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제목 조회 등록일
1302 no image 최선의 DMZ 보존책은 '국제평화공원'
11939 2015-07-09
최선의 DMZ 보존책은 ‘국제평화공원’ 세계적 환경기자 앨런 와이즈먼 “北에 경제적 이익 큼을 알려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는 가장 아름다우면서, 군대가 대치하는 가장 무서운 곳이지요. 여기에서 (국제멸종위기종인) 두루미 11마리를 봤을 때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컨벤션센터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주제로 열린 ‘세계리더스포럼’에 참석한 앨런 와이즈먼(Weisman)은 8일 본지 인터뷰에서 ‘DMZ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 만들어낸 자연의 보고’라고 했다. 그는 ‘인간 없는 세상’ ‘인구 쇼크’ 등 세계적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하다. 평생을 프리랜서 환경전문가로 일해 온 그는 한국 DMZ와 채르노빌 방사능 유출사고 현장 등 세계 각지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 현안과 지구의 미래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개발업자들의 손길이 미치면서 DMZ가 훼손될 겁니다. 두루미를 비롯해 아시아흑곰, 담비, 고라니 같은 다양한 종이 사는 DMZ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는 DMZ를 국제평화공원으로 만들어 보존하면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지도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와이즈만은 “북한은 자연, 생태계 보존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니, 남한이 DMZ를 보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라는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 면서 “커피나 무를 야생 열대우림 가까이 심어 한 해 6만달러어치 생산량을 늘린 코스타리카에서 보듯 야생 보존이 더 많은 [경제적]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했다. 통일에 대한 조언도 나왔다. 그는 “내일 당장 통일된다면, 남한은 북한을 상대로 ‘(낙후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한다’ 고 주문할 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를 물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려면 ‘인구감소’가 필수라는 색다른 주장도 폈다. “22세기가 되면 인구 100억멍 시대가 옵니다. 이 인구가 먹을 시량을 생산하려면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탄소 배출량은 더 늘고, 생물종의 다양성은 더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귀포=김정환 기자
1301 no image "서해 경기만 10억평 매립(2)"
1539 2015-07-09
서해 경기만 10억평 매립(2) (조선일보 2015.7.8 “조선경제” 일면. 유하룡기자) 경기만 매립해 기가시티 만들자 “경부운하 건설해 나온 준설토 사용하면 돼” 총개발 기간은 30년으로 잡았다. 향후 5년간 국민적 합의와 타당성 연구를 거친 뒤 2021년부터 2050년까지 단계적으로 개발하자는 것이다. 공사비는 총 90조원이 필요하지만 간척사업으로 조성한 토지를 분양하면 공사비를 빼고도 약 1100조원의 개발 이익이 예상된다. 주명건 이사장은 “노르웨이는 북해 유전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연금펀드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광개토 프로젝트에서 생기는 이익을 ‘제2국민연금’ 재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광개토 프로젝트의 또 다른 축은 경부운하 건설이다. 경부 운하 프로젝트는 한강 상류인 산곡수중보를 시작으로 남한강 팔당댐, 충주 조정지댐, 영강댐을 거쳐 낙동강 하구언을 잇는 총 길이 495km의 운하를 건설해 1만톤급 바지선이 다닐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한반도 대운하 사업으로 추진했지만, 환경논란이 제기되면서 4대강 보 건설과 강바닥 준설 등으로 사업이 축소됐다. 경부운하는 수심6m 이상의 적정 수심 확보를 위해 강바닥 준설이 필수적이다. 연간 교통 혼잡비용 37조원. 화물 수송비 30조원을 절감할 수 있다”면서 “준설을 통해 물그릇이 커지면 치수 능력 확충과 새로운 관광레저 상품 개발도 가능해진다” 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김종원 국토연구원 박사는 “파격적인 국가 개조 전략에 놀랐다”며 “국민적 컨센서스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가 사업 실현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새만금 사업도 20년 이상 끌어오고 있지만 여전히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다” 면서 “서해안은 연약 지반이어서 공사비가 예상보다 많이 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완)
1300 no image 서해 경기만 10억평 매립
2061 2015-07-08
서해 경기만 10억평 매립 (조선일보 2015.7.8 “조선경제” 일면. 유하룡기자) 서울 5.5배 기가시티(Giga City) 만들자 세종연구원 ‘광개토 프로젝트’ 발표 인천 강화도-영종도-안산 시화호-충남 태안항으로 이어지는 경기만 일대 바다를 매워 생긴 3340km2(약 10억평)의 간척지에 이른바 기가시티(Giga City)를 만들자는 중장이 제기됐다. ‘광개토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사업이 실현되면 향후 30년에 걸쳐 1100조원이 넘는 개발 이익이 생기고 이를 제2의 국민연금으로 활용해 미래 세대를 위한 복지 연금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연구원과 세종대 국가전략연구소는 7일 개최한 제13회 세종라운드 테이블에서 이 같은 구상이 담긴 ‘광개토 프로젝트를 통한 국가 개조 전략’을 발표했다. 주명건 세종연구원 이사장은 “한국은 2050년이면 인구 절벽에 부닥쳐 제조업중심의 성장 방식으로는 국가 경쟁력을 통해 세계 최대 항만과 공항을 갖추고 동북아 물류와 첨단 산업 허브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5.5배 규모 가용 토지 늘어나” 광개토 프로젝트가 간척 대상자로 꼽은 점은 지역은 경기만 일대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수도권과 인접하고 중국 진출에도 유리한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명채 세종대 교수는 “수심이 1-5m로 얕아 간척 사업이 쉽고 공사비도 적게 든다”면서 “인근 인천공항과 인천항, 아산만 지역이 불류 중심지라는 점도 감안했다”고 말했다. 대립 면적은 3340km2로, 우리나라 전체 도시 면적의 20%에 육박하는 가용 토지가 새로 생기게 된다. 새만금(410km2)은 물론이고 서울시 전체 면적(605km2)과 비교해도 5.5배 수준이다. 유럽의 룩센부르크(2586kn2)나 홍콩(1104km2) 보다 넓다. 간척지에는 가칭 ‘뉴서울항’ 과 ‘세종국제공항’을 만들고 총 연장 400km에 이르는 방조제에는 원전 24기와 맞먹는 초대형 풍력발전단지(10MW급2400기)가 들어선다. 또 금융과 물류 중심의 국제평화도시인 ‘광개토시’를 건설하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이곳과 서울, 세종시를 시속 500km의 자기부상열차로 연결하면 인구 3000만명을 20분 생활권으로 묶을 수 있다. 중국 베이징이나 홍콩, 일본 도쿄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메갈로폴리스가 탄생하는 것이다.(계속)
1299 no image [알터에고]展 프리뷰
1970 2015-06-17
[알터에고]전 프리뷰 -진정 [예술]은 가능한 것인가 수원에 있는 [해움미술관]에서는 수원 거주 토박이 예술가 일곱 사람의 작품들을 뫃아 기획전을 열고 있다. 그 전시 제목이 쉽게 와 잡히지 않는 [알터에고]다. 그러면서도 이 명칭은 매우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데, 아마도 현대문명의 착종현상을 상징적으로 적확하게 잡아 내어 이를 표현하고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오픈날의 배려깊은 행사를 통해 미술관이 갖고 있는 전래의 화이트 큐-브적 공간 전시에 대한 진부감도 가시면서 작품들이 품어 내는 아우라라 할까 충만함과 작가들의 다양한 프로필을 바로 작품이 전시된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는 즐거움을 전하고 싶다. [알터에고]란 용어는, 현대뇌심리학에서 쓰기 시작한 개념으로, ‘자아의 궁극’ ‘또 하나의 나(분신)’ ‘절대 사유’ 등 생각 보담 폭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불교권에서도 일직이 인간의 지각태를 두고 ‘아뢰야식(Alayavizinama)’에 까지 이르는 분류를 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인간의 존재와 지각태에 관해서 현대 심리학 못 지 않는 명밀한 분석이 이루어 지고 있다. 마음을 통괄하는 제 7식에서 ‘에고’에 헤당하는 ‘我慢의 마음’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 인간의 지각태를 상징적으로 겨울 (鏡)로 비유하고 있음으로, 현상이나 사상, 내지 예술이 지향하는 ‘표현’의 매체성과 소통의 보편성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현대철학이나 미학과 공유하고 있는 점이다. 이 보다 더 실감이 나는 대비의 장이 바로, 약 십만년전 신인류(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가 탄생한 이후 스패인과 프랑스 남동부 일대 동굴속에서 발견된 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진 크로마뇽人이 그린 벽화들이다. “예술’이 처음으로 탄생(주-1)하였다는 사실과 이와 함께 ‘인류가’ 동시에 탄생했다는 사실의 발견의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이러한 古層帶의 사건들이 현대인의 마음과 뇌내 자연속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通底하고 있다는 점이 알터에고展이 던지고 있는 역설적인 힘이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래된 시작”이나 호지 여사의 “오래된 미래’란 파래다임과 일맥 상통한다. 예술이 당대의 트랜드(時流)를 제대로 표현해 내는 전위의 역할을 하는 문화매채이고 현상이며 이벤트라면, [알터 에고]전은 그에 상응하는 둘도 없는 핵심을 찌른 메타포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가한 작가들과 작품들도 주제가 갖는 대칭성에 상응하는 신선도를 보여주고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드물게 순수예술이 갖는 작가들의 알터에고적 개성과 진정성을 현장에서 맛 보게 한다. 작가들이 도발적으로 전개해 놓은 창의적인 작품들의 위상은 비평가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하드래도, 필자가 전시장을 둘려 보고 작품 하나 하나, 작가 한 분 한 분의 알터 에고적 분신들(작품)을 음미하는데는 아무런 장헤가 없었다. 미술관이란 장은, 자신과 마주 하는 작품들을 소비하지 않고 육화해 가게 하는 오리지널티(originality)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이것은 작품이 놓여 있는 장소성의 문제를 완화해 주는 점이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창작해 가는 과정에서 진정 혼적 치유를 성취한다면, 그것이 어떤 장소에 놓여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로 보인다. 야외현장을 선호하는 작가들도 그것이 미술을 전시할 수 있는 장소란 점에서 확대된 미술관에 지나지 않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수원 화성이 조성되던 당시의 역사적 현실들이 다가 온다. 해움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 터가 바로 교동으로써 옛 시대의 인문의 중심지 향교가 자리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알터에고의 문명사적 비전너리를 이용하여 해움미술관의 가까운 미래를 점처 보면, 미래의 해움미술관의 모습이 떠 오를 것이다. 하나의 예로, 아나로그적 실재들이 디지털의 시스템적 인다라망(인터페이싱)을 활용하게 되면, 미술관이 필수로 갖추야 하는 일체의 아-카이브를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고, 지역문화의 선양에 필요한 장치들이 쉽게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지역 주민들의 문화의식 계몽과 소통의 문제가 과제로 남을것이다. 이는 세계를 향한 문화교류의 활성화를 통한 새로운 시대의 문예부흥의 불씨를 마련해 감으로써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헤움 미술관]은 21세기 수원의 문화사를 새롭게 쓸 수 있는 화성의 自矜心의 核에 놓여 있으며, 이는 바로 個와 全體의 待對的 변증으로 성취 될수 있는 ‘오래된 시작’을 예감케 한다. 주-1: 藝術의 誕生: 인간의 뇌세포 뉴-런의 구조에 근본적인 개조가 일어 나 그때 까지 중간에는 벽이 있어 상호간의 교통이 없었던 뇌끼리 통로가 생겨 우리 인류의 마음속에 유동성이 일어 난다. 그때 까지 별개로 분리되어 있었던 마음의 활동이 하나로 이어저 가면서 이질적인 정보들이 서로 겹치면서 비유나 상징이 발생하여 [표현]이 되고 이것이 바로 인류가 최초로 창조해 낸 예술이 되었다. 인류가 만든 최초의 예술군이 라스코, 쇼-베, 알타미라 동굴지역의 벽화들이다 바로 예술의 원형들이다. 인류고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으로 이 이후 인류의 사유에는 어떠한 새로운 변화도 일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298 no image [내 영혼의 氣象圖]展 감상기
1720 2015-06-07
작가 김영섭의 [내 영혼의 氣象圖]展 감상기 2015.5.25-6.1 수원미술전시관 3전시실 80년대 이후 가난한 화가생활을 함께 해 왔던 동향의 선배 작가 김성배는 김영섭의 최근 수원미술전시관에서 선 보인, [내 영혼의 氣象圖]展에서 일련의 작품群이 보여주는 특징을 가르켜 “[유희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독백과 같은 중얼거림으로 언급한다. 여간 해서 남의 작품을 평하는 일이 없는 이 수원의 토박이 예술인의 촌평 한마디에 나는 그때까지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이 색다른 풍광들에 압도당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막연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 투명하게 다가왔다. 미술전시를 둘려 보고 높은 지적 수준에 매료되는 일은 자주 있지만, 관람자체가 무심한 즐거움을 동반해 오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난삽해 보이는 그림들 앞에 서서 어떤 긍정의 기운이 도는 호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그 그림들이 두뇌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몸으로 포근한 기운으로 갑싸면서 다가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감각감상이라고 표현한다 해도 과히 틀리는 일은 아닐것이나, 그러나 작품 자체가 관람자의 감각감상을 필연으로 촉발 해 오는 사태는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신체적 언어”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탈이성적인 점도 작용하지만 차라리 탈인간중심주의적 토포로지칼 세계관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평소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두뇌라고만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지만, 두뇌 못지 않게, 몸도 이 세계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지각을 감각지각 혹은 감각감상이라 말할 수 있을것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들을 두고 이런 저런 인상 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새가 찌저기는 소리를 왜 이해하려고 하는가… 사랑하지 않고….”라는 말로 멋지게 통박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나 회화작품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임을, 피카소가 모르고 했을 이가 없다. 사랑에는 그즛이 없고, 반드시 내적 필연의 과정을 요구하기에, 그렇다. 지금 이 시대는 피카소가 살았던 시대 보담 더 더욱, 회화를 사랑한다 안 한다의 문제 보담 휠씬 깊은 파격적인 문제, 즉 회화가 존속해 갈 수 있는가? 라는 원천적인 물음 앞으로 내 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예술부정 혹은 비관론은 그 前史가 요지부동하게 살아 있으며 우리들이 시각예술 작품앞에 설 때 마다 어김 없이 그 장막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예술작품에서는 존재자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바로 놀라운 일이다”라고 운을 띠운 마르틴 하이데거의 근원적 존재 사상이 있었고,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행위다”라는 아포리즘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후리 친 아도르노의 難問은? “작품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진리는 결코 작품 속에 한 번에 현전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기표의 놀이, 즉 그것들의 차이, 연기, 산포의 유희뿐이다” 라고 일괄한 데리다의 해체론적 유희론, “너희 자신의 기관없는 몸체를 찾아라.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라.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의 문제다”, 새로운 유물론적 미학을 정립했던 질 들뢰즈의 ‘되기’ 사상, 푸코의 마그리트론, 리오타르의 숭고, 보드리야르의 시물라시웅등 이러한 이론적인 세례를 거치고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전통적인 전시 공간에서 그것도 켄버스로 그려낸 서구식 표현법을 차용한 유화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포리아(不能)의 변주곡들은 그것으로 끝히지 않고 신구조주의로 진화해 갔으며 不定形과 裂傷의 사상가 바타유로 승계되어 간다. 당신은 현대미술 작품중에서 하나라도 이를 두고 마음의 평화를 얻던가, 사랑하던가, 좋아 했던 일이 있었는가? 라고 누가 나에게 묻는 다면, 그 대답은 단연코 [노-]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 호감이라니….?! 이러한 이론적 前史들을 감안하드래도 김영섭의 조형세계의 유회성에 쉽게 동참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필자도 김성배의 [유희]론에 은근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그런 과정에서 어떤 공감을 느끼고 오히려 이 개념을 단초로 작품을 ‘사랑’ 할 수 있는가를 알아 보기 시작했다.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우라에 이끌리면서…. . 가장 먼저 거이 직감적으로 김영섭의 일군의 작품들을 둘려 보면서 가지게 된 강력한 인상은 그것들이, “탈현상적이며, 反實存主義的 성향”을 띠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인상에 김성배의 “유희론”을 병치시킨다면 김영섭 작가의 조형언어의 원형이라 할까 윤곽이 떠 오르지 않을까….. . 유희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창작충동을 불려 일으켜주는 ‘놀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희는 바로 [예술] 직전의 단계, 즉 에니미즘(Animism물활론)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전예술적 ‘예술놀이’ 일것이다. 그렇다면, 김영섭의 회화작품은 착종된 현대미술의 쟝글속에서 한 가닥 기대 볼 수 있는 유회론으로 치장한 [예술]이며 혹은 예술적 ‘指標’가 될 수 있는 놀이가 될 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빌릴것도 없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野生의 思考’가 활동케 하는 것이 [예술]일 것이 었다”라고 한다면, 김영섭의 조형언어는 “진화해 나가는 과정의 뭇 생명체 내지 物들의 미분화된 단면을 포착하고 있는” 에니미즈적 세계 혹은 마음의 古層에서 울어 나오는 이야기(혹은 신화)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야생]이란 말은 매스미디어상에서 쓰이고 있는 거침을 나타내는 wildness보담 토포로지칼한 파래다임에서 쓰이는 원초적 혹은 태고적 개념인 primitive에 가깝다. 김영섭의 작품속의 원초적 이미지는 바로 검증의 문제를 제처 두드래도,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신인류)와 같은 시대까지 소급해 가야 보이는 형상들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유희’란 개념과 겹치면서, 겁없이 논다는 의미, 그 안에 미분화된 야생성, 생명적인 풋풋함을 걸려 내는 예술성이 발효되어 가고 있음을 예감케 하는 세계다. 體 感覺的으로 다가 오는 이미지들의 부드려운 감촉에서 느끼는 好感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들 신체에는 그러한 이미지들에 공감을 불려 일으켜 주는 古層的 感情帶가 潛勢해 있다. 그의 전시 작품은 작품별로 題가 붙어 있지 않고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이어 가게 하고 있는 처사부터 파격적이다. 이는 그의 작품 전체가 하나씩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제스추어다. 그리고 그러한 逆分類的 조작은 작품이 개별적으로 변별되어 분리되어 독립해서 나름의 개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막아 주고, 이를 일群의 한 콤마로 간주하게 한다. 群은 個보담 전체를 우선시하는 전근대적인 혹은 원시적인 사고이다. 필자가 앞서 “탈현상적” 내지 “반실존주의적”이란 용어를 쓰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김영섭의 이번 전시의 대단원으로 잡을 수 있는 제로 붙혀진 [내 영혼의 기상도(氣象圖)]란 것이 수수꺼기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분별된 표현들이다. [내 영혼의 기상도(氣象圖)]란 제명은, 토포로지칼한 대지적 메트릭스(Matrix)상에 펄쳐진 작가의 우주적 비전너리를 암시한다. 마치 어린이들이 모래밭에서 모래를 가지고 무심하게 노는 파래다임을 떠 올려 준다. 모래성 쌓기가 가지고 있는 유희성은 旣知의 定型化된 세계의 모-든 규칙과 관행들을 뒤집고 환상적이며 未知的 혹은 非知的 幻影들을 쫓아 가는 과정에서 얻는 전적으로 다른 성질의 쾌감을 즐기는 놀이다. “유회”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점은, 예칙 불허의 이미지들이 어떤 미리 설정된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담, 조형이 이루어지는 순간 순간, 체험하는 짜릿한 전율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앞과 뒤, 시작이나 끝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집이 금시 성이 되었다가 돌맹이가 물고기가 되고 나무 꼬챙이가 호랑이로 변신하는 변이가 자연스렵게 받아 들여진다. 한마디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旣知의 세계가 강제하는 규칙들이 전적으로 顚覆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간의 잠재의식속에 숨어 있는 공통적인 이 놀이의 機制를 그림속에 풀어 내고 있는 것이 김영섭 작품군이 보여주고 있는 샤-먼적 혹은 토테미즘적 기호들이다. 그 기제를 만들고 있는 평면상에 변별된 이미지들의 개별적인 콤마들이 공유하고 있는 미학적 내지 시각적 효과는 단순하다. 눈 부시게 작열하는 강력한 태양의 黃光을 배면에 깔고 무대 앞에 놓여저 있는 동식물들의 原像들, 일부 記號화된 物들의 倂置, 이따금 나타나는 인간의 형상을 한 교회건물과 같은 굴절 착종된 기하학적 이미지들이 연출하는 무대로 그 위로 假現運動을 시키면서 우리들의 뇌리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이미지군들은 아주 희안하게도, 육감적으로 호감을 안겨준다. 세상을 밝게 긍정할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의 여백에서 울어 나온 카리스마가 내재해 있기 때문일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전너리 앞에서 비로소 우리의 내면에 깊게 드리우고 있는 인간적 고뇌의 장막들을 걷어 내고 ‘마음을 비우게’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혼적 裂傷들을 치유해 주는 [예술]이란 것이다. 莊子 齊物論 서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조물은 사람놀리기 꼭둑각시처럼 하고 造物弄人如弄幻 달인은 환을 몸보듯 하네. 達人觀幻如觀身 인생은 환꽃으로 모두 하나이거니 人生幻花同爲一 필경 누가 참이며 누가 참 아닌가? “ 畢竟誰眞誰匪眞 우리가 “유희”라고 어럽게 호칭한 김영섭 화백의 회화작품들이 주는 궁극적인 성취는 바로 장자의 제물론 서시가 보여주는 경지와 같다. 그것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위안이며, 평화이며, 동시에 마음의 치유이다. 이것은 동양의 무나 허는 만물을 관통하여 사물을 그 본래의 밝음으로 비추어 무궁한 경지에 [노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양의 니힐리즘적 “虛無”가 들어 올 자리가 없다.
1297 no image 도병훈선생의 [Cross point - ^^로부터] 를 읽고
1683 2015-05-22
도병훈선생의 형도 프로젝트와 관련된 글을 읽고, 앞서 동 프로젝트 서문조로 글을 쓰서 발표한 본인으로써 그 빈곳을 체워주는 듯 하여 대단히 반가웠습니다. 나의 글이 에드밸런ad-baloon였다면 도병훈씨의 글은 적확하게 그 알맹이를 제대로 체워주는 매우 과학적이며 역사적 차원에서 조망하는 역할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글도 영문으로 번역을 하여 가능한데로 동 프로젝트 宣揚의 멧시지로 삼았으면 합니다. 우리 국토의 기본이 되는 자연의 형질을 소비주의적 '개발'이란 명목으로 쉽게 바뀌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그 논리적인 합당한 사유를 밝히는 것이 관계하는 분들의 공통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도병훈선생의 글은 참여하는 작가들에게 자유로우면서도 동 프로젝트에 대한 마음가짐을 어떤 필연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vision)을 적확하게 잡아 주고 있습니다. 동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압축해 본다면, "치유의 예술", 자연과 인간의 삶이 이미 심하게 손상된 섬의 슬픈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修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나라 마다 자신들의 문화적 수준에 걸맞게 해석하고 이를 갱생하고 있음을 참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앞선 글에서 소개한 일본의 세도나이가이의 "나오지마(直島)" 예술 프로젝트도 그러한 하나의 바람직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1296 no image MOA 형도 탐방 감상
1761 2015-05-19
MOA 형도 탐방 감상 4.24.2015 *”토양속에 각인되어 있는 과거의 사회의 기록을 읽으면, 지속가능한 사회가 과연 가능한가 어떤가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흙의 문명사] 저자: David R. Montgomery. *환경변화: 과도소비문명의 지속적 유지를 위해 고안된 모-든 기술적 발명은, 원천적으로 양질의 자양분을 고갈시키고 있는 대안에 지나지 않다. -------------------------------------- Maehole Open Air Art 4.9 형도 탐방 감상 ----------------------------------- 서언 風情의 轉化 - 폐허의 미학 본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場所는, 반도의 중서부 한강이 바다로 흘려 들어 가는 仁川과 그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남쪽과 대응하고 있는 시화호와 그 호수 안쪽 가장자리에 조금만한 혹과 같이 나 있는 형도라 불리는 섬을 중심점으로 인근의 바다와 육지 사이로 형성되어 있는 넓은 갯벌과 갈대밭이 끝도 없는 아름다운 경관이 펄처저 있는 곳이다. 형도는 이곳에서 해안과 강의 이점을 살려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얼마되지 않는 거주민들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개발계획에 따라 철거를 당하고 텅 비어 있어나 기본이 되는 살림살이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마치 사람들이 일보러 나가서 잠시 집을 비운 것으로 착각을 할 정도로 사람의 훈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섬의 반을 차지하는 採石場도 야산을 깕아 먹은체 그대로 흉한 몰골을 보이며 방치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이 섬은 방치됨으로써 처절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폐허ruin의 이미지들’을 과감 없이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현대화란 명목으로 개발을 위해 한가닥 직선으로 나 있는 도로와 이어지면서 섬으로 불릴 수도 없는 섬과 육지의 중간에 걸쳐 있는 땅이 되어 버렸다. 섬은 육지와 이렇게 도로로 연결되어 버리면 섬이란 생명력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한반도를 中空에서 내려다 보면 북쪽은 중국대륙과 접해 있으며, 등뼈에 헤당하는 동해안의 산악지대는 岳山의 맥을 이루며 남북으로 달리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내려 앉으면서 완만한 평지로 인근에 무수한 섬들을 품고 있는 굴곡진 서해안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東의 剛과 西의 軟의 대칭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서로 待對(symmetry)하고 있는 形相임으로 地勢(topology)가 살아 있는 동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형도와 그 인근의 강과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늪지대의 地形과 그곳에 붙어 살았던 인간의 삶의 흔적들이 마치 동물의 허물처럼 원상을 보존한체 다가 오는 모습은 그 자체가 아주 규모가 큰 특이한 [場 field]이 되어 있고, 예술가들에게는 전적으로 새로운 [코드 code]를 함축한 토포로지컬topological한 [오브제 object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場的 논리는, 전래의 이미지를 재생해 내는 오브제와의 미학적 等式을 거부하고, 그 자체의 본성에 바탕을 둔 존재이유를 밝혀 내어야 하는 [이질적인 오브제]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너무 성급한 결론을 유보한채, 경견한 마음으로 어떤 절실한 물음을 안고 대상의 그 이질적인 潛勢된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다가 가야 한다. 그 슬프고도 애잔한 상실의 아픔들을 달래기 위해서도 그렇거니와 새로 갱생해 나올 ‘오래된 미래’를 그려내기 위해서도 對機의 지혜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場field]이란 어휘는 현대문명의 막다른 길목에서 인류문화가 ‘外的自然’과 ‘內的自然’(주-1)의 결정적인 分離로 인해 환경이 막다른 골목으로 치 닫고 있는 현대적 상황에서 국면 전환의 대안으로 삼아 볼 수 있는 的確한 개념이다. 場은 물리학의 싱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이율배반적 모순론에서도 새롭게 등장한 개념으로 사물의 새로운 실재관과 바로 가 닿아 있으며, 우연하게도 이는, 여러 인문을 통섭하여 공유하고 있는 동양적인 사유에서 그 한 가닥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周易思想의 待對(symmetry)란 개념에서 제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는 공히 서양의 전통적인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접근법을 넘어서 全一的이고 생태적인 세계관을 나타내는 “가이아Gaia”(주-2) 신화의 맥에 가 닿는 種과 類的 개념이다. [대대]는 음과 양의 氣의 자재로운 屈伸을 통해 만물을 창조해 내는 매우 유동적인 일종의 에너지態이며, 대상을 分別知로 일방적으로 裁斷하지 않고, 대립하면서도 긍정해 내는 상생의 역동성을 창출해 낸다. 이는 현대의 디지털세계에서 볼 수 있는 ‘시스템’ 적 발상과 비슷하다. 프로젝트가 설정하고 있는 이 일대의 지형적 특성과 인간의 삶의 흔적들은 “오래된 미래”(주-3)로 일컫는 시공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사물을 초 시공적 사유를 통해 지퍼 보는 정신적 구조, 고대 인류의 뭇 신앙적인 체계와도 서로 창조적으로 상응하며 이를 배타하지 않는 유연한 사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한국사회의 여러 서로 다른 종교의 파벌들이 상대를 이질적인 것으로 보면서 배타하지 않고 공생하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장]에서는 자연도 산을 이루고 있는 흙의 맥과 물의 맥이 서로 안고 돌며, 그기에 인간의 삶이 혼유되면서, 부정적인 동시 긍정적인 카오코스모스로 변환하는, 풍수지리적 비전vision과 地相學geomancy이 상보하고, 가이아의 인태국, 산태국, 수태국을 연출해 내고 있는 비저너리visionary가 가능해 지는 ‘터(장소)’일것이다. 주-1: 2010년 여름, 일본 세도나이가이의 나오시마(直島)의 중심에서 행해젔던 [세도나이가이國際藝術祭]의 첫쩨날 서두에 있었던 프랑스 작가 르.크레지오의 강연의 한 대목. [진정한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 란 테-마의 심포지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諸問題는, 그 근원을 찾아 보면, 內的自然과 外的自然의 決定的인 分離에 있다.” “내적 자연이란 腦內에서 일어 나는 心的現像이고 타의 생물체와는 달리 인간의 그것은 외적자연의 구조와 활동에 조화하지 않고 過剩된 自由領域을 품고 있다. 인간의 내적자연은, DNA의 판에 박히지 않는 자유영역을 포함한다. 이 점이 바로 지구권에서 살아 가는 여타 모든 생물계에 여태 보지 못한 큰 의미를 안겨주게 된 것이 바로 현대세계이다.” 이 일대의 섬들을 함께 아울려 “자연과 역사와 현대아-트”란 명제로 섬들의 갱생을 시도하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후구다께 쇼이치로(福武總一郞)씨다. 주-2: 제임스 러브록이 주장한 말로, 지구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로 땅의 여신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말. 지구는 땅이고 땅은 가이아Gaia여신이다. 주-3: 세계적 스테디셀러 '오래된 미래 '의 저자이자, 생태환경운동가인 스웨덴 출신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 여사가 세계화의 문제점을 들며, 그 대안으로 지역 공동체 활성화를 강조했다.
1295 no image [야생의 과학] 37
1504 2015-05-19
[야생의 과학] 37 후가자와시치로(深澤七朗)의 普遍性 나는 인류학의 공부를 40년 정도 해 왔습니다만, 그 중에서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말을 몇 개로 압축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 [야생]이라는 말입니다. 앞서 소개한 [명치대학야생의 과학연구소]라고 하는 것이 나왔습니다만 震災後 일본인이 어떠한 세계를 향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것인가 에 대해서 새로운 확고한 방향성을 보여 드리기 위해 새로운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에 야생이란 말을 부치고 싶었습니다. 나는 野生이란 말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었는데, 그기에는 후가좌와시치로가 언급했던 생각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에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해 나오는 근대인의 의식이나, 인테리의 의식을 無化. 相對化해 버리는 視点이 포함되어 있어, 자신을 둘려 쌓고 있는 자연의 세계와 전적으로 일체화하여 살아 가는 방식의 가장 뛰어난 표현이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둘려 쌓고 있는 환경세계와의 관계를 修復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많은 일본인은 2011년3월11일이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原發(원자력발전소)과 같은 것을 일본열도안에 많이 만들어 버렸다. 이때 작용하는 자연관은 자신들의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것인가 하면, 전적으로 그렇치가 않는 것이다. 원발사고를 계기로 전적으로 이질적인 자연관이 밖에서부터 우리들 속으로 강제로 들어 와서 그것을 따라서 경제발전을 해 왔지만 이 경제발전이란 것이 과연 진정으로 옳바른 방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깊은 회의를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의 존재방식이나 인간끼리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 갈것인가 하는 것을 묘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여기서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이 표현한 것이 매우 크다란 의미를 갖고 다가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방의 시대, 지역의 시대란 것을 휠씬 뛰어 넘으서 보다 보편적인 것입니다. 후가자와시치로의 문학은 보편적인 문학입니다. 보편적인 문학이란 근대문학보담 휠씬 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근대문학은 十八世紀이후의 유-럽에서 발생하여 일본에는 十九世紀에 와서 그런 의식이 나온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가좌와시치로가 그리고 있는 인간의 마음의 세계라는 것은 근대문화가 시작하기 휠씬 이전, 중세이전, 나라나 교도에 고대문화가 시작하기 휠씬 이전, 휠씬, 휠씬 앞, 보다 보편적인 시대까지 소급합니다. 그 시대에서는 이 일본열도에서 살아 가는 인간의 마음과 미국선주민의 마음, 유-라시아대륙에서 살아 가던 사람들의 心, 인도에서 살아 가던 사람들의 心, 인도네시아에서 살아 가던 사람들의 心, 오-스트라리아에서 살아 가던 사람들의 마음, 모두가 같은 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기에 곧 바로 연결되는 문학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자주 근대문학의 앞에 있는 보편적인 문화는, 世界文化, 世界文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이는 유-럽의 의식형태나 문화와 이어저 있는 다음의 형태를 [세계]라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부터 목표를 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세계가 아니고, 아마도 [普遍]이라고 하는 방향일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때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이 크게 부상해 나올것으로 봅니다. 지금부터 후가좌와시치로의 보편적인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저 있는가, 작품을 따라 보고자 합니다.
1294 no image [야생의 과학] 36
1611 2015-05-18
[야생의 과학] 36 고-슈(甲州)의 정신풍토와 후가좌와시치로(3) 헌대 우리들은 문학이라 하면 근대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평가하던지 판단하던지 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유-럽의 십구세기이후의 문학속에 주류로 흐르고 있는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베이스로 삼고 있는 근대인의 의식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유-럽에서는 인간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나온다는 것은 십칠세기나 십팔세기에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이것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은 명치유신이후의 일입니다. 유-럽에의 동경심이 배경에 깔고 늦었던 부분을 많이 안고 있었던 일본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근대작가다라고 하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문학이 이루어젔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에 나타난 것이 후가좌와시치로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것은 丸石神의 세계와 잘 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후가좌와시치로님의 문학은 근대의식과는 다른 구조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느쪽이 앞선것인가 우수한 것인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의식의 존재방식의 문제입니다. 후가좌와시치로가 그린 세계는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 자연의 세계와 일체가 된, 마치 자신이 환경의 일부 인양, 혹은 환경이 자신속으로 침투해 들어 와서 자신과 환경이 일체가 된 것 같은 공생상태속에서 살아 가는 인간의 의식입니다. 후가좌와시치로님이 그리고 있는, 일례로, [나라야마부시코]나 [笛吹川]같은 것이나 [庶民列傳]에는 근대적인 의식과는 다른 정신구조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기에 표현되 있는 인간의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 세계를 느끼는 방식, 생이나 사에 관해 생각하는 뿌리는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笛吹川]에서는, 武田家가 멸망하고 천목산에서 勝賴의 自塵에 이르는 과정에서 여기에 말려 들어 죽어간 백성들의 의식의 내부부터 그려저 있습니다. [나라야마부시코]에는 그가 어릴 때 대흑판 언저리에서 친척의 할머니 아주머니들로부터 들었던 ‘노인장’의 전승을 점점 부풀려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은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石和 언저리에 살았던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이 찌끌이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살아 가는 방식을 관찰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관찰하는 방식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곤충이 풀속에서 자신의 주변을 풀이나 그 풀에 붙어 있는 작은 벌레도 자신과 일체가 되어 이들을 관찰하는 것과 같이 매우 색다른 관찰안입니다. 근대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만들지 못했던 것을 이러한 관찰안으로 내부에서 세계를 일으켜 세워 보이는 것입니다. 이 문학은 분명히 후가좌와시치로가 소년시절에 체험했던 大正이나 昭和의 초기언저리의 고-슈의 서민들의 사고방식이나 말씨가 배후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기에 있는 사생관이나 세계관을 살펴보면 매우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후가좌와시치로 문학에 대한 인상이 였습니다. 그리고 이 인상은 앞서부터 언급하고 있는 환석신을 통해 체험했던 인상과 실로 무난하게 접속되고 있습니다. 환석신 안에는 죠-몽시대의 이 언저리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생관등이 확실하게 들어 있어 끊기지 않고 큰 改變없이 살아 남았다. 神道나 佛敎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보다 더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저 온 종교나 신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 그와 같은 짜임세로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이란 것이 태어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은 나에게는 매우 크다란 의미를 계속 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1293 no image [야생의 과학] 35
1692 2015-05-17
[야생의 과학] 35 고-슈(甲州)의 정신풍토와 후가좌와시치로(2) 근대문학자에는 소행이 나쁜 사람이 많았다. 작가들은 밤이 되면 술을 마신다. 혼자서는 마시지 못하니, 다른 작가들과 여러 사람들이 뫃이는 자리에 가서 함께 술을 마신다. 마시면 바탕이 들어 난다. 말하자면,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면적으로 생활하고, 술을 마시면 가면을 벗고 알몸이 되어 인간끼리 부딛친다. 그 중간에 아무런 완충재를 두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맞 부딛힌다. 그 위에 술을 마신 탓으로 거리감이 쫍아 진다. 작가들은 이러한 상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술이 나오지 않는 근대문학이란 거이 없는 것입니다. 그기에다 근대문학자들은 戀愛를 좋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太宰治(다자이 이사무)였을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상대를 바뀌어 가면서 연애를 반복해 갑니다. 다자이의 연애란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연애를 쌓아 가는 것은 자신속의 절대 충족될 수 없는 여성성에 대한 욕망이 그 사람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테리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점입니다. 심층심리속에는 모친이나 고향의 풍경에 갑쌓여 있었던 자기자신이 살아 간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감각이 살아 있으면서도 도시에서는 근대인으로서 행세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동체가 없는 도회지에서는 擬似공동체로서의 작가들의 뫃임이나 술집의 뫃임이 있으나 그기에서는 절대 충만할 수 없는 무엇이 연애와 이어저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근대문학이 가장 크게 발전해 가는 와중에 후가자와시치로가 돌연 출현했다. 여기에 많은 작가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작가뿐 아니라, 근대문학의 독자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충격의 원인이 후가자와문학의 수수꺼기를 푸는 열쇠인 동시 후가자와시치로를 탄생시킨 고-슈의 정신 문화나 풍토의 열쇠를 푸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후가좌와시치로의 등장에 가장 많은 충격을 받은 작가는 미지마유기오(三島由紀夫)였습니다. 미지마유기오는 근대문학에서도 가장 세련된 훌륭한 언어감각을 갖고 있었던 작가였었는데, 그 의식의 구조가 바로 근대의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유명한 작품에는 [假面의 告白]이란 것이 있습니다. 가면이란 말하자면 자신이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둘려 쌓고 있는 사회한경안에서 자신은 가면을 쓰고 살아 가고 있다, 그 깊은 속에 있는 진짜의 자신의 얼굴은 이젠 알 수 없다라고 하는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미지마유기오의 全作品은 일본인속에 형성되어 있는 근대의식이 가장 세련된 모양을 실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후가좌와시치로는 中央公論新人賞이란 문학상을 탄 덕택으로 데뷰하게 되었는데, 그 심사원의 한 사람이 미지마유기오 였습니다. 미지마유기오는 후가좌와시치로를 무서워하고 매우 싫어했습니다만, 이것이 바로 그가 뛰어난 奇跡的인 문학이란 것을 확실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인식했던 것도 미지마유기오였습니다.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안에서는 근대의 의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 자연스렵게 존재하고 더욱이 포로레타리아문학이나 농민문학과 같이 일단 밖에 나갔던 [인테리]가 원래의 자신이 태어 났던 서민의 세계로 돌아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서민의 세계가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의 세계에서는 후가좌와시치로의 작품은 고립되어 있지만 엄연하게 진한 리얼리티의 힘을 갖고 일어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할래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출현해 버렸던 것입니다. 당시의 작가나 평론가의 후가좌와시치로에 대한 평론을 읽으 보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미지마유기오는 당혹스렵게 느끼고 있고, 고바야시히데오(小林秀雄)의 후가좌와시치로론은 마치 뒤죽 박죽입니다. 나는 후가좌와시치로 같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허나 고바야시히데오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고바야시히데오와 같은 복잡한 의식구조를 갖고 있었던 사람조차도 후가자와시치로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의 수스꺼기는 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武田泰淳이나 正宗白鳥, 井伏尊二 같은 소수의 작가만이 후가좌와시치로의 문학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위에 후가좌와시치로는 선이 매우 굵은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문단에서는 재미있는 사람인 동시에 골난한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후가좌와시치로가 대담하는 상대라 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장 재미 있었던 이는 야마시다기요시(山下淸)이라 한 화가였습니다. 야마시다기요시는 잘 알려진 바 [벌거벗은 대장]으로 불렸던 분입니다. 야마시다기요시와 오가모도타로라 하는 이상한 사람들과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담이 자랑이였습니다. 야마시다기요시와 후가좌와시치로의 대담은 실로 재미 있는 것으로 꼭 읽으 보시기 바랍니다. 그 뱃장 좋은 후가좌와시치로가 처음으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1292 no image [야생의 과학] 34
1720 2015-05-17
[야생의 과학] 34 고-슈(甲州)의 精神風土와 후가자와시치로(深澤七郞) 대학생시절, 인류학이나 종교학을 배우고 있었던 친구에는 도시부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았고, 이들은 시골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조사를 위해 보르네오나 뉴-기니아 등지를 가던지 아마죤 유역으로 가면서, 선주민들의 세계와 만나서는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필요가 없었습니다. 20세기 초두에 출판된 인류학 관련 책을 통해서 당시의 뉴-기니아인들의 사고방식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 나 알고 있어, 할머니가 이야기 해 준 것과 같은 것이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놀라워하지 안했습니다. 이를 통해 나는 얼마나 다행한 곳에서 태어 났던가 하고 마음을 놓게 되었습니다. 보르네오의 산속이나 아마존유역의 인디오곁으로 찾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인류학적 환경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세계에 둘려 쌓여있었던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장 절실하게 실감케 해준 사람이 후가좌와시치로였습니다. 후가좌와시치로가 [나라야마부시꼬Ballad of Narayama](주-1) 를 가지고 데뷰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친이 와서 독서회에 제기했던 책이 바로 [나라야마 부시꼬]였습니다. 여기서는 熊王德平의 [기쯔내와 다누끼], 나가무라기쥬로(中村鬼十郞)의 작품등, 말하자면, 농민문학자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하여 자주 서로 나누어 가며 읽곤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후가좌와시치로라고 하는 분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能王이나 나가무라의 문학을 보면 이분들이 시골의 인테리구나 하고 직감하게 됩니다. 농민작가는 대개가 인테리로 서민의 세계로부터 의식이 일단 벗어난 체험을 한 후에, 다시 한번 서민의 세계로 돌아 와서 자기 자신을 깔아 앉혀서 서민의 세계를 문학화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후가좌와시치로라고 하는 작가는 그런 의식의 줄거리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토양으로부터 분리하여 뿌리체 공중에 뜬 존재가 되어 이러면 안되지 하고 자신을 길려 준 서민들의 큰 세계로 되돌아 왔다는 의식의 운동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인테리다 서민이다 하는 구별조차 없으며, 그러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할머니나 여자나 남자들의 이야기들을 귀로 들으면서 그 깊은 출소를 직감적으로 잡아 내고 있다. 그러한 무엇이라고 짤라 말할 수 없는 문학이 출현하였던 것입니다. [나라야마부시코 增山節考]가 출판되었던 당시의 일본의 문단은 모두 놀라워 했습니다. 놀라워 했던 것은 당연했던 것으로, 당시의 문단의 세계란 소위 일컫는 ‘근대문학’의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근대문학의 시작은, 앞서 언급했던 인테리의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도대체, 문단을 맡고 있었던 사람들은 시골에서 태어 나서 豪農과 같은 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은 자식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나아 갔던 동경에서 구라파의 문학이나 새로운 도회지 정신을 몸에 익힌다. 그러면, 여태 태어나서 자랐던 시골과의 사이에 아주 크다란 간격이 생겨 있는 것을 께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후가좌와시치로風으로 말하자면, [인테리]가 되는 것입니다. 후가좌와시치로는 [인테리]라 하는 말에 가벼운 경멸의 의미를 가미하면서 쓰고 있습니다만, 인테리님이란 자신이 태어난 대지로부터 분리해 버린 자들이 였던 것입니다. 이 분리가 근대인을 만들었다. 근대인은 태어나서 자란 대지로부터 분리되어 버린 존재들이다. 이 분리가 근대인을 만든 것입니다. 근대인은 태어나서 자랐던 공동체로부터 떠나 개인으로써 분리된 자기의식을 만들어 갑니다. 이 분리의식을 갖고 서민이 살고 있는 자신이 자랐던 정신성의 대지의 세계를, 밖에서 보게 되는 개인은 고독하며 자신의 뿌리를 잃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개인 안에 어린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어릴때의 기억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어머니나 고향 그리고 그러한 것들과 일체가 되었던 시절의 기억이 그 사람 속 깊은 곳에 침잔해 있는 것이다. 자신속에 있는 이 낙차에 괴로워하면서 문학을 만들어 간다. 일본의 근대문학은 우선 무사시노(武藏野)를 발견하고 있다. 무사시노는 그렇게 표나는 볼꺼리가 많은 곳이 아닌 多摩의 구능지대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자연을 바라 보며 관찰하면서 문학을 만들어 간다는 의식이 발달합니다. 이는 여태 일본인에게는 없었던 의식입니다. 고-슈의 사람들은 해질 무릎 서산으로 깔아 앉는 해님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바라본 일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 경치 자체에서 부터 무언가를 밖으로 분리해 낸다던지, 분리된 눈으로 석양을 바라 본다 던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동물이 자신이 살고 있는 생명의 세계에서 감관기관을 날카롭게 뻗히면서 세계의 일들을 바라 보지만, 보고 있는 자신은 주변의 물이나 흙의 세계와 일체가 되어 있어 이를 지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근대이전의 인간의식은 물속의 물고기나 대지위로 뛰어 가는 개구리와 거이 같은 모양으로 세계를 지각하여 이 세계를 밖에서부터 객관적으로 바라 본다는 의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오면 객관적으로 세계를 본다는 의식이 발달하게 된다. 그래서 주로 도회지를 생활 발판으로 삼는 근대문학이라 하는 것에는 특수한 감각이나 정신적 경향을 지니게 된다. 주-1: [나라야마부시꼬]는 후가좌와시치로의 대표 작품으로, 이를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영화화하여 1983년에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는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칠십 노인의 “고래장”과 유사한 풍습으로 그것들의 맥이 서로 닿아 있다는 점이 이 적퓸울 매우 친근한것으로 느끼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옮긴이)
1291 no image [야생의 과학] 33
1684 2015-05-11
[야생의 과학] 33 제7장 두나의 深澤七郞論(3) 奇蹟의 文學 道祖神 --- 丸石神에 얽힌 이야기 요즘도 정월 십사일의 밤에는 짚으로 만든 도조신위에 오두막집을 짖고 아이들이 뫃여서는 여러가지 장식을 하고 있지요. 옛날에는 이 오두막집에 아이들을 넣었다고 합니다만 요즘은 오두막집을 태우는 정도라 합니다. 이때 나오는 하야시 고도바(메기는 소리)란 것이 많아 그 대부분이 性的인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현대의 도조신굿의 근원을 살펴 보면 아무턴 동지의 굿입니다. 죠몽시대에 벌써 다른 형태로 행해젔던 동지의 굿이 아직도 여기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 굿을 보고 있으면 중앙에서 내려 오는 神社나 神道 같은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시대에 고-슈에 살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神聖視 했던 것인가가 잘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거듭하는 사이에 자신이 고-슈에서 태어 난 것을 매우 다행한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슈가 아주 오래된 뿌리를 갖고 있어 아마도 일본열도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문화를 갖는 죠몽시대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끊키지 않고 하나의 문화.정신의 구조가 살아 이어저 왔던 곳이 이 고-슈가 아닌가 합니다. 그 중의 하나로 나타난 것으로 이 환석신을 본 것입니다. 일본열도에 전개해 왔던 가지 각색의 문화를 고려해 보면 이는 매우 희유한 경우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일은 드문일입니다. 그건 죠몽시대부터 이어저 오는 오래된 굿은 많은 곳에서는 가마구라시대 부터 무로마치시대 부근이고 일단 끊겨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에도시대에는 근세의 새로운 형태의 굿이 시작됨으로 죠몽시대이래 지속되어 온 오래된 타잎의 정신구조는 사회의 표면에는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에도시대에는 幕藩體制가 수립되어 여러 번이 설정됩니다. 각 번에서는 새로운 농업기술이나 제조기술자를 뫃아서 지방의 특산품을 만들게 하고 상품으로 팔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성하마을이 발달한 곳에서는 그 지방특유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근세문화가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슈=야마나시에는 일직부터 천령이 되었지요. 다게다 신겐, 요리모도공 이후의 야마나시에는 영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천령이 되었던 곳에서는 관동인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근세문화가 전혀 발달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郡馬縣이 그렇습니다. 야마나시는 천령이 되어 고-후에는 에도부터 고-후勤番이 취임해 온다. 고-후근번이란 에도에서 근신을 당한 친구들이 많아, 일컬어 좌천과 같은 모양으로 고-후근번에 임명되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관리들은 일할 의지는 없고 관심사는 주로 연극이나 주연임으로 고-슈에는 극장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관동인근의 天領지대를 보면, 깡패도 많다. 그로 인해 도박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에도의 주변부, 천령지대의 특징입니다. 일례로, 고가라시 몬지로, 버들잎을 입에 물고 [앗시니와 가가와리는 나이 고도되 고쟌스/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돌아 다니는 논팽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에도번에서 쫒겨 나온 인간들은 본토의 번에는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럼으로 고-슈깡패의 독특한 정신풍토가 조성되면서 도박분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이 또한 고-슈의 정신구조를 길려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 바탕위에 고-슈에는 독특한 정신구조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고-슈인이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곳에서는 이상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의 상징적인 존재가 바로 환석신입니다. 환석신이 있는 도조신장에는 매우 고대적인 축제가 이어저 왔습니다. 소정월의 불굿입니다만 동지의 축제로 된 불꽃놀인것입니다. 사정은 유-라시아대륙 전역,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서도 같엤습니다. 동지와 함께 또 하나의 불꽃놀이가 있는데, 이는 바로 오盆에 헤당합니다. 화지와 동지에는 불을 피우는 축제가 있지만, 야마나시현에서는 지금도 매우 중요한 살아 있는 민속으로써 연명하게 이어저 가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