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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01:4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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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明은 人間을 幸福하게 했는가?

                             -.노아.하라리 著 [사피엔스]에서- 19

       과거 500년간 놀라운 혁명이 연이어 일어났었다. 지구는 생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단일한 영역에 통합되었다. 경제는 指數間數的으로 성장을 이루었고, 인류는 현재, 여태 옛이야기속에서만 있었던 정도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과학과 산업혁명의 덕택으로, 인류는 초인간적인 힘과 실질적으로 무한의 에너지를 손에 넣었다. 그 결과 사회, 사회질서는 근저에서 변용됬다. 정치나 일상생활, 인간심리도 마찬가지다.

            하나, 우리들은 이전보다 행복해 졌는가? 과거 5세기 사이에 인류가 축적한 풍요로움에, 우리들은 새로운 만족을 찾았던가. 무진장의 에너지자원의 발견은 우리들의 눈앞에서 끝없는 지복의 문을 열어 주었던가? 더욱 시간을 거슬려 올라가 인지혁명이후의 7만년 정도의 격동의 시대에, 세계는 보다 살기 쉬운 장소가 되었는가? 무풍의 달에 지금도 그때의 흔적을 남겨 놓은 닐.암스트롱은 3만년전의 쇼-배 동굴의 벽에 손 자국을 남겼던 무명의 수렵채집민보담 행복해 졌는가?

 만일 그렇다면 농경이나 도시, 서기, 화폐제도, 제국, 과학, 산업등의 발달에는 도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었던가?

           역사학자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일은 거이 없다. 우르크나 바빌론의 주민이 수렵채집생활을 하고 있었던 조상보다 보다 행복했었던가, 혹은 이스람교의 대두에 의해, 이집트인은 나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을 깊어젔었던가, 더욱이, 이프리카에서 유-럽의 제 제국의 붕괴가 무수한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주었던가, 라고 하는 문제는 제기하지 않는다. 허나 이것들은 역사에 관해 우리들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 현재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나 정책은 인간의 행복의 진정한 원천에 관한한 천박한 견해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다수다. 국민주의는, 우리들의 행복에는 정치적인 자결권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자는 프로레타리아의 독재 아래서만 만인이 행복해진다고 호소한다. 자본주의자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실현하여, 사람들을 자립과 진취의 정신을 가르키는 것으로, 자유시장만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 온다고 주장한다.

            본격적인 연구에 의해, 이러한 가정들이 번복된다면 어떻게 될까? 경제성장과 자립이 사람들의 행복을 증대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에는 어떤 이점이 있다는 것인가? 거대 제국의 피지배민쪽이 일반적으로 독립국가의 시민 보담 행복하고, 알제리아인이 독립 후 보담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가 행복했다는 사실이 판명된다면, 어떨까? 그것들은, 식민지해방의 진전이나 국민의 자결권의 의의에 관해,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이것들은 어느 쪽도 가상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은, 여태까지 역사학자는, 이런 문제에 답을 하는 것은 물론 문제를 제기하는 것 조차 피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나 사회, 경제, 사회적.문화적 성별(젠다-), 질병, 성행동, 식물, 의복등, 거이 대부분의 사태의 역사에 대해서 연구했지만, 여기서 한숨 돌리고 봄면, 그것들이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묻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장기간에 걸친 행복의 역사를 연구한 예는 그리 만치 않는데, 학자뿐만 아니고 일반인들은 대체로 행복의 역사에 관해서는 막연한 선입견을 품고 있다. 자주 있는 일로, 인류는 능력은 역사를 통해 최대의 길을 따라 왔다는 것이 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비참한 상황을 개선한다던지 원망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활용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당연히, 중세의 조상들 보담 행복하며, 또한 그들도 역시 석기시대의 수렵채집민보다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다.

             허나, 이 진보주의적인 견해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미 봐 왔듯이, 새로운 적성이나 행동양식이나 기능이 생활을 향상시킨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농업혁명으로 인류가 농경. 목축의 수법을 습득했을 때 주위의 환경을 정돈하고, 집단으로써 능력은 증대하였어나 많은 인간에게는 개인으로서의 운명은 보다 가혹해 젔다. 농민은 종류의 측면에서도 영양의 면에서도 열악한 식량으로 어떻게 살아 남기 위해 수렵채집민 이상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병에 걸린다던지 착취당한다던지 하는 위험이 각별하게 증대하였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제재국의 확대는 상상이나 테크노로지-, 작물을 확산시키고, 새로운 교역의 길을 개척함으로써 인류전체의 힘을 대폭적으로 증진시켰다. 허나 이것 역시 방대한 수의 아프리카인이나 아메리카원주민, -스트라리아의 아포리지니에게는 길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인간은 분명히 권력남용의 험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과연 길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인간은 분명히 권력남용의 기미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에너지를 증대하면 할수록 행복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익한 생각이다.

            진보주의의 관점에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의 일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 그들은 인간의 능려과 행복도는 반비례한다고 주장한다. 능력을 가진자는 부폐함으로 인류는 가지는 힘이 클스록 진정한 필요에는 등을 돌린다. 기계적이며 찬 세계를 구축해 왔다고, 라고 그들은 말한다. 진화는 우리들의 심신을 수렵채집생활에 적합하도록 모양 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쩨로, 농업으로, 다음에는 공업으로 이행한 결과로, 인간은 본래의 성향이나 본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그럼으로 더욱 극심한 흥분이나 순수한 기쁨에는 미치지 못한다. 새로운 발명을 할 때 마다 우리들은 에덴동산에서 한층 더 멀어져 가게 된것이다. 깊은 갈망을 채우지 못하는 부자연스려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도시의 중산계급의 쾨적한 생활의 경험으로 누구던지 수렵채집민의 생활집단이 만모스를 어렵게 잡았을때 느끼던 열광적인 흥분이나 순연한 기쁨에 미치지 못한다. 새로운 발명이 일어 날 때 마다 우리들은 에덴 동산과의 거리는 한층 더 크지는 것이다.

             허나 모-든 발명의 배후에서 불길한 그림자를 보게 되는 이 로망주의적인 주장은, 진보를 필연으로 삼는 신념과 같이 獨善的이다. 우리들은 안의 수렵채집민의 모습에서 떨어저 나갔으런지도 모르나,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례를 들면, 과거 2세기 동안, 근대의료에 의한 소아사망율은, 33퍼센터에서 5퍼센트미만으로 저하되었다. 이것이 의료가 없었다면 목숨이 사라젔을 아이들의 행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친구들의 행운에 크게 공헌했음에 의문을 던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中道를 가는 것이 이를 미묘하게 수정한 입장이다. 과학혁명까지, 갖는 힘과 행복에 명확한 상관관계는 없었다. 중세의 농민들은 실은, 수렵채집민의 조상보다 불행했을는지 모른다. 허나 이 수세기 동안 인류는 스스로의 능력을 현명하게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근대의료의 승리는 그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미증유의 공적으로써, 그 이외도 폭력의 격감이나 국가간의 전쟁의 사실상의 소멸, 대규묘의 기근이 거이 일소된 것을 들 수 있다.

            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단순화가 지나치다. 첫쩨, 이 설은 극히 짧은 기간을 대상으로 한 낙관적인 평가에 입각하고 있다. 인류의 대다수가 근대의료의 은혜를 입게 된것은 겨우 1850년이후의 일이며, 소아사망율의 급격한 저하는 20세기에 들어 와서의 현상이다. 대규묘의 기근도 20세기 중반까지의 일이며, 소아사망율의 급격한 저하는 20세기에 들어 와서의 일이다. 대규묘의 기근도, 20세기 중반까지이며, 소아사망율의 급격한 저하는 20세기에 들어 와서의 일이다. 1958-61년에 실시한 중국공산당에 의한 대약진정책의 기간에는 1000-5000만의 아사자가 나왔다. 국가간의 전쟁은, 1945년 이후에 와서 가까스로 드물어 젓던 것이며 이것이 헥병기에 의한 절멸이란 새로운 위헙에 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와 같이 인류에게는 과거 수십년은 전대미문의 활금기였어나, 이것이 역사의 추세의 발본적전환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일시적인 흐름이 역전된 행운의 탓인가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근대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쉽게 21세기의 서양중산계급의 시점에 서게 된다. 허나, 19세기의 웰즈의 탕광부나, 아편중독에 빠졌던 중국인, 더욱이, 다스마니아의 아포리지니의 시점을 잊으서는 안된다. 최후의 순혈의 다스마니아 선주민이 되었던 도르가니니는 아니메[심프슨]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서양중산계급의 부친 호-.심슨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두번쩨로, 과거 반세기의 잠간 동안의 황금기에서도, 실은 장래의 대참사의 씨를 뿌리고 있었음을, 멀지 않아서 분명해 질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 수삽년, 우리들은 새로운 다종다양한 모양으로 지구의 생태학적균형을 교란해 왔으며 이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 한정없는 과잉소비에 의해 우리들은 인류번영의 기반을 손상해 왔음을 나타내는 많은 증거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최후에 가서는, 근대의 사피엔스가 이루워 놓았던 위업에 대해서 우리들이 자랑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타의 모-든 동물들의 운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경우에만 한정된다. 질병이나 기근으로부터 우리들을 지켜주는 자만의 물질적 풍요로움의 대부분은 실험대에 놓인 원숭이나 젖소 벨트공베야-에 얹힌 병아리의 희생위에 구축되었던 것이다. 과거 2세기에 걸쳐서 이 지구라고 하는 혹성의 역사상 류예가 없는 잔인한 산업이용의 체제에, 기백억의 동물들이 종속되어 왔었다. 동물애호가의 주장의 불과 10분의 1이라도 인정한다면, 공업화된 근대농업은, 사상최악의 법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전체의 행복도를 평가함에 있어 상류개급이나 구라파인, 혹은 남성의 행복만을 계측재료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인류의 행복만을 고려한다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일 것이다.  이장 완료.  

            *옮긴이의 自評

             하라리는 그의 저서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에서 이상의 논조로 인류의 자기위주의 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태 인류문명을 거론함에 있어, 이런 폭 넚은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파라다임로 철저하게 분석해 낸 문명론은 접해 본 일이 없던 필자에게 매우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 온다. 현대문명의 실체와 그 향방을 이런 관점에서 철저히 분석해 내는 그의 문명론은 전혀 독창적이며 참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통합되어 가면서 요구되는 관점을 제시한 것으로 참고해야 할 담론이다. 그 저변에는, 동양적 사상과 정신을 다시 음미해야 할 것으로 내다 보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의 지구의 정체를 귀납 분석해 본다면, 전적으로 새로운 파라다임이 나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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