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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8 (22: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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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의 새로운 존재방식, 폴 세잔의 사과


                    

1.
  우리가 늘 대하는 어떤 사물이나 세계는 경험과 인식의 틀에 따라 다르다. 동일한 대상도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는 것이다. 문제는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으면 이 사실을 깨닫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의 그림은 사물과 세상을 보는 새롭게 법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예로 폴 세잔 Paul Cezanne(1839~ 1906)의 사과가 유명하다. 주1) 누군가는 인류의 3대 사과로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를 꼽았다. 이 세 개의 사과는 의식과 감성이 심화 확장되어 온 문화적 진화 과정을 집약한 말이다. 주2)
  사물에 대한 재현적 묘사력은 15세기 얀 반 에이크 이래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른바 ‘오감 정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손으로 만지는 듯한 질감을 묘사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잔의 사과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의 사과는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사람이 잘 그리려고 애쓰다가 어설프게 미완성으로 끝난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일까, 세잔 생전 그의 그림이 출품되었을 때 처음에는 물감만 떡칠된 그림이라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잔사후 그의 그림은 전인미답의 새로운 회화 원리를 추구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그가 도달하고자 한 새로운 회화는 과연 어떤 세계일까?  


2.
  아래 그림(*도판 생략)은 세잔이 그린《사과와 병》이다. 이 그림은 그저 평범한 정물화처럼 보이지만 주의 깊게 보면 이채로운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음영이나 명암이 아닌 색채의 차이로 화면을 구성하거나 대상을 그렸음을 발견할 수 있다. 테이블도 천을 경계로 하여 좌우 높이가 다르다. 이러한 사실이 세잔의 그림을 이해하는 단서다.

  먼저, 이 그림의 두드러진 색채효과는 인상파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 세계의 순간을 포착하는 그림을 그렸다. 망막에 닿은 시각적 인상을 그린 인상파 화가들에게 자연의 현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변하는 것이었으므로 세계의 실제 모습이란 동일한 형태로 지속될 수 없다.  
  이러한 세계 인식은 고대 그리스 이래 고전적 미의식과는 상반된 미의식이다. 고전주의 미술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은 진정한 현실이 될 수 없었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감각적 현상을 초월하는 ‘이상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 비례를 가진 형상을 잘 그리는 것이 근대 신고전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주된 목적이었으며, 투시원근법과 명암법의 발견도 사물을 재현하기 위한 기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을 그리기 위하여 종래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기조로 한 회화적 기법을 버리고 시시각각 현하는 세상의 모습- 빛이 빚어낸 색채의 차이일 수밖에 없는-사물과 세계를 온통 빛의 색채로 표현하는 방법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회화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은 모두 유동적인 것만은 아니며, 견고하고 육중한 바위 덩어리는 물론 사과 하나라도 만져 보면 단단한 실체적 존재감이 느껴진다. 세잔은 바로 이러한 존재감을 다각적 관점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전적 방법으로 표현하면 색채가 죽어버리고 인상주의 방식으로 하면 사물의 구조적 견고함이 해체되어 버린다. 그래서 세잔은 색채로 형태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다시 말해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몇 가지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모든 것이 빛의 물결로 환원되어 버리는 인상파 그림의 특색에서 벗어나, 대상에 대해 주위의 세계와 구별하는 기본적인 형태를 다양한 관점을 공존시킴으로써 종합하고자 했다. 그 결과 《사과와 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색채와 형태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세잔의 그림이 일견 서툴러 보이는 것은, 아니 ‘잘 그린 그림’이기를 거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세잔에게는 사과처럼 단단하고 둥근 물체가 인상파 그림에 나타난 세계의 존재론적 상대성을 극복하고 물체의 입체감과 색채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그래서 ‘세잔의 사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세잔은 주로 사과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세계는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독특한 자신의 어법(idiom)을 드러내며, 이는 《생트 빅투아르산》연작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주3)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산을 60여 회나 그렸다. 이 그림(도판 생략)은 세잔의 만년 작품이다. 우선 납작납작한 붓 터치로써 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터치 하나하나는 색으로 된 평면인데, 평면으로 또한 입체감을 표현했다. 부분적으로 보면 무수한 평면에 지나지 않은데 전체적으로 보면 입체이기도 한, 그래서 마치 화면이 이 양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듯하다.
  세잔이 그린 들판과 산은 그가 그린 정물화도 그러하듯 투시법적 일관성이 없다. 이처럼 세잔의 그림은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은 공간이며, 데카르트적 명료함과 분명함을 배제하고 색채의 차이로써 사물과 세계를 표현한다. 그래서 세잔의 회화는 기하학적 공간에서의 단일한 균형이 아니라 무수한 순간을 고정시킨 다양한 관점들을 종합함으로써 평면과 입체 양자 사이의 긴장된 모순 속에 진동하는 화면이다.
  세잔이 이런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이유는 당대 인상파의 영향으로 전통적 재현 회화의 방식인 명암법과 원근법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리면 대상이 갖고 있는 풍부한 색채감을 표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세잔은 실제 대상이 갖고 있는 입체적인 구조(원뿔과 원기둥)도 포기할 수 없었다. 대상은 분명 어떤 덩어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터치는 대상의 실재감과 직결되는 만큼, 세잔은 하나의 터치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톤 하나 이상해도 그림의 전체 질서가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잔은 “색채와 데생은 결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색깔을 칠해감에 따라 데생은 견고해지고, 데생이 충실해짐에 따라 색채도 풍부해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세잔의 그림은 찬찬히 들여다보면 놀라울 정도의 진지함으로 그렴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세잔의 그림이 평범한 주제인데도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 같은 비밀이 그림 속에 있어서다. 세잔은 하나의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서도 오랜 작업 시간을 들였고,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게 할 정도로 매우 까다로왔다. 그에게는 순간적인 대상의 생생한 실재는 물론 구조적 탐구가 다같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는 회화란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모험이었다. 세잔 이전까지는 형태를 묘사하는 데생과 색채는 각기 별개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잔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 파리에서 열린 회고전은 그의 그림세계를 제대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전시를 본 피카소나 브라크의 큐비즘cubism, 즉 ‘입체주의’ 그림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또한 야수주의이후 색상의 자율성을 추구한 현대회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그의 자화상이나 <수욕도>연작을 중심으로 세잔의 그림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는 많은 담론이 있다. 그만큼 세잔의 그림은 현대회화의 중요한 화두인 것이다.


3.
  세잔은 이전과 다른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 `세잔의 사과`에는 바로 이러한 비밀이 들어 있다.  세잔의 일생은 한 알의 사과에 대해서도 무수한 관점을 종합함으로써 인상파의 표면적 순간적 현실을 넘어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애쓴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세잔은 인간의 지각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시시각각 단편적으로 들어오는 시각적 단편들을 복수의 시점으로 재구성하여 화면을 구조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천을 경계로 테이블의 높낮이가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세잔은 붓 터치마다 다른 색채의 차이로 다양한 관점과 형태를 구축하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세잔이 현대회화의 아버지로까지 자리매김되는 이유도 결국 그가 구축하고자 한  그림이  회화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25일
                                                     도 병 훈



주1)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로렌스는 세잔에 이르러 전통적 진부함에서 벗어난 스스로 존재하는 사과를 그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2)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파리스로부터 황금사과를 받는다. 이 사과는 여신 비너스의 신물神物이자 결혼 의식의 제의적인 징표다. 또한 성서의 사과는 선악과로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헤브라이즘적 전통의 원류를 상징하는 사과다.  
사과가 그림의 모티브로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들어 플랑드르 지역에서부터다. 이 지역은 15세기 유화의 창시자인 얀 반 에이크가 나온 이래 회화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남쪽 이탈리아 지역의 르네상스 미술과 함께 18~19세기 유럽 미술을 주도한 프랑스 미술의 2대 원류가 된다. 곧 이러한 신화적(상징적) 사과가 쿠르베에 이르러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일상적 사과로 변하지만 기법 면에서는 전대의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3)세잔이 《생트 빅투아르산》과 함께 만년에 많이 그린 그림으로는 《수욕도》 시리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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