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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부터 9월 12일까지 수원에 위치한 대안공간 눈에서 열리는 "흰대나무 그림으로부터, 도병훈, 최선 2인전"을 준비하면서 쓴 글입니다.. 

 

 

   

한 그림에 담긴 사연으로부터 - ‘회화성’의 무한 지층과 예술의 가치

 

 

1.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촌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갈등과 비극적 사건, 그 중에서도 극단적 대립과 증오가 낳는 사건들은 삶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갖게 한다. 최근 이 땅의 정치·사회·문화적 국면들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아도르노(Theodor L. W. Adorno, 1903~1969)는 근현대 사회를 ‘동일화의 강제’로 ‘관리되는 사회’라고 규정하고 이 때문에 비인간화되고 야만화된다고 보면서,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인간적인 삶을 사는 유일한 해법으로 예술의 반성능력을 제시하였다. 최근에는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에 주목하여 현시대를 ‘피로사회’라고 규정한 철학자도 있다.

이런 관점들은 근현대사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가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준다. 물론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아도르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예술이 상품화되고 키치화하는 현상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20세기 후반기 이후 사회전반의 복잡성이 나날이 증대되고, 현대 테크놀로지로 인해 가속화된 속도는 공간에 바탕을 둔 체험 축소 현상을 나타내면서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실정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발적 모험으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예술의 힘과 존재이유를 더욱 절감하게 된다.

2.

작년 가을 고향 문중에 전해지는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가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일이 있다. 나는 지난 1996년에 <열녀서씨포죽도>를 처음 본 후 이 그림의 화가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1756~1802년 이후)의 그림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차례 글을 써 왔다.

<열녀서씨포죽도>의 주인공 서씨는 나의 17대조 할머니로,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시대 세종조 연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여인이다. 아직은 유교적 윤리질서가 형성되기 전인 조선초에 나의 17대조 할아버지가 후원에 대나무를 심고 완상하다가 천연두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자 서씨 부인이 수년간이나 매일 대나무를 붙잡고 울었더니 그 자리에 백죽(白竹), 즉 흰 대나무가 그 자리에 솟아났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은『세종실록』에까지 실리게 되어, 여러『속삼강행실도』로 간행되어 후대에 전해졌고, 정조시대에 이르러 문중 선조들이 당시 조선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이명기에게 의뢰하여 그린 그림이 <열녀서씨포죽도>이다.

 

시골 고향마을에 수백 년간 전해져 온 <열녀서씨포죽도>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푸른 쪽빛으로 물들인 종이 족자를 펼치자 매끈매끈한 한지 위에 유려한 필치로 구사한 조선 후기 회화를 볼 수 있었는데, 특유의 공간감, 맑고 투명한 색채, 화폭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나무의 위치와 구성, 준법과 채색의 미묘하고도 절묘한 균형감 등은 그 때까지 경험하고 배워왔던 서구의 근현대회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다가왔다.

 

고대부터의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이 입증하듯 특이한 사건에 의해 역사의 지층은 새롭게 형성된다. 그러나 역사는 언어나 예술적 표현을 통해 해석되거나 심화되며, 특히 감수성에 호소하는 예술적 표현에 의해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된다.

<열녀서씨포죽도>는 ‘조선’ 이라는 왕조시대의 이념과 상징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동양의 이러한 전통회화 속에는 시대적 이념성 이전에 자연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깃들어 있다. 우주를 간략히 표현하기 위해 산과 물을 소재로 삼은 전통 산수화 속에는 흔히 산 속을 소요하는 한 사람이나 하나의 정자, 그리고 강 위에 표류하는 작은 배가 있는데, 이는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사의 찰나적 삶과 무상함을 보여준다. 피상적으로 보면 중국이나 한국, 또는 시대와 상관없이 전통 산수화는 거의 동일한 이미지로 보이지만 화가의 감수성이나 필력에 따라 확연히 다른 세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전통회화의 가변성은 전통 문인화인 사군자 그림,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이 그린 묵죽(墨竹)화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대표적인 묵죽화가는 조선 중기에 살았던 이정(李霆, 1554~1626)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그의 <풍죽>은 간결하고 명료한 구도와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 정교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필치를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신위(申緯, 1769~1847) 등이 이전과 다른 묵죽화를 많이 그렸으며, 특히 신위는 필묵의 유희에 가까운 새로운 필치의 묵죽화를 남겼다.

이처럼 묵죽화도 시대에 따라 다른 특성을 지니는 데, 표현재료이자 바탕인 먹이나 종이나 비단(생명주)의 특성, 무엇보다 그리는 자의 감수성과 행위에 따라 전혀 다른 국면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가장 전형적인 전통회화인 묵죽화도 그 표현의 결과는 미리 계획될 수 없으며, 손, 신체, 눈, 재료, 그림의 표면, 마음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과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산수화의 기법인 적묵, 파묵 등의 묵법(墨法)과 몰골법과 같은 필법(筆法)의 명칭도 표현 행위와 표현재료인 물질성의 양태에 근거한다. 이러한 표현은 동양의 전통회화에도 주목하면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09~1992)의 그림을 해석한 질 들뢰즈(Gills Deleuze,1925~1995)의 ‘감각의 논리’를 빌리면, 대상의 시각적 재현이 아닌 형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의 포획’, 또는 ‘선의 운동학적 응축’이다. 이는 그리는 순간의 호흡이나 기세(氣勢)에 따라 유동적인 민감성을 지닌 과정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화폭은 깊은 감응의 공간으로 변모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인격과 인생을 바꿀 정도의 느낌과 사유를 촉발시킨다. 이런 예술의 특성은 동서고금의 많은 훌륭한 미술작품 및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오랜 전통적인 기법적 관습과 결별한 화가로는 마네를 꼽을 수 있다. 마네의 그림은 그 표면이 물질성을 숨기지 않고 즉흥적 거친 필치와 색채의 극적인 대비로 ‘그려져 있음’-질료의 양태 그 자체로 전적인 현실성을 갖는-에 주목하게 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 회화는 세잔에 이르러서 획기적 전환을 이루는데, 그가 망막에 와 닿는 빛과 색채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인상주의 너머 ‘사물의 피부’를 깨고 도달한 말년의 예술의 세계-<생트빅투아르 산>시리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경의 초록색과 후경의 머나먼 푸른 색 사이의 충만한 공간감-가 특히 그러하다.

한국의 현대미술가인 이동엽은 최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관된 방법론으로 그것도 흰색에 가까운 단색조로 ‘존재의 심연’을 추구한 화가이다. 그의 <상황>시리즈나 <사이>시리즈는 선(?)과 면(?)이 여백과 분리되지 않고 공존하는 방식으로 수행처럼 반복되는 옅은 붓질을 통해 무상성과 가변성이 느껴지는 미세한 변화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처럼 여러 시공간과 역사적 흐름과 지층 속에서 예술의 역능과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면, 기존의 관점을 극복하려는 자발적 의지로부터 형성되는 것이 미적, 예술적 가치임을 알 수 있다. 재능이나 천재성만으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의 특성과 이에 대한 감응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입증해왔다. 이러한 감응의 힘은 아도르노식으로 말하자면 온갖 지배 이념과 분석이 재단해버리는 삶에 대한 강한 반성능력의 근거이다.

 

나는 <열서서씨포죽도>에 그려진 주인공인 서씨 부인의 순정한 삶과 그로 인해 그려진 흰 대나무 그림을 보며, ‘나’라는 한 개인은 한정된 시간 속에 살지만 그 형성과정은 장구하므로 역사 속에 사는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전하지 않은 세종대의 <백죽도>에서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의 계보학적 변천과정과 함께 하얀 종이처럼, 흰 캔버스처럼 ‘순백’이 가지는 순수함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백색이 갖는 원초성은 고대의 신화라든가, 설산 숭배, 한국과 일본의 백산 신앙, 동식물의 백색 변이를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이는 인류의 원형무의식적 마음과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마음은 숫자 ‘0’, 혹은 불교의 ‘공(空)’이나 근원적인 빛에 비유할 수 있듯,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무한 감각의 세계와도 서로 통한다.

물질적 측면에서도 순백은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바탕이자 공간이 되므로, 흰 대나무는 다시 정결한 마음으로 새로운 그림을 펼쳐가는 근원적 모티브이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원초적 이미지이다.

 

이번에 출품한 나의 작품들은 옛 지도에 나타난 다층적 공간성과, 겸재나 추사의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유의 포괄성과 유연성 있는 힘의 리듬, 세잔 그림의 모순적 특성이나 현대물리학적 시공관에 주목하면서도 어디까지나 ‘그린다’는 작업과정으로써 어떤 잠재성을 지닌 양상을 표현하고자 한 이전 그림들의 맥락을 잇고 있다. <열녀서씨포죽도>는 능숙한 선묘(線描)와 함께 ‘맑은 기운이 감도는 담채와 청청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이러한 그림의 특성은 표면보다 이면의 층이 두텁다. 그 까닭은 힘의 강도와 리듬에 따라 형성되는 표현의 과정은 유동적이며 복합적인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가진 채로 버린다는 말이 있다. 전통으로부터 무엇인가 발견하되 과감한 비움과 도약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의 그림은 화폭이라는 흰 공간에 나의 의지인 자발성과 힘, 그리고 정신의 떨림과 옅고 짙은 푸른 색조의 물질로 이루어진다. 작업하는 동안 긴장감이 느껴지는 망설임과 설렘 속에서 먼 우주를 유영하듯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몸과 감수성, 그리고 물질의 상태가 상호작용하는 예측불가능의 과정이다. 비록 그 흔적은 물질의 얼룩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의지와 정신, 호흡 등이 결부되면서 지금/여기에서 재구성되는 일회적 그림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떠한 언어나 관념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낯선 영토, 또는 시공간을 대면하고 체험하고자 것으로, 지난 수 십 년간 지속적으로 ‘그리는’ 작업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3.

문명의 탄생 이래 미술은 오랫동안 종교적 신념이나 통치이념을 표상하는 수단이 되어왔다. 즉 동서를 막론하고 예술의 내용과 형식은 당대의 이념이나 관점의 틀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예술은 주제나 관습적 형식과는 다른 차원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으며, 지고한 이념미를 추구한 문인화도 예외는 아니다. 지조와 절개의 표상으로 묵죽화를 그렸지만 화가의 개성과 표현재료의 강도 및 기세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화폭이 되었다.

근현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러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모든 것을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근대적 합리화의 바탕인 사변이성의 확대로 심미적 감성의 축소를 야기하는 현상에 맞서 비합리성의 세계인 예술의 가치를 입증하거나 부각시켜왔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의 특성상 미적 성취는 언제나 대량복제와 시장의 필요에 따른 상품화로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현대예술은 점점 급진적이면서도 다양한 표현 양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흔히 현대예술에 대해 난해하다고 말하지만 통찰과 감성을 촉각적·시각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물질성, 풍토, 창작 순간의 여건 등 여러 복합적 요소를 고려한다면 그 가치와 의미를 느끼고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온갖 지배 이념과 분석이 재단하는 폭력적 삶, 또는 현대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준 문명의 이기에 중독되어 공간과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능력과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갖게 한다. 예술로부터 촉발된 감수성으로 역사와 현실을 다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시시각각의 순간에 더 충실한 능동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013.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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