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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0 (19:22:01)
미술은 없다? 새로운 방식의 미술과 소통을 꿈꾸는 자들의 화두
1. 이번 Coding conversation전을 기획하고 세 번째 작가로도 참여한 김도희는 전시 기획의 취지를 밝힌 글에서 이 전시가 우리의 기형적 미술문화에 대한 대응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밝힌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특히 자본주의가 판치는 현실 속에서 한낱 소비꺼리로 전락한 예술의 존재방식, 트렌드화된 이미지와 그 파편의 무한증식, 또는 형식화 ․ 물신화된 통념적 예술에 대해 회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낯 설음’의 경험을 작품 그 자체에만 요구하며 정작 자신의 태도는 수정하지 않고 유사 작품만 늘어놓는 전시와 비평채널에 대해서도 통렬한 회의를 제기한다. 이런 시각에서 기획자는 개인적 취향이나 부박한 통념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의 전시를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이런 취지에서 기획자는 이번 전시가 가장 파격적인 형식으로 이루질 것임을 참여 작가들에게 예고한다. 그것은 바로 참여 작가들이 주어진 기간 동안 선행된 작업을 모티브로 하여 자신만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어법으로 교체하는 과정을 통해 전시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준비된 작업을 공간으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초대작가가 상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어법을 장소에 이식하는 방법’을 통해 형성되는 과정적 전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번 전시는 참여 작가에게도 도전이자 실험이고, 전시 자체도 그 실험성 자체를 품은 도전이며, 감상자에게도 숙제를 안겨준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20세기 후반기 이후 현대철학의 주류로서 후기구조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질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떠올리게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기계’로 정의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기계란 다른 것과 접속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생성 될지 모르는 생성적 상황을 ‘리좀’이라든가, ‘고원’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물론 이번 전시는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한 전시는 아니다. 이러한 철학적 개념 자체가 정형화된 지식을 거부하는 예술적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수용미학의 입장에서 작품은 작가와 관람자간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므로 ‘작품’이라는 말 대신에 ‘텍스트’라는 말을 사용한다. 텍스트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인(因)이며, 이는 근원을 뜻하므로 내적인 것이라면 연(緣)은 외적인 것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관계를 맺거나 결합하여 모든 것이 생겨나고 이 관계나 결합이 해소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인연론’이다. 즉 인이 연을 얻어 새로운 세계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전시는 이번 전시에 참여한 4인의 작가인 연기백, 김성배, 김도희 김학량에 의해 이들과 연(緣)을 맺은 물질과 공간이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우리 미술계에 어떤 파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2. 첫 번째 참여 작가인 연기백의 이번 작업은 일일 정보매체인 ‘신문지꾸러미’라는 매체를 이용한 것이다. 이 일회적 소모적 정보전달매체는 수없이 반복하는 인위적인 행위로 시간의 변화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종이라는 물성이자 시각전달매체가 “지속적인 흔적의 흔적을 기록하는 과정자체에서 의미를 찾도록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속되는 행위의 과정에 의해 새로운 주름을 가진 세계로 점점 변하게 된다. 그래서 연기백의 작업은 마침내 예기치 않은 직접적 물성을 가진 물적 오브제로 변질된다. 이러한 작업의 주된 특성은 순전히 부단히 개입하는 과정에 의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생성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백의 작업은 질량과 에너지, 또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의 세계도 자연의 힘에 의한 시공간의 변화과정의 산물임을 일깨운다. 작가는 종이라는 얇고 가변적인 매체, 무엇보다 정보를 전달하는 바탕 재료를 사용하여 낯설고 새로운 형상의 사물로 변형시켜 현장의 감상자에게 새로운 체험을 유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문지에 인쇄된 글자나 사진의 잉크를 긁어낸 것을 둥글게 빚어낸 ‘지환(紙丸)’, 즉 조그마한 종이 덩어리+잉크 작업은 전시 기간 동안 산맥처럼 가로놓인, 나중에 김성배 작업의 모티브가 된 작업보다 그 크기와 상관없이 더욱 깊은 감응을 불러일으키며, 그만큼 작가 특유의 어법이 집약된 오브제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작은 종이 덩어리 작업 중에서 연기백 다음 작가인 김성배의 눈사람 ‘설인’과 유사한 형태도 있다는 점인데, 이는 물론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지만 프랙탈, 또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화엄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그의 어법은 요컨대 과정이 실재(reality)가 되는 세계의 단면을 제시한다. 이러한 행위의 정신적 가치는 무엇보다 일체의 과장된 제스처나 허위의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업은 순전히 끊임없는 정신적 인내와 육체적 노동을 수반하는 고독한 과정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김성배는 지난 90년대 초반이후 히말라야(Himalayas)를 화두로 살아왔다. 김성배가 그간 경험한 히말라야는 이제 그의 작업의 원천이자 문명적, 사상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에게 백두대간이나 히말라야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하는 중심축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출간한 『슈룹 프로젝트 20년 백두대간-히말라야』이란 자료집에 집대성되어 있듯, 그간 김성배는 단지 백두대간이나 히말라야에 심취하여 이를 소재로 작업을 해 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근대이후 서구 예술의 존재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서의 삶과 예술을 지향해왔다. 요컨대 문제는 그 자신 또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처럼 그는 그간 삶과 예술 행위를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어법의 예술을 제시해왔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우연이 곧 필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이 때문에 우연적인 경험이 그의 작업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작업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이자 작업의 모멘트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전시장 아카이브로서 벽면에 설치된 머리카락을 꿴 바늘 아래 세로로 길게 쓴 “일상 가까이 일상 깊게 우주 가까이 우주 깊게”라는 메시지에 드러나듯 표현 어법의 진폭이 매우 크며, 바로 여기에 그의 작업이 특성이 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그가 히말라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전부터 드러난다. 예컨대 그의 하늘을 배경으로 발을 들어 올린 사진 작업 작업만 하더라도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다 비를 만나 신발이 젖어 햇볕에 발을 말리는데, 그 전에 배가 고파 먹었던 과자 부스러기가 걷어 올린 다리와 발 사이에 떨어져 개미들이 줄을 서서 오르는 모습이 재미있어 촬영을 하고 나중에 인화해 보니 사진 상에 개미는 잡히지 않고 발만 찍혔는데 하늘을 배경으로 넌지시 발을 들어 올린 장면으로 나온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봉을 수채화로 그린 그림 오른 쪽 위 상단에 올가미처럼 붙어 잇는 실밥 모양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중에 옷으로부터 실밥이 떨어진 것을 그 자리에 고정시킨 것이다. 그의 이런 작업 방식은 이번에 전시된 날개 달린 화석 같은 이미지(?)를 아들의 외장 하드 케이스에 붙인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 전시 기획자와 통화 중 우연히 아스팔트 위에서 발견한 아스팔트용 도료가 파편으로 떨어진 것을 떼어낸 것이다. 이처럼 그는 작업을 할 때마다 당시의 시공간적 상황이나 우연적 경험을 적극 활용하는 매우 엉뚱하고도 기발한 방식을 택해왔다. 이토록 기상천외한 발상의 작업은 매우 전략적이며 비상한 감각의 발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이는 역사적 아방가르드 이래 현대 작가들의 어법과도 일맥상통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의 웬만한 전위적 작가들보다 김성배는 더욱 근원적이고 실질적인 삶을 지향해왔으며, 그러한 삶속에서 예술이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해온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히말라야’ 라는 영역의 발견과 체험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주요 단서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과연 무엇일까? 지구의 표면에 융기된 가장 높은 땅인 히말라야는 불교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내면에도 있다. 그것은 불교의 유식(唯識) 철학에서 말하는 제7식(識)이다. 이 식은 현대심리학 용어로 표현하면 '자아의식'으로 곧 '에고(ego)'를 말한다. 이 7식을 '말라식(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라(mala)'는 히말라야의 '말라'와 같은 뜻이다. 인간이 진화를 하면서 유전자에 축적된 정보가 히말라야 산처럼 높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말라야는 인간 내면의 업장을 상징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제8식인 아뢰야식을 해탈의 차원으로 보는 유식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는 내면의 히말라야다. 예컨대 원효의 저서인 『대승기신론소 ․별기』에서도 나오듯, 유식 불교는 바로 이 에고의식, 즉 7식에서 어떻게 해탈하는가의 문제를 매우 치밀한 분석적 논리로 탐구한다. 그런데 지난 2002년 오랜만에 한 김성배 개인전의 전시 타이틀은 ‘해탈 不可(불가)’였다. 이 개인전을 통해서도 그 다운 발상을 보여준 셈이다. 이러한 전력을 가진 작가답게 김성배는 이번에도 즉흥적이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의 퍼포먼스를 조규현 선생과 함께 진행하였다. 두 사람의 이질적 행위는 극적으로 대비되어 퍼포먼스의 극적효과를 증폭시켰다. 이러한 퍼포먼스의 동기는 연기백의 신문 더미가 김성배에게 히말라야 산맥처럼 보인데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성배의 퍼포먼스는 상징적인 눈사람 형태의 ‘설인’으로 남았다. 연기백의 종이와 시간, 그리고 지속적 노동이 빚어낸 작업이 김성배에 의해 ‘설인’이라는 상징적 시각적 이미지로 변한 것이다. 4. 김성배에 의해 탄생된 ‘설인’은 김도희에 의해 또 다시 다른 차원으로 전복된다. 그것은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상상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대상이 가지는 물질성의 직접적 변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이의 출발점으로 우선 김도희는 한의학에서 행하는 ‘뜸’이란 방법을 썼다. 이 뜸은 몸의 기혈의 순환을 원활하기 위한 처방이다. 이러한 뜸의 방법을 김도희는 그 변형과정의 시작 단계부터 태양의 빛을 돋보기로 빌려 불과 연기를 내는 방법으로 시작한다. 제시된 자료에 의하면 설인의 정수리에 놓인 뜸에 불이 붙으면서 바람과 함께 설탕가루 타는 냄새와 함께 마치 설인의 영혼이 증발하듯, 개념이 증발하듯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침내 설인 이미지는 한 중의 재로 전소되며, 이 순간 물질의 연소 과정에서 바람과 함께 에너지는 더욱 극적으로 증폭된다. 현장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위가 개입된 이러한 순식간의 변화 과정은 자연 속에서는 매우 장구한 시간 속에서 마이크로, 또는 매크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한한 개체인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특성을 감지하거나 체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분석적으로 수치화 ․ 계량화된 과학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숯의 주성분인 탄소의 변화과정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숯은 원소 기호 6번인 탄소 덩어리로서, 이 탄소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 중 유물의 연대 측정에 쓰이는 탄소는 14C, 즉 질량수가 14개인 탄소로 양성자 8개인 희귀탄소다. 그런데 이 탄소는 대기 중의 질소(14N)가 우주선(宇宙線, galactic cosmic ray)과 반응해서 만들어진다. 우주선이란 우리 은하 전체를 날아다니는 입자들의 흐름이며, 지구로 쏟아지는 우주선이 질소와 부딪치면 그 충격으로 인해 질소의 양성자는 하나 줄고, 중성자는 하나 늘어나 양성자는 6개 중성자는 8개인 원소로 바뀐다. 즉 질소가 탄소로 바뀐다. 생물체의 몸은 공기를 통해 받아들이는 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유기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 동 ․ 식물은 대기를 호흡하기 때문에 동식물의 내부에는 일반탄소와 14C탄소의 비율이 일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동식물이 죽어 호흡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일반탄소는 거의 변화가 없는데 방사성원소인 14C는 붕괴되어 다시 질소로 돌아가는 데, 원자 개수가 처음의 반이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반감기라 한다. 14C는 5,730년이다.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고고학계에서는 유물의 연대 측정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무수한 존재들 모두 우주적 존재이다. 다만 시간을 달리하여 존재의 양태만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가변성 때문에 생명과 세계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관점에서 알 수 있는 사물의 변화과정을 우리 몸으로 직접 체험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술작업은 우리가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의 사물의 변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겁의 세월이 걸리는 자연현상을 일거에 집약하여 증폭시키는 행위가 예술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김도희 작업을 통해 순식간에 일어난 질량의 변화와 에너지의 증폭, 그리고 숯만 남게 된 과정은 세계의 우주적 변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5. 김학량은 <부작란>작업으로 알려진 작가다. 원래의 <부작란>는 현존하는 추사의 마지막 난 그림으로 흔히 <불이선란도>라고도 한다. 추사는 과천과 봉은사를 오가며 살던 만년 시절에 이 부작난을 치고(그리고)는 화제 첫머리에 “난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부작란화이십년;不作蘭花二十年)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우연사출성중천;偶然寫出性中天)이란 ‘자화자찬’으로, 자신이 20년 동안 난을 그리지 않았지만 작위적 경지를 넘어선 자연의 경지에 이르렀노라고 밝힌다. 반면 김학량의 부작란은 눈 속에 드러난 빼어난 가지의 난 같은 형상의 잡초를 찍은 사진 작업이다.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눈 위의 잡풀이 그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어 말 그대로 그리지 않은 난, 즉 부작란이 됨 셈이다. 하얀 눈 위 몇 가닥의 난초를 닮은 선으로 드러난 잡초에 대한 집중과 선택으로 그는 붓을 들지 않고 김정희 예술 정신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그의 부작란 작업은 일종의 패러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 어법은 이번 전시회에서 그의 아카이브로 제시된 <청청 하늘에는 별도 많네> 라는 작업에도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헌화가’란 타이틀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쓴 그의 글에서도 그의 작업이 어떤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성립하는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김학량은 김도희가 준 ‘선물’로 세계를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듯한 광경의 다양한 이미지의 사진이나 오브제를 제시해놓고는 벽에다 유려한 자필로 일일이 극히 내러티브한 문학적 상상력을 제시(?)한다. 특히 사진 작업 밑에는 자유로운 필치의 연필로, <산, 혹은 최초의 건축>, <그리고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 <최초의 대화, 또는 생각하는 산>, <최초의 들림(*사진속의 작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귀 기울인다>, <최초의 잠(*작가는 바닥에 누워있다)>, 그리고 <최초의 풍경 또는 꿈> <최초의 정물> <가장 처음의 달>, <그 이튿날의 해>, <다도해, 또는 최초의 삶> <최초의 오(五)>, <최초의 다섯 구명>, <이틀째의 달>, <가장 처음의 원, 혹은 태초의 도식(scheme)>, <그런 다음의, 최초의 외출>, <그 이튿날의 외출>, 아, 아!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는구나!>, <가장 첫 씻김>, 최초의 높임>, <최초의, 뜸>, <최초의 얻음, 또는 가장 나중의 감추임>이라 쓴다. 얼핏, 이러한 진술은 이미지와 부합되는 시적인 상상력을 드러낸 듯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진술은 각각의 사진 작업에 나타난 이미지를 보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적 유희이다. 그 자신이 최초의 감상자가 된 것이다. 이는 <공산에 명월>이란 설치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김학량의 작업은 들뢰즈나 스피노자의 핵심 화두이기도 한 표상representation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들뢰즈와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가 표상 없이 사유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표상을 통해 지각하고 생각하며 말한다. ‘의미’란 대개 그렇게 표상된 어떤 것을 지칭한다. 이런 차원에서 표상representation이란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눈앞에 빨간 깃발이 있다면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어떤 것과 연관되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은 투우 경기 장면을,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를 떠올린다. 즉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이나 생각, 혹은 관념이나 도덕 등을 통해서 빨간 깃발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서 깃발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통해 다시 나타나며, 이는 기존의 관념과 동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표상을 통한 사유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동일성에 의한 사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학량의 서사적 내러티브는 동일성에 의한 사유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기술까지 자신의 어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거의 모든 작업에 대해 ‘최초’란 말로 진술하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다. 그러나 이는 ‘참된 진리는 말로 전할 수 없으며, 관계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방편적인 언어를 구사한 동북아적 사유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미 오래전부터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대상 그 자체의 고유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 가치가 형성되어 왔다. 글씨를 쓰든 난을 치든, 거문고를 연주하든, 지세를 살피든, 기(氣)나 도(道), 리(理)를 통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전통도 서구적 의미의 실체적 초월적 의미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오감의 경험을 기술하는 용어일 뿐이다. 이러한 문화적 유전인자가 김학량의 작업 속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일견 사림(士林)에 은거하는 선비 같은 풍모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도 이러한 유전인자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그의 언어 유희적 작업이 단지 관념이나 직관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감응(affect)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술 영역에 대해 관념 없이 사물에 감응하게 하는 방법, 다시 말해 새로운 감응에 의해 촉발된 사유는 어떻게 가능할까? 라는 스피노자나 질 들뢰즈의 문제의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5. 이번 전시는 각 작가들의 형식적 특성을 드러내는 태도와 어법을 부각하고 이들 작업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예기치 않은 우연적 상황과 릴레이 방식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참여 작가들도 이전 작업방식과 달리 당면한 우연적 상황을 자신의 어법으로 소화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처럼 이번 전시의 가장 주된 특색은 ‘참여 작가 상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어법을 장소에 이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참여 작가들은 작업을 진행하고 어법을 부각시키기 위해 전후의 작업에 대한 이해과정이 수반된 작업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작업 순서가 아니어도 작업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자신의 작업에 대해 생각하고 예상해야 했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무엇보다 작업으로 서로 의 접점과 만남, 그로 인한 감응과 소통의 계기를 조성하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그 주된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핵심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통념화된 미술의 관행을 벗어난 강밀한 코드이며, 이러한 의도된 ‘우연성(모호성)’, 또는 ‘클리나멘(벗어나는 선)’은 기존 예술과 차별화된 대응국면을 형성하는 방법론을 뜻한다. 특정한 순간의 개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러한 ‘특개성’의 세계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방식이어서 오히려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님을 우리는 마르셀 뒤샹 이래의 획기적 현대미술의 역사를 통해 자각하게 된다. 결국 이번 전시회는 현장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시너지 효과를 낳은 의미 있는 생성과 소통의 장이었으며, 감상자 또한 이러한 도전이 제시하는 새로운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음을 일깨운 전시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10월 9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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