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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no image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대한 단상
도병훈
5753 2009-02-19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대한 단상 "만득이가 삶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졌어요. 그걸 알기 위해 생각을 하다가 정처 없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하는 겁니다."(2003년 서울대 초청강연)" (*옛날에는 완행열차를 타면 실제로 '삶은 계란'을 외치며 먹을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즐겨 이야기한 유머라고 한다. 이분이 돌아가신 후 연일 매스컴에 크게 보도 되고 추모 인파도 수 십 만이 몰리는 것은, 무엇보다 이 분이 엄혹한 시절에도 불의에 굴하지 않았고, 평생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렇지만 일시적 열풍은 현재의 암울한 시대 분위기와 워낙 이 분이 갖고 있는 종교적 사회적 지위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김수환 추기경의 진면목도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파장 속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기실 김 추기경의 삶의 배경에는 이 분이 추기경이 되기 직전 1962년 10월, 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이루어진 공의회(*세계의 모든 주교들이 모인 가운데 교리와 규율과 전례 등을 검토하는 최고의 의사결정체로 수 천 년 가톨릭 역사 속에서 1960년 이전까지 스무 번 개최됨)에서 제시한 ‘아조르나멘토’도 있었다. 아조르나멘토는 가톨릭 역사상 매우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까지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겼던 교리 해석과 표현, 전례, 규율, 사목 등에 대한 반성은 물론 쇄신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무소유’의 저자 법정이 주관한 불교 사찰 개원식에도 참석할 정도로 타종교에 대한 관용정신을 보여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바로 이러한 아조르나멘토의 정신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필자가 이 분에게서 발견하는 매력은 종교적 제도 안에서의 지위를 넘어선 소탈한 성품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 면모다. 김수환 추기경은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근처인 경북 군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분이라 진작부터 고향의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느껴왔다. 이 분의 회고에 따르면 대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선산에서 군위로 가기 위해 붉은 노을 지는 석양 무렵 고개를 넘었다고 하는데, 필자도 그 산과 고개 마루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대구로 나와 신학교에 들어간다. 이후 신부가 되는 과정에서는 이 분의 회고에 따르면 뜻밖에도 어떻게든 신부가 되지 않으려 한 인간적 면모가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성직자가 되고 난 뒤에는 참된 성직자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평생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 분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정말 깊은 감동을 느낀 것은 다른 글에도 잠깐 썼지만 소박한 자화상과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 "바보 같이 안보여요? 저 모습대로는 아니지만 바보 가까워…. 제가 잘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는 것이 바보지. 그런 식으로 보면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2007년 동성고 100주년 전시회에 '바보야'라고 쓴 자화상을 내놓은 뒤) 다음 글도 이 분의 인간적 면모를 알게 한다. "누가 나한테 미사예물을 바칠 때 자연히 내 마음이 어디로 더 가냐하면 두툼한 쪽으로 가요. '아니'라고 하는 게 자신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안 그래요. (웃음) 어떤 때는 무의식 중에 이렇게 만져보기도 해요."(2005년 부제들과의 만남에서) 18일 공개된 서재 책상 위엔 이 분이 쓰던 육필 원고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나는 누구인가? 80을 넘긴 내가 새삼스럽게 이런 물음을 던져 본다....” 김추기경은 지난 해 7월 병원 입원을 위해 주교관을 떠나던 순간까지도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한다. 이 분의 이런 면모는 서산대사가 마치 입적하기 직전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고 적은 시를 떠올리게 한다.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종교라는 것은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어느 문명권에서나 삶의 기틀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그 도그마가 큰 폐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국의 가톨릭도 교세의 확장이라는 외연적 성장과 비례하듯, 특히 1990년대 이후 보수화되는 추세이다. 그래서일까? 삶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 김추기경의 구도자적 삶은 종교의 본질과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 반문하게 한다. 이런 차원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선종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돌아볼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009년 2월 19일 도 병 훈
90 no image 우화 한 토막
도병훈
5155 2009-02-01
우화 한 토막 꾀꼬리와 비둘기 그리고 무수리는 서로들 제 목소리가 좋다고 승부를 다퉜다. 승부가 나지 않자 상의한 끝에 어른을 찾아가 심사를 받기로 합의했다. 모두들 “황새라면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꾀꼬리는 제 목소리가 신비하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터라 그늘 짙은 곳에서 쉬면서 웃기나 했고, 비둘기도 승부에 크게 괘념치 않고서 느릿느릿 걸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나 불렀다. 반면에 무수리는 제가 생각해도 저들보다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뱀 한 마리를 부리에 물고서 다른 새들 몰래 먼저 황새를 찾아갔다. 뱀을 먹으라고 건네면서 개인사정을 말하고 청탁을 넣었다. 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황새는 한 입에 뱀을 꿀꺽 삼키고서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 “그저 그것들과 함께 오기나 해!” 셋이 함께 황새한테 갔다. 먼저 꾀꼬리가 목소리를 굴려 꾀꼴꾀꼴 노래를 불렀다. 황새가 주둥아리를 목으로 집어넣으면서 살짝 음미해보더니 말했다. “맑기는 맑은데 소리가 구슬픈 데 가깝다!” 그 뒤를 이어서 비둘기가 구구구 소리를 냈다. 황새가 모가지를 땅바닥으로 내리면서 슬며시 웃고 말했다. “그윽하기는 그윽한데 소리가 음탕함에 가깝다!” 맨 마지막으로 무수리가 모가지를 쭉 빼고서 꽥 소리를 질렀다. 황새가 꽁무니를 쳐들고 빠르게 외쳤다. “탁하기는 탁하지만 소리가 웅장함에 가깝다!” 고과(考課)하는 법에는 뒷부분의 평가가 우수한 사람이 이긴다. 그리하여 무수리는 제가 이겼다고 생각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 사방을 휘둘러보면서 부리를 떨며 쉼 없이 소리를 질렀다. 황새도 뒤꿈치를 높이 쳐들고 먼 곳을 바라보며 우쭐댔다. 꾀꼬리와 비둘기는 부끄럽기도 하고 기가 꺾이기도 하여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마치 이솝의 우화 같은 위 이야기는 조선 후기 18세기 영 정조 시대에 살았던 서얼출신 문인으로서 주로 규장각에서 활동했던 인물인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청성잡기』중 「성언(醒言)」에 실려 있는 우언(寓言)이다. 꾀꼬리와 비둘기 그리고 무수리(*황새과의 물새), 이렇게 세 종류의 새가 목소리를 경쟁하여 무수리가 부정한 방법으로 이겼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메시지는 분명하다. 뇌물 앞에서 새들의 목소리의 우열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무수리가 황새에게 뱀을 물어다 준 결과 꾀꼬리의 구슬이 구르는 듯한 높고 고운 목소리는 구슬픈 소리로 전락하고, 비둘기의 낮은 소리는 음탕한 소리로 전락하는 반면, 무수리의 탁한 외마디 소리는 가장 멋진 소리로 탈바꿈한다. 이 우화는 당대의 사회를 반영한 이야기다. 18세기 조선시대의 문란했던 과거제도와 관리의 고과제도가 이러한 우언의 직접적 배경이다. 이는 이 글 뒤에 “인물을 판단하는 감식안이 없는 시험관이 이 글을 읽었다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있으랴?”라는 평이 달려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평자도 동시대 문제를 잘 풍자한 우언으로 읽은 셈이다. 우리 시대에도 각계에 이러한 무수리와 황새가 많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러나 기가 꺾이지 않은 꾀꼬리와 비둘기가 있는 한,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성대중이 『청성잡기』 다른 부분에서 말했듯, 작은 일에서 그 근원이 드러나고, 큰일에서 그 흐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2009년 2월 1일 도 병 훈
89 no image 퐁피두센터의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을 보고
도병훈
6503 2009-01-16
퐁피두센터의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을 보고 지난 1월 11일,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화가들의 천국’이란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을 보았다. 이번 특별전은 퐁피두센터 측에서 기획한 전시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회가 개최되는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미술문화, 그 중에서도 제도영역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나라를 대표하는 수도의 미술관이 개관이래 지난 수 년 동안 자체 기획력의 무능함을 입증하듯, 주로 유명 작가들이나 해외 유명 미술관 소장 작품 위주의 대형 전시회를 위해 장소를 빌려주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오히려 반문화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관행을 되풀이해왔기 때문이다. 전시 기획력이 관람자와 나아가 미술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때 이러한 제도 영역의 부실함은 우리 미술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반면에 이번 전시는 문화정치학적 역량을 축적해온 국제적 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답게 최근에 본 전시회 중에서 주제는 물론 단위 작품의 선정과 배열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오류투성이의 국내의 대형 전시회에 비하면 질적인 측면에서 장소적 조건이 열악해 보일 정도로 짜임새 있고 정성을 들인 전시회였다. 그러나 전시된 작품들을 보는 내내 미리 규정된 시각을 강요당하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 이는 무엇보다 소주제에 따라 구획된 작품 선정 및 배열로 인해 작가의 개성이나 개별 작품 고유의 어법(idiom)에 집중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커미셔너는 퐁피두센터 미술관의 부관장이자 수석 학예연구관인 디디에 오탱제(Didier Ottinger)로서 그는 ‘아르카디아(Arcadia)’란 서구의 신화적 이상향을 뜻하는 말을 화두로 삼아 이 전시를 기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프롤로그(Prologue), 쾌락(volupté), 허무(vanités), 풍요(abondance), 조화(harmonie), 낙원(l'arcadie), 암흑(nuits), 황금시대(l'agd'or), 전령사(messagers), 풀밭위의 점심식사(Déjeuners sur l'herbe) 란 소주제로 나누어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 10개의 소주제는 아르카디아가 풍요와 쾌락의 낙원이지만 암흑과 허무도 존재하는 등 다양성을 지닌 세계임을 암시한다. 아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에 실재하는 땅이지만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황금시대’의 신화를 통해 이상향으로 노래하면서 서구인들에게 이상향처럼 여겨진 곳이다. 디디에 오탱제는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취지를 밝힌 쓴 ‘시간의 분할선 아르카디아’란 글에서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작가인 니콜라스 푸생 Nicolas Poussin (1594~1665)이 그린 두 점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를 베르길리우스의 신화를 당대 프랑스 예술 속에 현실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주1) 이런 관점에서 기획자는 20세기 초의 야수파에서부터 1960년대의 아르테 포베라에 이르기까지도 아르카디아적 세계가 순환적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이는 현대미술도 신화적 전통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획자는 ‘현대미술은 가능한 모든 서술성을 모티브에서 제거한 후, 남은 것을 형태로 유지한다’는 미술사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그 근거의 하나로 에두아르 마네가 ‘낙선전’에서 선보인<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도 보들레르의 견해 중 마네가 마르크-앙투안 레이몽디의 판화작품인 <패리스의 심판>중 일부분을 차용하여 그 구성을 적용했다는 사실에서 이는 고전의 ‘영원한 불멸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확인시킴으로써 ,아르카디아의 현대적 변용인 도시적 쾌락주의나 목가적 열정의 표현으로 해석한 것을 인용한다. 즉 이번 전시의 기획자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는 황금시대의 꿈, 즉 천상의 과일을 음미하던 시대의 꿈이자 아르카디아의 꿈으로 인도하는 작품으로 본다. 그러므로 후대의 현대미술도 마네 그림의 이러한 주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색조와 조형 형태의 유희, 순수회화의 도래 등과 같은’ 부수적(?) 영역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기술한다. 이런 관점에서 미래주의 화가들의 경우 ‘주제’ 만큼이나 ‘현대에 등장한 기계성’에 대해 강조했으며 그래서 전통적인 장르에서 벗어나 에너지와 스피드로 가득 찬 기계적 주제의 표현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관람자는 아르카디아로 들어가기 위해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와 목자들(Les Bergers d'Arcadia)>의 영상이 투사되는 발을 통과해야 한다. 전시장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 그림은 후경에서 보이는 서정과 평화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네 사람의 목자들이 묘비 앞에서 비문을 보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비문에는 "나 아르카디아에도 있노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무덤 속으로 잠식되는 생명의 종말 뒤에도 또 다른 이상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발 뒤엔 이상향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발을 통과하면 예기치 못한 낯선 광경인 프랑수아-자비에 라란(François-Xavier Lalane)의 설치 조각 작업인 24마리의 양떼를 보게 된다. 양들은 비옥한 푸른 풀밭 위에 있지만 일부 머리 없는 양들의 존재는 보는 사람들을 당혹감과 함께 유머러스 하다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이곳은 전시장에서 첫 번째로 만난 아르카디아로서 축복과 풍요의 땅으로 배치한 작업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번 전시회의 주요 작품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꿈인 것 같지만 어쩌면 언젠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만드는 동경을 아르카디아로 규정한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주로 ‘풍요’나 ‘낙원’, ‘쾌락’이란 소주제 아래 배치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나르(Pierre Bonnard), 마티스(Henri Matisse), 브라크(Georges Braque), 뒤피(Raoul Dufy), 피카소(Pablo Picasso), 레제(Fernand Leger), 피카비아(Francis Picabia) 등의 작품을 통해 그들이 꿈꾸었던 아르카디아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들 미술가들은 에로틱한 관능과 쾌락, 따스한 햇빛이 반짝거리는 자연, 시간에 따른 죽음과 허무, 여유로운 노동자들의 피크닉, 새로운 예술의 조형성 등을 탐구하면서 아르카디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20세기 초 야수주의자들에게 특히 마티스의 경우 아르카디아의 풍요, 쾌락, 기쁨, 행복은 지중해 연안의 작열하는 햇빛과 결부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삶의 행복>을 그리며 회화의 낙원을 탐색했다는 것이다. ‘풍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선택된 것은 마티스의 <붉은 색 실내>, <초록색 찬장이 있는 정물>로 이 작품들은 마티스가 젊은 시절 지중해 연안에서 그린 것들이다. 기획자는 마티스 그림의 화면 전체에 넘쳐흐르는 눈부신 붉은 색채도 건강, 풍요, 쾌락, 행복이 가득 찬 낙원을 가리킨다고 본다. ‘낙원’이란 소주제하에 배치된 그림들 그 중에서는 보나르나 뒤피의 <탈곡> 같은 그림이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특히 <미모사가 피어있는 아틀리에>라는 보나르의 작품은 온통 노란색이 지배적인 화면 구성으로 삶의 풍요, 안락, 따스함이 넘치는 낙원인 듯하지만 푸생의 목자들이 두개골을 그리며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듯 이 그림에는 죽음, 그리움의 이미지도 존재하며 이는 왼쪽 하단에 죽은 부인의 모습을 그려진 것에서 알 수 있다. 첫 전시장 맞은편에 있는 제 2전시장에 들어서면 지우제페 페노네(Giuseppe Penone)의 설치 작품 <되찾은 낙원>이 온통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은은한 낙엽 냄새와 함께 짙은 갈색으로 변한 월계수 잎은 낙원에도 늙음의 시간과 마침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벽에 걸린 작은 폐 모양의 조형물들도 나뭇잎과 동화되는 듯 같은 퇴색된 나뭇잎과 같은 색조로 만들어져 퇴색된 무수한 잎들도 언젠가는 부스러기, 한 줌의 먼지가 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허무’란 소주제 하에서는 주로 어둡고 침울한 색조의 상징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러지는 동안 화가들은 인간이 저지르는 참혹한 비극을 체험했으며, 서구인들이 꿈꾸던 아르카디아는 절망의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절망은 죽음으로 죽음은 허무를 낳으며, 이러한 허무는 때때로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로 도록에는 브라크가 그린 <바니타스>란 작품이 언급되어 있다. 알다시피 브라크는 20세기 초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주의를 화풍을 추구한 화가이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두개골과 묵주, 십자가가 있는 정물을 그렸는데, 이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교훈적 소재로 즐겨 그렸던 그림과 다름없으며 실제로 브라크는 자신의 작품 제목을 <바니타스>(1938~1943)로 명명했다. 바니타스는 지상의 쾌락에 대한 덧없음과 헛되고 헛된 삶의 허무를 의미한다. 이 바니타스 회화에 반드시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두 개록이며, 이는 서구에서 삶의 덧없음과 종말에 대한 명상을 나타낸 전통적 소재였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통해 중년이후 브라크가 조용히 생을 관조하며 죽음을 사색하고 종교를 통한 평화를 꿈꿨음을 알게 된다. 이번 전시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를 마지막 테마로 소개한다. 기획자는 누드의 여인과 두 남자가 화창한 자연 속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원본으로 삼은 몇 개의 작품을 전시장에서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으로 먼저 알랭 작케(Alain Jacquet)는 그림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1963~64)를 여러 명이 등장하는 사진을 이용하여 가까이서 보면 이미지보다 굵은 망점 밖에 보이지 않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미술사의 아이콘이 된 그림들을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풍자적으로 대체한 방식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블라디미르 두보사르스키와 알렉산더 비노그라프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매우 큰 작품으로 마네의 그림을 원본으로 삼아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그림 속 인물로 배치한 그림이어서 해학성이 돋보인다. ‘조화’란 테마아래 전시된 그림 중 페르낭 레제의 <여가-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1948~1949)를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정부에서 결정한 ‘유급휴가’를 받고 가족단위로 자전거로 전원으로 휴가를 떠나는 여가의 장면을 화려한 색채와 명확한 형태로 보여준다. 이 작품 속 그림의 하단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자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속 마라의 팔동작과 유사한 포즈를 취한 채 손에 <루이 다비드에 대한 경의(Hommage à Louis David)>라고 씌어 있는 종이쪽지를 들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유급 휴가가 민주적 투쟁을 통해 쟁취된 역사적 결과임을 암시한다. 아르카디아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회는 다시 소주제별로 작품을 분류함으로써 세심한 기획력을 보여주며, 기획자가 기술하듯 테마 면에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 문화 특유의 초월성과 지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급진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 현대미술의 대세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테마 전시의 한계는 자명하다. 무엇보다 미술관 자체에서 전시주제를 주체적으로 결정한 전시가 아니므로 이번 전시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감상자는 항상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좀 더 주체적인 시각에서 전시를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번 특별전에 선정된 80여점 중 소주제의 틀 속에 편입됨으로 인해 오히려 그 가치가 묻혀버린 작품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마티스의 <붉은색 실내>와 <잠자는 요정을 유혹하는 목신>이란 목탄 데생 그림이 그 한 예다. <붉은색 실내>는 마티스가 그린 실내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일 뿐 만 아니라 그의 작품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만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마치 진부한 시집 속에서 빛나는 싯귀 한 구절처럼 주변 작품들의 존재감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군계일학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록을 펼쳐보니 이번에 전시된 마티스의 목탄 데생 작품은 마티스의 작업실에 항상 걸어 놓은 두 점의 목탄화 중 한 점이었다. 주2) 그렇다면 이러한 작품의 가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당대로서는 기존의 인식의 틀에서 훨씬 벗어난 지점에서 성립한 것들로 그만큼 통념을 벗어난 예술작품이다. 그러한 대담성과 참신성이 미술의 표현 영역을 확장해왔다는 것이며, 이런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통념을 벗어난 예술세계의 진가를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를 보고 난후의 뜻밖의 소득은 <몽유도원도>와 겸재가 그린 ‘진경산수화’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소재로 하여 동양의 아르카디아라 할 수 있는 무릉도원을 그린 그림인데, 언젠가 겸재 정선이 그린 장소를 답사하다가 어느 계곡에서 <몽유도원도> 속에 나오는 폭포와 너무도 흡사한 폭포를 보고 이상한 느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이처럼 ‘상상화'인 <몽유도원도> 속에 실경이 존재하는 듯한 낯선 체험을 하면서 혹시 안견의 고향이 이쪽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근거 자료가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이 이번 전시를 보고나서 아르카디아에 대해 생각하면서 풀렸다. 그것은 더욱 행복하고자 하는 꿈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와 그에 대한 동경은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현상이며, 또한 ‘상상’과 ‘실제’의 구분도 상상해서 그렸는가, 또는 실제로 보고 그렸는가의 사실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미술현장’과 ‘제도’, 그리고 ‘관람자(또는 애호가)’를 미술문화의 세 가지 기본 영역으로 본다면 이 중 제도 영역, 그 중에서도 기획자는 미술현장과 관람자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기획자들은 이러한 매개자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표면적으로는 대중들에게 좀 더 작품에 대해 가까이 다가서게 하려는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이 기획자의 주된 역할이지만 단지 문화적 가치 생산이 주된 목적이 아니며, 국경을 건너는 전시회의 경우 문화정치학적 논리의 일환인 경우가 많다.(가령 이번 전시회의 경우 ‘도록’ 앞부분에 왜 프랑스 대사의 ‘축사’까지 실리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자국의 역사적 산물인 예술적 가치를 브랜드화하고 그 가치를 새로운 기획력을 통해 재생산하는 측면은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다. 그렇지만 개별 작품을 어떻게 체험하는가는 감상자의 주체적 역량에 달린 문제이다. 기획자가 제시하려는 주제의 근거로 ‘선택’된 작품이 곧 전시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해서 작품마다의 고유한 표현의 어법까지 이러한 주제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오히려 기획자의 인식적 틀에 따라 개별 작품의 진면목이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전시기획자에 의해 설정된 테마를 전시를 보는 객관적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구획된 틀을 벗어난 새로운 관점과 시각에서 전시회를 보려는 태도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09년 1월 16일 도 병 훈 주1) 푸생은 프랑스의 고전주의적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화가이다. 그는 거의 모든 생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지내면서 로마 고대조각의 포즈와 라파엘의 회화세계를 연구했다. 또한 그는 고대문학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과 스토아파 철학에 의해서 다져진 정신을 회화라는 장르에 도입시킨 화가였다. 푸생은 '회화는 정신적인 것이다'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실천하듯, 이에 합당한 주제의 선택, 인물의 포즈와 구도, 그것들의 질서정연한 구축이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성에 의해 반드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회화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형태와 색채, 사고와 감정, 진실과 아름다움, 이상과 현실이 모두 조화되고 균형 잡혀 있는 예술세계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대개 명쾌한 구성과 수학적 비례가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화가가 훌륭한 양식(maniere magnifique)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가령 영웅적 행위 같은 위대한 것이어야 하며, 세부적인 것을 버리고 모든 비속한 걸 제외시키며, 정곡을 찌를 개념, 자연스러운 구도, 그리고 순수하게 개인적(個入的)인 양식(style), 기법(manner), 기호(taste)로 재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회화의 최상의 목표란 ,고결하고도 진지한 인간의 행위를 재현하는데 있다. 미술가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것을 추구해야한다. 즉 미술가는 감각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호소해야하기 때문에 반짝이는 색깔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억제하고 형태와 구성에 역점을 두어야한다" 이러한 푸생의 그림관은 이후 고전적 그림의 룰이 되었으며, 개성을 억압하는 형식적 강령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푸생 그림의 가치는 ‘현대화화의 아버지’로 꼽히는 세잔에 의해 재발견된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색과 빛이 있는 야외에서 살아있는 푸생을 그린다." 이처럼 세잔은 푸생처럼 인간과 자연을 장엄한 질서로써 통일시키고자 했다. 세잔이 평생 과제로 삼은 것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의 대가인 푸생이 달성한 놀라운 균형과 완벽성,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되찾아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잔과 푸생의 회화는 결국 다른 길을 걷는다. 푸생은 "확고한 진리는 이해될 수 있으며, 회화는 그 나름의 법칙과 방법을 갖고 있는 예술이다." 라고 한 반면에 세잔은 "진리는 포착될 수 없으며 탐색은 끝이 없어 근본적으로 고독한 인간은 겸손하게 인간 조건의 신비를 가늠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세잔의 이런 생각은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며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회화에는 두 가지 것이 필요하다. 즉 눈과 두뇌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도와야 한다. 이 둘의 상호적인 발전을 위해 화가는 노력하여야 한다. 눈은 자연에 대한 비전에 따르고 두뇌는 표현 수단의 기초가 되는 조직된 감각의 이론에 따라야 한다. 양자가 각기 발전한 후 상호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모네는 눈에 불과하다. 그러나 굉장한 눈이다. " 세잔은 그의 그림을 통해 눈과 두뇌, 시각과 이성, 감각과 사유의 조화를 지향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회화 그 자체를 정립하고자 형식, 절도, 비례, 긴장, 균형, 리듬을 과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주2) 수년 전 시립미술관에서 마티스 관련 전시(*지난 2005년말부터 2006년 사이에 개최된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이란 전시회임)를 하면서 정작 마티스의 작품은 그 숫자도 적고 평범한 작품만 전시되었던 전시회에 비하면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마티스 그림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그 때의 수준을 훨씬 능가한 작품들이었다.
88 no image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 대한 소고(수정)
도병훈
6830 2009-01-10
*이 글을 읽기 전에 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조선시대 유학자의 삶에 대해 쓴 것인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이 글을 쓴 의도는 ‘가치의 입법자’에 대한 고찰이다. 물론 전통적인 형이상학, 종교, 이데올로기들이 오늘날 과학적 지식들에 비해 ‘진리가(眞理價)’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은 필자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정신적 유산들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동양의 전통 가운데 중요한 점은 학문의 목적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가치론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계보학적 역사해석에 따르면 어떤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단일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결국 어떤 역사적 자산이든 현재적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며 이는 오로지 ‘삶’이라는 화두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가치의 입법자가 필요한 것이다. .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 대한 소고 여는 말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는 유서 깊은 도동서원이 있으며, 그 앞으로 유장한 낙동강이 오늘도 유유히 굽이쳐 흐른다. 주1) 이 도동서원은 건축 전문가들이나 전통문화유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서원중에서 안동의 낙동강 가에 위치한 병산서원과 함께 건축적 공간미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서원이지만 원래는 당대의 세속적, 권력지상주의적 가치에 맞선 한 인물을 기린 공간이다. 이 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자로서 심성의 수양에 철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리를 실천하고자 한 학문인 도학(道學), 또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정립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유교)인 성리학, 그 중에서도 도학의 선구자가 바로 김굉필이며, 권력을 상징하는 훈구파에 맞선 사림파의 거목이었다. 주2) 또한 김굉필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교육자였을 뿐 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시대 최고의 가치 입법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세기 사림 정치의 주역이 된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정붕, 이장곤, 이연경, 이적 등은 그의 실천적 유학을 계승했으며, 이 뿐 만 아니라 영남의 좌도를 대표한 퇴계 이황과 우도의 남명 조식은 물론 기호학파에 이르기까지 그의 도학사상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동방 5현의 첫머리에 김굉필을 높이 받든 것도 조선조 유학사상에서 도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그의 위상을 알게 한다. 그의 사상은 <한빙계>라는 짧은 글에 집약되어 있으며, 이 <한빙계>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 이율곡 등 후대의 거의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계심(戒心)이 되었다. 이처럼 김굉필이 조선의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유는 무엇이며, 오늘에는 그의 사상과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유학에 대해서 현대적 삶과는 어울리지 않은 ‘전통사상’으로 여긴다. 하버드대의 중국학 교수인 뚜 웨이밍(杜維明)의 말로 요약하면 유학은 인간의 참된 감정(genuine feeling)인 인(仁)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예(禮)를 바탕으로 ‘인간이 되기를 배우는 것(Learn to be human)’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유교나 ‘예’에 대해 그 부정적(말폐적) 측면, 즉 가부장적 규범주의를 먼저 떠올린다. 이는 조선의 유학이 후기로 갈수록 형식적 예에 치중하는 풍조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실천 윤리가 가부장제적 계층화를 강조하는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적 성향으로 형식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폐가 드러나기 전의 유학의 참모습은 일반인들의 통념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김굉필의 생애와 도학사상의 성립과정 고려 후기 이후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사대부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이 조선의 건국을 주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 왕조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조선 건국이후 1백 여 년 간의 유학은 문장 중심의 사장(詞章)과 통경명사(通經明史) 중심의 학문이었다. 주3) 그러다 조선 성종조 무렵부터 조선조 성리학은 문장 중심의 사장파 대신 새로운 학풍인 이학(理學)파가 태동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소학》과 《대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성장한 도학 중심의 신진사림파가 문장중심의 훈구파와 대립하게 된다. 이 결과 유자광, 이극돈, 한치형 등 훈구파가 당시 사림파들의 스승으로 지목된 김종직 주3)이 지은 조의제문(吊義帝文)을 빌미로 그 문인들인 사림파 40여명을 숙청하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연달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이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대표적인 학자가 한훤당 김굉필이다. 김굉필은 본관이 황해도 서흥이며 단종 2년(1454년) 서울의 정릉(지금의 정동)에서 김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는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누가 무례하게 놀리거나 거만스럽게 굴면 채찍으로 마구 휘둘러 갈기기 때문에 한번 그에게 당한 사람은 멀찌감치 피해갈 정도였다. 김굉필은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특히 한유가 쓴《창려집(昌藜集)》을 좋아했는데, ‘남팔아,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세 번씩 읽었다고 한다. 김굉필은 19세 때 조부의 고향인 지금의 대구 광역시 현풍 인근에 있는 합천 야로현 말곡에 살던 박예손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살이를 하면서 냇물가에 한훤당(寒 찰 한, 暄 따뜻할 훤, 堂 집 당)이란 서재를 짓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의 호는 이 한훤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때 부터 김굉필은 처의 고향인 지금의 경남 합천군 야로, 그리고 처외가인 경북 성주군 가천 등지를 왕래하면서 학문을 넓혔다. 김굉필의 학문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21세 때 영남지역의 수령으로 부임한 김종직의 문인이 되면서부터다. 김종직은 조선조 유학사의 첫 머리에 나오는 야은 길재의 학문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의 가학을 배운 유학자로서 또한 당시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주4) 김굉필은 식량을 싸들고 수개월씩 김종직의 집에 머물면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 때《소학》을 읽고 크게 깨우쳐서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주5) 누가 나라에 관하여 물으면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했으며, 그는 《소학》이 제시한 지침대로 몸가짐을 단속하여 수신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예법대로 생활했다. 늘 초립을 쓰고 밤늦도록 학문에 힘썼으며 집안 식구들도 서재를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연밥으로 만든 갓끈 흔들리는 소리로 그가 공부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김굉필은 27세 때인 성종 11년(1480년)에 생원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지만 대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이후에도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여 이 때 벌써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 무렵 김굉필이 《소학》과 《대학》으로 학문의 기본을 삼은 것은 대의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도학 형성에 결정적 토대가 된다.《소학》은 원래 초학자들이 배우는 유학입문서이지만 김굉필은 《소학》을 위기지학의 기본서로 삼았다. 그 이유는 남을 다스리는데(治人) 앞서 자신을 다스리는 존심(存心)과 양성(養性)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는 《소학》이 이러한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소학을 바탕으로 한 학문은 평생을 그의 평생이 삶의 지침이 되었다. 이는 당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명문장가로서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인 노년의 김종직의 처세에 회의를 갖게 하며, 이로 인해 사제 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는 남효온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김굉필의 삶을 ‘빛을 감추고 자취를 흐렸다’는 도광회적(韜光晦迹)으로 표현한다. “김굉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태를 돌이킬 수 없음과 세도가 실행하지 못함을 알고 빛을 숨기고 자취를 흐렸는데 사람들 역시 이를 알아주었다.” 《소학》을 실천하는 것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은 김굉필의 도학사상은 김안국, 조광조 등에 계승되는데, 김안국은 경상감사가 되자 도내 향교에서 《소학》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게 했다. 이후 영남 사림에서는 《소학》을 중시하게 되었고 소학계가 조직되는 등 소학을 배우는 풍조가 정착되면서 이후 전국적으로도 《소학》을 읽고 실천하는 운동이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학》을 통해 큰 깨우침을 얻으면서 ‘소학동자’를 자처하며 도학 공부에 전념했고《소학》의 윤리를 실천하는데 힘쓴 김굉필은 가정을 다스리는데도 사람 됨됨이에 바탕을 둔 《가범(家範)》을 지어 실천했다. 그가 이《가범》을 지은 것은 가도를 확립하는 것이 치국의 근본이 된다는 생각에서 유교 윤리를 그의 집안에서부터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주6) 그의 《가범》은 《소학》과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의 실천윤리지침으로서 부모자식, 형제, 부부, 고부 등 모든 가족이 제 위치를 바로 지키면 집안의 도가 바르게 되고 따라서 국가가 안정된다는 데 있다. 주 그래서 그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집안 식구들을 불러 모아 예절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규칙을 정하기도 했다. 그의 《가범》은 자녀들 뿐 만 아니라 집안 노비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는 또한 노비들에게도 일정한 직명과 직급을 주고 일을 맡겨서 일의 성과에 따라 직급을 승격시키거나 강등시키는 일종의 성과급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같은 일은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굉필에게는 이러한 도학자의 면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에 의하면 김굉필은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있는 그림이 없었는데, 최근 경주의 한 고가에서 김굉필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청초호주즙도>라는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굉필이 안견의 그림들을 10폭 병풍으로 만들어 늘 감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주7) 이러한 사실은 서릿발 같은 도학자와는 다른 김굉필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김굉필의 삶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히게 되는 것은 벼슬길에 들어서면서였다. 김굉필이 40세 때인 성종 25년(1494) 겨울에 경상감사 이극균(李克均)이 그를 한양의 남부참봉(南部參奉)으로 천거하여 임명되었고, 3년 뒤에는 형조좌랑(정6품)이 된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폭군 연산군의 시대가 되면서 당시 학계 및 정치계에 큰 변동이 일어나며 이 때문에 그의 삶도 이러한 시대 조류에 휘말리게 된다. 학문을 좋아했던 성종은 훈구세력의 전횡을 막기 위하여 영남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여 중앙정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생육신이나 죽림우사와 같은 청담사상을 지닌 인사들에게까지 관대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훈구파 세력에 둘러싸여 이러한 아버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연산군은 재위 초기부터 죄 없는 선비들을 체포하고 국문서적을 불태우는 등 폭정의 만행을 일삼는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로 인해 당시 여러 뜻 있는 선비들이 큰 화를 입는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친구가 죄에 연좌되어 화를 당하지 않도록 미리 단교하기도 했다. 이즈음 김굉필도 자신이 화를 당할 것을 예견하고 친구인 신영희를 찾아가 단교하고 멀리 피하게 한다. 이보다 앞서 그는 문우인 남효온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갔다. 그러나 남효온은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김굉필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남효온은 벽을 향해 누운 채 끝내 말 한마디 없이 죽었다. 남효온 역시 자기로 인하여 김굉필이 연루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이 사림파의 학자들은 시국의 암운을 예견했으나 결코 학문적 신념을 굽히거나 피하지 않았다.(*남효온이 죽은 시기는 성종 말기여서 실제로 남효온과 사이가 나빠져서 말을 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마침내 형조참판이 된 이듬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그의 문인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을 기화로 훈구파가 주도한 무오사화(1498년)에 김굉필도 김종직의 문인이란 죄목으로 장(杖)80대를 맞는 형(刑)을 당한 후 평안도 희천에 유배됨으로써 그의 관직생활은 5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러나 평안도에서의 그의 귀양살이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연의 계기가 된다. 그는 당시 유풍이 미미했던 평안도에 유학을 일으켰고, 무엇보다 후일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의 태두가 된 조광조를 제자로 맞이하여 그의 학통을 잇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8) 당시 17세의 나이로 평안도 어천 찰방인 부친을 따라 왔던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학을 배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검찰총장격인 대사헌 양희지의 소개장을 얻어 그의 배소로 찾아 왔던 것이다. 당시는 법률상 귀양중인 사람을 만날 수 없던 시기였다. 뒷날 김굉필은 조광조를 전송하는 자리에서 “도(道)가 동쪽(조선)으로 왔다”고 할 정도로 그의 학문을 칭송했다. 그러나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에서 2년 뒤 전라도 순천으로 다시 이배되며, 1504년 전라도 순천에서 51세의 나이로 참형을 당한다. 주9) 조선 5백년의 유학의 역사는 세속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갈등의 연속이었으며,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세속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들의 권모술수의 피해자가 되어 숱한 이들이 고난과 핍박 속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고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것이다. 조선 유학사상 김굉필은 정여창과 함께 16세기 이후의 사림의 학문적 특성이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론적 철학으로 심화하는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정치 현상 자체를 도덕의 힘을 통해 갱신해보고자 하는 열망이 심성이기론의 핵심이며,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정붕, 이장곤, 이연경, 이적 등 김굉필의 문인들은 그의 실천적 도학의 학통을 이어 16세기 사림 정치의 주역이 되며, 특히 그의 학통은 조식, 오건, 정구 등 경상 우도의 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었다. 이처럼 김굉필이 창도한 도학사상은 이기론(理氣論)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며, 후일 영남학파의 양대 지주가 된 이황과 조식이 모두 김굉필을 도학의 큰 선구자(도학지종道學之宗)로 받든 까닭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의 유학사상은 이후 정통성을 확보하며 지배적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다.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무려 30여명에 이르는 문인들은 그의 고향인 현풍과 합천 야로, 성주 가천,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사제 관계를 맺어 영남학파는 물론 기호학파에까지 이른다. 이 뿐 만 아니라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은 호남지역에도 접목되어 후일 호남 유학의 선구자가 되는 데, 이는 그가 생애의 마지막을 호남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 됨됨이를 위한 지침인 <한빙계>와 이일분수론 김굉필은 한국유학사상 처음으로 도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힘쓰면서 한편으로 문우(文友), 문인들과 치열하게 학문을 토론한다. 특히 네 살 위인 정여창과는 막역한 사이였고 뜻과 학문이 같아서 밤이 새도록 도학을 토론하기도 하면서 형제처럼 지냈다. 주10) 이 때부터 김굉필은 학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제자 문인들이 집안에 가득차서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관청의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정여창이 “비방하는 사람이 많으니 잠시 수업을 중지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하자 “먼저 안 사람이 후진을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므로 화를 당해도 그만 둘 수 없다.”고 하면서 끝내 강의를 중지하지 않았다. 세상의 비방에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는 성종 24년(1493)에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한다. 이시기 얼마 후 다시 김굉필은 사헌부 감찰직에 있었는데 당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이 찾아와 문인이 되기를 청했다. 성균관 대사성 반우형(潘佑亨)이 '자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선친의 유지(遺志)를 따른다' 하며 제자를 자청하였다. 연산군 2년(1496) 가을이었다. 반우형은 일찍이 서거정에게 수업하고 17살에 문과에 합격한 인재였다. 경상우수사를 지낸 부친 반희(潘凞)는 평소에 '김굉필·정여창·김일손은 문장과 도덕으로 일세의 영수인데 너도 사도(斯道)를 배우지 않으면 유속(流俗)에 빠질 것이다'고 훈시하였다고 한다. 이 때 김굉필은 43세였고 반우형은 38세였지만 벼슬은 반우형이 훨씬 높았다. 김굉필이 “친구라면 가하지만 스승은 불가하다”고 사양하자, 반우형은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습니다.”고 하면서 끝내 돌아가지 않아 그를 문인으로 받아들이고 훗날 그의 도학의 핵심이 된 <한빙계>를 지어 가르쳤다. 김굉필의 학문을 전하는 글은 무오 갑자사화 때 거의 모두 불태워졌으나, 반우형과의 이러한 우연한 인연 덕분에 그의 실천적 도학이 후대로 이어졌음을 반우형의 『옥계집(玉溪集)』을 통해 알 수 있다. <한빙계>는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할 계율’이란 뜻이다. 이는 물이 얼어 생긴 얼음은 물보다 차갑다(氷寒於水)'는 의미에서 후배가 선배보다, 제자가 스승보다 진취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그리고 '얇은 얼음 밟듯이 하라'는 증자의 말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주역』의 '추워지면 얼음이 얼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굳어진다'는 말과도 상관이 있는데 이는 일의 기미를 알아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빙계>는 모두 18개 조목으로 된 짧은 글로서 몸을 다스리고 사물을 탐구하는 도학방법을 담고 있다. 주11) 김굉필이 주창한 도학이 실천적이었던 만큼 <한빙계>의 내용은 공리공론과는 거리가 먼 현실적인 교육방법이라는 특색이 있다. <한빙계>의 주요 내용은 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痛絶舊習),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日新工夫)”,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라(讀書窮理), “마음을 바르게 하여 본성을 따르라(正心率性)”, “마음을 한 결 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말라(主一不二).”와 같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한빙계>의 마지막 조목은 지경존성(持敬存誠)으로, 공경함을 가지고 성실함을 지니는 것이 소학과 도학의 목표이고, 인격을 닦고 국가를 다스리는 요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굉필의 사상은 위기지학이 핵심인 유교사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김굉필의 <한빙계> 18조목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결국 ‘인간이 되기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굉필의 실천적 도학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한빙계>라면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집약되는 그의 세계관은 <추호가병어태산(秋毫可竝於泰山), 추호라도 태산과 견줄 수 있다는 뜻임>이라는 짧은 부(賦) 형식의 논문에 담겨있다. 그는 여기서 “나는 아노라, 대저 천하의 사물은 이(理)가 있고 분(分)이 있는데, ‘이’는 일만 가지를 합쳐서 하나가 되고 ‘분’은 일만 가지의 차이가 있어도 문란하지 않았다. 저 따지기 좋아하는 작은 지(智)는 사물만 보고 이(理)를 빠트렸다”고 하였다. 그는 이어 정주학의 태극도설과 이기설을 인용하면서 “추호가 비록 작지만 태극을 갖추고 있고, 태산이 크기는 하지만 하늘이 만든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근본을 생각지 않고 대롱 속으로 하늘을 헤아리듯 하고 어떤 이는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것이 크고 저것이 작다고 싸우며 시끄럽게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그는 원래 사물들은 다양성을 가지는 것이 실상이지만 그 소이를 미루어 따져보면 마침내 근본이 같은 줄 알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 우주관은 문인들에게 계승돼 후일 ‘심성이기론’으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된다. 맺음말 - 김굉필 도학 사상의 현재적 의미 조선 초기 권력의 화신인 훈구파들의 작태를 보면서 사림파들은 욕망을 제어하는 학문인 도학을 통해 삶의 가치를 새롭게 구축하고자 하였다. 김굉필은 바로 이러한 사림파의 선구자였다. 우리는 김굉필의 <한빙계>를 통해서 그의 도학사상의 핵심을 짐작할 수 있다. <한빙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성리학(도학)은 바른 심성을 바탕으로 한 예(禮)를 중시하는데, 이처럼 예를 중시한 까닭은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인간의 가치는 개인주의적 인간의 존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드러난다. 무엇보다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의 공통점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일상 속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떻게 깨어 있는 상태로 일상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했으며, 실제로 많은 선사들과 유학자들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김굉필은 세속적 가치인 부와 권력을 추구한 ‘훈구파’에 맞서 도학을 제창하였고 평생 이를 실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목에 칼이 닿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굉필의 <한빙계>는 사람 됨됨이, 즉 인간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조건이었으며, 무엇보다 살아가는 동안 바른 행실을 추구하는 학문을 죽는 순간까지 추구함으로써 후대에 추앙과 존숭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여러 지역에서 종교적 신념의 배타주의로 인해 숱한 갈등이 증폭되는 실정이다. 또한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성적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와 더불어 삶의 가치를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사람 됨됨이’를 만드는 교육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으며, 현실적인 학문과 실천적 삶의 가치는 더욱 값진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세속에 영합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 한 삶과 사상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2009년 1월 9일 도 병 훈 주1) 조선시대의 서원은 유학을 통해 지방의 엘리트를 육성하는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자 성현들을 모시는 공간이었지만 오늘날은 거의 모든 서원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채 제사의 기능만을 거의 형식적으로 수행하는 실정이다.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1) 유림에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를 받들어 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5년(선조 38)에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재건하고 당시 동명을 따서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리어지다가, 2년 뒤인 1607년(선조 40) 에 도학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인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5대 서원중의 하나이며, 조선시대 서원이 성행할 때 전국 680여 개의 원사院祠가 있었는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47개소 주요원사를 제외한 모든 원사가 훼철되었으나 도동서원은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주요 원사 중 하나이다. 또한 도동서원은 서원의 원형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한 서원으로 손꼽힌다. 산(대미산)을 배경으로 앞에 강(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북향의 공간 속에 전학후묘의 배치. 사당에서 중정, 마당-환주문-수월루-은행나무-앞산까지의 일직선 배치는 위계질서를 강조한 서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동 서원은 산지형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태로, 기능에 따라 3개의 공간 즉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진입공간에는 서원의 대문격인 외삼문(外三門)과 수월루(水月樓), 강학공간에는 환주문(喚主門)을 경계로 하여 강당(講堂,中正堂, 기둥 부분 맨 상단에는 하얀 한지가 둘러싸여 있어 경건한 느낌을 자아냄), 동재東齋,居仁齋), 서재(西齋,居義齋), 장판각(藏板閣) 등이 있으며, 제향공간에는 내삼문(內三門), 사당(祠堂) 등이 있다. 그 밖에 전사청(典祀廳)과 증반소(蒸飯所), 유물전시관, 신도비(神道碑) 등이 있다. 그리고 상당히 공들여 쌓은 기단부를 포함하여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석조물들이 존재한다. 도동서원은 아름다운 담에 의해 영역들이 나누어지며, 각 영역을 다시 단으로 구분하여 경계를 표시한다. 특히 담장은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한 견고한 축조기법과 수막새의 장식무늬를 갖는다. 담장이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면서 담장 면의 변화가 생긴다. 도동서원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높아 강당과 사당 담장이 1963년에 보물 제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강학공간 출입문인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며 담장은 아름다운 토담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김굉필의 외증손 정구가 1605년에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을 중건할 때 그린 두 폭의 벽화는 3백 80년 동안이나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명품으로 꼽힌다. 지난 2005년 여름에 필자가 대구 정화여고의 국사교사인 동생과 함께 도동서원에 갔을 때, 이 그림을 보려했으나 관리인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그래서 멀리서 이 그림을 보러 온 사연을 간곡하게 말하자 비로소 이 그림들이 보존된 건물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림들은 비교적 대작인데다 화격이 높았으며, 400년 가까이 된 그림으로는 보존 상태도 좋았다. 이 두 점의 벽화는 한훤당이 자연과 도학정신을 시로 표현한 내용을 그린 것으로, 오른쪽 벽화는 노송(老松)에 눈이 쌓여 있고 그 가지 사이로 둥근 달이 걸린 풍경화로 회칠한 흰 면에 검정색과 주황색을 이용하여 그린 <설로장송(雪路長松)>이란 벽화이다. 가로 130cm, 세로 150cm의 크기이다. 왼쪽 벽화는 가 회칠한 흰 면에 검은색으로 그린 것으로 우측에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라 적혀있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서원을 방문한 손님이 도동 강나루에서 나룻배 한 척을 띄워 놓고 혼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는 벽화로 130cm, 세로 94cm의 크기이다. 주2) 역사책에는 흔히 조선 성리학, 또는 영남의 학맥을 야은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순으로 기술한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 김굉필을 영남학맥의 선구자로 꼽은 것은 성리학 중에서도 ‘도학’. 또는 위기지학 사상을 실질적으로 창도한 인물을 김굉필로 보기 때문이다. 주3)사장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정인지(鄭麟趾), 어효첨, 최항(崔恒), 양성지, 권람, 신숙주(申叔舟), 서거정(徐居正), 성현, 강희안, 이극배 등이다. 개국의 뒤를 이은 조선초 유학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주4)김종직(1431~1492)은 호가 점필재(佔畢齋)이다. 그는 김숙자의 아들로서 영남의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통해 가학을 계승하였는데, 특히 시문을 잘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하였는데, 특히 경연관으로서 성종에게 특별한 예우를 받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저술을 많이 남겼으나, 실천궁행에 힘쓴 부친과 달리 도학 상의 문자를 남긴 것이 없다. 뒷날 퇴계는 “김점필은 학문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종신사업이 단지 사화(문예) 상에만 있었던 것을 그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비평한 바 있다. 뒷날 무오사화의 화근이 된 「조의제문」은 그가 쓴 글이다. 주5) 《소학》은 주희가 엮은 것이라고 씌어 있으나, 그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주희의 지시에 따라 여러 경전에서 아이들을 교화시키는 일상생활의 범절과 수양을 위한 격언과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책의 구성은 내편(內篇) 4권과 외편(外篇)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 순으로 되어 있다. 내편은 〈서경 書經〉·〈의례 儀禮〉·〈주례 周禮〉·〈예기 禮記〉·〈효경 孝經〉·〈좌전 佐傳〉·〈논어 論語〉·〈맹자 孟子〉·〈제자직 弟子職〉·〈전국책 戰國策〉·〈설원 說苑〉등의 문헌에서 인용하여 편집한 것이고, 외편은 주로 송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주로 유교의 효(孝)와 경(敬)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상과 아울러 수기(修己)·치인(治人)의 군자(君子)를 기르기 위한 계몽(啓蒙)적 교훈이 담겨 있다. 주6) 이를 입증하듯 서원 근처에 있는 김굉필의 종가집에는 지금도 ‘소학세가(小學世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주7) 김굉필의 이 병풍은 갑자사화로 집안이 적몰될 때 도화서(圖畵署)에 압수되었다가 민간에 흘러들어 갔는데, 조식에게 배운 오운(吳澐)이 처가 집에서 얻어 김굉필의 손자인 김립에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는 조식의 「한훤당의 그림 병풍에 적다[寒暄堂畵屛跋]」에 나온다. 안견 그림의 제목은 검푸른 전나무와 늙은 소나무[蒼檜老松], 푸른 나무와 파릇한 버들[碧樹靑楊], 오래된 나무와 무성한 대숲[古木叢篁], 거문고와 학 그리고 소와 양[琴鶴牛羊], 낚싯줄을 드리우고 달을 보는 모습[垂綸翫月], 구름 낀 산 아래 초가[雲山草屋], 백리의 물길[百里長河], 천 척 폭포[千尺懸瀑]이다. 남명 조식은 이 병풍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선생께서 이 병풍을 보고 누워 계실 때는 눈길을 주고 감흥을 일으키실 적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상쾌한 바람 같은 선생의 영혼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듯하고, 사모하는 마음 사이에 예전의 모습이 오히려 보이는 듯하다.” 주8) 지치주의란 덕성과 인성 수양의 유교 정신이 정치의 덕목이어야 한다는 조광조의 사상을 집약한 말이며, 이는 《주서》〈군진편〉에 나오는 至治聲響 感于神明(지극정성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그 향기가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뜻임)에서 유래한다. 주9) 신도비에 기록된 그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형장에서 형을 당하는 날에 목욕하고 관복을 가지런히 입었다. 신발이 벗겨지자 도로 신으면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천천히 수염을 간추려 입에 물고, “몸에 난 터럭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았으므로 이것마저 다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정신이 어지럽지 않았다. 주10)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왕래했는데, 그들이 학문을 논했던 정자인 이로정이 지금도 낙동강변에 있다 주11) 한빙계(寒氷戒)의 18조문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 :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 :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 :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 :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 :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실욕징분(室欲徵忿) :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耗仁) :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 :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 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도록 하라. 12.불망어(不忘語) :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 :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 :일의 기미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87 no image 2008년을 보내며-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도병훈
6937 2008-12-30
*올 한해를 마감하는 아래 글을 올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일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2008년을 보내며-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2008년도는 미국 발 금융 위기 상황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그 여파로 우리나라에서도 금융 불안과 함께 환율이 치솟고, 주가는 곤두박질쳤으며, 경제는 더욱 어려운 지경에 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러한 경기침체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사람들은 지난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불안감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2008년도에는 GMO, AI, 광우병, 멜라민 파동과 관련한 먹거리 불안, 남북관계 불안, 정치 불안, 교육 불안 등으로 인해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언론매체에서는 ‘불안’을 2008년도의 열쇠말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참상으로 보아 지금보다 훨씬 엄혹한 시기도 있었다. 현대는 과학지식, 경제적 기회와 부, 식량, 소비 물자, 기대 수명 등의 면에서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한 시대이다. 당분간 경기회복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근대 이전의 선조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그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들보다 더한 불안감을 갖고 산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많은 현대인들에게 불안은 숙명이 되었을까?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라는 말로 유명한《불안Status Anxiety》의 저자인 영국의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중세 때의 인간은 현대인이 갖는 불안감이 없었으며, 불안은 근대사회이후 지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본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진 신분계층 사회였던 중세사회는 어떤 지위도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근대, 특히 18세기 이후 경제적 능력과 유용성만이 사회적 위상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불안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들이 겪는 끝없는 불안의 징후는 사회적 지위의 추구로 인해 야기된다고 본다. 그리고 높은 지위를 구하려는 동기는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며,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는 불안의 원인을 크게 사랑결핍과 속물근성snobbery, 기대(심), 능력주의 그리고 불확실성이라는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으므로 불안하며,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동일시하면서 남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이 속물근성이다. 또한 이전보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달라지지 않는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에 의해 인간은 좌절하고 불안해하며, 예측 불가능한 요인 중 예를 들어 고용주는 피고용자를 불안하게 하고, 고용주는 경제의 불확실성 탓에 불안하다. 이 때문에 현대사회는 불안의 연속이며 성장과 후퇴를 반복하는 유동적인 세계경제의 특성 때문에 지위를 얻으려는 노력은 그 결과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부터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 대한 해법을 기술한다. 그가 제시한 다섯 가지 해법이란 ' 철학', '예술', '정치', '종교(기독교),' ‘보헤미아(보헤미안의 삶)’이다. 이러한 그의 해법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에서 삶에 대한 다른 길을 제시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찾은 것이다. 이 중에서 ‘예술’이란 장에서 알랭 드 보통은 예술을 '삶의 비평'으로 정의한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의 말을 인용한 후 우리의 삶이 비평이 필요한 현상임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타락한 피조물로서 가짜 신들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 등 예술작품은 은근히 또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인간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우리가 지위와 그 분배의 문제에 접근할 때만큼 비평이 필요한 순간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대를 막론하고 아주 많은 예술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사회가 사람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을 창조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술의 역사는 지위의 체계에 대한 도전, 때로는 풍자나 분노가 서려 있기도 하고, 때로는 서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재미있기도 한 도전으로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보헤미아’(*보헤미안들의 사회 또는 집단이란 뜻임)란 장에서 19세기 초에 생겨나 경제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지위체계에 맞선 보헤미안의 삶에 대해 기술한다. 예컨대 윌든 호숫가에서 산업문명을 등지고 자연과 함께 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인 채터튼의 죽음, 보헤미안의 삶을 선원에게 붙잡힌 새로 비유한 샤를 보들레르의 시 <앨버트로스>,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린 후 L,H,O,O,Q(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라 서명한 마르셀 뒤샹의 작업 등이 그가 꼽은 예인데, 이를 통해 ‘세상의 지배적 관념에 맞서 독자적 가치’를 추구해온 보헤미안의 가치체계를 드러낸다. 보헤미안들은 자신의 자유로운 삶으로서 근대적 문화와 예술의 주류계층인 부르주아지에 온 몸으로 맞섰다는 것이다. 이들 보헤미안들은 문화와 예술을 회의한 아방가르드, 즉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예술의 선구자들이기도 하다.(*현대예술사에서는 이들은 대개 아방가르드 현대예술가로 자리매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헤미안에 대해 쓴 장은 알랭 드 보통이 쓴 불안이란 책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보헤미안의 정신은 선불교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의 ‘방하착放下着’을, 원효의 사상과 삶에 비견하자면 ‘무애無碍’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 말의 참 뜻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알 듯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를 뜻하는 말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욕망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직시하는 일이며, 이런 의미에서 오히려 통념적 삶을 거부하는 의미로서만 이 말은 진정성을 가질 뿐이다. 자본주의 시대이후 삶의 조건이 그 이전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면 이는 분명히 시정되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최근의 경제 위기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쉽게 극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감은 이러한 경제 논리로만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불안》의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의 불안은 근대 이후의 사회적 욕망에서 기인한다. 사실 오늘날의 소비사회는 근대의 부르주아지 문화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문화는 곧 그들의 욕망의 흔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근대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도 불안감은 지속될 것이다. 모든 불안은 욕망의 문제이며, 욕망은 무한하나 삶은 유한하므로 그 끝은 좌절과 무력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정작 중요한 문제는 ‘쪽박의 현실’도 ‘대박의 꿈’도 아닌 삶의 근본적 가치를 새롭게 설정하는 문제이다. 보헤미안은 낭만적 현실도피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가장 치열하게 현실과 맞선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으며, 그것은 지위나 명예, 돈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닌 다른 방식의 삶이였다. 2008년 12월 30일 도 병 훈
86 no image 미술의 경계를 넘은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
도병훈
24024 2008-12-15
아래 글은 올해 2학기 1학년 미술수업 중 현대미술을 다루면서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에 대해 수업한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지난 2년전 예술과 시민사회에서 주관한 시민을 위한 미술강좌 중 '역사를 바꾼 아웃사이더, 마르셀 뒤샹'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한 면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 봅니다. 수업내용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구어체 문장이 있습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미술의 경계를 넘은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 “난 400년 내지 5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유화를 더 이상 계속 그려야할 이유가 없는 시대에 맞는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결론적으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았다면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지. 음악에서 전자악기들이 예술에 대한 사람의 태도를 바꾸는 표적target이 되었네. 그림은 더 이상 식당이나 응접실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야... 예술은 표적의 형상을 가지며 더 이상 장식적인 역할을 하지 않네. 난 평생 이런 느낌이었어.” - 마르셀 뒤샹- 들어가면서 지난 시간에 ‘다다’운동까지 공부했다. 그렇다면 다다와 그 이전 미술의 차이는 뭘까? 다다 이전의 서구 근대미술은 시대에 따라 여러 ‘양식’과 ‘유파’가 새로 생겨나는 반전통의 역사였다. 그래서 새로운 유파들은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는 대신 새로운 이즘을 바탕으로 삼아 집단으로 통일된 미학적 가치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반면에 다다는 예술적 차원에서 새로 정립된 미학을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허무’와 ‘반항’정신을 전제로 한 반예술 운동이다. 즉 다다 이전의 미술은 반전통적이긴 해도 다다처럼 예술 자체를 부정한 집단적 반예술 운동은 아니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다다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뉴욕 다다이스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은 다다 운동의 범주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다. 그는 다다는 물론 이후의 미술사조인 초현실주의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서 뒤샹의 작품세계에 대해 공부하면 현대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는 20세기 초 예술에 대한 인식의 틀과 이디엄idiom을 가장 크게 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사상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지만 아직도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대중 뿐 만 아니라 심지어 미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대다수 미술을 전공한 사람을 포함하여-미술에 대해 `리얼리티reality`가 아닌 `미beauty`의 대상으로서 장식적 볼거리로 여긴다. 근대이후 서구근현대미술을 잘못 수용한 데다가, 배금주의拜金主義 풍토 속에서 상품적 가치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본능과 지성을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확장된 진폭은 일반인이 갖고 있는 통념적 인식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다. 현대미술은 근대라는 특수한 시기에 생겨난 근대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은 근대사회의 성립과 변천과정에 근거한 근대미술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이해되는 세계다. 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마르셀 뒤샹의 ‘예술을 넘어선 예술’에 대해 그럼 유인물에 실린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같이 보면서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왼쪽 위편에 실린 도판 그림의 제목을 보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No.2>라고 적혀 있다. 마르셀 뒤샹이 25살 때 그린 이 그림을 통해 그도 원래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얼핏 보면 입체파 그림 같지만 자세히 보면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그림은 일반적인 나체 그림과도 큰 차이가 있다. 마르셀 뒤샹이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을 전후한 시기인 20세기 초반은 수학, 과학, 문학, 연극, 음악, 역사, 사상, 기술적 발전,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사상 가장 심한 변화의 시기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획기적 변화의 시기였다. 이를 통해 뒤샹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역사란 수천, 수 백 년 길이로 보면 시대별 특색이나 예술적 특성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누드화의 변천과정만 보아도 서양인들의 미와 예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 지 알 수 있다. 먼저 르네상스 시대 때의 보티첼리나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면 신화 속의 여신으로 누드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8세기나 19세기가 되면 비로소 일상적인 모습의 여자를 그리게 된다. 그 중에서도 선구적인 화가로는 고야나 마네를 꼽을 수 있다.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는 당대의 평범한 매춘부를 그린 그림이다. 고전주의 관점으로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다. 그러나 폴 고갱에 이르러서는 남태평양 타히티 원주민 여자를 누드로 그린다. 당시 서구 문명권 대다수의 사람들이 백인종만이 문명인이며 다른 종족들은 추한 야만족으로 여겼던 때였으므로 고갱이 이러한 원주민 여자를 그림의 소재로 삼은 것 자체가 당시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갱의 누드화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에 비하면 공주님이다. 알다시피 <아비뇽의 아가씨>에 나오는 누드를 고전주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추하고 흉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No1, 2>에 이르면 사람인지 로봇인지조차 불분명하고 게다가 여러 사람이 겹쳐져 진 듯 그려져 있을 뿐 구체적 형상도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무수한 선과 면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로 사람의 움직임을 연속 촬영한 사진의 영향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배경이 있다. 마르셀 뒤샹이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수학, 과학, 문학, 미술 등 여러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때이다. 과학에서는 이른바 ‘4차원’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논의되며 뒤샹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음을 훗날 그가 한 대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20세기 초에 들어 현대물리학을 중심으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4차원에 대한 논의가 많을 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영향을 받은 민코프스키란 사람이 쓴 4차원 시공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또한 포볼로프스키의 <사차원 나라에의 여행>책도 출간되었으며, 당시 뒤샹이 속해 있었던 연구 모임에서도 주로 이런 문제를 쟁점으로 삼아 자주 토론을 했다고 한다. 4차원이란 엄밀히 말해서 ‘4차원 공간’과 ‘사차원시공’으로 나누어지는데 20세기초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세계관은 `사차원 시공`으로 이는 3차원적 세계에 `시간`을 더한 것이다.(*칠판에다 그리면서 다음과 같이 수학적 차원으로 설명한다. 점은 0차원, 두 점 사이의 선은 1차원, 사각형의 4점을 잇는 점은 2차원, 높이를 갖는 사각 입방체는 3차원, 이 3차원에다 앞에 엇갈리게 4각형을 하나 그린 후 먼저 그린 사각형과 선을 연결하면 4차원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것이 3차원에다 시간을 합친 4차원 시공을 도식적으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다) 이 4차원 그림을 보면 마치 시간 안에 움직이는 사각형의 순간순간 모습을 그린 듯하며, 이런 특성을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No.1, 2>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그림은 당시 개최된 전시회에서 출품을 거부당한다. (*수 년 후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가 미국의 뉴욕 아모리Armory 쇼에서 전시되면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뒤샹은 이전까지의 미술의 표현 방식에 대해 더욱 회의를 하게 되며, 결국 전형적인 미술의 형식과 결별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를 그린 1912년은 마르셀 뒤샹의 생애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시기이다. 1912년 6월 마르셀 뒤샹은 그 전해(1911년 10월)에 알게 된 프란시스 피카비아, 그의 아내, 카브리엘 피뎃 피카비아, 그리고 아폴리네르와 함께 당시 전위적인 극작가인 레이몽 루셀이 쓴 <아프리카의 인상>이 이라는 극장 공연을 보러 갔는데, 이 체험이 이후 마르셀 뒤상 예술세계의 여러 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언어의 동음이의적인 특성을 활용하거나 말장난pun을 작품의 컨셉이나 제목으로 삼은 일도 이 레이몽 루셀의 영향이 컸다. 또한 공연에 도입된 독창적인 기계, 인공적인 과학실험 등도 후에 뒤샹의 작품의 큰 특징이 되는데, 특히 뒤샹이 1915~1923년까지 8년 동안 제작한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로부터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도 많은 부분 루셀을 만난 것이 고동이 되어 착안된 것이다. 1912년 7,8월에 있었던 독일 뮌헨 시 체류이후 그는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과 <신부> 그리고 <독신자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 라는 주제의 드로잉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훗날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로부터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이하 큰 유리로 통일함) 작품의 구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뮌헨임을 알 수 있다. 이해 10월에는 피카비아, 아폴리네르 등과 함께 프랑스 쥐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며, 이 때 훗날 제작하게 되는 녹색상자의 자료들을 구상하고 메모하게 된다. 뒤샹이 이 여행 동안에 쓴 노트들은 언어유희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논리와 상식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어 1913년부터 뒤샹은 관습적인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고 대신 ‘측량과 시공간의 계산’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물리학적이면서도 우연적인 효과를 추구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 첫 예가 여러분이 보는 유인물에 나오는 <세 개의 표준 정지기>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1m 길이의 실을 1m 높이에서 수평으로 세 번 낙하시켜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자의적인 새로운 길이 단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인물 2쪽에 나오는 <샘>은 흔히 뒤샹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다. 그러나 <샘>은 마르셀 뒤샹에 의해 최초로 ‘선정’된 1917년 당시 전시장에 전시조차 되지 못한 채 격벽/ 칸막이 벽 뒤에서 발견된 오브제였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죽 방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변기 사진만이 마르셀 뒤샹이 비트리스 우드, H.-P. 로체와 함께 출판한 잡지 <장님>의 두 번째호에 실린다. 이후 <샘>은 많은 사람들에게 논의의 대상이 되며, 요컨대 예술 및 예술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오브제’로 해석된다. 이 오브제를 통해서 뒤샹은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부정하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샘>이 예술작품을 부정하는 작품으로 해석되는 까닭은 바로 ready-made, 즉 제작된manufctured 기성제품을 단지 선택(선정)만 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이란 예술가가 미적 감상대상으로서 직접 그리거나 만드는 활동, 즉 창작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샘>은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창작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뒤샹이 미적 감상 대상이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전략적 제스처임을 알 수 있다. <샘>은 뒤샹이 선택한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아니지만(*뒤샹의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1913년의 <자전거 바퀴>이다. 그러나 뒤샹이 최초로 레디메이드란 말을 한 작품은 눈 치우는 삽에다 <부러진 팔에 앞서서>란 제목을 단 것임) 이런 작품을 전시회라는 공적 행사에 내놓음으로써 후대에 <샘>은 현대예술사상 새로운 예술의 존재방식 및 가능성을 제시한 중요 작품으로 평가받게 된다. <샘>이후 예술은 종래의 조각이나 그림 같은 대상적 상품적 실체가 아닌 작가의 개념적 정신과 의도로서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인물에 나오는 사진을 자세히 보면 왼쪽 하단 부분에 R. MUTT 1917이라고 쓰여 있다. M. Duchamp라 쓰지 않고 R. MUTT라 썼다는 것이다. 이 이름은 소변기 공장 사장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한국의 김철수처럼 흔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하여튼 익명의 이름이며, <샘>을 해석할 때 이 사실이 중요하다. 대중들은 가령 어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볼 때, 흔히 누가 그린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들은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서명 때문에 그 그림을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셀 뒤샹은 <샘>에 익명의 이름을 서명함으로써 예술가란 존재에 대해 근원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뒤샹의 <샘>은 예술과 비예술,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이후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출현하면서 종래에는(칠판에다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안에다 예술이라 쓴 후)이만큼이 ‘예술’이라면 나머지는 예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경계가 존재하며, 있다면 누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정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비판 정신과 문제의식을 갖고 생각해보면 결국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도 어디까지나 임의적으로 설정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경계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경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예술가과 비예술가의 경계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의 경계도 사라짐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예술가’라고 자처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난센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무엇이든 어떠리Anything goes 식의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것은 그만큼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이 확장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현대예술가(?)들은 스스로 원점에서 묻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고독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뒤샹의 예술이나 현대예술을 들여다보면 그 어법idiom이 보인다. 유인물 2쪽에 나오는 < L.H.O,O,Q >라는 작품도 현대미술의 새로운 어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인 <모나리자>를 프린트한 싸구려 복제 사진에다 마르셀 뒤샹이 조금 손질을 가한 작품이다. 겨우 엽서 크기 만 한 것인데, 이 모나리자의 얼굴에다 검정색 연필로 수염을 그리고 밑에 빈 공간에다 대문자로 L.H.O,O,Q라고 쓴 것이다. 이 제목은 프랑스어로 읽을 경우 ‘elle a chaud au cul’이 되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란 외설스런 뜻이다. <모나리자>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다 빈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졌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근대예술을 대표하는 상징하는 신비한 미소를 지닌 아름다운 여자로서 대표되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마르셀 뒤샹은 너무도 간단한 방법으로 모나리자를 음란한 여성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은 정말 모나리자를 모독한 것일까? 이러한 원작 ’비틀기‘는 뒤샹 특유의 장난스런 위트의 소산이다. 마르셀 뒤샹은 유머러스한 장난 끼를 발휘하여 모나리자에 대한 대중들의 우상화된 통념을 조롱함으로써 예술의 본래가치를 생각하고 반성하게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모나리자를 모독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통념을 조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로서 다가온다. 어떤 사람은 평생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해도 제대로 된 작품하나 못 남기는 데, 마르셀 뒤샹은 불과 몇 분도 채 안 걸렸을 개념적 행위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마르셀 뒤샹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무엇이든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점은 그렇다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떠한 기준도 존재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은 그만큼 명확하게 ‘이것이 바로 예술이다.’ 라고 입증할 수 없는 시대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가짜’가 ‘진짜’ 행세하는 무수한 사이비들이 생겨났지만, 이는 일반 대중들 대대수가 여전히 과거예술에 대한 고정관념과 향수를 갖고 있어서 ‘속거나’ ‘속이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도 수많은 예술작품이 제작되고 발표될 텐데, 그럼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즉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없다면 진짜와 가짜의 경계도 없을까? 라고 반문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현대예술가들 중에서 미술을 단지 생계나 출세의 수단으로 삼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당대 유행하는 트렌드 스타일에 편승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마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양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그것을 경력으로 삼아 남을 속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이비’들은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사이비를 알아보는 사람까지 속일 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 참된 예술은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려는 비평적 활동으로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언어유희적인 작품을 보자. 유인물에도 나오듯 마르셀 뒤샹은 이런 작품을 여럿 선택하고 장난을 했다. 먼저 <로즈 셀라비>란 작품을 보자. 이 작품은 1920년에 뒤샹이 여자로 분장을 한 모습을 만 레이가 찍은 것이다. 당시 뒤샹은 카톨릭 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유태인식 이름으로 바꾸려다 성적인 정체성마저 바꾼 ‘로즈 셀라비’란 이름을 택했다고 한다. ‘로즈 셀라비’는 프랑스의 문장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그 뜻은 ‘에로스 이것이 삶이다Erose, C’est la vie이다. 일종의 중의법적 언어유희인 것이다. 다음 은 <신선한(발랄한) 과부>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식 창문French window`의 모형 오브제를 선택하여 철자만 변형하거나 바꾸어 `신선한 과부Fresh Widow`로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파리에서 7개월간 체류한 후 1920년 1월에 뉴욕에 다시 돌아와서 목수에게 제작 의뢰한 첫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받침대 윗부분에 보이는 서명은 다음과 같다. “신선한 과부, 마르셀 뒤샹. 저작권 로스-그리고 로스가 아닌-셀라비” 다음은 <로즈 셀라비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라는 작품이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새장에다 각설탕 형태의 대리석 입방체, 온도계, 오징어 뼈 등을 담은 작품이다. 역시 마르셀 뒤샹 특유의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약 8년 동안 <큰 유리>란 작품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마지막 대작 <주어진 것(에탕 돈네): 1, 폭포2, 조명용 가스 Etant donnees : 1"la chute d`eau, 2"le gaz d`eclairage *이하 에탕 돈네로 표기함>와 함께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힌다. < 큰 유리>는 표면적으로는 무슨 기계 설계도 같은 이미지다. 이 작품은 크게 상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 부분은 신부의 영역이며, 아래 부분은 독신자 영역을 뜻한다. 이중 윗부분은 뒤샹에 의하면 4차원에 대한 이론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뒤샹은 사차원이 3차원을 가진 어떤 물건을 투영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즉 우리가 보는 3차원적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4차원을 가진 물건의 투영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이 구상된 배경은 역시 레이몽 루셀의 공연인 <아프리카 인상>으로 거술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의 인상>에 담겨 있는 반의미성, 비예술적 반미학적 측면들에 영향을 받고 이러한 구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큰 유리>는 남녀 간의 미묘한 관계를 기계적인 드로잉으로 상징이나 기호로 표현한 것으로 문명 속에서 기계화된 인간을 불투명하게 표현함으로써 전통적인 미술에서 벗어난 미술을 추구한 것이다.(*이 작품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의 해석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르셀 뒤샹은 1941년대 초반 이 그림을 기록한 스케치, 메모, 설계도 등을 모아 <녹색 상자>와 <흰색 상자>를 만든다. 이 상자들은 그의 자필 원고모음이자 <큰 유리>에 대한 설계도이며 최후의 대작이자 마르셀 뒤샹 사후에 공개된 <에탕 돈네>까지 일관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전의 작업을 작은 모형으로 축소해서 가방 안에 담는 작업으로 호화판 20개, 보통판 300개 미만으로 제작하였다. 일종의 움직이는 뮤지엄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마르셀 뒤샹은 죽을 때까지 언어유희와 함께 위트 넘치는 작품을 선정하며 그 모두가 기상천외한 발상의 작업들이다. 그 중에서 한 작품을 꼽는다면 두 번째 유인물 오른쪽 아래 부분 도판에서 볼 수 있는 <내 혀를 가지고 내 뺨 안에서>가 있다. 볼 부분은 사탕을 입에 넣은 것처럼 혀를 볼 쪽으로 내밀어 석고를 뜬 것이고 나머지는 윤곽선 만을 간단히 드로잉한 것이다. 매우 간단한 발상의 전환과 방식으로 입체와 평면이 즉 2차원과 3차원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식의 자화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끝으로 1946년부터 죽기 2년 전까지 약 20년간 작업을 한 마지막 대작 <에탕돈네>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마르셀 뒤샹이 죽고 난 뒤 그의 스튜디오 구석의 은밀한 밀실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에탕 돈네>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붉은 벽돌 벽에 스페인식의 나무로 된 낡은 문과, 문 가까이 눈을 대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눈높이에 있어 관람자는 엿보는 사람으로 만드는 공간과 그 안의 내부의 광경이다. 이 중 내부는 석고로 만든 여인이 나체로 다리를 벌린 채 죽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누어있고 여인의 왼 손에는 가스램프가 들려있다. 그 뒤로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떠 있으며, 그 밑에 보이는 작은 연못에서 안개가 퍼지고, 작은 폭포도 흐른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주로 애욕적인 본능과 그가 평생 관심을 가졌던 과학적 지성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여러 뒤샹 연구가들이 큰 유리와 함께 1911년 이후 만들어진 뒤샹의 모든 작품들이 집약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독창성을 대담하기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아이러니한 미학과 레디메이드 작품을 통해 유미주의적, 또는 망막적 작품을 거부한 삶을 살았다. 얼마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그에게 예술이란 조형적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라 정신적 활동의 매개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마르셀 뒤샹은 평생 동안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한껏 발휘하여 유유자적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묘비명도 ‘하기야 죽는 일도 남의 일이지’란 말이었다. 맺음말 마르셀 뒤샹은 죽기 수 년 전, 살며 숨 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좋아한다고 말했다. 평생 볼거리로서의 예술을 거부한 마르셀 뒤샹 다운 말이다.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는 미적 가치를 보여주는 스타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굴레에서도 벗어난 것이었다. 이는 통념적 예술과 이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뒤샹의 예술세계를 오해하거나 형식적 측면으로만 관심을 가질 경우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를 표현방법으로 차용한 수많은 뒤샹의 후예들_ 특히 ‘네오다다’ 또는 `팝 아트`로 이름을 얻은-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마르셀 뒤샹의 예술은 인간의 감성을 지배하는 본능과 이 세계를 이해하는 틀인 고차원적 지성을 포괄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의 작업은 표면적으로는 `이미지`에서 `오브제` 미술로의 전환으로 보이지만 볼거리가 아닌 동어반복적인 일상의 삶을 일깨우는 정신적 예술을 추구하였다. 결국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서구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성과 의식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제시한 현대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들도 이시간 이후부터 자신의 의식을 제한하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깊고도 폭 넓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2008년 12월 10일 도 병 훈
85 no image 가을, 秋전을 보고
도병훈
5544 2008-11-20
가을, 秋전을 보고 낙엽이 분분히 흩날리던 지난 11월 15일, 미술탐구반 학생들과 함께 ‘국박(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가을, 秋-유물 속 가을 이야기 전》을 보았다. 이 전시는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가을 특별전으로 가을을 소재로 한 조선시대 회화와 서간류, 한시와 시조 등을 모은 전시였다. 전시 폐막 하루 전에 보게 되었는데 질적 측면에서 내실 있는 전시회였다. 뜻밖에도 명품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먼저 이번 전시회의 최대 화제작인 이인문(1745~1824?)의 <강산무진江山無盡>도가 특별 제작된 긴 진열장에 들어 있었다. <강산무진>은 길이만 8m 56cm에 달하는 두루마리 그림이다.(*전체 길이는 9m 15cm이며, 그림 부분만 8m 56㎝임)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8m 18cm 길이인 현재 심사정의 두루마리 그림 <촉잔도권>과 더불어 불교 전통문화유산인 <괘불>도를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통 회화로 꼽힌다. <강산무진>은 1993년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화폭 전체가 공개되었다고 한다. 2005년 박물관의 용산 이전을 기념하는 개관전 때 일부만 공개된 그림을 본 후 처음으로 전체 그림을 보게 된 것이다. <강산무진>은 실경이 아닌 상상화로서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사계절을 한 폭에 담아낸 그림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연한 청녹색을 엷게 바림한 화면 위 소나무 숲을 지나 먼 산 아래 들과 강이 굽이치듯 펼쳐지다가 다시 온갖 형상의 바위들과 소나무가 어우러지고 가을이 완연한 붉은 나무들이 보인다. 그리고 배들과 포구, 불탑, 마을 풍경도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도입부에서는 나무와 사람 집이 좀 더 크면서도 자세하게 묘사되다 점점 개미떼처럼 작아지면서 풍경 위주로 펼쳐진다. 그림 속에는 곳곳에 나귀를 타고 산수를 유람하는 이들부터 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어부, 절벽에 수직으로 길게 드리워진 도르래를 이용해 물건을 나르는 필부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생활풍속도 함께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자연과 일생을 한 화면 속에서 보는 듯한 그림인 것이다. 하지만 <강산무진>은 그림 내력에 얽힌 제문, 제발 등이 없어 구체적인 제작 경위는 현재 밝혀진 바 없는 그림이다. 다만 ‘추사진장’秋史珍藏 이라는 낙관이 찍힌 점으로 미루어 한 때 추사 김정희가 소장하였음을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두루마리 그림은 동아시아에서 즐겨 그린 형식이다. 이인문은 조선 후기 특유의 담백한 화풍으로 이 장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이 그림은 중국풍의 전통화법의 틀에서 벗어난 18세기 문화부흥기 조선 회화의 훌륭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그림은 한 그림 속에 다시점이 다 구사하는 전통회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즉 장면 장면마다 때로는 내려다보는 심원법, 또는 올려다보는 고원법 등으로 다양한 시점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땅의 바위나 산의 주름을 나타내는 붓질법인 ‘준법’이 다양하게 구사된 그림으로도 그 특색이 두드러진다. 지난 2007년 봄, 인사동의 《동예헌 30년 전》에 출품된 이인문의 화첩 그림을 보면서부터 이후 이인문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때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이인문의 그림이 그간 과소평가되었다는 점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인문은 조선 정조 때 단원 김홍도와 어깨를 겨룬 궁중 화원이었지만, 특히 산수화에서 조선 특유의 맑으면서도 바람이 솔솔 부는 듯한 풍광을 매우 잘 나타낸 화가이다. 그리고 안견 작으로 전해지는 사계절 산수도,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모음인 《풍악도첩》, 정조 대왕의 국화 그림, 부자 사이인 김두량 · 김덕하가 그린 <사계산수> 등 조선회화사 에 중요한 작품으로 나오는 명품들이 줄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벼 타작하는 농민들과 감독관의 관계를 잘 표현한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에 나오는 <타작)> 등 대개의 회화는 평소에는 수장고에 보관되는 그림이어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그림들이었다. 이 중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등이 남긴 금강산 그림은 실재하는 산수를 직접 화가가 그린 것이다. 겸재 정선의 《풍악도첩》은 그가 36세 때인 신묘년(1711년)에 그린 그림들로 정교한 필치와 묘사에서 그의 초기 화풍을 잘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그간 주로 간송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보았던 만년의 그림들과 그 화풍이 크게 다르다. 그런데 《풍악도첩》에 나오는 이들 초기 그림과 함께 경재 정선이 지금의 경북 포항시 인근에 위치한 청하 현감으로 부임하여 화풍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는 시기인 그의 나이 58세 때 그린 <내연삼용추>도 함께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 그의 화풍 변화를 한 공간 한 장소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삼성 리움에 있는 또 한 폭의 같은 제목의 그림과 더불어 이 <내연삼용추>그림은 지난 10여 년간 겸재 정선의 예술세계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지난 90년대 초반이후 전시되지 않아 실물을 볼 수 없었는데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비단에 그린 소품이지만 겸재는 이 그림에서부터 활달하면서도 거침없는 수직 준법 위주의 필치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금강산 전경을 그린 정수영의 <해산첩>, 단원의 스승이었던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의 <풍악장유첩>도 볼 수 있었으며, 정조의 <국화도>, 국화와 벌을 그린 김희성의 <초총도>,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김득신의 <노안도>도 담백하고 맑은 수묵과 묘법 등이 잘 구사된 그림들이어서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옛 유물이나 그림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치를 갖는 건 아니다. 옛 유물 중에는 그야말로 운 좋게 살아남은 매우 관습적인 것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옛 유물이나 그림에서도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상상 이상으로 전통문화예술의 세계는 깊고 넓으며, 그만큼 이러한 가치는 새로운 예술 또는 삶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발견은 단지 옛 것을 좋아하는 취미활동 차원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회화는 서양의 주류 근대미술처럼 사물의 재현이나 시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이 아님을 자각케 한다. 오히려 우리의 전통회화는 철저히 순간순간 우연 속에 생성된 듯한 시간 속 예술이며, 그래서 초월이나 영속성과는 대조적으로 변화의 진폭이 큰 예술성을 띤다. 이 점은 같은 동양권의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더 그러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땅에서 생겨난 훌륭한 전통예술은 삶과 세계에 대해 매우 낙천적인 감성과 기상을 드러내며, 그럼에도 살면서 맞닥뜨린 숱한 역경과 슬픔을 넘어선 차원이어서 그런지 경박하지 않다.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속에 한 순간 우듬지가 드러나는 것처럼 가을은 세상과 삶이 더 온전하고도 낯설게 노출되는 '시공(space-time)'의 계절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실감할 수 있듯, 우리의 선조들이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이란 계절에 더 풍성한 예술적 성과를 거둔 것도 이러한 이 땅 특유의 풍토와 기후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역시 가을은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인가 보다. 2008년 11월 17일 도 병 훈
84 no image 김홍도와 신윤복 신드롬과 조선 후기 회화의 단면
도병훈
8184 2008-10-31
김홍도와 신윤복 신드롬과 조선 후기 회화의 단면 조선 후기 화가에 대한 신드롬 언제부터인가 사극이 TV드라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중문화의 주요 콘텐츠로 등장했다. 과거 주로 왕과 신하, 주변 인물 위주의 왕조사극이었지만 최근 옛 고구려 땅을 무대로 하여 영웅 중심의 블록버스터 사극이 성행하고 그 범위도 조선과 고려를 넘어, 통일신라 ․ 발해 ․ 고조선까지 이른다. 게다가 주제와 범위도 확대되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퓨전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어 다양해진 듯 보인다. 그래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을 구분했던 이전의 드라마와 다른 특색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풍조에 힘입어 올해 들어 조선시대의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1758~?)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TV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이들에 대한 신드롬 현상까지 생겨났다. 주1) 이런 현상은 정신문화의 정수인 문화 예술을 콘텐츠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예술을 다루는 드라마답게 그림의 세부까지 섬세하게 영상미로 보여준 것은 전례없는 일이어서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주2)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의 그럴듯함은 실제 예술가 및 예술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조선 후기 예술가의 삶과 예술 최근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는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한 소설을 바탕으로 그들을 스승과 제자로 삼아, 여기에 ‘남장여자’라는 제3의 섹슈얼리티를 접목시킨 이야기다. 또한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전성기)의 왕인 정조라는 아이콘을 통해 음모와 추적이라는 스릴러의 요소도 가미했다. 그러나 김홍도와 신윤복의 실제 삶과 예술은 드라마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로 김홍도는 신윤복보다 그의 아버지 신한평과 함께 주로 활약했다. 주3) 또한 홍도의 라이벌로 당대 제일의 초상화가로 꼽혔던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1756~1803년 이후)에 대한 극중 역할 설정도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단원 김홍도 하면 조선을 대표하는 풍속화가로만 알지만 그렇지 않다. 김홍도는 꽃과 나무, 동물 등을 그린 화조도, 영모도(새 또는 짐승 그림)와 금강산 등을 그린 산수화, 야외나 궁중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그린 그림, 초상화, 삼강오륜 같은 책에 들어가는 삽화, 그리고 불교화까지 모든 종류의 그림을 잘 그렸다. 게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거문고나 퉁소의 연주도 뛰어나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화가 전한다. 이처럼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으며, 이 뿐만 아니라 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주4) 시도 잘 써서 아들인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주4) 1745년(영조 21년)에 중인 계층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 당시 시서화에 능한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화원의 화가가 되었다. 주5) 그가 강세황에게 배운 것은 그림뿐이 아니었다. 강세황은 그에게 시와 글도 가르쳤다. 그래서 김홍도는 여느 중인 출신의 화가들과 다르게 시심詩心어린 그림을 남겼으며 자작시를 그림 곁에 쓰기도 했다. 김홍도는 젊은 시절에 주로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이 무렵 그린 그림들이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으로 남아 있다. 이 화첩 중 춤추는 소년과 피리를 부는 말뚝벙거지의 사내의 생동감 있는 표정 등 흥에 겨운 군상의 율동감을 멋지게 표현한 <무동舞童>, 씨름 장면을 실감나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린 <씨름도> 등이 특히 유명하다. 김홍도는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진행되는 그림 사업에는 항상 참여하였다. 그래서 왕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도사’에도 여러 번 화사로서 이명기와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김홍도가 마흔 네 살 때는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 일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이 때 그린 것이 바로 온건하고 세밀한 화풍의 《해산첩海山帖》이다. 김홍도가 마흔 다섯 살(정조13년, 1789년)이었을 즈음에는 정조의 지시로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후 그는 일본 쓰시마 섬으로 가서 지도를 그려온다. 그리고 중국에도 다녀오면서 체험의 폭과 안목을 넓힌다. 1791년 김홍도는 이명기와 함께 어진도사에 참여한 공로로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며, 이때부터 김홍도는 사대부들의 그림인 문인화을 즐겨 그린다. 이를 통해 김홍도 역시 자신의 신분을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으면서 주로 시적인 정취를 중시하면서도 화면을 대담하게 단순화시키는 식으로 화풍이 달라진다. 문인화가로서 김홍도의 진면목은 1796년 그가 52세 때 그린 《단원절세보첩, 일명 병진년 화첩》에 잘 드러난다. 화조산수화로 구성된 이 화첩은 김홍도 그림의 진수를 보여준다. 선명한 필치와 맑은 기운, 넘치는 시정,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여백 등이 그러하다. 거의 모든 그림이 명품이지만 이 화첩 중의 백미는 <소림명월도>을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둥근 보름달을 배경으로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를 능란한 붓놀림으로 농담처리 하여 정취가 가득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치 가을 밤 은은한 달빛과 함께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홍도는 19세기 초 무렵인 생애 말년에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 자연의 삶이 벼슬보다 더 좋다는 뜻을 담은 그림으로 1801년에 그린 것임>,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소나무 아래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으로 1805년에 그린 것임> 등의 작품을 그리면서 자연에 귀의하는 인생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세상을 떠날 때 무렵 화가 김홍도는 세상의 물욕이나 권력을 넘어선 그림을 주로 그린다. 그러나 정조의 승하 이후 6년 동안 김홍도는 대체로 병고와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도는 평생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겸재 정선과 함께 조선 후기 진경문화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답게 당시 일상적인 사람의 모습 뿐 만 아니라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나 고사 인물까지도 고유색이 짙게 드러나는 당시 조선 사람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맑으면서도 탄력 있는 붓놀림으로 그린 소나무와 생황을 부는 신선을 유연한 정취로 표현한 <선인송하취생仙人松下吹笙>, 길가 버드나무 아래 위에서 화답하는 노란 봄 꾀꼬리 한 쌍의 흐드러진 교성에 가는 길도 잊은 듯 넋을 잃고 멈춰 서 있는 그림인<마상청앵馬上聽鶯>, 《단원절세보첩》안의 산수 10폭 중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 《단원절세보첩》안의 화조 10폭 중의 하나인 <매작梅鵲>, 한 목동이 소 등에 타고 왼편으로 유유히 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기우도강騎牛渡江>, 파도와 갈매기를 맑은 필치로 그린 <창해낭구滄海浪鷗>, 고려 왕궁 옛터인 만월대 에서 열린 들 잔치를 기념한 일종의 기록화인<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 능숙하고 유려한 필치로 염불하여 서방정토로 올라가는 장면을 그린 <염불서승念佛西昇>등이 있다. 이번 TV드라마에서 김홍도의 라이벌로 나오는 화산관 이명기는 일반사람들에게 생소하지만 당대에는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혔다.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의 윤리적 이념화와 함께 왕의 초상인 어진제작은 물론 학문이 높은 사람을 기리는 숭현사상崇賢思想의 표본으로 공신들이나 사대부들의 초상을 그리게 하며, 이를 진전眞殿이나 사당 및 영당影堂에 모시고 가문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초상화를 그린 뛰어난 화가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최전성기인 18세기 후반에 뛰어난 초상화를 남긴 사람이 화산관 이명기다. 현재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초상화는 약 10여점에 이르며 이외 다수의 산수인물화가 전한다. 이명기는 36세 때인 정조 15년(1791년)에 10년 이상 선배이자 스승격인 김홍도와 신한평을 제치고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일을 총괄하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첫 번째 어진을 그렸다. 그의 나이 37세 때인 정조16년(1792년)에 그린 <번암 채제공의 73세 초상>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인 곰보 자국은 물론 사팔뜨기의 눈까지 그대로 그릴 정도로 묘사가 치밀하다.(* 그런데 이번 TV드라마에서는 오히려 김홍도와 신윤복이 체제공의 사팔뜨기 눈을 묘사하는 것으로 나온다)뿐 만 아니라 속옷 색까지 얼비치는 의복의 묘사도 절묘하여 그가 남기 초상화 중에서도 <서직수 상>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당시 기록에 이 그림을 본 정조가 우울해 보인다며, 다시 그리게 할 것을 권하자, 채제공이 그림 그릴 당시 실제로 우울했다며 사양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이명기가 사람의 심리적 내면까지 묘사할 수 있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극진한 필력으로 묘출한 그의 초상화는 당시 사대부들의 기질과 내면적 성정, 품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명기의 대표작으로는 <강세황 상>, <오재순상>, <유언호상>, <허목 상>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여러 점의 인물 산수화도 남겼다. 이명기의 초상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초상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와는 다르다. 중국의 초상화는 과다한 장식적 배경까지 함께 그리거나 주로 남녀 군상 및 조상들을 함께 그리는 것이 주된 특성이라면, 일본의 초상화는 인물의 표정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조선의 초상화는 그리는 대상인물을 정직하게 그리려 한 특성을 보여준다. 신윤복은 김홍도, 김득신金得臣(1764~1822)과 더불어 조선의 주요 풍속화가로 꼽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그에 대한 연구 성과도 드문 편이다.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속설과 함께 오세창吳世昌의《근역서화징》에도 단 두 줄의 기록만이 남아 있다. 신윤복申潤福(1758~),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본관 고령高靈, 첨사 신한평申漢枰의 아들.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이렇듯 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주6) 그렇지만 그림에 남긴 간기로 보아 1805년부터 1813년까지 약 8년간 주로 많은 그림을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는 이미 김홍도가 죽고 난 이후다. 그의 부친 신한평은 임금 초상인 어진 제작에 참여한 어용화사로 노년까지 도화서에 봉직했다. 근 40년간에 걸친 이 같은 아버지의 도화서 활동 때문에 부자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것을 꺼리는 이른바 ‘상피相避’ 풍조로 신윤복은 제도권 밖에 머물게 되었고, 그래서 한량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야유회나 기방을 빈번하게 출입하면서 그만의 농염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수화와 문인화가 으뜸이던 시대에 신윤복은 주로 여인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여인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주변 배경을 살리는 새로운 구도와 여인의 얼굴 화장, 입술, 의복에 화려한 채색을 하는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는 여인들의 과감한 노출이나 기녀와 한량의 유흥을 그려낸 모습 등의 직접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는 섬세하고 유연한 선을 구사하면서도 채색을 즐겨 사용했다. 전통수묵화에서 색채는 극도로 제한된다. 색채가 가미되어도 수묵담채화 정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윤복의 풍속화는 색채를 적극적으로 구사한 그림이다. 물론 서양의 야수주의 그림처럼 대담하고 강렬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색채감은 오늘날의 대중적 영상 이미지와도 부응한다. 무엇보다 신윤복은 여성성을 세련된 감각으로 보여주는데 특히 그의 그림은 여자의 심리적 내면까지 정감 있게 포착한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소재 선택, 구성, 인물의 표현방법 등에서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매우 다르다. 신윤복의 그림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이라 하기도 함, 국보 135호)주7)으로 이 그림들은 조선 후기시대 우리 조상들의 풍속을 잘 알게 한다. 《혜원전신첩》은 간송미술관에서 1930년대에 일본 오사카에서 고미술상으로부터 구입한 후 새로 표구한 것이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기생과 한량을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행락이나 정념 또는 양반사회의 풍류를 소재로 그린 것으로, 경아전京衙前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의 서울 시정의 유흥적· 향락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각 인물들의 몸동작과 표정을 비롯한 배경 등을 신윤복은 정교하교 치밀한 소묘력으로 표현했다. 특히 가늘고 유연한 필선과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최대한 살린 색채의 효과적인 사용 등을 통하여 당시의 풍속 상과 풍류생활의 멋과 운치를 전해준다. 등장인물들은 남녀 모두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선정적인 모습에 맵시와 멋이 넘치는 자태로 그려 도회적인 세련미와 함께 색정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신윤복의〈월하정인月下情人〉은 그의 풍속화 중에서도 가장 심리적인 내면 묘사를 잘한 작품으로 꼽힌다. 그림을 보면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의 자제인 듯 잘 차려 입은 청년이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다.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다.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 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른다. 이 그림의 찬문撰文은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고 적혀 있다. 주6) 이처럼 그의 그림들은 심지어 한 밤중의 도성 뒷골목에서 두 남녀가 은밀한 만남을 즐기는 것도 보여주며, 나아가 유교문화와 가장 근접해 있는 선비들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생들과 놀이를 하는 모습 등을 대담하게 또는 은근하게 묘사하여 현대의 관점에서도 다소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그림 속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의 엄한 도덕적 규범과 금기를 벗어나, 솔직하고도 당당하게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당시 사대부들이 엄하고 강직하기만한 도덕군자만이 아닌, 때로는 인간적 본능과 감정에 충실 하는 감성적인 측면도 드러나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제반 사회, 도덕적 규범이 엄격했던 당시 유교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서민층과 대다수 양반가 남성들은 비교적 폭 넓은 성적 자유를 향유하며 살았었지만 반가의 여성, 특히 과부들에게는 수절이 강요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혜원의 그림 중에는 이런 사회적 제약을 넘어선 그림까지 있다. 이런 그림의 예로〈이부탐춘嫠婦耽春〉을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높은 담장 밖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어느 화창한 봄날, 과부로 보이는 반가의 두 여성이 내원의 고목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서, 마당에서 짝짓기에 열중하는 개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는 장면을 그렸을 알 수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김홍도의 <주막>과 신윤복의 <주사거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주로 해학적인 필치로 다루었다면, 그는 젊은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남녀 간의 애욕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매우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한 까닭에 그의 작품은 매우 세련된 감각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의 풍속화는 당시 살림살이와 복식 등을 자세히 묘사하여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김홍도 그림과의 차이는 인물 묘사에서 뚜렷이 나타나며, 대체로 얼굴은 갸름하며 섬세한 ‘세금선’의 필치로 인물의 윤곽선을 그리면서 아름다운 채색을 적절히 사용했다. 그러나 산수를 배경으로 한 풍속화에서는 준법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윤복은 무속巫俗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풍모를 보여주는 풍속화도 그렸으며, 산수화는 옅은 먹과 옅은 채색(바림)을 주로 사용해 맑으면서도 참신한 감각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미인도>도 신윤복의 대표작중 하나로 꼽는다. <미인도>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당시의 기생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지만 옷맵시나 여인의 세련도고도 품격 있는 자태로 보아 지체 높은 사대부의 소첩 같기도 하다. 윤이 나는 트레머리의 한 쪽에 자줏빛 댕기가 살짝 내비꼈고, 자주고름에 달린 수마노 삼작노리개를 그 희고 연연한 손으로 매만지는 자태가 매우 곱다. 초승달 같이 길고 가는 실눈썹과 귀 뒤로 하늘거리는 잔 귀밑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저 단아한 눈매를 섬세하게 그렸다. 왼 쪽 상단에 보이는 제시의 뜻은‘화가의 가슴속에 만 가지 봄기운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 준다.(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언물전신盤礡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이다. 주8) 신윤복의 그림은 소재의 선정이나 구성법, 인물들의 표현기법 등에서 특히 김홍도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신윤복도 김홍도처럼 여러 가지 그림에 능해서 남종문인화풍의 산수, 사실적인 묘사력과 서정이 조화를 이룬 동물그림 등도 잘 그렸다.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의 유운홍劉運弘과 유숙劉淑 등을 거쳐 1930년대 이용우李用雨의 인물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신윤복의 화풍은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 미상의 풍속화나 민화 등에도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신윤복의 필치를 가장한 춘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화격으로 진, 위작을 구별하며 현재 진작은 백 점이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세계는 차이점과 함께 유사성도 있다. 먼저 김홍도는 젊은 시절 풍속화를 통해 ‘사람살이’에 주목하여 일상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지만 필력 면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병진년 화첩》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는 성리학적 유교에 바탕으로 둔 문인화를 그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이 신윤복과 현저하게 다른 점이다. 즉 신윤복은 김홍도와 달리 이러한 문인화적 화격을 보여주는 그림을 별로 많이 그리지 않았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주로 기녀들이나 미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신윤복은 여성을 통해 성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으며 이에 따라 당대 남녀 유별한 유교 문화권에서 신윤복의 그림세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경제력의 발달이 섹슈얼리티의 주목과 맞물려 가는 것에 맞추어 신윤복은 기녀들을 주인공으로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풍자하고, 추상적 관념론을 우선시하는 화풍에 반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TV드라마는 한 화가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림 자체에 관심이 있는 아니라 어디까지나 화가를 소재로 한 극적 이야기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사건이나 이야기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개되며, 제작을 추진 중인 영화 ‘미인도’는 남장 여성을 둘러싼 섹슈얼리티에 더 주목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최근의 소설이나 TV 드라마에 나오는 조선 후기 화가들을 중심으로 한 코드 역시 최근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대중문화와 장르문학의 관계를 보여줄 뿐 그들의 삶의 실상이나 예술의 본질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전통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TV드라마라든가 한 영화제작을 계기로 예술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여러모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제대로 만든 드라마 한 편은 문화상품으로서 뿐 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김홍도나 신윤복 신드롬 현상은 문화에 대한 참된 관심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시대 대중문화의 전형적 현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흥미를 조장하기 위한 역사왜곡은 물론 예술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없으며, 그 대신 에로티시즘을 미끼로 ‘예술’이나 ‘천재’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과 콤플렉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중적 흥미의 근간인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예술적인 것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서의 신윤복이나 김홍도는 참된 예술가상이 아니며, '모든 것‘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콘텐츠일 뿐이다. TV드라마는 무엇보다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윤복과 김홍도에 대한 일시적인 신드롬 현상은 허상에 대한 열광이라 할 수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최근 TV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예술가상’이나 예술작품은 오히려 예술의 참된 가치를 대중들로부터 소외시키는 역현상을 초래하며, 이런 면이 대중문화의 실상이자 근본적 문제점이기도 하다. 2008년 10월 31일 도 병 훈 주1) 10월 13일부터 26일까지 2주간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보화각설립 70주년 기념 서화대전’에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이 전시되었는데, 전시기간 내내 사람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는 바람에 전시회를 보려면 몇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필자도 지난 19일에 아침 일찍 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늘 봄 가을에 간송미술관을 다녔지만 전시기간동안 사람이 붐빈 것은 최근의 일이다. 주2) 이전보다 드라마에 나오는 서화의 퀄리티 면은 확실히 진일보한 듯하지만 아직도 우리 전통 서화 특유의 분위기나 품격을 살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 중 뛰어난 작품들은 먹을 써도 투명수채화처럼 맑은 기운이 넘치는데, 이러한 그림의 특색을 못 살리는 것은 필력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종이의 재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고급한지는 종이의 표면이 매끈해서 먹이 잘 번지지 않는다. 신윤복의 <단오 풍정> 같은 그림도 이 같은 조선종이에 그려야 인물의 윤곽선인 ‘세금선’의 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간혹 드라마에 나오는 그림 바탕종이로 일정한 가로 줄무늬가 보이는 현대의 화선지도 보였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종이다. 이 종이에 그리면 먹이 번지거나 먹빛이 맑지 못하다. 고급 한지를 구할 수 없다면 일회 촬영용 그림이므로 굳이 화선지나 질 나쁜 한지를 쓸 것이 아니라 차라리 현대의 펄프종이를 쓰는 것이 당시의 종이와 그림의 특색을 더 근사하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주3)신윤복의 그림 중에는 김홍도의 그림과 유사한 부분도 있어 신윤복이 어느 정도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단원과 혜원에 대한 기본 개설서로는 최완수가 쓴 「단원 김홍도」와 이원복이 쓴 「혜원 신윤복의 회화」(『간송문화』, 제59호 회화ⅩⅩⅩ Ⅵ, 단원 혜원,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0년)의 75-108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단원 그림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은 『간송문화』제68호(2005년)를 참조할 것. 단원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 논고집인 『단원 김홍도』(삼성문화재단, 1995년)를 참조할 것. 주4)조선 말기 화가인 조희룡趙熙龍에 따르면, “김홍도는 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성미는 너그럽고 선선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지 않아서 신선과 같은 인물” 이었다고 한다. 주5) 강세황과 김홍도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김홍도는 중인으로서 벼슬을 하는 데, 첫 번째 부임지가 바로 스승 강세황과 함께 근무하는 장원서(궁중의 화초나 과실나무들을 관리하는 곳)였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당시 우리 미술사상 제일의 인물로 높이 평가하였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풍속화 솜씨에 대해 “더욱 우리 동쪽나라 인물풍속을 잘하여, 선비가 공부하는 것이나, 장사치가 시장으로 치닫는 것. 규중의 여인, 농사꾼, 누에치는 여인 및 가옥의 규모와 산과 들 같은데 이르러서는 그 형상을 거의 실제 모습으로 그려 어그러짐이 없었으니 이는 곧 옛날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주6) 이명기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열녀서씨 포죽도》와 이명기의 그림세계」,『나와 너의 그림세계』책을 읽다, 2007, 318~328쪽 참조 주7) 김재희의 ´색 샤라쿠´는 일본 에도에서 1794년 10개월 동안 140여점의 그림을 남기며 불꽃처럼 활동하다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 전설의 화가 샤라쿠를 신윤복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밑받침하는 사료적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신빙성이 극히 희박하다. 샤라쿠의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드가 등 인상파는 물론 반 고흐와 고갱 등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주8)《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실린 그림은〈월하정인 月下情人〉·〈월야밀회月夜密會〉·〈춘색만원 春色滿園〉·〈소년전홍少年剪紅〉·〈주유청강舟遊淸江, 강에서 뱃놀이하는 장면 〉·〈연소답청 年少踏靑,젊은 선비들이 새싹을 밟는다는 뜻으로 봄 들놀이가 끝나고 돌아오는 장면〉·〈상춘야흥賞春野興, 봄날 야외에서 벌어진 연회 장면〉··〈납량만흥 納凉漫興〉·〈무녀신무 巫女神舞,굿하는 장면〉·〈주사거배酒肆擧盃〉·〈쌍검대무 雙劍對舞, 양반들 앞에서 쌍칼을 들고 춤을 추는 장면〉·〈휴기답풍 携技踏楓〉·〈정변야화 井邊夜話 봄밤에 우물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양반이 지켜보는 장면〉·〈계변가화 溪邊佳話,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활과 화살을 들고 그 옆을 지나는 젊은 선비를 그린 장면〉·〈삼추가연 三秋佳緣, 어린 기생의 초야권을 사고파는 장면〉·〈표모봉심 漂母逢尋〉·〈야금모행 夜禁冒行, 한 밤에 기생과 양반이 어디론가 가려는 모습〉·〈유곽쟁웅 遊廓爭雄,기방 문 앞에서 벌어진 싸움을 말리는 장면〉·〈이승영기 尼僧迎妓〉·〈이부탐춘 嫠婦耽春>·〈단오풍정 端午風情〉·〈홍루대주 紅樓待酒〉등 모두 30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폭마다 제시와 낙관이 있다. 주9) ‘얇은 저고리 밑, 가슴 속 가득한 정을 붓끝으로 전하노라資薄縛胸中萬華云 筆湍話與把傳神’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83 no image 볼거리 없는 전시? 《묵음(&#40665;音)》전을 보고
도병훈
5552 2008-10-15
볼거리 없는 전시? 《묵음(黙音)》전을 보고 1. 주말인 어제 오늘 이틀 동안 거의 하루 종일 계속된 고성방가로 소음에 시달렸다. 시의 체육관 및 야외 잔디 운동장 시설이 아파트 근처에 있다 보니 해마다 이 맘 때면 어김없이 되풀이 되는 연례행사로서 어제부터 이틀통안 거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주변까지 떠들썩하게 만드는 이런 각종 행사는 거의 매달 한 두 번 씩 한다. 사실 전국 각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성행한다. 알고 보면 속빈 강정인 '가짜 이벤트(pseudo-event)'에 지나지 않지만 막대한 자본을 들인 행사답게 거창하고도 요란하게 치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떠들썩한 행사가 문화인 줄 아는 이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각종 비엔날레를 포함해 지역마다 치러지는 각종 문화행사도 그 본질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귀가 멍할 정도로 거의 연이틀 동안 폭력적으로 강요되는 고성방가를 들으며, 아이러니 하게도 지난 9월 23일부터 외대 옆 SPACE ZIP GALLERY에서 열리는 전시회인《묵음(黙音)》전에 대한 글을 썼다. 주1) 그만큼 소모적인 행사가 떠들썩하게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기만하는 일임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으며, 또한 욕망을 충족하는 대상으로서의 미술문화 양상도 이러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 상황과 대조해보면 '묵음'의 문제의식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2. 현대미술의 거칠고 도발적인 외피는 우상처럼 떠받들어 온 미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의심과 저항에서 비롯된 태도의 문제이다. 미술을 둘러싼 첨예한 비평 담론은 이러한 태도에 부응한 노력의 산물이며, 이곳에 박제된 아방가르드가 설 자리란 없다. 시각적으로 그럴듯한 외형을 취한다고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진정성을 연출하는 것만큼 역겨운 것도 없다. 위 글은 《묵음(黙音)》전 팸플릿에 나오는 기획의 글 앞부분이다. 이어 이 글은 세속에 영합하기 위해 사이비 작품과 거짓 비평이 득세하는 한국의 미술계를 날카로운 어조로 질타하며, ‘미술 하는 일’이 더 이상 눈요기 거리의 제시가 아님을 역설한다. 이 글을 통해 이번 전시가 현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방식과 기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기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글은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전시 기획의 표제도 《묵음(黙音)》, 또는 ‘볼거리 없는 전시’라는 반어법적 표현이다. 즉 눈요기 거리(마르셀 뒤샹의 어법을 빌자면 망막에 호소하는)는 넘쳐나나 이면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상황에 대한 도발적 표제임을 직감할 수 있다. ‘묵음’이란 말은 선불교적 용어인 ‘연주하지 않은 연주’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또는 수행기간 동안 한 마디로 하지 않는다는 ‘묵언 수행’이란 말도 떠올리게 한다. 그 목적은 엄연히 다르지만. 전시장에서는 먼저 최선의 <썩은>이란 작업을 볼 수 있다. 이번 기획전을 앞두고 약 1년 간 냉장고 바깥 위에 방치해두어 검은 색 상태로 변한 자신의 썩은 피로 중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리커란李可染의 수묵산수화라가 추사 김정희의 ‘서화일치’ 론 같은 동양의 전통을 의식하면서도 기존의 회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점을 찍듯 선을 내리긋듯 단순한 흔적을 남긴 작업이다. 즉 피가 검은 색이어서 먹물 대신 쓴 것이며, 작업하는 동안 지독한 냄새로 숨을 멈추어야 할 정도였으나 마르고 나서는 냄새도 사라지고 검은 색도 붉은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작가가 ‘이것’이었으면 하는 의도가 배제된 이러한 과정의 어긋남에 작가는 주목한다. 그러므로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은 선혈이 낭자한 섬뜩함도, 그렇다고 구역질나게 혐오스런 이미지도 아니다. 다만 그의 운필 작업은 매끈한 하얀 종이 위에 조금 씩 조금 씩 천천히 이동한 흔적으로 인해 고동색에 가까운 붉은 색이 종이위에 응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몇 개의 점인 듯 선인 듯 간결한 행위의 흔적은 이로 인해 망설임과 단호함을 동시에 느끼게도 한다. 그렇지만 간결한 양태로 보아 무슨 형상성을 표현하기 위한 선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프란츠 클라인의 그림 같이 서도書道를 흉내 낸 선도 아니었다. 오히려 추사 김정희 만년의 글씨의 획처럼 어떤 이론이나 기교에서도 벗어난 질박한 선이 결연한 의지로 드러난 느낌이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몇 개의 투박한 운필 자국이 전부이지만 들여다보면 어떤 자국에선 강철을 구부려 놓은 듯 힘이 느껴졌고, 어떤 부분은 세포가 증식하는 듯 정체불명의 생명체같이 꿈틀거리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가가 원하는 것은 결과로서의 이미지는 아니다. 이 작가는 평소 서구미술문맥에서 배제된 입김, 체온 같은 약하면서도 사라지기 쉬운 것을 작업의 과제로 삼아 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는 예술세계는 통념적으로 대하는 예술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성립함을 할 수 있다. 서구미술사 문맥에서 축적된 기존의 가치를 ‘때를 벗겨내듯 씻어버리고(작가의 말임)’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의 이번 작업은 이전의 그가 해온 작업들, 이를테면 캔버스를 벗긴 작업이나, 폐유 혹은 동냥젖을 캔버스에 발랐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맥락의 방법을 구사하였음에도 마치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앞에서 한 걸음 더 내 딛는(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서는 어떠한 미적 조형의 상투성도 거부하는 생경함과 ‘뚝심’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육순호의 작업은 <심호흡>주2) 으로, 약 150cm 높이의 좌대 위에, 즉 어른의 코가 닿는 높이의 좌대 위에 정체불명의 하얀 가루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선천적 특성인 작가의 ‘오목가슴과 정상적인 체형이 가지는 차이만큼의 양을 매운 가루로 쌓아 놓은 후 작가의 함몰된 가슴으로 찍어 놓고 이를 사람의 얼굴 높이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 작가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전 작업(스프레이 락카로 사건 현장의 사람 모습을 테두리로 남겨놓고 기록해 놓은 작업)을 어떻게 풀어갈 지가 지속적인 관심사였으며, 특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과 개념을 이용하여 통념을 자극하거나 교란시키는 방식도 어쩌면 스타일화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부재不在’의 영역을 어떤 사물로서의 작품처럼 제시(연출)해 놓고 관념 혹은 감각 반응들이 서로 교차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작가의 오목가슴은 부재한 부분이지만 심호흡이 요구될 때 부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역으로 소통의 채널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동시에 ‘정말로 작가가 빠져 나가버리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을 이번 작품에서 드러낸다. 즉 개인적인 불편함, 부재의 인식을 교차시키기 위해 미술 전시장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리고 약간의 암시만을 위해 ‘찍어내는 방식’을 도입했고, 드러난 신체의 전도된 모습에서 찍어낸 가슴과 연관된 ‘호흡’의 부분을 연상시키고자 분말형태와 냄새를 도입함으로써 오히려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냄새와 호흡이라는 것도 작업의 전반적인 구성이 작동되도록 하는 일종의 ‘장치’인 것이다. 결국 이 작업은 미술 전시장에서 미술의 조형성 문제를 결부시켜 설정된 연극적인 모습, 좌대와 덩어리 작품인 것처럼 유도하지만 작품에 다가서는 순간 가루에서 자극적인 냄새로 인해 미술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감상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실제 감각 - 냄새, 재채기 등 최루가루처럼 숨 쉬는 행위를 거스르는 물질만을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분말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며, 그만큼 쉽게 사라지거나 훼손되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물질이다.) 이런 차원에서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미술이란 곧 가공된 인공 향기와 다름없다는 자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가의 신체적 특성과 결부된 작품을 보면서 문득 뒤샹의 말이 생각났다. 뒤샹은 생애 말년에 있었던 카반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며 숨 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좋아한다. 나는 내가 한 일들이 미래에 어떤 사회적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의 예술은 산다는 것일 것이다. 매순간 매 호흡은 아무데도 기록되지 않고, 시각에 호소하지도 않고, 정신적이지도 않은 작품이다. 그것은 일종의 항구적인 환희이다.” 사혜정의 작업 <X>는 손수건만한 광목천에 짙고 옅은 먹물이 여러 방울 엉겨져 떨어져 있는 상태로 제시되어 있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현 형식은 일견 평범했지만 이 작업은 특정한 숫자나 기호(전해 듣기로는 고도의 계산이 깔린 수학적 공식이나 수열 같은 수식)를 고무도장에 새겨 먹물로 얼굴에다 찍어 땀으로 흘러내린 자국이라고 한다. 수학을 전공한 후 미술작업을 하는 작가의 이채로운 경력이 이 작업에도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인류는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학문적인 수학적 사고력를 키워왔지만 특히 근대이후 과학문명의 언어로서 수학은 가장 엄밀한 사고의 영역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근현대화 과정은 곧 수학적 사고의 엄밀성을 키워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지의 X값을 푸는 방정식에 대한 도전의 역사이다. 하지만 5차 방정식은 대수적 방법으로는 풀 공식이 존재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역설적 공식이 되어버린다. 곧 삶과 문명에는 어떤 공식도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삶의 영역은 그 어떤 고차 방정식으로도 불가해한 가역성의 세계가 아닌가? 또한 오늘날 모든 것이 수치화 ․ 계랑화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을 속박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는 점도 수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혜정의 작업은 수학적 엄밀성을 넘어선 세계, 즉 일종의 카오스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수’로 이루어지는 정교하고 치밀한 사고의 과정은 머리 속 좌뇌, 그 중에서도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적 산물이지만 먹과 땀은 공간과 시간과 물성의 영역이다. 겉으로 보이는 단순성과 달리 그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장소에서 오체투지 하듯 온몸으로 행한 고투의 흔적인 것이다. 최근 과학이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과 물질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구분할 수 없는 에너지의 덩어리라고 보는 관점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최근 이론도 에너지 덩어리란 설과 공간을 중심으로 공간이 구겨져서 뭉쳐진 것이 사물이란 설이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물성에서 수치화된 ‘개념’적 수를 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수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없는 영역을 자각함으로써 차원이 다른 복합적 세계를 탐색해왔던 인간의 사고와 행위의 과정을 집약한 흔적으로 보인다. 백정기의 <RMP-b>란 영상 작업은 달리는 자전거에 장착된 카메라가 찍은 길 주변의 영상이었다. 그의 작업 중 벽면에 커다랗게 프로젝터로 보여주는 영상은 제목이 <ROADSTAR> 주4)라는 영상 기록물이다. 그리고 <RMP-b>(영상매체와 음향장비 등으로 개조된 자전거 전개도)와 <RMP주-b, 서울주행>(백정기 씨가 RMP-b를 타고 주행한 위치를 기록으로 남긴 자료)이라는 자료가 출력되어서 벽에 붙어있는 방식으로 디스플레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이번 영상은 자전거 바퀴의 고무 부분을 수레바퀴처럼 나무와 철로 교체하여 그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의 거리를 달리며 찍은 영상물로서, 그만큼 전시장 벽에 비친 화면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영상이었다. 작가의 의도는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 대한 반성인 듯 했다. TV나 각종 영상매체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이란 상업적 목적 하에 아름답게 포장된 가공된 영상으로 그것도 편집된 영상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그러한 가공된 시각이 아닌 흔들리는 영상에 비친 모습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현시대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마저 선택되고 가공된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바로 이를 거부하고자 오히려 아날로그적 방식을 도입한 것이 작가의 주된 의도로 읽힌다는 것이다. 이어령식으로 말하자면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된 디지로그 작업인 셈이다. 이 작업은 언젠가 보았던 카메라가 도로 바닥을 뒹굴며 찍게 한 영상이나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면서 찍힌 영상작업을 연상케 했는데, 예기치 않은 당혹스러움의 면에서, 무엇보다 볼거리를 거부하는 이번 전시의 취지로 본다면 이러한 영상이 더 부합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도희의 작업은 아무런 구체적 영상도 없이 치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주사선의 빛만 명멸하는 초기화면이 보이는 TV모니터를 향해 작은 화분만이 놓여 있다. 화분에는 향일성을 입증하듯 모니터 쪽으로 쏠린 모양의 식물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이 식물은 TV모니터 앞에서 자란 것도 아니므로 TV 모니터를 향한 설정은 역설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업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물체나 상황에 몰입해서 의미를 찾는 일반적인 접근(감상법)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상은 그저 현상일 뿐인데, 진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는 성경구절을 차용한 제목도 반어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찾는 진리라는 것도 관념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업은 오늘날 상업적 목적으로 고도로 발달한 영상매체에 대한 거부의식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영상매체로서 오히려 영상매체를 비판하는 의도를 담은 작업인 것이다.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오늘날 TV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의 영향력은 지배적이다. 그러나 TV 속 화면은 그 다채로운 화려한 연출력만큼이나 상업적 의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TV나 영화는 물론 ‘가공’된 영상으로 비엔날레의 주류를 이루는 비디오 아트 조차 시각적 스펙터클 효과를 보여주는 매체로서 과잉 이미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근대 이전의 인간에게 빛은 언제나 희망과 긍정의 상징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빛이 그러하고, 불교의 ‘회광반조’의 빛이 그러하다. 그리고 현시대의 영상매체의 빛-영상은 시스템화 되어 있다. 그러나 김도희의 작업은 이러한 상징이나 시스템을 벗어나 어떠한 해석도 거부하는 현상만을 너무도 단순한 형식으로 제시한다.(이 작업은 지난 9월 30일부터 위치를 전시장 입구 창가 쪽으로 옮겨 TV모니터가 창을 등지고 그 앞에 화분이 놓아두는 방식으로 설치했다고 한다. 모니터와 식물과의 상황적 관계를 희석하기 위해서 창가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캡션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모니터, 식물, 해가 떠 있는 시간, 2008로 고쳤다고 한다.) 3. 이번 전시는 예술을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감상자들에게는 정말 ‘볼거리’가 없는(?) 전시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 전시 참여 작가 중 특히 네가티브하고 역설적인 전시 방식을 택한 작가들의 문제의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만의 어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온, 그래서 당대에는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예술가들과 다르지 않다. 이번 전시의 전반적 경향은 전시를 구상하는 초기에는 작업을 선별하고 규정하는 반대급부적인 측면, 이를테면 미술의 조형적인 문제, 장식적인 문제, 스타일리쉬한 문제 등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다른 채널을 강구하고 있는 점에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 기획자의 표현을 빌면 ‘한쪽 길을 차단함으로써 다른 길을 뚫어 놓으려는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는’것인데, 이는 ‘묵음 (볼거리 없는 전시)’ 의 타이틀과 묘한 접점을 형성시키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 작품 중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활동인 전시의 특성상 좀 더 일반적 통념을 배반하는 도발적 형식으로 제시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었다. 막상 구체적 실천 단계에서는 문제의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이 있음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숭고한 미적가치나 우상적인 작가의 정형화된 틀을 대신하는 어떤 '중립지대'에 이르기 위한 방법들이다. 무엇보다 때에 따른 적절성, 즉 ‘시중時中’ 이란 말이 있듯, 전시 형식이란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도 정곡을 꿰뚫는 작업이란 규모나 외형적 세련됨, 또는 장인적 완성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벗어나 좀 더 깊고도 넓은 감응을 느끼게 하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볼거리’ 이상의 세계로서의 대응과 실천 방법은 우리 모두의 화두이리라. 2008년 9월 28일 도 병 훈 주1) 전시장에는 지난 9월 25일 다녀왔다. 전시장에서 조규현 선생님을 만났뵈었으며, 최선, 김도희, 육순호, 정동춘과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한 조선생님의 고견을 경청할 수 있었다. 주2)작품 캡션은 <심호흡, 오목가슴으로 찍어 낸 매운 가루, 2008>로 적혀 있음. 주3) 이 제목은 백정기 씨가 개조한 자전거의 원래 브랜드(?)가 ROADSTAR 여서 지어진 제목이라고 함.
82 no image 현대예술(가)의 존재방식에 대한 단상
도병훈
5501 2008-09-17
볼거리 없는 전시? 《묵음(黙音)》전을 보고 1. 주말인 어제 오늘 이틀 동안 거의 하루 종일 계속된 고성방가로 소음에 시달렸다. 시의 체육관 및 야외 잔디 운동장 시설이 아파트 근처에 있다 보니 해마다 이 맘 때면 어김없이 되풀이 되는 연례행사로서 어제부터 이틀통안 거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주변까지 떠들썩하게 만드는 이런 각종 행사는 거의 매달 한 두 번 씩 한다. 사실 전국 각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성행한다. 알고 보면 속빈 강정인 '가짜 이벤트(pseudo-event)'에 지나지 않지만 막대한 자본을 들인 행사답게 거창하고도 요란하게 치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문화인 줄 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각종 비엔날레를 포함해 지역마다 치러지는 각종 문화행사도 그 본질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귀가 멍할 정도로 거의 연이틀 동안 폭력적으로 강요되는 고성방가를 들으며, 아이러니 하게도 지난 9월 23일부터 외대 옆 SPACE ZIP GALLERY에서 열리는 전시회인《묵음(黙音)》전에 대한 글을 썼다. 주1) 그만큼 소모적인 행사가 떠들썩하게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기만하는 일임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으며, 또한 욕망을 충족하는 대상으로서의 미술문화 양상도 이러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 상황과 대조해보면 '묵음'의 문제의식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2. 현대미술의 거칠고 도발적인 외피는 우상처럼 떠받들어 온 미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의심과 저항에서 비롯된 태도의 문제이다. 미술을 둘러싼 첨예한 비평 담론은 이러한 태도에 부응한 노력의 산물이며, 이곳에 박제된 아방가르드가 설 자리란 없다. 시각적으로 그럴듯한 외형을 취한다고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진정성을 연출하는 것만큼 역겨운 것도 없다. 위 글은 《묵음(黙音)》전 팸플릿에 나오는 기획의 글 앞부분이다. 이어 이 글은 세속에 영합하기 위해 사이비 작품과 거짓 비평이 득세하는 한국의 미술계를 날카로운 어조로 질타하며, ‘미술 하는 일’이 더 이상 눈요기 거리의 제시가 아님을 역설한다. 이 글을 통해 이번 전시가 현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방식과 기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기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글은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전시 기획의 표제도 《묵음(黙音)》, 또는 ‘볼거리 없는 전시’라는 반어법적 표현이다. 즉 눈요기 거리(마르셀 뒤샹의 어법을 빌자면 망막에 호소하는)는 넘쳐나나 이면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상황에 대한 도발적 표제임을 직감할 수 있다. ‘묵음’이란 말은 선불교적 용어인 ‘연주하지 않은 연주’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또는 수행기간 동안 한 마디로 하지 않는다는 ‘묵언 수행’이란 말도 떠올리게 한다. 그 목적은 엄연히 다르지만. 전시장에서는 먼저 최선의 <썩은>이란 작업을 볼 수 있다. 이번 기획전을 앞두고 약 1년 간 냉장고 바깥 위에 방치해두어 검은 색 상태로 변한 자신의 썩은 피로 중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리커란李可染의 수묵산수화라가 추사 김정희의 ‘서화일치’ 론 같은 동양의 전통을 의식하면서도 기존의 회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점을 찍듯 선을 내리긋듯 단순한 흔적을 남긴 작업이다. 즉 피가 검은 색이어서 먹물 대신 쓴 것이며, 작업하는 동안 지독한 냄새로 숨을 멈추어야 할 정도였으나 마르고 나서는 냄새도 사라지고 검은 색도 붉은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작가가 ‘이것’이었으면 하는 의도가 배제된 이러한 과정의 어긋남에 작가는 주목한다. 그러므로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은 선혈이 낭자한 섬뜩함도, 그렇다고 구역질나게 혐오스런 이미지도 아니다. 다만 그의 운필 작업은 매끈한 하얀 종이 위에 조금 씩 조금 씩 천천히 이동한 흔적으로 인해 고동색에 가까운 붉은 색이 종이위에 응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몇 개의 점인 듯 선인 듯 간결한 행위의 흔적은 이로 인해 망설임과 단호함을 동시에 느끼게도 한다. 그렇지만 간결한 양태로 보아 무슨 형상성을 표현하기 위한 선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프란츠 클라인의 그림 같이 서도書道를 흉내 낸 선도 아니었다. 오히려 추사 김정희 만년의 글씨의 획처럼 어떤 이론이나 기교에서도 벗어난 질박한 선이 결연한 의지로 드러난 느낌이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몇 개의 투박한 운필 자국이 전부이지만 들여다보면 어떤 자국에선 강철을 구부려 놓은 듯 힘이 느껴졌고, 어떤 부분은 세포가 증식하는 듯 정체불명의 생명체같이 꿈틀거리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가가 원하는 것은 결과로서의 이미지는 아니다. 이 작가는 평소 서구미술문맥에서 배제된 입김, 체온 같은 약하면서도 사라지기 쉬운 것을 작업의 과제로 삼아 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는 예술세계는 통념적으로 대하는 예술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성립함을 할 수 있다. 서구미술사 문맥에서 축적된 기존의 가치를 ‘때를 벗겨내듯 씻어버리고(작가의 말임)’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의 이번 작업은 이전의 그가 해온 작업들, 이를테면 캔버스를 벗긴 작업이나, 폐유 혹은 동냥젖을 캔버스에 발랐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맥락의 방법을 구사하였음에도 마치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앞에서 한 걸음 더 내 딛는(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서는 어떠한 미적 조형의 상투성도 거부하는 생경함과 ‘뚝심’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육순호의 작업은 <심호흡>주2) 으로, 약 150cm 높이의 좌대 위에, 즉 어른의 코가 닿는 높이의 좌대 위에 정체불명의 하얀 가루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선천적 특성인 작가의 ‘오목가슴과 정상적인 체형이 가지는 차이만큼의 양을 매운 가루로 쌓아 놓은 후 작가의 함몰된 가슴으로 찍어 놓고 이를 사람의 얼굴 높이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 작가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전 작업(스프레이 락카로 사건 현장의 사람 모습을 테두리로 남겨놓고 기록해 놓은 작업)을 어떻게 풀어갈 지가 지속적인 관심사였으며, 특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과 개념을 이용하여 통념을 자극하거나 교란시키는 방식도 어쩌면 스타일화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부재不在’의 영역을 어떤 사물로서의 작품처럼 제시(연출)해 놓고 관념 혹은 감각 반응들이 서로 교차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작가의 오목가슴은 부재한 부분이지만 심호흡이 요구될 때 부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역으로 소통의 채널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동시에 ‘정말로 작가가 빠져 나가버리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을 이번 작품에서 드러낸다. 즉 개인적인 불편함, 부재의 인식을 교차시키기 위해 미술 전시장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리고 약간의 암시만을 위해 ‘찍어내는 방식’을 도입했고, 드러난 신체의 전도된 모습에서 찍어낸 가슴과 연관된 ‘호흡’의 부분을 연상시키고자 분말형태와 냄새를 도입함으로써 오히려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냄새와 호흡이라는 것도 작업의 전반적인 구성이 작동되도록 하는 일종의 ‘장치’인 것이다. 결국 이 작업은 미술 전시장에서 미술의 조형성 문제를 결부시켜 설정된 연극적인 모습, 좌대와 덩어리 작품인 것처럼 유도하지만 작품에 다가서는 순간 가루에서 자극적인 냄새로 인해 미술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감상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실제 감각 - 냄새, 재채기 등 최루가루처럼 숨 쉬는 행위를 거스르는 물질만을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분말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며, 그만큼 쉽게 사라지거나 훼손되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물질이다.) 이런 차원에서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미술이란 곧 가공된 인공 향기와 다름없다는 자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가의 신체적 특성과 결부된 작품을 보면서 문득 뒤샹의 말이 생각났다. 뒤샹은 생애 말년에 있었던 카반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며 숨 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좋아한다. 나는 내가 한 일들이 미래에 어떤 사회적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의 예술은 산다는 것일 것이다. 매순간 매 호흡은 아무데도 기록되지 않고, 시각에 호소하지도 않고, 정신적이지도 않은 작품이다. 그것은 일종의 항구적인 환희이다.” 사혜정의 작업 <X>는 손수건만한 광목천에 짙고 옅은 먹물이 여러 방울 엉겨져 떨어져 있는 상태로 제시되어 있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현 형식은 일견 평범했지만 이 작업은 특정한 숫자나 기호(전해 듣기로는 고도의 계산이 깔린 수학적 공식이나 수열 같은 수식)를 고무도장에 새겨 먹물로 얼굴에다 찍어 땀으로 흘러내린 자국이라고 한다. 수학을 전공한 후 미술작업을 하는 작가의 이채로운 경력이 이 작업에도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인류는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학문적인 수학적 사고력를 키워왔지만 특히 근대이후 과학문명의 언어로서 수학은 가장 엄밀한 사고의 영역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근현대화 과정은 곧 수학적 사고의 엄밀성을 키워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지의 X값을 푸는 방정식에 대한 도전의 역사이다. 하지만 일반 대수학 안에서 5차 방정식은 그것을 풀 공식이 존재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역설적 공식이 되어버린다. 곧 삶과 문명에는 어떤 공식도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삶이란 그 어떤 고차 방정식으로도 불가해한 가역성의 세계가 아닌가? 또한 오늘날 모든 것이 수치화 ․ 계랑화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을 속박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는 점도 수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혜정의 작업은 수학적 엄밀성을 넘어선 세계, 즉 일종의 카오스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수’로 이루어지는 정교하고 치밀한 사고의 과정은 머리 속 좌뇌, 그 중에서도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적 산물이지만 먹과 땀은 공간과 시간과 물성의 영역이다. 겉으로 보이는 단순성과 달리 그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장소에서 오체투지 하듯 온몸으로 행한 고투의 흔적인 것이다. 최근 과학이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과 물질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구분할 수 없는 에너지의 덩어리라고 보는 관점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최근 이론도 에너지 덩어리란 설과 공간을 중심으로 공간이 구겨져서 뭉쳐진 것이 사물이란 설이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물성에서 수치화된 ‘개념’적 수를 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수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없는 영역을 자각함으로써 차원이 다른 복합적 세계를 탐색해왔던 인간의 사고와 행위의 과정을 집약한 흔적으로 보인다. 백정기의 <RMP-b>란 영상 작업은 달리는 자전거에 장착된 카메라가 찍은 길 주변의 영상이었다. 그의 작업 중 벽면에 커다랗게 프로젝터로 보여주는 영상은 제목이 <ROADSTAR> 주4)라는 영상 기록물이다. 그리고 <RMP-b>(영상매체와 음향장비 등으로 개조된 자전거 전개도)와 <RMP주-b, 서울주행>(백정기 씨가 RMP-b를 타고 주행한 위치를 기록으로 남긴 자료)이라는 자료가 출력되어서 벽에 붙어있는 방식으로 디스플레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이번 영상은 자전거 바퀴의 고무 부분을 수레바퀴처럼 나무와 철로 교체하여 그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의 거리를 달리며 찍은 영상물로서, 그만큼 전시장 벽에 비친 화면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영상이었다. 작가의 의도는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 대한 반성인 듯 했다. TV나 각종 영상매체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이란 상업적 목적 하에 아름답게 포장된 가공된 영상으로 그것도 편집된 영상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그러한 가공된 시각이 아닌 흔들리는 영상에 비친 모습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현시대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마저 선택되고 가공된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바로 이를 거부하고자 오히려 아날로그적 방식을 도입한 것이 작가의 주된 의도로 읽힌다는 것이다. 이어령식으로 말하자면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된 디지로그 작업인 셈이다. 이 작업은 언젠가 보았던 카메라가 도로 바닥을 뒹굴며 찍게 한 영상이나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면서 찍힌 영상작업을 연상케 했는데, 예기치 않은 당혹스러움의 면에서, 무엇보다 볼거리를 거부하는 이번 전시의 취지로 본다면 이러한 영상이 더 부합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도희의 작업은 아무런 구체적 영상도 없이 치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주사선의 빛만 명멸하는 초기화면이 보이는 TV모니터를 향해 작은 화분만이 놓여 있다. 화분에는 향일성을 입증하듯 모니터 쪽으로 쏠린 모양의 식물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이 식물은 TV모니터 앞에서 자란 것도 아니므로 TV 모니터를 향한 설정은 역설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업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물체나 상황에 몰입해서 의미를 찾는 일반적인 접근(감상법)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상은 그저 현상일 뿐인데, 진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는 성경구절을 차용한 제목도 반어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찾는 진리라는 것도 관념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업은 오늘날 상업적 목적으로 고도로 발달한 영상매체에 대한 거부의식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영상매체로서 오히려 영상매체를 비판하는 의도를 담은 작업인 것이다.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오늘날 TV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의 영향력은 지배적이다. 그러나 TV 속 화면은 그 다채로운 화려한 연출력만큼이나 상업적 의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TV나 영화는 물론 ‘가공’된 영상으로 비엔날레의 주류를 이루는 비디오 아트 조차 시각적 스펙터클 효과를 보여주는 매체로서 과잉 이미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근대 이전의 인간에게 빛은 언제나 희망과 긍정의 상징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빛이 그러하고, 불교의 ‘회광반조’의 빛이 그러하다. 그리고 현시대의 영상매체의 빛-영상은 시스템화 되어 있다. 그러나 김도희의 작업은 이러한 상징이나 시스템을 벗어나 어떠한 해석도 거부하는 현상만을 너무도 단순한 형식으로 제시한다.(이 작업은 지난 9월 30일부터 위치를 전시장 입구 창가 쪽으로 옮겨 TV모니터가 창을 등지고 그 앞에 화분이 놓아두는 방식으로 설치했다고 한다. 모니터와 식물과의 상황적 관계를 희석하기 위해서 창가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캡션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모니터, 식물, 해가 떠 있는 시간, 2008로 고쳤다고 한다.) 3. 이번 전시는 예술을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감상자들에게는 정말 ‘볼거리’가 없는(?) 전시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 전시 참여 작가 중 특히 네가티브하고 역설적인 전시 방식을 택한 작가들의 문제의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만의 어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온, 그래서 당대에는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예술가들과 다르지 않다. 이번 전시의 전반적 경향은 전시를 구상하는 초기에는 작업을 선별하고 규정하는 반대급부적인 측면, 이를테면 미술의 조형적인 문제, 장식적인 문제, 스타일리쉬한 문제 등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다른 채널을 강구하고 있는 점에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 기획자의 표현을 빌면 ‘한쪽 길을 차단함으로써 다른 길을 뚫어 놓으려는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는’것인데, 이는 ‘묵음 (볼거리 없는 전시)’ 의 타이틀과 묘한 접점을 형성시키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 작품 중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활동인 전시의 특성상 좀 더 일반적 통념을 배반하는 도발적 형식으로 제시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었다. 막상 구체적 실천 단계에서는 문제의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이 있음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숭고한 미적가치나 우상적인 작가의 정형화된 틀을 대신하는 어떤 '중립지대'에 이르기 위한 방법들이다. 무엇보다 때에 따른 적절성, 즉 ‘시중時中’ 이란 말이 있듯, 전시 형식이란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도 정곡을 꿰뚫는 작업이란 규모나 외형적 세련됨, 또는 장인적 완성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벗어나 좀 더 깊고도 넓은 감응을 느끼게 하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볼거리’ 이상의 세계로서의 대응과 실천 방법은 우리 모두의 화두이리라. 2008년 9월 28일 도 병 훈 주1) 전시장에는 지난 9월 25일 다녀왔다. 전시장에서 조규현 선생님을 만났뵈었으며, 최선, 김도희, 육순호, 정동춘과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한 조선생님의 고견을 경청할 수 있었다. 주2)작품 캡션은 <심호흡, 오목가슴으로 찍어 낸 매운 가루, 2008>로 적혀 있음. 주3) 이 제목은 백정기 씨가 개조한 자전거의 원래 브랜드(?)가 ROADSTAR 여서 지어진 제목이라고 함.
81 no image 이동엽의 회화, 채움과 비움 ‘사이’에 대한 소고
도병훈
8213 2008-08-08
아래 글은 "미술과 담론" 26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동엽의 회화, 채움과 비움 ‘사이’에 대한 소고 1. 2008년 5월, 학고재에서 이동엽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의 그림은 1970년대 초반의 <컵> (*무상-상황)시리즈 작업에서부터 최근 작업인 <사이間>시리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거의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화면 가득히 ‘여백’이며, 텅 비어 고요하며, 맑은 물처럼 담백한 그의 작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흔히 ‘여백’은 이성을 중시하고 물질을 강조해온 서구 정신과는 대비되는 핵심어로 여기며, 비어 있지만 기운으로 충만한 세계, 존재가 아닌 생성의 공간이라 말한다. 특히 대상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형사形似’보다 뜻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해온 전통 문인화에서 여백은 비가시적 세계를 함축한 심원한 ‘비움’의 공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러한 ‘여백’의 미학을 브랜드처럼 표방하는 현대작가도 있다. 그러나 근 현대란 시기는 여러 면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패러다임의 시대이므로 과거 전통적인 미학과 방법론으로는 한계가 있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는 격변과 혼미상황으로 점철된 시기다. 불과 수십 년 만에 농경사회에서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은 인드라망 속의 무아적 존재이지만 미시사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마다 그 역사적 경험의 진폭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동엽의 그림에 대한 접근도 먼저 근현대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의 개인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2. 이동엽의 그림은 겉으로 보기에 극히 허허롭고 단순해서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듯한 그의 그림 저편에 실은 너무 많은 사건과 얼룩진 상처(트라우마)와 당대의 풍경이 존재하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작가는 이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주1) 이러한 사실은 그의 최근 작업일기 서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화했다고 믿는 인간의 영혼,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지금 어느 지점에 닿아 있는지,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는 테러, '성전'이라는 이름의 전쟁, 기아, 인간 의지로 극복하지 못한 이 모든 혼돈의 세계를 직시하며 동양의 우주적 자연관을 사유한다. 해방 직후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그의 유년시절은 우리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이자 가장 궁핍한 시기였으며, 당시 세상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주2) 이런 현실일수록 대조적으로 더욱 자연의 세계를 극히 아름답게 체험할 수도 있는데, 이동엽의 유년 시절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강력한 체험이 부산 피난시절 태종대 앞 바다를 본 기억이었다. 주3)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아름다운 체험을 한다. 그가 서울 용산에서 살 무렵인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머물고 있던 지리산 동화골이란 곳에 가서 파란 이끼가 낀 자연 웅덩이 샘에서 맑은 샘이 솟는 것을 본 것이다. 이 풍경은 당시 폐허 속의 서울과 대비되어 어린 소년의 눈에 더욱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주4) 이는 곧 이 땅 특유의 맑은 자연의 풍광, 곧 눈부신 밝은 햇살 속에 드러난 자연이었다. 주5) 이동엽은 이후 아름다운 샘, 물에 대한 꿈을 계속 꿀 정도로 물 ․ 바다 ․ 그리고 근원적인 자연의 본 모습으로서 ‘무無’의 상태를 떠올리며 흰색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어린 시절 이 두 차례의 물과 관련한 체험이 훗날 생명성에 대한 관심과 <컵> 시리즈에서 물을 그린 직접적 계기가 된다. 이러한 그의 유소년기의 체험과 관련한 훗날 그의 그림은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어린 시절과 문체를 연상케 한다. 까뮈의 소설은 ‘태양과 침묵’의 언어이다. 즉 그의 문체는 ‘한 없이 밝은 햇살 속의 고요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까뮈의 문체는 집 밖은 지중해의 태양이 빛나고 집 안은 우울한 침묵상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는 그의 유년시절 체험에서 기인한다. 까뮈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징집되어 전사했으며, 어머니가 가정부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던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체험을 반영하듯 까뮈의 문체는 ‘고요함’과 ‘간결함’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삶과 세상에 대한 투철하고도 근원적인 응시의 소산이다. 비정하리만큼 간결하고 고요한 문체로 삶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을 담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에게 있어 남다른 유년시절 체험과 개인사는 작품을 특징짓는 원천이다. 화면 전면을 거의 백색으로 표현한 극단적 ‘간결성’을 보이는 이동엽의 작업도 그의 어린 시절 체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동엽 그림의 주된 특성인 간결함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H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하여 1학년 때부터 학교 실기수업시간에는 정물화나 모델을 그렸지만 혼자서는 당시 이미 사물이나 세계의 이면인 존재의 근원이나 ‘무’에 대해 생각하며 추상적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점점 흰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그리다, 덕수궁 옆 문화공보관에서 가진 졸업전 출품작은 완전한 백색 그림을 그려 다른 설치 작품과 함께 출품한다. 주6) 이때 그린 백색 회화는 당시 ‘우주’적 시공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뫼비우스 띠 같은 모양을 원의 구조로 드로잉 하듯 그린 그림으로 형태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추상작업이었다. 이어 이동엽은 물 ․ 불 ․ 바람 같은 근원적 원소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래서 그는 대지 위에 큰 통나무가 불타거나 바람에 쓰러지는 장면으로 바람을 그리거나, 식물의 잎에 맺힌 물방울을 커다랗게 클로즈업해서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작업 중 실질적으로 첫 페이지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 되면서도 동시에 한국현대미술사에서도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른바 ‘단색조 미술’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 <컵>시리즈이다. <컵> 시리즈는 잡지광고에 실린 컵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컵에 채워지고 비워지는 물의 현상에서 자연의 질서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업 역시 어린 시절의 체험의 연장선에서 당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생각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는 이 작업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 내 나름대로는 문명에 대한 비판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동서 문명의 차이를 생각하고, 인간의 욕망의 포화로 서구 물질문명이 주도하는 것을 보며, 비워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환경문제도 생각했지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릴 때부터 민감했어요. 그래서 물질문명이 과도해지면서 세계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어요. <컵> 시리즈는 현대적인 오브제로서 발상과 구조를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 계곡이 아닌 컵으로 하게 되었지요. 또한 당시 ‘무상성無常性’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인문학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헤르만 헷세의 소설, 『나르시스와 골드문트』 속에, ‘흐르는 물속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것이 실상은 쇳조각이었다.’라는 구절, 또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 구절 중에 ‘왕이시여, 그대 발등에 입 맞추게 하는 영광을 주소서’(*작가는 이 구절의 왕을 자연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와 같은 범신론적 구절에서, 고정된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주7) 컵 그림도 처음에는 극사실로 그리다가 그렇게 그리는 것이 대상을 한정짓는다는 생각이 들어 점차 지우면서 그리다보니 마침내 윤곽선만 남게 된다. 이 때 그린 컵 그림들은 100호 정도 크기였다. 이 그림들을 그릴 무렵 글을 읽거나 전시회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과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을 발견하기도 한다. 주8) 이 그림 중 하나가 1972년 8월에 응모한 《앙데팡당》전에서 1석으로 선정되어《칸 회화제》에 허황, 하종현과 함께 참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 무렵 일본 동경화랑 대표가 당시 일본의 유명 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와 함께 내한하여 그의 그림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후 당시 한국 화단에서 백색 그림이 유행하여 70년대 후반까지 집단화되어 유행한 이른바 단색조 미술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주9) 이후 그의 작업은 점차 구체적 형태마저 사라진 현재의 <사이>시리즈 작업으로 변모하는데, 이는 세계가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회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미세한 것에 더 본질적인 우주가 있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었다. 주10) 그래서 최소한의 구체적 형상도 배제하고 간략한 선의 형태로 그어지는 찰나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작업에 드러나는 백색 위주의 표면적 이미지는 단지 물질적 질료가 아니며, 따라서 그의 그림이 백색 그 자체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흰 바탕은 대안공간이며 색이상의 색이며, 안료는 그러한 세계를 은유할 뿐이다. 주11) 이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백색의 화면을 빌어 ‘의자연’의 세계를 제시한다. 백은 존재의 근원적 지대로서, 단순히 물질적 공간이나 눈에 보이는 가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정신의 대지이며 자연이다. 또한 흰 공간은 의식의 여백이며 현상의 빈터, 즉 '무의 지대'이다. 모든 존재 현상은 빛과 어둠, 혼돈과 질서, 충만과 공허, 음과 양의 양면성을 지니며 이것은 우주의 순환과 균형, 생명의 본질이다. '밝음이요 빛'인 흰 공간, 그곳은 존재의 대지 또는 존재의 출처로서 생명의 바다이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세계의 근원으로부터 발생하는 형태의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순환의 고리, 자연의 숨결과 진동을, 그 생명적 공간과 시간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태, 그것은 무상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우주 속에 육화하는 물질과 행위의 일체화 즉 합일의 세계를 이루고자 함이며 그것은 자연의 의지로서 그 순환의 원리에 밀착하는 인간정신, 의지이다. 위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동엽 그림의 이면에는 ‘실체적 물질성’을 넘어선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은 서구의 현대과학이 도달한 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물질과 사상을 분리하여 존재를 입증하는 구체적 자료를 중시하던 서구의 근대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물질의 집합체였으며,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근대의 과학자들은 그 물질의 근원(소립자)을 파악하기 위해 쪼개고 또 쪼개었다. 그래서 1961년 미국의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이 의심을 품기 전까지는 돌턴의 원자 가설이 기반이 되어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라 생각했다. 그러나 1964년 머리 갤만은 ‘쿼크’라는 더 작은 단위를 제시하며, 이것이 내부구조가 없는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입자라고 생각했다. 주12) 1996년 페르미 연구소에서는 연구 발표를 통해 쿼크도 내부 구조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수세기에 걸친 연구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은 실체적 개체가 아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작용(전환성)으로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 현대물리학의 물질에 근원에 대한 이진법적 결론은 역시 이진법이 바탕인 동양의 ‘주역周易’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주역』「계사상전」제11장)는 구절이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만물의 근원을 역에서 태동한 태극으로 보았는데, 여기에서 바로 양의, 즉 음양이 생성되며, 이 음양이 다시 서로 교합하여 사상을 낳는다고 생각해 물질과 사상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만물의 이치를 ‘음陰’이 항상 음이 아니고 ‘양陽’이 항상 양이 아니며, 별도로 존재하지도 않고 서로 교합하여 서로 돕기도(상생)하고 해치기도 하고(상극)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 실험과 수학적 증명 과정을 거치지 못했을 뿐, 소립자의 두 가지 특성인 개체성과 전환성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양의적인 동시에 융합적이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논리마저 초월하려는 측면은 한국의 전통사상의 두드러진 특성이며, 원효의 ‘화쟁’ 사상이나 의상의 ‘화엄’사상, 최제우의 불연기연不然其然 ;긍정과 부정을 아우르는 말임)사상, 김지하 시인의 ‘흰 그늘’ 미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주13) 이 중에서 원효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원효는 마음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국면을 각각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으로 보았으며, 생멸문에서 마음이 진리와 같아지는 가능성과 마음이 진리를 등지는 가능성을 동시에 논한다. 이 때 생멸문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구체화되는 통로가 바로 시각 · 본각 및 불각이다. 원효는 시각 · 본각에는 실체적 자성이 없다고 보았으며, 이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열반과 생사'·‘진眞과 속俗’ 그 어느 것도 소유적 머뭄住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이처럼 본각은 주관과 객관의 그 어떤 대상적 경험境界도 실체로 보지 않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의 힘(반야의 자성)을 지녔기에, 자신의 행위와 관련된 주·객관의 경험에 대해 소유 및 집착하지 않고 '하나로 같아진 차원一如'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원효에 의하면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은 ‘생겨남生’과 ‘사라짐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분리를 할 수 없다. 이는 일체의 인위적 구별이 원천적으로 해체된 상태로서 일심一心, 또는 진여문이라 한다. 원효에 의하면 ‘일심’이란 이미 둘로 분별할 것이 없으니, 하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인지 반문하며, 이와 같은 도리는 언어적 범주를 벗어나고 모든 것을 이원적·실체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지라서 무슨 말을 붙여야 될지 알 수 없어 억지로나마 ‘한 마음一心’이라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有’를 싫어하고 공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에 이르려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청靑’과 ‘쪽藍이 같고, 얼음과 물이 같은 원천이고, 거울이 만 가지 형태를 다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같음’과 ‘다름’도 마찬가지이며, 동일 속에 차이가 내포되고 차이 속에 동일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원효의 화쟁론으로 본다면 이동엽의 회화는 삶과 죽음(존재와 비존재, 생生과 멸滅), 성스러움과 속됨, 진실과 허위 등의 분별과 분리가 근원에서 해체되어 그들이 '둘 아님'으로 만나는 동시에, 일심을 지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여의 차원, 그 본래의 왜곡 안 된 모습의 구현으로 볼 수 있다. 사상이나 미학은 그림에 대한 의미와 해석의 틀이지만 원효의 사상을 포함한 우리 전통사상은 또한 그러한 언어적 의미와 해석의 틀마저 초극하고자 한다. 사실 그림이 제작되는 일련의 과정은 언어적 의미와 해석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며 미묘한 차원이다. 특히 이동엽 그림의 주된 특성은 작업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이동엽의 그림은 매우 예민하고 정치精緻한 작업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흰 공간에 붓질을 한다. 화면과 상을 하나의 몸으로 의식하기 위해 나는 늘 흰 바탕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긋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동양화를 그릴 때 쓰는 넓은 평 붓을 사용한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바탕과 같은 흰색을 칠하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붓질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붓과 물감이 화면에 젖어들고 흰 화면과 이어진 일체의 선으로서의 붓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 붓의 한쪽 끝은 짙은 색으로 안쪽은 엷은 색으로, 흰 바탕과 물려 있도록 톤을 조절하여 그린다. 최근에는 하나의 붓 선을 그어 내린 다음 붓을 뒤집어 생체의 골격처럼 대칭으로 맞대어 나란히, 또는 수평선을 이루는 좌우대칭으로 긋는다. 나의 붓질은 유연성 있는 물감이 바탕에 잦아들고 섞이면서 모필에 의한 미세한 변화를 촉발한다. 붓 자국과 붓 자국은 서로 맞닿아 상호 교화하고 의지하면서 미묘하게 발생한다. 즉 화면에서 촉발되는 우연성과 나의 의지에 의해 적절한 교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꽤 까다롭다. 수직으로 긋는 의지가 작용하지만 붓이 맞닿아 물감이 서로 섞이면서 미세하게 변화해 가는 톤은 우연과 자연(습도 등 기후)의 반응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물物의 정신화'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물질감을 가능한 한 제거하며 생경한 붓의 필세와 물감의 양을 줄이면서 붓질을 반복한다. 마치 소의 되새김질처럼. 그리하여 ‘물物’과 정신이 만나 서로 화학반응이라도 하듯, 붓 선은 자신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상승하듯이 공간으로부터 투명해지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고 흰 공간에 하나의 획을 긋는다. 나와 세계를 일체화하고 공명의 공간을 형성, 하나의 생명(공간적 신체)을 부여한다. 사라지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순환의 고리, 존재의 무상성을 드러내는 붓질로 자연계의 공명적 구조를 열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나와 세계, 그리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정신적 차원을 드러내며, 바로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혼돈의 세계를 직시’하면서도 굳건히 한 길을 걸어온 그의 회화의 진정한 힘이다. 그는 변화무쌍한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왔고 또한 살고 있는 것이다. 3. 무절제와 과잉생산에 기초한 문화는 현대생활의 기본조건이다. 무엇보다 온갖 갈등과 거짓과 술수가 판치는 지금의 세상은 더욱 삶과 예술의 가치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갖게 한다. 이런 현실상황과 이동엽의 작업은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끊임없이 무화시키려는 듯한 행위와 물질이 어우러진 그의 그림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염세적 니힐리즘으로 볼 수 없다. 그의 그림은 결코 백색 일변도의 현실과 무관한 그림이 아니며, 오히려 시대적 혼미상황에 의연히 맞서려는 일관된 정신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동엽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눈부신 가을햇살을 느낄 수도, 순백의 백설 천지, 나아가 온갖 세상사의 부질없음도, 궁극엔 이 모든 풍경을 넘어선 어떤 정신적 차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빛이나 백색이라는 표면적 이미지나 물질적 환원주의 시각에서 이동엽의 그림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갈등과 혼돈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의지, 즉 건강한 몸과 정신을 회복하려는 지향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정신의 전개 과정으로 보면 그의 회화는 어느 순간부터 더욱 맑고 담백한 세계로 환하게 빛난다. 결국 현실의 온갖 혼돈을 직시하는 대극에서 더욱 정갈하고 의연한 정신성이 아득히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 이것이 이동엽 회화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 2008년 7월 29일 주1) 평탄치 않은 남다른 삶을 산 작가들 중 극단적으로 비움의 작업을 보여주는 예로 팔대산인이나 마크 로드코, 윤형근의 그림들을 꼽을 수 있다. 주2)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 갓 태어났을 때 부어서 나와 백일 된 아이보다 컸다고 해요. 그건 어머니가 공포 속에서 임신 중독이 되었으며, 영양실조 상태에서 뱃속에서 나왔기 때문이었어요. 태어나서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어요. 당시 피난 생활이란 누가 누굴 도와 줄 상황이 아니었으며.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지요.”(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3) 초등학교 입학을 하기 전에 동네 큰 아이를 따라 바다에 갔지만, 너무 어린 나이여서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들의 신발을 지키며 바다를 바라보았다고 했다.(2008년 7월 9일 작가와 전화 통화 중에서) 주4) 자신의 그림이 세상 건너편이자, 반대편인 것도 이러한 체험과 상관이 있다고 했다. (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5) 19세기 말이나 20세 중반까지 한국에 온 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상 중 밝은 햇살 속에 뚜렷한 풍광을 꼽았다. 일제강점기 때 추사를 연구한 학자인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로서 수 년 전 추사관련 유물 수 만 점을 과천시에 기증한 일본인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은 햇빛이 찬란하여 나무하나 풀 한포기까지 선명하고 하늘의 깊은 푸른 색紺碧은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서재의 창을 열면 유난히 높은 준령이 눈에 잡히고 그 담홍의 아름다운 화강암은 하늘에 빛나서 무척 선명하였습니다.” 주6) 당시 하종현 지도교수가 이동엽의 졸업 작품을 보고 장 포트리에의 작업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설치 작업은 거울 위에다 여행 중 배낭에서 주워왔던 자갈을 예수의 가시 면류관 형상의 둥근 가시철망 속에 놓은 작업이었다고 한다.(2008년 7월 9일 작가와의 전화 통화중에서) 주7)2008년 7월 9일 작가와의 전화 통화 중에서. 주8)작가는 군입대중 어떤 불교 서적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고 한다. 한 청년이 고향의 절에서 여승의 딸을 만나 가까이 지내다, 같이 서울 유학 가서 사귀었는데, 어느 날 그 딸이 학교에 보이지 않아 고향의 절에 갔더니 그 딸이 여승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딸이 하는 말이, ‘물이 얼면 얼음이니 얼음이 물이로다.’ 라는 말했다는 것이다. 이동엽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자신이 하던 작업과 일맥상통함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어떤 선시 선화 전을 보러 갔다가, ‘참의 물은 맛도 냄새도 없다.’는 구절을 보고 자신에 작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9)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 작가와의 대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8월에 제1회《앙데팡당》전에 응모하여 각 국가에서 대표를 선정하는 데 내가 1석으로 뽑혔어요. 그러나 곧바로 9월에 군대에 갔으며, 조카가 군대로 와서 작가로 선정되었으니 작업론을 써야 한다고 해서, 군대 훈련소 참호에서 그것을 썼지요. 그 글의 내용은 물리화학에 대한 얘기와 노장사상의 영향도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앙데팡당전이 처음에는 《파리 비엔날레》대표로 선정한 것이지만, 《파리 비엔날레》전이 설치 위주여서 결국 칸 회화제에 나와 허황, 하종현이 참가하게 되었지요. 그 무렵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명동화랑 주인 김문호씨가 ‘일본 동경화랑에서 야마모토 사장과 나카하라 유스케란 평론가가 오며, 니 작품 보러 온다.’고 해요. 그래도 설마 나부터 찾겠나 싶어 며칠 있다가 연락을 했더니, 김문호씨가 노발대발하면서 ‘당신 어디 있느냐?’ 하면서, 그들이 오자마자 나를 찾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마모토, 나카하라 유스케, 이일 선생이 화실로 왔는데, 그들 일본인들이 나의 작품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인상적었습니다. 당시 집이 망해서 재료도 시원찮고 캔버스 상태도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물감도 보내주겠다, 캔버스도 보내주겠다, 동경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 이게 갓 대학하고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제대하면 초청장 보내주겠다, 이런 사실들이 당시 『주간한국』이란 잡지에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 차범근과 함께 소개되었어요. 그들은《한국 ․ 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전을 열기로 하고 한국작가들을 탐방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1호였던 겁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박서보 선생의 제자라면 이 5인전에 같이 나란히 참가가 되겠는가? 그래서 1975년에 제대할 때《한국 ․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을 하게 되었지요. 김문호 씨는 얼마 후 죽었는데, 그 무렵 이미 얼굴색이 검었지요. 그전에 국내에서의 전시는 《4+1, (또는 5+1인)》전인가 했지요. 그리고 1974년에 《조형과 반조형전》을 했는데, 김창렬 박서보 윤명로가 조형전 대표로, 이건용, 이강소, 심문섭, 이동엽이 반조형전 맴버로 전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1975년에《한국 ․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도 하게 되었지요...(중략) 야마모토는 나를 ‘고뿌(컵의 일본 발음임)의 리’로 불렀어요. 당시 동경화랑은 일본의 일급화랑이었으며, 그때 나는 모노하를 몰랐어요, 미술 잡지에서 세키네 작품을 한 두 번 본 정도였지요. 1977년 동경화랑이 한국미술 단면전을 기획, 센츄럴 미술관에서 한국작가들을 초청했지요. 그 때 모노하 작가들을 봤는데, 세키네는 사람이 골격이 크고 인상이 힘세 보였어요, 스가이는 핸섬하게 보였고...(중략) 당시 동경화랑은 일개 화랑이 아니었어요. 그 위상이 대단했지요. 야마모토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가를 탐색했으며, 그가 파리에 나타나면 파라 화랑가가 술렁거렸다고 해요. 그러므로 70년대 단색조 미술의 등장에 대해 동경화랑 1개 화랑의 취향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당시 동경화랑이 차지하는 위상이 대단했어도 그렇지만 문화정치학적 시각에서 보는 건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나는 그런 혐의를 부정합니다, 막말로 화랑은 그림 장사꾼인데, 왜 문화정치학의 논리로 접근하지요? 문화를 지배하기 위해 문화정치학 정략적 차원에서? 그렇지 않아요. 그 혐의는 모노하를 그대로 모방한 ‘AG’에 국한되는 일이지요. (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70년대 단색조 미술의 확산과정에 대해서는『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Ⅲ(Vol.1)』,, ICAS, 2003, 310-312쪽을 참조할 것. 주10)의상의 『화업일승법계도』중 세계의 현상을 공간적으로 설명한 부분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즉 ‘가는 티끌 하나 속에 시방세계 들어 있고’라는 말이 나온다. 주11) 작가도 자신의 그림은 흰색이 아니라고 말했다. “단색조를 나는 자연색으로 생각해... 바래진 것 같은...” 4+1전 때 이일 선생이 물어보더라구... “그래서 나의 흰색은 무한한 것을 뜻한다, 평면이 아닌 공간이다”, 이렇게 말했더니 이일 선생의 표정이 이상하더라구... 이일 선생은 내 그림이 평면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내 그림 속 흰색은 자연 색, 갱지 빛깔이지요. 모노크롬도 아니고 단색도 아닙니다.(2008년 5얼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12) 당시 그는 up, doun, strange라는 세 쿼크의 존재만을 말했다. 주13)김지하의 미학은 '흰 그늘'이란 말로 요약된다. 흰 그늘이란 모순된 언어로 분열돼 있으면서도 하나로 융합된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는 단군신화나 고주몽 설화, 칼 융의 그림자론, 그리고 동학사상을 통해 ‘흰 그늘’의 미학을 말하는데, 이는 주역에서부터 계승된 원리이자 동학의‘불연기연(아니다 기다)’, 원효의‘비연사연 ’등을 계승한 미학이다.
80 no image 일상의 삶과 참된 예술의 가치
도병훈
5970 2008-08-03
일상의 삶과 다른 예술가의 삶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훌륭한 운동시설과 동네 약수터가 있다. 그래서 운동을 하다 가끔 준비해간 작은 물통에다 물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약수터에서는 수도꼭지가 여러 개 있음에도 오래 기다려야 겨우 순서가 돌아온다. 그 이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십 통의 커다란 물통을 손수레에 싣고 와서는 기다리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물통들만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러한 광경을 볼 때만 하더라도 그날따라 우연히 이런 사람이 많은가보다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 거의 매일같이 당연한 듯 조금도 남을 배려하지 않은 이러한 행태를 예사롭게 하는 것을 지켜보며 갑자기 인간이란 존재가 몹시 낯설어지고 심지어 추악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광경은 우리시대 보통 사람들의 삶의 단면이지만,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다.본래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 속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자신의 물통만을 채우려는 현대 우리 사회의 문제는 분열된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그릇된 병폐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래적 삶을 생각해보면 이기적 인간의 속성이 무색할 정도로 삶의 근저는 부조리하며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이러한 물음을 가질 때마다 예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무대에 비유한 사람이 셰익스피어라면 일상적 무대 라는 '장' 위에서 삶의 무의미함과 권태로움을 질릴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사람은 사무엘 베케트이다. 그리고 일상의 지루함과 무의미함, 즉 권태로서의 삶을 ‘시간 죽이기’로 본 철학자가 있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현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기분을 권태라 했다.『형이상학의 근본개념』에 나오는 그의 말을 옮겨보자. 폭 좁은 철도를 끼고 있는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 우리는 앉아 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야 온다. 기차역 일대는 삭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배낭 속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 꺼내 읽어볼 것인가? 그러면 어떤 물음이나 문제에 대해 골똘히 사색에 잠겨볼 것인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기차 운행 시간표를 훑어보거나 또는 이 역과-우리는 잘 모르는- 낯선 곳과의 거리가 다양하게 표시되어 있는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다 우리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겨우 15분이 지났다. 그래서 우리는 국도 쪽으로 가 본다.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이제는 국도변의 나무를 세어본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처음 시계를 보았을 때보다 5분이 더 지났다. 이리저리 거니는 것도 싫증이 나 우리는 돌 위에 앉아 갖가지 형상을 모래위에 그려본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우리가 또다시 시계를 쳐다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위의 내용은 우리의 삶을 압축한 얘기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바로 삶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핵심어는 ‘시간 죽이기’다. 얼핏 생각하면 다들 바쁜 세상에 무슨 ‘시간 죽이기’같은 한가로운 이야기야 할지 모르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다. 이 글에 나오는 ‘시간 죽이기’란 '부조리'한 삶의 실상을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죽이기’란 ‘붙잡고 있음’이자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음’이다. 그래서 기차시간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인 것이 권태로운 삶의 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살든, 그것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이며, 이를 실존적 용어로는 삶의 시간적 부조리라 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부조리 연극은 이 시간 죽이기 중의 극단적 상황이 연극화된 작품이다. 시골 길 나무 한 그루 아래서 작품 속 두 주인공은 연극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오지도 않고 끝내 정체도 밝혀지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 죽이기를 반복한다. 권선징악이나 비극적 서사가 있는 전통연극과 달리 어떤 극적 사건도 없는 시공간 속에 사람이 던져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단지 두 사람은 무의미한 대화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절망은 더욱 깊어간다. 베케트가 보여준 인간상황은 우리 일상적 삶의 근원적 무의미함과 허망함을 나타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간 죽이기의 일상적 삶을 비본래적 삶이라 규정했다. 하이데거는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를 구분했다. 표면적 권태는 시간 죽이기로 해결하며 살아가면 되지만 깊은 권태는 시간 죽이기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 깊은 권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실존’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가 말하는 실존이란 단지 다른 세상 사람들이 살듯 유행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가능성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알베르 까뮈는 실존적 삶을 ‘부조리’에 맞서는 ‘반항’에서 찾았다. 그가 말한 반항이란 잘못된 것을 용인하지 않고 목적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수동적 삶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결국 ‘실존’하는 삶에 가장 가까운 이들은 그 누구보다 부단히 새롭게 미의식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몇몇 현대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어진 의미나 기존의 질서 미리 정해진 자기 역할을 거부하는 방법에서 삶을 가치를 찾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예술가들의 행위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풍성한 담론이 생겨나고, 그만큼 ‘예술’로서 그 정신적 가치가 자리매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미의식을 확장하는 인간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값지게 만드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해 또는 세속적 지위나 명예를 위해 사는 인간만큼 어리석은 이는 없다. 인간이란 누구나 기차 떠날 시간이 다가오면 단 돈 1원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들이 난쟁이의 삶, 즉 어리석게 사는 것은 앎과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구도자나 철학자의 삶은 결국 부조리를 직시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습관을 깊이 들여다보면 앎과 삶이 엇갈리며, 나와 세계의 괴리 자체가 부조리, 즉 삶의 실상이라면 무엇보다 이러한 부조리를 직시하고 자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제는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거나 자각한 다음의 삶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몇 몇 현대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은 일상적 삶의 틀에 갇히지 않고 유모어와 상상력으로 삶의 여유를 꿈꾸며 감성과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원래 앎과 삶은 엇갈릴 수밖에 없으며, 고정된 의미도 정해진 운명도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삶을 새롭게 만들며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2008년 8월 2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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