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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17: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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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가을, 북한산 백운대 등정 소감

 

 

1.

얼마 전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837m)에 다녀왔다. 대학 입학 후 서울에서 살게 되고, 군 생활도 북한산 자락에서 한 이후 최근까지 이 산의 여러 산행 코스를 다녔다. 어느 때는 산 벚꽃이 흩날리고, 어느 때는 진달래꽃을, 그리고 사계의 변화와 상관없이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굳센 기상의 소나무들은 언제 어디서나 북한산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더 높은 곳에서 북한산 전체를 조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에 비로소 정상인 백운대에 오른 것이다. 백운대 정상에 오르기까지 수 십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이 땅을 독자적 화풍으로 그린 진경산수화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을 본 이후 북한산은 언제나 하나의 화두였다. 겸재는 북한산 자락인 지금의 청와대 근처에서 살았고, 북한산의 한줄기인 인왕산을 중심으로 서울 특유의 산세를 사생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창안하고 완성했기 때문이다.

‘본다’는 문제를 화두로 삼은 세계적인 미술가로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전통회화와 동양의 두루마리 산수화를 깊이 탐색하여 공간과 풍경을 새롭게 보는 법을 평생 추구해왔다.

한자로도 본다는 것은 ‘시(視)’와 ‘견(見)’과 ‘관(觀)’으로 구분된다. 이번 백운대 등정이후 북한산에 대해, 그리고 현대의 등산과는 다른 옛 사람의 ‘입산(入山)’, 또는 ‘유산(遊山)’의 의미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옛 글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의불문聽而不聞)는 말이 있다. 한자를 보면 ‘시(視)’와 ‘견(見)’, 이어 ‘청(聽)’과 ‘문(聞)’의 글자가 다르다. 이 글은 문맥상 ‘시’가 아닌 ‘견’이, ‘청’이 아닌 ‘문’이 핵심이다.’ 요컨대 ‘시청(視聽)’이 아닌 ‘견문(見聞)’의 차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구절인데, 무엇보다 체험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단서로 다가온다.

 

2.

북한산 주1) 백운대에 오른 날은 유난히 청명한 가을날이자 한글날이었다. 약 12경에 집에서 출발하여 철산역으로부터 수유역과 우이동을 거쳐 도선사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도선사부터는 도보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 인수봉 밑을 지나 북한산장과 북한산성의 암문이 있는 곳을 이르자 거대한 암벽이 나타났다. 정상 쪽을 바라보자 흰색에 가까운 회색의 거대한 암벽 위로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오르거나 하산하는 모습을 까마득하게 쳐다봐야 할 정도였다. 바위에 최대한 몸을 붙인 채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올라가니 정상이 보였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선사에서 이곳 백운대 정상까지는 쉼 없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걸어 올랐으며, 약 1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금은 백운대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에 난간이나 구조물이 있어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아이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되었지만, 산 정상 부근이 거대하면서도 가파른 화강암 덩어리여서 마음이 약한 사람은 선뜻 내키지 않을 정도로 부담감을 갖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만약 난간이나 철책이 없다면 전문 클라이머나 오를 수 있는 난코스라는 것이다.

백운대 정상에서 보는 사방의 풍경은 다양한 준법이 있는 거대한 수묵화로 된 장대한 두루마리 화폭을 펼친 듯 매우 강렬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정상에 오르기 직전까지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랜 풍화작용이 빚은 다양한 변화를 역동적으로 집약한 공간 한 가운데에 내가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만경대(800m)와 인수봉(826m) 사이에 백운대가 우뚝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위치한 거대한 종 모양의 암봉인 인수봉의 거의 수직에 가까운 장대한 암벽에는 수 십 명의 클라이머들이 개미처럼 매달려 있었다. 암벽과 사람이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된 장면이어서 마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인수봉 뒤로도 능선들이 구비치는 데, 바로 도봉산 줄기의 연봉들인 오봉(660m), 주봉(675m), 자운봉(740m), 만장봉(718m), 선인봉(708m)이었다. 날씨가 좋아 그 밖으로도 사위는 그야말로 무시무종의 시공이었는데, 그 끝자락에 아파트와 집들이 장난감 집처럼 오밀조밀하게 보였다.

 

백운대 최정상은 겨우 10여명 정도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상 밑에는 다소 넓은 공간이 펼쳐져 정상에 이른 사람들이 그곳에서 잠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상 가운데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 울타리가 있었는데, 그 안 바위 표면 바닥에 새겨진 한자 글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3.1독립운동에 관한 것으로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었다. 주2)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 최초로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으며, 이들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17세기의 문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1603년에 북한산 노적봉 일대를 오른 후 쓴 기행문인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임진왜란 이전에는 백운대에도 사람들이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땅의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백운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주3)

 

북한산 기행문은 이덕무(李德懋)의 〈북한산기행 北漢山紀行〉과 조선 후기 정조대의 문인인 이옥(李鈺, 1760~1815)의 기행문이 알려져 있다. 이덕무(李德懋)의 북한산 기행에는 “이틀 밤을 자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북한산에 있는 열한 곳의 사찰”을 다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옥은 전통 고문(古文)을 기준으로 새로운 문체를 불순한 잡문체로 규정한 정조의 문체반정(1792년 10월)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은 정조에 의해 징벌을 받아 벼슬길을 포기하고 유배까지 가야 했다. 시대를 앞서간 죄였다. 그는 1793년(정조17) 김려 등과 함께 삼각산을 여행하고 <중흥유기>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세검정에서 출발하여 승가사→문수사→대성문→중흥사→용암봉→백운대→상운사→대서문을 두루 돌아보고 쓴 기행문 끝자락에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썼다. 주4)

 

어떤 이들은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섬기는 노장(老莊)적 태도로써 산림을 즐기지만 나는 다르네. 만고에 의연한 청산의 이법을 마음 안에 끌어들여 도의(道義)라는 심성을 기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 아니런가?

 

위의 글은 퇴계 이황(1501~1570)이 쓴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시인묵객들의 입산이란 인간 사회를 벗어나 ‘자연’이라는 또 다른 성리학의 세계로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고 그 속에서 성리학적 이치와 호연지기를 느끼며 심성을 수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거의 모든 기행문이 유산기(遊山記)로서, ‘유’자가 들어가는 참뜻을 되새기게 된다.

 

삶은 매순간 어느 공간에선가 시시각각 물리적 위치를 점유하는 과정이다. 나는 산에서 자연과 인간세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느껴왔다. 우리는 산에서 무엇인가 보고 접촉하고, 냄새 맡고 듣는다. 산은 조금의 경사만으로도 내 몸의 호흡이 달라지는 그런 구체적 장소이다.

신념에 갇힌 삶은 동어반복이지만 두 발로 경험하는 세상은 경험하는 순간마다 다르다. 그래서 발걸음마다 좀 더 이 세상을 새롭게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정서적 울림과 과학적 시선이 교차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산 속에서는 지평선과 같은 부재의 환영을 볼 수 없다. 산이란 때로는 입산, 즉 걸어 들어갈수록 따스하게 감싸 안은 어머니의 가슴이고 때로는 근접할 수 없이 차가운 시공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삶이 화폭이라면 우리는 퍼즐의 한 조각처럼 나의 경험으로 그 삶을 채워나간다. 그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은 경험의 소산이다. 나의 자발적 의지로 구성하는 새로운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하산 길에 수 년 전 도선사에서 감명 깊게 보았던 청담기념관을 다시 보기 위해 이곳을 다시 찾았지만 개관 시간이 지나 문이 닫혀 있었다. 대웅전 마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대입 수능을 앞둔 시점이어서인지 수직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라에 앉아 기도를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바로 아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 평생 정진했던 부처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차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곳 뿐 만 아니라 현재의 대다수 절들을 보면 옛 절이 지닌 소박한 아름다움은 점점 사라지고 요란하고 과도한 치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변화하는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욕망의 산물은 역시 일치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3.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산을 오른다. 누구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이고, 누군가는 근육을 키우는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으며, 극한의 체험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람마다 산에 오르는 이유는 다르고, 느끼는 바도 다르다. 남보다 좀 더 어려운 코스에 올랐다는 성취감이나 심신의 건강 증진 차원이라면 이곳이 아니라도 다른 장소가 많다.

어떤 장소나 공간은 그 장소만의 특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다. 자연미도 자연 그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낄 때 아름다운 것이다. 조상들의 자연관과 세계관, 현대의 물리학적 시공 개념, 그리고 개인적 감수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우리는 좀 더 온전하게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산천이 가진 지질학적 배경이나 지리학과 함께 인문학적 숨결까지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대상을 본다는 시(視)의 차원을 넘어 좀 더 종합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을 때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풀과 나무 그리고 옛사람들의 숨결과 발자취가 비로소 보이고, 산과 물, 즉 산수(山水)가 왜 전통 자연관의 핵심이면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짐을 알 수 있다. ‘시’에서 ‘견’으로, 견에서 ‘관(觀)’으로, 또는 거의 대다수 옛 기행문에 보이는 ‘노닌다’는 의미의 ‘유(遊)’, 나아가 이러한 약속된 기호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원에서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는가가 곧 삶의 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2013. 10. 11

도 병 훈

 

 

주1)백두대간 한북 정맥에 위치한 북한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북한산이란 지명은 옛날부터 썼으나 중국의 오악(五嶽)의 하나인 화산(華山)에 비유하여 화산이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 인물인 정도전은 ‘신도가(新都歌)’에서 “앞엔 한강수여 뒤엔 삼각산이여”라 했고, 병자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가던 김상헌도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회한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하고 읊조린 데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주로 삼각산이란 명칭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 중 이곳 백운대는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부아봉(負兒峰)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주2)비바람과 사람들의 발자취로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獨立宣言記事,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作成 京城府 淸進町,

六堂 崔南善也 庚寅生,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 萬歲導唱,

海州 首陽山人 鄭在鎔也 丙寅生

위 글을 한글로 옮기면,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10일에 경성부(서울) 청진정(청진동)의 경인생 육당 최남선이 썼고, 기미년 3월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 만세는 해주 수양산인 정재용이 선도했다”는 내용이다. 이글을 새긴 정재용(1886-1976)은 황해도 해주 의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독립운동가로 이러한 사연은 선생의 글씨를 새겼다는 조그만 안내판에서도 볼 수 있다. 위의 글이 새겨진 네 모퉁이에는 조금 더 큰 글씨체로“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로서는 이곳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나라를 잃어버린 시대를 사는 자로서의 간절한 염원으로 그 마음을 남겼음을 짐작하게 된다.

 

주3)우리의 선조들은 유람기행(遊覽紀行) 또는 관유기행(觀遊紀行) 이라 해서 명승지를 탐방하여 시문이나 그림으로 남겼다. 기행문 중 가장 오랜 작품으로는 고려말 임춘(林椿)의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여행기인〈동행기 東行記〉가 있다.

그 후 조선 후기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동유기 東遊記〉는 이십여 일에 걸친 본격적인 금강산 유람기로서 조선 후기 기행문의 표본으로 꼽힌다. 이외 기행문으로는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의 〈두류산기행 頭流山紀行〉과 조식(曺植)의 〈유두류록 遊頭流錄〉이 있다. 이외에도 정구(鄭逑)의 〈가야산기행 伽倻山紀行〉, 이황(李滉)의 〈유소백산록 遊小白山錄〉, 허목(許穆)의 〈범해록 泛海錄〉, 이상수(李象秀)의 〈유속리산기 遊俗離山記〉, 성대중(成大中)의 <유내연산기 遊內延山紀>, 박제가(朴齊家)의 〈묘향산소기 妙香山小記〉, 채제공(蔡濟恭)의 〈관악산기행 冠岳山紀行〉, 송상기(宋相琦)의 〈유계룡산기 遊鷄龍山記〉 등 수없이 많은 기행문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한문으로 지어진 작품들이지만 한글로 창작된 유람기행 작품도 있는데, 신대손(申大孫)의 아내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작으로 밝혀진 〈의유당관북유람일기 意幽堂關北遊覽日記〉중 〈동명일기 東溟日記〉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기행문을 남긴 사람 중 김창협은 율곡학파로서 조선 후기 문화예술의 학문적 토대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는 율곡 이이의 ‘기발이승(氣發理乘)설’을 계승하면서도 외부의 사물에 대한 경험의 느낌 즉 ‘마음’과 ‘기’를 중시하는 정(情)의 다양성으로 나아간다. 현실의 경험을 중시하는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그의 동생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장자의 사상을 수용하여 직접 탐승기행하면서 그 감흥을 노래하는 ‘기유紀遊문학’이 성행하게 된다. 이러한 기유문학은 그림으로도 이어졌으니,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이러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왔다.

 

주4)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북한산의 명소는 산영루(山影樓)라는 누각이었다. 이 누각은 현재 북한산 노적봉 아래에 계곡 위 너럭바위에 위치한 정자로 조선 숙종 이후 조재호·정약용·김정희·이덕무 등 수많은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반해 시를 남겼다. 이 산영루 누각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고 현재는 주춧돌 10개만 남아 있는데,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금년 중 완공 예정으로 현재 복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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