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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482
조규현
조회 수 : 1428
2015.06.07 (11:10:04)
작가 김영섭의 [내 영혼의 氣象圖]展 감상기
2015.5.25-6.1 수원미술전시관 3전시실
80년대 이후 가난한 화가생활을 함께 해 왔던 동향의 선배 작가 김성배는 김영섭의 최근 수원미술전시관에서 선 보인, [내 영혼의 氣象圖]展에서 일련의 작품群이 보여주는 특징을 가르켜 “[유희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독백과 같은 중얼거림으로 언급한다.
여간 해서 남의 작품을 평하는 일이 없는 이 수원의 토박이 예술인의 촌평 한마디에 나는 그때까지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이 색다른 풍광들에 압도당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막연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 투명하게 다가왔다.
미술전시를 둘려 보고 높은 지적 수준에 매료되는 일은 자주 있지만, 관람자체가 무심한 즐거움을 동반해 오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난삽해 보이는 그림들 앞에 서서 어떤 긍정의 기운이 도는 호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그 그림들이 두뇌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몸으로 포근한 기운으로 갑싸면서 다가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감각감상이라고 표현한다 해도 과히 틀리는 일은 아닐것이나, 그러나 작품 자체가 관람자의 감각감상을 필연으로 촉발 해 오는 사태는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신체적 언어”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탈이성적인 점도 작용하지만 차라리 탈인간중심주의적 토포로지칼 세계관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평소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두뇌라고만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지만, 두뇌 못지 않게, 몸도 이 세계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지각을 감각지각 혹은 감각감상이라 말할 수 있을것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들을 두고 이런 저런 인상 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새가 찌저기는 소리를 왜 이해하려고 하는가… 사랑하지 않고….”라는 말로 멋지게 통박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나 회화작품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임을, 피카소가 모르고 했을 이가 없다. 사랑에는 그즛이 없고, 반드시 내적 필연의 과정을 요구하기에, 그렇다.
지금 이 시대는 피카소가 살았던 시대 보담 더 더욱, 회화를 사랑한다 안 한다의 문제 보담 휠씬 깊은 파격적인 문제, 즉 회화가 존속해 갈 수 있는가? 라는 원천적인 물음 앞으로 내 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예술부정 혹은 비관론은 그 前史가 요지부동하게 살아 있으며 우리들이 시각예술 작품앞에 설 때 마다 어김 없이 그 장막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예술작품에서는 존재자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바로 놀라운 일이다”라고 운을 띠운 마르틴 하이데거의 근원적 존재 사상이 있었고,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행위다”라는 아포리즘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후리 친 아도르노의 難問은? “작품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진리는 결코 작품 속에 한 번에 현전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기표의 놀이, 즉 그것들의 차이, 연기, 산포의 유희뿐이다” 라고 일괄한 데리다의 해체론적 유희론, “너희 자신의 기관없는 몸체를 찾아라.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라.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의 문제다”, 새로운 유물론적 미학을 정립했던 질 들뢰즈의 ‘되기’ 사상, 푸코의 마그리트론, 리오타르의 숭고, 보드리야르의 시물라시웅등 이러한 이론적인 세례를 거치고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전통적인 전시 공간에서 그것도 켄버스로 그려낸 서구식 표현법을 차용한 유화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포리아(不能)의 변주곡들은 그것으로 끝히지 않고 신구조주의로 진화해 갔으며 不定形과 裂傷의 사상가 바타유로 승계되어 간다.
당신은 현대미술 작품중에서 하나라도 이를 두고 마음의 평화를 얻던가, 사랑하던가, 좋아 했던 일이 있었는가? 라고 누가 나에게 묻는 다면, 그 대답은 단연코 [노-]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 호감이라니….?!
이러한 이론적 前史들을 감안하드래도 김영섭의 조형세계의 유회성에 쉽게 동참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필자도 김성배의 [유희]론에 은근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그런 과정에서 어떤 공감을 느끼고 오히려 이 개념을 단초로 작품을 ‘사랑’ 할 수 있는가를 알아 보기 시작했다.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우라에 이끌리면서…. .
가장 먼저 거이 직감적으로 김영섭의 일군의 작품들을 둘려 보면서 가지게 된 강력한 인상은 그것들이, “탈현상적이며, 反實存主義的 성향”을 띠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인상에 김성배의 “유희론”을 병치시킨다면 김영섭 작가의 조형언어의 원형이라 할까 윤곽이 떠 오르지 않을까….. .
유희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창작충동을 불려 일으켜주는 ‘놀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희는 바로 [예술] 직전의 단계, 즉 에니미즘(Animism물활론)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전예술적 ‘예술놀이’ 일것이다. 그렇다면, 김영섭의 회화작품은 착종된 현대미술의 쟝글속에서 한 가닥 기대 볼 수 있는 유회론으로 치장한 [예술]이며 혹은 예술적 ‘指標’가 될 수 있는 놀이가 될 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빌릴것도 없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野生의 思考’가 활동케 하는 것이 [예술]일 것이 었다”라고 한다면, 김영섭의 조형언어는 “진화해 나가는 과정의 뭇 생명체 내지 物들의 미분화된 단면을 포착하고 있는” 에니미즈적 세계 혹은 마음의 古層에서 울어 나오는 이야기(혹은 신화)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야생]이란 말은 매스미디어상에서 쓰이고 있는 거침을 나타내는 wildness보담 토포로지칼한 파래다임에서 쓰이는 원초적 혹은 태고적 개념인 primitive에 가깝다. 김영섭의 작품속의 원초적 이미지는 바로 검증의 문제를 제처 두드래도,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신인류)와 같은 시대까지 소급해 가야 보이는 형상들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유희’란 개념과 겹치면서, 겁없이 논다는 의미, 그 안에 미분화된 야생성, 생명적인 풋풋함을 걸려 내는 예술성이 발효되어 가고 있음을 예감케 하는 세계다. 體 感覺的으로 다가 오는 이미지들의 부드려운 감촉에서 느끼는 好感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들 신체에는 그러한 이미지들에 공감을 불려 일으켜 주는 古層的 感情帶가 潛勢해 있다.
그의 전시 작품은 작품별로 題가 붙어 있지 않고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이어 가게 하고 있는 처사부터 파격적이다. 이는 그의 작품 전체가 하나씩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제스추어다. 그리고 그러한 逆分類的 조작은 작품이 개별적으로 변별되어 분리되어 독립해서 나름의 개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막아 주고, 이를 일群의 한 콤마로 간주하게 한다. 群은 個보담 전체를 우선시하는 전근대적인 혹은 원시적인 사고이다. 필자가 앞서 “탈현상적” 내지 “반실존주의적”이란 용어를 쓰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김영섭의 이번 전시의 대단원으로 잡을 수 있는 제로 붙혀진 [내 영혼의 기상도(氣象圖)]란 것이 수수꺼기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분별된 표현들이다.
[내 영혼의 기상도(氣象圖)]란 제명은, 토포로지칼한 대지적 메트릭스(Matrix)상에 펄쳐진 작가의 우주적 비전너리를 암시한다. 마치 어린이들이 모래밭에서 모래를 가지고 무심하게 노는 파래다임을 떠 올려 준다. 모래성 쌓기가 가지고 있는 유희성은 旣知의 定型化된 세계의 모-든 규칙과 관행들을 뒤집고 환상적이며 未知的 혹은 非知的 幻影들을 쫓아 가는 과정에서 얻는 전적으로 다른 성질의 쾌감을 즐기는 놀이다.
“유회”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점은, 예칙 불허의 이미지들이 어떤 미리 설정된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담, 조형이 이루어지는 순간 순간, 체험하는 짜릿한 전율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앞과 뒤, 시작이나 끝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집이 금시 성이 되었다가 돌맹이가 물고기가 되고 나무 꼬챙이가 호랑이로 변신하는 변이가 자연스렵게 받아 들여진다. 한마디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旣知의 세계가 강제하는 규칙들이 전적으로 顚覆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간의 잠재의식속에 숨어 있는 공통적인 이 놀이의 機制를 그림속에 풀어 내고 있는 것이 김영섭 작품군이 보여주고 있는 샤-먼적 혹은 토테미즘적 기호들이다.
그 기제를 만들고 있는 평면상에 변별된 이미지들의 개별적인 콤마들이 공유하고 있는 미학적 내지 시각적 효과는 단순하다.
눈 부시게 작열하는 강력한 태양의 黃光을 배면에 깔고 무대 앞에 놓여저 있는 동식물들의 原像들, 일부 記號화된 物들의 倂置, 이따금 나타나는 인간의 형상을 한 교회건물과 같은 굴절 착종된 기하학적 이미지들이 연출하는 무대로 그 위로 假現運動을 시키면서 우리들의 뇌리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이미지군들은 아주 희안하게도, 육감적으로 호감을 안겨준다. 세상을 밝게 긍정할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의 여백에서 울어 나온 카리스마가 내재해 있기 때문일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전너리 앞에서 비로소 우리의 내면에 깊게 드리우고 있는 인간적 고뇌의 장막들을 걷어 내고 ‘마음을 비우게’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혼적 裂傷들을 치유해 주는 [예술]이란 것이다.
莊子 齊物論 서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조물은 사람놀리기 꼭둑각시처럼 하고 造物弄人如弄幻 달인은 환을 몸보듯 하네. 達人觀幻如觀身 인생은 환꽃으로 모두 하나이거니 人生幻花同爲一 필경 누가 참이며 누가 참 아닌가? “ 畢竟誰眞誰匪眞
우리가 “유희”라고 어럽게 호칭한 김영섭 화백의 회화작품들이 주는 궁극적인 성취는 바로 장자의 제물론 서시가 보여주는 경지와 같다. 그것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위안이며, 평화이며, 동시에 마음의 치유이다. 이것은 동양의 무나 허는 만물을 관통하여 사물을 그 본래의 밝음으로 비추어 무궁한 경지에 [노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양의 니힐리즘적 “虛無”가 들어 올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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