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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5 (20: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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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올해 2학기 1학년 미술수업 중 현대미술을 다루면서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에 대해 수업한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지난 2년전 예술과 시민사회에서 주관한 시민을 위한 미술강좌 중 '역사를 바꾼 아웃사이더, 마르셀 뒤샹'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한 면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 봅니다. 수업내용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구어체 문장이 있습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미술의 경계를 넘은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


“난 400년 내지 5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유화를 더 이상 계속 그려야할 이유가 없는 시대에 맞는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결론적으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았다면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지. 음악에서 전자악기들이 예술에 대한 사람의 태도를 바꾸는 표적target이 되었네. 그림은 더 이상 식당이나 응접실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야... 예술은 표적의 형상을 가지며 더 이상 장식적인 역할을 하지 않네. 난 평생 이런 느낌이었어.”

                                                                                              - 마르셀 뒤샹-



들어가면서


지난 시간에 ‘다다’운동까지 공부했다. 그렇다면 다다와 그 이전 미술의 차이는 뭘까?

다다 이전의 서구 근대미술은 시대에 따라 여러 ‘양식’과 ‘유파’가 새로 생겨나는 반전통의 역사였다. 그래서 새로운 유파들은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는 대신 새로운 이즘을 바탕으로 삼아 집단으로 통일된 미학적 가치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반면에 다다는 예술적 차원에서 새로 정립된 미학을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허무’와 ‘반항’정신을 전제로 한 반예술 운동이다. 즉 다다 이전의 미술은 반전통적이긴 해도 다다처럼 예술 자체를 부정한 집단적 반예술 운동은 아니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다다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뉴욕 다다이스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은 다다 운동의 범주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다. 그는 다다는 물론 이후의 미술사조인 초현실주의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서 뒤샹의 작품세계에 대해 공부하면 현대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는 20세기 초 예술에 대한 인식의 틀과 이디엄idiom을 가장 크게 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사상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지만 아직도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대중 뿐 만 아니라 심지어 미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대다수 미술을 전공한 사람을 포함하여-미술에 대해 `리얼리티reality`가 아닌 `미beauty`의 대상으로서 장식적 볼거리로 여긴다. 근대이후 서구근현대미술을 잘못 수용한 데다가, 배금주의拜金主義  풍토 속에서 상품적 가치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본능과 지성을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확장된 진폭은 일반인이 갖고 있는 통념적 인식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다. 현대미술은 근대라는 특수한 시기에 생겨난 근대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은 근대사회의 성립과 변천과정에 근거한 근대미술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이해되는 세계다. 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마르셀 뒤샹의 ‘예술을 넘어선 예술’에 대해

그럼 유인물에 실린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같이 보면서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왼쪽 위편에 실린 도판 그림의 제목을 보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No.2>라고 적혀 있다. 마르셀 뒤샹이 25살 때 그린 이 그림을 통해 그도 원래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얼핏 보면 입체파 그림 같지만 자세히 보면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그림은 일반적인 나체 그림과도 큰 차이가 있다.
마르셀 뒤샹이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을 전후한 시기인 20세기 초반은 수학, 과학, 문학, 연극, 음악, 역사, 사상, 기술적 발전,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사상 가장 심한 변화의 시기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획기적 변화의 시기였다. 이를 통해 뒤샹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역사란 수천, 수 백 년 길이로 보면 시대별 특색이나 예술적 특성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누드화의 변천과정만 보아도 서양인들의 미와 예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 지 알 수 있다. 먼저 르네상스 시대 때의 보티첼리나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면 신화 속의 여신으로 누드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8세기나 19세기가 되면 비로소 일상적인 모습의 여자를 그리게 된다. 그 중에서도 선구적인 화가로는 고야나 마네를 꼽을 수 있다.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는 당대의 평범한 매춘부를 그린 그림이다. 고전주의 관점으로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다.
그러나 폴 고갱에 이르러서는 남태평양 타히티 원주민 여자를 누드로 그린다. 당시 서구 문명권 대다수의 사람들이 백인종만이 문명인이며 다른 종족들은 추한 야만족으로 여겼던 때였으므로 고갱이 이러한 원주민 여자를 그림의 소재로 삼은 것 자체가 당시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갱의 누드화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에 비하면 공주님이다. 알다시피 <아비뇽의 아가씨>에 나오는 누드를 고전주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추하고 흉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No1, 2>에 이르면 사람인지 로봇인지조차 불분명하고 게다가 여러 사람이 겹쳐져 진 듯 그려져 있을 뿐 구체적 형상도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무수한 선과 면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로 사람의 움직임을 연속 촬영한 사진의 영향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배경이 있다.
마르셀 뒤샹이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수학, 과학, 문학, 미술 등 여러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때이다. 과학에서는 이른바 ‘4차원’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논의되며 뒤샹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음을 훗날 그가 한 대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20세기 초에 들어 현대물리학을 중심으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4차원에 대한 논의가 많을 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영향을 받은 민코프스키란 사람이 쓴 4차원 시공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또한 포볼로프스키의 <사차원 나라에의 여행>책도 출간되었으며, 당시 뒤샹이 속해 있었던 연구 모임에서도 주로 이런 문제를 쟁점으로 삼아 자주 토론을 했다고 한다.
4차원이란 엄밀히 말해서 ‘4차원 공간’과 ‘사차원시공’으로 나누어지는데 20세기초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세계관은 `사차원 시공`으로 이는 3차원적 세계에 `시간`을 더한 것이다.(*칠판에다 그리면서 다음과 같이 수학적 차원으로 설명한다. 점은 0차원, 두 점 사이의 선은 1차원, 사각형의 4점을 잇는 점은 2차원, 높이를 갖는 사각 입방체는 3차원, 이 3차원에다 앞에 엇갈리게 4각형을 하나 그린 후 먼저 그린 사각형과 선을 연결하면 4차원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것이 3차원에다 시간을 합친 4차원 시공을 도식적으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다) 이 4차원 그림을 보면 마치 시간 안에 움직이는 사각형의 순간순간 모습을 그린 듯하며, 이런 특성을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No.1, 2>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그림은 당시 개최된 전시회에서 출품을 거부당한다. (*수 년 후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가 미국의 뉴욕 아모리Armory 쇼에서 전시되면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뒤샹은 이전까지의 미술의 표현 방식에 대해 더욱 회의를 하게 되며, 결국 전형적인 미술의 형식과 결별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를 그린 1912년은 마르셀 뒤샹의 생애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시기이다.

1912년 6월 마르셀 뒤샹은 그 전해(1911년 10월)에 알게 된 프란시스 피카비아, 그의 아내, 카브리엘 피뎃 피카비아, 그리고 아폴리네르와 함께 당시 전위적인 극작가인 레이몽 루셀이 쓴 <아프리카의 인상>이 이라는 극장 공연을 보러 갔는데, 이 체험이 이후 마르셀 뒤상 예술세계의 여러 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언어의 동음이의적인 특성을 활용하거나 말장난pun을 작품의 컨셉이나 제목으로 삼은 일도 이 레이몽 루셀의 영향이 컸다. 또한 공연에 도입된 독창적인 기계, 인공적인 과학실험 등도 후에 뒤샹의 작품의 큰 특징이 되는데, 특히 뒤샹이 1915~1923년까지 8년 동안 제작한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로부터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도 많은 부분 루셀을 만난 것이 고동이 되어 착안된 것이다.          

1912년 7,8월에 있었던 독일 뮌헨 시 체류이후 그는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과 <신부> 그리고 <독신자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 라는 주제의 드로잉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훗날 <큰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로부터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이하 큰 유리로 통일함) 작품의 구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뮌헨임을 알 수 있다.  이해 10월에는 피카비아, 아폴리네르 등과 함께 프랑스 쥐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며, 이 때 훗날 제작하게 되는 녹색상자의 자료들을 구상하고 메모하게 된다. 뒤샹이 이 여행 동안에 쓴 노트들은 언어유희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논리와 상식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어 1913년부터 뒤샹은 관습적인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고 대신 ‘측량과 시공간의 계산’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물리학적이면서도 우연적인 효과를 추구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 첫 예가 여러분이 보는 유인물에 나오는 <세 개의 표준 정지기>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1m 길이의 실을 1m 높이에서 수평으로 세 번 낙하시켜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자의적인 새로운 길이 단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인물 2쪽에 나오는 <샘>은 흔히 뒤샹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다. 그러나 <샘>은 마르셀 뒤샹에 의해 최초로 ‘선정’된 1917년 당시 전시장에 전시조차 되지 못한 채 격벽/ 칸막이 벽 뒤에서 발견된 오브제였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죽 방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변기 사진만이 마르셀  뒤샹이 비트리스 우드, H.-P. 로체와 함께 출판한 잡지 <장님>의 두 번째호에 실린다.
이후 <샘>은 많은 사람들에게 논의의 대상이 되며, 요컨대 예술 및 예술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오브제’로 해석된다. 이 오브제를 통해서 뒤샹은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부정하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샘>이 예술작품을 부정하는 작품으로 해석되는 까닭은 바로 ready-made, 즉 제작된manufctured 기성제품을 단지 선택(선정)만 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이란 예술가가 미적 감상대상으로서 직접 그리거나 만드는 활동, 즉 창작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샘>은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창작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뒤샹이 미적 감상 대상이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전략적 제스처임을 알 수 있다.  
<샘>은 뒤샹이 선택한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아니지만(*뒤샹의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1913년의 <자전거 바퀴>이다. 그러나 뒤샹이 최초로 레디메이드란 말을 한 작품은 눈 치우는 삽에다 <부러진 팔에 앞서서>란 제목을 단 것임) 이런 작품을 전시회라는 공적 행사에 내놓음으로써 후대에 <샘>은 현대예술사상 새로운 예술의 존재방식 및 가능성을 제시한 중요 작품으로 평가받게 된다. <샘>이후 예술은 종래의 조각이나 그림 같은 대상적 상품적 실체가 아닌 작가의 개념적 정신과 의도로서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인물에 나오는 사진을 자세히 보면 왼쪽 하단 부분에 R. MUTT 1917이라고 쓰여 있다.  M. Duchamp라 쓰지 않고 R. MUTT라 썼다는 것이다. 이 이름은 소변기 공장 사장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한국의 김철수처럼 흔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하여튼 익명의 이름이며, <샘>을 해석할 때 이 사실이 중요하다.  

대중들은 가령 어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볼 때, 흔히 누가 그린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들은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서명 때문에 그 그림을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셀 뒤샹은 <샘>에 익명의 이름을 서명함으로써 예술가란 존재에 대해 근원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뒤샹의 <샘>은 예술과 비예술,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이후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출현하면서 종래에는(칠판에다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안에다 예술이라 쓴 후)이만큼이 ‘예술’이라면 나머지는 예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경계가 존재하며, 있다면 누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정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비판 정신과 문제의식을 갖고 생각해보면 결국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도 어디까지나 임의적으로 설정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경계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경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예술가과 비예술가의 경계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의 경계도 사라짐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예술가’라고 자처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난센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무엇이든 어떠리Anything goes 식의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것은 그만큼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이 확장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현대예술가(?)들은 스스로 원점에서 묻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고독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뒤샹의 예술이나 현대예술을 들여다보면 그 어법idiom이 보인다.

유인물 2쪽에 나오는 < L.H.O,O,Q >라는 작품도 현대미술의 새로운 어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인 <모나리자>를 프린트한 싸구려 복제 사진에다 마르셀 뒤샹이 조금 손질을 가한 작품이다. 겨우 엽서 크기 만 한 것인데, 이 모나리자의 얼굴에다 검정색 연필로 수염을 그리고 밑에 빈 공간에다 대문자로 L.H.O,O,Q라고 쓴 것이다. 이 제목은 프랑스어로 읽을 경우 ‘elle a chaud au cul’이 되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란 외설스런 뜻이다. <모나리자>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다 빈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졌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근대예술을 대표하는 상징하는 신비한 미소를 지닌 아름다운 여자로서 대표되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마르셀 뒤샹은 너무도 간단한 방법으로 모나리자를 음란한 여성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은 정말 모나리자를 모독한 것일까? 이러한 원작 ’비틀기‘는 뒤샹 특유의 장난스런 위트의 소산이다.
마르셀 뒤샹은 유머러스한 장난 끼를 발휘하여 모나리자에 대한 대중들의 우상화된 통념을 조롱함으로써 예술의 본래가치를 생각하고 반성하게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모나리자를 모독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통념을 조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로서 다가온다.  
어떤 사람은 평생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해도 제대로 된 작품하나 못 남기는 데, 마르셀 뒤샹은 불과 몇 분도 채 안 걸렸을 개념적 행위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마르셀 뒤샹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무엇이든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점은 그렇다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떠한 기준도 존재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은 그만큼 명확하게 ‘이것이 바로 예술이다.’ 라고 입증할 수 없는 시대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가짜’가 ‘진짜’ 행세하는 무수한 사이비들이 생겨났지만, 이는 일반 대중들 대대수가 여전히 과거예술에 대한 고정관념과 향수를 갖고 있어서 ‘속거나’ ‘속이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도 수많은 예술작품이 제작되고 발표될 텐데, 그럼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즉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없다면 진짜와 가짜의 경계도 없을까? 라고 반문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현대예술가들 중에서 미술을 단지 생계나 출세의 수단으로 삼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당대 유행하는 트렌드 스타일에 편승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마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양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그것을 경력으로 삼아 남을 속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이비’들은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사이비를 알아보는 사람까지 속일 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 참된 예술은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려는 비평적 활동으로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언어유희적인 작품을 보자. 유인물에도 나오듯 마르셀 뒤샹은 이런 작품을 여럿 선택하고 장난을 했다. 먼저 <로즈 셀라비>란 작품을 보자. 이 작품은 1920년에 뒤샹이 여자로 분장을 한 모습을 만 레이가 찍은 것이다. 당시 뒤샹은 카톨릭 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유태인식 이름으로 바꾸려다 성적인 정체성마저 바꾼 ‘로즈 셀라비’란 이름을 택했다고 한다. ‘로즈 셀라비’는 프랑스의 문장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그 뜻은 ‘에로스 이것이 삶이다Erose, C’est la vie이다. 일종의 중의법적 언어유희인 것이다.

다음 은 <신선한(발랄한) 과부>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식 창문French window`의 모형 오브제를 선택하여 철자만 변형하거나 바꾸어 `신선한 과부Fresh Widow`로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파리에서 7개월간 체류한 후 1920년 1월에 뉴욕에 다시 돌아와서 목수에게 제작 의뢰한 첫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받침대 윗부분에 보이는 서명은 다음과 같다. “신선한 과부, 마르셀 뒤샹. 저작권 로스-그리고 로스가 아닌-셀라비”    

다음은 <로즈 셀라비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라는 작품이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새장에다 각설탕 형태의 대리석 입방체, 온도계, 오징어 뼈 등을 담은 작품이다. 역시 마르셀 뒤샹 특유의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약 8년 동안 <큰 유리>란 작품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마지막 대작 <주어진 것(에탕 돈네): 1, 폭포2, 조명용 가스 Etant donnees : 1"la chute d`eau, 2"le gaz d`eclairage *이하 에탕 돈네로 표기함>와 함께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힌다. < 큰 유리>는 표면적으로는 무슨 기계 설계도 같은 이미지다. 이 작품은 크게 상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 부분은 신부의 영역이며, 아래 부분은 독신자 영역을 뜻한다. 이중 윗부분은 뒤샹에 의하면 4차원에 대한 이론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뒤샹은 사차원이 3차원을 가진 어떤 물건을 투영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즉 우리가 보는 3차원적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4차원을 가진 물건의 투영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이 구상된 배경은 역시 레이몽 루셀의 공연인 <아프리카 인상>으로 거술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의 인상>에 담겨 있는 반의미성, 비예술적 반미학적 측면들에 영향을 받고 이러한 구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큰 유리>는 남녀 간의 미묘한 관계를 기계적인 드로잉으로 상징이나 기호로 표현한 것으로 문명 속에서 기계화된 인간을 불투명하게 표현함으로써 전통적인 미술에서 벗어난 미술을 추구한 것이다.(*이 작품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의 해석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르셀 뒤샹은 1941년대 초반 이 그림을 기록한 스케치, 메모, 설계도 등을 모아 <녹색 상자>와 <흰색 상자>를 만든다. 이 상자들은 그의 자필 원고모음이자 <큰 유리>에 대한 설계도이며 최후의 대작이자 마르셀 뒤샹 사후에 공개된 <에탕 돈네>까지 일관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전의 작업을 작은 모형으로 축소해서 가방 안에 담는 작업으로 호화판 20개, 보통판 300개 미만으로 제작하였다. 일종의 움직이는 뮤지엄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마르셀 뒤샹은 죽을 때까지 언어유희와 함께 위트 넘치는 작품을 선정하며 그 모두가 기상천외한 발상의 작업들이다. 그 중에서 한 작품을 꼽는다면 두 번째 유인물 오른쪽 아래 부분 도판에서 볼 수 있는 <내 혀를 가지고 내 뺨 안에서>가 있다. 볼 부분은 사탕을 입에 넣은 것처럼 혀를 볼 쪽으로 내밀어 석고를 뜬 것이고 나머지는 윤곽선 만을 간단히 드로잉한 것이다. 매우 간단한 발상의 전환과 방식으로 입체와 평면이 즉 2차원과 3차원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식의 자화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끝으로 1946년부터 죽기 2년 전까지 약 20년간 작업을 한 마지막 대작 <에탕돈네>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마르셀 뒤샹이 죽고 난 뒤 그의 스튜디오 구석의 은밀한 밀실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에탕 돈네>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붉은 벽돌 벽에 스페인식의 나무로 된 낡은 문과, 문 가까이 눈을 대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눈높이에 있어 관람자는 엿보는 사람으로 만드는 공간과 그 안의 내부의 광경이다. 이 중 내부는 석고로 만든 여인이 나체로 다리를 벌린 채 죽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누어있고 여인의 왼 손에는 가스램프가 들려있다. 그 뒤로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떠 있으며, 그 밑에 보이는 작은 연못에서 안개가 퍼지고, 작은 폭포도 흐른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주로 애욕적인 본능과 그가 평생 관심을 가졌던 과학적 지성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여러 뒤샹 연구가들이 큰 유리와 함께 1911년 이후 만들어진 뒤샹의 모든 작품들이 집약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독창성을 대담하기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아이러니한 미학과 레디메이드 작품을 통해 유미주의적, 또는 망막적 작품을 거부한 삶을 살았다. 얼마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그에게 예술이란 조형적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라 정신적 활동의 매개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마르셀 뒤샹은 평생 동안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한껏 발휘하여 유유자적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묘비명도 ‘하기야 죽는 일도 남의 일이지’란 말이었다.  


맺음말

마르셀 뒤샹은 죽기 수 년 전, 살며 숨 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좋아한다고 말했다. 평생 볼거리로서의 예술을 거부한 마르셀 뒤샹 다운 말이다.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는 미적 가치를 보여주는 스타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굴레에서도 벗어난 것이었다. 이는 통념적 예술과 이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뒤샹의 예술세계를 오해하거나 형식적 측면으로만 관심을 가질 경우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를 표현방법으로 차용한 수많은 뒤샹의 후예들_ 특히 ‘네오다다’ 또는 `팝 아트`로 이름을 얻은-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예술세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마르셀 뒤샹의 예술은 인간의 감성을 지배하는 본능과 이 세계를 이해하는 틀인 고차원적 지성을 포괄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의 작업은 표면적으로는 `이미지`에서 `오브제` 미술로의 전환으로 보이지만 볼거리가 아닌 동어반복적인 일상의 삶을 일깨우는 정신적 예술을 추구하였다.
결국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서구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성과 의식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제시한 현대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들도 이시간 이후부터 자신의 의식을 제한하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깊고도 폭 넓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2008년 12월 10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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