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6038
2008.04.20 (07: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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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봄과 세잔 그림의 재발견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는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불과 며칠 사이 싱그러운 숲으로 변하는 광경을 자주 본다. 2년 전 꼭 이맘때처럼 봄에 아파트보다 주위 환경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살게 되었고 또 새 봄을 맞은 것이다.

올 봄에는 아파트 단지 군데군데 커다란 자목련 나무에 핀 꽃들이 매우 아름다웠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물론 꽃잎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표정을 지닌 것이 지나다닐 때마다 눈길을 멈추게 하였다. 이어 꽃들이 지기 시작하고 나뭇가지 마다 신록이 싹트고 순식간에 연푸른 녹색들이 숲을 이루는 데, 저마다 다른 색조의 변조가 새롭다.
이는 때마침 최근 모 잡지에서 파랑, 검정과 흰색, 그리고 녹색을 주제로 각각 색채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 있어 세잔의 회화를 다시 보게 된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이전까지 유럽의 진부한 그림방식을 극복하려 했던 세잔은 새로운 감각과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수고>에서 대기의 짙은 청색에 대해 관찰자로서 기록을 남겼다면, 세잔은 대기를 매우 청명한 청색의 색조로 표현하였다. 특히 말년에는 그의 그림에서 청색의 비중이 커진다. 생트 빅투아르 산 시리즈에서 잘 볼 수 있듯, 공간의 깊이와 약동하는 자연의 존재감을 그는 주로 푸른 색조의 변조를 통해 실현하였던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에 일전의 내가 쓴 글의 제목이기도 했던 ‘세잔의 사과’란 제목의 책이 서평란에 신간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저자는 전영백 교수인데, 현대사상가나 비평가들의 세잔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시각을 정리한 책이었다.
오후에 학교에서 퇴근하자마자 바로 서점으로 가서 그 책을 구입하였다. 집에 와서 일독을 하면서 지금까지 잘 몰랐던 세잔의 삶과 작품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간 세잔에 대해 나름대로 관심도 있었고 세잔에 대한 글도 썼다. 그래서 언젠가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비교하는 글을 꼭 써보겠다는 생각을 하다 이번에 ‘세잔의 사과’란 책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세잔에 대해 심도 있는 선행연구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작품에 대한 풍성한 담론이 바로 미술문화의 두께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에 실린 많은 부분이 내가 직접 화집에서 세잔의 그림을 자세히 보며 느끼고 알게 된 관점과 부합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세잔이 말년에 그린 그리다 만 듯한, 그림의 선, 색채, 구성에서 작업의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생트 빅투아르 산 그림들을 특히 좋아하는 데, 이 책에서도 심도 있게 이 부분을 다루었다.

그러나 역시 책은 책이고 세잔의 그림은 그림이다. 새 봄 나무에 싹트는 새 순처럼 세잔의 그림은 세상을 진부하게 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눈을 맑게 한다. 바로 이 점이 세잔 그림이 여전히 독보적인 지위를 갖는 이유가 아닌가? 그야말로 색채와 터치로‘아무 것도 아닌 광경이 됨으로써만 어떤 것의 광경이 되는 광경’을 세잔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4월 19일 11시 30분경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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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no image 대중문화와 현대미술의 단면
도병훈
6896 2008-07-17
아래 글은 올해 하계방학 중 이루어지는 본교 3학년 인문계 논술 주제 중 ‘예술과 대중문화’영역에 대해 의뢰받고 강의를 준비하면서 쓴 것입니다. 대중문화와 현대미술의 단면 문화란 좁은 의미에서는 예술과 문학을,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 철학, 역사를 아우른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 인간의 ‘삶 자체를 규정하는 가치체계’가 곧 문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흔히 문화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나누어 고급문화를 일상적인 삶과 유리된 창작자 지향의 문화로, 사용자의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을 대중문화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는 근대에서 현대사회로의 이행과정과 문화의 의식적 측면이나 공적 가치를 간과한 이분법적 시각의 전형적 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의무교육과 매스미디어가 대중 형성의 바탕 및 매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중은 단지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선거권의 확대와 같은 민주주의의 진전 등에 따른 대중사회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한 집단으로서 질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사회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특히 상업적 목적으로 조장된 소비지향적 대중문화는 인간소외, 또는 가치 전도 현상이라는 문화적 위기 상황을 초래하는 주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중문화를 어떻게 보는가는 곧 현대인의 삶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근대예술의 성립과정과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통해 근대 문화의 핵심과 현대인의 삶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과연 무엇이 우리의 삶과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역사의 변천 단계에 따르면 고대와 중세 문화의 핵심은 종교였다. 이 시기 인간은 당연히 종교를 삶의 준거로 삼았다. 따라서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삶도 신이 만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노예제, 신분제 사회가 가능했다. 이 시기 모든 예술(물론 당시는 근대 이후 개념으로서의 예술이란 말도 없었다)은 당연히 종교에 예속된 수단이었으며, 종교의식의 일부인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이었다. 15세기 이후 중세의 신분제가 해체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마침내 근대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그 하나의 계기는 중세 말기 오늘날의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일부 해안 도시가 번성함에 따라 상업자본을 축적하게 된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육지에서도 장원들 사이에 위치한 교역 장소를 중심으로 상인계층을 주축으로 한 근대 도시가 출현한다. 바로 이들 상인들이 돈을 벌어 자식을 교육하게 되면서 대학을 졸업한 그들의 자손들이 성직자, 법률가, 의사가 되는데, 이들이 이른바 부르주아지 계층이다. 이들 중에서 돈 뿐 아니라 지식과 예술에 대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예술품을 사 모으고 향유하기 시작한다. 근대에 들어 비로소 예술이 문화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전 예술의 종교적 숭배 가치는 개인적 능력이 반영된 ‘미’의 숭배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당대 화가들이나 조각가들은 이전의 공리적 가치를 제작하던 기능인에서 천재적인 예술가로 그 지위가 격상되기 시작한다. 그들은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왕족이나 귀족들의 문화를 모방하려는 부르주아지, 즉 신흥 자본가들의 미에 대한 숭배의식의 표현인 초상화를 그리거나 집안의 정원을 장식하는 조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렘브란트라든가 고야, 쿠르베, 마네와 같은 근현대 예술의 선구자들이 점차 당대 사회 지배계층의 눈높이를 넘어서 자율적인 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이들은 종래의 종속적인 존재였던 예술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예술을 추구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구사회는 획기적으로 변한다. 산업혁명이후 생산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노동자 계급이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며. 이로써 대중문화가 예술적 구매력을 갖게 된다. 게다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사진, 라디오, TV 등이 발명되어 20세기 중반이후 대량 보급되면서 문화상품을 담아 옮길 수 있는 매스미디어 체계가 구축되었고, 이어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특징으로 먼저 과거에 소수 특권층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심미적 욕망을 대중들이 지향하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발달된 복제 기술은 특정인에 의해 독점되던 명작을 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1) 그러나 기술복제 시대의 도래는 원작이 지닌 ‘아우라의 상실’을 야기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중의 심미적 욕망은 인간을 단지 물품을 소비하는 향락적 존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문화의 본질은 대중이 주체가 아니라 대중의 심미적 욕구(취향)를 충족시켜주는 자본주의 산업이다. 이 자본주의 산업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무한욕망의 구도로 왜곡 변화시키기도 한다. ‘욕구’는 생물학적 사용가치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욕망’은 사회 문화적인 취향이라는 것이다. 주2) 그런데도 대중문화는 이 욕망을 마치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양 필요한 것으로 조장하며, 이로써 기존의 것은 끊임없이 용도 폐기하는 유행 현상이 형성된다. 이처럼 대중문화란 일상성이 사회 전면에 대두된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일상성이란 주관과 개성 없이 비주체적으로 남을 따르는 성향을 말한다. 이러한 대중들의 삶은 대중매체를 통해 기업가, 정치가가 좌우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중매체는 지배도구로 쓰이며, 소비자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복종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예술의 존재방식과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현대미술은 창작자 중심도, 그렇다고 수요자 중심도 아닌 그 사이에서 형성되는 정신적 가치로서 오히려 그 독자성이 두드러진다. 마르셀 뒤샹의 <샘>주3)이나 <L. H, O, O, Q>주4)을 통해 알 수 있듯, 과거의 예술작품이나 예술가에 대한 우상적 가치를 비틀어버린 뒤샹의 의도(컨셉)와 정신에서 현대미술의 특성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샘>의 경우 그 작품의 가치는 ‘소변기’란 기성제품(ready made)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샹의 정신에 있다. ‘예술작품’이라는 좁은 의미의 예술에서 벗어나 결국 예술가의 예술적 의도와 감상자의 감상능력이 만나는 접점 속에서 새로운 콘센서스를 형성해온 것이 현대미술의 특성인 것이다. 3. 더 이상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라는 이분법적 틀로는 오늘날의 문화현상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실질적 기제는 이윤추구이므로 이러한 시대 속의 대중문화의 속성이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다다 이래 아방가르드적 현대예술가들은 부르주아지의 눈요기 거리를 만들던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로서의 고급문화의 시녀 노릇을 거부해왔으며, 또한 대중문화의 상품적 가치와 획일성도 거부해왔다. 현대예술은 근대 예술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대중문화의 확산에 편승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현대미술가들의 예술을 통해 알 수 있듯, 현대미술은 근대예술과 대중문화의 속성을 직시하는 삶과 예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현대미술은 이전의 근대예술은 물론 오늘의 일상적 대중문화와도 실로 다른 정신적 지향인 것이다. 2008년 7월 16일 도 병 훈 주1) 발터 벤야민은 현대의 정교한 복제기술에 의해 예술작품이 숭배가치를 상실했다고 보았으며, 이를 ‘아우라의 상실’이라고 정의하였다. 주2)이러한 문화에 대한 고찰과 관련, 사회문화 이론가인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의 ‘구별짓기(La Distintion·1979)’를 꼽을 수 있다. 부르디외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0년대 말 전국민을 상대로 음악, 미술, 의상 스타일, 실내장식, 스포츠, 요리, 영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프랑스인의 문화적 취향 및 생활양식을 연구했다. 부르디외의 주된 관심사는 사회에서 개인 및 집단의 문화적 취향은 무엇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는지, 또 문화가 사회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어떠한 문화적 취향을 갖고 어떤 종류의 문화를 소비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계급을 드러내는 실마리가 된다.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부르디외는 ‘사회공간으로서의 장(場)’ ‘문화자본’ ‘아비투스(habitus)’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먼저 ‘사회공간으로서의 장’이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가 혹은 이질적인가에 따라 개개인이 서로 구별되는 공간이다. 특히 이러한 장에선 개개인이 정치, 경제, 문화와 같은 다양한 자본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실상 사회적 서열이 매겨진다. 문화자본이란 가정환경, 가정교육과 같이 어려서부터 내면적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문화·예술 소장품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처럼 오랫동안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때 형성되기도 한다. 또 학력과 같이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인정해주는 문화자본도 있다. 여기서 부르디외는 계층 간에 불평등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단지 경제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들 사이엔 문화자본 또한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개인의 취향과 문화소비 경향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단지 재능이나 기호가 다르기 때문만이 아니며, 사회문화적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끼침을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란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아비투스’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한 취향을 갖거나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기제이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론 의식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아비투스가 의식적으로 나타날 때는 자신을 남과 차별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된다. 그러나 문화적 취향 혹은 문화 소비행태가 사회계급과 기계적이고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고찰은 현대인의 취향과 소비문화 현상에 대해 개념적 기초를 제공하는 이론으로서 현대인의 소비문화에 대한 마케팅 분석 및 전략 수립의 이론적 근거로도 이용되고 있다. 주3)<샘>이 20세기 미술사상 문제작의 하나로 꼽히는 까닭은 바로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하나는 기성품을 단지 선택만 함으로써 과거의 예술에 대한 회의 정신을, 하나는 마르셀 뒤샹이 아닌 'R, mutt'란 익명의 서명을 쓴 것인데, 이는 예술가에 대한 우상화 거부를 의미한다. 주4) <L. H, O, O, Q>란 작품은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의 복사본에다 수염을 그리고 밑에다 <L. H, O, O, Q>라 쓴 것으로, 이를 연음으로 읽으면 프랑스어로 그 발음의 뜻이 ‘그녀의 엉덩이는 뜨거웠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대중들의 모나리자에 대한 우상화를 통렬히 비틀어버린 것이다.
78 no image '물의 포에지’, 빌 비올라의 비디오 아트(수정)
도병훈
6846 2008-07-07
물의 '포에지', 빌 비올라의 비디오 아트 1. 기독교에서는 요단강이, 불교에서는 도솔천 혹은 삼도천이 삶과 죽음을 잇는 강(물)로 나온다. 또한 『노자도덕경』이나『논어』를 보면 물에 비유하여 세상과 삶을 논하고, 또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서도 알 수 있듯, 물은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친숙한 관조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서양의 현대 비디오 작가 중에 지난 수 십 년간에 걸쳐 주로 물을 소재로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빌 비올라다. 지난 토요일, 우리학교의 미술탐구반과 함께 소격동 국제 갤러리에서 빌 비올라의 개인전을 보았다. 때마침 국립현대미술관은 비올라가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때 선보였던 영상 설치작품 <Ocean Without a Shore해변 없는 바다>주1)를 특별전 형식으로 상영 중이지만, 국제갤러리에서도 5년 만에 그의 개인전을 연다고 해서 가 본 것이다. 비올라는 1974년 백남준이 <TV부처>나 <TV정원> 등 작품을 선보이던 즈음 그의 조수로도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현존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중 유명한 작가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지난 35여 년 간 건축적 비디오 설치, 사운드 설치, 전자 음악 퍼포먼스, 평면 비디오, TV 방송영상 등 다양한 작업들을 해왔다. 알고 보면 어떤 작가든 개인사가 매우 중요하지만 특히 빌 비올라는 자신의 개인사나 다양한 여행체험을 바탕으로 탄생, 삶, 의식, 죽음 등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해왔다. 또한 그의 작품은 동서양 미술은 물론 불교의 선종Zen, 이슬람의 수피교Sufism, 기독교의 신비주의Mysticism 등 다양하면서도 종교적 정신적 전통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의 화면들은 흐리고 뿌연 흑백의 이미지와 고화질 이미지가 공존하지만 매우 세련된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전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1970년대 낡은 흑백 카메라를 사용해 촬영하여 흑백의 영상으로 옮긴 작품 <Lover’s Path연인의 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때로는 흐릿하고 낡은 이미지를 구사하기도 한다. 2. 그의 작업이 대중들에게 특히 어필하는 이유로는, 비디오 테크놀로지를 통해 펼쳐 보이는 종교적 영적 사유때문인 것 같다. 그는 1980년대 일본에서 2년간 살면서 일본 선종의 대가 다이엔 다나카를 만나 불교에 심취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밖에서 안을 바꾸는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안에서 밖을 바꾸죠. 이 깨달음은 아티스트로서 큰 변화를 겪게 만들었어요. 카메라가 외부의 이미지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자아의 이미지를 끄집어내는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요. 이번 전람회의 타이틀은 <Transfiguration변모(형)>’인데, 이는 작가가 “7년 단위로 몸의 세포들도 다 바뀐다 하니 인간은 계속 바뀌고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며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도 그러하듯 그의 작품 대부분은 물을 소재로 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관조적으로 다룬다. 대개 쏟아지는 물줄기가 온몸을 적시는 이미지다. <변모>라는 주제하의 이 작품들은 대개 인간의 형상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밝은 공간으로 나오면서 점차적으로 뚜렷하게 ‘보이다色’가 보이지 않는 문턱(특수 장비로 설치된 물 장막)을 넘으면서 또는 ‘물질화’나 ‘공空’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불교사상에 심취한 것으로 보아,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영상화로 보인다.) 여기서 ‘물의 장막’은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이자 일종의 보이지 않는 힘 또는 알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한 장치이다. 그의 작품에서 물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의 세계는 다시 색의 이미지로 변한다. 관람객이 바라보는 쪽 삶의 세계는 최신장비로 촬영한 생생한 HD화면이지만 ‘문턱’ 너머 죽음의 세계는 1970년대식 장비로 찍은 뿌연 흑백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의 느린 움직임과 망설임을 그 특유의 어법인 ‘슬로우 모션slow motion’ 으로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연기자가 아니라고 한다. 작가는 그들을 만나 죽음에 관한 시를 읽어 준 뒤, 그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들은 후 촬영할 때 자신의 진솔한 느낌을 생생하게 되살리도록 부탁한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이외에 <해변 없는 바다>를 제작하면서 파생된 작업인 <Acceptance,수락> <Transfiguration 변모> <Three Woman 세 여자> <The Innocent 순결한 자들> <Small Saints작은 성인들> <The Arrangement 배열>등 6점과, 2001년 제작된 그의 대표작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 밀레니엄을 위한 다섯 천사들>등 모두 10점의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이 중 전시장 2층에 전시된 <밀레니엄을 위한 다섯 천사들>은 5개의 비디오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각각의 영상을 어두운 전시장 벽에 투영하는 작품이다. 캄캄한 어둠 속 물결을 따라 빛이 명멸하는 가운데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물속에 뛰어들기도 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무중력 상태와 같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인간의 형상이 음향과 함께 연출된다. 이른바 ‘Departing Angel떠나는 천사’, ‘Birth Angel탄생의 천사’, ‘Fire Angel불의 천사’, ‘Ascending Angel상승의 천사’, ‘Creation Angel창조의 천사’다. 이들은 모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순간 모든 것이 정지하는 듯한 고요함과 함께. 어린 시절 물에 빠진 경험 이후 그가 19살 때 처음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넣고 찍은 작품이 '물'과 '물결로 퍼지는 빛'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물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죽은 영혼이 강을 건넜다는 고대의 신화적인 모티브를 한편의 영상물로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비올라는 1990년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는 삶과 죽음을 새롭게 인식했다고 한다. “죽으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늘 함께한다. 나는 죽음을 생각할 때 어둠이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을 생각한다.”고 말했듯. 지구에 머무는 시간은 너무 짧고 값진 것이기에 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는 우리의 행위나 창조물은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역사, 새로운 혁신이나 개념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이 나중에 겉으로 드러날 뿐이다. 내 작품을 보면서 그런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그는 자신의 작업에 담고자 한다. 그의 작품 중 인상적인 작품으로 2005년 6월에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원작으로 보는 현대미술 교과서' 전에서 본 <Observance의식儀式>이 기억난다. 이 작품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움직이는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뭔가 못 볼 것을 본 듯한 표정 같기도, 어떻게 보면 끔찍한 상황을 위로하기 위하여 다가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술을 꽉 다물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다시 매우 느리게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장면이 계속되었다. 3. 이번 전시가 개최되는 갤러리는 특정 취향의 한정된 소수 작가, 그것도 유명세 있는 외국작가들 위주로 전시하는 곳이다. 비올라 개인전도 수년 전에 이어 2 번째다. 이번에 전시된 빌 비올라의 작품을 보면서, 새삼 비디오 아트의 열린 가능성을 보면서도, 반면 그의 작업이 최근에 와서 전형화 되는 측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로우 테크놀로지’냐 ‘하이 테크놀로지’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화면은 초창기의 전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문제 작품들처럼 그렇게 낯설지도,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업은 오히려 매우 서정적이고 서사적이며, 그 영상은 하나같이 잘 만든 다큐 프로그램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준다. 느린 화면을 통해 한껏 서정성과 서사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이 갖는 대중적 공감대는 어쩌면 우리 갖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신비주의적 선입견에 호소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도 한다. 예술의 ‘진정성reality’이 신비주의적 주제와 보여주는 방식의 세련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인식이 불일치하는 간극 사이의 고뇌어린 모색, 또는 의연한 긍정 속에 성립한다면 측면에서. 2008년 7월 7일 도 병 훈 주1) 이 제목은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가인 ‘이븐 알아라비’의 다음 시에서 따온 것이다. The Self is an ocean without a shore Gazing upon it has no beginning or end, in this world and the next. -Ibn al'Arabi(1165-1240) <해변 없는 바다>의 직접적 동기는 20세기 세네갈의 시인인 디옵(Birago Diop)의 다음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죽은 이들은 흙속에서 쉬지 않네/그들은 살랑거리는 오두막과 군중 속에 있네/웅얼거리는 숲 속에/흐르는 물과 멈춘 물 속에/ 오두막과 군중 속에 있네/ 죽은 이들은 죽지 않네.. PS: 2008년 8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해변없는 바다>를 보았다. 정면과 양측면에서 약 20여명의 등장인물이 번갈아 가며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듯 물의 세례를 맞으며 등장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특히 종교적 색채가 더욱 강한 비디오 아트였다. 주2)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Hearing things more than beings, listening to the voice of fire, the voice of water. Hearing in wind the weeping bushes, sighs of our forefathers. The dead are never gone: they are in the shadows. The dead are not in earth: they’re in the rustling tree, the groaning wood, water that runs, water that sleeps; they’re in the hut, in the crowd, the dead are not dead. The dead are never gone, they’re in the breast of a woman, they’re in the crying of a child, in the flaming torch. The dead are not in the earth: they’re in the dying fire, the weeping grasses, whimpering rocks, they’re in the forest, they’re in the house, the dead are not dead.
77 no image ‘클리셰’와 새로운 예술
도병훈
6199 2008-06-23
‘클리셰’와 새로운 예술 프랑스어로 ‘클리셰’란 판에 박힌 것들, 혹은 ‘진부함’을 의미한다. 소설가인 D.H. 로렌스는 세잔의 ‘사과(성)’을 진부함 부수기, 즉 클리셰를 부수기 위한 고투의 단서로 보고 세잔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세잔의 일생을 진부함과의 싸움(전쟁)의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로렌스에 의하면 인물화에서의 클리셰란 “인간성, 개인성, 유사성”이며, “우리가 모두 알고 있고, 인내의 한계를 넘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파악하는 개인의 모습이다. 반면 “한 대상의 ‘사과성’이란 직감적 감지나 본능적인 깨달음에 의해 인지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한다. 로렌스는 세잔의 그림을 이러한 사과성을 포착하고. 그것의 상투성을 배제하려 한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로렌스는 ‘클리셰의 배제’와 ‘사과성의 구축’이라는 이중구조로 세잔의 그림을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렌스는 세잔의 마지막 수채화들도 진부함으로부터의 탈출이며, ‘텅 비었다는 것은 진공이고, 그것이 세잔이 진부함과 대적한 최후의 언어였다’고 보았다. ‘텅 빈 종이위에 몇 개의 터치로 이루어진 세잔의 마지막 수채화 풍경들은 그 자체로 풍경에 대한 하나의 풍자’로 본다. 질 들뢰즈는 이러한 로렌스의 클리셰 개념을 수용하여 그의『감각의 논리』란 책에서 베이컨의 작품을 다루면서, 그가 ‘구상’이란 클리셰를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는지 탐색한다. 들뢰즈는 ‘구상’적인 것의 특성을 서술적이며 삽화적인 것으로 보며, 회화에서 구상이나 재현(representation)이 위험한 것은 외계, 즉 바깥세상의 이미지가 그 화면내의 이미지와 연관되고, 그 때문에 시각(the eye)이 재인(recognition)의 모델에 종속되면서 감각의 직접성과 강도(intensity)를 상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는 “회화는 재현할 모델도 전해주어야 할 스토리도 없으며, 그림 그 자체는 감각, 우연히 마주친 기호”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회화는 구상과 재현을 피해야 하는데, 이는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한 가지는 추상(abstraction)을 통해 순수한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추출(extraction) 혹은 고립(isolation)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베이컨의 방법은 바로 두 번째의 것인 고립(격리)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들뢰즈는 추상회화와 액션 페인팅을 비판하는데, 전자의 경우 시각적이며, 후자는 손의 행위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 그가 어떻게 이러한 세계를 드러내는지 설명한다. 먼저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마주할 때, 실제로 화가는 순백의 화면 앞에 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즉, “화가는 자기의 머리 속에, 자기 주변에, 혹은 화실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자기 머리속이나 자기 주변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소간 ‘잠재적’으로, 다소간 ‘현실적’으로, 그가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화폭 속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화가는 이처럼 이미 주어진 이미지를 전제로 그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판에 박힌 것’, 즉 클리셰다. 그러므로 이 클리셰를 어떻게 파괴해야 할 것인가?가 화가의 핵심 과제가 된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그려진 이미지 내부에 ‘자유로운 표시’들을 아주 빨리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연’한 것으로 돌발적인(accidental) 것이며, 전혀 재현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우연적인 표현(터치, 헝겊으로 문지르기, 물감 뿌리기 등)을 베이컨은 ‘디아그람’(돌발 흔적)이라 한다. 그러나 이 디아그람은 새로운 질서와 리듬을 위한 싹이어야 한다고 베이컨은 말한다. 이러한 베이컨의 생각을 언급하며, 이어 들뢰즈는 베이컨이 자신의 회화에서 근본적인 세 요소를 구분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바로 살로 구성된 형상(세워진 이미지), ‘윤곽’(동그라미-트랙, 평행육면체) 단색의 커다란 색인 물질적인 ‘구조’(아플라)이다. 그래서 베이컨의 그림을 촉각적이고도 광학적인 눈으로 만지는 그림으로 본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다. 클리셰란 우리의 인식과 지각에서 우선적으로 비워야 할 어떤 것이다. 즉 클리셰란 표면적 구조나 정해진 형태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데, 사실 클리셰가 통념으로 지배하는 현실에서 이를 떨쳐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리 클리셰에 저항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클리셰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그림의 ‘탈형태’와 관련하여 세잔과 베이컨에게서 공통적으로 포착하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힘’으로 나타나며, 이 힘은 힘이 작용한 대상의 상태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수년 전부터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가 동양의 ‘기운생동론’이나, 남․북종화론을 극복하려 한 석도의 ‘일획론’과 유사하다는 점이 있음을 흥미롭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동양화론이 절대적인 강령의 ‘클리셰’가 되어 전통회화를 진부하게 만든 원인이 된 면도 없지 않았음을 느껴왔다. 역시 문제는 ‘감각’인가 보다. 2008년 6월 23일 10시 30분 경 도 병 훈
76 no image 피카소가 그린 &lt;한국에서의 학살&gt;의 진실
도병훈
9241 2008-06-19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의 진실 6월이 되면 생각나는 이상한(?) 그림이 하나 있다. 바로 피카소가 그린〈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그림이다. 이 그림은 1951년에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렸으며, 그래서 그림의 제목도〈한국에서의 학살〉이다. 이 그림에 대해 국내 일부 평자들은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로 알려진 신천리 학살을 모티브로 한 그림으로 기술하지만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신천리 학살 자체가 미군이 신천에 당도하기 전에 그 지역의 좌우익간 다툼에서 빚어진 사건이라는 설도 있듯, 아직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실상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제목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이 당시 극동의 한반도 전쟁에서의 살육 행위인지 아니면 다른 데서 일어난 살육행위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중세풍의 갑옷, 또는 외계인 로봇 같은 군인들이 여자와 어린이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전혀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 전쟁의 리얼리티는커녕 사실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우스꽝스런 그림으로 보인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진지함도 고뇌도 없는 것이 이 작품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 대해 많은 국내외 비평가들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며, 심지어 혹자는 이 그림이 한국에서 그다지 평가되지 못하는 것은 반미적인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 피카소에게 한국 전쟁은 단지 감성적인 그림의 ‘소재’일 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대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당시 한국전쟁의 특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큰 전쟁 중 한국전쟁만큼 복잡한 이해관계를 내포하면서도 비극적인 전쟁은 없다. 그만큼 특수하면서도 복잡한 내막이 있는 전쟁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진실은 물론 해방공간의 역사마저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자기 배반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남북 공히 여전히 한국전쟁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피카소가 이러한 한국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알았을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이 과연 한 개의 캔버스를 채우는 그림의 소재가 될 수가 있는 지도 의문이라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전쟁의 리얼리티와 거리가 멀다. 물론 어떤 이는 이 그림에 대해 특수한 지역의 전쟁을 다룬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전쟁의 참상을 다룬 그림이며 그래서 피카소가 천재라고 말하지만 이는 현대미술의 본질적 특성이라든가, 이 그림과 관련된 전 후 사연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뿐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몇 년 전 피카소는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친공산주의 분위기에 부화뇌동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소련은 이러한 피카소를 선전, 선동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이 그림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프로파간다(공산당)를 돕는 선전용 포스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피카소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단 한 번도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일이 없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동료였던 브라크는 보병으로 참전하여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피카소를 유명하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한 시인 아폴리네르는 참전 부상 후유증으로 죽었으며, 이외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이러한 시대를 방관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그동안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로 전쟁과 파괴에 대항하여 그림이라는 표현수단으로 예술적 항거를 강렬하게 보여주었다고 서양 미술관련 책마다 흔히 칭송되는 <게르니카>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게르니카>는 1936년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에서 내란이 발발했을 때 피카소가 프랑스에서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 대한 한결 같은 극찬―‘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 입은 말, 버티고 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케 하며, 흰색·검정색·황토색으로 압축한 단색화에 가까운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다.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된다.’는 따위―에도 불구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혀 이러한 상찬을 받을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의 내용도 상징과 알레고리적 측면에서 소나 부러진 칼 같은 시대착오적인 진부한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표현기법은〈아비뇽의 아가씨〉에도 못 미치는 평면적이고 구성적인 상투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피카소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20세기 초 입체주의자로서 한정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현대미술사는 이전과 그 차원을 달리하여 전개되는데, 피카소는 이러한 현대미술의 길과 동떨어진 퇴행적이며 동어반복적인 양식의 작품을 양산한 사람이었다. 요컨대 피카소는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릴만한 인품도 지성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게르니카〉와〈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찬사는 ‘천재 작가’로 우상화된 피카소의 작품이라는 이유가 주된 것이다. 2008년 6월 19일 도 병 훈
75 no image 대운하 건설계획과 입장(立場)의 사고
도병훈
5083 2008-05-02
대운하 건설계획과 입장(立場)의 사고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서정주 시인의 시 구절은 논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동양에서는 조수 간만의 차, 밀물과 썰물의 원인이 지구가 아닌 달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고대부터 알고 있었지만, 서양에서는 18세기 초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개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와 전체적(관계적) 사고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공약 중 한반도 대운하 건설에 대해 정부 출범 초기부터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다. 대운하 건설 계획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거나 반대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운하 건설계획은 실용과 경제논리를 앞세운 공약이지만 근본적으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대운하 건설’ 이라는 개발 논리는 근대 이후 서양인 특유의 자연을 대상화한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미국인)과 동양인(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에게 같은 그림이나 사진을 보여주고 질문을 하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각각 다른 대답을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서양인이 어떤 대상을 나누어 실체적으로 본다면 동양은 관계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양 문명권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그만큼 서양인과 동양인은 세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양아이들과 동양아이들에게 자기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개 서양아이들은 특정시점에서, 그것도 눈높이에서 바라본 집을 대상화하여 그리는데 동양 아이들은 집을 마당과 함께 다시점으로 그린다고 한다. 즉 서양아이들은 특정시점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만 동양아이들은 대개 그 시점이 다양하면서도 새가 내려다보듯이 그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투시 원근법을 기조로 한 서양의 근대 풍경화와 다시점인 삼원법을 기조로 한 산수화와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 서양의 언어는 명사 중심의 언어이며 동양의 언어는 동사 중심의 언어다. 서양인은 ‘나’란 존재가 있어 ‘내’가 가지만 동양인은 ‘가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곧 ‘나’다. 존재론 중심의 전통적 서구 특유의 철학과 달리 불교의 연기설에 근거한 ‘제법무아(諸法無我)’설은 ‘나’는 외부와 단절된 존재일 수 없음을 뜻한다. 도가(道家)의 ‘유무상생(有無相生)’ 논리도 마찬가지이며, 이는 사물을 쪼갠다는 말이 어원인 서양의 분석적 사고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요컨대 유무상생이란 ‘있음’과 ‘없음’이 명백한 서구적 사고로는 이해되지 않은 입장의 사고이다. 입장의 사고란 말 그대로 어떤 장(場)에 서서(立) 사고한다는 뜻이다. 즉 동양인은 원래 입장(立場)의 사고, 즉 나를 내가 서 있는 장소와 공간 속에서 함께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사고로 생각해보면 백두대간의 허리를 끊고 강과 산을 콘크리트로 도배하고 식수원에 거대한 화물선을 띄운다는 구상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형인 국토의 특성을 무시한 개발지상주의 논리로 접근한 발상임을 잘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해당예정지역에 대한 환경 영향평가, 문화재 지표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운하 추진계획이 먼저 설정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잘못 추진될 경우 식수오염, 홍수피해, 생태계 파괴 등 환경재앙을 초래하며, 결국 투기꾼 지주, 대기업 등 극소수를 위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입장의 사고로 대운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며, 이는 곧 자연을 대상화하여 규정하지 않는 다시점의 사고이자 전체적 사고를 의미한다. 언어의 틀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나타난 ‘현상’과 ‘실재(reality)'의 일치 여부가 문제가 되는 것도 언어의 틀이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방식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즉 언어가 인간의 주인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서구화가 곧 합리화를 의미할 정도로 우리는 근 백 년 동안 서구식 사고를 익혀 왔다.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시각이지만 현대의 동양인을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에 비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서구의 언어에 근거한 서구적 사고방식은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을 키워주며, 사실 근현대문명은 이러한 사고의 소산이다. 그러나 현 정부의 대운하 건설추진에 대해 지각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 결 같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러한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다시점의 사고, 즉 입장의 사고에 대해 그 가치와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줄기를 직선으로 만들고 웅덩이를 파고, 강가를 콘크리트로 막으면 살아 있는 강이 될 수 없다. 살아 있는 강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장(場)을 먼저 생각하는 입장의 사고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8년 5월 2일 도 병 훈
Selected no image 새 봄과 세잔 그림의 재발견
도병훈
6038 2008-04-20
새 봄과 세잔 그림의 재발견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는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불과 며칠 사이 싱그러운 숲으로 변하는 광경을 자주 본다. 2년 전 꼭 이맘때처럼 봄에 아파트보다 주위 환경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살게 되었고 또 새 봄을 맞은 것이다. 올 봄에는 아파트 단지 군데군데 커다란 자목련 나무에 핀 꽃들이 매우 아름다웠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물론 꽃잎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표정을 지닌 것이 지나다닐 때마다 눈길을 멈추게 하였다. 이어 꽃들이 지기 시작하고 나뭇가지 마다 신록이 싹트고 순식간에 연푸른 녹색들이 숲을 이루는 데, 저마다 다른 색조의 변조가 새롭다. 이는 때마침 최근 모 잡지에서 파랑, 검정과 흰색, 그리고 녹색을 주제로 각각 색채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 있어 세잔의 회화를 다시 보게 된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이전까지 유럽의 진부한 그림방식을 극복하려 했던 세잔은 새로운 감각과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수고>에서 대기의 짙은 청색에 대해 관찰자로서 기록을 남겼다면, 세잔은 대기를 매우 청명한 청색의 색조로 표현하였다. 특히 말년에는 그의 그림에서 청색의 비중이 커진다. 생트 빅투아르 산 시리즈에서 잘 볼 수 있듯, 공간의 깊이와 약동하는 자연의 존재감을 그는 주로 푸른 색조의 변조를 통해 실현하였던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에 일전의 내가 쓴 글의 제목이기도 했던 ‘세잔의 사과’란 제목의 책이 서평란에 신간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저자는 전영백 교수인데, 현대사상가나 비평가들의 세잔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시각을 정리한 책이었다. 오후에 학교에서 퇴근하자마자 바로 서점으로 가서 그 책을 구입하였다. 집에 와서 일독을 하면서 지금까지 잘 몰랐던 세잔의 삶과 작품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간 세잔에 대해 나름대로 관심도 있었고 세잔에 대한 글도 썼다. 그래서 언젠가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비교하는 글을 꼭 써보겠다는 생각을 하다 이번에 ‘세잔의 사과’란 책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세잔에 대해 심도 있는 선행연구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작품에 대한 풍성한 담론이 바로 미술문화의 두께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에 실린 많은 부분이 내가 직접 화집에서 세잔의 그림을 자세히 보며 느끼고 알게 된 관점과 부합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세잔이 말년에 그린 그리다 만 듯한, 그림의 선, 색채, 구성에서 작업의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생트 빅투아르 산 그림들을 특히 좋아하는 데, 이 책에서도 심도 있게 이 부분을 다루었다. 그러나 역시 책은 책이고 세잔의 그림은 그림이다. 새 봄 나무에 싹트는 새 순처럼 세잔의 그림은 세상을 진부하게 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눈을 맑게 한다. 바로 이 점이 세잔 그림이 여전히 독보적인 지위를 갖는 이유가 아닌가? 그야말로 색채와 터치로‘아무 것도 아닌 광경이 됨으로써만 어떤 것의 광경이 되는 광경’을 세잔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4월 19일 11시 30분경 도 병 훈
73 no image 숭례문 참화 소감
도병훈
5548 2008-02-19
숭례문 참화 소감 1. 얼마 전 조선 초기 이래 600년을 의연히 버텨 온 숭례문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하루 밤 사이 불탔다. 특히 TV화면을 통해 건물이 전소되고 숭례문이라는 현판이 떨어지는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언론매체에서도 이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언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숭례문에 대해 애착이 있었는지 유, 무형적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반성과 자책을 했으며, 심지어 추모 열풍까지 생겼다. 숭례문은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오히려 존재 가치를 입증한 셈이다. 불타기 전의 숭례문은 명색만 국보 1호였을 뿐 사실상 고층 빌딩과 도로와 매연 속에 위치한 도시 속의 섬이었다. 숭례문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면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불탈 리도 없거니와 성벽을 허물고 길을 내고, 또한 그 옆에 빌딩을 함부로 지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반대는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는 말이 있나보다. 2. 숭례는 ‘예’를 숭상한다는 뜻이다. 조선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유가에서 사람이 늘 지켜야할 다섯가지 도리인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가운 데 넉 자를 흥인지문 주1), 돈의문 주2), 숭례문, 홍지문(弘智門) 주3) 등 사대문 이름에 쓰고 믿을 ‘신’자는 도성 중앙의 보신각에 담았다. 그러므로 숭례문이 불탄 것은 곧 예가 불탄 것이다. 예는 사양지심으로 자신을 낮춰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숭례문은 이런 정신이 담긴 상징물이다. 남대문은 민족의 상징인 만큼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수난을 겪었다. 숭례문 양쪽 성벽은 1899년(광무 3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일부 훼손된 뒤 1907년(융희 1년) 또다시 크게 헐렸다. 당시 방한했던 일본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때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성벽 허무는 것도 모자라 대대적인 환영 구조물까지 만들었다. 이로부터 숭례문은 양쪽에 날개처럼 성벽을 지녔던 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외로운 섬처럼 고립됐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무참히 붕괴되면서 서울성곽의 4대문 혹은 8대문 중 유독 남대문인 숭례문의 현판 숭례문 현판(편액·扁額)은 가로로 놓지 않고 세로로 세운 까닭이 화제가 됐다. 풍수지리설에 근거,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워 달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양은 풍수지리적 특성에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허약하며, 조산이 되는 관악산이 지나치게 높고 화기가 드세다고 한다. 특히 관악산은 그 뾰족한 봉우리 생김새가 화산의 기운을 지닌다. 이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대문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인 '崇'(숭)자와 오행에서 화(火)를 상징하는 예(禮)를 수직으로 포개어 놓아 관악산이 뿜어내는 화기를 막고자 했으며,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 다스린다"는 뜻을 구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이규경)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방대한 백과사전 중 경사편5 논사류1에서 조선의 궁궐 액자를 다루면서 숭례문에 대해서는 "세상에 전하기를 양녕대군 글씨라 하며,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그것을 떼어 버려 유실되었다가 난리가 평정된 뒤에 남문 밖 연못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을 내므로 그곳을 파서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는 정도의 언급만 남겼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 성곽 다른 대문이 모두 3글자임에도 동대문만 '흥인지문'이라고 해서 굳이 '之'라는 글자를 덧보태 4글자로 만든 까닭을 풍수학계에서는 한양의 좌청룡인 낙산의 허약함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나, 이 또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사를 전공하는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현판을 세운다 해서 무슨 화기를 막겠느냐.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유독 숭례문 현판을 세운 까닭은 조선왕조를 뒷받침한 유교의 절대경전인 논어에서 유래한다. 논어 태백편에서 공자가 남긴 말 중 하나로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다시 말해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악에서는 이룬다"는 말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인의예지신과 같은 유교의 가치이념을 음양오행설에 접목해 서울성곽 문 이름을 지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그들은 남쪽에 예를 배정해 이를 활용한 숭례문이란 이름을 지으면서 그 현판을 세우게 된 까닭이 바로 이 논어 구절 중 '立於禮'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통해 사람은 일어난다 했으므로 숭례문이란 현판 또한 세워서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한국의 고건축 유산은 조상들의 숨결은 물론 정신적 지혜가 숨어 있다. 이번 방화 사건과 관련 어떤 이들은 숭례문을 단지 조선시대의 잔재로 평가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어느 모로 보나 숭례문 역시 우리 건축 특유의 기상과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임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혹자는 서양 궁전의 화려함과 중국 자금성과 조선시대의 궁전을 비교하면서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없지 않는 데, 이는 문화사대주의적 시각이다. 숭례문만 하더라도 그 모양새에 있어 당당함과 오롯함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고건축은 대개 이 땅의 공간적 조건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지어진 경우가 많으며, 남대문도 원형대로 주변 성곽까지 복원된다면 이러한 우리 건축의 특성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3. 조선시대 이후 우리 역사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숭례문이 세워지고 나서 오늘날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사실 숭례문은 근대 이후에는 불구적인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숭례문이 국보 1호라고 해서 곧 전통문화유산 중 가장 값진 유물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징성은 매우 큼을 이번 참화를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혹자는 숭례문을 왕조시대의 전근대적 잔재로 그 가치를 평가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숭례문이라는 문화유산의 유형적 예술적 가치는 물론 그 역사성과 함께 정신적 가치를 동시에 생각해본다면 복원만 잘 된다면 ‘예’를 상징하는 유산으로서의 가치는 미래에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예’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 숭례문의 복원은 유형의 복원이 아닌 무형의 정신적 가치까지 복원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2008년 2월 19일 도 병 훈 주1)흥인지문(동대문)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세웠다. 전체 모습과 규모는 숭례문과 비슷하되 웅장한 느낌은 덜하다. 문 밖에 반달모양의 옹성(甕城)을 둘렀으며, 옹성 위에는 방어에 유리하게 여장(女墻)을 쌓았다. 아래층의 모서리 4기둥이 그대로 위층의 바깥기둥이 되는 합리적인 구조이며, 장식이 많고 섬세한 다포계 공포(包)형식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이다. 주2)돈의문(敦義門)은 속칭 서대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지만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철거 전 사진을 통해 돌로 쌓은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虹霓門) 위로 단층 우진각지붕의 문루(門樓)와 주위에 낮은 담이 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돈의문은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 다른 문들과 함께 건축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해 숙정문(肅靖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되었다. 그 대신 약간 남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1422년(세종 4)에 다시 이 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을 새문안(지금의 신문로)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숙종 때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주3)일명 한북문(漢北門)이며, 숙종 때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수축할 때 세검정과 홍지동 사이의 오간대수문 옆의 문루이다. 또한 북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하는 설도 있는데,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원래 숙청문(肅淸門)이었던 것이 중종 연간부터 숙정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72 no image 2007년을 보내며
도병훈
5164 2007-12-31
무자년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계획하신 일 이루시기 기원합니다. 2007년을 보내며 교수신문 필진과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전국 국ㆍ사립대 교수회 회장 등 3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2007년 한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자기기인(自欺欺人)이 뽑혔다고 한다. 자기기인이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주자의 어록을 집대성한 책인 『주자어류(朱子語類)』와 각종 불경(佛經)에 나오는 사자성어다. 이 말은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까지 속이는 사람 또는 도덕 불감증 세태를 풍자하거나 망언(妄言)을 경계하는 성어로 널리 쓰였다. 주자는 『주자어류』에서 ‘남을 속이는 것은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짓이 심해진 것이다’고 했으며, 중국 당나라 때의 불서인『법원주림(法苑珠林)』에서는 ‘망언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고 또한 남을 속인다, 망언하는 자는 일체의 선한 근본이 없어 자기를 바보로 만들어 좋은 길을 잃게 만든다.’라고 했다. ‘리좀’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뱅셍느 대학의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야스퍼스가 던졌던 한 테마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매우 심오한 테마입니다. 그는 상황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습니다. 한계상황들, 그리고 단순한 일상적 상황들, 그는 말했지요. “한계상황들은 언제든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상황들이다.” 여러분들은 뭘 원합니까? 괴로움을 겪지 않은 자, 그건 무슨 뜻일까요? 그는 자신이 버텨낼지 버텨내지 못할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작 필요할 때, 가장 용감한 유형들은 맥없이 무너져버리고, 그 방면에서 형편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유형들이 경이롭게도 끝까지 버텨냅니다. 알 수가 없지요. 한계상황이란 정말이지 이런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때로는 너무 늦었다 싶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스스로 알게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좋건 나쁘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을요. 그러나 우린 그걸 미리 말할 수 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 쉽죠. “ 아, 난 결코 그걸 못했을 거야!” 우리는 그러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 옆을 스쳐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죽고,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위의 말처럼 사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정말 할 수 있는 것, 그 옆을 스쳐가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덧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거짓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진실을 향한 용기이며 실천임을 한 해를 마감하며 생각하게 된다. 12월 31일 11시 25분경 도 병 훈
71 no image ‘김성배-우연과 필연 사이’를 읽고(수정)
도병훈
5927 2007-12-15
‘‘김성배-우연과 필연 사이’를 읽고 지난 12월 12일 책 한 권을 배달 받았다. 김성배 선생이 부쳐준 ‘김성배-우연과 필연 사이’란 책이었다. 지난 11월 30일 수원 행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작업실 겸 전시공간인 ‘우주대학’에서 출간 기념회가 있었지만 그날 마침 재직하는 학교에서 축제행사가 있어서 가지 못했는데, 김 선생이 책을 부쳐준 것이다. 책은 작지만 단정하고 묵직했다. 책을 펼쳐보니 김 선생의 삶과 예술의 흔적이 짜임새 있게 담겨 있었다. 한 해가 저물가는 시점에서 받은 값진 선물이었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건용, 김찬동, 오상길, 조광석, 조 규현 선생의 글과 나의 졸고 두 편도 실려 있었다. 이건용 선생은 김 선생과의 가장 오래된 인연과 작품세계를 담담하면서도 진솔한 필치로, 김찬동 선생은 주로 질 들뢰즈의 ‘리좀’적 사유와 ‘내재성’의 사유로, 오상길 선생은 김 선생의 작업을 ‘개입’과 ‘조정’이라는 관점에서, 조광석 선생은 대지와 호흡하는 예술이라는 관점의 글을, 조규현 선생은 특유의 날카롭고도 힘 있는 문장으로 쓴 ‘김성배- 카일라스의 덫’을, 나의 글은 ‘예술을 넘어선 예술가’와 ‘흑백논리전에 대한 소고’였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는 오상길 선생과 대담한 ‘작가와의 대화’를 읽을 수 있었다. 동서고금의 주요 고전과 마르셀 뒤샹과 카반느의 대화가 그러하듯, 진지한 대화는 논증적, 예술적 글쓰기보다 삶의 단면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나는 두 분의 연륜이 묻어나는 속 깊은 대화를 읽으면서, 지난 수 십 년간 가장 실질적이고도 의미 있는 우리의 문화와 현대미술의 현장일지도 모르는 사건과 사실들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 이 부분만으로도 삶과 미술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음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애독서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숙독할 수 있다면 김성배 선생의 삶과 작품세계를 실질적 측면을 소상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김 선생이 그간 해 온 수많은 드로잉, 회화, 설치 미술 작품들은 매우 이채롭고 다양하며, 한결같이 뱃장과 뚝심, 그리고 번득이는 기지와 해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1988년의 인동초를 이용한 설치미술이나 1989년 소나무 갤러리에서 전시한 설치 미술인 한지, 먹, 돌, 오동나무를 오브제로 한 <무제> 작품 같은 것은 나도 처음 보는 작업으로서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지난 수 십 년간 김성배 선생이 큰 걸음으로 이 혼탁한 세상을 성큼성큼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성배 선생의 서구적 문맥과는 미학적 성취를 통해서 동시대 집단적으로 추구해왔던 미술 운동보다 훨씬 더 진정성 있는 현대미술의 특성을 자각할 수 있다. 현대미술은 예술가의 작품보다 어떤 의미에서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밝혀진 김 선생의 삶과 작업의 가치와 의미는 이 책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실감할 수 있듯, 오상길 선생과의 인연의 힘이 컸다고 본다. 역시 현대미술의 가치는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드러나는가 보다. 2007년 12월 15일 도 병 훈
70 no image 회화의 새로운 존재방식, 폴 세잔의 사과
도병훈
8514 2007-12-08
회화의 새로운 존재방식, 폴 세잔의 사과 1. 우리가 늘 대하는 어떤 사물이나 세계는 경험과 인식의 틀에 따라 다르다. 동일한 대상도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는 것이다. 문제는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으면 이 사실을 깨닫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의 그림은 사물과 세상을 보는 새롭게 법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예로 폴 세잔 Paul Cezanne(1839~ 1906)의 사과가 유명하다. 주1) 누군가는 인류의 3대 사과로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를 꼽았다. 이 세 개의 사과는 의식과 감성이 심화 확장되어 온 문화적 진화 과정을 집약한 말이다. 주2) 사물에 대한 재현적 묘사력은 15세기 얀 반 에이크 이래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른바 ‘오감 정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손으로 만지는 듯한 질감을 묘사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잔의 사과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의 사과는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사람이 잘 그리려고 애쓰다가 어설프게 미완성으로 끝난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일까, 세잔 생전 그의 그림이 출품되었을 때 처음에는 물감만 떡칠된 그림이라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잔사후 그의 그림은 전인미답의 새로운 회화 원리를 추구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그가 도달하고자 한 새로운 회화는 과연 어떤 세계일까? 2. 아래 그림(*도판 생략)은 세잔이 그린《사과와 병》이다. 이 그림은 그저 평범한 정물화처럼 보이지만 주의 깊게 보면 이채로운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음영이나 명암이 아닌 색채의 차이로 화면을 구성하거나 대상을 그렸음을 발견할 수 있다. 테이블도 천을 경계로 하여 좌우 높이가 다르다. 이러한 사실이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는 단서다. 먼저, 이 그림의 두드러진 색채효과는 인상파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 세계의 순간을 포착하는 그림을 그렸다. 망막에 닿은 시각적 인상을 그린 인상파 화가들에게 자연의 현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변하는 것이었으므로 세계의 실제 모습이란 동일한 형태로 지속될 수 없다. 이러한 세계 인식은 고대 그리스 이래 고전적 미의식과는 상반된 미의식이다. 고전주의 미술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은 진정한 현실이 될 수 없었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감각적 현상을 초월하는 ‘이상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 비례를 가진 형상을 잘 그리는 것이 근대 신고전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주된 목적이었으며, 투시원근법과 명암법의 발견도 사물을 재현하기 위한 기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을 그리기 위하여 종래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기조로 한 회화적 기법을 버리고 시시각각 현하는 세상의 모습- 빛이 빚어낸 색채의 차이일 수밖에 없는-사물과 세계를 온통 빛의 색채로 표현하는 방법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회화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은 모두 유동적인 것만은 아니며, 견고하고 육중한 바위 덩어리는 물론 사과 하나라도 만져 보면 단단한 실체적 존재감이 느껴진다. 세잔은 바로 이러한 존재감을 다각적 관점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전적 방법으로 표현하면 색채가 죽어버리고 인상주의 방식으로 하면 사물의 구조적 견고함이 해체되어 버린다. 그래서 세잔은 색채로 형태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다시 말해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몇 가지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모든 것이 빛의 물결로 환원되어 버리는 인상파 그림의 특색에서 벗어나, 대상에 대해 주위의 세계와 구별하는 기본적인 형태를 다양한 관점을 공존시킴으로써 종합하고자 했다. 그 결과 《사과와 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색채와 형태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세잔의 그림이 일견 서툴러 보이는 것은, 아니 ‘잘 그린 그림’이기를 거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세잔에게는 사과처럼 단단하고 둥근 물체가 인상파 그림에 나타난 세계의 존재론적 상대성을 극복하고 물체의 입체감과 색채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그래서 ‘세잔의 사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세잔은 주로 사과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세계는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독특한 자신의 어법(idiom)을 드러내며, 이는 《생트 빅투아르산》연작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주3)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산을 60여 회나 그렸다. 이 그림(도판 생략)은 세잔의 만년 작품이다. 우선 납작납작한 붓 터치로써 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터치 하나하나는 색으로 된 평면인데, 평면으로 또한 입체감을 표현했다. 부분적으로 보면 무수한 평면에 지나지 않은데 전체적으로 보면 입체이기도 한, 그래서 마치 화면이 이 양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듯하다. 세잔이 그린 들판과 산은 그가 그린 정물화도 그러하듯 투시법적 일관성이 없다. 이처럼 세잔의 그림은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은 공간이며, 데카르트적 명료함과 분명함을 배제하고 색채의 차이로써 사물과 세계를 표현한다. 그래서 세잔의 회화는 기하학적 공간에서의 단일한 균형이 아니라 무수한 순간을 고정시킨 다양한 관점들을 종합함으로써 평면과 입체 양자 사이의 긴장된 모순 속에 진동하는 화면이다. 세잔이 이런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이유는 당대 인상파의 영향으로 전통적 재현 회화의 방식인 명암법과 원근법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리면 대상이 갖고 있는 풍부한 색채감을 표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세잔은 실제 대상이 갖고 있는 입체적인 구조(원뿔과 원기둥)도 포기할 수 없었다. 대상은 분명 어떤 덩어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터치는 대상의 실재감과 직결되는 만큼, 세잔은 하나의 터치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톤 하나 이상해도 그림의 전체 질서가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잔은 “색채와 데생은 결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색깔을 칠해감에 따라 데생은 견고해지고, 데생이 충실해짐에 따라 색채도 풍부해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세잔의 그림은 찬찬히 들여다보면 놀라울 정도의 진지함으로 그렴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세잔의 그림이 평범한 주제인데도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 같은 비밀이 그림 속에 있어서다. 세잔은 하나의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서도 오랜 작업 시간을 들였고,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게 할 정도로 매우 까다로왔다. 그에게는 순간적인 대상의 생생한 실재는 물론 구조적 탐구가 다같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는 회화란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모험이었다. 세잔 이전까지는 형태를 묘사하는 데생과 색채는 각기 별개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잔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 파리에서 열린 회고전은 그의 그림세계를 제대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전시를 본 피카소나 브라크의 큐비즘cubism, 즉 ‘입체주의’ 그림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또한 야수주의이후 색상의 자율성을 추구한 현대회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그의 자화상이나 <수욕도>연작을 중심으로 세잔의 그림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는 많은 담론이 있다. 그만큼 세잔의 그림은 현대회화의 중요한 화두인 것이다. 3. 세잔은 이전과 다른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 `세잔의 사과`에는 바로 이러한 비밀이 들어 있다. 세잔의 일생은 한 알의 사과에 대해서도 무수한 관점을 종합함으로써 인상파의 표면적 순간적 현실을 넘어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애쓴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세잔은 인간의 지각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시시각각 단편적으로 들어오는 시각적 단편들을 복수의 시점으로 재구성하여 화면을 구조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천을 경계로 테이블의 높낮이가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세잔은 붓 터치마다 다른 색채의 차이로 다양한 관점과 형태를 구축하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세잔이 현대회화의 아버지로까지 자리매김되는 이유도 결국 그가 구축하고자 한 그림이 회화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25일 도 병 훈 주1)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로렌스는 세잔에 이르러 전통적 진부함에서 벗어난 스스로 존재하는 사과를 그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2)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파리스로부터 황금사과를 받는다. 이 사과는 여신 비너스의 신물神物이자 결혼 의식의 제의적인 징표다. 또한 성서의 사과는 선악과로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헤브라이즘적 전통의 원류를 상징하는 사과다. 사과가 그림의 모티브로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들어 플랑드르 지역에서부터다. 이 지역은 15세기 유화의 창시자인 얀 반 에이크가 나온 이래 회화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남쪽 이탈리아 지역의 르네상스 미술과 함께 18~19세기 유럽 미술을 주도한 프랑스 미술의 2대 원류가 된다. 곧 이러한 신화적(상징적) 사과가 쿠르베에 이르러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일상적 사과로 변하지만 기법 면에서는 전대의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3)세잔이 《생트 빅투아르산》과 함께 만년에 많이 그린 그림으로는 《수욕도》 시리즈가 있다.
69 no image 돈오돈수(頓悟頓修)와 깨침의 미학
도병훈
6151 2007-11-18
돈오돈수(頓悟頓修)와 깨침의 미학 1. 나의 가계도 외가로 거슬러 올라가면 외할머니의 어매까지 약 백년의 뿌리를 지닌 기독교 집안이다. 그만큼 기독교는 나의 몸에 체화된 그 무엇이며, 유년 시절 아름다운 추억도 교회와 관련된 일이 많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어떤 방식의 삶을 살든 고백하건대 나의 도덕성의 많은 부분은 모태로부터 내재화된 기독교적 윤리관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의 제반 현상에 더러 비판적인 생각을 표명해 온 셈이다. 하여튼 언젠가 부터 지각과 이해한다는 것과 실재 세계, 그리고 아름다움의 진정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불교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부처’의 원 뜻이 ‘바로 아는 자’임을 알게 되면서 이후 불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었다. 오늘날 기복화된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해서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은 지난 수 십 년간 이름 그자체로 나에게 화두였다. 지난 1993년 가야산자락 낙엽 분분히 흩날리는 날, 그는 다 떨어진 누더기 가사(袈裟) 한 벌과 열반송, 그리고 후학들에게 수행에 정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앉은 채 세상을 등졌다. 그런데 성철은 입적하기 십여년전 한국 불교에 큰 쟁점을 남긴다. 이른바 돈오돈수(頓悟頓修)설이다. 2.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났으니 베어 버리지 않을 수 없다.(毒樹生庭 不可不伐) 지난 1981년 성철 스님이 자신의『선문정로(禪門正路)』란 책을 통해 한국불교 조계종의 종조인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3~1210)이래 700년간 불교의 정맥으로 이어온 ‘돈오점수’를 부정하며, ‘돈오돈수’가 진정한 깨달음이라 주장하며 한 말이다. 물론 뜰 앞의 몹쓸 나무란 보조의 돈오점수설을 지칭한다. 이처럼 성철이 보조 지눌을 비판한 것은 보조의 돈오점수 중 ‘돈오’가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는 관점에서다. 성철에 의하면 완전한 깨달음이란 닦음, 즉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 없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돈오돈수’다. 물론 돈오돈수설도 성철이 최초로 한 말은 아니며, 중국 선종인 임제종 일파의 명제를 다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성철의 주장은 발표 당시에는 감히 맞서는 사람이 없다가 1990년대에 들어 이른바 ‘돈점 논쟁’을 일으켰으며, 주로 세 갈래의 논쟁이 이어졌다. 보조 지눌이 말한 돈오점수의 의미는 스스로의 불성을 깨달은 뒤에도 자기 속에 배여 있는 습기(習氣, 잘못된 습성))를 수행으로 닦지 않고는 깨달음이 완성되지 않으므로 수행에 초점을 맞춘 불교사상이다. 즉 보조는 자신의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고 견성(見性)하는 것이 돈오이지만, 습기로 인해 성인에 이르기 위해서는 닦고 또 닦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성철은 돈오점수의 ‘돈오’는 해오(解悟)이며, 이는 진정한 깨달음이 아닌 지해(知解, 분별적 지식, 또는 알음알이를 말함)로 보았다. 따라서 지해는 깨달음을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며 선문 최대의 금기이고, 따라서 돈오점수는 진정한 깨달음의 과정이 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반면에 돈오돈수의 돈오는 해오가 아니라 바른 깨침인 증오(證悟)이므로, 바르게 깨친다면 삶의 방향도 확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돈오와 돈오 후의 닦음, 또는 실천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성철에 따르면 ‘해오’에 의지해서는 ‘증오’에 이를 수 없으며, 증오인 ‘돈오’로서 견성하면 곧 돈수이므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깨달음 뒤에도 닦을 번뇌가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는 것이 성철이 주장하는 ‘돈오돈수’의 핵심주장이다. 그렇지만 나는 최근까지도 돈오돈수보다는 돈오점수가 깨달음과 수행의 과정상 타당성이 더 있다고 생각해왔다. 상식적으로도 ‘돈오점수’가 합리적인 과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짜가 활개치는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우리의 경박한 문화 현상을 보면서, 또한 성철의 삶을 돌이켜볼수록 ‘돈오돈수’라는 말의 진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며, 결국 돈오돈수가 깨달음에 실천에 대한 강경한 표현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언어는 약속된 기호체계이므로 불철저한 앎이 오히려 철저한 앎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수행과정과 깨침 과정은 분리될 수 없고, 돈오와 점수가 분리된다면 그것은 이미 깨침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돈오돈수의 진의는 깨침과 실천적 삶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그래서 불교를 더 철저한 공부와 깨달음의 종교로 만들기 위한 데 있다는 것이다. 성철은 생전에 사람을 잘 만나 주지 않았지만 가끔 기자들을 만나면 “속이지 말 그래이”(속이지 말라는 경남 산청 사투리)라고 말했다. 남을 속이지 말라는 것에 그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불기자심(不欺自心)인 이 말을 통해서도 그의 진면목을 잘 알 수 있다. 결국 성철의 돈오돈수설도 가장 치열한 현실인식과 실천의지의 표명임은 평생 추상(秋霜) 같이 올곧게 살았던 그의 삶이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3. 나는 깨달음의 과정과 차원에 대한 그 어떤 신비주의도 배격한다. 동시에 지나치게 개념적인 분석도 불립문자를 논하는 차원에서 보면 개념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다고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에 대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성철의 ‘돈오돈수’설은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왜색불교로 그 맥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한국 전통불교의 기풍을 회복하기 위해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며 불교를 바로 세운 장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수행을 명목으로 절밥만 축 내면서 가당치도 않게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여기는 이들을 경계한 말이다.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사정없이 내리치는 죽비인 것이다. 깨달음과 수행 또는 실천의 차원을 따로 나눌 수 없음은 이미 신라시대의 고승 원효의 삶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삶과 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의 지향과 그로 인한 깨침과 실천은 결코 다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7년 11월 15일, 낙엽 분분히 흩날리는 늦가을 밤에 도 병 훈
68 no image 감상과 예술적 성취 - 추사와 한중교류전을 다녀와서
도병훈
6417 2007-11-14
감상과 예술적 성취 - 추사와 한중교류전을 다녀와서 1. 지난 11월 6일, 과천 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추사와 한중교류전’을 다녀왔다. 작년 후지츠카 아키나오 선생이 기증한 자료로 개최된 ‘추사 글씨 귀향전’에 이어, 이번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과 청대 학자 및 서화가들 간의 문화적 교류를 알 수 있는 추사의 편지와 그림, 금석문 제발(題跋), 중일 관련 추사 글, 청나라 학자가 그 주위 사람에서 보낸 편지와 서화, 경학과 금석학 관련 서적 등이 전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자료는 원본 자료를 제외하고는 1920~1940년대에 후지츠카 츠카시가 직접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대개 그 원본이 부재한 것이기 때문에 추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한 자료였다. 전시장에서 전시를 준비하는 데 애를 쓰고 초대해 준 황정수 선생 주1) 과 만났으며, 주로 추사연구회 및 소치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한 뒤풀이 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KBS TV 진품명품 프로그램에서 한문 서적을 해석하고 감정하는 김영복 선생, 전각을 하며 이번 전시도록에도 글을 올린 고재식 선생, 이전 전시도록에 실린 서간들을 번역했으며, 한학에 조예가 깊은 김규선 선생, 이충구 선생 등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함께 하며 여러 얘기 끝에 추사 글씨의 예술성을 화제로 삼게 되었다. 김규선 선생은 당대 청나라 서예와 비교를 해보아도 과연 추사가 특별한 서예가일 수 있을까를, 김영복 선생과 고 선생은 당대 청나라 어느 누구도 글씨로는 추사와 필적할만한 서예가는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면서도 김영복 선생은 추사의 말년 글씨들에서 이해되지 않은 면도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현대예술을 보는 관점에서 추사의 글씨에 대해 말했다. 그 예로 프랑스의 피에르 슐라즈 그림과 추사의 대형 글씨를 비교하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미술 전공자들 중에서도,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며, 그 예로 대학교 다닐 때 교수들의 작업실에서 추사의 <판전> 탁본 글씨를 보았던 사실도 얘기했다. 제각기 추사글씨에 대해 말했지만 서로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2. 최근 며칠 동안 전시장에서 증정 받았던 두툼한 도록을 읽었다. 주로 청나라 연경에서의 추사의 행적과, 새 학문의 조류와 이질적인 예술과의 만남으로 매너리즘에 빠진 조선의 고루한 문화를 일신해간 추사예술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글이었다. 나는 이러한 글을 보면서도 줄곧 추사 예술의 진면목과 그 가치를 공유할 감상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추사 예술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그간 여러 번 추사예술에 대해 ‘학예일치’의 차원으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발표해왔다. 이러한 나의 시각은 대다수 미술사학자들과 다른 관점이지만, 당대 그 누구도 비견할 자가 없을 정도의 깊고 넓은 학문으로 평생 고증학적 검증을 중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예술을 심화했던 추사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도 부정할 수 있듯, 추사 또한 만년에 이르러서는 특히 제주 유배를 다녀 온 이후 어떤 학문적 차원이나 경전도 무색한 예술 세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추사의 서예 그 자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서예’라는 장르의 고유성이나 특수성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한문 위주의 ‘서예’는 갑오경장이후 실질적으로 단절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서예는 지금도 주로 한자로 쓰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한문을 읽을 줄 모른다. 그래서 현재 서예 분야는 국 ․ 사립 박물관에서의 상설전시를 제외하고는 서예문화 저변의 인프라로서의 제도 기관들은 물론 그 문화적 욕구는 극히 미약한 실정이다. 다만 북 디자인 영역이나 의상디자인에서 더러 전통서예를 창의적으로 계승한 가능성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해마다 전통서예전이 성황리에 열리지만 ‘그들만의 잔치’이며, 해가 갈수록 서예 영역은 퇴행적 양상을 드러내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서예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서(篆書)체 글씨는 붓이 나오기 전 갑골문자에서 유래하는 글씨체다. 즉 갑골문이기 때문에 전서 특유의 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를 정형화하여 다시 붓으로 그 모양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전서의 형식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서’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글씨의 모양이 재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는 사실, 무엇보다 왕희지 이후 양식화된 틀을 상대화하여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전서에서도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추사체도 바로 이러한 예가 아닌가. 추사는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내기까지 열 개의 벼루 밑창을 뚫어지게 하고, 천 개의 붓을 닳게 할 정도로 많은 글씨를 썼음을 간찰에서 쓴 바 있다. 물론 예술가가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이 과정이 장인적인 수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추사의 만 년 작들 예컨대 <대팽 ․ 고회(大烹 ․ 高會)>주2)나 <판전(版殿)>을 보면, 기존의 어떠한 서체로도 논할 수 없는, 즉 모든 형식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지를 보여준다. 조금의 과장도 허세도 없이 어떠한 형식적 아름다움도 떨쳐버리고 그저 자신의 심경과 호흡을 한없이 맑고 곧은 선에 집약해서 보여줄 뿐이며, 바로 이 점이 그토록 추사글씨가 매력적인 이유다. 지난 2004년 추사 탁본전에서 보았던 은해사 소장 대형 현판 글씨인 <불광(佛光)>과 봉은사 현판인 <판전>, 그리고 <공산무인 수류화계(空山無人 水流花開,빈 산에 사람은 없으나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를 본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판전>은 탁본 상태가 좋아 최근 새로 금칠된 봉은사의 실재 현판보다 더욱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불광>에서 수직으로 내리 그은 세로획의 그 가없는 힘과, 그로 인해 현판 하단의 드넓은 여백과의 그 장중하고도 무한한 긴장감을 보며, 나는 추사의 맑고도 드높은 기개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글씨를 통해 좀 더 진전된 예술의 길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3. 새로운 글씨를 창안하기가 어렵지 글씨를 모방하는 것은 솜씨 좋은 우뇌형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다. 가령 세잔의 그림이나 반 고흐, 마티스 그림들을 우리나라 유수의 재능 있는 미대생들에게 그대로 그려보라고 한다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에게는 추사 글씨도 마찬가지다. 마음만 먹으면 추사체와 방불하게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지금은 한자를 상용하는 조선시대가 아니므로 그렇게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마르셀 뒤샹 이후 예술이란 그 가치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담론이 전개돼왔다. 뒤샹의 <샘>을 예로 들면 이것의 가치는 <샘>이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르셀 뒤샹의 의도와 정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주고받은 한 폭의 ‘난’화나 산수화도 그 가치를 공유하는 측면에서 보면 <샘>의 차원과 다르지 않다. 이는 추사의 예술세계도 마찬가지다. 즉 추사 서화의 예술적 가치도 종이 위에 발라진 먹의 자취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을 단서로 느끼고 생각하는 감성적 교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 활동은 분명 물질을 매개로 한 정신적 활동이다. 이는 이번에 전시된, 민태호에게 그림을 보여달라는 서신이나 권돈인에게 보낸 추사의 아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본은 감히 가장 앞선다 할 저수량의 임모본으로 일찍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일찍이 임리운이 제게 준 상고당본이 있었는데 탁본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십 수 년이 흐른 지금 풍파 속에서 찾을 길이 없었는데, 귀 서고에 이 탁본이 있으시다 하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절로 신명이 나고 흥이 나는 것이 마치 잊었던 사람이 다시 찾아온 듯합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곤궁한 길에 한이 서린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러한 환희도 다 잊었단 말입니까? 인연으로 보아 일상의 묵연(墨緣)이 아니니 이는 모두 돈독하게 돌봐주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저의 것이라도 되는 양 뿌듯합니다. 이것은 안목을 높일 수 있고 부질없는 시름을 삭일 수 있고 구습을 개정할 수 있고, 남은 생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여생도 1~2년, 많아도 3~4년을 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받아서 펼쳐보는 날 저녁 안에 바로 아이에게 잘 감싸서 보내도록 할 터이니 인자하고 후하신 각하께서 반드시 가엾게 여기고 자비롭게 여겨 한번 허허 웃고 보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평소의 돌봐주심을 믿고 이처럼 무턱대고 부탁드립니다. 이 또한 풍류(風流)의 죄과이니 그 당돌함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서신에서도 알 수 있듯, 추사는 이전 서화들의 성취를 감상하면서 깊이 교감한 이후,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자신만인 예술세계에 도달한다. 이는 전각의 현판이 아닌 것으로는 가장 큰 추사의 글씨인 ‘산해숭심(山海崇深)’의 원 구절도 “옛 것을 고찰하여 현재에 증명함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는 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추사가 새 예술세계에 도달한 것은 수천 백 년 간 지속되어온 서예의 특성을 깊이 탐구하는 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추사 이전의 서예가들은 대개 왕희지 이래 서법을 절대시 하며, 그것을 모본으로 삼아 글씨를 써왔다. 그러나 추사는 역대 중국의 명필들에 의해 구축되고 전승되어 온 일체의 서법과 그로 인한 우상적 가치를 부정하고 전한(前漢)의 예서(隸書)에서 다시 자신의 서법을 찾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 구절 중에 나오는 ‘풍류’의 참 뜻도 바람의 흐름이라는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형용한 말이 아니라 예술과 예술 간의 감성적 교감을 바람의 흐름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풍류도’나 조선의 문예 중흥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듯, 그들은 서로의 예술세계를 공유하는 차원을 풍류(風流)라 하여 예술로서 삶을 누렸던 것이다. 이처럼 예술 활동이란 제대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감상이 중요하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 활동인 것이다. 이처럼 감상이 곧 창작의 동기이자 벼리임을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자료는 물론 현존하는 추사의 다른 수많은 서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4.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일과 그것을 느끼고 읽는 것은 결코 다른 차원이 아니다. 공히 느끼고 생각하는 차원에서 출발해서, 저마다 자신의 감성과 인식의 틀을 확장하는 정신활동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 그러하듯, 현대예술은 그 특성과 가치를 공유하는 자들의 머리 속에서 성립한다. 이처럼 현대의 예술가들은 발상 및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의 차원에 도달하며, 이 점을 이해하면 추사의 서예를 보더라도 상호 교감이 가능하다. 추사의 말년 글씨들은 선가(禪家)의 용어를 빌리면 ‘백척간두 진일보’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경지다. 기존의 관습과 타성의 틀을 벗어던지면, 그 때 비로소 새로운 형식에 도달함을 특히 추사의 과천 시절 글씨를 통해 실감하게 된다. 먹색 선의 짙고 옅은 변주의 무한함과 명징함, 그리고 서릿발 같은 오연(傲然)함을 나는 추사의 최후 글씨들에서 발견하며, 그 때마다 그 정신을 나의 작업의 본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2007년 11월 9일 도 병 훈 주1)황정수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추사 글씨 전람회' 때였다. 당시 전람회 전시를 보고 난 후 도록을 구하려 했으나 견본 밖에 없어 꼭 도록을 구했으면 좋겠다고 데스크에 앉아 있는 분에게 얘기를 했더니, 나를 지켜보던 황 선생이 초면임에도 자신의 차를 세워 둔 주차장까지 가서 뒤 트렁크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전시 도록 한 권을 꺼내 주었다. 황 선생은 이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추사 관련 자료를 찾아다닌 장본인이었다. 추사 글씨 탁본전 도록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즐겨보고 아끼는 추사 관련 도록 중 하나다. 주2)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이다. 추사의 몰년인 그해 여름에 쓴 글이며 추사의 대련 중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원문 전문은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으로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과 손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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