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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no image 팔공산 은해사를 다녀와서
소나무
4247 2007-06-05
팔공산 은해사를 다녀와서 1. 지난 5월 28일, 경북 영천군 청통면 치일동에 있는 팔공산 은해사(八公山 銀海寺)를 다녀왔다. 팔공산은 주봉인 해발 1192미터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서 커다란 학이 좌우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의 산줄기로, 지금은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의 칠곡, 군위, 경산, 선산, 영천군에 걸쳐 자리 잡은 거대한 산이다. 팔공산은 신라 이래 고려 조선을 통하여 한국 제일의 불교 성지였다. 석굴암의 원형으로서 국보 제 109호인 제2석굴암(군위 삼존석굴 삼존불상)이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신라시대 이래 유서 깊은 절인 동화사(桐華寺)와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봉안했던 부인사(符仁寺)와, 산꼭대기에 있는 돌부처로 유명한 갓 바위 부처(관봉 석조약사여래좌상)가 바로 팔공산 줄기의 한 봉우리인 관봉에 있다. 팔공산에서 은해사는 동화사와 함께 대표적인 양대 사찰이다. 은해사는 창건 당시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했으나 팔공산이 아미타 신앙의 도량으로 불 ․ 보살 ․ 나한 등의 불보 들이 있는 모습이 마치 은빛바다(銀海)가 물결치듯 찬란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리고 은해사는 백흥암(百興庵), 거조암(居祖庵), 백련암(白蓮庵), 운부암(雲浮庵), 중암암(中巖庵), 기기암(奇奇庵) 등의 웬만한 사찰 규모의 부속 암자가 많은데, 본 절인 은해사보다 오히려 이 각 암자에 뛰어난 문화재들이 산재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비구니들의 수행 도량으로서 평일에는 출입금지 구역이라 바깥에서 얼핏 보았지만, 백흥암이 본사인 은해사보다 더 사찰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작년에 먼저 보았던, 본 절에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국보 14호인 거조암의 영산전(靈山殿)은 여말선초에 중건된 맞배지붕 건물로서, 장중하면서도 간결한 일자(一字)집의 단순 소박한 건축미는 서울의 종묘 건물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2. 은해사의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것은 절 아래 주차장의 큰 돌에다 새겨놓은 ‘은해사’란 휘갈겨 쓴 글씨 탓이다.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나 그 허세를 부린 천박함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절 안의 현판에도 그런 글씨체가 눈에 띄었다) 사실 요즘 어디를 가나 큰 돌에다 글씨를 새겨 놓은 경우가 많은 데, 대개는 그 글씨들이 형편없어서 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다른 곳도 아닌 ‘추사체의 보고(寶庫)’인 절에 ‘날티 나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궁궐의 출입문처럼 거대한 산문(멀리서 볼 때는 이 산문이 대웅전 건물인 줄 알았다)에 들어서자 매우 큰 적송들이 솔숲을 이루고 있어 저절로 감탄사가 날 정도로 좋았다. 나는 이번에 은해사를 보기 전까지는 은해사가 매우 큰 절인지 몰랐다. 그래서 막상 은해사를 보면서 사찰의 광대함에 놀랐고, 무엇보다 경내 전체가 천혜의 명당자리임에 놀랐다. 명산에는 의례히 대찰이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고, 또한 늘 보아왔지만 은해사는 더욱 그러한 대찰이었다. 게다가 부속 암자들이 산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 경내의 크기를 어림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내에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곧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절의 규모는 매우 컸지만 절의 전체구조와 건물의 짜임새가 엉성하고 산만했기 때문이다 팔공산 서쪽에 위치한 동화사도 절 옆에다 거대한 통일대불을 조성하면서 옛 절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고, 게다가 산허리를 잘라 새로 진입로를 내면서 절을 황폐화시켜 버렸듯이, 이곳도 무질서하게 들어선 최근의 건물들과 보수 흔적들로 인해 그 좋은 장소가 아까울 정도로 격이 맞지 않았다. 이를테면 절의 중심인 대웅전 건물에 비해 주변 건물들이 너무 크거나 건물배치도 산만했고, 특히 은해사 입구의 보화루 옆의 2층 돌 난간이 있는 건물은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추사 글씨의 고고청고(孤高淸高)한 필력이 남아있는 보화루나 대웅전 현판과 대조적이어서 마음이 더욱 착잡했다. 사실 이번에 은해사에 가게 된 것은 은해사에 남아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를 보기 위해서였다. 은해사는 추사체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글씨들이 현판(扁額)과 주련으로 걸려 있는 절로서 ‘추사체의 보고(寶庫)’라 일컬어지는 절이기 때문이다. 영남 지방의 사찰인 은해사에 이처럼 많은 추사 글씨가 현판으로 남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1847년 은해사에 큰 불이 나서 절 안의 거의 모든 전각들이 불에 탔다. 이 때부터 3년간의 큰 불사로 다시 전각을 세우고 이 절에 있던 추사와 친분 있던 스님의 부탁으로 은해사 현판을 비롯, 대웅전, 불광, 보화루의 현판을 추사가 다시 쓴 것이다.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1) 이 현판들은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온 1849년에서 1851년 가을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 갈 때까지 약 2년간 서울에 머물 때, 즉 추사 나이 64~65세 무렵에 쓴 것이다. 이처럼 은해사에 남아 있는 현판 및 주련 글씨들은 추사가 그 기록이 남아 있어 추사를 글씨를 시기별로 이해하는 준거가 되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글씨들은 과천과 봉은사를 오가면서 쓴 추사 말년의 글씨들과 더불어 추사체의 정수이다. 게다가 은해사에 있는 추사 글씨들은 가로 길이가 2~3m에 이르는 대작들로서, 글씨가 클수록 더 좋은 추사체의 특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은해사에 남아있는 글 중, "은해사" 편액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은해사의 추사 글씨 들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온갖 신산을 겪으며 한결 무르익고 원만해진 추사의 솜씨와 인격이 그대로 드러난 글씨들인 것이다. 작년 과천에서 열렸던 에서 이곳 은해사에 연관된 과 , , 백흥암 주련 글씨, 그리고 ‘산숭해심’ 까지 탁본으로 보았을 때, 추사체의 웅대한 필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지난 십여 년 간 간송 미술관에서 추사 관련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가 보았고, 또 인사동의 동산방 화랑 등에서 웬만한 추사 글씨를 거의 다 보았지만, 은해사 소장 추사 글씨들은 탁본임에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대작들이어서 대작일수록 더욱 매력적인 추사체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광’이란 편액의 탁본은 마치 현대 추상화를 보는 듯했다. 이를테면 길게 내리 그은 마지막 세로획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누르는 듯한 강한 힘과 함께 그 옆에 광 자 밑의 넓은 공간은, 피에르 슐라즈의 현대 추상화보다도 더욱 강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3. 가끔 절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은 요즘 지은 절들이 대개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 조선시대의 절집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요즘 절들이 중창불사라는 명목으로 건물만 지었다 하면 규모만 크고 화려하게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지은 절집들을 볼 때마다 왜 수덕사 대웅전 같은 정숙하고 단아한 건물을 짓지 못하는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물론 요즘 지은 절들이 대개 옛날보다도 못한 것은 집을 잘 짓는 목수가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는 절집에 사는 현대 승려들의 심미적 안목과 맨탈리티에 있다. 이는 대개의 절에서 절을 안내하는 안내 책자 하나 변변하게 만들지 못하고, 안내 표지판 문구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절이나 불전은 관광객이 문화적인 유물을 감상하는 곳이 아니라 불교신앙의 청정한 공간이다. 그럼에도 절은 세속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절이란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색공불이(色空不二)'는 물론 '세계일화'라는 화엄사상을 통해서도, '진여문'과 '생멸문'이 둘이 아닌 원효의 사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궁국적으로 '승'과 '속'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 은해사에서 한 가지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화장한 유골을 나무 밑에 묻는 수림장(樹林葬)이 이곳 사찰에서 운영돼 묘지난 해결과 친환경적 장례에 새 지평을 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은해사 경내 사찰 1만여 평의 소나무 군락지에 수림장을 조성한 것으로, 이 수림장은 지난해 9월 타계한 국내 임학계의 거목인 오제(悟齊) 김장수(金樟洙) 선생의 장례를 평소 나무를 사랑하는 고인의 뜻을 기려 수림장으로 거행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은해사가 도입한 수림장 역시 이러한 방식을 따라 화장한 유골을 천이나 종이에 모신 뒤 나무 밑 30㎝ 정도에 구멍을 파 안장하는 장례방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화장한 유골을 나무 밑에 안장한 뒤 나무에 망자의 이름과 출생·사망일을 적은 팻말을 부착할 뿐 비석이나 경계석 등 일체의 인공조형물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땅의 여건을 생각할 때 이러한 방식은 새로운 장묘 문화의 대안이 아닐 수 없다. 4. 최근 ‘템플 스테이’ 같은 프로그램의 유행에서 알 수 있듯 인간관계가 황폐한 도시 생활에 찌들고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연 속에 자리 잡은 전통사찰은 정신적인 위안이 될 수 있는 천혜의 공간이다. 이런 면에서 전통사찰은 향후 문화적으로도 큰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다. 은해사는 ‘추사체의 보고’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일반적인 사찰과 다른 가치를 지닌 절이다. 무엇보다 은해사는 말사로 거느리고 있는 산내 암자들이 많아서 그 지리적 여건이나 잠재력 측면에서 다른 사찰보다 더욱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나무 한 그루 심는 것은 물론, 담을 쌓고 집을 지을 때 최소한 그 공간과 장소성에 대한 감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며, 이는 기실 ‘깨달음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각주 주1)1862년 혼허 지조(混虛 智照)스님이 지은「은해사중건기」에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秋史 金相公)의 묵묘(墨妙)"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 뒤 1879년 당시 영천군수이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의 편액인 '銀海寺', 불당의 '大雄殿', 종각의 '寶華樓'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의 '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 no image 일선김씨 묘 출토 조선 사발에 대한 소고
소나무
4497 2007-06-05
일선김씨 묘 출토 조선 사발에 대한 소고 1. 어떠한 사심도 없이 빚은 조선 사발이다. 작으면서도 넉넉한, 밥 한 그릇 담거나, 차 한 잔 마시면 흡족할 사발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맑으면서도 은은한 누르스름한 색의 깊은 맛이 한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사발 바깥은 물레를 돌린 조선 사기장(沙器匠)의 생생한 손자국이 궤적을 그리며 그릇을 둘러싸고 있다. 굽 부분은 태토(胎土)가 그대로 드러나고 어떤 부분은 유약이 흘러내린 그대로 응결되어 있다. 두 손으로 감싸 쥐면 알맞은 크기다. 눈으로 보는 차원 넘어 몸으로 느끼는 대상이다. 이 사발은 지난 2004년 4월 16일(陰曆 閏 2월 27일) 집안 문중에서 고향인 경북 군위군 효령면 성동의 선산에 있는 13대조 도락(都洛)공의 배위(配位)인 일선김씨부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하여 파묘(破墓)하던 중, 유택(幽宅)에서 접시 한 점, 무쇠로 만든 젓가락 2쌍과 함께 출토되었다. 유골과 함께 깊은 땅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약 4백년 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1) 이 땅에서 죽은 사람의 무덤 속에 부장품을 넣는 장례 습속은 6세기 신라 지증왕때 순장금지령(殉葬禁止令)이 공포되면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는 박장(薄葬)으로 변한다. 이후 웬만한 지배층의 무덤이라 해도 청동 숟가락, 술병 하나, 술잔과 밥그릇 정도가 부장품으로 묻혔다. 게다가 14~16세기는 성리학이 지배층의 이념으로 정립되면서 사후세계와 관련하여 부장품을 넣는 습속은 거의 사라진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무덤 속에서 도자기가 출토되는 일은 드물지만 조선 초기까지는 조선 사발이 출토되기도 한다. 부장품 중에 ‘명기’처럼 무덤에 넣기 위해 따로 만든 특수한 것도 있지만 조선의 부장품들은 대개 그 무덤의 주인이 실제로 쓰던 물건을 넣은 것이다. 일선김씨 묘 출토 사발은 출토 당시 인부들의 부주의로 파손되었으나, 평소 숭조(崇祖) 정신이 각별한 가친(家親)께서 사발과 부서진 파편들을 수습해 오셨다. 그러나 이 사발을 처음 보았을 때, 흔히 본 하얀 백자도 아닌데다 워낙 심하게 파손되었고, 파편 조각도 일부 망실하여 그저 지방 가마(民窯)에서 제작된 질 낮은 사기(沙器)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이 사발이 조상의 무덤에서 나왔고, 그 출처는 물론 제작연대를 거의 정확히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중에 나도는 출처불명의 조선 사발과 다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발의 깨진 파편을 붙이고 망실된 부분은 석회로 붙여 복원을 해 보았더니 그 모양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깊고 부드러운 색깔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간 박물관의 두꺼운 유리 속에 들어 있는 도자기들을 눈으로만 보다가 가까이서 보고 만지면서 조선 사발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2. 이번에 출토된 사발이 묻혀 있었던 무덤의 주인공인 김씨 부인의 생몰 년대는 미상이나, 아들(子)인 12대조 도안기(都安畿)2)공의 생몰연대가 1569~1629년으로 대동보(大同譜)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 연간(1568~1608), 즉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발이 제작된 시기인 16세기 후반은 한국 도자기 역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시기다. 즉 조선 초기에 성행했던 분청사기의 말기 연대이자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3) 16세기 후반은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전국적으로 서원이 설립되고 향약이 보급되어 사림들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특히 향약의 보급과 서원의 설립은 성리학의 발달을 촉진시켜 백자의 실생활화로 이어지며, 그 결과 분청사기의 백자화가 계속되어 백자에 흡수되는 현상을 가져왔다.4) 일선김씨 묘 출토 사발도 이러한 백자의 일종이다. 그러나 17세기 초 이후 즉 조선 중기와 후기에 오면 더 이상 이러한 사발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로서는 임진왜란(1592~98)의 영향이 컸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할 만큼 도자기 약탈에 혈안이 돼 있었다.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의 봉건 영주들은 서로 앞 다투어 조선의 우수한 도공들을 납치하였고 이후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도자기 산업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결국 도자기 제조 기술이 점점 쇠퇴하게 된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때 ‘왜사기’ 제작이 성행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조선 고유의 사발은 상사기(常沙器)로 불리다가 왜사기는 ‘사기’로, 상사기는 막사기로 불렸고, 결국에는 상사기를 파는 상사기점의 이름마저도 ‘막사기점’으로 바뀌면서, 막사기점에서 파는 그릇이 막사발이 된 것이다. 즉 막사발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백사기다. 그런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烈, 1889~1961)가 조선 사발인 이도 차완을 보고 막사발로 규정하면서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도 흔히 조선 사발을 막사발로 오인하게 된 것이다.5) 3. 조선 백자는 처음 관악산 주변과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해서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김씨부인 묘 출토 사발은 조선 초기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 만들어진 사발이다. 이러한 지방 가마에서 만들어진 사발은 관요에서 만들어진 백자에 비해 도자사(陶磁史)에서 경시되고 시중에서도 그만큼 가치가 낮게 평가된다. 즉 일선 김씨부인 묘 출토 사발은 조선 초 지방 가마에서 제작된 경질 백자로 주 용도는 밥그릇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초기 사발이 일본에서는 찻잔으로 전용하여 쓰여 졌으며, ‘카타테 차완’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일선김씨 부인 묘 사발은 매끈하게 생긴 일반적인 조선 초기의 다른 사발보다 물레선, 즉 손자국이 더 거칠게 남아 있다. 그릇 색깔도 다른 조선 사발이 녹색 끼의 단일색이지만 일선김씨 묘 출토 사발은 전체적으로는 황색 끼를 띤 부드러운 색이면서도 그 색감이 풍부하고 깊다. 이를테면 일선김씨 묘 출토 사발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전체모양, 부분 부분마다 운치 있는 생김새, 또한 산화불(酸化焰)과 환원불(還元焰)을 동시에 받아 색감이 풍부하고 다양해서 풍부한 정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일본에서 명완(名盌)으로 꼽는, 이른바 “이도차완(井戶茶碗)”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일선 김씨 묘 출토 사발과 이도차완은 제작시기와 색깔 및 크기가 비슷하다. 즉 이번에 출토된 사발은 수고, 즉 그릇 높이가 6.7~7.0cm, 그릇 구경이 14.1~14.6cm로서 현재 일본에 있는 이도차완들과 거의 같은 평균 크기이다.6) 그러나 일본에서 명품으로 꼽는 이도 차완은 굽이 높고 구연부와 몸체가 똑바로 이어져 옆면이 거의 일직선이다. 그리고 그릇 하단부 표면에 이른바 ‘가이라기7)’, 혹은 매화피(梅花皮)라고 해서 울퉁불퉁하게 유약이 응결된 부분이 있고, 유약이 갈라진 자잘한 빙렬이 그릇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도차완은 지금까지 대체로 16세기 중반 경남 진주 지방 및 인접 해안지방에서 만든 사발로 추정되지만, 그 모양이 다양하기 때문에 한 가마에서 제작된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도차완은 일본에서 ‘미의 종교’라고 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일본 특유의 탐미주의적 대상으로 존숭된 조선 사발이다. 이도차완은 무사와 승려들의 차 문화, 즉 다도(茶道)의 산물이다. 일본 차도의 대성자는 센노 리큐(千利休, 1522~91)선사이며, 이도차완에 대한 심미적 미학도 그에 의해 심화되었다. 그 후 이도차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는 물론 15세기 이후 거의 모든 ‘다이묘(大名)’들과 상인들까지 애호하였다. 이도차완 중 현재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 고호안(孤蓬庵)에 있는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井戶)는 그릇의 색깔과 자잘한 빙열, 자연스런 매화피 등으로 천하의 명기(名器)로서 대명물로 꼽히는 일본의 국보다. 사진으로 보아도 명품임을 직감할 수 있다. 이 기자에몬 이도를 한 때 소장했던 사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등이 있으며, 어떤 소장자는 이것을 내놓기 싫어서 목에 걸고 객사했다는 실화가 있을 정도로 이 이도차완에 얽힌 일화는 드라마틱하다. 그리고 또한 근세에 와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잡기설’8)로서도 유명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 원래 용도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9) 일본에서 흠모와 경배의 대상이 된 이도차완은 사비(寂び)와 와비(侂び)같은 청정하고 고요한 마음을 중시하는, 즉 정(靜)적인 일본의 전통적인 미학이 반영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전국시대가 지속되면서 무사들은 언제 전장에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심미성을 찾는데, 이는 일본에서 성행한 선(禪)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일본인의 심미 성향이 어떤 대상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게 몰입하는 특성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하며, 단적인 예로 돌로 자연을 응축시킨 ‘분석(盆石)’이라든가, 분재(盆栽) 등이 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일본 특유의 차 문화가 형성되며, 찻잔에도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심미의식이 투영된다. 차 맛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찻잔까지 감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찻잔에 생긴 우연적 흠집이나 흔적까지 미적 가치로 느낀다. 사실 이처럼 ‘자연’ 혹은 자연을 연상케 하는 사물을 통해 자연의 섭리와 무한감을 느끼고 거기서 삶의 이치를 발견하는 미의식은 한자 문화권 공통의 미의식이지만, 일본에서 특히 심화된다. 가령 그릇의 태토가 그대로 드러나는 굽 부분을 보고서도 아무리 감추고 가리려 해도 드러나는 진실이 있음을 깨달아 삶이 항상 하늘과 인간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삼았던 것은 자연의 이치를 삶의 이치로 삼았던 일본인의 미의식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일본인의 심미의식은 미적 가치가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물론 이 땅에서도 전통적으로 심미의식의 수준이 높았으며, 이로 인해 고려청자와 조선시대의 분청사기, 그리고 백자와 같은 매우 격이 높은 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들은 궁중이나 지위 높은 서울 지역의 사대부들만이 쓸 수 있는 생활 용기였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사기공들이 거의 다 일본으로 잡혀가면서 기술마저 단절된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자기가 많이 제작되고 널리 보급되지만 그만큼 격은 떨어졌으며 일제시대 때 왜사기가 대량으로 쓰여 지면서 실질적으로 전통자기의 맥은 끊어진다. 3. 요즘 만들어지는 산업도자기들은 하나같이 기계로 찍어내어 천편일률적이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동안 전통도자기의 맥을 끊어져서 그런지 지금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재현 도자기들도 도예가 들의 한결같은 염원과 달리 대개 모조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이도차완 재현 품을 보면 일본에 전해지는 것들과 달리 대개 그릇 모양의 격도 떨어지고 유약이 지나치게 두껍게 착색되어 있어 발색이 투박하다. 특히 굽이 높은 것과 그릇 모양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많고, 억지로 만든 ‘매화피’도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일부러 투박하게 만든 도자기들을 보면 잘 만든 산업 도자기보다도 그 격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이는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심미의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의 문제다. 이는 서양의 도자기를 감각적으로 수용한 현대 도예가들의 그릇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의 그릇들은 모양도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깊은 맛이 없다. 이는 역시 서양의 자기들을 감각적으로 흉내 냈기 때문이다. 일선김씨부인 묘 출토 사발이나 이도차완은 사기공의 손자국, 또는 물레질한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또한 모양도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그릇의 색도 부분마다 다르고 맑으면서도 깊이감이 있다. 이는 ‘환원불’과 ‘산화불’이 한 그릇에 나타난 현상으로, 장작가마에서 구웠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사동의 도자기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도차완 재현 품들과 일선 김씨 묘 사발은 서로 확연히 차이가 있다.10) 또 온갖 현란한 기교를 부린 요즘의 현대자기들과도 다르다. 일선 김씨부인 묘 출토 사발은 요즘의 풍조인 명품 지상주의 시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가장 소박하고 정직한 자태를 보여준다. 이처럼 문제는 미의식, 즉 안목이다. 시중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도자기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자기는 흙이라는 물질을 구워 만든 생활용기다. 그러므로 삶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어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문명과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하게 하는 도자기라면 비록 얼마간 금이 가고 훼손되었다 하더라도, 심지어 작은 파편인 사금파리 한 조각에서도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하나의 명품이란 원래부터의 대상의 실체적 특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 전해지는 명품 차 사발이 유명한 것은 물론 그릇도 좋지만 그것을 소장하게 된 내력과 세월의 흔적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동다송』의 저자이자 추사의 친구인 초의 스님의 찻잔도 그 한 예다. 즉 명품의 아름다움은 그 대상의 실체적 특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과 감응, 즉 상호 교감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11) 4. 일선 김씨 부인 묘 출토 사발은 4백년이나 땅 속에 묻혀 있었음에도 한 시대의 역사를 응축한 채 시공을 넘어 우리 앞에 생생히 현전한다. 나는 이번에 조상이 실제로 쓰던 물건인 사발을 통해 내 몸속에 맥맥하게 흐르는 조상의 숨결과 조선 사발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발은 고려청자도 아니고 조선의 관요에서 만들어진 호사스런 백자도 아니다. 즉 관요에서 제작된 그 시대의 지배층의 이념과 취향이 반영된 도자기가 아니라 조선 초기 경상도 북부지방 지방 가마에서 이름 없는 한 사기공이 무심한 마음으로 빚은 소박한 사발이다. 그래서 이 조선 사발은 가까이서 볼수록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정감어린 누르스름한 색과 작지만 당당한 자태를 통해 꾸밈없는 소박함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전통 도자기는 요즘의 산업도자기와 달리 전기 가마가 아닌 장작 가마로 굽기 때문에 구워지는 과정에 따라 그릇이 색깔이 달라지는 ‘요변 현상’이 일어나 사기공의 솜씨나 그릇이 구워지는 과정에 따라 천태만상이다. 그래서 색깔에 깊은 맛이 있고 모양이 자연스러우면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면 얼마든지 명품이 될 수 있다. 거기다 세월의 흔적과 내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참된 미적 가치란 어떠한 이념적 표상을 재현하는 기교나 ‘전형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만남’을 통한 참된 감응에 있는 것이다. 각주 1) 실제로 이번에 총 6기의 묘를 이장했으나 이 무덤에서만 이 사발이 출토되었다. 2)도안기 공은 선무랑(宣務郞), 군자감정(軍資監正), 주부(主簿)의 벼슬을 역임했다. 선무랑은 조선 시대 종6품(從六品) 문관(文官)의 참상관(參上官) 위계(位階)이고, 군자감정은 군자감(軍資監)의 정3품 벼슬이며, 조선(朝鮮) 시대 호조의 산하기구로서 군수 식료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은 관아(官衙))의 최고 책임자로서 정3품 당하관이었다. 주부는 종친부(宗親府) ․돈령부(敦寧府) ․한성부(漢城府) ․봉상시(奉常寺) ․종부시(宗簿寺) ․사옹원(司饔院) ․내의원(內醫院) ․상의원(尙衣院) ․사복시(司僕寺) ․군기시(軍器寺) ․사섬시(司贍寺) ․군자감(軍資監) ․장악원(掌樂院) ․관상감(觀象監) ․전의감(典醫監) ․사역원(司譯院) ․선공감(繕工監) ․풍저창(豊儲倉) ․광흥창(廣興倉) ․사도시(司寺寺) ․사재감(司宰監) ․제용감(濟用監) ․평시서(平市署) ․사온서(司署署) ․전생서(典牲署) ․내자시(內資寺) ․예빈시(禮賓寺) ․의영고(義盈庫) ․장흥고(長興庫) ․양현고(養賢庫) ․혜민서(惠民署) ․전옥서(典獄署) 및 무관관서의 훈련원에 두었던 종육품관으로서 선무랑의 품계와 같다. 3)도자사의 시대구분은 일반적인 역사구분법과 다르다. 강경숙에 의하면 대개 1392년~1600년을 조선 백자가 완성되는 초기, 중기는 1600~1750년 사이로 회백자와 철화백자가 번창한 시기다. 후기는 1752~1883년까지로 흔히 ‘分院里 시대’라 부르며 백자가 대중화되고 진사백자가 나타나는 시기다. 말기는 1884년에서 1945년 까지를 말한다. 4) 윤용이 지음, 『아름다운 우리도자기』, 학고재, 2001, 292-293쪽 5) 신한균 지음 , 『우리 사발 이야기』, 가야넷, 2005, 44-46쪽 참조 6) 일본에 있는 이도차완들의 수고는 대개 5~8cm, 구경은 약 13~15cm인데, 특히 14.3~14.9cm정도 크기가 많다. 즉 일선 김씨 출토 대접과 이도차완은 대체로 거의 같은 크기다. 예컨대 이번에 출토된 대접과 거의 동일한 크기의 이도차완으로 하쿠바이이도(白梅井戶, 6.9×14.5cm)와 다이히잔이도(大悲山井戶, 6.2~6.4×14.1~14.4cm)가 있다. 이외에도 비슷한 크기를 지닌 이도차완으로는 마쓰야이도(松本井戶,6.1~6.4×14.3cm)와 쇼안이도(少庵井戶, 6.2×14.6cm) 가 있다. 그리고 크기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모양과 색깔로 볼 때 것은 와스레미즈이도(忘水井戶, 7.2~7.4×13.8cm)와 센소탄이도(千宗旦井戶, 7.2×15.8cm)를 꼽을 수 있다. 7) 사무라이 들이 쓰던 칼의 손잡이 부분에 밀착감을 위해 바다표범 가죽을 감았는데, 이를 ‘가이라기’라고 했다. 매화피가 있는 차사발을 잡을 때 마치 바다표범 가죽처럼 느껴진다 해서 ‘가이라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8) 이에 대해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가장 값싼 보통의 물건이다. 개성 따위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평범함의 극치다....... 이 정도 흔해빠진 물건은 없다. 이것은 틀림없는 천하의 명기 대명물의 정체다. 9) 이도 차완의 원래 용도에 대해서는 야나기 무네요시 이래 통설이었던 조선 서민들의 막사발이라는 잡기설, 그리고 하야시 세이조와 신한균의 의해 주장된 제사지내는 멧사발이라는 제기설이 있다. 그리고 정동주에 의한 ‘발우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 중 굽이 높고, 매화피가 뚜렷하며, 또 무덤 속에서 출토된 예가 없다는 점을 볼 때 제기설이 가장 유력해 보이나, 향후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10) 실제로 이번 일선 김씨 부인 묘 출토 사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계기로 국립 중앙 박물관이나 인사동 골동품 가게, 그리고 도자기 재현품을 파는 곳을 들러보면서 절실히 느꼈던 것은 대다수의 재현 도자기들의 질이 너무 조악하고 형편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물건들을 외국인들이 둘러보면서 관심을 보일 때마다 민망했다. 11) 죤 듀이는 참 아름다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Beauty is the mutual adaptation of the several factors in an occasion of experience.
17 no image 대안공간 눈 개관전과 최근 나의 작업에 대한 변
소나무
3766 2007-06-05
대안 공간 ‘눈’ 개관전과 나의 최근 작업에 대한 변 1. 지난 4월 23일 대안 공간 ‘눈’과 아트샵 겸 휴게공간인 ‘갤러리 아트 넷’의 개관 행사가 수원에서 있었다. 화창한 봄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오픈 행사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대안공간 ‘눈’과 갤러리 아트넷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내 팔달구 북수동에 위치하며, 그래서 가까운 곳에 화홍문, 장안문,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용연등과 더불어 화성행궁, 수원시 경기도 무형문화재 전수관, 창호 성재 전시실 등이 있다. 이곳은 40년 가까이 주거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을 개조하여 1997년~1999년 갤러리 아트넷을 운영하였던 김정집 선생과 조각가 이윤숙 선생이 지역의 시각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육성하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먼저 대안공간 ‘눈’은 대지 90여평에 40평 규모의 전시공간으로 그리고 30여 평의 야외전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안공간 ‘눈’은 순수 창작활동을 하는 실험적인 작가들을 위해 기획 위주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이 지역의 미술대학과 지역작가, 일반 시민의 연계와 소통을 통해 지역의 문화발전에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아트샵 겸 휴게공간인 ‘갤러리 아트넷’ 은 수원과 화성의 시각예술분야의 작가와 활동내용을 테이터 베이스 화 하는 일과 함께, 작가와 컬렉터를 연결하는 역할을 주로 하며, 아트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여 이익금으로 대안공간 눈을 운영, 지원하는 형식으로 운영될 방침이라고 한다. 대안공간 ‘눈’과 ‘갤러리 아트넷’은 개인 전시공간으로서는 수원에서는 처음으로 실내와 실외의 전시시설과 아트샵, 휴게시설을 갖추어 예술인과 일반 시민들을 위한 신선한 문화의 매개하는 장소로서 수원시민과 화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 공간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곳이 그야말로 언제나 가보고 싶고, 머물고 싶은 명소가 되려면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며, 이는 문화예술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정신에 달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 이 대안공간 ‘눈’의 오픈전으로 2004년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한 -새로운 유형의 예술문화활동 지원사업의 일환인 예술인 세계문화체험-슈룹 ‘백두대간-히말라야 프로젝트’인 히말라야 보고전(전시기간 : 4. 23-5. 20)이 열리고 있다. 참여작가 및 프로젝트 참가자는 김성배(설치, 드로잉), 안원찬(사진), 도병훈(회화), 이윤숙(조각), 박근용(조각), 이우숙(드로잉), 김정집(대안 공간), 김예옥(출판), 김인자(문학), 이해덕(언론) 등이다. 3. 나는 최근 수 년 간, 책 출간(*현재 보류 상태임) 문제로 원고와 씨름하느라 2000년 다섯 번째 개인전 이후 별다른 작품 발표를 하지 않다가, 이번 개관 전시에 오랜 만에 작품을 출품하게 되었다. 내가 이번에 출품한 작품 제목은 이다. 광목천에다 짙은 푸른 색으로 그린 다섯 개의 산봉우리 아래로 지도의 한 부분을 축소한 듯, 문명의 흔적인 선돌과 고인돌, 스톤헨지, 신전, 현대의 건물 등을 텅 빈 여백 사이에 부분적으로 조그맣게 그려 넣은 것이다. 그리고 중앙 부분 하단에는 미켈란젤로의 중 신과 인간의 손길이 닿으려는 부분만 드로잉으로 그려 놓고 그 아래에는 우표만한 크기의 책 한 권을 그렸다. 그리고 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듯 신의 손 바로 위에다 조그맣게 반가사유상 하나를 정교하게 그렸다. 이번 나의 그림은 현실에 대한 비판과 문명에 대한 성찰을 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거대한 다섯 개의 산 이미지와 조응하면서도 이에 비하면 매우 미미한 흔적처럼 보일 뿐이다. 가상세계와 교환가치, 그리고 상품미학 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짓는 주요 특성이다. 문제는 이러한 양상들이 현대인들에게 허위의식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버리는 한 우리의 문화는 그만큼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떠한 예술이든 현시대는 자연과 문명,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부단한 성찰이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가치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든, 우리나라의 한 시골 벽촌에서 작업을 하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근대 이후 주체와 개인의 감성적 존재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유례없는 인류문명을 창출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로 인한 개별적 존재성의 극대화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을 분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문명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현실에 대한 섬세한 반성이 동시에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므로 문명의 변천 과정과 교류와 조응이라든가, 종교의 본질과 종교 간의 공존 문제 등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과 문명의 관계, 개인과 사회, 종교 간의 갈등 등 이러한 문제를 별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현대의 예술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각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림의 경우, 점을 찍든 선으로 그리든, 단일한 화면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특성이 있으며, 이는 저마다의 몫이리라. 2005년 4월 27일 도 병 훈(화가)
16 no image 팔대산인의 그림
소나무
20128 2007-06-05
팔대산인, 그 격통激痛의 삶과 그림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선묘 일부만이 보일 뿐이다. 왼쪽 하단에 막 피어난 목련 한 송이가 그려져 있고, 오른 쪽 윗 단에 막 개화하려는 꽃봉오리를 축으로 하여 나뭇가지가 그려져 있다. 몰골법으로 그린 선의 농담과 굵고 가는 변화만 있을 뿐 화면은 텅 비어 있다. 그런데 여백은 그저 비어있다고는 할 수 없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그림 <송백동춘도> 나는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목련도>를 볼 때마다 흔히 얘기하는 여백의 미학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적 시공관을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그려진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의 팽팽한 긴장 속에 한 치의 빈틈도 발견할 수 없다. 지난 1992년 중국의 베이징에 갔을 때 팔대산인의 화집을 사기도 했지만 막상 그의 그림을 직접 본 것은 지난 2001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요녕성 박물관 소장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그것은 <송백동춘도>로서 팔대산인 그림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특히 이 그림은 그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어서 숙연한 기분이었다. 이는 또한 팔대산인의 남다른 회한과 격통激痛의 삶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예인의 삶, 격통의 그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예술가의 삶이 평탄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 중에서도 팔대산인은 특히 기구하고 파란만장하기 그지없는 삶과 범상치 않은 예술세계를 이룩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주탑朱耷인데, 명(明) 황실의 후예로서 1644년 명조가 멸망하자 스물세 살 때 머리를 깎고 중이 된 후 30여 년 동안 수도에 전념하거나 승려생활을 하면서 이 때는 평범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러나 당시 중국 강남을 뒤흔든 ‘삼번三藩의 난’ 과 같은 사건이 전개된 격동의 시대 조류에 휩쓸리면서 그는 더 이상 평온한 삶을 살 수 없게 되며 그의 예술세계도 크게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 이 무렵 그는 지방 현령의 초대를 받고 시회詩會에 참가했다가 관에 연금되는 사건이 일어나 이 때문에 발광하게 된 그는 어느 날 몸에 걸치고 있던 승복을 갈기갈기 찢어 불사른 뒤 뛰쳐나가는 데, 이 때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그래서 팔대산인은 한동안 비참한 나날을 보내지만 조카의 보살핌으로 다시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되찾아 그림도 다시 그리게 된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그는 일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며 홀연히 크게 웃고 통곡하는 광증에 시달리면서 고절高絶하고 처절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 그의 그림을 보면 그의 이러한 삶의 고뇌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 중에서 새 그림은 배를 두드리거나, 한 발로 서 있거나, 또 물고기 그림들은 하나 같이 고기들이 눈을 크게 뜨고 검은 눈동자는 푸른 하늘을 향해 위에 박혀 있는데, 이는 청나라의 지배계급과 권세가를 백안시, 즉 멸시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림에다 이름을 쓸 때도 ‘팔대八大’라는 두 글자는 울 ‘곡哭’이나 웃을 ‘소笑’처럼 보이게 하고, ‘산인山人’이라는 두 글자는 ‘이 지之’처럼 써서 곡지哭之 : 이를 슬퍼하여 운다 나 ‘소지笑之 : 이를 웃는다 로 읽게 하였다. 이는 지나간 세상(명 왕조)를 생각하며 울고, 지금 세상(청 왕조)을 비웃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청에 대한 비분강개,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과 고통의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본다. 특히 그가 69세(1694년) 때 그린 《안만첩安晩帖》에는 두 장의 산수화를 제외하고 꽃이나 새, 물고기, 쥐, 강아지나 돌 등을 그야말로 일필휘지, 즉 간단한 붓놀림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최소한의 표현으로 이 정도로 깊고 풍부한 감동을 주는 그림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경지다. 특히 간결하면서도 대담한 필치는 탁월하여 그저 표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소나무松, 연蓮, 괴석怪石을 그린 그림은 삼품三品이라 하여 후대에서 더 높이 평가했다. 팔대산인은 초기에는 주로 화조를 많이 그리고 후기에는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그 뿐만 아니라 팔대산인은 시문․서예․전각 등도 잘했으며, 특히 필법은 격식에 얽매임이 없이 자유분방한 것이 일품이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화경은 역시 피를 토할 듯한 삶의 절절함을 초연한 필묵으로 도도하게 표출한 데 있다. 그는 격변의 시기에 태어나 미칠 수밖에 없는 통절한 예인藝人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면 특정시대 특정지역을 넘어선 보편성을 느낄 수 있다. 삶과 죽음! 그 알파와 오메가의 곡진함을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역시 색즉시공이다.
15 no image 현대와 현대예술 바로보기
소나무
4240 2007-06-05
현대와 현대예술 바로 보기 1. 표범의 송곳니 자국이 뚜렷한 선사시대 두개골 화석이 증명하듯, 고대 인류는 포식자의 먹이감이기도 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고도로 정교해진 신경망인 뇌의 발달에 힘입어 인류는 자연을 극복하면서 문명의 세계를 이루었다. 이제 인류는 몸속의 신경계를 인드라 망처럼 전 지구의 차원으로 넓혀놓았다. 그야말로 불교의 화엄종(華嚴宗)에서 말하는 무한중중연기(無限重重緣起)의 세계요,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종횡무진 활동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어떤 사물이나 세계, 즉 자연과 직접 만나거나 접촉하는 대신 주로 정보 통신망을 통해 ‘상징적 가상접속’을 한다. 즉 전자감각적 지각(Electro Sensory Perception : ESP)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텔레메틱스(Telematics)주1), 사이버지각(cyberception),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주2) 텔레노이아(telenoia) 등의 새로운 용어들이 시사하듯이 기술과 인식이 결합된 의식이다. 이처럼 고도 정보기술사회의 도래로 인한 정보량의 증가와 속도는 시공간의 개념까지 바꾸고 있으며, 그만큼 인간의식의 확장을 예감케 한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의 과잉정보를 ‘데이터 스모그(data smog)’로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각종 영상매체가 24시간 쏟아놓는 과잉정보는 감각과 사고를 획일화하고 마비시키기도 한다. ‘동일․반복․속도’의 메커니즘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이다. 확대된 신경망이 현대인의 감성과 의식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처럼 현대의 정보화 사회는 인간의 ‘내적’ 욕망까지 조작한다. 개인의 의지는 정보의 의지인 것이다. 또한 소비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상품의 논리가 일반화되어 노동과정이나 물질적 생산품뿐만 아니라 문화, 섹슈얼리티, 인간관계, 심지어 개인적 욕망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또 이러한 상품은 이미지와 기호로 소비되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속에서 소멸한다. 그러므로 소비시대의 인간은 자기노동의 생산물뿐 만 아니라 자기 욕구조차도 직시하는 일이 없으며,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다.주3) 따라서 유행도 개성의 추구가 아니라 유도되고 조작당하는 몰개성적 전염 현상이기 십상이다. 더 큰 문제는 유행현상이 다른 모든 가치와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킨다는 점이다. 특정한 유행에 경도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가치들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사회적 모순에 무감각하게 되어 결국 스스로를 낙오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 욕구로 충족감을 누리는 동안 오래전부터 ‘도구적 합리주의’에 의한 수많은 제도적 장치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거나 구속해왔다. 그런데 도구적 합리주의의 바탕은 사실 학교 교육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형성된다. 바로 이 때문에 무엇보다 학교 교육의 실상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한 전위적인 현대예술의 역능에 대해 바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전위적인 현대예술이 삶과 현실을 다시 보게 하고 반성케 하기 때문이다. 2. 근대 이후 시작된 학교 교육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간파했듯이 국가적 ‘규격화(normalization)’의 논리를 실현하는, 즉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장이다. 더구나 이 땅의 초중등 교육은 ‘대학 서열화’란 완고한 체제 속에서 ‘학벌주의’와 ‘획일주의’에 함몰되어버림으로써 다양하고 풍성한 삶의 가치를 알게 하는 체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때문에 폭넓은 체험과 유연한 사고를 전제로 가능한 창의력이 제대로 함양될 수 없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질적으로 고양된 문화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현행 우리나라 미술교육의 실상과 위상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미술은 그 과목의 특성상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표현으로 생성되는 ‘놀이’의 성격이 있으며, 이로 인해 창의적인 영역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시간에 ‘놀이’ 차원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허용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미술교육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아교육에서 이러한 자기표현으로써의 ‘놀이’는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유아교육의 한 축으로서 미술교육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다른 교과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미술교육은 획일적인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어떤 대상을 관찰해서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만드는 미술수업을 한다. 초․중․고교에서는 주로 기능적인 실기 위주의 미술수업이 행해진다는 것이다.주4) 더 문제인 것은 평가다. 그것은 주로 한 가지 잣대, 이를테면 그림의 경우 실재 대상과 유사하게 그릴 수 있는 묘사력이 그 주된 척도다. 게다가 고등학교에서는 미술이 대학의 당락을 결정짓는 수능 교과가 아니기 때문에 미술을 등한시 한다.주5) 그러면서도 미술에 대한 잘못된 인식만을 심어준다. 말하자면 미술이란 특수한 천재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식이다.주6) 그래서 이와 같은 잘못된 미술교육으로 인해 일반사람들은 대개 미술에 대해 “비싼 그림”,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영역”등으로 인식하면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다. 가령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술이 ‘솜씨 있는 그림 기술’인 것도 학창시절에 그런 경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실생활과 별로 연관이 없는 영역이 미술이라고 오인하게 된다. 이러한 미술교육의 실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전체주의’적 또는 ‘획일적 가치’를 보편적 의식으로 강요한다는 데 있다.주7) 물론 학교 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외적 인격(persona)’은 사회생활의 기본조건이기도 하다.주8) 또한 이를 토대로 우리는 사회생활의 토대인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이처럼 학교에서 주로 배우는 것은 도구적 사유체계이다. 그렇지만 외적 인격의 강요는 한 개인의 개성적 잠재력을 억압한다. 니체 (Nietzsche, 1844~1900)주9)는 우리 인간이 “한결같은 논리로 인정하는 일체의 개념들이 깊이 들여다보면 서로 어긋나는 생각체계에 따른 것이며, 논증적 사고가 요구하는 진리 그자체가 하나의 가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가끔 세상 속에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낯선 느낌을 통해서 자각할 수 있듯이, 인간의 삶은 기호체계를 전제로 성립하는 인간의 의식을 넘어선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삶이란 언어적 논리로 규정할 수 없는 세계 속의 한 살이(生)다. 이처럼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삶에 대해 현대의 예술가들은 바로 그 밑자리부터 다시 생각하고 모험을 하는 존재이다. 3. 권력과 제도가 지배하는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은 그 권력과 제도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러한 시대의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으로서 잘 포장된 상품과 같은 향유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아키(archy), 즉 인간의 권력 지향적 제도의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모든 개별자의 고유성을 거대한 체제 속에서 도구화해버리는 ‘관리된 사회의 비합리성’을 거부하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양상이 현대예술의 주된 성향인 아나키즘(anarchism)적, 혹은 ‘아방가르드’로 지칭되는 현대예술이다. 즉 끊임없이 동일화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비동일자( 타자)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현대는 오리지널한 미적 성취도 시장의 대량 복제 주10)에 의해 하루아침에 흔하고 값싼 ‘키치’가 되어버린다. 이와 같이 어제에는 새로웠던 것이 오늘은 진부해지는 것이 현대 사회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현대예술은 이러한 진부함을 급진적으로 거부하려 한다. 실제로 현대이후 예술보다 더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영역은 없으며, 그만큼 예술 표현의 형식은 자주 바뀐다. 온통 공리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현대예술가는 더 이상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미적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가치를 끊임없이 거부하는 현실비판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 예술가들은 이 모호한 현실 속에서 기약 없는 희생을 치르면서도 도전과 모험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다. 불가(佛家)에서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如實之見)’이 무엇보다 으뜸가는 해탈의 길이라고 말하듯 예술은 감각적 깨침을 통해 현실을 바로 보는 수단이자 길이다. 러시아의 슈클로프스키(Shklovsky)는 현대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의 감동을 회복하기 위하여, 감각을 다시 찾기 위하여, 돌이 정말로 돌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주11) 어떠한 이념적 독재도 거부하면서 우리 몸에 직접 호소하고자 하는 이러한 현대미술의 경향은 질 들뢰즈의 용어로 표현하면 ‘탈영토화,’ 혹은 ‘탈주’이다.주12) 이는 인간/기계, 정신/몸, 물질/비물질, 자연/문화, 주체/객체 등 이항 대립적 사유의 모든 근간을 부정하고 해체한 인간의 원형질적 감수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 O. Wilson) 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가장 사적인 경험과 전망, 인식을 감상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직접적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주13) 란 말도 예술의 특성을 잘 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 특성인 지각력(perception), 감정이입(empathy), 상상력(imagination)이란 특별한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인간의 잠재력의 표현이다. 이 중에서 상상력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을 경계 짓지 않는 유연한 사고력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잠재력의 발현이 바로 ‘창의력(creativity; creativeness)’이라 할 수 있다.주14) 그러므로 현대인의 획일적인 일상성(normality)은 창의력을 구현하는 예술을 통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비판적 현실인식과 이러한 인식을 넘어선 지각의 통합을 통해 부단히 새로운 감응(affect)을 야기하는 모험의 과정이 곧 현대미술의 역사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 현대는 물질적 생산품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개인적 욕망에 이르기까지 기호화된 상품의 논리가 일반화되어 모든 개별자의 고유성을 획일화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기호 속에서 명멸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자신의 거짓 욕구를 직시할 수 없으며, 자신의 참 모습과도 마주 대면할 수도 없다. 이처럼 미망이 지배하는 삶에 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삶을 확장하고 일깨우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현대의 예술가들이다. 현대예술의 참된 존재가치는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사고의 틀을 깨뜨리는 데 있으며 나아가서는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세계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혹은 ‘예술가’란 말도 현대의 예술가들에겐 하나의 방편적 용어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체험의 확장을 통해 또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지만, 현시대의 특성상 현실을 지배하는 일상적 통념을 뒤집어엎는(subversive) 지각적 감응을 유발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자 다양한 방식이 현대예술이다. 현대예술은 인간을 규정해왔던 인습적 규범과 통념에 도전하여 감수성을 회복하고 넓힘으로써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metamorphosis)시키는 영역인 것이다. 각주 주1) S. 노라(Simon Nora)가 처음 쓴 말로서 컴퓨터와 네트웍의 결합을 의미하며, 예술과 사이버네틱스, 텔레메틱스, 인터랙티브 미디어의 관련성에 관한 선구적인 사상가이자 예술가인 로이 애스콧(Roy Ascott)에 의해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미디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됨. 로이 애스콧/이원곤 옮김, 『테크노에틱 아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28-29쪽 참조. 주2) 네트웍에 접속한 상태의 인식론적인 특질로서 즉 전혀 다른 두개의 경험영역(two distinctly different fields of experience), 같은 대상에 대한 두개의 시선(two distinctly views of the same event), 격리되어 있는 두개의 원격지(Two separate or remote location)에 동시에 접속하고 있는 존재상태를 말한다. 로이 애스콧/이원곤 옮김, 같은 책, 221쪽 참조. 주3) 이상 상품의 논리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소비의 사회』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한 글임 주4) 우리나라의 근 현대미술교육은 19세기말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미션 스쿨에서 시작된 이래 갑오경장 이후 새로운 교육제도에 대한 제법령이 제정․공포되면서 ‘도화’라는 교과 명으로 교과과정에 처음 등장한다. 이어 일제시대의 식민 교육정책에 의한 미술교육이 행해지다가 해방이후 한동안의 혼돈 시대를 거쳐 1970년대에 들어 박철준, 김영학, 임영방, 노재우, 박휘락 등에 의해 주로 미국의 ‘표현 기능중심 이론 교육’과 치젝(F. Cizk, 1865-1946), 로웬펠드(V. Lowenfeld1903-1960), 허버트 리드(H. Read)에 정립된 ‘창의성 중심 미술교육’이 절충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표현중심교육은 묘사적 기능 위주로, 창의성 중심교육은 자유방임적 교육이 되는 수가 많았기 때문에 교실현장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재에 이르는 제 7차 교육과정에서는 종래의 미술교육을 보완한다는 취지에서 미술표현 능력과 미술비평 능력, 미학, 미술사에 대해 전반적인 역량을 갖추어야 가능한 ‘이해 중심 미술교육’으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외국의 교육이론에 근거한 교육과정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고, 또한 입시위주의 학교 교육 현실, 무엇보다 전반적인 역량을 갖춘 미술교사가 거의 부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미술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근현대미술 교육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미술교육에 대한 한 권의 책을 꼽는다면 한국미술교과교육학회의『미술교육 이론의 탐색』(예경, 2003)이 있다. 주5) 사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술대학 교육의 실태이다. 대다수의 미술대학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기형적으로 제도화된 미술교육을 함으로써 허위 문화를 부추기는 기술자를 양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6) 테오드로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가 “천재의 개념은 허위”라고 간파했듯, 미술이란 단지 한 개인의 천재적 영감의 소산이 아니다. 천재란 개별자를 절대화한 근대적 주체의 산물이다. 이성의 폭력성의 기반인 근대적 주체를 거부한 아도르노는 예술가를 미적 주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테오드로 아도르노, 홍승용 역, 『미학이론』, 문학과 지성사, 1988, 269쪽. . 주7)서구 근대화의 필연적 귀결인 개인주의는 한 인간의 존엄성, 즉 존재가치가 사회와 제도에 앞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뜻한다. 즉 국가나 민족 같은 전체적 가치보다 전체를 구성하는 개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은 개인보다 공동체적 가치를 우선하는 가치관과 갈등과 충돌의 소지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세대간, 혹은 보수, 진보 세력간의 갈등이 큰 까닭도 이런 가치관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최근 한 젊은 국회의원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포함한 일련의 국민의례가 파시즘과 일제 잔재라 비판했을 때 보수적인 사람들이 반발하고 비난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생각이 깔려 있어서이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아직 전체주의적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는 나라이다. 물론 국가나 사회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국가나 사회는 개인이 생존에 필요한 기본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성립한 근대의 민주사회에서 전체는 결코 개인보다 우선하는 개념이 아니다. 즉 전체를 구성하는 개인이야말로 사회와 제도에 앞서 존중받아야 할 가치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의식의 성숙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뿐만 아니라, 자기 몸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추었을 때 개인주의는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그 속성상 이러한 개인의 존재를 억압하는 기제를 갖고 있다. 주8) ‘외적 인격’은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말한 용어다. 융에 의하면 외적 인격은 사회를 통해 형성되지만 개인의 잠재력은 ‘자기실현’을 통해 구현된다. 이 자기실현은 ‘자아의 형태로 제한된 의식’이 아닌 ‘비자아적인 내적 가치’이다. 주9) 니체는 진리, 이성, 과학, 도덕 등 기존의 모든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하고 전통철학의 경계를 새롭게 사유하고자 했다. 즉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 ‘자연적인 존재’로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관점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20세기의 사상과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주10) 대량 복제의 의한 ‘원본’적 가치의 상실을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라 규정했다. 주11) H. 마르쿠제, 최현․이근영 역, 『미학과 문화』, 범우사, 1989, 190쪽에서 재인용 주12) 질 들뢰즈는 베르그송,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20세기의 대표적인 형이상학자로 이 세 사람은 니체에서 연원하는 생성의 사유를 가장 풍요롭고 포괄적으로 전개한 인물들이며, 특히 들뢰즈는 사건과 의미를 동시에 사유함으로써, 아니 사건이 곧 의미이고 의미가 곧 사건임을 보여줌으로써 의식의 지평을 확장 철학을 제시한다. 질 들뢰즈, 이정우 역의 『의미의 논리』(한길사, 2000) 와 이진경의 『노마디즘1,2』(휴머니스트, 2002)참조 주13) 에드워드 윌슨, 이한음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북스, 2002, 281쪽 주14)) 창의성이란 말은 종래에는 과학적, 지적 의미와 미적 창의성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이러한 구분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미술영역에서는 이 창의성이 19세기말부터 인간의 조화로운 성장을 돕고 창의적인 잠재력을 계발시켜주는 교과로서의 미술교육의 필요성에 의해 등장하며, 특히 오스트리아의 치젝과, 로웬펠드, 그리고 영국의 허버트 리드에 의해 대표되는 이른바 ‘창의성 중심 미술교육’은 20세기 미술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최윤재, 「창의성 중심미술교육」, 『미술교육 이론의 탐색』,(예경, 2003), 261-281쪽 참조.
14 no image 병산서원을 다녀와서 (2005/1/18)
소나무
3921 2007-06-05
병산서원(屛山書院)을 다녀와서 1. 현시대는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체험과 생활세계를 규정하고 지배한다. 이미지와 영상은 코드와 매체의 기술적 조작인 시뮬레이션을 통해 생산된다. 조작으로 표현된 조건만을 그 본질로 삼는 시뮬레이션은 ‘원본’과 ‘모사’ 모두를 무효화 한다. 이른바 매체에 의해 지시대상이 모델로, 생산이 재생산(복제)으로 대체되는 '내파(implosion)' 현상으로 인해 실재가 소멸되고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새로운 실재, 즉 하이퍼리얼리티가 산출된다. 이처럼 전자매체가 만드는 시뮬레이션의 장면/영상(scene/screen)은 지시대상과 불일치하는 ‘심층부재의 표면’이다. 우리는 실재의 환각만을 제공하는 모사 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이상의 글은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의 현대문화에 대한 진단을 요약한 것이지만, 현대인이 처한 일상을 성찰케 한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급속한 산업화이후 이미 도구적 합리주의를 전제로 모든 것이 수식화, 도표화, 입자화 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도구적 이성의 확장이 심미적 이성의 축소를 야기하는 것 당연하다. 그렇다면 몸의 지각적 세계를 주창한 ‘현상학’적 체험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는 걸까? 비록 현상학이 과학에 대한 일정한 오해에서 출발했지만,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한 지각의 세계는 세상을 체험하는 근원적 문제이다. 2. 지난 1월 15일, 나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병산서원 주1)과 하회마을을 다녀왔다. 1년 단위의 달력이 12진법의 숫자놀음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하는 연말, 뜻하지 않은 ‘미아 미술관의 폐관’ 사태를 접하면서 우리 미술문화의 한 단면을 알게 된 것 같아 한동안 씁쓸한 심경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심기일전의 차원에서 또 아이들의 체험학습도 겸해서 가족과 함께 평소 가고 싶었던 안동으로 갔다. 오후 2시 50분에 안동시외버스 터미널 앞 건너편에서 출발하는 병산서원행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 드넓은 풍산들을 한참 달리자 차 한대가 겨우 다닐만한 비포장 도로 위로 진입했다. 전국의 유명 사찰이나 문화재가 있는 곳마다 그 유적이 있는 바로 아래까지 진입로와 대형 주차장을 만들어 놓아 깊고 그윽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체험 동선(動線)을 없애버림은 물론 경관의 분위기를 망쳐버린 곳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가는 길 왼 편 아래로 겨울 낙동강이 보였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을 정도로 제방을 쌓지 않아 자연 상태 그대로의 강이 겨울 찬바람 속에 시리게 흐르고 있었다. 어느 덧 가파른 산자락 옆으로 날 구불구불한 길로 접어들었지만 길게 굽이쳐 흐르는 겨울 낙동강 주변 풍광에서 줄곧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사진으로만 보았던 병산서원의 전경이 보이는 화산(花山) 아래에 도착했다. 병산서원의 입구인 외삼문(外三門)으로 들어서자마자 통나무 계단을 통해 곧바로 만대루(晩對樓)에 올라섰다. 사방이 탁 트인 장방형의 누마루에서 맞는 겨울 낙동강 칼바람은 매서웠지만, 두보(杜甫)의 <백제성루(白帝城樓)>라는 시의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왔다는 건물 이름에 걸맞게, 때마침 오후 늦은 시간이라 깎아지른 병산이 눈 앞에 펼쳐졌다. 3. 조선 시대 서원의 기본 배치는 성균관 문묘나 고을의 향교들처럼 남북 일직선상에 외삼문 ․ 누각 ․ 강당 ․ 내삼문 ․ 사당이 자리 잡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으며, 강당 위쪽으로는 전사청과 장판각이 있다. 병산서원은 이 기본 배치의 전형을 보여주며, 사당만 축에서 약간 어긋나 있으나 전체적인 조화로움은 잃지 않고 있다. 병산서원은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서원 중 대구광역시 현풍에 있는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한 도동서원과 비교할 때 서원으로서의 공간 배치나 건물자체(특히 사당이나 강당)의 당당함과 정제된 건축미는 덜하지만 병산서원의 가치와 의미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만대루란 매개체 때문이다. 이 건물은 장소성, 즉 주위 공간을 절묘하게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여러 건축 전문가들이 한국 건축사상 최고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의 현대 건축가들이 병산서원의 진가를 안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안동의 병산서원을 처음 찾았던 몇몇 건축가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전 세계를 돌며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생각 있고, 느낌 있는 건축미의 전형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주2) 4. 심미적 관점에서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건물은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나 강당인 입교당(入敎堂)이 아니라 만대루다. 이 누각은 강당군의 전면에 걸쳐 있는 긴 건물이다. 전문가들에 의해 알려졌듯, 강당의 대청마루에서 보면 이 만대루의 지붕과 마루 사이로 낙동강이 흐를 정도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만대루의 수직 기둥은 수평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흐름을 시공으로 나누지만 비바람에 씻기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감동적인 체험을 하게 만든다. 또한 사면이 트인 만대루에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한한 시점이 생겨난다. 서원 동쪽의 너들대 벽은 서쪽 산세에 비해 높고 강렬하고, 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어 역동적인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기둥 사이마다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시점의 미묘한 차이에 매혹되어 때로는 몇 달이나 헤어나지 못했던 세잔(P. Cezenne, 1839~1906)의 다음과 같은 말이 실감난다. .....같은 소재라도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극도로 흥미진진한 연구주제를 안겨준단 말이야. 그 양상이 어찌나 변화무쌍한지 한자리에서 그저 몸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조금씩 기울이기만 해도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이 나온다니까. 이렇게 하면 몇 달이고 이 자리에서만 계속 새로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아. 집요하게 하나의 대상을 탐구하면서도 세잔은 늘 새로운 경험을 했지만 실체의 견고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병산서원이나 만대루를 매개로 한 경험은 대상이라기보다 공간과 시간의 문제이므로 그 경험의 질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즉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은 거대한 주위 자연과 건축 간의 스케일 큰 관계에서 나온다. 그것은 화산과 병산과 그리고 낙동강, 진입동선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다양한 공간을 극대화시킨 선조들, 즉 이 건물의 장소를 정하고 건물을 지은 사람들의 정신에 의해 생성된 것이다. 병산서원에서 나와 하회마을로 갔다. 하회마을은 이십여 년 전에 보았을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특히 옛 고향 같은 흙 담 사이의 마을길과 초가집들은 석양 무렵이어서 그런지 더욱 정겨웠다. 그러나 강변에 있는 대형 주차장과 하회마을에서 멀리 보이는 고층 건물이 눈에 거슬렸다. 병산서원이나 하회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옛 건물의 단아한 품격은 오늘날 겉모습이나 장식만 화려한 건물과 대비된다. 실제로 돌아오는 길에 본 현대 안동시의 모습은 안동에서 볼 수 있는 전통 건물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씁쓸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거리에 현대식의 깔끔한 보도 사이로 1200년 전 중세의 보도블록이 그대로 깔려 있는 것을 어느 책에서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따라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발바닥으로 천 년의 역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가장 전통이 잘 유지된 지역 중 한 곳인 안동에서조차 현란하기 이를 l데 없는 광고 설치물들이 과도하게 건물들을 가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땅에 만연된 문화의 천박성과 야만성은 도시의 일상적 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지럽게 난립된 채 우리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간판과 삭막한 건물들은 우리 삶의 질을 보여준다. 가시적 특성상 건축만큼 한 시대의 삶의 지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건축 기술은 요즘이 옛날보다 훨씬 발달했다. 그리고 현대에도 세계적인 건축물들이 많다. 예컨대 일본 건축가인 마키 후미히코(槇文彦)의 ‘바람의 언덕 화장터(風の丘 葬齊場) ’와 같은 건물은 삶과 죽음을 잇는 건축물로서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마구 길을 내거나 자연을 난개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연과 지리적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효율성 위주의 획일적 건물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물론 잘 지은 건물도 가끔 눈에 띈다. 노출 콘크리트로 재료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는 건물들이 그러하다. 특히 요즘 새로 지은 건물 중 인상적이었던 예로 지난 12월에 새로 개관한 금강휴게소를 꼽을 수 있다. 금강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 살리는 건물구조와 주 외장 재료로 목재를 써서 현대적인 방식으로도 잘 만 지으면 얼마나 멋있는 공간이 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게다가 이 건물은 땅 속의 열을 이용해 냉난방을 해결하는 지열 냉난방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한다) 나는 금강휴게소에서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자연경관의 특색을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 보여주고자 하는 건축 설계자의 세심함과 용의주도함을 휴게소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서 새로 지은 금강휴게소는 현대의 만대루라 할 만 했다. 5. ‘집은 기계다’라는 르코르뷔지에의 말대로 이제 집은 편리한 도시생활을 위한 효율적 기계와 다름없다. 문제는 천민자본주의에 입각한 무분별한 난개발이다. 자연이 황폐화되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은 그 지리적 장소성부터 영남 퇴계학파의 학풍과 논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병산서원은 유교적 형식예법을 준수하는 장소로서의 용도와 기능성을 최대한 구현하면서도 이러한 형식적 윤리의식을 넘어 삶의 공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다. 훌륭한 문화는 인간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키는 최첨단의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산서원은 자연과 최대한 어우러진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삶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삶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일은 공간과 시간을 다채롭게 지각하는 것과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2005.1.17) 주1)병산서원은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세 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이다. 류성룡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제자로서 임란 때 선조임금을 수행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순신을 천거하고 임란의 실상을 기록한 『징비록』으로 유명하다. 이 서원은 1572년 류성룡이 풍산에 있던 풍악서당을 옮겨지은 데서 유래한다. 이후 1613년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배향하고자 사당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이란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년)의 일이며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이른바 ‘병호시비’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병호시비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인 유성룡의 병산서원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93)의 호계서원(虎溪書院) 간의 위패 서열 문제로 그 문도들이 수 백 년 간 서로 다투었던 일을 말한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까? 주자성리학의 근간인 원시 유가(儒家) 사상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仁)’과 ‘예(禮)’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굳이 말한다면 둘 중에서 인이 더 본질적이다. 인이 없으면 예는 형식화되어 버린다. 사실 인이란 윤리적 개념이전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의 참된 감정이다. 퇴계 이황은 주희의 성리학인 이기론(理氣論)을 해명하여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로 재정립한다. 참된 감정, 즉 ‘인’을 중시하는 원시 유가 사상보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고자 도덕적 ‘리(理)’를 보편적 원리로 한 윤리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계승한 퇴계의 문도들은 형식적 ‘예’를 철저하게 중시하게 된다. 특히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학파들이 조선 후기 들어 율곡학파인 서인들의 후예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더욱 형식적 윤리의식을 고수하는 유학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단적인 예가 병호시비인 것이다. 그렇지만 퇴계 자신은 지극히 산수(山水)를 좋아하고, 또한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다시 출가시키고, 마지막 유언도 ‘저 매화나무에 물을 줘라’ 한데서 짐작할 수 있듯, 심미적 감수성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 주2) 중앙일보, 1997년 11월 8일자 기사 중에서 인용한 말로,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이자 ‘마당 건축론’으로 유명한 민현식 교수가 한 말이다.
13 no image 'MIA'의 갑작스런 폐관 사태에 대한 비애감 (2004/12/22)
소나무
3116 2007-06-05
'MIA'의 갑작스런 폐관 사태에 대한 비애감 인간사 중, 무지한 소인배의 어처구니없는 만행으로 다 년간의 노력과 무한한 잠재력이 한 순간에 좌절되는 일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그간 수 년 간 각고의 노력으로 이제 막 그 큰 꿈을 펼치려던 미아의 출범 과정을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번 '미아'의 너무도 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폐관 사건에 참으로 유감스럽고 착잡한 심경 금할 수 없다. 우리 근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중의 하나는 잘못된 질곡의 역사로 인해 정당한 부의 축적이 아닌 부당한 부의 축적이 야기됨으로써 인간관계의 토대인 최소한의 자본주의 윤리마저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 땅의 가진 자들의 천민자본주의자적 행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미아의 폐관 사건을 보고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현실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선각자는 늘 고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며, 동시대인들에게도 박해를 받는다는 말이 있지만, 바로 이 때문에 깨어있는 자들은 또한 부단히 ‘분노’와 ‘연민’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삶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이번 미아의 폐관 사건은 씁쓸함을 넘어 우리 현실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2004년 12월 17일 ........................................... 전원길 [2004/12/23 (0:48)] 정말 갑작스런 비보를 듣게 되는 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을 수 있을까요? 아니 어쩌면 이런 상황이 가능한 나라에 살고있다는 현실감을 일깨워준 사건인가요.
12 no image 문명의 교류의 역사, 도자기에 대한 소고 (2004/12/15)
소나무
5437 2007-06-05
문명 교류의 역사, 도자기에 대한 소고 1. 지난 11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KBS 스페셜 다큐멘터리로 ‘도자기’ 편이 제1부작 ‘흙으로부터’에서 6부작 ‘문명을 넘어’까지 방영되었다. 이 프로는 단지 공예라는 협애한 분야로서 도자기가 아닌 문명교류사적 시각에서 도자기의 실체와 위상을 총체적으로 조망한 역작이었다. 문명이 교류하는 것은 문명이 지니고 있는 속성의 하나인 모방성 때문이다. 문명은 일단 생겨나면 주위에 퍼질 뿐 만 아니라, 주위의 문명과 교류하면서 필요한 것은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형성한다. 무엇보다 도자기의 역사는 이러한 문명의 형성과 교류의 과정을 잘 알게 한다. 토기 제작으로부터 도기 제작, 그리고 마침내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자화(磁化)하는 자기를 만들게 되고, 오늘의 우주선에까지 도자기 제조 기술이 이용되는 과정은 인류의 역사가 도구를 사용하고 제조하는 기술의 발달과정의 핵심이자 대륙간의 문명의 교류사이자 변천사임을 자각케 한다. 현대 중국 사상계와 미학의 거인 리쩌허우(李澤厚)의 말처럼 “역사 과정 속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의 물질생활과 의식주행이며, 물질생활과 의식주행 가운데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생산력과 과학기술”인 것이다. 2. 신석기 시대 정착문명을 발생시켰던 인류 최초의 저장도구, 토기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토기와 도기의 역사는 BC6000년경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지방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햇볕에 말린 토기였지만 곧 불로 굽게 된다. BC 5000경에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자르모 유적에서 출토된 각문 토기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한편 이란 고원에서는 BC 4000년경 채문토기가 만들어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BC 4000년경 테베 근처의 바다리에서 블랙 톱이라 불리는 흑두적색토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뒤이어 띠 모양의 기하학적 문양 외에도 동물․식물․물고기 등을 그린 채문 토기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어서 고왕국 시대에는 청색이나 청녹색의 시유도기와 타일이 제작되는데, 이는 토기에서 도기로의 기술발달 때문에 가능했다. 고대 인류는 토기의 한계를 보완하고 더 단단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불의 온도를 높이기를 시도한다. 윗부분이 열린 통가마는 인류가 발명한 열효율을 높이는 첫 번째 구조물이었다. 이로부터 토기는 도기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진전된 불 기술은 광석을 녹이는 기술과 깊은 상관관계를 맺으며 문명 발달에 크게 공헌한다. 그러나 이 도기도 완벽한 방수가 되지 않아 물을 흡수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유리 제작기술을 발명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그들 서아시아인들은 사막의 모래와 소다와 소금이 섞이면 녹는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고도의 유리 제작 기술을 발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7세기 초에 이슬람 제국이 발흥하면서 7세기 중엽에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8세기 초에는 지중해의 이베리아 반도를 그 지배 하에 두었다. 이처럼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슬람 도기도 많이 제작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마호메트가 금 은 제품으로 만드는 사치를 금하여 도기의 수요가 증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슬람의 사원 궁전 공공 건조물의 내외를 시유 타일로 장식하였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도 서아시아 특유의 뛰어난 기술로 만든 도기 타일로 2500년의 세월동안 선명한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기술을 가졌음에도 그들은 자기를 만들 수 없는 자연환경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1100도 이상에선 녹아버리는 그들 지역의 흙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아시아 지역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끝내 자기를 제작하지 못하고 도기의 제작에 머물고 만다. 3. 가장 늦게 발생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중국. 그러나 중국에서도 자생적으로 토기와 도기와 제작이 이루어져 이미 은대에 이르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도기를 만들게 된다. 서안시 외곽의 진시황릉과 호남성 장수 지방의 마왕퇴 무덤 출토품들은 이미 BC 200년경 뛰어난 도기 제작술을 획득했음을 알려준다. 진시황릉을 엄호하는 실제 사람크기의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도용(陶俑) 8000개를 탄생시킨 중국 도공들의 기술 혁신,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100년 뒤 만들어진 마왕퇴에서 발견된 고분에서는 그들이 기술혁신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숨겨져 있다. 이 때만 하더라도 중국은 아직 자기를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국 워싱턴 동아시아 박물관 프리어 갤러리에 소장된 백도, 기원전 13C 상왕조 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이 유물은 중국이 왜 세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국에서 세계 최초로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 상품인 자기를 만들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인류공통의 염원이었던 자기는 어떻게 발생했을까? 7세기 초 중앙아시아 국가 우기로 시집을 간 중국의 황녀 푸테스바라는 혼수품으로 방직기와 누에씨를 몰래 가져간다. 이로써 사막에 길을 냈던 중국의 비단 독점을 깨진다. 그러나 중국으로 향하는 서아시아 대상(隊商)들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진다. 이 때 새롭게 부상한 교역품이 도자기였다. 이 신비로운 그릇 하나가 지역과 대륙 그리고 토착 문화와 관습을 넘어 문명 교역의 주된 매개체가 된 것이다. 천 년 전, 실크로드 교역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던 당의 수도, 장안, 사막을 건너 도착한 장안에서 서아시아 상인들은 놀라운 사실을 목격한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투명하고 청결한 그릇인 도자기를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자기는 좋은 흙과 높은 온도의 융합으로 만들어진다. 높은 온도는 흙의 성질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에서 최초로 1700년전 중국의 저장성 웨저우(越州), 한 호숫가에서 이루어진 자기의 탄생이었다. 인류역사상 중국인이 세계 최초로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 상품인 자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때까지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그릇이었으며, 당연히 인류문명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이로부터 18세기까지 최고의 도자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이 문명의 중심지였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후 송 대에 이르러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자기가 대중화될 정도로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다. 특히 그 자신 그림과 글씨에 능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탁월했던 북송 휘종의 ‘우과청천’, 즉 ‘비갠 후의 하늘빛과 같은 청자를 만들어라’라는 명에 따라, 녹색을 넘어 푸른빛을 띠는 자기를 만들게 된다. 이는 1300도의 고온에서 유약이 푸른색의 유리질로 바뀐 것이다. 이는 호수에 고인 물이 기포의 반사로 푸른빛을 내는 이치와 같은 것이었다. 중국 자기를 실은 함선의 출발지는 남송의 전통 무역항 천주였다. 천주를 출발한 중국의 정크선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한다. 자카르타에 도착한 청자는 이곳 사람들에게 신비의 그릇이었다. 이로써 그들에게는 청자를 갈아 해독제로 사용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자카르타를 출발한 정크선이 도착한 곳은 인도. 힌두교 교리에 따라 형성된 계급제도 카스트는 이곳 사람들에게 계급마다 그릇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사용하게 하며, 한 번 사용한 그릇은 반드시 폐기 처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문화적 관습을 중국의 청자는 넘어선다. 바다를 건너 페르시아 만으로 건너간 청자는 깨지면 철사로 봉합해서 쓸 만큼 소중한 물건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자기 제작기술이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이 고려였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세계 최초로 그 유명한 상감청자를 만들게 된다. 1123년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방문했던 북송의 화가 서긍은 훗날 그의 여행기 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을 크게 칭송한다. 남송시대 태평 노인이 작성한 골동품 수집목록에는 으뜸으로 고려청자를 꼽고 있다. 1000년전 동아시아는 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4. 1240년, 동 유럽 헝가리의 무히 마을에서 6만 명의 헝가리 군사가 전멸한다. 몽골기마병의 침략 때문이었다. 몽골기마병은 총 3만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믿을 수 없는 기동력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했다. 그들이 지나치는 곳은 언제나 공포와 학살이 엄습했다. 이처럼 몽골제국은 말위에서 건설한 제국이었으나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었다. 이에 몽골의 쿠빌라이칸이 중국을 중심으로 원 제국을 건설한다. 그리고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 색목인을 관리로 등용한다. 중국엔 당나라 때부터 서역에서 온 색목인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원대에는 1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색목인이 살았다. 몽골인들은 흰색을 숭배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흰 젖보다 더 선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때문에 몽골 지배하의 중국에서 백자가 탄생한다. 이른바 ‘추부 백자’의 탄생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청자는 백자로 바뀌게 된다. 그 중심지는 징더젠(景德鎭)이었다. 이 징더젠의 고령산에서 도자기 원료인 흙이 채취되었다.(도자기의 원료를 고령토라고 하는 것도 이 산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이 고령토는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고령토는 단지 흙이 아니다. 원석을 가루로 빻아서 만드는 것이다. 이 고령토의 주 성분은 석영, 장석, 점토다. 바로 이 고령토로 백자를 만들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청백자였으나 1351년 마침내 눈부시게 흰 순백자를 만들게 된다. 이 백자는 ‘블루 엔 화이트’ 청화백자의 탄생을 통해 또 하나의 기술정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중국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융합의 산물이었다. 이란의 이스파한은 블루 모스크로 유명하다. 이슬람에서 푸른 색은 물을 상징한다. 푸른색 안료의 원료는 코발트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안료는 철, 코발트, 동 이 세 가지 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 이른바 ‘회청(回靑)’이라고 했던 코발트는 불의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1300도에 이르러야 선명한 청색을 띠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선 청화백자를 만들지 못한다. 그 지역의 흙은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다. 이슬람과 중국 문명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성취가 청화백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문양은 당초문이었다. 이 당초문의 기원은 이집트의 룩소르 신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덤 안에는 포도 넝쿨이 보인다. 주인의 영성을 기도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로 전해져 에릭테이온 신전에서 볼 수 있듯, 넝쿨무늬로 형상화 된다. 이는 생명을 상징한다. 이 그리스 문명이 로마로 이어지고 이슬람은 후기 로마 문명의 유산을 이어받는다. 이것이 요르단 마다바에서 볼 수 있는 모세의 성당과 이란 이스파한 블루 모스크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당초문의 기원이다. 이것은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래된다. 그래서 당초문은 청화백자의 대표 문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유목민족인 이슬람 문명권으로 수출된다. 15세기까지 인류문명의 전달자는 유목민족이었다. 이 유목민족들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오늘도 전세계인의 40%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이 유목민족들의 그릇도 점차 청화백자로 바뀌어 간다. 그것은 터키의 세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터키의 세밀화를 보면 터키에서 커피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세밀화에 그려진 커피 잔은 모두 청화백자다. 음식이 담긴 큰 그릇도 모두 청화백자다. 이것은 중국의 징더젠에서 주문 생산한 것이다. 14세기 중 후반, 중국에서는 원 제국이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된다. 이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는 영락제였다. 이 영락제때 정화는 150척(때에 따라서는 300여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이끌고 먼 항해 길을 떠난다. 일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세계에서 이보다 더 큰 선단은 없었다. 주선의 길이는 150m, 무게는 8000톤, 승무원이 하루 소비하는 쌀은 100가마였다. 정화는 이 15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8년간 7차례에 걸쳐 아프리카까지 여행한다. 18만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유럽 인들이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것은 이로부터 50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이다.) 정화의 원정은 외교적인 목적을 가진 원정대였다. 이를테면 당대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명나라의 하사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청화백자와 비단이 주된 하사품이었다. 당대 명나라는 유라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것이다. 정화의 대선단은 아프리카 케냐의 말린디에도 도착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청화 백자의 유물이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청화백자는 중국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이란 알다빌, 왕들의 무덤 내부에서도 이 청화백자를 볼 수 있다. 커다란 진열장 같은 모습의 무덤 내부엔 압바스 1세를 비롯한 왕들이 신에게 바친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바로 청화백자들이다. 5. 1498년, 포르투칼 사람들인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은 인도에 도착한다. 후추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중국의 마카오까지 이른다. 이들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청화백자는 유럽에 전해진다. 예컨대 산토스 궁전의 천장은 청화백자 접시로 치장된다. 1492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다. 코르테스는 1521년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다.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은을 생산하게 된는데 당시 아메리카 은의 1/3을 중국에서 유입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청화백자를 수출한 대가 였다. 16세기에 중국의 청화백자를 소유함은 부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카리브해 바다 속에서 수많은 청화백자가 발견된다. 당시 스페인에서 스페인으로 가려던 배가 절반 이상 침몰되었던 흔적이다. 그런데 17세기부터 아시아 무역의 주역이 네덜란드로 바뀐다. 지금도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그 거점이었다. 이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공화국 케이프타운을 돌아 중국으로 왔다. 17~ 18세기 약 6000만점의 도자기를 수입한다. 400년 전 도자기는 유럽이 중국을 바라보는 창이었다.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과 풍경은 동양에 대한 흥미를 유발한다. 이 때 유럽의 모든 궁전은 중국의 자기 방이 있었다. 500년전 이 세계는 청화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6. 일본의 다이도쿠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다완이 있다. 이 다완은 16세기 이전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다완은 야나기 무네요시 때문에 한 때 조선의 막사발로 오해되었지만, 막사발은 아니다. 그래서 이 일본의 국보와 비슷한 다완은 현재 전 세계에 일본에만 100여개가 남아 있다. 이 다완은 전국시대 무사들의 최고의 애호품이었다. 그래서 다완과 자신의 성을 바꾼 영주도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다완의 애호자였다. 16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은 결국 도자기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세계 도자기사에서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 세계에서 중국을 제외하고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베트남 뿐 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견줄 정도의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조선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 1000명의 도공이 일본에 붙잡혀 간다. 이 숫자는 당시 조선 도공의 거의 전부였다. 그래서 이후 조선의 도자 기술은 급속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큐슈에는 지금도 유명한 도자기 생산도시 아리토가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 이삼평이 20년에 만에 이 아리토에서 최초로 고령토를 발굴 하면서 생긴 도시다. 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해 1616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도자기가 구워진 것이다. 영주들의 각별한 후원 하에 직인별로 역할이 분업화, 전문화하면서, 이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유럽의 주문을 받을 만큼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성장한다. 그 중에서도 붉은 색 문양의 도자기는 일본이 세계 최초로 만든다. 이 붉은 색 문양은 유산철 가루로 그린 것이다. 이것은 10년 이상 산화된 철로, 오래 산화할수록 색이 선명하고 곱다. (그래서 할아버지 대에 만들어진 산화철을 손자 대에 쓰기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중국에서도 이미 명나라 때 채색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꽃피운 것은 일본인 것이다. 그리고 백자의 흰색도 일본에서 더욱 희게 된다. 이 자기의 흰색 바탕, 부드러운 흰색은 산소가 부족한 상태로 구워져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바로 17세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장 순도 높은 흰색 도자기를 만든다. 결국 불과 50년 만에 일본에서는 조선은 물론 중국을 능가하는 일본화된 자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17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는데 백년간, 약 370만점의 도자기를 수출한다. 이때부터 중국 징더젠의 자기가 일본을 모방하는 역전 현상이 생긴다. 그래서 이 도자기를 ‘차이니즈 이마리’라 불렀다. 당시 유럽은 세계 무역을 통해 부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이 즐기는 최고의 호사는 중국식 옷, 아프리카의 커피, 아메리카의 담배였다. 커피는 중국도자기에 잔을 받치는 접시는 일본도자기였다. 17세기까지 유럽에는 개인 접시를 쓰지 않았다. 나이프는 있었으나 포크는 없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중국에 주문했다. 17세기 무렵 중국은 약 7000만점이나 되는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했기 때문에 중국은 심지어 “도자기를 앞세운 착취자” 로 인식되기도 했다. 아직은 중국과 일본이 여전히 세계에서 도자기를 수출하는 유일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마침내 도자기를 만들게 된다. 7. 1700년대 초 독일의 마이센 알브레이츠부르크성에서 연금술사인 뵈트커가 엄중한 감시 속에서 도자기를 만들라는 명을 당시 왕으로부터 받게 된다. 뵈트커는 대리석과 뼛가루로 실험했지만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다가 1708년 카올린, 즉 고령토 광산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의 성분비를 과학적으로 연구, 부족한 것이 장석임을 알게 된다. 과학적 실험과 분석으로 마침내 1710년, 유럽 최초의 백자 도자기를 만들어낸다. 그 후 1716년 그의 조수들인 흉거 일행이 그 성에서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 여왕의 비호 하에 그들은 아우가르텐 도자기를 제작함으로써 도자기 제조 기술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는 다른 유럽의 도작기와 구별하기 위해 쌍 검을 도자기에 그림으로써 마이센 도자기의 상징으로 삼는다. 그리고 17세기 중반부터 마이센 도자기는 중국제 도자기보다 높은 가격에 팔린다. 특히 자기 인형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데 ,이는 일본의 가케몽 도자기의 모방품이었다. 17세기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군주제국가로서 베르사이유 궁전이 유명했으며, 당시 프랑스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루이 14세는 중국 자기의 애호가였다. 그리고 그의 총비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스 자시 생산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래서 프랑스 쉐브르에서 유럽양식의 도자기가 완성된다. 이는 금빛, 로얄 블루로 이루어진 도자기다. 이후 유럽의 도자기의 발달사는 독일 마이센과 프랑스 쉐브르의 경쟁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1800년대에 들어와 유럽의 도자기는 중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한다.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오랫동안의 열등감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1748년 이탈리아에서 폼페이 발굴이 이루어진다. 이를 계기로 로마 붐이 일어난다. 그래서 신고전주의 운동이 일어나며, 도자기도 로마의 도자기를 모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스퍼 웨어란 도자기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찰스 다아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아윈, 산소를 발견한 프린스턴,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에 의해 영국은 산업 혁명을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증기기관의 도입으로 운송시스템과 생산의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바뀐다. 즉 대량생산체제를 갖게 된 것이다. 곧이어 모든 산업은 전문화, 분업화하는데 도자기 산업이 산업혁명의 선두였다. 그래서 유럽 사회의 생산 시스템을 바꾸어 놓았다. 도자산업의 발달도 가속화되어, 인쇄된 문양, 전사기법 등을 사용하게 된다. 이어 영국에서는 기술 개발을 계속, 에트루스칸 본차이나를 만들게 된다. 이 본차이나는 도자기의 재료로 소뼈를 사용하게 되며, 이로써 재료공학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뼈를 섞은 흙은 1100도에서도 자화가 이루어지고 충격에도 강해진다. 기술 발달로 이처럼 고급 도자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며, 자기의 공급은 수요를 넘어선다. 바로 이 때문에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마케팅 전략이 생겨난다. 이 마케팅은 적극적 판촉 활동으로 매장에 진열품을 놓는 것이었다. 이것이 주문 받지 않은 상품을 판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이 때부터 유럽에서 자기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그릇이 된다. 18세기 유럽과 아시아는 명암이 엇갈린 것이다. 중국이 성장을 멈춘 사이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도자기는 19세기 말에도 여전히 그 성가를 유지한다. 1876년 국제 만국 박람회에 일본은 큐슈의 아리타의 도자기를 출품한다. 이 지역의 영주들이 도자기를 팔아서 부국 강병의 자금으로 삼으려했던 것이다. 여기서 자금을 축적, 이들이 나중에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이때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가 일본의 채색 목판화인 우키요에였는데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는 이 일본의 채색 목판화에 심취한다. 그래서 모네는 지베르니에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놓고 만년을 그 곳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반 고흐는 일본의 안도 히로시게의 목판화들을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유럽에서 일본 열풍, 즉 자포니즘이 성행했으며 이 때 유럽은 일본으로부터 ‘간결함’과 ‘단순함’의 미학을 배웠다. 20세기에 들어서 도자기 산업은 더욱 발전, 각종 생활 용품 전반으로 확산되어 대량생산된다. 그릇 뿐 만 아니라, 심지어 소변기까지 공장에서 도자기술로 제작된 것이다. 그래서 1917년, 마르셀 뒤샹이 이 소변기를 하나를 익명으로 선택하고 제시하게 되며, 이는 이전까지 서구적 미의식을 일거에 전환시키는 일대 미술사적 사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영빈관에서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도자기를 사용하듯 오늘도 도자기는 국가 브랜드로서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대변한다. 반면에 우리 조선의 도자기 문화는 이와 대비된다. 고려 때부터 전세계에서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세계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백자와 청자 사이에 있는 분청사기는 전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가장 우리나라의 특색이 두드러지는 도자기다. 무심한 듯 빚은 대범함과 파격적으로 대담한 철화 그림들은 그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우리나라 도자기의 명맥은 실질적으로 단절된다. 이는 수백년이 지나도 만회할 수 없는 역사가 된다. 그것은 오늘날 이천이나 인사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잡한 재현도자기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8. 도자기의 변천사는 곧 동서 문명의 교류사다.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문명의 교류를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자 하이테크 상품이었던 것이다. 문명의 전파에는 중단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연파(延播)와 여기저기서 점점이 이루어지는 점파(點播)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이 중 연파는 전파의 연속성이 보장된 가장 확실한 교류 현상이다. 청화백자의 당초문은 이집트 무덤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로마를 거쳐 이슬람 문화와 융합되어 이어지면서 마침내 가장 완숙된 중국 청화백자의 주된 문양으로 탄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당초문은 자기에 담겨있는 가장 오래된 문명 교류의 흔적이다. 13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은 청화백자를 만들게 했다. 이 청화백자는 중국과 유럽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유럽의 성공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세라믹은 오늘날 통신 수단의 핵심이다. 도조 예술. 최첨단 우주산업으로 이어진다. 우주선이 대기권에 진입할 때 1800도의 고온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도자기 밖에 없다. 우주선 컬럼비아호의 몸체는 도자기다. 도자기의 역사는 인류의 모든 지혜가 발휘된 역사인 것이다. 2004년 12월 15일
11 no image 숭산(崇山)의 선(禪)과 그 행적 (2004/12/6)
소나무
3366 2007-06-05
숭산(崇山)의 선(禪)과 그 행적 1. “걱정하지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요, 청산유수靑山流水(수없는 세월동안 빛이 존재했으니 산은 푸르고 물은 흐른다)인데.” 지난 11월 30일, 숭산 행원(崇山 行願)은 임종직전 스님께서 가시면 저희는 어찌합니까? 라며 묻는 제자들에게 이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 하버드 대학 신학대학원에 다니다 숭산을 만나 출가한 벽안(碧眼)의 제자인 현각(의 저자임)은 스승이 입적한 날 “스님은 마지막까지도 ‘너희들 조심해라. 몸도 믿을 수 없고 마음도 믿을 수 없다. 오직 모를 뿐이란 사실을 새겨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늘 어린애 같은 마음과 동안의 밝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숭산은 지난 12월 3일 다비식에서 한 줌 재를 남긴 채 한 줄기 연기로 허공에 사라졌지만 그가 세계 곳곳에 뿌린 씨앗들은 결코 적지 않다. 그는 지난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 불교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던 서구에 한국의 선불교를 이식했다. 이를테면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 “Why are you?”(당신은 누구입니까?) “Why alive?”(왜 삽니까?) 등 의표를 찌르는 독특한 화법과 구도적 삶으로 미국과 유럽 대륙 뿐 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숱한 벽안의 엘리트들을 구도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뚜렷한 자취에 비해 그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20세기 이후 실질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이라든가 교육, 근대화에 있어 기독교의 영향력이 우리 사회의 대세이기 때문이다. 불교계로만 한정해도 당대에 지난 90년대 초반에 입멸한 성철이 워낙 유명했고, 또 그가 주로 국외에 머물렀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의 차이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작금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무지의 충돌’이 되어버린 이라크 전쟁과, 온갖 거짓이 횡행하는 이 땅의 각박한 현실은 숭산의 삶을 되새기게 한다. 무엇보다 숱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찾는 배움을 전제로 삶의 지평을 무한히 넓혀나간 숭산의 행적은 우리의 삶을 성찰케 한다. 2. 1927년 평남 순천에서 태어난 숭산은 일제강점기 지하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해방 후 동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다 1947년 마곡사에서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그는 금강경을 읽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 무릇 모습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이라는 대목에서 발심, 4대 독자의 몸으로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최근세 한국 불교의 큰 맥인 경허(鏡虛)와 만공(滿空)으로부터 법맥을 이은 고봉의 가르침에 따라 참선을 시작했다.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동안거를 마친 그는 누더기를 걸친 채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고봉을 찾아가 법거량(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 끝에 깨달음의 징표인 법인가를 받는다. 22살의 새파란 나이였다. 그 후 그는 일본을 거쳐 예일대, 하바드 대, 보스턴 대학에서의 시작된 미국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해서, 프랑스, 캐나다 등지에 선원을 세워 한국의 선불교를 전 세계에 처음으로 퍼뜨린다. 스즈키 다이세츠가 일본의 선불교를 서구에 알려 20세기 현대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한국에는 숭산이 있었던 것이다. 늦은 나이에 영어를 익혀 간결하고도 선적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문답은 서양의 지식인들을 단번에 매료시켰다. 아래의 대화는 미국 하버드 대학 강연회에서 박사 학위 반에 재학 중이었던 한 미국 여학생과의 문답이다. 여학생 : “What is love?” 숭산 : “I ask you: What is love?” 여학생 : ........(침묵) 숭산 : This is love. 여학생 : ........(침묵) 숭산 : “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숭산은 불교의 선(禪)을 이렇게 쉽게 깨우치고자 했다. 점진적인 깨달음을 중시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부정하고 오직 단 번에 깨쳐야 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역설한 성철 류의 국내 전통 선가에서는 단계적인 깨달음으로 이끄는 숭산의 이런 지도 방식을 “일본 선의 아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선불교는 형식에 치우친 면이 있어 초기 불교의 전통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는 숭산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분명 일본과 다른 방식의 선불교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현각, 대봉, 무량 등 수많은 눈이 푸른 엘리트 제자들을 길러냈다. 우리 불교에서 누구보다 먼저 해외로 눈을 돌린 선각자였던 것이다. 이는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떨기 꽃)라는 그의 스승의 스승인 만공이 남긴 화두로서 이 화두를 숭산은 실천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재에선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 베트남 출신, 프랑스 플럼빌리지의 틱 낫한, 캄보디아의 종정 마하 고사난다와 함께 세계 사대 생불로 소개되기도 했다.(이러한 추앙에 대해 생전에 숭산은 “서양인의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금년에도 그랬지만 해마다 수능을 앞둔 입시철만 되면 어느 부처가 영험하다느니 하면서 그 부처가 있는 절은 사람들로 붐빈다. 불교의 이런 기복 신앙적인 측면 때문에, 세계 불교사상사에 큰 획을 그어 후세 동아시아 불교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은 원효가 있었고, 또 20세기만 하더라도 효봉과 성철이란 거목이 존재했던 나라에서, 또 전 세계로 한국불교의 진수를 확산시킨 숭산이 있음에도 일반 사람들은 흔히 불교를 오해한다. 석가의 행적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알 수 있듯, 불교의 본질은 제도화된 종교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상, 다시 말해 자신을 알고자 하는데 있다. 그래서 숭산도 늘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달리 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라고 가르쳤다. 누가 왜 선을 수행하는지 물었을 때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라 한 숭산의 말도 이런 맥락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선이란 결국 몸의 체험인 순간순간의 감수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평소에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느낄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고 말하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座臥 語黙動靜; 행하든 머물든 앉아 있든 누워있든 말하든 침묵하든 움직이든 고요히 있든) 모든 것이 선이 아닌 것이 없다, 생활 속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라고 했던 것이다. 3. 숭산은 배움의 궁극이 바로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신의 참모습은 존재론적 실체를 넘어 삶의 진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 사상은 특정한 도그마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많은 부분 현대예술의 본질을 성찰케 하는 측면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선사들의 행적이나 마지막 임종 장면은 그 숱한 쟁점을 일으킨 현대의 전위적 행위 예술을 연상케 한다. 물론 현대예술은 ‘감응’과 ‘지각’을 인위적으로 조장한다. 그러나 선불교적 관점에서는 모든 삶의 행위가 선(禪)이 아닌 것이 없듯,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종이 위에 한 획을 긋는 것도 문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삶인 것이다. 2004년 12월 5일 오전에
10 no image 최선의 ‘벗겨낸 그림’, 그 무화(無化)의 역능 (2004/11/26)
소나무
3475 2007-06-05
최선의 ‘벗겨낸 그림', 그 무화(無化)의 역능 1. 지난 11월 23일, 최선의 개인전이 미아에서 열렸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엄청난 볼륨의 하드 록 음악 소리가 드넓은 전시장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전시장 깊숙한 안쪽에서 벽면을 향해 선 몇몇 최선의 동료로 결성된 밴드 그룹의 오프닝 퍼모먼스 연주 소리였던 것이다.(연주가 끝난 후 멤버 몇명이 바닥에 드러눕고 그 주위를 사건의 현장처럼 테이프로 표시하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그날 그곳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신선하고도 패기어린 공연은 무기력한 우리 미술계와 대조적일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그 역동적인 소동(?)의 와중에 최선의 작품들이, 드넓은 전시장 바닥 한 구석에 있는 화집을 썰어 만든 종이 침대와 함께, 텅 빈 대형 벽면 여기저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벗겨내기 작업 뿐 만 아니라 다양한 드로잉으로 제시된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현대미술의 존재 방식을 가장 투명한 방식으로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들은 조금도 조형적 꾸밈이 없는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우리의 전도된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그의 이번 개인적 도록에서 집중적으로 담론화된 ‘벗겨내기 작업들’은 더욱 그러했다. 2. 사실 최선의 벗겨내기 작업을 연상케 하는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53년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는 화가인 윌렘 드 쿠닝에게 한 폭의 그림을 준다면 그것을 지울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드 쿠닝은 이에 동의했고 라우센버그는 그의 그림을 한 달 간에 걸쳐 40개의 지우개로 지웠다. 그렇다면 이 과 최선의 작업이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최선이 이러한 전례를 의식했든 아니든 최선의 벗겨내기 작업이 이러한 전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유사 사건(?)은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우선 최선의 행위가 행해진 시대적 장소적 배경이 당시 미국의 상황과 전혀 다른 오늘 이 땅의 미술계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국내 유수의 미술대학 실기실에서 무언가의 표현을 거부하고 동료 학생의 그림을 벗겨내고, 또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담당교수의 그림까지 벗겨내려 했다는 것은 라우센버그의 지워진 그림보다 더욱 절박한 실존적 행위다. 다시 말해서 ‘사기’와 ‘허위 심미의식’이 만연된 현재 우리의 풍토와 대비됨으로써 최선의 무화(無化) 작업은 더욱 강한 역능을 구현한다. 사실 현대미술은 실체적인 미적 가치를 거부하는 전략적 전술 속에 그 진면목이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여명기의 그림들 속에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세잔의 그림과 반 고흐의 그림은 결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사실 그들의 그림도 천 위 에 발라진 색색의 물감 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에 대한 풍성한 담론이 존재하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려는 긴장된 모험의 의지가 그들의 붓 자국에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림이란 고독한 역정의 흔적이 생생히 배여 있어 그것이 어떤 느낌을 촉발시킬 때 바로 그 순간에 그 가치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그림에 대한 풍성한 담론은 바로 이 순간의 느낌의 언어화이다. 고대에는 주술로서의 미술이, 중세는 종교미술, 그리고 절대 왕정시대를 거쳐 신흥부르주아가 지배계층이 되면서 서구에선 눈요기 거리로서의 미술이 존재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들은 양식화되었고, 그래서 미술이란 점차 숙련된 기술 혹은 솜씨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숙련된 기술이란 얼마만큼 집요하게 많이 반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당연히 이 시대의 예술가란 이러한 숙련된 기술을 구사하는 사람을 뜻했고 예술작품은 그 산물이었다. 이른바 천재신화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성립한 허위 우상이었던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이 미술사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계기가 된 것은 요컨대 ‘익명’으로 ‘기성제품’을 선택, 제시함으로써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과연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가는 어떤 존재인지 뒤샹은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뒤샹은 이 을 통해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장인적인 수련과 숙달을 통해 달성되는 형식이나 실체가 아님을 자각케 한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한 선사가 있었다. 그리고 나무부처(木佛)를 도끼로 산산조각내서 땔감으로 만든 스님도 있었다. 사실 불교는 부처 때문에 성립한 종교다. 그런데 불교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부처를 부정하고, 또 박살내버린 것이다. 부처, 즉 붓다는 고대 인도어로 ‘바로 아는 자’란 뜻이다. 그렇다면 부처는 무엇을 알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바로 아는 자’란 칭호를 얻었을까? 그것은 그가 이 세상이 인연의 고리, 즉 인과론적 양상으로 생성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바 ‘무아(無我)론’도 말 그대로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와 분리된 개체적인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섬김의 대상이 된 것은 석가모니의 깨달음, 즉 불교의 본질을 가리는 변질된 양상이다. 그래서 불교을 아는 자는 오히려 부처를 부정하고, 또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림을 부정하는 행위는 조사가 부처를 죽이고 산산조각 내는 행위와 다름없다. 옛 선사가 부처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었듯, 또한 진정한 제자는 스승을 배반하듯, 최선은 자신의 그림을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그림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3.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 지도,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가짜들이 오히려 진짜인양 행세하는 미술계에 실로 오랜만에 첨예한 쟁점을 야기시킨 한 작가가 출현했다. 최선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작가는 길러지는 타율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임을 실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최선의 벗겨내기 작업을 통해 우리는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삶의 흔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곧 진정한 ‘감응’을 유발함을 자각 할 수 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불감증 환자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들리는 것이 기실 참 세계임을 최선은 가장 통렬한 무화(無化)의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 2004년 11월 25일 도 병 훈(작가)
9 no image 샘1,2,3,4, 그리고 샘 (2004/11/21)
소나무
3901 2007-06-05
샘1,2,3,4, 그리고 샘 한 처녀가 물병을 들고 서 있다. 그녀는 의 요정이다. 알다시피 작품제목이 인 이 그림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가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상적인 형태와 포즈로 조화미를 추구한 신고전주의 화풍을 눈부신 나신으로 보여주고 있다. 1806년 이탈리아로 가서 18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체류했던 앵그르는 귀국하자마자 신고전주의자의 수호자가 된다. 그것은 그가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까지 왜곡하면서까지 이상미를 추구한 그림인 1814년 작인 에서 잘 나타난다. 은 앵그르의 만년 작품으로 조각을 연상케 하는 신고전주의 화풍의 결정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앵그르의 은 그리스 이래 서구에서 낭만주의가 출현하기까지 지속적으로 추구되었던 이상미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는 신고전주의 이후 서구 근대 미술사가 너무도 다양한 양상의 주관적 개성을 표출하는 것으로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앵그르의 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낙조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연상케 한다. 샘2 여성의 음부를 거의 정면에서 적나라하게 그린 이란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브 쿠르베는 누드를 즐겨 그렸다. 그가 1868년에 그린 도 그 중 하나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쿠르베의 은 그저 평범한 그림처럼 보인다. 그러나 쿠르베의 은 마네의 나 와 마찬가지로 당시 프랑스 제2제정 시대의 관습적인 아카데미 화풍에 대한 일대 반항의 정신을 담고 있다. 그리스 이래 서구에서 여인의 육체는 모든 화가와 조각가의 영원한 주제이자 모티브였다. 그 상징적 의미는 언제나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서 속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누드는 이상화되어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 지고의 아름다움은 수학적인 비례미, 즉 ‘이성의 영역’이자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객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쿠르베의 속에 등장하는 누드는 이러한 고전적 이상미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오른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누드의 뒷모습에서 신화적인 포즈가 엿보이긴 하지만 풍만한 지방 덩어리로 묘사된 둔부와 허벅지의 사실적 표현은 예전 여신의 고전적 우아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처럼 적나라한 사실적 묘사는 당시로는 이례적이어서 전시장을 방문했던 나폴레옹 3세도 분노하여 들고 있던 승마용 채찍으로 화면을 내려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샘3 1917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일반 상점에서 구입한 남자용 소변기에다 ‘R. mutt’란 익명의 이름을 서명하여 뉴욕의 독립미술가협회전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 에 출품한다. 그러나 주최 측의 거부로 전시되지 못한다. 이 소변기가 바로 이다. 주1) 전통적으로 주술과 종교, 혹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해 ‘사회적 제도로서의 미술’이 성립했지만 마르셀 뒤샹이 보기엔 이러한 제도적 미술이란 ‘망막적 즐거움’을 주는 눈요기 거리였다. 그래서 뒤샹은 제도적 존재로서의 미술을 거부한다는 의도에서 ‘그려진’ 것도 ‘만들어진’ 것도 아닌 대량생산품인 기성제품 ready made 을 전시장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흔한 이름을 서명해서 전시장에 갖다놓은 것이다. 사실 은 뒤샹이 일생동안 행한 삶과 예술의 기념비적 증표다. “표현함에 있어 그건 끊임없는 선택 주2)”이란 마르셀 뒤샹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샘은 의도된 개념적 산물이다.이처럼 마르셀 뒤샹은 미적 감상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단지 ‘선택’하고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의도적인 ‘도발 행위’이며 ‘선언’이다. 요컨대 마르셀 뒤샹은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변기’라는 사물로서의 대상과, 뒤샹이 부여한 전략적 개념으로서의 변기를, 익명의 서명으로 내놓음으로써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가란 무엇일까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오브제를 ‘선택’함으로써 죽어가던 근대 서구미술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확인 사살을 한 것이다. 이는 그 후 그가 일생동안 서구 문명과, 근대적 자아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비판적인 대응으로 일관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실 사물의 즉물성(현존성)과 언어의 개념성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 때문에 ‘샘’이 현대미술의 기점이 되기도 하지만 뒤샹의 의도와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떠한 개념도 거부하는 물자체의 속성과 또 하나는 후세 사람까지 포함한 관객의 역할 때문이다. 이는 마치 타임캡슐에 지금은 평범한 물건을 담아 놓아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것만으로도 가치를 갖는 현상에 비유될 수 있다. 이처럼 범용한 사물도 후세의 사람들에 의한 취향에 의해 우연히 살아남은 속성이 있다. 설령 뒤샹이 우연히 ‘변기’를 선택했어도 시간이 흐르면서 관객에 의해 점점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훗날 뒤샹의 대담을 통해 이 사실을 뒤샹이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뒤샹은 이러한 의도로 변기를 ‘선택’하고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은 후세에 남은 많은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한편으로는 뒤샹의 의도대로, 또 한편으로는 뒤샹의 의도(개념)를 배반하는 숙명을 지닌다. 그렇지만 마르셀 뒤샹의 이 예술가란 존재와 작품과 관객의 상호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게 한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샘4 유년 시절, 산으로 둘러싸인 나의 고향 마을은 수 천 년 이어지던 마을 단위의 농경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바람 속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고향을 등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또한 유년시절 그곳에 떠나 온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마을 곳곳에 있던 땅을 깊게 파서 둥글게 돌로 쌓아올린 깊은 샘이다. 마을 사람들은 두레박으로 샘물을 길어 올렸다. 나는 그 고향 샘물을 마시며 자랐다. 그렇지만 지금 고향에는 단 한군데도 내 유년기의 샘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며, 이제 나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 기실 우리는 이미 노마디즘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뒤샹 이후 창조자로서의 예술가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듯 이제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돌아갈 고향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예술을 부정하며 새로운 예술을 샘솟게 한 뒤샹의 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샘은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는다. 샘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자궁이자 아이덴티티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한 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사는 존재이므로. 샘5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른 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 시대와 실존적 고뇌의 흔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은 삶과 예술의 근원을 성찰케 하는 ‘상징’이며 ‘의미’다. 우리 모두에게 은 부인할 수 없는 삶과 예술의 원천이자 척도인 것이다. 주1)이 변기는 전람회 하는 동안 운영위원들로부터 묵살되어 실제로는 칸막이 뒤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렌스버그라는 사람이 구입했으나 분실했으며, 현재 미술 책에 도판으로 나오는 것들은 나중에 복제한 것들이다. 주2)뒤샹이 훗날 샤르보니에와 대담에서 한 말이다. 北山硏二譯, デュシンとの 對話, みす ず書房, 1997, 69쪽 2004년 11월 21일
8 no image 세한도 다시 보기 (2004/11/16)
소나무
5889 2007-06-05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대한 소고 흔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난(蘭) 그림인<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세한도歲寒圖>를 꼽는다. 이 중 <세한도>는 추사란 인물의 고난과 역경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세한도>는 집 한 채와 각각 두 그루씩, 소나무 잣나무로 보이는 나무만을 그린 간결하고 담백한 그림이지만 추사의 친필과 청나라 학자들의 감상기까지 포함하면 약 13미터에 이르는 두루마리 그림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복사판 그림이나 작은 도판 사진으로 보면 매우 평범하게 보이는데, 이는 그 표면적 이미지만 보기 때문이다. <세한도>는 개인 소장품이어서 추사 관련 전시회가 있어도 좀처럼 볼 수가 없다. 나는 지난 90년대 중반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된 《조선후기 국보전》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두루마리 그림인 <세한도>는 유리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세한도>를 보는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날 보았던 그 칼칼한 붓 자국이 뇌리에 선명하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기념전에 이어, 2006년 11월 19까지 있었던 <추사서거 150주기 특별전>에서 다시 두 번을 더 보았다. <세한도>는 추사가 유배 중이던 제주 땅에서 그의 제자인 이상적(藕船 李尙迪,1803~1865)이 중국에서 귀한 서적들을 연이어 보내오자 그 답례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구성을 보면 오른쪽은 두 그루 소나무, 왼 쪽은 두 그루의 잣나무, 그리 고 그 사이 중앙에는 집 한 채가 있다. 이러한 그림의 소재는 그림 왼편의 발문에 쓰여 있듯이『논어(論語)』「자한(子罕)」편의,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시들음이 늦음(사철 푸르다는 뜻)을 안다(歲寒然後松柏之後淍)”는 구절에 연원을 둔 것이다. 이 그림의 허허롭고 황량한 겨울 동토(이는 추사의 귀양살이를 처지를 암시함)와 기괴하게 생겨 몹시 처연한 느낌을 주는 늙은 소나무는 추사의 자화상이며, 그 옆의 곧게 자란 소나무는 바로 추사의 제자인 이상적의 형상화로 해석된다. 이 그림의 진면목은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넘어선다. 추사체도 그러하듯, <세한도> 역시 추사 특유의 독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까칠한 붓질의 특성상 그 심경이 붓질의 흔적인 먹자국마다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한도>는 수묵화다. 통상 수묵화는 채색을 하지 않으므로 다양한 준법과 용묵법으로 그려진다. 다시 말해서 옅은 먹(淡墨)으로 시작해서 중간 정도의 먹(中墨), 아주 짙은 먹(焦墨), 또는 적묵법에 의한 농담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사물의 여러 가지 형태, 즉 갈래진 주름을 ‘짙음과 옅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수묵화는 본질적으로 농담의 다양한 변주로 이루어진다. 추사의 <세한도>는 통상적인 수묵화와 다르다. <세한도>는 ‘복수성’과 ‘간결성’이라는 대립적 요소를 간명하게 집약한 그림이다. 그것은 스치듯 지나간 마른 붓질, 노송가지 끝의 솔잎, 허름한 집의 윤곽선, 무엇보다 텅 빈 여백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추사의 <세한도>는 삽필(澁筆), 즉 꺼칠한 마른 붓질로 그린 그림이다. 털이 거의 다 빠진 몽당붓인 독필(禿筆)로 그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세한도>는 먹을 짙게 간 초묵을 찍어 까슬까슬한 마른 붓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럼에도 추사의 <세한도>는 무한한 ‘다질성’과 ‘복수성’이 느껴진다. 물론 동양의 뛰어난 전통 화가들은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감을 구현했다. 그러나 추사는 간결하고 까칠한 선의 변주만으로 무한감을 드러내었다. 특히 늙은 소나무의 형상 묘사와 소나무 껍질 부분을 보노라면 그 선의 변주가 한없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비단 이 소나무뿐만 아니라 집을 그린 윤곽선도 얼핏 보면 덤덤하고 단순한 것 같은데 긴장감과 미묘한 변화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나무와 집의 농담의 차이가 두드러지고, 그린 부분과 여백도 한량없는 공간으로 느껴지는데, 이는 특히 집 옆의 메마른 붓으로 겨우 스치듯이 몇 번 스친 자국과 ‘세한도’ 라고 쓴 부분의 대조적 차이 때문이다. <세한도>는 얼핏 보면 변화(복수성)의 진폭이 크지 않은 덤덤한 그림처럼 보인다. 극도로 함축적인 간명한 선으로 표현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한도는 양극성을 한 화면에 구현한 극적인 그림이다. 이는 굵은 부분은 장마철 구름을, 가는 부분은 매미 날개를 연상케 하는 그의 글씨와도 일맥상통하는 특성이다. 이러한 <세한도>의 특성은 추사 만년의 글씨에서 더욱 두드러진 데서 알 수 있듯, 역시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이라는 극한 체험의 산물이다. 약 10년간에 걸친 그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혹독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각종 질병과 부인의 죽음 등으로 추사 자신의 말대로 “푸른 바다 넓은 하늘에 한스러움만 끝없이 사무치는(碧海長天 恨無窮已)” 시련의 나날이었다. 그 당시 절해고도인 제주 남단에 위리안치 되어 기약 없는 귀양살이를 하면서 추사의 예술 세계는 비약한 것이다. 이는 그가 주로 쓴 만년의 글씨체가 유난히 독특한 개성을 구사하고 있음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추사의 <세한도>가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얼마 전 제주에 갔을 때 자생하는 해송들을 보고 직감하였다. 해송들은 거센 바닷바람에 견뎌야하기 때문에 소나무 중에서 유난히 생명력이 강한 형상으로 생겼으며 솔잎도 억세고 무성하다. <세한도> 중 노송 옆의 억센 소나무 줄기와 무성한 솔잎은 영락없는 제주도의 해송이었던 것이다. 물론 추사는 예술가의 감성과 엄청난 지성을 동시에 소지한 인물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고금의 서화를 날카로운 혜안으로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흔히 추사의 예술세계를 미술사학자들은 ‘학예일치’의 이념을 구현한 결정체로 본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그림)과 학문은 각기 다른 그 소통방식이 다른 영역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추사가 겪어야 했던 삶의 온갖 신산고초를 생각할 때, <세한도>를 ‘학예일치’의 구현으로 규정하는 것은 관념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스치듯 만 듯한 그 미묘한 숨결 같은, 그러나 단 한 군데도 어수룩한 면이 없는 처연한 붓질(세한도의 부분 도판 예시)의 차원(느낌)을 어떻게 학문적인 언어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추사의 남다른 예술세계가 그의 심원하고도 방대한 학문체계의 소산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 세계를 관념적 학문의 세계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기호체계인 ‘언(학문)’과 ‘행(예술)’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그러므로 추사의 <세한도>에 대해 ‘서화일치’니 ‘학예일치’니 하는 관념적, 상투적 용어로 규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추사의 예술세계를 제한하고 왜곡하는 일이다. 모든 훌륭한 예술이 그러하듯 <세한도>는 학문적 이론이란 범주에서 벗어난 불가해(不可解)한 ‘감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각주 1)내가 전시장에서 직접 본 우리나라 주요 전통회화로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일본의 천리대에 소장되어 있지만 국내에서 몇 회에 걸쳐 전시됨),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금강전도<金剛全圖>, 그리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김홍도(金弘道)의 <병진년 화첩>, 이인상(李麟祥,1710~1760)의 <설송도(雪松圖)>,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장승업의 <매화도> 등이다. 바로 이러한 그림들이 조선후기 민화를 제외하고는 이 땅의 전통회화를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2)글씨는 아주 선명하고 그 밑은 텅 비어 있고 그 아래 겨우 스치듯이 자국이 있는 부분을 말함. 3)김정희, 최완수 역, 추사집, 현암사, 1976, 258쪽 참조. 4)한자 문화권의 옛사람들이 그림을 비평할 때 ‘문기’, ‘격조’, ‘문자향 서권기’, ‘천인합일’, ‘서화일치’ 같은 말을 썼다. 이처럼 추상적 용어로 기술(記述: description)함으로써 복잡 미묘한 예술의 세계를 오해를 조장하는 경우도 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학문을 과신한 나머지 본바탕부터 그 특성이 다른 예술의 세계를 연역적 관념과 추상의 진부한 언어로 기술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예술(그림)의 특성상 가장 유의해야할 요소이다. 학문과 예술의 영역은 그 특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그림이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려졌다든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 라든가, 또 한 작가의 예술의 특성이 어떻게 변모 되었는가 라든가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 전원길 [2004/11/17 (9:2)] 가을 끝자락에 세한도를 마주하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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