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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no image 랴쇼오몬(羅生門)
도병훈
6571 2007-11-04
랴쇼오몬羅生門 1. 해마다 전화(戰禍)와 역병(疫病), 천재(天災)가 계속된 일본의 헤이안(平安) 시대. 한 무사가 어여쁜 아내를 말에 태우고 여행 중이었다. 그런데 산 도적이 산 속에서 이들을 유인한 후, 무사를 속여 큰 나무에 포박한다. 그리고 그 무사가 눈을 부릅뜨고 보는 앞에서 대낮에 그의 아내를 겁탈하며, 그 후 무사는 죽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1950년에 제작된 일본영화 <랴쇼오몬>의 간략한 줄거리다. <랴쇼오몬>은 쿠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 감독이 만든 영화로 1951년에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상(작품상)을 수상했다. 쿠로사와는 이태리의 휄리니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서구인들에게 동양적 사유의 무한한 깊이와 넓이를 보여 준 영화감독으로 꼽히는데, 특히 <랴쇼오몬>이란 문제작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라쇼오몬>은 만들어지기까지 그 시나리오만 하더라도 상당한 역사성과 내력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아쿠다가와 류우노스케(芥川龍之介, 1882~1927)의『숲속』(藪の中, 1921, 대정 10년)이란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흑백 영화다. 아쿠다가와의 소설 가운데 원제가 <라쇼오몬>인 소설은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의 줄거리와는 무관하며, 다만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주제 의식과 폐허의 라쇼오몬을 4인의 진술을 얘기하는 장소로 차용하였다. 아쿠다가와의 『숲속』은 일본에서 12세기 초에 성립한 『콘자쿠 모노가타리(今昔物語)』라는 설화집을 재구성하여 쓴 것이다. 설화집의 원래 내용은 한 무사(사무라이)가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하다가 도적에게 속아 숲속으로 유괴되어 포박을 당하고 아내는 겁탈 당하는 데, 도적이 사라진 후 그 무사와 아내는 다시 여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아내는 무사에게 “너는 얼빠진 놈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쿠다가와는 이 설화에서 힌트를 얻어 사건의 관계자들이 검비위사(檢非違使 :경찰서 겸 재판소)에서 자기들의 죄상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 소설을 당시 무명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하시모토 시노부(橋本忍)가 시나리오로 만들었고, 그의 시나리오를 본 쿠로사와는 흥미를 갖고 영화화 하면서, 제4의 인물 나무꾼을 첨가하여 시나리오를 보완한다. 2. 다 헐어져버린 폐찰의 입구에 우뚝 선 거대한 랴쇼오몬(羅生門),주1)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비하려 농민이 들어온다. 그곳에는 기묘한 살인사건에 대한 심문에 증인으로 참석하고 나온 한 승려와 나무꾼이 있었다. 나무꾼이 낙수 지는 라쇼오몬의 처마 끝에 움츠리고 앉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 이 신이 <라쇼오몬>의 첫 장면이다. 이로부터 영화는 숲 속에서 벌어진 한 사무라이의 피살사건을 두고 이와 연관된 산적인 타죠오마루, 사무라이의 아내, 사무라이가 서로 다른 증언을 한 것을 각기 다른 영상으로 보여 준다. 먼저 사건의 가해자인 산적 타죠오마루(多襄丸)의 진술은 요약하면, 그는 무사인 카니자와(金澤)의 타케히로(武弘)의 아내 마사고(眞砂)를 겁탈한 후에 그냥 떠나가려고 하는데 마사고가 자신의 소매를 붙잡으며, “내 몸을 버려놓았으니 이젠 너 아니면 우리 남편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울부짖었으며, 그래서 그는 무사와 당당히 결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사고의 진술은 이와 다르다. 그의 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겁탈당한 후 나무에 묶여있는 채로 자기를 응시하는 남편의 눈초리에서 슬픔도 분노도 아닌 차가운 증오와 경멸감을 느꼈다, 나는 발작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날 죽여라!”라고 외쳤다. 그래서 나는 굴욕감과 착란 속에서 남편을 손 가까이 있는 소도(小刀)로 찔러버렸다. 그러나 강신 무녀의 입을 통한 타케히로의 진술은 아내와는 다르다. 그에 의하면 타죠오마루는 아내를 겁탈한 후에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말했으며, 그러자 아내는 타죠오마루와 함께 도망가려고 그에게 아양을 떨면서 “내 남편이 살아 있으면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그를 죽여요!” 라고 타죠오마루에게 간청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타죠오마루도 아내의 간악함에 깜짝 놀라 마사고를 밀쳐 던져버리고 자신에게 “이 계집을 죽일까, 살려줄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자신이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동안 숲 속으로 도망쳤으며, 타죠오마루는 자신을 결박한 끈을 풀어 준 후 사라졌고, 자신은 고독과 정적 속에서 소도로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고. 그러나 제4의 인물인 나뭇꾼은 3인의 고백은 모두 거짓말이라 한다. 나무꾼에 의하면 타죠오마루는 마사고를 겁탈한 후 마사고를 아내로 삼기 위하여 무사 타케히로의 포승을 끊고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나 무사 남편은 이따위 계집을 위하여 결투하는 것은 너무 하찮기 때문에 싫다고 말한다. 그러자 마사고는 태도를 일변, 두 남자의 용렬함과 비겁함에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두 사람을 흥분시켜 결투를 유도한다. 이 두 사람이 하기 싫은 결투를 하는 동안 여자는 도망친다. 결투 끝에 도망가는 타케히로에게 타죠오마루가 장검을 내려친다. 하지만 행인인 농민은 나무꾼의 이야기도 거짓말이라고 비웃는다. 나무꾼은 단검을 훔쳤다는 것이다. 다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무꾼은 라쇼오문 뒷켠에서 기르지 못하겠다고 버린 아기를 발견한다. 행인은 버려진 아기의 옷가지를 빼앗아 떠나고, 나무꾼은 이미 기르는 여섯 아이를 기르는 것이나 하나 더 보태 일곱 아이를 기르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중얼거리며 비가 그치고 활짝 갠 하늘에 태양이 빛날 때 우뚝 솟은 라쇼오몬을 떠나는 것이 엔딩 장면이다. 3. 과연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물론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은 이 영화에서 자신들의 진술 내용이 확고한 사실임을 주장한다. 타죠오마루의 경우 "당신(심문관)이 날 조만간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소.""우리는 무려 '23'합이나 싸웠소." 라고 증언하면서,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며 진술의 신빙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칼 싸움도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면서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으며, 가장 객관적인 관찰자로 보이는 나무꾼의 이야기도 신뢰할 수 없음을 그가 사건 현장에서 값비싼 단도를 습득한 사실을 밝히지 않은 장면에서 알게 된다. 결국 진술자 누구나 주관적으로 사건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인식주체의 인식의 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사건 그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이는 차원에서 <라쇼오몬>의 근본적 주제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불가지론과 동일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의하면 우리는 이 세계를 인식능력의 두 측면의 결합으로 성립시킨다. 이 두 측면이 바로 인간의 감성(sensibility)과 오성(understanding)이며, 감성은 인식의 자료(내용)을 제공하고 오성은 인식의 형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를 쇠틀에 굽는 붕어빵에 비유할 경우, ‘밀가루 반죽’과 ‘앙꼬’가 감성의 자료라면, ‘쇠틀’이 오성의 형식이다.주2) 쇠틀 모양에 따라 붕어빵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밀가루 반죽이나 앙꼬는 쇠틀에 들어가기 전에는 일정한 형태가 될 수 없다. 밀가루 반죽과 앙꼬는 붕어빵 틀로 찍어내야만 붕어빵이란 존재가 성립한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주관론(subjectivism : 객관적 세계의 모습이 주관의 틀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인식론의 총칭임)이라 하며, 이를 또 다른 말로 관념론(Idealism)이라고 한다. 이는 경험적 객관세계보다 인간의 주관에 내재하는 관념이 세계를 인식함에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3) 따라서 경험 세계란 나의 인식주관, 즉 ‘붕어빵 틀’이 밀가루 반죽과 앙꼬를 구워낸 모습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관에 나타난 이 세계는 붕어빵 틀이라는 조건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으로 그 조건을 벗어날 때 우리는 이 ‘세계 그 자체( Ding-an-sich : reality)’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물자체는 알 수 없는 궁극적 실재의 세계이며, 감성과 오성을 초월한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세계다. 이를 근대철학에서는 불가지론적 실재론(Agnostic Realism)이라 한다. 주4) 이 때문에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세계는 순수이성의 세계, 즉 감성의 자료에 오성의 형식이 가해져서 구성된 현상(나타난)세계일 뿐이다. 결국 칸트의 주관주의에 의하면 이 세계는 나의 인식주관이 능동적으로 구성한 결과로서의 세계이므로 이 세계는 인간의 주관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는 세계다. 그러나 아쿠다가와나 쿠로사와는 이 작품의 이론적 바탕을 칸트의 철학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영화 제목 ‘라생(羅生)의 문(門)’이란 불교 용어가 의미하듯, 이는 불교의 유식(唯識) 사상에서 유래한다. 주5) 유식 사상은 생멸(生滅)의 제법(諸法), 즉 모든 현현된 세계는 심상(心象)에 불과하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명제로 집약할 수 있는 사상이다. 주6) <라쇼오몬>은 인식론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일본적(동양적) 영상세계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먼저, 여백을 살린 수묵화처럼 절제된 화면을 꼽을 수 있다. 사건의 당사자들이 진술하는 장소인 관청의 모습도 마당과 그 뒤로 담과 하늘이 보일 뿐 나무 한 그루 없으며, 심문관의 모습도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삶을 빛나는 태양 아래서 명징하고도 집요하게 표출한다. 그래서 나무꾼의 숲 속 진입 장면에서부터 겁탈 장면에 이르기까지 태양을 향해서 죄를 범하고 태양을 향해서 선악의 경계에 대해 회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피해 당사자들의 비장미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산적 타죠오마루를 극악한 가해자로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다. 라쇼오몬은 선악 이분법의 경계가 사라진 극적인 사건을 백 일 하에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4. <라쇼오몬>은 요즘처럼 상업영화 일색인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영화다. <라소오몬>은 ‘실제로 있는 것(reality)’도 ‘나타난 것(appearance)’도 시간에 따라 유동적인 삶의 과정상 모두 미확정적이며 비규정적(non-definitive)임을 드러낸 영화다. 영화의 주제는 “인간성에의 불신과 절망, 객관적 진리에의 불신과 회의”다. 우리가 아는 사실 혹은 진리가 얼마든지 기만적(deceptive)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문제나 현상에 개인의 가치관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지각과 주관적 인식을 토대로 좀 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을 지향한다. 객관적 인식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의 컨센서스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넘어 삶에 대한 가치론적 성찰의 문제다. 그래서일까 <라쇼오몬>의 마지막 장면은 불가지론으로 끝나지 않고, 실존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나 전후 일본의 인간에 대한 절망감을 넘어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 표현으로 해석된다. <랴쇼오몬>은 일본적인, 아니 동양의 오랜 전통이 온축된 서사 구조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이고도 보편적 문제를 표현한 영화다. 2007년 11월 4일 도 병 훈 주1)이 영화를 지난 90년대 말 비디오테이프로 보았는데, 첫 장면에서 보여주는 라쇼오몬의 규모와 위용부터 매우 인상적이었다. 거의 반 이상이 허물어진 건물임에도 우리나라 사찰의 대형 일주문 보다 훨씬 더 큰 건물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의 고대 사찰 규모가 우리나라의 고대의 절들보다 그 스케일이 큼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고대 일본의 지배층의 권력이 피지배층보다 절대적으로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주2)오성의 형식을 칸트는 분량(Quantity), 성질(Quality), 관계(Relation), 양상(Modality) 등의 12가지 카테고리, 즉 범주로 설정했다. 주3)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일부 내용과 칸트 사상을 붕어빵에 비유한 설명은 김용옥의 『새 츈향뎐』, (통나무, 1987년)에 나오는 설명을 참고하여 쓴 것임. 주4) 서양 철학사를 진리 탐구의 역사로 본다면 감각기관에 ‘나타난 것(현상, phenomena, Appearance)’만 진실하다고 주장이 바로 감각론(sensationalism)이며, 영국 경험론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주5)불교의 유식 사상에서는 인식대상을 상분(相分)이라 하고 인식주체를 견분(見分)이라 한다. 주6)원효의 화쟁 사상은 유식사상과 공(空)사상을 통합한 것이다.
66 no image 길상사를 다녀와서
도병훈
5424 2007-10-22
길상사를 다녀와서 1. 어제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특별전인 ‘현재화파전’을 보러 갔다. 30년 만에 공개된다는 길이 8m가 넘는 그의 절필(마지막 작품) 그림으로 알려진 <촉잔도권>을 실제로 보고 싶었고, 또한 겸재의 제자인 심사정이 왜 겸재 화풍과 확연히 다른 그림을 그렸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간송문화』에 실려 있는 「현재 심사정 평전」에 의하면 심사정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가 대역죄인이어서 매우 파란만장한 역경 속에서 사연 많은 삶을 살았고, 겸재와의 인연도 아주 어린 유년시절로 한정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림으로서 겸재이후를 대표하는 일가를 이루었으며, 또한 ‘현재화파’라 칭할 정도로 당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몇 몇 가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인 특유의 거칠면서도 바람이 술술 통하는 듯한 담백한 듯한 화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다른 세파의 영향인 듯 그의 어느 그림도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 이후 그림이 보여주는 당당한 기백에는 미치지는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2. 간송미술관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길상사로 향했다. 이 절은 창건한지 불과 10년 남짓 밖에 되지 않지만 절이 들어서기까지 아름다운 내력을 갖고 있다. 이 절은 법정(法頂)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어느 불교 신자가 1980년대 후반 자신의 전 재산을 법정에게 양도하려 한 것을 그가 고사하면서 그 대신 조계종에서 양도 받게 하여 1990년대 후반에 세운 것이다. 이 불교 신자는 법명이 ‘길상화’인 김영한이란 여자로, 젊을 때 시인(詩人) 백석과 한 때 동거했던 기생이었으며 이후 대원각이란 유명한 요정을 운영한 사람이었다. 물론 조계종으로 재산이 이전되는 과정에서 주변에서 탐을 내는 사람들이 있는 바람에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1980년대 후반 당시 시가 1000억원에 달하는 땅과 재산은 결국 조계종으로 귀속되어 길상사가 세워진 것이다. 길상사 가는 길 골목길은 매우 부촌이었을 뿐만 아니라, 호주 대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대사관 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청와대 가까운 곳이어서 그렇거니 짐작은 했지만 다른 보통의 골목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집마다 붉은 벽돌 담 벽과 집안의 정원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러한 골목이 끝나는 막다른 골목 산자락에 길상사가 있었다. 늦은 오후, 길상사 경내는 한적하고 조용했지만 때가 때인지라 이곳도 다른 여느 절이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대웅전에 해당하는 극락전에서는 대입 수능시험을 앞두고 많은 학부모들이 기도 중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이곳도 여느 절과 다름이 없구나 싶었고, 종교가 성행하는 이유도 여전히 기복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점보다 더욱 실망스럽고 개탄스러운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최근에 신축한 지장전 건물의 규모였다. 아름다운 인연을 가능케 한 초심은 잃지 않아야 하지 않은가? 주1) 만약 법정이 직접 양도받아 절을 세웠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싶어 착잡했다. 그렇지만 다른 부분은 아직 원래 고급 음식점이 있었던 건물을 개조한 흔적이 남아 있어서, 여느 절과는 다른 특색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대도시 속의 절임에도 계곡과 숲이 있는 산자락에 있어서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단풍이 아름다운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찰이었다. 3. 오늘 신문을 보니 어제 오전 법정 스님이 길상사 앞마당에서 행한 가을 정기법회 법문이 소개되어 있었다. 어느 덧 75세를 맞은 법정은 이 법회에서 최근 공주 마곡사와 제주 관음사 등에서 주지 선출과 사찰 운영 문제로 빚어진 분란을 겨냥하여 “같은 옷 입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볼 면목이 없다.”고 하면서 법문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논지로 시작된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출가란 살던 집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온갖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안팎으로 정진하고 참선하지 않는다면 비리에 물들기 쉽다.” 또한 승가의 생명은 청정(淸淨)에 있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청정성을 잃을 때는 이미 승가가 아니다. 겉으로만 수행자일 뿐, 속으로는 돈과 명예를 챙기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도둑들이 내 옷을 꾸며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악업을 짓고 있느냐”라는 부처의 말을 인용하며 "문제를 일으킨 자는 불자(佛子)도 아니며, 가사(袈裟)를 입은 도둑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라.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가. 소유는 욕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다. 참선과 정진만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거기에 자유와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과 명예를 좇는 이들은 내안의 아름다움을 등지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법정은 “저 뜰에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작년과도 다르고, 내일도 다를 것입니다. 순간순간 내뿜는 아름다움을 허심탄회하게 보지 않고 작년과 비교하거나 하면 지금 저 아름다움을 놓치는 겁입니다.” 고 했으며, 마지막으로 ‘대(竹)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어나지 않고, 달이 연못을 쓸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네’ 라는 옛 선사의 시를 소개하고, “ 단 한번 뿐인 이 가을, 내 안에 샘솟는 아름다움을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 다들 아름다움을 만나고 가꾸면서 행복하시라”고 법문을 끝맺었다고 한다. 4. 나는 궁극적으로 종교적 신심을 삶과 죽음에 대한 경건한 염원으로 보며, 그러한 신심의 긍정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존적 삶의 진실성은 종교 혹은 신이란 존재 유무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도 생물학적 몸의 조건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제 길상사에서의 법정의 말은 새겨 봄 직 하며, 특히 와 닿는 부분은 ‘악업’과, 이와 대비되는 ‘아름다움’이란 말이다. 악업을 짓지 않고 살고자 하는 의지와 이를 실천하는 삶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고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법정이 말한 법문의 요지로 생각된다. 대나무는 곧기 때문에, 국화는 서리 속에 피기 때문에 아름답듯,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미와 도덕, 미와 현실이 공존해왔지만 이는 결코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인간도 욕망의 존재인 이상, 이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악업을 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나는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다. 죽을 때까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악업을 짓는 데 열심인 ‘가사 입은 도둑’ 같은 자라면, 오늘 이 순간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형형색색 저 무한한 단풍의 아름다움, 또는 시간의 유일무이한 ‘사이’를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주2) 2007년 10월 21일 도 병 훈 주1)길상사 개원식날 법정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시대와 후세에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이겨내야 할 과제지만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과 같은 경제난국은 물질적인 풍요에만 눈멀었던 우리에게 우리 분수를 헤아리게 하고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주2) 법정 스님 하면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고자 한 그의 삶이 떠오르지만, 이는 그의 스승인 효봉 스님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다. 효봉은 성철스님과 함께 20세기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은 정신적 양대 스승으로, 그는 일생동안 이른바 '계 ․ 정 ․ 혜' 삼학(三學)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마지막 열반송이 나의 졸저 『나와 너와 세계 美術』후기에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법정은 가톨릭계의 최고 어른인 김수환 추기경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스님으로는 최초로 법정은 카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명동성당에서 법문을 설했으며, 김수환 추기경은 길상사 개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은 유성 파스텔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놓고, 그 밑에다 ‘바보야’라고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나는 신문 지면을 통해 그 천진한 그림과 글씨를 보고 담백한 문인화를 보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이런 분들의 크고 맑은 행보는 자신만의 틀을 세계인양 여기는 이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메시지인가.
65 no image 소쇄원, 자연과 호흡하는 풍류(風流) 공간
도병훈
5626 2007-10-20
소쇄원, 자연과 호흡하는 풍류(風流) 공간 1. 지난 10월 13일, 전남 담양에 위치한 소쇄원(瀟灑園)을 다녀왔다. 경상도 태생이다 보니 주로 경북 내륙 지방을 답사하다 모처럼 큰 맘 먹고 전라도에 있는 소쇄원에 간 것이다. 가는 길이 지방 국도와 같은 88고속도로라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고 특히 경남 거창 일대의 풍광은 매우 수려하면서도 장대했다. 소쇄원을 다녀 온지 수일이 지났다. 바쁜 일상의 와 중에서도 잠시 머물렀을 뿐인 그곳 한 부분 한부분과 전체공간이 이상하게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자꾸 생각난다. 아니 생각한다. 2. 소쇄원 입구는 대숲이었다. 굵은 대나무들이 하늘 높이 죽죽 뻗은 모습이었다. 워낙 장거리에다 이전에 먹은 점심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오는 내내 지루해하고 투덜거리던 딸과 아들 녀석도 놀란 눈으로 대숲을 바라보았고, 집사람은 연신 감탄사를 발했다. 올라가는 동안 대숲의 청신함이 온 몸을 휩싸는 것 같았다. 길지 않은 대숲이 끝나면 계류를 사이에 두고 그 양쪽으로 소쇄원이 있다. 먼저 길다란 담장과 초가 정자인 ‘대봉대(待鳳臺’)와 그 아래로 나무속을 파낸 홈 대로 물길이 이어지는 작은 연못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대봉대를 지나 길게 이어진 담장 길을 따라 들어가면 애양단(愛陽壇)이라 새겨진 판이 박혀 있다. 애양단을 지나면 긴 담장은 ㄱ자로 꺾인다. 그 담 밑 물이 흐르는 곳에 오곡문(五曲門)이 있다. 담 아래로 돌을 쌓아 다리를 만들어 계곡 물을 흐르게 하였는데, 그 계류가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곡문 아래에 위치한 외나무다리를 통해 계류를 건너면 가파른 언덕에 만든 매대(梅臺, 매화를 심은 곳)인 두 단의 꽃 계단(花階)이 눈앞에 펼쳐진다. 매대 뒤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이란 뜻임)라는 송시열이 썼다는 석판 글이 보인다. 매대 앞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제월당(霽月堂)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두 칸은 마루이고 한 칸은 방이다. 제월당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계곡 축대 위에 자리 잡은 건물이 광풍각(光風閣)이다. 1755년 조선 영조 때의 목판화인 <소쇄원도>를 보면 이외에도 건물이나 문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의 소쇄원은 계류를 중심으로 세 건물과 담장 화계, 계류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제월당과 광풍각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평하여 흉회쇄락 여 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명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라는 뜻임)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신발을 벗고 광풍각 마루로 올라섰다. 삼면이 마루이고 가운데만 방이었다. 3면으로 처마 밑 걸쇠에 걸 수 있는 분합문을 달아 개방성을 강조한 방이다. 두 세 사람 정도 겨우 앉을 만한 공간인 방안에도 들어가 앉아보고 마루에 앉아 바위 위로 흐르는 계류를 지켜보았다. 작은 폭포가 매우 아기자기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인데도 마치 인공적으로 조성한 듯 바위 홈 위를 계곡물이 한 줄기로 흐르기도 하고 두 갈래로 흐르기도 하였다. 다 둘러보니 소쇄원은 오기 전 상상보다 훨씬 작은 아담한 공간이었지만 공간의 높낮이라든가 건물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구조적 짜임새는 현장을 와 보지 않고는 알 수도 없고 체험할 수 없는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역마다 다른 우리 전통문화의 이러한 ‘차이’에 특히 흥미를 느끼다 보니 시간을 내서 즐겨 답사하는 버릇이 생겼다. 3. 소쇄원은 소쇄공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둔자적을 위해 지금의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지은 별서정원(別墅庭苑)이다. ‘소쇄’라는 말은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함’을 뜻한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이런 말이 순전히 아름다운 말로 그 의미가 와 닿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슬픔과 좌절이 배여 있는 역설적인 말이다. 조광조가 중심이 된 사림의 혁신적인 꿈이 조광조의 죽음으로 좌절된 후, 그 산물이 소쇄원이기 때문이다. 양산보는 바로 조광조의 제자였고 스승이 사약을 받는 현장에서도 함께하다가 낙향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계층으로 태어나도 뜻을 펼칠 수 없을 때는 자연과 함께 하며 학문을 닦기도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이는 바로 이 지역에 살았던 송강 정철의 양극적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철은 자연으로 돌아오면 그가 지은 <관동별곡>이나 <성산별곡>처럼 아름다운 가사를 노래하던 사람이었지만 중앙 정치 무대에 서면 가장 잔혹한 사람으로 평가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다. 공간과 사람의 만남이 이렇듯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곳 소쇄원도 이곳을 드나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욕망의 공간이었다. 소쇄원은 고경명, 김인후, 송순, 정철, 김성원, 기대승, 백광훈, 송시령 등 당대 이름 있는 호남과 충청권 문인, 선비들이 자주 드나든 곳이며, 또한 이 일대는 이외에도 많은 누정이 존재하는 호남 누정 문화의 본향이며, 이 중에서도 소쇄원은 그 대표성을 갖는 원림이었던 것이다. 소쇄원이 호남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을 대표한다면 영남에는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서석지(瑞石池)가 있다.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1613년에 조성한 서석지는 사각형 연못을 중심으로 연못의 북쪽의 경정(敬亭, 공경하는 마음의 정자)과 동편에 서재인 주일재(主一齋,한 뜻을 받드는 곳)와 운서헌(雲棲軒)이 한 건물로 있다. 주일재 앞에는 연못 쪽으로 돌출한 석축단인 사우단을 만들고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었다. 서석지엔 연못 안에 돌들이 있는데, 이는 연못을 조성할 때 드러난 돌을 그대로 둔 것이며, 서석지란 연못 이름도 이 돌들에서 유래한다. 정영방은 이 돌에 상당한 애착을 가진 듯 각각 이름을 지었으니, 기평석(基枰石, 바둑을 두는 돌) 관란석(灌?石, 물결을 쳐다보는 돌), 상경석(尙絅石,높이 존중받는 돌) 낙성석(落星石, 떨어진 별 돌) 탁영반(濯纓般), 토예거(吐穢渠, 더러운 물을 쏟는 돌)등이다. 그러나 정자의 이름이나 사우단을 통해 알 수 있듯, 서석지는 주로 학문과 마음 수양에 정진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곳은 소쇄원에 비해 훨씬 단조로운 공간이지만 간결미가 돋보인다. 그러나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은 학문의 공간이라기보다 풍류(風流)의 공간이다. 빛과 바람과 물소리 새소리, 문 하나로 공간과 공간이 닫히고 이어지고, 안과 밖이 열리고 닫히는 자연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만나는가(배치)에 따라 공간의 의미도 달라진다. 심지어 같은 공간일지라도 어느 시대 누구와 만나는가에 따라 그 공간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지 않는가? 오늘날 효율성 위주의 공간 개념의 기원은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에서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 공간에서는 모든 점이 어떤 이질성도 갖지 않는다. 그게 산 위에 있던 도시 한 가운데 있든 길이든 나무줄기든 동일한 선일 뿐이다. 좌표로 표시되는 공간상의 위치만이, 그 위치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추상적 ‘선들만이 세계를 효율적으로 분할함으로써 나와 너를 격리시키고 분화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현대 문명은 이러한 극단적인 동질화의 척도적 공간에서 성립한 것이다. 이처럼 현대문명은 모든 질들을 전부 추상하여 위치로 양화시키는 면이 있다. 우리의 전통 건물이 있는 공간은 동질적 공간이 아닌 다질적 공간이며 시각적 공간이 아닌 질감이나 촉감적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간으로의 진입은 질감이나 촉감 등 오감으로 느끼는 과정이다. 국지적 공간은 시선이 근접한 경우 공간은 시각적이지 않으며, 눈 자체가 촉감적이고 비시각적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영조 때의 <소쇄원도>를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진입 공간의 담장 길이부터 계류를 건너 나선형으로 안으로 계곡에까지 이르는 체험 동선이 대략 황금비가 적용되는 앵무조개의 비례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공간적 유사성을 통해 ‘상속된 회상의 침전물’같은 인간의 무의식적 푸로토타입이 느껴졌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례나 공간에 심취하는가는 역시 보편적 심리적 근저가 저마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도 어디까지나 느끼고 발견하는 자의 몫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이라도 경험의 시간이 다르기만 해도 세상은 늘 새로운 경험의 공간으로 변모하지 않는가. 4. 소쇄원을 다녀와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을 비롯해서, 많은 소쇄원 관련 시문을 읽었다. 또한 소쇄원을 연구한 논문들도 수없이 많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쇄원에 대한 나의 몸의 느낌과 생각일 것이다. 이제 소쇄원은 조선시대 호남 문인들만 드나들던 곳이 아니라 21세기에 사는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소개된 이래 소쇄원은 내가 간 날도 관광버스로 단체관광을 오는 코스가 되어버릴 정도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주1) 그런데 한편으론 주변에 대형 음식점과 입장료를 받는 대형 주차장이 있는 데서 확인일 수 있듯, 천박한 상업자본주의의 속내가 들여다보여 씁쓸하다. 소쇄원은 그 규모로 보나 그 특성으로 보나 결코 관광객의 눈요기 거리로만 머물 수는 없는 공간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미세한 바람의 차이와 계절의 차이와 물길의 차이와 순간순간 머무는 장소마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며, 나와 세계의 관계를 오감(五感)으로 음미할 수 있는 자들이 조용히 드나들 때 더 의미있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주2) 2007년 10월 20일 도 병 훈 주1) 사실 전국 어디서나 지방의 특색을 살린 유적을 관광 상품화 하는 데 혈안이 된 시대다. 소쇄원 가는 길목에 있는 가사문학관도 특히 본관 건물의 경우 전시된 유물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규모만 거대하게 만들어 유물의 빈곤함을 더 강조한 그 몰지각함에 한심하다는 느낌과 실망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주2)돌아오는 길, 잠시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썼다는 식영정에 들렀다. 소쇄원과 더불어 일대의 정자로 유명한 환벽당과 자미탄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식영정에서 내려오다 굽 부분에 매화피(유약이 물방울 모양으로 오톨도톨 맺힌 부분으로 16세기 이후 일본에서 이도 차완으로 불리는 찻잔의 한 특성으로서 그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으로 일본의 차인들을 매료시킨 부분이다)가 있는 사금파리 한 조각을 주웠다. 국내에서는 매화피가 있는 도자기가 거의 없다. 특정지역에서 한 때 특수한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일본에서 이러한 도자기가 귀한 찻잔으로 대접받는 바람에 국내에서는 사금파리조차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금파리 한 조각도 나에게는 뜻밖의 소득인 것이다. 여행은 때때로 이렇게 예기치 않은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도 한다.
64 no image 명품 ‘브랜드’ 예술 -데미안 허스트전을 다녀와서
도병훈
7902 2007-10-03
명품 ‘브랜드’ 예술 - 데미안 허스트전을 다녀와서 1. 지날 달 9월에 청담동에 위치한 서미앤투스 갤러리와 박여숙 화랑에서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현대미술계의 슈퍼스타 대접을 받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작품전이 열렸다.(*박여숙 화랑은 데미안 허스트 & 줄리안 오피 2인전이었음) 박여숙 화랑에서는 2005년 제작된 '뉴 릴리전(New Religion)' 풀세트 50여점으로, 해골 조각과 십자가 가운데 홈을 파서 형형색색 알약을 장식품처럼 이어붙인 조각, 못과 면도날이 꽂힌 심장 조각, 사진, 그리고 이 모든 작품을 넣은 컨테이너를 함께 전시해놓았는데, 화랑에서 수십억을 들여 구입한 것이라 한다. 건물 자체가 청담동 특유의 단순하고도 세련된 디자인을 보여주는 서미앤투스 갤러리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6년도까지 제작한 것을 전시한 전시회로, 약방 진열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약 상자, 환각 상태를 표현한 약국 벽화, 나비를 캔버스에 붙인 ‘나비’ 시리즈와 수십 마리의 물고기를 포르 알데히드 수조에 넣은 작품 등이다. 데미안 허스트전의 작품들이 이제 부와 명품의 장소인 강남의 갤러리까지 상륙한 것이다. 수년 전 삼성 리움에 전시된 대형 알약 작품에 이어, 지난 9월 15일 이 전시회들을 보면서 자본주의 사회 속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확연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심오하고도 근원적인 주제인 종교적 상징이나 ‘실제 사람의 두개골마저도 명품 브랜드로 삼아버리는 데미안 허스트의 거침없는 잡식성 감각을 실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카소나 프랭크 스텔라, 제스퍼 죤스, 그리고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 같은 작가들의 만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성을 발판으로 해서 예술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을 양산함으로써, 즉 자신의 명성을 브랜드하여 상품화에 주력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미술 가치를 무의미하게 하거나 추하게 함은 물론, 그만큼 미술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하락시킨 장본인들이기도 하다.(물론 이들의 작품은 지금도 엄청난 상업적 가치를 지닌 명품으로 통하며, 심지어 이들 작품의 소장 여부가 부의 상징이자 척도가 되기도 한다) 2. 금년 8월 30일, 인간의 두개골에 백금 틀을 씌우고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해(For the Love of God)'란 작품도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다. 생존 작가로서는 최고가인 1억 달러(한화 약 940억원)에 팔린 이 작품에 대해 데미안은 “죽음의 상징인 두개골에 사치의 상징인 다이아몬드를 덮어버림으로써 욕망덩어리인 인간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조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인터넷에서 영상이미지로 보면서 지난 90년대에 고등어를 화려하게 치장한 이불의 화엄이란 벽면 설치 작업도 연상되었지만, ‘해골’까지 고가의 ‘명품’으로 만들 수 있는 고도의 자본주의 상술을 느꼈다.(마크 퀸의 ‘자소상’과 비교해보면 이러한 차이점은 두드러진다) 데미안 허스트는 영국 현대미술사상 최대 컬렉터인 찰스 사치(Charles Saatchi)와 화이트 큐브의 주인 제이 조플링(Jay Jopling)의 눈에 띄어 일약 스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데미안 허스트를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거대한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은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거대한 생물 표본실이나 약국 같은 현대의 과학적 성과를 오브제로 차용하며, 그만큼 시의성과 성, 특유의 유머는 그의 작품의 주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데미안 허스트는 인간의 삶을 종교, 사랑, 예술, 과학으로 둘러싸인 사각 링으로 여기며, 그 중심은 과학으로 본다. 이번 청담동에 전시된 ‘새로운 종교’란 작품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 고대부터 영혼의 구원을 통해 죽음을 극복(해결)하려했던 인류의 욕망(이것이 바로 종교의 근본적 주제다)이 이제는 과학, 아니 의학을 통해 육체 그 자체로 영속하려 함을 방증 하는 오브제로 제시하며, 수많은 알약 시리즈 작품들은 그 단적인 예다. 유한한 개체로서 ‘죽음’조차 초극하려는 인간의 종교적 욕망조차 절묘한(?) 감각으로 오브제한 것이다. 이번 콘테이너 박스와 약병 오브제 작품을 보면서 형식적 ? 소재적 측면에서 마르셀 뒤샹과 요셉 보이스의 오브제 조각을 좀 더 장식적으로 세련되게 연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80년대 후반 혜성과 같이 등장하였지만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은 어느덧 공장에서 명품 브랜드처럼 생산되며, 그래서 고부가가치 상품이자 현대의 신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의 작품이 얼마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가없는가 논의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무의미하다. 물론 비싸게 팔린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작품일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비싸게 팔린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작품일수도 없지만 예술적 가치가 자본주의 논리에 복속되어버렸다는 것이다. 3. 대중과 딜러들은 스타의 작품을 원하며, 스타를 선호한다. 하지만 스타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상품성에 기인하므로 예술적 가치와 상품적 가치는 별개다. 나는 이번 강남의 청담동에서의 데미안 허스트의 전시회를 보면서 참된 예술 가치를 배제시키는 현대의 니힐리즘과 우리사회의 무의식이 되어버린 문화사대주의 현상과, IMF 사태 이후 특히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된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명하게 절감할 수 있었다. 투자든 투기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몰리는 곳은 정해져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경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쫓는 한탕주의자나 기회주의자들이 주류로 행세한다는 사실이다. 이 와중에 이 땅의 문화적 풍토는 더욱 양극화 되어 미술계는 오히려 지난 80년대보다 더 황폐화되어 버렸다. 사실 지금 이 땅에서는 예술가적 역량으로 당당히 국제 사회에서 대접 받을 수 있는 작가를 키울 제도적 문화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와중에 몇 몇 조급한 작가들은 스스로 1회용 행사의 소모품처럼 전락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화랑들은 미술을 근시안적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삼으려 한다. 이러한 야만적 풍토 속에서 이 땅의 현대예술가들이 전업 작가로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한심스런 풍토 속에서 전시회를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게다가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현대미술비평가는 물론, 특히 현대미술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단 한명의 컬렉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진정한 예술을 꿈꾸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이며,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소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명과 익명성을 기꺼이 감수하며 유유히 살아간다. 명성을 브랜드 화하여 영악한 장사꾼으로 전락한 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참다운 예술가의 길을 자각하고 이 길을 의연히 걷고자 함이 한갓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7년 10월 3일 도 병 훈
63 no image 이방인에 대한 ‘동경’과 ‘공포’ 사이의 한국 현대미술?
도병훈
5930 2007-09-14
방학내내 바쁜 일이 있어서 뒤늦게 아래 글을 접하고 공부하는 셈치고 최근 며칠동안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적 토를 달아본 글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동경’과 ‘공포’ 사이의 한국 현대미술? -‘한국 현대미술사, 제노필리아와 제노포비아의 사이’를 읽고 1. 「한국현대미술사, 제노필리아와 제노포비아의 사이」란 글은 지난 2006년 『월간 미술』에 발표된 소논문으로 윤난지 이대 교수가 쓴 것이다. 윤 교수는 이 글 서두에서 한국 현대미술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란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해 “나는 타인이다”라는 랭보 식 대답으로 자문자답하며 ‘정체성의 준거를 바깥과의 관계맺음에서 찾는다.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는 안과 밖의 여러 사회적 차원의 얽힘 속에서 만들어지는 유동적 과정’이며, 따라서 ‘나의 정체가 나 아닌 것으로 구성되는 역설이 우리의 문화적 정체 또한 우리 아닌 것들로 구성되는 역설로 반복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윤 교수는 ‘순혈주의가 지배하는 민족 개념이 국가 개념에 중첩되는 한국에서는 미술에 있어서도 순혈주의가 그 정체의식을 지배해 왔다’고 보며, 식민지 경험이 ‘순혈주의 이데올로기를 더욱더 강화했다고 본다. 그러나 윤 교수는 ‘한국 현대미술사는 ‘우리’라는 순수혈통을 이어 온 역사가 아니라 ‘우리’를 표상하는 시각기호를 만들어 온 과정이며, 그것은 외래와 맺은 복잡다단한 관계들의 그물망 속에서 다양한 피를 수혈 받아 온 과정’으로 서술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는 외래와의 문화접변 지대’이며 이는 혼성의 공간,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이거나 ‘불가사의한 불안정성의 지대(zone of occult ins-tability)’ 로서 ‘서로 차용되고 번역되고 또한 재 역사화 되거나 새롭게 읽히면서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의미의 구조’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단일한 총체가 아니라 ‘끝없는 차이들로 열린 혼성물’이자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의 한 위치’이며, 이 위치를 결정하는 요인은 기호들에 짜여진 권력관계로 보았다 위 논의에서 의문을 갖게 되는 부분은 순혈주의가 한국(근대)미술의 정체의식을 지배해왔다는 논지다. 물론 식민지 경험이 민족주의적 ‘순혈주의’를 강화하고, 그래서 일제강점기 미술의 경우 특히 토속성이 짙은 현상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원인은 사실 ‘선전(총독부에서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의도적으로 그런 경향을 장려한 문화정치학적 측면이 오히려 더 주된 요인이기 때문이다. 서론 마지막 단락에서 윤 교수는 ‘특히 다난한 근·현대사를 겪어 오면서 국제관계의 위계에서 주로 하위에 놓였던 한국은 그러한 위치로 인하여 독특한 현대미술의 역사를 만들어 왔으나, ‘아버지 타자, 즉 본받아야 할,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의 타자’로서 ‘20세기 전반기에는 일본 또는 일본을 통한 유럽, 후반기에는 유럽 또는 미국으로 가장이 바뀌었다고 보았다. 사실 이러한 논리의 큰 틀은 윤 교수만이 아닌 한국 비평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다른 점은 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타자에의 종속성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미술 비평계가 통상 한국현대 미술사를 어떻게 인식하는 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즉 이런 식의 논조는 현재 대개의 한국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일반적 논의라는 것이다. 이는 윤 교수가 이 소논문으로 석남미술상에서 주는 평론가상을 수상한 데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2. 본론은 ‘타자와의 동화 또는 거리두기’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된다. 윤 교수는 이 장 첫 단락에서 1957년에 창립된 현대미술가협회가 미술사에서 특히 주목 받는 것은 젊은 미술가들이 당대 세계적으로 가장 첨단의 경향이던 앵포르멜을 들고 나오면서〈국전〉을 비롯한 일체의 보수적인 미술과 그 권위를 부정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이들은 우리 미술의 정체를 현대성을 중심으로 구성하고자 하였고 우리 안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그 도구를 바깥의 당대 양식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앵포르멜 형상이 모더니티의 표상으로 차용됐는데, 이런 점에서 모더니티와 그 근간인 합리주의의 표상으로서 기하학적 양식에 대한 직접적 저항으로 나타났던 본 고장의 현상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본다. 결국 1957년의 한국현대미술가협회가 당시 최첨단(?) 미술인 앵포르멜 양식을 도입했으므로 한국현대미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이 단락의 핵심인 셈이다. 즉 모더니티의 표상으로 차용된 당대 ‘타자의 형식’이 우리 안의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현대성’을 갖게 되었다는 논리다. 이러한 윤 교수의 주장과 당대의 비평인 1959년 5월 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병기 선생의 글을 대조해보자. ...(전략)...「앵훠르멜」의 「이데」가 지난 수십 년간에 있어 마련된 모던 아트의 뜻하지 않은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박차려는 과감한 부정이라 할진대 이것을 하나의 유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앵훠르멜」의 기본 태도를 벗어나는 것이 된다. ...(후략)...주1) 또한 위 단락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본고장의 앵포르멜에 대해 합리주의의 표상으로서 기하학적 양식에 대한 직접적 저항으로 기술한 부분이다. 그러나 앵포르멜 미술의 출현이 서구문명과 예술전반에 대한 근원적 회의는 물론 과학의 발달로 인한 패러다임의 전환 등 매우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시각은 앵포르멜 미술에 대해서 순전히 미술사적 형식논리로 접근했음을 알게 한다. 두 번째에서 일곱 번째 단락까지는 타자의 형식에 대한 국적을 밝히면서,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미술과 실존주의 사상의 영향이 컸음을 밝히고 그 유래도 서술한다. 이를테면 50년대 말 60년대 초의 미술에서 ‘구미’라는 불·미 혼성의 서양 개념과 동시에 전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는 태도를 읽을 수 있으며, 당시 젊은 미술가들이 한국전쟁과 제2차대전을 동일선상에 놓고 그 산물인 실존주의를 담론의 근거로 삼았다고 본다. 실존주의는 전후의 상실감에서 오는 저항의 기표로 당시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의 전 영역에서 회자되었는데, 이는 2차대전 직후 파리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서구의 사상적 맥락에서 보면 생의 원천적 부조리 상황의 자각에서 배태된 것이므로 실제로는 전쟁 이후의 허무주의와는 전혀 다른 이즘이다. 따라서 전쟁 직후(?)라고 해서 서양과 한국의 상황을 유사하게 본 것은 실존주의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일곱 번 째 단락에서는 먼저 ‘서양이라는 타자가 우리에게 경이로운, 무시할 수 없는 권위의 타자였던 점 또한 일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밝힌다. 일본이 전후 패전국으로서 서양과의 관계에서 찬양과 저항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있었던 데 비해 6·25전쟁과 그 복구기를 통해 구미강국에 빚진 우리에게 서양이라는 존재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기간은 전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후 대치 상황에서 또한 4·19와 5·16의 혁명기를 거치면서 나날이 강화된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러티브에서 권위의 타자 역할을 한 앵포르멜 미술은 프랑스 국적의 것이며, 미국은 정치, 경제, 또는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력에 비해 예술 분야에서는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본다. 이 단락은 당시 한반도가 처한 국제질서의 역학적 관계로 우리 미술을 기술한 대목으로 한국미술의 특성을 지나치게 종속적 관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 특히 예술은 정치적 역학관계와 달리 도입 및 수용 단계에서 소멸단계에 이르기까지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되며, 오히려 이러한 과정이 당대미술의 실상인 셈인데, 이를 배제함으로써 그 실상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단락에서는 동양화 부문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논한다. 이른바 왜색을 탈피하기 위해 채색화에서 수묵화로 그 중심을 옮기고, 이어 추상 동양화를 통해 앵포르멜과 연합하면서 한국--서양--일본이라는 다변화된 관계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1960년에 창립된 묵림회 중심의 동양화가들은 앙드레 말로가 자국의 앵포르멜을 일컬어 말한 “서양적 서예”의 반대항으로서 ‘동양적 추상화’를 만들어냈으며, 이는 서양으로 대변되는 현대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전통을 수호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유효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즉 사물의 외양을 모방하기보다 즉흥적인 붓놀림의 결과 나타나는 우연적 효과에서 내적 세계의 직접적인 표상을 찾는 원리는, 앵포르멜과 전통 수묵화 또는 서예가 공유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동양의 재료와 정신을 근간으로 서양의 형식을 받아들인 작품을 만들 었므로 이는 일방적 동화가 아닌 능동적 수용의 한 용례로, 또한 타와 구분되는 정체의 기표로 인용되기에 적합한 것이 되었다고 기술한다. 이런 관점에서 윤 교수는 이들 수묵 추상화 또는 추상 문인화는 서양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채색화 중심인 일본 취향으로부터 거리 두기에도 유효한 도구였다고 하면서, 그 이면에는 당대 일본의 파리 취향을 그대로 번복함으로써 왜색 혐의를 받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하였다고 서술한다. 이런 차원에서 윤 교수는 우리 현대사 속의 한일관계는 제노필리아와 포비아가 동전의 양면임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며, 197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단색조 회화의 전개과정과 그것을 둘러싼 담론은 그런 애증관계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위 단락에서 앵포르멜과 서예의 유사성을 논하는 것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예다. 물론 동양의 서예에 심취하고 영향 받은 마크 토비나 안토니 타피에스 같은 서구의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도달한 예술세계는 그 영향의 동기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열 번째 단락에서부터 윤 교수는 단색조 회화를 다룬다. 먼저 단색조 회화는 앵포르멜의 한 종류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서구식의 앵포르멜과는 상당히 다른, 따라서 좀 더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기표로 받아들여지기에 적절했다고 본다. 앵포르멜의 미술의 경향이 타자에 대한 저항의 기표라기보다 동화의 다른 버전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단색화는 저항 또는 거리두기의 기표로서 적절했다는 것이다. 그 전제로 백자나 토담을 연상시키는 색조 또는 한지와 같은 전통 재료 뿐 아니라 반복적인 필치는 선(禪)적인 명상을 이끄는 무위적인 반복 행위와, 색채, 재료, 기법 등에서 작위성을 배제하고 단순, 소박한 상태를 지향하는 태도는 예술행위를 자연현상과 동일시한 동양적 예술관의 구현물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결국 앵포르멜을 통해 발견하고 동화된 서양적인 것이 단색화에 이르러서는 다른 것의 기표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 단락의 서두는 단색화의 형성과 확산에 일본의 모노하와 이우환의 역할이 컸다고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국적인 것을 임의로 만들어내고 고착시키는 제국의 얼굴이 숨겨져 있었다고 주장하며, 단적인 예가 당시 나카하라 유스케 등 일본 비평가들의 글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백색미학이라고 본다. 이는〈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1975)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을 규정하는 미학으로 명백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 백색미학의 연원은 제국주의 미학의 혐의를 받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예술 특질론으로 본다. 그러나 “흰옷을 입음으로써 영원히 상을 입고 있다”라는 표현처럼, 백색미학은 그가 한국미의 일반적 특질로 본 ‘비애미’의 하나로 만들어졌으며, 이처럼 일본의 제국적 시선으로 만들어낸 타자의 기호가 한국적 정체 찾기라는 탈제국주의의 기호로 받아들여지는 역설이 단색화를 물들인 미학이이라는 것이다. 열두 번 째 단락은 단색화는 당대 민족주의에 부응하는 시각기호가 되었으며, 동시에 추상미술이라는 ‘현대성’을 갖춤으로써 조국 근대화라는 민족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고 논한다. 단색화에 부여된 순수와 침묵의 현대성을 주목하여, 여기서 그린버그식 모더니즘 이론의 직·간접적인 세례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단색화 시기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문화가 우리 문화의 맥락에 가시적으로 얽히게 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단편적이고 표피적이었다고 본다. 이는 “그 절규의 시대(앵포르멜의 시기) 이후에는 침묵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라는 이 일의 말을 인용하면서 단색화의 침묵은 그린버그 식 문학성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장인들의 말 없는 손길”이라는 야나기 식의 침묵에 가깝다고 규정한 데서 알 수 있다. 열세 번 째 단락에서는 단색화와 관련, ‘한국적 미니멀리즘’이란 명칭에 대해 기술한다. 즉 단색화의 맥락에 미국을 끼어 넣은 또 하나의 계기는 그것에 붙여진 ‘한국적 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민주주의’ 못지않게 이상한 이 이름은 한참 후에야 붙여진 것이고, 당대에는 프랑스의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urface)만이 비교의 대상이었다고 서술한다. 예컨대 박서보와 로버트 라이만의 흰 그림이 각각 정신주의와 물질주의라는 대극에 놓여 있듯, 단색화는 미학적으로는 미니멀리즘과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적 미니멀리즘’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붙였다는 것이다. 열네 번 째, 열다섯 번 째 단락에서는 70년대의 단색화가 체제 영합적 미술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미국의 입김이 읽힌다면 ‘내적 특질’이 아닌 바깥과 관계 맺는 방식이며, 이 시기 우리 미술은 전후 뉴욕에서처럼 작품-상품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예술의 존재방식을 체화하게 되며, 미국을 통해 전수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으로 이어지는 독재의 시기를 정당화하면서, 소위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유효한 전략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난 것이며, 정체성의 기호이자 투자 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거래된 단색화는 그 만남의 한 징후였다는 것이다. 상업 화랑과 미술 전문지의 등장으로 미술도 상품과 기호로서 대량생산, 유통되는 시대가 열렸으며, 이에 부응하듯 단색화는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양산되고 그 이미지는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광고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체제 비판의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침묵의 화면은 극도의 공안정치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윤 교수는 ‘현실초월’을 지향하는 미술의 ‘현실성’을 바로 보게 된다며, 이른바 복부인 시대의 신 풍속도에는 전통 찾기와 현대미술 붐, 그리고 부동산 투기라는 내러티브가 얽혀 있다고 본다. 2차대전 이후 미국 미술을 물들인 자국 우월주의와 모더니즘 미술, 그리고 자본주의의 은밀한 결탁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는 것이다. 이상 ‘단색화’ 미술에 대한 윤 교수의 언급을 통해 단색화의 집단화 ․ 획일화 현상을 주로 문화정치학적 시각에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색미학의 연원이라든가, 그것이 일본에 의해 그 가치를 부여 받는 과정, 단색화를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볼 수 없다는 시각, 획일화로 인한 폐해 등을 포착하지만, ‘단색조 미술’을 ‘단색화’로 규정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단색화’ 미술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윤 교수는 단색화의 미학적 성취 대해서는 피상적 논리를 펼친다. 이는 다음에 논하는 민중미술과 비교하여 단색화가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통해서도 알게 된다. 물론 예술가가 발 딛고 선 세계는 정치적, 사회적 현상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지만, 그러한 현상을 그린다고 해서 곧 현실을 표상한다고 볼 수는 없으며, 따라서 사회적 현상을 직접적인 모티브로 삼지 않았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3. 본론 2의 소주제는 ‘자타(自他)의 양극화, 그 이후’다. 먼저 첫 번째 단락에서 윤 교수는 현실을 침묵으로 외면해 온 단색화에 정면도전한 것이 민중미술이라 주장한다. 윤 교수에 의하면 민중미술이란 ‘현실과 발언’이라는 그룹의 명칭처럼, 민중의 처지에서 말하고자 하는 미술이며, 이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한 10·26사태가 그 전환점이며,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그러한 방향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5공, 6공을 거치면서 군사정권은 연장되고, 고도성장 위주의 정책이 지속되면서 자본주의 병폐는 중증으로 치닫게 되고, 미술계에서도 이른바 제도권 화단을 장악한 단색화 사단에 의해 박정희 식의 독재가 재연되고 미술시장 역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미술의 안과 밖에서 말할 거리가 많아졌으나 그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미술은 그 속성상 일정 기간 수난의 시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수난이 민중미술의 존재이유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민중미술 또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대 이데올로기에 얽혀 있음을 밝힌다. 70년대의 단색화에서는 이 둘이 상생의 결탁 관계에 있었다면 민중미술에서는 이 둘이 상극이었다는 것이다. 즉 민중이 곧 민족이었던 민중미술가들에게 계층 간의 분란을 야기한 자본주의 체제는 민족의 총화를 교란하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독재정권, 빈부격차, 농촌문제, 소비문화, 환경문제…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미술의 비판의 대상은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큰 주제로 수렴되며, 그것은 곧 미국 비판을 의미하게 되어, 예컨대 코카콜라에 성조기가 겹친 박불똥의 작품처럼 민중미술에서는 반자본주의가 반미를 의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민중미술이 친북 성향을 띤 내력을 밝히고 있다. 민족통일이라는 레토릭을 중심으로 구축된 민중미술의 민족주의는 북한을 동족의 울타리로 포용하는 태도로 나타났으며, 따라서 미국은 권위의 타자에서 혐오의 타자로, 북한은 타자가 아닌 품어야 할 나의 일부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전에는 입에 올리지도 못했던 친북과 반미를 말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변화된 주변의 국제관계와 무관하지 않으며, 전 세계를 이등분한 미·소의 대치 상황이 한반도마저 이등분한 이전과 달리 우리를 둘러싼 지정학이 미국과 북한, 일본, 중국 등이 얽히는 다양한 역학관계로 바뀜에 따라 우리의 처지도 그 관계들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네 번째 단락에서는 오윤의 〈통일대원도〉(1985)나 임옥상의 〈하나됨을 위하여〉(1989)의 흰 한복을 입은 등장인물들처럼 통일의 레토릭 또한 척양과 반자본주의 색채를 띤 것임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한복의 흰색 또한 단색화의 흰색처럼 ‘백의민족’이라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기호를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정체’란 내 안의 타자로 본다. 이런 차원에서 최초의 한국 국적의 현대미술로 평가되는 민중미술 속에도 실은 수많은 타자가 얽혀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민중미술도 양식상으로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으며, 전반적으로는 서양의 리얼리즘 특히 사회비판적인 사실주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1910∼1920년대 독일의 신객관성(Neue Sachlichkeit) 경향이나 19 30년대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와 양식이나 내용상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1980년대 초 우리나라에 소개된 프랑스의 신구상미술(Nouvelle Figuration)이나 독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의 공식미술이었던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와는 체제비판이라는 내용면에서는 상충하지만 양식면에선 리얼리즘을 공유한다고 본다. 이런 차원에서 걸개그림이나 도시벽화 등 공공의 장소에서 대중에 호소하는 방식 또한 혁명기 러시아의 선전미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다섯 번째 단락에서는 민중미술이 자와 타가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현대미술로 명명하는 것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목표가 된 미술이라는 점임을 주장한다. 예컨대 임옥상의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1988)처럼 민중미술은 한국인이라는 주체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견지함으로써 전 세계적 제국주의 구도에서 지워진 피식민자 주체의 시선을 회복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전의 미술이 나와 남의 동일화 과정이었다면 ‘민중미술은 남과 다른 나를 구축하는 것에 목표를 둔 최초의 미술이었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단락에서는 민중미술도 ‘자’와 ‘타’를 반대항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의 이분법적 폭력을 드러내며, 이런 관점에서 민중미술과 제도권 미술의 끊임없는 헤게모니 쟁탈전은 다른 문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억압하려는 제국주의 전쟁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본다. 따라서 민족주의 거울에 비친 자아 이미지 또한 제국주의 거울에 비친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편파적이고 왜곡된 모습이기도 하며, 그러므로 1980년대 후반 이후 다양한 요소가 혼재하는 소위 다원주의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이렇게 닫힌 거울이 열리는 징후로 볼 수 있다고 기술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민중미술의 경우, 이른바 ‘이전의 미술이 나와 남의 동일화 과정이었다면 민중미술은 남과 다른 나를 구축하는 것에 목표를 둔 최초의 미술이었다’는 주장을 제외하고는 이 소논문의 다른 부분과 달리 그 유래와 특히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비교적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단락에서는 1980년대 초에 시작된 정치적 혼란이 안정되고 군정에서 민정으로 옮아가면서 좌·우 대치상황 또한 점차 와해되는 것과 미술의 변화가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즉 나라 바깥뿐 아니라 나라 안에도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왔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에서 소비로 그 비중이 옮겨진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국제관계 또한 복합적이고 유동으로 변하여, 역사왜곡과 독도문제에 광분하면서도 일본말 간판들 당연한 듯 바라보고 맥도날드를 먹으며 촛불을 들고 반미를 외치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의 국제적 위치 또한 변화하여 욘사마는 한류를 타고 일본에 상륙했고, 삼성 광고판은 뉴욕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2002 월드컵을 지배한 붉은 색도 이전과는 그 상징성이 다르다고 본다. 획일적인 붉은 색은 여전히 전체주의적 톤이지만 적어도 소수자의 콤플렉스를 벗어버린 것이며, 따라서 그 목소리는 안으로 수렴하기보다 바깥을 아우른다는 것이다. 이는 나의 모습을 나와 남이 교차하는 보다 확장된 거울을 통해 바라본 것으로, 히딩크가 ‘한국’ 축구 감독이 되고 박찬호가 ‘미국’ 선수가 되며, 하인즈 워드가 미국인이자 한국인으로 수용되는 것도 이른바 다중 정체의 시대가 온 징후라는 것이다. 이어 아홉 번째 단락과 열 번째 단락에서는 이른바 다중 정체 또는 혼성의 시대에 민중미술과 같은 좌익 운동이 그 명분을 잃었으며 형식주의 매너리즘 또한 설 자리를 잃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미술에서도 다양한 양식과 매체가 혼용되는 다원주의로 인해 빈번해진 국제적 접촉은 다원주의를 재촉하여, 우리 작가들이 1986년부터 참가해 온 베니스비엔날레 등 대규모 국제미술전은 해외미술을 만나는 주요 통로가 되어 왔으며, 1993년의 휘트니 비엔날레, 1995년부터 시작된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등은 우리나라에서 펼쳐진 문화 혼성의 장이었다는 것이다. 1986년 과천으로 확장, 이전한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호암갤러리(현, 삼성미술관 리움), 아트 선재센터 등 주류미술관과 풀, 사루비아, 쌈지 등 다양한 성격의 공간들 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화랑들도 이에 가세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해 전시 폭주 현상이 나타나고 또한 전시를 신속히 알리는 미술 저널리즘의 팽창으로 서로 다양한 경향을 참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까지 가세하여 우리 미술을 세계미술과 동시에 접속시킴으로써 수많은 문화 접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성 형상은 1990년대 이후 우리 문화를 주도한 신세대 문화의 한 버전이라 주장한다. ‘수직적 위계와 범주 구분을 거부하는 신세대 감각이 전 세계 문화를 가로지르고 있는 가운데 우리도 그것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평적 다양성 간의 혼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러한 미술은 양식과 형태의 교환성, 즉 상품논리에 근거한 커다란 시장이며, 그래서 이면에 숨어 있던 미술시장이 표면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와 열두 번째 단락에서는 독창성의 신화 대신 차용과 혼성 담론의 세례를 받은 최근 작가들에게 ‘한국’이라는 국적은 더 이상 작업의 준거 효력을 가지지 않으며, 이른바 ‘한국적’ 현대미술을 만든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운 이들에게 민족주의는 하나의 담론이지 목표나 신념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더니즘 담론의 중심을 10년 이상 뒤처져 따라가던 우리 미술이 이제는 오히려 포스트모던 미술의 현장이자 견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최정화가 플라스틱 바구니 탑 같은 키치의 제3세계 버전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비 자본주의의 무소부재를 비트는 것이며, 서도호가 노방 옷감으로 한옥을 지은 것은 국적을 표상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정체의 가동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또한 김수자의 〈여행 비디오〉는 자와 타가 교차하는 맥락에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듯, 이 시대의 작가들은 중심의 복수성과 유동성을 말하는 소위 탈 중심화의 시대를 증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 담론에 있다고 본다. 그 까닭으로는 탈식민주의, 복합문화주의, 글로벌-글로컬리즘, 유목주의 등의 담론들이 주목하는 다양한 주변 중 하나가 우리나라이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국제성과 정체성,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가 갈등관계가 아닌 동전의 양면처럼 묶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깥의 것을 따라가는 것이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찾는 일이며 타 문화를 ‘죄책감 없이’, 나아가 적극적으로 번역, 차용할 수 있는 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일본의 아니메와 가라오케, 미국의 팝송이 교차하는 이불의 작업이 한국과 세계무대에서 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이제 밖으로 나감을 통해서 뿐 아니라 안으로 수용함을 통해서도, 물리적 이주 뿐 아니라 심리적 이식을 통해서도 진행되며, 따라서 그것은 타자와의 수평적 접촉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상 일곱 번 째 단락에서부터 열두 번째 단락에서 윤 교수는 80년대 후반 이후의 미술에 대해 사회문화사적 시각에서 기술하면서도 그 변화의 계기는 포스트모던 담론에 있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위 단락들에서의 핵심주장은 미술이 한갓 유행현상에 편승하는 것임을 이 글 마무리 부분의 주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신정아 사건을 통해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광주비엔날레는 물론 국민의 혈세 수백억을 낭비한 대표적 소모성 행사였던 미디어시티 서울전 같은 경우도 긍정적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은 한심함을 넘어 실소를 자아낸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중심주의 또는 그 연장으로서 국가중심주의가 내포한 폭력의 가능성을 넘어서서 남과 더불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일의 존재를 두려워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여유와 배려, 여기에 정체성 지도 그리기의 윤리적 차원이 있다’는 윤 교수의 말은 얼마나 그럴듯한 수사학인가? 이런 맥락에서 ‘문화적 정체성이란 데리다가 말한 “사이(entre)”의 공간에서 찾아져야 하며, 이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자를 볼 수 있으며, 이런 ‘제3의 공간’을 탐색함으로써… 우리는 양극성의 정치학을 벗어나 우리들 자신의 타자들로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이 소논문의 말미도 지난 90년대부터 유행한 당대의 담론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공허한 수사(修辭)인 셈이다. 단 한번이라도 하얀 캔버스 앞에 마주 서서 그 막막함을 절감해 본 사람이라면, 이방인에 대한 동경(제노필리아)과 공포(제노포비아) 사이에서 예술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실존적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수사인지 실감할 것이다. 나 역시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는 안과 밖의 여러 사회적 차원의 얽힘 속에서 만들어지는 유동적 과정’이거나 ‘끝없는 차이들로 열린 혼성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도 이방인의 대한 공포(제노포비아)와 이방인에 대한 동경(제노필리아) 사이로 한국현대미술을 규정한 윤 교수의 시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관념적 시각 때문에 심지어 당대 유행에 편승한 현상들마저 미술사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이 소논문이 근현대의 숱한 역경 속에서 배태된 작품들에 대한 리얼리티를 검증하려는 1차적 리서치가 매우 부실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글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든 배제(무시)되었든 아직도 대다수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생존해 있는 현실에서 그들이 제작한 작품과 전시활동의 실상에 대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은 정보를 근거삼아 재단하는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이글 서두에서 ‘정체성의 준거를 바깥과의 관계맺음에서 찾음으로써 ‘주체는 이미 그 존재의 조건에 타자를 내장하고 있으므로 애초부터 독자적인 나는 없으며,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주체의 이미지’또는 맥락 속에서 발화된 ‘주체효과’이므로 ‘나’는 ‘나’로부터 소외됨으로써 도달하는 역설의 산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서구에서 현대에 들어 ‘타자’성이나 차이를 강조하게 된 것은 그리스 이래 서구 언어 특유의 성향에서 기인하는 존재론적 철학의 전통에 대한 성찰 때문이다. 즉 서구의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타자성을 논한 것은 한 개인의 존재를 타와 분리된 절대적 주체로 설정한 서구 특유의 존재론적 철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연장선이며, 이는 이른바 주체의 해체, 또는 ‘탈 주체’로 기술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해체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구조상의 차이는 사고과정의 차이를 낳는다. 동양의 언어는 그 특성상 주어(주체) 중심, 즉 주어(행위자) 중심의 언어가 아니라 동사(탈주체, 변화) 중심의 비존재적 언어다. 그러므로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나의 행위 속에 내가 있(살)고, 꽃과 꽃봉오리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변화의 양태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서구적 의미의 실체적 ‘존재’는 부재하며, 선과 악도 대립적 실체가 아니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장소와 시간에 따라 ‘음’도 ‘양’이 될 수 있는 음양사상과, 상생 상극의 오행사상을 통해 알 수 있듯, 사물과 혹은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무엇보다 절대적 실체를 부정하는 동양의 전통 속에서 모든 존재란 이미 간주관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 ‘무아’ 사상이나 화엄사상도 ‘나’란 존재가 이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며, 결국 타자와 나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은 동양에서는 이미 오랜 정신적 전통이었다. 사고의 틀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그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처럼 불연속적이지만 문명권마다의 인식론적 기저인 언어의 틀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경우 갑오경장 이래 한자에서 한글로 문자가 교체되었고, 특히 해방공간이후 인식의 틀도 급속히 서구화되어 그만큼 일반인들의 경우 오히려 서구적 사고의 틀에 익숙하지만, 언어적 바탕은 어떠한 역사적 단절상황에서도 나의 사고 틀의 기층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또한 예술에 대한 인식론(또는 존재론)적 접근의 한계는 명백하다. 인식은 논증을 통해 이루어진다. 논증적 글은 주장과 논거(전제)로 구분되며, 논거의 타당성과 적절성이 논증의 진정성을 보장한다. 문제는 논증을 가장한 논리가 오히려 미술사의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전위적 현대미술의 주된 경향을 통해서 알 수 있듯, 예술이란 논증적 글쓰기 차원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특수성이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논증적 진술과 예술적 가치의 진정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2007년 9월 14일 도 병 훈 주1)오상길 저,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 ICAS, 2005, 88쪽에서 재인용.
62 no image 2007 여름, 청하를 다녀와서 [1]
도병훈
5432 2007-08-26
2007 여름, 청하를 다녀와서 들어가는 말 1990년대 후반, 어느 지역 중학교의 교지를 보다가 그 학교 재단이사장이면서 향토사학자인 이삼우(芽村 李森友) 선생이 쓴 <겸재 정선의 이 고장에서의 발자취>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 논문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50대 후반에 지금의 경상북도 청하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그림을 그린 행적을 현지답사를 토대로 간결하게 쓴 글이었다. 이후 언젠가 이삼우 선생을 찾아뵙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언 십 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올 여름 우연히 이삼우 선생의 논문을 다시 읽다가 꼭 만나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문에 실린 선생의 얼굴사진으로 볼 때 연로한 모습이어서 지금 만나지 않으면 못 뵐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사람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아는 선생님께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집사람의 소개로 청하중학교 박창원 교감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8월 19일 저녁, 포항시 흥해읍에 위치한 호리 저수지 가의 한 찻집에서 박 선생님을 만났다. 이삼우 선생의 근황을 물었더니 요즘은 식물원장으로서 이와 관련된 활동을 주로 하신다고 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삼우 선생은 서울대 농대에서 임학을 전공한 식물학자였다) 나는 박 선생님께 이삼우 식물원장을 알게 된 사연과 만나려는 이유를 말했다. 박 선생님은 논문집 2권을 내 놓았다. 그 중 한 권에는 내연산 폭포 주변에 새겨진 인명을 연구한 박 선생님의 논문이 실려 있었다.(박 선생님이 약 1년 동안 내연산 계곡을 샅샅이 답사하여 이곳을 다녀간 역사적 인물에 대해 행적을 정리한 논문이었다) 박 선생님도 이 지방에서의 겸재의 행적이나 발자취, 그리고 그동안 궁금했던 겸재의 <청하성읍도>의 현재 장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겸재의 <내연삼룡추도>와 관련, 수 년 전 몇 차례 시도하다 포기했던 선일대 올라가는 길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더니,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른 몇 가지 질문도 하고, 대화 중, 이 고장에 겸재 그림이 남아 있는지도 물었는데,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1980년대에, 이 지역 어느 마을에 화첩이 있었는데, 그 화첩이 대구의 누군가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겸재는 물론 화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때라 누구 그림인지 알 수 없었고, 화첩을 소장했던 분도 지금은 작고했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 지역 특유의 보수적 유교문화권 풍토상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의 그림이 드문 편이므로, 단일 족자도 아닌 화첩이라면 겸재의 그림일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겸재가 이 내연산 계곡에 어떻게 갔을까 궁금했는데, 박 선생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계곡 입구에 위치한 보경사의 스님들이 관찰사나 현감들을 가마인 ‘남여’에 태워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겸재 정선도 승려들이 멘 가마 위에 앉아 산천을 유람하고 구경하였던 것이다.(이런 풍습과 관련, 조선 말기에 어떤 보경사 스님 한 사람이 가마를 매고 올라가다가 당시 고을 현감을 계곡 물에 일부러 빠뜨린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 이후 이러한 관습이 없어졌다고 했다. 사실 조선 후기 많은 벼슬아치들이 금강산 갈 때 당시 장안사 중들이 그들을 가마에 태우고 올라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박 선생님을 통해 이곳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음을 생생한 일화로 알게 된 것이다.) 또한 박 선생님은 향토의 민속이나 민요, 민담 등도 관심이 많은 분이어서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밤이 늦어 다음날 이삼우 원장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1.이삼우 기청산 식물원장 방문기 8월 20일, 집사람과 함께 아침 8시 40분 집에서 출발해서 박 선생님의 안내로 9시경에 기청산 식물원에 도착했다. 기청산 식물원은 그 이름과 달리 산 속이 아닌 평지에 있는 식물원이었으며, 노송림이 둘러싼 청하중학교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이 곳의 넓이가 약 3-4만평의 크기라고 했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 원장님의 집이 있었다. 집 근처에 이르러 야외에 있는 벤치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수수한 회색 개량 한복 차림을 한 원장님이 집에서 나왔다. 인사를 나누고 가까이서 지켜보니 청수(淸秀)한 기품이 감도는 단아한 동안(童顔)이었지만 강직한 기품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인해 조선 사대부의 모습 같았다. 원장님의 일정상 대화를 나눌 약속시간이 길지 않다고 해서 준비해 간 나의 책을 드린 후 곧바로 질문을 했다. 아래 글은 주요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도병훈(이하 도) : 삼복더위의 계절에 바쁘신 가운데도 귀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대학 재학시에는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지난 90년대 초 간송미술관에 들린 일이 인연이 되어 겸재 정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후 겸재 그림에 대해 공부하면서 겸재 특유의 독자적인 화풍과 이 곳 청하에서의 삶이 커다란 상관관계가 있음을 그의 전 후기 그림들과 이 곳 행적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990년대 후반에 원장님의 글도 처음 보게 되었고, 꼭 만나 뵙고 싶어 오늘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실 원장님이 임업을 전공하시고 또 식물원장이신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언제부터 겸재 정선의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삼우 원장(이하 이) : 정확히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대략 1990년대초 무렵,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인 최완수씨가 TV에 나와 보경사와 겸재 정선의 '탐승각자'(명승지 바위에 새기는 이름을 말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옆에서 박 선생님이 1993년경이라고 했다) 도: 원장님의 글을 보면 <의송관폭도(倚松觀瀑圖); 소나무에 기대어 폭포를 본다는 뜻임>에 나오는 소나무가 실제 이곳 비하대 위의 실재하는 소나무라고 하셨는데, 사실 이 그림에 나오는 소나무는 중국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화보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의송관폭도>에 그려진 소나무를 이른바 <겸재송>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먼저 이 그림의 화제(畵題)가 삼룡추폭하 유연견남산(三龍湫瀑下 悠然見南山)입니다. 즉 삼룡추폭포 아래에서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이 삼룡추는 이 곳 내연산 계곡에 있습니다. 삼룡추 옆의 절벽이 비하대인데 이 절벽 위에 수령 약 400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 소나무가 두 그루 있습니다. <의송관폭도> 소나무는 이 두 그루 중의 하나를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소나무는 50~60년까지는 금방 자라지만 그 다음부터는 잘 자라지 않습니다. 또 절벽 위 바위틈에서 자란 생육조건을 감안하면 현재 비하대 위의 두 그루 소나무는 수령이 약 300~400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고, <의송관폭도>에 나오는 소나무 그림과 수형도 비슷하다는 것입니다.(대담과 나중에 자료를 통해 알았지만 이 원장은 나무 전문가로서 나무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바탕으로 지역 노거수(老巨樹) 회를 이끄는 분이었다) 도 : <내연삼룡추도>를 보면 관음폭포에서 연산폭포로 올라가는 바위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다리는 언제 설치한 것입니까? 이 : 내가 고등학교나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나무로 만든 사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비하대 아래에서 야영도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야영하는 며칠 동안 겨우 몇 사람이 올라 올 정도로 한적했습니다. 사다리로 올라가려면 관음폭포 바로 위 냇가 좁은 곳에 돌이 놓여 있어 그 위를 딛고 건넜는데, 그 돌을 딛고 건너다가 미끄러져 계곡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다리는 1960년대 중반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들어졌습니다. 도 : 원장님께서는 정선이 그린 <청하성읍도>에 대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봉송정이란 정자에서 그렸다고 하셨는데.. 이 : 봉송정은 지금 7번 국도와 청하에서 나가는 국도가 교차하는 사거리 부근에 있었던 정자로 옛날에는 이곳에 숲이 울창했습니다. 이 숲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숲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수고 20~30M 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무슨 바람 막는 효과가 있느냐고 하는데, 잘 모르는 얘기 입니다. 나무 한 그루만 심어도 공기의 기류가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식물원 주변도 이 숲 덕분으로 이 주위의 공기가 다르며, 한 여름에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시원합니다. 이곳에 숲이 있는 한 자손만대까지 그 혜택을 보는 것이지요. 도 : (준비해 간 겸재 정선 특별전 도록을 펼쳐 보이며) 겸재 정선이 그린 <청하성읍도>에 나오는 성곽이라든가 건물들의 위치, 그리고 뒤에 보이는 산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 : 이곳 오른 쪽 상단에 보이는 성문이 청하 읍성의 서문이고, 현재 동사무소 근처입니다. 그리고 이곳 하단 성곽 모퉁이에는 옹성이 있는데 겸재는 이 옹성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누각은 해월루 입니다. 그림 성 읍 위에 보이는 산 중 윗부분은 덕성산이고, 아래는 호학산 자락을 그린 것으로 봅니다. 이 호학산이 청하의 진산입니다. 도 : 저도 겸재의 그림에 관심을 갖다 보니 그와 관련된 자료는 알게 되면 어떻게든 구해 보는데요, 원장님이 쓰신 글 중 참고문헌으로 나오는 최완수 선생의 글인「겸재 정선의 청하현감시절의 화력고」를 아직 못 읽어 보았습니다. 혹시 그 자료를 지금도 갖고 계십니까? 이 : 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요즘은 워낙 다른 일에 몰두하다 보니....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최완수 선생의 글에 내연산 폭포 하단 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잘못되어 있어 그 글에다 표시해서 다시 보냈는지도 몰라요. 도 : 조금 전에 드린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도 최 선생의 글에서 그러한 오류를 발견하고 주석에다 그러한 오류를 밝혀 놓았습니다. 이 : 그랬군요. 도: 한국인들은 소나무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매우 소나무를 좋아합니다만.. 이 : 소나무는 ‘제왕수’입니다. 물론 목재로서 유용하지만 소나무는 토양을 척박하게 합니다. 땅을 산성화해서 냇물과 강물은 물론 바다까지 산성화시켜 어족까지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나무로서 좋은 나무는 역시 참나무 입니다. 도 : 그렇군요. 오늘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내 주시고 두서없는 질문에도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 (박 교감 선생님께) 모처럼 오셨으니, 식물원을 견학을 할 수 있게 안내해드리고 청하읍성도 안내해주세요.(대담이 끝난 후 이 원장의 서재에 비치된 방명록에 기록을 남겼다. 이 원장께서는 식물원 관련 홍보가 실린 지역 신문 1부, 청하중학교 팜플렛, 당신의 수필이 실린 수필집과 이 지역에서 있었던 겸재 정선 관련 행사와 관련한 팜플렛 등을 담은 봉투를 주었다. 그리고 식물원을 견학하기 전해 벌레에게 물릴 수 있다면서 벌레를 쫓는 천연 약물이 들어 있는 분무기로 손수 몸에 뿌려주었다. 식물원을 관람 후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2. 겸재 정선의 <청하성읍도> 현장 탐방기 기청산 식물원을 나와 박 선생님의 안내로 <청하성읍도>를 그린 현장으로 이동했다. 먼저 동사무소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해놓고 내리니 송덕비들이 보였다. 박 선생님이 겸재 정선의 송덕비는 없다고 했다. 이 곳에 재임하는 동안 그림만 그려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러한 송덕비 중에는 억지춘향 식으로 강요해서 세워진 비도 있다. 이런 얘기를 박 선생님께 했더니, 맞는 얘기라고 했다. 동사무소 앞마당에 수령 500년은 됨직한 회화나무가 있었다. 겸재 정선이 이곳에 재임하던 기간에서 살아있던 나무인 것이다. 박 선생님은 <청하성읍도>에 나오는 나무 중 두 그루를 가리키며 이 둘 중 하나의 나무일 것이라 했다. 과연 수형이 비슷했다. 우리는 그곳을 나와 성벽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청하초등학교 울타리 동쪽 울타리 아래 성이 성벽이 남아 있었다. 성이 높지는 않았지만 장방형의 큰 돌을 다듬어 쌓은 것이었다. 갑자기 박 선생님이 성돌을 감싼 덩굴을 걷어내니 ‘예안(禮安)’이란 한자가 보였다.('안' 자는 글자의 획이 훼손된 부분이 있어 젊을 '소'자처럼 보였다)박 교감선생님도 처음에는 이 글자가 무슨 자이며 어떤 뜻인지 몰랐는데 경주박물관에 근무하는 성(城) 전문 연구자에게 물었더니, 이 성은 지금의 안동 인근인 예안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쌓았다는 표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성은 규모와 기술적 문제로 지방의 일반 장정들이 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각 지역에서 온 기술자들이 구역을 할당해서 쌓았음을 이 글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어 서문 성벽 바깥에 위쪽의 향교 근처로 갔다가 다시 청하초교 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날따라 워낙 더운 날이어서 도로 옆 동네 슈퍼에서 생수를 산 후 청하초교로 들어가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박 선생님으로부터 청하읍성에 대해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청하초교의 자리가 성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옛 성곽의 3면이 청하초교의 울타리였다. 그림을 놓고 펼쳐보니 해월루 자리도 바로 청하초교 안이었는데, 회재 이언적 선생의 기문에 이곳 해월루 주변의 풍광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동사무소 앞마당에서 집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봉송정 근처로 갔다. 그곳에는 수령 300년은 됨직한 몇 그루의 소나무와 별장 같은 현대식 건물이 있었다. 이곳은 청하 읍성에서 다소 먼 거리였다. 이어 7번 국도를 타고 조금 내려가니 청하 읍성과 덕성산 호학산 등을 전체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장소가 국도 변에 있었다. 박 교감 선생님은 손으로 산자락과 성 위치를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다시 동사무소에 도착하여 보경사 아래 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박 선생님과 헤어졌다. 맺는 말 여말선초에는 사시도류와 소상팔경도, 조선 중기에는 옛 현인의 행적이 암시된 고사인물도, 무이구곡도 등 전통적 주제를 많이 그렸다. 이어 조선 후기에 명망 높은 안동김씨 가문의 김창협(金昌協,1651~1708), 김창흡(金昌翕,1653~1722) 형제가 새로운 유람 문화의 선구자로 등장하면서 18세기 전반기부터 문인들의 산수 유람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조선의 산수화가들도 자기체험의 공간을 담아낸 실경산수화를 그렸다. 이런 실경을 탁월하게 잘 그린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이며 그는 당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화풍의 독자성(까칠하면서도 굳센 필력으로 대상을 대담하게 생략하고 강조한 청명한 화풍을 말한다)은 후기 그림에서 두드러지며, 특히 청하 현감 부임 이후의 그림들은 그 필력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 겸재 정선은 1733년 청하에 현감으로 부임하여 절경인 내연산 계곡을 오르내리며 그린 <내연삼룡추> 연작과 관동의 명승을 그리며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한 것이다. 내가 그간 청하에서의 겸재의 행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삼우 식물원장은 이러한 겸재의 행적을 향토사학자이자 임학자로서 주목하여 겸재 예술세계를 탐색하였으며, 이 지역이 문화적 뿌리가 있는 곳임을 드러낸 분이다. 이번에 나는 이삼우 원장과 박창원 교감 선생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가지 겸재의 행적들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물론 <의송관폭도>의 경우 그 소나무가 실제 그 소나무인가 하는 사실 여부와 화풍의 독자성은 엄밀히 말해서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이 소나무가 <의송관폭도>에 나오는 그 소나무가 아니라 할지라도 생육조건으로 보아 지금부터 약 270 여 년 전 겸재 정선의 생존시에도 있었던 소나무임은 틀림없으므로 겸재의 그림세계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청하성읍도>의 소재인 청하읍성과 관련한 사실들은 이 지역에 사는 분들의 증언 없이는 결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집으로 돌아와서 두 분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이 분들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삼우 원장의 단아한 풍모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또한 삼복더위 땡볕 아래서 청하 읍성과 그 주변을 직접 친절하게 안내 해 준 박창원 교감 선생님에게도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07년 8월 25일 도 병 훈
61 no image 최근 딜레마 상황에 대한 단상
도병훈
4694 2007-08-10
최근 딜레마 상황에 대한 단상 연역 논증 중에 딜레마 형식이 있다. 둘 중 모두 나쁜 결과를 초래함에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딜레마이다. 이를테면 ‘싸우면 죽는다, 도망치면 죽는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결론은 죽는다'이다.(p이면 q이다. r이면 q이다. p이거나 r이다. 따라서 q이다)이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남한산성』이란 소설도 바로 이와 같은 딜레마 형식의 틀 속에 씌여진 것이다. 즉 청나라에게 항복하면 자손만대에 오욕이 되고, 끝내 저항하면 군사는 물론 백성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린 것이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이다. 그럼에도 이 와중에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인식하며 제각기 다른 삶을 영위한다. 요즘 답보상태인 아프간 피랍 사건과 관련, 아프간 정부의 입장도 딜레마 상황을 잘 보여준다. 포로 교환을 하자니 또 다른 인질사태를 유발할 수 있는 선례가 되고, 안 하자니 많은 피랍자들의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우리 정부 입장에선 무엇보다 남은 피랍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입장이지만 아프간 정부 측은 현재까지 탈레반 측이 요구하는 포로 교환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물론 아프간 정부가 처한 진퇴양난의 배경에는 미국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자기 결정권의 미약함이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기실 한국인이 납치되어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지만 한국정부와 아프간 정부도 미국정부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사안에 접근하기 때문에 실마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해 냉엄한 국제 현실과 삶과의 상관관계 또는 어떤 사태의 이면에 깔려 있는 복잡다단함을 실감할 수 있다.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해관계가 나라와 문명권에 따라 크게 다르며,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한 개인의 삶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진행형인데다 여전히 쉽사리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염원하지만 이는 심정적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이번 사태는 결코 간절한 마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실로 간단치 않은 변수가 가로놓여 있다. 이번 아프간에서의 피랍사태는 딜레마 상황 이상의 복잡한 실타래가 뒤엉켜 있다. 나와 관계 맺는 상대의 실상은 모른 채, 순진한 의식과 마음만으로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뼈아픈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지, 이번 피랍 사태는 알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또한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존재조건을 감내하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실존적 역량만이 삶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임을 절감하게 된다. 설령 결과적으로 상황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달리 다른 길은 없지 않은가. 2007년 8월 7일 도 병 훈
60 no image 책 출간 소감
소나무
4736 2007-06-05
출간 기념회에서 제가 말했던 소감입니다. 책 출간 소감 먼저 바쁘신 가운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출간한 이 책은 작년에 출간된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에 이어 두 번째 책입니다. 저는 처음 이 책을 준비할 때 많은 시간이 걸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예술에 대한 저의 고뇌와 회의의 산물입니다. 현대미술은 어떠한 객관적 척도도 없으며 이 세계와 삶 그자체가 화두입니다. 그래서 현대미술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원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니 그 길은 저마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전인미답의 길입니다. 이 책은 철학, 사회학, 생물학, 심리학, 동 서양사, 종교사상, 문화 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텍스트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해는 참고 문헌 책값만 몇 백 만원이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모르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도 공부이지만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을 바로 아는 것도 공부임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수 년 전에 나왔더라면 그야말로 오류투성이의 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 출간해놓고 보니, 또 몇 군데는 어처구니없는 오류가 눈에 띕니다. 이는 다 제 불찰이니 이 점에 대해서는 면목이 없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공부는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발걸음으로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 뒷부분에 있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 예술세계에 대한 내용은 사실 제가 주로 직접 그들과 관련된 현장을 찾아다닌 흔적입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서 자신의 책이 후세에 간장병 병마개로나 쓰이지 않을까 염려하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옛날에는 흔히 종이를 말아서 병마개로 썼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종이도 흔해서 가치 없는 책은 병마개로도 쓰 잘 데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책을 나름대로는 역사적 소명감을 갖고 썼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지 '나'라는 한 존재의 개인적 산물이 아닙니다. 무언가 하고자 하는 나의 무의식적 욕망도 사회적 역사적 복수성의 발로이므로 이 책을 출간하면서 무엇보다 ‘인연’, 또는 ‘인연의 조건’ 이란 말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 책이 그래도 일고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면 그것은 수많은 인연이 쌓인 덕분이겠지요. 때로는 세 살 먹은 어린애에게도 배울 수 있듯, 제가 만난 그 모든 사물과 사람이 저의 스승입니다. 이처럼 삶은 본질이나 본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나를 둘러싼 외부적 조건과 관계 속에서 형성됨을, 이 책을 출간해놓고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틀로만 세상을 보려 하지만 좋은 예술은 이러한 고정된 인식의 틀로 보면 낯선 세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낯선 체험이 고정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좀 더 넓고 깊은 차원에서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는 영역이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저에게는 더 깊고 넓게 느끼고 생각함으로써 이전보다 풍요로운 정신과 마음을 지닐 수 있는 삶이 나와 너의 세계인 미술입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5월 도 병 훈
59 no image 책 제목 "나와 너의 세계, 미술"에 대한 단상
소나무
5720 2007-06-05
책 제목 “나와 너의 세계, 미술”에 대한 단상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중심으로- 1. 이번에 출간된 나의 졸저 책 제목은 단지 평범한 뜻으로 정한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세계’는 현대의 고전으로 유명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책, 『나와 너』를 통해서도 생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염두에 두고 책 제목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한 ‘나와 너’와 상관이 없지 않다. 마르틴 부버는 ‘깨어진 세계, 인간의 자기상실, 원자화’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객체화 될 수 없는 주체이며 인격으로서 공존하는 ‘나’와 ‘너’의 만남, 곧 ‘나’와 ‘너’의 대화를 통하여 회복하려고 하였다. 부버의 사상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2.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함께 하는 인간이다.”(『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사상을 전제로, ‘나’는 ‘나’만으로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너’의 ‘나’이거나 ‘나-그것’의 ‘나’이거나 이며, 이 밖의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이 두 가지의 근원어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너’는 내가 ‘나’의 온 존재(Wesen)를 기울여야말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데 반해, ‘나-그것’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말할 수 없다. ‘나- 그것’의 관계는 인간의 객체적인 경험 ― 지식의 세계의 것이요, ‘나-너’의 관계는 인간의 주체적인 체험 ― 인격의 세계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사물의 표면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은 경험한다. 우리는 이 사물로부터 그것들의 성질에 관한 지식, 곧 경험을 가져온다. 하지만 그는 사물에 붙어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경험만으로는 세계를 사람에게 가져올 수 없다. 경험은 사람에게 오직 ‘그것’과 ‘그 여자’,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너는 오직 존재를 기울여서만이 말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나-너’의 세계와 ‘나-그것’의 세계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의 전체를, 모든 사람, 모든 인간 활동을 꿰뚫고 있는 이중성이며, 상호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대적 상황이 너무도 전적으로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 너’에 있어서 모든 ‘너’는 언젠가는 ‘그것’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우리 운명의 숭고한 우수가 있다. 더 없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너’의 직접적, 상호적 현존적 관계는 때의 흐름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너’는 ‘그것’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차원 더 깊은 자각을 한다면 낱낱의 ‘너’를 넘어서 마침내 ‘너’이면서 결코 ‘그것’이 되지 않은 ‘영원한 너’를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무리 현전하며 생성되는 자를 통하여 ‘영원한 너’의 옷자락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너’는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요컨대 부버에 의하면 인간의 세계에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질서가 있다. 그 하나는 ‘나-너’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참다운 대화가 이루어지는 인격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 곧 ‘그것’으로 밖에 보지 않는 ‘나-그것’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집단적 세계이다. 그러나 부버가 서양인이고 무엇보다 유대인이어서 그런지 ‘나와 너’에 대한 논의도 결국 서양인 특유의 초월적인 사상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점은 나의 세계관과는 다르지만 ‘나’와 ‘너’의 이면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 논의는 우리의 삶과 예술을 깊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3. 사실 이번 책의 표제의 나와 너는 ‘나’와 ‘타자’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너’는 동양과 서양을 뜻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타자와의 만남, 즉 교류 속에 제3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세계는 개개인의 사람마다 다른 ‘다질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술의 특성과 가치에 주목해왔다. 미술 또한 그 어떤 영역보다 다질 공간, 즉 다양성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즉 미술은 개별 작품마다 각각 하나의 세계이면서 ‘세계’의 여러 얼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이런 의미에서“좋은 회화와의 만남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고 ‘세계’와의 새로운 만남이다. 결국 나에게는 미술이 곧 너와 나의 세계인 것이다. 2007년 5월 9일 도 병 훈
58 no image "나와 너의 세계, 美術"을 출간하며
소나무
5263 2007-06-05
오랫동안 준비해온 저의 졸저, "나와 너의 세계, 美術"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글을 읽다'의 의 김예옥 대표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책 표지 그림으로 을 허락해주신 이승택 선생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책을 내면서 지난 1세기 동안 우리 사회는 외세에 의해 문화적 기틀이 무너지고 개발지상주의 일변도로 급속하게 변하면서 가치의식의 혼미 상태가 지속되어 왔다. 그 결과 최근에는 물질적 부(富)만을 좇는 현상, 또는 자본주의 전략에 의해 포장된 소비성 향락풍조가 만연하고 있어서 우리 사회는 삶의 질을 높이는 다원적이고 생산적인 가치 창출이 미약한 상태이다. 이러한 잘못된 문화풍토 속에서 나는 미술(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더 절실하게 느껴왔다. 예술은 진정한 삶을 지향하는 정신적 도전과 모험으로써 삶을 확장하고 심화해 온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의 미술 수업을 정리하게 되었고, 지난 수년 간 쓴 글을 더 보탠 것이 이 책이다. 첫 장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 및 인식 차이에 따른 동 서양의 전통적 미의식과 현대 미의식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스 이래 서구 특유의 전통적 미의식이 ‘시간 밖’의 초월성을 지향해왔다면, 동양에서는 ‘시간 안에서의 ‘유동적인 정감’의 미를 추구하는 특성이 두드러짐을 시공간에 대한 의식을 중심으로 탐색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절대공간 절대시간 개념이 무너지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함께 그리스 이래 근대까지 고수해온 서구의 예술적 가치도 가변적인 양상을 띤다. 이어 서양의 전통적 미의식과 노자와 공자로 소급되는 동양의 전통적 미의식의 차이를 고찰했다. ‘시지각적 체험과 미술 ’이란 장에서는 사회생물학적 관점에서 몸의 감수성과 시지각적 체험을 다루었다. ‘미술감상과 미적 가치'란 장에서는 현대미술이 절대적 치로 우상화된 ‘미술’에서 정서적 위안을 얻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라 미술과 담론의 경계와 사이에서 존재하는 능동적 가치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고대 미술 다시보기’장은 미술이란 영역이 왜 형성되었는가에 초점을 준 것이다. 네번째 장은 ‘근 현대미술 들여다 보기로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다루었다. 현대미술은 근대의 ‘주체’적 세계관으로부터 출현한 근대 미술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미술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미술은 근대적인 인식주체로서의 자아의 위기와 명증될 수 없는 삶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개별자의 고유성을 교환가치로 전락시켜버린 도구적 합리주의가 초래한 파국적 현실, 상업자본주의의 폐해 등도 현대미술의 배경이 된다. 그러므로 현대 미술이란 근대적 인간관에 근거한 미적 주체의 심미적 표현이 아니라 그러한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의도된 굴절’이며 ‘소통의 굿거리’를 지향한다. 그래서 현대 미술가들은 전통적 표현방식을 거부하며 부단히 ‘급진화’한다. 따라서 현대 예술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비틀고 재구성함으로써 틀 지워진 미적 가치의 향수가 아닌 관객(혹은 비평가)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상호 만남과 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관객이 곧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미술의 특성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서구의 현대미술작가인 마르셀 뒤샹과 요셉 보이스 등을 이 장에서 다루었다. ‘한국현대미술의 비평적 담론’이란 장에서는 먼저 비평에 대한 성찰과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을 현시대 미술사적 시각과 다른 관점에서 기술하였으며, 이어 현대미술의 특성을 이해하는 단서로서 첨예하면서도 흥미로운 작업을 해온 몇몇 현대작가(이승택, 김성배, 오상길, 전원길, 최선, 이태한) 들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전통 예술 다시 보기’ 는 ‘서양 인종의 이데올로기’, 혹은 현시대 우리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응의 장이다. 그래서 먼저 동양의 전통화론과 수묵화의 사상적 배경을 다루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진경산수화에 대해 그 이념적 시대적 배경을 서술하였으며, 이어 겸재 정선의 예술세계를 당대의 의미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과 감수성으로 다시 해석하고자 했다. 이어 조상 묘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도자기에 대한 부분도 이런 의도를 담고 있다. 이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이명기에 대한 소고는 해 주로 문중에 전해지고 있는 글과 그림을 통해 이명기의 행적과 화풍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완당평전』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세상에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는’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를 재해석하고자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미술에 대한 그 어떤 언어적 접근과 해석도 언어의 기호학적 특성상 간접화된다. 그럼에도 언어에 의한 비평적 담론에 의해서만이 또한 언어를 넘어선 미술의 가치를 규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단히 예술적 가치를 성찰하고 드러내는 것이 담론의 진정한 역할이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화된 미술’, 즉 미술에 대한 담론을 지적 사고에 동화시키는 것으로 여긴다면 어처구니없는 오독이다. 끝으로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 항상 진지한 눈빛으로 수업에 임해준 진성고 학생들, 작가로 다루는 것을 허락해주었을 뿐 만 아니라 작품 슬라이드를 제공해주신 작가들과, 수 십년의 인연으로 미술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준 오상길 선배님, 마르셀 뒤샹에 대해 조언을 해주신 김찬동 선배님, 인류문화사적 시각과 문체를 지적해주신 조규현 선생님, 아울러 제자 황은향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원고를 보고 선뜻 발간을 결정해준 '글을 읽다'의 편집진께 깊이 감사드린다. 2007년 3월 광명에서 책을 마치며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평생 ‘무無’자를 화두로 삼아 ‘삼학(三學: 戒․定․慧)’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의 열반송이다. 비록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나는 ‘무’자 화두가 현대 미술가들의 철학적인 물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술은 구도적 실천 행위가 아니며, 철학도 아니다. 현대미술의 특성은 잘못된 통념으로 인한 ‘허상’과 ‘미망’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대응에 있다. 그러므로 현대 미술가들은 참된 감성Genuine feeing을 본바탕으로 삼으며 진정한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모험과 유희를 마디하지 않는다. 문명 차원의 거시적 콘텍스트 속에서, ‘몸’이 알파와 오메가인 인간의 삶 속에서. 새로운 감수성과 새로운 가치를 찾아. 이 책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도중에 출판사를 옮기기도 하고 여러 차례 원고를 수정하였고, 어떤 원고는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항구에 도착한 줄 알았더니 어느 새 다시 바다 한 가운데 있더라’는 말이 있다. 미술이란 화두는 결국 사유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는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한 탐색이다. 삶과 예술은 시시각각 세상 속 숱한 인연으로 형성된다. 새잎으로 출렁이는 저 나무처럼.
57 no image 이정우의 ‘세계의 모든 얼굴’을 읽고
소나무
5754 2007-06-05
이정우의 ‘세계의 모든 얼굴’을 읽고 1. 그림의 창작은 화가나 회화 애호가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질적으로 생성된다. 즉 회화의 본질은 본질의 부재, 그 다양성에 있다. 따라서 20세기 회화의 사유를 간단하게 논하는 것은 회화의 질적 풍요로움을 도식적으로 마름질하는 것이 된다. 예술을 범주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예술의 속성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회화의 존재론을 다질공간을 통해 一以貫之할 수 있다면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어떤 존재론도 이런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각각의 존재론은 나름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다. 위의 글은 최근 출간된『세계의 모든 얼굴』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자 이정우다. 그는 서울대에서 공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동대학원에서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서강대 교수를 재임하다가 동대학의 고루한 교수들과의 갈등 끝에 사직하고, 현재는 철학 아카데미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간 숱한 저서를 펴냈는데, 담론의 공간(1994), 가로지르기(1997), 인간의 얼굴(1999), 접힘과 펼쳐짐(2000), 주름, 갈래, 울림(2001)등을 꼽을 수 있다. 2. 철학자 이정우는 『세계의 모든 얼굴』에서 “회화와 존재론은 세계(*그는 이 책에서 세계란 단어를 전부 한자 世界로 썼다)를 그 근원에서 탐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관점에서 회현대화가 각각 하나의 세계=면을 드러내면서 ‘세계’의 진정한 얼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에게 “좋은 회화와의 만남은 세계의 발견이고 ‘세계’와의 새로운 만남이다. 그는 철학자답게 서구 존재론의 근거가 실재實在 'to on'의 탐구, 즉 참된 것 진짜의 탐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온톨로지ontology로 문화로 보며, 이에 대한 추구를 서구 문화의 근간으로 본다. 서구인들은 이 존재론들에 입각해 세계와 인간을 보는 눈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들의 형상(이데아, 에이도스)을 전통 존재론과 나란히 서구회화의 전통도 사물들의 형상을, 본질을 모방하는 것을 주조로 삼아왔다고 본다. 물론 그는 학문 영역에서 이루어져 온 존재론과 기예 영역에서 이루어져 온 회화가 반드시 서로를 전제했던 것도, 인식했던 것조차 아니라고 보면서 서구 회화사의 굵직한 흐름에서 회화 자체의 존재론을 읽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정우는 서구의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세계의 참된 실재를 찾으려는 ‘본질주의’와 함수적 관계, 주체 개념으로 서술하지만 20세기 문화의 전체 흐름은 본질주의적 전통의 종언으로 본다. 그래서 현대회화는 탈본질주의, 즉 존재론적 상대성을 갖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각 화가, 각 유파는 본질주의적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본다. 그 까닭은 사실상 화가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관점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회화의 핵심은 본질주의의 종언이 아니라 본질의 다원화, 실재의 다원화를 거친 ‘실재’ 추구로 본다. 그럼에도 그는 현대 화가들에게 일반적으로 승인된 ‘실재’는 없으며, 각자 자신의 본질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이정우는 많은 화가들은 그것이 ‘실재’라고 말하지는 않으며 자신이 본 세계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현대회화는 다양성을 그 생명으로 하며, 현대의 화가들이 찾아낸 존재면들을 종합하면 우리는 세계의 ‘실재’에 좀더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이 책에서 서구의 근현대회화사에 대해 주로 마네의 올랭피아, 인상파 그림, 세잔 몬드리안, 마그리트, 잭슨 폴록, 베이컨, 바넷 뉴먼의 회화를 다루었다. 이정우는 이 책의 말미에서 1970년대 이후 회화가 뚜렷한 퇴조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화가들의 영혼이 죽지 않는 한 회화의 존재 탐구는 계속되리라고 믿는다는 말을 결론으로 대신하면서 회화예술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애정을 보여준다. 3. 이 책은 철학자의 책이지만 간결한 문체여서 난삽하지 않으며,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이 책에 담긴 그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시각이 보이지 않은 글이나 책들을 많이 보게 되는 비평 부재의 시대여서 그럴까? 회화들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다층적으로 드러낸 시각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적어도 이 책은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미술이란 세계를 느끼고 발견하려는 탐구정신이 바로 미술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바탕임을 알게 한다. 2003년 3월 6일 도 병훈
56 no image 김기동 선생님
소나무
5129 2007-06-05
김기동 선생님과의 인연 우리의 근현대 미술가 중에는 남달리 굴곡진 삶을 산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작가적 역량과 활동에 비해 그 진가가 입증되지 않고, 잊혀 진 분도 많다. 나의 고교 미술교사였던 김기동(金基東1937~?) 선생님도 그 중 한 분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달 동안 미술학원 다닌 것과 3학년 때 수능(당시는 ‘예비고사’라고 함)이후 서울 종로에 있었던 미술학원에 한 달 동안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3년 동안 선생님께 그림을 배웠다. 지금도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된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고교 1학년 때 과학실, 미술실 등 특별실이 있는 건물의 완만히 경사진 복도를 먼지가 풀풀 나도록 열심히 쓸고 있는데, 선생님이 미술실에서 내려오시다가 얼굴을 찡그린 채 손으로 코를 감싸 쥐며, 높은 톤의 음성에다 서울말 특유의 억양으로 “야, 물 좀 뿌리고 쓸어야지.”라고 하시며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다 선량한 눈웃음을 지으시고는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선생님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큰 키에 늘 청바지를 즐겨 입어 30대 초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그때 선생님은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 후 미술 수업 시간에 사과 3개를 그린 내 정물화를 선생님이 보시고는 그림을 그려 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나는 무척 그림을 좋아했고, 그만큼 절실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때라 다음날 바로 미술준비실로 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2절지 목탄지를 합판에다 붙이게 한 후 이젤을 세우게 하더니 목탄으로 석고 대에 있는 ‘아그리파’를 그려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석고의 크기를 재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눈대중만으로 그린 후 명암도 미술 책에서 본 대로 열심히 그렸다. 내 그림을 보신 선생님은 미술학원에 다닌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셨다. 내가 석고 데생은 처음이라고 했더니, 앞으로 미술준비실에 와서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때 미술준비실에서 그림을 그린 학생은 나 혼자였다. 주로 점심시간이나 체육 및 교련 시간, 그리고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도 밤늦게까지 목탄 데생을 했는데, 선생님은 특유의 보폭이 넓은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미술실에 들어와서는 소처럼 크면서도 형형한 눈으로 항상 말없이 내 그림을 지켜보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달리 내가 그린 목탄 그림을 보시더니 지우고 다시 그리라고 해서 지우고 다시 그렸다. 그 그림을 보시고선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또 다시 그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시 또 그렸더니, 선생님은 “그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하시며, 그림 앞에 앉더니 손수 한 부분을 고쳐 주셨다. 나의 그림에 직접 손으로 그려주신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때 그림을 그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그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방학 때도 학교 미술준비실에 혼자 나와서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은 늘 뒤에서 지켜보실 뿐, 내 그림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선생님은 미술실에서 주로 일본어로 된 책들만 보셨다.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으나 미술 책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내가 그림을 다 그리면 커다란 미술교실 벽에다 하나씩 붙여주셨다. 그래서 일 년 후엔 미술실 사방 벽면이 온통 내 목탄 데생만으로 가득 찼다. 이처럼 나는 그 때 주로 목탄 데생을 했지만 나중에는 수채화와 함께 유화도 그리게 되었다.(2학년이 되면서 후배 미술부원들도 늘어났다) 미술준비실에는 선생님의 기하하적인 추상회화(*캔버스 생천 바탕에 한 모서리만 약간 덜 칠한 암갈색의 사각형을 주로 그린 그림이었다)와 설치 작업에 쓴 나무토막 등이 한 쪽 벽에 세워져 있거나 쌓여 있었다. 그리고 슬라이드를 모아 놓은 앨범도 여러 권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가끔 선생님의 슬라이드 앨범을 펼쳐 보았지만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저 아! 이런 게 현대미술인가보다 싶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 재수한 후 나는 그토록 원하던 미술대학에 입학했다.(입학 후 바로 바로 군대에 갔었고, 제대 후 복학해서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비로소 선생님이 대학 졸업 당시부터 실험적인 현대미술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60년대 현대미술사에서도 다루어지는 <60년 미협전>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 주1) 그리고 대학 재학시절 교수들도 대개 선생님의 바로 위 선배 아니면 후배들이어서 선생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언젠가 이 일 선생에게도 우리 선생님을 아시느냐고 여쭈어보았더니 대단한 작가인데 하면서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5년에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셨다는 얘기를 몇년 후에 알게 되었다.(*그 때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면서 다른 선생님들께, “다리 위에 내가 서 있으면 시냇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흐른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90년대 초반, 선생님은 대구의 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퇴직금으로 아는 분과 동업을 하다가 파산하는 바람에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선생님을 잘 아는 어떤 분이 강제로 작업실에 붙들어 놓고는 그림을 그리게 해서 열린 전시회였다) 그 때 본 선생님의 그림 세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풍경화도 있었고 반추상도 있었지만, 참 맑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었다. ‘현상現象과 향기香氣Ⅰ,Ⅱ’란 제목의 작품에 대해 선생님은 도록 맨 뒷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흔히들 관념觀念을 배제한다고 한다. 물질, 세계, 어떤 현상에 붙어있는 인위적인 관념을 배제하여 그 물질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노력을 이야기 하는데 어떤 이는 아무리 관념을 벗겨내도 관념은 남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대각선對角線으로 자르면 관념을 벗어난 현상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곳이 변증법이 끝나는 곳이다. 반조返照 주2)를 이야기 하고 그것을 지나면 하나의 세계를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만일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관념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현실을 가로지나가는 현상은 절대적 현상만이 존재한다. 이 절대란 말은 그 현상 이전의 그 현상을 낳기 위한 전제의 현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현상이 원인이 되어 다른 현실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절대적 현상에는 오직 향기만이 생生긴다. 그러니까 완전히 관념이 배제되었을 때 나타나는 향기를 말하는 것이다. 아동들의 작희作戱에 가까운 선으로 산과 잠자리채를 든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지만 어디에서 온 것도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산과 어린이의 찰나적刹那的인 모습에서 향기만이 생길 뿐이다. 그러면 그러한 현상이 우리들 생활 현실에서 갖는 관계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그 대답은 오늘의 세계와 사회 발전이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인 확장의 영역에서 모두 너무 소홀하지 않았느냐 라고 그 답을 대신할 수 있다. 반조返照는 반조이다. 위의 글은 지나치게 세계를 논리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나 자신은 현실세계를 논리화 하는 입장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니까. 주3) 1990. 11. 金基東 다시 몇 년이 지난 후 선생님이 매우 어렵게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하여튼 그 무렵, 수소문 끝에 어떻게 선생님과 연락이 닿아 같은 학교 후배와 함께 선생님을 잠깐 만나 뵙고 저녁을 사드렸다. 그 날도 마땅히 갈 곳조차 없는 상황인 것 같았으나 선생님은 저녁 늦게 갈 때가 있다면서 자리를 뜨셨다. 그래서 후배와 만나 어떻게 선생님을 돕는 방안을 강구하던 끝에 통장을 하나 만들어 한 달에 약소한 금액이나마 부쳐주기로 했으나, 얼마 후 종적을 감추어 버려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가족과 함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 구석 자리에 앉아 주무시는 선생님을 보았다. 전에 뵈었을 때 보다 늙고 행색도 초라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을 깨울 수가 없었다. 어린 아들 녀석을 안고 있었고, 집 사람도 함께 있는 상황이어서 민망해 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한동안 내 마음이 무거웠고, 날씨가 유난히 추운 겨울이 오면 어디서 고단하게 살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역시 가족들과 함께 인사동을 길을 걷고 있는데, 전 보다 더욱 초라해진 노숙자의 행색으로 더블 백 같은 것을 둘러매신 채 큰 길을 가로 질러 어디론가 급히 가시는 선생님을 보았다. 예기치 않게 갑자기 이전보다 더욱 초라해진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뿐 차마 선생님을 부를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급이지만 이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지금도 따뜻한 밥과 좋은 음식을 먹을 때, 한 잔의 여유롭게 커피를 음미하며 창밖을 내다 볼 때, 가끔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갖게 되는 자책감 때문이다. 선생님은 당신이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어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혼자 감내하시면서도 생애 후기까지 불꽃처럼 비상한 화업을 성취했다. 알량한 재주로 세상을 속이며 호의호식하는 미술인들을 볼 때마다, 선생님의 고결했던 인품과 삶의 자취를 생각하게 되며, 과연 진정한 예인의 삶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예술로서 ‘그레이터 굿(greater good, 弘益)’은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비롯되었음을 절각하게 된다.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느 덧 일흔을 넘긴 연세다. 선생님이 어디엔가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계시기를, 또한 무엇보다 어디엔가 남아 있을 선생님 관련 자료와 작품도 모으고 싶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2007. 2. 10) *각주 주1) 60년 미술협회는 1960년에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생 6명(김기동, 김대우, 김응찬, 송대현, 이주영, 유영렬), 서울대 미술대학 졸업생 6명(김봉태, 김종학, 손찬성, 백재곤, 윤명로, 최관도)이 결성한 단체로, 1960년에 야외전 형식으로 덕수궁 담 벽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가졌다. 나는 대학입학이후 가끔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당신께 60년 미술가 협회전에 대해 여쭈어 보았으나 당시 절친한 친구였던 윤명로(서울대 교수로 퇴임)와 주도해서 하게 되었다는 말만 간단히 했으며, 2회 전시회나 그 후 결성된 악띄엘 그룹에 왜 참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부터 세력화된 집단과 결별하게 된 모종의 사연이 있어 일부러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 같다. 주2) 선종(禪宗)의 ‘회광반조(廻光返照)’에서 나온 말로 밖의 언어나 문자에 의지해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안으로의 자기반성, 즉 자신을 돌이켜보면 자신의 본성이나 참된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뜻임. 주3) 이 글 옆에 실린 선생님의 약력은 아래와 같다.(*한자는 한글로 바꾸었으며, 이 약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무한대전은 1974년에 열렸던 제1회 전시회에도 참가했음을 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Vol.1, 632쪽에서 실려 있는 작품 도판 사진에서 확인함) -'37 대전 출생 -'61 홍익대 회화과 졸업 -'60 미술가 협회 창립회원 -'73 현대미술초대작가전(대구 대백화랑) -'74 제1회 서울 비엔나레전(국립현대미술관) -'74 연대성(連帶性) 개인전(서울) -'78 무한대전(서울명동화랑) -'85 한일 교류전(대구 수화랑, 東京 東野화랑) -'90, '90 신춘서양화전(세일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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