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1492
2018.02.13 (11: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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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미학 5

   C  觀照

   자연과 관계하는 조응경험에서 관조적인 태도로 이행하는 것이, 양식적인 통일이 깃들어 있는 인공물에 대한 호감에서 관조적태도로 이행하는 것 보담 훨씬 쉽다는 것은, 자연과 관계하는 조응경험의 특성이다. 나의 타이프라이트. 나의 만년필. 나의 티-컾. 나의 실내관상용 야자와 나는, 매일과 같이 조응적 컨택트를 취하고 있다. 이들중에서 관상용 야자는 특별한 역할을 보여준다. 내가 그 야자를 바라보느라면, 야자는 그 어느때와 같은 표정으로 [응답]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응답을 철회하고 그 친밀한 몸짓을 억제하여 – 그 성장의 이 단계의 생존을, 잎의 흘들림과 더불어 관찰하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타이프라이트나 만년필이나 접시는, 같은 한 순간의 지각으로 직관되지만, 素直한 관엽식물의 조응적마력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나의 직관이 이들의 순수한 현존에 고착되어 있을 때 야자의 경우는, 하나의 우연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들이 일용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관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단순히 고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용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 사용을 위해 제작자는 타이프라이트나 만년필이나 접시를 고안한 것이나, 그것은, 단순히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것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 사용자들로부터 마음속으로부터 사랑받을 것이다. 기구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나의 일용품이 갖고 있는 이 조응적감각에서, 관조적직관은 우선 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고로, 순수한 관찰에는 깊은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식물과 그 표정의 연결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과 표정 풍부한 그 형태와의 묶음과는 같지 않다.

  관조적실천은 미적의미도 또한 미적으로 추상하는 것이다. 의미에서 감각을 관조적으로 정화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 및 감각에 의한 了解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감각의 비판도 아니다. 그것은 감각에 대한 방향짓기의 혹종의 단념인데, 그 단념이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결과로 의미의 변용을 일어키는 일이 있어도 본래 여하한 종류의 의미의 변용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관조적주의는 그 단념에 의해 감각 및 감각에 대한 신뢰를 일으키는 것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출을 연출해 내기 위해 감각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둔다. 그것은 실천으로부터는 여하한 거리를 취하기 위한 실천이다.

  제1장의 기술은, 그것만으로는, 무엇을 첨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허나 관조적주의에는 산출내지 형성이라고 하는 고유의 실천은 무엇이나 해헤당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는, 해설의 필요가 있다. 단순히 타의 것 보다 많다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으로 관조에 상응하는 대상을 산출할 수 있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연은 그런 창조적 활동에 의해 능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특별히 그것이 관조에로 잘못 유도하는 장합에, 결코 순수한 관조적객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고, 항상 또한 조응적 내지 상상적으로 매료하기 때문이다. 자율적 예술의 의무는 때로는 이러한 순수주의에서 보여져 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요셉.알버스의 회화씨리즈 [정방형의 오마-쥬]나 [구체]회화의 제형식,혹은 공업적으로 만들어진 쟛드의 오브제등, 최근의 조형예술의 몇 개의 작품은, 이 이상에 해당될 수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허나, 쟛드의 경우를 보면, 배타적인 관조적 예술이라고 하는 이상은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었던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이상이 과잉하게 달성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관조적 예술작품은, 항상 그 자신이상의 것이다. 마르셀.뒤샹 이상의 것을 천재적으로 나타냈던 사람은 없었다. [레이디.메이드]의 작품은 배타적인 과조적생산의 실현화를 통해 동시에 그 부가능성에 대한 증명이다. 순수한 미적구성이어야 하는 객체는 그러함으로 해서 역으로 더욱 더 마족안 의도에서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사물을 그것이 바로 현재에 있는것과 같이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가 객체에 일정한 형을 대여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사물의 현출만을 규정되어 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빈병건조기를 전시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지극히 실용적인 기구가 다루어져 있기 때문에 화랑의 공간에 있는 그 미적거리는, [목적없는 목적성]에 대한 실로 효과적인 사례인것이다. 그 대상은,(병의 건조를 위해서는) 합목적적이다. 허나 여기서는, 미적인 문맥에 있어, 모든 그와 같은 목적없이는 그것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 지금이야말로 관찰을 위한 것의 이외의 어떠한 것을 위해서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관찰은, 실용적 내지 예술적 혹은 미술공예품적으로 형성된 형태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 대상의 순수한 사물존재에 그 주의를 쏟는 것이다. 허나, 순수한 예술적지향이 실현되는 그 순산에 그 자향은 다시 붕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상안의 건조기는, --- 레스트랑안의 그것과는 달리 ---  우리들을 눈앞으로 이끌어 준다. 그 결과 미적 지각은 쉬지 않고 상상적 혹은 조응적형성이 끝날 무렵에, 이제서야 어느 일정한 --- 관조적 – 의미에서, 가까스로 미적인 지각이 정당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해서, 연출된 건조기는,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고 단순히 건조기가 갖고 있지 않았던 상상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예술적인 조작은 일반적인 기구에 그 미적 일반성이 갖는 고귀함에 관해 이야기하게 하는것이다. 관조적인 반. 인공물은, 관조적시각의 표식이 되고, 더욱 또한 비 – 대리적예술의 전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 순수한 관조적대상과는 달리 – 료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이 제1장에서 문학적 텍스트에 입각하여 관찰한 관조적예술이 갖는 변증법이, 새로운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변증법은, 뒤샹의 경우에는, 물론 단순히 효력을 발휘하는 것 만 아니다. 그것은 현출에 있어 등장한다. 즉, 우리들의 예술의 개념과 더불어, 우리들의 관조적예술이라는 개념까지 수정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모든 예술은, 관조적예술도 포함하여, 상상의 바늘 구멍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그들 작품이 관조적 직관의 뛰어난 객체라고 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아마도, 그것은, 그들 작품의 유래가 상상의 영역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조의 걸출한 객체를 낳기 위해서, 예술은 보다 좁은 의미에서 [관조적예술], 즉 – 가에이로나, 뒤샹의 경우와 같이 – 관조적 지각의 상상적모사일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모든 종류의 구성적 상상은 순수한 미적직관의 幻惑的 객체를 낳을 수 있다. 상상적 객체로부터 관조적 객체로의 전환의 가능성 역시 관조의 변증법에 속에 있다. 내가 자신의 방에 엘른스트의 숲의 그림의 오리지널을 걸어 놓고 있다면, - 그것은 분명히 오리지널이 아니면 안될것이나, 라고 하는 것은, 그림이 복제일 경우에 상실하는 첫쩨번 것은    바로 그 관조적 자력이기 때문에 – 그것의 무엇이든지 밝혀 낸 무성한 것의 움직임에 의해 눈의 즐거움이 되는 호수의 바라봄과 더불어 그 그림을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 있는 가까움이란 점에서 그것은 부재를 위로하는 藥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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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ed no image 자연미학 5 - C 관조
1492 2018-02-13
자연미학 5 C 觀照 자연과 관계하는 조응경험에서 관조적인 태도로 이행하는 것이, 양식적인 통일이 깃들어 있는 인공물에 대한 호감에서 관조적태도로 이행하는 것 보담 훨씬 쉽다는 것은, 자연과 관계하는 조응경험의 특성이다. 나의 타이프라이트. 나의 만년필. 나의 티-컾. 나의 실내관상용 야자와 나는, 매일과 같이 조응적 컨택트를 취하고 있다. 이들중에서 관상용 야자는 특별한 역할을 보여준다. 내가 그 야자를 바라보느라면, 야자는 그 어느때와 같은 표정으로 [응답]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응답을 철회하고 그 친밀한 몸짓을 억제하여 – 그 성장의 이 단계의 생존을, 잎의 흘들림과 더불어 관찰하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타이프라이트나 만년필이나 접시는, 같은 한 순간의 지각으로 직관되지만, 素直한 관엽식물의 조응적마력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나의 직관이 이들의 순수한 현존에 고착되어 있을 때 야자의 경우는, 하나의 우연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들이 일용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관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단순히 고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용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 사용을 위해 제작자는 타이프라이트나 만년필이나 접시를 고안한 것이나, 그것은, 단순히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것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 사용자들로부터 마음속으로부터 사랑받을 것이다. 기구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나의 일용품이 갖고 있는 이 조응적감각에서, 관조적직관은 우선 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고로, 순수한 관찰에는 깊은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식물과 그 표정의 연결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과 표정 풍부한 그 형태와의 묶음과는 같지 않다. 관조적실천은 미적의미도 또한 미적으로 추상하는 것이다. 의미에서 감각을 관조적으로 정화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 및 감각에 의한 了解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감각의 비판도 아니다. 그것은 감각에 대한 방향짓기의 혹종의 단념인데, 그 단념이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결과로 의미의 변용을 일어키는 일이 있어도 본래 여하한 종류의 의미의 변용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관조적주의는 그 단념에 의해 감각 및 감각에 대한 신뢰를 일으키는 것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출을 연출해 내기 위해 감각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둔다. 그것은 실천으로부터는 여하한 거리를 취하기 위한 실천이다. 제1장의 기술은, 그것만으로는, 무엇을 첨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허나 관조적주의에는 산출내지 형성이라고 하는 고유의 실천은 무엇이나 해헤당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는, 해설의 필요가 있다. 단순히 타의 것 보다 많다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으로 관조에 상응하는 대상을 산출할 수 있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연은 그런 창조적 활동에 의해 능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특별히 그것이 관조에로 잘못 유도하는 장합에, 결코 순수한 관조적객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고, 항상 또한 조응적 내지 상상적으로 매료하기 때문이다. 자율적 예술의 의무는 때로는 이러한 순수주의에서 보여져 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요셉.알버스의 회화씨리즈 [정방형의 오마-쥬]나 [구체]회화의 제형식,혹은 공업적으로 만들어진 쟛드의 오브제등, 최근의 조형예술의 몇 개의 작품은, 이 이상에 해당될 수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허나, 쟛드의 경우를 보면, 배타적인 관조적 예술이라고 하는 이상은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었던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이상이 과잉하게 달성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관조적 예술작품은, 항상 그 자신이상의 것이다. 마르셀.뒤샹 이상의 것을 천재적으로 나타냈던 사람은 없었다. [레이디.메이드]의 작품은 배타적인 과조적생산의 실현화를 통해 동시에 그 부가능성에 대한 증명이다. 순수한 미적구성이어야 하는 객체는 그러함으로 해서 역으로 더욱 더 마족안 의도에서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사물을 그것이 바로 현재에 있는것과 같이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가 객체에 일정한 형을 대여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사물의 현출만을 규정되어 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빈병건조기를 전시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지극히 실용적인 기구가 다루어져 있기 때문에 화랑의 공간에 있는 그 미적거리는, [목적없는 목적성]에 대한 실로 효과적인 사례인것이다. 그 대상은,(병의 건조를 위해서는) 합목적적이다. 허나 여기서는, 미적인 문맥에 있어, 모든 그와 같은 목적없이는 그것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 지금이야말로 관찰을 위한 것의 이외의 어떠한 것을 위해서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관찰은, 실용적 내지 예술적 혹은 미술공예품적으로 형성된 형태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 대상의 순수한 사물존재에 그 주의를 쏟는 것이다. 허나, 순수한 예술적지향이 실현되는 그 순산에 그 자향은 다시 붕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상안의 건조기는, --- 레스트랑안의 그것과는 달리 --- 우리들을 눈앞으로 이끌어 준다. 그 결과 미적 지각은 쉬지 않고 상상적 혹은 조응적형성이 끝날 무렵에, 이제서야 어느 일정한 --- 관조적 – 의미에서, 가까스로 미적인 지각이 정당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해서, 연출된 건조기는,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고 단순히 건조기가 갖고 있지 않았던 상상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예술적인 조작은 일반적인 기구에 그 미적 일반성이 갖는 고귀함에 관해 이야기하게 하는것이다. 관조적인 반. 인공물은, 관조적시각의 표식이 되고, 더욱 또한 비 – 대리적예술의 전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 순수한 관조적대상과는 달리 – 료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이 제1장에서 문학적 텍스트에 입각하여 관찰한 관조적예술이 갖는 변증법이, 새로운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변증법은, 뒤샹의 경우에는, 물론 단순히 효력을 발휘하는 것 만 아니다. 그것은 현출에 있어 등장한다. 즉, 우리들의 예술의 개념과 더불어, 우리들의 관조적예술이라는 개념까지 수정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모든 예술은, 관조적예술도 포함하여, 상상의 바늘 구멍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그들 작품이 관조적 직관의 뛰어난 객체라고 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아마도, 그것은, 그들 작품의 유래가 상상의 영역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조의 걸출한 객체를 낳기 위해서, 예술은 보다 좁은 의미에서 [관조적예술], 즉 – 가에이로나, 뒤샹의 경우와 같이 – 관조적 지각의 상상적모사일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모든 종류의 구성적 상상은 순수한 미적직관의 幻惑的 객체를 낳을 수 있다. 상상적 객체로부터 관조적 객체로의 전환의 가능성 역시 관조의 변증법에 속에 있다. 내가 자신의 방에 엘른스트의 숲의 그림의 오리지널을 걸어 놓고 있다면, - 그것은 분명히 오리지널이 아니면 안될것이나, 라고 하는 것은, 그림이 복제일 경우에 상실하는 첫쩨번 것은 바로 그 관조적 자력이기 때문에 – 그것의 무엇이든지 밝혀 낸 무성한 것의 움직임에 의해 눈의 즐거움이 되는 호수의 바라봄과 더불어 그 그림을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 있는 가까움이란 점에서 그것은 부재를 위로하는 藥일것이다.
1433 no image 자연미학 4 b - 조응
1612 2018-02-09
자연미학 4 – b 照應 간혹 예술작품은 생의 상황의 표현일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구체화한 부분이다. 더욱 예술작품의 상상은 世界內 존재의 일정한 상황을 모사할 뿐 아니라 이 모사의 힘으로 생의 일정한 상황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혹은 그러한 상황에 윤곽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외적]인 표현임으로 해서, [내적]인 미적표현을 획득하고 있다. 내가 막스.ㅇ엘런스트의 어스럼한 숲의 그림의 하나를 나의 방에 걸어 놓는다면 이 그림은 오-피스의 멋없는 내장이나 밝은 밖의 풍경과 대극을 이룰 것이며, 그 회화모사는 깨끗하게 만들어 놓은 실용공간안에서, 겁나는 자연과 비기능적인 질서의 양상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공간작용을 이 그림이 갖는 것은, 그러나 연구실의 흔한 환경에서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각예술은 일반적으로, 그 직관에 조응하여 그 실존적공간을 변화시키던가 변경하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그러나, 몇가지 예술의 조응적인 방식을, 그러한 가능한 조응형성작용의 다양함과 동일시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으로, 내가 영화속에서, 함프리.보카-드와 같은 사람이 주인공인 허구의 세계를 지각하는가 아닌가, 혹은 영화의 역에서 함프리.보카-드가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내가 현실의 세계를 그렇게 보는가 아닌가, 이는 전적으로 별개의 일이다. 첫쩨번 장합은, 나에게 보카-드영화는 상상의 객체이며, 영상공간의 암흑속에서 허구적인 조응현성은 끊기 힘든 그 객체의 직관에 속한다. 두번째 경우는 상상의 객체는 나에게 있어 일상적인 조응형성의 자극이 되어 그 조응은 영화속의 생이 대낮에 계속 이어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첫째번 경우, 나는 함프리.보카-드의 세계를 보고, 체험하는 것이 되며, 둘째번 경우에는, 내가 함프리.보카-드와의 세계의 누군가로서 자신을 보고,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양식이 나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환상과 맺어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환상은 결코 단순한 가상은 아니며, 전적으로 의식적으로 산출된 상상적가상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떠난 조응이 성립하는 이상 이들 환상은 나의 생의 주관적현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생을 바꿀 때, 붕괴하는 첫째번 것은 오래된 미적 조응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나가 버린 가장 오래된 것은 또한 다가 오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적가상에서 세계지각이 그런것과 같이, 조응적지각에서도 또한 직접적 구성요소와 간접적인 구성요소가 있다. 확실히 조응적지각에 있어서는 이들 관계는 총괄적으로는 구성적이다. 조응적인 지각은, 대상 내지 공간의 형태와 표현에 직접적으로 관련되 있으며, 지각하는 자의 생의 구상에는 간접적으로 연관되 있다. 양자는 서로 맺으져 있는 것이다. 양자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 조응인것이다. 그것들의 수용적 혹은 거부적인 형태에 있어 조응하는 제대상은, 생에 대한 그때 그때의 구상의 긍정적 현출로써 혹은 부정적 현출이던가 한다. 조응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란 분활적 혹은 분활가능한 생의 구상의 표현이며, 또한 그들의 형태의 안에 실제적으로 생성한 생의 구상의 표현의 것이다. 조응적으로 추한 형태란 분활적 혹은 분활가능이 아닌 실존적이상의 표현이나 실재물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함으로 자기자신의 생에 대해서 현저하게 부적합한 관계에 놓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적합]대신 [불균제]라고 말해도 좋을것이다. 실존적투기에 대해 분명히 불균재인것이 조응적으로 추한것에 응하여 자기자신의 생에 대해 분명히 적합하고 균제가 잡혀 있는 관계에 놓인 것은 조응적으로 아름답다. 류의어의 [정합적]과 마찬가지로, [균제]라고하는 말은 독특한 어휘다. 어떤것이 어떤것에 대해 균제가 잡혀 있다, 즉 자족한 좋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두 관점의 조응적 부합은 바로 自動詞적사용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해 준다. 그 자신으로 균제적이던가 정합적인 것은, 타의 것과는 정합하지 않고, 그것은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감정이나 행위에, 최종적으로는, 말하자면, 우리들의 생의 유의에 맞는 것이다. 자동사적 균제성은 직관적인 실존적정합성이다. 다른 것들이 타동사적으로 서로 종합한다는 속애서 이 자동사적 균제가 몇겹으로 실현하는 한, 이 적합의 미적감각을 설명하는 것은 자동사적의미인 것이다. 이런 종류의 [순수한]정합성은 무슨 예술의 카데고리-가 아니고 생의 사물에 대한 전예술적인 호감의 범주범주인 것. 예술이 조응적제형태의 상상적형성으로써 이따금 료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미적조응은, 모든 예술로부터 독립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미의 본래의 형식이다. 이 조응의 개념을 내용적인 정합성의 이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틀린 것이 될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덴지방은, 뉴-욕라는 무대와 같이 정합적인것으로 경험될 수 있을것이며 장미의 한잎은 나의 잡연한 감상용야자와 같이 또한 상속된 거실의 쾌적함은 차가운 빛과 밋밋한 평면으로 이루어진 실재장식과 같이 또한 반려의 친밀한 아름다움은 모르는 통행인여성의 인상과 같이 정합성으로써 경험되는 것이다. 이들 조응의 얼마간은 숭고한 것을 가볍게 닿는 것이 가능하며 타의 것이 숭고의 상태임이 가능할것이다. 무언가 놀라운 방식으로 균제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사람들을 끌어 들일것이다. 아름답다던가 추하다고 하는 형식개념에는 숭고적조응이라고 하는 형식개념이 어울린다. 숭고적조응은 생에 대한 세계의 긍정적인 불균제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구축물이나 지역은, 아직도 미해되지 않는 생의 구상의 모사로써 현출되는 것이다. 예술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조응을 숭고로 바뀌는 일을 그 과제로 고려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예를 들면, 나의 사물실 벽에 걸려 있는 엘런스트의 어두므래한 숲 그림은 학술적환경이라고 하는 비호아래의 응호아래에서 통약불가능성에의 경고일것이다. 이제 미적조응은 일반적으로 간단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되었다. 조응적인 [현전화]란, 본질적으로 형성적인 산출의 실천이며, 그기서는 생의 사물이나 환경을, 그것이 어느정도는 견딜수 있는 생의 형식이 될 수 있도록 정비하는 것이 중요한것이다. 이 형성작용에 있어서는, 형성적인 제형식의 획득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는 실제로, 모든 인간은 [예술가]이던가, 혹은 그렿게 될 수 있는 것이며, --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과의 뚜렷한 차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일하는 자리나 주거의 조정. 복장의 나타남. 식사의 준비. 머리 모양이나 차종의 선택 같은, 가장 일상적인 종류의 조응행위인 것이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매우 명인적.숙련적.고가인것일 것이며, 조응적산출은 일산적인 미적예술인 것이다. 관조가 아니고, 상상도 아니고, 조응이야말로 개인적 내지 사회적인 취미의 첫쩨번 전문영역인것이다. 이 취미행동의 다양함은, 지향적인 조응생산의 3개의 형식에 눈을 돌릴 때 분명해진다. 포에이시스적인 조응생산은 그 객체를 가능한 한 매혹적인 방법으로 형성하고 배열한다 -- 직업적 혹은 개인적 [디자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자유선택적인 조응생산은 시적인 조응의 객체의 일정한 양식이나 견본속에서 아름다운 것,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를 뽑아 낸다. 수행적인 조응생산은, 많든 적던 아름다운 객체를 특별한 몸짓으로 혹은 특별한 기회에 제시한다던지 혹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를 사용한다. – 꽃을 선사 한다든지 선조전래의 액세서리를 좋아하면서 몸에 걸친다던지 조부의 타이프라이트로 편지를 쓰는 경우가 그렇다. 이들 행동이나 몸짓의 대부분이 부차적인 것이기는 해도 이들 모두가 생의 구상을 직관에로 나아가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이따금 어떻게 살아 갈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기존의 이미지의 더욱 나아간 발명이기도 하는 것이다. 구상의 직관에는 항상 그 역기를 그냥 두지 않으려는 직관의 구상이 감취어져있다. 미적조응은 고유의 구상에 대해 알고, 그리고 그 중의 하나를 손에 넣는 본질적인 행동양식이다. 지향적인 조응생산의 활동은, 실존을 양식화하는 행위다. 그 의미는, 고유의 생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 형식에 있어서 이 생의 바램의 형식은 일목요연한 것이 되고, 또한 그럼함으로 해서 보다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허나, 조응적지각과 조응적 호감의 양식이 당장에 그러함은 반드시 모든 것이 의도적 혹은 관습적인 양식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도시 공간안에서 벤야민의 유보자 ‘프라늘’은, 분명 극단으로 양식화된 실존이며, 조응적 사건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연한 것이 갖는 의외성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의도적인 형성작용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조응은 따라서 단지 만들어지는 것뿐 아니라 발견해 내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자연은 ---- 129페이지에서 [양식없는]거라고 명명했다 싶이 --- 목표를 정하지 않는 조응의 공간이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것이 인간의 목표를 정한 노력의 표현인 장소 – 정원.공원.초화가 장식된 창가 – 에 그 자신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정합적인 것이 우리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우리들이 일치하지 않는 한, 자연의 형성작용과 우리들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1432 no image 자연미학 3 - a 상상
1490 2018-02-01
a 상상 이 갱신된 개념은, 자연 혹은 예술과의 연관을 전적으로 떠나드래도 어떻게 해서라도 해 낼 것 같이 보인다. 허나, 이 外見은 믿을 바가 못된다. 라고 하는 것은, [생동적]인 상상대신 [예술적] 상상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이라고 하는 개념은 제3장에서 정식화된바와 같이, 예술과의 연관없이는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과 예술의 비교에서, 이 사실은 충분히 자극적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들은 미적실천이라고 하는 포괄적인 개념에서 분명히 예술이 아니고 자연을 제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달리 말한다면, 제약이 없는 미적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예술없이는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나, 자연은 없으도 고려할 수 있다. 미적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앞으로 보다 상세하게 규정되어 질것임을 의미함에,미적자연이라고 하는 것 보담 기본적인것이다. 이는 상상적미적능력의 일반적주제화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첫쩨번 귀결인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지금은 그냥 기록해 두는 것으로 그치고, 우선 상상적지각의 구조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저 한다. 여기서는 새로 기술될 것은 없음으로, 나는 이 관점에서 다시 새로운 고찰을 시작하고저 한다. 자연을 예술의 상상으로 잡는 논고는 미적상상의 거이 완전한 상을 밝힘에 이르렸다. ---- 허나 또한, 이는 수정된 고찰의 제2의 요점인데, 그것은 예술의 완전한 상을 밝히지는 못했다. 美的想像은 예술과의 연관없이는 성립되지 못하지만, 허나, 일정한 예술작품의 現前이 없이도 충분히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적상상은 예술없이도 성립된다. 우리들은, 호수를 호돌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 앞에 호돌라의 그림이 있는 것을 필요치 않는다. 사막의 미니멀한 연주를 듣기 위해 스티브.라이히의 [사막의 음악]을 실제로 사막속에서 들을 필요는 없다. 또는 보이스의 손에 의한 작품과 같이 보이기 위해서 市電 의 정차장이, 같은 타이틀의 보이스의 조각작품과 같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는 연애소설을 마음되로 공상하기 위해, 자신들의 연애를 사설로 쓸 필요는 없다. (또한 한번도 연애를 체험해 보지 않아도 좋다). 단지, 우리들이 필요로하는 것은 예술에 관한 일정한 지식이다. 상상적인 미적지각은, 반드시 직접일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 간접적으로는 예술작품과 연관되던가 우리들이 가까스로 예술이 되는 장합에도 그런것인데, 적으도 접적으로는 예술작품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가까스로, 가능한 예술의 장합에도 그렇치만, 세계를 예술의 양식으로 관찰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측에서 본다면, 예술의 상상적인 제구성이란 것이, 우리들에게는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곙측에서 보는 예술의 상상적인 제구성이란 것이, 우리들에게 이미 주어저 있기 때문이다. 投影的 이며 미적인 상상은 구성적이고 미적인 상상의 수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동시에, 이미 밝혀진바와 같이 예술의 생산적 상상은, 세계의 제현출 – 특히 자연에 대해서 예술이 작난끼 어리게 투영하는 능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투영적인 즉흥이 예술작품없이는 성립할수 없는것과 같이 예술작품의 신종의 구성은, 기지 혹은 아직 미지의 예술양식에 있는 세계의 지각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허나, 그것은, [예술적상상]의 미적기능이, 직접적 내지 간접적인 예술지각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되는 것이 아니고, 양자에 공통적인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수 있음이다. 상상적미적지각은, 예술작품에 간접적 내지 직접적으로 관련해 있으며, 그것은 그런 관련하에 제상황이나 제대상이 인간에 의해 친밀하기 쉽게 의미지평에서 일어나는 생생한 생동적지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형식의 지각은, 의미심장한 세계내 존재의 모사의 지각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예술은 이와 같은 제시물을 산출하고, 또한 예술의 모든 지각은, 두나로 즉, 이 계시물로써의 예술 및 그렇게 해방된 시형식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의 예술작품을 지각하는가, 혹은 마치 예술과 같이 보이는 것을 지각하는가, 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예술의 연속적인 제작품과의 관계는, 그 다발간의 가상의 관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예술양식속에서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 예술작품의 의미의 시금석이며, 예술에 의해 공표된 제형식과의 직대결은, 예술작품의 엄밀한 구성과 최종적으로는 관계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그리고 더욱, 즉 예술이 세계형성적인 시형식의 표현으로써 성공하면, 할수록, 그만큼 예술은, 통상, 생의 형태로써 혹은 관조의 대상으로써도 보다 성공적인것이다. 관조적/ 혹은 조응적인 제제의 장점의 전개에 의해 예술적상상의 작업을 하는 것은 예술적상상의 많은 제형식의 논리에 어울리는 것이다. 상상적 模寫에 의해 이루어진 모사의 초월적 이 논리는, 허나, 단지 무엇인가가 아니고 그기서 자기도 모사해 내는 바의 제객관에 따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논리는, 그것이 나태낼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이 현재 그렇게 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이 성질은, 그것의 투영적 현실화에 있어 필연적으로 상실된다. 그러함으로 자유로운 미적상상은, 예술과의 직접적인 만남에 비해 항상 또한 빈약한 것이다. <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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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 no image 자연미학 2
1726 2018-01-27
1. 미적인 것의 3개의 차원 – 앞장의 연속 강렬한 미의식을 불태우는 것은 항상 또한 자연임이 틀림없다 함은, 그 이면으로서, 눈여겨 보이는 것은, 자연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觀照. 照應經驗. 投影的 상상기도의 계기가 되는 것은, 자연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들 제직관들을 실현한다. 자연의 미적지각은 미적관찰이 갖는 기본적가능성의 어김없는 變種이다. 그것은 약한 의미에서나, 보다 강한 의미에서도, 변종인것이다. 우선, 제1장부터 제3장까지의 각제3절의 결과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연은 관조적. 조응적. 상상적인 지각 그 때 마다 특수한 활동영역이며, 非 – 자연적인 대상의 장합과의 상위는 여기서는 원리적성질인것이다. 바야흐로, 포괄적인 것으로써 자연미는 매우 특수한것이며, 바로 이로 인하여 특수한 것으로 매우 포괄적인 것이다. 이러함은, 우리들이 잠시 그 目線을 바뀌고, 일반적인 미적관찰의 이끌어주는 실(STRING)아니고 예술을 선택한다면 보다 명확해 질것이다. 예술의 제표현형식도 역시, 미학에의 범례적인 도입의 출발점이 였을 것이다. 허나 이러한 도입의 각각은 그 자체로 일면적인것에 머물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또한 전체를 고려해 넣는다 해도 그것은 불충분한 것으로 머물것이다. 말하자면, 미학이, 자연인가 예술인가 어느쪽인 것이 아니고, 여전히 자연과 예술로 한정되어 있는 한 그렇다는 것이다. 미적인 것의 통일성은 미적인것의 통일적 현상속으로 매몰되는 일은 없다. 미적지각은 자연으로부터나 예술에 의해서도 제공받지 못하는 제 대상들이나 가지각색의 기회에서, 다양하게 발화될 수 있다. 미적인것은, 재언한다면, 결코 통일성속으로 매몰되는 일은 없다. 미적인것은, 그 근본적인 지각형식의 분리와 결합, 무차별과 상호작용속에서 존립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미적인것은, 그 도입시에는 행동의 방향잡을 때 그 대상의 감성적 내지/ 혹은 감각적인 존재와 함축성에 의존하는 것 같은 지각은 미적인것으로, 라고, 압축시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개의 상세한 규정은, 미적인 경험이 그때 그때 그 아래에서 행해지는 지각적제관계의 분석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미적인 관계를, 이들 제관계안에서 자리매김하는 것, 이것이 지금에 와서는 매우 중요해 진다. 이 목적을 위해서 나는 미적실천의 세개의 차원에 관해 짧게 새로 설명해 본다. 이때 우리들은, 이 미적실천이 반드시 독점적우선적으로 지각의 행위가 아니란 걸 고려할 필요는 있다. 미적실천은 여태까지 흔히들 지각의 실천으로 일컬어저 왔으며 드물게 주연적으로 산출의 실천으로써 일컬어져 왔다는 것이, 자연미의 방향잡음에 따라 붙었었다. 미적제차원에 관해 일반화하려고 하는 새로운 기술은 이 일면성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허나 이 수정은 아마도 사람들이 기대할 정도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많은 활동영역에 있어 미적인 제작이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것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그것은 미적실천에 있어 그때 그때 비상한 관심의 적이 되는 것인바, 모-든 미적인 산출은 이에 반하여 산출되는 것과의 지각적 만남을 위해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산출이란 관점은, 개념적으로는 2차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다. 미적인 것의 산출에 특수한 것은, 미적형성작용이 이를 향해 생기하는 지각방식에의 회귀에 의해서만 잡히는 것이며, 형성되는 것은 그 미적형성작용에 대해 열려저 적합해 있는것이다. 미적시런은 따라서 산출의 실천을 이따금 전제하며, 또한 동시에 산출의 실천일경우가 드물지 않는 지각실천으로써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美的실천의 세가지 차원은, 미적대상의 세가지 기본적차원이 그것에 대응해 있는 것인데, (미적실천은 미적대상안에서 아름다운/숭고한 존재성 혹은 함축성의 매혹을 인정하던가 또는 거부하던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조적주의, 종응적현재화 및 생동적상상이다. 관조적주의는 공간내 – 사물에 관계해 있으며, 거기서, 인간의 신체적. 감성적인 지각능력은, 이것에 전념함으로써 현저한 것이 된다. 조응적현재화는, 개인적 내지 집단적 생의 가능성에 관계해 있으며, 거기서 그 가능성의 의미는 이 생의 연관안에서 직관되는 것이 된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동적상상은, 인간의 시형식과 세계와의 만남과 관계되는 것이며, 거기서 그 움직임에 의해 새롭게 그려내는 제시물의 실현가능성이 동시에 의식되는 것이다. 관조적 태도와 상상적지각은 모두 산출해 내는 행위일 것이며, 혹은 그러한 것을 품고 있는 것이다. 조응적지각은 또한 동시에 행위세계의 결정적인 형식이며, 이따금, 이러한 형식의 인위구조에 끼어 넣는다. 세계적 지각은 또한 동시에 세계상을 형성하는 시형식의 건설적인 문절화이며, 어느쪽이던, 그러한 인공물에 끼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미적인것의 제2, 제3의 기능에서는, 활동적인 형성작용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는, [현전화]나 [상상]이라 하는 표현 그 자체속에 이미 포함되 있기 때문에, (양자는, 생산적행위와 같이 수용적행위에도, 관계한다) 다시 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멀할수 도 있다. 미적실천은, 관조적주의이던가 조응적현전화이던가, 혹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동적상상이던가, ---- 혹은 동시에 그중의 몇 개일것이다.
1430 no image 자연미학
1530 2018-01-22
책 소개 [自然美學 “EINE ASTHETIK DER NATURE” 1991년] 말틴. 젤(Martin Seel)著 ‘일본 우니벨시타스 총서’ 1002번에 등제되어 있음. 現代美學의 새로운 地平을 열다 “왜 우리들은 자연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는가? 자연을 배려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보호로 이르는가? 왜 자연미는 인간적실존이 그 생을 슬기롭게 성취하도록 그 범례적인 장소가 되고 있는가? 자연을 미적으로 지각하는 가능성을 체계적. 규범적으로 기술하여, 미학과 윤리의 근원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 본다” – (책 소개의 말) 序 자연미학이 다루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에 대해서 왜 호감을 갖게 되는가? 라고 하는 그 이유에 다름 아니다. 자연미학은, 인간이 대체로 외적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를 간결하게 기술함과 동시에, 자연이 생활세계로써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간이 매료되는 이유란 실제적으로는 어떤 것인가를 아야기 하려고 시도한다. 자연미학은 인간에게 어떤 미적가치를 갖게 되는가를 해명하고 그로 하여 자연을 존중하고 보존하기 위한 각별한 이유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그것은, 그러한 관심이 자연적세계에 대한 비도구적으로 관계를 갖게 하고 응호하는데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응호에 미학이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미학이 자연미를 今日的인 경험에 입각하여 실제로 말을 통해 시도해 볼 수 있을 때 만이다. 우리들이 외적자연에 대해 품게 되는 근대적인 호감의 근거란 어떤 것인가? 더 이상 내적인 의미가 믿을 수 없는 지각에 대해 자연의 감성적인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우연적인 형태의 영역이 어떻게 하여 인간의 전일적인 삶의 가능성이 되고 있는가? 미적자연은 예술의 원상인가? 혹은 그 모상인가? 왜 자연미는 [인간적] 실존이 그 삶을 슬기롭게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범례적인 장소가 되고 있는가? 자연을 슬기롭게 다루는 것이, 말하자면, 인간세계의 보호에 귀착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주로 18세기에 정식화된 고전적인 회답을 단순하게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회답을 시도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본서의 회답은, 자연을 미적으로 지각하는 가능성을 체계적 더한 규범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기술에는 인간에 의한 자연관찰의 역사도 포함되겠지만, 본서에는 그러한 역사는 기술되지 않으며, 또한 자연에 대한 호감의 이론의 역사도 기술되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자연미를 세속적으로 변명하려는 것이다. 허나 그러한 시도는 그것이 약속하는 이상의 것을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자연미학이 자연을 다루며 예술 및 기타의 미적영역을 다루지 않는다면, 자연미학은 그 대상을 놓치는 것이 될것이다. 자연미학은 그 대상의 특수성을 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자연미학이 그 주제를 전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일반미학의 견취도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때는 이미 미학의 콘텍스트도 넘어서 있게 될 것이다. 자연미학을 상술한다면, 그것이 삶의 긍정적인 점에 관한 일반윤리학의 일부가 될 것이 판명될것이다. 본서의 결정적인 테-제는 이와 같이 내용상 수용적인 구조로 되있다. 자연미가 파악되는 것은 그 안에서 인간의 하나의 범례적인 삶의 가능성이 직시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그러함으로, 미학의 탐구는 행복론적윤리학을 시작하는 것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서론에서는, 미적인 자연관계와 그 철학적고찰과의 제관계을 간략하게 논하고있다. 서론에 이어 세개의 장에서는, 미적으로 지각되는 자연의 근본형식이 하나 하나 논해져 있고, 제1장에서는, 자연은, 의미소개적 방식으로 현출이 요동치는 공간으로 제출되며, 제2장에서는 우리들의 생활을 모양짖는 장소로써 그리고 있으며, 제3장에서는 예술작품과 그 양식을 제재로 하는 즉흥으로써 자연이 묘출된다. 제4장에서는 이들 세개의 관점의 상호 연관이 탐구되어 있다. 풍경현상을 시야에 넣고 미적자연의 총일성 이론이 구상되 있다. 이들을 이어 양장 및 결론은 공히 [선행하는 서술의] 일면성을 수정하는 방법으로 이끌어 간다. 즉, 그 때 마다, 고찰의 지평이 확장됨으로써, 자연미학의 기초를 논한 제장에서 설명되지 못했던 제전제 및 거기서 제거되지 못했던 제제약이 밝혀진다. 제5장은 자연미를 미적예술 및 기술적예술의 중요성에 직면케 한다. 제6장에서는 선행하는 분석의 윤리적의미가 전개되며, 자연이 도덕적문제로 논구된다. 결론으로 미적자연의 윤리적의미가 상대화되며, 잘 성취된 삶의 형식에 관한 일반적언명이 갖는 신분이 음미된다. 제1장에서 제5장에 걸쳐서는, 콘스탄쯔대학철학부의 1989/90년 동학기에 교수자격논문으로 수리되었다. 앙겔라.케프라-, 크리스트.멘케=에카스, 칼르로스.베래타, 및 알프레히트.뷜마-로부터 받은 많은 의론과 조력에 감사한다. 율겐.하바마스와 한스.로벨트 야우스는 비판적인 코멘트를 보내 주었다. 많은 실무상의 일로 베른스트.릭데슐와 말틴.프랑크는 나를 지탕해 주었다. 벤야민과의 유보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지루한 감을 주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목차 저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1, 원상인가 모상인가 2, 美的관계 3, 자연학은 어떤 자연을 다루는가 4, 윤리학으로써의 자연철학 5, 미학의 용어법에 관해서 제 1장 관조의 공간으로써의 자연 1, 현출의 희롱 2, 의미를 결한 세계 3, 관조적 의식 4, 관조의 형이상학과 관조의 이데올로기 5, 관조적 판단 제 2장 조응하는 장소로써의 자연 1, 생의 반영 2, 형성하는 공간 3, 조응적의식 4, 조응의 형이상학과 조응의 이데올로기 5, 조응판단 제 3장 상상의 무대로써의 자연 1,예술이라고 하는 가상 2, 세계와의 희롱 3, 상상적의식 4, 예술의 형이상학과 예술의 이데올로기 5, 상상적판단 제 4장 자연지각의 시간 미적자연의 통일성 양의적 경험 자연의 규범적개념 풍경의 자연의 회고 자연풍경. 문화풍경. 도시풍경 제 5장 예술의 위대함 1, 미적인것의 세가지 차원 2, 예술작품의 통일성 3, 미적자연과 미적예술 4, 기술적예술의 기간 5, 미적자연의 상호주관성 제 6장 자연미의 도덕 1, 자연미학에서 자연윤리학으로 2, 윤리에 관한 구별 3, 좋은 삶의 세가지 관점 4, 윤리적 경험으로써의 미적자연 5, 도덕적 문제로써의 자연 저론 자연고찰의 한계 1,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도 좋다 2, 두가지 상호작용 3, 좋은 삶의 추상개념 4, 善과 옳 바름 5, 외부에의 눈짓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1. 原像인가 模像인가 먼저 최초로 자연은 예술의 원상으로 자리 매김되고, 그 후에 예술의 모상으로 바뀠다. (원상과 모상의 구별을 제대로 이해할 것.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사를 하나의 명제로 삼는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제는 미적직관을 둘려 싸는 아주 오랜 역사를 요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일반이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긴장감도 표명 하고 있다. [예술]은 예술가가 제작하는 예술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천에 의한 모-든 종류의 기술적숙달의 성과와 제도화된 규정도 포함한다. 예술과 자연이란, 그 인식과 행위에 있어, 標準的審級의 역할을 맡고 있는가를 둘려 싸고 경합한다. ( 自然美術이란 표현은 위의 분석과는 처음부터 상반되는 작위적이고 인간위주의 자연인식에서 나오는 착각을 나타내고 있다. 말틴 젤의 [자연미학]의 ‘미학’이란 표현은 자연미술이란 표현과 어긋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자연미술은 자연이 마치 미술인양 착각을 하고 나온 표현이다. ) 2017.12.7 인간의 실천의 모상이 되어 진다. 인간의 실천과 자연의 존재를 포괄적으로 모개하는 실은 끊어저버렸다. 2017.12.09 [원상에 대한]에 대한 근본적인 양극성은, 고대이후 자연에 대한 사안을 펄쳐저 왔고, 더욱 다양한 선택지로 분기된다. 자연은 일체의 인간의 이성활동이 모범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행위주체인가, 아니면, 이성의 모법이 보이는 것은, 자연을 일체의 활동에 있어 뜻되로 되어지는 객체가 되는 능력이서인가, 자연에서 부터 그 법칙을 들어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법칙을 강제하여 자연에 그 구조를 자백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고관찰이 얘슐가의 발안한 것에 따르는 것인가. 예술가가 발안한 것은 자연의 산물에 따르는 것인가. 12.11 제5장 예술의 위대함 p.263 風景的自然의 이론과 더불어, 우리들은 제1의 종결에 이르렸다. 풍경의 자연에 대한 고찰은 미적자연의 모-든 제규정을 이어가고, 자연미의 포괄적인 현상을 향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미의 포괄적인 개념을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풍경이란 개념이, 순수한 자연풍경을 더욱 넘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미에 있어 일시적인 통일을 찾아 내는 3개의 미적차원이, 미적지각일반의 3개의 차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연미가 탁월한 미적인것의 통일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미의 특수성으로 봐 진다. P. 263 예술미에 대한 충분한 고려없이는 자연미는 미지의 위대함에 머물려 버릴것이다. 양자의 위대함의 직접적인 대결없이는, 도대체 어느쪽이 다른쪽의 모범인가에 대한 물음에 타당한 해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1. 미적인것의 3개의 차원 자연미의 분석은, 일반미학의 도입이기도 했다. 자연이 실제로 포괄적인 미적현상이라면, 그렇게 될 수 박에 없는 것이다. 미적지각의 기본적가능성은, 자 자졍적인 대상의 장합과는 다른 점은 여기서는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제4장의 결과가 보여주는 바 같이 – 그 통일체에서의 자연미는, 이들 세가지 차원의 연미를 예로 표현되며 – 또한 그렇게 하여 최초의 제고찰이 이해가능했던 것이다. 자연에의 미적연관을 알기 위해서는, 3가지 지각방식을 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자연과 관련되는 지각방식이 아니다. - 다음 편에 이어짐. <iframe src="http://engdic.daum.net/dicen/small_search.do?endic_kind=all&m=all&q=%EC%B1%85%20%EC%86%8C%EA%B0%9C%C2%A0%20%C2%A0%20%5B%E8%87%AA%E7%84%B6%E7%BE%8E%E5%AD%B8%20%E2%80%9CEINE%20ASTHETIK%20DER%20NATURE%E2%80%9D%201991%EB%85%84%5D%0A%0A%C2%A0%EB%A7%90%ED%8B%B4.%20%EC%A0%A4(Martin%20Seel)%E8%91%97%C2%A0%20-%C2%A0%20%C2%A0%E2%80%98%EC%9D%BC%EB%B3%B8%20%EC%9A%B0%EB%8B%88%EB%B2%A8%EC%8B%9C%ED%83%80%EC%8A%A4%20%EC%B4%9D%EC%84%9C%E2%80%99%201002%EB%B2%88%EC%97%90%20%EB%93%B1%EC%A0%9C%EB%90%98%EC%96%B4%20%EC%9E%88%EC%9D%8C." frameborder="0" scrolling="yes" style="width: 100%; height: 100%; background-color: rgb(255, 255, 255);"></iframe>
1429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전제를 마치고
2029 2017-11-21
[20세기의 미술과 사상] 씨리즈, 轉題를 마치고. 2016년 10월 31일부터 [대안 미술공간 소나무 갤러리]의 칼럼에 약 일년 동안 번역을 하여 전제했던 글로, 이 글의 원전은 일본 [미술수첩사]가 2002년 3월 20일자로 발행한 [20세기의 미술과 사상]에 관한 특집이다. 총 47인의 현대사상가의 글과 여기에 대응하는 일본의 석학들을 그 전문영역에 따라 배정하고 주제와 연관시켜 소개하고 있다. 執筆者紹介欄을 보면, 현대 일본의 지성들이 모두 동원되다 싶이 하여 일본의 지적 저력을 실감케 해 준다. 미술이 한 사회의 문화의 중심적 근간을 이루며 그것이 곧 인류문명의 보편적인 대세속으로 녹아 들어 간다고 보면, 이 특집은, 바로, 그러한 맥락을 제대로 짚고 있다. <편집-목차란에 실린 글> Art and Ideas in The 20th Century 시대를 인도한 사상가 47인 현대미술의 비평 ----- 새로운 파라다임 “본서는 20세기미술의 사상의 확립에 공헌한 미술사가, 미학자, 비평가, 철학자 등 47인을 선출하여 각각의 언설을 소개하면서 전체로써는 ‘20세기미술’을 독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가지각색의 미술사적인 접근에 더하여, 여기서는, 시대나 문화의 양상을 읽으 내려는 적극적인 연구자들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에서 번역이 되지 않으며, 소개가 들 된 중요한 사상가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가능한데로 소개하도록 노력했다. 물론, 여기에 다루지 못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양해를 기대하며, 이 기획이 우리나라의 미술환경에서 활성화의 일조가 되기를 기대하는 바다.” 谷川屋{감수} 西野眞季[편집협력] 동원된 석학들과 일본의 해설자들의 면면을 다시 훑어 본다. 소개되는 원작가 소개글 제목 소개글 집필자 시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 “작품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연 정신분석” 다니가와 아쯔시 쟉.라캉(Jacques Lacan) – “회화의 기능의 근본원리를 묻다” 아오야마 마사루 구스탑. 루네. 호케(Gustav Rene Hocke) “마니에리슴을 예술현상전반에 적용 다니가와 아쯔시 아로이스. 리글(Alois Riegl) “미술사에서 뷘학파 최대의 공로자” 미야시다 마고도 하인릿히. 뷀프린(Heinrich Wollflin) “순수한 감상형식으로써의 미술사” 미야시다 마고도 엘빈. 파노브스키(Elwin Panofsky) “세계의 정신까지 독해해 내는 이코노로지-를 확립” 잇죠.가스히코 E.H. 콤브릿지(E.H. Gombrich) “심리학. 사회이론을 원용하면서 미술을 독해한다” 마즈에다. 이다루 그로드. 레비. 스토로우스(Claude Levi Strauss) “기호론으로 예술을 독해한 구조주의자” 시노하라.모도아끼 메이야. 샤피로(Mayer Schapiro) “현대미술비평을 역사연구로 삼고 자리매김하다” 마즈에다.이다루 료자.프라이(Roger Fry) “포마리즘비평가로써의 신화” 가와다 도끼고 그라이브.벨(Glive Bell) “바뀌친 포-말리즘의 [교의]” 가와다 도끼고) 올데가. 이. 가셋드(Jose Ortega y Gasset) “선구적인 20세기예술론” 다니가와 아쯔시 도날도. 프레쯔이오지(Donald Fresiosi) “[미]를 [과학]하는 근대미술사학의 부곡을 지탕함” 스쯔끼 마리꼬 에우에니오. 돌즈(Eugenio D’ors) “20세기 미술에 깔리는 바로크개념” 다니가와. 아쯔시 안드레 브루턴(Andre Breton) “눈은 야생의 상태에서 존재한다” 다니가와. 아쯔시 죨즈 바다이유(Georges Bataille) “물질의 강한 힘에 의해 인도된 [모양없는 모양] 지바.후미오 밋셀 레리스(Michel Leiris) “피카소에서 베이콘으로, 창조행위로써의 비평” 지바.후미오 로-란 발도(Roland Bartthes) “Signifiant, 혹은 빠져 나가는 알벨찌누” 스즈무라 가쯔나리 작끄 데리다(Jacque Derrida) “있는지 없는지 알쏭달쏭한 베일” 스즈무라 가쯔나리 질 도울즈(Gilles Deleuze) “차이와 표층의 철학” 다니가와 아쯔시 밋셀.후-코(Michel Foucault) “시각문화의 제도성이나 이데올로기를 다시 묻다” 아오야마 마사루 쟝 프란소와 리오탈(Jean-Freancois Lyotard)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모-던에로..시대를 표류” 시노하라 모도아끼 윌리엄 루빈(William Rubin) “미국현대미술의 융성에 기여” 오사끼 신이치로 하롤드 로젠버스(Harold Rosenberg) “Action Painting의 명명자” 오사끼 신이치로 그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포마리즘비평의 확립자” 오사끼 신이치로 마이켈 프리드(Michael Fried) “포마리즘비평에서 최상의 성과” 오사끼 신이치로 로자린트 크라스(Rosalind Krauss) “20세기의 미술의 역사 그 자체를 재검토하다” 고니시 노부유기 뒤엘리 드 듀-브(Terry de Duve) “뒤샹이란 어떤 자인가” 다니가와 아쯔시 T. J. 크라-크(T.J. Clark)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의 사회사” 다니가와 마사유기 폴 크라우즈(Paul Crowther) “포스트모던에 있어서의 작품의 미적가치론의 소생” 가와다 도기고 노-먼.브라이슨(Norman Bryson) “뉴-아-트 히스토리-의 기수” 스즈기 도기고 이브 알랜 보와(Yve-Alain Bois) “모더니즘이 억압했던 표상 시스템을 분석하다” 다나가 마사유기 한스 벨딩(Hans Blting) “미술사의 파라다임 쉽트” 마스터 도기유기 아-사. C. 단토(Arthur C. Danto) “팝 아-트를 철학자로써 논하다” 스즈기 마리고 할 포스트(Hal Foster) “저항의 포스트 모더니즘” 구레누마 노리히사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카메라라고 하는 미디어가 탄생시킨 지각의 미학” 마에가와 오사무 데오돌 아드르노(Thodor W. Adorno) “”자본주의하의 문화비판의 실직한 선구자” 미나미 쇼-고 마-살 막르한(Marshal Mcluhan) “미디어는 멧시지이다” 아가미 마리고 에드워-드 사이도(Edward W. Said) “역사와 문화를 대상으로 부상시키는 비판의 눈” 다게나가 히도시 보-리스 구로이스(Boris Groys) “전위 예술이란 [새로운 것을] [수집하는 것이다] 라고. 아사누마 게이소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소비사회에서 소멸하는 예술을 고발함” 쯔가하라 후미 W. J. T. 밋첼(W.J.T. Mitchell) “화상이 시각을 능가하는 현대의 시각문화를 비판” 스쯔기 마리고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역사적 변전을 거듭하는 세계시스템의 끊임없는 해석자” 미나미 쇼-고 기-도우볼(Guy Debord) “자본주의 사회와 예술의 일상을 비판” 이사라시 다로 볼 뷔리리오{Paul Virillio} “정보문명이 갖는 부정적측면을 각성시킴) 요시오가 히로시 린다 녹크린(Linda Nochlin) “미술사에 젠다-의 시점을 초래함” 사가가미 게이고 그리젤다 보록(Griselda Pollock) “휘미니스트에 의한 미술사의 파라다임쉽트” 사가가미 게이고 발행사: ㈜ 미술출판사 ISBN4-568-40063-5 C3070 ©Bijutsu Shuppan-Sha, Ltd, 2002 http: //www.bijutsu.co.jp Printed in Japan
1428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 누락분
1899 2017-11-13
*漏落分 구스탑 . 루네. 호케(Gustav Rene Hocke) “마니에리슴을 藝術現像전반에 적용” 로벨트. 그루티우스는, [유럽문학과 라틴중세]에서 마니에리슴을 [아마도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모-든 문학적경향의 공분모]라고 불렸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고전주의에 대한 補足現像]이며, [유-럽문학의 하나의 定數]이다, 라고. 그루티우스의 제자였던 구수탑.루네.호케는, 그의 [迷宮으로써의 세계]에서, 이 의론을 예술현상전반에 일거에 적용하여, 고전주의와 마니에리슴을 인간성의 두 [原身짓]이라 규정하고, 양자의 관계를 아래와 같은 계열간의 대립으로 번역한다. 구조 – 현상, 남성적 – 여성적, 로고스 – 비밀, 자연적 – 기교적, 승화 – 폭로, 평형 – 불안전, 통일성 – 분열성, 통합 – 분해, 경화 – 해체, 성격 – 개성, 아니무스 – 아니마, 형태 – 외곡, 위엄 – 자유, 질서 – 반항, 원- 타원, 관습 – 인공성, 신학 – 마술, 교양학 – 신비학, 밝음 – 비밀 -------. 하위계열에 표시한 마니에리슴의 규정을 보면, 그것이 바로크 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같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호케는 도울즈의 바로크론에 22종의 [바로크]이 올려진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나치게 풍부함으로 해서 오는 공혹]을 갖으 온다고 비판하고 있다. 호케는 역사적 바로크양식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바로크에 관해서는 판단정지한 모양새로 의론을 밀어 간다. 크라식을 한쪽으로 두면서 다른 한편 바로크라 하는 [아이온]이 오는가. 니면, 마니에리슴라 하는 [원신흔들기]가 오는가, 라고 하는 문제는 그러함으로 해서 시점의 상위에서 뿐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의 미결정 그대로이다. 헌대, 호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마니에리슴의 신화적 조상은 마르시아스이며, 위엄과 광휘에 넘친다고 하면서, 지금으로써는 약간 한물간 존재로 되어, 고전주의의 선조는, 말하자면, 아포론이다]. 사듀로우스의 한사람인 마루슈아스는, 피리를 잘 부는 자신의 기술을 믿고, 불손하게도, 피리의 명수 아포론에 악기연주의 경기를 도전한다. 승자는 폐자를 어떻게 다루드래도 좋다는 약속으로, 무-샤를 심판으로 하고, 경기를 진행했지만, 쌍방 모두 비슷하게 훌륭한 연주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아포론은 악기를 거꾸로 해서 불수 있는가라고 마루샤스를 도발했다. 견검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피리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폐한 마르샤스를, 아포론은 소나무에 묶고 매달아 놓고 전신의 껍질을 벗겼다고 하였다. 호케에 의햐면, 마르슈아스는 또 카인이며 캬리반이며 아포론은 또 아벨이며 아이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전자들은 후자들을 끊임없이 타도하려고 생각했다. 헌데, [은총을 입는]자 아벨은 한순간의 죽음의 뒤에 가서 한층 더 광휘에 빛나는 소생을 할 것이다]. 마니에리시슴은 고전주의를 우선 平板化에서 살려 내고 그런 후에 보다 강렬한 표현수단을 고전주의에 획득케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타원의 종족, 달의 종족]인 마르슈아스는 [원의 종족, 태양의 종족]에 지나지 않는 아프론에 대해 [불가결의 보각을 이룬다]라고 하는 것이다. 호케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마니에리슴 시대로 다음의 다석가지를 들고 있다. 알렉산드리아기(전 약350년-150년), 로-마의 [白銀라틴]시대(14-138), 1520년부터 1650년에 이르는 [의시적]마니에리슴시대, 더 나아가서, 로망파, 특히 1800년부터 1830년에 이르는 라틴계의 로망파, 최후로, 1880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시대. [미궁으로써의 세계]는, 이 [의식적] 마니엘슴의 세계를 종횡으로 논하며, 팔미쟈니.노-, 알친 보래도, 몬스.지지트리오라고 하는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안했던 화가들에 조명을 데며, [蛇狀曲線形], 이나, [환상모방]과 같은 마니엘슴 특유의 개념을 밝히면서 자유롭게 시대를 초월하는 점에 매력이 있다. 20세기의 예술가들, 키르히나-.칸딘스키, 쿠레, 삐카소, 뒤샹, 엘른스트, 디.키리코, 단키, 다리, 그리고 특히 파브릿쯔. 그래릿지가, 마니엘슴의 개념에 들어 간다. 호케에게는, 슈리얼리즘 란 것은, 마니엘슴라고 하는 [원신 짓]의 20세기적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 호케는 [미궁으로써의 세계] 2년후에 [문학에서의 마니엘슴] (1959)을 냈다. 스승 쿠루티우스의 일을 기점으로 삼고, 마니엘슴개념을 범 유럽적으로 확대한 실로 놀라운 서책이다. [미그나. 그라에기아](1960)는, 희랍적 남부이테리편력]의 부제가 말하고 있듯이 이 시대의 희대의 석학의 지중해세계에로 지향한 고고학적기행소설이다. 이 사람의 지적탐구의 헥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암시하는 적절한 읽을 꺼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케는 1974년에 [절망과 확신 20세기말의 예술과 문학을 위해]를 公간했다. [미궁으로써의 세계]가 마니엘슴개념을 가지각색의 각도에서 다루면서, 그 경이의 샹상에 자유롭게 놀아난 것이었다면 본서는 제2차대전이후의 특히 60년대이후의 20세기예술의 대부분의 양상에 [불안과 절망]을 보게 되는, 철저한 페시미즘에 물든 책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도르노의 [미힉이론]과 通底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호케는 이 [불안과 절망]의 극점에서 [확신]이 나오리라는 것을 논증하려 한다. [절망-확신]의 긴장관계가 20세기말의 예술에서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 가 본서의 주제가 되어 있다. 현대예술의 문제를 확대한 知의 지평상에서 저상에 올리는 호케의 논점은 새삼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예술을 마니에리슴개념과의 관계로 생각하는 가능성 혹은 불가피성을 나타낸 것으로, 호케는 각별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약력 * 1908년 브릿셀에서 태어나다. 본대학에서 E.R.그르티우스에 관한 글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이후 작가. 비평가로써 활약. 87년 몰. 주저 * [미궁으로써의 세계] 1966. [문학에 있어서의 마니에리슴] 1971. [절망과 확신] 1977. [마그나 그라에키아] 1996. [유-럽의 일기] 1991.
1427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1609 2017-11-05
50번쩨(最終回) 그리젤다. 보록(Griselda Pollock) “훼미니스트에 의한 美術史의 파라다임의 變革” 그리젤다. 보록은, 린다.녹크린과 나란히 훼미니즘, 젠더의 시점에서 미술을 새로 잡아 내려고 하는 현대의 대표적 논객의 한사람이다. 1970년대의 훼미니즘운동과 같은 시기에, 여러가지 논고를 연 이어 전개해 왔으며, 그 가장 두드려진 특징은 개별의 작품이나, 작가를 다시 읽음으로써 미술의 역사의 일부를 하나씩 새로 쓴다는 작업도 그렇거니와 오히려 전체를 포괄하는 시점의 묘색이, 그 논술 넘어 아주 큰 목표로 잡혀 있었다. 일반적으로 훼미니즘의 관점에서 미술의 새로 읽기는, 70년대 기타의 훼미니즘운동과 연동하여, 우선, 역사속에 매몰되 있는 여성미술가의 발굴을 첫 단초로 삼고, 과거에 있었던 여성예술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재능을 상찬하는데서 부터 시작했었다. 허나, 80년대 들어 와서는, 이러한 방법에 의한 여성예술가의 역사를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여태까지의 남성의 視座로 형성된 미술사에, 빠져 있는 여성 예술가를 첨가하고 [보족]하는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 혹은 여태까지의 미술사가 [백인 남성의 미술사]라고 한다면, 이를 180도 되집어서 [백인 여성의 미술사]로 바뀌 쓰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많은 휘미니스트들이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데체, 여성판의 레오날드나 미칼란제로를 만드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으로는, 여성들 역시 남성의 과오를 되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보록은 남성들이 여태까지 행해 왔던 일방적인 미술의 역사의 구축을 두번 다시 여성이 되풀이 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알고, 여태까지와는 전적으로 다른 파라다임의 제안이야 말로 이러한 파라독스를 분쇄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거장]과 [작품]을, 역사를 따라 줄을 세운다는 남성들이 구축해 왔던 미술사의 규범의 틀 그 자체를 새로 물어야 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보록의 시선은 이리하여 기존의 미술사의 틀의 타파와 새로운 파라다임의 제안으로 향하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주목 해 봐야 할 것은 보록이 목적하였던 바 결코 종래의 미술사학이라고 하는 쫍은 영역속의 파라다임의 변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록은 분명하게 그녀 자신의 연구가 [새로운 미술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보록은 이 경우에 미술사 라고 하는 개념조차 벗겨 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보록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훼미니스트미술사]가 아니라, 복수의 [미술의 역사]에 휘미니스트로써 개입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본다면, 그것은 [문화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새로 쓰게 되는 파라다임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라다임의 변경의 주장과 묘색은, 저작물들이 쌓일때 마다 강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는 바, 허면, 보록이 주장하는 훼미니스트의 시점의 개입에 의한 아-트의 역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보록의 주장에 의하면, [훼미니스트에 의한 개입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만드는 측에서 보는 여성의 연구이다. 로지카.바-카-와의 공저 [女. 아트. 이데올로기] 에서는, 고대나 중세부터 시작하여, 소프니소바.앙길라소, 알데 미지아. 젠 디렐스키, 유딧트.라이스텔, 아드라이트. 라비유=귀알, 앙게리카.카프만, 로-자. 보늘, 베르트.모리죠, 메아리.카삿트, 슈쟌느.베라톤, 레오놀.휘-니, 메렛드.오펜하이머, 마리솔.에스코발, 에봐.헷세, 메아리. 케아리 등 현대에 이르는 수 많은 여성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활동이, 상세하게 다루어저 있다. 그녀들의 작품을 진지하게 분석함으로써, 여성의 예술에 관해 한결 같이 되푸리 되던 [여성다움]이라고 하는 스테레오 타잎의 비평이, 부각되어 왔다. 단지, 이는, 어디까지나, 여성 아-티스트의 역사가 아니고, [여와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상호관계를 분석한 것]이라고 말한다. 1981년의 [시선과 차이 – 훼미니즘로 읽는 미술사]에서도, 만드는 자의 입장의 여성을 연구하는 것에서는, 시점이 바뀌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여기서는, 메아리.카삿드와, 베르트. 모리죠를 중심으로, 그녀들의 작품을 19세기 후반의 근대 도시 빠리의 사회적 배경안에서 비추어 내고 [여성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자체에, 계급적 함의가 있었음을 논하고, [훼미니스트에 의한 개입이, 단순한 여성의 문제에 머물음이 없이, 계급이나 인종의 문제에 관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인상파를 특징짖는 [현대생활]을 그린 회화가 섹슐알리티를 둘려 싼 제문제와 연결되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 해서 모더니스트의 미술사관의 偏向을 지적하고 있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더욱이 이 저작에서는, 라파엘전파가 그린 [기호로써의 여성]의 문제를, 정신분석적 해석을 통해 논하고 있는바, 이는, 최근의 보록에 특히 현저하게 접근하는 것을 뜻한다. 여하턴, 보록의 언설의 매력은,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여성의 역사를 불평등과의 투쟁의 역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여성들이 여성임으로 해서 곤난한 상황을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문제 삼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헌데, 훼미니즘의 사상은, 어떻튼 탁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사상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실제 보록의 경우도, 실천가로써 70년대의 훼미니스트.아-트에 관해 언급할 뿐 아니라, 가지 각색의 여성들의 예술활동의 장을 설립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넓혀 갔었다. [브릿팃시.훼미니스트 아-트 앤드 히스토리즈 넷워-크]의 설립과 운영에서 보여준 공헌은,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보록의 새로운 규범, 파라다임의 묘색의 의지는, 이렇게 저작과 활동의 양면에서 아직도 여전히 착실하게 의욕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때로는, 그 난해한 문장과 혼란스려운 이론의 전개는, 자주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허나, 경우에 따라서, 훼미니스트의 시점에 의한 미술사나, 리비죤니즘의 미술사가 빠지기 쉬운 측면에 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미술사의 틀을 넘어선 장대한 파라다임의 제안에 도전하는 보록의 자세에는, 가지각색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약력: 옥스포-드 대학에 이어 런던대학 부속 코들트 연구소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배움. 현재 영국의 리-즈 대학예술학부 교수 및 동대학 문화연구소 소장. 주저: [여. 아트. 이데올로기](로직카.파-카와의 공저) 1992. Old Mistresses: Women, Art and Ideology(1981 London: Pandora Press) [시선과 차이] 1998 일본. Vision and Difference – Feminity, Feminism and the History of Art(1998 London: Routhledge) Mary Casatt: Painter of Modern Women(1998 New York : Thames and Hudson) Differencing the Canon : Feminist Desire and Writing of Art’s History(1999 London : Routledge) Looking back to the future : essays on art, life and death(2001: G + B Arts International).
1426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1681 2017-10-31
49번쩨 린다. 녹크린(Linda Nochlin) “미술사에 젠더-의 視点을 도입하다” 린다. 녹크린은, 그 전적으로 새로운 視点에 입각하여 미술 연구에 크-다란 족적을 남긴 제1인자로, 후세에도 기억되고 있는 가장 위대한 현대 美術史家의 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녹크린이 쏘아 올린 新視点으로 무엇 보담 중요한 것은 훼미니즘, 젠더-(gender)로 부터의 접근이다. 대체적으로 남성위주의 연구자들에 의해 다루저 왔던 미술작품은 여성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1970년대 다방면으로 전개한 여성해방운동과 유동하는 모양으로 진행한 녹크린의 착실한 연구는 이후 다양하게 발전해 가는 젠더-의 시점에 의한 새로운 미술사사연구를 선도하는 것이 되었다. 녹크린의 초기의 연구는, 역사속에서 매몰된 여성 아-티스트의 문제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미술의 영역을, 개관했을 때, 녹크린의 의문은 먼저, [왜 여성의 대예술가는 나타나지 안했던가]에 도달한다. 녹크린은 여성의 대예술가가 나타나지 안 했던 이유가, 여성자신의 예술적 재능의 결함으로 귀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그녀들을 역사속에서 배제하고 엄폐해 왔던 미술사의 저자들이었던 주로 남성들의 미술사가들의 문제였음을 먼저 고발한다. 당시, 대학의 미술사의 택스트의 定番으로 사용되었던, [미술의 역사]의 저자 W. 쟌송은, [한권의 책으로 미술사를 나타내려면 다루어야 할 여성 아티스트는 한사람도 발견하지 못한다]라고 호언하고, 한사람의 여성 아-티스트도 수록하지 안 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이 미술의 역사가, 남성의 일방적인 이론에 의해 재구축된 작위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 냄에, 1976년 녹크린이, 안. 사쟈란드.하리스와 공동으로 계획한, [여성 아-티스트 1550 – 1950]展은, 여태까지 미술의 역사에서 쓰여지지 안했던 여성 아-티스트들에 빛을 조명했던 것으로, 가장 중요한 이와 같은 종류의 작업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녹크린의 시점의 귀중함은, 오히려, 이하의 문제 제기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여성들이 가지 각색의 사회적 [제도]나 [인습]에 의해, 말하자면, 역사에 남을 만한 대작으로써의 공공미술작품에 손대는 아-티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사회구조적문제가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부각시켰던 사실이다. 공방이나 미술학교에서 행하는 공식적인 미술교육에서 여성들이 불과 100년전만 해도 문전 박대를 당했었다는 사실, 가정안에 갇혀있었던 여성들이, 가정내의 수공예품에서 발휘했던 미술적재능은, 공공미술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오늘날의 미술사관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잡아 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시점을 축으로 하여 녹크린이 연 이어 잡아 냈던 미술작품이나 아-티스트에 대한 해석들은,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측면을 밝혀 내고 여태까지의 개념들을 전복시키며 신선하고 자극적인 충격을 안겨 준다. 그루배의 연구에서 출발했던 녹크린이 여태까지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구체적으로는, 드라구라와, 제-리코, 미레-, 라파엘전파, 마네, 드가, 카삿드, 모리죠, 르느왈, 봔 고흐, 도울즈, 로드랙, 쓰라등으로, 어떤때는 역사를 소급하며 또는 다른 때는, 20세기현대미술에 이르기 까지 넓혀 나간다. 허나 녹크린-의 업적은 이런 젠더의 시점에 특별히 중심을 놓은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는 한편, 젠더-에만 종시하는 한정된 것이 아님을 여기서 특별히 강조해 두고 싶다. 녹크린-의 저서 [繪畵의 政治學]의 서문에서, 자신의 미술연구의 기본이 [미술사를, “他者性”의 시점에서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남성을 주체로 했을 때의 객체인 여성은, 바로 [타자]이며, [훼미니즘]나 [젠더]의 시점은, [타자성]의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유효한 시점의 하나이지만, 그것만이 녹크린-의 목적은 아니고, 그것은, 그녀가 지향하는 새로운 미술사의 구축을 위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나오고 있는 주된 3가지의 논문집 안의, [회화의 정치학]에서도, 특히, 폭넓게 [타자성]의 문제가 다루어저 있다. 즉, [支配者]와 [被支配者], [强者]와 [弱者], [主體]와 [客體], [中心]과 [周邊]등의 문제가 남녀의 관계성에서만의 문제가 아니고,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바, 구체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으로써의 구라파와 변경으로써의 오리엔트, 미술의 주류인 아카데미즘와 아반가르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관계성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 노문집에서는, 오리엔타리즘의 미술작품에서 검증한 [허구의 오리엔트]이나, 부엘토리코의 화가를 그루배와의 관계성에서 논한 [그루배, 오리엘장소의 의미], 반유대주의를 다룬 [드가와 도레휘스事件]은, 그러한 의미에서, 어느 것도 매우 흥미 깊은 말하자면, [정치적]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몰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녹크린은 젠더의 시점에 의한 연구의 제1인자로써 잘 알려저 있는 바, 그 연구는 빈번하게 오해를 받게 되듯이, 젠더나 훼미니즘 자체가 목적이 되 있는 것은 아니다. 녹크린의 연구가 젠더의 시점에 의한 비슷한 연구언애서도 한층 돋보이는 것은, 그것이, 보다 장대한 역사적, 정치적 시야에서 초래된 것에서 온 것의 다름 아닐것이다. 녹크린의 언설은 기존의 가치기준이나 평가에 의존하는 것을 단호히 물리치고 항상 작품의 진지한 분석과 사회적. 역사적 視座의 물음을 기초로 이들을 적확하게 서로 연결시키며 독자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여태까지의 미술연구에서는 없었던 신선한 접근을 연이어 전개하고 새로운 미술연구의 가능성을 개척하였던 것이디. 약력: 1931년, 뉴-욕 브륵크린에서 태어남. 51년 봣사 대학 졸업(철학전공).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사호를 획득(17세기 영국문학). 뉴-욕대학 아-트 인스트튜-트에서 박사호 취득(그루-베론). 봐사 대학 및 예일대학등을 거처, 현재 뉴-욕대학 아-트 인스트티우트 교수. 연구중심은 19세기근대미술. 주저: [회화의 정치학] 1996년 일본. The Politics of Vision; Essays on Nineteenth Century Art and Society(1989) New York: Harper and Row) Women, Art, and Power and Other Essays(1998 New York: Harper and Row)(1부 방역 있음: 제1장 [여성. 미술. 권력] [여성미술대학기요]2000년; 제7장[왜 여성의 대예술가는 나오지 않는가?] 1976. Representing Women(1999 New York : Thames and Hudson) (일부 방역 있음: 제2장 2절[시작으로 끝나는 젠더의 중심성] [언어문화] 1995년. The Body in pieces : The Fragment as a Metaphor of Modernity(1994 New York Thames and Hudson) Realism (1971 New York: Penguin Books)
1425 no image 20세기사상과 미술 씨리즈
1740 2017-10-23
48번째 폴. 뷔이리리오(Paul Virillio) “情報文明이 갖는 不定的側面을 自覺케 한다” 왜 뷔이리리오를 읽는가? 그것은 正氣로 돌아 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미친것인가? 그렇치는 안타. 리얼타임로 配信되는 방대한 정보에 현혹되어 우리들은 [이 세상이 미치고 있다]리고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광기 그 자체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광기 보담 더한 것으로, 거이 痲痺狀態인 것이다. 이 마비를 갖으 오게 하는 것이, 情報化이다. 정보화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으면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는 상황을 만든다. 이 사실은 물론 [진보]란 것이며, 생활이나 일들을 한량없이 효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고, 모-든 것을 瞬時的으로 알게 하는 상황이란, 지식과 신체. 행위가 결락된 것을 의미한다. 고도로 발달된 정보환경속에서 알려진 사항들의 의미의 중심은 腐植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손쉽게 손에 들어 오면 올수록 지식은 범용해 가게 되는 것이다. 헌되, 우리들은 그 점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는 이 세계의 틀 속에서 구멍이나 금을 보는 것인데, 완성된 정보공간속에서는, 모-든 것이 – 쌕스나 잔학행위와 같은, 한때는 충격적인 것들 조차 – 보통으로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이 마비작용을 불려 일으키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知的作用의 전영역에까지 미친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것이다. 20세기의 중요한 토픽, 중요인물을 열명, 오십명, 혹은 백명을 들 수 있다. 이들 각자에 관해서 한권의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몇 페이지로 개관해 볼 수도 있다. 데이트 베이스는 모-든 곳에 산재해 있으며, 이를 이용한다면 임의의 길이의 택스트를 생산해 낼 수 있고, 편집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지식을 콤팩트하게 압축하여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니쁜 일일까? 아니다, 그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침묵을 만들어 낼 뿐이다. 정보가 과부족 없이 제시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미술가나 인문과학의 학생들은 [나에게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선 매뉴얼이나 키-워드집으로 기초를 갖추고]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보는 분명 레-포트로 A를 받는 데는 유효 할런지는 모른다. 허나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 버린다.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총체화된 정보에는 不定性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정성이란, 데칼트의 회의와 같은 것, 공인된 세계를 전체로써 거절하는 사고의 힘이다. 부정성은, 직접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들을 매료한다. 상식을 부정하는 것, 일상적현실을 마비 혹은 작술로 느끼게 하는것, - 사상서를 읽는 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경험에 매료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뷔이리리오는 우리들의 일상적 현실을 만들고 있는 정보 태크노로지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보화에 관해서, 프라스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모-든것의 측면에 대해서, 뷔이리리오는 부정을 내 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정보화에 의해 무엇인가를 얻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대신, 그는 정보화로 인해 무엇이 상실되고 있는 가에 대해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성취로 간주되고 있는 것 – 수송. 통신 태크노로지의 발달에 의해 초래되고 있는 그로벌이제이선이나, 전자 넷워크가 가능케한 리얼타임의 쌍방향적 콤뮤니케이선 – 그것과 더불어 상실된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비행기가 초음속을 실현한 이래, 세계의 모-든 大洋이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라고 뷔이리리오는 말한다. 한때 긴 시간이 걸렸던 여행을 통하여 신체의 운동과 결부됨으로써 의미를 갖고 있었던 대양은 [지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바다의 넓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시속 천킬로로 공간을 이동하는 흐라이트의 시간의 무의미성을 떠 올린다면 좋을 것이다. 그기에서는 여하히 쾌적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가가 문제될뿐이다. 수송 태크노로지에 의해 인류는 거리를 극복하고 공간을 정복하였다. 허나, 이 사실이 동시에 공간의 무의미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전자태크노로지는 더욱 고속으로, 지구상의 모-든 장소를 연결하고 그 고유의 시간. 공간이란 제약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 결과, 모-든 장소에서의 세계동시성, 리얼 타임의 정보환경이 성립해 가고 있다. 허나, 이로 인해 행위 내지 행동에 입각한 의미는 공동화된다. [우리들은 자기자신과 목표간에 [행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가치를 잃어 버리고, 즉시적인 [상호작용-인터락선]만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인터락선은 액선 즉 행동을 소외하고, 인간을 단순히 반응하기 위한 존재로 만든다. 테크노로지-가 세계의 공간을 축소하여 무의미화시키고 살아 있는 신체와 행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한다 – 이와 같이 기술해 버리면, 뷔이리리오의 사상이란 결국, 반문명적인 패시미즘이 아닌가 라고 말 할지 모른다. 그는 정보화사회의 과속이나 굴절을 적당히 지적함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듣기 좋은 IT 어용학자는 아니다. 그의 사상은 정보문명이 갖는 근본적, 원리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자각케 하고 있다. 뷔이리리오 사상의 헥심은, 바로 이러한 철저성에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실랄한 비판을 통해, 현대의 미디어나 태크노로지의 모습이 오히려 생생하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뷔이리리오는 반태크노로지-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오히려 너무 태크노로지에 매료되어 있고, 패시미즘라 부르기에는 그의 문체는 힘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뷔이리리오로 인해 논하게 되는 현대문명의 양상은 무서운 것이나, 동시에, 그것은, 뷔이리리오를 이해하지 않고 태크노로지의 소박한 예찬자가 발설하는 해 묵은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며 신선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판적사고가 갖는 각성작용, 우리들을 正氣로 되돌려 놓는 힘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IT]란 이름의, 총통없는 파시즘가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종통문화가 완전히 결하고 있는 점이다. 약력: 1932년생. 열 다섯살 때 연합군에 의한 난토 폭격을 경험. 스탠드 그라스 작가가 되려고 빠리의 공예학교에 입학하여 야간에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청강. 75년에 빠리 건축학교 교장. 훼릭스. 카다리와 자유방송 [라디오 토마도]를 창설한다던지, 가리레-출판사에서 [비판공간] 코랙선을 주재한다. 또한 주거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후생문제를 정비하는 활동을 했다. 자기 스스로 [철학자]가 이니고 [도시계획자]라 규정했다. 주저: [속도와 정치] 1989년 일본. [戰腦世界 – 최악의 씨나리오에 대응] 1998년 일본. [순수전쟁] 1999년 일본. [정보화 폭탄] 1999년 일본. [전쟁과 영화] 1999년 일본. [환멸에 대한 전략] 2000년 일본. 기타, 불어 원서 다수.
1424 no image 책 소개
1829 2017-10-22
책 소개 [自然美學 “EINE ASTHETIK DER NATURE” 1991년] 말틴. 젤(Martin Seel)著 - ‘일본 우니벨시타스 총서’ 1002번에 등제되어 있음. 現代美學의 새로운 地平을 열다 “왜 우리들은 자연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는 가. 자연을 배려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보호로 이르는 가. 왜 자연미는 인간적실존이 그 생을 슬기롭게 성취하도록 그 범례적인 장소가 되고 있는가. 자연을 미적으로 지각하는 가능성을 체계적. 규범적으로 기술하여, 미학과 윤리의 근원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 본다” – (책 소개의 말) 序 자연미학이 다루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에 대해서 왜 호감을 갖게 되는가 라고 하는 그 이유에 다름 아니다. 자연미학은, 인간이 대체로 외적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를 간결하게 기술함과 동시에, 자연이 생활세계로써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간이 매료되는 이유란 실제적으로는 어떤 것인가를 아야기 하려고 시도한다. 자연미학은 인간에게 어떤 미적가치를 갖게 되는가를 해명하고 그로 하여 자연을 존중하고 보존하기 위한 각별한 이유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그것은, 그러한 관심이 자연적세계에 대한 비도구적으로 관계를 갖게 하고 응호하는데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응호에 미학이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미학이 자연미를 今日的인 경험에 입각하여 실제로 말을 통해 시도해 볼 수 있을 때 만이다. 우리들이 외적자연에 대해 품게 되는 근대적인 호감의 근거란 어떤 것인가. 더 이상 내적인 의미가 믿을 수 없는 지각에 대해 자연의 감성적인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우연적인 형태의 영역이 어떻게 하여 인간의 전일적인 삶의 가능성이 되고 있는가. 미적자연은 예술의 원상인가, 혹은 그 모상인가. 왜 자연미는 [인간적] 실존이 그 삶을 슬기롭게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범례적인 장소가 되고 있는가. 자연을 슬기롭게 다루는 것이, 말하자면, 인간세계의 보호에 귀착되는가 – 이러한 물음에 대해 주로 18세기에 정식화된 고전적인 회답을 단순하게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회답을 시도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본서의 회답은, 자연을 미적으로 지각하는 가능성을 체계적 더한 규범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기술에는 인간에 의한 자연관찰의 역사도 포함되겠지만, 본서에는 그러한 역사는 기술되지 않으며, 또한 자연에 대한 호감의 이론의 역사도 기술되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자연미를 세속적으로 변명하려는 것이다. 허나 그러한 시도는 그것이 약속하는 이상의 것을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자연미학이 자연을 다루며 예술 및 기타의 미적영역을 다루지 않는다면, 자연미학은 그 대상을 놓치는 것이 될것이다. 자연미학은 그 대상의 특수성을 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자연미학이 그 주제를 전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일반미학의 견취도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때는 이미 미학의 콘택스트도 넘어서 있게 될 것이다. 자연미학을 상술한다면, 그것이 삶의 긍정적인 점에 관한 일반윤리학의 일부가 될 것이 판명될것이다. 본서의 결정적인 테-제는 이와 같이 내용상 수용적인 구조로 되 있다. 자연미가 파악되는 것은 그 안에서 인간의 하나의 범례적인 삶의 가능성이 직시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그러함으로, 미학의 탐구는 행복론적윤리학을 시작하는 것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서론에서는, 미적인 자연관계와 그 철학적고찰과의 제관계가 간략하게 논해저 있다. 서론에 이어 세개의 장에서는, 미적으로 지각되는 자연의 근본형식이 하나 하나 논해저 있고, 제1장에서는, 자연은, 의미소개적 방식으로 현출이 요동치는 공간으로 제출되며, 제2장에서는 우리들의 생활을 모양짖는 장소로써 그려저 있으며, 제3장에서는 예술작품과 그 양식을 제재로 하는 즉흥으로써 자연이 묘출된다. 제4장에서는 이들 세개의 관점의 상호 연관이 탐구되어 있다. 풍경현상을 시야에 넣고 미적자연의 총일성 이론이 구상되 있다. 이들을 이어 양장 및 결론은 공히 [선행하는 서술의] 일면성을 수정하는 방법으로 이끌어 간다. 즉, 그 때 마다, 고찰의 지평이 확장됨으로써, 자연미학의 기초를 논한 제장에서 설명되지 못했던 제전제 및 그기서 제거되지 못했던 제제약이 밝혀진다. 제5장은 자연미를 미적예술 및 기술적예술의 중요성에 직면케 한다. 제6장에서는 선행하는 분석의 윤리적의미가 전개되며, 자연이 도덕적문제로 논구된다. 결론으로 미적자연의 윤리적의미가 상대화되며, 잘 성취된 삶의 형식에 관한 일반적언명이 갖는 신분이 음미된다. 제1장에서 제5장에 걸쳐서는, 콘스탄쯔대학철학부의 1989/90년 동학기에 교수자격논문으로 수리되었다. 앙겔라.케프라-, 크리스트.멘케=에카스, 칼르로스.베래타, 및 알프레히트.뷜마-로부터 받은 많은 의론과 조력에 감사한다. 율겐.하바마스와 한스.로벨트 야우스는 비판적인 코멘트를 보내 주었다. 많은 실무상의 일로 베른스트.릭데슐와 말틴.프랑크는 나를 지탕해 주었다. 벤야민과의 유보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지루한 감을 주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목차 저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1, 원상인가 모상인가 2, 美的관계 3, 자연학은 어떤 자연을 다루는가 4, 윤리학으로써의 자연철학 5, 미학의 용어법에 관해서 제 1장 관조의 공간으로써의 자연 1, 현출의 희롱 2, 의미를 결한 세계 3, 관조적 의식 4, 관조의 형이상학과 관조의 이데올로기 5, 관조적 판단 제 2장 조응하는 장소로써의 자연 1, 생의 반영 2, 형성하는 공간 3, 조응적의식 4, 조응의 형이상학과 조응의 이데올로기 5, 조응판단 제 3장 상상의 무대로써의 자연 1,예술이라고 하는 가상 2, 세계와의 희롱 3, 상상적의식 4, 예술의 형이상학과 예술의 이데올로기 5, 상상적판단 제 4장 자연지각의 시간 미적자연의 통일성 양의적 경험 자연의 규범적개념 풍경의 자연의 회고 자연풍경. 문화풍경. 도시풍경 제 5장 예술의 위대함 1, 미적인것의 세가지 차원 2, 예술작품의 통일성 3, 미적자연과 미적예술 4, 기술적예술의 기간 5, 미적자연의 상호주관성 제 6장 자연미의 도덕 1, 자연미학에서 자연윤리학으로 2, 윤리에 관한 구별 3, 좋은 삶의 세가지 관점 4, 윤리적 경험으로써의 미적자연 5, 도덕적 문제로써의 자연 저론 자연고찰의 한계 1, 그것은 자연이 아니드래도 좋다 2, 두가지 상호작용 3, 좋은 삶의 추상개념 4, 善과 옳 바름 5, 외부에의 눈짓 책 소개의 변 - 조규현 약 한달동안 미주 일원을 돌아 보고 귀국하면서, 그 동안 애독서의 하나로, 짬짬이 훑으 보았던 말틴.젤의 [자연미학]을 소개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미적탐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오고 있는데 비해 그 이론적인 맥락이 매우 빈약함을 절감한다. 예술적 문맥에서는, 우리민족이 갖고 있는 높은 감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바, 고무적인데 반해, 그 이론적 바탕은 지역적인 것에 한정되어 전개됨으로써, 지구권으로 확상되 가는 인류문명의 차원에서 다시 우리를 볼 수 있는 대목에서는 무언가가 심히 결락되 있다는 인상을 준다. 철저하게 자기를 분석하면서 이를 객관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정립해 가지 않으면, 설득력이 약해 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현대문명은 자기정체성 넘어 세계적인 차원의 파래다임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는 연유이다 말틴.젤의 [자연미학]은 미학적 논술이면서 동시에 문명비판의 차원으로 읽을 수 읶는 택스트가 되는 근저이다. 그는 철저한 논리와 이론으로 무장되 있다. 이는 미학에 한정되지 않으며, 타자와의 소통에 결정적인 요소로 평가하게 된다. 필자는 일어를 해독할 수 있는 덕택으로, 수십년간 일어서적들을 탐색해 오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서구문명에 대한 철저한 공구를 눈 여겨 봐 왔다. 서구문명에 대한 그들의 대응은 상상을 초월하는 태도로 오늘날의 일본 현대문명을 지탕해 주는 지렜대가 되어 있음을 절감하는 바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 한다는 이론적 문맥에서 본다면, 그들의 전략적 서구문명 수용의 열의가 어디를 행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북한을, 중국을, 일본을. 미국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세계문명은 또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자문해 보게 된다.
1423 no image [20세기 사상과 미술] 씨리즈
1504 2017-10-20
47번쩨 기. 도우볼(Guy Debord) “資本主義社會의 藝術과 日常性을 批判” 1968년은 20세기의 크다란 전환점으로 기억되고 있다. 현대건축을 개관하는 몇 개의 저작은 이 해를 중요한 節目으로 자리매김한다. 일반적으로도, 이 전후에 近代가 끝나고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변용되었다고 사료되고 있다. 또한 라칸의 [에크리], 후-코의 [언어와 사물], 데리다의 [그라마토로지에 관해서], 도울즈 .카타리의 [차이와 반복] 등 사상사의 흐름을 바꾸는 저작도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1968년은,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점거한 칼체.라단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했던 파리의 5월현명이 일어났던 해였다. 이 혁명의 공기를 준비했던 것이 시츄아시오니스트의 활동이고, 그 중심적 사상가가 기. 도우볼이 였다. 시츄아시오니스트는 1950년대에 결성되어 슈-리얼리즘의 흐름을 이끄는 그룹이다. 그들은 개인의 무의식보담 도시의 무의식에 착목하여 상황분석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 상황의 구축을 노렸다. 그래서 5월혁명에서는 코믹형식의 전단을 뿌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당시, 도우볼의 저작은 노도와 같이 읽히고 있었고. 그는 앙리. 루훼블이 주창한 일상성에서의 생활의 변혁의 영향을 받았섰는데, 그러나, 그 낡아 빠진 예술관이나 투쟁에 참가하지 않는 이론가적 입장에는 비판적이었다. 도우볼은 1931년 태어 났고, 磯崎新과 같은 나이다. 허나 그의 1968년의 체험이 시츄아시오니스트에 닿지 않했던 것과 같이, 그렇게 많이 일본에 소개되지 않았다. 小倉利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쩨, 마르크스주의의 지식인이 아니고 아-티스트로 활동했음으로 정치적인 문맥에서 벗어나 있었다. 둘쩨 안드레 브르톤의 명성에 다른 슈리얼리즘의 전개에 가려젔다는 것, 제3에는, [예술]의 틀을 넘어, 도시의 일상생활의 변혁을 지향했기 때문에, 예술의 측에서는 일탈로 간주되어, 정치운동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나 공장의 문제가 결략되어 있다고 간주되었다. 허나 1990년대에는 著作이나 전람회를 통해 세계적으로 재평가의 파도가 일어 난다. 일본에서는 木下誠이나 上野俊재가 정력적으로 소개한다. 도우볼의 주저 [스팩타클의 사회](1967)는 세상 모든 것이 눈요기에 지나지 않게 된 현대도시의 일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근대의 자본주의사회는, 일방향의 컴뮤니케이선에 의해,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비인간적 존재로 만듦으로써 이를 지배하고, 직접적으로 살아 있는 경험을 表象과 代理의 세계로 밀어 내 버린다. 그리고 미디어의 과잉화는, 스팩트클의 사회를 전체적으로 갑싸버린다. 스택트클이란 노동이나 생산을 추상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스팩트클에서, 세계의 일부가 이 세계의 목전에서 연출되고 {대리. 표상되어}, 그기다 이 세상보담 더 낳은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고로, 시츄아시오니스트는, 그 顚覆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서는 221의 단편적인 택스트로 구성되고, 서책의 형식도 정해진 목표에의 수집이라는 스팩트클화에 항거한다. 그리고 無斷轉用을 장려하고, 저작권을 거부한다. 언어는 노상에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오-픈 소-스적 발상이다. 시츄아시오니스트의 主戰略은 [漂流]와 [轉用]이다. 우연에 맡기면서 도시에서 꿈틀거리며, 일상적인 의식을 절단하는, [실천적인 행동양식]이다. 예를 들면, 한밤중에 해체현장에 침입한다던지, 끊임없이 힛치 하이크를 한다던지. 도우볼의 [표류의 이론](1958)에 의하면, 많은 소 그뤂에 의해, 심리지리학적인 기폭이나 도시넷워-킹의 끊킨 틈새를 인식하고, 데이타의 集積과는 다른 地圖의 작성이 가능해 지게 한다. 그들은 자동차가 보행자를 갈라 놓는 도시계힉을 부정했다. 心理地理學的地圖는 도시의 물질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을 해방시키는. 地圖인것이다 한편, [전용]은, 본래의 장소에서 사물을 탈백시켜, 새로운 창조의 가치를 겨냥하게 한다.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전용]이란, 앞서 존재하는 예술적 제요소를 새로운 단위속에서 재사용하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희롱하는 바로디는 아니다. 미를 구축하는 것도 아니다. 게릴러적인 것이다. 도우볼은 [전용의 사용법]에서 [전용]이 문학이나 영화에서 건축이나 도시의 레벨로 확대하여, [상황의 구축]으로 이르게 한다, 라고 쓰고 있다. 그기서 심리지리학적으로 도시를 조사하여, 도시의 스펙트클장치나 교통의 [전용]을 생각한다. 시츄아시오니스트는, 르 콜비지에의 도시 계획이 기능주의로 생활을 산산쪼각 내 버리고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것을 비판하여, 생활의 전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도시의 상황을 바꾸는 제안을 행한다. 일례를 들면, 공원의 야간해방, 교회를 귀신집으로 전용하고, 미술관을 페지하여 가두나 술집에서 전시한다, 감옥에 외부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게 하며, 땅 이름의 젼용이나 가로명의 변경, 모뉴-멘트의 파괴등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이 스팩트클화 하지 않토록 유의한다. 그리고, 5월혁명의 바리케이트나 스쿠오딩등, 공간의 자본화에 대항하게 하는 가지 각색의 운동을 장려한다. 건축에의 보조선을 끄 놓는다. 특히 베르날.츄-미는 시츄아시오니스트와 5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간의 이용의 문제를 고려하여, 건축에 이벤트를 발생시키는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교회를 보-링장으로 한다던지, 의도하지 않는 용도에 시설을 전환하는 그로스 프로그램잉은 [전용]과 닮았다. 그의 프로그램론이 슈리얼리즘적인 것도 납득이 간다. 90년대 이후의 젊은 건축가들이나 아-티스트들은, 도시에 이미 있는 것들 을 유용하여 시츄아시오니스트적인 태도를 보인다. 허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젊은이들이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를 타협으로 볼것인가, 유연으로 볼것인가는 판단이 갈라질것이다. 시츄아싱니스트는 예술가와 공동전선을 폇는데, 허나 도우볼은 예술적인 미나 창조하는 주체의 실현도 인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미는 狀況的 美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엄격함과 순수함으로 하여 그들은 건축적인 프로젝트를 배제하고, 최후에는 情性化한 스스로의 조직을 무너터린다. 루페뷜이나 시츄아니즈트의 이론으로 시작하면서 출발하여, 消費社會를 분석한 쟝.보드리얄도 60년대후반에 건축가와 [유-토피아]라고 하는 그룹을 결성하였는데, 5월 혁명이후, 이론과 실천의 乖離로 인해 결열하였다. 사상가와 작가가 만나는 어려움을 여하히 극복하는가가 크-다란 과제가 된다. 약력: 1931년 파리 출생. 레토리숨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그 신비화와 비실천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52년에 좌파의 친구들과 [레토리스트 인터내선날]을 결성.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과 일상성을 비판하였다. 57년에는 [시츄아니스트. 인터내선날]을 결성하여, 72년의 해산까지 중심적 지도자가 됨. 이들 기관지에 많은 메니페스트를 발표하였다. 집필활동 이외도 [轉用]을 사용하는 [사-드를 위한 절규](1952)등 스팩트컬을 배재한 영화도 제작하였다. 주저: [스팩트컬의 사회] 1993. [인터내선날.시츄아니스트 전 6권 [상황의 구축에] [미궁으로서의 세계] [무장을 위한 교육] [孤立의 技術] [스팩털의 정치] [하나의 時代의 始作] 1945. 일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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