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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23: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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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없는 전시? 《묵음(黙音)》전을 보고



1.
주말인 어제 오늘 이틀 동안 거의 하루 종일 계속된 고성방가로 소음에 시달렸다. 시의 체육관 및 야외 잔디 운동장 시설이 아파트 근처에 있다 보니 해마다 이 맘 때면 어김없이 되풀이 되는 연례행사로서 어제부터 이틀통안 거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주변까지 떠들썩하게 만드는 이런 각종 행사는 거의 매달 한 두 번 씩 한다. 사실 전국 각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성행한다. 알고 보면 속빈 강정인 '가짜 이벤트(pseudo-event)'에 지나지 않지만 막대한 자본을 들인 행사답게 거창하고도 요란하게 치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문화인 줄 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각종 비엔날레를 포함해 지역마다 치러지는 각종 문화행사도 그 본질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귀가 멍할 정도로 거의 연이틀 동안 폭력적으로 강요되는 고성방가를 들으며, 아이러니 하게도 지난 9월 23일부터 외대 옆 SPACE ZIP GALLERY에서 열리는 전시회인《묵음(黙音)》전에 대한 글을 썼다. 주1) 그만큼 소모적인 행사가 떠들썩하게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기만하는 일임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으며, 또한 욕망을 충족하는 대상으로서의 미술문화 양상도 이러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 상황과 대조해보면 '묵음'의 문제의식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2.
현대미술의 거칠고 도발적인 외피는 우상처럼 떠받들어 온 미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의심과 저항에서 비롯된 태도의 문제이다. 미술을 둘러싼 첨예한 비평 담론은 이러한 태도에 부응한 노력의 산물이며, 이곳에 박제된 아방가르드가 설 자리란 없다. 시각적으로 그럴듯한 외형을 취한다고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진정성을 연출하는 것만큼 역겨운 것도 없다.

위 글은 《묵음(黙音)》전 팸플릿에 나오는 기획의 글 앞부분이다. 이어 이 글은 세속에 영합하기 위해 사이비 작품과 거짓 비평이 득세하는 한국의 미술계를 날카로운 어조로 질타하며, ‘미술 하는 일’이 더 이상 눈요기 거리의 제시가 아님을 역설한다.        
이 글을 통해 이번 전시가 현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방식과 기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기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글은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전시 기획의 표제도 《묵음(黙音)》, 또는 ‘볼거리 없는 전시’라는 반어법적 표현이다. 즉 눈요기 거리(마르셀 뒤샹의 어법을 빌자면 망막에 호소하는)는 넘쳐나나 이면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상황에 대한 도발적 표제임을 직감할 수 있다.
‘묵음’이란 말은 선불교적 용어인 ‘연주하지 않은 연주’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또는 수행기간 동안 한 마디로 하지 않는다는 ‘묵언 수행’이란 말도 떠올리게 한다. 그 목적은 엄연히 다르지만.

전시장에서는 먼저 최선의 <썩은>이란 작업을 볼 수 있다. 이번 기획전을 앞두고 약 1년 간 냉장고 바깥 위에 방치해두어 검은 색 상태로 변한 자신의 썩은 피로 중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리커란李可染의 수묵산수화라가 추사 김정희의 ‘서화일치’ 론 같은 동양의 전통을 의식하면서도 기존의 회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점을 찍듯 선을 내리긋듯 단순한 흔적을 남긴 작업이다.  
즉 피가 검은 색이어서 먹물 대신 쓴 것이며, 작업하는 동안 지독한 냄새로 숨을 멈추어야 할 정도였으나 마르고 나서는 냄새도 사라지고 검은 색도 붉은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작가가 ‘이것’이었으면 하는 의도가 배제된 이러한 과정의 어긋남에 작가는 주목한다.
그러므로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은 선혈이 낭자한 섬뜩함도, 그렇다고 구역질나게 혐오스런 이미지도 아니다. 다만 그의 운필 작업은 매끈한 하얀 종이 위에 조금 씩 조금 씩 천천히 이동한 흔적으로 인해 고동색에 가까운 붉은 색이 종이위에 응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몇 개의 점인 듯 선인 듯 간결한 행위의 흔적은 이로 인해 망설임과 단호함을 동시에 느끼게도 한다.
그렇지만 간결한 양태로 보아 무슨 형상성을 표현하기 위한 선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프란츠 클라인의 그림 같이 서도書道를 흉내 낸 선도 아니었다. 오히려 추사 김정희 만년의 글씨의 획처럼 어떤 이론이나 기교에서도 벗어난 질박한 선이 결연한 의지로 드러난 느낌이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몇 개의 투박한 운필 자국이 전부이지만 들여다보면 어떤 자국에선 강철을 구부려 놓은 듯 힘이 느껴졌고, 어떤 부분은 세포가 증식하는 듯 정체불명의 생명체같이 꿈틀거리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가가 원하는 것은 결과로서의 이미지는 아니다. 이 작가는 평소 서구미술문맥에서 배제된 입김, 체온 같은 약하면서도 사라지기 쉬운 것을 작업의 과제로 삼아 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는 예술세계는 통념적으로 대하는 예술과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성립함을 할 수 있다. 서구미술사 문맥에서 축적된 기존의 가치를 ‘때를 벗겨내듯 씻어버리고(작가의 말임)’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의 이번 작업은 이전의 그가 해온 작업들, 이를테면 캔버스를 벗긴 작업이나, 폐유 혹은 동냥젖을 캔버스에 발랐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맥락의 방법을 구사하였음에도 마치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앞에서 한 걸음 더 내 딛는(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서는 어떠한 미적 조형의 상투성도 거부하는 생경함과 ‘뚝심’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육순호의 작업은 <심호흡>주2) 으로, 약 150cm 높이의 좌대 위에, 즉 어른의 코가 닿는 높이의 좌대 위에 정체불명의 하얀 가루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선천적 특성인 작가의 ‘오목가슴과 정상적인 체형이 가지는 차이만큼의 양을 매운 가루로 쌓아 놓은 후 작가의 함몰된 가슴으로 찍어 놓고 이를 사람의 얼굴 높이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 작가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전 작업(스프레이 락카로 사건 현장의 사람 모습을 테두리로 남겨놓고 기록해 놓은 작업)을 어떻게 풀어갈 지가 지속적인 관심사였으며, 특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과 개념을 이용하여 통념을 자극하거나 교란시키는 방식도 어쩌면 스타일화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부재不在’의 영역을 어떤 사물로서의 작품처럼 제시(연출)해 놓고 관념 혹은 감각 반응들이 서로 교차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작가의 오목가슴은 부재한 부분이지만 심호흡이 요구될 때 부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역으로 소통의 채널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동시에 ‘정말로 작가가 빠져 나가버리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을 이번 작품에서 드러낸다. 즉 개인적인 불편함, 부재의 인식을 교차시키기 위해 미술 전시장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리고 약간의 암시만을 위해 ‘찍어내는 방식’을 도입했고, 드러난 신체의 전도된 모습에서 찍어낸 가슴과 연관된 ‘호흡’의 부분을 연상시키고자 분말형태와 냄새를 도입함으로써 오히려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냄새와 호흡이라는 것도 작업의 전반적인 구성이 작동되도록 하는 일종의 ‘장치’인 것이다.
결국 이 작업은 미술 전시장에서 미술의 조형성 문제를 결부시켜 설정된 연극적인 모습, 좌대와 덩어리 작품인 것처럼 유도하지만 작품에 다가서는 순간 가루에서 자극적인 냄새로 인해 미술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감상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실제 감각 - 냄새, 재채기 등 최루가루처럼 숨 쉬는 행위를 거스르는 물질만을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분말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며, 그만큼 쉽게 사라지거나 훼손되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물질이다.) 이런 차원에서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미술이란 곧 가공된 인공 향기와 다름없다는 자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가의 신체적 특성과 결부된 작품을 보면서 문득 뒤샹의 말이 생각났다. 뒤샹은 생애 말년에 있었던 카반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며 숨 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좋아한다. 나는 내가 한 일들이 미래에 어떤 사회적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의 예술은 산다는 것일 것이다. 매순간 매 호흡은 아무데도 기록되지 않고, 시각에 호소하지도 않고, 정신적이지도 않은 작품이다. 그것은 일종의 항구적인 환희이다.”

사혜정의 작업 <X>는 손수건만한 광목천에 짙고 옅은 먹물이 여러 방울 엉겨져 떨어져 있는 상태로 제시되어 있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현 형식은 일견 평범했지만 이 작업은 특정한 숫자나 기호(전해 듣기로는 고도의 계산이 깔린 수학적 공식이나 수열 같은 수식)를 고무도장에 새겨 먹물로 얼굴에다 찍어 땀으로 흘러내린 자국이라고 한다. 수학을 전공한 후 미술작업을 하는 작가의 이채로운 경력이 이 작업에도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인류는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학문적인 수학적 사고력를 키워왔지만 특히 근대이후 과학문명의 언어로서 수학은 가장 엄밀한 사고의 영역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근현대화 과정은 곧 수학적 사고의 엄밀성을 키워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지의 X값을 푸는 방정식에 대한 도전의 역사이다. 하지만 일반 대수학 안에서 5차 방정식은 그것을 풀 공식이 존재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역설적 공식이 되어버린다. 곧 삶과 문명에는 어떤 공식도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삶이란 그 어떤 고차 방정식으로도 불가해한 가역성의 세계가 아닌가?
또한 오늘날 모든 것이 수치화 ․ 계랑화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을 속박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는 점도 수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혜정의 작업은 수학적 엄밀성을 넘어선 세계, 즉 일종의 카오스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수’로 이루어지는 정교하고 치밀한 사고의 과정은 머리 속 좌뇌, 그 중에서도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적 산물이지만 먹과 땀은 공간과 시간과 물성의 영역이다. 겉으로 보이는 단순성과 달리 그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는 장소에서 오체투지 하듯 온몸으로 행한 고투의 흔적인 것이다.
최근 과학이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과 물질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구분할 수 없는 에너지의 덩어리라고 보는 관점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최근 이론도 에너지 덩어리란 설과 공간을 중심으로 공간이 구겨져서 뭉쳐진 것이 사물이란 설이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물성에서 수치화된 ‘개념’적 수를 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수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없는 영역을 자각함으로써 차원이 다른 복합적 세계를 탐색해왔던 인간의 사고와 행위의 과정을 집약한 흔적으로 보인다.

백정기의 <RMP-b>란 영상 작업은 달리는 자전거에 장착된 카메라가 찍은 길 주변의 영상이었다. 그의 작업 중 벽면에 커다랗게 프로젝터로 보여주는 영상은 제목이 <ROADSTAR> 주4)라는 영상 기록물이다. 그리고 <RMP-b>(영상매체와 음향장비 등으로 개조된 자전거 전개도)와 <RMP주-b, 서울주행>(백정기 씨가 RMP-b를 타고 주행한 위치를 기록으로 남긴 자료)이라는 자료가 출력되어서 벽에 붙어있는 방식으로 디스플레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이번 영상은 자전거 바퀴의 고무 부분을 수레바퀴처럼 나무와 철로 교체하여 그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의 거리를 달리며 찍은 영상물로서, 그만큼 전시장 벽에 비친 화면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영상이었다.
작가의 의도는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 대한 반성인 듯 했다. TV나 각종 영상매체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이란 상업적 목적 하에 아름답게 포장된 가공된 영상으로 그것도 편집된 영상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그러한 가공된 시각이 아닌 흔들리는 영상에 비친 모습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현시대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마저 선택되고 가공된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바로 이를 거부하고자 오히려 아날로그적 방식을 도입한 것이 작가의 주된 의도로 읽힌다는 것이다. 이어령식으로 말하자면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된 디지로그 작업인 셈이다.
이 작업은 언젠가 보았던 카메라가 도로 바닥을 뒹굴며 찍게 한 영상이나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면서 찍힌 영상작업을 연상케 했는데, 예기치 않은 당혹스러움의 면에서, 무엇보다 볼거리를 거부하는 이번 전시의 취지로 본다면 이러한 영상이 더 부합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도희의 작업은 아무런 구체적 영상도 없이 치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주사선의 빛만 명멸하는 초기화면이 보이는 TV모니터를 향해 작은 화분만이 놓여 있다. 화분에는 향일성을 입증하듯 모니터 쪽으로 쏠린 모양의 식물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이 식물은 TV모니터 앞에서 자란 것도 아니므로 TV 모니터를 향한 설정은 역설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업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물체나 상황에 몰입해서 의미를 찾는 일반적인 접근(감상법)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상은 그저 현상일 뿐인데, 진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는 성경구절을 차용한 제목도 반어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찾는 진리라는 것도 관념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업은 오늘날 상업적 목적으로 고도로 발달한 영상매체에 대한 거부의식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영상매체로서 오히려 영상매체를 비판하는 의도를 담은 작업인 것이다.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오늘날 TV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의 영향력은 지배적이다. 그러나 TV 속 화면은 그 다채로운 화려한 연출력만큼이나 상업적 의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TV나 영화는 물론 ‘가공’된 영상으로 비엔날레의 주류를 이루는 비디오 아트 조차 시각적 스펙터클 효과를 보여주는 매체로서 과잉 이미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근대 이전의 인간에게 빛은 언제나 희망과 긍정의 상징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빛이 그러하고, 불교의 ‘회광반조’의 빛이 그러하다. 그리고 현시대의 영상매체의 빛-영상은 시스템화 되어 있다.
그러나 김도희의 작업은 이러한 상징이나 시스템을 벗어나 어떠한 해석도 거부하는 현상만을 너무도 단순한 형식으로 제시한다.(이 작업은 지난 9월 30일부터 위치를 전시장 입구 창가 쪽으로 옮겨 TV모니터가 창을 등지고  그 앞에 화분이 놓아두는 방식으로 설치했다고 한다. 모니터와 식물과의 상황적 관계를 희석하기 위해서 창가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캡션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모니터, 식물, 해가 떠 있는 시간, 2008로 고쳤다고 한다.)    

3.
이번 전시는  예술을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감상자들에게는 정말 ‘볼거리’가 없는(?) 전시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 전시 참여 작가 중 특히 네가티브하고 역설적인 전시 방식을 택한 작가들의 문제의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만의 어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온, 그래서 당대에는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예술가들과 다르지 않다.
이번 전시의 전반적 경향은 전시를 구상하는 초기에는 작업을 선별하고 규정하는 반대급부적인 측면, 이를테면 미술의 조형적인 문제, 장식적인 문제, 스타일리쉬한 문제 등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다른 채널을 강구하고 있는 점에 관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 기획자의 표현을 빌면 ‘한쪽 길을 차단함으로써 다른 길을 뚫어 놓으려는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는’것인데, 이는 ‘묵음 (볼거리 없는 전시)’ 의 타이틀과 묘한 접점을 형성시키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 작품 중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활동인 전시의 특성상 좀 더 일반적 통념을 배반하는 도발적 형식으로 제시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었다.  막상 구체적 실천 단계에서는 문제의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이 있음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숭고한 미적가치나 우상적인 작가의 정형화된 틀을 대신하는 어떤 '중립지대'에 이르기 위한 방법들이다.
무엇보다 때에 따른 적절성, 즉 ‘시중時中’ 이란 말이 있듯, 전시 형식이란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도 정곡을 꿰뚫는 작업이란 규모나 외형적 세련됨, 또는 장인적 완성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벗어나 좀 더 깊고도 넓은 감응을 느끼게 하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볼거리’ 이상의 세계로서의 대응과 실천 방법은 우리 모두의 화두이리라.      
                      
                                 2008년 9월  28일
                                      도 병 훈


  
주1) 전시장에는 지난 9월 25일 다녀왔다. 전시장에서 조규현 선생님을 만났뵈었으며, 최선, 김도희, 육순호, 정동춘과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한 조선생님의 고견을 경청할 수 있었다.  
주2)작품 캡션은 <심호흡, 오목가슴으로 찍어 낸 매운 가루, 2008>로 적혀 있음.
주3) 이 제목은 백정기 씨가 개조한 자전거의 원래 브랜드(?)가 ROADSTAR 여서 지어진 제목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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