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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9 (12: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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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미의 부활

미의 죽음?
저자는 서두에서 현대예술은 아름다움 추구를 단념했고, 비웃었으며, 홀대했으나  ‘미의 환기’라는 목표를 위해 헌신한 화가나 미술운동의 한 예로 마티스를 꼽는다. 마티스는 젊은 '야수fauve' 시절부터 평생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그의 작품 <분홍누드(1935)>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영속적이며, 자기충족적이며, 세상사와는 무관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추상주의를 거쳐 팝아트, 개념미술 등은  반미적(anti-aesthetic) 감수성을 지향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중적인 데, 미가 하찮은 즐거움 너머 예술의 가치와 무관하다는 생각과 함께 타성에 빠진 무딘 잠에서 사람들을 깨워서 진짜 세계를 제대로 보게 하려는 경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미가 실용적인 관심사들, 특히 사회정치적인 관심사들과 따로 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의 예로 저자는 ‘신경 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예술은 우리의 자기인식과 세계 이해에 도전하는 혁명적 예술’라는 앙드레 브르통의 말로 대신한다.  
  
감각적인 것,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저자는 철학자들이 미와 미의 속성, 감상을 위한 조건들에 관심을 갖게 된 기원을 칸트의『판단력 비판 (1790)』으로 본다. 칸트는 미적 판단aesthetic judgement의 중심사례를 ‘미beauty’로 간주하고 탐구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주장을 주관적으로 보았으며, 이는 미가 ‘쾌’에 근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판단은 객관성이 요청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판단에 동의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며, 칸트는 이 모순적 가정이 어떻게 양립가능한 지 밝히고 참된 미의 본성을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먼저 칸트 미학의 핵심으로 미적 판단을 선(좋음, goodness)에 대한 판단 및 단순히 쾌적한 것(merely agreeble)에 대한 판단, 양자 모두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인 것으로 구별해낸 것으로 본다.
이어 저자는 칸트가 어떤 것을 미적으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용해서 얻는 목적에 관심을 갖지 말고 형식을 감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기술한다. 이와 달리 개개인의 욕구와 관심과 기호에 따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보며 이런 선호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으로 본다.(마티스의 색상, 이브 클랭의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 이와 대조적으로 진정 아름다운 것, 미적으로 부를 수 있는 것에서 얻는 쾌는 우리 모두가 이성적 존재인 덕분에 공유하는 마음의 구조들이 관계되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칸트의 진정한 미적 판단을 만족시키는 미학을 탐구한다. 그것은 (1) 미적 판단은 무관심적disinterested이어야 한다. (2) 미적 판단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것을 관조하면서 그런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면 의미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3) 즐거움은 합목적성form of finality으로부터 온다. 대상이 제공하는 경험 그 자체의 합목적적 형식purposive form에 관심을 가지며, 그 대상이 무슨 이론적, 실용적 목적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졌는지, 그것이 어떤 목표를 위한 것이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4)즐거움의 보편성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그 즐거움은 인간이 공유하는 마음의 작용operations of the mind 의 결과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조건을 통해 칸트는 취미의 ‘주관적 보편성’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관점은 1913년 클라이브 벨, 형식주의 옹호자, 1960년대 클리멘트 그린버그에 의해서도 옹호된다. 벨은 ‘의미 있는 형식’을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선과 색의 조합뿐이며, 재현적 내용은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어 저자는 칸트의 자유미free beauty와 종속미dependent를 언급한다. 자유미는 풍경이든 캔버스 위의 자국이든 형식들 간의 상호관계에서 생겨나며, 종속미는 개념을 통해 작품에 주목하는 경우로 대다수 재현적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한 사례로 저자는 피카소의 <우는 여인(1937)>을 꼽는다. (슬픔이란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칸트에 따르면 미에 대한 판단의 불일치는 미적인 즐거움을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즐거움과 혼동하거나, 자유미를 종속미에 대한 판단과 비교하거나 아니면 작품을 관련된 개념을 통해 보는 것에 실패할 때 생긴다고 본다. 저자는 마티스의 <분홍누드>를 예로 들어 그 형상이 여성의 몸을 자연주의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본다면, 작은 머리와 길쭉하게 늘려진 몸통, 그리고 뻗혀진 팔들은 추한 변형으로만 보일 것이며, 메시지가 없어 불만이라면 실용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실패한 데서 온 실망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특정 시점에서 사랑한 작품의 경우 그 정도로 좋은 작품이 아닌데 당시 유행 때문에 과대평가한 것으로 본다.  

심미주의의 미덕
저자는 이 글 서두에서 칸트 이론이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며, 한 작품의 가치가 그 내용으로만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무제(당신은 사로잡힌 관객이다)(1992)>는 남성의 손이 여성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우고 있는 사진 위에 'You are a captive audience'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작품인데, 저자에 의하면 이 작품은 설명적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이 같은 설명적 삽화와 예술작품을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것은 작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형성될 때 작품이 제공하는 독특한 미적인 경험과 작품 내용간의 상호침투라고 주장한다. 그 예로 크루거의 작품과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1814)>을 대조한다. 고야의 이 작품은 물감의 자국조차 시각적 인지적 반응을 형성한다고 본다. 거칠게 처리된 표면, 전경에 있는 군인이 차고 있는 칼집의 번개모양의 줄무늬, 긁힌 흔적과 함께 말라붙은 어두운 심홍색 핏자국들, 그리고 맨 앞에 쓰러져 있는 인물의 얼굴 특징들이 분간할 수 없게 지워져서 특정인임을 알 수 없게 그려졌다는 것에도 눈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무자비한 행위들의 잔혹성, 전쟁무기의 날카로운 정확함, 말라붙은 피의 모양과 감촉, 그리고 손상된 사람들의 뭉크러진 형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단지 교훈적인 작품이 아니라 개인 생명에 대한 잔인한 말살이 사무치도록 가슴을 때리는, 깊이 소름끼치게 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크루거의 작품도 형식의 중요성이 있다고 본다. 그가 자신의 메시지를 광고와 수사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야 작품만큼 감동적이지 못한 것은 고야의 경우 내용에 맞추어 작품의 미적인 측면을 수립하여 상호침투하는 데 사용한 예술적 수단들이 여러 층위에서 작용하기 때문으로 본다.
이어 저자는 칸트의 견해가 또한 동의할 수 없는 관점을 담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도 어떻게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고 기술한다. 저자는 먼저 마사초의 작품 <아담과 이브의 추방(1426-7)>, <실낙원>을 예로 들며,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삼차원을 그림의 평면 위에 재현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그는 원근법에 정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심오한 표현적 울림과 미적 웅장함도 지닌다고 본다. <추방>은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해 절망한 상태로 에덴동산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육체적 유혹에 대한 엄격한 종교적 백안시, 신체적 자각에서 오는 부끄러움에 대한 권장, 인류가 천상의 상태로부터 추방된 사실로 본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적 메시지나 믿음과 상관없이 그 구조적인 구성과 표현적 특질과 형식의 내용의 상호침투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칸트의 견해가 예술감상을 독특한 종류의 행위로 특징짓는다고 본다. 작품에 대한 적극적 감상을 하는 것은 미적 특질들에 대한 특별한 종류의 주목을 요구하며, 이것이 진정한 예술을 기능적 문화적 상품과 구별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미적 판단에 반론으로 저자는 (1) 미적 감상은 컬트다. (2) 추하고 징그러워도 즐겁다. (3) 의미도 중요하다를 꼽으면서, 그런데도 미적 감상에 대한 칸트의 설명에는 지킬만한 무언가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미적 감상은 컬트다  
먼저 저자는 칸트에 대한 반론으로 미적 감상은 무관심적일 수 없다는 주장을 검토 한다. 예컨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 스페인 전쟁의 참상을 유사하게 묘사하는 지 아닌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그림에 대한 미적감상도 이런 관심으로만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고 본다.
한편 저자는 미적 감상이 진정 무관심적 일 수 없는 이유가, 작품에서 즐거움을 얻는지의 여부에 늘 관심을 갖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면 칸트의 무관심설을 오해한 것으로 본다. 무관심성이란 우리의 즐거움이 어떠한 감각적, 실용적, 이론적으로 관심으로도 환원될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20세기 초 칸트 미학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제기된 바, 칸트의 무관심성이 심리학적으로 변모되며, 그 결과 이는 지각을 통해 주목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간주되었다고 본다. 예컨대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올 때 피가 퍼져나가는 모양을 감상할 수 있겠지만, 통증으로 인해 오래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기원은 에드워드 벨로프로, 그는 미적 감상을 위해서는 감상자 자신의 당면한 염려와 관심들로부터 일종의 심리적 거리가 요구된다고 보고 ‘심적 거리’라는 용어를 도입했다고 본다. (이에 대한 철학적 버전으로 제롬 스톨니츠가 제안한 것임) 저자에 의하면 미적 무관심성에 대한 이런 개념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게슈탈트 심리학을 동원했으며, 그 예는 ‘오리토끼 그림’이다. 이 그림을 토끼로도 오리로도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방식으로 관심을 갖는 방식을 미적, 실용적, 이론적 방식들 사이에서 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적으로 변모된 무관심성 개념은 미적 감상을 다른 주목 형식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것이 특별한 종류의 지각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얘기한다. 우리가 취하는 태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무엇을 알아보고 어떻게 그것에 반응하는지 측면에서 지각이 인도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태도는 실용적, 이론적 관심의 태도다. 그러나 미적인 경우 대상의 모양과 구조에 대한 우리의 주목이 즐거움을 주는지 여부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정원수를 예로 든다. 정원수를 보고 무슨 종인지(이론적 관심), 햇빛을 가리고 있어 잘라내야 하는지(실용적 관심) 관심을 갖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줄기와 가지의 윤곽, 나무의 결,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면서 흔들리는 모습, 가지에 드리운 얼룩진 그림자. 뻗어나가다가 사람 팔 모양으로 구부러진 가지 등에 주목하는 경우는 무관심적이라 할 수 있다고 기술한다. 마찬가지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을 역사적 관심의 측면에서 볼 수도 있으며,  그것은 실제로 행해진 처형을 재현할 것인가? 그때의 처형은 전형적으로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는가? 라는 의문보다 흰옷을 입은 중심인물로 시선을 이끄는 구조적 구성에 주목하거나, 또는 응고되고, 매대기쳐지고, 마치 수은처럼 흐르기도 하는 피가 어떻게 반짝거리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는지에 주목한다면 이는 미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저자는 미적 태도는 작품에 주목하는 특별한 동기의 측면에서 그 특징을 찾는다. 하지만 동기가 다르다고 지각적 주목의 종류가 달라지지 않는다. 작품에 접근할 때 관심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서로 다른 동기의 문제로 본다. 어떤 사람이 역사적 관심에서 고야 작품을 보러 갔지만 막상 보는 순간에는 미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갑자기 다른 주목방식으로 전환하지는 않으므로 미적 태도라는 개념은 신화로 본다. 이 개념을 적용하면 예술에 가해지는 교훈적, 도덕적, 상업적 압력에 맞서, 이들과 구별되고 이들 모두를 넘어서 있는 예술 감상의 우위를 강조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도 이 개념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어 칸트 이후 그의 무관심성 개념을 심리학적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의 이론은 이런 반론에 취약해보일지라도 원래 칸트 이론이 그런지는 분명치 않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칸트는 미적 경험이 일상적인 지각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각상태로의 급작스러운 전환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칸트의 무관심성은 심리적인 상태의 특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판단이 이루어질 때, 대상에 대한 반응의 근거를 특징짓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제대로 된 미적 판단이라면 즐거움은 작품에 대한 어떤 특정한 관심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작품의 형식에 주목한 결과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애초 관심적인 이유로 작품에 주목한 사람의 경우에도 사실일 수 있으며, 칸트의 ‘무관심성’이란 이론적, 실용적 관심에서 자유로운 그런 관심에 의해 제약 받지 않는 주목을 말한다고 본다.
어쨌든 저자는 미적으로 감상으로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대상을 지각적으로 처리하고 대상에 반응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며 이 차이가 무관심적 상태의 표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그 예로 세 명의 수습 사진기자의 과제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에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전시회를 다녀오라는 과제를 주었는데, 카르티에-브레송은 매그넘 사진작가협회 설립자 중 한 명이며, 그는 대상들의 움직임의 순간적인 인상을 잘 잡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자코메티 사진 앞에서 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한사람; 왜 이것들이 다 미술갤러리에 있지? 사진은 좋지만 왜 이게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미술관에 걸려 있지 않은 다른 것들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어.
두 번째 사람 : 저 구조를 봐, 조각과 함께 있는 자코메티를 찍었다고 해서 다 이것처럼 좋지는 않을 거야...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복잡한 시각적 관계의 상호작용을 언급한다.
세 번 째 사람 : 나는 네가 이 사진에 대해 설명한 것은 동의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 사진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이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식뿐이다.

저자에 의하면 마지막 두 사람 모두 미적인 관심을 가졌지만 오직 두 번째 사람만이 즐거움을 얻었으며, 따라서 미적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작품에 미적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칸트에 따르면 진정으로 미적인 판단은 단지 무관심적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대상의 형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과는 다른 세 번째 사람 같은 경우가 있다면 칸트가 말하는 조건들 사이의 관련성은 의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작품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은 작품을 보는 것으로부터 어떤 즐거움도 얻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는 칸트에 의하면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칸트와 견해 차이를 보인다.(저자는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미와 예술적 가치의 관한 판단에서 얻는 즐거움이 정말로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고찰하며 이 점을 제안한다. 저자는 거기서 미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판단은 부분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성품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우리의 성품에는 비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이유로 하여 칸트와 다른 제안을 한다)
저자는 이와 별도로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보는 방식에서 첫 번째 사람과 뒤의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로 본다. 뒤의 두 사람만 사진을 미적으로 보는데, 일부 사람들은 이런 감상을 무관심적이라고 말하겠지만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으로 시각적 관계를 찾고 그 찾아낸 것들에 반응하는 것은 단지 무엇을 묘사하는 이미지인지를 시각을 통해 알아채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상적 대상이나 이미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고찰해보면 이런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지각perception이 하는 일에 대해,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공되지 않은 정보와 감각데이터를 시각, 청각 등의 서로 다른 감각 양상을 통해 개념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각의 상태perceptual state가 그것이 표상하는represent 바에 의해 정상적으로 야기된 경우일지라도, 예컨대 ‘연기를 봄’이라는 지각 상태이고 그것이 실제로 불에서 나오는 연기를 데에서 야기된 경우라도, 지각 상태의 정보는 연기를 표상으로 경험하는 것에 비해 덜 구체적이고 정보량만 헤프게 많다는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이라는 개념도 함께 갖고 있지 않는 한 연기를 본다고 무언가 탄다는 믿음을 갖지는 못한 것이고, 운동, 깊이, 색조의 변화를 포착하는 시각적 처리 과정이 있지 않는 한 연기를 다른 것과 다름으로 인식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 본다. 지각적인 경험의 역할은 믿음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러려면 주어지는 가공되지 않은 정보 역시, 가공되지 않았음에도, 형식을 제공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각의 경우 지각은 시지각적 처리과정, 도식schema, 범주에 의해 형식을 부여 받아야 형성된다. 일상적 지각의 경우 지각 형성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미적 관심이 있는 경우에는 경험에 무언가 더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미지 지각 방식은 예컨대 보는 이미지들이 명료해지고 부분들이 관련을 맺다가 갑자기 이미지 전체를 통해 두드러지는 시각적 관계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미지가 이런 일을 하려면 대상의 일상적 인식을 위한 표준적인 인식과정과 도식에 도전해야 한다. 즉 그것들을 전도시키거나 생생하게 만들거나 뜻대로 잘되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서로 다른 도식들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주목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우리가 즐거움을 얻느냐는 질문은 이미지들이 지각경험을 형성하는 방식, 지각 경험에 구조를 제공하고 불명료함을 제거하고 확장시키고 보다 생생하게 바꾸는 방식에서 즐거움을 얻는가로 간주하면 된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파편화된 입체주의 시기,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에서 알 수 있듯, 미적감상은 우리가 경험에 형식을 부여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적 관심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약화된 형태의 미적 관심이지만 예술과 자연경관, 또는 디자인된 사물 등의 감상에서는 이 개념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미적 감상 개념 전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저자는 미적 감상 개념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제한 조건들이 더 있어야 한다고 본다. 칸트의 미적 판단에 대한 설명은 일반적으로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칸트에 대한 표준적 해석에 의하면 아름다움의 판단, 나아가 미적 감상 일반은 대상을 경험하면서 지각하게 되는 바로서의 대상의 형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고 본다.
일부 사람들이 개념미술에 대해 가지는 우려의 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념예술처럼 작품을 경험한다고 해서 더해지는 것이 없거나, 물질적인 대상이 작품의 핵심이 아닌 경우, 그런 작품에는 미적이라고 구분해서 부를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따라서 그런 작품은 나쁜 예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생각은 개념미술에게도 칸트에게도 부당하다. 그 예로 종종 어떤 생각들로부터도 미적인 이끌림을 느끼는 사실을 예로 든다. 어떤 과학적 증명이나 공식이 지닌 매력, 예를 들어 e=mc2의 매력에는 그것의 아름다움도 한몫하고 있다는 곳이다. 비슷한 경우로 어떤 종교적 세계관이나 철학적 아이디어들이 지닌 매력은 종종 그것들의 우아함과 설명의 복합성, 그리고 일관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런 경우 지각적인 형식이 그 일을 해준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것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개념화를 구성하는 도식, 범주, 믿음, 태도들의 개념적인 형식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매력은 그것이 인류의 사악함과 오류 가능성과 고귀함 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방식과, 그런 생각하에서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강조하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전 경험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으로 일부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칸트의 용어를 빌리면 종속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으며, 그의 미적이념에 대한 생각은 덜 전통적인 용어들을 사용해서 개념예술의 미적 장점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해준다는 것이다.(칸트에 의하면 미적 이념은 생각들과 마음의 패턴을 자극하는 상상력의 표상이라고 제안했기 때문에)  
그 예로 저자는 정원 잔디 위에 선을 만들기 위해 걷기를 반복한 리처드 롱의 <걸어서 만든 선(1967)>은 걷는다는 관념, 환경으로부터의 분리, 풍경에 자국을 낸다는, 또는 풍경의 일부가 된다는 생각 같은 것들을 반추해보도록 자극한다고 본다.
또한 사이먼 패터슨의 <큰곰자리(1992)>는 런던 지하철 노선도의 역명을 칼 마르크스에서 오드리 헵번에 이르는 문화인사들의 이름으로 바꾼 작품인데, 이것을 보면서 문화적 공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 서로 다른 개인들의 공통의 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노선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 어떤 식인지, 같은 문화의 부분들인데도 거의 만날 수 없어 보인다는 것이 어떤 식인지, 그리고 문화속에서 움직여 다닌다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개인적 선택에 달린 문제인지, 또는 어느 정도까지 그것에 달린 문제가 아닌지 등을 반추해볼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런 생각이 칸트에 대한 전형적 해석은 아니지만 미적 이념들이 그 차제로 감상될 수 있음을, 즉 생각에 대해서도 우리가 미적 관심을 취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저자는 개념미술에 대한 조롱의 많은 부분이 사물은 지각을 통한 관조에서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틀린 가정으로부터 형성되었다고 본다. 결국 칸트의 무관심성 개념을 독특한 지각적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미적 감상에 대한 너무나 강한 요구이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않으며 올바른 이해도 아니다. 무관심적인지 아닌지는 반응의 근거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반드시 즐거움을 느끼지 않고서도 작품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무관심성이 미적 판단의 다른 조건들과 반드시 관련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이론에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보며, 이는 칸트가 근본적이라 여겼던 미적 판단의 보편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추한 것, 기괴한 것. 혐오스러운 것
저자는 이글에서 먼저 20세기 예술의 발전은 칸트의 생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고 문제제기를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 이것을 일반화, 미적감상을 설명해준다는 칸트의 생각이 미친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작품은 우아함, 고상함, 활기, 박력 같은 성질을 지닐 수 있는데, 이것들이 결합되어 조화로운 통일성을 이루고, 복잡해지고 일관성 있는 구성을 갖추게 되고, 강렬하게 되면 그것이 미적으로 매력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적 가치란 아름다움이 지닌 매력을 일반화시킨 것으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여기서 중심생각은 즐거움을 취하는 대상은 그것 자체가 즐거운 대상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묘사 대상 자체는 추하더라도 그것이 아름답게 묘사될 수 있음을, 따라서 이미지 재현 대상은 즐겁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한 이미지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음을 인지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존 컨스터블의 “추한 것은 없다, 나는 살면서 추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대상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빛과 그림자, 그리고 선택된 시점이 언제나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한 점을 언급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추함과 기괴함, 뒤죽박죽이고 혐오스러운 것들은 그 자체로는 언제나 미적으로 불쾌하다고 여겨지며, 칸트도 단 한 종류의 추만은 모든 미적 만족, 따라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연 그대로 표현될 수 없는데 바로 혐오스러움disgust일 일깨우는 추이다“라고 말했다는 점을 저자는 상기한다. 그런데도 실제 대상이건 상상 속 대상이건 기괴, 혐오, 부패, 완전 추함을 묘사하는 것은 시각 예술의 오랜 전통이었다고 본다. 20세기에도 이 전통은 유례없는 열정으로 계속되었고, 심지어 혼란스럽고 비정합적이고 완전히 부조화스런 것을 추구하라는 것이 예술의 강령으로 등장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 이전 시대 북해 연안의 피에타 들은 예수의 죽음이 갖는 끔찍한 성격을 괴기스럽게 강조했다는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동산(1500)>은 고문에서부터 사람의 몸을 삼키는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혐오스러운 장면들을 보여주며, 퀸틴 마시스의 <늙은 여인(1520)>은 극도로 추한 여인의 모습을 그린 예로 든다.
20세기의 예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에 나오는 왜곡, 타락, 부패한 형상을 저자는 떠올린다. 기형, 불구, 토막난 신체에 대한 강박적인 관심을  부추기는 작업을 한 사진작가 조엘 피터 윗킨의 작품과 성기 모양으로 왜곡된 얼굴 형상을 가진 어린이 마네킹들이 서로 붙어 있는 제이크와 디노스 체프먼 형제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928년 부뉴엘과 달리가 만든 영화인 <안달루시아의 개>는 같은 배우가 여러 역을 연기하고 바깥 장면은 풍경이었다가 곧 도시 경관으로 제멋대로 바뀌며, 안구를 베는 것과 같은 초현실주의 이미지들이 병치되며 편집은 경직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영화 내러티브 앞뒤가 맞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실제로 많은 작품들은 단지 혐오스러운 것을 묘사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부추길 뿐 만 아니라 불쾌한 재료를 사용함을 언급한다. 특히 신디셔먼, 마이크 켈리, 폴 매커시, 카키 스미스, 제닌 안토니와 같은 작가들은 이른바 '비속예술abject art' 에 관심도 이런 같은 흐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신체의 대사과정에서 나온 것들, 체액, 구토, 월경혈, 대변과 같은 것들에 대한 몰두와 저급하고 혐오스럽거나 금기를 위반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고려한다면, 이는 마치 혐오란 미적 반응의 울타리 밖에 있다는 칸트의 주장을 시험하는 예술운동인 듯하다는 것이다.103
<무제 167>(1986)과 <무제 175>(1987)로 대표되는 이 시기 신디 셔먼의 혐오스러운 사진 중에는 여성의 몸과 연관된 소품들과 다양한 신체부분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들이 오물 속에 흩뿌려져 있으며, <무제 172>(1987)에는 더러운 접시들과 녹슨 학스로 어질러진 식탁이 있고, 전경에는 벌레들을 담은 접시가 반짝거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이 불쾌한 재료들로 구성되거나 변태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불쾌한 반응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미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칸트의 관전에서는 이런 예는 미적 감상 영역으로 보이지만, 저자는 이 추함, 혐오스러움, 뒤죽박죽임이 미적으로 매력적인 이유의 일부로 본다.    
또한 저자는 실제로 예술적 관심이 미적 영역 밖에 있을 때가 있다고 본다. 다다 운동은 감상자의 경험을 혼동시키기 위해 급진적 테크닉을 추구했으며, 이들은 의식적으로 반미적anti-aesthetic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다다이즘은 예술적 관습과 불변의 가치라는 신념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R. Mutt라고 사인된 뒤집어진 소변기인 마르셀 뒤샹의 <샘>(1917)은 고전주의를 배경으로 고려할 때 예술은 어떤 본질적인 미적 속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가정에 대한 익살스런 반박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추하고 뒤죽박죽인 것이 일반적으로 불쾌하더라도 특정한 맥락에서 어떤 관계가 주어진다면 즐거운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을 언급한다.    
루시안 프로이드의 누드 그림은 종종 대상의 신체를 마치 두터운 고기조각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리 보워리를 모델로 한 연작은 살의 얼룩덜룩한 톤, 그 윤곽과 넓은 면적에 주목하게 하며, 그래서 몸은 그 본성이 물질적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의 특성들이 미적인 매력(장점)으로 변화됨을 느낄 수 있으며, 제니 샤빌의 작품<폐쇠된 접촉#14>(1995)도 유사한 예로 본다.      
이어 저자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미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럽고 불쾌하고 추한 것들이 표준적인 미적 특질일 수 않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레온티온 이야기(시체의 모습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내용임)를 예로 든다. 이런 관심을 보여주는 예술의 예로 보슈의 작품이 있으며,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책형>(1515)은 황량하며 잔인하며 공포스럽다고 본다 .
또한 저자는 20세기 후반에 와서 <시체공시소>(1992)라고 명명한 안드레 세라노의 사진 연작, 부검과정을 추적한 수 폭스의 무제 작품들(1996) 그리고 리처드 소던 스미스의 <증상>(1997)연작은 모두 인간육체의 색과 형태, 그리고 그 육체가 치명적으로 훼손되었음에 중점을 둔 작품으로 본다. 데미언 허스트의 <1000년>(1990)도 구더기가 들어 있는 부패하는 소의 머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구더기는 파리가 되고 그 파리는 다시 구더기가 될 알을 낳은 끝없는 순환과정이 반복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또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울부짖는 형상들 중 많은 수가 육체와 영혼의 영속적 타락과 저열한 부패를 다루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전형적인 미적 장점은 아니며, 이런 경향들만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심각한 의미의 도착倒錯으로 본다. 이런 경향들은 그 시도가 잘 이루어졌을 때는 미적으로 가치 있을 수 있지만, 동물적 본성들을 승화시키지 못할 경우 인간들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칸트의 생각과 달리 추하고 기괴한 것도 미적인 성질일 수 있고 긍정적 가치일 수 있다고 본다.

의미가 중요하다.
저자는 최근 ‘미’나 ‘미적인 것’이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지만 부정확한 것도 많다고 본다. 그런데도 미와 미적인 개념에 대한 질문 중 많은 것들은 흥미로우며, 특히 작품의 미가 작품의 의미에 대해 외적인 경우와 내적인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는 아서 단토의 최근 제안이 그러하다고 본다. 단토는 작품에 구현된 의미embodied meaning를 중시했으며, 미가 작품의 의미에 대해 내적인 경우라야만 작품의 미적 속성들이 예술로서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적절하게 관련된다고 본다. ‘의미가 중요하다’는 슬로건이 대두되는 이유는 우리가 작품의 맥락과 내용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토는 “어떤 것을 예술로 보는 것은 눈이 알아보지 못하는 무엇-예술이론의 분위기와 예술사에 대한 지식, 즉 예술계artworld를 요구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의 고전적 예는 앤디 워홀이 복제한 브릴로 상자들인데, 이 상자들은 실재 브릴로 상자들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지만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들은 예술로 간주한다. 단토에 따르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1960년대 들어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예술로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감상이 지식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으며,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가 만들어진다고 본다.
이어 저자는 칸트의 설명에 따라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경우 작품 형식이 어떻게 재현하는 내용을 그려내는 것이 미적으로 적합한 수단이 되느냐 하는 방식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본다. 이런 시각에서 작품에 내용이 있는 경우,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얼마나 솜씨 있게 전달되는가를 주목함으로써 즐거움을 얻는지의 여부이며, 그러므로 칸트는 작품 내용 또한 의미가 작품의 미적 가치와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간접 부수효과로서만 그러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작품 메시지 그 자체는 작품의 가치와 무관한 것으로 보고, 메시지는 내용의 미적인 장점의 성취를 도와주거나 방해하는 경우가 되어야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칸트의 이 이론이 어느 측면에서는 정말로 예술에서 의미가 수행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이론일 수 있다고 본다.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예수>(1987)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오줌 속에 담긴 채 빛을 받고 있는 사진인데, 이 작품의 시각적인 겉모습은 반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제목을 알아야 함-이 필요할 뿐 만 아니라 그 사실이 작품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데 중요성을 가지는가를 파악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작품이 제공하는 경험의 성격을 그것이 가진 감정적인 깊이와 통찰력 또는 이해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으로부터 작품의 순수하게 미적인 가치를 뚜렷하게 분리해낸다는 것은 유지되기 힘든 주장으로 본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은 영국왕실에 파견된 두 명의 대사들을, 그들 각자의 역할과 그에 따르는 특권을 나타내는 도구들에 둘러싸인 채 로 묘사한 작품인데, 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는 그림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부수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자신감 넘치는 포즈, 류트, 풀루트, 천체구, 휴대용 해시계, 찬송가 책, 그리고 다양한 항해도구, 기하각 기구들은 인류의 지식과 예술을 상징하며, 동시에 서양문화가 정복한 전세계의 영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토대로 저자는 그들 옷의 재질과 화려함은 이러한 성취에서 오는 물질적 보상을 암시하지만 그림 전면의 해골이 등장한다.(정면에서는 식별할 수 없다) 이는 전도서의 한 구절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임을 기술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대사들의 분별없는 긍지와 자기만족에 그림자를 드리운 죽음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며, 그래서 배경의 커튼조차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고 본다. 커튼 뒤에는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어둠이 있으며, (대사들은 커튼에 등을 돌린 채 이를 못 깨닫음) 이 그림은 대사들이 죽음의 견지에선 삶을 숙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주목해야할 것은 대사들을 통해 이해하게 된 것이 회화적인 수단을 통해 그림 속에 내포된 것이라는 점으로 본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런 태도, 열망에 대한 깊은 시사점을 지닌 관점을 회화적으로 구현한 것이 이 작품을 훌륭한 작품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이어 저자는 매우 깊이 있는 지각, 태도, 또는 반응을 구현한 것으로 인해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증진되는 일은 재현적 예술에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20세기의 시각예술은 형식과 구조에 대한 관심, 예술의 물질성, 색과 평면과 질감 간의 관계를 중요한 특성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들 추상예술이 순수하게 미적인 장점들과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며, 일견 내용 없는 추상미술, 또는 추상미술, 또는 추상조각이라도 그러 단지 고도의 표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 반응, 지각과도 관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몬드리안의 작품)
마크 로드코와 같은 작품의 경우 서로 대비되거나 상보적인 또는 미묘하게 다른 색들의 블록과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그림을 그렸는데, 색을 얇은 층으로 만들어 겹쳐서 여러 번 칠한 결과 서로 다른 각도나 조명의 차이에 따라 미묘하게 반응하는 강렬한 색채감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저자는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찬사 받는 경우도, 실패한 허세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 잘된 것은 아름다운 것 이상이며, 로스코는 그가 근대의 정신이라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받아들였던 소외, 절망, 그리고 의심의 느낌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본다. 그의 변화하면서 뒤로 멀어지는 색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불확정의 세계 속에서 혼자인 경험하게 하여 고독한 존재로서 세계 속의 우리 위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할 것인지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장 끝부분에서 작품이 얼마나 훌륭한가는 주된 목적이 예술적으로 가공된 미적 특질들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도덕적 통찰, 종교적 헌신, 또는 아첨을 보여주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고 본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미적 특질들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가 좋은 작품인가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작품에 대한 적극적 감상을 할 때 드러나는 반응이나 통찰, 이해가 가치 있느냐의 문제이며, 이런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반면 그것이 심오하거나 흥미롭거나 시사적이거나 삶에 진실하거나 통찰력이 있다면 좋은 작품으로 본다. 아름다움과 미적 관심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그것이 예술 가치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다음에 실을 예정인 3장은 ‘예술에 들어 있는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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