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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7 (17: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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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다시 탐색하기  


1.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7일까지 9일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전>에 맞추어 일본의 덴리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안견安堅(1400?~1470?)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전시되었다. 주1)
전시 마지막 날, 약 4시간의 줄서기와 기다림 끝에 전시장 깊숙한 안쪽의 두꺼운 유리 진열대 속에 길게 놓여 있는 <몽유도원도>를 감상할 수 있었지만 연이어 수많은 관람객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오래 볼 수는 없었다.
이렇게나마 <몽유도원도>를 보게 된 까닭은 전시 후 소장처인 일본으로 돌아가면 한국에 다시 올 수 없다는 보도가 있었고, 주2)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림 중 도원桃源, 그 중에서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복숭아꽃잎 부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몽유도원도>감상은 지난 1996년 호암미술관에 이어 두 번째였다. 주3) 당시에는 전시장이 한적할 정도여서 혼자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 격세지감을 느꼈다. 물론 주최 측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그간 <몽유도원도>에 대한 연구는 지난 수 십 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서구의 경우 빈센트 반 고흐의 ‘낡은 구두’를 그린 그림 한 점만 하더라도 미술사학자들이나, 비평가, 철학자 등에 의해 다양하면서도 심도 있게 분석된 글이 존재한다. 근대이후 전개된  미적 가치의 형성, 그리고 이에 대한 회의나 다양한 예술철학의 양상, 그리고 저자에 따라 다른 여러 미술사를 통해 알 수 있듯 미적, 예술적 가치는 절대적, 보편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몽유도원도>도 새로운 관점의 비평적 담론에 의해 그 특성이 새롭게 사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이 서른 살 되던 해인 1447년(세종 29) 여름에 그린 그림이다. 매우 귀한 조선 초기 그림으로 제작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산수화인 것이다.  
이 그림은 비단(명주)에 먹과 채색으로 그렸으며, 가로 106.2㎝, 세로 38.6㎝ 크기이지만, 글씨까지 두루마리 2개로 이뤄진 작품 전체를 펼쳐놓으면 길이가 20m에 달한다. 주4)
안평대군이 직접 그림 제작의 경위를 쓴 제기題記에 의하면, 이 그림은 자신이 꿈속에 본 도원에 찾아 든 감회를 안견에게 그리도록 하여 3일 만에 완성하였다. 또한 <몽유도원도>에는 그의 시 한수를 비롯해,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김종서, 서거정, 정인지 등 당대 20여 명의 문사들이 친필로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의 시 ․ 문 ․ 서 ․ 화가 융합된 작품으로서 당대를 이해하는 종합적인 ‘텍스트’이다.

먼저 <몽유도원도>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림을 보는 방향이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진입공간과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단절성이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의 도원까지 파노라마처럼 그린 그림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 도잠(365?~427,자가 연명淵明이므로 흔히 도연명이라 한다)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럼에도, ‘도연명의 「도화원기」가 도가적인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준다면,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은 텅 비어 있어 어딘가 모호한 공간으로 설정’주5)되어 있는 차이점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몽유도원도>를 보고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로 단정하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적 이해이다. 송의 소식이 왕진경의 <연강첩장도>를 노래한 시에서 “도화유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무릉이 어찌 신선만을 사는 곳이리오.” 주6) 라고 말했듯,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동서의 세계관적 차이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단서가 된다. 이는 주로 공간 또는 장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동서양의 정신(spirit)적 차이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에토스(ethos)적 이성과 파토스(pathos)적 감정, 또는 ‘현실’과 ‘이상’의 이원론적 구분이 확립되면서, 무엇보다 중세 이후 스콜라 철학에서 정점을 이루는 헤브라이즘의 영향으로 근대이전까지 서구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확연히 구분되는 의식이 형성된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핵심인 직관(intuitus)적 신비주의에 의하면 정신은 물질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오직 신의 은총의 상태에서 또는 초자연적 대리자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이처럼 ‘공간(space)’이 ‘자리(place)’의 복합체가 아닌 '사물 그 자체(thing-in-itself)', 영원히 연장되는 비물질적 허공으로 인식되면서 종교적 초월성이 두드러지는 공간적 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의식적 특성은 근대이후 합리적 세계인식, 그리고 이러한 합리적 세계인식을 넘어서고자 한 낭만주의적 의식에 의해 비로소 크게 달라진다. 서구에서는 근대에 이르러 워즈워드 식으로 표현해서 정신이 마음과 물질이 혼융混融된 차원이 되며, 그래서 ‘풀 속에 빛’, 또는 ‘꽃 속에 영광’을 찾게 되는 것이다. 주7)    

그러나 동양에서는 위진 남북조 시대 이후 특히 당, 송대  시기에 이르러, 세계란 마음과 물질이 혼융된 오감으로 ‘시간 안’에서 체험하는 자리, 즉 ‘장소’임을 이 시기의 문학(시)과 회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의식의 발전에 있어 미술의 기능’이란 부제의 『도상과 사상』이란 저서를 남긴 허버트 리트는 동 서양의 공간 및 장소 인식의 차이로 인해 저마다 다른 미술로 이행되었음을 송대의 회화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송대의 회화는 송대의 시와 마찬가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정교한 형태의 조화-산과 안개, 강과 나무, 새와 나뭇가지, 꽃과 기하, 남자와 여자, 음陰과 양陽 등, 상반되지만 상보적相補的인 원칙이 요구되는 상호작용-에 대한 점증하는 의식의 표현이다. 형식이 허용한다면 사상도 이 형식적 변증 안으로 틈입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이란 사상을 표현하려 들지 않았으며, 그것은 강렬한 범신적汎神的 인식의 조형의 구현이었다. 송대 문화를 통해 송대의 감수성은 실재에의 새로운 암시, 워즈워드 의미에서 보자면 또한 영원성에의 새로운 암시를 인식하게 되고 있었던 것이다. 주8)
      
<몽유도원도>는 이러한 송대 회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회화이다. 송대는 중국 역사상 수묵회화의 최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화가들이 훌륭한 그림들을 그린 시기이며, 그 대표적인 화가로는 북송에는 이성李成과 곽희郭熙, 남송에는 마원馬遠과 하규夏珪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화풍에는 당시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으며,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수묵화법을 통해 이를 구현하고자 한다. 주9) 안견의 그림은 바로 이 이곽파 화풍과 마하 화풍 등을 융합한 화풍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곽파 화풍의 경우 사물을 묘사할 때 그 윤곽선이 계속 이어지는 필법, 산의 아래 부분이 밝고 위가 어두운 조광 효과, 게 발톱을 그린 듯한 해조묘蟹爪描를 연상시켜 주는 나뭇가지 그리는 법, 윤곽선을 그리는 구륵법, 산을 뭉게구름처럼 표현한 운두준 등을 꼽는다. 그간의 연구 성과에서 밝혀지고 있듯,  <몽유도원도>와 전칭傳稱  안견 그림으로 전해지는 <사시팔경도> 중 ‘늦은 봄’ 그림에서 이러한 영향을 볼 수 있다.
또한 <몽유도원도>는 이곽파 중 특히 곽희의 영향으로 화면을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경군景群별로 고원, 평원, 심원의 삼원법이 공존한다. 이러한 안견의 화풍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며, 일본에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마하파 화풍은 주로 구도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송대 회화의 영향이 보이면서도 또 다른 독자성을 드러낸다. 첫째, 그림의 구성을 보면 몇 무더기의 흩어진 듯한 경물들이 집합하여 하나의 조화된 총체를 이루고 있다. 즉, 중국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기성과는 차이가 큰 것이다. 둘째, 공간개념이 지극히 확대지향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즉, 옹색하고 좁고 답답한 공간을 지양하고 넓고 시원한 공간을 추구했던 것이다. 셋째, 바위나 산 자체의 형태에서보다는 수직과 수평의 대조 및 사선 운동의 효율적인 표현을 통해 웅장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 사실이다. 이 점도 안견이 크게 참조했던 북송대 거비파巨碑派 화풍에서 주산을 웅장하고 경외롭게 표현함으로써 기념비적 효과를 거두고자 했던 경향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넷째, 형태를 약간씩 평면화 또는 단순화시킴으로써 환상적 느낌을 고조시키고 있다. 주10) 이런 관점에서 <몽유도원도>가 매우 복합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시대적, 역사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몽유도원도>는 중국의 그림과 다른 독자성이 보이는데 이는 역시 안견이 이 땅에서 경험한 풍토적 특성과 작가의 기질적 개성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몽유도원도>와 유사한 공간을 이 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난 90년대 후반부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탐색하면서 그 현장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느낀 사실이다. 겸재가 50대 후반 청하 현감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내연산의 보경사 계곡에 있는 <내연삼용추도>를 그렸는데, 바로 이 계곡이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풍경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계곡이 있는 내연산은 멀리서 보면 그저 토산처럼 보이지만 계곡의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상당부분 <몽유도원도>와 흡사한 기이한 풍경을 체험할 수 있다. 특히 계곡의 진입공간은 <몽유도원도>의 그림 왼쪽 계곡부분과 유사하고, 내연산 12폭포중 제1폭포인 상생폭포도 <몽유도원도> 중앙부분의 두 갈래 폭포와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겸재가 그린 삼용추 폭포를 지나 도원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실제로 다시 공간이 넓어져 몇 집 있는 마을도 있다. 물론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또한 현재로서는 안견의 고향이 충남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러한 장소적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화가의 발자취를 통해서도 이런 실경을 그린 듯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실에서, 도원의 세계가 결코 현실과 무관한 이상 세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몽유도원도>의 주된 특색은 동시대 다른 나라나 다른 작가와 차별화된 예술적 성취, 즉 안견의 회화 어법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몽유도원도>는 동양의 산수화에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림의 크기에 비해 거의 무한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다양한 선적 변화로 이루어져 있다. 부분마다 무궁무진한 변화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적 과학적 용어를 빌리면 <몽유도원도>의 어법은 비선형, 또는 프랙털 기호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인 필치는 물 흐르듯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필치를 구사하여 선묘 위주 필법의 특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그림이 비교적 작은 그림임에도 매우 큰 대작처럼 느껴지고 볼수록 매력이 있는 것은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물과 기괴한 바위의 대조, 분방한 필치와 극히 정묘한 세부묘사의 공존 등도 한자 문명권은 물론 한국 전통회화사상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몽유도원도>의 주된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 가장 공력을 들인 ‘도원경桃源境’의 정경, 그 중에서도 복숭아나무와 복사꽃, 그리고 초록의 새잎 등도 볼수록 그 세밀한 구성과 함께 정묘한 필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복숭아 꽃 부분에는 꽃 술 부분을 금가루로 그려 꽃의 화려함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도원 아래 부분 물결 따라 흔들리는 조각배는 정경의 쓸쓸함을 더하고, 대나무 숲 속의 띠풀집도 자세히 보면 3채가 아니라 4채이며, 가려진 암벽 뒤로 집이 더 있어 마을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몽유도원도>의 콘텍스트적 측면도 이 그림의 가치는 물론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그것은 이 그림을 그리게 한 장본인과 안견은 물론 찬문을 쓴 사람들도 이 그림을 그린 불과 수 년 후 ‘계유정란癸酉靖難’과 ‘사육신 사건’이라는 정치적 격변에 의해 그 운명이 크게 엇갈린다는 점이다. 즉 이 사건들에 의해 누구는 목숨을 잃는 참화를 겪고 누구는 정난공신이 된다. 주11)이러한 사실은 복사꽃으로 상징되는 인생의 봄이라는 아름다운 시기가 그야말로 봄밤의 꿈처럼 느끼게 하는 삶의 무상성과 함께 <몽유도원도>를 더욱 각별한 마음으로 보게 한다.        

지난 수 십 년간 진행된 <몽유도원도>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조선 전기 회화가 순전히 중국풍을 모방하는 차원에 머물렀다는 일제 강점기 이래의 편견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미술에 대한 평가는 미술사학자마다 크게 다르다. 안견은 당대에 비견할 수 있는 그림이 없을 정도로 정치精緻한 필력을 구사한 화가이지만, 그가 도달한 회화세계는 화원 출신 화가라는 신분 계층의 한계 속에서 당대 수요자의 취향이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기예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이는 안평대군 사후에는 안견이 그다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사실로도 입증된다.
사실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조선시대는 여러 면에서 획기적 변화를 보인다. 즉 조선 후기 들어 사회적 경제적 요인으로 문화의 다양성이 생겨나 이른바 조선후기의 문화예술을 꽃피우게 되며, 그 대표적인 사람이 겸재 정선(1676~1759)이다. 안견이나 김홍도의 경우 조선시대 화가 중 재능이 가장 두드러진 예인들이었지만 역시 사대부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화풍에 있어서도 그 신분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특성이 보인다.  
반면에 겸재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무엇보다 사대부 출신 예술가로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세계에 도달한다. 또한 양적면에서도 이 두 사람의 예술세계와 비교할만한 화원 출신 화가가 없는 점도 이러한 신분계층의 차이를 간과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즉 겸재나 추사 예술세계의 독자성과 당당한 기개는 사대부라는 조선 시대를 이끈 주역으로서의 신분을 바탕으로 하며, 그들이 도달한 예술세계는 당대 사대부 계층과의 교유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사회적, 신분적 조건만이 그들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은 아니다. 겸재나 추사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듯, 남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적 요인, 그리고 무엇보다 타고난 성정이야말로 그들 예술세계의 원초적 바탕이지만 궁극적으로 화원출신 화가들과 격이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사대부 출신으로서의 신분적, 지적 역량과 함께 그만큼 자유롭고도 독자적인 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몽유도원도>는 상상화임에도 경물의 핍진한 재현에 치중하고 <인왕제색도>는 실경임에도 파격적일 정도로 대담한 강조와 생략이 공존하는 근본적 이유 중에는 겸재와 안견의 신분적 차이도 있다는 것이다.
비록 지역에 따라 방식은 다르지만 회화의 역사는 대상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대상의 객관적 묘사나 완전한 재현이 회화의 목적은 아님을 전제로 한다. 이 때문에 대상(세계)에 대한 효과적인 어법, 또는 방법론의 독창성 여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근현대미술이 유례없는 다양성과 질적 비약을 이루게 된 것도 당대의 취미나 기호를 뛰어넘고자 하는 새로운 어법에 대한 도전 정신이 있었으며, 이러한 정신의 이면에는 신분적 계층이 해체되는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견의 삶과 예술은 안평대군이라는 페트론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계유정란 직전 일부러 귀한 먹 하나를 훔치는 연기로 안평대군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야사도 안견의 기지와 함께, 그만큼 두 사람이 수직적 관계였음을 드러낸다. 이런 관점에서 <몽유도원도>는 여러 문화적 교류를 융합한 결정체로서 훌륭한 회화적 성취를 보여주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시대적 한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는 문화적 수용의 차이를 포함한다. 즉 <몽유도원도>는 여러 화풍을 종합했어도 선묘 위주의 필법이 두드러진다면, 겸재 정선의 그림은 이러한 필법과 함께 묵법의 농담효과가 두드러지는 남화적 요소도 동시에 수용하여 더욱 폭 넓고도 종합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 안견이후 겸재 정선이 출현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필요했던 것도 이러한 문화적 수용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3.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그림으로서 역사, 문화, 예술이 집약된 대표적인 그림이다. 우리는 <몽유도원도>와 그 찬문을 통해 당대의 시대적 내면인 유가적 현실성과 도가적 몽환성이 공존하는 특성 뿐 만 아니라 그 이전의 문제인 예술의 성립조건이나 인간의 의식적, 심리적 내면 같은 더욱 심층적 문제를 성찰할 수 있다.
또한 <몽유도원도> 제작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와 그로 인한 인간사의 부침은 ‘몽유도원’이란 그림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보게 한다. 무엇보다 변화가 무궁한 <몽유도원도> 특유의 화면은 그 진폭의 변화가 매우 풍부해서 감상자의 시선을 무한히 끌어들이는 매력과 흡인력이 있다.
현대이후 절대적 미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현대 이전이든 그 이후이든 어떤 화가의 작품도 예외일 수 없다. 이는 예술의 세계가 끝내 언어로 기호화될 수 없는 측면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바로 이 때문에 끊임없는 쟁점의 대상이 되는 예술세계가 있으며,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텍스트로서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텍스트는 다층적인 배경인 콘텍스트 속에서 좀 더 객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견의 <몽유도원도> 역시 향후 더욱 다양한 관점에서 새롭게 그 가치가 규명될 수 있다고 본다. 감상이나 미적체험은 이미 통념화된 미적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과 감상자의 의식이 작품이란 매개체를 근거로 미적 가치가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009년 10월
                                도 병 훈


<각주>
주1)<몽유도원도>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조선시대 계유정란 이후로 추정한다. 이후 1893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발견됐고, 1950년대 초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대가 사들여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국보로 지정됐다가 지금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950년대 우여곡절 끝에 한국인 고미술상이 이 작품을 부산으로 들여왔지만, 결국 구입처를 찾지 못해 다시 일본으로 가버린 사연이 있어 고미술계나 학계에선 당시 이 그림을 우리 손에 넣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주2)<몽유도원도>의 이번 대여 전시를 놓고 덴리대 측은 "더 이상 전시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전시후 몽유도원도는 곧바로 일본의 소장처로 돌아갔다.  
주3)몽유도원도는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고,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 국보전> 때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며, 이번이 세 번째인데 9일간만 전시된 것이다. 이중 1996년의 전시회는 ‘조선전기국보전’ 도록를 참조할 것.  
주4)'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이라는 말이 있듯 비단은 500년, 종이는 1000년 동안 간다고 한다. 전통회화의 경우 종이와 함께 비단 그림이 많으며, 조선 전기나 중기의 그림들이 특히 그러하다. 이 중에서도 <몽유도원도>는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림으로 햇수로도 560년이 넘은 그림이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주5)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96쪽  
주6) 안휘준, 안견과 몽유도원도, 사회평론, 2009, 136쪽
주7) 이 부분은 주로 허버트 리드, 김병익 역, 도상과 사상(열화당,1982), 78~79쪽 내용을 읽고 요약한 것임
주8) 허버트 리드의 같은 책, 78쪽
주9) 조선 초기에는 이곽파 화풍, 마하파 화풍, 절파 화풍, 그리고 미법산수화풍 등 다양한 화풍이 수용되었다. 이 중에서 안견은 주로 이곽파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안휘준의 한국회화의 전통(문예출판사, 1988) 125~142쪽 참조    
주10) 이상 안견 그림의 특징에 대한 부분은 안휘준의 한국회화의 전통(문예출판사, 1988) 81쪽에서 인용함.
주11)계유정란은 1453년(단종 1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몽유도원도>와 관련된 인물로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이 계유정란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리고 2년 뒤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서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죽음을 당하지만, 안평대군의 꿈속에서 같이 도원을 거닐었던 신숙주, 최항 등은 세조의 편을 들어 정난공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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