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병훈
조회 수 : 4944
2010.01.21 (1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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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작업일기1


작년 말 새 아파트에 입주 한 후 최근 한 쪽 벽에 그림을 걸었다. 이 그림은 이미 수 년 전에 그린 것이었지만 부분적으로 다시 손을 보게 되었는데, 전면적 덧칠이나 부분적 가필이 아니라 주로 그림의 한 부분을 닦아내거나 아예 캔버스 천을 벗겨서 여러 부분을 씻어내고 말리는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오래 전에 그린 그림임에도 마치 며칠 전에 그린 듯, 한 부분 부분마다 그리던 당시의 감흥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새로 그림틀을 짜서 다시 캔버스를 만든 후 액자 없이 벽에 걸었지만 때때로 지켜보는 과정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림틀에서 광목천을 다시 떼어내어 또 한 번 화면을 물로 닦고 씻어내는 작업을 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내 그림은 주로 뜨겁게 끓인 물에 푼 짙은 청색 염료에 밀가루로 쑨 풀을 섞어 그리는 것이다. 주된 이미지는 넉넉한 크기의 올이 굵은 광목천에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같은 산山줄기와 물水줄기 중심의 세계를 간결한 드로잉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지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또는 직접 산하를 답사하며 체험한 세계를 리드미컬한 진폭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는 과정도 물을 많이 섞은 매우 옅은 청색부터 광목천을 물들이거나 아니면 물기가 적은 짙은 염료로서 화면의 부분 부분을 때로는 비백飛白이 보일 정도로 속도감 있게 문지른 것이다. 그래서 화면은 표현된 부분보다 표현하지 않은 부분이 더 많으며, 이들 가시적 비가시적 공간 전체는 과정에 따른 변주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곡진함 자체가 그림을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전통 수묵화는 종이나 비단에 먹으로 옷감에 물들이듯 그림을 그렸다. 먹에 물을 묻힌 붓을 대면 종이나 비단에 스며드는 과정에 따라 먹물이나 물감의 농도가 달라지는 것이 수묵화의 특성인 것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배채법이나 전통 옷감의 은은한 색감도 바로 이러한 염染, 즉 ‘물들임’의 미학이 깔려있다.
아산 현충사에 보관 중인 이순신 장군의 칼에 새겨진 검명에도 물들일 염染자가 나온다. 이순신의 검명은 “석자 길이의 칼을 들어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三尺誓天 山河動色, 一輝掃蕩, 血染山河”이다. 이순신이 당시 나라 안팎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때로는 백의종군하면서까지 왜적과 맞서 싸운 고독한 상황을 돌이켜보면 그의 전체 시 구절 중에서도 이 ‘염’자는 고뇌가 집약된 핵심어이다. 당시의 정황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글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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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림은 주로 천을 푸른 색 염료로 물들이는 과정이어서 그릇닦는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야 짙게 칠한 부분이 조금씩 옅어졌다. 이런 작업을 여러 번 되풀이 한 것이 이번 수정 작업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바탕 흰 부분은 더욱 희게 변하고 그림의 농담農談 변화는 더욱 풍부해졌다. 그래서 시시각각 행위의 과정에 따라 물질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가역성을 띤 공간과 함께 그 세계로부터 나의 느낌이 확장되는 듯한 새로운 체험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그림을 그리면서 주로 계룡산 근처 출토 분청사기나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대담하고도 낙천적인 필치와 추사 김정희의 제주 해배解配 이후의 글씨와 그림에 보이는 서릿발 같은 결기를 그림에 담고자 했다. 이들 예술세계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색들이 내가 지향하는 관점을 표현하는데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근현대의 과학과 철학에서 뿐 만 아니라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서구의 지각 및 의식적 전통인 세계관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잘 보여 준다. 특히 관찰자의 인식의 틀로 대상세계를 하나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구축한 관점인 싱글 퍼스펙티브 single perspective에서 20세기 초 미술의 특징인 다시점의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에 이르기까지의 관점의 변화는 인간이 특정 관점을 문화적으로 구성하고 나아가 확장하였음을 깨닫게 하며, 그만큼 예술의 특성과 가치에 눈뜨게 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얼마든지 관점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여 대중들도 기술에 의해 굴절되고 조작된 관점을 향유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이 지나치게 말초적 재미에 치우치고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관점이란 단지 재미를 위해 조작된 관점이 아니라 더욱 폭 넓은 관점의 자각을 바탕으로 한 감동의 진폭인 것이다.

지난 2000년대 초반 이후 주로 미술판의 문제점이나 비평적 글, 그리고 문화유산에 대한 글을 쓰고, 그래서 책들도 출간했지만 지금도 그 어떤 일보다 그림 그리기를 가장 좋아 한다. 나에게 그림은 체험적 삶의 과정을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자 영역이다. 물론 직접 그리기보다 마음의 붓으로 허공에다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만...

기획전이었던 2000년의 개인전 이후 전시다운 전시를 한 적이 없다. 누가 나 보고 전시회를 하자는 특별한 요청도 없었지만, 우리 미술계의 풍토를 지켜보며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의 예술세계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결코 서운해 하거나 원망한 적도 없다. 참된 예술적 가치란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는 그 진가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면이 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가치가 지각 있는 감상자에 의해 발견되거나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중들에 의해 우상화되거나 신화화된 예술가의 존재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간 우리 미술계에서 반면교사의 사례를 숱하게 보았으며, 그 때마다 적어도 그렇게 살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해왔다. 그 누구의 예술세계든 살아생전 성취한 성과로 평가될 뿐이다.
마르셀 뒤샹이 레디메이드인 소변기에 남의 이름을 서명한 이후 미술 장르에서 그림이 갖는 절대적 위상은 물론 근대적 의미의 예술적 가치는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눈 밝은 사람들이 역설하듯, 마르셀 뒤샹의 의도를 넘어 그림을 포함한 예술 활동이 저마다 원점에서 출발해야하는 상황을 시사한다.

최근 수년간 유례없는 한파와 함께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이번 겨울동안, 틈 날 때마다 내 그림을 지켜보며 그간 내가 추구해온 관점을 다시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역시 근본적 화두는 근대이후 서구적 미술이 성취해 온 예술적 틀과 다른 관점이다.  

                                새해 원단(2010. 1. 21)에
                                      도 병  훈

PS :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업일기란 자화자찬이 되거나 또 진의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어 가능한 한 공개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작업일기에 따라서는 소통과 담론의 매개체로서 역능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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