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1774
2015.12.30 (06: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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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직

과속 문명에 대한 경고를 과속으로 날리다

 

      아무런 모양도 색도, 소리도 없이 무한의 공간을 카오스(Chaos)라 한다면, 그 속에서 뭔가 새로운 기운이 만들어저 나온 생명을 에로스(Eros)라 한다.

  무질서에서 어떤 질서를 찾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하지만 서로 상반되는 것은 모순이기 이전에 불가분의 관계다. 서로 없어서는 안될..

무질서가 없다면 질서도 없고, 질서가 없다면 무질서도 없는 것이다. 결국 공허함이다.

      난 그 속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느끼며, 이를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놀라운 언설이,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로 아슬 아슬하게 지면을 스치며 온갖 굴절된 무질서한 보도 블록의 상을 영상물로 잡아 내고 있는 김수직의 자기 작품에 대한 촌평이다.

 

 작가는 현대문명의 과잉성, 과속성을 엔토로피적 관점에서 판정하고, 미학의 원리와 물리학의 원리를 서로 크로스 오브(crossover) 시킨다. 속도가 만들어 놓은, 현대문명의 본질속에 내포되어 있는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神話에 대한 단순 명쾌한 是非다.

 

 

번호 제목 조회 등록일
1338 no image 우주 속 우리 인연展 6
1892 2015-12-30
김수철 오브제와 만난 인연을 풀어 내다. 백삼십여개가 되는 숫덩어리들을 천정에 매 달아 놓다 작가는 불에 검게 탄 숫덩어리들을 유기물의 ‘뼈’로 간주한다. 살아 숨쉬던 모든 일상적이며 가식적인 허물을 벗어 던진 진정한 미니멀리즘의 원형임으로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오브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선을 보이고 있는 物의 “뼈”들은 2014년 12월 ‘빈집 프로젝트’ [예술을 믿습니까] 전시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레지던시 작가가 오브제물로 쓸 나무 토막들이 타다 숯덩이가 된 것들이다. 이것들을 줏어다 일년이 넘게 보관해 놓고 아껴오던 것으로 이번 ‘인연전’에 합당한 오브제로 스스로 발의하여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 숫덩어리들이 자기의 내적 필연의 길로 ‘연이 가 닿는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이를 무대에 등판시키는 일을 도와 주웠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실험공간 UZ에 전시된 작품들중에서 김수철작가의 ‘숫덩어리’는 마치 달마 선사가 面壁 九年의 수행명상을 하였듯이, 面墨명상을 해도 좋을 것 같다. 모든 수행의 아이콘에는 무나 공이 깔려 있는데, 숫덩어리는 유기물이 무로 화한 것으로 사유의 원천적인 치유가 가능한 대상이 아닌것인가. 이러듯 작가는 어딘가 초현실적인 연의 실타레로 사물들의 명운을 풀어 내는 우주관을 지니고 있어 보인다. 이러한 파라다임은 그 속에 매우 원초적인 신심이 살아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동양의 주역이나 샤먼이즘적 성향도 고려해 볼만하다. 인류문명의 그 쫍은 태두리를 훨적 벗어 나서 통우주적으로 열려 있는 정신으로 살아 가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사유에는 초시공적 魂적 차원의 비전너리(visionary)가 潛勢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럴진데, 그가 숫덩어리에게 사역을 당하고 있는지, 그가 숫덩어리를 사역하고 있는지, 분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의 ‘예술’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하늘天과 따地사이, 是와 非를 넘어 서 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
Selected no image 우주 속 우리 인연展 5
1774 2015-12-30
1336 no image LEE YOUNG GIL - 우주 속 우리 인연展
1736 2015-12-30
LEE YOUNG GIL 우주 속 우리 인연 2015.12.12 – 2016.1.31 실험공간 UZ 새로운 신화만들기-잃어버린것과 새로 만나는 것이 인연이라면… 실로 신화에는 인류문명의 [씨]로써의 태초적 시원성(因)과 아울러 인류문명의 열매(果]로서 終末的完成性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인류의 원초적인 사유속에는 [環]을 그리며 순환 반복하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복논리, biological]라던가, [대칭성, symmetrical](주-c)적 논리가 潛勢해 있을 것이다. 이를 예술영역에서 살펴 본다면, 예술가 개개인의 이류-젼(illusion)을 넘어 거시적 비전으로 총합되는 場(장, 마당)으로 잡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통해 작가는, 현대가 잃어버리고 있는 태초의 창생적 신화의 행방을 묻고 아직도 그 저변에 남아 있는 基體속에서, 미래적 비전을 찾고 싶으 한다. 그는, 이번 [우주속 우리 인연]전의 호스트(host)로써 이 작품들을 선 보이고 있는데, 작품 1.에 헤당하는 것은, 벽면 가득히 후박나무 열매로 엮은 동심원과 무수한 솔방울로 채워진 바닥이 이를 이어주고 있는 무대이다.(동심원의 중심 축에 헤당하는 후박나무 열매의 모양은 작가의 작품전시의 아이콘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자기 몸속에 우주율적 리듬을 몸에 색여 넣고 있으며 열매의 구조들이 모두 비보나치 수 배열(주-a)로 이루어저 있다.) 이를 설치작품(installation)이라 부를 수 있다면, -(주-b). 작품 2.는 쟥슨 포록(Jackson Pollock)류의 올 오브(all over, 전면화)로 처리되어 있어 벽화(mural)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벽화는 같은 이미지의 화소들을 무한 반복으로 빈틈없이 화면을 과 채워 넣은 것으로, 우주탄생의 星雲을 연상시켜 주고 있다. 3.은 같은 이미지로 세개의 켄버스를 한 묵음으로 엮은 조각형식을 취한 작품이고, 건너편 벽에는, 작품 4.로 간주할 수 있는 매우 이색적인 작품아닌 작품이 벽에 걸려 있다. 아주 오랫동안 작업바닥으로 쓰였던 흰 색갈의 페인트로 얼룩진 ‘합판’을 전혀 손을 데지 않은체 ‘레이디 메이드’성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 이 합판에는, 밑면의 프레임에 검은 색칠을 해 놓았는데, 이 물감이 합판 안 쪽으로 번져 옮기면서 일종의 山勢를 나타내는 환영적인 실루엣(silhouette)를 만들어 놓고 있어, 아주 우연하게 발생한 이 진귀한 이미지는 레이드 메이드의 物이 ‘자기가 자기 보기와 자기 검증을 하는 자기를 본다는’ 자기언급의 묘를 연출해 낸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운 미소를 머검케 한다. 예술은 인간문화의 결과이며 동시에 원인제공자라 한다면, 인간 예술의 본질을 능가하는 자연이 만들어 놓는 이러한 경이로운 이미지 창출의 묘는 어떻게 불려야 할지 궁금해 진다. 작품 5는 한쪽 벽면에 수백개가 되어 보이는 나무 格子의 작은 칸속에 말라비툴어진 복숭아가 빼곡히 들어 앉아 있는 작품이다. 복숭아 시신을 모셔 놓은 납골당이다. 자연물의 쇄잔해 감과 그것의 종말적 이미지가 기하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정사각형 칸과의 만남이 묘한 운을 띠우면서 관객을 맞이 하고 있다. 이 작품앞에는 무수한 백색으로 칠해진 비닐으로 된 물체들이 쌓여저 있어 미끄러지기 쉽게 해 놓아서 이를 밞고 작품을 보려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작가 이영길의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의 제시 방식은, 자기가 선 자리에서 밖으로향하여 건너뜀(cross-over)으로써 타를 창조적으로 받아 들이는 만남의 인연을 만들고 새로운 교차문화를(cross-cultural) 통해 우주율적 융합을 생성해 갈 수 있는 비전을 암시하고 있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주-a: 피보나치 황금비율은 0과 1의 항에서 이전의 두 항을 더한 값으로 무한히 이어저 가는데, 이것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저 가는 수열로 잡히면서, 자연이 보여주는 미의 기본적인 모델이 됨으로, 전시 주제로 세우고 있는 우주적 율의 공유를 허용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수는 자연속에서는 이치나 법칙이 되지만 인간문화권에서는 언어와 같이 은유(allegory)가 될 수 있다. 주-b: 후박나무(일본 목련과) 열매는 그 자체로 아주 뛰어난 造形性을 나타내고 있음으로 작가는 그 신비한 형상에 매료 되어 자신의 작품 전시의 아이콘으로 삼고 있다. 주-c : 對稱性 대칭성이란, “현대의 양자역학이 그려 내는 物系의 미세한 영역도 흥미 깊은 점으로 그것과 매우 닮은 꼴 (됨됨)이다.” 하이젠벨그가 최초로 그려낸 物界의 지도에 의하면 미세영역은 [모든 것의 차이를 열 지워 놓는 매트릭스]의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어딘가 한군데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이내 그 변화는 매트릭스 전체에 이르고. 그러나 매트릭스 자체는 부동의 상태로 견지된다. 모-든 물은 전체성으로 운동하고 변화가 일어 나지만, 매트릭스 자체는 부동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기에 대칭성의 월리가 생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1335 no image 우주 속 우리 인연展 4
1658 2015-12-29
박근용의 -역설 혹은 반예술적 遊戱 양변기 물속에 한마리의 금붕어를 풀어 놓고 그 유영을 보고 즐기도록 해 놓은 것이 박근용의 작품이다. 여타 일곱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각기 자기 스스로 맥이 닿아 있는 듯한 자족감을 품고 평온해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보는 사람의 의표를 찌르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 처사는 어떤 각도에서 보드래도 “예술” 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금붕어는 유영을 끝내면 아래 구멍을 통해 사라지는데, 작가는 이를 두고, “매우 잔인한 처리를 했다”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잔인했었는지…. 물어볼 경앙이 못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살아 꿈털거리는 금붕어가 작가의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동영상에서 투영된 영상물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상상력이 좀 딸리는 사람에게는 실물이 틀림없었던 생동감을 보여주던 금붕어가 실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자 두번 놀란다. 다른 여타의 작품들이 관객의 상상력을 빌려 가까스로 ‘예술’이란 문턱에 걸치고 있는 실정과 비교 해 보면 박근용의 금붕어 프로젝트는 관객들을 일단 웃기고 즐거움을 안겨 주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그것이 구지 [예술]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어야 한다는 당위는 전혀 무의미해 보인다. 작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 갑작이 작가는 포켓에서 조금만한 만원경을 꺼집어 내 보여준다. 작난감 같이 보이는 이 만원경은 자세히 보니 – ‘Kelvin & Hughess London1917’ 이란 문자가 새겨저 있다. 1917년산 영국 켄빈사의 제품이란 표시다. 마치 어린이가 자신의 작난감을 가지고 친구에게 자랑하면서 보여주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건 말이지요 내가 인도를 여행할 때 일요시장에서 발견한 것이예요.” 이 만원경의 놀라움이 미처 사라지기 전 그는 아주 진지하게 필자를 향해서 이젠 ‘말의 놀라움’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번 전시가 시작한 날이 12월 12일인데요, 이것을 한문으로 읽으면, “십이 십이”(是非 是非)가 되요.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된 날이 1979년 10월 26인데요, 이걸 략해서 “십이륙”으로 통칭을 하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쌍스렵게 들립니다.” 작가의 연이어 내 품는 숨가픈 ‘놀라움’의 창발성에 필자는 그의 작품의도를 물어 보는 일조차 잊고 멍하니 보고 멍하니 듣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좀 어리석어서 “이 양반의 예술론을 곡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꼼꼼히 생각해 보니 박근용의 이러한 일련의 ‘충격요법’성 돌발성에는 이외의 해답이 숨어 있다. 오랫동안 예술적 삶을 추구해 오다 끝없는 좌절감을 맛 본 사람이 몸에 지니게 된, 현실을 해학적으로 보는 마음의 굴절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뒤안길에서 예술에 대한 동경의 강도는 더 심해가는 작가의 역설적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슬픈 웃음을 자아 내던 채플린의 게그(gag)나 코믹(comic)이 떠 오른다 [삶은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우린 그 방식을 잃어버렸다.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세계에 증오의 방벽을 쌓았으며 그 뻣뻣한 걸음걸이는 인간을 비참과 유헐 속으로 몰아넣었다. 지식은 우리를 냉소적인 인간으로, 지혜는 우리를 냉혹하고 비정한 인간으로 만들고 말았다. 생각은 너무 많으나 감정은 매말려 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성이다. 지식이 아니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인생은 극단으로 치달아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챨리 채플린이 한말이다.
1334 no image 우주 속 우리 인연展 3
1917 2015-12-28
경수미의 總合 變易 循環의 굿 판 여덟명의 작가중에서 경수미는 가장 토속적인 비전을 곧바로 작품에 불어 넣고 있다. 모든 색이 한곳으로 융합된 것이 먹물이 되어 놋그릇 속에 뫃 인 것으로 이를 천정에서 내려온 실타레를 타고 위로 역류시키고 있다. 융합과 역류의 소용돌이의 象을 만들어 놓은 설치물이 이색적이다. 유교나 도 교 내지 불교, 기독교적인 종교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살아 오던 동이민족의 원시적인 신앙 체계로 간주할 수 있는 샤머니즘 (註-1)적 맥락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는 또한 [易]사상을 가지고도 풀어 볼수 있는 문맥이다. [易] 역시 宇宙的 차원의 對立과 總合, 變易과 循環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미래를 예측하는 占卦의 기능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오래된 우주관을 나타내고 있는 사상이다. 우리는 경수미의 놀라운 상상력을 빌려 이 작품이 또한 현대미술에 매트릭스(matrix,鑄型)적인 파래다임을 풀어 놓는 ‘祭儀’로 보기 원한다. ‘우주속 우리 인연전’이 열리고 있는 지하 동굴과 같은 공간의 한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는 이 神具들은 非見 非視의 에너지원을 찾아 내고 수원일원에 범세계적인 정신혁명과 문예부흥의 섬광을 불려 일으키는 부시돌이 되기 바란다. 註-1 : “샤머니즘은 유교와 불교가 가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특성을 거의 다 흡수했다. 유교는 영적인 용들에 대해, 귀와 신이라고 불리는 혼령에 대해, 바람의 영, 언덕들과 강의 영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국 샤머니즘은 이러한 특성들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이러한 존재와 이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이들이 과연 유교 신자로 행동하는지, 아니면 샤머니즘의 신봉자로 행동하는지를 알아 내기는 어렵다. 불교는 후대로 가면서 중국의 질 낮은 도교로부터 주술, 부적 만들기, 수정으로 점치기, 꿈 해몽 등등을 차용한다. 샤머니즘은 또 불교로부터 이러한 내용들을 수용하였다. 샤머니즘은 심지어 티베트 불교에서 나온 다라니경의 기도문에서도 많은 것을 가져왔고, 주문을 욀 때도 이를 제멋대로 이용하였다. 비록 무당들이 불교 사원에서 행해지는 祭事에 참여하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도 말이다.” –[샤머니즘의 사상] 민속원간.
1333 no image 우주속 우리 인연 2
1572 2015-12-28
이성실편 [몸화] 전시장 한쪽 아직 아무런 칠도 입히지 않는 시멘트 벽면에 크다란 두개의 원이 서로 겹치면서 계속 돌고 있는 모양새를 한 작품이 이성실의 ‘쌍접원(雙接圓)’ 이다. 팔을 최대한으로 뻗고 그 끝에 크레파스(화구)를 쥐고 무수히 그려 나간 쌍접원은 오른쪽 팔이 그린 것들은 청색이 주조가 되어 밖앗쪽에서 부터 안쪽으로 색이 연하게 변조되어 가고 있고, 왼쪽 선들은 붉은 색이 주조가 되고 황색이 이를 부드럽게 받아 들이도록 처리되 있다. 물론 작가는 원을 그리면서 그때 그때 다른 색상으로 바뀌웠지만, 이는 관점에 따라서는, 색소는 고정되 있돼 빛의 농도에 따라 변색을 한 것으로 가상해 볼 수도 있다. 이는 우주속 별들이 상대 별 주변을 서로 교차하면서 도는 雙星系의 運動軌道와 빼 닮았다. 그 운동이 남겨 놓는 궤적의 흔적이 쌍접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가가 시동을 걸었다고 하나, 그 이후는 자동적으로 정지함이 없이 무한 반복과 다름이 이어가는 것으로 마치 별이 탄생해 나오는 현장을 연상시켜준다. 이렇게 관객들의 상상력을 불려 일으키면서 발을 그 자리에 묶으 놓고, 정일한 감동을 불려 일으켜 주는 이미지는, 일종의 반문화적 純全性과 無碍함, 날것(野生的 生堅함)이 갖는 진득한 흡인력으로 세뇌를 하기 시작하는 퍼포밍(몸의 이미지 그리기)으로 본다. 이성실이 자신의 몸을 화구로 삼고 그려낸 실험화, 이 작품은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예술 풍취나 완성적 개념으로 잡아 낼 수 없는, 정반대로 “직접적이며 순전한 원생적인 에너지를 바로 발산하는 氣運”을 품고 있는 ‘몸화(身體畵)’로 부를 수 있는데, 그래서 쌍접의 이미지는 아직도 주객이 분리되기 이전의 통우주를 상징하는 메트릭스(marix, 母胎)적 인연속에 놓여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場의 論理的 세계안에서는, 모든 것이 생성의 과정으로 곧 바로 우리의 감성에 와 닿는다. 구지 말해본다면 관념적이고 지식축약적 산물이 아니라, 情緖的 知性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융합이 이루어진 모럴코-드(moral code)이다.
1332 no image LEE YOUNG GIL - 우주속 우리 인연
1663 2015-12-28
새로운 신화만들기-잃어버린것과 새로 만나는 것이 인연이라면… 실로 신화에는 인류문명의 [씨]로써의 태초적 시원성(因)과 아울러 인류문명의 열매(果]로서 終末的完成性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인류의 원초적인 사유속에는 [環]을 그리며 순환 반복하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복논리, biological]라던가, [대칭성, symmetrical](주-c)적 논리가 潛勢해 있을 것이다. 이를 예술영역에서 살펴 본다면, 예술가 개개인의 이류-젼(illusion)을 넘어 거시적 비전으로 총합되는 場(장, 마당)으로 잡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통해 작가는, 현대가 잃어버리고 있는 태초의 창생적 신화의 행방을 묻고 아직도 그 저변에 남아 있는 基體속에서, 미래적 비전을 찾고 싶으 한다. 그는, 이번 [우주속 우리 인연]전의 호스트(host)로써 이 작품들을 선 보이고 있는데, 작품 1.에 헤당하는 것은, 벽면 가득히 후박나무 열매로 엮은 동심원과 무수한 솔방울로 채워진 바닥이 이를 이어주고 있는 무대이다.(동심원의 중심 축에 헤당하는 후박나무 열매의 모양은 작가의 작품전시의 아이콘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자기 몸속에 우주율적 리듬을 몸에 색여 넣고 있으며 열매의 구조들이 모두 비보나치 수 배열(주-a)로 이루어저 있다.) 이를 설치작품(installation)이라 부를 수 있다면, -(주-b). 작품 2.는 쟥슨 포록(Jackson Pollock)류의 올 오브(all over, 전면화)로 처리되어 있어 벽화(mural)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벽화는 같은 이미지의 화소들을 무한 반복으로 빈틈없이 화면을 과 채워 넣은 것으로, 우주탄생의 星雲을 연상시켜 주고 있다. 3.은 같은 이미지로 세개의 켄버스를 한 묵음으로 엮은 조각형식을 취한 작품이고, 건너편 벽에는, 작품 4.로 간주할 수 있는 매우 이색적인 작품아닌 작품이 벽에 걸려 있다. 아주 오랫동안 작업바닥으로 쓰였던 흰 색갈의 페인트로 얼룩진 ‘합판’을 전혀 손을 데지 않은체 ‘레이디 메이드’성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 이 합판에는, 밑면의 프레임에 검은 색칠을 해 놓았는데, 이 물감이 합판 안 쪽으로 번져 옮기면서 일종의 山勢를 나타내는 환영적인 실루엣(silhouette)를 만들어 놓고 있어, 아주 우연하게 발생한 이 진귀한 이미지는 레이드 메이드의 物이 ‘자기가 자기 보기와 자기 검증을 하는 자기를 본다는’ 자기언급의 묘를 연출해 낸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운 미소를 머검케 한다. 예술은 인간문화의 결과이며 동시에 원인제공자라 한다면, 인간 예술의 본질을 능가하는 자연이 만들어 놓는 이러한 경이로운 이미지 창출의 묘는 어떻게 불려야 할지 궁금해 진다. 작품 5는 한쪽 벽면에 수백개가 되어 보이는 나무 格子의 작은 칸속에 말라비툴어진 복숭아가 빼곡히 들어 앉아 있는 작품이다. 복숭아 시신을 모셔 놓은 납골당이다. 자연물의 쇄잔해 감과 그것의 종말적 이미지가 기하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정사각형 칸과의 만남이 묘한 운을 띠우면서 관객을 맞이 하고 있다. 이 작품앞에는 무수한 백색으로 칠해진 비닐으로 된 물체들이 쌓여저 있어 미끄러지기 쉽게 해 놓아서 이를 밞고 작품을 보려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작가 이영길의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의 제시 방식은, 자기가 선 자리에서 밖으로향하여 건너뜀(cross-over)으로써 타를 창조적으로 받아 들이는 만남의 인연을 만들고 새로운 교차문화를(cross-cultural) 통해 우주율적 융합을 생성해 갈 수 있는 비전을 암시하고 있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주-a: 피보나치 황금비율은 0과 1의 항에서 이전의 두 항을 더한 값으로 무한히 이어저 가는데, 이것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저 가는 수열로 잡히면서, 자연이 보여주는 미의 기본적인 모델이 됨으로, 전시 주제로 세우고 있는 우주적 율의 공유를 허용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수는 자연속에서는 이치나 법칙이 되지만 인간문화권에서는 언어와 같이 은유(allegory)가 될 수 있다. 주-b: 후박나무(일본 목련과) 열매는 그 자체로 아주 뛰어난 造形性을 나타내고 있음으로 작가는 그 신비한 형상에 매료 되어 자신의 작품 전시의 아이콘으로 삼고 있다. 주-c : 對稱性 대칭성이란, “현대의 양자역학이 그려 내는 物系의 미세한 영역도 흥미 깊은 점으로 그것과 매우 닮은 꼴 (됨됨)이다.” 하이젠벨그가 최초로 그려낸 物界의 지도에 의하면 미세영역은 [모든 것의 차이를 열 지워 놓는 매트릭스]의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어딘가 한군데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이내 그 변화는 매트릭스 전체에 이르고. 그러나 매트릭스 자체는 부동의 상태로 견지된다. 모-든 물은 전체성으로 운동하고 변화가 일어 나지만, 매트릭스 자체는 부동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기에 대칭성의 월리가 생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1331 no image [場所의 精神分析] - 11
1704 2015-12-11
[피로소피아.야포니카] 中澤新一 2 [場所]의 精神分析 제六장 慾望으로서의 西田哲學 – 11 [모친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묘지에 놀려 가는 아이들]과 같다, 고, 말라르메는 예술가인 자신의 본질을 뀌뚫어 보고 있었다. 거울의 상속에 비추워진 자신의 모습을 쳐다 보고 있는 유아의 배후에서 유아를 안으면서 모친이 말하는 [예야, 이것이 너란다]. 모친은 이때 원초의 화로스이기도 하고, 유아에게는 근원적인 욕망의 대상임을 가르키는 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친이 묘지에 혼자서 가는 것은 위험함으로 가지 마세요, 라고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그 금지를 어기고 혼자서 묘지에 가서 노는 인간들이다. 정신의 내부에서 어떤 관념적 능력을 동원하드래도 이미 도달이 불가능해 보이는 物을 향해 유물론적인 탐구를 시도하는 것, 그것이 아방가르드예술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며, 그기서는 [미]의 현상도, 物이라 하는 것의 출현과 일체화된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경향은 니시다 기다로가 자신의 독자적 철학적사고를 전개해 가던 바로 그 시대에 정치화되어 있었던 유물론의 사상과 수상한 동조를 나타내면서 점차 영향력을 강화해 갔던 것이다. 니시다의 철학적사고가 이와 같이 世界大의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허면, [일반자의 자각적체계]가 쓰여젔던 시기의, 니시다에게 [美]란 것은 무엇이었던가? 가 문제가 된다. 그는 같은 논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들이 의지를 넘어 예지적자기의 입장에 설 때, 이를 의식적자기의 입장에 본다고 하면, 그건 무한히 창조적이라 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적예지적 노에시스이지만, 그것은 所謂意識一般으로써 구성적이라 본다. 단지 자기자신의 내용을 보지 못함으로 하여 단순한 인식주관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예술적직관에서는 보는 것은 만드는 것이며 만드는 것은 보는 것이다(가장 적당한 의미에서 자기는 창조적이다). 예지적의지의 입장에 이르러서는 이데야는 이미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고, 자각적일반자에 있어 최후의 것으로, 의지는 지향되는 것이 지향하는 것이며, 그 내용이 노에마적으로 한정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지적의지에게는 그 이데야는 지적직관의 대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데야는 단순하게 실천적으로, 노에시스의 방향에서 자유의지란 것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예직적자기는 자유로운 人格이라 고려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예지적의지]란, 현실세계에서 요구되는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적욕망의 기저에 있는 [술어면]에서, 대상성없는 순수욕망의 영역으로, 들어 가려고 하는 욕망, 불교가 대상적욕망과 구별하여 [大欲]이라 부르고 있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 예지적자기는 예술적직관을 갖고, 물이면서 동시에 [어머니]며 [여성인]것이며, 존재의 크다란 초월적술어면을 통해 이와 같이 자유로운 공간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라고 니시다기다로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데아적인 미]라 부른 표현은, 이데아 그 자체를 이 물적인 공간내부에서의 실천으로써 이해하고 있는 바, 니시다의 [미]를 둘려 싸고 있는 생각은, 말이 겉으로 풍기고 있는 정도로 古風스렵지 않고, 오히려 말라르메등의 유물론적 [미]의 사상과 친근한 것이다. [예지적자기]라 하는 표현은 동양사상적 내지 종교자상적인 콘텍스트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아주 적확하게도 현대적 문제에 가 닿아 있다. 예지적자기에 [놓여 있는] 초월은 이렇게 하여 나의 앞에 하나의 거대한 주제로 전개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場所]이다. – 第六章 ‘요망으로써의 니시다철학’ 종료.
1330 no image [場所의 精神分析] - 10
1464 2015-12-10
2 [場所]의 精神分析 제六장 慾望으로서의 西田哲學 – 10 叡智的自己 그것 自體의 내용은 진리로써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物 자체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예지적자기 그 자체의 내용은 오-직 예술적직관과 같은 것에 의해 처음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자각적일반자에게 진실로 있는 것은 자기자신속에 지향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된다. 노에마가 노에시스로 돌아 가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의지적 자기는 이런 의미에서 그 극점에 놓이는 것이다. 자각적일반자에 있어 최후의 것이다. 우리들이 하는 방법에 따라서 니시다기다로의 이 난해한 표현을 다시 읽으 보자. 자각적일반자에게 있어 최후의 것은 의지의 자기이다. 즉, 욕망의 주체이다. 그것은 한정이란 거세에 의해 모양지워지고, [물자체의 세계]를 자신에게 있어서는 도달불가능한, 근원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품고 있는, 감정의 주체인것이다. 이렇게 모순에 찬 모양을 갖고 있는 욕망의 주체는, 그 근원적이인 욕망에 추동되어 이 세상의 가지 각색의 대상을 욕망하고 손에 넣으려 하지만, 이러한 노에마의 움직임에 의해서는 욕망의 노에시스적 결핍은 체워지지 않는다. 이때, 욕망의 주체는, 자신의 대상으로 있는 것에는 [술어면]이 있고, 이 [술어면]의 바닥을 통해서만이 그 불가능한 것의 에코-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각적일반자의 바닥을 뚫고 초월에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대상을 갖고 있는 욕망을 넘어서는, 순수욕망에의 初出, 불교에서 [大欲]이라 불렸던 것이다. 이때 자각적일반자(욕망의 주체)의 바닥에는 물의 수상한 파도가 밀여 오게 된다. 이 바닥을 뚫고 근원적인 욕망의 대상(그것은 욕망의 주체에게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운명지워진 것이었다)를 향해 예지적일반자의 초월의 운동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를 집으 내면서 지적하기를, 니시다기다로는, [예지적자기 그 자체의 내용은 진리로서 인식되는 일은 없는, 그것은 물 자체의 세계에 속한다]라고 쓴다. 욕망의 주체의 구성과 그 한계에 관해서, 그는 그야말로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욕망의 주체를 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死의 慾望]이라 그가 부르던 속에서 발견하려고 했었다. 의식의 저변에 밀어 닥치는 수상한 것들의 泡沫을 직관하여 그것이 에로스의 원리를 부정하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원리임을 인식한 프로이드는, 욕망의 주체를 구성하는 원리와 이 [死의 慾望]의 원리를, 무언가 하나로 통일하여 이해하려고 노력을 지속했었다. 자각적일반자라 하는 욕망의 주체의 근저에, 같은 원리들의 꿈틀걸임을 보고 있었던 니시다기다로가, 이를, 프로이드와 같이 부정적. 파괴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지적일반자에로의 초월적 운동으로써 이해한 것에는, 역시 동양의 종교사상이 그에게 입힌 심각한 영향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아직 더 이상 논하지 안기로 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이를 잇는 一文, [예지적자기 그 자체의 내용은, 마냥, 예술적 직관과 같은 것에 이르러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예술]이 十九世紀 후반에서 시작한 혁명적인 현대예술(모던 아-트)를 직접 가르키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니시다기다로가 [美]라 부르고 있는 것은, 일견, 유물론적이 아닌 관념적 미이며, [예술]은 그 관념적 미의 표현자의 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만 보면 무언가 매우 낡은 것을 그가 쓰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예술의 특징이라 하는 것을, 말라르메, 죠이스의 문학이나 세쟌의 추상회화에 이르는 미술의 흐름이나, 쉔베르그 이후의 음악을 두고 보면, 그기에는, 물의 현실계와 같은, 그때 까지 표상체계의 밖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 조직적인 회귀를 다하려고 했던 모습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은 [반역하는 것]이라고 일컬어 지는데, [반역(revolt)]라는 말의 어원은, 쫒겨 나고 잃어버렸던 것들이 시간속으로 회귀해 들어 다는 의미임으로, 이는 현대예술의 주제를 잘 나타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 [현실적인 것] [모성적인 것] [여자의 것]등의 표현의 행위속으로의 대규모적인 회귀운동을 가르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기서는 [미]의 현상이, 혹종의 유물론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거울의 단계]에서 시작한 욕망의 주체의 조형의 과정에서 이미 인간의 내부의 욕동의 활약(욕동의 표상화 이전에 있는 생명의 유물론적인 움직임을 가르키고 있다)은 욕망면의 기저로 후퇴하여 보이지 않게 되어 쫒겨 나왔던 것이다. [보는 것] 그 자체가 후와로스의 움직임으로 해서 그기에 거세를 치루고 원초적인 억압을 만들고 있는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물이라 부른다. 현대예술은 이와 같은 물인 것을, 표현속에 표상적관념적이 아닌, 바야흐로, 비표상적유물론적으로 회귀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계속)
1329 no image [場所의 精神分析] - 9
1496 2015-12-09
2 [場所]의 精神分析 제六장 慾望으로서의 西田哲學 – 9 이때 잃어버린 근원적인 그 [물건]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자각적일반자에 작동을 걸어 온다. 진실의 [나]는 말속에는 없다. 그것은 자각적구조에서는 절대적으로 소원해 버린 영역, 이 세계의 배후에 물려 서 있는 영역속에, 있다. 이를 세계의 절대적인 [술어면]이라 해 두자. 자각적일반자에게 있어 [진실의 자기]란, 이 절대적인 [술어면]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은 도달이 불가능한 대상이다. 프로이드적 주체는, 이를 근원적인 [욕망]이라 하여 끌어 안는다. 이 사태를, 니시다철학은 [술어면의 바닥에의 초월]로, 철학의 개념으로 표현해 보이고 있다. 근원적인 욕망의 대상은, 이 세계의 술어면 깊게 후퇴하여 숨는 것이다. 그기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면서도 자각의 [나]속에 억제할 수 없는 요망을 추동시킨다. 이 물건은 말하자면 거울속의 자신의 상을 보고 있는 [나]의 배후에 서서, [나]를 바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실의 자기가 그기에 있고, 주어가 된 자각적일반자를, 그 술어면 안쪽에서 [보며] [싸버리고 있는 것]이 있다. 초월의 원동력이며, 근원적인 욕망의 대상인 그 물건이란, 거울의 상의 술어면이며, 유아인 [나]를 보듬고 [싸 안아 버린 것], 즉 그것은 어머니인, 여자로 이으지는 무엇인가가 틀림없다. 로-란. 발트가 [그 자신에 의한 로-란.발트]에 揭堤한 한장의 사진에, 그것의 진실이, 응축되어 나타내 보이고 있다. 유아인 그의 모습을 나타낸 상의 배후, 상상계의 그의 [술어면]에서부터 속삭이는 다정한 것이 있다. 그 영상을 볼 때 마다 우리들은 발트와 같이 기묘한 비애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것이 있었던 시간이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기에는 불가능으로써 만들어져 있는 우리들의 욕망의 진실이 암시 되 있기 때문이다. 니시다기다로가 [철학은 우리들의 自己矛盾的 사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철학의 동기는 [놀라움]이 아니라, 깊은 인생의 비애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쓴 것은 ([장소의 자기한정으로써의 의식작용]) 그가 이런 사태의 복잡성을 정확히 뀌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철학은 主體가 慾望으로, 意志로 형성되며 그 원초적 지점에 서서 세워진 것으로, [보는 것]으로 인한 거세의 사실과 그기에 수반된 근원적인 상실의 감정을, 내부속에 품고 있는 것으로, 모양 지워저 있다. 욕망의 철학으로써의 니시다철학. 그 主題는 근원적인 것에의 깊은 욕망에 의해 추동되면서 전개해 가고 있다. (계속) * * *
1328 no image [場所의 精神分析] 8
1417 2015-12-08
2 [場所]의 精神分析 제六장 慾望으로서의 西田哲學 – 8 기분이 좋아서 거울 속의 자신의 似像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幼兒는, 이때 하나의 결정적인 去勢를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자기안에 자기를 비춘다]는 체험은 유아의 내부에 去勢란 중대한 현실을 만들어 낸다. 더욱 그것은 慾動에 직접적으로 작동하여 그기에 원초적인 억압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기서 부터 프라이멀한 욕망이 일어 서는 것이다. 칸톨-와 같은 사람은 [자기속에 자기를 비추는] 寫像(맛빙 mapping 函數)l이라고 하는 수학적 개념속에, 이와 같은 [去勢의 主題]가 감추워저 있다는 사실을 어렴푸시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유대인 답게 [超限transfini]이란 개념을 하나의 원초적억압으로써, 수학에 도입하였던 것인바, [일반자의 자각적체계]안의 니시다기다로는 아직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은 [논리]의 과정으로써,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초월의 사실이 그르저 있다. 그러나 생명에 관해 논하고 있는 니시다철학은, 어김없이 하나의 [욕망의 철학]이다. 우리들은 그기서 자각적일반자의 생성의 과정에, [鏡의 段階]를 다루는 라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삽입해 보고저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철학이 時代속에서 취하지 않으면 안됬던 일종의 [논리주의]의 입장의 배우에 숨어버린 많은 진실이 또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욱 [보는 자]와 [씨우는 자]를 둘려 싼 복잡한 뉴앙스에 찬 그의 철학적사고의 含蓄이 더욱 분명한 구체성을 띠우고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보다]란 말을, 니시다기다로는 두나의 의미로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자기를 자기속에서 본다]라고 하는 말이 품고 있는 [보다]란 용법으로, 이는 [비춘다]라는 말과 置換이 듣고 프로티노스가 말하는 [되돌아보면서 본다]도, 그노시-스파의 [빛속에 비추워진 자신의 影을 본다]도, 이 의미로 쓰이고 있고, 수학으로 말한다면, [寫像], 발달심리학으로 말한다면 [鏡의 段階]에서 작동하는 시각의 능력으로 이어저 가는 것이다. 동일성을 만들어 내는 [본다]가, 바로 이것이다. 그 원초적인 경험을 모든 인류가 자신의 유아기에서 체험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각적 일반자나 예지적일반자가 열려저 나올것이다. 이 인간이란 생물인 유아는, 거울속에 비추워진 사상에 自身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이 사상을 통해 [나의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방식으로 [자기를 자기자신속에서 본다]는 경험을 행하는 것이다. (니시다는 이 표현을, 그런 의미에서 쓰려고 하지 않는다.) [본다]에 이와 같은 거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그는 내키지 않는다. 이때, 유아는, 과감한 도약을 보여준다. 자신의 미래를 先取하는 모양새로, 거울의 사형면에 비추어진 것을, 자각된 [나]로 인식하고, 하나의 초월의 세계로 발을 디디기 때문이다. 유아는 이때 자신을 한정시키는 작용을 갖는 사형면의 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여서 자신의 체내에서 꿈틀거리는 욕동의 아나끼적 활동의 모두를 이 상속에서 상을 통해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한정을 받아 들임으로써 자각적일반자로 초월해 가는 즉 거세의 수용이 이와 같은 초월의 조건으로 되 있는 것이다. 라칸은 이를 [父- 의 – 名]이라고도 후아로스도 부르고 있는 바, 이 후아로스가 유아속의 原抑壓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 아이는 자각의 [나]를 향해 거인의 한발자국을 내 딛는다. [자기속의 자기자신을 본다]는 체험은 이와 같이 인간의 유아속에 원초의 억압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바로 자각하는 [나]란 것을 형성하는 것이다. [私]는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동일성을 얻기 때문에, 거울의 상을 통해 태어나는 자각적일반자가 나르시즘(自愛)의 구조로 만들어저 나올것이라고, 충분히 예측이 된다. 더욱이, 감정의 [私]이기도 하다. 실제로 니시다기다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장 적당한 의미로 자각적일반자에서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감정적자기 가 아니면 안된다. 감정의 내용은 가장 적당한 의미에서 의식적자기자신의 내용이라 생각할 일이다. 자기자신의 안으로 지향하는 입장에서 한정된 靜的統一이 감정적이다. 지향한다는 것을 자기안에 자기의 影을 비추는 것이며, 노에마란 노에시스자신속에 비추워지는 노에시스의 影이라 본다면, 자기가 자기자신속에 비추는 자기자신의 영상이 감정적자기이며, 이와 같은 영상을 자기로 한정시키는 것이 자각인 것이다. 이렇게 자각적일반자를 推動하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의 대상이라 하는 것이, 점차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거울의 상의 효과(자기가 자기자신속에 비추는 자기자신의 영상)에 의해 자각적일반자는 자신의 同一性이란 것을 획득한다. 이를 거꾸로 말한다면, 鏡像에 동일화함으로 해서 그는 [생의 자연계]였던 욕동의 활동에 원초적 억압(최초의 한정)을 가한다. [보는 것] 그 자체가 여기서는 후아로스의 작용을 일으켜 이를 거세를 거치면서 자각적일반자가 모양지워저 나오는 것이다. 그의 내부에서는 감정이라 하는 것이 발생한다. 自愛의 구조에서는 거이 자동기계와 같이 질투나 경쟁심이나 노여움 같은 감정이 넘처 흘려 나오게 된다. 이때인것이다. 자각적일반자라 하는 감정을 갖는 [나]는 자신이 무언가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을, 상실해 버리지 않았나 라고 하는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이다. 자각적일반자는 자각에의 초월의 대가로 자신이 엄청나게 중대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을 안다.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것으로] 거세된 [나], 자각의 구조의 내부속에 살기 시작한 [나]의 세계에서 그것은 이미 절대적으로 소원해버린 물(chose)이 되 버렸기 때문이다. 자각적일반자는 지금부터 타자로부터 부여 받은 것을 찌껄이며, 타자가 만들어 낸 세계안에서 소외된 자로 자신을 형성해 간다. (계속)
1327 no image [場所의 精神分析] 7
1408 2015-12-07
2 [場所]의 精神分析 제六장 慾望으로서의 西田哲學 – 7 유아가 거울을 쳐다보고 있다. 생후 아직 십개월정도 지났을까. 물론 아직 말도 못할것이며, 신경조직의 발달이 미숙함으로 몸 움직임조차 서툴다. 그럼에도 인간의 유아는, 거울속의 자신과 닮은 似像을 발견하는 것이다. 눈 앞에 자신쪽으로 빛을 되돌려 보내는 것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본 유아는 기쁨에 어쩔줄 몰라 하는 것이다. [鏡의 段階]에 관해서, 정신분석학이 언급해 온 것은 종교나 철학의 이해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프로티노스에서 베-매에 이르기 까지 존재의 내부로부터의 의식의 생성을 이야기하고저 한 종교적인 철학은 반드시 이 [경의 단계]에 상당하는 문제를, 가지 각색의 모양으로 표현하려고 해 왔다. 유아가 거울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이 어린이는 [자기를 자기속에서 비춘다]라고 하는 근본적인 체험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는 본다. 봄으로 해서 미래를 先取하는 모양새로, [나]라고 하는 것의 동일성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신경의 조직이 아직 미발달한 몸의 움직임도 중심이 잡히지 않고 있는 데도 대뇌만이 그 발달이 빨라서 거울속의 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이외로 잘 균형잡힌 그 외면의 모습에 미래의 자신의 이상상을 겹치면서 거울속의 사상을 기쁨과 동시에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이때 유아는 物(個物)의 산만한 집적에 지나지 않는 세계의 배후에(그 술어면에!), 그런 세계를 싸 넣은, 그기에 통일을 주고 있는 [주어적인 것]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것을 향하여 뛰어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거울의 상을 향한 의식의 도약이 일어 나는 것이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태를 [보는 것],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자기속에 자기를 보는 것]의 유혹에 응하여 유아는 하나의 자기 한정인 似像을 받아 들이고 하나의 초월을 이룬다. 신경조직도 미숙한 유아의 내부의 판단적 일반자는, 物인 자신의 신체의 [놓여있는] 술어면의 바닥을 초월하여 자각의 주체에로 위대한 도약을 이룬다. 그 순간 거울속의 似像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인 유아의 내부에서는, 자각적일반자가 자기를 한정한다는, 사태가 일어 난다. 자각적일반자는 [끊어 막히는]것과 같이 유아속에 출현하는 것이다. 라칸의 [거울의 단계]를 다룬 이론에서는, 다른 생물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 나는 人間이란 生物의 특수성이 강조되고 있다. 신경諸조직의 발달은 매우 뒤져저 있는데도 대뇌의 視覺野만이 이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달해 있는 인간의 유아로서는 처음으로 이러한 [초월]이 가능했다, 라고 라칸은 논하고 있는데, 철학이란 言說은 어찌된 연문인지 이와 같은 인간의 생물로써의 특수성을, 자신속으로 짜 넣지 않고 있었다. 니시다기다로의 철학에도 이런 경향이 현저하여, 이 경우에도 [장소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한정한다]는 등, 말하게 되는 것이다. 신경조직이 미숙하다고 해도, 이때 유아안에서는 거울의 표면이라고 하는 술어면의 바닥을 돌파하는, 자각적일반에로의 초월이 일어 나고 있는 것이다. 이 초월은 결코 [장소가 자발적으로 자기를 한정한다]라고 하는 모양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유아는 이때 스스로 하나의 한정을 받아 들인다, 라고 하는 행위를 행한다. 限定을 스스로 받아 들임은, 프로이드가 [거세]라고 하는 개념으로 표현하고저 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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