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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6 (19:5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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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대나무 그림으로부터, 2인전 소감

 

 

지난 수 십 년 사이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도시화 ·기계화 되면서 그만큼 편리해졌지만 몸과 심리적 내면은 병적인 징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도 마음의 상처로 힘들어하는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삶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예술적 치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의 국제적인 갈등사태라든가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 이슈인 이념논쟁을 보면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선명한 논리가 오히려 갈등 국면을 낳는 프레임이 됨을 알 수 있다. 과연 삶을 재단하는 절대적이고 명백한 잣대가 있을까? 자신의 승리를 위해 타자는 희생되어야 하고, 자신의 편이 아니면 적대시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단순논리로는 결코 세상과 삶을 이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논리가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이 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잣대와 논리로도 재단할 수 없는 예술 앞에서는 겸허해지거나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전시장에 있으면 각기 다른 감상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주마간산 식으로 휙 둘러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부터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태도로 조심스럽게 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 둘째 날, 밝은 미소가 인상적인 교양 있어 보이는 한 나이 지긋한 여자 분이 전시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 물어보고 찬찬히 감상하더니 조금 전 가까이서 본 그림을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보며 멈춰 섰다. 그리고 연신 ‘이 그림이 정말 좋은 데요’ 라는 감탄사와 함께 호기심 많은 어린이처럼 순수한 눈으로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그 그림이 주는 맑음과 떨림 같은 느낌에 대해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하는데, 마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듯 했다. 그것은 그리다 만 듯한 미완의 상태가 야기하는 붓질의 긴장감과 파장이었다. 그래서 이 분과 이 그림을 매개물로 삼아 미진한 부분을 채워가며 완성해가듯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처럼 작가도 평론가로 아닌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소통과 교감은 예술영역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새삼 깊게 느끼게 해주었다.

 

때마침 전시회를 준비하는 기간이 방학이라 충분한 작업시간이 있었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러 점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 분이 본 그림은 전시 오픈 날 오전에 그린 그림이었다. 전시회 개막 전날 디스플레이를 하면서 그림들을 전시 공간 벽에 부착해놓고 보니 한 점이 약해 보였고, 한 쪽 벽면이 비어 보였다. 그래서 디스플레이를 한 후 집에 와서 새벽까지 가로 세로 각각 200×148cm 크기의 한지 두 장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렸는데, 결국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에 학교에 출근한 후 미술실에서 다시 같은 크기로 두 점의 그림을 시도했는데, 몇 개의 대나무 잎을 흰 한지에다 그린 후, 짙고 옅은 청색 염료를 묻힌 평 붓으로 마치 하얀 여백에다 서예의 선을 긋듯 그리거나 댓잎을 지우기도 하고 겹쳐서 투명성을 강조하기도 해서 긴장감과 공간감을 조성하고자 했다. 둘 다 얼핏 보면 워낙 담백하고 간결해서 가벼운 드로잉처럼 보였다. 감상자와 같이 오랫동안 지켜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 두 그림 중 한 그림이었다.

대화 중 그 여자 분은 이 그림을 이 장소 말고 다른 곳에 붙여놓고 앞에서 차를 마시면 참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발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보며 머물며 그림을 지켜보더니 예의를 표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번 전시회를 앞두고 전시장에 작품을 배열하고 붙이는 디스플레이 과정에서도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포스터 이미지로 삼은 푸른 점 속의 흰 대나무 그림을 벽에 걸었는데, 그림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전시장 바깥 정원의 오죽(烏竹)과 오른쪽으로는 가로 100cm 세로 20cm 크기의 창틀 없이 벽만 뚫린 작은 창문과 어우러져 이 전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 것이다. 이처럼 삶에 충실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또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적 삶에서 나는 우리 삶의 단면을 자각하게 된다.

 

함께 전시 중인 최선의 ‘가시박’이란 외래 덩굴식물 무더기 설치 작업인 <본능이 각인된 선의 임의적인 뒤틀림>이란 제목의 작업은 난마(亂麻)처럼 뒤얽힌 우리의 현실을 집약한 듯하다.

최선은 구제역 파동 때 수 백 만 마리의 돼지 숫자를 세는 일만 뉴스 화면에서 반복했던 살 처분, 즉 생명유린의 광경을 다룬 거대한 <자홍색 족자>, 구미 불산 누출 사건시 그 황폐화된 숲 속에 놓았다가 가져온 흰 천, 그리고 흐르지 않아 ‘녹조라테’가 되어버린 강물에 적셨다가 건져 올린 녹색 천과 같은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서 최선은 이번 전시회에서 저마다의 욕망으로 뒤엉킨 불인(不仁)한 자연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예민한 감성으로 드러낸다. 이번 작업은 넝쿨 식물의 본성인 뒤틀림과 작가에 의한 인위적 설치 작업이 혼재된 것이지만 얼핏 보면 자연 상태로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식물이 뜻밖에도 전시 공간을 상당한 부피로 점유하며 자연 상태와는 다른 어떤 양태로 존재한다. 또한 전시기간 동안 덩굴 굵기와 냄새, 색 등이 점차 변화하므로 그 순간마다 감상자에게 새로운 대상으로 변하는 데,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도된 것이다. 이처럼 자연 그자체로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선택하거나 조성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는 것에서 예술적 가치가 생겨난다.

 

내 그림은 자극적 볼거리가 아니다. 다만 살아 있는 내 몸의 에너지와 물질과 고정관념을 지양하려는 정신이 서로 어우러져 빚어내는 불완전하고 완결되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자 할 뿐이다. 덩굴 식물을 설치한 최선의 이번 작업 또한 그럴듯하게 치장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작업은 합리주의란 미명하에 획일적 잣대로 재단하는 세상의 폭력성을 부정하며 이와 다른 깊이와 넓이를 지향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먼 우주 속에서는 티끌 한 점, 또는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에 지나지 않는 지구를 보는 관점에서부터 가까이는 내가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이전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고 할 수 있다.

 

2013. 9. 6.

도 병 훈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51 no image 원펀치―형님’전을 보고나서
도병훈
3995 2013-10-28
‘원펀치―형님’전을 보고나서(완) 1. 지난 10월 12일부터 25일까지 수원 대안공간 눈에서 ‘원편치―형님’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는 ‘목표를 향하여 앞만 보고 달렸던 기억을 공유한 세 사람이 20 여 년 만에 다시 만나 변태를 도모’한 3인이 참여했는데 모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전시회를 연 것이다. 『노자도덕경』제1장에는 ‘명가명비상명, 무명천지지시(命可命非常名, 無名天地之始)’, 즉 ‘말로 형상화된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다, 천지의 시작은 이름이 없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가하면 많이 알려져 있듯, 마르셀 뒤샹은 익명으로 변기를 출품한 적이 있다. 한편 곰브리치는『서양미술사』서두에서, ‘미술가는 있고 미술작품은 없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우리는 작가를 통해서 작품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보는 것인지에 대해, 나아가 작품과 작가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대개 ‘작가’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고 작품을 보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숨기면 오히려 더 드러나는 전략과 전술적 차원도 있다. 그런데다 특이하게도 ‘형님’을 화두로 삼은 전시회이다. 3인은 왜 이러한 작업을 세상에 내놓았을까? 2. A, B, C 작가 중, B, C 작가들은 이전부터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통해 인연을 맺어 왔지만 A작가의 미술작업은 이번에 처음 보았다. A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2000년대부터 주로 영화감독으로 활동해온 사람이다.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생산적 활동(2003), 경축! 우리사랑(2007), 미안해 고마워(2001)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중 ‘생산적 활동’은 스페인 그라나다 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경축 우리 사랑’은 대종상 신인감독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의 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인간과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이라고 한다. A작가는 1980년대 후반에 파격적이면서도 과격한 전위적 미술작업을 선보였던 작가이다. 1989년 1회 개인전(도올갤러리)에서 그는 전시장 바닥에 200호 정도 크기의 외곽에 턱을 만들어 물을 넣은 후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풀어 놓은 작업과, 관객에게 껌 1개에 100원씩 받고 판 후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가면서 설치된 패널에 껌을 붙이면 (관객은 얌전히 붙이지 않고 온갖 형상들로 껌을 붙이고 낙서를 해 놓았다고 한다) 200원씩 주는 작업을 했다. 2회 개인전(대학로 소나무 갤러리, 1990)에서는 당시 처음으로 농산물 개방이 됐었는데, 패널 위에 수입 닭고기,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매달아 놓고 각각의 고기 밑에 단백질, 탄수화물, 비타민, 지방… 등의 영양소 분석표를 새겨 놓은 설치작업을 했는데, 날짜가 지나면서 고기가 부패하여 전시장 뿐 만 아니라 건물 전체까지 악취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스멀스멀 전시장 바닥을 기어 다녔다고 한다.(*몇 년 후 고등어를 벽에 매달아 썩게 한 작업으로 알려진 어떤 작가의 작품은 유명해져, 이후 국제적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남북한 축구대회가 열린 사실에서 착안하여 슈룹 수리미술연구소 전시장 양 쪽 벽에 골대를 그려놓고 공에다 빨간 물감을 묻혀 관객들에게 비닐을 씌운 신발을 신고 페널티 킥을 차게 하여 작품을 만드는 작업도 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A작가는 종이에다 물(水)을 적신 붓으로 ‘너희 형님이 너희들을 복되게 하리라’고 쓴 작품과, 지난 번 나와 같이 2인전을 한 최선 작가의 환삼덩굴을 재활용한 설치작업, 그리고 빔 프로젝트 영상작업을 출품하였다. ‘너희 형님이 너희들을 복되게 하리라’는 글씨를 종이를 이어 붙여 크게 쓴 물 드로잉 작업은 성경 구절을 패러디한 것으로, ‘장유유서’의 서열의식이 깔려 있는 우리 사회의 비합리적 특성인 이른바 ‘형님 문화’, 또는 ‘빅브라더’를 용인하는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담긴 대사회적 메시지임에도 가장 자연적이고 유동적인 ‘물’이란 물질로 표현됨으로써 역설적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영상작업은 수원의 양대 명문고로 알려진 두 학교를 배경으로 학생들이 등교하는 장면인데, 실은 두 학교의 배경을 바꿔 서로 다른 학교로 등교하는 것처럼 보이게 편집한 영상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걷는 장면과 함께 그 뒤로 학교의 전통을 드러내는 교훈이라든가 건물 입구나 벽에 부착된 학교 비전을 집약한 문구 등은 일제 강점기 이래 지속된 이 땅 특유의 사회적 특성이 형성된 단면을 잘 보여준다. A작가는 이 영상을 통해 ‘형님문화’처럼 우리 사회의 주된 특성인 동문의식(경상도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남이가?’라는 ‘끼리끼리’ 연대의식인 셈인데, 장유유서 의식이나 동문 의식은 이미 조선 17세기부터 형성되어 특정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한국사회의 특성이다)을 일상적 광경으로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A작가의 영상은 극적 내러티브나 어떤 과장된 스펙터클한 영상도 아니어서 오히려 사회적 리얼리티를 잘 드러낸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특수한 현상인 ‘학맥’이라는 비합리적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나아가 급격히 변하면서도 완고하게 변하지 않은 측면도 있는 삶과 사회의 실상을 좀 더 깊이 성찰해볼 수도 있다. A작가는 전시기간 중 이 영상작업을 폭풍에 쓰러질 듯 흔들리는 들꽃, 물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다 죽은 애벌레, 도로 가장자리를 기어가는 뱀 등을 무표정한 얼굴로 등교하는 학생들과 병치시켜 재편집했다. 이러한 보완 작업은 언제나 과정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반영하면서도 무엇보다 영화나 영상작업의 무한한 가능성이자 장점인 ‘홍운탁월(烘雲托月), 즉 달을 그리기 위해 구름을 그린다는’ 는 일종의 몽타주 기법으로써 단지 학교라는 장소를 넘어 이 땅의 사회 현실을 좀 더 총체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지난 9월초 같은 전시장에 설치되었던 최선 작가의 환삼 넝쿨을 재활용한 설치 작업은 작가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이번 전시회의 행동규칙(?)을 잘 드러낸 면이 있어 유니크한 작품을 창조하려는 창작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 작업은 포대에 넣어 말린 환삼덩굴을 포대에서 꺼낸 덩어리 그대로 바닥에 놓은 것인데, 시간의 경과가 빚은 물성적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전시된 장소성과 함께 최 작가의 작업을 물려받은 제법무아적 ‘몰아(沒我)성’과 합쳐져 새로운 느낌과 의미로 다가왔다. 최 작가의 작업을 이어 받은 A작가의 이번 작업에서 창작 행위는 진폭의 차이는 있어도 선대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유일무이한 대상적 실체에 집착하는 행위의 어리석음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B작가 역시 기상천외한 발상을 바탕으로 한 작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어 전시장에 머리카락 하나를 바늘에 꽂는다거나, 때로는 한쪽 발을 하늘을 향해 쳐들고 있는 작업이라든가 김을 벽에 붙여 거대한 독수리를 만든 작업 등 수많은 전위적 작업을 해온 작가이다. 이번에 작가는 철조망을 전시장에 빨랫줄처럼 설치한 후 거기다 빨간 고추장을 바른 작업을 선보였다. 철조망은 외부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배타적 ‘경계’의식의 산물이지만 인공 가시를 만든 그것의 물성적 특성으로 찔리거나 긁힌 부위에 피가 나거나 옷이 찢어진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처’의 기억으로 다가온다. 철조망에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 시간이 흐르면서 엉겨 붙은 듯한 자국을 보았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B작가 역시 이 작업에 빨간 고추장을 쓴 무의식적 배경으로 이러한 체험을 상기하는 언급을 했다. 작가는 지난 1990년대에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했는데, 그 때 분단된 한반도의 허리 위치인 ‘비무장 지대-DMZ’의 동서 약 250km를 가로지르는 겹겹으로 설치된 철책이 백두대간을 가로막은 것을 보고, 이후 이 철조망을 휴전선 동쪽과 서쪽 사이 한 가운데 지역에 둥근 원형으로 뭉쳐 놓는다면 엄청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상상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가?) 또한 B작가는 지난 1980년대 말, ‘초록색 그림에 붉은 색의 고추장을 마치 폭포처럼 쏟아 붇고 싶었던 기억’이 이번에 설치된 철조망에 고추장을 바르게 된 연유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작가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철조망 설치작업은 이러한 여러가지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B작가는 작업과정에서 철조망에 고추장을 바르는 쾌감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촉감이라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철조망으로부터의 직간접적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B작가의 작품은 다층적 요소들의 결합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성을 보여준다. 철조망과 고추장의 만남처럼 극히 이질적인 대상을 융합함으로써 평범한 대상을 낯설게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적 표현이지만 마치 금줄 같기도 하고, 녹슨 철조망 같기도 한 광경은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변화에의 의지를 드러낸다. 유동적이고 물기를 머금은 정도에 따라 칠하는 과정에서 바닥에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공기에 노출되는 시간에 따라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변하는 고추장의 특성상 전시기간 동안에도 작품의 양태는 변하며 그만큼 철조망은 새로운 형태로 체험을 유도한다(*B작가는 전시를 마치고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 철조망이 길다란 붉은 뱀 형상으로 보여 이미지가 새로운 감응을 유발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했다) C작가는 오래전부터 주로 거대한 나무 둥치나 불상을 소재로 한 조각과 설치 위주의 작업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작업 활동 뿐 만 아니라 이번 전시회가 열린 공간을 거점으로 삼아 지역성을 살린 폭넓은 문화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수원이란 한 지역에서 순수한 자발성을 바탕으로 이처럼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C작가의 활동은 물성적인 양태를 지닌 구체적 대상으로만 예술적 표현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캔버스로 삼거나 조각으로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작업에서 C작가는 스티로플로 만든 큰 두상을 비닐로 감싸서 출입문 입구에 거꾸로 세워놓아 문을 막아버린 형국으로 설치해놓았다. 원래는 전시장 안으로 넣을 예정이었는데, 출입문에 걸려 그대로 놓아 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 사회의 소통을 가로막은 형님 문화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다가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은 흰색이면서 부피에 비해 매우 가벼운 물성을 지닌 덩어리라서 반영구적 실체로써 기념비적, 초월적 성격이 강한 전통적 조각상과 달리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유동적 대상으로도 다가온다. 완고한 의식의 틀을 깨는 과정은 상황에 따라 새로운 방식으로 가능함을 가변적이고 임의적인 설치작업의 특성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3. 이번 전시회는 ‘호랑이 가죽보다 못할 뿐인 명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자 하는 무명(無名)의 전시회로 시작되었다. ‘무명’은 노장과 불교의 본질을 집약한 핵심어이기도 하다.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에 선진(先秦)문헌에 속하는『노자도덕경』을 주해하여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유명한 왕필(王弼, 226 ~ 249)은 <노자도덕경왕필주(老子道德经王弼注)>에서 제1장을 해석하면서, 우리가 무어라 부르는 이름(名)이라는 것은 사물을 지시하거나 형태를 드러낸 하나의 표현이며, 항상 꼭 반드시 그 이름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可道之道, 可名之名, 指事造形, 非其常也)’라고 주석한 바 있다. 이처럼 관념과 대상은 일치하지 않으며, 작가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흔히 많은 사람들은 피카소와 앤디워홀 같은 ‘이름’으로 작품을 본다.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들은 적지 않은 연륜을 지닌 작가들답게 집착을 내려놓는 방하착(放下着)의 정신과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로 차이와 맑음을 지향하는 건강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3인의 작업들은 얼핏 보기에는 이상하고 엉뚱하고, 심지어 이것도 작품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작품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 의도와 특성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 있다. 표현의 넓이는 팽창하는 우주와 같이 그 외적 경계가 없다. 바로 이러한 무한한 넓이에서 다양성이 생겨난다. 현시대처럼 극심한 편애와 유행이 범람하는 시대 속에서는 무엇이 가치 있고 없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상품화되는 것만이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본주의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술적 가치나 한 작가의 삶은 오랜 기간에 걸쳐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조망은 곧 비평을 말한다. 감상이 감상으로 끝나지 않고 비평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 해석, 평가로 이루어지는 비평은 우선 어떤 사건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예술은 재조명의 과정을 통해 그 가치와 의미가 발굴되고 드러나지만, 현단계 이 땅의 미술판은 수입된 서구의 이론으로 지난 수 십 년 간의 미술을 거칠게 재단해버리는 일이 관행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특정 그룹의 미술 운동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기점을 다룬다거나, 몇 몇 알려진 작가 위주로 현대미술의 역사를 동어반복적으로 기술하는 것인데, 이러한 관행은 비평 부재의 우리 미술의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특정 양식이나 패러다임이 부재하는 현시대 속에서 무엇이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바로 이 때문에 어떤 사건이나 사태에 대한 진위와 옥석을 가리는 정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의지와 도전으로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실존적 태도로부터 삶의 지평을 확장하는 담론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13. 10. 26. 도 병 훈
150 no image 2013년 가을, 북한산 백운대 등정 소감
도병훈
4130 2013-10-11
2013년 가을, 북한산 백운대 등정 소감 1. 얼마 전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837m)에 다녀왔다. 대학 입학 후 서울에서 살게 되고, 군 생활도 북한산 자락에서 한 이후 최근까지 이 산의 여러 산행 코스를 다녔다. 어느 때는 산 벚꽃이 흩날리고, 어느 때는 진달래꽃을, 그리고 사계의 변화와 상관없이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굳센 기상의 소나무들은 언제 어디서나 북한산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더 높은 곳에서 북한산 전체를 조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에 비로소 정상인 백운대에 오른 것이다. 백운대 정상에 오르기까지 수 십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이 땅을 독자적 화풍으로 그린 진경산수화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을 본 이후 북한산은 언제나 하나의 화두였다. 겸재는 북한산 자락인 지금의 청와대 근처에서 살았고, 북한산의 한줄기인 인왕산을 중심으로 서울 특유의 산세를 사생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창안하고 완성했기 때문이다. ‘본다’는 문제를 화두로 삼은 세계적인 미술가로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전통회화와 동양의 두루마리 산수화를 깊이 탐색하여 공간과 풍경을 새롭게 보는 법을 평생 추구해왔다. 한자로도 본다는 것은 ‘시(視)’와 ‘견(見)’과 ‘관(觀)’으로 구분된다. 이번 백운대 등정이후 북한산에 대해, 그리고 현대의 등산과는 다른 옛 사람의 ‘입산(入山)’, 또는 ‘유산(遊山)’의 의미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옛 글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의불문聽而不聞)는 말이 있다. 한자를 보면 ‘시(視)’와 ‘견(見)’, 이어 ‘청(聽)’과 ‘문(聞)’의 글자가 다르다. 이 글은 문맥상 ‘시’가 아닌 ‘견’이, ‘청’이 아닌 ‘문’이 핵심이다.’ 요컨대 ‘시청(視聽)’이 아닌 ‘견문(見聞)’의 차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구절인데, 무엇보다 체험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단서로 다가온다. 2. 북한산 주1) 백운대에 오른 날은 유난히 청명한 가을날이자 한글날이었다. 약 12경에 집에서 출발하여 철산역으로부터 수유역과 우이동을 거쳐 도선사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도선사부터는 도보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 인수봉 밑을 지나 북한산장과 북한산성의 암문이 있는 곳을 이르자 거대한 암벽이 나타났다. 정상 쪽을 바라보자 흰색에 가까운 회색의 거대한 암벽 위로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오르거나 하산하는 모습을 까마득하게 쳐다봐야 할 정도였다. 바위에 최대한 몸을 붙인 채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올라가니 정상이 보였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선사에서 이곳 백운대 정상까지는 쉼 없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걸어 올랐으며, 약 1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금은 백운대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에 난간이나 구조물이 있어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아이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되었지만, 산 정상 부근이 거대하면서도 가파른 화강암 덩어리여서 마음이 약한 사람은 선뜻 내키지 않을 정도로 부담감을 갖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만약 난간이나 철책이 없다면 전문 클라이머나 오를 수 있는 난코스라는 것이다. 백운대 정상에서 보는 사방의 풍경은 다양한 준법이 있는 거대한 수묵화로 된 장대한 두루마리 화폭을 펼친 듯 매우 강렬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정상에 오르기 직전까지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랜 풍화작용이 빚은 다양한 변화를 역동적으로 집약한 공간 한 가운데에 내가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만경대(800m)와 인수봉(826m) 사이에 백운대가 우뚝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위치한 거대한 종 모양의 암봉인 인수봉의 거의 수직에 가까운 장대한 암벽에는 수 십 명의 클라이머들이 개미처럼 매달려 있었다. 암벽과 사람이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된 장면이어서 마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인수봉 뒤로도 능선들이 구비치는 데, 바로 도봉산 줄기의 연봉들인 오봉(660m), 주봉(675m), 자운봉(740m), 만장봉(718m), 선인봉(708m)이었다. 날씨가 좋아 그 밖으로도 사위는 그야말로 무시무종의 시공이었는데, 그 끝자락에 아파트와 집들이 장난감 집처럼 오밀조밀하게 보였다. 백운대 최정상은 겨우 10여명 정도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상 밑에는 다소 넓은 공간이 펼쳐져 정상에 이른 사람들이 그곳에서 잠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상 가운데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 울타리가 있었는데, 그 안 바위 표면 바닥에 새겨진 한자 글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3.1독립운동에 관한 것으로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었다. 주2)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 최초로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으며, 이들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17세기의 문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1603년에 북한산 노적봉 일대를 오른 후 쓴 기행문인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임진왜란 이전에는 백운대에도 사람들이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땅의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백운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주3) 북한산 기행문은 이덕무(李德懋)의 〈북한산기행 北漢山紀行〉과 조선 후기 정조대의 문인인 이옥(李鈺, 1760~1815)의 기행문이 알려져 있다. 이덕무(李德懋)의 북한산 기행에는 “이틀 밤을 자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북한산에 있는 열한 곳의 사찰”을 다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옥은 전통 고문(古文)을 기준으로 새로운 문체를 불순한 잡문체로 규정한 정조의 문체반정(1792년 10월)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은 정조에 의해 징벌을 받아 벼슬길을 포기하고 유배까지 가야 했다. 시대를 앞서간 죄였다. 그는 1793년(정조17) 김려 등과 함께 삼각산을 여행하고 <중흥유기>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세검정에서 출발하여 승가사→문수사→대성문→중흥사→용암봉→백운대→상운사→대서문을 두루 돌아보고 쓴 기행문 끝자락에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썼다. 주4) 어떤 이들은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섬기는 노장(老莊)적 태도로써 산림을 즐기지만 나는 다르네. 만고에 의연한 청산의 이법을 마음 안에 끌어들여 도의(道義)라는 심성을 기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 아니런가? 위의 글은 퇴계 이황(1501~1570)이 쓴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시인묵객들의 입산이란 인간 사회를 벗어나 ‘자연’이라는 또 다른 성리학의 세계로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고 그 속에서 성리학적 이치와 호연지기를 느끼며 심성을 수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거의 모든 기행문이 유산기(遊山記)로서, ‘유’자가 들어가는 참뜻을 되새기게 된다. 삶은 매순간 어느 공간에선가 시시각각 물리적 위치를 점유하는 과정이다. 나는 산에서 자연과 인간세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느껴왔다. 우리는 산에서 무엇인가 보고 접촉하고, 냄새 맡고 듣는다. 산은 조금의 경사만으로도 내 몸의 호흡이 달라지는 그런 구체적 장소이다. 신념에 갇힌 삶은 동어반복이지만 두 발로 경험하는 세상은 경험하는 순간마다 다르다. 그래서 발걸음마다 좀 더 이 세상을 새롭게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정서적 울림과 과학적 시선이 교차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산 속에서는 지평선과 같은 부재의 환영을 볼 수 없다. 산이란 때로는 입산, 즉 걸어 들어갈수록 따스하게 감싸 안은 어머니의 가슴이고 때로는 근접할 수 없이 차가운 시공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삶이 화폭이라면 우리는 퍼즐의 한 조각처럼 나의 경험으로 그 삶을 채워나간다. 그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은 경험의 소산이다. 나의 자발적 의지로 구성하는 새로운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하산 길에 수 년 전 도선사에서 감명 깊게 보았던 청담기념관을 다시 보기 위해 이곳을 다시 찾았지만 개관 시간이 지나 문이 닫혀 있었다. 대웅전 마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대입 수능을 앞둔 시점이어서인지 수직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라에 앉아 기도를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바로 아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 평생 정진했던 부처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차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곳 뿐 만 아니라 현재의 대다수 절들을 보면 옛 절이 지닌 소박한 아름다움은 점점 사라지고 요란하고 과도한 치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변화하는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욕망의 산물은 역시 일치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3.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산을 오른다. 누구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이고, 누군가는 근육을 키우는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으며, 극한의 체험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람마다 산에 오르는 이유는 다르고, 느끼는 바도 다르다. 남보다 좀 더 어려운 코스에 올랐다는 성취감이나 심신의 건강 증진 차원이라면 이곳이 아니라도 다른 장소가 많다. 어떤 장소나 공간은 그 장소만의 특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다. 자연미도 자연 그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낄 때 아름다운 것이다. 조상들의 자연관과 세계관, 현대의 물리학적 시공 개념, 그리고 개인적 감수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우리는 좀 더 온전하게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산천이 가진 지질학적 배경이나 지리학과 함께 인문학적 숨결까지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대상을 본다는 시(視)의 차원을 넘어 좀 더 종합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을 때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풀과 나무 그리고 옛사람들의 숨결과 발자취가 비로소 보이고, 산과 물, 즉 산수(山水)가 왜 전통 자연관의 핵심이면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짐을 알 수 있다. ‘시’에서 ‘견’으로, 견에서 ‘관(觀)’으로, 또는 거의 대다수 옛 기행문에 보이는 ‘노닌다’는 의미의 ‘유(遊)’, 나아가 이러한 약속된 기호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원에서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는가가 곧 삶의 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2013. 10. 11 도 병 훈 주1)백두대간 한북 정맥에 위치한 북한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북한산이란 지명은 옛날부터 썼으나 중국의 오악(五嶽)의 하나인 화산(華山)에 비유하여 화산이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 인물인 정도전은 ‘신도가(新都歌)’에서 “앞엔 한강수여 뒤엔 삼각산이여”라 했고, 병자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가던 김상헌도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회한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하고 읊조린 데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주로 삼각산이란 명칭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 중 이곳 백운대는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부아봉(負兒峰)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주2)비바람과 사람들의 발자취로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獨立宣言記事,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作成 京城府 淸進町, 六堂 崔南善也 庚寅生,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 萬歲導唱, 海州 首陽山人 鄭在鎔也 丙寅生 위 글을 한글로 옮기면,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10일에 경성부(서울) 청진정(청진동)의 경인생 육당 최남선이 썼고, 기미년 3월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 만세는 해주 수양산인 정재용이 선도했다”는 내용이다. 이글을 새긴 정재용(1886-1976)은 황해도 해주 의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독립운동가로 이러한 사연은 선생의 글씨를 새겼다는 조그만 안내판에서도 볼 수 있다. 위의 글이 새겨진 네 모퉁이에는 조금 더 큰 글씨체로“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로서는 이곳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나라를 잃어버린 시대를 사는 자로서의 간절한 염원으로 그 마음을 남겼음을 짐작하게 된다. 주3)우리의 선조들은 유람기행(遊覽紀行) 또는 관유기행(觀遊紀行) 이라 해서 명승지를 탐방하여 시문이나 그림으로 남겼다. 기행문 중 가장 오랜 작품으로는 고려말 임춘(林椿)의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여행기인〈동행기 東行記〉가 있다. 그 후 조선 후기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동유기 東遊記〉는 이십여 일에 걸친 본격적인 금강산 유람기로서 조선 후기 기행문의 표본으로 꼽힌다. 이외 기행문으로는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의 〈두류산기행 頭流山紀行〉과 조식(曺植)의 〈유두류록 遊頭流錄〉이 있다. 이외에도 정구(鄭逑)의 〈가야산기행 伽倻山紀行〉, 이황(李滉)의 〈유소백산록 遊小白山錄〉, 허목(許穆)의 〈범해록 泛海錄〉, 이상수(李象秀)의 〈유속리산기 遊俗離山記〉, 성대중(成大中)의 <유내연산기 遊內延山紀>, 박제가(朴齊家)의 〈묘향산소기 妙香山小記〉, 채제공(蔡濟恭)의 〈관악산기행 冠岳山紀行〉, 송상기(宋相琦)의 〈유계룡산기 遊鷄龍山記〉 등 수없이 많은 기행문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한문으로 지어진 작품들이지만 한글로 창작된 유람기행 작품도 있는데, 신대손(申大孫)의 아내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작으로 밝혀진 〈의유당관북유람일기 意幽堂關北遊覽日記〉중 〈동명일기 東溟日記〉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기행문을 남긴 사람 중 김창협은 율곡학파로서 조선 후기 문화예술의 학문적 토대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는 율곡 이이의 ‘기발이승(氣發理乘)설’을 계승하면서도 외부의 사물에 대한 경험의 느낌 즉 ‘마음’과 ‘기’를 중시하는 정(情)의 다양성으로 나아간다. 현실의 경험을 중시하는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그의 동생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장자의 사상을 수용하여 직접 탐승기행하면서 그 감흥을 노래하는 ‘기유紀遊문학’이 성행하게 된다. 이러한 기유문학은 그림으로도 이어졌으니,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이러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왔다. 주4)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북한산의 명소는 산영루(山影樓)라는 누각이었다. 이 누각은 현재 북한산 노적봉 아래에 계곡 위 너럭바위에 위치한 정자로 조선 숙종 이후 조재호·정약용·김정희·이덕무 등 수많은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반해 시를 남겼다. 이 산영루 누각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고 현재는 주춧돌 10개만 남아 있는데,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금년 중 완공 예정으로 현재 복원 중이다.
Selected no image 흰 대나무 그림으로부터, 도병훈·최선 2인전 소감
도병훈
4102 2013-09-06
흰 대나무 그림으로부터, 2인전 소감 지난 수 십 년 사이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도시화 ·기계화 되면서 그만큼 편리해졌지만 몸과 심리적 내면은 병적인 징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도 마음의 상처로 힘들어하는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삶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예술적 치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의 국제적인 갈등사태라든가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 이슈인 이념논쟁을 보면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선명한 논리가 오히려 갈등 국면을 낳는 프레임이 됨을 알 수 있다. 과연 삶을 재단하는 절대적이고 명백한 잣대가 있을까? 자신의 승리를 위해 타자는 희생되어야 하고, 자신의 편이 아니면 적대시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단순논리로는 결코 세상과 삶을 이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논리가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이 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잣대와 논리로도 재단할 수 없는 예술 앞에서는 겸허해지거나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전시장에 있으면 각기 다른 감상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주마간산 식으로 휙 둘러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부터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태도로 조심스럽게 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 둘째 날, 밝은 미소가 인상적인 교양 있어 보이는 한 나이 지긋한 여자 분이 전시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 물어보고 찬찬히 감상하더니 조금 전 가까이서 본 그림을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보며 멈춰 섰다. 그리고 연신 ‘이 그림이 정말 좋은 데요’ 라는 감탄사와 함께 호기심 많은 어린이처럼 순수한 눈으로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그 그림이 주는 맑음과 떨림 같은 느낌에 대해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하는데, 마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듯 했다. 그것은 그리다 만 듯한 미완의 상태가 야기하는 붓질의 긴장감과 파장이었다. 그래서 이 분과 이 그림을 매개물로 삼아 미진한 부분을 채워가며 완성해가듯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처럼 작가도 평론가로 아닌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소통과 교감은 예술영역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새삼 깊게 느끼게 해주었다. 때마침 전시회를 준비하는 기간이 방학이라 충분한 작업시간이 있었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러 점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 분이 본 그림은 전시 오픈 날 오전에 그린 그림이었다. 전시회 개막 전날 디스플레이를 하면서 그림들을 전시 공간 벽에 부착해놓고 보니 한 점이 약해 보였고, 한 쪽 벽면이 비어 보였다. 그래서 디스플레이를 한 후 집에 와서 새벽까지 가로 세로 각각 200×148cm 크기의 한지 두 장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렸는데, 결국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에 학교에 출근한 후 미술실에서 다시 같은 크기로 두 점의 그림을 시도했는데, 몇 개의 대나무 잎을 흰 한지에다 그린 후, 짙고 옅은 청색 염료를 묻힌 평 붓으로 마치 하얀 여백에다 서예의 선을 긋듯 그리거나 댓잎을 지우기도 하고 겹쳐서 투명성을 강조하기도 해서 긴장감과 공간감을 조성하고자 했다. 둘 다 얼핏 보면 워낙 담백하고 간결해서 가벼운 드로잉처럼 보였다. 감상자와 같이 오랫동안 지켜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 두 그림 중 한 그림이었다. 대화 중 그 여자 분은 이 그림을 이 장소 말고 다른 곳에 붙여놓고 앞에서 차를 마시면 참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발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보며 머물며 그림을 지켜보더니 예의를 표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번 전시회를 앞두고 전시장에 작품을 배열하고 붙이는 디스플레이 과정에서도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포스터 이미지로 삼은 푸른 점 속의 흰 대나무 그림을 벽에 걸었는데, 그림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전시장 바깥 정원의 오죽(烏竹)과 오른쪽으로는 가로 100cm 세로 20cm 크기의 창틀 없이 벽만 뚫린 작은 창문과 어우러져 이 전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 것이다. 이처럼 삶에 충실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또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적 삶에서 나는 우리 삶의 단면을 자각하게 된다. 함께 전시 중인 최선의 ‘가시박’이란 외래 덩굴식물 무더기 설치 작업인 <본능이 각인된 선의 임의적인 뒤틀림>이란 제목의 작업은 난마(亂麻)처럼 뒤얽힌 우리의 현실을 집약한 듯하다. 최선은 구제역 파동 때 수 백 만 마리의 돼지 숫자를 세는 일만 뉴스 화면에서 반복했던 살 처분, 즉 생명유린의 광경을 다룬 거대한 <자홍색 족자>, 구미 불산 누출 사건시 그 황폐화된 숲 속에 놓았다가 가져온 흰 천, 그리고 흐르지 않아 ‘녹조라테’가 되어버린 강물에 적셨다가 건져 올린 녹색 천과 같은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서 최선은 이번 전시회에서 저마다의 욕망으로 뒤엉킨 불인(不仁)한 자연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예민한 감성으로 드러낸다. 이번 작업은 넝쿨 식물의 본성인 뒤틀림과 작가에 의한 인위적 설치 작업이 혼재된 것이지만 얼핏 보면 자연 상태로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식물이 뜻밖에도 전시 공간을 상당한 부피로 점유하며 자연 상태와는 다른 어떤 양태로 존재한다. 또한 전시기간 동안 덩굴 굵기와 냄새, 색 등이 점차 변화하므로 그 순간마다 감상자에게 새로운 대상으로 변하는 데,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도된 것이다. 이처럼 자연 그자체로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선택하거나 조성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는 것에서 예술적 가치가 생겨난다. 내 그림은 자극적 볼거리가 아니다. 다만 살아 있는 내 몸의 에너지와 물질과 고정관념을 지양하려는 정신이 서로 어우러져 빚어내는 불완전하고 완결되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자 할 뿐이다. 덩굴 식물을 설치한 최선의 이번 작업 또한 그럴듯하게 치장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작업은 합리주의란 미명하에 획일적 잣대로 재단하는 세상의 폭력성을 부정하며 이와 다른 깊이와 넓이를 지향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먼 우주 속에서는 티끌 한 점, 또는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에 지나지 않는 지구를 보는 관점에서부터 가까이는 내가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이전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고 할 수 있다. 2013. 9. 6. 도 병 훈
148 no image 한 그림에 담긴 사연으로부터 - ‘회화성’의 무한 지층과 예술의 가치
도병훈
4018 2013-08-27
8월 30일부터 9월 12일까지 수원에 위치한 대안공간 눈에서 열리는 "흰대나무 그림으로부터, 도병훈, 최선 2인전"을 준비하면서 쓴 글입니다.. 한 그림에 담긴 사연으로부터 - ‘회화성’의 무한 지층과 예술의 가치 1.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촌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갈등과 비극적 사건, 그 중에서도 극단적 대립과 증오가 낳는 사건들은 삶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갖게 한다. 최근 이 땅의 정치·사회·문화적 국면들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아도르노(Theodor L. W. Adorno, 1903~1969)는 근현대 사회를 ‘동일화의 강제’로 ‘관리되는 사회’라고 규정하고 이 때문에 비인간화되고 야만화된다고 보면서,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인간적인 삶을 사는 유일한 해법으로 예술의 반성능력을 제시하였다. 최근에는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에 주목하여 현시대를 ‘피로사회’라고 규정한 철학자도 있다. 이런 관점들은 근현대사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가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준다. 물론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아도르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예술이 상품화되고 키치화하는 현상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20세기 후반기 이후 사회전반의 복잡성이 나날이 증대되고, 현대 테크놀로지로 인해 가속화된 속도는 공간에 바탕을 둔 체험 축소 현상을 나타내면서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실정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발적 모험으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예술의 힘과 존재이유를 더욱 절감하게 된다. 2. 작년 가을 고향 문중에 전해지는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가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일이 있다. 나는 지난 1996년에 <열녀서씨포죽도>를 처음 본 후 이 그림의 화가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1756~1802년 이후)의 그림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차례 글을 써 왔다. <열녀서씨포죽도>의 주인공 서씨는 나의 17대조 할머니로,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시대 세종조 연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여인이다. 아직은 유교적 윤리질서가 형성되기 전인 조선초에 나의 17대조 할아버지가 후원에 대나무를 심고 완상하다가 천연두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자 서씨 부인이 수년간이나 매일 대나무를 붙잡고 울었더니 그 자리에 백죽(白竹), 즉 흰 대나무가 그 자리에 솟아났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은『세종실록』에까지 실리게 되어, 여러『속삼강행실도』로 간행되어 후대에 전해졌고, 정조시대에 이르러 문중 선조들이 당시 조선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이명기에게 의뢰하여 그린 그림이 <열녀서씨포죽도>이다. 시골 고향마을에 수백 년간 전해져 온 <열녀서씨포죽도>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푸른 쪽빛으로 물들인 종이 족자를 펼치자 매끈매끈한 한지 위에 유려한 필치로 구사한 조선 후기 회화를 볼 수 있었는데, 특유의 공간감, 맑고 투명한 색채, 화폭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나무의 위치와 구성, 준법과 채색의 미묘하고도 절묘한 균형감 등은 그 때까지 경험하고 배워왔던 서구의 근현대회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다가왔다. 고대부터의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이 입증하듯 특이한 사건에 의해 역사의 지층은 새롭게 형성된다. 그러나 역사는 언어나 예술적 표현을 통해 해석되거나 심화되며, 특히 감수성에 호소하는 예술적 표현에 의해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된다. <열녀서씨포죽도>는 ‘조선’ 이라는 왕조시대의 이념과 상징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동양의 이러한 전통회화 속에는 시대적 이념성 이전에 자연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깃들어 있다. 우주를 간략히 표현하기 위해 산과 물을 소재로 삼은 전통 산수화 속에는 흔히 산 속을 소요하는 한 사람이나 하나의 정자, 그리고 강 위에 표류하는 작은 배가 있는데, 이는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사의 찰나적 삶과 무상함을 보여준다. 피상적으로 보면 중국이나 한국, 또는 시대와 상관없이 전통 산수화는 거의 동일한 이미지로 보이지만 화가의 감수성이나 필력에 따라 확연히 다른 세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전통회화의 가변성은 전통 문인화인 사군자 그림,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이 그린 묵죽(墨竹)화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대표적인 묵죽화가는 조선 중기에 살았던 이정(李霆, 1554~1626)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그의 <풍죽>은 간결하고 명료한 구도와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 정교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필치를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신위(申緯, 1769~1847) 등이 이전과 다른 묵죽화를 많이 그렸으며, 특히 신위는 필묵의 유희에 가까운 새로운 필치의 묵죽화를 남겼다. 이처럼 묵죽화도 시대에 따라 다른 특성을 지니는 데, 표현재료이자 바탕인 먹이나 종이나 비단(생명주)의 특성, 무엇보다 그리는 자의 감수성과 행위에 따라 전혀 다른 국면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가장 전형적인 전통회화인 묵죽화도 그 표현의 결과는 미리 계획될 수 없으며, 손, 신체, 눈, 재료, 그림의 표면, 마음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과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산수화의 기법인 적묵, 파묵 등의 묵법(墨法)과 몰골법과 같은 필법(筆法)의 명칭도 표현 행위와 표현재료인 물질성의 양태에 근거한다. 이러한 표현은 동양의 전통회화에도 주목하면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09~1992)의 그림을 해석한 질 들뢰즈(Gills Deleuze,1925~1995)의 ‘감각의 논리’를 빌리면, 대상의 시각적 재현이 아닌 형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의 포획’, 또는 ‘선의 운동학적 응축’이다. 이는 그리는 순간의 호흡이나 기세(氣勢)에 따라 유동적인 민감성을 지닌 과정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화폭은 깊은 감응의 공간으로 변모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인격과 인생을 바꿀 정도의 느낌과 사유를 촉발시킨다. 이런 예술의 특성은 동서고금의 많은 훌륭한 미술작품 및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오랜 전통적인 기법적 관습과 결별한 화가로는 마네를 꼽을 수 있다. 마네의 그림은 그 표면이 물질성을 숨기지 않고 즉흥적 거친 필치와 색채의 극적인 대비로 ‘그려져 있음’-질료의 양태 그 자체로 전적인 현실성을 갖는-에 주목하게 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 회화는 세잔에 이르러서 획기적 전환을 이루는데, 그가 망막에 와 닿는 빛과 색채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인상주의 너머 ‘사물의 피부’를 깨고 도달한 말년의 예술의 세계-<생트빅투아르 산>시리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경의 초록색과 후경의 머나먼 푸른 색 사이의 충만한 공간감-가 특히 그러하다. 한국의 현대미술가인 이동엽은 최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관된 방법론으로 그것도 흰색에 가까운 단색조로 ‘존재의 심연’을 추구한 화가이다. 그의 <상황>시리즈나 <사이>시리즈는 선(?)과 면(?)이 여백과 분리되지 않고 공존하는 방식으로 수행처럼 반복되는 옅은 붓질을 통해 무상성과 가변성이 느껴지는 미세한 변화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처럼 여러 시공간과 역사적 흐름과 지층 속에서 예술의 역능과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면, 기존의 관점을 극복하려는 자발적 의지로부터 형성되는 것이 미적, 예술적 가치임을 알 수 있다. 재능이나 천재성만으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의 특성과 이에 대한 감응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입증해왔다. 이러한 감응의 힘은 아도르노식으로 말하자면 온갖 지배 이념과 분석이 재단해버리는 삶에 대한 강한 반성능력의 근거이다. 나는 <열서서씨포죽도>에 그려진 주인공인 서씨 부인의 순정한 삶과 그로 인해 그려진 흰 대나무 그림을 보며, ‘나’라는 한 개인은 한정된 시간 속에 살지만 그 형성과정은 장구하므로 역사 속에 사는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전하지 않은 세종대의 <백죽도>에서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의 계보학적 변천과정과 함께 하얀 종이처럼, 흰 캔버스처럼 ‘순백’이 가지는 순수함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백색이 갖는 원초성은 고대의 신화라든가, 설산 숭배, 한국과 일본의 백산 신앙, 동식물의 백색 변이를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이는 인류의 원형무의식적 마음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마음은 숫자 ‘0’, 혹은 불교의 ‘공(空)’이나 근원적인 빛에 비유할 수 있듯,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무한 감각의 세계와도 서로 통한다. 물질적 측면에서도 순백은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바탕이자 공간이 되므로, 흰 대나무는 다시 정결한 마음으로 새로운 그림을 펼쳐가는 근원적 모티브이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원초적 이미지이다. 이번에 출품한 나의 작품들은 옛 지도에 나타난 다층적 공간성과, 겸재나 추사의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유의 포괄성과 유연성 있는 힘의 리듬, 세잔 그림의 모순적 특성이나 현대물리학적 시공관에 주목하면서도 어디까지나 ‘그린다’는 작업과정으로써 어떤 잠재성을 지닌 양상을 표현하고자 한 이전 그림들의 맥락을 잇고 있다. <열녀서씨포죽도>는 능숙한 선묘(線描)와 함께 ‘맑은 기운이 감도는 담채와 청청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이러한 그림의 특성은 표면보다 이면의 층이 두텁다. 그 까닭은 힘의 강도와 리듬에 따라 형성되는 표현의 과정은 유동적이며 복합적인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가진 채로 버린다는 말이 있다. 전통으로부터 무엇인가 발견하되 과감한 비움과 도약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의 그림은 화폭이라는 흰 공간에 나의 의지인 자발성과 힘, 그리고 정신의 떨림과 옅고 짙은 푸른 색조의 물질로 이루어진다. 작업하는 동안 긴장감이 느껴지는 망설임과 설렘 속에서 먼 우주를 유영하듯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몸과 감수성, 그리고 물질의 상태가 상호작용하는 예측불가능의 과정이다. 비록 그 흔적은 물질의 얼룩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의지와 정신, 호흡 등이 결부되면서 지금/여기에서 재구성되는 일회적 그림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떠한 언어나 관념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낯선 영토, 또는 시공간을 대면하고 체험하고자 것으로, 지난 수 십 년간 지속적으로 ‘그리는’ 작업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3. 문명의 탄생 이래 미술은 오랫동안 종교적 신념이나 통치이념을 표상하는 수단이 되어왔다. 즉 동서를 막론하고 예술의 내용과 형식은 당대의 이념이나 관점의 틀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예술은 주제나 관습적 형식과는 다른 차원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으며, 지고한 이념미를 추구한 문인화도 예외는 아니다. 지조와 절개의 표상으로 묵죽화를 그렸지만 화가의 개성과 표현재료의 강도 및 기세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화폭이 되었다. 근현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러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모든 것을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근대적 합리화의 바탕인 사변이성의 확대로 심미적 감성의 축소를 야기하는 현상에 맞서 비합리성의 세계인 예술의 가치를 입증하거나 부각시켜왔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의 특성상 미적 성취는 언제나 대량복제와 시장의 필요에 따른 상품화로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현대예술은 점점 급진적이면서도 다양한 표현 양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흔히 현대예술에 대해 난해하다고 말하지만 통찰과 감성을 촉각적·시각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물질성, 풍토, 창작 순간의 여건 등 여러 복합적 요소를 고려한다면 그 가치와 의미를 느끼고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온갖 지배 이념과 분석이 재단하는 폭력적 삶, 또는 현대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준 문명의 이기에 중독되어 공간과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능력과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갖게 한다. 예술로부터 촉발된 감수성으로 역사와 현실을 다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시시각각의 순간에 더 충실한 능동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013. 8. 21) 
147 no image 이동엽의 회화, 채움과 비움 ‘사이’에 대한 소고
도병훈
4684 2013-08-18
1970년대 이래 <상황>시리즈와 <사이> 시리즈로 알려진 이동엽 선생이 지난 8월 16일 향년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이에 삼가 조의를 표하며 지난 2008년 선생의 학고재 전시회를 본 후 쓴 아래 글을 다시 싣습니다. 이동엽의 회화, 채움과 비움 ‘사이’에 대한 소고 1. 2008년 5월, 학고재에서 이동엽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의 그림은 1970년대 초반의 <컵> (*무상-상황)시리즈 작업에서부터 최근 작업인 <사이間>시리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거의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화면 가득히 ‘여백’이며, 텅 비어 고요하며, 맑은 물처럼 담백한 그의 작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흔히 ‘여백’은 이성을 중시하고 물질을 강조해온 서구 정신과는 대비되는 핵심어로 보며, 비어 있지만 기운으로 충만한 세계, 존재가 아닌 생성의 공간이라 말한다. 특히 대상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형사形似’보다 뜻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해온 전통 문인화에서 여백은 비가시적 세계를 함축한 심원한 ‘비움’의 공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여백’의 미학을 브랜드처럼 표방하는 현대작가도 있다. 여백의 존재론적 본질은 ‘무’와 같은 극한의 화두이다. 이는 사유될 수도 명증될 수도 없는 실존적 자각의 문제이다. 이동엽은 수 십 년간 거의 일관된 방법론으로 화폭 가득 여백인 작업을 해왔다. 예술가의 작업은 실존적 경험에 기인하는 내재적 동기와 역사의 문맥 속에서 진정성이 드러난다. 거시적 관점에서 개인은 인드라망 속의 무아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역사적 경험의 진폭이 각각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이동엽의 그림에서 우리는 같은 시공 속에서도 저마다 다른 경험과 감수성으로 사는 존재임을, 무엇보다 비움으로 아득한 그의 화폭에서 철저히 삶과 대면하는 과정을 실감하게 된다. 2. 겉으로 보기에 극히 허허롭고 단순해서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동엽의 그림은 역설적인 화폭이다.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듯한 그림 저편에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사건과 얼룩진 상처(트라우마)와 당대의 풍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1) 최근 작업일기 서두에서도 작품의 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화했다고 믿는 인간의 영혼,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지금 어느 지점에 닿아 있는지,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는 테러, '성전'이라는 이름의 전쟁, 기아, 인간 의지로 극복하지 못한 이 모든 혼돈의 세계를 직시하며 동양의 우주적 자연관을 사유한다. 해방 직후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그의 유년시절은 극심한 혼란기이자 궁핍한 시기였으며, 당시 세상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주2) 이런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이동엽은 부산 피난 시절 초등학교 입학 전에 동네 선배 아이들과 함께 태종대 앞에서 바다를 보며 자연, 그 중에서도 물의 아름다움을 강렬하게 느끼는 체험을 한다. 주3) 그 후 이동엽은 서울 용산에서 살 무렵인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머물고 있던 지리산 동화골이란 곳에 가서 파란 이끼가 낀 자연 웅덩이 샘에서 맑은 샘이 솟는 것을 본다. 이 풍경은 당시 폐허 속의 서울과 대비되어 어린 소년의 눈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주4) 이는 곧 이 땅 특유의 맑은 자연의 풍광, 곧 눈부신 밝은 햇살 속에 드러난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주5) 이동엽은 이후 아름다운 샘, 물에 대한 꿈을 계속 꿀 정도로 물 ․ 바다 ․ 그리고 근원적인 자연의 본 모습으로서 ‘무無’의 상태를 떠올리며 흰색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어린 시절 두 차례의 물과 관련한 체험이 훗날 생명성에 대한 관심과 <컵> 시리즈에서 물을 그린 직접적 계기가 된다. 예술가의 남다른 유년시절 체험과 개인사는 삶과 예술을 특징짓는 원천이다. 화면 전면을 거의 백색으로 표현한 극단적 ‘간결성’을 보이는 이동엽의 작업도 어린 시절 체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어린 시절과 예술세계도 이런 유사성이 드러난다. 까뮈의 소설은 ‘태양과 침묵’의 언어이다. 그의 문체는 ‘한 없이 밝은 햇살 속의 고요함’을 드러낸다. 까뮈의 문체는 집 밖은 지중해의 태양이 빛나고 집 안은 우울한 침묵상태로부터 비롯된다. 까뮈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징집되어 전사했으며, 어머니가 가정부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던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유년시절의 체험을 반영하듯 까뮈의 문체는 ‘고요함’과 ‘간결함’으로 드러나며, 이는 삶과 세상에 대한 투철하고도 근원적인 응시의 소산이다. 비정하리만큼 간결하고 고요한 문체로 삶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을 담고자 한 것이다. 이동엽 그림의 주된 특성인 극한적 간결함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는 H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하여 1학년 때부터 학교 실기수업시간에는 정물화나 모델을 그렸지만 혼자서는 당시 이미 사물이나 세계의 이면인 존재의 근원이나 ‘무’에 대해 생각하며 추상적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전에 겪은 삶의 어두운 터널이 백색을 찾는 근원적 이유가 되었는데, 당시 실기실에서 작업하던 중 캄캄한 밤에 불을 켜는 순간 어둠이 사라지더라는 체험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가 이미 환한 백색을 지향하였음을 방증한다. 그래서 점점 흰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그리다가, 덕수궁 옆 문화공보관에서 가진 졸업전 출품작은 완전한 백색 그림을 그려 다른 설치 작품과 함께 출품한다. 주6) 이때 그린 백색 회화는 ‘우주’적 시공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뫼비우스 띠 같은 모양을 원의 구조로 드로잉 하듯 그린 그림으로 형태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추상작업이었다. 이어 이동엽은 물 ․ 불 ․ 바람 같은 근원적 원소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래서 그는 대지 위에 큰 통나무가 불타거나 바람에 쓰러지는 장면으로 바람을 그리거나, 식물의 잎에 맺힌 물방울을 커다랗게 클로즈업해서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업 중 첫 페이지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 되면서도 동시에 한국현대미술사에서도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른바 ‘단색조 미술’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 <컵>시리즈이다. <컵> 시리즈는 잡지광고에 실린 컵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컵에 채워지고 비워지는 물의 현상에서 자연의 질서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업 역시 어린 시절의 체험의 연장선에서 당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생각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는 이 작업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 내 나름대로는 문명에 대한 비판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동서 문명의 차이를 생각하고, 인간의 욕망의 포화로 서구 물질문명이 주도하는 것을 보며, 비워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환경문제도 생각했지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릴 때부터 민감했어요. 그래서 물질문명이 과도해지면서 세계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어요. <컵> 시리즈는 현대적인 오브제로서 발상과 구조를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 계곡이 아닌 컵으로 하게 되었지요. 또한 당시 ‘무상성無常性’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인문학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헤르만 헷세의 소설, 『나르시스와 골드문트』 속에, ‘흐르는 물속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것이 실상은 쇳조각이었다.’라는 구절, 또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 구절 중에 ‘왕이시여, 그대 발등에 입 맞추게 하는 영광을 주소서’(*작가는 이 구절의 왕을 자연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와 같은 범신론적 구절에서, 고정된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주7) 컵 그림도 처음에는 극사실로 그리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대상을 한정짓는다는 생각이 들어 점차 지우면서 그리다보니 마침내 윤곽선만 남게 된다. 이 컵 그림들은 100호 정도 크기였다. 이 무렵 글을 읽거나 전시회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과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을 발견하기도 한다. 주8) 이 그림들 중 하나가 1972년 8월에 개최된 제1회《앙데팡당》전에서 ‘평면 일석’으로 선정되어, 이동엽은 1974년《칸 국제 회화제》에 허황, 하종현과 함께 참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일본 동경화랑 대표가 당시 일본의 유명 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와 함께 내한하여 그의 그림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동경화랑에서《한국 5인의 작가 -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개최된다. 이 전시회가 당시 한국 화단에서 백색 그림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면서 70년대 후반까지 이른바 단색조 미술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주9) 그의 작업은 점차 구체적 형태마저 사라진 현재의 <사이>시리즈 작업으로 변모하는데, 이는 세계가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회의로부터 비롯되며, 미세한 것에 더 본질적인 우주가 있다는 생각을 담고자 한 것이었다. 주10) 그래서 최소한의 구체적 형상도 배제하고 간략한 선의 형태로 그어지는 찰나에 주목한다. 바로 여기서 그의 작업에 드러나는 백색 위주의 표면적 이미지는 단지 물질적 질료가 아니며, 따라서 그의 그림은 백색 그 자체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흰 바탕은 대안공간이며 색 이상의 색이며, 안료는 그러한 세계를 은유하는 데, 작가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11) 나는 백색의 화면을 빌어 ‘의자연’의 세계를 제시한다. 백은 존재의 근원적 지대로서, 단순히 물질적 공간이나 눈에 보이는 가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정신의 대지이며 자연이다. 또한 흰 공간은 의식의 여백이며 현상의 빈터, 즉 '무의 지대'이다. 모든 존재 현상은 빛과 어둠, 혼돈과 질서, 충만과 공허, 음과 양의 양면성을 지니며 이것은 우주의 순환과 균형, 생명의 본질이다. '밝음이요 빛'인 흰 공간, 그곳은 존재의 대지 또는 존재의 출처로서 생명의 바다이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세계의 근원으로부터 발생하는 형태의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순환의 고리, 자연의 숨결과 진동을, 그 생명적 공간과 시간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태, 그것은 무상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우주 속에 육화하는 물질과 행위의 일체화 즉 합일의 세계를 이루고자 함이며 그것은 자연의 의지로서 그 순환의 원리에 밀착하는 인간정신, 의지이다. 위의 말에서도 나타나듯, 이동엽 그림의 이면에는 ‘실체적 물질성’을 넘어선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으며, 서구의 현대과학이 도달한 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물질과 사상을 분리하여 존재를 입증하는 구체적 자료를 중시하던 서구의 근대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물질의 집합체였으며,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근대의 과학자들은 그 물질의 근원(소립자)을 파악하기 위해 쪼개고 또 쪼개었다. 1961년 미국의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이 의심을 품기 전까지는 돌턴의 원자 가설이 기반이 되어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라 생각했다. 1964년 머리 갤만은 ‘쿼크’라는 더 작은 단위를 제시하며, 이것이 내부구조가 없는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입자라고 생각했다. 주12) 1996년 페르미 연구소에서는 연구 발표를 통해 쿼크도 내부 구조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수세기에 걸친 연구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은 실체적 개체가 아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작용(전환성)으로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게 된다. 이 같은 서구 현대물리학의 물질의 근원에 대한 이진법적 결론은 이진법이 바탕인 동양의 ‘주역周易’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주역』「계사상전」제11장)는 구절이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만물의 근원을 역에서 태동한 태극으로 보았는데, 여기에서 양의, 즉 음양이 생성되며, 음양이 다시 서로 교합하여 사상을 낳는다고 생각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만물의 이치를 ‘음陰’이 항상 음이 아니고 ‘양陽’이 항상 양이 아니며, 별도로 존재하지도 않고 서로 교합하여 서로 돕기도(상생)하고 해치기도 하고(상극)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 실험과 수학적 증명 과정을 거치지 못했을 뿐, 소립자의 두 가지 특성인 개체성과 전환성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양의적인 동시에 융합적이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논리마저 초월하려는 측면은 한국 전통사상의 두드러진 특성이며, 원효의 ‘화쟁’ 사상, 의상의 ‘화엄’사상, 최제우의 불연기연不然其然 ;긍정과 부정을 아우르는 말임)사상, 김지하 시인의 ‘흰 그늘’ 미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주13) 이 중 원효는 마음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국면을 각각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으로 보았으며, 생멸문에서 마음이 진리와 같아지는 가능성과 마음이 진리를 등지는 가능성을 동시에 논한다. 생멸문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구체화되는 통로가 바로 시각·본각 및 불각이다. 원효는 시각·본각에는 실체적 자성이 없다고 보았으며,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열반과 생사'·‘진眞과 속俗’ 그 어느 것도 소유적 머뭄住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이처럼 본각은 주관과 객관의 그 어떤 대상적 경험境界도 실체로 보지 않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의 힘(반야의 자성)을 지녔기에, 자신의 행위와 관련된 주·객관의 경험에 대해 소유 및 집착하지 않고 '하나로 같아진 차원一如'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은 ‘생겨남生’과 ‘사라짐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분리를 할 수 없다. 이런 차원을 원효는 일심一心, 또는 진여문이라 한다. 원효에 의하면 ‘일심’이란 이미 둘로 분별할 것이 없으니, 하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인지 반문하며, 이와 같은 도리는 언어적 범주를 벗어나고 모든 것을 이원적·실체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지라서 ‘한 마음一心’이라 지칭한다는 것이다. 원효는『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有’를 싫어하고 공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에 이르려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청靑’과 ‘쪽藍이 같고, 얼음과 물이 같은 원천이고, 거울이 만 가지 형태를 다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같음’과 ‘다름’도 마찬가지이며, 동일 속에 차이가 내포되고 차이 속에 동일이 포함된다. 원효의 화쟁론으로 본다면 이동엽의 회화는 삶과 죽음(존재와 비존재, 생生과 멸滅), 성스러움과 속됨, 진실과 허위 등의 분별과 분리가 근원에서 해체되어 그들이 '둘 아님'으로 만나는 동시에, 일심을 지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상이나 미학은 의미와 해석의 틀이지만 원효 사상을 포함한 우리 전통사상은 또한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하나의 화폭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세계는 언어적 의미와 해석보다 더욱 근본적이며 미묘한 차원이다. 특히 이동엽 그림은 붓 선이 배어들거나 바탕이 드러나는 작업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이동엽의 그림은 매우 예민하고 정치精緻한 작업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흰 공간에 붓질을 한다. 화면과 상을 하나의 몸으로 의식하기 위해 나는 늘 흰 바탕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긋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동양화를 그릴 때 쓰는 넓은 평 붓을 사용한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바탕과 같은 흰색을 칠하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붓질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붓과 물감이 화면에 젖어들고 흰 화면과 이어진 일체의 선으로서의 붓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 붓의 한쪽 끝은 짙은 색으로 안쪽은 엷은 색으로, 흰 바탕과 물려 있도록 톤을 조절하여 그린다. 최근에는 하나의 붓 선을 그어 내린 다음 붓을 뒤집어 생체의 골격처럼 대칭으로 맞대어 나란히, 또는 수평선을 이루는 좌우대칭으로 긋는다. 나의 붓질은 유연성 있는 물감이 바탕에 잦아들고 섞이면서 모필에 의한 미세한 변화를 촉발한다. 붓 자국과 붓 자국은 서로 맞닿아 상호 교화하고 의지하면서 미묘하게 발생한다. 즉 화면에서 촉발되는 우연성과 나의 의지에 의해 적절한 교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꽤 까다롭다. 수직으로 긋는 의지가 작용하지만 붓이 맞닿아 물감이 서로 섞이면서 미세하게 변화해 가는 톤은 우연과 자연(습도 등 기후)의 반응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물物의 정신화'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물질감을 가능한 한 제거하며 생경한 붓의 필세와 물감의 양을 줄이면서 붓질을 반복한다. 마치 소의 되새김질처럼. 그리하여 ‘물物’과 정신이 만나 서로 화학반응이라도 하듯, 붓 선은 자신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상승하듯이 공간으로부터 투명해지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고 흰 공간에 하나의 획을 긋는다. 나와 세계를 일체화하고 공명의 공간을 형성, 하나의 생명(공간적 신체)을 부여한다. 사라지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순환의 고리, 존재의 무상성을 드러내는 붓질로 자연계의 공명적 구조를 열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나와 세계, 그리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정신적 차원을 드러내며, 바로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혼돈의 세계를 직시’하면서도 굳건히 한 길을 걸어온 그의 회화의 진정한 힘이다. 그는 변화무쌍한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왔고 또한 살고 있는 것이다. 3. 무절제와 과잉생산에 기초한 스펙터클 문화는 현대생활의 기본조건이다. 무엇보다 온갖 갈등과 그럴듯한 술수가 넘치는 지금의 세상은 더욱 삶과 예술의 가치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갖게 한다. 이런 현실상황과 이동엽의 작업은 극히 대조적이다. 무엇인가 끊임없이 무화시키려는 듯한 행위와 물질이 어우러진 그의 그림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염세적 니힐리즘으로 볼 수 없다. 그의 그림은 결코 백색 일변도의 현실과 무관한 그림이 아니며, 오히려 시대적 혼미상황에 의연히 맞서려는 일관된 정신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이동엽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눈부신 가을햇살을 느낄 수도, 순백의 백설 천지, 나아가 온갖 세상사의 부질없음도, 궁극엔 이 모든 풍경을 넘어선 어떤 정신적 차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그의 화폭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도 화가의 주관도 사라진 공간이다. 하지만 빛이나 백색이라는 표면적 이미지나 물질적 환원주의 시각에서 이동엽의 그림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갈등과 혼돈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의지, 즉 건강한 몸과 정신을 회복하려는 지향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정신의 전개 과정으로 보면 그의 회화는 어느 순간부터 더욱 맑고 담백한 세계로 환하게 빛난다. 결국 현실의 온갖 혼돈을 직시하는 대극에서 더욱 정갈하고 의연한 정신성이 아득히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 이것이 이동엽 회화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2008, 7, 29) * 이 글은 2008년 『미술과 담론』 26호에 실렸으며, 2012년 8월에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함. 주1) 평탄치 않은 남다른 삶을 산 작가들 중 극단적 비움의 작업을 보여주는 예로 팔대산인이나 마크 로드코, 윤형근의 그림을 꼽을 수 있다. 주2)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 갓 태어났을 때 백일 된 아이보다 컸다고 해요. 그건 어머니가 공포 속에서 임신 중독이 되어, 영양실조 상태에서 뱃속에서 부어서 나왔기 때문이었어요. 태어나서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어요. 당시 피난 생활이란 누가 누굴 도와 줄 상황이 아니었으며.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지요.”(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3) 초등학교 입학을 하기 전에 동네 큰 아이를 따라 바다에 갔지만, 너무 어린 나이여서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들의 신발을 지키며 바다를 바라보았다고 했다.(2008년 7월 9일 작가와 전화 통화 중에서) 주4) 자신의 그림이 세상 건너편이자, 반대편인 것도 이러한 체험과 상관이 있다고 했다. (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5) 19세기 말이나 20세 중반까지 한국에 온 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상 중 밝은 햇살 속에 뚜렷한 풍광을 꼽았다. 일제강점기 때 추사를 연구한 학자인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로서 수 년 전 추사관련 유물 수 만 점을 과천시에 기증한 일본인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은 햇빛이 찬란하여 나무하나 풀 한포기까지 선명하고 하늘의 깊은 푸른 색紺碧은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서재의 창을 열면 유난히 높은 준령이 눈에 잡히고 그 담홍의 아름다운 화강암은 하늘에 빛나서 무척 선명하였습니다.” 주6) 당시 하종현 지도교수가 이동엽의 졸업 작품을 보고 장 포트리에의 작업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설치 작업은 거울 위에다 여행 중 배낭에서 주워왔던 자갈을 예수의 가시 면류관 형상의 둥근 가시철망 속에 놓은 작업이었다. 자갈이 자연 그 자체라면 가시철망은 인간의 권력이나 폭력을 상징하는 작업으로 인간에 의해 생명이 억압된 문제를 제기한 작업이었다.(2008년 7월 9일 작가와의 전화 통화중에서) 주7) 7월 9일 작가와의 전화 통화 중에서. 주8)작가는 군입대중 어떤 불교 서적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고 한다. 한 청년이 고향의 절에서 여승의 딸을 만나 가까이 지내다, 같이 서울 유학 가서 사귀었는데, 어느 날 그 딸이 학교에 보이지 않아 고향의 절에 갔더니 그 딸이 여승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딸이 하는 말이, ‘물이 얼면 얼음이니 얼음이 물이로다.’ 라는 말했다는 것이다. 이동엽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자신이 하던 작업과 일맥상통함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어떤 선시 선화 전을 보러 갔다가, ‘참의 물은 맛도 냄새도 없다.’는 구절을 보고 자신에 작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9) 작업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 작가와의 대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8월에 개최된 제1회《앙데팡당》전에 내가 평면 1석으로 뽑혔어요. 당시 나는 이 전시회가 나이, 학력을 불문하고 모든 작품을 심사 없이 전시한다는 요강을 보고 작품을 출품했어요. 당시 이우환 선생이 단독심사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곧바로 9월에 군대에 갔으며, 조카가 군대로 와서 작가로 선정되었으니 작업론을 써야 한다고 해서, 군대 훈련소 참호에서 그것을 썼지요. 그 글의 내용은 물리화학에 대한 얘기와 노장사상의 영향도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앙데팡당》전에서 처음에는 《파리 비엔날레》대표로 선정한 것이지만, 《파리 비엔날레》전이 설치 위주여서 결국 《칸 국제 회화제》에 나와 차석을 한 허황, 그리고 하종현 선생이 참가하게 되었지요. 1973년에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명동화랑 주인 김문호씨가 ‘일본 동경화랑에서 야마모토 사장과 나카하라 유스케란 평론가가 오며, 니 작품 보러 온다.’고 해요. 그래도 설마 나부터 찾겠나 싶어 며칠 있다가 연락을 했더니, 김문호씨가 노발대발하면서 ‘당신 어디 있느냐?’ 하면서, 그들이 오자마자 나를 찾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마모토와 나카하라 유스케, 가화실로 왔는데, 이일 선생도 동행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이 나의 작품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집이 망해서 재료도 시원찮고 캔버스 상태도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물감도 보내주겠다, 캔버스도 보내주겠다, 동경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 이게 갓 대학을 졸업하고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제대하면 초청장 보내주겠다, 이런 사실들이 당시 『주간한국』이란 잡지에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 차범근과 함께 소개되었어요. 그들은《한국 5인의 작가 - 다섯 가지의 흰색》전을 열기로 하고 한국작가들을 탐방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박서보 선생의 제자라면 이 5인전에 같이 나란히 참가할 수 없었죠. 그래서 1975년에 제대할 때《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을 하게 되었지요. 그전에 국내에서의 전시는《3+1》전인가 했지요. 그리고 1974년에 명동화랑에서《조형과 반조형》전을 했는데, 김창렬 박서보 윤명로가 조형전 대표로, 이건용, 이강소, 심문섭, 이동엽이 반조형전 맴버로 전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1975년에《한국-5인의 작가 - 다섯 가지 흰색》전도 하게 되었지요...(중략) 야마모토는 나를 ‘고뿌(컵의 일본 발음임)의 리’로 불렀어요. 당시 동경화랑은 일본의 일급화랑이었으며, 그때 나는 모노하를 몰랐어요, 미술 잡지에서 세키네 작품을 한 두 번 본 정도였지요. 1977년 동경화랑이 한국미술 단면전을 기획, 센츄럴 미술관에서 한국작가들을 초청했지요. 그 때 모노하 작가들을 봤는데, 세키네는 사람이 골격이 크고 인상이 힘세 보였어요, 스가이는 핸섬하게 보였고...(중략) 당시 동경화랑은 일개 화랑이 아니었어요. 그 위상이 대단했지요. 야마모토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가를 탐색했으며, 그가 파리에 나타나면 파라 화랑가가 술렁거렸다고 해요. 그러므로 70년대 단색조 미술의 등장에 대해 동경화랑 1개 화랑의 취향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당시 동경화랑이 차지하는 위상이 대단했어도 그렇지만 문화정치학적 시각에서만 보는 건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나는 그런 혐의를 부정합니다, 막말로 화랑은 그림 장사꾼인데, 왜 문화정치학의 논리로 접근하지요? 문화를 지배하기 위해 문화정치학 정략적 차원에서? 그렇지 않아요. 그 혐의는 모노하를 그대로 모방한 ‘AG’에 국한되는 일이지요. (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70년대 단색조 미술의 확산 과정에 대해서는『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Ⅲ(Vol.1)』,, ICAS, 2003, 310-312쪽을 참조할 것. 주10)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중 세계의 현상을 공간적으로 설명한 부분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즉 ‘가는 티끌 하나 속에 시방세계 들어 있고’라는 말이 나온다. 주11) 작가도 자신의 그림은 흰색이 아니라고 말했다. “단색조를 나는 자연색으로 생각해... 바래진 것 같은...” 《3+1》전 때 이일 선생이 물어보더라구... “그래서 나의 흰색은 무한한 것을 뜻한다, 평면이 아닌 공간이다”, 이렇게 말했더니 이일 선생의 표정이 이상하더라구... 이일 선생은 내 그림이 평면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내 그림 속 흰색은 자연 색, 갱지 빛깔이지요. 모노크롬도 아니고 단색도 아닙니다.(2008년 5얼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12) 당시 그는 up, doun, strange라는 세 쿼크의 존재만을 말했다. 주13)김지하의 미학은 '흰 그늘'이란 말로 요약된다. 흰 그늘이란 모순된 언어로 분열돼 있으면서도 하나로 융합된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는 단군신화나 고주몽 설화, 칼 융의 그림자론, 그리고 동학사상을 통해 ‘흰 그늘’의 미학을 말하는데, 이는 주역에서부터 계승된 원리이자 동학의‘불연기연(아니다 기다)’, 원효의‘비연사연 ’등을 계승한 미학이다.
146 no image 미국에서 제자로부터 온 글과 파울로 솔레리의 건축정신
도병훈
4824 2013-05-15
미국에서 제자로부터 온 글과 파울로 솔레리의 건축정신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건강하시지요. 한국에는 이제 봄기운이 완연할 듯합니다. 이곳 필라델피아도 어느새 봄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선생님께 진작 메일을 받고도 학기말에 경황이 없어 송구스럽게도 이제서야 답을 올립니다. 학기 중이었던 지난 양력 4월9일, 저의 또 다른 정신적 스승이셨던, 파올로 솔레리 옹께서 향년 9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1919년 6월21일 여름의 시작에 오셔서, 봄의 시작 즈음에 해서 가셨습니다. 선생님 고향에서 있었던 오래된 꽃달임(화전花煎) 사진에 대한 글을 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며, 파올로 솔레리의 일생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매(일) 시공을 아름다운 삶으로 채워 넣고 가신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 후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에서 수학 후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의 사막에서 코산티와 아르코산티의 실험을 시작으로 평생 한길을 그렇게 걸어온 파올로 솔레리의 삶은 의지와 열정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첨부하는 사진은 파올로 솔레리의 스튜디오와 1971년 아르코산티가 처음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지던 모습입니다. 건축이 물질을 통해 의지가 형상으로 그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파올로 솔레리라는 꽃은 피고 이제 졌지만, 그가 일구어놓은 숲은 이제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의지로 그 모습을 새로이 찾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의 장례식은 그가 떠남을 슬퍼함이 아니라, 그가 일구어놓은 삶의 찬가와도 같았습니다. Elegant Frugality, 검소함의 아름다움, 마치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떠오르게 하는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하였던 그 이기에, 그의 작업과 꿈만을 남기고 파올로 솔레리는 떠난듯합니다.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던, 그의 관을 옮기며, 또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의 관에 흙을 덮으며, 다시금 아름다운 삶이란, 또 그 어떻게 그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곱씹어보았습니다. 스튜디오에 이제 파올로 솔레리는 없지만, 그의 의지와 열정은 아름다운 삶의 기폭제로서 우리와 함께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위 글은 지금 재직하는 학교의 1회 졸업생 제자가 쓴 것이다. 지난 4월말에 내가 썼던 ‘화전花煎놀이날에 찍은 오래된 사진 1장’이란 글에 대한 답 글이다. 이 제자가 재학하던 당시부터 나는 일반적 수업행태였던 기능 위주의 맹목적 실기수업보다는 학생들이 철학수업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별난(?) 방식의 미술수업을 했다. 그런데도 진지하게 수업을 한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 제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 제자와는 지난 2011년 가을에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이 무렵 제자는 아르콜로지(arcology, architecture와 ecology의 합성어)라는 선지자적 건축사상을 제시한 세계적인 건축가인 ‘파올(울)로 솔레리’가 주도하여 계획하고 세운 애리조나주의 ‘아르코산티(Cosanti, 사물이란 뜻의 이태리어cosa와 반을 뜻하는 Anti를 합친 용어)’에서 연구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잠시 한국에 오면서 파울로 솔레리의 건축적 정신과 프로젝트가 담긴 텍스트로서 자신의 「Density and Transportation Systems of Lean Linear City」란 글을 포함한 여러 연구원들의 논문이 실린, 자신이 디자인하고 그래픽한 『LEAN LINEAR CITY』란 책의 초본을 갖고 학교에 왔다. 제자는 여전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배움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오랫동안 깊은 대화를 나눈 친구를 만난 듯해서 격의 없는 소통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대화를 하면서 고등학교 때의 내가 했던 수업의 내용까지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작년 5월에 다시 귀국하여 스승의 날에 푸른 색조의 꽃이 담긴 아름다운 바구니를 보내왔으며, 그날 오후에 만난 자리에서는 파올로 솔레리가 한국의 절 건물이나 누각 처마에 매다는 작은 종인 ‘풍경(風磬)’을 보고 청동으로 제작했다는 ‘풍경’까지 선물로 주었다 이일이 있고나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제자는 얼마 후 아르코산티에서의 3년간 생활을 정리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조경과 도시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제자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유기체간의 상호작용과 자연과의 조화를 축으로 삼는 파울로 솔레리의 건축사상을 알게 되었다. 파울로 솔레리는 1950년대에 이미 환경친화적이고도 공간효율적인 생태도시를 구상한 선구적 건축가로서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술과 건축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한 사람이다. 국내에 『파울로 솔레리와 미래도시』로 번역된 책에서 그는 아르콜로지의 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그것은 기후나 태양을 더 고려한 도시환경이며 태양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개념일 것이다. 두 번째는 빛을 향해 우리의 삶을 구축하려는 의지, 세 번째 요소는 삼라만상위에 쏟아지는 많은 양의 에너지이다. ...현실을 무시하지 말고, 우리의 내적동기의 차원에서 더 많은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방향, 즉 우리 내면에서 발산되는 가치들을 향해 도약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식으로 외적 세계를 변화 시켜야 한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파울로 솔레리의 다른 말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령, 인간의 뇌를 예로 들어 보면요. 그것을 이차원으로 펼쳐보면, 50평방킬로미터 이상을 차지할 것입니다. 뇌 속에 흐르는 정보가 엄청나기 때문에 정상적인 뇌기능을 위해서는 수천 킬로미터의 연결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를 거듭하면서 3차원으로 둘둘 말리며 접혀지자 엄청난 복잡성이 생기게 된 사례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소형화 개념입니다.” -아르콜로지, 그 시작과 끝 p53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어느 정도의 병적인 측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시가 제공할 수 있거나 천 년간 제공해 오고 있는 것과 도시에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즉 당신의 지적대로 환경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이 환경은 좋은 사회를 이끌어 낼만한 것이 아닌 편입니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제거한다면 남아날 것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 미국인들이 도시에 대해 아주 회의적일지라도, 우리는 도시가 여전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재, 세상에 만들어진 가장 소비 지향적이며 가장 낭비가 만연되고 가장 오염되고 차별이 심한 주거의 형태는 교외 주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 단독주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의 경제력이 향상될수록 집의 규모는 더 커지게 되고, 이 집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구매하게 됩니다. 따라서 점점 더 큰 단위 주택을 짓는 과정에 착수하여 개인주택 위주의 교외 도시 확산현상이라 불리는 형태로 주택들은 고립되고, 주택들 각각은 자원이나 설비 시설, 오수처리와 쓰레기 처리와 같은 정화 시설과 연결망을 구축합니다. 이 집들의 상자는 소비의 본거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이라고 여겨지는 소비의 사이클을 가동시키고 난 후 더 많은 것을 소비합니다. ... 우리 자신들이 이러한 물질만능에 몰두한다면 결국 우리는 사멸할 것입니다. ,,, 필요하다고 느끼는 기계장치로 주변을 치장하면 할수록, 정신적 과정은 주목되지도 않고 전혀 필요 없게 되는 상황으로 점점 더 흘러가게 마련이며, 장치들을 가치고 놀면서, 결국은 전혀 만족하지 못하게 될 행위를 하면서 쾌락을 찾는 일만이 더 절실하게 요구되어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의 충족도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소비에 더욱더 매달리게 됩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게 되며, 결국 인간의 가장 위력 있는 술수는 잡동사니들에 대한 필요성을 창출해 내는 능력이며, 두 번째로 강력한 술수는 이것을 생산해 내는 기술이겠지요. 친밀한 인간관계나 인정이 사라지면 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비인간적이며 인공적인 필요들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백화점에 간 때가 아마 예닐곱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고 그 큰 상점의 꼭대기 층은 장난감 코너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에 어떤 정신으로 달려 들어갔는지조차 형언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크리스마스 기간의 장난감 세계였을 뿐입니다. 지금은 매일 매일이 크리스마스인 것 같습니다... 예외적인 것은 흥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거의 지루해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현재 우리의 내적 동기의 차원에서 더 많은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방향, 즉 우리 내면에서 발산되는 가치들을 향해 도약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식으로 외적 세계를 변화시켜야 할 책임을 가집니다. .. 우리는 개인주의를 벗어나야 합니다. 삶은 무엇인가를 초월해 내는 과정입니다.” <진화하는 도시 중> 위의 파울로 솔레리 말에서, 제자의 말처럼 평생동안 ‘Elegant Frugality, 즉 검소함의 아름다움을 실천하고자 한 풍모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환경친화, 친환경, 지속가능한 건축 등의 말과 유사한 이른바 생태건축 개념들도 파올 솔레리의 건축사상이 그 선구적 예임을 알 수 있다. 생태건축이란 인간, 도시, 자연, 기술의 새로운 관계정립과 태도를 통해 유기체적 사고와 자연존중의 지혜를 유도하여 인간과 자연 모두 함께 지속가능한 생존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태양열주택이나, 옥상녹화, 도시의 대단위 녹지조성, 흙·나무 등 자연재가 사용된 건축, 도시 공간 속 공통체적 외부 공간, 마을 만들기, 자전거나 도보 위주 가로체계 등 그 구체적인 대안이나 방법론이 다양하게 모색되거나 전개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파올로 솔레리로부터 사막 위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형인 아르코산티는 자연이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먼 미래까지 가정하여 착안된 도시이자 건축으로서 20세기 말의 에코폴리스, 사이버건축, 가이아 건축 등의 미래건축의 여러 양상들, 나아가 미래문명의 대안을 20세기 중반에 이미 예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파올로 솔레리는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정신은 훌륭한 제자들에 의해, 또한 건강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더욱 창조적인 문화와 문명으로 진화할 것이다.(2013.5.14) * 파울로 솔레리 건축의 큰 틀에 대해서는 유튜브에서 [PAOLO SOLERI] Lean Linear City: Arterial Arcology를 검색하면 볼 수 있는데, 위 제자가 이 동영상 컴퓨터 그래픽을 제작한 것임)
145 no image 화전花煎놀이날에 찍은 오래된 사진 1장
도병훈
4562 2013-04-26
화전花煎놀이날에 찍은 오래된 사진 1장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화개작야우 화락금조풍)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는구나..... 최근, 모든 사물은 무한 관계 속에 무한히 변화함을 표현한 이 한시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더 깊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 일이 있었다. 지난 토요일 수도권의 고향출신 모임에서 나 보다 연장자인 일가 조카로부터 사진 하단에 ‘乙未(을미) 四月(4월) 十二日(12일) 花煎(화전)’이라 적혀 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55년에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을 받았다. 이 사진은 옛 사진을 최근에 확대하여 복원한 것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일견 구한말의 민속사진처럼 보이는 이 사진은 어릴 적 집성촌인 고향마을에서 본 대다수의 일가 아지매들과 소수의 남자 어른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모여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남자 어른 6명, 여자 30명, 어린이 18명 총 54명인데, 군복을 입은 한 일가 아재의 모습과 남루한 차림의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한국 전쟁 휴전 직후의 분위기를 보여줄 뿐, 쪽진 머리 혹은 머리를 땋고 한복을 입은 여인들은 휴전 직후임에도 모처럼 차려 입고 나온 듯 사진 속의 옷차림은 깨끗하다. 흑백사진이라 얼핏보면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일색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문양이 있는 저고리도 보여 모처럼 단장하고 화사하게 차려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진 속에 세 살 아기의 모습인 누님을 안고 있는 스물 세 살의 꽃다운 어머니 모습이 있었다. 쪽진 까만 머리에 눈매와 입매까지 20대 초반의 젊음이 느껴지는 처음 본 어머니의 가장 젊은 모습이었다.(하필 사진을 찍으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누나가 칭얼거리며 보채다가 울음을 터뜨리자, 어머니 특유의 “쯧 쯧 쯧”하면서 아기를 달래는 순간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이 사진을 찍기 5년 전인 1950년에 18살의 나이로 부친과 결혼했는데, 당시 부친은 아직 군에서 제대하기 전이어서, 왜소하고 가녀린 몸으로 시어머니인 할매(할머니)를 모시고 온갖 집안일을 다하다가 모처럼 이날 시간을 내어 이 놀이에 참석하였고, 그래서 이 사진 속에 일가 아지매들과 함께 그 모습을 남긴 것이다. (사진 뒷줄의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예쁘게 흰 이를 보이고 있는 처녀가 결혼 2년 전, 당시 꽃다운 18살의 막내 고모임) 사진에 찍힌 사람들 뒤쪽으로는 고향을 둘러싼 산줄기이자 우리 집 뒷산인 향계산 능선의 나무들과 ‘집뒤골’(=家後嶝 가후등 : 아마 종가집 뒤 등성이란 뜻인 듯)이란 골짜기와 우리 집 바로 뒷산 산줄기까지 선명하게 보였는데, 현재는 숲이 우거져 너무나 변해버린, 오래 잊고 살았던 고향 뒷산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까지 바로 그 고향산천이었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마을을 둘러싼 앞산인 성째산 자락의 ‘당미’란 곳으로 근처에는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노루밧골이란 곳으로 소풀 먹이러 다닐 때 자주 마시던 샘물이 있었는데,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흙 구멍 속에서 언제나 풍부한 수량의 물이 작은 시내처럼 흘러나왔다. 사진 오른 쪽 앞면에는 군위군에서 1등상으로 받았다는 한자글씨가 적혀 있는 징과 징채, 징을 기대 놓은 것은 곡식을 담는 말로 보이며, 오른 쪽 끝에는 일가 어른들이 주전자로 막걸리를 놋쇠 술잔에 따르고 마시는 광경이 보인다. 남자 어른들은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지금은 모두 별세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사진 속에 나오는 어린이 중에도 말로만 들었던, 한국 전쟁 직후라 포탄을 갖고 놀다가 사고로 죽었다던 일가의 형님뻘 되는 어린이를 포함하여 돌아가신 이들이 여럿 보였는데, 이들 또한 살아있으면 이미 일흔을 전후한 나이일 것이다. 여자 어른들과 어린이 가운데 아직 생존해 있는 분들이 많은데, 아지매로 불렀던 일가 아주머니들은 어린 시절에 본 바로 그 모습들이었다. 사진에 적혀 있는 ‘화전’이란 ‘꽃지짐’이란 뜻으로 화전놀이를 줄인 말이다. 화전놀이는 봄에 경치가 좋은 곳에서 부녀자들이 시집살이의 굴레를 벗어나 꽃잎을 따서 전을 부쳐 먹으며 노는 놀이를 말하는 데, 이 놀이는 통상 삼월 삼짇날, 즉 음력 3월 3일에 하였다. 사진을 찍은 이 장소는 모처럼 여인들이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된 공간인 셈이다. 이번에 화전놀이에 대해 부친께 물어보는 과정에서 이 화전놀이를 고유어로는 ‘꽃달임’이라고도 한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전쟁 후의 참화와 삭막한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봄날 하루 동안 이런 화전놀이를 즐겼다는 것이 특이하다. 사진 하단에 적힌 날짜는 양력으로, 음력으로는 3월 20일이다.(그 해에는 윤3월이 있었음) 장소와 방향으로 보아 사진을 찍은 시점은 화전놀이가 끝난 직후인 오후 1~2시 사이로 추정되고, 검은 천을 뒤집어 쓴 사진 기사가 뷰 카메라의 렌즈를 길게 앞으로 내밀고 유리 원판에 유제(AgCl 염화은)를 묻혀서 카메라에 끼우고 사진을 찍을 준비를 마친 뒤, “하나, 두울, 셋” 구령에 맞추어, 맨 오른쪽 새 신랑(천호양반)에게 도회풍의 세련된 헤어스타일과 조끼를 갖추어 입은 ‘삼만 할배(청년의 모습임)’가 막걸리 주전자를 기울이고, ‘천호양반’은 새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채 검은색 라이방(선글라스 생산 회사인 ‘레이밴RAYBAN’의 일본식 발음) 선글라스를 폼 나게 쓰고 어른들 중 유일하게 카메라를 90도로 외면하고 앉아서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술을 마시려는 모습에서 절로 웃음이 나오게 된다. 순간 사진 기사의 손은 이 멋진 포즈를 놓칠세라 고무공 같은 스위치를 눌렀고, 자칫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말았을 1955년 을미년 군위군 효령면 잣골( =성동)의 성주 도씨들의 화전놀이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선암 아재가 챙을 약간 뒤집어서 쓴 모자는 바로 뒤에 서있는 보이 아재(오동 아재의 동생)의 군인 모자이고, 연호아재(=점태 아재)가 쓴 모자는 아마도 세련된 도시 사나이 삼만 할배의 중절모인 것 같다. 이 사진이 나온 지 어언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직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점에서도 고향에는 사람들이 살았고, 그만큼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실만으로도 자식된 자로서 무한한 감회에 젖게 만든다. 이러한 사진은 문화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갖는다. 가족의 구성형태까지 달라지고 급기야 하루가 다르게 점점 무연(無緣)사회가 되어가는 지금과 달리 공동체 사회에 가까울 정도로 지역 특유의 문화가 지속되던 시기를 이 사진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통해 아름다운 봄날의 한 순간을 즐기는 우리나라 특유의 전통적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사진은 누구나 봄날에 핀 꽃 같은 젊은 시절이 있으며, 그 시절에는 다가올 미래에 어떤 희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사진에서 우리 삶의 바탕인 시공(時空)과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이날 한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의 운명을 바꾼 문명과 문화의 급격한 변화 속에 고향을 떠나 어느 봄날에 분분히 흩날리는 꽃잎처럼, 푸른 하늘 한 점 구름처럼 흩어졌다. 이처럼 사진 속의 현존과 현실 속 부재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삶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 때문에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한순간 한 순간 더욱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즉 아름답게 살고자 한다. 부조리한 우리 삶의 실존의 양상들을 자각할 때 미학적 가치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2013. 4. 25)
144 no image 송은미술대상전과 최선의 최근 작업을 보고
도병훈
4900 2013-02-19
송은미술대상전과 최선의 최근 작업을 보고 1. 2013년 2월 2일, 청담동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제12회 송은미술대상전을 보았다. 이 전시회의 최종 수상자로 선정된 4명의 작가는 백정기, 윤보현, 하태범, 최선이다. 이번 전시회를 보러 가게 된 까닭은 선정된 작가 중 대상작가인 최선의 작업에 대해 1회전 개인전부터 유골을 전시장 바닥에 흩뿌린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도발적인 작업에 대한 글을 쓴 인연과, 이번에 전시한 작품 중 특히 흰 그림(돼지 그림) 실물작품에 대해 전시하기 전에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 공모전은 심사의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사회적 지명도를 가진 작가나 비평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된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의 안목과 미학적 틀, 즉 관점에 의해서 공모작들의 우열이 가려지고 수상여부가 결정된다. 서구에서는 근대 미술의 패러다임이 사실상 해체된 19세기말 이후 예술의 자명성과 미술을 객관적 척도로 평가할 수 있는 미학적 틀이 해체되는 징후를 드러내었으며, 이어 급격하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는데, 특히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의 등장이 그 단적인 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전위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담론에 의해 다양한 양상의 현대미술이 형성될 수 있었다. 기성의 미학을 회의하며 배반하는 자들에 의해 역설적으로 현대미술의 가치가 확장된 것이다. 물론 지각 있는 작가라면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청년 작가들이 공모전에 출품하는 이유는 관전에서부터 민간 언론기관 등에서 열어온 공모전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신춘문예 같은 등단 코스처럼 일시에 지명도를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고 , 또한 최근 우리 미술계의 상품성 있는 작가 위주 독식 현상으로 인해 전시 기회를 갖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번 최선의 수상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송은미술대상전 같은 경우는 다른 공모전에 비해 비교적 참신한 방식(온라인 포트폴리오 예선심사와 본선 실물작품 심사로 하면서도 심사위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달리 해서 심사하고 집계한다거나 작가의 출품과정에 대한 배려와 성의 있는 협조 등을 말함)으로 심사가 이루어지고, 대상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일정기간 전시회를 열어줄 뿐만 아니라 개인전까지 개최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진화된 공모전 형태를 보여준다. 2. 전시장에서 먼저 본 백정기의 <Is of : Mt. Seorak in Autumn>이라는 현상작업들은 잉크 대신 작가가 설악산에 가서 수집한 다양한 색상의 단풍잎으로부터 추출한 천연색소로 인쇄한 설악산의 가을 풍경과 이러한 결과를 도출한 프로세스를 마치 화학 실험실처럼 다룬 프로젝트이다. 작품 이미지는 얼핏 보면 일반 잉크로 출력된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전시장 공간에 중소기업 공장처럼 가득 채운, 단풍잎으로부터 색소를 추출하기 위해 작가가 직접 구성한 분쇄기와 농축기 등의 기자재 장비들을 통해 벽에 걸려 있는 설악산의 가을 풍경이 실제 현장의 단풍잎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재현 대상과 이미지의 물질적인 동질성이 이 작품의 핵심 콘셉트인 셈이지만, 이처럼 기술적 장비의 공간적 점유로 이미지와 물질의 관계를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태범의 작업은 자연 재해나 전쟁, 테러 등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의 보도 이미지들을 순백에 가까운 무채색 사진 이미지로 재현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실제 보도사진의 모습 그대로 모형을 제작하여 사진 촬영하는 ‘Actuality’ 접근과 실제를 바탕으로 하되 자신의 주관적인 사고를 개입하여 모형에 반영해 작업하는 ‘Imagination’ 접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의 모형들은 현장 잔해의 디테일까지도 재현하지만, 사건 현장의 현실감을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제거해버리고 이를 백색 및 회색의 무채색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번 전시에 선 보인 <White> 시리즈는 정치적 분쟁과 테러 이미지를 다룬 작업으로, 보도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소비하는 현대인의 시선과 냉소적인 감성을 담았다고 한다. 별도의 공간에 삼차원적으로 설치한 그의 영상 작업<Playing War Games>은 도시로 설정한 바닥 공간에 사각 건물의 도시가 하나 둘씩 생겨나고 건물 모형이 하나씩 나타나면서 이내 소음과 함께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1990년대 초반 한 밤중에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바그다드 시가 폭격장면을 재현한 듯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뉴스시간마다 재현된 실제사건이 무슨 시뮬레이션에 의한 가상현실처럼 보였던 당시의 폭격장면이 연상되었다. 당시 이 시가공습에 대해 한 기자는 ‘미국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를 일백 배 확대한 것 같다’고 말했고, 미 ABC TV의 앵커는 ‘이것은 제멋대로 진행되는 쇼’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실제의 참혹한 현실조차 ‘쇼’로 보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현장의 참혹한 광경을 백색의 순결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역설적인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태범의 <White> 시리즈 작업을 보는 순간 일본의 여행 작가 후지와라 신야가 3.11 대지진 때 일본 동북부의 재해현장을 푸른 달빛에 젖은 장면으로 찍은 <월야>라는 사진이 생각났다. 그는 오른쪽 눈으로 사용하게 설계된 카메라로 굳이 시력이 약한 왼쪽 눈으로 사진을 찍는 데, 이러한 간단한 방식만으로도 그의 사진은 대상에 대한 리얼리티, 혹은 진정성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윤보현은 전시도록에 소개된 대로 유리 매체의 비가시적인 속성 즉, 투명함, 굴절, 왜곡과 같은 특성을 탐구하고 이를 가시화시키는 데에 관심을 갖는 작업을 보여준다. <Glass Helmet>은 유리를 인체에 착용하고 물과 유리의 상호작용을 다룬 작품이다. <Glass Tube>와 <Glass Trumpet> 역시 유리 속성을 다룬 것으로, 유리 두께와 크기 그리고 물, 불, 공기 압력 등의 외부 요인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듣게 하는 공감각적 작업이다. <Glass Tube>는 유리관 한 쪽에 있는 철망을 가열시켜 발생된 공기압력의 차로 인해 소리가 나는데, 서로 다른 모양의 관을 움직이는 일련의 자세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Glass Trumpet>은 일본 에도(江戶)시대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의 작품 <나팔을 부는 여자>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작품으로, 얇은 유리 표면이 수축과 팽창됨으로써 소리가 나는 옛 장난감을 재현했으며 무작위적인 소리와 이미지 굴절을 감상자에게 체험하게 한다. 이 모든 작품에는 스포트라이트가 투사됨으로써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굴곡과 기포와 같은 유리 특유의 속성들이 그림자를 통해 드러난다. 이처럼 윤보현은 ‘유리’라는 투명한 물질적 매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표현하는 데, 투명하면서도 깨지기 쉬운 특정 물질을 매개로 편집광적 표현을 추구하는 성향을 통해 이방인으로서의 소통에 대한 갈망과 이러한 심리적 트라우마를 보상하려는 듯한 작업으로 이해되었다. 최선은 지난 2004년에 개최된 1회 개인전부터 매우 파격적이고 참신한 작업을 해온 작가이다. 최선의 작업은 이번에 4점이 출품되었는데 두 점은 이전 작업이다. 다른 작가와 달리 모두 제각기 다른 재료와 형식으로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의 작업은 초기부터 일반적 통념과는 거리가 있는 비예술적인 착상에서 비롯된다. 기존의 물감 안료를 대신하는 재료, 예를 들어 산모들의 모유를 추출하여 캔버스에 바르는 작업 등, 미술의 통상적인 재료나 표현방식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이는 두 점의 <흰 그림>은 최근 이 땅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업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자홍색 족자>는 구제역으로 생매장된 350만 마리 돼지의 숫자를 도살할 때 돼지 엉덩이에 찍는 수성염료와 유사한 마젠타 색의 잉크로 출력한 작업이다. 거리를 두고 작품을 바라보면 ‘분홍색 평면회화’로 보이지만 근접해서 보면 4포인트 크기의 글씨와 숫자가 나열되어 있다. 전시장 가운데를 대각의 면으로 반분하듯 가로지르는 <흰 그림>은 매우 얇은 유산지 전체에 돼지 한 마리에서 추출한 기름이 칠해져 있어 관객과 작품 간의 간격과 관객의 수에 따라 주위 온도가 상승되면 기름이 녹아 공백으로 남게 되는 작품으로, 실제로 전시현장에 설치된 유산지 뒷면에다 손가락만 살짝 닿아도 기름이 손가락에 묻고 녹아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작품 또한 구제역 살처분과 생명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고 있다. 다른 한 점인 <불산 흰 그림>은 2012년 9월 구미 주변의 자연을 황폐화시킬 정도로 큰 피해를 주었던 구미 불산(불화수소산) 누출 사고 현장을 담은 작업이다. 불산 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한 구미의 한 숲 속에 가서 대기로부터 불산을 흰 천으로 채취한 무색무취의 회화 작업이다. 맹독성 불산 가스가 휩쓸고 간 재난의 현장에서 최선은 불화수소산을 흰 천으로 채취한 작업을 한 것이다. 불산의 위력은 단적으로 말해 피부 겉은 멀쩡한 데 그 안의 뼈는 녹아버리는 데서 그 끔찍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비가시적 무색무취의 화학물질이 우리의 세상과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시적으로 접하는 세상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자각하게 한다. 색에 대한 접근에 있어 <흰 그림>과 대조를 이루는 <가쁜 숨(검은 방)>은 전구 위에 실제 피를 바르고 이로 인해 전구가 비치는 방안이 붉은색을 띄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피가 검게 굳어짐에 따라 암흑의 방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과정 전반은 마치 별의 일생을 요약한 듯하기도 하고, 우리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방식은 극히 단순하다. 이번에 대상을 받은 최선의 작품들은 이른바 ‘공모전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공모전 스타일이란 간단히 말해 심사위원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준비된’ 포토폴리오를 바탕으로 기술적 완결성과 디스플레이의 세련성을 갖춘 작품을 말한다. 반면 최선의 작업은 이처럼 숙련된 기술 위주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반어적 작업이다. 게다가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듯 외국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거리가 있는 청담동에 그의 비예술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 일정 공간을 점유하는 역설적 광경은 토폴로지적 측면에서도 반어적 효과를 주었다. 3. 아무리 공모전이 진화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심사를 하고 선정을 하는 이상 특정한 관점에 의해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번 송은미술대상전을 보면서 신진작가를 새롭게 발굴하여 창작여건이나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형태로 공모전이 이루어진다면 그 순기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운영의 묘를 살린다면 작가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나아가 미술계에 기여하는 공모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시스템이 좋아도 그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한다면 역기능 또한 가능함을 의미한다. 하여튼 수상 여부와는 별개로 최선의 작품이 제시하는 감성적 넓이와 깊이, 또는 예술에 임하는 기본 태도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선은 수상 후, 전시에 앞서 나눈 대화중에서 ‘작품이라는 것은 관객에게 어떤 단서에 불과하다, 작품은 관객이 생각을 하고 느낌을 갖는 것에 도움을 주는 매개체’ 라는 필자의 말을 인상적으로 상기했다. 최선의 작품이 주는 체험의 강렬함과 임팩트가 어디서 오는가를 다각도로 반문해본다면 다른 수상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근원적 감성, 또는 문제의식임을 간파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이 갖는 두드러진 특색은 가장 비예술적인 날것으로부터 생명의 숨결과 같은 보이지 않은 세계의 리얼리티를 감성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다. 우리 삶에서 과연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철저히 고독한 성찰 없이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경탄할만한 테크닉을 구사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기 어려우며, 임팩트 있는 감동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L.H.O.O.Q>가 단적으로 시사하듯, 현대미술에서 표현방법은 매우 유동적이어서 때로는 가벼운 몸짓의 흔적만으로도 새로운 존재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감응을 유발하는 원초적 진정성이나 기존의 표현을 전복하는 강한 힘이 더 좋은 작업과 그렇지 않은 작업을 구분하게 한다. 따라서 작업에 있어 더욱 근원적인 문제는 좀 더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봄으로써 가능한 깊고 풍부한 감성이야말로 그 어떤 현란한 기술이나 가시적 볼거리보다도 선행 조건인 셈이다.(2013년 2월 15일)
143 no image 대승기신론과 삶의 이면 들여다보기
도병훈
5707 2013-01-08
대승기신론과 삶의 이면 들여다보기 1. 저기 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것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삶을 영위했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의 총합,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적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의 지도자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저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 살았던 것이다. 위 글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이 지난 1970년대 후반에 태양계 바깥으로 긴 여행을 떠난 보이저 1호가 1990년에 지구에서 12억km 떨어진 곳에서 보내온, 그야말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으로 지구가 보이는 사진을 보고 썼다는 글이다. 주1) 칼 세이건이 본 사진과 그가 쓴 이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새삼 인간의 욕망, 신념, 이데올로기 등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時空)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인생을 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보고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나아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인 페시미즘(pessimism)에 빠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인한 충돌과 갈등이 계속되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동아시아 한중일의 관계는 외교적 분쟁과 함께 각각 우경화 혹은 민족주의화 일변도의 악화일로로 치닫는 추세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세대, 계층, 지역별로 극심한 분열 현상을 드러냈다. 그리고 악성 댓글과 연관된 유명 연예인 가족의 도미노식 비극적 최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 등 이러한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복합적 진실이 있다. 지구촌의 여러 비극적 사태와 우리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갈등 현상이 악화되거나 비극적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그리고 현대예술의 과도한 자본주의적 존재 방식 같은 현실의 비현실성을 느낄 때마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알라야식(ālaya-vijñāna, 阿賴耶識)’과 연관된 ‘각(覺,깨달음)’과 ‘不覺(무명의 상태)’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 불교 관련 서적에서 알라야식에 대해 수 십 년 전부터 접해왔지만 번쇄한 말의 동어반복이 심했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이나 과학적 접근, 또는 철학적 성찰, 특히 뇌 과학을 만나고 실존적 삶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리고 연초에 일본의 불교철학자인 우매하라 다케시(梅原 猛)가 쓴「대승기신론-염세주의의 극복」이란 글을 읽으면서 알라야식에 대해, 그리고『대승기신론』을 해석한 원효(元曉, 617~686)사상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주2) 2. 알라야식은 유식학파에서 정세하게 논의되었다. 그중에서도 5세기경 인도 학승인 바수반두(世親)의 유식 사상은 인류의 철학적 사유에서 인간의 마음에 관해 가장 정밀하고 심오한 분석을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의식의 스펙트럼을 8가지 층으로 나누었다. 여덟 가지 의식이란 오식-시각적 지각(眼識), 청각적 지각(耳識), 후각적 지각(鼻識), 미각적 지각(舌識), 촉각적 지각(身識)-과 이들 5종 지각을 종합해서 다음 찰나에 하나의 개념지를 형성하는 판단적 인식으로서의 제6식인 의식(意識), 이어 제7식 마나스식(manas, 末那識)과 제8식 알라야식은 현행하는 마음의 심층의식을 말한다. 알라야는 범어로 ālaya로서 a는 ‘없다, 아니다’라는 부정사이고, laya는 ‘없어진다’는 뜻이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라야식은 모든 존재를 생기게 하는 힘이므로 한어로는 저장한다는 뜻이 담긴 ‘장식(藏識)’으로도 번역된다. 마치 씨와 나무의 관계를 매개하는 종자(種子)처럼 매개한다는 뜻에서 ‘일체종자식’, 또는 과거의 업에 의해 미래가 다른 형태로 성숙한다는 의미에서 이숙(異熟)이라 하는데, 이런 차원에서는 현대의 분자생물학이나 사회생물학의 기저인 유전자 DNA를 연상케 한다. 이 알라야식에 대해서는 7, 8세기의 주요 불교 경전들마다 언급할 정도로 논의가 분분하다. 이처럼 알라야식에 대한 탐구는 불교논리학인 인명학과 더불어 불교사상 중 가장 난해한 부분이지만 대승불교 사상의 대표적 불교 경전인『대승기신론』에 이르러 새로운 전환을 이루는 데, 이 때 큰 역할을 인물이 바로 신라의 원효이다. 원효의 알라야식에 대한 논의는 그의 저서 중 하나인『대승기신론 소·별기』에서 볼 수 있다.『대승기신론 소·별기』는 『대승기신론』에 대해, 원효가 이전 불교의 주요 사상은 물론 노·장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텍스트와 사상을 융합하여 종합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책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은 2세기경의 인도 사람인 아슈바고샤(Ashvaghosa, 馬鳴)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지만 원본이 전하지 않아, 책이 쓰여 진 시기나 책의 저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마명보다는 후대에 쓰여 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논서가 7세기 후반 이후 중국 불교는 물론 이후 동아시아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8세기 이후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까지 원효가 높이 평가되고 이유도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해석인『대승기신론 소·별기』가 8세기 초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법장(法藏,643~712)이 지은 『대승기신론의기』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 정도로 영향을 주고, 이후 동아시아 불교사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법장은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義湘과 더불어 지엄智儼에게서 화엄종의 교학을 사사하여 중국 화엄종 제3조로서 이 종파의 교리를 집대성한 인물이며, 신라에 귀국한 의상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원효의 저서를 접했다.) 『대승기신론』에 대한 뛰어난 해석은 당대 동아시아에서 세 가지가 꼽혔는데, 다음과 같다. 먼저 혜원(523-592)의 『대승기신론의소(大乘起信論義疏)』 4권이 있는데 약칭으로는 『정영소(淨影疏)』라 하며,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2권은 『해동소(海東疏)』, 법장의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5권은 『현수소(賢首疏)』라고 하며, 이들을 합하여 기신론 삼소(起信論三疏)라고 했다. 이 중 원효와 법장의 저서가 후대 동아시아 불교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원효는 이 논서에 대해 중국에 수용되기 직전에 형성된 인도 불교의 양대 큰 산맥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를 지양 · 융합한 관점에서 해석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어는 이문(二門), 즉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심진여문은 마음의 ‘자성청정’을 주로 말하는 중관 사상에서, 불각, 즉 깨닫지 못한 마음의 상태를 세밀하게 분석한 심생멸문은 유식학파에서 유래한다. 이 불각의 분석에 대해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무명업상(無明業相)에서 업계고상(業繫苦相)에 이르기까지 쉽게 비유한 일본의 불교철학자인 우매하라 다케시의 말을 빌려보자. 조용한 마음에, 한 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바람이 없는 연못과 같이 조용했던 마음이 갑자기 풍파가 일어난다. 움직인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무명업상). 그는 눈을 뜨고 지나간 여자를 보았다. 그렇다. 그의 마음은 여자를 보는 눈, 바로 그것이 되어버렸다. 바로 능견(能見)의 마음이 되었다(능견상). 그때, 여자는 그의 앞에 아름다운 자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진정한 여의 모습이었으나, 여자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그의 마음에 여자가 다시 분명하게 보였을 것이다(경계상). 그 이후 그의 마음속에는 그 여자의 모습이 산다. 여자를 그의 마음이 분명 의식한다. 그리고 애(愛)와 증(憎)이 그의 감정이 된다(지상). 그 마음은 어제부터 오늘로, 오늘부터 내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음은 그렇게 시간의 상속에 사로잡혀 이미 자유를 잃어버렸다(상속상). 그리고 여자에의 집착, 그의 마음은 날로 여자를 만나는 기쁨과 여와 헤어지는 괴로움에 사로잡힌 노예가 된다(집취상). 그 여자의 이름이 그에게는 이미 하나의 이도라(偶像)가 되는 것이다. 그 이름 밑에 그의 행복이 있는 것으로 환상(幻想)을 갖는다(계명자상). 그리고 이러한 이름의 이도라, 번뇌를 낳은 이도라에 사로잡혀 그는 광기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기업상). 그러한 광기에 가까운 행동의 결과로 그는 그야말로 무량의 고통을 받고 그의 마음은 영구히 부자유한 속에 놓이게 된다(업계고상).주3) 위의 비유는 프로이드 이래 심화된 현대의 심리학, 그 중에서도 현재 작동하는 우리의 욕망은 모두 과거의 금지의 흔적이며, 그래서 우리가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는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 1981)의 심리학을 연상케 한다. 원효는『대승기신론 소·별기』에서 근본무명이 진여, 즉 인간의 청정한 마음을 훈습하여 불심이 처음으로 일어난 무명업상과, 이로 인해 세계의 대상을 볼 수 있게 되는 전상(轉相), 또 이 전상에 의해 세계의 대상이 나타나게 되는 현상(現相) 등 이 세 가지 미세한 마음(三細)을 알라야식 위(位)에 해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이것이 원효의 삼세·알라야식설인데, 중국 당의 법장이 그대로 이어 받았으며, 이에 대해서는 현대에 와서 한 일 불교철학자들에 의한 찬반설이 있다) 이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의 제멸, 즉 내적인 동요가 사라지면 청정한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원효의 주장이었다. 『대승기신론』은 깨달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이 맑은 ‘지정(智淨)’과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을 한다는 ‘불사의업(不思議業)’ 두 가지로 보면서, 진여와 무명에 대한 비유를 바람(風)과 물(水)의 비유로 설명한다. 큰 바다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있을 때, 바람의 성(性)과 물의 성(性)은 일체이다. 만일 물이 움직이지 않으면 바람이 그치고 머물 데가 없어지면 움직임(파도)은 없어지나 물은 여전히 존재하고 물의 젖는 성질은 그대로이다. 如大海水, 因風波動, 水相風相不相捨離。而水非動性。 若風止滅, 動相則滅, 潛性不壞故。 이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다’라는 것은, 지금 움직이는 것이 자성(自性)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것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자성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움직이는 상이 없어질 때에 젖는 성질도 따라서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다른 것(바람)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상은 비록 없어지더라도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바람과 물로 비유한 『대승기신론』의 구절과 이에 대한 원효의 해석은 결국 바람과 물에 빗대어 욕망이나 유행에 휩쓸리는 마음(무명)과 청정한 마음(진여, 자성), 곧 깨달음의 세계를 기술한 것이다. 주4) 『대승기신론』과 원효에 의하면 깨달음과 거리가 먼 무명의 존재는 바다의 원래 모습을 망각하고 파도만을 바다로 보는 것과 같다. 원효는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바다가 고요하고 잔잔하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바다와 파도는 서로 나눌 수 없는 세계이다. 오히려 바다를 성질을 알 때 미풍에도 섬세하게 반응하는 물결 그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 『대승기신론』이 바다와 바람으로 깨달음과 무명의 세계를 비유한 것은 근원적 인간 마음이 동요하는 원인에 대한 무지, 즉 무명을 일깨우고자 함이었다. 『대승기신론』은 공이 갖는 허무적 니힐리즘과 아울러 알라야식의 분석에 머문 유식학파의 페시미즘을 탈각한 논지를 펼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염(染)과 정(淨)이, 또는 진(眞)과 속(俗)이 별개의 세계가 아님을 역설한다. 이런 차원에서 삶과 인식을 그릇되게 굴절시키는 무명은 무지가 아니라 번뇌와 환상을 깨닫지 못한 인간의 상태를 뜻한다. 『대승기신론』은 각(覺, 깨달음)과 불각의 여부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를 역설한 텍스트인 것이다. 여기서 염세적 측면이 강하던 인도불교는 인간이 지닌 불성을 긍정하는 현세적 동아시아 불교로 전환되며,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텍스트중 하나가 『대승기신론』이고, 나아가서는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 · 별기』인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십문화쟁론』에서 “유(有)를 부정하고 공(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에 다다름과 같다, 비유컨대 청(靑)과 남(藍)이 동체이고, 얼음과 물이 같은 원천이고, 거울이 만 가지 형태를 다 용납함과 같다”고 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융합하고 아우르는 화쟁 사상과, 특정한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부주열반(不住涅槃)’ 사상, 그리고 논리와 주관과 객관을 부정한 직관적 실천인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원효 사상의 주요 핵심인 것도 바로 이러한 해석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높은 파고(波高)로 출렁이는 한중일간의 갈등도 사실상 해결할 길이 없는 문제로 보인다. 국가 간의 영토나 종교 분쟁만큼 해결하기 힘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이면도 근본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문제이다. 이는 외교 정치적으로 해결을 모색하려는 시도보다 세 나라사람들 간의 감정적 대립의 격화로 치달으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는 사실로도 능히 알 수 있다. 실로 마음이 근본 문제이기 때문에 객관적 진실을 알기 어렵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 땅에서는 마치 한 마리의 동물을 가두고 집단으로 몽둥이 타작을 하듯, 뒤틀리고 왜곡된 심성의 한풀이로 개인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는 악성 댓글과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고 마는 일련의 사태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데, 이 문제도 그 이면에는 마음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신분석학에 ‘전위’와 ‘투사’란 용어가 있다. 유식학파나『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이러한 투사나 전위는 알라야식에 의해 일어난다. 인간이 과거에 발생한 금지된 것과 결핍을 채우기 위해 욕망하고 애착하는 존재인 것도 이 알라야식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전위'란 예컨대 아버지로부터 좋지 않은 경험이 있을 때, 그래서 그 마음의 상처가 무의식에 부정적 형태로 기억되어 있을 때, 학교나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해 적개심과 더불어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투사’란 어느 사람이 어떤 소속단체에 있을 때, 그 단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비난하는 것만으로 대처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모든 잘못을 남에게 또는 사회에 전가하여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자신의 불화를 남에게 '투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만 이해해도 우리 자신의 삶이나 어떤 사태를 좀 더 깊게 직시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과정을 드러내듯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맨 안의 파충류식 신경회로망들이 식욕과 색욕 등 본능적으로 현재를 대처하는 뇌라면, 그 위를 둘러싼 포유류식 뇌인 변연엽(limbic system)은 과거 기억 위주로 현재에 대처하는 뇌다.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부위인 신피질(neocortex)은 종합적 판단을 하는 영장류의 뇌다. 이러한 뇌의 다층적 특성은 우리 인간의 마음과 현실 대처 방식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며, 그 중에서도 변연엽은 불교의 논서들에서 깊게 탐구되었던 인간의 감각, 의식과 마음 등에 대해서도 새롭게 보는 관점을 열어준다. 3. 우주의 크기와 그에 따른 시간을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생은 '찰나'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이지만 세상은 모순과 불일치, 불합리, 카오스 그 자체이다. 우리의 세계는 보이지 않은 수많은 두꺼운 담벼락이 인간을 가두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도라든가 권력만을 나를 가두는 담벼락으로 생각한다.『대승기신론』은 이전 불교가 지닌 페시미즘적 요소를 극복하고자 한 새로운 사상이며, 원효가 이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남긴 것도 우리 인간 삶의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찾기 위해서였다. 지정학적 특성상 ‘타자에 의한 자기 상실’이 반복된 우리 역사에서 원효는 타자와의 적극적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형성한 큰 사상가였다. 순전히 나의 욕망으로만 알고 있었던 내적 욕망조차 타자의 욕망임을 불교의 유식학파나 현대 심리학에서는 역설한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인가? 라는 라캉의 의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급속하게 발달한 뇌 과학은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도 인간의 행동이나 삶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을 좀 더 깊고 넓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어떤 사태의 표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보다는 그러한 표층의 기저를 자각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우리의 현실과 세계를 좀 더 깊고 넓게 사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자신도 모르는 욕망과 신념의 노예로 살다가 심지어 주변에 피해만을 주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이 세계의 이면적 리얼리티를 직시하고자 하는 꿈꾸는 아름다운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좀 더 향기롭게 변하기 때문이다.(2013년 1월 8일) 주1) ‘여행자’라는 뜻을 가진 보이저 1호는 지금도 1초에 17Km 속도로 36년째 여행 중이며, 지난 2012년 12월 4일에 나사에서 태양계를 벗어나 새로운 우주영역인 성간 공간(interstellar space)의 '자기장 고속도로'라는 영역에 들어간 것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보이저 호에는 지구인의 메시지를 담은 골든 레코드가 담겨 있으며, 2025년경 교신이 끊어진 후에도 계속 여행하여 4만년 후 다른 별에 진입한다고 한다. 주2) 조규현 역, 우매하라 다케시(梅原 猛), 야나기타 세이잔(柳田聖山) 공저, 『무의 탐구, 중국선』(가쿠가와 문고, 1997년)에 나오는 글이다. 이 책은 조규현 선생님이 2012년 가을에 일본에서 구입한 것으로, 7, 8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중국불교의 핵심이 잘 정리된 책이다. 원효에 대해서 나는 지난 2003년에 「원효의 삶과 사상, 그 현대적 의미」를 썼으며, 수년 전부터 원효의 저서인『판비량론』과 현대예술에 대한 감응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주3) 조규현 역, 같은 책, p277. 주4) 은정희 역주, 원효 저,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1991, pp174~178 참조.
142 no image 2012 김성배 개인전 감상 소감
도병훈
5136 2012-10-29
2012 김성배 개인전 감상 소감 지난 10월 25일, 수원에 위치한 대안 공간 눈에서 김성배 개인전을 보았다. 늘 담대한 발상과 유유자적한 행보로 의표를 찌르는 설치 작업을 해온 김성배는 이번 개인전에서 드로잉 작업 위주의 전시회를 열었다. 가정집을 개조한 전시장으로 이제는 수원의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명소가 된 아담한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벽에 붙어 있는 히말라야 카일라스 산을 그린 큰 그림을 보았다. 넉넉한 한지를 바탕으로 작업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거나 생성된 물감 자국에 이르기까지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어 지금까지 본 그의 히말라야를 대상으로 한 그림 중에서는 가장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 하단 부분에 비닐로 가려놓은 부분은 그림 속 그림으로 김성배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다층적 작업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가 이번 개인전에서 새롭게 시도한 주 작업은 18세기 후반 김득신(金得臣) 외 화원들이 1795년(정조19년)에 그린《화성능행도 8곡병(華城陵幸圖八曲屛)》을 모티브로 한 드로잉 이었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그의 그림들은 매우 신선하고 이색적인 드로잉 작업이었다. 지난 주 필자가 진품명품에 의뢰한 화산관 이명기의 <열녀서씨포죽도>가 바로 이 능행도를 그린 해인 1795년에 그린 그림이다. 18세기 후반의 조선시대는 조선 후기 문화예술의 전성기이며, 이후 조선 문화는 급속하게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큰 맥락 속에서 21세기 초를 살며, 다시 약속이나 한 듯 동시대 조선 문화에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보게 된 셈이다. 《화성능행도 8곡병》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삼성 리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작년에 삼성 리움에서 기획한 큰 전시회인 조선화원대전에서도 단연 이 그림들이 가장 감동적인 작품으로 와 닿았던 인연이 있다. 《화성능행도 8곡병》은 정조가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에 걸쳐 수원화성 행궁으로 행차하는 장면과 주요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제1폭은 화성의 문성왕묘에서 치러진 알성의(謁聖儀)를 그린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이며, 이어 지역유생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 합격자 발표 광경을 그린 <낙남헌방방도(落南軒放榜圖)>,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거행된 진찬례를 그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수원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그린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화성 성곽의 가장 높은 곳인 서장대에서 밤에 군사를 조련하는 장면을 그린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행궁에서 활쏘기를 하고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기는 장면을 그린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환궁하는 장면을 그린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노량진에 설치된 배로 만든 다리 위로 한강을 건너는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가 있다. 이들 그림 중 <한강주교환어도>와 <환어행렬도>는 수 백명의 행렬을 그린 것으로 고공에서 내려다 본 듯, 스케일이 장대하면서도 매우 치밀한 묘사가 압권이다. 이들 그림들은 특히 시점과 구성과 색채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스케일을 가진 대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콘텍스트를 모른다하더라도 김성배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김성배는 크고 두꺼운 한지 위에다 능행도에 나오는 대상, 구도, 색채를 근거로 하되, 매우 자유분방한 필치의 드로잉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그림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장대야조도>를 모티브로 한 그림은 역원근법적 시각과 지도를 합성한 듯한 특징을 핵심으로 포착하면서도 분방한 필치로 표현하여 새로운 느낌으로 와 닿는다. 이처럼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김성배의 그림은 새로운 현대드로잉으로 다가온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특별히 개인적인 주관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김성배의 이번 그림들이 흥미로운 것은 자연과 문명이, 동(東)과 서(西)가, 그리고 ‘과거(古)’와 ‘현재(今)’가 어떻게 종횡무진 상통할 수 있는지,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시선은 무엇인지,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서로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관계로 성립하는 지, 한 폭의 평면적 그림 속에 다차원적 ∙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은 어떤 양식이나 기법에 구애됨이 없이 거침이 없는데, 이러한 표현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초등학교 시절 세잔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그의 순수한 열정은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그림에서도 역력히 표출되며, 그의 이번 그림들은 이처럼 순수하고 소박한 작가적 태도의 흔적을 보여준다. 개인이 아닌 역사와 문명 속에서 예술을 보는 그의 스케일 큰 행보는 그림에서도 대상이나 표현 방식에 전혀 속박되지 않은 태도와 특성으로 표출된다. 무엇보다 김성배의 이번 드로잉은 그림이라는 2차원적이고 아날로그적인 표현도 그 상상력의 폭이 넓거나 복합적이고 순수한 열정이 깃들어 있으면 얼마든지 흥미로우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2년 10월 28일 도병훈
141 no image <열녀서씨포죽도>의 사연과 화폭의 단면
도병훈
5261 2012-10-24
<열녀서씨포죽도>의 사연과 화폭의 단면 <열녀서씨포죽도>는 지난 10월 21일 방영된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서 고가의 감정가가 책정되어 화제가 된 그림이다. 이처럼 엄청난 가격에 주변사람들은 놀라면서 그림의 내력과 특성에 대해 궁금해 한다. 수 백 년에 걸친 역사적 배경이 있는 데다, TV화면에서 보여준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그려지기까지에는 여러 문헌적 배경이 있으며, 그림 역시 다채롭고 복합적인 특성이 있다. 이 그림의 역사적 지층은 다음과 같다. 세종대왕 때 경북 군위에 살았던 도운봉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분이 대나무를 좋아했으나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로 죽는다. 그래서 부인인 서씨가 17년간이나 뒤뜰 대 숲에서 슬퍼하자, 어느 날 홀연히 대숲에서 흰 대나무가 자랐다. 이를 향당에서 경상도 감사에게 알리고, 다시 경상도 감사가 세종대왕에게 장계를 올리자, 왕이 <백죽도>를 그려 올리라 명한다. <백죽도>를 본 왕이 서씨에게 열녀의 증표인 정문 및 복호를 명한다. 이런 사연이 『세종실록 20년 7월 기해조(17일)』, 1482년(성종13년)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 1514년(중종9년)에 간행된『속삼강행실도』「열녀편」에 실리고, 이어 1617년(광해군9년)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도 실린다. 세종대왕이 내린 작첩이나 문서 및 사적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멸실된다. 이후 영조 2년인 1726년, 또는 그 이전에 문중에서 의뢰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포죽도가 낡아 정조 19년인 1795년에 당시 오늘의 경부 영천 지역에 찰방(현 우체국장)으로 재임하던 당대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에게 부탁해서 새롭게 그린 것이 바로 이번에 TV에 나온 <열녀서씨포죽도>인 것이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세종대왕께 진상된 <백죽도(모필화)>-> 중중 때 제작된 『속삼강행실도』의 <서씨포죽도(목판화)> -> 광해군 때 편찬된 『신증동국신삼강행실도』의 <서씨포죽도(원간본 목판화, 중간본 목판화)> -> <옛 포죽도(모필화)> -> 정조 때 그린 <열녀서씨포죽도(이명기 중모작, 모필화)> 순이다. 이들 그림 중에서 세종대왕께 진상된 <백죽도>와 18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옛 포죽도>는 남아 있지 않다. <옛 포죽도>는 1726년(영조 2년)에 써서 이 그림 뒷면에 붙인「포죽도 후서」만이 부친이 소장한 옛 전적(*『정부인달성서씨 사적』이며 필사본임)에 남아 있다. 이 후서에 따라 <열녀서씨 포죽도>의 그림 오른 쪽 상단에는 <옛 포죽도>를 그린 년도를 ‘숭정후(崇禎後) 병오중춘(丙午仲春), 즉 1726년 봄으로 써 놓았다. 그러나「포죽도 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새로 그렸다는 얘기가 없고, 유도(遺圖), 즉 ‘남아 있는 그림’이란 용어를 쓴 것으로 보아 이전에 그린 것으로도 보인다. 다만 <열녀서씨 포죽도>의 화풍, 그 중에서도 먼 산을 그린 방식은 겸재 정선(1676~1759)이후 흔히 구사되는 기법이어서 열녀서씨 포죽도가 이전 그림을 충실하게 묘사했다면 겸재의 생몰연대 상 <옛 포죽도>를 그린 상한년도도 18세초로 추정된다. 사실 겸재 정선이 고향 군위에서 가까운 대구 인근의 하양에서 1721년부터 1726년까지 하양현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영남의 풍토상 화가가 존재할 수 없는 여건이므로 <옛 포죽도>가 겸재 정선의 그림일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겸재 정선 특유의 활달하고 시원한 필치는 청하현감 시절인 1733년 이후 그림에서 볼 수 있음) 어떠한 정신적 의미와 가치도 회화에서는 물적 대상으로 표현된다. <열녀서씨포죽도>의 전체 외형은 족자축에서 족자끈인 가는 생명주 실까지 조선시대 족자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어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도 이와 동일한 형태의 족자를 본적이 없다. 족자 크기는 141.5×69.4 cm, 그림 크기는 72. 6×51.9cm(*그림 윗부분 글씨가 쓰여 있는 부분을 포함한 작품지는 90.0×59.0cm 크기임)로 옛 그림으로는 상당한 크기의 대작이다. 일견 소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족자 자체도 요즘의 일본식 족자와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족자는 흔히 보는 비단이 아니라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쪽물을 들인 종이에다 사방연속 卍자 문양의 목각판으로 더 짙은 색의 문양이 화려하지 않게 찍혀 있다. 요즘은 이러한 장식이나 족자를 만드는 것을 ‘표구’라 하지만 조선시대는 ‘장황(裝潢)’이라 했다. 그래서 장황법에 따라 족자가 제작되었는데, 부분마다 세부명칭이 있다. 그림 위아래는 윗단(天頭)과 아랫단(地脚), 양 옆은 가욋단, 아랫단의 화면을 균일하게 당겨주는 역할을 하는 목축은 족자축이라 한다. 윗단의 단면이 세모형인 나무는 반달(上杆)이라 부른다. 이 족자 그림은 말아 놓은 상태에서는 작고 가벼운 원통형이어서 관리 및 휴대하기도 용이하지만, 위에서 펼치는 순간부터 눈부시게 맑은 날의 깊고 그윽한 가을하늘빛 쪽물을 들인 종이 위에 만자 문양을 찍은 바탕을 배경으로 옅은 황색 바탕의 그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열녀서씨포죽도>는 이명기가 이전 그림을 중모(重摹), 즉 다시 그린 그림이지만 그의 필력이나 채색의 기량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전통회화의 특성 때문에 이런 그림은 창작된 그림과 마찬가지로 인정된다. 이 그림은 수묵화의 농담, 색의 짙고 옅음의 차이를 원용하여 3차원적 공간감을 구현하고 있다. 이 그림의 두드러진 특색은 전경의 집 뒤 느티나무와 살구나무로 추정되는 나뭇잎에서 볼 수 있는 채색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기운생동의 필력을 자유자재로 리듬감 있는 필치로 구사하는 능숙한 필력과 함께, 한 폭의 훌륭한 채색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채색은 매우 맑고 고우면서도 천연안료이기 때문에 은은하게 깊은 맛이 있다. 또한 화면에서 부각되는 부분의 배경을 이루는 여백 부분에 옅은 색채를 반복해서 칠한 바림 기법도 이 그림의 특색이다. <열녀서씨포죽도>는 전체적으로 채색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런 필력이 결합된 그림이다. 무덤 앞의 소나무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필력은 이 부분만 따로 보면 한 폭의 탈속한 문인화 필치인양 자연스런 필법과 묵법을 구사한다. 요즘의 전통회화나 서예를 보면 종이도 그렇고 흔히 먹색이 너무 탁하고 그 표면적 질감도 거친 경우가 많다. 반면에 훌륭한 전통 서예나 회화의 먹색을 보면 아무리 짙어도 탁하지 않으며, 윤기가 느껴질 정도로 맑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농담, 즉 짙고 옅음이 그대로 드러나 그림을 그린이나 글쓴이의 숨결이나 힘이 그대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주된 이유는 먹의 질도 차이가 있겠지만 역시 바탕인 종이 재질의 차이가 크다. 조선시대의 고급한지나 장지는 요즘의 한지처럼 거칠거나, 화선지처럼 먹이 잘 번지는 종이가 아니다. <열녀서씨포죽도>에 쓰인 최고급 한지의 경우는 마치 코팅한 것처럼 표면이 반질반질해서 먹이 번지지 않으며, 이러한 종이의 반발력에 의해 붓이 더욱 탄력적으로 구사되고 농담처리도 매우 맑으면서도 다양한 것이다. <열녀서씨포죽도>는 매우 단아한 기품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면서도 마치 역사 속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듯, 흡인력이 강한 그림이다. 그래서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면 르네 마그리트 그림과 유사한 초현실주의 그림 같다. 특히 전경·후경의 실경 속에 조릿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뒷모습만 보이는 서씨가 붙잡고 있는 흰 대나무, 즉 백죽이 보이는 데, 백죽을 마치 흰 뼈대처럼, 댓잎 부분을 흰 그늘의 환영(幻影)처럼 묘사하고, 게다가 집 안의 ‘대지팡이(苴仗)’에 돋아난 댓잎까지 묘하게 융합되어 있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듯한 느낌을 준다. 예술의 세계는 기록된 문헌 넘어 또 다른 지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열녀서씨포죽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우리는 현시대와는 크게 다른 전통적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땅에서 살고 있다. 다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자산을 잊고 사는 것이다. 전통회화는 단지 한 시대 한 작가의 개성의 표현이기보다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세(人間世)를 보는 또 다른 창이자, 세계를 드러내는 독자적 방식이다. 근(近)과 원(遠)도,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도 우리의 익숙한 시각과 상이하다. 이러한 전통회화의 특색에 대해 주목하면 우리의 풍토와 문화적 특성에 대해 더 넓고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또한 여러 지층을 간직한 한 폭의 그림은 오탁악세(五濁惡世)를 정화하는 무한한 상상력과 영감의 대상이다. 2012년 10월 23일 도 병 훈 * 이 글은 졸고 「열녀서씨와 화산관 이명기의 그림세계」가 매우 학술적이고 긴 글이어서 <열녀서씨포죽도>에다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쓰되 그림의 특성에 더 주안점을 두고 쓴 것임. ** 10월 23일에 <열녀서씨포죽도>를 문중에 양도했다. 1996년 이래 두 번에 걸쳐 모사할 때, 그리고 이번 진품명품 프로그램 녹화로 인해 잠시 이 그림을 다시 보관하면서 그림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렇지만 이번 TV 방송에서 워낙 거금의 감정가가 매겨짐으로써 가정집에서는 보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문중회의를 거쳐 고향 인근에 위치한 안동국학원에 맡기게 되었다.
140 no image <열녀서씨 포죽도> 출품 소감(TV쇼 진품명품, KBS1TV, 10.21 11시)
도병훈
6270 2012-10-21
<열녀서씨포죽도> 출품 소감(TV쇼 진품명품, KBS1TV, 10.21. 11시) <TV쇼 진품명품(870회>에 고향 문중에서 소장 중인 <열녀서씨포죽도>란 옛 그림이 출품되었다. 이 그림은 조선 정조 때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 1756~ 1802년 이후)가 그린 것으로, 필자의 선대 할머니로서 조선 세종 때에 살았던 열녀 서씨의 이채로운 사연과 역사적 내력이 담겨 있는 그림이다. <열녀서씨포죽도>의 내력과 가치에 대한 종합적 고찰 후 책정된 감정가는 무려 10억으로, 1995년 진품명품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래, 회화로서는 역대 베스트 세 번째의 고가였다. 이러한 감정가가 곧 그림의 가치에 대한 객관적 척도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백 년 역사적 사연을 담고서도 시골 벽촌에서 별다른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 그림의 내력을 아는 나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다. 이 그림이 출품된 것은 지난 9월 초 필자의 고향인 경북 군위에서 진품명품 프로그램의 출장감정 녹화 때, 문중 어른이 <열녀서씨 포죽도>의 감정을 의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사 유물이 아님을 직감한 감정위원의 뜻에 따라 본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녹화하기로 방송국 측에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화폭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아, 진품명품 담당PD로부터 그림의 내력에 대한 질문과 함께 그림의 작가를 입증하는 증빙 자료인 『정부인 달성서씨 사적』을 직접 보고 싶다는 요청을 받고 필자가 제시했다. 이런 과정에서 필자가 결국 의뢰인으로 방송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의뢰된 그림이 진품임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정부인 달성서씨 사적』이란 소책자는 1950년에 공무 차 대구에 가신 부친께서 헌 책방에서 구입한 필사본이다. 이 책은 그 내용상 19세기 말 고향에서 필사된 책이 명백한데, 일제 강점기 무렵에 당시로서는 고향에서 먼 거리인 대구시로 헐값에 팔려나갔다가 헌 책방에서 다시 부친에게 발견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책에는 열녀 서씨를 주인공으로 해서 16세기에 살았던 인물의 글에서부터 18세기의 인물인 이명기의 글, 그리고 19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글까지 수백 년 간의 글이 담겨 있으나, 이 같은 내용은 이 책 이후 이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전적에 나오는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문중에도 전하지 않는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마을 일가 어른들 집 안에서 고서들이 선반 위에 쌓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나 주로 거의 매일 마을을 드나들었던 엿장수들에게 팔려나가고(*수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시골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어릴 때부터 <열녀서씨포죽도>에 대해 얘기를 들었지만 내가 실물을 처음 본 것은 1996년 추석 무렵이었다. 그 당시 이 그림에 대한 첫인상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종이의 표면이 현대의 최고급 종이처럼 반질반질할 정도로 매끈하고 색감도 현대의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듯 맑고 선명해서 처음 본 순간에는 진품이 맞을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대학시절 서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 때만 하더라도 전통회화는 흔히 보는 일반적인 한지나 화선지에나 그리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명기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존하는 그의 다른 그림을 직접 보거나, 관련된 자료를 찾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명기와 김홍도의 합작인 <서직수 상>이나 <강세황 초상>이 입증하듯, 이명기가 조선시대의 대표적 초상화가임에도, 이제까지 그를 다룬 선행 연구논문이 한 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고교 국사 교사인 동생이 1차로 번역한 부친 소장의 옛 전적과 2004년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강세황전 도록에 실린 강세황 초상 제작 과정을 기록한 글에서 밝혀진 이명기 관련 사실과 수 년 간의 이명기 그림의 감상 및 동시대 회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2004년에 <달성서씨 포죽도와 이명기의 그림세계>란 소논문을 써서 성주도씨 대종친회 회지 제19호(2004. 5. 23)에 실었다. 바로 이 글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열녀서씨 포죽도>에 대한 첫 발굴의 기록이자, 화산관 이명기의 회화세계를 다룬 국내 첫 논문이었다. <열녀서씨포죽도>는 1795년, 정조 19년에 당시 조선 제일의 초상화가로 인정받던 화산관 이명기가 정조의 어진을 그린 공로로 지금의 경북 영천 지방에 찰방(현 우체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고향의 문중 선조가 부탁해서 그리게 된 그림이다. 이번 방송에서 간략히 소개되었지만 이 그림의 역사적 배경은 조선 세종 때 선조의 이른 죽음을 슬퍼한 자리에서 ‘백죽’, 즉 흰 대나무가 자랐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시대가 희생을 강요해서 생겨난 다른 비정한 열녀 이야기와 달리 한 여인의 슬픔이 대나무란 상징적 나무를 통해 마침내 백색으로 승화된 사연의 메타포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그림이면서, 무엇보다 실물 오브제로까지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필자에게는 예술적 상상력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번 방송에서 <열녀서씨 포죽도>가 높이 평가된 이유는 조선 초 『세종실록』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오랜 역사적 배경과, 또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가인 화산관 이명기이며, 그리고 종이 지질면이나 채색 재료인 물감 등에서 당시 최고급품을 사용한 점, 그림의 바탕인 족자와 그림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점, 그림을 그린 년도(기년)와 장소가 분명한 점, 조선시대의 풍속 및 도덕을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 또한 조선 후기 그림의 높은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화격, 즉 그림의 예술적 가치 등 때문이다. 평소 주로 현대적인 드로잉 작업을 하고, 또한 서양미술사 및 현대미술 관련 글을 쓰거나 책의 저자로 활동해온 사람으로서,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번 방영을 전후하여 새삼스럽게 깊이 느낀 사실은 역시 관심과 발견, 그리고 기록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어떠한 문화적 가치와 의미가 성립하려면 아무리 가치 있는 원본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누군가 관심을 갖고 그 가치를 규명하고 드러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새로운 관점의 담론이 ‘구성’되는 것도 문화유산 및 예술적 가치를 규명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의 소산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방영을 계기로 드는 생각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이명기의 그림이 전칭 작을 포함하여 약 30여점이 현존하므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명기 특별전을 개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열녀서씨포죽도>를 국립박물관에 기탁해서 공적 활용가치를 가진 문화유산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2012년 10월 21일 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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