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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63
도병훈
조회 수 : 6114
2009.10.08 (10:41:19)
가장 값지고 귀한 추석 선물
설날이나 추석은 유년기 아름다웠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추석이 다가오면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고 마음이 맑아진다. 올해도 추석을 맞아 부모님이 계신 대구와,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군위에 있는 고향마을에 갔다. 대학 진학 후 상경하여 늘 타지에 살다가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바람도 선선하여 더 없이 좋은 계절에 부모님과 형제를 만나 담소를 나누고, 또 선영이 있는 고향 마을에 가는 일은 일상의 세파에 찌든 나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올 추석에도 말 그대로 선조들의 묘를 살핀다는 성묘(省墓)도 하고, 또 아버지께서 선산에 정하신 부모님 묘 자리도 아버지와 형님, 그리고 동생과 함께 둘러보았다. 고향 마을 주위 산자락에는 약 600년 전 고향마을에 최초로 들어온 입향조부터 조부모 산소까지 17대 선조들의 묘가 단 1기도 손실 없이 존재한다. 게다가 입향조의 부인인 열녀 서씨는 『세종실록』에도 실린 ‘백죽(白竹)’의 사연으로 대대손손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의 잘 알려진 명문 종가에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나에게 고향 산천은 더욱 마음을 애틋하게 만드는 본향인 것이다. 부모님은 내년이 되면 어언 결혼 60주년을 맞게 된다. 옛날 같으면 온 마을이 떠들썩할 성대한 회혼례(回婚禮)라도 치러야 하는 햇수를 두 분이 함께 하신 것이다. 이처럼 두 분이 건재하셔서 올 추석도 나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어머니로부터 뜻밖의 귀한 선물을 받아 더욱 뜻 깊은 추석이 되었다. 부모님 집 근처에 있는 동생집에서 추석을 지내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고 집사람과 동생과 함께 부모님 아파트에 들렀다가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집사람이, “어머님이 솜씨가 좋으시지요?” 라는 말과 함께, “예전에는 삼베도 직접 짜셨다면서요?”라는 말을 하자, 어머니가 “예전에는 다 짜고 그랬지.” 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버지도 옆에서 “너의 어머니가 다른 사람보다 더 정교하게 명주를 짰다”고 거드셨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곧바로 농문을 열고 아래 칸에서 무명 두루마기 한 벌과 아버지 모시 두루마기 한 벌, 그리고 곱게 짠 명주(明紬)천을 내놓으셨다. 명주천의 폭은 약 35cm, 길이는 약 90cm 정도 돼 보였다. 이 중에서도 무명 두루마기에 대해 어머니는 “나중에 우리가 죽으면 너희들이 상복으로 입을지도 모른다 싶어 남겨 놓았다”고 했다. 직접 목화를 따다 실을 뽑아 만든 무명 두루마기는 한 땀 한 땀 바느질의 정성이 배여 있었고, 모시 두루마기는 지금 유명 백화점에 진열해 놓아도 고급상품으로 팔릴 정도로 기품 있고 고급스러웠다. 이처럼 어느 것 하나 눈길이 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일품이어서 집 사람과 나와 동생은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특히 직접 어머니의 손으로 짠 명주천은 볼수록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삼베만을 짠 줄 알았지 이렇게 고운 명주까지 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 우리가 보는 명주천이 언제 짠 것인지 물어보았더니 정확한 연대는 기억 못하시고 18세 나이로 1950년에 시집오셔서 형님이 어릴 때까지 짰다고 했다. 그렇다면 1950년대에 짠 것이어서 햇수로 50년이 넘은 것이다. 19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의 전통적 생활방식이 거의 그대로 이어지던 나의 고향에서는 이런 명주나 삼베를 직접 짜서 입었다. 나의 어머니 세대가 이 땅에서 직접 베나 명주를 짠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명주천이 볼수록 귀한 느낌이고 마음에 들어 명주에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핑계로 명주 천이 갖고 싶어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선뜻 “갖고 싶으면 가져라”고 하셨다. 그래서 동생이 한 장을 갖고, 내가 석 장을 가지면서 나중에 돈으로 살 테니까 나머지 것도 잘 보관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도 한지를 꺼내어 어머님이 주신 명주 천을 고이 접어 사 주셨다. 명주는 뽕을 먹고 자라는 누에의 집인 고치를 실로 뽑은 견사(絹絲)를 이용해 짠 직물로서 우리나라에서 누에를 쳐 명주를 길쌈한 것은 삼한시대부터였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상류층이 중국산 명주나 비단을 수입하여 의복재료로 삼음으로써 명주를 길쌈하는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명주 길쌈을 권장하여 각 지방에 잠실(蠶室)을 설치하고, 뽕나무 키우는 법인 종상법(種桑法)을 반포했으며 관복을 국내산 명주로 바꾸어 짓게 했다. 그러나 왕실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에서는 명주를 주로 의복 안감이나 신발인 운혜(雲鞋)감으로만 사용했지만 서민들은 혼수감이나 명절복으로 널리 애용하였다. 그리고 종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바탕이 되기도 하여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겸재 정선의 <내연삼용추도> 같은 그림은 명주에 그린 것이다. 명주의 길쌈 과정은 먼저 누에치기를 한 후 따낸 고치로부터 ‘실뽑기’를 하고 다시 ‘실 내리기’를 한다. 이어 타래 지은 실을 다른 직물의 길쌈 때와 같이 풀칠을 해 말려서 도투마리에 감아주는 명주매기를 하며, 그리고 도투마리에 감긴 명주실을 베틀에 올려서 잉아를 걸고 실꾸리를 북에 넣은 다음 명주를 짠다. 명주는 특히 올이 가늘어 가장 굵은 것이 10새이고 보통이 12~13새이며, 15새 정도가 되어야 상품(上品)으로 쳤다고 한다.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지만 나는 어머니가 짠 명주 천을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게 된다. 비단(실크)은 형형색색의 호사스런 느낌이 들지만 물들이지 않은 비단인 명주는 소박하면서도 고귀한 품격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때로는 문명 교류의 상징인 실크로드를, 때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떠올리며, 무슨 그림을 그릴까? 궁리하게 되지만, 명주 천의 재질감이 좋아 그 위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부질없는 짓거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고운 올로 촘촘히 짜인 노르스름한 윤기 나는 명주를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면, 지금까지 이 명주천의 가치조차 모르고 작품을 한 답 시고 살아온 나의 삶이 무색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어머니가 짠 명주를 보며 어머니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 올 한 올 당신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생생한 자화상이었다. 나의 삶의 바탕에는 수천 년 이어 온 한 조선 여인의 명주 같은 삶이 있었던 것이다. 2009년 10월 6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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