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전원길 칼럼입니다.
조회 수 : 5427
2007.06.05 (13: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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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르트 리히터 의 전시를 보고

전원길

2006/4/1 (22:35)

게하르트 리히터 의 전시를 보고
국립현대미술관
2006.2.25-4.30

내가 리히터의 작품을 직접 본 것은 1999년 런던의 한 갤러리에서였다. 일부러 들른 것은 아니였고 그저 지나치다가 들어섰는데 몇 점의 추상화들을 보고 “음 추상인데 상당한 감각이네 그렇지만 뭐가 그렇게 대수롭단 말이야” 하고 나오다가 이른바 사진의 이미지가 사실적으로 그려진 사진회화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이건 또 뭐야”.
그 이후에도 잡지 등을 통해서 그의 그림을 보았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매년 그림 값 순위를 매기는 자료에 의하면 그의 그림은 언제나 가장 비싼 작가인데 왜 그의 그림이 그렇게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리히터의 전시회를 계기로 그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의 대강의 얼거리를 잡아보려고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 속 한 쪽 구퉁이가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회화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명제와 함께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그는 우리 눈 앞에 적어도 크게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을 모사한 부드럽고 뽀시시한 사진회화와 추상표현주의적 필치가 강하게 다가오는 추상 작품이 그것이다. 그의 작업 속에 깔려진 코드를 모르는 사람, 특히 구상과 추상을 미술의 역사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당혹스러운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서양사람들이 화면의 일류전을 극복하고 자기지시적인 회화의 세계를 열기위해서 얼마나 심각한 시도들이 있었는가를 생각한다면, 이 시대의 중요한 현대미술가 중의 한 사람인 그가 펼쳐보이는 구상과 비구상의 가로지르기 수법은 그가 흐릿하게 형태들을 뭉게버린 그림만큼이나 헷갈리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렇게 그려질 수 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와 과정이 있었으리라는 전제하에 그의 작업 아래 깔려진 그의 노림수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글은 나와 함께 그의 전시회를 찾았던 분들과 나누었던 대화 중에 미진한 부분을 정리해 보고자 하는 의미도 있다.
그림과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의 관계속에서 작가인 그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의 작품의 특이성을 찾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특성 즉 외부 세계를 예술적 규범이나 양식의 틀을 통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해내는 기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위에 언제나 서 있다는 사실로부터 문제 풀이를 시작해 볼 수있을 것이다. 비록 흐릿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외부세계의 어떤 장면과 관련을 맺고 있는 구상적인 그림은 사진과의 관련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이미지가 떡이 되도록 덧칠되어 있는 추상작업도 색채스케치라고 불리우는 사진작업으로부터 얻어진 것들이다. 하드엣지나 미니멀의 한 시리이즈 중에 속 할 듯한 색견본표를 모사(?)한 그림 조차도 일종의 인쇄된 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요즘에는 오히려 사진이 미술의 주요 표현 매체가 되고 있지만 그가 보격적인 활동을 시작 할 무렵에도 그가 영감을 받았다는 리히텐쉬타인이나 앤디워홀 같은 팝아티스트들이 사진이미지를 사용해서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역사적으로나 기법적으로 사진을 사용한다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렇다면 그의 말을 통해 그는 사진을 어떻게 별다르게 대하고 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저는 사진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진이 빛에 노출된 한 장의 종이라는 사고를 무시하기 때문에, 저는 다른 매체들을 사용해서 사진을 만듭니다. 사진의 어떤 측면이 들어 있는 그림이 아니란 말이죠. 게다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사진적 견본 없이 출현하는 그림들(추상회화등)또한 사진이죠”
사진을 만들고 싶은 이유에 대하여 “이전에 제가 미술과 연관시켰던 관습적 규범 없이, 다른 비젼을 제게 전달해준 이미지로서 말이죠. 거기엔 양식도 구성도, 규범도 없었습니다. 사진은 저로하여금 제 이전의 개인적 경험을 떨쳐버리게 해주었습니다.
“사진을 만들고 싶다”라는 것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것이 아니고 회화를 사진적인 상태 즉 양식과 규범에 부응하는 조형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사진상태가 되도록 사진을 위해 사용하고 싶다라는 말이라고 이해된다. 그가 사진을 새롭게 본 것은 미술사가 공간 속의 대상에 대하여 가한 많은 조형적 해석이 결국 하나의 관점이라는 한계에 구속 되 버리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어떤 것이 사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그는 사진이 가지고 있는 몰인격성을 통해 양식의 틀에서 벗어나 양식과 양식을 연결하고 다시 그것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태도를 양식화시켜버리는 기존의 미술작가들과는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작품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한 리히터의 작업위치에 주목하는 평론가들의 관점 보다는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회화의 가치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리히터와 장시간 인터뷰를 가졌던 벤자민 부흘로는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리히터는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냉소주의, 아이러니 그리고 다른 이론적 짐을 일체 거부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전통적이고 심지어 보수적인 화가로 분명하게 규정한다” *인터뷰 내용은 (현대미술의 변명/시각과언어/ 진시겔 엮음)에 실려있다

여기서 이른바 요즘 전문가들을 어리둥절 하게 한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외견상의 특징만으로는 그의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그리 중요하게 취급 될 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꾸 개념적 형식적 측면에서 자신의 그림이 이해되기 보다는 아름다운 그림으로서의 위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그의 기술과 회화적 감각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요즘 미술의 필연적 조건으로 여겨지는 ‘새롭다’라는 자격을 부여받을 수는 없다. 새롭다라는 차원에서 그의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그동안 미술의 흐름이 만들어낸 여러 양식들을 리히터 자신이 딛고선 사진의 직접성위에서 마음대로 구상과 추상과 심지어는 미니멀한 작업을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방법의 특이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왜 자꾸 그림 자체로 시선을 끌어 갈려고하는 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개념적 동기를 강조하는 것은 왠지 충만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일종의 약은 노림수가 우리의 뇌를 흔든다 할 지라도 단순히 그것에 그치는 것 보다는 엄연히 실재하는 시각적 판단 대상의 충일한 완성도 즉 회화의 즐거움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추측 해본다. 이것 또한 그리고 흩트러뜨리는 그의 그리기 방식과 나란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더나아가서 개념적 특질이 미술의 중심에서 작용하면서 시감각에 호소하는 전통적인 작업들은 점차 고리타분해졌으며 잘 그리기위한 기술의 습득이나 보아서 아름다운 그림의 가치는 더 이상 훌륭한 그림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지금 시대의 미술현상 즉 회화가 죽어버린 이 시대에 놀라운 회화의 부활을 선언하고 증명해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그의 그림의 가치는 이론적이며 개념적 성격에 의해 부여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회화의 즐거움이 가져다주는 가치를 받아들임으로서 개념성의 과도한 진출을 돌려세우고 눈의 기쁨 즉 회화의 가치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회화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그는 사진이라는 이미 재현된 이미지에 발를 딛고 서서 마치 야구감독이 상황에 따라 선수를 기용하듯이 자유롭게 구상과 추상을 교체 투입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그는 선수로서 자기 스타일을 개발해 나가는 것이아니라 경기를 풀어나가는 감독의 입장에서 선수를 관리하듯이 다양한 방식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의 작업태도는 그가 마치 문을 여닫게 하는 문틀의 경첩과 같은 위치에서 구상회화를 통하여 그림 밖의 세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추상을 통하여 자기지시적인 회화내부의 세계로 우리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면서 보이는 세상이 아름답지않냐고 물어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적 특성을 보여주기 위한 회화

리히터는 사진의 이미지가 갖는 비인격성에 주목한다. 단지 기록되어진 사진은 인간의 작위적 의미부여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려진 사진의 사실성이 가지게 되는 전통적 회화의 가치를 유지함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그것은 일종의 전략으로 느껴진다. 일류전의 거부와 회화 그 자체의 속성 즉 평면성에 주목하면서 사실묘사를 바탕으로 인간이 개척한 새로운 세계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은 수작업의 기술의 가치를 뒤로 밀어내고 직접 사물과 관계하는 회화의 죽음 이후의 개념적 미술에 대한 역설적 반응이면서 그 자체로 개념적 성격을 띄게 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독일 표현주의의 도도한 흐름을 타지않고 이지적 태도를 가지는 개념적 성향에 가깝다.

붓터치와 화면의 통합

리히터는 사진을 모사할 경우 그림이 마르기 전에 마른 붓을 이용하여 화면 전체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는 묘사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집중과 이완의 인간적 흔적을 통합하여 전체화면을 동등하게 만들면서 미흡함을 일관되게 흐르는 기계적 붓 터치 속에감추려고 한다. 이것은 디테일을 감추면서 그려진 그림의 표면에 집중하게 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고정되고 확정된 이미지를 파괴함으로서 그림자체의 회복작용을 유도하는 가운데 생기는 시각적 긴장감 유도하는 동시에 베일속의 대상에 대한 심리적 접근욕구를 발생하게 하게하는 일종의 신비화 전략으로도 보여진다.

비인격적인 자연

그는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연을 대한다. 우리가 일종의 낭만적 향수를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해서 직시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자연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우연하게도 나는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고 “마음없이 움직이는 자연처럼 일하고 싶다”라고 표명한 적이 있는데 놀라운 의식의 겹침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창의적 예술가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성중의 하나라고 말 할 수 있다.

역사의 가로지르기

리히터의 작업은 적어도 일정기간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브랜드화 하려고 하는 작가들의 눈으로 본다면 엇나가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완전추상과 완전사실을 왕래하면서 작업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하나의 미술의 역사속에서 양식적 힘을 쇄진한 구상양식과 추상양식을 사진이 세상을 바라보듯이 바라보고 대하는 듯이 보인다. 그 두가지 양식은 그린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나는 그림일 뿐이라는 태도를 취함으로서 그리는 회화의 가치를 살려내는 동시에 사진을 흐릿하게 만드는 시각적 일체화의 맥락에서 개념적 일체화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 전체를 묶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성의 추구에 대한 회의

그의 체념적 사고는 인간의 예술적 행위가 결국 한계를 드러내는 심리적 정신적 기법적인 작위성에 근거하다는 생각에 기인하는 듯하다. ‘유토피아란 범죄적인 것이 아니고서 의미없는 것이다“라는 표명은 세계에 대한 비관적 관조이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언제나 작동하는 부정직성을 직시하는 가운데서 나온 말 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미술도 체념 자체가 방법론이 되어 하나의 리얼리티로서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작업 방식의 주요한 언급으로 읽혀지는 무작위성은 자신의 의도을 제한하고 과정속에서 발생하는 실패와 우연성이 가지는 현존성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그림이 그토록 선명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생각된다.

역사적 상황

미국이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한 모더니즘회화의 미학을 미국산으로 만들어 극단적인 형식주의의 늪속에 함몰 시킨 이후에 독일에서는 패망이후 나찌즘의 과거청산이라는 전흔에 대한 자기치유의 과제와 더불어 이데올로기적 물리적 분단이라는 국가적 위기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독일 예술가들은 처해있는 정치상황속에서 미국 미술의 빚을 안으면서도 미국미술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가지게 된다. 전후미술의 정치화 사회화를 주장하는 요셉보이스를 중심으로 미국미술에 대응하는 흐름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다리파(1903-13 독일 북부 드레스텐을 중심으로 활동한 키르흐너, 헤켈, 에밀놀데, 밀러/ 도시풍경, 술집등의 도시문화)의 표현주의 전통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신표현주의가 일어난다. 그러나 게하르트 리히터는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내적 분출의 통로로 형상을 다루는 신표현주의자들의 라인에 서있기 보다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확보함으로서 독일 미술의 중심에 서게된다.  

이중적 정체성의 반영과 극복

리히터의 작품은 토하듯이 쏟아내는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회화의 조건 자체를 문제삼는 개념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섬세한 묘사를 바탕으로한 사진을 대상으로 한 작업과 색채를 통한 추상적 공간을 왕복함으로서 양식사적 미술사의 종적 흐름을 무시하고 횡적인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가로지르기는 그가 동독에서 사실주의 기술에 의거한 공부를 하였으며 모더니즘의 순수추상의 분위기가 지배하던 뒤셀도르프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적 자아의식이 바탕이 되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겹치는 지점에서 리히터는 자신의 회화의 위치를 찾아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촌티나는 보수적 구상회화를 버리고 당시유행하던 추상표현주적 작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당시 워홀이나 리히텐쉬타인 같은 미국산 팝아트의 대표선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새로운 이미지 즉 사진을 응용한 작품들이 동기가 되어 사진을 이용하게 되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과거의 자신의 동독에서의 예술적 경험을 다시 새롭게 회복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음으로서 그는 분절된 자신의 삶의 역사를 회화를 통해서 다시 이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진의 현실화

이미지가 넘치는 이 시대에 이미지는 하나의 환경이 되고 있다. 이미지는 더 이상 신비로운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미지들은 실재를 대신하는 망령과 같은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실제 세계는 사라지며 죽음의 알레고리로 변하고 있다.” 장보드리야르, 상징적 교환과 죽음에서._ 기계적 프로세스의 산물인 이미지는 현실물을 대신하지만 시간속에서 자체적 진화와 분열을 거듭하며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조우하면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는 회화를 위해서 사진을 이용한다기 보다는 사진을 위해서 회화를 이용한다고 한다. 결국은 회화가 되는 이 상황에서 그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사진을 그리려는 리히터의 시도는 사진 속에 결여된 그 무엇을 완성하려는 충동이며 사진 속에 갇혀진 순간을 회화로 전환시켜 제3의 차원으로 영구화 하려는 결단이다. 사진 속의 이미지는 다시 회화로 재현됨으로써 리히터의 ‘현재’라는 시간적. 공간적 좌표 속에 재구축되는 것이다” 김혜련 월간미술 2003.3

주제와 배경, 이미지와 현실의 통합되는 표면

리히터가 독일로 이주한 곳은 뒤셀도르프였다. 그가 미술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하던 요셉보이스가 가르치고 있었으며 플럭서스 이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제로그룹의 전시회가 뒤셀도르프아카데미에서 열리기도 했다. 당시 아카데미는 이상적인 것에로 눈을 돌리게 하고 익명의 예술작품을 생산하라는 것이었으며 그는 곧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림같은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전제하에 사진을 바라보게 되었고 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이라는 나무로 지탱하고 있는 또 다른 나무를 세워놓았다.  
해석된 이미지 사진은 모사과정에서 해석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더욱이 반사투영기 에 비쳐진 이미지를 따라가는 작업과정에서 자신은 기계처럼 일 할 뿐이다. 마지막 과정에서 이미지를 흐릿하게 만드는 마른 붓질은 이미지속의 공간이 균일하게 움직이는 과정을 드러냄으로서 공간을 압축한다. 이러한 압축과정은 곧 정지된 사진이미지를 현실의 흔적과 조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과 이미지가 하나의 레이어에압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제와 배경/ 이미지와 현실이 만나는 표면이 된다.

각기 다른 구슬을 하나의 실로 꿰어가는 예술

그의 각기 다른 양식으로 그려지는 그림들은 일정한 방식에 의해서 하나로 꿰어진다. 회색 그림들은 회색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근거한다. “회색은 무관심과 진술거부,무형상성에 상응하는 완전하고 유일한 색” 이라고 가정한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사물을 기록하는 사진이나 마음없이 존재하는 자연을 그리는 그의 태도에 부응하는 색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회색그림은 충실하게 그려진 사진회화와 색채들의 향연이 벌어지는 비구상회화의 활력사이의 중간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음으로서 의미있다. 말하자면 전체 그의 작업의 과정 속에서 가치가 부여되는 측면이 강하므로 따로 떨어져서 그려졌을 때는 그 신비감은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밖과 안을 연결하는 지도리로서의 작가

그가 작은 색채스케치를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작업한 일련의 작업들은 마치 외부세계를 지향했던 구상회화와 자기지시적 추상회화의 지도리적 위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은 그가 회화라는 전체속에서 플레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선수로서 보다는 감독의 입장에서 그의 방법론들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회화의 각 경향들을 하나의 재료로서 다루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지도리와 같다. 그러면서 그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모든 것을 더잘 모사할 수 있는 사진 기술이 있고 이미 모든 것을 보여준 미술사가 있으며 모든 것을 훨씬 더 시대에 맞게 파악 할 수 있는 새로운 미디어, 비디오, 고연예술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즐거움은 분명 회화의 필연성에 대한 또다른 증거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림을 자기 마음대로 그리지요. 회화는 경탕할 만큼 아름다운 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야말로 아슬한 플레이를 벌이고 있는 그는 각기다른 양식의 그림을 이용해서 게임을 풀어가면서 언제나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어 내는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계속 몸값을 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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