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5225
2008.02.19 (19:5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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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참화 소감


1.
얼마 전 조선 초기 이래 600년을 의연히 버텨 온 숭례문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하루 밤 사이 불탔다. 특히 TV화면을 통해 건물이 전소되고 숭례문이라는 현판이 떨어지는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언론매체에서도 이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언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숭례문에 대해 애착이 있었는지 유, 무형적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반성과 자책을 했으며, 심지어 추모 열풍까지 생겼다. 숭례문은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오히려 존재 가치를 입증한 셈이다.
불타기 전의 숭례문은 명색만 국보 1호였을 뿐 사실상 고층 빌딩과 도로와 매연 속에 위치한 도시 속의 섬이었다. 숭례문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면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불탈 리도 없거니와 성벽을 허물고 길을 내고, 또한 그 옆에 빌딩을 함부로 지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반대는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는 말이 있나보다.


2.
숭례는 ‘예’를 숭상한다는 뜻이다. 조선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유가에서 사람이 늘 지켜야할 다섯가지 도리인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가운 데 넉 자를 흥인지문 주1), 돈의문 주2), 숭례문, 홍지문(弘智門) 주3) 등 사대문 이름에 쓰고 믿을 ‘신’자는 도성 중앙의 보신각에 담았다. 그러므로 숭례문이 불탄 것은 곧 예가 불탄 것이다. 예는 사양지심으로 자신을 낮춰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숭례문은 이런 정신이 담긴 상징물이다.

남대문은 민족의 상징인 만큼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수난을 겪었다. 숭례문 양쪽 성벽은 1899년(광무 3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일부 훼손된 뒤 1907년(융희 1년) 또다시 크게 헐렸다. 당시 방한했던 일본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때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성벽 허무는 것도 모자라 대대적인 환영 구조물까지 만들었다. 이로부터 숭례문은 양쪽에 날개처럼 성벽을 지녔던 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외로운 섬처럼 고립됐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무참히 붕괴되면서 서울성곽의 4대문 혹은 8대문 중 유독 남대문인 숭례문의 현판 숭례문 현판(편액·扁額)은 가로로 놓지 않고 세로로 세운 까닭이 화제가 됐다. 풍수지리설에 근거,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워 달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양은 풍수지리적 특성에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허약하며, 조산이 되는 관악산이 지나치게 높고 화기가 드세다고 한다. 특히 관악산은 그 뾰족한 봉우리 생김새가 화산의 기운을 지닌다. 이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대문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인 '崇'(숭)자와 오행에서 화(火)를 상징하는 예(禮)를 수직으로 포개어 놓아 관악산이 뿜어내는 화기를 막고자 했으며,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 다스린다"는 뜻을 구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이규경)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방대한 백과사전 중 경사편5 논사류1에서 조선의 궁궐 액자를 다루면서 숭례문에 대해서는 "세상에 전하기를 양녕대군 글씨라 하며,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그것을 떼어 버려 유실되었다가 난리가 평정된 뒤에 남문 밖 연못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을 내므로 그곳을 파서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는 정도의 언급만 남겼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 성곽 다른 대문이 모두 3글자임에도 동대문만 '흥인지문'이라고 해서 굳이 '之'라는 글자를 덧보태 4글자로 만든 까닭을 풍수학계에서는 한양의 좌청룡인 낙산의 허약함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나, 이 또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사를 전공하는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현판을 세운다 해서 무슨 화기를 막겠느냐.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유독 숭례문 현판을 세운 까닭은 조선왕조를 뒷받침한 유교의 절대경전인 논어에서 유래한다. 논어 태백편에서 공자가 남긴 말 중 하나로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다시 말해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악에서는 이룬다"는 말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인의예지신과 같은 유교의 가치이념을 음양오행설에 접목해 서울성곽 문 이름을 지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그들은 남쪽에 예를 배정해 이를 활용한 숭례문이란 이름을 지으면서 그 현판을 세우게 된 까닭이 바로 이 논어 구절 중 '立於禮'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통해 사람은 일어난다 했으므로 숭례문이란 현판 또한 세워서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한국의 고건축 유산은 조상들의 숨결은 물론 정신적 지혜가 숨어 있다. 이번 방화 사건과 관련 어떤 이들은 숭례문을 단지 조선시대의 잔재로 평가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어느 모로 보나 숭례문 역시 우리 건축 특유의 기상과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임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혹자는 서양 궁전의 화려함과 중국 자금성과 조선시대의 궁전을 비교하면서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없지 않는 데, 이는 문화사대주의적 시각이다. 숭례문만 하더라도 그 모양새에 있어 당당함과 오롯함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고건축은 대개 이 땅의 공간적 조건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지어진 경우가 많으며, 남대문도 원형대로 주변 성곽까지 복원된다면 이러한 우리 건축의 특성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3.
조선시대 이후 우리 역사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숭례문이 세워지고 나서 오늘날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사실 숭례문은 근대 이후에는 불구적인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숭례문이 국보 1호라고 해서 곧 전통문화유산 중 가장 값진 유물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징성은 매우 큼을 이번 참화를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혹자는 숭례문을 왕조시대의 전근대적 잔재로 그 가치를 평가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숭례문이라는 문화유산의 유형적 예술적 가치는 물론 그 역사성과 함께 정신적 가치를 동시에 생각해본다면 복원만 잘 된다면 ‘예’를 상징하는 유산으로서의 가치는 미래에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예’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 숭례문의 복원은 유형의 복원이 아닌 무형의 정신적 가치까지 복원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2008년 2월 19일

                                           도 병 훈



주1)흥인지문(동대문)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세웠다. 전체 모습과 규모는 숭례문과 비슷하되 웅장한 느낌은 덜하다. 문 밖에 반달모양의 옹성(甕城)을 둘렀으며, 옹성 위에는 방어에 유리하게 여장(女墻)을 쌓았다. 아래층의 모서리 4기둥이 그대로 위층의 바깥기둥이 되는 합리적인 구조이며, 장식이 많고 섬세한 다포계 공포(包)형식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이다.

주2)돈의문(敦義門)은 속칭 서대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지만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철거 전 사진을 통해 돌로 쌓은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虹霓門) 위로 단층 우진각지붕의 문루(門樓)와 주위에 낮은 담이 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돈의문은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 다른 문들과 함께 건축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해 숙정문(肅靖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되었다. 그 대신 약간 남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1422년(세종 4)에 다시 이 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을 새문안(지금의 신문로)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숙종 때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주3)일명 한북문(漢北門)이며, 숙종 때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수축할 때 세검정과 홍지동 사이의 오간대수문 옆의 문루이다. 또한 북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하는 설도 있는데,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원래 숙청문(肅淸門)이었던 것이 중종 연간부터 숙정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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