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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08: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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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기 전에 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조선시대 유학자의 삶에 대해 쓴 것인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이 글을 쓴 의도는 ‘가치의 입법자’에 대한 고찰이다. 물론 전통적인 형이상학, 종교, 이데올로기들이 오늘날 과학적 지식들에 비해 ‘진리가(眞理價)’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은 필자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정신적 유산들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동양의 전통 가운데 중요한 점은 학문의 목적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가치론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계보학적 역사해석에 따르면 어떤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단일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결국 어떤 역사적 자산이든 현재적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며 이는 오로지 ‘삶’이라는 화두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가치의 입법자가 필요한 것이다.   .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 대한 소고


여는 말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는 유서 깊은 도동서원이 있으며, 그 앞으로 유장한 낙동강이 오늘도 유유히 굽이쳐 흐른다. 주1)
이 도동서원은 건축 전문가들이나 전통문화유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서원중에서 안동의 낙동강 가에 위치한 병산서원과 함께 건축적 공간미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서원이지만 원래는 당대의 세속적, 권력지상주의적 가치에 맞선 한 인물을 기린 공간이다. 이 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자로서 심성의 수양에 철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리를 실천하고자 한 학문인 도학(道學), 또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정립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유교)인 성리학, 그 중에서도 도학의 선구자가 바로 김굉필이며, 권력을 상징하는 훈구파에 맞선 사림파의 거목이었다. 주2) 또한 김굉필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교육자였을 뿐 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시대 최고의 가치 입법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세기 사림 정치의 주역이 된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정붕, 이장곤, 이연경, 이적 등은 그의 실천적 유학을 계승했으며, 이 뿐 만 아니라 영남의 좌도를 대표한 퇴계 이황과 우도의 남명 조식은 물론 기호학파에 이르기까지 그의 도학사상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동방 5현의 첫머리에 김굉필을 높이 받든 것도 조선조 유학사상에서 도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그의 위상을 알게 한다.  
그의 사상은 <한빙계>라는 짧은 글에 집약되어 있으며, 이 <한빙계>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 이율곡 등 후대의 거의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계심(戒心)이 되었다. 이처럼 김굉필이 조선의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유는 무엇이며, 오늘에는 그의 사상과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유학에 대해서 현대적 삶과는 어울리지 않은 ‘전통사상’으로 여긴다. 하버드대의 중국학 교수인 뚜 웨이밍(杜維明)의 말로 요약하면 유학은 인간의 참된 감정(genuine feeling)인 인(仁)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예(禮)를 바탕으로 ‘인간이 되기를 배우는 것(Learn to be human)’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유교나 ‘예’에 대해 그 부정적(말폐적) 측면, 즉 가부장적 규범주의를 먼저 떠올린다. 이는 조선의 유학이 후기로 갈수록 형식적 예에 치중하는 풍조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실천 윤리가 가부장제적 계층화를 강조하는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적 성향으로 형식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폐가 드러나기 전의 유학의 참모습은 일반인들의 통념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김굉필의 생애와 도학사상의 성립과정

고려 후기 이후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사대부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이 조선의 건국을 주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 왕조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조선 건국이후 1백 여 년 간의 유학은 문장 중심의 사장(詞章)과 통경명사(通經明史) 중심의 학문이었다. 주3) 그러다 조선 성종조 무렵부터 조선조 성리학은 문장 중심의 사장파 대신 새로운 학풍인 이학(理學)파가 태동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소학》과 《대학》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성장한 도학 중심의 신진사림파가 문장중심의 훈구파와 대립하게 된다. 이 결과 유자광, 이극돈, 한치형 등 훈구파가 당시 사림파들의 스승으로 지목된 김종직 주3)이 지은 조의제문(吊義帝文)을 빌미로 그 문인들인 사림파 40여명을 숙청하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연달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이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대표적인 학자가 한훤당 김굉필이다.      

김굉필은 본관이 황해도 서흥이며 단종 2년(1454년) 서울의 정릉(지금의 정동)에서 김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는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누가 무례하게 놀리거나 거만스럽게 굴면 채찍으로 마구 휘둘러 갈기기 때문에 한번 그에게 당한 사람은 멀찌감치 피해갈 정도였다.
김굉필은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특히 한유가 쓴《창려집(昌藜集)》을 좋아했는데, ‘남팔아,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세 번씩 읽었다고 한다.
김굉필은 19세 때 조부의 고향인 지금의 대구 광역시 현풍 인근에 있는 합천 야로현 말곡에 살던 박예손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살이를 하면서 냇물가에 한훤당(寒 찰 한, 暄 따뜻할 훤, 堂 집 당)이란 서재를 짓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의 호는 이 한훤당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때 부터 김굉필은 처의 고향인 지금의 경남 합천군 야로, 그리고 처외가인 경북 성주군 가천 등지를 왕래하면서 학문을 넓혔다.  

김굉필의 학문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21세 때 영남지역의 수령으로 부임한 김종직의 문인이 되면서부터다. 김종직은 조선조 유학사의 첫 머리에 나오는 야은 길재의 학문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의 가학을 배운 유학자로서 또한 당시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주4)
김굉필은 식량을 싸들고 수개월씩 김종직의 집에 머물면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 때《소학》을 읽고 크게 깨우쳐서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주5) 누가 나라에 관하여 물으면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했으며, 그는 《소학》이 제시한 지침대로 몸가짐을 단속하여 수신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예법대로 생활했다. 늘 초립을 쓰고 밤늦도록 학문에 힘썼으며 집안 식구들도 서재를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연밥으로 만든 갓끈 흔들리는 소리로 그가 공부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김굉필은 27세 때인 성종 11년(1480년)에 생원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지만 대과에 급제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이후에도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여 이 때 벌써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 무렵 김굉필이 《소학》과 《대학》으로 학문의 기본을 삼은 것은 대의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도학 형성에 결정적 토대가 된다.《소학》은 원래 초학자들이 배우는 유학입문서이지만 김굉필은 《소학》을 위기지학의 기본서로 삼았다. 그 이유는 남을 다스리는데(治人) 앞서 자신을 다스리는 존심(存心)과 양성(養性)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는 《소학》이 이러한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소학을 바탕으로 한 학문은 평생을 그의 평생이 삶의 지침이 되었다. 이는 당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명문장가로서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인 노년의 김종직의 처세에 회의를 갖게 하며, 이로 인해 사제 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는 남효온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김굉필의 삶을 ‘빛을 감추고 자취를 흐렸다’는 도광회적(韜光晦迹)으로 표현한다. “김굉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태를 돌이킬 수 없음과 세도가 실행하지 못함을 알고 빛을 숨기고 자취를 흐렸는데 사람들 역시 이를 알아주었다.”
《소학》을 실천하는 것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은 김굉필의 도학사상은 김안국, 조광조 등에 계승되는데, 김안국은 경상감사가 되자 도내 향교에서 《소학》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게 했다. 이후 영남 사림에서는 《소학》을 중시하게 되었고 소학계가 조직되는 등 소학을 배우는 풍조가 정착되면서 이후 전국적으로도 《소학》을 읽고 실천하는 운동이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학》을 통해 큰 깨우침을 얻으면서 ‘소학동자’를 자처하며 도학 공부에 전념했고《소학》의 윤리를 실천하는데 힘쓴 김굉필은 가정을 다스리는데도 사람 됨됨이에 바탕을 둔 《가범(家範)》을 지어 실천했다. 그가 이《가범》을 지은 것은 가도를 확립하는 것이 치국의 근본이 된다는 생각에서 유교 윤리를 그의 집안에서부터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주6)   그의 《가범》은 《소학》과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의 실천윤리지침으로서 부모자식, 형제, 부부, 고부 등 모든 가족이 제 위치를 바로 지키면 집안의 도가 바르게 되고 따라서 국가가 안정된다는 데 있다. 주 그래서 그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집안 식구들을 불러 모아 예절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규칙을 정하기도 했다.
그의 《가범》은 자녀들 뿐 만 아니라 집안 노비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는 또한 노비들에게도 일정한 직명과 직급을 주고 일을 맡겨서 일의 성과에 따라 직급을 승격시키거나 강등시키는 일종의 성과급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같은 일은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굉필에게는 이러한 도학자의 면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에 의하면 김굉필은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있는 그림이 없었는데, 최근 경주의 한 고가에서 김굉필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청초호주즙도>라는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굉필이 안견의 그림들을 10폭 병풍으로 만들어 늘 감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주7) 이러한 사실은 서릿발 같은 도학자와는 다른 김굉필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김굉필의 삶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히게 되는 것은 벼슬길에 들어서면서였다. 김굉필이 40세 때인 성종 25년(1494) 겨울에 경상감사 이극균(李克均)이 그를 한양의 남부참봉(南部參奉)으로 천거하여 임명되었고, 3년 뒤에는 형조좌랑(정6품)이 된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폭군 연산군의 시대가 되면서 당시 학계 및 정치계에 큰 변동이 일어나며 이 때문에 그의 삶도 이러한 시대 조류에 휘말리게 된다.  

학문을 좋아했던 성종은 훈구세력의 전횡을 막기 위하여 영남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여 중앙정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생육신이나 죽림우사와 같은 청담사상을 지닌 인사들에게까지 관대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훈구파 세력에 둘러싸여 이러한 아버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연산군은 재위 초기부터 죄 없는 선비들을 체포하고 국문서적을 불태우는 등 폭정의 만행을 일삼는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로 인해 당시 여러 뜻 있는 선비들이 큰 화를 입는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친구가 죄에 연좌되어 화를 당하지 않도록 미리 단교하기도 했다. 이즈음 김굉필도 자신이 화를 당할 것을 예견하고 친구인 신영희를 찾아가 단교하고 멀리 피하게 한다.
이보다 앞서 그는 문우인 남효온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갔다. 그러나 남효온은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김굉필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남효온은 벽을 향해 누운 채 끝내 말 한마디 없이 죽었다. 남효온 역시 자기로 인하여 김굉필이 연루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이 사림파의 학자들은 시국의 암운을 예견했으나 결코 학문적 신념을 굽히거나 피하지 않았다.(*남효온이 죽은 시기는 성종 말기여서 실제로 남효온과 사이가 나빠져서 말을 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마침내 형조참판이 된 이듬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그의 문인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을 기화로 훈구파가 주도한 무오사화(1498년)에 김굉필도 김종직의 문인이란 죄목으로 장(杖)80대를 맞는 형(刑)을 당한 후 평안도 희천에 유배됨으로써 그의 관직생활은 5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러나 평안도에서의 그의 귀양살이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연의 계기가 된다. 그는 당시 유풍이 미미했던 평안도에 유학을 일으켰고, 무엇보다 후일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의 태두가 된 조광조를 제자로 맞이하여 그의 학통을 잇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8) 당시 17세의 나이로 평안도 어천 찰방인 부친을 따라 왔던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학을 배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검찰총장격인 대사헌 양희지의 소개장을 얻어 그의 배소로 찾아 왔던 것이다. 당시는 법률상 귀양중인 사람을 만날 수 없던 시기였다. 뒷날 김굉필은 조광조를 전송하는 자리에서 “도(道)가 동쪽(조선)으로 왔다”고 할 정도로 그의 학문을 칭송했다. 그러나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에서 2년 뒤 전라도 순천으로 다시 이배되며, 1504년 전라도 순천에서 51세의 나이로 참형을 당한다. 주9)

조선 5백년의 유학의 역사는 세속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갈등의 연속이었으며,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세속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들의 권모술수의 피해자가 되어 숱한 이들이 고난과 핍박 속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고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것이다.

조선 유학사상 김굉필은 정여창과 함께 16세기 이후의 사림의 학문적 특성이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론적 철학으로 심화하는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정치 현상 자체를 도덕의 힘을 통해 갱신해보고자 하는 열망이 심성이기론의 핵심이며,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정붕, 이장곤, 이연경, 이적 등 김굉필의 문인들은 그의 실천적 도학의 학통을 이어 16세기 사림 정치의 주역이 되며, 특히 그의 학통은 조식, 오건, 정구 등 경상 우도의 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었다. 이처럼 김굉필이 창도한 도학사상은 이기론(理氣論)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며, 후일 영남학파의 양대 지주가 된 이황과 조식이 모두 김굉필을 도학의 큰 선구자(도학지종道學之宗)로 받든 까닭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의 유학사상은 이후 정통성을 확보하며 지배적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다.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무려 30여명에 이르는 문인들은 그의 고향인 현풍과 합천 야로, 성주 가천,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사제 관계를 맺어 영남학파는 물론 기호학파에까지 이른다. 이 뿐 만 아니라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은 호남지역에도 접목되어 후일 호남 유학의 선구자가 되는 데, 이는 그가 생애의 마지막을 호남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 됨됨이를 위한 지침인 <한빙계>와 이일분수론

김굉필은 한국유학사상 처음으로 도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힘쓰면서 한편으로 문우(文友), 문인들과 치열하게 학문을 토론한다. 특히 네 살 위인 정여창과는 막역한 사이였고 뜻과 학문이 같아서 밤이 새도록 도학을 토론하기도 하면서 형제처럼 지냈다. 주10) 이 때부터 김굉필은 학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제자 문인들이 집안에 가득차서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관청의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정여창이 “비방하는 사람이 많으니 잠시 수업을 중지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하자 “먼저 안 사람이 후진을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므로 화를 당해도 그만 둘 수 없다.”고 하면서 끝내 강의를 중지하지 않았다. 세상의 비방에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는 성종 24년(1493)에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한다.
이시기 얼마 후 다시 김굉필은 사헌부 감찰직에 있었는데 당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이 찾아와 문인이 되기를 청했다.
성균관 대사성 반우형(潘佑亨)이 '자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선친의 유지(遺志)를 따른다' 하며 제자를 자청하였다. 연산군 2년(1496) 가을이었다. 반우형은 일찍이 서거정에게 수업하고 17살에 문과에 합격한 인재였다. 경상우수사를 지낸 부친 반희(潘凞)는 평소에 '김굉필·정여창·김일손은 문장과 도덕으로 일세의 영수인데 너도 사도(斯道)를 배우지 않으면 유속(流俗)에 빠질 것이다'고 훈시하였다고 한다. 이 때 김굉필은 43세였고 반우형은 38세였지만 벼슬은 반우형이 훨씬 높았다. 김굉필이 “친구라면 가하지만 스승은 불가하다”고 사양하자, 반우형은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습니다.”고 하면서 끝내 돌아가지 않아 그를 문인으로 받아들이고 훗날 그의 도학의 핵심이 된 <한빙계>를 지어 가르쳤다. 김굉필의 학문을 전하는 글은 무오 갑자사화 때 거의 모두 불태워졌으나, 반우형과의 이러한 우연한 인연 덕분에 그의 실천적 도학이 후대로 이어졌음을 반우형의 『옥계집(玉溪集)』을 통해 알 수 있다.

<한빙계>는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할 계율’이란 뜻이다. 이는 물이 얼어 생긴 얼음은 물보다 차갑다(氷寒於水)'는 의미에서 후배가 선배보다, 제자가 스승보다 진취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그리고 '얇은 얼음 밟듯이 하라'는 증자의 말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주역』의 '추워지면 얼음이 얼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굳어진다'는 말과도 상관이 있는데 이는 일의 기미를 알아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빙계>는 모두 18개 조목으로 된 짧은 글로서 몸을 다스리고 사물을 탐구하는 도학방법을 담고 있다. 주11) 김굉필이 주창한 도학이 실천적이었던 만큼 <한빙계>의 내용은 공리공론과는 거리가 먼 현실적인 교육방법이라는 특색이 있다.
<한빙계>의 주요 내용은 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痛絶舊習),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日新工夫)”,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라(讀書窮理), “마음을 바르게 하여 본성을 따르라(正心率性)”, “마음을 한 결 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말라(主一不二).”와 같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한빙계>의 마지막 조목은 지경존성(持敬存誠)으로, 공경함을 가지고 성실함을 지니는 것이 소학과 도학의 목표이고, 인격을 닦고 국가를 다스리는 요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굉필의 사상은 위기지학이 핵심인 유교사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김굉필의 <한빙계> 18조목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결국 ‘인간이 되기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굉필의 실천적 도학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한빙계>라면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집약되는 그의 세계관은 <추호가병어태산(秋毫可竝於泰山), 추호라도 태산과 견줄 수 있다는 뜻임>이라는 짧은 부(賦) 형식의 논문에 담겨있다. 그는 여기서 “나는 아노라, 대저 천하의 사물은 이(理)가 있고 분(分)이 있는데, ‘이’는 일만 가지를 합쳐서 하나가 되고 ‘분’은 일만 가지의 차이가 있어도 문란하지 않았다. 저 따지기 좋아하는 작은 지(智)는 사물만 보고 이(理)를 빠트렸다”고 하였다.
그는 이어 정주학의 태극도설과 이기설을 인용하면서 “추호가 비록 작지만 태극을 갖추고 있고, 태산이 크기는 하지만 하늘이 만든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근본을 생각지 않고 대롱 속으로 하늘을 헤아리듯 하고 어떤 이는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것이 크고 저것이 작다고 싸우며 시끄럽게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그는 원래 사물들은 다양성을 가지는 것이 실상이지만 그 소이를 미루어 따져보면 마침내 근본이 같은 줄 알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 우주관은 문인들에게 계승돼 후일 ‘심성이기론’으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된다.


맺음말 - 김굉필 도학 사상의 현재적 의미

조선 초기 권력의 화신인 훈구파들의 작태를 보면서 사림파들은 욕망을 제어하는 학문인 도학을 통해 삶의 가치를 새롭게 구축하고자 하였다. 김굉필은 바로 이러한 사림파의 선구자였다. 우리는 김굉필의 <한빙계>를 통해서 그의 도학사상의 핵심을 짐작할 수 있다.
<한빙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성리학(도학)은 바른 심성을 바탕으로 한 예(禮)를 중시하는데, 이처럼 예를 중시한 까닭은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인간의 가치는 개인주의적 인간의 존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드러난다.
무엇보다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의 공통점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일상 속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떻게 깨어 있는 상태로 일상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했으며, 실제로 많은 선사들과 유학자들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김굉필은 세속적 가치인 부와 권력을 추구한 ‘훈구파’에 맞서 도학을 제창하였고 평생 이를 실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목에 칼이 닿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굉필의 <한빙계>는 사람 됨됨이, 즉 인간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조건이었으며, 무엇보다 살아가는 동안 바른 행실을 추구하는 학문을 죽는 순간까지 추구함으로써 후대에 추앙과 존숭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여러 지역에서 종교적 신념의 배타주의로 인해 숱한 갈등이 증폭되는 실정이다. 또한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성적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와 더불어 삶의 가치를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사람 됨됨이’를 만드는 교육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으며, 현실적인  학문과 실천적 삶의 가치는 더욱 값진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세속에 영합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 한 삶과 사상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2009년 1월 9일
                                   도 병 훈


주1) 조선시대의 서원은 유학을 통해 지방의 엘리트를 육성하는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자 성현들을 모시는 공간이었지만 오늘날은 거의 모든 서원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채 제사의 기능만을 거의 형식적으로 수행하는 실정이다.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1) 유림에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를 받들어 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5년(선조 38)에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재건하고 당시 동명을 따서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리어지다가, 2년 뒤인 1607년(선조 40) 에 도학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인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5대 서원중의 하나이며, 조선시대 서원이 성행할 때 전국 680여 개의 원사院祠가 있었는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47개소 주요원사를 제외한 모든 원사가 훼철되었으나 도동서원은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주요 원사 중 하나이다.
또한 도동서원은 서원의 원형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한 서원으로 손꼽힌다. 산(대미산)을 배경으로 앞에 강(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북향의 공간 속에 전학후묘의 배치. 사당에서 중정, 마당-환주문-수월루-은행나무-앞산까지의 일직선 배치는 위계질서를 강조한 서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동 서원은 산지형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태로, 기능에 따라 3개의 공간 즉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진입공간에는 서원의 대문격인 외삼문(外三門)과 수월루(水月樓), 강학공간에는 환주문(喚主門)을 경계로 하여 강당(講堂,中正堂, 기둥 부분 맨 상단에는 하얀 한지가 둘러싸여 있어 경건한 느낌을 자아냄),  동재東齋,居仁齋), 서재(西齋,居義齋), 장판각(藏板閣) 등이 있으며, 제향공간에는 내삼문(內三門), 사당(祠堂) 등이 있다. 그 밖에 전사청(典祀廳)과 증반소(蒸飯所), 유물전시관, 신도비(神道碑) 등이 있다. 그리고 상당히 공들여 쌓은 기단부를 포함하여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석조물들이 존재한다.
도동서원은 아름다운 담에 의해 영역들이 나누어지며, 각 영역을 다시 단으로 구분하여 경계를 표시한다. 특히 담장은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한 견고한 축조기법과 수막새의 장식무늬를 갖는다. 담장이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면서 담장 면의 변화가 생긴다.
도동서원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높아 강당과 사당 담장이 1963년에 보물 제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강학공간 출입문인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며 담장은 아름다운 토담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김굉필의 외증손 정구가 1605년에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을 중건할 때 그린 두 폭의 벽화는 3백 80년 동안이나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명품으로 꼽힌다. 지난 2005년 여름에 필자가 대구 정화여고의 국사교사인 동생과 함께 도동서원에 갔을 때, 이 그림을 보려했으나 관리인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그래서 멀리서 이 그림을 보러 온 사연을 간곡하게 말하자 비로소 이 그림들이 보존된 건물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림들은 비교적 대작인데다 화격이 높았으며, 400년 가까이 된 그림으로는 보존 상태도 좋았다.    
이 두 점의 벽화는 한훤당이 자연과 도학정신을 시로 표현한 내용을 그린 것으로, 오른쪽 벽화는 노송(老松)에 눈이 쌓여 있고 그 가지 사이로 둥근 달이 걸린 풍경화로 회칠한 흰 면에 검정색과 주황색을 이용하여 그린 <설로장송(雪路長松)>이란 벽화이다. 가로 130cm, 세로 150cm의 크기이다.
왼쪽 벽화는 가 회칠한 흰 면에 검은색으로 그린 것으로 우측에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라 적혀있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서원을 방문한 손님이 도동 강나루에서 나룻배 한 척을 띄워 놓고 혼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는 벽화로 130cm, 세로 94cm의 크기이다.
주2) 역사책에는 흔히 조선 성리학, 또는 영남의 학맥을 야은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순으로 기술한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 김굉필을 영남학맥의 선구자로 꼽은 것은 성리학 중에서도 ‘도학’. 또는 위기지학 사상을 실질적으로 창도한 인물을 김굉필로 보기 때문이다.
주3)사장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정인지(鄭麟趾), 어효첨, 최항(崔恒), 양성지, 권람, 신숙주(申叔舟), 서거정(徐居正), 성현, 강희안, 이극배 등이다. 개국의 뒤를 이은 조선초 유학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주4)김종직(1431~1492)은 호가 점필재(佔畢齋)이다. 그는 김숙자의 아들로서 영남의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통해 가학을 계승하였는데, 특히 시문을 잘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하였는데, 특히 경연관으로서 성종에게 특별한 예우를 받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저술을 많이 남겼으나, 실천궁행에 힘쓴 부친과 달리 도학 상의 문자를 남긴 것이 없다. 뒷날 퇴계는 “김점필은 학문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종신사업이 단지 사화(문예) 상에만 있었던 것을 그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비평한 바 있다. 뒷날 무오사화의 화근이 된 「조의제문」은 그가 쓴 글이다.

주5) 《소학》은 주희가 엮은 것이라고 씌어 있으나, 그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주희의 지시에 따라 여러 경전에서 아이들을 교화시키는 일상생활의 범절과 수양을 위한 격언과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책의 구성은 내편(內篇) 4권과 외편(外篇)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 순으로 되어 있다. 내편은 〈서경 書經〉·〈의례 儀禮〉·〈주례 周禮〉·〈예기 禮記〉·〈효경 孝經〉·〈좌전 佐傳〉·〈논어 論語〉·〈맹자 孟子〉·〈제자직 弟子職〉·〈전국책 戰國策〉·〈설원 說苑〉등의 문헌에서 인용하여 편집한 것이고, 외편은 주로 송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주로 유교의 효(孝)와 경(敬)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상과 아울러 수기(修己)·치인(治人)의 군자(君子)를 기르기 위한 계몽(啓蒙)적 교훈이 담겨 있다.
주6) 이를 입증하듯 서원 근처에 있는 김굉필의 종가집에는 지금도 ‘소학세가(小學世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주7) 김굉필의 이 병풍은 갑자사화로 집안이 적몰될 때 도화서(圖畵署)에 압수되었다가 민간에 흘러들어 갔는데, 조식에게 배운 오운(吳澐)이 처가 집에서 얻어 김굉필의 손자인 김립에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는 조식의 「한훤당의 그림 병풍에 적다[寒暄堂畵屛跋]」에 나온다. 안견 그림의 제목은 검푸른 전나무와 늙은 소나무[蒼檜老松], 푸른 나무와 파릇한 버들[碧樹靑楊], 오래된 나무와 무성한 대숲[古木叢篁], 거문고와 학 그리고 소와 양[琴鶴牛羊], 낚싯줄을 드리우고 달을 보는 모습[垂綸翫月], 구름 낀 산 아래 초가[雲山草屋], 백리의 물길[百里長河], 천 척 폭포[千尺懸瀑]이다. 남명 조식은 이 병풍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선생께서 이 병풍을 보고 누워 계실 때는 눈길을 주고 감흥을 일으키실 적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상쾌한 바람 같은 선생의 영혼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듯하고, 사모하는 마음 사이에 예전의 모습이 오히려 보이는 듯하다.”
주8) 지치주의란 덕성과 인성 수양의 유교 정신이 정치의 덕목이어야 한다는 조광조의 사상을 집약한 말이며, 이는 《주서》〈군진편〉에 나오는 至治聲響 感于神明(지극정성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그 향기가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뜻임)에서 유래한다.
주9) 신도비에 기록된 그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형장에서 형을 당하는 날에 목욕하고 관복을 가지런히 입었다. 신발이 벗겨지자 도로 신으면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천천히 수염을 간추려 입에 물고, “몸에 난 터럭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았으므로 이것마저 다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정신이 어지럽지 않았다.  
주10)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왕래했는데, 그들이 학문을 논했던 정자인 이로정이 지금도 낙동강변에 있다
주11) 한빙계(寒氷戒)의 18조문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 :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 :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 :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 :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 :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실욕징분(室欲徵忿) :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耗仁) :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 :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 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도록 하라. 12.불망어(不忘語) :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 :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 :일의 기미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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