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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1 (15: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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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번쩨          [. 데리다(Jacque Derrida)]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베일(Veil)

 

              [여인들은, 그럼으로 베일을 걸치기 위해 베일을 벗기는 것이다. 그들은 베일을 걸치는 수단으로 베일을 걷어 낸다].

 

 .데리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미술평론을 쓰 본 일이 없다. 회화나 사진에 관해서 데리다가 쓴 책은 제법 있어나, 이들은 대부분 저자의 철학적 관심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그림이 [작품]으로 다루어 진 일은 거이 없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된 것을 들어 보면, [회화에서 찾는 진리](1978), [시선의 권리 M. F. 브릿살의 사진 독해](1985), [基底材를 돌려 어지렵힌다 [알트의 뎃상과 초상]의 연구](1986), [盲者의 記憶 자화상 내지 여타의 廢墟](1990), 그리고 에레느.시쿠스스와의 공저 [베일](1998)이 있다.

 

더욱이, 邦譯(일본어 역)이 없는 後二者, [系譜Lignees]는 미카엘라.에니슈의 먹()으로 칠한 2백매의 뎃상의 한장 한장에 데리다가 十五行정도의 택스트([켑션](egendes))를 붙힌 것이나, 뎃상 그 자체를 논한 부분은 皆無에 가깝고, [베일Voiles]에 이르러서는, 엘런스트.비니용=엘런스트의 육매의 뎃상과의 관계가, [베일]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뻬면, 상호 어떠한 관계도 없다.

 

일례를 들어 보면, [系譜]의 다음의 斷章은, 데리다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다고 봐야지만, 에닛슈의 뎃상과는 무관계하다. ---- 부매랑, 그 기원으로 보던지, 또는 언어의 본질로 봐서 그렇다. 내가 무엇을 만하던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하지만, 나를 反해서 이해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닌가. -든 足炙이 나에게 되돌아 온다.

 

 ---- 만일 당신이 足炙trace des pas을 쫓는다면, 말하자면, 否認 [[족적]에는 부정의 의미가 있다]에 의해 四邊形의 圓周를 쫒는다면. barrage이 통과passage의 형태일것이다. 이는 각각, 一人의 사람의 자전인 것이다]. 이는 그림을 [설명하는 legender] 문장이 아니다. 데리다의 미술비평을 생각하는 마당에서는, 작품에 대해 철학자의 택스트가 취하는, 이러한 무관계의 관계 ----- 이를 [베일]의 관계라 해도 좋다 ----라고 하는 측면을 먼저 고려에 넣어 봐야 할 것이다.

 

 [회화에서의 진리]는 세잔의 에밀.베르날앞의 서간의 일절 [나는 회화의 진리에서 당신에 빚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점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에서 타이틀이 부쳐저 있다. 여기서 데리다는 세잔이 말한 [말함]이란 言語遂行的인 표현을 쓰면서도, [회화에 있어서의 진리] 그 자체를 우회적으로 말하는 데 착목한다. 여기서는 데리다 자신의 방법론이 현시되 있는바 데리다도 또한 [회화에 있어서의 진리]라 부쳐진 책에서 [회화에 있어서의 진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잔에 대해서도 혹은 이 책에서 이름이 올려진 화가들, 아담이나 디체우스=칼멜이나 고흐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회화]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라는, [緣 태두리 board]애 헤당하는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의 진리]에서는, 그 영역은 [바렐콘]이라 이름을 부쳐진다. 이는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쓴 용어로, 이에 대해 데리다는, [본질적인것도 부수적인것도 아니고, 고유나 비고유도 아닌 것, 말하자면, cadre] 이라 고 말하고 있다. [태두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것은 놓이는 장소란 것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보시다 싶이, 데리다에게는 [額緣]을 논하는 것이 회화를 논하는 것이다. 이 경계는 묻는것의 끝이 없는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脫構築이라 부른 이론의 요지를 가르키는 思考이다. [cadre란 것은 본질적으로 구축된 것이고 따라서 뿌셔지기 쉬운 것]이면서 동시에 혹종의 유-모어를 품고 있는 것이다.

 

바렐콘이란 따라서 데리다의 미술비평이란 --- 작품에 맴도는 망령과 같은 것으로, 작품의 주변을 맴돌며 기어코 그 위치를 빼앗아 버린다. 작품이란, 데리다에게는, 어떤 종류의 [非在]이며, 우리들은 이 無가 보여주는 칼자리 밖에 볼 수 없다. 작품이 사라지고, 태두리만 남는다. 그와 같이, 없음(sans)의 痕跡이 美의 근원인것이다.

구두를 그린 반 고흐의 유명한 그림을 논할 때 도, 데리드가 주목하는 것은, 고흐의 그림이라가 보담 그 그림에 그려진 구두, 아니, 구두의 태두리이며, 그기에 그는 바렐콘을 발견해 낸다. [바렐콘]은 여기서는 아마도 내부를 외부에 묶으 주는 구두 끈은 [그 안을 통과하여, 그 밖으로 나와서, 그리고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그 내부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로 향해 이를 재봉합하는 것]. 고흐의 구두의 그림을 논하는 데리다의 애쿠리첼 그 자체를 시사하는 이 운동은, 고흐의 그림의 해체/구축과 동시에, 데리다의 미술비평을 해체/구축해 가는 것이다.

 

이 순수한 [切斷의 (없음)의 흔적]에는, 뒤의 논고[기저재를 맹렬히 미치게 하는]것이 아니라 알토-가 뎃상에 대해서 쓴바[基底材]라고 하는 말에 관해 쓰여지고 있다. 그렇다, 기저재란 하나의 단어인것이다]. 고흐의 구두끈이 언어인것과 같이, 데리다가 다루는 여러가지의 바렐콘 알트의 [기저재], [순수한 절단의 (없음으로)], [베일], 그것을 [말하는]것에 의해서만 존재가 가능해 지는 亡靈的인 존재인것이다.

 

바렐콘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고 묻는 ([말하기])가 바렐콘을 존재케 한다. 그것은 말에 의해 가르키는 경계영역이며, 나타남과 사라짐의 사이 에서 항간 보여지는, 있음과 없음의 선과 같은 것이다. [盲者의 기억]에서는 이 도망치는 선이 뎃상화가의 선묘에 겹쳐 논해진다. 이것은 루-불미술관에 맡겨저 있는, 맹인을 그리는 선을 논한것인데, 데리다는 뎃상화가가 선을 끌 때는 눈을 감고 손으로 더덤는 식으로 선을 끄을 수 밖에 없는 순간을 문제시하고 있다. 이때 뎃상화가의 선은 무한히 후퇴해 가는 유다야.기독교적인 [否定神學] [보이지 않는 신]의 후퇴를 나타내는것에 이른다. [끄으진 선이란 보이지 않는다] 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그것은 점차로 가늘어저서 결국에는 사라지려고 한다]. 여기서는 저 프루스트의 [도망해 가는 알벨치느]의 베일이 나타났다 사라자곤 하는 것이다.

 

    略歷: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의 엘.비알에서, 유대계 프랑스인 가계의 삼남으로 태어나다. 43년 처음으로 알제리를 떠나, 파리의 루이..그랑 고등중학교에 입학. 52년 에콜.놀말에 입학. 64년부터 동교의 교단에 서다. 67년 에크리첼과 차이] [소리와 현상] [그라마.토로지에 관해] 삼저를 저술. 70년대를 통해 탈구축이론의 철학자로 간주된다. 84년부터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

 

     主著: [에크리첼과 차이] 1977년 상. 1983년 하. [근원의 저쪽 크라마토로지에 관해서] 1972. [회화에 있어서의 진리] 1997 . 1998 . [시선의 권리] 1988. [맹자의 기억 자화상 및 기타의 폐허] 1998. [알토/데리다[뎃상과 초상] 1992. [기저재를 맹렬히 미치게 하다] 1999. [정신에 관해 하이테카와의 물음] 1990. [시 포래도 파울 쯔엘란을 위하여] 1990. [他의 岬] 1993. [밧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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