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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8 (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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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래 <상황>시리즈와 <사이> 시리즈로 알려진 이동엽 선생이 지난 8월 16일 향년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이에 삼가 조의를 표하며 지난 2008년 선생의 학고재 전시회를 본 후 쓴 아래 글을 다시 싣습니다.




이동엽의 회화, 채움과 비움 ‘사이’에 대한 소고


                                                                
1.
  2008년 5월, 학고재에서 이동엽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의 그림은 1970년대 초반의 <컵> (*무상-상황)시리즈 작업에서부터 최근 작업인 <사이間>시리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거의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화면 가득히 ‘여백’이며, 텅 비어 고요하며, 맑은 물처럼 담백한 그의 작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흔히 ‘여백’은 이성을 중시하고 물질을 강조해온 서구 정신과는 대비되는 핵심어로 보며, 비어 있지만 기운으로 충만한 세계, 존재가 아닌 생성의 공간이라 말한다. 특히 대상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형사形似’보다 뜻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해온 전통 문인화에서 여백은 비가시적 세계를 함축한 심원한 ‘비움’의 공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여백’의 미학을 브랜드처럼 표방하는 현대작가도 있다.
  여백의 존재론적 본질은 ‘무’와 같은 극한의 화두이다. 이는 사유될 수도 명증될 수도 없는 실존적 자각의 문제이다. 이동엽은 수 십 년간 거의 일관된 방법론으로 화폭 가득 여백인 작업을 해왔다. 예술가의 작업은 실존적 경험에 기인하는 내재적 동기와 역사의 문맥 속에서 진정성이 드러난다. 거시적 관점에서 개인은 인드라망 속의 무아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역사적 경험의 진폭이 각각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이동엽의 그림에서 우리는 같은 시공 속에서도 저마다 다른 경험과 감수성으로 사는 존재임을, 무엇보다 비움으로 아득한 그의 화폭에서 철저히 삶과 대면하는 과정을 실감하게 된다.    

2.
  겉으로 보기에 극히 허허롭고 단순해서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동엽의 그림은 역설적인 화폭이다.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듯한 그림 저편에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사건과 얼룩진 상처(트라우마)와 당대의 풍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1) 최근 작업일기 서두에서도 작품의 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화했다고 믿는 인간의 영혼,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지금 어느 지점에 닿아 있는지,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는 테러, '성전'이라는 이름의 전쟁, 기아, 인간 의지로 극복하지 못한 이 모든 혼돈의 세계를 직시하며 동양의 우주적 자연관을 사유한다.

  해방 직후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그의 유년시절은 극심한 혼란기이자 궁핍한 시기였으며, 당시 세상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주2) 이런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이동엽은 부산 피난 시절 초등학교 입학 전에 동네 선배 아이들과 함께 태종대 앞에서 바다를 보며 자연, 그 중에서도 물의 아름다움을 강렬하게 느끼는 체험을 한다. 주3)
  그 후 이동엽은 서울 용산에서 살 무렵인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머물고 있던 지리산 동화골이란 곳에 가서 파란 이끼가 낀 자연 웅덩이 샘에서 맑은 샘이 솟는 것을 본다. 이 풍경은 당시 폐허 속의 서울과 대비되어 어린 소년의 눈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주4) 이는 곧 이 땅 특유의 맑은 자연의 풍광, 곧 눈부신 밝은 햇살 속에 드러난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주5)
  이동엽은 이후 아름다운 샘, 물에 대한 꿈을 계속 꿀 정도로 물 ․ 바다 ․ 그리고 근원적인 자연의 본 모습으로서 ‘무無’의 상태를 떠올리며 흰색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어린 시절 두 차례의 물과 관련한 체험이 훗날 생명성에 대한 관심과 <컵> 시리즈에서 물을 그린 직접적 계기가 된다.
  예술가의 남다른 유년시절 체험과 개인사는 삶과 예술을 특징짓는 원천이다. 화면 전면을 거의 백색으로 표현한 극단적 ‘간결성’을 보이는 이동엽의 작업도 어린 시절 체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어린 시절과 예술세계도 이런 유사성이 드러난다. 까뮈의 소설은 ‘태양과 침묵’의 언어이다. 그의 문체는 ‘한 없이 밝은 햇살 속의 고요함’을 드러낸다. 까뮈의 문체는 집 밖은 지중해의 태양이 빛나고 집 안은 우울한 침묵상태로부터 비롯된다. 까뮈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징집되어 전사했으며, 어머니가 가정부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던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유년시절의 체험을 반영하듯 까뮈의 문체는 ‘고요함’과 ‘간결함’으로 드러나며, 이는 삶과 세상에 대한 투철하고도 근원적인 응시의 소산이다. 비정하리만큼 간결하고 고요한 문체로 삶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을 담고자 한 것이다.

  이동엽 그림의 주된 특성인 극한적 간결함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는 H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하여 1학년 때부터 학교 실기수업시간에는 정물화나 모델을 그렸지만 혼자서는 당시 이미 사물이나 세계의 이면인 존재의 근원이나 ‘무’에 대해 생각하며 추상적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전에 겪은 삶의 어두운 터널이 백색을 찾는 근원적 이유가 되었는데, 당시 실기실에서 작업하던 중 캄캄한 밤에 불을 켜는 순간 어둠이 사라지더라는 체험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가 이미 환한 백색을 지향하였음을 방증한다. 그래서 점점 흰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그리다가, 덕수궁 옆 문화공보관에서 가진 졸업전 출품작은 완전한 백색 그림을 그려 다른 설치 작품과 함께 출품한다. 주6) 이때 그린 백색 회화는 ‘우주’적 시공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뫼비우스 띠 같은 모양을 원의 구조로 드로잉 하듯 그린 그림으로 형태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추상작업이었다.        
  이어 이동엽은 물 ․ 불 ․ 바람 같은 근원적 원소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래서 그는 대지 위에 큰 통나무가 불타거나 바람에 쓰러지는 장면으로 바람을 그리거나, 식물의 잎에 맺힌 물방울을 커다랗게 클로즈업해서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업 중 첫 페이지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 되면서도 동시에 한국현대미술사에서도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른바 ‘단색조 미술’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 <컵>시리즈이다.  
  <컵> 시리즈는 잡지광고에 실린 컵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컵에 채워지고 비워지는 물의 현상에서 자연의 질서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업 역시 어린 시절의 체험의 연장선에서 당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생각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는 이 작업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 내 나름대로는 문명에 대한 비판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동서 문명의 차이를 생각하고, 인간의 욕망의 포화로 서구 물질문명이 주도하는 것을 보며, 비워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환경문제도 생각했지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릴 때부터 민감했어요. 그래서 물질문명이 과도해지면서 세계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어요. <컵> 시리즈는 현대적인 오브제로서 발상과 구조를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 계곡이 아닌 컵으로 하게 되었지요.
또한 당시 ‘무상성無常性’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인문학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헤르만 헷세의 소설, 『나르시스와 골드문트』 속에, ‘흐르는 물속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것이 실상은 쇳조각이었다.’라는 구절, 또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 구절 중에 ‘왕이시여, 그대 발등에 입 맞추게 하는 영광을 주소서’(*작가는 이 구절의 왕을 자연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와 같은 범신론적 구절에서, 고정된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주7)

  컵 그림도 처음에는 극사실로 그리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대상을 한정짓는다는 생각이 들어 점차 지우면서 그리다보니 마침내 윤곽선만 남게 된다. 이 컵 그림들은 100호 정도 크기였다. 이 무렵 글을 읽거나 전시회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과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을 발견하기도 한다. 주8)
  이 그림들 중 하나가 1972년 8월에 개최된 제1회《앙데팡당》전에서 ‘평면 일석’으로 선정되어, 이동엽은 1974년《칸 국제 회화제》에 허황, 하종현과 함께 참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일본 동경화랑 대표가 당시 일본의 유명 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와 함께 내한하여 그의 그림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동경화랑에서《한국 5인의 작가 -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개최된다. 이 전시회가 당시 한국 화단에서 백색 그림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면서 70년대 후반까지 이른바 단색조 미술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주9)  

  그의 작업은 점차 구체적 형태마저 사라진 현재의 <사이>시리즈 작업으로 변모하는데, 이는 세계가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회의로부터 비롯되며, 미세한 것에 더 본질적인 우주가 있다는 생각을 담고자 한 것이었다. 주10) 그래서 최소한의 구체적 형상도 배제하고 간략한 선의 형태로 그어지는 찰나에 주목한다. 바로 여기서 그의 작업에 드러나는 백색 위주의 표면적 이미지는 단지 물질적 질료가 아니며, 따라서 그의 그림은 백색 그 자체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흰 바탕은 대안공간이며 색 이상의 색이며, 안료는 그러한 세계를 은유하는 데, 작가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11)

나는 백색의 화면을 빌어 ‘의자연’의 세계를 제시한다. 백은 존재의 근원적 지대로서, 단순히 물질적 공간이나 눈에 보이는 가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정신의 대지이며 자연이다. 또한 흰 공간은 의식의 여백이며 현상의 빈터, 즉 '무의 지대'이다.
모든 존재 현상은 빛과 어둠, 혼돈과 질서, 충만과 공허, 음과 양의 양면성을 지니며 이것은 우주의 순환과 균형, 생명의 본질이다. '밝음이요 빛'인 흰 공간, 그곳은 존재의 대지 또는 존재의 출처로서 생명의 바다이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세계의 근원으로부터 발생하는 형태의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순환의 고리, 자연의 숨결과 진동을, 그 생명적 공간과 시간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태, 그것은 무상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우주 속에 육화하는 물질과 행위의 일체화 즉 합일의 세계를 이루고자 함이며 그것은 자연의 의지로서 그 순환의 원리에 밀착하는 인간정신, 의지이다.

  위의 말에서도 나타나듯, 이동엽 그림의 이면에는 ‘실체적 물질성’을 넘어선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으며, 서구의 현대과학이 도달한 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물질과 사상을 분리하여 존재를 입증하는 구체적 자료를 중시하던 서구의 근대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물질의 집합체였으며,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근대의 과학자들은 그 물질의 근원(소립자)을 파악하기 위해 쪼개고 또 쪼개었다.
1961년 미국의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이 의심을 품기 전까지는 돌턴의 원자 가설이 기반이 되어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라 생각했다. 1964년 머리 갤만은 ‘쿼크’라는 더 작은 단위를 제시하며, 이것이 내부구조가 없는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입자라고 생각했다. 주12) 1996년 페르미 연구소에서는 연구 발표를 통해 쿼크도 내부 구조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수세기에 걸친 연구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은 실체적 개체가 아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작용(전환성)으로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게 된다.
  이 같은 서구 현대물리학의 물질의 근원에 대한 이진법적 결론은 이진법이 바탕인 동양의 ‘주역周易’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주역』「계사상전」제11장)는 구절이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만물의 근원을 역에서 태동한 태극으로 보았는데, 여기에서 양의, 즉 음양이 생성되며, 음양이 다시 서로 교합하여 사상을 낳는다고 생각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만물의 이치를 ‘음陰’이 항상 음이 아니고 ‘양陽’이 항상 양이 아니며, 별도로 존재하지도 않고 서로 교합하여 서로 돕기도(상생)하고 해치기도 하고(상극)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 실험과 수학적 증명 과정을 거치지 못했을 뿐, 소립자의 두 가지 특성인 개체성과 전환성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양의적인 동시에 융합적이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논리마저 초월하려는 측면은 한국 전통사상의 두드러진 특성이며, 원효의 ‘화쟁’ 사상, 의상의 ‘화엄’사상, 최제우의 불연기연不然其然 ;긍정과 부정을 아우르는 말임)사상, 김지하 시인의 ‘흰 그늘’ 미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주13)

  이 중 원효는 마음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국면을 각각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으로 보았으며, 생멸문에서 마음이 진리와 같아지는 가능성과 마음이 진리를 등지는 가능성을 동시에 논한다. 생멸문에서 두 가지 가능성이 구체화되는 통로가 바로 시각·본각 및 불각이다. 원효는 시각·본각에는 실체적 자성이 없다고 보았으며,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열반과 생사'·‘진眞과 속俗’ 그 어느 것도 소유적 머뭄住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이처럼 본각은 주관과 객관의 그 어떤 대상적 경험境界도 실체로 보지 않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의 힘(반야의 자성)을 지녔기에, 자신의 행위와 관련된 주·객관의 경험에 대해 소유 및 집착하지 않고 '하나로 같아진 차원一如'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은 ‘생겨남生’과 ‘사라짐滅’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분리를 할 수 없다. 이런 차원을 원효는 일심一心, 또는 진여문이라 한다.  
  원효에 의하면 ‘일심’이란 이미 둘로 분별할 것이 없으니, 하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라고도 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인지 반문하며, 이와 같은 도리는 언어적 범주를 벗어나고 모든 것을 이원적·실체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지라서  ‘한 마음一心’이라 지칭한다는 것이다. 원효는『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有’를 싫어하고 공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에 이르려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청靑’과 ‘쪽藍이 같고, 얼음과 물이 같은 원천이고, 거울이 만 가지 형태를 다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같음’과 ‘다름’도 마찬가지이며, 동일 속에 차이가 내포되고 차이 속에 동일이 포함된다. 원효의 화쟁론으로 본다면 이동엽의 회화는 삶과 죽음(존재와 비존재, 생生과 멸滅), 성스러움과 속됨, 진실과 허위 등의 분별과 분리가 근원에서 해체되어 그들이 '둘 아님'으로 만나는 동시에, 일심을 지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상이나 미학은 의미와 해석의 틀이지만 원효 사상을 포함한 우리 전통사상은 또한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하나의 화폭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세계는 언어적 의미와 해석보다 더욱 근본적이며 미묘한 차원이다. 특히 이동엽 그림은 붓 선이 배어들거나 바탕이 드러나는 작업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이동엽의 그림은 매우 예민하고 정치精緻한 작업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흰 공간에 붓질을 한다. 화면과 상을 하나의 몸으로 의식하기 위해 나는 늘 흰 바탕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긋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동양화를 그릴 때 쓰는 넓은 평 붓을 사용한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바탕과 같은 흰색을 칠하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붓질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붓과 물감이 화면에 젖어들고 흰 화면과 이어진 일체의 선으로서의 붓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 붓의 한쪽 끝은 짙은 색으로 안쪽은 엷은 색으로, 흰 바탕과 물려 있도록 톤을 조절하여 그린다. 최근에는 하나의 붓 선을 그어 내린 다음 붓을 뒤집어 생체의 골격처럼 대칭으로 맞대어 나란히, 또는 수평선을 이루는 좌우대칭으로 긋는다.
나의 붓질은 유연성 있는 물감이 바탕에 잦아들고 섞이면서 모필에 의한 미세한 변화를 촉발한다. 붓 자국과 붓 자국은 서로 맞닿아 상호 교화하고 의지하면서 미묘하게 발생한다. 즉 화면에서 촉발되는 우연성과 나의 의지에 의해 적절한 교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꽤 까다롭다. 수직으로 긋는 의지가 작용하지만 붓이 맞닿아 물감이 서로 섞이면서 미세하게 변화해 가는 톤은 우연과 자연(습도 등 기후)의 반응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물物의 정신화'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물질감을 가능한 한 제거하며 생경한 붓의 필세와 물감의 양을 줄이면서 붓질을 반복한다. 마치 소의 되새김질처럼. 그리하여 ‘물物’과 정신이 만나 서로 화학반응이라도 하듯, 붓 선은 자신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상승하듯이 공간으로부터 투명해지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고 흰 공간에 하나의 획을 긋는다. 나와 세계를 일체화하고 공명의 공간을 형성, 하나의 생명(공간적 신체)을 부여한다. 사라지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순환의 고리, 존재의 무상성을 드러내는 붓질로 자연계의 공명적 구조를 열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나와 세계, 그리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정신적 차원을 드러내며, 바로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혼돈의 세계를 직시’하면서도 굳건히 한 길을 걸어온 그의 회화의 진정한 힘이다. 그는 변화무쌍한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왔고 또한 살고 있는 것이다.    


3.
  무절제와 과잉생산에 기초한 스펙터클 문화는 현대생활의 기본조건이다. 무엇보다 온갖 갈등과 그럴듯한 술수가 넘치는 지금의 세상은 더욱 삶과 예술의 가치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갖게 한다. 이런 현실상황과 이동엽의 작업은 극히 대조적이다. 무엇인가 끊임없이 무화시키려는 듯한 행위와 물질이 어우러진 그의 그림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염세적 니힐리즘으로 볼 수 없다. 그의 그림은 결코 백색 일변도의 현실과 무관한 그림이 아니며, 오히려 시대적 혼미상황에 의연히 맞서려는 일관된 정신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이동엽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눈부신 가을햇살을 느낄 수도, 순백의 백설 천지, 나아가 온갖 세상사의 부질없음도, 궁극엔 이 모든 풍경을 넘어선 어떤 정신적 차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그의 화폭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도 화가의 주관도 사라진 공간이다. 하지만 빛이나 백색이라는 표면적 이미지나 물질적 환원주의 시각에서 이동엽의 그림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갈등과 혼돈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의지, 즉 건강한 몸과 정신을 회복하려는 지향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정신의 전개 과정으로 보면 그의 회화는 어느 순간부터 더욱 맑고 담백한 세계로 환하게 빛난다. 결국 현실의 온갖 혼돈을 직시하는 대극에서 더욱 정갈하고 의연한 정신성이 아득히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 이것이 이동엽 회화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2008, 7, 29)

* 이 글은 2008년 『미술과 담론』 26호에 실렸으며, 2012년 8월에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함.
                                      

주1) 평탄치 않은 남다른 삶을 산 작가들 중 극단적 비움의 작업을 보여주는 예로 팔대산인이나 마크 로드코, 윤형근의 그림을 꼽을 수 있다.
주2)그의 고향은 전북 정읍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 갓 태어났을 때 백일 된 아이보다 컸다고 해요. 그건 어머니가 공포 속에서 임신 중독이 되어, 영양실조 상태에서 뱃속에서 부어서 나왔기 때문이었어요. 태어나서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어요. 당시 피난 생활이란 누가 누굴 도와 줄 상황이 아니었으며.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지요.”(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3) 초등학교 입학을 하기 전에 동네 큰 아이를 따라 바다에 갔지만, 너무 어린 나이여서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들의 신발을 지키며 바다를 바라보았다고 했다.(2008년 7월 9일 작가와 전화 통화 중에서)  
주4) 자신의 그림이 세상 건너편이자, 반대편인 것도 이러한 체험과 상관이 있다고 했다.      (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5) 19세기 말이나 20세 중반까지 한국에 온 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상 중 밝은 햇살 속에 뚜렷한 풍광을 꼽았다. 일제강점기 때 추사를 연구한 학자인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로서 수 년 전 추사관련 유물 수 만 점을 과천시에 기증한 일본인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은 햇빛이 찬란하여 나무하나 풀 한포기까지 선명하고 하늘의 깊은 푸른 색紺碧은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서재의 창을 열면 유난히 높은 준령이 눈에 잡히고 그 담홍의 아름다운 화강암은 하늘에 빛나서 무척 선명하였습니다.”      
주6) 당시 하종현 지도교수가 이동엽의 졸업 작품을 보고 장 포트리에의 작업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설치 작업은 거울 위에다 여행 중 배낭에서 주워왔던 자갈을 예수의 가시 면류관 형상의 둥근 가시철망 속에 놓은 작업이었다. 자갈이 자연 그 자체라면 가시철망은 인간의 권력이나 폭력을 상징하는 작업으로 인간에 의해 생명이 억압된 문제를 제기한 작업이었다.(2008년 7월 9일 작가와의 전화 통화중에서)
주7) 7월 9일 작가와의 전화 통화 중에서.
주8)작가는 군입대중 어떤 불교 서적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고 한다. 한 청년이 고향의 절에서 여승의 딸을 만나 가까이 지내다, 같이 서울 유학 가서 사귀었는데, 어느 날 그 딸이 학교에 보이지 않아 고향의 절에 갔더니 그 딸이 여승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딸이 하는 말이, ‘물이 얼면 얼음이니 얼음이 물이로다.’ 라는 말했다는 것이다. 이동엽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자신이 하던  작업과 일맥상통함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어떤 선시 선화 전을 보러 갔다가, ‘참의 물은 맛도 냄새도 없다.’는 구절을 보고 자신에 작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9) 작업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 작가와의 대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8월에 개최된 제1회《앙데팡당》전에 내가 평면 1석으로 뽑혔어요. 당시 나는 이 전시회가 나이, 학력을 불문하고 모든 작품을 심사 없이 전시한다는 요강을 보고 작품을 출품했어요. 당시 이우환 선생이 단독심사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곧바로 9월에 군대에 갔으며, 조카가 군대로 와서 작가로 선정되었으니 작업론을 써야 한다고 해서, 군대 훈련소 참호에서 그것을 썼지요. 그 글의 내용은 물리화학에 대한 얘기와 노장사상의 영향도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앙데팡당》전에서 처음에는 《파리 비엔날레》대표로 선정한 것이지만, 《파리 비엔날레》전이 설치 위주여서 결국 《칸 국제 회화제》에 나와 차석을 한 허황, 그리고 하종현 선생이 참가하게 되었지요.
1973년에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명동화랑 주인 김문호씨가 ‘일본 동경화랑에서 야마모토 사장과 나카하라 유스케란 평론가가 오며, 니 작품 보러 온다.’고 해요. 그래도 설마 나부터 찾겠나 싶어 며칠 있다가 연락을 했더니, 김문호씨가 노발대발하면서 ‘당신 어디 있느냐?’ 하면서, 그들이 오자마자 나를 찾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마모토와 나카하라 유스케,  가화실로 왔는데, 이일 선생도 동행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이 나의 작품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집이 망해서 재료도 시원찮고 캔버스 상태도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물감도 보내주겠다, 캔버스도 보내주겠다, 동경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 이게 갓 대학을 졸업하고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제대하면 초청장 보내주겠다, 이런 사실들이 당시 『주간한국』이란 잡지에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 차범근과 함께 소개되었어요. 그들은《한국 5인의 작가 - 다섯 가지의 흰색》전을 열기로 하고 한국작가들을 탐방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박서보 선생의 제자라면 이 5인전에 같이 나란히 참가할 수 없었죠. 그래서 1975년에 제대할 때《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을 하게 되었지요.  
그전에 국내에서의 전시는《3+1》전인가 했지요. 그리고 1974년에 명동화랑에서《조형과 반조형》전을 했는데, 김창렬 박서보 윤명로가 조형전 대표로, 이건용, 이강소, 심문섭, 이동엽이 반조형전 맴버로 전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1975년에《한국-5인의 작가 - 다섯 가지 흰색》전도 하게 되었지요...(중략)
야마모토는 나를 ‘고뿌(컵의 일본 발음임)의 리’로 불렀어요. 당시 동경화랑은 일본의 일급화랑이었으며, 그때 나는 모노하를 몰랐어요, 미술 잡지에서 세키네 작품을 한 두 번 본 정도였지요. 1977년 동경화랑이 한국미술 단면전을 기획, 센츄럴 미술관에서 한국작가들을 초청했지요. 그 때 모노하 작가들을 봤는데, 세키네는 사람이 골격이 크고 인상이 힘세 보였어요, 스가이는 핸섬하게 보였고...(중략)
당시 동경화랑은 일개 화랑이 아니었어요. 그 위상이 대단했지요. 야마모토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가를 탐색했으며, 그가 파리에 나타나면 파라 화랑가가 술렁거렸다고 해요.
그러므로 70년대 단색조 미술의 등장에 대해 동경화랑 1개 화랑의 취향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당시 동경화랑이 차지하는 위상이 대단했어도 그렇지만 문화정치학적 시각에서만 보는 건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나는 그런 혐의를 부정합니다, 막말로 화랑은 그림 장사꾼인데, 왜 문화정치학의 논리로 접근하지요? 문화를 지배하기 위해 문화정치학 정략적 차원에서? 그렇지 않아요. 그 혐의는 모노하를 그대로 모방한 ‘AG’에 국한되는 일이지요. (2008년 5월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70년대 단색조 미술의 확산 과정에 대해서는『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Ⅲ(Vol.1)』,, ICAS, 2003, 310-312쪽을 참조할 것.
주10)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중 세계의 현상을 공간적으로 설명한 부분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즉 ‘가는 티끌 하나 속에 시방세계 들어 있고’라는 말이 나온다.
주11) 작가도 자신의 그림은 흰색이 아니라고 말했다. “단색조를 나는 자연색으로 생각해...  바래진 것 같은...” 《3+1》전 때 이일 선생이 물어보더라구... “그래서 나의  흰색은 무한한 것을 뜻한다, 평면이 아닌 공간이다”, 이렇게 말했더니 이일 선생의 표정이 이상하더라구...  이일 선생은 내 그림이 평면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내 그림 속 흰색은 자연 색, 갱지 빛깔이지요. 모노크롬도 아니고 단색도 아닙니다.(2008년 5얼 14일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주12) 당시 그는 up, doun, strange라는 세 쿼크의 존재만을 말했다.
주13)김지하의 미학은 '흰 그늘'이란 말로 요약된다. 흰 그늘이란 모순된 언어로 분열돼 있으면서도 하나로 융합된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는 단군신화나 고주몽 설화, 칼 융의 그림자론, 그리고 동학사상을 통해 ‘흰 그늘’의 미학을 말하는데, 이는 주역에서부터 계승된 원리이자 동학의‘불연기연(아니다 기다)’, 원효의‘비연사연 ’등을 계승한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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