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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11: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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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잡다한 일이 많은 매우 바쁜 일상 속에 살다가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실재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과 예술


초가을 이맘때는 한 입 베어 먹는 풋 사과를 통해서도 사물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살을 꼬집으면 아프듯,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통해 엄연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철학자들은 이 세계가 정말 실재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가졌지만 지금도 대개의 일반사람들은 이 세상이 정말 실재하느냐? 라니 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이 세계의 실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존재론적 의문을 가진 철학자들이나 볼교의 논사論師들은 세계와 사물의 실재성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해왔다. 또한 어떤 예술가는 나무를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리고, 어떤 화가는 ‘40년 동안의 긴 분투 끝에’ 한 개의 사과를 여러 색채의 차이로 구성된 덩어리로 단순하게 묘사했는데, ‘실제적 물질real substance로 즉 대상적 물질로 향하는 첫 번째 작은 발걸음을 뗐다’고 한다. 주1) 존재란 무엇이며, 왜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은 실재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새롭게 기술하고 표현하는 것일까? 주2)


근대철학에서 존재론적 실재성을 화두로 한 양극은 실재론realism과 관념론idealism이다. 이 두 개념은 우리가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지각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상호 대립적이다. 실재론은 물질적 세계Matter or Material substance가 먼저 존재하고 그 세계를 지각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이 생성된다는 생각이지만 관념론은 이와 정반대다. 세계는 우리의 관념 즉, 의식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3)  
서양 철학사에서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을 때 18세기 독일의 한 지방 도시에서 새로운 인식론적 존재론적 지평을 연 사상가가 바로 칸트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의 형식과 범주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세상을 경험한다. 밀가루 반죽의 형태와 상관없이 붕어빵틀 안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이 붕어빵으로 구워지듯, 우리는 일정한 인식의 틀로 세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구성설로서, ‘경험적 실재론’이라 하기도 한다. 반면에 나의 인식이 세계를 구성하기 이전과 이후, 즉 초월적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으로 실재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초월적 관념론’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러한 초월적 세계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다.
칸트는 그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이처럼 경험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를 나눌 수밖에 없었지만, 인식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그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인식의 한계와 함께 역설적으로 관점의 객관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갖게 해주었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불가지론’을 ‘가지론’으로 해결한다. 그것은 생에 대한 맹목적 의지Blind Will다. 세계의 객관성은 나의 의지의 표상representation이며 관념ideas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니체는 관념과 실재라는 이분법을 넘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인식을 보여준다. 우리의 세계를 관념과 실재의 차원이 아닌 생물학적 욕망과 의지의 차원에서 논함으로서 서양철학의 오랜 존재론적 틀에서 벗어나는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 이전에 고대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는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존재론적 깨달음으로 붓다, 즉 ‘바로 아는자’란 칭호를 얻었다. 그의 사상은 모든 것은 개별자로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로 집약된다. 독립된 개체, 즉 개별자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무아론’이 초기 불교의 핵심 사상인 것이다. 이처럼 개별적으로 독립된 실체를 부정하는 이른바 ‘연기론’적 세계관은 석가 사후 700여년이 지나 나가르쥬나(용수)의 공空사상으로 심화된다. 주4) 그는《중론(中論)》에서 일체의 모든 세계를 공空으로 보는 공사상을 펼친다.
그러나 바수반두의 유식사상에서는 공사상을 인정하되 허망분별이나 공성은 공으로 보지 않음으로써 이후 불교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이후 진나, 다르마키르티, 지의, 현장, 원효, 법장 등에 의해 이들 양대 산맥을 통섭하려는 새로운 사상을 고도의 논리로 정립하게 되는 데, 그 네트워크의 정점에서 우리는 원효의 《판비량론》과 화쟁 사상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나가르주나 이래 원효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대표적 논사들은 세상에 대해 ‘있다有’고도 하지 않고 ‘없다無’고도 하지 않았다. 이는 결코 세상과의 두루뭉술한 타협이거나 언어유희가 아니다. 실재에 대한 물음을 고도의 논리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원효의 경우 불유지법 불즉주무 불무지상 불즉주유不有之法 不卽住無, 不無之相 不卽主有, 즉 있음도 없음도 아닌 것은 고정된 상태일 수 없고 끊임없이 서로 부정하는 생성의 과정이라 하여 ‘있지 않음不有’을 무로 해석하거나 ‘없지 않음不無’을 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강하게 부정하였다.주5)  
그리고 현대 물리학인 양자역학은 서구의 전통적 존재론적 사고와 정면충돌한다. 양자역학이 설명하는 이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실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모든 물체를 구성하는 미립자corpucle를 지각하기에는 인지수단이 너무 무디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철학의 존재론적 언어로는 이러한 세계를 기술하고 상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술의 역사를 통해서도 의식의 진화과정을 고찰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평가를 받는 그림은 그러한 진화과정이 집약된 콘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일견 사실적으로 보이는, 즉 피상적으로 보면 의심할 바 없이 세계를 실재를 드러내거나 모방하고 복제한 듯한 그림조차 문화적 관습이나, 신념 등에 의한 선택적인 집중과 조정이 개입되어 있다. 주6) 새로운 관점의 발명에서 새로운 미술 양식과 이즘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가들, 그중에서도 인상주의 화가들이 본 세계의 실재성을 의심한 화가들인 반 고흐나 고갱, 그리고 세잔은 우연적 순간의 겉모양이 아닌 세계의 실재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특히 세잔이 그린 사과나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들을 보면 그가 사물의 실재성을 어떻게 드러내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주7)  이와는 크게 다른 방식의 표현이지만 반 고흐가 요동치는 물결이나 타오르는 불길처럼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시대를 지배하는 관습적 인식과 맞서 자유로운 상상적 이미지를 통해 관념적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겸재 정선의 후기 산수화. 그 중에서도 《관동명승첩》은 가장 유동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을 통해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동해안의 맑은 풍광 아래 환한 세계의 광경을 보여준다. 겸재의  낙천적이고 해맑은 풍광은 소멸과 생성의 선적 변주와 리듬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그의 그러한 그림은 서구와는 크게 다른 관점에서 세계의 실재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시적이고도 비가시적인 실재성을 동시에 넉넉한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수 천 년부터 실재론은 철학의 핵심이었으며, 특히 근대 서구에서는 철학의 첨예한 쟁점이 되었으며, 석가 이래 바른 앎을 추구한 불교에서도 이는 근본적 문제였다. 이러한 철학적 물음은 삶과 예술에 대한 고찰의 힘을 길러준다.  
실재에 대한 물음을 통해 우리는 실재 그 자체보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이와 연관된 상식적 의식이나 신념조차 누군가에 발명되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이로 인해 삶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좀 더 철저하게 자각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인식의 지적 형성과정에 대한 깨달음은 매우 중요하다. 인식의 틀은 절대적일 수 없으며, 신념과 제도가 인식의 틀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존재론적 신념은 수 십 년 동안 특정 문화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에 기존의 가치관을 스스로 부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런 차원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개체로서의 생명체란 고립된 실체적 존재라기보다는 자연의 한 속성에 지나지 않음을 햇빛, 바람. 물, 또는 인간과의 능동적 관계 속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술의 역사는 그 어떤 영역보다도 능동적 관계맺음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생생히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예술적 감성을 통해 우리의 삶은 좀 더 풍요롭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2010년 9월 5일
                                도 병 훈


1) 소설가 로렌스는 1929년 「이 그림들에 대한 소개」라는 세잔 회화에 대한 논고에서 주로 세잔의 사과를 중심으로 이러한 글을 남겼다. 전영백 지음, 『세잔의 사과』, 한길아트, 2008, 237쪽
2) 존재론적 철학의 선구자는 파르메니데스이다. 그는 아낙시만더의 자연철학을 존재론적 철학으로 변환시킨 철학자이다. 그의 ‘존재(있는 것)는 존재하고(있고), 비존재(없는 것)는 존재하지 않는다(없다).(Being is, and Nonbeing is not.)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존재론은 지순, 지속, 불변이 핵심이다. 양자물리와 철학적 전통, Aage Petersen 지음, 오채환, 김희봉 옮김, 청음사, 45쪽 참조
3) “존재는 지각된 것”(esse est percipi)이라는 도발적 명제를 남겼던 버클리는 실재는 물체가 아니라 관념이라 말하고, 이 관념이 “마음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버클리에 의하면 주사위라는 사물자체가 있고, 그 주사위의 속성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어의 용법에 기만당하는 것이다. 즉 ‘주사위’는 낱말일 뿐이고, 그것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색깔 등이 관념으로 내마음 속에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그는 오직 경험하는 지각내용만을 인정했다.
주4)나가르주나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의 연기 관계에 있으므로(緣起) 고정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하며(無自性), 공이란 이처럼 일체의 사물이 고정 불변의 자성을 갖지 못한다(空). 이때 일체의 사물은 다만 연에 의해서 임시로 지칭하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假名). 그러므로 어떤 사물이 생하고 소멸할 때, 정말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은 명칭일 뿐이다. 이처럼 일체의 사물은 다만 명칭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한다. 일체의 사물은 궁극적으로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中道) 것이다.(나가르주나의 『중론』 24장 게18, 19참조)
주5)원효, 『원효성사전서 권2』, 원효전서국역간행회, , 1987, 239~241쪽 참조  
주6) 곰브리치는 『미술과 환영』에서 “왜 눈에 보이는 세계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민족들에 의해 그처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왔던 것일까? 라는 물음아래 이 책 첫 장에서 가장 고전적이며 서정적인 그림으로 보이는 콘스터블의 <와이벤호 공원>도 그것이 당대의 자연과학(철학)적 실험성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주7) 라캉은 세잔의 사과에 대해 “대상에 정결하게 나타나게 하는 순간에 실재와의 관계가 다시 새로워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잔의 그림에 대한 논고를 남긴 로렌스는 세잔의 사과에 대해 “인간이 수 천 년 만에,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진정한 첫 징조”로 보았다, 전영백 지음, 같은 책,  239~2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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