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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no image 무진화변과 역사의 진실
도병훈
4949 2011-09-20
무진화변과 역사의 진실 1. 조선 초기 전통초상화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인《조반 부부초상》이 있다. 이 중 <부인상>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여인 초상화로서는 가장 시기가 이른 귀한 작품이다. 이 부부초상은 조선 후기에 다시 임모한 이모본(移摸本)이지만 원본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전통 초상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부부초상의 안면은 실처럼 가는 선으로 그리는 구륵세선(鉤勒細線)으로 이목구비를 표현하고, 옷 주름 역시 일정한 굵기의 선묘로 처리하였다. 조반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체구는 왜소하나 이마가 유난히 앞으로 나온 편이며, 눈빛이 강하여 매우 영민하면서도 당찬 모습이다. 이《조반 부부초상》을 볼 때마다 600년 시공을 뛰어넘어 역사와 삶의 이면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조반(趙伴, 1341-1401)은 여말 선초의 인물로 나의 선조가 멸문지화의 재앙을 당하는 사건인 '무진화변'과 관련된 핵심인물이다. 처음에는 사소한 사건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를 기점으로 여말 선초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듯, 동일한 역사적 사건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 게다가 고려시대란 시기는 의외로 1차 연구 자료가 매우 드물어 전공 학자는 물론 관련 서적도 많지 않다. TV드라마의 단골 메뉴인 사극에서 조차 고려시대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가 거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말 선초의 시대상황은 급변하는 환란의 연속이었으며, 이러한 사건의 이면에는 현재의 관점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매우 복합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 2. 무진화변은 고려 말엽 32대 우왕 14년인 1388년 1월에 일어난, ‘염흥방의 가노에 의한 토지탈점사건’으로부터 비화된 정치적 사건이다. 염흥방(廉興邦)은 당시 최고의 권문세가였던 이인임 일파 중 한 사람이다. 고려사에 실린 무진화변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염흥방의 가노였던 이광(李光)이 조반의 백주(白州, 황해도 연백) 땅을 빼앗았다. 이에 조반이 염흥방에게 그 부당함을 말하자 돌려주었으나 이광이 다시 그 땅을 강탈하였다. 그래서 조반이 기병을 이끌고 가서 이광을 죽이고 집을 불사르자 염흥방이 조반을 잡아 심하게 고문하였다. 이 사건을 당시 염흥방과 대립관계에 있던 최영이 알고 우왕과 협의하여 조반을 석방했다. 이어 최영은 이성계와 협력해서 계파의 수장격인 이인임(李仁任), 염흥방, 임견미(林堅味), 도길부(都吉敷) 등이 모의하여 우왕에 대한 모반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이인임 일가를 제외한 가문들은 그 가족까지 천 여 명이나 도륙 및 학살했는데, 강보에 쌓인 어린 아기까지 모두 임진강에 던져 버리니 죽음을 면한 자가 몇 명 없었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은 몰입하여 관비가 된 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이 모든 참화가 불과 십여 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 중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몰려 참형을 당한 도길부(?~1388)가 나의 선조로 족보에 나온다.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사회 지배 권력계층인 이인임 계파의 주요인물이라는 이유로 토지탈점 사건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음에도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도길부는 요즘의 일반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와 함께 참전한 황산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대첩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유린한 왜구를 섬멸한 전쟁으로, 이성계가 도순찰사, 변안열이 도체찰사, 도길부, 왕복명, 우인열(禹仁烈), 박임종, 홍인계, 임성미, 이원계 등이 원수로 출전하였다. 도길부의 가문은 선친인 도홍정(都洪正)이 현 국무총리급인 문하시중의 벼슬을 할 정도로 고려 말의 손꼽히는 권문세가였다. 그래서 도길부는 벼슬이 현재 부총리급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른 인물이었지만 누대에 걸친 세습 권력 가문이었기 때문에 반대 세력에게는 혁명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무진사변은 역모로 비화된 사건이므로 연루된 사람은 거의 모든 사람이 죽음을 당했으나, 도길부의 아들 중 도유(都兪)는 죽음을 면하고, 곤장을 맞은 후 변방으로 유배되는 데, 그는 당시 최영과 이성계 편인 우인열의 사위로서, 고려사에 의하면 최영과 우인열의 친분이 도유의 죽음을 면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유는 족보에 도응(都膺)으로 나오는 인물로서 호는 노은(魯隱)이며, ‘청송당(靑松堂)’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도응은 고려 공민왕 때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주1) 조선 건국 1년 후부터 이성계가 여러 차례에 걸쳐 도응에게 관직을 하사하였으나, ‘개천이나 구덩이에 던져져 죽는 분수를 지켜 초목과 함께 썩겠다.’는 뜻을 밝히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주2) 이성계가 도응에게 벼슬을 내린 왕지(王旨) 4점과 녹패 1점은 600여년이 넘게 보존되어 ‘성주도씨 종중문서’로서 보물 7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3) 도응은 여말선초 고려 말 충신으로 ‘두문동 72인’ 중 한 사람이며, 포은, 목은, 야은, 도은 등과 함께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도응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닭제산 아래 강개골 마을에 은거하였으며, 이 때 그가 지었다는 고려 말의 찬역을 개탄하는 내용의 아리랑 2수가 구전되어 아리랑 및 국문학 역사에서 귀중한 연구 대상으로 꼽힌다. 도응은 무진화변이라는 대참화가 있기 전인 6개월 전만 하더라도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것은 우왕 13년인 1387년 추석날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있었던 시회(詩會)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총 13명으로 여말을 대표하는 쟁쟁한 문사들이다. 그 면면을 보면 이보림(李寶林), 이종학(李種學), 길재, 홍진유(洪進裕), 고병원(高炳元), 김자수(金自粹), 김약시(金若時), 윤상필(尹祥弼), 홍로(洪魯), 이행(李行), 조희직(曺希直), 도응, 안성(安省)이다. 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여말 선초 시기를 대표하는 신진유학자들이다. 고려의 성리학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문하에서 이색을 비롯한 정몽주, 김자수, 이숭인, 정도전 등의 명유(名儒)가 나왔고, 다시 정몽주의 문하에서 권근, 길재 등의 유학자가 배출된다. 위에 나오는 사람 중 이보림은 이제현의 손자이며 이종학은 이색의 아들이다. 그리고 김자수와 김약시 등도 당시 신진유학자로서 쟁쟁한 인물들이었으며, 나중에 다 같이 절의로써 이름을 빛낸다. 길재는 고려 말까지는 한미한 유생이었으나, 조선조에 들어 그의 문하에서 김숙자(金叔滋)와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유학자를 배출하면서 영남 사림파의 시조가 된다. 이 모임에서 정몽주는 이날 동행한 동료와 후학들에게 초서체로 유려하게 쓴 「백원첩」을 보여주었고,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백원첩」을 보고 각각 한 구절씩 연구(聯句)로 시를 짓는다. 이 연구 중 맨 마지막 구절을 도응이 썼으며, 현존하는 도응의 유일한 친필 흔적이다. 주4) 연시는 7명의 글이 남아 있고, 정몽주를 포함한 7명의 시는 전해오지 않는다. 이들 중 정몽주, 김약시, 길재, 이행 외의 다른 사람들은 한 세대 아래 연령대이고 길재가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아 이제현의 제자였던 김자수를 제외하고는 정몽주와 사승(師承) 관계로 추정된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한 것을 알고 지은 두 개의 도응 시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더욱 이러한 유추를 가능케 한다. 주5) 도응은 동화사에서 이 가연(佳緣)을 맺은 후 불과 6개월 만에 무진화변이라는 전대미문의 참화를 겪었다. 그가 동화사에서 남긴 시 구절에는 닥쳐올 환란을 예감케 하는 어떤 징후도 발견할 수 없다. 삶이란 때때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우연성과 엄혹함이 그 경로를 바꾸어버린다. 이러한 삶의 급변은 무진화변을 주도한 최영에게도 일어난다. 최영은 무진화변 6개월 후 그 자신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죽음을 당한다. 이 때 그는 무진화변에 대해 자신의 처사가 지나쳤음을 후회했다. 최영은 고려왕실 구파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명장이었음에도, 당시 신진세력으로 부상한 이성계 일파에게 제거 당함으로써 고려왕조의 멸망을 재촉한 원인제공자가 되었다. 결국 무진화변 4년 후인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된다. 무진화변은 조선 초기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건이 왜곡 기술됨으로써 진실이 가려진 면이 있다. 이 사건은 물론 고려사의 편향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가(史家)들이 염흥방의 부패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또한 시대변화의 전기를 만들기 위하여 토지 탈점 사건의 실제의 이유인 이광과 조반의 채권채무관계를 배제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도 있다. 무진화변이 정치적 사건임은 계파의 수장격인 이인임이 최영과 친분이 있어 그 아들들과 함께 죽음을 면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도길부는 벼슬을 사양하는 도응의 글에 무고가 밝혀진 데 대해 감사하는 구절이 나온 데서 알 수 있듯, 사건 얼마 후에 역적의 누명을 벗게 된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특유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통해서만이 무진화변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고려시대는 국가가 일부계층에게 그 신분적인 특권을 활용하여 대토지 소유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권력과 부가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였으며, 대부분의 농장주가 국왕이나 국왕의 집안, 귀족관료 및 사원이나 승려에 국한된다. 그래서 세습되는 신분에 따라 그 역할이 다른 사회였다. 농장의 조성과 경영 역시 마찬가지로, 농장은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갖춘 대토지 소유를 말한다. 신분제사회에서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무진화변의 배경엔 이런 근원적 문제가 전제되어 있다. 결국 무진화변은 고려말엽 정치경제적 특수상황과 관련된 "염흥방의 종 이광의 조반 토지탈점사건"과 염흥방이 주도한 조반 고문 사건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정치적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중 기현상은 순식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상황은 물론 때로는 가해자가 곧 수혜자도 된다는 사실이다. 무진화변을 주도한 최영은 나의 선조를 도륙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도응의 자손들을 살아남게 한 수혜자이기도 하다. 조선을 건국한 인물인 이성계도 최영과 더불어 나의 선조들을 형장의 이슬로 만들고 몰살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현존하는 성주도씨 일족 최고의 유물은 이성계가 도응에게 내린 왕지와 관련 유물들이다. 사건의 당사자인 조반은 어릴 때부터 중국을 왕래하여 몽골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그는 고려 조정에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다가 무진화변 이후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2등 공신에 녹훈되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며 부흥군(復興君)에 봉해졌다. 그는 특히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와 조선을 오갔던 인물로, 이를 통해 외교적 역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조시대에 들어 그의 후손들 중 인물이 적지 않다. 또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할아버지가 조반의 사위이다. 매우 드문 조선시대 초기의 초상화인 부부초상도 이러한 집안 내력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4. 고려 말에 갑자기 일어난 무진화변이란 회오리바람은 피해자측의 순간적 판단미숙과 가해자의 무자비한 대응으로 인해 발생한 일대 회오리바람이었으며, 이 와중에 도길부 일족은 무참한 죽음을 당했다. 도길부의 삶과 관계된 직접적 유물은 일체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무진화변에 대한 후대 사가의 기록과 그의 가문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도응이 남긴 글을 통해서만이 그 삶의 단편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는 원래 세습적 신분사회가 그 기반이었다. 고려사에 기술된 무진화변은 조선왕조 역성혁명의 당위성 및 정당화 입장에서 왜곡, 과장되었다. 현대의 인식론과 과학에 의하면 찰나의 진실조차 사실상 파악이 불가능하다. 진실은 모호한 경계선에 있어서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권력’과 ‘부’의 세습으로 인해 무진화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부의 세습은 가문의 몰락은 물론 심지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회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도길부는 토지탈점사건으로 비화된 무고에 의해 참변을 당했지만, 사건 발단의 근본원인을 생각해보면 당대의 주요 사회지배계층으로서 권력과 부를 과도하게 점유함으로써 질시와 원망의 대상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역사는 사건에 대한 관점의 기술이다. 역사는 특정 관점에 의한 역사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무진화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진실과 더불어 여전히 뜻밖의 사건이 연속되는 현재적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2011년 9월 20일 도 병 훈 주1) 고려사에는 무진화변 이전에는 도유로 나오며, 무진화변후 개명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무진화변 이전의 팔공산 시회에서 남긴 글에 이미 도응이란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무진화변이 일어나기 전에 개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도응이 남긴 글 중 「계아조설誡兒曺設」의 핵심 내용이『중용(中庸)』사상인 것으로 보아 이를 바탕으로 개명했음을 알 수 있다. 『중용』에 ‘회(回)의 사람됨은 중용을 택하여 좋은 것을 얻으면 가슴(膺)에 꼭 품어서 떠받들고 그것을 잃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응’(膺)자는 ‘가슴(胸)’을 뜻한다. 도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도응의 장남인 사면(思勉)의 장인으로서 조선 초 판윤과 대사성을 역임한 이민(李岷)이 쓴 ‘행장(行狀)’이며, 현재『청송당 실기』와 문중의 여러 문적 등에 전한다. 주2) 도응이 ‘벼슬과 녹봉을 사양한 글(辭職辭祿箋)’ 마지막 부분에 나오며 원문은 ‘수구학지분 동귀초목지부운(守溝壑之分 同歸草木之腐云)’이다. 주3)충남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에 위치한 종중문서 보호각에 있으며, 종중문서는 조선 태조 2년(1393)부터 6년(1397)까지 도응에게 하사한 왕지 4매와 녹패 등 5매다. 호방한 달필의 초서체로 쓰여 진 왕지 4매는 도응위 조봉대부 전의소감자(都膺爲朝奉大夫典醫小監者)외 3매, 녹패 1점은 준사 선절장군 흥위위 좌령장군 도응(准賜宣節將軍興威衛左領將軍都膺)이다. 주4) 그가 남긴 글의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단문 형식의 글로서 성리학의 수용과정이나 도응의 학문적 배경과 인생관을 알 수 있는「사직사록전」,「계자손서」,「계아조설」과 약 10여수의 한 시가 인쇄본이나 필사본으로 전한다. 주5) 이색을 방문하고 지은 시도 있어 그의 제자일 가능성도 있다.
126 no image 다래와 키위 이야기
도병훈
6588 2011-09-13
다래와 키위 이야기 어린 시절에는 밤, 대추, 감 같은 과일도 제사나 명절이 아니면 거의 먹을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예닐곱 살 무렵이던 어느 날, 큰 고모의 무남독녀인 고종사촌 누나가 생전 처음 보는 어떤 과일을 갖고 왔다. 그 과일은 누나가 살던 한밤(대율) 마을 뒷산인 팔공산 깊은 산속에서 채취한 야생다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친인척 집에 손님으로 오가며 며칠씩 머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고, 그 누나도 외가인 우리 집에 오면서 다래를 선물로 갖고 온 것이다. 다래는 작은 달걀 크기에다 솜털이 있는 갈색의 껍질로 둘러싸여 있었다. 과육은 녹색에 가까운 연두색인데 작고 검은 씨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당시 먹어 본 다래의 맛은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누나의 고운 모습과 함께 유년기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다래가 ‘키위’로 더 알려져 있으며 원산지는 대개 뉴질랜드산이다. 그런데 키위의 원산지가 중국이며, 중국의 다래와 이 땅의 야생 다래가 거의 같은 품종임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마트에서 늘 볼 수 있는 키위도 사연과 내력이 있다. 100여 년 전인 1904년, 중국 창장(長江·양쯔강) 유역의 한 야산에서 다래를 발견한 사람은 뉴질랜드 선교사 이사벨 프레이저였다. 그녀는 다래 씨를 채집하여 귀국한 후 처음 뉴질랜드 땅에 심었다. 그녀는 열매의 모양이 서양까치밥나무 열매(구스베리)와 비슷하다고 해 '차이니스 구스베리'란 이름을 붙였으며, 처음에는 칡이나 포도나무처럼 덩굴로 자라는 다래나무의 특성상 그늘을 만드는 정원수로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뉴질랜드의 원예학자인 헤이워드 라이트가 그 열매의 '맛'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가 10년 넘게 품종을 개량한 끝에 마침내 크기가 크고 당도도 높은 개량 키위를 만들어 '키위프루트'란 새 이름을 붙였다. 뉴질랜드의 국조(國鳥)인 키위와 닮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어 2차 세계대전 직후 뉴질랜드 정부는 참전병사의 사회복귀 프로그램으로 과수원을 권장하여 키위 재배가 급증한다. 그리고 1950년대를 기점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키위를 수출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뉴질랜드하면 키위가 떠오를 만큼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상품이 됐다. 북반구에서 과일이 나지 않는 시기에 공급이 가능했고, 또 장거리를 냉장해서 싣고 가도 물러지지 않고 맛이 더 좋아지는 후숙(後熟) 과일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키위의 겉모양이 호감을 주지 않기 때문에 수출 초기부터 절반을 잘라 속을 보여주고 맛과 영양이 풍부하다는 걸 강조하는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키위의 주도권과 관련해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추세인데, 중국이 참다래 육종과 재배에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야생 참 다래는 그 종류가 4가지이며, 시중에서 판매되는 참다래는 이 야생 다래를 재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다래는 크기도 개량종 다래인 키위에 비해 작고 당도가 낮다. 게다가 완전하게 익기 전의 다래 특유의 아릿한 신맛이 강하다. 이는 후숙 과일임에도 적정 출하 시기보다 이른 시기에 출하되어 작고 딱딱한 상태로 출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래 보다는 뉴질랜드산 키위가 더욱 친숙하다. 커피나 감자, 옥수수 등의 서구 유입 과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다래에서 키위로의 변천과정은 근대의 대항해시대 이후 서구인들이 산업자원을 확보하거나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려던 과정에서 일어난 일종의 되먹힘 현상이지만, 그 주된 경제적 이익은 유전자 차원의 개량 및 복제능력을 바탕으로 상품화를 선점한 사람들이 차지해왔다. 이러한 상품화는 한반도가 원산지인 콩도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동물, 광물질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런 사례는 근대 동서 문명의 교류 및 이입 과정이 광범위한 진폭으로 형성되었음을 입증한다. 한 선교사가 중국에서 우연히 한 야생과일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그 과일은 현대인들이 즐겨 먹는 과일이 되었다. 뜻밖의 우연한 사례로부터 불과 100여년 만에 세계적으로 확산된 다래의 역사, 즉 다래에서 키위로의 변천사는 현 시대 농작물이 어떻게 상품화되는지 잘 알게 한다. 키위의 물화(物化), 또는 상품화 현상은 20세기 이후 유통되는 농작물의 일반적 실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포장된 진열장의 키위처럼 거의 모든 과일들이나 농작물은 개량된 품종이며, 명품으로 포장된 상품만이 물신(物神)으로 살아남는다. 그만큼 자연의 맛은 귀한 맛이 되어버렸으며, 현대인들은 자연을 가장한 인공적인 맛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세계는 종자 전쟁 중이다’는 말이 있듯, 육종학의 차원에서는 개량되기 이전의 종자가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비동일자로서 특수한 고유성을 유일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유전자 차원의 상품화도 그 근원은 야생의 자연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품화 현상은 오늘날 이벤트 화되는 행사를 바탕으로 고급 상품으로 포장되는 예술(?)과 함께 비동일자로서 우리의 감성을 일깨우는 예술에 대해서도 자문하게 한다. 2011년 9월 12일 도 병 훈
125 no image 2011 강진 해남 문화유적 답사소감
도병훈
5066 2011-08-22
2011 강진 해남 문화유적 답사소감 1. 지난 8월 16일 한반도 서남쪽 끝단에 위치한 해남과 강진의 주요 유적지를 답사했다. 고속도로와 지방 국도 주변의 여름 산하는 가는 길 내내 흐린 날씨로 인해 농담(濃淡)의 대비가 강조된 수묵화를 연상케 해 마치 옛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산하대지는 거칠고 아름다웠다. 더없이 친숙하면서도 낯선 세계가 가는 곳마다 있었다. 하루 동안 8군데나 답사하는 강행군이었지만 마지막 목적지인 달마산 미황사(美黃寺)를 나와 귀경길에 오르는 순간, 오래 미루어 둔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 특히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일지암(一支庵)’ 답사는 만시지탄의 느낌이 들었지만, 물리적 시공간인 자연과 관점의 문제인 역사, 문화예술 등에 대해서 좀 더 다각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된 체험이었다. 2. 남도 특유의 나직한 산과 들이 한적한 성하(盛夏)의 숲길, 첫 기착지는 강진 월출산 무위사로, 극락전과 조선 초기의 벽화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진입공간은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아담한 경내에 들어서자 무위사의 중심건물인 극락전(국보 13호)이 왼 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듯한 댓돌(축대) 위에 소박하나 기품 있는 자태로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1) 건물의 형태는 주심포 맞배지붕이며 정면3칸, 측면3칸이었다. 극락전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세종 12년(1430년)에 지었다는 조성연대가 남아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문화유산 중 국보로 지정받는 데 이러한 기년명이 결정적 요건이 된다. 양식적 변화의 근거로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건축 문화유산의 경우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인데다 몽고와 일본이 국토를 무참히 유린해버린 참화를 겪으면서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은 극히 드문 편이다. 그래서 임란 이전의 벽화도 매우 귀한 문화유산이다. 극락전 후불탱화인 아미타여래삼존벽화(阿彌陀如來三尊壁畵, 국보313호)는 성종 때 그려진, 경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불화로 조선 후기의 탱화와는 사뭇 다른 구도와 분위기를 갖고 있다. 벽화보존관에서는 극락전 흙벽에서 떼어낸 다른 벽화를 따로 전시하고 있었는데.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 다양한 벽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다음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영랑의 생가에 갔다. 생가 입구 기념관 안에 전시된 그의 시들이나 그림은 영랑의 시풍과 거리가 먼 방식으로 번잡스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군청 소재지 도로변 인근에 있는 영랑생가는 옛 모습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한 번 거쳐 가는 관광지 같은 인상이었다. 그래서 방문객들이 좀 더 뜻깊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생가를 나오면서 1950년대에 출간된 김윤식의 시집을 복제한 ‘영랑시선’을 샀는데, 옛 시집 특유의 여백과 글씨체가 소담해서 좋았다. 집에 와서 찬찬히 보니 사투리 그대로의 시어들이 표준어로 바꾼 시보다 어감이 좋았다. 이어 다산초당에 올랐다. 초당의 진입공간에 있는 다산기념관에서 다산 관련 유물을 보았는데, ‘노규황량사(露葵黃梁社)’란 추사의 글씨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글씨체로 보아 제주 해배 이후 추사체의 특색인 강건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유희적인 개성이 십분 구현된 명품 글씨였다. 그래서 기념관 입구에서 이 글과 함께 다산초당의 편액의 원문인 ‘보정산방(寶丁山房)’이란 글씨가 들어 있는 <제7회 다산 유물 특별전 다산과 추사Ⅱ>도록을 샀다. 올 8월 초에 있었던 이 전시회에 처음 원본이 공개된 보정산방 글씨는 비록 인쇄된 화면이었지만 푸른 기를 머금은 맑은 먹색과 붓질의 궤적이 선명해서 어제 쓴 듯 했다. ‘다산의 학예와 인품을 존경하고 보배롭게 여기는 산방’이란 뜻의 이 글씨는 추사가 다산 사후 제자에게 써 준 것으로 그동안 모각된 글씨인 다산동암(茶山東菴)의 편액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산초당은 기념관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만덕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초당을 중심으로 세 채의 건물이 보였다. 초당 앞의 좁은 마당 가운데는 직경 1m 남짓 크기의 타원형 넙적 바위인 ‘다조(茶竈,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란 뜻임)’가 있었는데, 두륜산 대흥사의 일지암과 함께 조선 후기 차 문화를 증거 하는 유물이다. 주2) 초당 뒤에는 작은 샘물인 약천(藥泉)이, 초당 옆에는 사각형의 작은 연못과 인공 산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다성각(多星閣)이 있고, 동쪽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 있는 다산동암이 있다. 다산은 이 동암에서 주요 저서들을 썼으며, 아내가 보내 준 치마에 그려 두 딸에게 준 애절한 사연이 담긴 <매화와 새> 그림 2폭도 이곳에서 그렸다. 주3) 다산 정약용(茶山 鄭若鏞,1762,영조38년~1836,헌종2년)은 조선 말기에 외래 종교인 서학(西學), 즉 천주교 수용과정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그의 형인 정약전과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모진 고문을 겪으며 밀고와 배교(背敎)로 겨우 살아남아 이곳 유배지에서 반전의 삶을 이룬 인물이다. 당시 그의 비통한 처지와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은 정조에게 올린 상소문인 <자명소(自明疏)>에 잘 드러난다. 그래서 다산은 영달과는 거리가 먼 자정(自靖)의 삶을 살았으며, 다산초당은 그 흔적으로 남았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 와서 지내다 1808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도움이 있었다. 다산초당은 원래 귤동 마을 해남 윤씨 가문의 산장이었다. 다산은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다산은 이곳으로 와서 축대를 쌓고 동서 두 암을 마련하고 연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고, 가는 나무에 홈을 파서 만든 수로를 통해 흘러내리는 작은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그는 이곳에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약 10년간에 걸친 유배기간을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학문과 저술활동으로 목민심서 ․ 경세유표 ․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써서 조선조 후기 학문을 집대성 하였다. 또한 다산은 여기서 18명의 제자들을 가르쳐 모두 학자로 키웠다. 게다가 다산은 여유당전서에서 르네상스 때 개발되어 조선에 전래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해 쓴 ‘칠실관화설(漆室觀畵設)’을 남겨 회화관은 물론 다방면에 걸친 관심의 폭을 짐작케 한다. 이 뿐 만 아니라 그는 그림과 서예 등 문예활동까지 하며 지냈다. 그러나 다산의 제반 선구적 업적은 당대의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지배세력의 우물안 개구리식 안목으로 인해 비전이 되지 못한다. 그 후 백 년의 시간이 지나 한 ‘저술광(著述狂)’의 문적(文蹟)들은 거친 현실 속 낡은 이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의 다산초당은 1930년대에 폐허화되어 1950년대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초당은 말 그대로 띠집(초가집)을 뜻하는데 현재는 기와집이다. 조만간 띠집으로 복원될 예정이라 한다. 그러나 기록이나 초의가 그린 그림인 <다산도>에 의하면 원래 동암, 서암 각 두 채이므로 이대로 복원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각사나 낙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현존하는 건축문화유산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라진 것이 다시 생겨난다. 이 과정에서 규모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그대로 복원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산초당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산이 공간적 조건과 건물의 배치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다산초당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정상 동암 뒷편의 전망 좋은 천일각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다산이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으로 ‘丁石(정석)’이란 글씨를 새긴 바위를 보지 못한 채 그 다음에 들른 곳은 해남 윤씨 종택인 녹우단(綠雨壇)이었다. 이곳은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와 그 후손들이 살아 온 집이다. 특히 녹우단의 사랑채인 녹우당(綠雨堂)과 고산의 증손이자 다산의 외증조할아버지인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88, 현종9년~1715, 숙종4년)가 그린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을 소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두 눈과 개성적인 풍모를 보여주는 그의 자화상은 윤두서의 고뇌어린 삶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듯하여, 가히 전통 인물화를 대표할 만한 그림이다. 이외에도 새로 지은 유물관에서 윤선도 관련 유물과 윤두서 관련 유물인 그림과 그의 아들, 손자의 그림도 함께 볼 수 있었으나 이 모두는 원본이 아니라 복제품이었다.(*윤두서 자화상 원본은 국립박물관 등 다른 특별전에서 두 번 실제로 보았음) 다만 윤두서가 그린 보물 제 481호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지도>는 서적들과 함께 원본 실물이었는데 특히 동국 여지 지도는 매우 아름다운 고지도였다. 일본 지도는 안내 소책자에 의하면 공재가 직접 48명의 첩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두륜산 대흥사로 갔다. 대흥사의 옛 지명은 대둔사이다. 사찰 입구는 울창한 나무 숲이 긴 복도형 공간을 만들어 한 낮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중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이 남부지방 특유의 활엽수림이었다. 주차장에서도 절 입구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며 가는 길에는 유선장이란 꽤 알려진 음식점도 있었다. 절 입구에 이르렀을 때 ‘왕벚나무 자생지’를 알리는 나무 팻말이 보였다. 가람의 경내는 크게 남원 북원, 유교적 공간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영역 등 모두 4개의 영역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자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우뚝 선 2층 누각이 보였다. 편액 글씨를 보니 ‘계곡을 베개로 삼는다’는 침계루(枕溪樓)다. 북원 일곽의 정문인 듯 다리를 건너 내정에 들어서자 대웅전이 있었다. 지면에서 익히 보아 온 대웅보전 현판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추사 앞 세대의 대표적인 명필로 꼽힌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일반적인 편액 글씨와 달리 매우 구불구불한 역동적 글씨체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는 길에 이 편액을 보고 혹독한 비판과 함께 떼어버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는 글씨다. 나 역시 최근까지 현판 글씨로는 격이 떨어진다 싶었지만 실제로 보니 마치 울분이 배인 듯한 힘과 개성이 느껴졌다. 그의 글씨는 마치 흔들리는 배 위에서 쓴 듯, 마치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은데, 그가 이곳 대흥사에서 멀지 않은 신지도에서 16년 동안이나 귀양살이 한 사실에서 기인하는 듯했다. 대웅전 옆 무량수각의 편액은 추사가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쓴 것인데, 예산 화암사에 남아 있는 무량수각 글씨와 대조된다. 화암사의 편액은 제주 유배시에 쓴 글로 대흥사의 편액글씨보다 필획이 가늘어 메마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대흥사 경내를 들러보다 나의 발걸음은 곧 일지암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일정에서 내심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지암은 조선 차를 중흥시킨 초의가 만년 40년 (1826~1866)동안 거주한 곳이다. 주4) 그런데 이곳은 본 절인 대흥사에서도 도보로 다시 2, 30분은 올라가야 가는 가파른 산 중턱에 있어서 바쁜 일정상 가기에는 무리였지만, 처와 아이들에겐 잠시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한 후,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의 뛰어올라가다시피 해서 일지암에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는 등산객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하산하는 것을 보았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일지암에 도착하자, 마침 젊은 스님 한 분이 마당에 있기에 부탁해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후 잠시 숨을 고르고 눈앞을 보니 사방은 운무로 가득했다. 초의(草衣,1786, 정조 10년~1866, 고종3년)는 이 일지암에서 차와 선, 시와 그림 등의 예술과 문화를 생활화하며 차에 대한 저서인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외 불교 관련 책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거의 명맥이 끊긴 차문화를 중흥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조선후기 실학의 거두이자 당대의 명사인 다산 정약용은 물론 금석학과 추사체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정조 10년~1857, 철종 8년)와 교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초의 차가 유명하게 된 계기는 추사와의 가연(佳緣) 때문이다. 초의와 추사는 1815년 겨울 수락산 학림암에서 처음 만났으며, 추사가 초의로부터 차를 제공받기 시작한 것은 1838년경이었다. 이 때부터 1850년 무렵까지 추사는 초의에게 50여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차와 관련한 것이 약 15통이나 된다. 추사는 차를 받은 답례로 초의에게 글씨를 써주고 그림을 그려준다. 추사는 제주 유배길에서도 초의 선사가 머물던 대흥사 일지암을 방문한 이후 제주도에서 차를 선물 받았다. 추사는 보답으로 글씨를 보냈는데, 일로향실(一爐香室), 죽로지실(竹爐之室), 명선(茗禪, ‘차를 마시며 선에 들다’라는 뜻임) 같은 명품 글씨가 현존한다. 초의 차는 그 제조법을 이은 사람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식 녹차와는 매우 다르다고 한다. 추사의 편지 글에 드러나듯, 차를 맛 볼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매료될 정도였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차를 매개로 당대의 명사들이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고차원의 정신문화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초의는 추사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서울까지 출입하며 당대의 명사인 정약용·김정희·신위의 집을 방문했고, 당대를 대표하던 학자이자 예인이기도 한 홍현주, ·신헌, ·허련 등과 방외청교(方外請交)를 맺었다. 이들 중 신헌은 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인물로서 시와 서, 금석학에서 추사의 수제자였다. 그가 초의에게 보낸 아름다운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초의가 산 위로 떠나가서는(草衣上山去) 초암에서 한가로이 지낸다 하네.(閒居草庵中) 띠집을 얽은 지 40년인데(結草四十年) 오가는 건 맑은 바람이라네.(往來有淸風) 일지암은 초의의 입적 후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로 방치되다가 초의의 시와 간찰(簡札), 소치 허련이 저술한 몽연록(蒙緣錄)을 참고로 1979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주5) 현재 일지암에는 초의의 살림채인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라는 산방도 복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웅전을 포함한 여러 채의 당우들이 모여 작은 절을 이루고 있다. 일지암에 담긴 정신은 ‘일지’. 즉 한 가지가 의미하듯, 절욕(節慾), 허심虛心, 자족(自足)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신도 어디까지나 물리적 대상으로 구현되므로, 현재 일지암의 모습은 너무 가지가 많은 셈이다. 다음은 해남 땅끝 마을으로 갔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갔지만 막상 가서 보니 그렇지 않았다. 흐린 날이라 육지와 바다 사이는 뚜렷한 경계가 없었으며, 그만큼 감개무량했다. 땅끝 마을에서 나와 오늘 일정의 마지막 기착자인 달마산 미황사로 향했다. 낮이 긴 여름이지만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미황사에 도착하여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일주문을 지나자 계단들이 진입공간을 이루었는데, 최근에 조성했음에도 붉은 기미의 돌을 거칠게 막 다듬질을 한 돌계단이 일품이었다. 주변 풍광과 참으로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꽤 경사가 진 가파른 길이었지만 계단이 아름다워 힘들지 않았다. 마당에 올라서자 단청이 거의 탈색된 대웅전(보물 947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건물을 이루는 주요 뼈대인 기둥을 포함한 처마는 비바람에 하얗게 탈색되어 마치 단정한 풍모를 지닌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사찰 규모만이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전통사찰의 구조는 미황사와 비슷하다. 특히 대웅전과 다른 당우, 즉 좌우 승방이나 누각으로 감싸진 정방형의 방형 마당 공간이 그러하다. 그런데도 사찰마다 사뭇 분위기가 다른 것은 무엇보다 지붕이 없는 외부 공간, 즉 지형적 조건에 따른 마당이나 계단 형태 차이 때문임을 이곳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템플스테이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이러한 장면에서 향후 미래 불교의 모습을 예감할 수 있었다. 미래의 사찰은 단지 불 보살, 나한, 신중 등에 대해 경배하는 곳이거나, 승려가 수행하는 곳이라는 이분법적 의식에서 벗어나 깨침의 공간, 심신수양의 공간으로서 지역사회 문화의 중심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템플 스테이는 미래 불교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책 속의 정보와 체험하는 실상은 전혀 다르다. 건축물은 시대를 불문하고 지형적 조건을 바탕으로 특정지역마다 최고의 기술력과 미의식을 집약하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지닌다. 영남과 달리 호남의 건축문화유산은 규모면에서 소담하고 감성적이었다. 건축물과 자연지형과의 어울림으로, 깊숙한 산의 경사진 산자락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전통건축의 주인은 외부 공간임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은 단지 옛 것에 대한 심미적 감상이 목적이 아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다산초당이 특히 그러하다. 강진 유배지에서의 다산의 삶은 그 반전과 승화로, 한편으로는 과도기적 상황이었던 당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한 단면으로서 실존적 삶의 무게를 깨닫게 한다. 이처럼 여행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작은 깨달음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문화유적지에 현존하는 물리적 대상은 공간의 변화, 즉 시간의 흔적이다. 그래서 그곳에 얽힌 사연과 내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변하는 무상한 대상과 역사는 일견 모순되는 듯하지만 이러한 자각을 통해 우리는 세계와 삶의 관계를 체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태도와 체험의 강도다. 어떤 시공간에서 살아가든 문화와 정신이란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1. 8. 21. 도 병 훈 주1) 편액에는 ‘極樂寶殿’이라 새겨져 있다. 주2)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의 저자에 의하면, 다산초당은 조선 차를 중흥시킨 산실이다. 다산이 혜장이나 초의로부터 차를 배웠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다산은 이곳으로 귀양을 오기 전에도 차에 대한 식견이 높았으며, 1805년 “(다산이) 만덕산 백련사에 놀러갔다가 주변에 야생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아암 등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의는 1809년 다산초당을 처음 찾은 이후 다산의 학문과 인품에 빠져들면서 차의 제법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당시 다산은 48세, 초의는 24세였다) 그간 우리 차에 대한 최초의 저술로 손꼽혀온 것은 초의가 1837년 저술한 <동다송>이었지만, 이 책의 저자는 부안현감이었던 이운해(1710~?)가 1755년 지은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를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로 본다. 이어 저자는 이덕리의 <동다기>를 조선에 차의 씨앗을 뿌린 두 번째 저작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다시 시작된 조선의 차문화가 초의, 추사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다산 차는 채식 위주의 한국인에게 맞도록 야생차의 독성을 눅이는 제조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 차는 지금처럼 ‘잎차를 우려 마시는 방식’인 녹차와 같은 잎차가 아니라 떡차였다. 이것이 초의에게로 이어져 한층 다양한 떡차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사실의 발견은 한국 차문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다삼매茶三昧’라고 하는 불교적 깨달음의 차원에서 논의될 정도로 고도의 차문화를 유행시킨 장본인은 초의다. 주3) 두 폭 모두 딸들을 위해 그린 것이지만 고대 박물관 소장의 ‘매화와 새’그림은 새가 두 마리이다. 나머지 한 폭은 한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 그림으로 다산이 강진에서 얻은 소실 태생의 딸을 위해 그린 것이다. 주4) ‘일지(一支)’라는 이름은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있는 ‘뱁새가 깊은 숲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경우 한 나뭇가지면 충분하다(鵻鷯巢於深林 不過一枝.)’와, 한산(寒山)의 시‘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에 살아도 편 안하다(想念誚鶁鳥安身在一枝.)’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주5)일지암은 호남 화단의 비조인 소치 허련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진도 운림산방의 주인이었던 허련은 초의와 추사의 두 스승을 인연으로 맺어 미산, 의재, 남농으로 이어지는 호남의 전통화풍을 이루게 한 것이다.
124 no image 도화창圖畵窓과 복합 공간의 어울림 - 논산 명재고택 답사기
도병훈
4509 2011-08-06
도화창圖畵窓과 복합 공간의 어울림 - 논산 명재고택 답사기 1. 어제 가족과 함께 김천에 있는 황악산 직지사를 거쳐 충남 논산에 있는 명재고택을 다녀왔다. 올여름은 비가 많이 내려, 오전까지도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날이 개었다. 명재고택은 야트막한 산과 들이 펼쳐진 내륙 깊숙한 곳에 오랜 세월 풍상에 씻기면서 형성된 한옥 특유의 유서 깊은 분위기를 간직한 채 의연히 자리 잡고 있었다. 담장도 없이 열린 공간이 뜨거운 여름 햇살아래 유달리 환해 보였는데 바깥마당 양쪽으로 큰 백일홍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명재고택에 들어서니 밖으로 드러난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동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예기치 않은 경험을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답사의 묘미다. 지형도 다르고 건축의 재료인 돌이나 나무의 크기와 모양도 다르고, 무엇보다 그것을 조성해낸 선조들의 정신이나 안목과 솜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간 책자라든가 연구자료 및 신문지면을 통해 이 고택에 대해서 흥미와 관심을 가졌는데 이번 답사를 통해 더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주1) 2. 명재고택은 중부(호서) 지방에 위치한 조선 중, 후기의 대표적인 한옥으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즉 ‘향교가 있는 마을’에 있다. 이 지역은 파평 윤씨의 세거지이며 인근의 회덕 지역과 함께 조선 후기 정치 사상계 실세들의 본거지였다. 명재고택은 조선 중기의 선비인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 선생의 말년인 1709년(숙종35년)에 제자들이 주도하여 지은 건물로 전해지며, 윤증 선생이 오랫동안 살았던 옛집은 인근 유봉마을에 있다. 주2) 현재 고택의 건물 양식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이어서 이 무렵에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담장이나 소슬대문과 같은 별도의 경계물이 없고, 주3) 대문채 앞 넓은 평지에 동양의 전통적 연못과 섬인 ‘방지원도方地圓島’가 있다. 정면에서 보면 명재고택은 2단의 축대 위에 지은 사랑채와 대문채가 나란히 있다. 이 중에서도 격식과 규모면에서 사랑채 건물이 단연 두드러지며, 특히 누마루가 있는 모퉁이 공간이 파사드facade처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공간은 정자 역할을 하는 장소로 전면의 경관이나 농토를 조망하거나 오른 쪽 앞의 사각 연못을 감상하는 장소이다. 윤증 선생은 덕유산을 여행한 후「유여산행遊廬山行」이란 글을 남길 정도로 자연의 풍경風景을 사랑한 분이므로 이러한 풍류 정신이 이 건물에 깃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때마침 여름이라 여닫이로 된 3면의 창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매달아 놓았는데, 모퉁이 칸은 정자처럼 활짝 열린 공간을 이룬다. 특히 정면 황금비의 ‘도화창圖畵窓’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경을 완상하는 프레임 역할을 한다. 굳이 누마루에 올라가보지 않아도 능히 도화창을 통해 전경을 감상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누마루 정면의 편액은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천시天時를 연구하는 집’이라는 뜻인 ‘이은시사離隱時舍’가 검은 바탕에 흰색의 행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주4) 누마루 측면에는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도원’은 ‘무릉도원’을 의미하므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주5)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총 8칸으로 그 중 방은 2칸이다. 나머지는 마루이거나 다락이다. 사랑채 공간은 안팎으로도 특이한 부분이 많다. 그 중에는 바깥 사랑채 마루 밑의 검 은색을 띤 높이 30cm 크기의 산수석 같은 돌들도 있는데, 이 돌은 석가산石假山, 즉 금강산을 뜻하므로 이로 인해 누마루는 산 위에 있는 정자가 된다. 주6) 또 하나의 예는 TV나 책자 등에 소개되어 많이 알려진, 사랑방과 골방 사이에 있는 ‘안고지기’라고 불리는 ‘미닫이 여닫이문’이다. 즉 미닫이로 열 수 있으면서 또한 문틀과 문짝이 맞물린 상태로 여닫이(*앞으로 당겨 여는 것)로도 열리는 문으로, 현대적 관점에서도 매우 참신한 디자인으로 보였다. 사랑채 뒤의 툇마루와 낮은 굴뚝이 있는 공간은 매우 아늑하고 정감이 있었다. 여기서 작은 문을 통해 안채 오른쪽 날개채의 뒷마당으로 이어진다. 대문채를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경冂’자형의 공간이 대문채로 인해 아담한 정방형 안마당을 형성하는데, 동서로는 통로로 열린 공간이다. 안채는 가운데 ‘육六자’형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이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7) 또한 크기는 다르지만 사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 마루공간이 있다. 대청의 천장은 우리의 전통적 한옥처럼 기둥보다 굵은 대들보와 함께 서까래가 드러나 있다. 대청마루 뒤로는 활짝 열린 바라지창 뒤로 바로 장독대가 놓인 후원이 보인다. 낮게 조성된 뒷담 너머 뒷산인 노성산은 솔숲이 무성하다. 여기서 언젠가 한옥을 다룬 다큐 프로그램에서 나온 장면이 생각났다. 이러한 한옥의 경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대청마루로 불어오는데, 뒷산 자락의 찬 공기가 더운 마당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대개의 전통 한옥의 마당에 잔디를 심거나 나무를 심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통풍 효과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안채 서쪽에는 안채와 곳간이 형성한 공간이 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무심히 지나쳤을 공간인 이곳은 ‘아래는 넓게 위는 좁게’ 비껴서 배치한 물길이자 바람이 지나는 공간으로, 유체의 역학 법칙인 ‘베르누이의 정리’를 경험으로 터득한 선조의 지혜를 보여준다. 안채 동쪽 측면에도 좁고 긴 마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사당으로 통하는 문 옆에는 나지막한 굴뚝이, 끝부분은 계단식 화단이 있어 아늑한 느낌을 갖게 한다. 안채의 동측 뒷면 공간에는 별도로 지어진 사당이 있다. 명재 고택 뿐 만 아니라 격식을 갖춘 조선시대 한옥에서 사당은 집터의 가장 높은 곳에 별도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간에는 하단이 송판인 ‘내외벽’이 있는데, 아랫부분은 약 30~40Cm 높이로 뚫리어 있다. 안채에서는 이 공간을 통해 방문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이처럼 명재고택은 남녀의 성, 세대, 신분에 따라 여러 채 또는 영역들로 나뉘지만, 한 가족의 생활공간이므로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어디까지나 그 바탕은 지형적 조건이다. 무엇보다도 명재고택은 우리 전통 건축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왕궁이나 전통사찰, 서원은 지형에 따라 지어 전체 건물 군을 같은 높이의 평지에 지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전통 건축공간은 그 구성이 다채롭고 복합적이며 체험동선도 단조롭지 않다. 명재고택 또한 민가여서 규모만 작을 뿐 이러한 기본적 특색은 다르지 않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다. 사랑채는 정면에서 보면 두 단의 높은 기단 위에 있지만 안채는 낮고 소박한 석축 위에 경冂’자형으로 자리 잡았다.주8) 3. 명재고택은 조선 중기 호서지방 사대부의 생활공간이 남아 있는 대표적 건물이다. 약 300년 전에 이 고택이 지어진 후 지금처럼 현존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사연과 곡절이 있다. 특히 명재 윤증 선생의 중용적 실천의 삶은 우리 삶과 세계에 대해 더욱 폭 넓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갖게 한다. 그래서 이 건물은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한다. 명재고택 안팎의 공간은 지형과 건물의 관계를 종합적 관점에서 통찰할 수 있을 때 고유성과 특이성을 느낄 수 있다. 즉 명재고택 고유의 특이성은 부분보다 전체, 단편보다 종합에 있다. 그래서 ‘가장 기능적일 때 가장 아름답다’는 최근 현대 디자인의 특성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삶의 지혜를 통섭적으로 아우르는 복합공간이라는 것이다. 선조들의 깊은 지혜가 담긴 이런 역사적 · 물리적 어울림의 공간은 급속하게 무연無緣사회로 변하면서 물질, 또는 상품의 과잉이 문제인 현대문명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2011년 8월 5일 도 병 훈 주1)이번 명재고택답사에는 이숙실문화해설사의 자상한 설명이 큰 도움이 됐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주2)윤증은 예학자로서 기호학파 계열의 인물이다. 윤증은 당시 실세였던 노론파의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후에 우암에 대항하는 소론파의 영수가 된다.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른다. 두 학자가 거주했던 회덕(懷德-송시열)과 노성의 당시 지명인 니성(尼城-윤증)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두 학자로부터 비롯된 ‘노·소’ 갈등의 근본적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윤증)’의 대립이었다. 윤증은 호란 이후 사회경제 문제는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윤증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의 낙인이 찍히기도 했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은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노론에 비판 세력 역할을 했다. 이 같은 노소 대립은 경종 ·영·정조 대에도 계속되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 노론 일당의 지배 체제로 굳어졌다. 이 와중에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남인들은 약 200년간 중앙 권력으로부터 거의 소외되는데, 윤증을 필두로 한 소론은 야당인 남인과 노론 사이에서 중도 노선을 견지하였다. 윤증은 평생을 도리와 예법을 좇아 살고자 한 당대의 대표적 선비였다. 그는 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을 임명 받았지만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간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중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나 서신으로 적극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리고 지행합일의 인간적 소통과 화합정신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윤증은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의 삶을 지향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3) 연구 자료에 의하면 원래는 소슬 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주4) 이 편액은 명재의 후손 중 개화기 때 윤하중尹昰重이란 인물이 천문학에 심취하여 그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주5) 이 편액 ‘도원’의 ‘桃자는 ’木‘변이 위에 있다. 주6) 석가산 아래쪽 마당에도 돌무더기가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화단을 둘러싼 돌로 보이지만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상징한다고 한다. 주7)冂자형 안채의 가운데 부분, 전면 다섯 칸은 대청이다. 깊이 방향을 계산하면 8칸이다. 얼핏 보면 주택의 규모에 비해 크다. 대청이 너른 것은 제사를 위한 제청 및 초례청과 가족들의 모임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청의 뒤쪽엔 머름(전통 주택의 창호 구분은 ‘머름’의 유무로 선택한다. 머름이란 ‘멀다’란 의미와 소리를 뜻하는 한자음인 음을 합한 이두표기다. 머름의 위치와 크기는 방바닥 위에 약 30센티미터 높이로 설치하며 그 위에 창을 설치한다. 즉 머름이 있는 부분은 출입을 목적으로 하는 문이 아니라 환기를 목적으로 하는 문임)대 위에 세운 문얼굴이 있고 바라지창이 달렸다. 주8)안채와 사랑채의 분리, 사당의 건립 등은 조선조 중기 성리학적 규범이 지방사회를 지배하면서, 17세기 이후 '가례'와 같은 예학이 강력한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으면서 정착되었다. 특히 남녀의 공간을 분리하는 주생활 규범은 16~7세기에 이르러 일반화된다. 그리고 대청 서쪽의 안방으로 들어가는 세 짝의 문은 맹장지 사분합이라 부른다. 동쪽의 대청 끝자리로 띠살무늬에 궁판을 들인 분합문은 건넌방의 출입문이다.
123 no image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과 후지와라 신야의 ‘월야月夜’
도병훈
5877 2011-07-11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과 후지와라 신야의 ‘월야月夜’ 1. 7월 2일, 인터넷에 이태형 충남대 천문우주과학과 겸임교수가 신윤복(申潤福, 1758~?)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의 그림에 대해 제작년도는 물론 그림 속 두 남녀가 만나는 시간까지 알아냈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월하정인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수록된 그림으로 깊은 달밤 아래서 두 젊은 남녀가 만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교수는 이 그림에 그려진 일상적 형태의 달이 아닌 위가 볼록한 형태인 눈썹 모양의 달을 보고, "밤에는 태양이 떠 있지 않아 달의 볼록한 면이 위로 향할 수 없고, 오직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는 사실을 단서로 삼았다. 그래서 이 교수는 신윤복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간 '승정원일기' 등 당시 기록을 통해 서울에서 관측 가능한 부분월식을 조사한 결과, 1784년 8월 30일과 1793년 8월 21일 두 번에 걸쳐 그림과 같은 부분월식이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1784(정조 8년)년에는 비가 와서 월식을 관측할 수 없었으나, 1793년(정조 17년) 8월 21일에는 "7월 병오(丙午·15)일 밤 이경에서 사경까지 월식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이 그림 속 인물들의 만남 시기까지 알았다고 한다 . 이 과정에서 그림 속의 달이 처마 근처에 그려진 것과 '야삼경夜三更'이란 글귀도 결정적 단서가 되는데, 여름에는 남중고도南中高度가 낮고, 야삼경이란 시각은 밤 12시 전후의 '자시(子時)'를 무렵이므로 결국 이 그림은 1793년 8월 21일 밤 자정 무렵의 달 아래 있는 남녀를 그렸다는 것이다. 2. 한편, 같은 날짜, 한 신문에는 토일섹션 특집으로 “일 젊은이의 ‘정신적 지주’ 도보여행가 후지와라 신야, 대지진 100일後후를 말하다”란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기사 위에는 사진가로도 활동하는 후지와라가 찍은 사진이 신문 상단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진 제목은 월야(月夜). 3.11대지진으로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일본 동북부의 재해현장의 마을이 교교히 빛나는 하얀 보름달빛 아래 푸르게 젖어 있는 장면이었다. 후지와라 신야 藤原新也·67)는 여행가로서 그의 첫 저서인 인도방랑(1972)와 티베트방랑, 동양기행, 아메리카기행을 펴낸 사람이다. 주1) 그는 고2때 가업이 망하면서 그림에 빠져드는데, 무일푼이 되어 만난 수선화를 보고 붓을 든 이후, 도쿄예술대에 진학했지만 재학 중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물다섯 나이로 인도로 떠난다. 신문 인터뷰에는 다음과 같은 인도여행 첫 장면이 나온다. 처음 인도에 가서 사막을 2km 걸었다. 현지 관리에게 돈을 주고 여기서 저기까지 걸었다는 증명서를 만들고 발자국 사진까지 찍었다. 일본에 가서 전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득 ‘아트(art)’라는 게 어처구니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더라. 종잇장은 찢어버리고 자유롭게 여행했다. ‘살아있는 인간’들을 만났다. 인간이란 존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숭고하거나 존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수많은 여행에서 그는 살아있는 공부를 하며, 사진도 찍는데, 이 때 그는 오른쪽 눈을 사용하도록 설계된 카메라를 왼쪽 눈으로 찍는다. ‘보고 싶은 것을 찍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문명의 본질이나 일본사회의 병적 징후를 그 특유의 명징하고 단호한 문체로 날카롭게 해부한다. 그래서 일체의 기성 가치관과는 타협하지 않고 정면 대응하여 젊은이들의 정신적 스승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대지진 직후에도 그는 자동차에 생수를 싣고 재해 현장으로 달려가서 참혹한 재해 현장을 대면하나, 언어를 망각할 정도의 충격으로 처음에는 걷기만 했다고 한다. 이 때 찍은 사진 중 하나가 이번 신문에 실린 <월야>인 것이다. 이후 그는 이번 사태의 대처과정에서의 ‘국가’ 또는 일본 정부의 무능과 비겁한 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이번 대지진이 장기적으로는 “일본에 축복이 될 것”이라고 본다. 쓰나미가 오기 전까지 일본은 고도성장의 폐해로 인해 ‘무연사회無緣社會’로 흘러갔지만 이번 지진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신윤복의 월하정인이나 신야의 사진 속에 나오는 달의 모양은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화면 왼쪽 상단 위치까지 비슷하다. 월하정인의 달과 대지진의 참사현장 위의 달은 다른 것이 아니다. 기쁜 시간에도 슬픈 시간에도 어김없이 달은 뜨고 진다. ‘달빛이 침침한 밤중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는 화제가 적힌 ‘월하정인’ 속에서도, 참혹하기 그지없는 대지진의 현장에도 달빛은 교교하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다만 세상사의 차이와 인간의 마음이 서로 다른 달로 보게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달에 투사하였을까?…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비추어도 달은 하나다. 그믐달이든 보름달이든 우주적 질서 속에서 운행될 뿐이다. 우리 인간의 삶은 욕망과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가고 구성한다. 문제는 삶의 원천인 욕망과 프레임, 즉 ‘생각의 틀’이다. 2011년 7월 3일, 억수같이 장맛비가 내리는 날에 도 병 훈 주1) 이 중에서 나는 조규현 선생님이 빌려주신 동양기행1,2권을 읽었다. 그간 조선생님과 여러 차례의 대화를 나누면서 후지와라 신야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동양기행은 감성과 직관, 날카로운 통찰, 간결한 문체로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122 no image 김도희의 두 번째 개인전 - ‘프레임’ 해소 공간
도병훈
5166 2011-07-11
김도희의 두 번째 개인전 - ‘프레임’ 해소 공간 1. 건물 밖 붉은 벽돌 벽에는 이번 개인전의 제목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둥치의 나무가 쇠줄에 매달려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어둠 속 가운데 바닥에 광목과 삼베로 염을 한 커다란 관 모양의 형체가 칠성판 위에 놓여 있다. 오른쪽 벽에는 한 밤중에 고가 차도에서 냉장고가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광경이 반복해서 영상화면으로 나타난다. 안쪽 구석에는 건물 바깥으로 이어진 긴 호스와 함께 세탁기가 보인다. 그리고 지하 공간에서는 구석의 작은 모니터 화면을 통해 한 여자가 분노의 육성을 토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멧돼지 조심>이라는 제목으로… 주택으로 지어진 공간을 개조한 이층 입구 벽에는 개인전이 열리는 날에 닭을 잡은 후 그 피로 쓴 ‘虛靈不昧(허령불매)’란 글귀가 적혀 있다. 주1) 그리고 공간 안쪽에 작가가 간소하게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작가는 창문하나 없이 폐쇄된 이 공간에서 <콘크리트 시계>라는 제목으로 5월 22일부터 하루 24시간씩 총 14일간 머물렀다. 전시장에서 작가는 외부에서 제공하는 반입품, 그리고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들과 우연한 만남을 가졌다. 원래 작가는 하루 24시간씩 총 18일 동안 전시 공간에만 머물 예정이었으나, 나흘 먼저 스스로 방을 걸어 나왔다. 김도희는 전시 기간 동안 왜 이곳에 머물렀으며, 화이트 큐브 속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배제한 낯선 광경들로 이루어진 이번 개인전의 실상(reality)은 무엇일까? ‘퍼포먼스’도, '의식(ritual)'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전시장에 유폐시킨 프로젝트는 어떤 의미와 가치와 있을까? 이번 그녀의 개인전은 자전적 문제일까?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레퀴엠(requiem)일까? 2. 작가는 이번 개인전 중 열려 있으나 닫힌, 미풍도 없는 회색 시멘트 공간 속에서 오직 홀로 숨 쉬는 존재로 연명하는 동안의 미묘한 심적, 신체적 변화 등을 낱낱이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은 비록 언어로 진술되어 있지만 내밀한 마음의 상태를 포함한 실제 상황에 대한 진술이어서 형언할 수 없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특정 공간에 한정된 유폐 상황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아시아 각지를 여행하며 삶과 문명의 이면을 체험한 후지와라 신야의 책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나온다. 주2) 신야는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불교도, 기독교도를 각각 한 명씩 방에 가둔다고 설정하는데, 그 방은 앞 뒤 ,좌우, 상하가 새하얀 추상적 공간이다. 이곳에서 누가 제일 먼저 발광하고, 누가 제일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가를 그는 스스로 묻고 답한다. 그의 대답은 추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성립한 종교를 믿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힌두교도나 불교도와 같은 구체적인 환경 속에 살아 온 인간보다 오래 버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추상적 공간에서는 자아의식을 신으로 변모시키며, 그렇게 변모된 신을 육체 속에 가둬버리기 때문으로 본다. 이러한 가상실험은 사막 같은 추상공간에서는 강고한 신념의 틀이나 의식이 시간을 지연시켜나가는 수단임을, 그래서 이들 지역의 종교적 특성을 드러내지만, 역으로 ‘존재와 사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갖게 한다. 김도희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자신이 타자(관람객)의 체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타자에 대한 관찰자가 되는데, 관찰자로서 그의 체험은 타자가 자신들의 생각의 틀을 대상에 덮어씌우는 존재로 드러난다. 이는 그가 개인전 중에 남긴 기록에서도 입증된다. 저의 몸이 저의 상상과 충돌하며 그 상상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던 많은 순간들처럼 많은 이들의 감상 역시 벽에 걸린 한 점의 그림을 보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상상의 그림에 말을 걸고 화를내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구요. 대부분 먹을 것이 문제일 것이라 상상 할 밖에 없고..(저도 그랬었지요..)어떤 이는 제가 넣어준 식품을 먹지 못하는 것을 '끝장을 보려는 태도' 또는 '여유가 없음'으로 오해하고 타박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극단적 사건의 연출을 원하기도 했고...어떤 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나에게도 좋은 것이라 강요하거나 좋은 행동으로 보이도록 제게 연기를 하라고도 하더군요. 저를 완결된 텍스트로 판단할수록 그들은 공간과 전시 자체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덫을 쳐 놓고 미끼 노릇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글은 생경한 마주침과 대비되는 타자의 인식적 프레임을 읽을 수 있다. 작가는 타자의 반응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가끔의 혐오는 있었지만 그들은 고기가 아니라 실재였다고.’ 이런 맥락에서 또한 그녀는 물성적 대상으로 만난 관객들은 이전에 추상적(간접적)으로 만난 타인들보다 증오할 만한 대상들이 아니더라는 고백을 한다. 이번 전시장 안에서의 작가의 신체적 상황은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극’과 유사하다. 아르토의 잔혹극은 말 그대로의 끔찍함, 또는 포악함이 아니라 기존 관념이나 예술에 대항하는 ‘파괴 행위’극을 말한다. 그렇지만 극이란 틀이 있는 한 사실상 불가능한 이상을 향한 시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토의 잔혹극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황을 드러내는 행위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이런 차원에서 ‘신체는 물질 덩어리이다. 그는 혼자이며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들이란 신체의 적이다.’라는 아르토의 말과, ‘숨 쉬지 않는다면 인간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도희의 진술은 둘 다 개념적 인식을 철저히 부정하는 점에서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인간의 심성도 어디까지나 물적 토대에 기인한 2차적 특성으로 본다. 이러한 점은 그녀가 고가도로에서 떨어지는 냉장고와 볼펜을 비유하며, 냉장고의 크기가 볼펜보다 훨씬 작거나 컸다면 우리가 그 대상을 경험하는 방식 역시 많이 다를 것’이라고 진술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신체(몸)와 심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신체가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심성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들은 전시장에서 머무는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처음 밖으로 나온 날의 체험에 대한 기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3) 이 글에서 작가는 의식적 사유와는 거리가 먼 실존적 존재로 드러난다. 실존적 존재란 다만 ‘거기에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그 자신의 의식과 모순된 존재이다. 그래서 이러한 실존적 자각은 가치 체계화된 언어를 회의하고 거부하는 현대예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김도희 역시 이번 개인전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전람회에서 실존적 존재로서 몸이 먼저 감응하는 방식을 구사해왔다. 이처럼 어떤 대상에 대해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은 진화심리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작가가 말한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배움 없이도 벼랑에서 걸음을 멈추는 아기처럼’이란 말이 그 한 예다. 그래서 냉장고의 추락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임을 몸이 먼저 감지한다. 물성적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그만큼 허망하고 참담한 광경이어서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추락한 냉장고를 대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실제로 망자에게 하듯이 모든 격식에 맞추어 손수 정성껏 광목과 삼베로 염을 했다. 이처럼 작가가 직접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이 모든 의식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무언가 가슴 저미는 사연과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냉장고에 대해 행한 정성을 다한 염 의식은 무엇보다 어떤 충격적 현실에 대한 죄책감과 살아남은 자로서의 슬픔 등을 견디기 위한 자기 치유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의식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심연은 수직 절벽의 가장자리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며,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이 심연을 실감한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차원에서 냉장고의 추락과 함께 들리는 굉음, 그리고 그것이 관 모양으로 묶여져 있는 상태를 보고, 우리의 사회적 현상인 자살의 증가라든가 허무적 관념을 연상하는 것은 의식의 투사일 뿐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제시된 영상과 사물, 또는 행위는 의식적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멧돼지 조심>이라는 영상에서 볼 수 있는, 한 여자가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말을 거침없이 토로하는 장면은 그러한 언사가 행해지는 대상에 따라서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까지 받을 수 있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장면은 합리적인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삶의 단면이다. 삶의 ‘누적 트라우마(Cumulative Trauma)’를 드러내는…… 김도희의 이번 개인전은 개인의 직접 경험과 타인과의 간극, 또는 사유와 몸의 모순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시각매체로서 가시화하거나 의미로 체계화할 수 없으며, 실존적 자각으로 생생해지는 삶의 문제이다. 3.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인간의 몸과 몸 밖의 근저(根底)인 물성과, 서로 투사하고 공감하는 심성을 화두로 삼았다. 주4) 이런 차원에서 그녀의 개인전은 우리 인간이 물성적 조건 속에서 사는 것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심리적 투사를 제거하면, 그 대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물성만이 남는다. 라캉의 말을 빌리면 ‘나는 생각한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반 개념적 개인전의 낯 섬, 애매모호성, 불투명성은 합리적, 기계적 사고와 이념에 대한 비판 정신을 전제로 한다. 주5) 이번 개인전에서 김도희는 물성에 기인하는 심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전시공간에 유폐시켰고, 그러한 상황이 야기하는 직접적 경험을 견디고 감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그녀의 시도들은 원천적으로 불안한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삶에의 의지, 또는 상처의 ‘해결’이 아닌 해소’로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작가의 이번 작업이나 전시장 거주 프로젝트는 단지 레퀴엠(requiem)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바탕인 실존적 상황을 드러낸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상황이든 그것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닭을 직접 잡아 손에 피를 묻히는 행위도, ‘죽은 나무에 물주기’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도,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허무를 넘어서고자 하는 삶에의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지시하는 환유적 언어가 아닌 자신과 관람객이 함께 일상의 동어반복에서 벗어난 실재와 삶의 생생함을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결코 공유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2011년 6월 19일 도 병 훈 주1)이 사자성어는 시멘트 벽 한지 위에 닭 피로 단정하게 쓰여 있었다.(개인전 오픈 날 직접 2층 전시장에서 닭을 잡은 후 썼다고 함) 『대학』에 대한 주자의 해석에 나오며, 다분히 도교적, 불교적인 이 사자성어를 통해 공자, 맹자의 원시유교가 신유학자인 주자에 의해 어떻게 변천, 심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 주2)후지와라 신야는 도쿄대학 미술학부 서양화과 중퇴 후 20대부터 30대까지 10여 년 간 아시아 각국을 여행했다. 위 내용과 관련 있는 부분은 (후지와라 신야 동양기행2,김욱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8), 291쪽에 나온다. 그리고 후지와라 신야의 같은 책, 42쪽에는 김도희의 이번 실제 체험과 유사한 부분이 나오는데, 그가 티베트 오지의 라마교 사원(산사)에서 21일간 머물며 겪었던 체험 중에 흙덩어리 같은 그곳 음식을 5일 동안 먹지 못하다가 마침내 먹게 된 과정이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다. ‘엿새째 아침이 되자 마침내 혀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이 혁명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주3) 김도희, <일지 이후의 편지>, 마지막 부분 참조 주4)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언어’나 ‘개념’의 반대급부를 지향한 이번 개인전 특성상 용어 선택에 매우 고심했다. 물론 어떤 단어도 ‘실재’의 기호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능한 한 연역적인 용어는 피하고자 했다. ‘퍼포먼스’ 와 같은 용어를 쓰지 않거나, ‘물리(物理)’ 대신 ‘물성’을, ‘심리(心理)’ 대신 ‘심성’이란 말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물리, 또는 심리할 때의 ‘리理’란 그 어원상 연역적인 이치를 전제로 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주5)이런 차원에서 보면 불교철학에서 ‘공空’과 ‘불립문자’를 말하는 것과, 현대 사상가들이 전통적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도, 세계 그 자체와는 유리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 의지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121 no image 수묵의 향기로 소통한 예술, 사군자 그림
도병훈
10317 2011-06-05
수묵의 향기로 소통한 예술, 사군자 그림 1. 봄비가 내리던 지난 5월 21일, 조규현 선생님과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먼저 온 관람객이 간송미술관 골목 입구까지 긴 행렬을 이루고 있어서 한참의 기다림 끝에 전시장에 들어 설수 있었다. 간송미술관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서 간송 전형필(1906∼62)이 수집한 전통 유산 및 미술품을 바탕으로 1966년에 개관하였으며, 71년 가을에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첫 전시를 열었다. 이번 ‘사군자대전’은 이 전시를 시작한 지 40년째를 맞아 80번째 기획전이었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매해 봄가을 두 차례 간송미술관에 드나들어 30회 이상의 간송미술관 기획전을 보았다. 언제나 현수막하나 내걸지 않은 전시였지만 그곳에서 전통 미술품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과 고결한 정신을 만났으며, 무엇보다 겸재와 추사의 예술세계를 만났던 것이 가장 뜻 깊은 일이었다. 그간 사군자 관련 전시는 2000년의 소규모 사군자전과, 2005년 가을의 ‘난죽대전’이 있었다. 이번 ‘사군자대전’이 사군자 전시로는 최대 규모였다. 사립 미술관에서 이 정도로 종합적인 사군자화 전시를 할 수 있는 것은 간송미술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 백 년의 시공을 가로질러 각 시대를 풍미한 사군자화의 정수를 한 장소에서 조망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2. 사군자를 그린 문인文人들은 시인, 묵객墨客은 물론 계층으로는 사대부이면서 대개 삶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 이르기까지 학문과 사색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주1) 성리학의 용어를 빌리면 ‘관물찰리觀物察理’ 의 학문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관물찰리란 말을 다르게 구성하면 ‘관찰’과 ‘물리’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사자성어는 사물을 관찰함으로써 그 이치를 꿰뚫는 학문의 방법이다. 이 말은 송대 문인 소옹(邵雍)의 “무릇 관물觀物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리理로 보는 것이다. 천하의 물物은 리理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성性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명命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에서 유래 한다. 주2) 문인들은 군자君子의 삶을 지향했다. 군자란 유교문화권의 이상적 인간상으로서 자연 속에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절조를 지키는 사람을 뜻한다. 문인들이 사군자인 매梅 ∙ 난蘭 ∙ 국菊 ∙ 죽竹을 즐겨 그린 까닭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거나 늘 푸름을 유지하는 식물이 바로 이들 사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법적으로도 서화동원(書畵同源)을 입증하듯 그 정수만을 간결하게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매화는 모진 추위를 겪을수록 더욱 맑은 향기를 발하고, 사람은 어려움을 겪을수록 그 절개가 드러난다.(매경한고발청향 인섭간난현기절梅經寒苦發淸香, 人涉艱難顯其節)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동양의 문인(선비)들은 다양한 꽃들 중에서도 매화를 좋아했으며, 특히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의 매화 각별한 사랑이 알려져 있다. 그가 생을 마감하면서 최후로 남긴 말이 “저 매화에 물을 주거라”이다. 난은 사군자 중에서 대나무와 함께 많이 그린 소재로서, 꽃이 한 줄기에 하나 피는 난蘭과 잎이 길고 꽃이 많이 피는 혜란蕙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난을 그린 이유는 역시 난의 특성에 있다. 난은 깊은 산속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꽃을 피운다. 이는 유교적 인간상과 부합하는데, - 『논어』, 「학이편」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구절과도 부합한다. 또한 난은 금란지교金蘭之交(*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주역』,「계사전」)의 상징성이 있다. 그래서 난 그림의 화제에서도 이러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국화菊花는 ‘서리를 이겨내는 외로운 절개傲霜孤節’를 뜻한다. 국화 그림을 즐겨 그린 이유로는 국화꽃을 꺾으며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도연명의 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 탐구정신이나 상징성象徵性과 우의성寓意性만으로 사군자 그림을 규정할 수는 없다. 사군자화는 주로 수묵화로 그려졌으며, 이로 인해 동아시아 특유의 그림이 성립한다. 3. 대나무는 사군자화 중 가장 많이 그린 소재로서 간혹 검은 명주에 금니(金泥; 아교와 금가루로 그림)로 그린 대 그림과 녹색 대 그림도 볼 수 있지만, 주로 묵죽墨竹으로 그렸다. 대나무 그림은 마른 대나무를 그린 고죽枯竹, 새로 나온 대인 신죽新竹, 다 자란 굳은 대인 성죽成竹, 왕대인 통죽筒竹, 맑은 대인 청죽晴竹, 비속의 대인 우죽雨竹, 이슬 맞은 대인 노죽露竹, 눈 맞은 대인 설죽雪竹, 바위와 함께 그린 석죽石竹, 어린 대인 순죽旬竹과 눈죽嫩竹, 안개에 묻힌 대를 그린 연죽煙竹 등이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조선시대 묵죽 그림을 대표하는 화가는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1675~1756),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2~1756),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7),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1883~1950)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묵죽 화가는 탄은 이정이다. 그는 세종의 고손(高孫)으로 임진왜란 때 오른 쪽 팔이 거의 잘리는 참화를 입었지만 많은 대나무 그림을 남겼다. 이번 사군자대전에 출품된 그의 작품 5점 가운데 바람에 맞선 대나무 네 그루를 그린 <풍죽風竹>은 그가 남긴 대 그림 중에서 가장 수작일 뿐 만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나무 그림으로 꼽힌다. 이정 대나무 그림의 예술성은 간결簡潔하면서도 정세精細한 표현, 맑은 기운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풍류와 예술세계는 《삼청첩三淸帖》과 그 서문, 그리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남긴「월선정기月先亭記」등을 통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다. 주3) 조선후기 화가 유덕장의 묵죽화도 특기할 만하다. 그의 묵죽은 간결한 필력이면서도 생기가 넘친다. 대나무를 채색화로 그려낸 ‘설죽雪竹’도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수운에서 자하 신위에 이르기까지 묵죽 그림의 공통점은 농묵과 맑은 담묵의 구성진 구사인데, 특히 신위의 경우에는 그 필치가 더욱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진 흥취를 드러낸다. 주4) 그리고 표암의 대 그림은 조선 후기 고아한 흥취를 보여주는 남종문인화풍을 잘 보여준다. 또한 항일운동을 벌이다 투옥됐던 김진우의 맑으면서도 굳센 필치로 그린 대나무 그림은 창칼의 뾰족함을 연상시켜 우국지사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매화도는 어몽룡魚夢龍(1566~1617)이 당대는 물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힌다. 5 만 원권 지폐의 매화 그림이 바로 어몽룡의 그림이다. 그리고 단원 김홍도,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 등도 매화를 잘 그렸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삼성 리움 미술관이 소장중인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병풍을 가득 채운 두 그루 거대한 매화 그림도 꼽을 만하다. 이들 중, 조선 선조 때 충북 진천 현감을 지낸 어몽룡은 당시부터 묵매화로 유명했다. 가지는 정갈하게, 꽃잎은 단순하게 그려낸 그의 묵매도에 대해 당시 문화인들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는 매화의 절개를 강인하고 청신淸新하게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몽룡의 묵매화 한 점을 볼 수 있다. 어몽룡의 대표작은인 <월매月梅>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있다. 극적인 대조, 직선과 곡선 이미지를 활용한 시정 넘치는 대비, 하단의 나무 둥치와 수직으로 길게 솟아오른 두 줄기 마들가리의 극적 대비 효과가 탁월하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그림은 이에 비하면 매우 소품이지만 어몽룡 묵매도墨梅圖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김홍도의 <白梅>는 매우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흥취興趣가 두드러진다. 조선시대의 난蘭그림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석파石坡 이하응 李昰應(1820~1898),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추사 김정희 난 그림은 간일簡逸, 청수淸秀, 가늘게 그리는 수식瘦式의 묵란墨蘭을 선호하였다. 그의 난 그림을 대표하는 것은 이번 전시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불교의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은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색공불이色空不二’의 정신을 고졸한 필치로 친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꼽는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추사의 난은 《난맹첩》에 나오는 그림 일부와 부채 그림이다. 주5) 대나무와 마찬가지로 묵란화墨蘭畵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따라 특징이 크게 다르다. 추사의 수식, 즉 매우 가는 잎으로 그린 난 그림은 그의 곧은 성품이 반영되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느끼게 한다. 그의 제자인 석파 이하응의 초기 난 그림들도 추사의 난 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게다가 마치 수채화로 그린 듯 먹빛도 맑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말년에 그린 석파의 난 그림, 즉 ‘석파란’은 민비와의 대립으로 자초한 만년의 정치적 부침 때문인 듯 과장된 기교에 치우친 면이 보인다. 예술세계에서도 늘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함을 대원군의 그림에서도 절감할 수 있다. 반면에 이번에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뿌리를 드러낸 운미 민영익의 노근란露根蘭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 뿌리내릴 땅조차 없는 망국대부의 심경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진솔하게 드러낸다. 국화는 사군자화 중에서 비교적 적게 그려진 편이어서 이번에 전시된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그린 <오상고절도傲霜孤節圖>가 현존하는 최초의 그림으로 전한다. 이외 心田심전 안중식安中植(1861~1919), 김용진金容鎭(1878~1968)의 국화도를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사군자 그림은 새삼 보링거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환경이 풍요로운 땅에선 인간과 자연 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감정이입충동’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유기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발달한다. 하지만 풍토가 사막처럼 광막하고 척박한 곳에선 인간에게 끊임없는 내적 불안감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충동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양식이 발달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 예술과 이집트 예술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지만 자연과 문명의 상관관계를 꿰뚫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사군자의 자연친화적 표현은 이러한 풍토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사군자화는 미셀 푸코의 ‘상사’란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사군자화는 되도록 실물과 닮아야 하고, 닮음으로써 그 대상의 기호가 되어야 하는 ‘유사類似의 원리’가 아니라 비슷하되 차이를 인정하는 ‘상사相似’의 놀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군자는 현장에서 대상을 사생寫生한 것이 아니라 대상의 기운이나 운치를 그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묵매’와 ‘묵죽’, 그리고 ‘묵란’이라는 말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엄연히 실물과 다른 그야말로 먹으로 그린 매화요, 대나무요, 난초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군자는 원본이 있으되, 원본이 없는 그림이다. 그래서 탄은과 신위와 운미, 그리고 일주의 대나무가 서로 다르며, 오히려 이러한 차이에서 사군자화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매화가지 끝에 달이 걸린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듯, 사군자화의 배경은 우주까지 이어진 무한한 공간이다. 주6) 예컨대, 한 두 그루의 대나무는 대숲을, 난초는 깊은 산속의 난초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군자화는 비록 손바닥 만 한 소품이라 할지라도 우주까지 이어진 큰 그림이다. 간결한 붓질의 문인화에서 때때로 시공을 넘어서는 심오함을 수 있는 이유다. 먹물과 붓질의 미묘한 변주라는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세계인 대자연, 또는 우주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변화, 또는 ‘기氣’와 ‘리理’였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뛰어난 사군자화를 그린 이들에게는 추상적 공리공론이 아니었다. 그들은 늘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직접 대면하는 구체적이고도 감성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느끼고 이해했으며, 이런 차원에서 사군자화는 문인들의 감성적 소통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군자화는 상품이 되기 위한 어떤 과장도 속임수도 없으며, 진짜처럼 보이려는 사이비 위선도 없다. 사군자화는 존재자로서 존재를 드러내며, 향기와 향기로 소통하고자 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일 뿐이다. 뛰어난 사군자 그림은 차원 높은 소통의 매개체였던 것이다. 4. 이슬람이나 기독교 문명은 사막에서 발생했다. 그래서 구체적 현실보다 추상적 신념이나 이념이 이들 지역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근 현대 이후 서구의 과학적 인식에 기초한 합리주의는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특히 19세기 중엽이후 서구의 급진적 예술은 합리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반란을 기도하였다. 이 땅에서는 서구 근 현대 예술의 역사적 맥락은 간과한 채 과학기술문명처럼 그 양상만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의 선조들은 기독교나 이슬람 문명권처럼 광물적, 추상적인 환경 속에 살지 않았다. 선조들이 자연친화적인 예술을 지향했음을 사군자 그림이 입증한다. 사군자화는 문인화의 핵심적 화목畵目이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 고유의 미감을 발현하게 되었음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대별 대표화가 및 사군자 장르로는 조선 중기에 탄은의 묵죽, 어몽룡의 묵매, 조선후기에는 표암의 묵란과 묵죽, 단원의 묵매와 묵죽, 조선 말기에는 추사의 묵란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사군자화는 산수화도 그렇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대개 명징明澄하고 개결介潔한 느낌이다. 그래서 이런 그림을 들여다보면 머릿속이 맑아지고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매우 작은 소품도 넉넉한 공간감과 함께 다정다감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군자 그림은 독자성을 지닌 화풍을 이룩했다. 이는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그림에서 제각기 다른 특질을 발견할 수 있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그러나 사군자 그림은 평화의 시대에는 은은한 향기와 같은 격조 높은 풍류이지만 말세에는 현실을 잊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에의 안주는 안빈낙도의 순응적 삶과 함께 실존적 치열함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餘技’ 차원을 넘어선 예술적 감응의 차원에 도달한 이가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군자 그림은 그 소박한 진정성으로 풍류風流의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차원 높은 소통의 방식과 감응의 향기를 보여준다. 연역적 추상적 신념이 아닌 늘 대면하는 현실적 체험인 변화 속에서 삶의 향기를 느끼는 것이 사군자화의 주된 특색이라는 것이다. 2011년 6월 5일 도 병 훈 주1) 사군자의 기원은 대나무부터 그려졌는데, 중국 북송시대 문동(文同,1018~1079과 소식(蘇軾,1036~1101)이 그 선구자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金富軾(1075~1151)과 정서鄭敍가 최초로 묵죽화를 그렸다. 매화는 정지상이 처음 그리고 북송에서는 비구니인 화광華光 중인仲仁이 묵매법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남송 말 원초 무렵에 정사초(鄭思肖,1241~1315)가 뿌리를 드러낸 난을 그려 망국의 설움을 드러냈다. 한편 조맹견(趙孟堅,1199~1267)은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세한삼우歲寒三友’, 또는 ‘삼청三淸’, 즉 세 가지 맑은 것이라 함으로써 후세에 이를 주제로 한 시와 그림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말에는 이제현(1287~1367), 이암(1297~1364), 정몽주 등이 모두 묵죽와 묵매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초 중기에는 세종, 문종, 안평대군(1418~1453), 성종, 선조 등이 난죽에 뛰어났으나 선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이외 사대부들도 묵죽에 뛰어난 이가 적지 않았으나 대부분 망실된 실정이다. 주2) 白仁山,「사군자(四君子)의 심상(心像)과 양상(樣相)」,『澗松文華』80호, 2011, 106쪽 참조 주3) 백인산은 탄은을 조선 사군자화의 실질적 비조로 보면서, 특히 탄은의 《삼청첩》을 조선사군자화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白仁山,「灘隱 李霆 硏究」, 『澗松文華』58호, 2000, 85~87쪽과 『澗松文華』80호 129쪽 참조 주4)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사군자화가 전통회화의 핵심적 화목이자 대세를 이루는데, 이러한 대세는 자하 신위이후 사군자화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澗松文華』80호, 122쪽 참조 주5) 조선시대 난죽화에 대한 종합적 조망은 白仁山의「조선왕조(朝鮮王朝) 난죽화(蘭竹畵)」, (『澗松文華』69호), 2005, 103~131쪽 참조 주6) 매화와 달을 함께 그린 ‘월매도’는 원래 매초상월梅梢上月, 즉 ‘나뭇가지 끝의 달’을 그린 것으로, 이는 중국어로 ‘미수상락眉壽常樂’, 즉 ‘오래살고 항상 즐겁다’는 사자성어와 동음이어서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몽룡의 <월매도>를 보면 이러한 우의성을 넘어선 느낌이 든다.
120 no image 소립자와 예술세계에 대한 단상斷想
도병훈
4976 2011-05-18
소립자와 예술세계에 대한 단상斷想 모 일간지에서 ‘우주 비밀을 찾아서’란 기사를 읽었다. 중성미자(우주 생성 당시 나온 가장 작은 소립자로서 원자의 1억분의 1크기)를 연구하는 김수봉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와의 인터뷰였는데, 매크로(거시세계)와 마이크로(미시세계)를 넘나드는 그 내용이 매우 시적이고 감동적이어서 ‘과학은 현상이나 다른 관찰 대상 사이의 연관성을 간략하게 설명할 때 가장 아름답다’는 어느 과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우주의 문제는 너무 멀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왜 먼가? 우리 존재가 우주에서 나왔다.” 무슨 근거로 말하는가? 라는 연이은 질문에, “우주 대폭발 뒤 3분 쯤 됐을 때 수소와 헬륨이 생겨났다. 이 두 원소가 핵융합을 일으켰다. 더 복잡한 원소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모여 별星이 되었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물질이 이들 원소로부터 비롯됐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옛말은 과학적으로 맞다. 소립자는 이들 원소보다도 더 작은,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은 단위다. 이 소립자의 성질을 알아내는 게 태초 우주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이처럼 최근의 과학적 성과는 우주가 얼마나 과정적이고 우연적인지 알게 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는 김광섭의 ‘저녁에’란 시다. 그리고 이 시를 보고 그렸다는 그림이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다. 화폭은 온통 푸른 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시와 그림은 물론, 신화시대로부터 비롯된 별자리 이야기에도 별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으며, 이 모두는 어떤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직관적이고도 신화적인 감성의 표현이다. 동양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유가와 히데키가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묶어주고 있는 핵력을 설명하는 '중간자'를 발견 했는데 그 힌트를 『노자도덕경』의‘충기沖氣'(*제42장에 나오는 낱말로 ’만물이 원기로서 조화를 이룬다‘는 구절의 일부임)에서 얻었다고 한다. 옛 문인화가들이 그린 묵매도墨梅圖는 실물대상의 형태를 재현한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와 우주의 물질적 현실이다. 그래서 화가의 몸과 마음의 상태와 결이 고운 명주나 한지의 재질과 먹의 농담濃淡과 붓놀림에 따라 다른 묵매가 피어났다. 심사정의 ‘묵매’와 단원 김홍도의 ‘백매’가 다른 이유는 그들의 오감과, 그림의 바탕 재질, 물의 함량에 따른 먹의 농담 등 그 변인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홍도가 밤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별을 많이 보아서일까? 그가 그린, 막 피기 직전의 크고 작은 매화 꽃 봉오리들은 나선형 은하 속의 무수히 빛나는 별을 닮았다. 그래서 나뭇가지와 그 뒤로 텅 빈 여백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우주적이기까지 하다.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의 감수성과 직관은 우리 삶의 본질을 이룬다. 김홍도의 백매도에서 우리는 소립자를 연상하고 자발적 우주적 진화과정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자연의 변화는 우연적이고 자발적이지만 오직 생명을 허용하는 장소와 시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실존적 조건 속에서 인류는 수 천 년 간 단지 생존하기 위한 삶의 차원을 넘어 자발적으로 문명을 형성하고 가치를 추구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의 대표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도, 최근 영국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 중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 행동에 있어 가장 위대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면서 “우리의 삶을 제대로 활용해 우리의 잠재력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주 초기에 아주 작은 양자 파동이 은하와 별, 그리고 인류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는 과학적 사실, 즉 실로 우연적인 인因과 연緣이 우주의 역사이듯, 우리의 삶과 예술적 변천과정도 우주적 진화의 연장선에서 더욱 심오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해마다 봄·가을 정기전을 연 지 40년째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올 봄에는 ‘사군자’를 주제로 봄 정기전을 5월 29일까지 연다고 한다. 전시장에 가면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의 맑은 먹색의 붓 맛이 일품인 묵죽墨竹과, 김홍도의 담백하고도 구성지게 어우러지고 흐트러진 백매와 추사 김정희의 칼날 같은 묵란墨蘭을 볼 수 있다. 이번에는 그들의 그림도 소립자적 관점과 함께 은하의 세계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관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친숙한 것이 낯설어진 뒤에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오감의 떨림을 경험하듯... 사실 모든 그림은 감상자에 의해 순간순간 다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2011년 5월 18일 도 병 훈
119 no image 일본 대지진 참상에 대한 소고
도병훈
4730 2011-03-17
일본 대지진 참상에 대한 소고 엄청난 대지진이 최근 이웃나라 일본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그 여파로 야기된 원전사태로 더욱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지도 모른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천재지변으로 야기된 문제는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일 수 있는가 하는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야말로 세계는 그것에 행하는 어떤 분석과 구축, 또는 구성을 거부하며, 단지 기술記述description될 뿐이라는 실존적 자각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대지진과 원전 사태는 이해 당사자의 여부를 떠나 삶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후지산 보다 거대한 파도가 압권인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 - 1849)의 다색 목판화인 우키요에도 다시 보게 되었다. 마치 현재의 상황을 집약한 듯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삼 우키요에의 뜻도 되새기게 되었는데, 우키요에란 일본어로 ‘부세浮世’, 즉 ‘뜬세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랜 전국시대를 거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한 일본 특유의 심미의식이 반영된 말이라고 생각했던 이 말이 뜻 밖에도 지구과학적 측면에서도 부합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지구를 사과에 비유하면 흙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대지는 사과껍질 정도로 얇으며, 그 안, 즉 사과의 흰 살에 해당하는 부분은 액체 상태의 암석인 맨틀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맨틀은 대류현상이 있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지진과 화산 활동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의 대지는 늘 불안정하며, 말 그대로 이 세상은 부세, 즉 뜬세상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세계의 현상에 대한 과학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이번 일본에서의 재앙의 규모에서 알 수 있듯, 오류의 문제가 아닌 한계의 문제다. 어떤 경우에도 세계는 ‘사고자인 자신의 의식 속에 대상화對象化시킨 세계와의 일방적 관계설정’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과학은 세계의 현상에 대해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가장 엄밀한 사유임에 틀림없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타원형으로 돈다는 사실도, 시공간이 분리될 수 없다는 현대물리학적 세계관도 어디까지나 과학의 힘으로 밝혀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 사유의 진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래서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는 다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일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천벌을 받았다는 식의 종교적 신념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런 식의 신화적 신념에 비하면 ‘자연은 인자하지 않으며, 만물을 지푸라기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는 노자의 말이 훨씬 와 닿는다. 고대와 중세에 신을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았던 인간은 근대이후 스스로 세계의 주인이 됨으로써 인간의 가치체계에 맞게 조정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어느 서양철학자의 말처럼 ‘우리가 인식해 온 세계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와는 다른 인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하나의 상象’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패러다임의 전환 이후 현대인들은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의 엄청난 일본 사태는 이러한 자각을 실감나게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살아남은 자의 삶이다. 모든 생명체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 요약되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진화해왔으며, 인간의 문명 또한 자연에 대한 극복 의지의 산물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의연함과 슬기로운 대처만이 살아남은 자의 몫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말에 매우 공감하게 된다. “인간이란 그가 목적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는 한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이란 자기 행동의 총체 이상도 아니며, 그의 생애 이상도 아니다.” 2011. 3. 17 도 병 훈 PS : 마지막 부분의 인용에서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싶어 덧붙인다. 이 말의 의미는 사르트르의 핵심사상인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Man is condemned to be free.)'는 명제와 관련 있다. 여기서 선고 받았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 던져진 순간부터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뜻이다. 개미에게는 굵은 빗방울도 엄청난 재앙일 수 있듯,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은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이번 원전 사태의 수습을 포함하여 향후 범지구적 차원에서의 원전에 대한 근본적 대처는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마지막 문장을 되새겨 본 것이다. 물론 위 말의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 메시지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 사고력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인간이 인간의 미래'라는 실존적 명제도 성립한다고 본다.
118 no image 추사 적거지와 세한도
도병훈
5888 2011-02-26
추사 적거지와 세한도 1. 지난 2월 19일 집안의 혼사로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에 간 김에 서귀포 인근 대정에 위치한 추사기념관과 적거지를 찾았다. 추사 적거지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선생이 조선조 헌종 6년(1840) 10월 1일부터 헌종 14년(1848) 12월 6일까지 9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며 기념관은 바로 그 앞에 있는 건물로 최근에 지은 것이다. 추사기념관은 세한도에 나오는 둥근 창이 있는 집을 외형으로 하고 있었으며, 안은 매우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전시관에는 전시품 228점 (추사진품 4점, 영인본 82점, 민구류 142점)이 전시되어있었고, 다른 관람객이 거의 없어 여유 있게 이 모두를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조선시대 문인화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는 일제강점기 당시 추사 연구가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가 만든 100개의 영인본 중 하나였다.(*조선 후기 국보전과 용산국립중앙박물관 개관 기념전,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전 때 진품을 본 적이 있다) 추사기념관에서 나오자, 선생이 적거(謫居)했던 사랑채를 포함 초가 네 채를 복원해 놓은 곳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추사기념관에서도 복원된 그의 적거지에서도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기리고자 새롭게 단장하는 데 애쓴 면은 느낄 수 있었지만, 왜 이곳에서 추사의 예술세계가 크게 변모되었는지 알기에는 미흡했다. 세한도는 극한적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려졌다. 추사의 예술세계는 제주에서의 유배생활로 크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유배를 전후하여 추사의 예술세계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문제이다. 2. 1840년 6월, 추사는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수행하여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기가 되었던 연행燕行을 30년 만에 다시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년 8월 하순, 안동김씨 세력의 음모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 자제로서 승승장구하던 추사의 삶은 하루아침에 파탄에 이른다. 당시 충남 예산의 집에 머물던 추사는 의금부 금부도사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된다. 이후 추사는 6차례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또한 곤장 36대를 맞을 정도로 참담한 수모와 고초를 겪었다. 1840년 9월 초, 추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만을 건진 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기약 없는 제주 유배 길을 떠났다. 1840년 9월 말, 추사는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으로 건너갔다. 80리길을 더 들어가 서귀포시 대정읍 송계순의 집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고 춥고 험난한 지역이었다. 추사는 얼마 후 다시 강도순의 집 사랑채에 짐을 풀었지만 집 주위에 탱자나무로 가시 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배당하던 해에 해배에 대한 희망의 끈이었던 절친한 친구 김유근이, 또 1842년엔 부인 예안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추사의 유배 생활은 당시 그가 남긴 수많은 서간에 잘 드러나듯, 기가 막히는 억울함에다 숱한 풍토병과 눈병에 시달렸으며, 겨울에는 한풍이 여름에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고난과 역경의 삶을 연명해야 했다. 유배기간동안 제자인 소치 허련과 역관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適 184-1865), 친구인 초의선사가 제주를 찾아왔지만 세상은 추사를 잊어갔다. 추사는 책과 서화, 제주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푸른 바다와 긴 하늘 같이 한이 끝이 없는’ 유배생활의 고독과 시름을 달랬다. 이처럼 유배지에서 외롭게 삶을 살아가는 추사에게 그나마 큰 위안은 책을 보는 것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에 여러 번 드나 든 역관으로서 귀한 중국책들을 구하여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그의 변함없는 마음에 답하고자 1844년 59세의 추사는 서간지를 펼쳐 놓고 붓을 들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 세한도다. 세한도를 전해 받고 감격한 주1) 이상적은 그해 10월 동지사 이정응(李晸應)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으로 가서 이듬해 1845년 정월 22날 그의 벗인 오찬(吳贊)의 장원에서 벌어진 잔치에 초대 받는다. 이 자리에는 오찬 ․ 장요손 등 옹방강(*추사가 아버지를 수행하여 연경에 갔을 때 만난 금석학의 스승)의 제자 17명이 참석을 하였는데, 이상적이 세한도를 꺼내 보이자, 이들은 깊은 감동과 함께 제(題)와 찬시를 쓴다. 주2) 대부분의 미술작품은 시간이 흐르면 그 감동이 처음보다 덜해진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다. 내게는 그 대표적인 예가 추사의 만년 글씨와 세한도를 포함한 몇 몇 그림들이다. 그의 서예와 그림을 대하면 늘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게 되며, 마음이 더없이 숙연해진다. 추사의 만년 글씨가 그러하듯, 세한도는 일견 보잘 것 없을 정도로 간결하기 그지없는 그림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평범한 그림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그림을 보아왔지만 세한도가 가진 매력은 여러 면에서 매우 독특하다. 먼저 세한도는 긴장감 있는 구도와 함께 ‘일획이무’, 즉 단 한 번의 덧칠도 농담처리도 없이 붓에다 짙은 먹을 묻혀 운필의 강약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붓 자국마다 그의 담담하고도 처연한 심정이 배여 있는 듯하다. 이는 늙은 소나무의 한 가지에 달린 몇 가닥의 솔잎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간결하고 메마르게 그렸음에도 세한도는 그 변화의 진폭이 무한하다. 이는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빈 공간의 상응효과이다. 그리고 세한도는 필선의 까칠함으로 황량하고도 한기가 느껴진다. 마치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듯한 서늘한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한도는 원고지처럼 칸을 그리고 쓴 칼로 새긴 듯한 발문 글씨와 그 내용이 뜻 깊다. 특히 『논어』「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한 부분이 그러하다. 추사에 의하면 늘 푸른 이들 나무에 대해 특별히 공자가 언급한 것은 단지 지조와 굳은 절개 때문이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울 때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3) 세한도의 제목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바로 이 때문에 세한도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고독한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동병상련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3. 살면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제주 적거지에서의 추사의 삶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나의 어려움은 추사에 비해 호사스럽다고까지 느끼게 된다. 예술은 한 개인의 절박한 실존적 상황을 얼마만큼 진정성 있게 드러나게 하는가의 문제라는 나의 작은 깨달음은 추사의 세한도에서 볼 수 있는 붓질과 그의 만년 예술세계에서 얻은 것이다. 세한도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고결하게 피어난 매화 향기와 같은 그림이다. 나는 오래 전 추사의 세한도를 통해서 그림의 매력이 극한의 삶, 나아가서 유무를 통섭하는 상상력과 기질의 문제임을 절감했으며, 이후 나의 예술관은 크게 달라졌다. 물론 오늘날은 붓을 꺾어 버려야 또 다른 차원의 예술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시대이며, 그만큼 현대의 예술세계는 다양하게 진화하는 추세다. 그렇지만 화가들에게 붓을 꺾는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화두일 뿐임을 세한도는 알게 한다. 2011년 2월 25일 주1)이상적이 세한도를 전해 받고 추사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런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ㅎ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를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章甫冠을 쓴 것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淸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이 글은 박철상 지음, 세한도, 문학동네, 2010, 183~184쪽에서 인용함) 주2)현존하는 세한도는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 또는 제영題詠과 함께 길이 약 13m의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이 장권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이 죽고 그의 제자였던 이병선과 김준학,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의 소유가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민규식은 경성제대 중국철학교수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세한도를 팔게 된다. 1943년 여름, 우리의 전통서화에 대해 남다른 안목이 있었던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세한도의 가치를 알고 당시 경성에 있던 그를 찾아가 양도를 원했으나 거절당한다. 1944년 여름,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비롯해서 서화 전적을 모두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후지츠카를 찾아가 되돌려 줄 것을 100일간에 걸쳐 요청하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1944년 12월 무렵 후지츠카는 소전의 열정에 감동, 선비의 유품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며 보상 없이 세한도를 양도하여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처럼 손재형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한 후 석 달쯤 지난 1945년 3월, 후지츠카의 서재가 있던 대동문화학원이 폭격을 맞아, 이 때 후지츠카가 소장했던 서화들이 대부분 불타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가 아끼던 완당에 관한 서적이나 다른 서화들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해방이후 소전이 국회의원에 출마를 하면서 선거자금이 부족하자 소장품 중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당시 삼성물산 사장이었던 이병철에게 양도하고, 세한도는 한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리는데, 그는 선거에서 낙선하고 빚도 지게 되어 세한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채업자는 미술품 수집가인 손세기에게 세한도를 팔아서 지금은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주3) 원문을 좀 더 자세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논어』 「자한」편에 에 이르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랜 세월) 후에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하였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은 것이라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요,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지만 성인은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에 이를 일컬었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유배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고 유배 후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그러나 유배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칭찬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유배온 뒤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단지 늦게 시드는 곧은 지조와 굳은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울 때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일세.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위의 번역 글은 강관식의 추사의 그의 시대(돌베개, 2002) 213~214쪽의 번역을 바탕으로 필자가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후조後凋’에 대한 해석은 말 그대로 하면 ‘늦게 시든다’이지만, 전체 문맥상 흔히 ‘늘 푸름’ 또는 ‘시들지 않는다’고 해석하며, ‘시드는 것을 뒤로 한다’는 해석도 있다. 필자의 경우 ‘(오랜 세월) 뒤에 시든다’고 해석한 것은, 원래 한자 문명권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의 개념이 없다는 세계관에 기인한다. 소나무도 언제까지 푸를 수는 없고 다만 살아 있는 동안 푸름이 지속되므로 공자도 ‘후조’라 했다는 것이다.
117 no image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단상
도병훈
4904 2011-02-15
새해 들어 처음으로 단상을 올립니다. 원래는 지난 가을부터 써 온 원효의 판비량론을 중심으로 한 글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너무 방대한 글이 되어 버려서 이곳에는 적절치 않은 내용인 듯해서 다른 기회를 통해 발표하고자 합니다. 아래 싣는 글은 최근에 읽은 칼럼의 한 부분을 보고 조금 전에 간단히 쓴 것입니다.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단상 국립박물관의 고려청자 전시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중학생과 인솔교사가 들어왔다. 그 때 나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이 도자기들은 고려의 도공들이 억압 속에서 노예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으며, 차라리 증오해야할 물건들”이라고 그 젊은 교사가 단언했던 것이다. 위 글은 얼마 전 모 신문 칼럼에서 읽은 것이다. 물론 모든 고려청자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비천한 신분의 무명 도공들이 고통 속에서 고려청자를 만든 것도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양하기 그지없는 그것들 모두가 아무 가치가 없으며, 증오해야할 물건일까? 무엇을 근거로 이처럼 확신에 찬 언어도단(?)의 사유가 가능한가? 위 일화는 도자기의 역사에 내포된 다층적이고도 문명사적인 의미 , 무엇보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 물음을 갖게 한다. 그 이유는 현장에서 가능한 그 어떤 직접적 체험과 만남의 가능성, 그로 인한 사유의 지평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는 과거와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시사하듯, 어떤 사건이나 대상의 가치와 의미는 그 사건이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이는 자의적, 주관적 해석이 모두 타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관점에 따라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 어떤 대상에 대한 정형화된 폄하와 미화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물론 고려청자도 마찬가지다. 시대와 지역, 또는 도공의 감수성과 역량에 따라 다른 고려청자의 특성상, 매도와 찬사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래와 교육의 힘을 생각할 때 어떤 경우에도 교사의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시대에 따라 교사의 역할이 변하지만, 미래는 더욱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여서 학생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게 그 여건을 조성할 수 있는 사려 깊은 교사상이 요구된다. 오늘의 교사들이 고민해야할 화두는 바로 이와 같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위의 사례는 감성의 풍부함과 생각의 힘을 기르기보다는 획일적인 지식을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한국 특유의 교육 풍토 속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단순논리의 위험성은 예술적 감성이나 철학적 사유의 빈곤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세계를 왜곡한다는 데 있다. 어떠한 지식도 객관적일 수 없다는 현시대 혼돈의 상황은 그만큼 끊임없는 성찰을 하고,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뜻한다. 문제는 교사의 생각이 아니라 피교육자의 감성과 생각의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2011년 2월 15일
116 no image 신라역사인물 특별전1 ‘원효대사’와 판비량론
도병훈
5080 2010-09-28
신라역사인물 특별전1 ‘원효대사’와 판비량론 1. 초가을 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바람도 더 없이 선선한 지난 9월 24일,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원효대사 특별전을 보고 왔다. 주1) 이번 전시는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신라를 세우고, 일구고, 가꾼 사람들을 돌아보는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 기획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첫 번째로 ‘한마음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으로 통일신라 사상의 초석을 닦고, ‘무애無碍’의 삶을 산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를 종합적으로 조명하고자 열린 특별전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독백 형식을 빌려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다음은 원효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승되고 그의 모습이 어떻게 후세에 인식되는지를 원효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진영眞影들을 통해 볼 수 있다. 이어 그의 다양한 저술들을 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당시는 물론 후대에 원효가 어떻게 국제적으로까지 평가되고 계승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주2) 그러나 광명에서 경주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원효의 치열하면서도 치밀한 논증적 사유가 담겨 있는『판비량론判比量論』필사본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는 수 년 전부터 한국사회의 문화적 상황은 물론 사유와 담론이 빈곤한 미술계의 현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원효의 사상, 그 중에서도 『판비량론』을 생각해왔기 때문이다.『판비량론』은 원효의 저서 중에서도 당대의 문제 상황을 어떠한 사유를 바탕으로 대응했는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텍스트이다. 2. 이번에 전시된『판비량론』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본 오타니대학(大谷大學) 소장되어 있으며, 국내에서는 최초로 공개된 것이다. 주3) 이『판비량론』은 원래 원효가 저술한 전체 내용의 8분의 1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8세기에 이루어진 필사본이다. 8세기는 원효사후 불과 수십 년 후 이므로 『판비량론』은 원효의 저술의 진본을 짐작케 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인 것이다. 현재 원효가 쓴 수많은 책은 한 권도 진본이 전하지 않으며, 필사본이나 판본 형태로서 주로 한국, 일본, 중국 등에 현존하는 데 『판비량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판비량론』은 전시장 안 쪽 긴 유리관 속에 2m 가 채 안 되는 두루마리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판비량론』의 글씨는 초서로 작은 도판을 통해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유려하게 잘 쓴 명필"이었다. 7절부터 14절까지 절별로 나누어져 있었고 두루마리 끝부분에는 서기 671년에 해당하는 연호인 함형咸亨 2년 7월 16일 행명사行名寺에서 쓴 사실이 명기되어 있어『판비량론』이 원효가 저술한 것임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671년은 원효 나이 55세 때이며 신라 문무왕 11년이다. 현존하는 원효의 저서 중 이처럼 저술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서기 740년 신라에 유학한 일본인 승려 신쇼審祥가 일본 왕에게 바침으로써 일본으로 전해진『판비량론』은 한동안 일본의 나라시대에 쓴 것으로 간주됐지만, 최근에는 서체라든가 서풍으로 보아 신라에서 직접 일본으로 들여온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주4) 『판비량론』끝 부분에 찍힌 '내가사인內家私印’이라는 도장은 나라시대 고대 일본의 쇼무천황聖武天皇 부인인 고묘光明 황후이다. 고묘는 일본 고대 문화유산의 보고인 쇼소인正倉院을 태동케 한 장본인이다. 집으로 돌아와 두툼한 도록 뒤편에 실린 원효의『판비량론』전문을 복사해서 노트에다 옮겨 행마다 세로로 된 행마다 잘라서 붙인 후 읽기 힘든 초서체 옆에 정자로 정서한 후 한 자 한 자 이미 번역된 글과 대조하며 해석 작업에 들어갔다. 기존의 해석은 너무나 어려운 전문 용어로 번역되어 있어 전문 학자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여러 번 『판비량론』관련 논문과 책들을 읽었지만,주5) 이처럼 원본과 직접 대조하면서 공부함으로써 원효 사상의 깊이와 논리의 엄정함을 더욱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비량론』은 당시 불교계를 풍미한 당나라의 학승인 현장(玄奬600~664)의 유식학唯識學 논리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비판적으로 논박한 글이다. 이러한 『판비량론』의 배경에는 현대어로는 인식논리학이라 할 수 있는 ‘인명학因明學’이 있다. ‘인명’이란 ‘원인, 또는 올바른 지식의 근거因’을 ‘밝힌다明’는 뜻이다. 인명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한다. 먼저 자기의 주장을 타인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논리를 구성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이를 오타悟他라 한다. 여기에는 능립能立과 능파能破, 사능립似能立과 사능파似能破라는 네 가지 논리적 구조가 포함된다. 두 번째는 자신이 어떻게 논리적 대상인식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는 자오自悟라고 한다. 여기에는 현랑現量주6)과 비량比量주7), 사현량似現量과 사비량似比量의 4가지 인식방법이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인명학의 8대 구성 부분이다. 8대 구성부분 중 능립은 논제(종), 이유(인), 논증(유)의 3지로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논식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세운 논식이 참이면 진능립이라 하고 오류가 있으면 사능립이라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종 : 저 산에 불이 있다. 인 : 거기에는 연기가 있기 때문에 유 : 무릇 연기가 있는 곳에는 다 불이 있다. 마치 부엌과도 같이 여기서 ‘종(논제)’은 논식의 기본 명제로서 두 개 이상 명사로 구성되어야하며, 이 두 명사를 연결하는 극성어(자타가 인정하는 말로서 ~이다 ~아니다 등이 있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은 논제가 성립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밝히는 것으로서 여기서 논술되는 사건은 종의 앞부분 명사와 그 범위가 같거나 혹은 커야 한다. ‘유’는 논제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것으로서 이론적으로 논증하는 명제와 함께 반드시 구체적인 실례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어 ‘능파’는 상대 주장의 부당성을 논박하는 논리적 진술과정을 말한다. 그래서 옳게 구성되면 진능파, 그릇된 경우는 사능파라 한다. 그리고 ‘현량’이란 외계의 사물현상을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 감응하면서 촉발되는 인식으로서 이때 대상 현실을 옳게 인식하는 것을 진현량, 반면 그롯된 인식을 사현량이라 한다. ‘비량’이란 (연역적) 추리에 의하여 인지하는 인식을 말한다. 이것이 옳게 구성된 것을 ‘진비량’이라 하고 그 구성이 그릇될 경우는 ‘사비량’이라 한다. 원효의 『판비량론』은 이와 같은 인명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판비량론』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가 바로 ‘비량’이다. 즉 비량을 비판하기 글이기 때문에 『판비량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의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불교인식 논리학의 독특한 특성이기도 한 상위결정相違決定의 오류를 알아야 한다. 상위결정이란 각각의 추론식 그 자체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그 결론이 상반된 두 가지 추론식이 동시에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현장의 『인명입정이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추론식을 예로 든다. <논식1> 종 : 소리는 무상하다. 인 :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유 : 항아리 등과 같이 <논식2> 종 : 소리는 늘 존재한다. 인 : (언제나) 들리기 때문에 유 : 보편적인 소리와 같이 <논식1>과 <논식2>는 각각의 주장이 이른바 ‘斷滅’과 ‘常住’로 상반되며, 이처럼 이율배반적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 바로 ‘상위결정’의 오류이다. 원효는 『판비량론』에서 이 상위결정의 오류를 이용하여 당대 인도와 중국에서 최고의 학승으로 추앙 받던 현장이 인도 유학 중 발표했던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증명하는 논증식”과 “대승불교가 부처의 교설임을 증명하는 논증식”과 호법護法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당시 불교 인식논리학이 당면한 난제들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번에 전시된 『판비량론』과 함께 고대 일본 학승들의 저술 속에 단편적으로 들어 있다. 인도의 불교 인식논리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른 앎, 즉 ‘해탈’이다. 논리적 명제란 해탈에 이르는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 인식논리학은 요컨대 전분별->분별->초분별의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불교가 궁극적으로는 사변의 논리와 언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초분별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임에도 분별(개념구성)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이유는, 삼법인을 예로 들자면, “만사는 무상하다”고 할 때 바로 이 말 자체도 무상한 것인지 묻게 되면 ‘자어상위自語相違’에 걸리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 말 자체만은 무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어상위에 걸리고 만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별을 넘어서 초분별지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 본다. 이런 맥락에서 지식과 인식의 한계를 알고 이 사실을 입증하려는 것이 불교 인식논리학의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서양의 논리학이 연역적 사유와 귀납적 방법을 통한 사유의 엄밀성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사상적 철학적 전통의 핵심이라면, 반면 인도에서는 지식의 바탕 자체가 근본적 문제가 있음을 규명하기 위하여 고도의 논리학이 발달해왔으며, 원효의『판비량론』은 그 정점을 형성한다. 이는 불교인식논리학을 정초한 진나(陳那, Dignaga,480~540)에 이어, 호법, 승군, 현장 등 쟁쟁한 불교 인식론자들의 버턴을 비판적으로 계승함으로써 당대 불교사상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원효는 일생에 걸쳐 15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저술을 요약한다면, ‘한마음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이면에는 『판비량론』에서 볼 수 있는 치열한 논리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바로 이러한 논리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것이 『판비량론』이라고 할 수 있다. 3.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효에 대한 기록의 제목은 원효불기元曉不羈, 즉 ‘원효, 관습에 얽매이지 않다’이다. 원효의 삶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매우 적절한 제목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다채로운 원효의 삶의 바탕에는 고도의 논리적 사유가 깔려 있다. 이는 불교적 사유의 핵심이자, 급변하는 당시 상황에 대한 논리적 대응의 흔적이며,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글이 바로 『판비량론』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무엇보다 원효의 치열한 열정과 사유의 힘을 배우게 된다. 물론 원효는 평생에 걸쳐 다종다양한 저술을 남겼지만 일반적으로 원효의 저술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대승기신론』 2권과 『금강삼매경론』 3권, 『화엄경소』, 그리고 『십문화쟁론』이다. 송고승전의 저자 찬녕은 원효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문장의 전장을 영웅처럼 누비다(웅횡문진雄橫文陣)으로 찬탄하였다. 이처럼 원효는 거칠 것 없이 논리를 구사하는데, 그 바탕에는 『판비량론』으로 집약된 불교 인식논리학의 치밀한 논리가 있다. 결국『판비량론』에 관심을 갖는 근본적 이유는 사유의 결여 또는 부재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단계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과 함께 사유의 근거와 원천에 대해 더욱 깊이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9월 28일 도 병 훈 주1) 이번 특별전은 원효사상에 특별히 관심이 많으신 조규현 선생님이 사전에 함께 동행 하시기를 희망하셨으나, 당일 선약이 있으셔서 혼자 가게 된 것이다. 주2) 이번 특별전에서는『이장의二障義』,『보살계본지범요기 菩薩戒本持犯要記』 등 국내에 없는 원효의 저술도 처음 공개되었다. 아울러 모사본이지만 일본 고산사高山寺 소장의 원효의 진영眞影과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도 볼 만하다. 고산사 소장의 진영에 대해서는 졸고「원효의 삶과 사상, 그 현재적 의미」(2003. 12. 18, ICAS, FORUM)을 참조할 것. 주3)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2009년 가을 200여년 만에 재발견된 문무왕릉비편文武王陵碑片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과 동국대학교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는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던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도 처음으로 함께 전시되었는데, 원효의 생몰연대와 화쟁 사상의 중요성은 이 비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주4) 일본의 고바야시 교수는 ‘판비량론’을 통해 가타가나와 비슷한 조어(造語) 방식을 가진 신라인의 각필가점(角筆加點)을 연구하여 현재의 일본어인 가타가나가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주5)주로 읽은 글은 원효성사전서 권6, 김성철의 「원효의 논리사상」과「원효 저 판비량론의 대승불설 논증」. 김상일의 원효의 판비량론의 비교연구(지식산업사, 2004) 등이 있다. 주6)현랑은 현대어로는 지각으로 번역되며, 진나는 분별을 떠난 인식으로 보았다. 주7)비량은 현대어로는 추리로 번역되며, 언어를 바탕으로 한 개념구성에 의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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