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5943
2008.08.03 (10:28:22)
extra_vars1:  ||||||||||||||||||||| 
extra_vars2:  ||||||||||||||||||||||||||||||||||||||||||||||||||||||||||||||||||||||||||||||||| 
  일상의 삶과 다른 예술가의 삶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훌륭한 운동시설과 동네 약수터가 있다. 그래서 운동을 하다 가끔 준비해간 작은 물통에다 물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약수터에서는 수도꼭지가 여러 개 있음에도 오래 기다려야 겨우 순서가 돌아온다. 그 이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십 통의 커다란 물통을 손수레에 싣고 와서는 기다리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물통들만을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러한 광경을 볼 때만 하더라도 그날따라 우연히 이런 사람이 많은가보다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 거의 매일같이 당연한 듯 조금도 남을 배려하지 않은 이러한 행태를 예사롭게 하는 것을 지켜보며 갑자기 인간이란 존재가 몹시 낯설어지고 심지어 추악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광경은 우리시대 보통 사람들의 삶의 단면이지만,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다.본래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 속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자신의 물통만을 채우려는 현대 우리 사회의 문제는 분열된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그릇된 병폐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래적 삶을 생각해보면 이기적 인간의 속성이 무색할 정도로 삶의 근저는 부조리하며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이러한 물음을 가질 때마다 예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무대에 비유한 사람이 셰익스피어라면 일상적 무대 라는 '장' 위에서  삶의 무의미함과 권태로움을 질릴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사람은 사무엘 베케트이다. 그리고 일상의 지루함과 무의미함, 즉 권태로서의 삶을 ‘시간 죽이기’로 본 철학자가 있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현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기분을 권태라 했다.『형이상학의 근본개념』에 나오는 그의 말을 옮겨보자.

폭 좁은 철도를 끼고 있는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 우리는 앉아 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야 온다. 기차역 일대는 삭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배낭 속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 꺼내 읽어볼 것인가? 그러면 어떤 물음이나 문제에 대해 골똘히 사색에 잠겨볼 것인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기차 운행 시간표를 훑어보거나 또는 이 역과-우리는 잘 모르는- 낯선 곳과의 거리가 다양하게 표시되어 있는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다 우리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겨우 15분이 지났다. 그래서 우리는 국도 쪽으로 가 본다.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이제는 국도변의 나무를 세어본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처음 시계를 보았을 때보다 5분이 더 지났다. 이리저리 거니는 것도 싫증이 나 우리는 돌 위에 앉아 갖가지 형상을 모래위에 그려본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우리가 또다시 시계를 쳐다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위의 내용은 우리의 삶을 압축한 얘기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바로 삶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핵심어는 ‘시간 죽이기’다. 얼핏 생각하면 다들 바쁜 세상에 무슨 ‘시간 죽이기’같은 한가로운 이야기야 할지 모르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다.
이 글에 나오는 ‘시간 죽이기’란 '부조리'한 삶의 실상을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죽이기’란 ‘붙잡고 있음’이자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음’이다. 그래서 기차시간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인 것이 권태로운 삶의 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살든, 그것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이며, 이를 실존적 용어로는 삶의 시간적 부조리라 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부조리 연극은 이 시간 죽이기 중의 극단적 상황이 연극화된 작품이다.
시골 길 나무 한 그루 아래서 작품 속 두 주인공은 연극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오지도 않고 끝내 정체도 밝혀지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 죽이기를 반복한다. 권선징악이나 비극적 서사가 있는 전통연극과 달리 어떤 극적 사건도 없는 시공간 속에 사람이 던져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단지 두 사람은 무의미한 대화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절망은 더욱 깊어간다. 베케트가 보여준 인간상황은 우리 일상적 삶의 근원적 무의미함과 허망함을 나타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간 죽이기의 일상적 삶을 비본래적 삶이라 규정했다.  
      
하이데거는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를 구분했다. 표면적 권태는 시간 죽이기로 해결하며 살아가면 되지만 깊은 권태는 시간 죽이기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 깊은 권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실존’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가 말하는 실존이란 단지 다른 세상 사람들이 살듯 유행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가능성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알베르 까뮈는 실존적 삶을 ‘부조리’에 맞서는 ‘반항’에서 찾았다. 그가 말한 반항이란 잘못된 것을 용인하지 않고 목적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수동적 삶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결국 ‘실존’하는 삶에 가장 가까운 이들은 그 누구보다 부단히 새롭게 미의식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몇몇 현대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어진 의미나 기존의 질서 미리 정해진 자기 역할을 거부하는 방법에서 삶을 가치를 찾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예술가들의 행위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풍성한 담론이 생겨나고, 그만큼 ‘예술’로서 그 정신적 가치가 자리매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미의식을 확장하는 인간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값지게 만드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해 또는 세속적 지위나 명예를 위해 사는 인간만큼 어리석은 이는 없다. 인간이란 누구나 기차 떠날 시간이 다가오면 단 돈 1원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들이 난쟁이의 삶, 즉 어리석게 사는 것은 앎과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구도자나 철학자의 삶은 결국 부조리를 직시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습관을 깊이 들여다보면 앎과 삶이 엇갈리며, 나와 세계의 괴리 자체가 부조리, 즉 삶의 실상이라면 무엇보다 이러한 부조리를 직시하고 자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제는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거나 자각한 다음의 삶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몇 몇 현대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은 일상적 삶의 틀에 갇히지 않고 유모어와 상상력으로 삶의 여유를 꿈꾸며 감성과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원래 앎과 삶은 엇갈릴 수밖에 없으며, 고정된 의미도 정해진 운명도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삶을 새롭게 만들며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2008년  8월 2일
                                  도 병 훈




Tag List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