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838
2018.08.28 (10: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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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스나이더 (2)

(1)   숲에서 얻은 영감

자연과 문학의 관계를 무어라고 정의 내려야 할까? 시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고대원시 사회의 제사와 관계된다. 그 사회의 우두머리는 바로 제사장이었고 제사의식을 더욱 엄숙히 하기 위하여 주술적인 시가 필요했고 노래가 필요했고 춤이 필요했다. 그 주술은 바로 무서운 자연, 즉 우주를 달래고 그 경외심을 표현하고 은혜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함으로 시의 시작은 바로 자연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우리의 옛 시나 중국, 일본에 있어서 자연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상식에 해당한다. 바로 동양화에 표현된 자연이 그것인데 깊은 산과 굽이치는 물이 있고 거기에 한적하게 어우러진 노인이나 농부는 바로 자연 동화된 인간이다. 그들은 결코 자연에 적대적이지 않고 자연에 포근히 감싸인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거기에 반하여 19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연파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문명의 정신적 뿌리인 기독교 사상의 기본은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이용할 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인간의 문명이 일어난 이래 자연은 끊임없이 파괴되어 왔으며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은 인간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식탁을 풍성하게 해왔다. 원시시대의 그 무섭던 자연이 어느 순간부터 인간에게 정복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고 그 속도가 가속화된 것은 19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이다. 사람들은 그 뛰어난 두뇌로 기계를 만들어내어 대량생산을 시작하고 의술의 발달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인구는 자연에게는 거대한 재앙이었다. 숲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그 속에 살던 무수한 생명체는 몰살되었다. 동화 [헨젤과 그래탤]에 나오는 무서운 숲은 이제 사라졌다.

   아메리카 대륙은 그 원시성을 유지하고 있던 풍성한 생명의 보고였으나 백인들이 상륙한 이후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부터 그 속도가 가속화되었고 지금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가. 자연과 친숙하게 살아가던 원주민들은 수천만이 학살당했고 그것은 지금 그들의 원죄의식으로 남아 있다. 시이튼의 동물기, 헤밍웨이의 단편이나 쿠퍼의 소설, 그리고 마크 트웨인의 소설 등에서 아메리카의 자연은 참으로 장엄하게 그려져 있으나 이제 그것은 거의 원형을 잃었다. 이 지역의 자연을 포함하여 지구상의 모든 자연이 회복불능의 지경이 되어서야 자연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문학에서는 생태문학이라는 장르가 생길 정도고 되었다. 게리 스나이더는 이런 면에서 하나의 선각자요 실천가인 셈이다.

   게리 스나이더는 1930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나 곧 이주하여 시애틀 북쪽 레이크 시티 근교의 농장에서 가난하면서도 자연에 있어서는 풍성한 소년기를 보냈다.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10년에 걸친 치열한 선 수행을 했으며 현재는 캘리포니아 중부 네바다시티 근처의 시애라네바다 산록에서 은거하고 있다. 그는 일생을 유랑자처럼 떠돌았고 그것은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그 영혼의 갈증에서 비롯된다. 대학을 마치고는 한때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어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 매료되었고 그것은 뒤에 동양의 선불교에 깊이 몰두하는 한 계기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서구의 물질문명에 염증을 느끼고 동양의 신비사상에 심취하여 티벳으로 네팔로 발길을 돌렸었던 1950년대 비트제너레이션의 움직임이다. 텁수륵한 얼굴과 긴 머리에 배낭 하나 짊어지고 허무한 표정으로 유랑하는 젋은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스나이더는 당시 미국 서부의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 시인이였다.

  

 


번호 제목 조회 등록일
1458 no image 현대미국시인 게리 스나이더 (6)
759 2018-09-11
게리 스나이더 (6) 자연은 무언의 스승이다. 이것은 높고 장엄한 산봉오리를 보거나 적요한 호수를 바라볼 때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격동이다. 산의 한 자락에서 그는 지금 바위와 달과 계곡물을 보고 있는데 그 자연은 영원불변의 생명체여서 수벡 만년 밤공기는 고요하고 한낮의 햇살에 데워진 따스한 상태로 존재해 있다. 그리고 그 무한한 산들을 덮고 있는 것은 역시 광대무변한 하늘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무한한 자연에 비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목숨을 ‘거품 같은 생명’ 이라고 표현한다. 이 영원무변한 자연속을 거닐며 그는 생각에 잠겨있다. 인간의 하찮은 지식이나 언변이 이 영원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무슨 가치가 있는가. 우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영겁을 놓고 볼 때 사실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이러한 시들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천성이 동양적인것에 매우 가깝다는 점이다. 앞의 시에서 그가 원한 보름달에 감탄한 점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가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는 점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가 대학에서 인류하을 공부하며 인디언 문화에 관심을 집중했던 점이나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선불교에 깊이 탐닉했던 점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그의 천성이 동양적임을 말해준다. 자연물에 대한 경외와 감탄은 [페이드 벨리 위에서](“Above Pate Valley”)라는 시에서도 보인다. 여기서의 스나이더는 벌목공 겸 산림감시인의 신분이다. 정오쯤에 산길을 따라 산의 시내를 따라 2천마일을 걸었다. 그것은 그의 생업이다. 그리고 작은 소나무의 숲을 지난 뒤 스나이더는 눈 녹은 물에 의해 유지되는 초록색 초원을 만나고 거기서 태양이 곧게 떠서 반짝이고 그러나 공기는 차가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기서 그는 무릎을 꿇고 작은 광석 하나를 소중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것은 여름 외에는 늘 눈으로 덮인 이 고산지대에서 흩어져 있는 보잘것 없는 돌이다. 그러나 이 작은 것들이 모여 세상을 지탱하고 우주의 균형을 맞추지 않는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자취’에 집중하고 있다. 사람의 자취와 사슴의 자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리들의 자취, 스나이더는 자신의 자취를 따라온 것이다. 드릴과 곡갱이를 집어 드는 것은 생화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것은 수 만년동안 여러 생을 거듭하면서 습관적으로 해온,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벌목공의 몸으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은 전생의 무수한 인연에 의해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야성을 추구하던 그에게 있어 인락하지만 바쁘고 경쟁적인 도회지 생활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숲 속에서의 한적한 생활의 단면은 [늑색 벨리](“Nooksack Valley”)란 시에서 볼 수 있다. 북으로 가는 여정의 저 끝에 딸기 따는 이들의 초막에서 숲과 구름 덮인 산맥까지 뻗어 있는 넓은 진흙의 들판 가장자리에서, 오후 내내 전나무 삭정이로 스토브를 지퍼며, 어두운 하늘이 더 어두워지는 것과, 황새가 퍼덕이며 지나는 것을 본다. 몸집 큰 사냥개는 먼지투성이 움막에서 낮잠이 들었다. 두 번째 자셍힌 슾의 높이 서서 썩어가는 그루터기들 눅색 강의 계곡에 납작하게 흩어진 농가들. At the far end of a trip north In a berry-pickers cabin At the ridge of a wide muddy field Stretching to the woods and cloudy mountains, Feeding the stove all afternoon with cedar, Watching the dark sky darken, a heron flap by, A huge setter pup nap on the dusty cot. High rotten stumps in the second-crowth woods Flat scattered farms in the bends of the Nooksack River……… .
1457 no image 게리 스나이더 5
1478 2018-09-09
게리 스나이더 (5) 스나이더는 1947년 포틀랜드의 리드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되는데 이 무렾인 열일곱 살에 미국야생지협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오리건 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마자마스라는 이름의 산악회에 가입했다. 앞의 시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산악인이 되어 미국 서부의 험악한 산들을 거의 대부분 오르내리며 대자연을 호흡하게 된다. 대학을 마친 1952년부터는 또 철따라 일하며 가끔은 벌목작업도 하는 삼림 관리인이 되었다. 즉 야생지의 보호가 되어 몇 년 동안 산과 숲에서 일하며, 미 서부의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이것은 그가 50년 말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의 경험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에게 있어 자연을 더욱 잘 관찰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으며 자연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갔다. 화강암 산등성이나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충분하리라. 아니면 바위나 작은 시내, 웅덩이 안에 잠긴 나무껍질의 조각만으로도, 첩첩이 표개어져 꿈틀거리는 산 너머 산 가는 돌 사이로 단단한 나무들 밀집해 있고 그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이 너무 밝다. 마음이 방황하는 이, 백만 번 반복되는 여름, 밤공기는 고요하고 바위는 따뜻하다. 산을 덮고 있는 가없는 하늘, 인간 세상의 모든 잡념 떨어져 나가고, 단단한 바위 흔들린다 이 무거운 순간도 가슴의 거품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말과 책들은 건조한 공기 속으로 증발하는, 절벽 끝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줄기 같다. One granite ridge A tree, would be enough Or even a rock, a small creek, A bark shred in a pool. Hill beyond hill, folded and twisted Tough trees crammed In thin stone fractures A huge moon on it all, is too much. the mind wanders. A million Summers, night air still and the rocks Warm. Sky over endless mountains. all the junk that goes with being human Drops away, hard rock wavers Even the heavy present seems to fail This bubbled of a heart. Words a small creek off a high ledge Gone in the dry air. -[파유트 크맄](“Piute Creek”) 부분
1456 no image 현대미국시인 게리 스나이더(4)
813 2018-09-04
게리 스나이더(4) 어린 스나이더는 당시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노동을 시작했고 그의 집안은 다른 농가의 집들보다 더 가난했다. 그리고 농장근처의 숲 속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놀았을 스나이더는 원래 작가가 되고 싶어 했었던 어머니의 인도로 도서관을 드나들기 시작 했다. 문학과 자연세계를 동시에 접할 수 있었던 그의 유년기는 그의 문학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시기였던 것이다. 시애틀 근교에는 아직도 그 원시림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숲에 있는 것을 좋아하여 밤늦게까지 머물려 있고는 했다. 숲은 신선한 공기와 많은 시내와 온갖 생명체들을 품고 있는 생명의 보고이다. 다음의 시에서도 이 시인의 순박하고 천진한 일면이 보인다. 경사진 암반 위 햇살의 압력에 밀려 어질어질 껑충 껑충 뛰어내린다. 조약돌 깔린 물웅덩이가 노간주 그림자 속에서 소곤거리며 올해의 방울뱀 가는 혀를 날름거리는데 나는 돌 빛 조그만 또아리를 보고 깔깔대며 뛰었다 – 더위에 얻어맞고 팽팽한 암반에서 개울로 달려 내려오다 둥그런 벽 아래로 깊숲이 굴러 떨어져 머리와 어깨를 물속에 쳐밖았다. 자갈 위에 사지를 뻗었는데 – 귀가 울리고 추위로 몸이 쑤셔 눈을 뜨니, 눈앞에 송어 한 마리. Pressure of sun on the rockside Whirled me in dizzy hop-and-step descent, Pool of pebbles buzzed in a Juni;per shadow, Tiny tongue of a this-year rattlesnake flicked, I leaped, laughing for little boulder-color coil- Pounded by heat raced down the slabs to the creek Deep tumbling under arching walls and stuck Whole head and shoulders in the water; Stretched full on cobble-ears roaring Eyes open aching from the cold and faced a trout. -[물](“Water”) 부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개구쟁이 시골 아이들처럼 어린 스나이더 역시 숲 속을 뛰어다니며 이러한 장난을 즐겼을 것이다. 햇살 뜨거운 여름날 더위에 지쳐 바위가 많은 계곡의 시냇가에서 놀다가 방울뱀을 만나고 놀란 아이는 뛰어 달아나다가 물속에 거꾸로 쳐박히고 한참후에 깨어난다. 이 단순한 이야기가 스나이더라는 장인을 만나 얼마나 감칠맛 나게 변화하는지. 그의 시는 매우 사실적이다. 이 시에서 무슨 의미나 상징을 찾거나 하면 그 맛이 사라져 버린다. 오직 어린 시절의 경험을 그대로 씌어진 [산책](“A walk”) 이라는 시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요일, 우리가 일하지 않는 유일한 날; 노새는 풀밭에서 방귀를 뀌고 머피는 낚시를 하고 탠트는 따뜻한 아침 태양아래 펄럭인다; 아침도 먹었으니 벤슨 호수까지 산보나 해야지. 점심을 꾸리고, 굿바이하고, 냇물의 바닥에 솟은 둥근 돌 위를 껑충거리며 암반 위를 3마일을 걸어 파유트 크릭에 도착했다 – 가파른 골짝, 방울뱀이 들끊는 빙하가 훓고 간 지역을 펄쩍 뛰어서, 웅덩이 곁에 착지하는데, 송어가 잽싸게 헤엄친다. 투명한 하늘. 사슴의 길 폭포 곁의 재수없는 곳, 집채처럼 큰 바위들, 점심을 허리끈에 묶고, 위틈을 버티고 오르다가 거의 떨어질 뻔 하지만 바위 선반에 안전하게 굴러 내려 천천히 기어오른다. 매추리 새끼들아 내 발밑에 돌 빛으로, 어어붙어 있다가 삐악거리며 달아난다! 멀리서 어미 매추리가 호들갑이다. Sunday the only day we don’t work : Mules farting around the meadow, Murphy fishing, The tent flaps in the warm Early sun : I’ve eaten breakfast and I’ll take a walk To Benson Lake, Packed a lunch, Good bye. Hopping on creeked boulders Up the rock throat three miles Piute creek – In steep gorge glacier – slick rattle snake country Jump, land by a pool, trout skitter, The clear sky. Deer tracks. Bad place by a falls, boulders big as houses, Lunch tied to belt, I stemmed up a crack and almost fell But rolled out sage on a ledge and ambled on. Quail chicks freeze underfoot, color of stone Then run cheep! away, hen quail fussing. 부분 이 시에서도 스나이더는 자신의 경험을 그냥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그 장난기와 기쁨이다. 숲에 동화된 그에게 모든 자연물은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어서 그는 자신의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방귀를 뀌는 노새조차, 찬 눈길로 어루만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 묘사된 스나이더는 얼마나 발길 가벼운 건강한 청년인가. 앞의 시에서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는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참으로 건강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1455 no image 현대미국시인 - 게리 스나이더 (3)
948 2018-08-31
게리 스나이더(3) 그의 시를 특징짓는 첫 번쩨 요소는 숲에 대한 애착이다. 그가 성장했던 당시 시애틀 근처는 한창 사람들이 원시림들을 벌목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미국 태평양연안은 강수량이 풍부하여 숲이 생성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울창한 원시림이 한창 벌목되는 시기가 게리 스나이더의 소년기였고 아이러니칼하게 그 역시 나중에 벌목공, 산림감시원 등의 직업을 호구하며 숲의 생태를 더욱 잘 파악하게 된다. 그의 숲에 대한 애착은 태생적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는 부모가 허락하는 한 숲에 들어가 있기를 즐겨 했고 숲 속의 온갖 생명체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를 즐겨했다. 말하자면 성자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에 흐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유랑 취미이다. 그는 젊은 시기에 거의 대부분을 유랑으로 보내고 지금은 시에라네바다산록에 은거하면서 틈만 나면 여행을 훌적 떠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 그는 여행과 돈의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유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패르시아 만까지 왕복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어쩔 수 없는 호기심과 유랑벽으로 모든 것을 떨치고 자신의 본능이 부르는 대로 살아 나갔던 그의 삶은 어떻게 생각하면 시인이 되기 위한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시선집 [무자연](No Nature)의 처음을 장식하는 [사워도 산의 전방대에서 8월 중순](“Mid-August at Sourdough Mountain Lookout”)에서 시인은 유랑자의 본색을 이렇게 드려낸다. 저 아래 골짝엔 자욱한 연기 닷새동안 장마 뒤, 무더위 사흘 전나무 솔방울에 송진은 빛나고 바위와 풀밭너머엔 새로운 파리 떼. 옛날에 읽었던 것들 생각나지 않고 몇 안 되는 친구들, 모두 도시에 있네. 양철 컵에 차가운 눈 마시며 높고 고요한 대기를 뚫고 저 아래 수 마일을 굽어보네. Down valleys a smoke haze Three days heat, after five days rain Pitch glows on the fir-cornes Across rocks and meadows Swarms of new flies. I cannot remember things I once read A few friends, but they are in cities, Drinking cold snow – water from a tin cup Looking down for miles Through high still air. 시애틀 근교에 있는 사워도 라는 이름의 산에서 시인은 아래를 내리다보고 있는데 그 정경이 우리에게도 몹시 낯익어 보인다. 옛날에 읽었던 책들이나 몇 되지 않는 친구들의 기억은 가마득한데 눈 녹인 물을 마시면서 고요한,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속진을 떨치고 산속에 사는 동양적인 은둔자의 모습이 아닌가. 이 시는 그가 살림 감시원으로 일하던 1950년대에 씌어진 것인데 한창 젊었을 그가 숲속을 뚫고 다니며 어느 산봉오리의 정상에서 허무한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유랑 및 여행이 이 시인의 본능적 욕구라면 그것은 아마 야성에 대한 끝없는 동경 때문일 것이다. 스나이더는 자신의 유년기를 보낸 농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북미의 북서태평양 연안에 있는 한 작은 농장에서 성장했는데 그 집 근처에는 연어가 가득한 퍼젯 사운드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당시 밖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일은 유사 이래 세계에서 가장 큰 숲 가운데 하나였던 숲에서 나무들이 목재용으로 끊임없이 잘려나가는 일이었다. 그 지역의 광대한 온대 우림은 가히 엄청난 규모의 생태학적, 식물학적 현상으로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해안에 있는 미국 삼나무들과 함께, 이 숲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들의 산지였다. 이상화역 [야성의 삶] 7
Selected no image 현대 미국시인 - 게리 스나이더(2)
838 2018-08-28
게리 스나이더 (2) (1) 숲에서 얻은 영감 자연과 문학의 관계를 무어라고 정의 내려야 할까? 시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고대원시 사회의 제사와 관계된다. 그 사회의 우두머리는 바로 제사장이었고 제사의식을 더욱 엄숙히 하기 위하여 주술적인 시가 필요했고 노래가 필요했고 춤이 필요했다. 그 주술은 바로 무서운 자연, 즉 우주를 달래고 그 경외심을 표현하고 은혜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함으로 시의 시작은 바로 자연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우리의 옛 시나 중국, 일본에 있어서 자연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상식에 해당한다. 바로 동양화에 표현된 자연이 그것인데 깊은 산과 굽이치는 물이 있고 거기에 한적하게 어우러진 노인이나 농부는 바로 자연 동화된 인간이다. 그들은 결코 자연에 적대적이지 않고 자연에 포근히 감싸인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거기에 반하여 19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연파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문명의 정신적 뿌리인 기독교 사상의 기본은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이용할 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인간의 문명이 일어난 이래 자연은 끊임없이 파괴되어 왔으며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은 인간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식탁을 풍성하게 해왔다. 원시시대의 그 무섭던 자연이 어느 순간부터 인간에게 정복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고 그 속도가 가속화된 것은 19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이다. 사람들은 그 뛰어난 두뇌로 기계를 만들어내어 대량생산을 시작하고 의술의 발달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인구는 자연에게는 거대한 재앙이었다. 숲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그 속에 살던 무수한 생명체는 몰살되었다. 동화 [헨젤과 그래탤]에 나오는 무서운 숲은 이제 사라졌다. 아메리카 대륙은 그 원시성을 유지하고 있던 풍성한 생명의 보고였으나 백인들이 상륙한 이후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부터 그 속도가 가속화되었고 지금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가. 자연과 친숙하게 살아가던 원주민들은 수천만이 학살당했고 그것은 지금 그들의 원죄의식으로 남아 있다. 시이튼의 동물기, 헤밍웨이의 단편이나 쿠퍼의 소설, 그리고 마크 트웨인의 소설 등에서 아메리카의 자연은 참으로 장엄하게 그려져 있으나 이제 그것은 거의 원형을 잃었다. 이 지역의 자연을 포함하여 지구상의 모든 자연이 회복불능의 지경이 되어서야 자연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문학에서는 생태문학이라는 장르가 생길 정도고 되었다. 게리 스나이더는 이런 면에서 하나의 선각자요 실천가인 셈이다. 게리 스나이더는 1930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나 곧 이주하여 시애틀 북쪽 레이크 시티 근교의 농장에서 가난하면서도 자연에 있어서는 풍성한 소년기를 보냈다.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10년에 걸친 치열한 선 수행을 했으며 현재는 캘리포니아 중부 네바다시티 근처의 시애라네바다 산록에서 은거하고 있다. 그는 일생을 유랑자처럼 떠돌았고 그것은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그 영혼의 갈증에서 비롯된다. 대학을 마치고는 한때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어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 매료되었고 그것은 뒤에 동양의 선불교에 깊이 몰두하는 한 계기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서구의 물질문명에 염증을 느끼고 동양의 신비사상에 심취하여 티벳으로 네팔로 발길을 돌렸었던 1950년대 비트제너레이션의 움직임이다. 텁수륵한 얼굴과 긴 머리에 배낭 하나 짊어지고 허무한 표정으로 유랑하는 젋은이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스나이더는 당시 미국 서부의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 시인이였다.
1453 no image 현대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
1096 2018-08-26
게리 스나이더( Gary Snyder) - 서부의 방랑시인 시선사 출판: [현대미국시인 7인의 시] 에서 序(prelude) 1930년 5월 8일 해럴드 스나이더와 로이스 사이에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곧 태평양의 북쪽으로 이주하여 위싱턴 주 시애틀 북쪽에서 작은 목장을 시작했다. 1945년 게리는 세인트 헬렌 산을 등정하였으며 1년후 등산클럽 마자마스(Mazamas)에 가입한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등산을 계속하고, 장거리 하이킹을 해왔다. 1947년 그는 링컨 고교를 졸업하고 리드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의 문학잡지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한다. 리드에 있는 동안 그는 동료 시인 필립 훼일런이나 류 웰치를 만난다. 1951년 스나이더는 영문학과 인류학의 학사학위를 받으며 졸업한다. 1951년 여름을 오리건 폭포의 동측에 있는 원 스프링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벌목공으로 일한다. 그 여름 작업을 마치고 그는 인디에나 대학까지 히치하이킹으로 가서는 거기서 인류학 대학원 과정을 공부한다. 1952년 봄까지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립 웨일런과 함께 살면서 생계를 위하여 잡다한 일을 했다. 1950년대 초반 동안 스나이더는 태평양 북부 연안의 숲과 산들을 자주 방문했다. 웜 스프링 목재 회사의 용원이나 산불 감시원으로 일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1953년에서 55년까지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동양어 학과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캠커스 곁의 작은 오두막에 살았다. 스나이더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와 잭 캐루악(Jack Kerouac)을 만난 것은 버클리에 체류하고 있을 때였다. 1955년 10월 그는 긴즈버그와 생프란시스코의 식스 갤러리에서 시낭송회를 주최했다. 스나이더, 긴즈버그, 필립 레이먼셔(Philip Lamantia), 마이클 맥클루어(Michael McClure), 그리고 필립 훼일런이 있었고, 케니스 랙스롯(Kenneth Rexroth)이 행사의 마스터로서 공연을 했다. 1956년 초반기에 스나이더는 밀 벨리의 작은 오두막으로 은거하고 케루악도 나중에 여기 합류했다. 스나이더는 이 집을 일본말로 ‘말 오두막’(Horse Grove Hermitage)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풀뜯는 말이 있는 근처의 목초지 때문이었다. 1956년 5월 스나이더는 일본으로 떠나는데 불교사찰 쇼코쿠지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57년에서 1958년 4월까지 8개월 동안 유조선의 엔진룸 청소부로 취직을 하게된다. 그리고 9개월을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보낸 후 59년 초 교토의 대덕사로 오다 셋소 노사 밑에서 선을 공부하러 떠난다. 이 기간 동안 스나이더의 첫 시집이 교토에서 출판되어 배포된다. 1960년 존 카이거(Joanne Kyger)와 결혼한다. 1961년부터 62년초까지 이 부부는 스리랑카, 인도, 네팔을 여행한다. 그들은 뉴델리에서 앨런 긴즈버그와 합류하며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난 후 1964년 5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다. 1965년 스나이더와 카이거는 이혼을 하고 그해 10월 그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1967년 8월 6일 마사 우에하라와 결혼한다. 1968년 4월 스나이더의 첫아들 카이가 태어난다. 가족은 1968년 12월 일본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자리 잡는다. 둘째 아들 겐이 1969년에 태어나고 스나이더는 두 아들, 아내, 친구들과 함께 네바다 시티 근처의 시에라내바다의 발치에 자리 잡는다. 학생들과 친구들과 함께 집을 지어 커킷디즈(Kirkitidizze)라고 이름 붙인다. 1989년 스나이더와 우에하라는 이혼한다. 그의 집 근처에서 마하야나 승가를 연다. 1970년대 스나이더의 집헛간에서 처음으로 집회가 열렸어며 1982년에 법당(zendo)이 지어지고 그리로 옮긴다. 키커디즈를 그의 기지로 삼고 스나이더는 낭송하고 토론하면서 넓게 여행을 한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많은 여행을 했고 그의 강연여행은 1981년 호주에서도 있었다. 1982년에는 잉글랜드, 스웨덴, 스코틀랜드에도 갔다. 1990년에는 대만, 1992년에 스페인, 1995년 아일랜드, 1998년 그리스와 체코, 2000년 일본과 한국, 2002년 일본과 프랑스, 2003년 다시 일본으로 다녔다. 1991에 역시 일본계 이민 2세 캐럴 코다(Carole Koda)와 결혼하는데 키컷디즈의 형식대로 결혼했다. 그녀는 작가였고 이미 두 딸 미카(Mika)와 로빈(Robin)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스나이더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데이빗 캠퍼스의 교수가 된다. <자연과 문화>라는 프로그램을 창시하는데 한 몫을 하며 야생과 창작을 위한 모임인 <야생의 기술>이라는 조직을 주도했다. 학술원에서 스나이더를 데이빗캠퍼스의 최고 영예인 2,000 교수 연구 강사로 임명된다. 2,002년에 은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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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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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 no image [자연미학]의 번역을 마치며
1334 2018-05-06
1449 no image 자연미학 20
1347 2018-05-06
자연미학 20 五, 미적자연의 상호주관성 객체화된 자연과 심미화된 자연과의 사이의 가능적인 맺음은, 요동치는 지반위에 성립해 있다. 그것은 분기적인 입장에 의해 맡겨저 있으며, 확실히 서로 가깝게 되기는 하지만, 허나, 서로 섞여 혼재하지는 못한다. 자연상태의 미적인 판정에 대한 기술적인 판정의 相違에서, 이것이 밝혀진다. 기술적인 판정은 그 목적이 일시적 혹은 본질적으로 선명하지 않을 때도, 목적에의 수단의 적합에 대한 考量으로 존속한다. 그것이야 말로 목적이 될 수 있음에 관한 효과의 평가이다. 이 목적자체의 판정은 기술적판단이 아니고 윤리적실천적판단이며, 자유로운 자연과 연관되는 작업에는 더욱 미적인 가치평가에 의존하는 판단이며, 그럼으로써, 특별한 곤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미 예술적판단에서는, 확실하게 당연한 것으로서의 타당성요구가 있어나, 허나 구속력이 있는 여하한 판정기준도 주어지지 않는다. 경제적인 유효성이나 생리적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의 넘어 있음으로 해서 처음으로 통찰력을 갖춘 판정에 기초가 결해있다는 것이 자연의 경우에는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술과 자연사이의 최후에 행했던 비교는, 이들 양자의 지각과 결합된 판단형식을 잡아낸다. 기술적인 판단은 객체적인 판단이다. 말하자면, 인과적인 전략과 더불어 불려 일으켜지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이며, 목표상태가 그것에 의해 가능한대로 간단한 방법으로 불려 일으켜지는 것은 기술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미적인 예술판단은, 객체적인 구성요소를 수반하는 상호주관적인 판단이다. 즉, 그 상상적인 분절화의 힘에 의해 고도의 조응적 에너-지 혹은 고도한 관조적감성을 구비하고 있는 예술작품은 성공하고 있다. 이 판단은 상호주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적인 기준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규범적인 기준에 지탱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수용자라고 하는 가정적인 공동체에 단순히 불려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객체적인 구성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비판적인 해석에 의해 이 무리한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적자연에 관해서는 – 현재에 있는 혹은 결하고 있는 자연미 – 에 관한 판단은, 그것에 대해서 객체적인 구성요소 없는 상호주관적인 판단이다. 세가지 미적인 자연관계에 속한 판단형식은, 타의 결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조응적판단만이 또한 객체적인 판단으로써 기술될 수 있었다. 허지만, 이 객체성은, 자연이 개척해 내고 자연이 대응하며 혹은 충돌하는 실존적인 投企에 의존하고 있음이 밝혀 젔다. 관조적인 판단은 순수하게 상호주관적이며, 그것은 그 미를 확정하는 점진적인 단계 이외는, 그 대상에 대해 기준이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상상적인 판단은 확실히 예술형식적인 특성을 자연의 것으로 하며, 또한 자연이 그 특성을 보다 농밀하게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그만컴 보다 높은 것으로써 자연에 그 가치를 인정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어떤 지속하는 작품구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확실한 해석적언명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미적자연과 미적예술간의 보다 폭넓은 상위에 부딛치는 것인데, 그 미적예술은 작품구조에의 자연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의 평가를 위해서 논쟁되지만, 자연의 평가를 위해서는 단지 요란스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로 인하여 자유로운 자연의 승인을 위해서는, 미적으로 논쟁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미에 대한 판단은 매우 상위한 것일 수 있으며 또한 여기서의 판단의 주고 받음안에서의 일치에는 매우 어렵지만, 한가지 점에서 통일은 어렵지 않다. 원래부터 자연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유로운 자연의 개념은 허나 그 자신 하나의 규범적인 개념이다. 이성적인 기술이나 정치는 자연에 대해 이 규범을 일관되게 갖고 있을 것이다. 그 규범의 정식화는, 개개의 우위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연이 자연미의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라 하는 실정에서, 그것은 근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제四장에서 다루웠던 미/숭고와 자유로운 자연과의 구별의 하나의 중요한 귀결이다. 자연의 보호나 애호의 강한 개념은 미적으로 – 미학에 따라 – 기초지워지는 것이나 그것은 일정한 내용적평가를 – 미적판단의 수준에서의 – 반드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으로 다루워젔던 자연이, 그 각각의 장합에서 자연미에 대한 개개인의 의향을 실현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술적으로 다루워젔던 자연은, 자유로운 자연의 보호나 육성의 미적인 위탁을 실현하는 것이 될것이며, 또한 자연에 대한 개개인의 의향을 빠르거나 늦게나마 실현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자율성의 기준이 개개의 태도결정의 상호주관성을 어떻게 조금만이라도 보증하지 않트래도 그것은 미적자연의 자유라고 하는 사태에 관한 상호주관성을 그만컴 강하게 보증할 수 있게 될터이다. 미적자연의 가능성으로써의 상호주관성은, 자유로운 자연의 미의 제형식에 대한 다른 관심속에의 자유로운 자연에의 공통의 관심에 헤당하는 것이다.
1448 no image 자연미학 19
1148 2018-05-01
자연미학 19 b 自然展開의 技術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두나의 중요사항의 相위를 얼마간 보다 상세히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자연은, 한편에서는 기술적인 제작(포이에시스)에서, 다른 편에서는 미적인 실천에 있어 어떻게 현전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점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하나의 광대한 연구영역이며, 이에 관해서 여기서 그 대부분에 대해 고찰할 수는 없다. 내가 주의를 집중하는 시점은, 자연에 대한 한편에서는 기술적인 관계와 다른 한편에서는 그 미적인 관계와의, 다른 시간구조이다. 자연계에 놓여 있는 기술적행위는, 자연의 재료와 연관되는 수행적행위이다. 이 행위가 무엇인가를 수행해 낼 수 있기 전에는, 그것은 자연의 재료로 향한 자연의 변화, 즉, 산정할 수 있는 대상물이나 사태로 향한 자연의 변화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대상영역이 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와 더불어 [대립하는] 물의 계산가능한 공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기술적태도에서는, 자연은, 자연의 생활세계적분절에서 많턴 적던 집어 낼 수 있는 생활공간의 구성으로서가 아니고, 그 생활공간에 있어서의 객체의 영역으로 모습을 들어 낸다. 분명히 이 행위 역시 실천적구상과 체험적세계의 톤택스트안에 있는 것이지만, 허나,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 콘택스트에 의해 제시되는 목적의 달성과는 연관이 있다. 그것은 목적지향적행위이며, 설정된 목적을 달성함에 성공한다면 풍요로운 성과가 기대된다. 그것은 이 목표에 나타나 있는 상태에 자연이 접근해 감에 의해 그 설정된 목표에로 접근해 간다는 시도안에 있는 행위이다. 이 접근을 발생케 하는데 기술적조작은 집중하는 것이다. 기술적자연의 시간은 직선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형식에서 나는 미적자연의 [별도의 시간]을 앞서 구별하였는데, 그 시간이란, 살아 갔던 세계에 대해 그것과는 상반되는 제입장의 동시적경험으로써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다원적으로 수행을 방향잡혀진 활동의 시간이며, 간략화를 위해 우이들은 이를 [동시적시간]이라 명명한다. 분명히 기술적인 행위는 결코 직선적인 시간의 유일한 형식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나, 허나, 그것은 지극히 순수한 형식에 있어 이를 성립시킨다. 마찬가지로 미적으로 지각된 자연에 있어서의 시간은, 동시적인 시간의 유일한 상태는 아니지만, 허나 그 결출한 제형식의 하나이기는 하다. 자연의 미적직관은, 그것이 그 공간의 의미깊은 질서하의 관조적으로 잠입하며 또한 상상적으로 넘어서려고 할 때 조차 늘 체험되는 공간의 현상성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미적직관은 이 공간의 내부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의미소원적. 의미부수적. 화상충만적소여의 교체안에서 그 공간을 공간으로써 현출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공간을 생기하는 공간으로써 탄생시킨다. 이 공간에서의 사물은, 이와 같은 생기를 일으키는 묘개물이 되는 것이며, 사용을 위한 도구적인 것들을 갖는 객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미적자연지각의 실행은, 조작적인 것이 아닌 자연의 변종에 대한 미리 주어진 목표에 의해 이끌어지지 않는 주의의 시도이다. 기술적행위도, 물론 동시적과정과 연관되며, 객체나 일들에 관한 시간동일적조작과 연관되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시간동일적소여성과 연관된다. 허나 여기서는 시간의 안의 동시성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이와 반해 [동시적 시간], 즉 상호작용하는 동근원적인 조우방법의 변종과는 연관되지 않는 것이다. 기술적자연지배의 시간은, 의도의 틀안에서 계산되며, 목적을 실현하는 도상에서 지나며, 소비되는 시간이다. 이에 대해서 자연에 있어서의 미적실천의 시간은 도구적활동과는 반대로 사람이 [천천히 여유를 가지는] 시간이다. 직선저시간경험은 어디까지나 시간동일적시간의 경험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그기에 있다. 동시적시간 때문에 직선적시간관계로부터 떨어질 수 있도록 우리들은 직선적기간관계를 뜻되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연미의 [별도의 시간]이 어디에 성립하는가 라고 하는 것이, 이제와서 보다 명확해 젔다. 그것은, 순수하게 수행되는 행위로부터의 충실한 거리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 거리는,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단지 거리단순히 기술적행위의 거리에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도구적 방향짓는데서에서 부터의 거리이다. 그것은 자연안에서 특별한 가능성과 만나며, [자기목적적] 행위을 위한 거리일것이다. 직선적시간을 - 일례로 기술적행위의 시간을 – 충실해 있는 시간, 동시적시간으로써 – 예를 들면, 미적자연직관의 시간으로써 – 충실한 시간으로써 역의 모양으로 기술해 보고저 하는 욕구를 배울수 있을는지 모른다. 일련의 이유에서, 허나 이것은, 단순에 불과한것이다. 첫쩨로 자연미의 충실한 시간은, 여기서는 일정의 행위목표가 채워질것이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여하한 목표도 그기에는 없다는 것, 또는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게 되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종류의 여하한 목표도 그기에는 부재하다는 것, 또는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는 것에 지배권을 휘둘지 않는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종류의 목표가 멈추게 되는 지배권을 휘둘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동시적]시간은 반드시 [충실한] 시간이 아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미적자연의 양의성에 관한 연구에서 다룰것이다. 세번째로, 수행적행위의 직선적시간은, 반드시 실존적으로 [공허한] 시간은 아니다. 그것이 공허한 것은 다음의 경우에서 만으로, 그 시간안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 외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 또한 그 목표달성의 형식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지각될 수 없을 경우, 또는 그 목표달성의 형식이 가치 있는 것으로 지각될 수 없을 경우, 또한 그 방법이 그 행위의 목표가 되지 못할 경우이다. 목표에 방향잡히는 행위는, 동시에 수행의 방향잡힌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그와 더불어 직선적시간도 어느정도 충실한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주는 교훈은 기술적행위와 관계된다. 기술적행위는 직선적시간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필연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던가, 파괴적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는 수행에 의해 방향지워저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동시에 깊이 고려된 목적설정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능적으로는 자기목적적행위로써, 또는 기술적인 목표에 방향지워저 있는 행위로써, 그 행위가 미적으로 포함적인 지각의 영역의 건너편에 있다고 하는 것은, 원리적인것은 아니다. 기술적행위를 그 수행에 있어 제어하는 미적지각이란 것은 있을 수 있다. 기술적인 수행은 목표에 방향잡히지 않는 존재의 콘택스트에 대해, 내적논리에서 봐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 기술적인 수행이, 대응하는 시간형식의 산출을 목표로 삼는 것은 가능하다. 확실히 기술적행위는, 아름다운 자연의 생기를 직접실행하는 것은 아니나, 허나, 그것은 생활안의 형성물을 만들 수는 있으며, 개입함이 허용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토지를 정돈할 수는 있는 것이다. 자연보전의 기술,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자연획득의 기술 – 우리들은 이를 자연전개의 기술이라 말하자 – 은, 첮쩨로 비기술적인 목표를 갖지 않으면 안 될것이며, 또한 두번쩨로, 그 수행에 있어 이 목표의 지각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선행하는 고찰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면, 적으도 이것은 가능할것이다. 이 [소극적인] 기술도 역시 자연지배의 기술일런지도 모르나, 허나 그것은 단지 좋은 의미에서이다. 이 기술도, 자연의 재료에 연관되는 목표로 향해지는 작업일것이나, 물론 특수한 수행형식과 특수한 종류의 목표등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쫍은 의미에서의 도구적행위여서는 안되며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의 이 관대한 기술은, 그 자신 하나의 미적기술이 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허나 비예술적미적기술, 그것은, 그것이 목표로 삼는 자연을, 그 기술의 작품으로 성립시키는 시도이지 않으면 안될안될 것. 그 작품안에서 자연을 변화시키려는 욕구의 기술은 자연파괴의 단지 다루기 힘든 형식일 뿐이다. 이 과제는 충분히 역설적이다. 자연의 미적기술은 생산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생산은 이루어젔던 목표상태에 關知하지 않는 생성이 아니면 안될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맺으진 시작의 상태의 생산이 아니면 안 될것이다. 물론 가장 간단한 것은 이것이 현재에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자연의 영역을 방치해 두는 것이다. 자연지배의 거리는 이 [無]의 기술에서만이 완전한 것이다. 보다 구하는 것이 많은 가능성은, [사라저 가는] 기술의 사용인바, 그기서는 자연발생적인 토지를 보존한다던가 혹은 인간이 품는 이미-지에 따라 이를 성형한다전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재생시킨다던지 혹은 계획적으로 그것에 첨부한다던지 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또한 최후에 허나 자연의 미적기술의 순수한 가능성으로써 상호작용적통일과 간섭적 통일사이에 있는 영국의 정원과 같은 手本에 따라, 자연에 충만한 공간을 다양한 색으로 변화시키는 것등도 들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더한 여러가지 가능성사이의 서열은 어떻게 기초지워지는가 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 어떤 자연보전의 형식이 적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 그때 그때의 자연환경에 있어 문제가 된다. 자유로운 자연이 반드시 손 안될 수 있는 자연이 아닌것과 같이 방치해 둔 자연이 반드시 매력적인 자연이 아니다. 손 안된 자연 혹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을, 시비하던, 기술적으로 손 안된체로 만드는 것의 미적근거란 없다. 자연의 미적기술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수정, 언제든 現에 있는 자연상태의 수정일지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자연의 미적기술이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제어되지 않는 활동이라기 보담, 오히려,,제어되지 않는 기술적제어에 의해 초래되는 자유로운 자연의 말살이다. 이와 같은 말살을 앞에 둔 자연의 보호의 경우, 머저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연미일 수 있는 인간의 결출한 생존가능성성의 보호일 것이다. 자연의 미적기술이란, [동시적시간]을 산출하는 기술을 일컫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완수된 인간적실천을 가능케하는 장소를 확보하는 시도이며, 또한 다시 이를 성립시키는 시도일 것이다.
1447 no image 자연미학 18
1139 2018-04-22
자연미학 18 四, 技術的藝術의 時間 기술도 역시 자연의 [修正]이며, 아마도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예술과는 달리, 기술은 자연적所與 그 자신의 일련의 변화에 있어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바뀌 나가는, 기술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그 현상적인 다름이 아니고, 실천적인 가변성이 문제시 된다. 자연에의 기술적관계는 그럼으로 미적인 자연관계와는 대조를 이룬다. 미적인 자연관계에 있어서는 자연이 우연히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연을 존재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금일 자연이 여하히 우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자연은 그러나 자연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의 기술적개입에 의해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우연성은, 단지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의 기술적인 개입이 필연적으로 자연의 미적성질을 침헤하며 파괴하는가 어떤가 라고 하는 문제는, 기술의 본질이 자연지배안에 있는가 아닌가 라고 하는 문제에 귀착한다. 그 답은 Yes 이며 동시에 No 이기도 한다. a 自然支配 의 技術 내가 [미적자연]에 관해서 간략하게 논한 바와 같이, [기술적자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논할 수 있다. 여기서 또 생각해 지는 것은, 문제제기적인 자연에의 기술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술은, 광범위하게 걸쳐서 자연에 대한 제학문의 성과임으로, 그 기술의 사용에서는, 서론에서 [기준적]이리고 이름부친 자연이, [문제제기적]인 자연의 영역으로 어디까지 들어가는 모양으로 활동한다. 허나 우리들은, 생활세계적인 자연에 대해 어떤 관계가 기술적자연에 의해 발생하는가를 해명하기 위해 자연과학자신의 기준적인 자연이 이미 기술적자연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에 관해, 의론할 필요는 없다. 기술적행위의 대상이 되는 문제제기적인 자연은 그럼으로 [기술적자연] 일것이다 라고 료해될지도 모를 일이다. 기술적인 행위는, 도구적인 행위의 한 형식이다. 쫍은 의미에서 도구적인 행위는, 명확한 목적을 달성함에 제수단의 사용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는, 미리 제시되어지기는 하지만, 단지 개략적, 잠정적으로 정해진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제수단의 발견과 제수단의 사용이다. 이 후자의 경우, 목적실현 그 자신은, 목적결정의 한 형식이며, 예를 들면, 예술적 수단사용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경우, 도구적인 행위는, 선명하게 끊어 낸 목적의 획득 혹은 실현에 관계지워저 있다. 쫍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의 대부분은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에서 성립한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의 대부분은, 쫍은 의미에서의 그런 행위(도구적인 행위)를 준비하는 것이다. 기술은 쫍은 의미에서의 도구적인 행위를 위한 신뢰할 수 있는 수단인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술이란 도구적인 행위의 도식이며, 이 경우, 그 [도식]은 자주 일정한 행위의 경과안에서만 성립할뿐 아니고 기구나 장치일식에서도 성립하는 것이다. 이 기술적인 도식은, 인과적인 작용의 목표를 정한 달성을 지시한다. 기술적인 행위란, 인과적인 전략의 조력과 더불어 그기에 있는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다. 기술적인 知란, [인과적인 전력과 맺으저 있는 수단知]이며, 금일적인 기술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한 대상화된 과정에 관한 자유로운 처리]라는 것이다. 인과적인 작용의 연관이 존재하는 – 이것은 자연의 근대적개념이 었었다. 비록 물리학이 그 개념을 버렸다고 하드래도, 기술적인 실천의 기술을 위해서는, 이 인과성이란 개념은 아직도 효력이 있다. 기술적인 자연이란 – 자연의 합법측적인 동태에 관한 지식이나 계산으로부터 – 인과적인 전력에 의해 처리되며, 또한 실현가능성에 대응하여 지배된 자연이다. 이와 같은 관계속에서 일상적. 감각적인 주위의 자연공간은, 제객체영역을 인간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처리하는 공간, 규정된 법칙에 따르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事象은 또한 거리화의 사상으로도 기술될 수 있다. 즉, 인간이 이와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을 둘려 쌓고 있는 자연은, 인간이 이를 조작하는 소여적인 자연이 된다. 자연의 이 중성화된 대상영역은, 생활세계적으로 열려 있는 자연의 내부에 있어 전개되는 것과 같이, 전체로서는 자연의 대신이 될 수도 있다. 농경의 경우, 첫쩨번 것이며, 댐건설의 경우는 두번쩨의 것이며, 연구를 위해서 실험실내의 경우는, 이러한 사례의 세번쩨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일상적으로 문제제기적인 현존재로부터의 자연의 거리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다른 것이며, 사용되는 기술은 그 자연대상을, 문제제기적인 행위의 세계로부터 그렇게 다른 거리이며 그때마다 멀어지는 것이나, 그것들에는 아직도 공통적인 점도 있다. 즉, 일정한 인간적인 특전을 채우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달성되며, 자연으로부터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일정한 목적이나 기능에 봉사하는 경우에서의 자연의 조정이 문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에 적용되는 모든 기술은, 자연지배의 기술이다. 허나 이건 자연지배의 어느쪽인가 하면, 약한 개념이다. 도구적인 지배 – 착취, 이용, 기능화 – 가, 자연의 기술적인 다룸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있는 곳에서 우리들은 처음으로 - 쫍은 의미에서의 자연지배의 – 강한 개념을 획득한다. 모-든 – 넓은 의미에서 풀이 된 – 기술은 자연지배일것이다라는 것의 단순한 확인만으로는, 모든 기술은 자연지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 불가역적으로 객체화된 자연을 낳는 다는 것이 기술이란 것의 의미나 본질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직 논급하지 않았다. 그 반대가 옳바른것이다. 기술의 본질안에 객체화라고 하는 것이 여하히 있던, 자기목적으로서의 이 객체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기술의 본질에는 없다. 기술적행위가 이루어야 할 일이, 타의 地에 있어 객체화인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은, 사용된 기술만의 물음이 이루어야 할 것을, 타의 지에 있어 객체화인가 어떤가 라고 하는 것은, 사용된기술만의 물음이 아니고, 인간의 목표설정의 물음이다. 개념적으로 볼 때, 미적자연을 성립시키는 것이, 기술적인 행위의 의미일런지도 모른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기술적인 자연은, 미적자연의 절대적인 반대물이 아니고, 매우 빈번히 실제로 미적자연일 수 있다. 요히훔.릿다나 타의 사람들이 되푸리 주장했다 싶이, 자연의 객체화을 위한 거리나 자연의 심미화를 위한 거리는, 역사적으로는 근간이 같다는 것이 옳바르다면, 자연의 객체화는 적으도 자연의 심미화를 위하여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여하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허나 같은 설득력을 갖고, 그 자연의 심미화의 단계라고 하는 것은, 멈출줄 모르는 자연의 객체화의 역사안에서의 아주 짧은 한 단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될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자연의 힘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안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객체화적인 방향설정과 심미화적 방향설정의 공존의 가능성이 문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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