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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5 (11: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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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의 시조와 글씨에 드러난 만남 ․ 사랑 ․ 삶

 

 

1.

최근 친일파와 독립 운동가들의 글씨체를 분석하여 그 특성을 밝힌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장(戰場)에서 쓴 무인의 글씨와 임천(林泉)에서 풍류를 즐기는 문인의 글씨가 다르듯, 글씨는 글을 쓴 당사자의 처지와 마음이 반영된다.

며칠 전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 1583)과의 애틋한 사연과 함께 한국고전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연시의 하나로 꼽히는 조선시대 기생 홍랑(洪娘)의 시조 글씨를 친구의 메일을 통해 보고, 그 필치가 예사롭지 않아 자료들을 찾아보았더니 그녀가 직접 쓴 육필 원본이었다. 주1) 이 글씨는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인 글씨체나 기교 넘치는 글씨와 달리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모습과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홍랑의 이 연시가 실린 서첩은 2000년 11월에 그 원본이 처음 공개되었다. 이 서첩에는 그간 알려진 홍랑의 시뿐만 아니라 최경창의 시도 함께 수록돼 있으며, 서첩 말미에 홍랑과 나눈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홍랑은 어떻게 최경창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시조와 친필 글씨까지 남기게 되었을까?

 

 

2.

홍랑이 만난 최경창이란 인물은 살아생전에 그 시대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 또한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릴 정도로 시에도 뛰어났으며, 글씨, 그림, 퉁소도 잘 부는 예인(藝人)이었다.

최경창은 과거에 급제한 뒤 5년이 지난 1573년(선조 6년)에 함북 경성(鏡城)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여 홍랑을 만나게 된다.

홍랑은 관아에 소속된 관기(官妓)로서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며,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예인이었음을 최경창과의 첫 만남의 과정에서 알 수 있다. 홍랑은 최경창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이 흠모하던 시인의 시를 노랫가락으로 표현했는데, 그 시는 최경창이 지은 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각별하게 한 인연의 끈은 이렇게 맺어진다. 그토록 흠모한 시인이 눈앞에 있음을 알게 된 홍랑의 감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며, 이후 두 사람은 막중(幕中)에서 함께 동거하게 된다. 그러나 임기가 끝난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때 홍랑은 쌍성(雙城,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까지 따라와 정인(情人)과 작별하고, 돌아가던 길에 날이 저문 함관령(咸關嶺:함흥과 흥원 사이에 있는 고개 마루)에서 봄비를 보며 사모의 정을 담은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낸다. 이 때 홍랑이 지은 시조는 다음과 같다.

 

묏버들 갈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

자시창(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

 

(산 버들가지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랑은 해마다 봄이 오면 싹트는 묏버들의 새 잎에 빗대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천 리 먼 거리로 떨어져 있어도 항상 임의 곁에 있겠다는 마음과 함께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달라는 뜻도 깃들어 있다. 특히 홍랑의 간절한 마음과 나무의 새 잎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400년의 시공을 넘어 지금도 이 시가 마음에 와 닿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로 간 최경창은 1575년(선조 8년)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 눕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랑은 곧 남장으로 행장을 차리고 그 날로 밤낮 7일을 걸어 서울의 최경창 집에 당도하여 그를 극진히 간호를 하며 잠시 함께 지낸다.

그러나 이들의 두 번째 만남도 오래 갈 수 없었다. 이들이 이른바 ‘양계의 금禁(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함)’을 어겼다는 죄목과 또한 당시 왕후의 국상 직후여서 사대부가 기생과 어울렸다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주2) 이 일로 최경창은 관직에서 파면되고 홍랑 또한 함북 홍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의 순간, 최경창은 자신의 마음을 담은 한시를 홍랑에게 준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는 부르지 마라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겠지.

 

相看脉脉贈幽蘭 상간맥맥증유란

此去天涯幾日還 차거천애기일환

幕唱咸關舊時曲 막창함관구시곡

至今雲雨暗靑山 지금운우암청산

 

첫 구의 '맥맥(脈脈)' 이란 시어는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습’을 뜻한다. 이 시 첫 구절에 드러나듯 고죽에게 홍랑은 그윽한 향기가 나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으며, 시 전체에 별리의 아픔이 구구절절이 배여 있다.

이 때 이별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이후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을 떠돌다 종성부사로 간 지 1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1583년(선조 16) 객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의 행적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의 문집인 『회은집(晦隱集)』에 전한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홍랑은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최경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곳에서 죽으려 했지만 때마침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래서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나 문적(文蹟)을 정리하여 등에 짊어지고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겨우 병화(兵火)에서 피신했으며, 그 덕분에 최경창의 시가 온전하게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홍랑이 죽자 최씨 문중은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 무덤이 있다. 그곳에는 현대에 들어 세운 홍랑가비(歌碑)가 서 있다.

 

인물과 재능이 출중했던 홍랑에게 최경창 같은 예인은 변방의 평범한 사내들과는 그 격이 다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며, 홍랑으로서는 최경창을 직접 만나고 사랑할 수 있어서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만남/사랑은 삶의 규범 및 제도적 틀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잘 알게 하는 사례다. 문제는 이러한 충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선택하는가이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변방에 부임하여 그 지역의 관기를 만나고 동침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관례였지만 홍랑이란 인물의 진가는 헤어짐의 장면에서부터 드러난다. 홍랑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묏버들의 새 잎이란 매개물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지에 먹으로 쓴 물적 오브제이며, 시각 이전의 직접 몸에 닿는 촉각적인 매체다. 홍랑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이러한 물적인 오브제가 없었다면 그들의 삶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홍랑은 이 단 한편의 시조를 필적으로 남김으로써 최경창의 마음은 물론 후대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홍랑이 쓴 정갈한 글씨는 당시 그녀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홍랑의 글씨는 조선 후기의 궁체와 같은 흘림이나 꾸밈이 없는 단정한 글씨이다. 특히 글자 세로획들의 반듯한 내리 그음은 그녀의 강단과 지조 있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홍랑의 필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초장 중장과 달리 세 번 째 행인 종장에 이르러 행의 배열도 조금 흐트러지고 글씨 크기도 제각각 다름을 보게 된다. 이 부분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홍랑의 당시 심정이 한 획 한 획마다 숨결처럼 드러나며, 그만큼 그녀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일견 담백해 보이는 글씨에도 마음은 그대로 드러난다.

홍랑의 필적을 전체적으로 보면 담백하게 쓴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한 획 한 획 또박또박 반듯하게 쓴 글씨는 볼수록 그 품격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일까, 최경창이 죽자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면서까지 한 사람을 위해 정절을 지키고자 한 그녀의 삶이 연상될 정도로 결연한 느낌까지 든다.

임진왜란 때, 홍랑이 최경창의 시고나 문적들을 그토록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것도 최경창이 남긴 시고나 문적들이 자신과 최경창의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들이고, 무엇보다 이 중에는 자신의 마음이 표현된 이 필적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유추하게 된다. 홍랑의 필적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셈이다.

 

3.

홍랑과 최경창의 만남/사랑은 홍랑의 시조로 알려졌으며 묏버들은 그 매개체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사랑도 청신한 새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만큼 만남/사랑에 대한 집약하는 이미지다. 욕망은 현실과 항상 어긋나며, 이는 모든 생명체가 겪는 부조리한 현실이다.

옛 그림이나 필적은 당대의 시공간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1차 자료로서, 이를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홍랑이 남긴 글씨, 그 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 행이 입증하듯, 한 획 한 획마다 글씨는 곧 그 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어떤 사연이 얽힌 당대의 오리지널 오브제야말로 가장 미세한 마음의 떨림까지도 보여준다.

홍랑의 필적은 만남/사랑 속 극히 작은 한 부분의 삶의 흔적이지만 그녀가 글을 쓸 당시의 심경과 옛 조선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과 기품을 느끼게 하며, 나아가 사랑과 삶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글씨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기질, 심지어 숨결까지 느낄 수도 있는 생생한 물적 흔적이다. 옛 유품, 그 중에서도 필적은 그 언어적 내용과 별도로 감추어진 삶의 본질에 대해 더 깊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2009년 5월 11일

도 병 훈

 

 

주1) 이 시조를 홍랑이 썼다고 밝힌 이는 시조 시인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이다. 이 글씨의 친필 감정은 시대별 어휘의 특성이나 지질, 그리고 함께 전하는 최경창의 문집 등을 보고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한다. 한글이 궁체 위주의 흘림체로 쓰여 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이다. 홍랑의 글씨는 조선 중기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며, 무엇보다 글씨 자체의 품격에서 홍랑의 글씨로 여겨진다.

주2)선조실록 10권, 9년(1576 병자 / 명 만력(萬曆) 4년) 5월 2일(갑오) 2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헌부가 아뢰기를,“전적 최경창(崔慶昌)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不時)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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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no image 마르셀 뒤샹과의 체스 놀이를 보고
도병훈
8599 2009-11-20
마르셀 뒤샹과의 체스 놀이를 보고 1. 지난 11월 7일, 김성배 선배님이 마르셀 뒤샹을 찍은 기록영화documentary film가 있다며, MPG 프로그램으로 보내주었다. 이 동영상은 1963년에 장 마리 드로Jean Mary Drot가 제작한 <마르셀 뒤샹과의 체스 놀이>라는 기록영화로서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자료였다. 뒤샹은 생전에 몇 번의 인터뷰와 함께 다수의 영상물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간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영상자료가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 다큐 프로그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위치한 파사데나 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을 중심으로 해서 촬영하고 기록한 것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당시까지 그룹전이든 개인전이든 전시회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회고전이 사실상 첫 개인전이었다. 마르셀 뒤샹과 진행자의 말은 프랑스어로 진행되었으며, 화면 아래 영문 자막이 나왔다. 이 기록영화는 오늘날의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 필름에 비하면 화면 구성이나 전개도 단순하고 화면의 질도 좋지 않은 편이고, 게다가 대부분이 흑백영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기록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마르셀 뒤샹 만년의 풍모를 그것도 생생한 육성과 함께 볼 수 있었다. 주1) 무엇보다 나는 이 기록영화를 보면서 마르셀 뒤샹 특유의 지적이고도 유유자적한 풍모와 함께 그의 삶과 예술의 단면을 좀 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2 약 40여 분간 진행되는 이 기록영화의 주 이미지는 마르셀 뒤샹이 체스를 두는 장면과 함께, 회고전에서 전시된 그의 작품들과 20세기 초의 마르셀 뒤샹의 행적이 드러나는 사진들을 회고전 당시의 현장 안팎을 배경으로 해서 재구성한 형식이었다. 그래서 촬영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거리 모습과 함께, 1917년 뉴욕에서 뒤샹의 상반신 사진이 여러 번 나오는 장면도 보였으며, 특히 이 사진 장면은 거울에 뒤샹의 모습이 정면 측면 등 마치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듯한 모습이어서 화면에 한 장면씩 부분적으로 클로즈업되어 나오기도 했다. 이 영화의 서두 부분은 “해답이 없는 것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주2)는 마르셀 뒤샹의 말로 시작되었으며, 뒤샹과 거의 같은 시기인 1차 세계 대전 와중에 미국으로 건너 와서 전위음악가로 활동한 에드가 바레즈Edgard Victor Achille Charles Varèse(1883~1965)와의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뒤샹이 체스를 두는 장면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이 기록영화는 주로 전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지만, 또한 마르셀 뒤샹이 과거를 회고하면서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게 되는 과정이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 소개 등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미술비평가인 조르주 스탬플리Georges Staempfli, 빌 코플리Bill Copley, 니콜라스 칼라스Nicolas Calas, 그리고 다다이스트로도 유명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등에 의한 증언이 이어졌다. 이 중 빌 코플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빌 코플리 : 사람들은 그(마르셀 뒤샹)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캔버스를 벗어나 이 시대의 그림을 그린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점차로 마르셀 뒤샹은 그의 예술이 캔버스를 떠남으로써 삶이 되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진행자 : 그래서 마르셀은 그의 삶이 그의 예술의 캔버스가 되었나요?. 빌 코플리 : 예, 그 자신의 삶으로… 주3) 이어진 다음의 주요 장면은 마르셀 뒤샹이 1902년 처음 인상주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야수파인 마티스와, 그리고 세잔을 거쳐 입체주의와 미래주의까지 조금씩은 영향을 받다가 마침내 과거로부터 해방되어 이전의 미술과 존재방식을 달리하는 예술세계에 이르는 과정이 그의 초기 작품들과 함께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마르셀 뒤샹이 입체주의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또한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룬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런 초기작품들을 전부 지금 다시 보면 당신께서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마르셀 뒤샹은<초콜릿 분쇄기>란 작품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작품들은 상처의 일종인 흉터와 같다, 그러나 건강한 상처… 이는 탯줄을 자르는 것과 같다. 나는 내가 참으로 이전대로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지금 시작이다. 나는 많이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중요할 것이다. 당신 또한 공동의 통로 앞에서 고독을 선택해야 한다. 주4) 그리고 최초의 오브제인 <자전거 바퀴>라는 작품이 화면에 등장하면서 이에 대한 뒤샹의 말이 나온다. 다음 장면은 그 유명한 ‘소변기’가 전시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뒤샹의 증언이 이어졌다. “심사위원회에 의해 어떤 것도 결정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색정적 경향의 포르노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주5) 이어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라는 작품에 대해 묻자, 자세히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뒤샹 : 설탕과 새장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라는 작품이다. 나는 당신이 설탕 조각과 재채기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에 타이틀의 이상함을 발견하리라 확신한다. 게다가 그 설탕은 설탕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다른 것이다. 당신이 그 새장을 들어보면 예기치 않은 무게에 깜짝 놀라게 된다. 또한 (새장)구석에 있는 온도계는 대리석의 온도를 측정하고 설탕이 아님을 입증한다. 등등… 이 작업은 내가 1923년에 했던 일이며, 그것이 내가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다. 진행자 : 당신은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을 시도하였습니까? 뒤샹 :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조롱한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재채기가 아니기 때문에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 와 ‘재채기’란 관념 사이에는 역설이 있다. 왜 재채기를 하지 않지? 왜냐하면 우리가 재채기를 내가 마음먹은 대로(의도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적인 표현이다. 나는 진부하고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문학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할 것이다. 대리석의 차가움이 거기에 있을 때… 그것은 실제 차가움이 아니라 차가움의 대한 관념이다. 주6) 그리고 <큰 유리>라는 작품 앞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과 함께 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 대한 마르셀 뒤샹의 설명이 이어졌다. 주7) 기록영화가 거의 끝나가는 부분에 이르자, 화면 첫 머리에서 화두로 제시된 말에 대한 뒤샹의 말이 자막으로 나왔는데, 이 말은 죽는 날까지 평생지기였던 만 레이의 말을 한 단계 더 변형시킨 말이었다. 문제가 없으므로 답도 없다. 나는 이 말을 매우 흡족하게 여긴다. 만 레이는 이를 다르게 제안했다. 문제는 없다 다만 답이 있을 뿐이라고. 이러한 만 레이와 뒤샹의 말은 마치 신수神秀(606?~706)와 혜능彗能(638~713)의 유명한 일화를 연상케 한다. 주8) 이어 진행자가 “당신이 언짢게 생각할 것을 알지만 나는 당신께 마지막 질문을 할까요?” 라고 하면서, “나의 느낌은 우리가 예술가와 함께 이 영화를 시작했지만 철학자로 끝났다”고 하자, 뒤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자는 좋은 낱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신중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모든 교육, 학교, 제자에 대해, 나는 아직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는 항상 생각한다. 또한 “예술은 무엇보다 사기다”라는 브랑쿠지의 말이 나의 결론이다. 여기에다 나는 또한 예술은 신기루와 같다는 생각을 덧붙이게 된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사람으로서 예술가를 믿는다. 그러나 예술은 신기루다. 주9)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중에 따로 추가한 부분인 듯, 뒤샹이 죽고 난 뒤 1969년에 공개된 <에탕 돈네(주어진 것)>란 작품이 소개되는 장면이 나왔다. 이 기록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뒤샹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뒤샹 : 예술가인가 예술가가 아닌가, 우리들은 우리의 동료들을 도울 수 없다. 각각의 개인은 그 자신을 스스로 꾸려가야 한다. 나는 미래의 개미탑 사회를 믿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난파선처럼 각각의 개인을 믿는다. 진행자 : 마지막 말입니까? 뒤샹 : 그렇다. 주10) 3. “우리는 아직도 마르셀 뒤샹을 모르고 있다.” 이 말은 지난 1985년 김성배 선배님이 수원에서 다른 지인들과 함께 일본에서 간행된 『뒤샹과 카반느와의 대화』(*2002년에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이란 제목으로 이 책이 처음 국내에서 출간됨)를 직접 수고로 번역하면서 책 표지에 쓴 말이다. 나는 이 복사본을 통해서 마르셀 뒤샹의 작품 세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고, 비로소 현대미술의 특성을 이해하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주11)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 번 마르셀 뒤샹의 ‘정신적 지층a mental stratum’을 탐구하는 것이 목적인 이 동영상을 통해 마르셀 뒤샹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이 기록영화는 철저하게 뒤샹이란 한 현대예술가의 삶과 작품세계에 초점을 둔 것이지만, 매우 의미 있는 자료로 보인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주요미술사조와 이러한 여러 경향들을 모방한 마르셀 뒤샹의 초기 회화의 비약적 변천과정과 1910년대 초반에 이르러 결국 이러한 모방적 경향에서 벗어나 전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미적 가치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뒤샹의 생애에 집약된 이런 비약적이고 획기적인 변천과정은 현대미술의 태동과정을 이해하기에 매우 좋은 자료인 것이다. 이러한 예로 이 기록영화에서 뒤샹은 반복적인 예술활동보다 체스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체스는 침묵의 학교다.”는 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반예술은 예술이 아닌 그 무엇이므로 예술이다.” 라는 금언을 꼽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셀 뒤샹의 예술과 삶을 이해하는 길은 단지 현대미술이란 영역의 이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텍스트이자 통로이며, 이런 차원에서 뒤샹의 삶과 예술은 여전히 의미 있는 화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2009년 11월 20일 도 병 훈 <각주> 주1)이 기록영화를 찍을 당시 마르셀 뒤샹은 75세였다. 주2)"There is no solution because there is no problem." 주3)People say he didn't paint for many years, That's not true. Perhaps he's the only who realised that in this century painting has finally left the canvas. Gradually, Marcel pushed it to a point where his art left the canvas to become life. So his life become the canvas of his art? Yes, his own life… 주4)And now, Marcel Duchamp, what do you think when you see it all again? It is like a scar, s sort of wound, but a healthy wound… It is like cutting the umbilical cord. I do not think I really lived before that. My life starts now. I might not do much, but it will be important. You also chose solitude, before the collective path. 주5)Since nothing was supposed to be judged by a jury there was no reason to reject such work, except in cases of eroticism or pornography. 주6)I am sure you find the title odd because there is no connection between the pieces of sugar and sneezing. What's more, the sugar isn't made of sugar. It's made of marble. So it's something else. When you lift the cage you're surprised by its unexpected weight. There's also a thermometer in a corner for measuring the marble's temperature to prove it's not sugar, and so on… That‘s what interested me in this work which I did 1923. Were you trying to poke fun at people? No, I was poking fun at myself most of all. There is a paradox between the notion of sneezing and why not sneeze since sneezing is not a voluntary act. Because we can not sneeze at will. That was the literary aspect. I say literary although it sounds trite and silly. But it will do for now… There's the coldness of marble… It is not literally cold but there's the idea of coldness. It allows for all sorts of associations… The more, the better. That is what I meant. 주7)이 작품은 율프 린드라는 사람이 재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8)신수가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은 것, 때때로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는 게송을 지었을 때, 혜능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더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티끌이 끼일 것인가?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말했다. 주9)진행자 : I know you hate giving advice but may I ask you one last question? 뒤샹 : What is it? 진행자: My impression is that we started this film with an artist but we've ended it with a philosopher. 뒤샹 : Philosopher is a nice word but it has to be treated with caution. All that is teaching, school, followers, never interested me and still doesn't. I always thought, or rather I came to the conclusion that, as Brancusi put it, "Art is above all a fraud." I'd add that it's a mirage as well. I believe in artists as persons, as individuals. But art is a mirage. 주10)Artist or not, we can't help our fellow men. Each individual fends for himself. I don't believe in the anthill society of the future. I still believe in the individual and every man for himself, like shipwreck. -Is that the final word? -Yes. 주11) 미대 재학 중이던 1985년에 발간한 『현대미술연구』란 소책자에「마르셀 뒤샹의 샘에 대한 소고」라는 글을 실었는데, 당시 그에 대한 변변한 텍스트 한 권 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쓴 것이었다.
102 no image 불완전성 정리와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
도병훈
6802 2009-11-04
아래 글은 『불완전성-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2007년, 승산)을 읽고, 지난 2008년 1월 22일에 썼던 마르셀 뒤샹의 말과 불완전성 정리를 다시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불완전성 정리와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 1. 비인의 논리학자들은 어떤 체계를 엮어낸 것인데,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모두 토털로지 tautology 말하자면 전제의 반복입니다. 수학에서는 매우 단순한 정리定理에서 복잡한 정리로 나아가는 데 모든 것은 최초의 정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중략)...이 블랙커피만 제외하고...(후략) 위 글은 마르셀 뒤샹(1887~1968)이 생을 마감하기 2년 전인 1966년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 중,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나는 그대들에게 일요일의 꿀벌들의 삶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안 그런가? 그것은 같은 말이다. 당신은 비인의 기호 논리학자들의 이야기를 아는가?” 라는 말을 카반느에게 되물으며 스스로 대답한 말이다. 위 글 서두에서 마르셀 뒤샹은 비인의 논리학자들(*선도적 옹호자는 다비트 힐베르트였다. 당시 힐베르트를 중심으로 한 비인 논리학자들의 과제는 형식주의formalism 수학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학의 영역에서 논리적으로 모순 없는 형식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힐베르트의 가정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수학만큼 확실한 진리체계는 없었다)의 형식주의를 언급하면서 이와 다른 세계의 표상으로서 감각적 지각의 세계인 블랙커피를 예로 들고 있다. 이 대담 부분과 관련, 최근에 출간된 『불완전성-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을 읽으면서 그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소상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괴델의 삶과 학문의 양극적 괴리를 알게 되면서,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 1916년 합스부르크 왕국이 무너지고 뒤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도시 비인(빈)은 정치적 영향력은 쇠퇴했지만 사상적 ․ 문화적 측면에서 당시 유럽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독창적 사상가들과 예술가들, 곧 과학자, 음악가, 시인, 화가, 철학자, 건축가들이 모였는데, 모두 분야를 넘어 공통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대화와 토론의 장에 참여했다고 한다. 토론의 전반적 주제는 윤리적 및 지적 죽음 그리고 다가 올 모든 것의 붕괴였고, 이에 따라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기초와 체계와 방법론을 논의했으며, 새롭고 다양한 문화를 꽃피운다. 그 예로 테오도르 헤르츨이 주도한 시오니즘 뿐 아니라 이와 가장 극단적인 나치즘도 여기서 태동하였고, 프로이트의 무의식, 억압, 히스테리, 노이로제에 관한 이론을 펼친 곳이기도 하고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등의 분리파들이 관능적인 그림을 그렸으며,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는 무조주의 음악을, 아돌프 로스는 오직 기능적인 형상을 가진 새로운 건축을 선보였다. 비인에서의 토론의 장은 카페와 서클을 중심으로 일정한 주제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는 것으로 펼쳐졌는데, 수많은 서클들 가운데 모리츠 슐리크를 중심으로 한 서클이 두각을 나타낸다. 바로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라는 사조가 바로 이 서클에서 활동한 사람들로부터 유래했다. 논리실증주의는 ‘모든 철학적 경향을 제거하려는 철학적 경향’이었다. 마르셀 뒤샹이 위의 대화에서 말한 빈의 논리학자들은 바로 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말한다. 극단적 엄밀성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주1)는 주장으로 언어 안에서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한 비트겐슈타인의『논리철학논고』주2)도 이 빈 서클의 사고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그는 “철학적 저술들에 나오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오류가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보고 수학적 명제 역시 논리학의 명제와 같이 아무런 사실도 나타내 주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어떠한 수학적 발견도 철학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이런 시각에서 20세기 최고의 수리 논리학자로 꼽히는 쿠르트 괴델(1906~1978)의 불완전성 정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도 결론적으로 말해서 쿠르트 괴델과 생각과 다르지 않다. 쿠르트 괴델도 이 논리실증주의자의 모임에 참여했지만, 사실 그는 논리실증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훗날, “모든 유의미한 생각은 감각지각sense perception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실증주의자들의 생각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고 말했다. 괴델은 오로지 수학적 접근과 증명을 통해 20세기 사상 획기적인 의식의 전환점인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를 통해 수학의 모순성을 밝힌다.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한 것은 24살 때인 1930년 10월이었다. 그의 논문은 어떤 수학적 결론은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 곧 수학이 어떤 공리를 채용하든 증명될 수 없는 진리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증명은 한 해 전에 마쳤던 박사 학위 논문의 요약이었는데, 완전성과 확실성을 전제로 한 수학적 논리, 즉 논리적 진리를 전제로 한다. 수학자·철학자·논리학자들의 모임인 쾨니히스베르크 학회가 발표 장소였다. 괴델은 학회의 마지막 날에 자신의 연구 결론을 아주 짧게 이야기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제1정리’와 여기서 딸려 나오는 ‘제2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정리의 결론을 요약하면, ‘모순 없는 수학적 형식체계가 있다고 할 때, 그 체계 안에는 참이면서 동시에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 이다. 이 결론에서 따라 나오는 제2정리는 이렇다. ‘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 진리란 ‘항진명제’를 말한다. 예컨대 “모든 아름다운 꽃은 아름답다.” “모든 타당한 논증은 타당하다.” 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 즉 어떤 대상이 P와 Q라는 두 술어의 특성을 갖는다면 그 중 하나의 술어를 가진다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 수학적 정리를 동어반복으로 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논리학 기호법으로 표현하면, 임의적인 개체를 가질 경우, x나 y와 같은 변수를 사용하고, 특정의 개체를 가리킬 경우는 a나 b와 같은 상수를, 개체의 성질은 P나 Q같은 술어상수를 사용한다. 이처럼 가장 간단한 표현은 어떤 개체에 어떤 성질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P(a)로 쓴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는 P라는 성질을 가진다”는 (x)P(x)로 쓰고, “모든 x는 P 이다”라고 읽는다. 또한 어떤 대상이 두 가지의 특정한 술어를 가지면 당연히 그 중 하나의 술어를 가진다는 말은 기호로는 다음과 같이 쓴다. (x)는 ((P(x) and Q(x)) → Q(x)) (*“모든 x에 대해서, x가 P란 성질을 갖고 Q란 성질도 가진다면 x는 Q란 성질을 가진다”로 읽음) 수학은 이처럼 서술적 내용을 기호로 표시하는 것으로, 일관성consistency과 완전성completeness을 전제로 한다. 먼저 일관성이란 어떤 수학 시스템에서 p가 참이면 p의 부정은 거짓이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완전성은 한 시스템에서 참인 모든 명제들이 증명가능 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쿠르트 괴델의 제1, 제2불완전성incompleteness 정리는 위와 같은 수학의 형식체계에서 틈을 발견한 것이다. 형식체계 안에서 참된 산술명제들 모두는 증명할 수 없으며, 형식체계의 내적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괴델의 논리는, ‘지금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거짓말쟁이 역설liar's paradox'과 같은 모순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이 문장은 거짓이다.’ 라는 명제는 '지금 이 문장'이 바로 명제 자신을 가리키므로 자기참조self-reference가 나타난다. 이 명제는 참도 거짓도 될 수가 없는 모순 명제이다. 참이라면 자기가 거짓이라고 한 명제가 참인 것이 되므로 모순이고, 거짓이라도 해도 역시 해당 문장은 거짓이 맞으므로 명제가 다시 참이 되어버려 모순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이러한 모순 명제가 근간인데,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이 체계 안에서는 증명 불능이다”에서, ‘이 문장’을 ‘G’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한다. “G는 이 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G의 부정은 정반대인 다음의 명제가 된다. “G는 이 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명제는 결론부터 말하면 ‘참’이면서 ‘증명불능’이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만약 G를 증명할 수 있다면 G의 부정은(스스로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므로) 참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명제의 부정이 ‘참’이라면 명제 자체는 거짓이므로, 이 관점에서 볼 때 G를 증명할 수 있다면 G는 거짓이다. 그러나 G를 증명할 수 있다면 이는 곧 G가 참이라는 뜻이다. 이 체계가 무모순이라고 가정할 때(모순이라면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으므로)이 증명은 이밖에 다른 것을 보여 줄 수 없다. 따라서 이 체계가 무모순이라는 가정 아래에서는, G를 증명할 수 있다면 이것은 참이면서 거짓이라는 모순이 나오며, 이런 뜻에서 G는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체계가 무모순이면 G는 그 안에서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G의 내용 그 자체이므로 G는 참이다. 그러므로 G는 ‘참’이면서 ‘증명불능’이며, 바로 이러한 정리가 불완전성 정리의 핵심이다. 주3) 이처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 지식으로 여겨 온 수학조차 어떤 체계가 안주할 확고부동한 근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uncertainty 논리와 함께 서구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이론이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1930년을 전후로 수학과 과학적 지식의 본질적인 한계를 입증한 양대 이론이다. 불완전성의 정리의 핵심은 무(無)모순성과 완전성을 동시에 갖춘 수학 체계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수학 체계의 무모순성을 유지하려면 증명할 수 없는 정리가 나타나 완전성이 무너지고, 모든 정리가 체계 내에서 증명되는 완전성을 이루려면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 불완전성 정리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도 이와 유사하다. 미시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정하려면 운동량이 결정되지 않고,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면 위치가 모호해진다. 즉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괴델과 하이젠베르크는 각각 수학과 물리학에서 두 가지 기준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이 불가능함을 갈파한 것이다. 그래서 이 양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20세기 지적 체계를 구성하는 세 개의 기둥으로 꼽힌다. 또한 ‘불완전성 정리’로 하여 괴델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사실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도달한 결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문장 ‘P는 증명 불가능하다’는 나중에는 상이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증명되기 이전과는”, “증명은 어떤(특정한) 상황에 대한 당신의 파악을 인도 한다.” “증명의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은 변화한다.…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은 개조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괴델과 비트겐슈타인은 동시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소통의 기회가 없어 끝내 서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기호로 사유하는 사유의 문제점을 근원적 차원에서 통찰한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괴델의 경우 어디까지나 수학의 영역 안에서 이처럼 탁월한 역설적 증명을 했다. 그래서인지 정작 이러한 역설이 의미하는 인간의 사유체계에 대한 메타적 통찰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이는 그가 시대착오적이라 할 정도의 플라톤주의자였으며, 심지어 어처구니없게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사람이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또한 그가 심한 정신적 불안정 속에서 자폐적 삶을 살았음을 통해서도 학문과 실존이 극단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된다. 1940년대 들어 괴델이 천신만고 끝에 비인을 탈출하여 미국에 망명했을 때, 누가 비인의 소식을 묻자 괴델은 “커피가 맛을 잃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답변은 앞의 마르셀 뒤샹의 대화를 다시 생각하게 하지만, 이후 그 자신의 삶 역시 맛을 잃은 커피에 비유할 수 정도로 어이없는 삶을 살았다. 미국에 도착하여 프린스턴대학의 고등과학원에 정착한 괴델은 같은 처지의 아인슈타인과 유일한 우정을 나눴지만, 1955년 아인슈타인이 죽고 난 뒤 철저한 자폐 상태에 빠졌다. 말년의 괴델은 세상이 자신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1978년 1월14일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을 때 그의 몸무게는 겨우 30㎏. 사인은 성격장애로 인한 영양실조와 굶주림이었다. 반면 마르셀 뒤샹은 <큰 유리>작업을 마친 1923년 이후 마치 선승禪僧처럼 평생 유유자적하게 살다 타인의 죽음인 듯, 삶을 마감한다. 모국인 프랑스에선 변변한 개인전 한 번 제대로 못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그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일하는 것보다 숨 쉬는 것을 좋아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처럼 이들의 삶과 죽음은 극적으로 대조적이다. 수리논리학에서의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마르셀 뒤샹의 대화 내용은 서로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성립한 것이지만, 학문(사상), 예술과 삶에 대해 메타적 차원에서 생각하게 한다. 특히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궁극적으로 불완전성이 세계의 ‘실재’이며 ‘절대적 완전성’ 이 허구임을 방증하는 메타언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뒤샹은 이미 1910년대부터 수학이라든가 과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이는 주로 푸앵카레라는 수학자나 퓌토 그룹을 통해서였다. 주4) 특히 퓌토 그룹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가 수학이나 4차원 문제였다. 이 모임을 통해 뒤샹은 일상적 이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알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마르셀 뒤샹은 완전성을 전제로 한 수학적 공리와 형이상학이나 일상적 문화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 인식과 함께, 뒤샹은 1912년, 독립전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의 출품 거부 사건 통해 근대적 미적 가치에 대해 근원적으로 회의하게 되며, 이후 자신의 말을 빌리면 ‘과거로부터 완전 해방’된다. 그래서 1913년부터 뒤샹은 사실상 관습적인 그림을 그만두게 되며, 이후에는 종래의 예술작품이 성립하는 과정과 전혀 다른 어법의 작업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먼저 ‘측량과 시공간의 계산’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물리학적이면서도 우연적인 효과를 추구한 작품을 시도하게 되는 데, 이 작품이 바로 <세 개의 표준 정지기Trois stoppages standards>이다. 이 작품은 1m 길이의 실을 1m 높이에서 수평으로 세 번 낙하시켜 고정시켜 놓은 것으로, 자의적이고 우연 hasard/chance적인 새로운 길이 단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1914년에 뒤샹은 <정지들의 네트워크>라는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1913년에 제작한 각 표준 장치들을 세 번씩 사용하여 그린 것으로, ‘우연’의 요소를 살린 ‘철도 지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후에 <큰 유리>그림의 ‘아홉 개의 능금산 주형들(Nine Malic Moulds)’에서 각 인물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뒤샹의 ‘삼 세 번’ 전략은 무슨 내기를 할 때 하는 ‘삼 세 판’을 연상케 하는데, 숫자 3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완성과 종결, 또는 잉여를 의미한다. 이러한 신념의 바탕은 불교의 삼신불, 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도 연관되는 인간의 잠재의식, 또는 신화적 사고인데, 마르셀 뒤샹은 인류 문화에 깔려 있는 이런 원형무의식을 이용해서 자신의 우연적 작품을 형성하는 어법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논증적 진리와 논증을 넘어선 예술적 세계, 그리고 삶의 특성이 논증의 문제를 넘어선 메타적 차원임을 알게 한다. 이런 차원에서도 우리는 삶에서의 논리의 문제와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다. 뒤샹의 작업상의 주요 어법은 우연, 4차원적 세계, 반의미, 또는 무의미, 그리고 일종의 언어게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모두는 형식주의 수학이나 논리적, 또는 논증적 진리에 대한 대극적 작업 방식이었다. 요컨대 뒤샹은 삶의 실존적 부조리함을 교란시키는 방법을 예술적 어법으로 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산 것이다. 나아가 마르셀 뒤샹은 “살아 숨 쉬는 일을 작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 어쩌면 나의 예술은 산다는 것일 것이다.” 라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뒤샹에게 삶의 참된 가치는 예술적, 실체적 형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 그 자체의 문제였던 것이다. 3. 어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이 갖는 실제적 의미를 자각하지 못하듯, 쿠르드 괴델은 자신이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가 갖는 중차대한 의미와 그 파장을 자각하지 못했음을 그 이후의 불구적, 자폐적 삶을 통해 알게 된다. 이러한 쿠르델 괴델의 삶은 마르셀 뒤샹의 삶과 매우 대조적일 정도로 양극적이다. 실제로 마르셀 뒤샹과 쿠르드 괴델은 교유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다만 주로 20세기 초반에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미국이라는 시공간을 무대로 하는 동시대를 살았을 뿐이다. 물론 이 글은 수학적 엄밀성이나 논리적 사고, 또는 논증적 진리가 무용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논증적 논리를 통해 지적 엄밀성, 나아가서 논증적 진리 이상의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근현대문명의 바탕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의 내로라하는 지성인과 예술인들이 어떤 문제를 화두로 하여 고민했는지, 또한 논증적 진리와 예술적 진리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패러다임의 변환시기로서 20세기 초 중반에 일어났던 인류의 정신적, 예술적 비약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정신적, 예술적 진화, 특히 마르셀 뒤샹의 삶과 예술은 6세기 신라의 원효가 <판비량론>을 통해 이전의 인도와 중국의 불교인식 논리학의 문제점을 치밀한 논리로 비판하면서, 또한 그 논리를 넘어선 ‘화쟁’론을 펼치고, 나아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都無定檢’,또는 ‘불기不羈’와 ‘무애無碍’, 즉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유인의 삶을 살았던 삶과도 비견된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11월 4일 도 병 훈 <각주> 주1)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명제 7임. 주2) 명제 6.54 나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결국 나의 명제들이 난센스와 같음을 알게 된다. 비유하자면 나의 명제들은 그보다 위로 올라가려면 딛어야 할 계단이기는 하지만 일단 오른 다음에는 걷어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3)제1불완전성 정리는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나 결정불능의 식, 곧 그 자체는 물론 그 부정도 증명할 수 없는 식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제2불완전성 정리는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 체계의 일관성(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이다. 제1, 2 불완전성 정리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불완전성 정리> 산술적으로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임의의 무모순인 계산 가능한 가산 이론에 대해, 참이지만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 없는 산술적 명제를 구성할 수 있다. 즉, 산술을 표현할 수 있는 이론은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여기에서 "이론"은 명제들의 무한집합으로, 여기에 속하는 것들 중 일부는 증명 없이 사실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리이며 나머지는 공리들로부터 유도되는 정리이다.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 있는" 명제란 공리에 1차 논리를 적용하여 유도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론 내에서 모순된 명제가 증명될 수 없을 경우 이를 무모순이라 한다.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이론 내에서 해당 명제를 실질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과정이 존재함을 말한다. 또한 여기에서 "산술"은 자연수의 덧셈과 곱셈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정리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한 산술적 명제를 해당 이론의 "괴델 명제"라 한다. <제2 불완전성 정리> 공리로부터 출발한 산술체계가 무모순인지의 여부 자체가 참 또는 거짓인지 결정할 수 없다 제1정리의 증명 과정 1) '논리식 G는 증명 불가능하다'라는 메타 수학적 문장을 나타내는 논리식 G를 구성한다. 2) G의 부정(~G)이 증명 가능할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G가 증명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G가 증명가능하다는 것은 "G는 증명 불가능하지는 않다"가 증명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G가 증명할 수 없는 식이며 동시에 참인 논리식임을 제시한다. 4) G가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하므로, 산술체계는 불완전하다는 결론(제1정리)을 도출한다. <설명> 논리식 G는 이런 뜻이다. "나는 증명불가능한 문장이다". 만약 이 문장이 증명가능하다면 G의 부정, 즉 ~G(나는 증명될 수 있다)가 증명되어야 한다. 즉 G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즉, G가 증명가능하다면 ~G가 증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서로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G는 증명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G의 내용이므로 G는 참이게 된다. 즉 G는 증명불가능하면서 참인 문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 G가 산술체계에서 구성될 수 있으므로 산술체계는 불완전하게 된다. 제2정리의 증명 과정(제1정리에서 출발) 1) 먼저 논리식 H를 구성한다. H는 "산술체계가 일관적이다"라는 문장이다. 2) "H이면 G이다"가 증명가능하다는 것을 보인다. 3) H가 증명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4) 이로부터 제2정리를 얻는다. 주4)1911년 뒤샹은 엘리 주프레 Elie Jouffret가 쓴 "4차원 기하학 개론 Traite elementaire de geometrie a quatre dimensions (1903)" 을 읽었다. 그리고 뒤샹의 전기를 쓴 사람 중 뒤샹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를 꼽는 이도 있다. “푸앵카레는 물질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법칙이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일반 원리도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과학은 사물 그 자체에 다다를 수 없다. 단지 사물간의 관계에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1910년대 당시 상황과 그의 작품의 변천과정으로 보아 푸앵카레의 이런 생각들은 이후 뒤샹 작품의 중심사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101 no image 몽유도원도 다시 탐색하기
도병훈
8243 2009-10-27
몽유도원도 다시 탐색하기 1.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7일까지 9일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전>에 맞추어 일본의 덴리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안견安堅(1400?~1470?)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전시되었다. 주1) 전시 마지막 날, 약 4시간의 줄서기와 기다림 끝에 전시장 깊숙한 안쪽의 두꺼운 유리 진열대 속에 길게 놓여 있는 <몽유도원도>를 감상할 수 있었지만 연이어 수많은 관람객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오래 볼 수는 없었다. 이렇게나마 <몽유도원도>를 보게 된 까닭은 전시 후 소장처인 일본으로 돌아가면 한국에 다시 올 수 없다는 보도가 있었고, 주2)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림 중 도원桃源, 그 중에서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복숭아꽃잎 부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몽유도원도>감상은 지난 1996년 호암미술관에 이어 두 번째였다. 주3) 당시에는 전시장이 한적할 정도여서 혼자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 격세지감을 느꼈다. 물론 주최 측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그간 <몽유도원도>에 대한 연구는 지난 수 십 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서구의 경우 빈센트 반 고흐의 ‘낡은 구두’를 그린 그림 한 점만 하더라도 미술사학자들이나, 비평가, 철학자 등에 의해 다양하면서도 심도 있게 분석된 글이 존재한다. 근대이후 전개된 미적 가치의 형성, 그리고 이에 대한 회의나 다양한 예술철학의 양상, 그리고 저자에 따라 다른 여러 미술사를 통해 알 수 있듯 미적, 예술적 가치는 절대적, 보편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몽유도원도>도 새로운 관점의 비평적 담론에 의해 그 특성이 새롭게 사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이 서른 살 되던 해인 1447년(세종 29) 여름에 그린 그림이다. 매우 귀한 조선 초기 그림으로 제작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산수화인 것이다. 이 그림은 비단(명주)에 먹과 채색으로 그렸으며, 가로 106.2㎝, 세로 38.6㎝ 크기이지만, 글씨까지 두루마리 2개로 이뤄진 작품 전체를 펼쳐놓으면 길이가 20m에 달한다. 주4) 안평대군이 직접 그림 제작의 경위를 쓴 제기題記에 의하면, 이 그림은 자신이 꿈속에 본 도원에 찾아 든 감회를 안견에게 그리도록 하여 3일 만에 완성하였다. 또한 <몽유도원도>에는 그의 시 한수를 비롯해,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김종서, 서거정, 정인지 등 당대 20여 명의 문사들이 친필로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의 시 ․ 문 ․ 서 ․ 화가 융합된 작품으로서 당대를 이해하는 종합적인 ‘텍스트’이다. 먼저 <몽유도원도>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림을 보는 방향이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진입공간과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단절성이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의 도원까지 파노라마처럼 그린 그림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 도잠(365?~427,자가 연명淵明이므로 흔히 도연명이라 한다)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럼에도, ‘도연명의 「도화원기」가 도가적인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준다면,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은 텅 비어 있어 어딘가 모호한 공간으로 설정’주5)되어 있는 차이점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몽유도원도>를 보고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로 단정하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적 이해이다. 송의 소식이 왕진경의 <연강첩장도>를 노래한 시에서 “도화유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무릉이 어찌 신선만을 사는 곳이리오.” 주6) 라고 말했듯,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동서의 세계관적 차이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단서가 된다. 이는 주로 공간 또는 장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동서양의 정신(spirit)적 차이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에토스(ethos)적 이성과 파토스(pathos)적 감정, 또는 ‘현실’과 ‘이상’의 이원론적 구분이 확립되면서, 무엇보다 중세 이후 스콜라 철학에서 정점을 이루는 헤브라이즘의 영향으로 근대이전까지 서구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확연히 구분되는 의식이 형성된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핵심인 직관(intuitus)적 신비주의에 의하면 정신은 물질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오직 신의 은총의 상태에서 또는 초자연적 대리자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이처럼 ‘공간(space)’이 ‘자리(place)’의 복합체가 아닌 '사물 그 자체(thing-in-itself)', 영원히 연장되는 비물질적 허공으로 인식되면서 종교적 초월성이 두드러지는 공간적 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의식적 특성은 근대이후 합리적 세계인식, 그리고 이러한 합리적 세계인식을 넘어서고자 한 낭만주의적 의식에 의해 비로소 크게 달라진다. 서구에서는 근대에 이르러 워즈워드 식으로 표현해서 정신이 마음과 물질이 혼융混融된 차원이 되며, 그래서 ‘풀 속에 빛’, 또는 ‘꽃 속에 영광’을 찾게 되는 것이다. 주7) 그러나 동양에서는 위진 남북조 시대 이후 특히 당, 송대 시기에 이르러, 세계란 마음과 물질이 혼융된 오감으로 ‘시간 안’에서 체험하는 자리, 즉 ‘장소’임을 이 시기의 문학(시)과 회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의식의 발전에 있어 미술의 기능’이란 부제의 『도상과 사상』이란 저서를 남긴 허버트 리트는 동 서양의 공간 및 장소 인식의 차이로 인해 저마다 다른 미술로 이행되었음을 송대의 회화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송대의 회화는 송대의 시와 마찬가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정교한 형태의 조화-산과 안개, 강과 나무, 새와 나뭇가지, 꽃과 기하, 남자와 여자, 음陰과 양陽 등, 상반되지만 상보적相補的인 원칙이 요구되는 상호작용-에 대한 점증하는 의식의 표현이다. 형식이 허용한다면 사상도 이 형식적 변증 안으로 틈입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이란 사상을 표현하려 들지 않았으며, 그것은 강렬한 범신적汎神的 인식의 조형의 구현이었다. 송대 문화를 통해 송대의 감수성은 실재에의 새로운 암시, 워즈워드 의미에서 보자면 또한 영원성에의 새로운 암시를 인식하게 되고 있었던 것이다. 주8) <몽유도원도>는 이러한 송대 회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회화이다. 송대는 중국 역사상 수묵회화의 최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화가들이 훌륭한 그림들을 그린 시기이며, 그 대표적인 화가로는 북송에는 이성李成과 곽희郭熙, 남송에는 마원馬遠과 하규夏珪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화풍에는 당시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으며,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수묵화법을 통해 이를 구현하고자 한다. 주9) 안견의 그림은 바로 이 이곽파 화풍과 마하 화풍 등을 융합한 화풍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곽파 화풍의 경우 사물을 묘사할 때 그 윤곽선이 계속 이어지는 필법, 산의 아래 부분이 밝고 위가 어두운 조광 효과, 게 발톱을 그린 듯한 해조묘蟹爪描를 연상시켜 주는 나뭇가지 그리는 법, 윤곽선을 그리는 구륵법, 산을 뭉게구름처럼 표현한 운두준 등을 꼽는다. 그간의 연구 성과에서 밝혀지고 있듯, <몽유도원도>와 전칭傳稱 안견 그림으로 전해지는 <사시팔경도> 중 ‘늦은 봄’ 그림에서 이러한 영향을 볼 수 있다. 또한 <몽유도원도>는 이곽파 중 특히 곽희의 영향으로 화면을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경군景群별로 고원, 평원, 심원의 삼원법이 공존한다. 이러한 안견의 화풍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며, 일본에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마하파 화풍은 주로 구도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송대 회화의 영향이 보이면서도 또 다른 독자성을 드러낸다. 첫째, 그림의 구성을 보면 몇 무더기의 흩어진 듯한 경물들이 집합하여 하나의 조화된 총체를 이루고 있다. 즉, 중국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기성과는 차이가 큰 것이다. 둘째, 공간개념이 지극히 확대지향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즉, 옹색하고 좁고 답답한 공간을 지양하고 넓고 시원한 공간을 추구했던 것이다. 셋째, 바위나 산 자체의 형태에서보다는 수직과 수평의 대조 및 사선 운동의 효율적인 표현을 통해 웅장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 사실이다. 이 점도 안견이 크게 참조했던 북송대 거비파巨碑派 화풍에서 주산을 웅장하고 경외롭게 표현함으로써 기념비적 효과를 거두고자 했던 경향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넷째, 형태를 약간씩 평면화 또는 단순화시킴으로써 환상적 느낌을 고조시키고 있다. 주10) 이런 관점에서 <몽유도원도>가 매우 복합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시대적, 역사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몽유도원도>는 중국의 그림과 다른 독자성이 보이는데 이는 역시 안견이 이 땅에서 경험한 풍토적 특성과 작가의 기질적 개성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몽유도원도>와 유사한 공간을 이 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난 90년대 후반부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탐색하면서 그 현장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느낀 사실이다. 겸재가 50대 후반 청하 현감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내연산의 보경사 계곡에 있는 <내연삼용추도>를 그렸는데, 바로 이 계곡이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풍경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계곡이 있는 내연산은 멀리서 보면 그저 토산처럼 보이지만 계곡의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상당부분 <몽유도원도>와 흡사한 기이한 풍경을 체험할 수 있다. 특히 계곡의 진입공간은 <몽유도원도>의 그림 왼쪽 계곡부분과 유사하고, 내연산 12폭포중 제1폭포인 상생폭포도 <몽유도원도> 중앙부분의 두 갈래 폭포와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겸재가 그린 삼용추 폭포를 지나 도원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실제로 다시 공간이 넓어져 몇 집 있는 마을도 있다. 물론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또한 현재로서는 안견의 고향이 충남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러한 장소적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화가의 발자취를 통해서도 이런 실경을 그린 듯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실에서, 도원의 세계가 결코 현실과 무관한 이상 세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몽유도원도>의 주된 특색은 동시대 다른 나라나 다른 작가와 차별화된 예술적 성취, 즉 안견의 회화 어법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몽유도원도>는 동양의 산수화에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림의 크기에 비해 거의 무한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다양한 선적 변화로 이루어져 있다. 부분마다 무궁무진한 변화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적 과학적 용어를 빌리면 <몽유도원도>의 어법은 비선형, 또는 프랙털 기호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인 필치는 물 흐르듯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필치를 구사하여 선묘 위주 필법의 특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그림이 비교적 작은 그림임에도 매우 큰 대작처럼 느껴지고 볼수록 매력이 있는 것은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물과 기괴한 바위의 대조, 분방한 필치와 극히 정묘한 세부묘사의 공존 등도 한자 문명권은 물론 한국 전통회화사상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몽유도원도>의 주된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 가장 공력을 들인 ‘도원경桃源境’의 정경, 그 중에서도 복숭아나무와 복사꽃, 그리고 초록의 새잎 등도 볼수록 그 세밀한 구성과 함께 정묘한 필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복숭아 꽃 부분에는 꽃 술 부분을 금가루로 그려 꽃의 화려함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도원 아래 부분 물결 따라 흔들리는 조각배는 정경의 쓸쓸함을 더하고, 대나무 숲 속의 띠풀집도 자세히 보면 3채가 아니라 4채이며, 가려진 암벽 뒤로 집이 더 있어 마을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몽유도원도>의 콘텍스트적 측면도 이 그림의 가치는 물론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그것은 이 그림을 그리게 한 장본인과 안견은 물론 찬문을 쓴 사람들도 이 그림을 그린 불과 수 년 후 ‘계유정란癸酉靖難’과 ‘사육신 사건’이라는 정치적 격변에 의해 그 운명이 크게 엇갈린다는 점이다. 즉 이 사건들에 의해 누구는 목숨을 잃는 참화를 겪고 누구는 정난공신이 된다. 주11)이러한 사실은 복사꽃으로 상징되는 인생의 봄이라는 아름다운 시기가 그야말로 봄밤의 꿈처럼 느끼게 하는 삶의 무상성과 함께 <몽유도원도>를 더욱 각별한 마음으로 보게 한다. 지난 수 십 년간 진행된 <몽유도원도>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조선 전기 회화가 순전히 중국풍을 모방하는 차원에 머물렀다는 일제 강점기 이래의 편견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미술에 대한 평가는 미술사학자마다 크게 다르다. 안견은 당대에 비견할 수 있는 그림이 없을 정도로 정치精緻한 필력을 구사한 화가이지만, 그가 도달한 회화세계는 화원 출신 화가라는 신분 계층의 한계 속에서 당대 수요자의 취향이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기예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이는 안평대군 사후에는 안견이 그다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사실로도 입증된다. 사실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조선시대는 여러 면에서 획기적 변화를 보인다. 즉 조선 후기 들어 사회적 경제적 요인으로 문화의 다양성이 생겨나 이른바 조선후기의 문화예술을 꽃피우게 되며, 그 대표적인 사람이 겸재 정선(1676~1759)이다. 안견이나 김홍도의 경우 조선시대 화가 중 재능이 가장 두드러진 예인들이었지만 역시 사대부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화풍에 있어서도 그 신분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특성이 보인다. 반면에 겸재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무엇보다 사대부 출신 예술가로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세계에 도달한다. 또한 양적면에서도 이 두 사람의 예술세계와 비교할만한 화원 출신 화가가 없는 점도 이러한 신분계층의 차이를 간과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즉 겸재나 추사 예술세계의 독자성과 당당한 기개는 사대부라는 조선 시대를 이끈 주역으로서의 신분을 바탕으로 하며, 그들이 도달한 예술세계는 당대 사대부 계층과의 교유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사회적, 신분적 조건만이 그들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은 아니다. 겸재나 추사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듯, 남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적 요인, 그리고 무엇보다 타고난 성정이야말로 그들 예술세계의 원초적 바탕이지만 궁극적으로 화원출신 화가들과 격이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사대부 출신으로서의 신분적, 지적 역량과 함께 그만큼 자유롭고도 독자적인 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몽유도원도>는 상상화임에도 경물의 핍진한 재현에 치중하고 <인왕제색도>는 실경임에도 파격적일 정도로 대담한 강조와 생략이 공존하는 근본적 이유 중에는 겸재와 안견의 신분적 차이도 있다는 것이다. 비록 지역에 따라 방식은 다르지만 회화의 역사는 대상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대상의 객관적 묘사나 완전한 재현이 회화의 목적은 아님을 전제로 한다. 이 때문에 대상(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어법, 또는 방법론의 독창성 여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근현대미술이 유례없는 다양성과 질적 비약을 이루게 된 것도 당대의 취미나 기호를 뛰어넘고자 하는 새로운 어법에 대한 도전 정신이 있었으며, 이러한 정신의 이면에는 신분적 계층이 해체되는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견의 삶과 예술은 안평대군이라는 페트론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계유정란 직전 일부러 귀한 먹 하나를 훔치는 연기로 안평대군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야사도 안견의 기지와 함께, 그만큼 두 사람이 수직적 관계였음을 드러낸다. 이런 관점에서 <몽유도원도>는 여러 문화적 교류를 융합한 결정체로서 훌륭한 회화적 성취를 보여주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시대적 한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는 문화적 수용의 차이를 포함한다. 즉 <몽유도원도>는 여러 화풍을 종합했어도 선묘 위주의 필법이 두드러진다면, 겸재 정선의 그림은 이러한 필법과 함께 묵법의 농담효과가 두드러지는 남화적 요소도 동시에 수용하여 더욱 폭 넓고도 종합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 안견이후 겸재 정선이 출현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필요했던 것도 이러한 문화적 수용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3.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그림으로서 역사, 문화, 예술이 집약된 대표적인 그림이다. 우리는 <몽유도원도>와 그 찬문을 통해 당대의 시대적 내면인 유가적 현실성과 도가적 몽환성이 공존하는 특성 뿐 만 아니라 그 이전의 문제인 예술의 성립조건이나 인간의 의식적, 심리적 내면 같은 더욱 심층적 문제를 성찰할 수 있다. 또한 <몽유도원도> 제작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와 그로 인한 인간사의 부침은 ‘몽유도원’이란 그림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보게 한다. 무엇보다 변화가 무궁한 <몽유도원도> 특유의 화면은 그 진폭의 변화가 매우 풍부해서 감상자의 시선을 무한히 끌어들이는 매력과 흡인력이 있다. 현대이후 절대적 미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현대 이전이든 그 이후이든 어떤 화가의 작품도 예외일 수 없다. 이는 예술의 세계가 끝내 언어로 기호화될 수 없는 측면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바로 이 때문에 끊임없는 쟁점의 대상이 되는 예술세계가 있으며,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텍스트로서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텍스트는 다층적인 배경인 콘텍스트 속에서 좀 더 객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견의 <몽유도원도> 역시 향후 더욱 다양한 관점에서 새롭게 그 가치가 규명될 수 있다고 본다. 감상이나 미적체험은 이미 통념화된 미적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과 감상자의 의식이 작품이란 매개체를 근거로 미적 가치가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009년 10월 도 병 훈 <각주> 주1)<몽유도원도>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조선시대 계유정란 이후로 추정한다. 이후 1893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발견됐고, 1950년대 초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대가 사들여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국보로 지정됐다가 지금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950년대 우여곡절 끝에 한국인 고미술상이 이 작품을 부산으로 들여왔지만, 결국 구입처를 찾지 못해 다시 일본으로 가버린 사연이 있어 고미술계나 학계에선 당시 이 그림을 우리 손에 넣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주2)<몽유도원도>의 이번 대여 전시를 놓고 덴리대 측은 "더 이상 전시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전시후 몽유도원도는 곧바로 일본의 소장처로 돌아갔다. 주3)몽유도원도는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고,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 국보전> 때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며, 이번이 세 번째인데 9일간만 전시된 것이다. 이중 1996년의 전시회는 ‘조선전기국보전’ 도록를 참조할 것. 주4)'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이라는 말이 있듯 비단은 500년, 종이는 1000년 동안 간다고 한다. 전통회화의 경우 종이와 함께 비단 그림이 많으며, 조선 전기나 중기의 그림들이 특히 그러하다. 이 중에서도 <몽유도원도>는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림으로 햇수로도 560년이 넘은 그림이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주5)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96쪽 주6) 안휘준, 안견과 몽유도원도, 사회평론, 2009, 136쪽 주7) 이 부분은 주로 허버트 리드, 김병익 역, 도상과 사상(열화당,1982), 78~79쪽 내용을 읽고 요약한 것임 주8) 허버트 리드의 같은 책, 78쪽 주9) 조선 초기에는 이곽파 화풍, 마하파 화풍, 절파 화풍, 그리고 미법산수화풍 등 다양한 화풍이 수용되었다. 이 중에서 안견은 주로 이곽파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안휘준의 한국회화의 전통(문예출판사, 1988) 125~142쪽 참조 주10) 이상 안견 그림의 특징에 대한 부분은 안휘준의 한국회화의 전통(문예출판사, 1988) 81쪽에서 인용함. 주11)계유정란은 1453년(단종 1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몽유도원도>와 관련된 인물로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이 계유정란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리고 2년 뒤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서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죽음을 당하지만, 안평대군의 꿈속에서 같이 도원을 거닐었던 신숙주, 최항 등은 세조의 편을 들어 정난공신이 된다.
100 no image 미술은 없다? 새로운 방식의 미술과 소통을 꿈꾸는 자들의 화두
도병훈
4981 2009-10-10
미술은 없다? 새로운 방식의 미술과 소통을 꿈꾸는 자들의 화두 1. 이번 Coding conversation전을 기획하고 세 번째 작가로도 참여한 김도희는 전시 기획의 취지를 밝힌 글에서 이 전시가 우리의 기형적 미술문화에 대한 대응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밝힌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특히 자본주의가 판치는 현실 속에서 한낱 소비꺼리로 전락한 예술의 존재방식, 트렌드화된 이미지와 그 파편의 무한증식, 또는 형식화 ․ 물신화된 통념적 예술에 대해 회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낯 설음’의 경험을 작품 그 자체에만 요구하며 정작 자신의 태도는 수정하지 않고 유사 작품만 늘어놓는 전시와 비평채널에 대해서도 통렬한 회의를 제기한다. 이런 시각에서 기획자는 개인적 취향이나 부박한 통념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의 전시를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이런 취지에서 기획자는 이번 전시가 가장 파격적인 형식으로 이루질 것임을 참여 작가들에게 예고한다. 그것은 바로 참여 작가들이 주어진 기간 동안 선행된 작업을 모티브로 하여 자신만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어법으로 교체하는 과정을 통해 전시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준비된 작업을 공간으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초대작가가 상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어법을 장소에 이식하는 방법’을 통해 형성되는 과정적 전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번 전시는 참여 작가에게도 도전이자 실험이고, 전시 자체도 그 실험성 자체를 품은 도전이며, 감상자에게도 숙제를 안겨준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20세기 후반기 이후 현대철학의 주류로서 후기구조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질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떠올리게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기계’로 정의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기계란 다른 것과 접속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생성 될지 모르는 생성적 상황을 ‘리좀’이라든가, ‘고원’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물론 이번 전시는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한 전시는 아니다. 이러한 철학적 개념 자체가 정형화된 지식을 거부하는 예술적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수용미학의 입장에서 작품은 작가와 관람자간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므로 ‘작품’이라는 말 대신에 ‘텍스트’라는 말을 사용한다. 텍스트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인(因)이며, 이는 근원을 뜻하므로 내적인 것이라면 연(緣)은 외적인 것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관계를 맺거나 결합하여 모든 것이 생겨나고 이 관계나 결합이 해소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인연론’이다. 즉 인이 연을 얻어 새로운 세계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전시는 이번 전시에 참여한 4인의 작가인 연기백, 김성배, 김도희 김학량에 의해 이들과 연(緣)을 맺은 물질과 공간이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우리 미술계에 어떤 파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2. 첫 번째 참여 작가인 연기백의 이번 작업은 일일 정보매체인 ‘신문지꾸러미’라는 매체를 이용한 것이다. 이 일회적 소모적 정보전달매체는 수없이 반복하는 인위적인 행위로 시간의 변화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종이라는 물성이자 시각전달매체가 “지속적인 흔적의 흔적을 기록하는 과정자체에서 의미를 찾도록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속되는 행위의 과정에 의해 새로운 주름을 가진 세계로 점점 변하게 된다. 그래서 연기백의 작업은 마침내 예기치 않은 직접적 물성을 가진 물적 오브제로 변질된다. 이러한 작업의 주된 특성은 순전히 부단히 개입하는 과정에 의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생성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백의 작업은 질량과 에너지, 또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의 세계도 자연의 힘에 의한 시공간의 변화과정의 산물임을 일깨운다. 작가는 종이라는 얇고 가변적인 매체, 무엇보다 정보를 전달하는 바탕 재료를 사용하여 낯설고 새로운 형상의 사물로 변형시켜 현장의 감상자에게 새로운 체험을 유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문지에 인쇄된 글자나 사진의 잉크를 긁어낸 것을 둥글게 빚어낸 ‘지환(紙丸)’, 즉 조그마한 종이 덩어리+잉크 작업은 전시 기간 동안 산맥처럼 가로놓인, 나중에 김성배 작업의 모티브가 된 작업보다 그 크기와 상관없이 더욱 깊은 감응을 불러일으키며, 그만큼 작가 특유의 어법이 집약된 오브제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작은 종이 덩어리 작업 중에서 연기백 다음 작가인 김성배의 눈사람 ‘설인’과 유사한 형태도 있다는 점인데, 이는 물론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지만 프랙탈, 또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화엄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그의 어법은 요컨대 과정이 실재(reality)가 되는 세계의 단면을 제시한다. 이러한 행위의 정신적 가치는 무엇보다 일체의 과장된 제스처나 허위의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업은 순전히 끊임없는 정신적 인내와 육체적 노동을 수반하는 고독한 과정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김성배는 지난 90년대 초반이후 히말라야(Himalayas)를 화두로 살아왔다. 김성배가 그간 경험한 히말라야는 이제 그의 작업의 원천이자 문명적, 사상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에게 백두대간이나 히말라야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하는 중심축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출간한 『슈룹 프로젝트 20년 백두대간-히말라야』이란 자료집에 집대성되어 있듯, 그간 김성배는 단지 백두대간이나 히말라야에 심취하여 이를 소재로 작업을 해 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근대이후 서구 예술의 존재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서의 삶과 예술을 지향해왔다. 요컨대 문제는 그 자신 또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처럼 그는 그간 삶과 예술 행위를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어법의 예술을 제시해왔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우연이 곧 필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이 때문에 우연적인 경험이 그의 작업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작업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이자 작업의 모멘트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전시장 아카이브로서 벽면에 설치된 머리카락을 꿴 바늘 아래 세로로 길게 쓴 “일상 가까이 일상 깊게 우주 가까이 우주 깊게”라는 메시지에 드러나듯 표현 어법의 진폭이 매우 크며, 바로 여기에 그의 작업이 특성이 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그가 히말라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전부터 드러난다. 예컨대 그의 하늘을 배경으로 발을 들어 올린 사진 작업 작업만 하더라도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다 비를 만나 신발이 젖어 햇볕에 발을 말리는데, 그 전에 배가 고파 먹었던 과자 부스러기가 걷어 올린 다리와 발 사이에 떨어져 개미들이 줄을 서서 오르는 모습이 재미있어 촬영을 하고 나중에 인화해 보니 사진 상에 개미는 잡히지 않고 발만 찍혔는데 하늘을 배경으로 넌지시 발을 들어 올린 장면으로 나온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봉을 수채화로 그린 그림 오른 쪽 위 상단에 올가미처럼 붙어 잇는 실밥 모양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중에 옷으로부터 실밥이 떨어진 것을 그 자리에 고정시킨 것이다. 그의 이런 작업 방식은 이번에 전시된 날개 달린 화석 같은 이미지(?)를 아들의 외장 하드 케이스에 붙인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 전시 기획자와 통화 중 우연히 아스팔트 위에서 발견한 아스팔트용 도료가 파편으로 떨어진 것을 떼어낸 것이다. 이처럼 그는 작업을 할 때마다 당시의 시공간적 상황이나 우연적 경험을 적극 활용하는 매우 엉뚱하고도 기발한 방식을 택해왔다. 이토록 기상천외한 발상의 작업은 매우 전략적이며 비상한 감각의 발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이는 역사적 아방가르드 이래 현대 작가들의 어법과도 일맥상통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의 웬만한 전위적 작가들보다 김성배는 더욱 근원적이고 실질적인 삶을 지향해왔으며, 그러한 삶속에서 예술이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해온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히말라야’ 라는 영역의 발견과 체험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주요 단서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과연 무엇일까? 지구의 표면에 융기된 가장 높은 땅인 히말라야는 불교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내면에도 있다. 그것은 불교의 유식(唯識) 철학에서 말하는 제7식(識)이다. 이 식은 현대심리학 용어로 표현하면 '자아의식'으로 곧 '에고(ego)'를 말한다. 이 7식을 '말라식(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라(mala)'는 히말라야의 '말라'와 같은 뜻이다. 인간이 진화를 하면서 유전자에 축적된 정보가 히말라야 산처럼 높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말라야는 인간 내면의 업장을 상징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제8식인 아뢰야식을 해탈의 차원으로 보는 유식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는 내면의 히말라야다. 예컨대 원효의 저서인 『대승기신론소 ․별기』에서도 나오듯, 유식 불교는 바로 이 에고의식, 즉 7식에서 어떻게 해탈하는가의 문제를 매우 치밀한 분석적 논리로 탐구한다. 그런데 지난 2002년 오랜만에 한 김성배 개인전의 전시 타이틀은 ‘해탈 不可(불가)’였다. 이 개인전을 통해서도 그 다운 발상을 보여준 셈이다. 이러한 전력을 가진 작가답게 김성배는 이번에도 즉흥적이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의 퍼포먼스를 조규현 선생과 함께 진행하였다. 두 사람의 이질적 행위는 극적으로 대비되어 퍼포먼스의 극적효과를 증폭시켰다. 이러한 퍼포먼스의 동기는 연기백의 신문 더미가 김성배에게 히말라야 산맥처럼 보인데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성배의 퍼포먼스는 상징적인 눈사람 형태의 ‘설인’으로 남았다. 연기백의 종이와 시간, 그리고 지속적 노동이 빚어낸 작업이 김성배에 의해 ‘설인’이라는 상징적 시각적 이미지로 변한 것이다. 4. 김성배에 의해 탄생된 ‘설인’은 김도희에 의해 또 다시 다른 차원으로 전복된다. 그것은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상상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대상이 가지는 물질성의 직접적 변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이의 출발점으로 우선 김도희는 한의학에서 행하는 ‘뜸’이란 방법을 썼다. 이 뜸은 몸의 기혈의 순환을 원활하기 위한 처방이다. 이러한 뜸의 방법을 김도희는 그 변형과정의 시작 단계부터 태양의 빛을 돋보기로 빌려 불과 연기를 내는 방법으로 시작한다. 제시된 자료에 의하면 설인의 정수리에 놓인 뜸에 불이 붙으면서 바람과 함께 설탕가루 타는 냄새와 함께 마치 설인의 영혼이 증발하듯, 개념이 증발하듯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침내 설인 이미지는 한 중의 재로 전소되며, 이 순간 물질의 연소 과정에서 바람과 함께 에너지는 더욱 극적으로 증폭된다. 현장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위가 개입된 이러한 순식간의 변화 과정은 자연 속에서는 매우 장구한 시간 속에서 마이크로, 또는 매크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한한 개체인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특성을 감지하거나 체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분석적으로 수치화 ․ 계량화된 과학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숯의 주성분인 탄소의 변화과정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숯은 원소 기호 6번인 탄소 덩어리로서, 이 탄소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 중 유물의 연대 측정에 쓰이는 탄소는 14C, 즉 질량수가 14개인 탄소로 양성자 8개인 희귀탄소다. 그런데 이 탄소는 대기 중의 질소(14N)가 우주선(宇宙線, galactic cosmic ray)과 반응해서 만들어진다. 우주선이란 우리 은하 전체를 날아다니는 입자들의 흐름이며, 지구로 쏟아지는 우주선이 질소와 부딪치면 그 충격으로 인해 질소의 양성자는 하나 줄고, 중성자는 하나 늘어나 양성자는 6개 중성자는 8개인 원소로 바뀐다. 즉 질소가 탄소로 바뀐다. 생물체의 몸은 공기를 통해 받아들이는 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유기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 동 ․ 식물은 대기를 호흡하기 때문에 동식물의 내부에는 일반탄소와 14C탄소의 비율이 일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동식물이 죽어 호흡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일반탄소는 거의 변화가 없는데 방사성원소인 14C는 붕괴되어 다시 질소로 돌아가는 데, 원자 개수가 처음의 반이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반감기라 한다. 14C는 5,730년이다.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고고학계에서는 유물의 연대 측정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무수한 존재들 모두 우주적 존재이다. 다만 시간을 달리하여 존재의 양태만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가변성 때문에 생명과 세계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관점에서 알 수 있는 사물의 변화과정을 우리 몸으로 직접 체험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술작업은 우리가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의 사물의 변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겁의 세월이 걸리는 자연현상을 일거에 집약하여 증폭시키는 행위가 예술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김도희 작업을 통해 순식간에 일어난 질량의 변화와 에너지의 증폭, 그리고 숯만 남게 된 과정은 세계의 우주적 변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5. 김학량은 <부작란>작업으로 알려진 작가다. 원래의 <부작란>는 현존하는 추사의 마지막 난 그림으로 흔히 <불이선란도>라고도 한다. 추사는 과천과 봉은사를 오가며 살던 만년 시절에 이 부작난을 치고(그리고)는 화제 첫머리에 “난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부작란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이란 ‘자화자찬’으로, 자신이 20년 동안 난을 그리지 않았지만 작위적 경지를 넘어선 자연의 경지에 이르렀노라고 밝힌다. 반면 김학량의 부작란은 눈 속에 드러난 빼어난 가지의 난 같은 형상의 잡초를 찍은 사진 작업이다.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눈 위의 잡풀이 그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어 말 그대로 그리지 않은 난, 즉 부작란이 됨 셈이다. 하얀 눈 위 몇 가닥의 난초를 닮은 선으로 드러난 잡초에 대한 집중과 선택으로 그는 붓을 들지 않고 김정희 예술 정신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그의 부작란 작업은 일종의 패러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 어법은 이번 전시회에서 그의 아카이브로 제시된 <청청 하늘에는 별도 많네> 라는 작업에도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헌화가’란 타이틀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쓴 그의 글에서도 그의 작업이 어떤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성립하는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김학량은 김도희가 준 ‘선물’로 세계를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듯한 광경의 다양한 이미지의 사진이나 오브제를 제시해놓고는 벽에다 유려한 자필로 일일이 극히 내러티브한 문학적 상상력을 제시(?)한다. 특히 사진 작업 밑에는 자유로운 필치의 연필로, <산, 혹은 최초의 건축>, <그리고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 <최초의 대화, 또는 생각하는 산>, <최초의 들림(*사진속의 작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귀 기울인다>, <최초의 잠(*작가는 바닥에 누워있다)>, 그리고 <최초의 풍경 또는 꿈> <최초의 정물> <가장 처음의 달>, <그 이튿날의 해>, <다도해, 또는 최초의 삶> <최초의 오(五)>, <최초의 다섯 구명>, <이틀째의 달>, <가장 처음의 원, 혹은 태초의 도식(scheme)>, <그런 다음의, 최초의 외출>, <그 이튿날의 외출>, 아, 아!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는구나!>, <가장 첫 씻김>, 최초의 높임>, <최초의, 뜸>, <최초의 얻음, 또는 가장 나중의 감추임>이라 쓴다. 얼핏, 이러한 진술은 이미지와 부합되는 시적인 상상력을 드러낸 듯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진술은 각각의 사진 작업에 나타난 이미지를 보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적 유희이다. 그 자신이 최초의 감상자가 된 것이다. 이는 <공산에 명월>이란 설치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김학량의 작업은 들뢰즈나 스피노자의 핵심 화두이기도 한 표상representation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들뢰즈와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가 표상 없이 사유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표상을 통해 지각하고 생각하며 말한다. ‘의미’란 대개 그렇게 표상된 어떤 것을 지칭한다. 이런 차원에서 표상representation이란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눈앞에 빨간 깃발이 있다면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어떤 것과 연관되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은 투우 경기 장면을,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를 떠올린다. 즉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이나 생각, 혹은 관념이나 도덕 등을 통해서 빨간 깃발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서 깃발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통해 다시 나타나며, 이는 기존의 관념과 동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표상을 통한 사유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동일성에 의한 사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학량의 서사적 내러티브는 동일성에 의한 사유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기술까지 자신의 어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거의 모든 작업에 대해 ‘최초’란 말로 진술하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다. 그러나 이는 ‘참된 진리는 말로 전할 수 없으며, 관계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방편적인 언어를 구사한 동북아적 사유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미 오래전부터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대상 그 자체의 고유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 가치가 형성되어 왔다. 글씨를 쓰든 난을 치든, 거문고를 연주하든, 지세를 살피든, 기(氣)나 도(道), 리(理)를 통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전통도 서구적 의미의 실체적 초월적 의미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오감의 경험을 기술하는 용어일 뿐이다. 이러한 문화적 유전인자가 김학량의 작업 속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일견 사림(士林)에 은거하는 선비 같은 풍모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도 이러한 유전인자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그의 언어 유희적 작업이 단지 관념이나 직관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감응(affect)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술 영역에 대해 관념 없이 사물에 감응하게 하는 방법, 다시 말해 새로운 감응에 의해 촉발된 사유는 어떻게 가능할까? 라는 스피노자나 질 들뢰즈의 문제의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5. 이번 전시는 각 작가들의 형식적 특성을 드러내는 태도와 어법을 부각하고 이들 작업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예기치 않은 우연적 상황과 릴레이 방식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참여 작가들도 이전 작업방식과 달리 당면한 우연적 상황을 자신의 어법으로 소화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처럼 이번 전시의 가장 주된 특색은 ‘참여 작가 상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어법을 장소에 이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참여 작가들은 작업을 진행하고 어법을 부각시키기 위해 전후의 작업에 대한 이해과정이 수반된 작업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작업 순서가 아니어도 작업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자신의 작업에 대해 생각하고 예상해야 했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무엇보다 작업으로 서로 의 접점과 만남, 그로 인한 감응과 소통의 계기를 조성하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그 주된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핵심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통념화된 미술의 관행을 벗어난 강밀한 코드이며, 이러한 의도된 ‘우연성(모호성)’, 또는 ‘클리나멘(벗어나는 선)’은 기존 예술과 차별화된 대응국면을 형성하는 방법론을 뜻한다. 특정한 순간의 개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러한 ‘특개성’의 세계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방식이어서 오히려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님을 우리는 마르셀 뒤샹 이래의 획기적 현대미술의 역사를 통해 자각하게 된다. 결국 이번 전시회는 현장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시너지 효과를 낳은 의미 있는 생성과 소통의 장이었으며, 감상자 또한 이러한 도전이 제시하는 새로운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음을 일깨운 전시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10월 9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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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병훈
4898 2009-10-08
가장 값지고 귀한 추석 선물 설날이나 추석은 유년기 아름다웠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추석이 다가오면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고 마음이 맑아진다. 올해도 추석을 맞아 부모님이 계신 대구와,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군위에 있는 고향마을에 갔다. 대학 진학 후 상경하여 늘 타지에 살다가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바람도 선선하여 더 없이 좋은 계절에 부모님과 형제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또 선영이 있는 고향 마을에 가는 일은 일상의 세파에 찌든 나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올 추석에도 말 그대로 선조들의 묘를 살핀다는 성묘(省墓)도 하고, 또 아버지께서 선산에 정하신 부모님 묘 자리도 아버지와 형님, 그리고 동생과 함께 둘러보았다. 고향 마을 주위 산자락에는 약 600년 전 고향마을에 최초로 들어온 입향조부터 조부모 산소까지 17대 선조들의 묘가 단 1기도 손실 없이 존재한다. 게다가 입향조의 부인인 열녀 서씨는 『세종실록』에도 실린 ‘백죽(白竹)’의 사연으로 대대손손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의 잘 알려진 명문 종가에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나에게 고향 산천은 더욱 마음을 애틋하게 만드는 본향인 것이다. 부모님은 내년이 되면 어언 결혼 60주년을 맞게 된다. 옛날 같으면 온 마을이 떠들썩할 성대한 회혼례(回婚禮)라도 치러야 하는 햇수를 두 분이 함께 하신 것이다. 이처럼 두 분이 건재하셔서 올 추석도 나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어머니로부터 뜻밖의 귀한 선물을 받아 더욱 뜻 깊은 추석이 되었다. 부모님 집 근처에 있는 동생집에서 추석을 지내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고 집사람과 동생과 함께 부모님 아파트에 들렀다가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집사람이, “어머님이 솜씨가 좋으시지요?” 라는 말과 함께, “예전에는 삼베도 직접 짜셨다면서요?”라는 말을 하자, 어머니가 “예전에는 다 짜고 그랬지.” 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버지도 옆에서 “너의 어머니가 다른 사람보다 더 정교하게 명주를 짰다”고 거드셨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곧바로 농문을 열고 아래 칸에서 무명 두루마기 한 벌과 아버지 모시 두루마기 한 벌, 그리고 곱게 짠 명주(明紬)천을 내놓으셨다. 명주천의 폭은 약 35cm, 길이는 약 90cm 정도 돼 보였다. 이 중에서도 무명 두루마기에 대해 어머니는 “나중에 우리가 죽으면 너희들이 상복으로 입을지도 모른다 싶어 남겨 놓았다”고 했다. 직접 목화를 따다 실을 뽑아 만든 무명 두루마기는 한 땀 한 땀 바느질의 정성이 배여 있었고, 모시 두루마기는 지금 유명 백화점에 진열해 놓아도 고급상품으로 팔릴 정도로 기품 있고 고급스러웠다. 이처럼 어느 것 하나 눈길이 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일품이어서 집 사람과 나와 동생은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특히 직접 어머니의 손으로 짠 명주천은 볼수록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삼베만을 짠 줄 알았지 이렇게 고운 명주까지 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 우리가 보는 명주천이 언제 짠 것인지 물어보았더니 정확한 연대는 기억 못하시고 18세 나이로 1950년에 시집오셔서 형님이 어릴 때까지 짰다고 했다. 그렇다면 1950년대에 짠 것이어서 햇수로 50년이 넘은 것이다. 19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의 전통적 생활방식이 거의 그대로 이어지던 나의 고향에서는 이런 명주나 삼베를 직접 짜서 입었다. 나의 어머니 세대가 이 땅에서 직접 베나 명주를 짠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명주천이 볼수록 귀한 느낌이고 마음에 들어 명주에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핑계로 명주 천이 갖고 싶어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선뜻 “갖고 싶으면 가져라”고 하셨다. 그래서 동생이 한 장을 갖고, 내가 석 장을 가지면서 나중에 돈으로 살 테니까 나머지 것도 잘 보관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도 한지를 꺼내어 어머님이 주신 명주 천을 고이 접어 사 주셨다. 명주는 뽕을 먹고 자라는 누에의 집인 고치를 실로 뽑은 견사(絹絲)를 이용해 짠 직물로서 우리나라에서 누에를 쳐 명주를 길쌈한 것은 삼한시대부터였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상류층이 중국산 명주나 비단을 수입하여 의복재료로 삼음으로써 명주를 길쌈하는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명주 길쌈을 권장하여 각 지방에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뽕나무 키우는 법인 종상법(種桑法)을 반포했으며 관복을 국내산 명주로 바꾸어 짓게 했다. 그러나 왕실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에서는 명주를 주로 의복 안감이나 신발인 운혜(雲鞋)감으로만 사용했지만 서민들은 혼수감이나 명절복으로 널리 애용하였다. 그리고 종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바탕이 되기도 하여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겸재 정선의 <내연삼용추도> 같은 그림은 명주에 그린 것이다. 명주의 길쌈 과정은 먼저 누에치기를 한 후 따낸 고치로부터 ‘실뽑기’를 하고 다시 ‘실 내리기’를 한다. 이어 타래 지은 실을 다른 직물의 길쌈 때와 같이 풀칠을 해 말려서 도투마리에 감아주는 명주매기를 하며, 그리고 도투마리에 감긴 명주실을 베틀에 올려서 잉아를 걸고 실꾸리를 북에 넣은 다음 명주를 짠다. 명주는 특히 올이 가늘어 가장 굵은 것이 10새이고 보통이 12~13새이며, 15새 정도가 되어야 상품(上品)으로 쳤다고 한다.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지만 나는 어머니가 짠 명주 천을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된다. 비단(실크)은 형형색색의 호사스런 느낌이 들지만 물들이지 않은 비단인 명주는 소박하면서도 고귀한 품격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때로는 문명 교류의 상징인 실크로드를, 때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떠올리며, 무슨 그림을 그릴까? 궁리하게 되지만, 명주 천의 재질감이 좋아 그 위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부질없는 짓거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고운 올로 촘촘히 짜인 노르스름한 윤기 나는 명주를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면, 지금까지 이 명주천의 가치조차 모르고 작품을 한 답 시고 살아온 나의 삶이 무색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어머니가 짠 명주를 보며 어머니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 올 한 올 당신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생생한 자화상이었다. 나의 삶의 바탕에는 수천 년 이어 온 한 조선 여인의 명주 같은 삶이 있었던 것이다. 2009년 10월 6일 도 병 훈
98 no image 덕숭산 수덕사, 그 시공간의 체험
도병훈
5942 2009-09-08
덕숭산 수덕사, 그 시공간의 체험 지난 8월 15일, 전북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와 개암사開巖寺로 갈 예정이었지만 길이 막혀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행선지를 바꾸어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修德寺로 가게 되었다. 여러 번 가본 곳이지만 최근 사찰 공간이 많이 달라졌고, 또 아이들을 생각해서 탐방장소를 바꾼 것이다. 나직한 산자락에 위치한 사찰 입구는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일주문을 새롭게 크게 짓는 중이었고, 기존의 일주문을 지나자 고암 이응로 화백의 사저였던 수덕여관이 초가집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이어 금강문, 사천왕문으로 들어서서 황하정루 지하에 있는 성보박물관으로 갔다. 그 곳에서 수덕사 대웅전 건립 700년을 기념하는 <수덕사! 천년의 아름다움>특별전 때 제작된 영상물을 통해 대웅전 짓는 장면을 보여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현대적으로 분석한 설계도면을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수덕사 경내에서 가장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올라서자 넓은 마당 위로 수덕사 대웅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수 년 전에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거기 있었다. 온갖 풍상과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딘 대상과 마주한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때 지은 건물이다. 현재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목조건축으로 현존하는 건물은 없다. 고려시대 목조건축으로는 13, 14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약 10동 정도 남아 있다.(봉정사 극락전鳳停寺 極樂殿, 수덕사 대웅전 이외에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과 조사당, 강릉 객사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봉정사 대웅전, 북한 황해도에 성불사 응진전과 심원사 보광전 2채가 남아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이며, 수덕사 대웅전은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1937년 해체 수리 때 "1308년 4월 17일 기둥을 세우다立柱"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어 창건 연대가 밝혀진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형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 형태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의 측면은 원목의 겉만 다듬은 둥근 도리가 앞뒤로 다섯 개씩 뻗쳐 나와 그보다 가는 서까래 여섯 개씩을 받치고 있다. 앞뒤의 보통 기둥平柱 두 개와 그 안의 높은 기둥高柱 둘이 서서 벽면을 이루었는데 높은 기둥 사이가 보통 기둥과의 사이보다 두 배 넓다. 그래서 벽면은 4등분으로 분할되고 종보와 들보, 퇴보 및 각목 형태의 3중 층방(層枋; 기둥과 기둥 사이에 층층이 가로질러 넣어 기둥들을 서로 연결 고정시켜 주는 부재)이 상벽을 11구간으로 나눠놓았다. 이처럼 측면은 기둥과 건물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구성미가 두드러진다.(1937년에 찍은 수덕사 전경 사진을 보면 대웅전도 조선시대의 다른 맞배집처럼 측면에 비바람을 막는 역할을 하는 판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내부공간도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구조 부재들이 그대로 노출된 대웅전 안은 용마루 아래 종도리에서 2등변 삼각형을 이루며 앞뒤로 질서정연하게 서까래가 드러나 있다. 수덕사 대웅전 앞 중심마당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형공간이다. 예전에는 이와 다른 구조였다. 양쪽에 승방만을 남기고 대웅전 바로 앞에 있던 선방건물을 철거하여 공간을 비움으로써 수덕사 대웅전의 모습을 한 눈에 들어오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수덕사 전체가 개방된 공간이 되어, 마당에서 앞을 내려다보면 멀리 내포평야가 바라보인다. 나는 승방인 백련당 툇마루에 오랫동안 앉아 묵언수행 하듯 수덕사 대웅전을 바라보았다. 일체의 장식이 배제된 장대석을 쌓은 높은 석조石造 기단基壇 , 기둥 위 주심포 형태의 단순 구조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창방과 도리, 맞배지붕 용마루까지의 중층적인 수평선은 일반적인 전통 한옥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전통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솟음이 없고, 또한 현란한 처마인 다포 형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욱 인상적인 점은 무엇보다 황색의 벽을 제외하고는 사찰이나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청조차 수 백 년 눈, 비, 바람에 탈색되어 사라져 버리고, 갈라진 뼈처럼 나뭇결들만이 드러나 있는 점이었다. 저처럼 모든 사물, 즉 색色의 세계는 무상한 법이다. 거듭된 생성과 소멸의 역사 속에 그 과정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수덕사 대웅전을 포함한 이 시기의 목조건물이 가치의 유무를 떠나 극히 소수라는 사실은 이 세계가 얼마나 유동적이고 무상한 시공간인가를 입증한다. 다만 지금 이순간 여름날 뜨거운 태양 아래 수덕사는 이 곳 대웅전을 중심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내포평야에서 덕숭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적요寂寥한 시공간으로 빛나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건축은 단일 건물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세나 공간에 따른 배치에 따라, 또한 시간 속에서 그 복합적 구조를 드러낸다. 이런 차원에서 돌담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사찰은 이러한 정신을 망각한 경우가 많다. 수덕사도 얼마 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지만 아직도 덕숭산이나 대웅전에 걸 맞는 공간으로서는 미흡한 점이 많이 눈에 보인다. 특히 진입로 변에 세운 큰 사적비나 코끼리 석등, 계단 옆에 위치한 거대한 포대화상, 그리고 진입공간의 수많은 계단들이 그러하다. 사실 이는 어느 한 부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곳 특유의 지세를 바탕으로 진입 공간에서 중심공간까지 모든 공간의 관계성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함을 뜻한다. 비움虛과 채움實이 절묘하게 구현되는 다차원적이며 중층적인 구조를 자각함으로써 수덕사 전체 공간은 물론 대웅전도 더욱 깊은 감응의 공간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응의 문제는 단지 미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종교적인 공간도 근본적으로는 항상 변화하는 역사적 공간 또는 실존적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가 동시적으로 새롭게 인연을 맺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가치 있는 체험이란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져 생성하는 그 관계를 끊임없이 탐색함으로써 새로운 감응의 미학을 창출하는 일인 것이다.(2009년 9월 4일, 도병훈)
97 no image 문화유적 답사 &#8228; 예술체험을 앞두고
도병훈
5054 2009-09-06
*아래 글은 이번 여름 학생들과의 답사체험후 만든 자료집 서문으로 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나 답사를 동경하고, 예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싶어 한다.‘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정해진 기호의 틀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산다. 이러한 기호의 틀은 인간의 의식적 진화 속에서, 특히 근대이후 합리적 사고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합리적 의식 밖의 세계나 삶은 이러한 기호의 틀로 규정 할 수 없다. 이를 실존적 용어로는‘앎과 삶의 괴리’, 또는‘부조리’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인식)은 항상 불완전하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와 인식의 다섯 단계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 한다. 색은 이 세계(대상)와 내가 감각과 관념 이전의 상태로 존재하는 차원이라면 수․상․행․식은 순수한 감각적 지각을 바탕으로 상이 맺히고, 이름이 붙여지는 인식과 정신의 단계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또한 우리 몸의 다섯 감각기관도 모두‘식(인식)’을 이루는 요소이며, 이를 바탕으로 더욱 높은 단계의 앎에 도달하는 것으로 본다. 앎이 단지 지식의 습득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응, 즉 체험을 근본적인 인식의 단계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 및 인식의 과정은 현대의 뇌 과학 및 인지과학이나 철학에서도 논의된다. 예컨대 미국의 시각문화연구학자인 미첼(W. T.Michell)은 체험영역을 몸성, 시각성, 세계성이란 범주로 나누어 체험영역의 중심은 몸성, 소통영역의 중심은 시각성, 이해 영역의 중심은 세계성으로 보았다. 또한 기호학의 창시자 퍼스(C.S Pairce)는 몸의 체험과 관련된 기호를 지표index, 시각적 이해와 관련된 기호를 도상icon, 세계성의 이해와 관련된 기호를 상징symbol로 구별하였다. 퍼스는 현실적으로는 대개 이 세 가지가 결합된 복합기호로 보았다.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림이든 건축이든 감응하고 해석하기 전의 대상 그 자체는 텍스트(text)이며, 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나 숨겨진 의미 등은 콘텍스트(context)이다. 문화유산이나 예술세계의 참된 가치는 규모의 크기나 외형적 형식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지역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형성된 정신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답사 과정이란‘텍스트를 통한 콘텍스트 알기’이다. 이러한 여러 다양한 관점들은 답사나 예술체험이 정해진 개념이나 인식적 가치에 동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지각과 감응을 바탕으로 새롭게 자신의 생각을 형성하는 과정임을 알게 한다. 가령 궁궐과 사찰의 경우 지세를 살피고 또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을 보고 진입하는 체험을 통해 기존의 개념과는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됨으로써 새로운 생각을 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회화나 도자기의 경우, 기법적 측면이나, 자유로운 정신 등이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면밀히 살펴본다면 그 선적 리듬감이나 미묘한 색조를 통해 틀에 박힌 이해방식과는 다른 느낌이 촉발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답사나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탐색과 감응이 현장에서의 순간적 경험으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탐색 결과를 글이나 포트폴리오 형식의 자료로 제작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체험을 이미지나 기록으로 정리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나아가서는 삶의 가치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오감을 통한 지각들(percepts)과 감응들(affects)을 바탕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안을 탐색하고, 나아가 스스로 텍스트를 분석하고 통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답사나 예술체험이다. 이처럼 새로운 경험이 새로운 사유를 낳는 계기가 되며, 예술 또한 새로운 사유의 매개체라 할 수 있다. 답사나 예술체험은 기존의 통념적 관념에서 벗어나 오감을 통해 가치 있는 정신의 유전자를 발견하고 나아가 삶의 가치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과정인 것이다.
96 no image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보는 그림 그리기
도병훈
7351 2009-06-03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보는 그림 그리기 1. 미술세계는 과학이나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체와 대상(세계들: the worlds)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 세 영역 모두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진화해온 공통점이 있지만 미술은 ‘지각’과 ‘감응’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고대 그리스 미술의 경우, 아름다움은 대상의 객관적 속성에 있다고 보는 ‘대이론’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삼라만상의 변화를 초월한 불변의 존재이며, 그 바탕은 이상적 규범이었다. 동양의 수묵화(水墨畵)는 이와 다른 세계관의 소산이다. 수묵화는 중국의 남송(南宋)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는데, 그 사상적 ․ 문화적 배경은 위진 남북조 시대와 당(唐)시대에 성행한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선종禪宗)이다. 노장사상과 선종은 개념적 체계나 도그마도 부정하는 급진적 자유정신이다. 그래서 이러한 정신이 반영된 수묵화는 지적 체계나 관념성을 띠지 않는다. 서양 근대미술은 근대성의 증표다. 근대 미술은 합리적 사고의 소산인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바탕으로 이상적 진리를 제시하거나 페트론, 즉 후원자의 미적 취향에 따른 재현적 묘사를 현란한 솜씨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직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이므로 그림이나 조각만이 사물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의 현대미술은 이상적 진리를 제시하려는 규범적 미학이나 후원자의 사적 취향 미학을 회의(懷疑)한 사람들에 의해 성립한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기존의 개념적 체계나 인식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 많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언어학자에 의하면 서양의 언어는 명사, 동양의 언어는 동사 중심이어서 서양은 ‘실체(존재)’적으로 동양은 ‘관계(생성)’적으로 사고한다고 본다. 고대 동양에서는 우주란 연속적 장(場)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들 간의 상호작용은 원자들의 충돌이 아니라 파장들의 중첩으로 이해되었다. 『주역』에서 알 수 있듯, 고대 동양인들은 ‘사물’의 본질보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당연히 어떤 사건이 특정 상태라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징후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삶도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끊임없는 변화과정이므로 모든 존재는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닐 수도 있어, 이러한 상태를 지각하는 시시각각의 감각과 경험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도가사상과 선불교에서는 ‘언어’로는 대상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나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이런 차원의 말이다. 선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과격한(?) 말이 있는 것도 각자가 아는 부처는 자신의 언어적 틀로 보는 부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사상 주체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획기적 전환은 칸트의 '구성설'에서 이루어진다. 구성설이란 나의 인식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뜻으로, 우리의 인식, 즉 앎이란 근본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나의 이해가 나의 틀대로 세상을 찍어낸 것임을 뜻한다. 나의 인식의 틀이 '△'이라면 세상은 '△'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인식은 언어를 바탕으로 하지만 언어는 실제세계에 대한 자의적 기호이므로 실제 세계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구성적 세계인식은 지동설 이전의 천동설은 물론 근대 서양을 특징짓는 근대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이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뉴턴은 고전물리학을 통해 이 세계를 몇 가지 법칙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세계의 바탕이 질서 정연한 것이라는 연역적 믿음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관점에서 근대를 가능케 한 합리적 사고도 이른바 '주체'가 '대상'을 결정하는 사유의 한 방식이며, '인간의 세계 지배'라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언어적 특성에 의한 사유 이전에, 인간이 대상을 그자체로 보는 것이 매우 어려운 까닭의 근저에 욕망의 문제가 있다. 대상을 통해 욕망을 충족하려는 본능적 마음이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대상을 그 자체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정신과 의사들은 7세 이전의 아이들에게 자기중심성이 강하며,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동서양의 언어적 특성에 의한 사고의 차이나, 칸트의 사유,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대한 이해는 결국 인간의 말이나 문자로 기인하는 인식의 틀을 자각하게 한다. 물론 말이나 문자는 대상이나 어떤 사실을 지칭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되어 소통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어떠한 과학적 언어도 근본적으로 기호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의 생각도 불완전 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어느 시대나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진리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믿는 보편적 사실이나 진리는 한 시대의 역사적 과정에 따라 생겨난 인식의 틀인 것이다. 한 개체로서의 개인은 낯선 타자 속에 둘러 싸여 있으며, 이러한 환경에 대해 적응하는 것은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진리나 행복에 대한 욕망은 안정적 삶을 희구하는 생물학적 욕망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적 ․ 객관적 진리나 행복은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환경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욕망인 것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감응과 비판적인 힘은 예술과 이에 대한 담론을 통해 자각할 수 있다. 수묵화 중에는 노자 어법을 빌리면 유무상생(有無相生), 불교 언어로 표현하면 공즉시색 색즉시공, 즉 색공불이(*色空不二: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는 뜻임)를 느끼게 하는 그림들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은 세계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 속에 변화하는 세계를 느끼게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의 과학적 시각에서도 수묵화의 주된 표현 매체인 ‘먹’과 ‘물’은 자연의 변화과정을 잘 알게 하는 물질이라는 점이다. 수묵화는 물(H2O)과 먹(탄소Carbon)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하얀 종이나 비단 위에 주로 짙고 옅은 농담의 차이로 그려지며, 간결하게 표현하면 몇 개의 선과 여백으로만 표현된다. 먼저 물의 경우, 구름, 강, 호수, 바다로 존재할 때는 눈에 보이지만 허공중에 밀도가 약한 상태로 존재할 때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며, 사실은 변화의 과정을 한 순간의 이미지로 고정시킨 것을 우리는 존재로 여긴다. 나무도 그렇다. 나무를 태우면 남는 숯을 통해 알 수 있듯, 나무는 탄소 덩어리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은 허공의 CO2에서 온 것이다. 이처럼 보이고 안 보이는 차이는 밀도와 모양의 차이일 뿐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이런 차원에서 수묵화는 짙고 옅은 농담(濃淡)이나 마르고 촉촉한 고윤(枯潤), 그리고 여백(餘白)으로 자연의 변화과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경험은 개별적이며, 시대나 지역에 따라 무엇보다 화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수묵화는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주체)의 감응을 보여준다. 동양의 시론이나 화론 중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를 볼 수 있다. 예컨대 명말 청초의 학자이자 시인인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자신의 예술관을 정경교융(情景交融)이란 말로 표현한다. 동양 시론(詩論)의 핵심으로도 유명한 이 말은 대상인 경물(객체의 모습)과 사람의 주체의 느낌(감흥)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관계를 중시하는 차원을 말한다.(*景中生情, 情中含景) 이 말은 왕부지가 시(詩)의 차원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경’을 보고 ‘정’을 일으키는 정수경생(情隨景生), ‘정’을 머금어 ‘경’에 투사하는 이정입경(移情入景), 둘의 선후를 구분하지 않는 ‘정경교융’ 등으로 구분한 데서 유래한다. 또한 명말청초의 화가인 석도(石濤, 1642~1707)는 ‘입어일획(立於一畫)’이란 집약되는 새로운 화론을 펼치는 데, 그 요지는 ‘한 번 그을 때마다 새롭게 그림이 형성 된다’는 것으로, 혼돈 상태인 자연(무위無爲 : 먹)이 인간(유위有爲 : 붓)의 행위에 의해 그림으로 형성됨을 뜻한다. 곧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주체성을 강조한 화론이다. 이처럼 과정 속에 생성되는 우연적 속성(침투와 번짐 등)을 통해 자연의 순환 현상을 축약하여 제시한 듯한 수묵화의 표현 방식, 그리고 왕부지의 정경론(情景論)이나 석도의 일획론은 서양미술이나 세계관과 다른 고유성을 보여준다. 개별적 경험에 입각한 리얼리티 탐색은 현대미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예로 마네의 대표작이나 반 고흐의 만년 그림, 생트 빅투아르 산 시리즈로 대표되는 세잔의 만년 그림, 그리고 20세기 들어 야수주의 이후의 다양한 회화들을 꼽을 수 있다. 결국 주체적 방식으로 대상의 리얼리티를 추구한 예술세계는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나려는 개체적 대응과 노력이 새로운 감응의 출발점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그림은 인간이 대상세계를 어떻게 지각하는 지, 나아가 과학적 인식을 넘어 주체와 대상 간의 새로운 감응 방식을 보여주는 생생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3. 우리 인간은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혼돈의 세상 속에서 서로 다른 유전자를 지닌 존재로서 개별적 경험을 하며 사는 존재다. 어떠한 개념체계나 절대적 신념도 인간이 역사 속에서 형성해 온 가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판단에 앞서, 또는 어떤 신념을 갖기 이전에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기존의 통념과 인식을 회의하고 비판하는 것은 좀 더 바로 알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동서 미술의 역사는 '보거나 사유하는 방식'에 대해 다양한 감응의 방식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농담, 고윤 등의 생성적 어법으로 세계를 구성하고자 한 동양의 수묵화나 19세기 후반이후 다양한 현대 회화는 기호를 넘어선 메타언어 영역의 소통방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그림들을 통해 세계와 좀 더 넓고 깊게 감응하며,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새로운 회화는 이전의 통념에 종속되지 않는 비판정신과 모험으로 비롯된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세계로서의 그림(예술세계)은 기존의 통념을 회의하고 비판하는 끊임없는 열정으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술은 특정 기준에 의해 제한된 논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펼치려는 시도인 것이다. 2009년 6월 1일 도 병 훈
Selected no image 홍랑의 시조와 글씨에 드러난 만남 ․ 사랑 ․ 삶
도병훈
7822 2009-05-15
홍랑의 시조와 글씨에 드러난 만남 ․ 사랑 ․ 삶 1. 최근 친일파와 독립 운동가들의 글씨체를 분석하여 그 특성을 밝힌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장(戰場)에서 쓴 무인의 글씨와 임천(林泉)에서 풍류를 즐기는 문인의 글씨가 다르듯, 글씨는 글을 쓴 당사자의 처지와 마음이 반영된다. 며칠 전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 1583)과의 애틋한 사연과 함께 한국고전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연시의 하나로 꼽히는 조선시대 기생 홍랑(洪娘)의 시조 글씨를 친구의 메일을 통해 보고, 그 필치가 예사롭지 않아 자료들을 찾아보았더니 그녀가 직접 쓴 육필 원본이었다. 주1) 이 글씨는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인 글씨체나 기교 넘치는 글씨와 달리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모습과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홍랑의 이 연시가 실린 서첩은 2000년 11월에 그 원본이 처음 공개되었다. 이 서첩에는 그간 알려진 홍랑의 시뿐만 아니라 최경창의 시도 함께 수록돼 있으며, 서첩 말미에 홍랑과 나눈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홍랑은 어떻게 최경창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시조와 친필 글씨까지 남기게 되었을까? 2. 홍랑이 만난 최경창이란 인물은 살아생전에 그 시대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 또한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릴 정도로 시에도 뛰어났으며, 글씨, 그림, 퉁소도 잘 부는 예인(藝人)이었다. 최경창은 과거에 급제한 뒤 5년이 지난 1573년(선조 6년)에 함북 경성(鏡城)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여 홍랑을 만나게 된다. 홍랑은 관아에 소속된 관기(官妓)로서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며,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예인이었음을 최경창과의 첫 만남의 과정에서 알 수 있다. 홍랑은 최경창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이 흠모하던 시인의 시를 노랫가락으로 표현했는데, 그 시는 최경창이 지은 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각별하게 한 인연의 끈은 이렇게 맺어진다. 그토록 흠모한 시인이 눈앞에 있음을 알게 된 홍랑의 감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며, 이후 두 사람은 막중(幕中)에서 함께 동거하게 된다. 그러나 임기가 끝난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때 홍랑은 쌍성(雙城,함경도 영흥의 옛 이름)까지 따라와 정인(情人)과 작별하고, 돌아가던 길에 날이 저문 함관령(咸關嶺:함흥과 흥원 사이에 있는 고개 마루)에서 봄비를 보며 사모의 정을 담은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낸다. 이 때 홍랑이 지은 시조는 다음과 같다. 묏버들 갈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 자시창(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 (산 버들가지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랑은 해마다 봄이 오면 싹트는 묏버들의 새 잎에 빗대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천 리 먼 거리로 떨어져 있어도 항상 임의 곁에 있겠다는 마음과 함께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달라는 뜻도 깃들어 있다. 특히 홍랑의 간절한 마음과 나무의 새 잎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400년의 시공을 넘어 지금도 이 시가 마음에 와 닿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로 간 최경창은 1575년(선조 8년)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 눕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랑은 곧 남장으로 행장을 차리고 그 날로 밤낮 7일을 걸어 서울의 최경창 집에 당도하여 그를 극진히 간호를 하며 잠시 함께 지낸다. 그러나 이들의 두 번째 만남도 오래 갈 수 없었다. 이들이 이른바 ‘양계의 금禁(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함)’을 어겼다는 죄목과 또한 당시 왕후의 국상 직후여서 사대부가 기생과 어울렸다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주2) 이 일로 최경창은 관직에서 파면되고 홍랑 또한 함북 홍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의 순간, 최경창은 자신의 마음을 담은 한시를 홍랑에게 준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는 부르지 마라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겠지. 相看脉脉贈幽蘭 상간맥맥증유란 此去天涯幾日還 차거천애기일환 幕唱咸關舊時曲 막창함관구시곡 至今雲雨暗靑山 지금운우암청산 첫 구의 '맥맥(脈脈)' 이란 시어는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습’을 뜻한다. 이 시 첫 구절에 드러나듯 고죽에게 홍랑은 그윽한 향기가 나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으며, 시 전체에 별리의 아픔이 구구절절이 배여 있다. 이 때 이별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이후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을 떠돌다 종성부사로 간 지 1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1583년(선조 16) 객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의 행적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의 문집인 『회은집(晦隱集)』에 전한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홍랑은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최경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곳에서 죽으려 했지만 때마침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래서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나 문적(文蹟)을 정리하여 등에 짊어지고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겨우 병화(兵火)에서 피신했으며, 그 덕분에 최경창의 시가 온전하게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홍랑이 죽자 최씨 문중은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에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 무덤이 있다. 그곳에는 현대에 들어 세운 홍랑가비(歌碑)가 서 있다. 인물과 재능이 출중했던 홍랑에게 최경창 같은 예인은 변방의 평범한 사내들과는 그 격이 다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며, 홍랑으로서는 최경창을 직접 만나고 사랑할 수 있어서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만남/사랑은 삶의 규범 및 제도적 틀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잘 알게 하는 사례다. 문제는 이러한 충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선택하는가이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변방에 부임하여 그 지역의 관기를 만나고 동침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관례였지만 홍랑이란 인물의 진가는 헤어짐의 장면에서부터 드러난다. 홍랑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묏버들의 새 잎이란 매개물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지에 먹으로 쓴 물적 오브제이며, 시각 이전의 직접 몸에 닿는 촉각적인 매체다. 홍랑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이러한 물적인 오브제가 없었다면 그들의 삶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홍랑은 이 단 한편의 시조를 필적으로 남김으로써 최경창의 마음은 물론 후대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홍랑이 쓴 정갈한 글씨는 당시 그녀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홍랑의 글씨는 조선 후기의 궁체와 같은 흘림이나 꾸밈이 없는 단정한 글씨이다. 특히 글자 세로획들의 반듯한 내리 그음은 그녀의 강단과 지조 있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홍랑의 필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초장 중장과 달리 세 번 째 행인 종장에 이르러 행의 배열도 조금 흐트러지고 글씨 크기도 제각각 다름을 보게 된다. 이 부분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홍랑의 당시 심정이 한 획 한 획마다 숨결처럼 드러나며, 그만큼 그녀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일견 담백해 보이는 글씨에도 마음은 그대로 드러난다. 홍랑의 필적을 전체적으로 보면 담백하게 쓴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한 획 한 획 또박또박 반듯하게 쓴 글씨는 볼수록 그 품격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일까, 최경창이 죽자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면서까지 한 사람을 위해 정절을 지키고자 한 그녀의 삶이 연상될 정도로 결연한 느낌까지 든다. 임진왜란 때, 홍랑이 최경창의 시고나 문적들을 그토록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것도 최경창이 남긴 시고나 문적들이 자신과 최경창의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들이고, 무엇보다 이 중에는 자신의 마음이 표현된 이 필적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유추하게 된다. 홍랑의 필적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셈이다. 3. 홍랑과 최경창의 만남/사랑은 홍랑의 시조로 알려졌으며 묏버들은 그 매개체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사랑도 청신한 새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만큼 만남/사랑에 대한 집약하는 이미지다. 욕망은 현실과 항상 어긋나며, 이는 모든 생명체가 겪는 부조리한 현실이다. 옛 그림이나 필적은 당대의 시공간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1차 자료로서, 이를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홍랑이 남긴 글씨, 그 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 행이 입증하듯, 한 획 한 획마다 글씨는 곧 그 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어떤 사연이 얽힌 당대의 오리지널 오브제야말로 가장 미세한 마음의 떨림까지도 보여준다. 홍랑의 필적은 만남/사랑 속 극히 작은 한 부분의 삶의 흔적이지만 그녀가 글을 쓸 당시의 심경과 옛 조선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과 기품을 느끼게 하며, 나아가 사랑과 삶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글씨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기질, 심지어 숨결까지 느낄 수도 있는 생생한 물적 흔적이다. 옛 유품, 그 중에서도 필적은 그 언어적 내용과 별도로 감추어진 삶의 본질에 대해 더 깊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2009년 5월 11일 도 병 훈 주1) 이 시조를 홍랑이 썼다고 밝힌 이는 시조 시인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이다. 이 글씨의 친필 감정은 시대별 어휘의 특성이나 지질, 그리고 함께 전하는 최경창의 문집 등을 보고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한다. 한글이 궁체 위주의 흘림체로 쓰여 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이다. 홍랑의 글씨는 조선 중기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며, 무엇보다 글씨 자체의 품격에서 홍랑의 글씨로 여겨진다. 주2)선조실록 10권, 9년(1576 병자 / 명 만력(萬曆) 4년) 5월 2일(갑오) 2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헌부가 아뢰기를,“전적 최경창(崔慶昌)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不時)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94 no image 추사 김정희의 &lt;불이선란도&gt;와 서화 다시 보기
도병훈
10726 2009-04-28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와 서화 다시 보기 아는 대로 본다면 새로운 경험은 불가능하다. 어떤 대상과 세계에 대한 낯선 ‘마주침’은 통념의 한계를 자각하게 한다. ‘실존은 사유에 선행 한다’, 또는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는 말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창작 세계를 감상(鑑賞)하고 비평하는 것은 경험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며, 회화 중에는 그 어떤 개념적 용어로도 해석이 쉽지 않은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 이후 선명한 기세의 그림, 담백하면서도 강경(强勁)하기 이를 데 없는 추사 김정희의 만년 글씨와 그림, 전통적 소재와 채색법에서 벗어난 마네의 그림, 빈센트 반 고흐가 생애를 마감할 무렵에 그린 특정 색에 대한 광적인 선호와 요동치듯 선이 흔들리는 그림, 끝내 단순화된 색채의 조합으로 귀결된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 잭슨 폴록의 ‘No시리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추사 김정희(1786,정조10년,~1856,철종7년) 만년의 그림이나 글씨는 여러 면에서 이채로운 특성을 보여준다. 추사의 그림은 몇 점의 산수화와 수십 폭의 난 그림 등이 전하지만 글씨에 비해서는 많지 않다. 추사의 난 그림은 간송미술관 소장의《난맹첩(蘭盟帖)》, 개인소장의 <산심일장란도(山深日長蘭圖)>, <증번상촌장란도(贈樊上村庄蘭圖)>, <불기심란도(不欺心蘭圖>, <불이선란(不二禪蘭)도>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중 <불이선란도; ‘不作蘭圖’라고도 함>는 추사의 <세한도>와 더불어 추사 그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불이선란도>에는 기년(紀年)이 적혀 있지 않지만 제시와 제발의 내용 및 서체 등으로 보아 추사가 만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최근 나는 책상머리 맡에 사진그림으로 표구한 <불이선란도>를 세워 놓고 추사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도도한 성정과 기(氣)의 선적 흐름, 즉 맥세(脈勢)가 드러난 난 잎과, 여백 부분의 필적을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그린 <세한도>에서 제주 유배시절 자신의 실존적 처지와 심경을 간결하면서도 꼿꼿한 필치로 구현한 추사가 <불이선란도>에서는 어떤 차원에 이르렀기에 “20년 동안 난을 치지 않아도 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고 자찬하였을까? <불이선란도>의 구성과 붓질의 특성 제시에서 드러나듯 <불이선란도>는 오랫동안 그리지 않다가 그린 그림이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이선란도>는 여느 난 그림과 다르며, 이 그림 이전에 그린 추사의 ‘묵란도(墨蘭圖)’와도 사뭇 다르다. 추사가 중 장년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난맹첩》의 15폭 난 그림 중 특히 <적설만산도(積雪滿山圖)>나 <춘농로중도(春濃露重圖)>, 그리고 <인천안목도(人天眼目圖)>에서 볼 수 있는 난은 칼끝으로 그은 듯 날카롭고 예리하여 당시 추사의 추상같은 성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불이선란도>는 담백하면서도 유희하는 듯한 특성이 보이며, 난의 구성이나 형세도 파격적이다. 전형적인 난 그림의 경우 대개 꽃대는 난 잎 사이에서 솟아나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꽃대만을 별도로 큰 비중으로 그렸다. 또한 화심(花心)을 제외한 난 잎과 꽃대는 옅은 먹으로 그렸으며, 몇 개의 난 잎은 건필(乾筆)과 검묵(儉墨), 즉 붓끝에만 먹물을 묻혀 쓰는 붓질과 먹을 아껴 쓴 흔적만 보일 정도이다. 그림의 구성을 보면 1, 2엽으로 전형적인 봉안(鳳眼)과는 다르게 봉안을 그린 후 3, 4 엽으로 이를 깨트렸다. 이 같은 화법으로 5,6엽을 친 후 7,8엽으로 다시 파봉(破鳳)하였다. 잎은 전체 10엽이지만 단연 1엽의 비중이 크다. 1엽의 형세는 잎 폭에서 큰 변화 없이 왼쪽 위를 향해 그려지다 크게 꺾이는 전절(轉折)에서 화면 오른쪽 위를 향해 대각선으로 뻗은 기세를 보여준다. 그래서 필세, 즉 붓의 흐름과 생동하는 맛, 힘의 패턴, 역동적 긴장감이 특히 두드러진다. 반면 2엽은 둥근 곡선형에다 기교적인 선을 구사하여 굵고 가는 비수(肥瘦)의 변화가 크며 농담의 변화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1엽의 단순한 기세가 돋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1엽의 존재감은 희미하게 마른 붓질을 한 5옆, 6엽과 대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뿐만 아니라 ‘ㄷ자 형으로 그린 3엽과 7엽도 1엽을 살려준다. 또한 난 잎이나 꽃대의 전절이 보여주는 경사성은 방향성 긴장감을 자아내며, 이로 인해 잎 사이의 간격 뿐 만 아니라 화면이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난의 아래 부분은 매우 빽빽한 반면, 윗부분은 상대적으로 잎 사이의 간격을 넓게 그려 공간으로 확산되는 듯한 데, 이는 4엽과 7엽, 그리고 8엽의 상단 끝 부분을 매우 희미한 갈필로 그려 더욱 그러하다. 이 그림은 얼핏 보면 단조로운 듯하지만 이른바 ‘삼전지묘(三轉之妙)’를 살려 난 잎을 쳐야한다는 자신의 ‘난화론’을 입증하듯, 잎 새의 변화가 무궁하다. 꽃대는 맨 좌측에서 꺾여 뻗어 올라가는 형세인데 상단부분은 비백까지 보일 정도로 속도감 있는 필치를 구사하다 다시 한 번 90도 가까이 꺾어 꽃을 그린 후 화심만 농묵(濃墨)으로 찍었다. 4개의 꽃잎도 아랫부분은 그 간격을 좁게, 윗부분은 넓게 하고, 2개의 화심도 위는 크게 아래는 작게 찍어 막 피어나는 듯한 참신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불이선란도>는 담묵으로 그렸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난 잎은 물론 꽃대, 심지어 화심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진폭이 크다. 이러한 난 그림의 선적 표현은 기(氣)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이 깔려 있으며, 무심한 듯 하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추사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난초 치는 것은 서너 장의 종이를 넘을 수 없다. 신기(神氣)가 서로 일치되고 주변의 분위기가 맞아야 한다. 주1) 한자 문명권에서 ‘기(氣)’는 인간의 몸, 산세와 지세를 보는 풍수사상, 그리고 글씨와 그림은 물론 칼을 쓰는 일에 이르기까지 세계와 삶과 예술, 사유에 일관된 개념이다. 그렇다고 기는 초월적, 형식적 개념도 아니며, 경험적 체험이 반영된 내재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아닌 개념이다. 추사의 글에서도 역시 ‘기’를 바탕으로 논지를 펼치며, 그가 인용하거나 직접 쓴 여러 글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 장화의「학서요론」을 인용한 글에서, 필획의 성글고 빽빽함과 가볍고 무거움, 굵고 가는 변화를 ‘내기(內氣)’라 하고, 행간의 좁고 넓음, 또는 자간의 좁고 넓음을 구성하는 장법을 외기‘(外氣)’로 보았다. 그러므로 ‘내기’는 인간의 몸과 상관이 있으며, 외기는 내기를 펼치는 장과 상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사는 글씨 쓰는 공간을 ‘내기’와 ‘외기’가 만나는 장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추사는 서화를 구분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차원에서 <불이선란도>는 난을 모티브로 한 기의 강함과 약함, 집중과 분산, 빠름과 느림 같은 생성과 흐름이며, 그 기와 기의 만남이 질감으로 드러나는 그림이다. <불이선란도>의 제시와 제발 다시 보기 <불이선란도>에는 마치 난초를 에워싸듯, 한 수의 제시(題詩)와 세 개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글은 전통적인 순서와 달리 왼쪽 위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러한 역행법은 청나라 때 서화로 유명한 판교 정섭(板橋 鄭燮,1691~1764)의 영향을 받았다. 상단 부분을 쓴 후 오른쪽 아래로 내려와서 작게 썼다. 이어 왼쪽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역행(逆行)으로 쓰다가 또 다시 안쪽의 그림 옆에 작게 추가로 썼다. 그리고 ‘제시’와 ‘제발’은 그림보다 유난히 먹색이 짙다. 글씨의 획은 실처럼 가늘거나 매우 굵기도 하며, 특히·‘난蘭’은 더욱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획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시 첫 행에서 보듯 ‘난蘭’자와 ‘이십년’의 현격한 크기 대비와 함께, ‘년’의 끝을 급하게 소멸되게 써서 ‘난’ 자가 상대적으로 더욱 커 보인다. 글씨는 전체적으로 유희하는 듯 썼으면서도 강밀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추사 만년 서체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위쪽 첫째 제시와 이어 쓴 발문은 다음과 같다. 난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부작란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 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폐문멱멱심심처(閉門覓覓尋尋處)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일세 차시유마불이선(此是維摩不二禪)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또한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말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 만향(曼香)쓰다.(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이 제시의 첫 행에 나오는 ‘부작란화 이십년’은 말 그대로 이 기간 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1820~1898)에게 보낸 다음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즉 “나는 배우려고 심히 노력하였으나 지금은 또한 남김없이 할 마음을 잃어버려서 이리저리 떠돌면서 그리지 않은 것이 이미 이십여 년이나 되어 버렸다”는 내용이다. 주2) 그러나 평생 추사가 난 그림을 통해 추구한 일관된 경지나 남긴 글로 볼 때, 말 그대로 20년 동안 난을 전혀 그리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 아들에게 쓴 난초 치는 법에 대해 말하면서 종이를 많이 보내 온 것을 나무라는 부분이 있고, 또한 유배시절에 아들에게 주기 위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불기심란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3) 추사의 제주 유배시기가 55세에서 63세 사이이므로 설령 55세 때 이 그림을 그렸다 하더라도 추사가 생을 마감하는 해까지는 20년이 채 안되므로 부작난화 이십년이 말 그대로 이 기간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 글이나 이 <불이선란도>의 제시로 보아 추사가 《난맹첩》을 그린 이후 오랫동안 거의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은 사실로 보인다. 먼저, 우연히 본성의 참 모습이 드러났다는 이 제시 두 번째 행과의 상관관계를 통해서도 그 참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두 번째 행의 핵심어는 ‘성중천(性中天,본성의 참모습)’인데, 성중천의 ‘천’은 단지 하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동양의 고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장자』에는 ‘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소나 말이 발이 4개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쉬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무엇보다 ‘천’은 송대의 신유학인 성리학에서 리(理), 성(性)과 함께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빈번히 나오는 용어이다. 학자에 따라 ‘천’에 대한 해석은 다르지만 ‘스스로 그러한’ 세계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작란’과 ‘성중천’의 참뜻은 추사가 아들에게 전한 다음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난을 치기가 가장 어렵다. … 또 모양을 비슷하게 하는 데에도 있지 않고 길을 따르는 데도 있지 않고 화법으로써 들어가는 것도 대단히 꺼린다. 또한 많이 그린 연후에야 가능하니, 당장에 성불할 수도 없으며 또 맨 손으로 용을 잡을 수도 없다. 비록 구천 구백 구십 구분에까지 이룰 수 있다 하여도 그 나머지 일분은 가장 원만하게 이루기 힘드니, 구천 구백 구분은 거의 모두 가능하나 이 일분은 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후략) 주4) 위 글에서 추사는 겉모양으로 난의 참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추사는 난의 겉모습을 그리기 위해 난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추사가 말하는 본성의 참모습이란 초시간적이고 불변적의 대상의 참모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본성의 참모습을 성리학에서는 선험적인 절대 진리인 ‘리(理)’의 차원에서 말한다. 이른바 ‘성즉리(性卽理)’이다. 그런데 김정희는 우주 운행 근거를 음양오행의 기(氣)로 설정한 청대의 학자 대진(1723~1777)의 사상을 수용하여 인간의 혈기(血氣)와 심지(心知)에서 발현된 욕망의 발현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추사의 견해는 ‘사사로움(私)’은 욕구의 잘못에서 생기고 ‘가림(蔽)’은 앎의 잘못에서 생긴다는 내용을 담은「사폐변(私蔽辨)」이란 글에서 드러난다. 주5)그러므로 위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머지 일분, 즉 자연의 본성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부분도 「사폐변」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추사의 생각은 그의 간찰이나 제발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추사의 글도 위의 내용과 유사한 맥락의 예술 정신이 드러난다. 요즘 사람들이 써낸 글씨를 보니 다 능히 ‘허화’하지 못하고 사뭇 악착한 뜻만 많아서 별로 나아간 경지가 없어서 한탄스런 일이다. 글씨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에 있는 것이니 이는 인력으로 나아갈 바가 아니요, 반드시 일종의 천품을 갖추어야만 능한 것이며, 심지어 법이 갖추어지고 기가 이르러 가면 한 경지가 조금 부족하다 해도 점차로 정진되어 스스로 가고자 아니해도 곧장 뼈를 뚫고 밑바닥을 통하는 수가 있기 마련이라네. 주6) 위 글에서, 점차로 정진하면 가고자 아니해도 뼈를 뚫고 밑바닥과 통한다는 말은 추사가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허화’라는 말도 ‘성중천’이란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성중천’이나 ‘허화’에서 드러나는 그의 예술관은 <불기심란도>의 제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기심란도>는 추사의 난 그림 중 《난맹첩》과 <불이선란도>의 사이에서 그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 글씨체가 <세한도>의 제발과 매우 유사하여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아들에게 주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난을 칠 때에는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안으로 마음을 살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후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쳐다보고 모든 사람이 지적하니 두렵지 아니한가. 이 작은 그림도 반드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비로소 손을 델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될 것이다. 주7) 이 글에서 추사는 난을 칠 때 무엇보다 거짓을 경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불이선란도> 제시의 첫 행의 의미도 다시 보게 된다. ‘부작란화 이십년’은 말 그대로 20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면서도, 또한『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부작’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술이부작은 “나는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술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꾸미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의미로 공자가 한 말이다. 이처럼 추사는 난을 그릴 때 어디까지나 ‘자기기인(自欺欺人)’, 즉 그림을 그릴 때 꾸밈을 경계하였고, 이를 평생 실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래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요사이 붓끝에만 먹물을 묻혀 쓰는 붓질과 먹을 아낌으로써 원나라 사람들이 거칠고 간략한 것처럼 억지로 꾸며내려고 하지만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후략)주8) 이 뿐 만 아니라 추사는 다른 그림을 논하면서도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예술적 형식은 그의 삶의 시기별로 크게 달라지지만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는 예술 정신을 평생 일관되게 실천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이선란도> 제시는 난초를 꾸며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비로소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은 자족한 세계를 그리게 되었다는 자부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유마불이선 앞의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이란 구절에서도 드러난다.주9) 그러므로 <불이선란도> 제시 끝부분의 ‘유마의 불이선’도 평생 자신이 추구한 예술관의 집약한 선(禪)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불이선은 ‘불이법문’에서 유래한 말로 그 출처는 <유마경維摩詰所說經>‘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이다. 유마는 출가하지 않은 석가모니의 재가 제자로 출가하지 않고도 살고 죽는 것과 있고 없음이 둘이 아님(不二)을 침묵으로 입증한 사람이다. 이런 차원에서<불이선란도>는 ‘상(相)과 색(色)이 공(空)인 세계이다. 둘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닌 것도 아닌 것이며, 하나의 공상(空相)에 의하여 그 평등의식마저 유마는 부정하였다. 그래서 이 제시에서 추사는 자신을 유마에 비유한 것이다. 추사는 사대부였지만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선승과 교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들에게 보낸 서신과 게송도 다수 남길 정도였다. 특히 만년에는 봉은사라는 절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한다. 아래 글은 추사가 불교와 선에 대해 말한 부분이다. 그림의 이치는 선과 통하네. 마힐 왕유 같은 사람은 그림으로 삼매의 경지에 들었고, 노릉가와 거연, 관휴 같은 무리들은 모두 정신으로 통달하여 유희했네. 그 요결에 이르기를 “길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물은 흐를 듯 흐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선지의 오묘한 경지일세(후략) 주10) 이처럼 추사는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그래서 <불이선란도>에서도 자신이 도달한 경지를 불교의 선적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인 ‘불이선’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불이선이란 말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세계를 말한다. 이는 불이선란도와 제시와 제발에서 유 불 선을 융합하는 통섭성이 볼 수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유교적 상징인 사군자를 그린 것과 제시에 드러나는 ‘부작’의 참의미와 선객노인의 선(仙)은 유교와 도교를 아우른 추사의 통섭적인 서화관이 잘 드러나며, 이 또한 불이의 세계다. 이처럼 ‘불이선’은 모든 이질적인 글씨를 통섭하여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또한 ‘불이선’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일관성 있게 구현하면서도 추사가 평생 연구한 비학碑學과 첩학帖學을 혼융한 성과를 선(禪)적 깨달음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불이선란도>는 ‘법고’와 ‘창신(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라는 어쩌면 모순적이기도 한, 두 가지 목적을 ‘불이’, 즉 둘이 아니라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융합된 그림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그림 속 1엽 난 잎을 경계로 그 아래 여백에 쓴 두 번째 발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른쪽 중간의 두 번째 발문은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의 기이한 글자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쓰다.(以草隸奇字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구竟又題” <古硯齋> 초서와 예서를 혼융한 붓질로 난초를 쳤다는 말이다. 예서와 초서는 엄연히 다른 방식의 글씨체다. 그런데 상이한 글씨체를 혼융하여 그림을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리라 말한 것이다. 사실 ‘초예기자지법’은 문인화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동기창(1555~1636)이 제시한 말이지만 추사는 자신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노라고 자부한 것이다. 예컨대 추사가 심희순(1819~ ?)에게 보낸 편지글에서도 이러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근일에 서법이 모두 급하고 촉박한 길로만 치달아서 항상 즐겁게 여겨지지 않더니만 지금 영감의 글씨를 보니, 첫째는 사군자의 너그럽고 가없는 도량이 팔목 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요. 둘째로는 순전히 천기로써 움직여 필묵의 혜경 밖에 있어 일점의 속된 기운이나 일호의 기교가 없는 점이라 이 때문에 항상 대해도 싫증나지 않는 거외다. 남들이 보면 이를 만필이나 희묵으로 여겨 여러 말이 곁에서 일어날 것이나 교계하고 변명할 거리도 되지 않으니, 속된 눈들이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주11) 위 글의 핵심은 특히 ‘천기로서 움직여 필묵의 혜경(법식) 밖에 있어 일점의 속된 기운이나 일호의 기교가 없는 점이라…’라는 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기’는 불이선란도의 성중천과 뜻이 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불이선란도>의 제시와 제발 및 그림에 대한 품평에 나타난 예를 종합할 때 속된 꾸밈없이 ‘천진’과 ‘자유’의 정신으로 걸림 없는 통섭의 차원에 도달했다는 자긍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주12) 추사 서화세계의 변천과 특색 추사 김정희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추사는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부터 온갖 풍상(風霜)을 겪는 삶을 살았다. 특히 장년기 이후에는 세도다툼에 휘말려 여러 번 가화(家禍)를 겪고 문초까지 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제주에서 8년 3개월(55세~63세 : 1840년, 헌종 6년~1848년, 헌종 14년), 함경도 북청에서 약 1년(66세~67세 : 1851년, 철종 2년~1852년, 철종 3년)등 장기간에 걸쳐 두 번이나 기약 없는 유배생활을 했다. 그리고 67세때인 1852년부터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인근 봉은사를 오가며 오랜 벗들과의 교류 및 시서화에 매진하다 71세 때인 185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의 변천과정은 이러한 생애의 굴곡을 반영하며, 특히 과천시절 이후 더욱 달라졌다. 이를 통해 추사의 서화세계는 이러한 역경과 정신적 지평의 확장 속에서 변화되고 승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추사의 학문과 서화의 결정적 전기는 25세 무렵의 청나라 연행(燕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추사는 이 연행을 통해 조선시대에 주로 성행한 학문이나 글씨가 왜곡되거나 편향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귀국하여 6년 뒤 완원의 학설을 수용하여「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을 썼다. 이후 그의 평생은 실제 사건이나 사물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학문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추사는 글씨의 경우 왕희지체 이전의 글씨를 추구하였고, 결국 생애 만년에 이르러 미려한 꾸밈과는 거리가 먼 뼈대만 남은 것 같은 완강하고 또렷한 글씨를 쓰게 된 것이다. 추사 만년의 글씨가 간결하면서도 마치 나뭇가지로 먹물을 찍어 쓴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추사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역시 추사가 금석학에 바탕을 둔 고증학적 학문을 통해 동양의 서예역사나 그림에 대해 통관할 수 있는 학문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증학을 통해 글씨의 꾸밈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다르며 부차적이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속이게 되는 짓거리임을 간파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여러 글에서 조선의 전통적 글씨에 대해 편벽되고 고루하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의 학문관을 스스로 말한 고백으로 집약하면, 제주에서 자신의 작은 초상화에다 생애를 술회하며 쓴 글로 “담계 옹방강은 ‘옛 경을 좋아 한다’ 하였고, 운대 완원은 ‘남이 한 말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두 분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 드러냈다.” 주13)는 말이다. 그리고 “법은 사람마다 이어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해야 되는 것” 주14)이라는 말은 추사의 개별성 짙은 서화관을 잘 알게 한다. 추사가 평생 일관되게 주장한 서화관은 이른바‘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이다. 그림이든 글씨든 심오한 학문적 소양과 부단한 공부를 바탕으로‘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추사의 그림을 두고 학문에 입각한 관념미를 구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추사에게 서화는 성리학의 공부방식인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길이었으며, 이는 몸과 일로써 체험하는 것이었다. <불기심란도>와 제발과 <불이선란도> 제시의 핵심어인 ‘성중천’이나 ‘불이선’이란 말에 드러나듯, 추사는 만년에 이르러서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체적 감응과 호흡에서 우러나온 서화세계를 지향했다. 이러한 서화관은 한자 문명권 특유의 세계관이나 추사의 여러 글에서 확인 할 수 있듯, 만물의 본질을 기의 흐름과 변화로 보는 세계관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의 흐름은 현실적 상황과 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구현된다. 똑 같은 글씨를 쓰고 똑 같은 그림을 그려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언어를 빌리면 ‘기’란 나타난 현상 너머의 실재, 즉 ‘리얼리티’를 말하는데 한자 문명권에서는 변화 자체가 ‘리얼리티’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기의 흐름을 변화로 보여줄 수 있는 개성적 필력이며, 이는 저마다의 인간적 기질과 삶의 체험의 진폭에 따라 다르게 구현된다. 추사가 만년에 도달한 서화세계의 진면목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불이선란도>는 물론 만년의 글씨를 대표하는 <대팽두부>같은 일체의 장식적 꾸밈이나 군더더기 없는 대련 글씨에서 확인할 수 있다.주15) 이처럼 추사의 서화는 철저하게 개별성을 띤다는 것이다. 결국 추사의 삶은 지적 정직성을 중시한 고증학적 학문에 바탕을 둔 정신의 실천, 즉 스스로도 남을 속이지 않겠다는 정신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일관된 것이었다. 추사가 어느 글에서, 『주역』의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그 올바름을 잃지 않는다’를 언급한 것은 곧 자신의 곧은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추사의 의지는 오랜 기간 변방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세상과의 단절 속에 승화되며 그것은 그 모든 것이 현재 속에 융합되는 아닌 불이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걸림없는 삶을 살고자 했다. 주16) 이 때문에 그의 서화세계는 그만큼 독보적인 권위를 갖게 되어 당대 예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가 일으킨 ‘완당(김정희의 또 다른 호)바람’이 오늘의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 뻗고 자라날 그림의 꽃나무들을 모진 바람으로 꺾어 버렸으며, 그래서 진경산수화 등 사실주의 화풍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겸재의 진경산수화나 단원의 풍속화는 당대의 문화적 풍토 속에서 성취한 개별성이듯, 추사의 서화세계는 ‘추사’라는 인물이 당대를 살면서 겪어야만 했던 체험과 혈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사의 서화세계가 ‘사의(寫意)’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사(形似)’를 중시하는 ‘사실주의’를 퇴조시켰다는 시각도 문제가 있다. 구체적 대상을 정교하게 그린 그림들도 알고 보면 대상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일부 속성만을 표현한다. 꽃 한 송이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그려도, 즉 형사에 치중하여도 실재 대상인 꽃과는 엄연히 다른 대상일 수밖에 없다면 ‘사실주의’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추사로 인해 사실주의가 퇴조되었다는 말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맺음말 <불이선란도>는 추사 김정희가 20년 만에 친 한 폭의 난이다. 추사는 이 난을 성중천이라 하고, 또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라 했다. 불이선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을 넘어선 경지를 말한다. 평생 굴곡 많은 인생 끝에 추사는 만년에 이르러 불이의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불이선란도>는 유희하는 듯 담백하다. 이 그림은 또한 간결하면서도 변화가 많고 고졸하면서도 참신한 느낌을 주는데, 추사의 앞선 시기의 작품과 크게 다른 점이다. 연행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온갖 역경 속에 살면서도 추사는 실사구시의 삶을 살았으며, 글씨와 그림은 자신의 이러한 뜻을 펼치는 세계였다. 그러므로 추사의 난 그림은 실제의 난을 모사한 것도 관념적인 선의 표현도 아니며, 그야말로 먹으로 그린 ‘묵란’이다. 그것은 체현된 기의 밀도의 흔적이며 변화를 야기하는 힘이다. 그래서 이러한 기의 흐름은 그만큼 감응적이고 촉감적인 변이의 공간을 형성 한다. 특히 추사는 만년에 이르러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불이의 세계에 이르며, 그래서 이 무렵의 글씨와 그림은 변화의 흐름인 기(氣)의 리듬만이 담백하고도 강렬한 밀도로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 만년의 서화는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이 빚은 삶의 흔적이며, 이런 차원에서 또한 ‘공’과 다르지 않은 세계인 것이다. 2009년 4월 26일 도 병 훈 주1)金正喜 著, 崔完秀 譯,『秋史集』, 현암사, 1976, p.313. 「與佑兒」 312~314중에서 부분 발췌 …殊可憤荀寫蘭、 不得過三四紙。 神氣之相湊、境遇之相融、… 주2)金正喜 著, 崔完秀 譯, 앞의 책, p.160.…余推鹵甚、 今又頹唐無餘、 鸞飄鳳泊、不作已二十年餘。…「題石坡蘭卷)」중 부분발췌 주3)金正喜 著, 崔完秀 譯, 앞의 책, pp.158~159 「題石坡蘭卷)」중 부분발췌 주4) 추사는 阮堂全集 卷一의 「사폐변」에서“생양의 도는 욕에 있고, 감통의 도는 정에 있는데, 사람이 각각 그 정을 얻고 욕을 이루되, 도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사폐변」은 청대의 학자인 대진(1723~1777)의 『맹자자의소증』의 내용을 수용하여 저술한 것으로, 사람의 근심거리를 사(사사로움)과 폐(가림)으로 보며, 사사로움은 욕구의 잘못에서 가림은 앎의 잘못에서 생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주5)金正喜 著, 崔完秀 譯,앞의 책, pp.158~159 「題石坡蘭卷)」중 부분발췌 주6)阮堂全集, 卷四, 書牘, 見作書者, 皆不能虛和, 軏多齪齪之意, 殊無進境可歎, 此書之最可貴者, 卽在虛和處, 此非人力可到, 必具一種天品, 乃能, 至如法備氣到一境, 差欠而漸次精進, 自有不欲行而直詣透骨徹底處耳。 주7)金正喜 著, 崔完秀 譯, 앞의 책, p.312. 주8)澗松美術館, 『秋史精華』, 知識産業社, 1983, p.234. 近以乾筆儉墨,强作元人荒寒簡率者, 皆自欺而欺人… 주9) 이 구절은 청의 서화의 대가인 板橋 鄭燮(1691~1764)의 시 구절 ‘山中覓覓復尋尋’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 구절을 주제로 한 <山中覓尋>이란 난 그림이 《난맹첩》에 전한다. 간송문화 제71호,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6년, 185쪽 참조 주10) 阮堂全集, 卷七, 雜著, 「示云句」 畵理通禪 如王摩詰 畵入三昧 有若盧楞伽巨然貫休之徒 皆神通遊戱 其訣云 路欲斷而不斷 水欲流而不流者 是禪旨之奧妙也… 주11) 阮堂全集, 卷四, 書牘, 近日書法進趍齪齪一路 常所不樂 今見令書 第一 是士君子襟度 坦無厓涘 有流出於腕底者 第二是純而天機行之 在筆墨蹊逕之外 無一點塵俗氣 無一毫機巧意 所以常欲對之而不厭 人之見者 以爲是漫筆戱墨 中咻旁起 便不足較辨也 俗眼鳥得知之也… 주12) 왼쪽 아래의 세 번째 발문은 ‘애당초 달준에게 주려고 아무렇게나 그린 것이다. 다만 이런 그림은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 仙客老人.” 示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樂文天下士 金正喜印 추사의 문집에 남아 있는 서찰, 시들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추사는 1853년 반대파의 탄핵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서 달준이라는 평민 출신의 총각을 만난 뒤 시동처럼 부렸다고 한다. 달준은 먹을 갈아주어서 ‘먹동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추사가 귀양에서 돌아와 과천에 은거할 때도 추사를 모셨다고 한다. 왼쪽 아래 안쪽의 네 번째 발문은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다.(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이는 소산이 달준에게 준 그림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정말 가소롭고 우습구나.” 라는 익살스런 제발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화의 세세한 기록은 이 그림에 얽힌 생생한 사연을 알게 하여 흥미를 더한다. 또한 이 그림에는 지나치게 많을 정도로 여러 개의 낙관이 찍혀 있는데, 이 중 추사가 직접 찍은 것은 첫 번째 제발의 ‘만향’밑의 추사, 두 번째 제발 끝의 고연재, 네 번째 발문 밑의 낙문천하지사, 김정희인 이며, 나머지는 후대의 소장가들이 찍은 것이다. 주13)覃溪云, 嗜古經, 芸臺云, 不肯人云亦云, 兩公之言, 盡吾平生(金正喜, 『阮堂全集』,卷六「제발(題跋)」, 또 제주에 있을 때(又-在濟州時) 주14)阮堂全集, 卷八, 雜識, 法可以人人傳 精神興會 則人人所自致 주15)<대팽두부>는 추사의 몰년인 1856년, 71세때 쓴 마지막 대련 글씨로 전한다. 대팽두부의 원문은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현세적 내용으로 글씨도 이와 걸맞게 일체 군더더기가 없는 형식을 보여준다. 주16)현대의 선적 깨달음을 대표하는 선승인 성철이 평생 가장 강조한 말이 불기자심(不欺自心,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뜻임)이었다. 이로 보아 추사의 만년의 예술관이 불교의 선적 깨달음과도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93 no image 니체 사상의 주요 단면
도병훈
6574 2009-03-06
니체 사상의 주요 단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그리스시대 이래 이어온 서구문명의 신념과 인식체계를 가차 없이 허물어뜨렸다. 그의 사상은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에 의해 다시 해석되면서 삶과 의식의 문제를 다루는 단서가 된다. 그런데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도 많은 대중들에게 니체사상의 참뜻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사상가가 남긴 저작 몇 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큰 파장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이는 니체가 고전문헌 학자로서 그리스 문명부터 서구 문명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고찰할 수 있었으며, 그 이전에 삶과 인식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는 예술적 감성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고교 재학시절에 소설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가 쓴 어떤 책에서 니체 사상을 처음 접한 후, 대학교 2학년 때 교양과목인 서양철학시간을 통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데,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치의 일대 전환이 일어난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수업은 한 학기 동안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로크, 칸트, 헤겔, 니체, 슈펭글러 등의 순으로 한 사람씩 발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나는 이 중 헤겔의 역사철학을 맡아서 발표했는데, 그의 역사철학은 변증법의 논리와 이성을 절대시하는 관점으로 세계사를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니체에 이르러서는 당시 박상규 철학교수가 발표수업 이후 다른 철학자의 사상을 공부할 때와 달리 강의식이 아니라 문장으로 적을 수 있도록 천천히 구술해 주었다. 그로부터 십 여 년 후 니체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특히 미셀 푸코와 질 들뢰즈 관련 책들을 보면서, 그 때의 수업이 니체사상의 심장부로 곧바로 진입한 공부였음을 알게 되었다.(*당시 박 교수가 구술해 준 니체 사상 부분은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니체 사상의 핵심을 잘 집약한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니체를 만나기 전까지 인간은 이성적 존재였고, 선은 악은 분명한 실체였으며, 비도덕과 도덕도 별개였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이며,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니체를 만난 후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생물학적) 존재이며, 선과 악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었으며, 도덕도 인간을 가축처럼 길들인 의식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절대적 진리도 지역성이 반영된 특수한 가치임을 알게 되었다. 니체의 문제의식은 서구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인식체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유럽의 전통적 도덕을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성립된 가치로 보았다. 니체는 19세기 후반을 살면서 당대에 대해 도덕적, 종교적 신념의 절대성은 이미 실증주의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는 시대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삶은 원래 무목적·무의미하며, 따라서 니힐리즘, 즉 허무주의의 도래는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사람들이 이러한 무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삶에 의미를 주는 대리 절대자를 찾으리라 예견하였다. 그 예로 니체는 당시 대두된 민족주의를 꼽으면서 이러한 이념이 민족국가에서 초월적 가치와 목적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그의 통찰은 이후 세계사의 주요 단면을 예견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삶을 그는 수동적 니힐리즘이란 용어로 설명한 것이다. 니힐리즘은 무(無)를 뜻하는 라틴어 ‘니힐Nihil’이 어원이며,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원래 불교용어인데, 서구에서는 니체나 도스트예프스키 등에 의해 철학적 개념으로 도입되었다. 니체는 니힐리즘을 다양하게 정의하였지만 크게 수동적 니힐리즘과 능동적 니힐리즘으로 구분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나 도덕을 수동적 니힐리즘이라 비판하면서, 일체의 기성가치를 허물어뜨려야 한다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주장하였다. 능동적 니힐리즘은 흔히 갖고 있는 사람들의 허무주의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무無를 긍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모색하는 실존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데, 바로 이러한 주장이 니체 사상의 큰 줄기를 형성한다. 요컨대 니체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통해 신, 진리, 힘, 선, 과학 등에 의거하여 불변의 실체(보편성)을 상정하는 경향을 비판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의 본바탕에는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을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힘(*흔히 ’권력‘이란 용어로 번역되지만, 이 말은 정치적 의미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을 향한 의지’로 본 니체의 새로운 인간관이 있다. 그러므로 니체가 도전으로 삼은 중심과제는 신념이나 진리에 대한 통념이었다. 니체에게 종교적 신념이나 진리란 인간이 역사 속에서 형성해온 가치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처럼 니체는 종교·철학·도덕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관점주의(perspectivism)에 대한 비판, 영원 회귀(이 말은 “의미와 목표도 없는, 그렇지만 피할 수 없이 회귀하는, 무에 이르는 피날레도 없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존”이라는 의미로, 삶의 매순간과 모든 순간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되는 것을 뜻함), 위버멘쉬(*이 말이 ‘초인超人’으로 번역되기도 했지만 지상의 삶에 대한 초월성을 거부한 니체 사상의 특성상 적절치 못한 용어임)를 집약되는 사상을 추구하였다. 이 중 관점주의란 우리가 갖는 지식이 1점 투시원근법처럼 특정한 관점에 의존한다고 보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순수한 지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 없는 지식은 없다고 생각했다. 전 방위에서 동시적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듯, 니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관점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니체의 사상도 또 하나의 주관적 관점주의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적어도 니체의 사상은 우리의 모든 관점이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가치(니체의 말로 하자면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 있을 뿐이다)임을 알게 하며, 그러므로 좀 더 메타적인 시각을 지향해야함을 자각하게 한다. 니체는 자신의 저작들을 통해 인간의 지각과 직관이 미리 정해진 관념이나 규범적 진리 아래 종속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니체가 그의 저작을 통해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예술의 힘이었다. 예술은 그 특성상 개념과 가치에 동화되지 않은 채,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의 얼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니체는 예술에 대해 개념 체계들이 갖는 은유적 기원을 상기시키고 이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하는 영역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니체에게 예술이란 선과 악 너머 존재하는 힘이며, 예술가란 미적 창조자가 아니라 ‘삶’을 드러내는 매개자였다. 니체는 삶이란 무엇인가, 또는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였으며, 대안을 제시하였다. 니체의 저서들은 수 년 전 국내에서도 전집으로 번역되었으며, 다양하면서도 심도 있는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석 책도 다른 사상가들에 비해 많은 편이다. 우리는 니체를 통해 객관적 진리로 알고 있는 개념체계가 특정시기의 사람들에게 강요된 가치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평가를 통해 가치가 창조됨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삶과 의식에 대한 니체의 근본적 다시보기는 우리가 자발적이고도 열린 삶을 사는데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문제는 삶의 가치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자주성인 것이다. 2009년 3월 6일 도 병 훈
92 no image 삶의 다양성은 왜 필요한가?
도병훈
7716 2009-03-02
* 2009년도 서울대 정시모집 논술고사(인문) 문항 중에서는 '삶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짧은 제시문을 제시 한후 이에 대한 논리 구성을 보완하기 위해 삶의 다양성이 필요한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1,800±100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이에 반하는 사례를 문학, 예술, 과학, 역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 활용하시오.)라는 논제가 출제되었다. 이번 논술은 그 동안 대학에서 출제된 전형적인 논술과 다른 방식이었다. 아래 글은 이 논술에 대한 필자의 출제의도 분석과 예시답안입니다. <출제의도> 이번 서울대 논술은 대학에 논술문제가 출제된 이래 인문계 논술의 일반적 경향이었던 비교적 장문의 제시문을 제시한 후 출제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논술이다. 제시문은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삶의 다양성’을 설명한 부분이다. 제시문에서는 삶의 다양성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당위성의 근거로 문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지 ‘예’와 ‘반례’를 들도록 하여 학생들이 다양한 영역으로 사고를 전개시켜 이를 통합적으로 구성하라는 것이다. 이 문항의 논제는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 여부와 그 근거에 따라 다양한 답안이 나올 수 있다. 서울대는 문항 해설에서 학생들의 답안에서는 삶의 다양성에 대한 단순한 사례의 나열이 아니라, 이 사례를 활용한 논증방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를 기대한다고 하고 사례들은 문학, 예술, 과학, 역사 등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있을 수 있으며, 사례와 주장의 적합성이 중요하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삶의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라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례를 제시하고, 그 반례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반례에 대한 논의, 즉 ‘반박 잠재우기’다. 논술, 즉 ‘논증적 글쓰기’의 관건은 논거(전제)의 ‘논증적 정합성’에 달려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리 반박을 예상한 논증을 함으로써 더욱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예시답안> 근대이후 이성에 기초를 합리화 과정은 인간이 중세적 무지와 미신에서 벗어나는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대상을 수치화, 계량화하는 합리적 과정은 획일적인 질서와 체계 속에 인간을 예속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근대문명의 부정적 측면은 근대를 지배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 기준이 인간 스스로 형성해왔음을 자각하게 한다. 삶을 획일화 시키는 동일성 보다 다양한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삶의 다양성은 저마다 자신에 맞는 삶의 가치, 즉 ‘차이’를 긍정할 때 성립한다. 김지하는 <새봄9>에서 ‘벚꽃 지는걸 보니/푸른 솔이 좋아/푸른 솔 좋아하다보니/벚꽃마저 좋아’라고 읊는다. 푸른 솔이 변함없어서 좋았는데 지금은 벚꽃도 같이 있으니까 좋다는 내용이다. 시인이 벚꽃을 좋아하게 된 까닭은 사철 푸르기 만한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같이 있어야 조화를 이루듯이, 이 시는 사람도 서로 다른 삶이 다양하게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근현대미술사를 통해서도 삶의 다양성을 자각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마네는 틀에 박힌 고전적 구도와 채색법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인상주의 화가들은 물론 이후의 화가들에게 다양한 표현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들은 각기 자신만의 어법으로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을 뜻하며, 이러한 개성적 표현의 다양성이 우리의 삶과 문화를 다채롭게 한다. 현대과학이론인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선택이며, 진화가 일어나려면 유전자 재조합과 돌연변이 등 유전적 변이에 의한 우연적인 생식이 있어야 한다. 모든 개체가 동일하다면 자연선택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계에서 여러 종들이 멸종하기도 하고, 진화하기도 하는 것은 유전자와 변이와 자연선택의 결과이며, 이러한 진화의 원동력은 유전적 다양성에 있다. 우리 인간도 이러한 생물학적 존재이므로 삶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며, 나아가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다양성은 비효율적이고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실용적 효용성이나 획일적 질서를 강요한 사례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삶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문명은 퇴보하며 결국 사라짐을 숱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독일,스페인 등 극단적 파시즘에 지배당한 나라들은 하나 같이 패망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지 오웰의 미래소설인 <1984년>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개개인의 개성적 삶, 즉 삶의 다양성이 사라진 기계화되고 도구화된 인간사회를 보여준다. 특히 <1984년>의 경우, 언어와 역사가 철저히 통제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박탈된 전체주의 사회를 드러낸다. 그래서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개인이 어떻게 파멸해 가는가를 알게 한다. 무지개가 다양한 색깔을 띠기에 아름답듯, 역사적으로도 다양성이 존중된 시대가 창조적인 문화를 꽃 피웠다. 우리는 특히 문학이나 예술세계, 그리고 현대과학을 통해 다양성이 얼마나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지 알 수 있다. 반면에 삶의 다양성이 결여되면, 그만큼 삶이 획일화되므로 삶의 질이 퇴보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제각기 다양한 색깔을 지닌 창의적인 소수자들이 오히려 귀한 존재인 것이다. 결국 삶의 다양성을 긍정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삶의 다양성은 반드시 필요할 뿐 만 아니라 존중되어야 한다. 2009년 3월 1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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