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제목 조회 등록일
18 no image 존재의 視線展
2701 2007-06-05
존재의 視線展 -倒錯된 聖스러운 시선 : 김희곤 개인전 참관기- [소나무 S 갤러리에서 3월20일~ 4월28일 전시되고 개최 첫날에는 독립작가연구회(Iam) 에서 새로 시도하는 ‘작가와의 만남 Presentation & Interview’ 기획에 따른 지정질문자 박남걸선생(한국예술철학), 임재광선생(작가.미술평론가), 진행 전원길(작가.소나무S갤러리 관장)에 의해 많은 내객들(대다수가 작가들이고 일부 관심있는 일반인)과 함께 어울려 전시작가 김희곤과 사안에 대한 질의 응답형식의 토의가 있었다.] 김희곤의 데뷰 초기작품을 도록을 통해서 보면, 삶의 일상속에 던져진 자신의 실존인식을 신표현주의적 화풍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부조리한 현실속에 매몰되어 갈 때 관념적으로 해체의 위기에 부딪치는 법인데, 이때 작가의 붓에 의해 잡혀있는 [아담과 이브] [자화상]등이 바로 해체의 위기에 내몰린 작가의 마음의 내면풍경이다. 작가자신은 이를 두고 “화면의 내면은 마치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되듯 자기 존재성을 분출하고 있다. 이렇게 분출되는 것들이라는 것은 오감에 의한 체험이나 본질직관을 통해 화면에 자유롭게 표현된 것 들이다.” 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환상을 토해 내듯한 분방한 필법으로 그려진 이때의 평면작품들은 작가가 해체의 위기를 막 부딪쳐 대응해 내고 있는 가장 순수하고 정직하게 잡힌 그리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작업들로 보인다. 자기 검증. 정체성 위기 의식. 그리고 탈출 구제에 대해 강하게 잡아낸 vision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의 세번째 와 네번째 개인전의 도록을 통해서 그림들을 보면, 다중적 색상에서 차츰 몇가지 원색으로 제한되어 쓰여지다가, 이번 7번째 전시회에 이르면 단색조 일변도로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검은 비닐에 포장되어 무대에 등장한다. 이 대목은 전원길관장의 적절한 설명으로 “…….그의 일련의 작업 과정에 동원되는 비닐과 철끈은 그의 평면작업 속 이미지들의 상징 현실물들이다. 회화의 형식적 측면에서 보자면 공간 속의 사물이 평면 속의 이미지로 전이되는 과정의 역행인 것이다.” 라고 이르듯이 작가의 일상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기물들이 포박되어 시체의 염을 연상시켜주는 완전히 흑 단색으로 처리된 오브제들이 기물의 내용에 따라 하나씩 백색 벽면위에 걸려 있게 처리되어 있다. 초기작품들과 비교하면 작가의 예술적 기량이 잘 정제되고 단순화 되어 가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이를 작가 자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면작업은 입체적인 일상적 기물의 형상을 차용하여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관념을 평면 단색조의 캔버스 위에 이미지를 실은 물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관념적으로는 캔버스를 매개로 하여 실제기물과 관념과 이미지가 관계성을 지니게 되지만, 물리적으로는 세개의 따로 떨어진 개별적 개체로 존재함을 스스로 인식하게된다. 나는 여기에서 매개로서의 물질인 캔버스를 버리고 회화적 이미지를 떼어내어 회화적 이미지로 입체적인 실제 기물을 감쌈으로써 입체적인 실제기물과 관념과 회화적 이미지가 융합된 작품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수법의 변화에는 작가는 “융합’ 이라 하고 있지만, 달리 표현하면, 평면캔버스에 묘사해 내려고 하는 관념세계의 복잡성과 이미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마치 조각 작품과 같이 ‘실물’ 을 등장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작가의 인간과 사물의 불온성 혹은 부조리성은 관념적인 세계의 것으로 원래부터 가시적으로 뚜렷한 오브제로 잡혔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더욱 평면속에 이미지화 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아우라’ 라고 표현한 바 있는 사물이 내품고 있는 ‘영기’ ‘에너지’ 등은 켄버스상에서는 영원한 아포리아(수행불능)로 남는 과제이기 때문에 이를 ‘입체물’로 제시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디언의 토테미즘이나 주술용 기구들의 대부분이 자연물로서 어떤 정령이 그 속에 들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조각하여 세워 놓는 것과 같이 김희곤은 이를 자신이 구분하고 있는 ‘실재’와 ‘파생실재’, 원형태와 유사태의 대비를 통한 정체성 인식을 위한 수단에 의해서 구분하고 있다. 인디언은 김희곤의 ‘파생실재’를 곧바로 정령이 깃든 ‘신성물’ 자체로 보는 대신 김희곤은 참실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차이가 대비될 수 있다. 실재와 파생실재간의 불편한 동거관계란 ‘원본’과 그 ‘복제품’과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복제는 원본과 한 시점에서 변존할 때, 역으로 원본의 본질을 훼손하기 때문에 근친상간적 불편함을 그 속에 안고 있다고 할수 있다. 김희곤은 이 불편함을 사물의 현시적 역학관계 속에서 보는 측과 보이는 측의 시선의 차이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희구하는 ‘존재의 시선’ 존재의 참실존을 보게 하는 시선의 작가 고유의 도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입체물은 항상 그 작품의 최종적인 해석과 수용의 콘텍스트를 관객에게 돌릴 수 있는 유리한 점이 있다. 오브제에서 이미지로 가는 평면작업과는 역효과가 작용하는 것이다. 오브제에 직면하는 관객은 자신의 평면이나 이미지를 그려나가게 되는 꼴이 된다. 드로잉으로 처리된 헝클어진 먹선위의 종이의 ‘裂傷’의 흔적역시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백색과 흑색의 시선의 역전, 실재와 파생실재의 구획을 강요하고 있다. 이 또한 입체물이며 평면작품은 아니다. 아니면 입체물처럼 보이게 한 착시작품이다. 오브제에서 이미지로 전이해온 수순의 역이 되게 함으로서 긴장을 증폭시키며 감각적 喚起力을 高揚하는 것을 노리고 있다. 여기에는 아직도 이전 작품에서 내품고 있는 엉킨 검은 선들이 바탕에 그대로 깔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하는 작품성의 완성도면에서 더 돋보이는 수준에 와 있는 듯 하다. 막장에 예정에 없던 김성배씨의 비닐을 덮어 쓰고 먹물을 종이위에 쏟아 붓는 이번 전시회와 공진하는 멋진 퍼포먼스의 한 막이 연출되었는데 종이 위에 먹물이 그려낸 드립핑의 형상이 아주 시원하게 전시회 전체를 갑싸주는듯, 하나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건 대단히 의미가 깊은, 행위예술과 불가촉 그림이 함께 어울려서 동조하는 또 다른 ‘아우라’를 창출해 낸 멋진 에필로그였다. 무대위의 연극이 끝나고 아주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종결의 신발 소리와 같았다. 퍼포먼스가 가지고 있는 위력을 여지 없이 발휘해준 사건이었다. 김성배씨는 전시회평에서는 ‘전시작품들이 전시공간을 제대로 잡지 못한 아쉬움’이 느껴진다고 했는데 이 아쉬움을 그 자신이 대신 멋지게 체워준 셈이다. 나는 존재의 시선전이 단지 작가자신의 실존과 사물의 해방을 답보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안이며 그가 도출해 낸 시선이 세계를 향한 시선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사물이 일상에서 벗어난 거시적 우주적 공간으로 확대해 간다면 블랙홀과도 같은 강력한 흡인력도 만나게 될 것이다. 블랙홀은 우주적 참 실재로서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또 다른 엔토로피의 변이를 보게하는 그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작가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매김의 감각을 확실하게 하고 나서(실존적 정체성) 이를 확대하여 그 시선을 세계와 우주를 향해 던지도록 가늠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작가의 세계인식의 확대가 될것이다. 새로운 세계인식은 새로운 자아인식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러할때의 시계는 넓어질 것이고 거기서 잡혀가는 자신의 정체성도 변모해 갈 것이다. 지금 인간 문명은 수평적으로는 온갖 문화가 융합해 가면서 마찰음을 내고 있고 공간적으로는 ‘지구권 실재의 파생실재’로 그 속에 복잡계와 케이오스가 넘나들면서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작가 김희곤의 ‘존재의 시선’은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덕택으로 필자는 오래간만에 매우 난삽한 철학적 화두가 되고 있는 ‘인간실존’의 문제와 상황을 시각적으로 다룬 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작가는 말이 없으나 그가 탄생시킨 작품은 진지하게 감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17 no image 2003 ‘초대작가와의 만남과 특별강좌’를 마치며- 전원길 진행자- 를 읽고
2873 2007-06-05
- 2003 ‘초대작가와의 만남과 특별강좌’를 마치며- 전원길 진행자- 를 읽고 - 아쉽게도 본인은 후반부에 가서 참가를 하게 되였는데, 그래도 이 강좌를 청강한 사람으로써 느낀 소감을 몇마디 적는다. 먼저 박남걸교수의 강의를 청강한데 대해서 감사함을 표시하는 글을 올린 것을 그 내용이 좀 엉뚱하드래도 양해 해주시기를 바라고 싶다. 현역작가로서 직접 이 프로젝트에 뛰어든 점을 우선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싶다. 수원 일원에 사는 많은 일반인들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리크리팅하는냐 하는 문제인데, 이는 작품을 창작하는 일과는 또다른 노력울 요구하는 문제이다. 내가 보건데는 마치 ‘군중속의 고독’ 과 같은 상황이 아니가 싶다. 황금어장의 흉년와도 같고. 미국과 같이 미술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고루게 인식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관행으로 되 있는 기부문화를 통해서 기업체가 선도를 하는 것 같고 우리나라도 기업체나 일반인으로서 그 가치를 제데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지방의 문화발흥과 개인적인 관심의 환기를 통해서 실마리를 풀어 갈수 밖에 없을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는 한 두사람의 운동가 가 나서되 주변에 관계하고 있는 작가나 동조자들의 결속과 지속적인 참여아래 켐페인이 전개되어야한다. 지역문화창달이란 대의명분은 있는 것이고 유지들속에서도 이 운동에 단계적으로 참여할수 있도록 하는데 진행 메뉴(프로그램)의 내용과 전개방식이 문제가 될수 있다.이미 다른 단체나 프로젝트에 간여하고 있더래도 메뉴가 참신하면 이중으로 간여 시킬수 있다. 참신한 메뉴를 엮어가지 않으면 매우 어렵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수원일원의 도시공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부조화를 찾아내어 이를 고쳐나가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던지(이를때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선배들과 함께하는 후배들이란 관점에서나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한다던지….) 처음에는 아주 결정적이고 상징적인 아주 적은 규모의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는 전술을 쓴다. 가정주부들중에 뜻있는 사람들을 후원부대로 엮어간다던지…..그래서 이를 화제로 만들어간다. 강좌도 본론을 처음부터 이런 전술로 이중화하여 기회를 잡아간다. 주로 유통기업체를 이용하여 디자인이나 미술적 가치가 있는 정보를 독자적으로 관리하여 이를 선전해준다. 등등 현재의 작가들의 여가시간을 인터넷상을 통해서 사용하도록 결속시킨다. 등등……………………. 독자적으로 자금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독자적인 아이디어 전업미술가들만이 해 낼수있는 것이어야 한다. 일종의 조용하데 설득력있는 켐페인을 전개한다.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 연대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국내외 미술 문화 여행 주관 회사의 기반 리크르팅에 일조한다. 작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을 꼭 알맞은 사람들이나 기업체에 대여하면서 화제를 불려 일어킨다. 이때 수원미술관의 협력을 얻는다 응용미술분야의 틈새 시장을 간접적으로 탐색한다. 프르젝트를 위해서 필요한 자재들을 생산업자들이 잠재우고 있는 것을 조사를 해 놓았다가 이를 이용한다. 수원미술관을 아에 통체로 역으로 이를 진흫시킨다. 깅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강좌별 list를 작성하여 이를 통합하고 수평적인 콤니케이선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위의 아이디어중에서 나는 미국 일본등지에서 하고 있는 사례를 옮긴것도 있고 그 중 매우성공한 사례도 많이 알고 있다.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는 그 어렵고 불가능해보이는 속에 오히려 유효한 보물이 들어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병의 원인은 항상 건강함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과 같다. 전원길교수의 강좌진행에서 그의 금년도 강좌진행을 마친후의 소감을 듣고 두서 없이 적어보았다. 그의 매우 합리적인 발상과 열정에 감사하고 있다. 이상 조규현 기.
16 no image 박남걸교수의 도가예술론
2684 2007-06-05
박남걸교수의 도가예술론 - 존재와 인식.존재와 표현 - 이번 두번쩨 강론은 유가의 존재론을 중심으로 도가와 서구미학을 비교하여 풀이해 주었다. 표현의 일차적인 매체는 소리고 그걸 확장해 가는데서 생겨난 ‘언어’를 대상 매체로 잡는다. 그리고 언어가 문장으로 다듬어저 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창출되는 콘택스트를 조명한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基妙 도는 항상 도로 있지 않고, 말도 항상 말로 있지 않고, 자연의 원초에는 말이 없고, 말이 천지에 나타나서 비로서 말이되고, 고로 그 지향하는 것에만 보지 않음이 말의 묘함이 있다. 한마디로 표현을 하면 언어가 가진 ‘규정성’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면 그 숨어 있는 무언어적 생동성을 놓친다. 한문의 문외한으로서 대략 이와 같이 잡아 보았다. 이 문장의 끝자락에 걸려있는 ‘妙’ 에 예술표현의 본질이 지시되고 있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 넘어 사물의 본질을 볼수 있는 가능태에서 부터 예술이 열리기 시작한다 라고 하는 이야기다. 언어는 불완전하다. 인간이 언어로서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은 일단 반어적 접근으로 주관적인 일류전이나 정감에 의존한다, 내앞에 나타난 현상의 시원적인 의미를 음미하고 다시 이를 바라보는 觀照에서 만이 참 교감이 이루워진다, 대충 이렇게 이해가 갔다. 이러한 언설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현상학적 그리고 동양사상적 접근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의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천지창조의 단초를 ‘말씀’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성서적 관점은 초역사적이며 초자연적인 재단이라고 보더라도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고 말의 자기지시적인 비롯함에서 비로서 존재가 탄생하였다 라고 보면 전혀 황도무개한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이 대목이야 말로 인간과 신과의 관계(종교적인 관점)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인간이 자연권에서부터 불리해 나온 ‘인간권’ 문명의 자연과의 관계망에서 빚고 있는 ‘단절성’ ‘고립성’ ‘사이버성(人工性)’의 특권과 문제점을 생각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인간중심으로만 보지 않고 우주적관점과 그 긴 시간적 스팬(span)으로 보면, 이러한 특권적인 분리의 긍정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면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 어떤 혹성물리학자는 이러한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엔토로피의 파멸적인 자가당착적 위기를 ‘일만년만의 위기’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류의 문명이 그 나아가는 구동력의 본질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구동력의 내재하는 ‘파래다임’을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등의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안은 아직 찾은 것 같지 않다. ‘역사의 종국’ 이라고 하는 말은 좀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서구문명의 파래다임을 절대시하는 유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는 미국의 일본계 정치학자 후란시스 후쿠야마의 화제가 된 책의 표제에서 매우 실감있게 대두된 말이다.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세계화’ 란 말에는 양의성을 띠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도 선진국대열에 당당하게 진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좀더 범인류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봐야하고 발신자의 입장에 서자는 것이고, 이는 근대화와 국가정체성의 새로운 인식(혹은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며, 두번째는, 역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의 맥락속에서 지역성과 지역문화를 발판으로 하여 보편으로 나가자라고 하는 방향의식이며 이 두가지 목표는 어느 한쪽을 결하고는 성립이 안되는 兩薏同質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제기하고 있는 화두는 이러한 현실정치적 사회적 국가적인 과제를 접어두고, 박교수님이 강론한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비켜갈 수 없는 동양사상의 연혁적 해석에서 다시 이를 귀납적 관점으로의 傳移의 필요성을 말 하려고 하는 것이며 이는 동양사상의 본질을 확대해석하여 언설속에 담아내고 있는 妙 와 理氣의 관점을 ‘만년만에 부딛치고 있는 지구권의 위기’ 의 관점으로 투사해 보면 어떤 파래다임의 변화가 일어날것인가 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동양사상의 파래다임에서는 현대물리학자나 환경응호론자들이 거론하고 있는 엔트로피(entropy) 란 물리적현상으로 부딛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흥미있는 질문이 나온다. 이 문제는 뒤집어보면 동양사상속에서는 당대의 학자나 군자들이 체혐하지 못한 것임으로 이런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며 문제가 될건 아니다. 그러나 이를 현대적관점에서 해석을 해야할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시간의 차에서 오는 전혀 새로운 그것도 지구전체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임으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사실은 오늘 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타율적인 면이 더 크다. 우리는 이 문제를 대하면서 그 해답을 곧바로 유가에서 찾을 수 없고, 서구문명권안에서도 그들이 초래한 이 문제를 전 지구적 단위에서 풀어 갈수 있는 묘법을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현대예술의 혼미함은 서구의 현대예술의 혼미와 겹치고 있으며(이건 근래의 한국미술사를 훑어 보면 금방 알수있디.) 우리의 사고는 비록 뿌리는 동양권에 두고 있지만 삶의 방식에서는 철저하게 수용된 서구문화의 부정적인 면을 노정하고 있고 그 틀에 갇혀 있다. 적당히 피난을 갈곳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또 조선반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사나 LA에서 사나 마찬가지다. 우주선상에서 지구를 보면 모두 한 점안에서 갇혀 있기 때문이다. 유가적 관점에서 이러한 전혀 새로운 문제를 포괄할수 있는 길이 있는가? 이것이 문제로다. 논리학에서도 연혁이 있고 귀납이 있는데 흔히 나무를 보고 숲을 본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떤 나무를 보고 어떤 숲을 보고 있는가? 쉽게 떠 오른 것으로 나는 엔트로피가 드리우고 있는 문화의 나무들로서 오늘날의 한국현대미술과 이를 아우리는 방식에서 보고 있다. 이런 어떤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어떤 작품들을 제대로 해독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이를 해석해 갈수 있는 직업에 있지도 않고.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조류로서는 이 영향권안에 놓여 있다는 점은 지적할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대단히 높은 감성과 역동성이 사회의 질서나 규범에서 벗어나서 헥분열을 일어키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는 사회공동체적 콘센사스에 의한 그물망이 상실되고 있는 뚜렷한 징후의 하나다. 치유란 관점에서 본다면 오진을 할 도리는 없고 한 집단의 문제의 치유란 관점에서 보면 더더욱이 오진의 카르테(처방)를 내서도 안되는데 우리는 집단으로 오진으로 악명높은 병원에 갇혀 있다. 일부 영리한 사람은 여기서 탈출하여 자연치료를 통해서 면역성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구성원 입장에서 보면 병원의 옳바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이 옳바른 진단중에 으뜸가는 자리에 ‘파래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가 있다. 보는 관점의 수정이다. 유가의 사상강론에서 박교수는 매우 유니크한 관점에서 동서양의 철학과 예술의 사조를 비교하는 넓은` 시계를 가지고 있다. 강론을 들은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이는 예술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질문이면서도 사조를 아울이는 철학하는 사람으로서는 피해가서는 안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예술이 철학과 동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철학은 과학과 문명사적 관점과 함께 동반해가야 하는 시대에 진입해 있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이들 쟝르를 가르고 있던 경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그동안 접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도 양자물리학에서 장자와 불교를 재조명하기 시작하고 종교학자가 혹성물리학자와 제휴하여 연구를 일꾸고 있고 언어학자가 소수민족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응호하는 운동에 뛰어 들고 이를 확대하여 세계적인 어필(appeal)을 하고 있으며 아시다싶이 퇴역한 전 미국대통령은 세계분쟁의 조정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보여 주었던 놀라운 슬기와 창조성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긍지를 안겨주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고유한 새로운 문제를 타개해 가야 한다는 관제는 남는다. 우리는 戰略이 필요하다. 박교수의 강론을 듣고 이런 엉뚱하고 돈키호테적인 의문을 부딛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 강론이 지니고 있는 대단한 매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15 no image 박남걸 교수의 ‘회사후소’ 해석
3599 2007-06-05
박남걸 교수의 ‘회사후소’ 해석 수원미술전시관에서 특별강좌 의 일환으로 전원길교수의 진행으로 열리고 있는 박남걸 교수의 ‘동북아의 예술정신’ 중 “회사후소”의 화론적 해석(12월 11일분)을 청강했다. 이 강좌는 박교수가 발제문에서 지적하고 있는대로 오늘날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독자적 현대예술의 새로운 관점과 그 실천적 가능성 탐색의 일환으로 한국의 전통사상에 내재하고 있는 유교적 예술관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이는 서구 현대예술이 서구문명의 발전 변화과정에서 직면하고 있는 혼미의 영향을 곧 바로 반영하여 일종의 해체와 회의주의속에서 아포리아(aporia)의 덫에 갇혀 있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문명의 대세로서 오늘날 서구가 직면하고 있는 헥심적인 문제는 인간상실의 극한점에 와서 ‘역사의 종언posthistoire’까지 언급하는 단계에 와 있고, 이는 비서구권의 문화정체성을 역으로 부추기고 근대화의 기치를 유일한 방편으로 몰리고 있던 한국역시 이러한 서구식 파래다임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자기해석’을 잡아 가기를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해석이란 문화적 맥락에서 독자적인 가치기준을 가지고 지역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내적 필연으로서 문화 콘텐쯔를 콘텟스트망속에서 도출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도 근대화의 힘겨운 과정에서 이러한 독자적 자기해석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혼미의 양상을 노정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일류국가로서 나아 갈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의 예술은 ‘철학’이 그 아포리아에서 탈출케 하는 강력한 요소로 등장한다. 다행하게도 동양권 문명과 문화속에는 서구를 능가하는 인간주의적 사상과 종교의 전통속에 서구문명의 대단한 역동성이 안고 있는 아키레스의 약점을 교정내지 치유 내지 보완 내지 지구권의 새로운 정신성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잠재해 있다. 역사학자이며 문명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에서, 문명의 흥망의 기본 틀을 문명간의 조우(encoune)와 도전과 응전의 도식으로 풀이하면서, 도전하는 문명은 항상 그 자체의 도전속에 내제해 있는 자기 부활 내지 갱신의 가능성을 도전당하는, 다시 말해서 응전하는 문명의 정신성속에서 본능적으로 찾는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이 대목은 그의 저술의 기본 테제로 도입한 문명간의 조우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서구식관점에서 벗어나서 인류전체의 역사란 관점에서 보기를 원했고 이를 ‘문명’이란 파레다임으로 포괄했다. 아주 긴 시간의 축을 가지고 세계역사를 본다면 서구문명이 오늘날과 같이 세계제패의 단계에 까지 와 있는 것은 그 기간이 얼마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지표를 통해서 판단컨데 서구문명은 매우 빠른속도로 추락하고 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것이다. 매우 아이로니칼 하게도 오늘날의 서구문명은 그 물리적 문화적 힘이 큼으로서 한계점에 온 것으로 보인다. 많은 서구 정치학자나 철학자들도 이를 전제하고 이 문제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해결책으로 동양사상이나 종교에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기 시작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엄격한 학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유일한 지향성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아프리카의 대안 가능성을 점치는 역사학자도 있다. 나는 이러한 문명의 명운과 관련 지으면서 박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좌의 내용도 예술의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유가의 회화론을 테마로 압축해 있었지만 그 저변에는 내가 언급한 위의 담론들을 깔고 있다고 보았다. 매우 다행하게도 박교수의 강연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수준에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에 흡족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특별히 마련된 강좌가 지역사회의 관련 기관이나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참가 할 수 있도록 홍보와 구전으로라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젠 시민의 차원에서도 이러한 강좌를 통해서 새롭게 눈을 뜨고 의미를 새기는 기회가 필요하며 이 필요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이 잠복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21세기를 살아 가는데 물질의 맹목적인 소비나 허세와 과시를 통해서 삶의 양적 만족을 추구하기에는 그 한계가 와 있다고 보며 정신적이고 건전한 교양과 양식을 통해서 삶의 질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도 인식할 때가 왔다고 본다. 우리들이 만사를 제치고 물질적인 풍요의 생활을 추구해 온 결과에서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파멸적인 불행을 모두들 피부로 느끼고 있다.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 교양을 통해서 자신의 보람을 찾는데 있으며 이는 자기존재가 진정한 나를 보기위해서 타자를 볼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떠가는 일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행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활들을 하고 있다. 박교수의 담론중 유가의 성지시자(현명한 군자는 시간을 본다)란 대목의 해설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 와서 유교나 도교의 토착문화와 접목하면서 새로운 대승불교의 선종을 낳게 한 점의 핵심에 와닿는 대목으로도 들렸다. 필자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숫자에서 0 이 차지하는 초월적의미가 막대하며 인류가 0을 발견한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0 이 인도에서 발견된 것을 우연한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0 의 철학적 영향이 불교의 공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데 막상 서구의 세계에서는 실용적인데서 멈춘 반면에 중국에서는 불교의 공사상으로 접목된 것 같다. 이는 서구의 기독교의 세계관과 동양의 자연순환사상의 갈림이될 수 있는 매듭으로 본다.일신교적 사고에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전제되여 있는데 반에서 불교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체계가 서로 엇물려 순환한다는 우주관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실상에서 ‘무’와 ‘공’을 파악하는 파래다임에서 비로서 0의 의미가 철학적으로 이해가 된다. 0 은 중간자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만물의 ‘도’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면 현상적으로는 ‘시간’으로 나타나지만 시간의 본질일 뿐 공의 본질은 아니다. 공에 와서 비로서 모든 존재는 자기지시적인 직자로 인식될 수 있다. 괄호 속에 갇혀 있는 0 이 아니라 순환의 틀속에 열려 퍼져 있는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구문명의 다이나미즘을 읽고 싶다. 오늘날 첨단을 걷는 서구 미학자들 중에는 서구문명이 안고 있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끊임 없는 자기복제현상을 반자연적인 일종의 ‘암’으로 보고 있는 사실을 주목한다. 아마도 박교수의 ‘성지시자’의 해석에도 이런 파래다임의 차이를 깔고 있을것이다. 전문가들 뿐만 아니고 일반 수원 일원의 많은 시민들에게 까지 알려지면서 이 특별강좌의 취지가 계속 빌전해가기를 기원한다. 이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전원길교수와 이를 주관하고 있는 수원미술관측의 노고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강좌를 듣고 저녁 식사까지 베풀어 주신 분들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슈-뤂의 칼럼에 올린다. 조 규현. 슈룹;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소나무
14 no image 사진을 통해서 본 연못이 ...
2889 2007-06-05
사진을 통해서 본 연못이 그런대로 수수하게 주변경광과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모든일들이 주어지고 규격화된 환경속에 갇혀사는 도심지의 아파트생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과 더불어 숨쉬고 노동하는 기쁨을 떠 올리게 합니다. 생활속에 터를 잡은 한 장치미술작품와 같은 것입니다. 어제는 세살박이 손자님이 어떤 사정으로 우리집에 피난을 해 왔었는데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동네 애완동물들 파는 가게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큰 자라 적은 자라 큰 토끼 적은 토끼 아주 귀여운 적은 쥐 열대지방에서 보이는 녹색의 도마뱀 온갖 열대어 등 많은 생물들을 선보이고 있는데 아이들은 평소 보지 못하던 신귀한 동물들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반응을 보여 한시간동안 좋은 동물 사랑 자연학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도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때문에 그 위에다 부모가 모두 직장인이라 보모를 두고 있는데 내가 여러면으로 관찰을 하고 있는 요주의 대상이지요.지나친 인공환경이란 것이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니까. 작가와 나누는 시간프로그램은 김성배를 시작으로 할때 또 사정이 있어서 가보지 못하고 그냥 무심하게 지나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12월 11일 잡힌 프로에는 나가볼 작정입니다. 저는 좀전에 강성원씨의 논산 창작실을 방문을 하고 일박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최근에 열었던 전시회에 이은 방문이라 마주 실감이 나고 얻는것이 많았습니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깝게 접촉하면서 작업실과 주변 공간을 직접 탐방을 하게 되니 작품세계가 좀더 현실감을 띄우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담 작가와의 대화가 아주 자연스렵게 이루어지고 궁금한것들이 풀려나가는 재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었습니다. 강씨의 그림세계의 뿌리가 되고 있는 독일 신 표현주의와 이를 대표하는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와 자료들을 일부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큰 소득이였습니다. 아주 황량한 시골의 국민학교 분교의 한 교실에서 그것도 혼자서 버티고 있는 강씨의 지구력 또한 보통의 수준을 넘어 있어 보입니다. 전시회때 마음에 두었던 그림은 누가 사가지고 가바렸기 때문에 대신 다른 그림 한점을 특가로? 입수하였습니다. 이제 내방에는 김성배 전원길 이윤숙 강성원의 소작들이 한 점씩 모여지게 되였습니다. 지난번 보내주신 서리내린 낙엽이 깔려있는 뜰 풍경사진중에 한점이 아주 잘 되어 사진을 찍은 분의 의도가 잘 살려져 있었습니다. 어느것인지 짐작하시지요? 소나무갤러리와 전원길의 삶의 언저리소식을 즐겁게 열어보고 있습니다. 이런 보조적인 연출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이따금 작품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감상하게 되면 전혀 다른 친근감을 가지고 작가의 세계를 대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한전에서 처음으로 전원길의 작품들과 대면하고 이원일씨의 글을 통해서 조금 감을 잡은 이후 그동안 줄곧 전원길의 작품세계-그림들에 대한 관심은 지속해 왔으며 이는 또한 작가의 그림세계가 그렇게 오랫동안의 숙성을 통해서 비로소 확실하게 잡혀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글 또한 대단한 수준에 와 있으며 글의 특색은 그야말로 '명징'과 '논리적 설득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대단한 독서력이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나올수 없는 글들이지요.가장 중요한것은 언로가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고나 생활들이 모두 응집되어 있다기 보담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들 참 현실(Real Rality)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이럴때는 가장 가깝게 가장 설득력있게 이해하는 대상들이 가장 영향력이 크고 귀한 존재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삶의 가장 가까운 이야기들이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내가 미술감상학습을 시작하면서 터득한 교훈이 있다면, 이 세계를 지식과 관념의 과잉으로 보려고 한 사고에서, 눈에 와 닿는 가장 가까운 표상의 프리즘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보는 세계를 새롭게 볼 줄 아는 시각의 발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중의 하나가 '자신을 채워가는 것과 비워가는 것의 분별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각적사고'의 중요성을 학습한 것입니다. 마치 예술의 다른 쟝르, 예를 들면 고전음악에 심취하여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든지 어떤 영화작가의 작품성을 토대로 해서 영화미학을 익힌다든지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림은 한점으로 아주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마술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것이 그림의 특권적인 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의 공간은 시간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콘택스트로 성립한 것이고 미술은 보는 사람의 감상력에 의해서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차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남고, 미술은 보는 사람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가 남는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소나무갤러리에게 보내는 인사로 대신합니다. 시각예술감상법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사람으로 부터. 조규현배
13 no image 최예문 선생께
3288 2007-06-05
최예문 선생께 아주 힘든 잔치를 치르시느라 항상 수고 하시는 최여사에게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중가인전 1부를 놓쳤기 때문에 이번에는 만사 무릅쓰고 참관을 했는데, 발품을 판 보람이 있어 작가 한분 한분의 수준높은 작품들을 볼 수 있었고, 작가들을 위시하여 먼곳에서 부터 찾아주신 귀한 내빈들의 진지한 관심들, 세련된 도록, 슈-룹 활동의 자기성찰과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등의 담론등을 들으면서 그 저변에 흐르고 있는 심상치 않는 변화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운이 보다 유효한 실천력이 수반되는 지역사회의 동인활동으로서 발전해갈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개인으로서는 슈-룹과 인연을 가진지 4년째가 되는데 작년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감상에 필요한 공부도 하고 해서 그동안 슈룹 회원들과의 개별접촉을 하면서도 김성배씨가 선도하고 있는 슈-룹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온 편입니다. 미술을 모르고서는 이런 동인활동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란 생각도 있었고, 겸해서 자신의 미술 감상 학습의 틀을 하나 만들어 내고 또 그렇게 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적 인격적 수행도 함께 해 가는 걸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벌난 참관인도 한 사람쯤 있어 심심치 않을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우선 저의 일본어 해독력을 이용하여 좋은 자료들을 찾아내서 번역을 하여 인터넷에 올려보고저 시도한 것이 최근에 완료한 [뒤샹은 말한다]입니다. 제가 그동안 입수한 자료들이 제법 있는데(미술에 관한 것들) 이런 것들을 잘 선별 해서 계속 번역을 해서 올려 볼까 합니다. 이런 일들이 슈-룹 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을 바라고 있으며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일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번에 시장에 나온 김해심씨 김성배씨의 책도 축하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김성배의 책에는 도병훈씨의 그림이 많이 삽입되여 있는걸 봤는데, 아주 잘 어울려서 책의 격과 상품성을 공히 격상시키는데 큰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소나무 갤러리로 가는 길은 도심지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뻬 놓을정도로 멀어보이고 어지럽지만, 한번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있는 사람이면, 다시 그곳을 아쉬워하게 됩니다. 그곳은 예술인들이 그 지친 영혼을 잠시 쉬게 하기에 충분한 어떤 흡인력이 있습니다. 자연이 인간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가짐으로서 자만하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는것 만큼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주인의 넉넉한 마음이 있고, 개짓는 소리가 있고, 무엇보다 예술과 예술인의 진지한 입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소나무갤러리를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조 규 현 배
12 no image 친애하는 전원길씨
2859 2007-06-05
친애하는 전원길씨 2002 프로젝트전을 계기로 알게된 야투의 자연미술전을 현장에서 처음으로 관람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산성을 넓게 펼쳐놓고 전개되는 자연속의 예술전시를 처음 가 보았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으나 다행히 전선생의 친절한 안내로 감상의 넉넉함을 맛 보고 돌아 왔습니다. 전원길씨의 '길을 따라서'는 작가의 해설까지 곁들여서 감상을 하게되는 행운을 얻어 숲속에서 다시 만나는 전원길의 입김을 직감 할 수 있었습니다. 길을 따라 늘어놓은 밧줄에 띄엄띄엄 원색을 칠해 놓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색"의 부름(소리와 같은 역할)으로 일깨워주고 한 고정된 장소로 초대해 놓고 거기서 관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곳의 자연물과 맞닥드리게 하여 의무를 다하는....남는 일은 관자의 감상력에 맡기고........이건 시각적 매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며 관자도 따라서 드라마의 참여자가 되게하는 묘를 간명하게 연출해 놓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과 만나는 관자가 준비를 해 가야 할 일은 으례히 그렇듯이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고 자신을 내면적으로 비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를 맛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지가 많은 이야기를 압축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렵게 놀래고 있습니다. 이점이야말로 미술의 힘을 느끼고 또한 미술이 존속하고 존속해 갈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어떤 연출을 맡아야 하는가입니다. '길을 따라서'는 작가의 번쩍이는 재치와 예술을 잡고 있는 기량으로 창작된 시공 속의 '몽타쥬'의 효과, 공간을 시계열속으로 전이하고, 이미지를 이야기로 변환하고, 관자속에서 통합케하는 일련의 씨켄스로 보면 아주 재미있는 감상이 될것입니다.자연속이란 겉으로 나타나는 사물의 표상의 풍요로움 못지 않게 그 안의 자연태가 갖고 있는 상호엉김-우주적 그물망과 같은것을 바로 체험할 수 있는 임장성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 같습니다. 이건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아주 원시적인 감성을 촉발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혀 다른 차원의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전시장을 찾아 가도 되지 않을까......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숱한 이야기들을 들으려.....
11 no image 친애하는 전원길씨
2915 2007-06-05
친애하는 전원길씨 이제 5월도,주변에 돌연히 나타나서 반발하고 있는 붉은 장미의 축제와 함께 무르 익어 가고 있습니다. 도심에서도 계절에 따라 순서대로 피워주는 꽃들로 인해 조금은 기분전환은 되지요.계륵리의 만춘은 그야말로 녹색천지겠지요. 아들님을 타향에 보내놓고 허전하지 않습니까. 내 경험으로는 남자는 일직감치 타향살이를 시키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좋고 부모들에게도 또 다른 측면의 보답이 돌아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신문 문화란에서 뽑아낸 순서대로 어제는 사간동지역 국제화랑의 아니쉬 카푸어전을 시발점으로 뒤돌아 오는 길목에 위치한 화랑들을 훑어보는 식의 미술전시회 나들이를 해 보았습니다.어떤 특정한 화랑을 지목하여 찾는 일 보담 화랑들이 줄을 이어 뫃여 있는 지역에서는 장소위주로 순서대로 관람하는 '감상학습'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이 지역에만 세시간여를 활애하다 지쳐서 예정에 잡았던 호암겔려리쪽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니쉬 카푸어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로 '세계의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조각가'로 크게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도 자연스렵게 끌리어 간 면이 있습니다만 그가 인도 출신이며 1977-78 영국 Chelsea School of Art, Lodon에서 수업을 했고(전원길씨도 1999년에 이 대학을 나왔지요) 신문기사에 실려 있는 글에서 '동양의 철학과 서구문화의 접목' 이란 사실에 주목을 했습니다. 작품은 모두 아홉점이 동원되여 있고 이들은 모두 한국전시를 위해 제작된 것이라고 , 인사말에, 화랑 대표인 이 현 숙씨가 전하고 있습니다. 카미엘 반 반켈의 작품세계의 해설 [아니쉬 카푸어 작품에서의 숭고에 관하여]글과 이우환씨가 1997년5월에 쓴 글 [아니쉬 카푸어]이 도록에 게재되여 있습니다. 반켈씨는 카푸어의 작품내면의 주로 심적 혹은 심리학적 측면을 , 인류문명이 잃어가고 있는 [숭고성 the sublime] 이란 화두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고, 이우환씨는 역시 '모노하'의 거장답게 아주 드라이한 멘토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우환씨의 멘토는 마치 인간이 체험할수도 볼수도 없는 4차원적 세계의 물리학적 진실에 육박하는 맥을 잡언 정확한 분석과 이를 지구권적인 문제속에 함몰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부조리함, 묵시론적인 절망감 ,현대예술의 문제등으로 대입시켜 그기서 어떤 가능성 혹은 '구제의식'을 보고 있는듯 합니다.카푸어의 조각방식이 '일상의 시각을 초월한다'라고 전제하고 있는 이우환씨는 다시 일상속으로 환원하는 역설과 '일반화' '우주의 유기체적 망'등등으로 마치 고대 인도의 '시바 나타라자(Shiva Nataraja)천동상이 그러하듯 '현대적인 시바여신상의 오브제의 무도'를 떠 올리게 합니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저자인 카프라박사는 조상(sculpture)의 가장 이상적인 오브제로 역사속에 부상한 10세기의 인도 예술가들이 만든 이 시바의 조각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습니다. [시바의 무도는 생사와 소멸의 우주적인 윤희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인도의 신비 사상에서 모든 존재의 기본으로 간주되는 생사의 일상적인 율동까지도 상징한다. 동시에 시바는 세계의 다양한 형상들이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환상(maya)이라는 것, 즉, 그가 그의 춤의 끊임없는 유동속에서 그것들을 계속하여 창조하고 소멸시키므로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망상이요, 계속 하여 변화하는 것이라고 께우쳐 준다. ] 카푸어의 '공' '비어 있음'의 냉용으로 보아 여기에 준하는 맥락에서 잡히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하기야 인도자체가 힌두교와 함께 카오스의 항아리와 같음으로 여기서 잡히는 '공' 계념은 불교까지도 포괄하는 깊이와 넓음이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우환은........... [조각은 공간을 위한 놀이터이다. 오늘날,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향의 성취를 위한 모더니스트들의 과제가 좌절되고 있지만 아니쉬 카푸어는 그의 조각을 통하여 다시금 인간의 전망을 위한 새로운 종류의 구원을 모색하여 제시하고 있다.] 라고 그의 멘토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한때 구스탑 말라의 교향곡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처음 이 작곡가의 음악과 만났을때 느꼈던 당혹감과 난삽함은 뒤에 찾아온 감동과 환희의 공감에 의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마치 우리가 현대의 조각을 볼때도 그런모습의 과정이 일어 나지않나 합니다. 그의 작품을 대할때 느끼던 감회가 차츰 용해되어 작품의 내면적 진실에 동시에 와 닿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군요. 반켈의 맺는 말에.......... "개념으로서의 괴기함을 그토록 흥미롭고 논쟁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심각하고 대중적인 문화의 모든 분류들을 똑바로 뀌뚫는다는 점이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에 적용될때 그것은 그의 작품이 지니는 외연적 차원과 비이성적인 연상적 반응 사이의 표면적 불일치를 넘어 설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보편적 원칙들을 근거 없이 이용하지 않는 통합적 견해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우리가 그속으로 빨려들어가기만 하면 감각적으로 전달되는 감흥을 홱덕할수 있다라고 말할수 있다면, 시각예술인 조각작품은 이외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동적으로 바로 순간적으로 와 닿지않고 끝없는 지체가 일어 나는 점이 다른것인가. 하기야 이런점이 없으면 현대미술이라고 말한수 없겠지만. 그 지체를 이어가게 하는 이마쥬의 힘은 또한 대단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 같고. 그러나 그런 과정을 잘 견디어 나가고 어떤 확실한 이해와 느낌의 융합점에 도달한다면 이 또한 매우 갑비싼 보상을 얻게 해 주는 것도 사실인것 같습니다. 물체로서는 한점 보잘것 없는 '덩어리'가 현대문명과 문화 그리고 인간의 위상과 향방까지도 함축하고 제시해 주고 있다니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조 규현 드림
10 no image 친애하는 전원길씨
3098 2007-06-05
친애하는 전원길씨 다음은 한국판 뉴-스위크 6월 4일 발행 p.76 에 개제된 카푸어전 논평을 옮기는 것입니다. 기자: 송성희 80년대 이후 세계 조각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도 출신 조각가 에니쉬 카푸어(49)의 조각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호암갤러리에서 6월 1일까지 열리는 '마인드 스페이스'전에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한 적은 있지만 한국에서의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전'. '뒤집어진 정적'. '뒤집어진 세상'. '회색의 허공'. '그 산을 기억하라'. 신탁'. '지금 막, 공간은 오브제가 되다'. '인도 여신'. 등 8점의 작품은 모두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한 최근작들이다. 봄베이에서 태어난 카푸어는 18세 때인 1970년대 초 인도를 떠난 이래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브론즈.사암.대리석.석판.유리섬유 등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선명한 안료의 서정적 강렬함을 결합한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동세대 작가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조각가로 곱히고 있다. 카푸어는 자신의 작품이 오브제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육중한 양감과 거대한 스케일로 재료의 물질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속성, 혹은 기의 흐름을 드려내 관람객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카푸어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숭고함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에게 숭고함의 경험은 항상 원초적인 육체. 심리적감각들과 연결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비어 있음은 많은 존재양태를 지닌다. 나는 늘 몸 속.동굴 속.자궁 속 등에서 물체에 의해 소모되는 듯한 존재의 개념. 공표의 개념. 현기증이나 추락, 안으로 끌어당겨지는 듯한 감각에 매료돼 왔다. 이것은 빛과 용화된 그림을 거꾸로 뒤집는 숭고의 개념이다. 이는 일종의 안과 밖의 뒤집기이며 암흑의 시각이다. 시각이 불확실하고 접촉을 원하며 손을 뻗어가는, 오직 상상만이 탈출의 가능성인 것이다." 이전의 불확실한 실존의 기억을 불러일어켜 관람객의 감수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한 곡선의 윤곽을 따라가다보면 관람객은 자신과 관찰하고 있는 대상의 거리가 어느덧 소멸되는 순간을 느끼게 될수도 있다. 특히 알루미늄 표면에 관택을 내 거울효과를 극대화한 '뒤집어진 정적'. '뒤집어진 세상'같은 작품은 작품을 둘러싼 주변 공간을 작품의 표면으로 빨아들여,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지며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 열리는 듯한 환영에 사로잡히게 한다. 거대한 자연석을 소재로 한 '성전'. '그 산을 기억하라'. '신탁' 등의 구멍은 다른 공간으로 건너가는 통로로 존재한다. 이는 물질과 비물질을 통합하고 나아가 허공간과 실공간이 하나의 공간에 동시적으로 신존함을 드러내 물질과 공간에 대한 역설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키워드인 혼성. 탈물질. 디지털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카푸어의 이 특이한 작품들은 오히려 오브제의 물성에 충실함으로써 차원이 다른 시공간을 열어보여 감각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기사소개: 조 규현
9 no image 친애하는 전원길씨
3527 2007-06-05
친애하는 전원길씨 몇일전 그의 포트프리오. 김용대의 작가와 작품해설 그리고 최월희.랠프 캐플린와의 3인 대화록 일부를 참고 자료삼아, 이번 로댕 갤러리에서 소개하고 있는 죤 배의 조각전을 감상 했습니다. 이 화랑은 처음 가 보는 곳이였으며, 신문지상에서는 그의 코-드가 되다 싶이한 작품, 나무가 된 수닭,이 아주 넓은 정원을 깔고 있는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현대적'이란 대리석과 유리 철근들로 곽 채워진 숨을 쉬기조차 힘든 공간속에서 만난것은 일종의 재난이였습니다. 이 작품은 화랑입구에 놓여저 있는 진짜 로댕의 지옥문과 카레의 시민과 같은 공간에 놓여저 있어 이때는 내가 좀 불편했습니다. 작품배치상의 문제인데 사정상 어찌 할수 없었다 하드래도 죤배의 작품전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과 로댕의 유명세와 함께 보게한 처사는 시각예술의 기본 논리를 무시하고 있는 무례라고 보았습니다. 로댕 갤러리는 이런 물리적인 환경의 척력을 느끼게 하면서 나에게 다가 왔습니다. 죤 배씨는 나에게는 처음등장한 예술가이지만, 동과 서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국내외로 알려진 께 유명한 작가란 걸 알게 됩니다.이미 어떤 의미에서던 그는 관록과 권위를 등에 지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들은 우선 그의 명성에 어울리게 아주 청치하고 빈틈없어 보입니다. 그것이 텅빈 공간에 3차원적인 오브제로 놓여 있지 안했다면, 컴퓨-타의 화면에서 조성되는 정교한 설계도면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것 같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이 였습니다. 오래간만에 무엇인가 무개가 실려있는 조각을 보게 된다는 호기심도 함께. 이분의 작품들은 가는 철사와 그 철사들을 촘촘히 엮으 직물의 포지와 같이 보이는 요소들과 위의 나무가 된 수닭에서 사용하고 있는 철봉(bar)들을 종횅무진의 방향과 형태등으로 구성해가는 용접조각가 입니다. 그러나 처음 와닿는 기이한 인상과는 달리 차츰 알게되는 것이, 그 주제에 있어 과히 문명사적 시계와 우주적 존재론을 다루며 그 모티브에 있어 동양과 서양의 철학들을 넘아드는 통이 큰 세계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더 이상 쪼갤수 없는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 어떤 자유를 얻어낼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평하고 있는 김용대씨의 말을 빌린다면 이건 현대양자물리학이나 물교나 도교 힌두교의 세게를 방불케하는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서구적 문법을 가지고 보는 것이지만.조형상의 한계를 전제하드래도 그의 이 미립자적 탐색의 기본요소는 지극히 평범한 철사줄이나 철사줄을 포지와 같이 엮은 물체 혹은 분활소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마치 회화가 색체나 현상 혹은 선등의 기본에서 이루워저 가듯. 이 기본소에서 부터 출발하는 죤배의 조형세계는 그야말로 근대적인 장인들의 집념을 떠올릴정도로 어떤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서 금욕적인 고행을 마다 하지 않습니다.거이 모든 작업들을 손으로 처리했다고 보면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철저한 '구속'일수 밖에 없는 마티엘과 그의 관념과의 총돌 투쟁. 그 엄혹한 창작과정이나 결과물 그리고 약간의 언어적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서 관객은 죤 배의 예술세계를 수용하고 향수할 준비가 될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그의 주제들은 그야말로 현대 서구예술의 첨예한 문제들에서 부터 동양적인 사상의 깊이에 이르며 일종의 범세계적철학서를 읽는 것과 같이 둔중한 무개를 안고 있으 며, 최근작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나무가 된 수닭'에 이르러 마티엘과 관념의 통합으로서 의 해방을 느끼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재료의 단순성과 구속성에서 놀라운 화두들을 창출해가면서 보여주고 있는 조형성의 의미를 색임질하는 것 만으로 아주 보기 드문 지적 희열을 느낄수 있게 됩니다. 거시와 미시의 세계의 문제에 대담한 도전장을 던지면서 그 수 많은 현대예술의 헥심문제에 육박해 가고 있는 이 작가의 예술세계를 만난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와 표상의 문제는, 문제가 있다고 알려줄수 있는것만으로, 그 문제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문제들을 함께 아우려서 지속적으로 보다 더 큰 물음으로 나아가게 하는것 만으로도 "예술"의 존재이유는 살아 있다라고 할수 있습니다.오브제와 이마쥬의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는 긴장속에서 밀입니다. 나는 예술을 하는 작가들의 그 엄혹한 금욕적이리 만컴 고뇌스려운 삶을 보면서 예술을 감상하려 나서고 있는 자신의 안일을 보게되며 진정한 보상은 그 내면의 발견속에 있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자유는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아는것 부터 배워가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건 어떤것에 더 이상의 것을 첨가하는것이 아니라 어떤것의 실상을 발견하는데서 부터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이 발견이란 말에 가장 부합되고 있는 쟝르의 하나가 시각예술을 '보는것'이라고도 할수 있을까요. 조 규현
8 no image 친애하는 전원길씨 에게
3318 2007-06-05
친애하는 전원길씨 에게 귀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참신하고 의욕에 넘치는 젊은 여류작가들의 작품들을 볼수 있어 전시장을 거닐면서 그 기운에 홈벅 젖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서로 색갈과 관점이 다른 개성들이 13명이나 뫃였는데도 아주 자연스렵게 어색함이 없는 장이 어울려저서 마치 13인의 합주를 듣는 그런 울림이 느껴젔습니다. 그건 아마 바로 이 기획전이 의도했던 젊음과 신선함, 의욕과 분망함, 순수성, 한 수준을 넘어선 기량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기운이 차 있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수준의 작품들이라면 그 기백과 어울리는 창의적인 조형성에서, 품어내는 감성의 높은 격조에서, 우리들 모두가 함께 긍지와 자랑을 느끼고 큰 기대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장편소설이 한 작가의 창작물인 동시에 각각 전혀 독립한 개성의 인간이란 배치와 같아서, 한 작가의 작품들이 서로 다른 색갈을 하고 등장하여 연출을 하고 있는 무대와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교향곡은 언제나 한 작가의 작품일수 밖에 없드시, 13인전도 한작가의 서로 다른 13개 의 에피소드가 깔려있는 교향시라고 하든가. 지휘자는 전원길씨가 됥터이고. 곡은 수원 환시곡 이라고 하고. 여하간 미술전시회를 미술전시회답게 감상을 하려면 한작가의 울림뿐만 아니고 회장 전체가 품어내는 장의 울림도 들을줄 알아야 할것 같고, 서로 다른 선율의 매김도 들을줄 알아야 재미있는 감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작가는 남은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세계를 창출하지만, 감상자는, 작가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내면적인 정신세를 볼수 있어야 한다는 즐거운 공상도 해 볼수 있습니다. 비전문가의 감상자로서 필자가 본 그런 류의 하나의 세계는, 작가들이 겪고 있는 순교자적 엄혹한 현실이며 그걸 지탕해 주고 있는 작가'정신'입니다. 이 정신속에 그 현실의 안티로서 작가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있을것이고, 개와 전체를 잇는 필연의 논리도 있을것이며, 우월도, 크고 적음도, 궁극으로 비약하는 예술의 혼도 볼수 있을것입니다. 작가가 누리게 되는 '자유'는 구원을 의미하고, 개와 전체의 변증법적 지양은 '보편성'이 될것이며, 서로 다른 색갈은, 화법 고유한 선율을 의미하며, 예술의 혼은 작가의 구제와 관련되는 화두가 되겠습니다. 작가들은 이번 전시회 참가를 통해서 아주 창의적이고 신선한 작품들을 제시하면서 조용한 바람을 불려 일어키고 있지만, 동시에,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서 작가자신에게 해답이 아닌 어떤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실험정신이란 바로 끝없이 이어저가는 의문을 하나하나 검증해 가는 일일테니까. 본인도 하나의 크다란 물음이 될수 있는 code 를 하나 챙겨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물음(code)은 항상 자유롭게 떠 돌아 다니겠지만 언제가 이번 전시회 참가 작가들과 다시 만나는 기회가 오면, 그때를 위해서 그 물음에 대한 조금만한 해답(de-coding)들을 발견해 가게 할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전시회를 창출한 무대연출자들의 참신한 기획성을 높이 평가 하고 싶고, 전원길교수의 노고에 대해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의도 조 규현드림
7 no image 친애하는 전원길씨
5876 2007-06-05
친애하는 전원길씨 그 동안 안녕 하신지요. 오래간만에 소식 전합니다. SUMMER PROEJCT 관람과 두번에 걸친 갤러리방문을 계기로, 한참 열을 올리면서 감상문을 쓰 가다가 잠시 멈추고 시작한 것이 피엘 가반느의' 뒤샹은 말한다'를 번역하는 것으로, 이에 탄력이 붙어서 지금까지 이어저 가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은,한 작가를 연구한다는 것은 미술사를 이해하는것과 같고 연혁이기라기 보담 귀납으로 접근을 해야 할것이란 것이고 (일종의 BIRD-EYE VIEW) 글 쓰는 작업이 중단되드래도 그것이 진짜 중단되는 것이 아니란것입니다.글들은 고스란히 보존되여 있어며 또 어떤 계기를 만나 다시 발동이 걸릴지 알수 없지요. 일단 나의 미술감상세계속에 들어온 전원길의 그림세계는 그 나름데로 좋은 의미애서나 그렇치 않는 어떤 의미에서던 함께 성장해간다고도 할수 있습니다.알종의 마감이 없는 학습과제인 셈입니다. 그건 작품과 보는 나자신과의 거리를 말 하기도 합니다. 거리를 조금씩 쫍혀가는 것 그것이 학습이지요. 독서를 하면서 얻언 교훈인데 그냥 눈으로 책을 읽어 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는 관성이 붙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한다면, 독후감을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진정한 책을 읽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이, 작품감상도 언어로 치환해서 자신의 느낌을 글로 표현해 보는 것이 더 확실한 감상행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좀 한가한 사람의 이야기 같지만. 어제는 교보에 들려, 새로 나온 톰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박순철.아트북스) 과 김종근교수의 "한국 현대 미술, 오늘의 얼굴" (1), 마를셀 마르소의 마임공연 티켓등을 구입하고, 그날 잡혀있는, 동덕아트홀에서 열리고 있는 "황창배 회고전" 단성갤러리의 "최경자 풍경화전"등을 들려 보았습니다. 최경자의 풍경화에서는, 제목들이 전부, 서로 다른 색체명만으로 되여 있고, 수채화로 된 일부 작품들은, 보는 이의 현대적인 고유한 감성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수준에 이르고 있어, 그림에 대한 친금감을 한번 다시 일께워주었습니다. 작품이 던지고 있는 난삽한 이미지를 해독해가야한다는 입장이 아니고, 그렇게도 상쾌하게 우리의 감성을 건드릴수 있는 이미지는 또 어디서부터 오는것인가 하는 즐거운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즐겨운 그림이 남아 있다' 라고, 그 가능성을 향해 작가는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의 그림이 두고 두고 그런 힘으로 우리의 별난 시각을 즐겁게 해 줄수 있다면, 작가의 실험은 성공하는것이 되겠지요. 나는 이 그림앞에서 자기자신에게 아주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시지각의 수준이 어디쯤 와 있는가? 를 진솔하게 반문해 가도록 말입니다. 김성배씨의 슈-롶 기획전에 관한 공문도 와 있고, 수원미술관이 주최하는 지팡이와 방망이전 13인전에 이우숙씨도 보이고 있어, 그쪽 나들이도 이루워지겠지요. 슈-뤂기획전에 나를 등제시켜 놓고 글을 쓰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미술애호가의 자격을 부여하고) 아닌밤에 홍두깨 같은 김성배씨의 주문과 어울리기 시작한지도 4년쩨가 되어가니 미술애호가의 행세를 견지해가야 겠지요. 기회가 되면, 양도 하기로 한 세계시집(포장해 놓음) 과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을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들외즈의 감각의 논리는 여간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빗나가곤 하는 아주 난삽한 문체와 내용이라 조금 더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