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제목 조회 등록일
42 no image 석류 그 세번째 이야기
2774 2007-06-05
석류 그 세번째 이야기 당산동으로 이사를 온 후 나는 이전보담 좀 넓은 공부방을 확보하고 있다. 그위에 바로 옆방까지 덤으로 얻어서 책장들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부엌 창문을 통하여 서강대교와 양화대교사이의 넓은 한강이 시야에 들어와 그런대로 아파트생활의 딱딱함이 덜어지고 내가 저녁이면 산책으로 거닐던 고수부지를 바라볼 수 있다. 새로 확보한 방에는 새로운 책장이 들어서고 같은 자리에는 두개의 말라가는 석류가 다시 놓인다. 터키에서 가지고 온 석류는 집사람의 수난을 겼고 사라졌지만 그 짝으로 놓였던 석류와 나란히 이젠 네팔에서 가지고 온 조그마한 석류 한 개가 다시 짝을 짓고 놓여 있다. 이 네팔의 석류는 이번에 네팔을 다녀온 김성배씨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는 나의 오베리스크와 석류의 단상을 읽고 기억해 두었다가 대단한 재치를 발휘하여 한 개의 조그마한 석류를 선물로 가지고 온 것이다. 미술의 오브제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각기 터키.이란. 네팔의 원산지가 되는 석류들이 나의 추억과 이국적인 감회를 불려 일으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라가는 석류이지만 아직도 꼿꼿하게 그 품격을 지닌 채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훌륭한 오브제 역할을 해 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이놈들을 스켓치 해 볼 충동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서툰 솜씨로 그리기 보담 그냥 두고 보는것으로 만족한다. 빛깔이 바래면 바래는 대로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모태인 나무위에서 싱싱한 빛깔로 열려있었던 그 찬란했던 한 때를 상상하면서 그 기구한 운명을 새겨보게 된다. 김성배씨가 우리집을 찾아 오게 되면 이 석류를 나의 머리위에 올려 놓고 스케치를 해 주도록 부탁해 볼까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네팔의 석류는 세잔의 정물과 같이 영원성을 확보 할 것이다.
41 no image 빛나는 경관
2544 2007-06-05
빛나는 경관 박재삼 저 푸르고 연한 미루나무의 눈부신 잎사귀에 바람은 어디서 알고 여기까지 찾아와서는 끊임없는 희롱을 하고 있는가. 이런 범용한 것을 사람들은 예사로 보고 어떤 정치적 사건에는 그 한때에 머물건만 그것을 들고 큰 야단이네, 천년이고 만년이고 한결로 이 빛나는 경관이 한 옆에 있길래 넋을 잃고 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막상 어디 있는가. 사집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중에서 그 많던 미루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논두렁마다 빗자루처럼 길쯤한 키로 서서 구름을 쓸던, 참매미 말매미 쓰르라미들을 한 음큼씩 달고 어름내 편안한 잠 한 숨 못 자 야워던 미루나무들. ‘이런 범용한 것을/사람들은 예사로 보고’라는 대목에서 무릎을 친다. ‘범용’이나 ‘예사’나 흔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일컬음이니 보잘것없는 걸 보잘 것 없이 보는 게 무에 문제인가? 그러나 시인은 저 보잘것없는 것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라 한다. 새삼 시인을 알겠다. 보잘것없는 것들을 빛나는 경관으로 보는 눈이라면 세상만사 신비롭지 않은 게 어디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보잘것없는 것이란 없다고 말하는 것 처럼 보인다. 저 빛나는 경관, 죽고 나면 못 본다 하셨나요? 시인 자신이 이제 바람이 되어 저 이파리들 희롱하고 있는 줄을 내가 안다……. . 반칠환. 시인 <펴온이의 감상> 시가 담아내는 것이 이토록 범용한 것인줄 이제 알겠다. 숭보면서 닮는다는데, 나도 이제 ‘이 아침에 만나는 시’를 보기만 하면 용을 못쓰고 달라붙는다. 그 제와 내용이 아무리 예사로운 것이라도 우선 읽고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걸 어떻게 하나. 시는 어떤 재주를 부리던 읽는 사람의 가슴에 뭉쿨한 감동 하나만이라도 던져주면 대단한 것이다. 우리가 쉽게 얻을수 없는 그런 진하고 혼깊이 와닿는 감동이라도 얻는다면 더 할 나위가 없갰다. ‘빛나는 경관’은 마음의 느긋함이 돈 백량보담 보약임을 훈시한다. 나도 이따금 범속하고 보잘 것 없는 대상이나 감정의 파편에서 ‘빛나는 경관’을 보는 일이 있다. 이 양극의 대비법은 미술의 쟝르에서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 의 ‘숭고’의 개념과 맥을 같이 하는 미학이다. 바넷 뉴만의 대표작인 [누가 빨강,노랑,파랑을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은 현대회화의 규범을 철저히 배제한 불조화의 전범이 되는 작품이다. 그저 커다란 색면 덩어리가 눈앞에 육박하고 있는 이 단순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상식적인 시각을 교란하는 이 작품이 표현하고저 한 것은 이 세상에는 우리가 보되 보지 못하고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숭고’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범속함 속을 보되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을 박재삼시인은 ‘빛나는 경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규현
40 no image 獨逸現代作家展: 무대를 보는 눈
2716 2007-06-05
獨逸現代作家展: 무대를 보는 눈 THE SCENIC EYE: Visual Arts and The Theatre 로댕갤러리 2004.5.21-8.8 이번 전시에는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19명의 미술가들이 <무대를 보는 눈>이란 미술과 연극간의 관계를 공동주제로 참여하고 있으며 작품안내 설명을 맡고 있는 허유순여사의 설명에 의하면 ‘97년 이후 전세계를 순회하면서 2008년까지 여러나라에서 전시를 하게 된다고 한다. - 안내책자에 실린 소개 글 미술은 연극무대의 한 부분으로 존재해 왔지만 근래 와서 대본 없는 시각효과의 중심이 되는 ‘이미지 극장’이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무대장치 의상면에서 새로운 연출을 요구하게 된다. 미술가들은 삶과 예술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으로 퍼포먼스와 해프닝 같은 연극적인 상황을 만드는가 하면 새로운 매체와 설치방식을 통해서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연극적인 방식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이런 흐름을 감안하여 미술과 연극의 상호작용을 심도있게 논의하기 위해서 대부분 무대 미술의 경험이 없는 작가들을 선정하여 그들이 자기의 예술개념에 따라 연극을 해석할 수 있도록 안배하고 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들은 오페라를 소재로 한 무대 미술 디자인에서부터 작가가 생각하는 연극성에 대한 개념을 풀어낸 작업까지 매우 다양하다. 참여 작가들은 감독, 연출, 무대, 배우 그리고 관객간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숙고한 결과 자신의 고유한 작업내에서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연극적인 요소들을 미술을 통해서 찾아 내고 있다. 사진에서부터 회화, 조각, 설치, 음향과 영상들이 어우러지는 이번 전시는 스스로의 한계를 넓히며 변해가는 현대 미술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 된 바 있는 독일 현대 작가들은 미술과 연극이라는 주제 아래서 자신만의 전략을 새롭게 펄칠 기회를 얻었다. 플럭서스의 선봉에서 활동했던 볼프 포스텔에서부터 중국출신 재독 여성작가인 킨 유팬에 이르기 까지 이번 전시는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을 가진 독일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독일 현대 미술가들이 바라본 극장의 모습인 <무대를 보는 눈> 전시가 미술과 연극의 만남을 통해 두 예술간의 기밀한 관계를 돌아 보고 진정한 종합예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상 소개말 중에서 옮김. 참가 작가는 아래와 같다. 클라우스 폼 브루호. 칼프리드리히 크라우스. 히르트비히 애버스바흐. 요핸 게르츠. 라이너 괴르쓰. 막달레나 예텔로바. 한스 패터 쿤. 라이문트 쿰머. 마르크 림메르트. 올라프 배첼. 헤르만 피츠. 칼 하인츠 쉐퍼. 토마스 쉬데. 카타리나 지베로켈. 권터 워커. 볼프 포스텔. 우데 바이쓰-레더. 킨 유팬. 관람 메모 [지옥문]의 작가 칼하인츠 쉐퍼 Karlheinz Schafer 로댕갤러리가 자랑하는 로댕의 ‘지옥문’ 바로 앞 검은 천을 바닥에 깔아 놓고 (검정마루 500x500cm) 그 위에 9개의 조각오브제를 흩으놓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오브제들은 모두 球形(달갈형)으로 보이는 사물의 해체해가는 모습들을 하고 있다. 작가 쉐퍼는 문명의 복잡한 세계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을 꼽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다. 모든 이야기가 배제되면서 드라마들은 작가에 의해 하나 하나의 오브제가 갖는 기형화되고 녹아내리는듯한 해체의 현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단테의 현대판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마주하는 로댕의 [지옥문]이 19세기에 나타나 조각계념을 새로히 바뀌놓았던 혁신적인 조형물로서 그 아래 마루에 전개되고 있는 쉐퍼의 [21세기형 지옥상]과의 대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한편의 미술사를 ‘보는’것과 같은 시각효과를 가저다 준다. 작가 쉐퍼는 이를 두고, ‘이 작품에서 나는 지옥에 대한 고찰을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신곡]에서 지옥의 구조를 이루는 깔때기 형을 거쳐서 나는 속이 빈 球라는 기본 형태에 도달하였습니다. 모양이 변하는 다양한 크기의 채색 오브제는 검정색 바닥 위에 느슨하게 흩어져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없는 변형되고 찢어진 껍지들, 부서지기 쉽고, 바람에 흩어지는 사물들은 모두가 자신의 작은 세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극장입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 옛사람과 현대인, 미개인과 개화인,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차이로 우리는 각자의 ‘地獄’상과 동시에 ‘天堂’ 상을 갖고 있다. 쉐퍼의 ‘지옥’은 관객들에게 소림끼치는 전율감을 불려 일어키지만 동시에 단테의 [神曲] 한편에 버금하는 [현대판 신곡]의 세계로 인도 해 준다. 무대는 작가가 제공해주지만 각색과 연출 뿐만 아니고 연기와 줄거리의 구성에 이르기 까지 관객의 상상력으로 진행시켜 가도록 유도하고 있는 점이 재미 있다. 권터 워커 Gunter Uecker 의 ‘니벨룽의 반지 The Ring of the Nibelungen’ 이 작가는 작년 3월에 현대갤러리에서 ‘고통과 치유, 속죄와 정화의 예술가’로서 전시회를 가저섰다.(필자의 칼럼에 소개되어 있음)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와그나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새로운 해석을 담은 작품이며 기존의 사실적인 해석과는 달리 파격적인 무대 디자인으로 께진 유리, 텅 빈 나무 그루터기, 금속, 돌, 재 같은 원시적인 재료들을 이용하여 무대의 분위기는 거칠고 험악하다. 이런 재료들이 오페라의 줄거리에 대응하는 상징성으로 잡아내고 있다. 이는 원 오페라의 ‘구제’에 대한 일말의 感傷도 혀용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대단히 차가운 끝맺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이 지향하고 증언하고 있는 진실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감미로운 幻想을 허용하지 않는다. 워커의 예술적 진실은 황량하며 매마르다. 그는 그의 작품의 코드가 되다 싶이 한 못을 가지고 자신을 향하여 쿡쿡 찔려되는 작가이다. 보는 관객들 역시 그 아픔을 같이 하는 수 밖에 없다. 색체의 전설 The Legend of Colour : 킨 유팬 Qin Yufen 색채에는 상징적 성격과 역사가 베여 있다. 색체자체는 기의가 없는 기표에 지나지 않치만 형태와 함께 하면 표현적 생명의 입김이 주입되어 상징성과 일화성이 부여된다. 노란 색과 검정색으로 염색되어 높게 걸린 20벌의 마오 인민복에 각기 긴 실크로 된 치마가 늘어저 있고 그 안에 드문 드문 전자식 스피커가 부착되어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어린시절 체험한 문화혁명때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스피커에서는 Mathias Kirschke 가 작곡한 전자음악이 들려 온다. 이는 베를리너 앙상불 극장에 설치했을때는 사물들이 즉시 역할을 맡아서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감을 제대로 잡을 수 가 없다. 가운데 자리 Middle Place : 한스 페터 쿤 Hans Peter Kuhn 스피커가 달린 박스 가운데 의자가 있고 관객이 앉아서 몇미터 앞에 떨어저 있는 투명유리속으로 자신을 비추워 보면서 일종의 상상적인 이미지의 여행을 하도록 권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고 하기 보다는 도리어 무언가 특별한 일을 일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나는 어떤 생동감이나 이야기를 보여 주거나 무엇인가를 알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저는 관중에게서 많은 감정과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관객들이 스스로 작품을 머리속에서 그려 나가도록 도와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도 군중의 박수소리인지 물방울이 모여 파란을 만드는 자연의 함성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관객이 판단할 문제로 남겨둔다. 이는 마치 이미지의 체면술을 거는 자리로서 인간의 감정이 이런 인공적인 자리위에서도 쉽게 연상작용을 이어갈 수 있을지 또 그러한 연상이 과연 진실이 담길 수 있는 살아 있는 상황에서의 이미지가 될수 있는지는 의심스렵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사이버성이미지가 되고 말지…………. 위의 작품 이외도 클라우스 폼 브루호의 ‘군인들에게 말하는 아르토’, 라이너 괴르쓰의 ‘스케너’, 막달레나 예첼로바의 ‘최종회의 연장’, 라이문트 쿰머의 ‘무대’, 마르크 람메르트의 ‘무대의 재구성’, 로제마리 크로켈의 ‘옷 입기의 중요성’ 등의 작품들이 있다. 미술감상의 입장에서 보면 로댕갤러리의 이번 초대전은 현대독일 미술가들의 테마전으로써 관념과 철학의 요람지 답게 대단히 이지적인 면이 두드려지는 것 같고 그 만큼 쉽게 와 닿는점도 있다. 미술작품은 전시장을 통해서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일께워 주는 이벤트이다. 조규현
39 no image 부처님 오신 날
2622 2007-06-05
부처님 오신 날 열열히 사랑하던 한 쌍이 있었다. 여자는 돈 많고 집안 좋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고, 남학생은 실의에 빠져 미국 이민을 떠났다. 훗날 이 여자가 둔 대학생아들이 실연당해 고통을 껶다 어머니 친구인 여교수에게 아픔을 토로했다. 얘기를 전해 들은 어머니는 아들이 애처로워 수소문해 보았다. 아들을 배신한 여자아이는 예날에 자기가 버렸던 남자의 딸이었다. TV 아침드라마 같은 사연은 지난해 법정스님이 어느 강연에서 들려준 실화다. 불교에서 업은 과거에 행한 선악에 따라 받는 고락을 이른다. 오랜 전생에서부터 지어온 무수한 업, 즉 숙업이 세상 모든 중생에서부터 지어온 무수한 업, 즉 숙업이 세상 모든 중생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부처는 전생에서 업의 사슬에 메이지 않았다. 그 500생 동안 한 번도 헛말, 헛일, 헛걸음을 하지 않은 자비의 덕으로 부처로 태어났다. 오늘은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중생을 건져내기 위해 부처님께서 오신 날이다. 아기 부처가 이렇듯 화창한 봄날에 온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산천초목이 가장 눈부시고 풍요롭게 살아나는 계절을 골라 가장 아름답게 생명을 빛내 보이려는 뜻일 것이다. 어는 옛 시인도 읊었다. ‘푸르른 물빛은 부처님의 눈/온 산은 부처님의 머리/달빛은 한 마음의 근원/구름은 8만4천 경문일세.’ 5월의 신록은 그 자체가 찬란한 찬불가다.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서는 길은 500년 된 전나무들이 우거져 한낮에도 해가 들지 않았다.초파일을 앞둔 지난 주말 거슬러 가는 25리 길을 걸어 오르며 소동파의 오도송을 떠올렸다. ‘계곡의 물소리 그대로 부처님 설법이요, 푸른 산빛은 청정한 부처의 법신이 아닌가.’ 불가는 악업의 사슬이 무겁다 해도 견고한 정진과 서원의 힘으로 끊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한평생저잣거리를 해매 살면서 마음에 끼인 때물 속인들이 어찌 벗겨낼 수 있을까. 조계사가 중학생들에게 앙케이트를 돌려 ‘부처의 정의’를 풀어보라 했더니 어느 아이가 답했다. ‘부처님은 변신 로봇이다.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오시니까.’ 헛일, 헛걸음까지는 몰라도 오늘 하루 헛말만이라도 삼갈 수 있다면 그 빈자리에 부처가 드실지 모를 일이다. 조선일보 오태진 논설위원 tioh@chosun.com <펴온이의 감상> 결과를 보고 ‘업’보를 께치는 인간의 단견도 문제이지만 많은 인간은 자신의 업자체를 헤아리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업은 우주의 대순환속의 한 가닥의 시작이요 끝이다.그리고 끝은 다시 시작으로 듸돌아가면서 서로 엇물려 있다. 생사고락의 연을 밝혀낸 부처님은 이 지구상의 생물들이 나고 멸해가는 데서 겪는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우리 개개인의 삶에서도 우리가 조금만 긴 잣대로 자신을 관조하면 자신의 업이 뚜렷하게 보일수 있다. 지구를 헤알리려면 40억년의 길이로 봐야 하고 우주를 보려면 무한의 잣대로 헤알려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을 헤아릴때도 조금은 긴 스팬(span)을 가지고 보면 그 속에 담긴 인과업보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참모습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들은 업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궁극적인 이 실재를 보려고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고 수행을 한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못박힘과 죽음과 부활을 인간의 숙업의 사살을 끊어 놓언 일대 사건으로 본다. 이를 중국의 현인들은 도라 했고 범인들은 도리라 고 하면서 삶의 지표로 삼는다. 나는 비록 결과를 보고 이 업의 엄혹함을 께우첬지만 우리의 삶의 과정전부가 자유이면서 묶이는 것이고, 혼란스려워 보이면서도 엄연한 질서가 있고, 악과 선이 곧 동전의 양면이며, 생과 사가 또한 그 바닥에서는 하나인 것을 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위하여 오태진선생의 글을 본 칼럼에 옮긴다. 조규현
38 no image
2832 2007-06-05
몸 나태주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눞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꿔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뻬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 준다 -시집 ‘슬픔에 손목 잡혀’중에서 천년만년 살아도 쫓겨날 일 없는 내 집인 줄 알았는데, 등기부등본을 때어보니 남의 집으로 되어 있다면 얼마나 허탈한 일인가? 혈기왕성하던 젊은 때야 일로 생각 했지만, 나이께나 들자 자꾸만 서까래 기울고 방고래 꺼지니 수리비가 수월찮이 든다. 귀밑머리 희어지고 무릎에 바람 들어오니 머지 않아 이 집 아주 비워줘야 함을 안다. 서글픈 일이나 진시황도 피치 못하던 일, 그러나 저 일이 어찌 서글픈 일이기만 하랴. 신이 영생의 감옥에 갇힌 걸 생각하면 때마다 집(몸)을 바꿀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가? 보라, 마른 잎 삭정이들, 해마다 꽃잎 새순이 되어 다시 돌아 온다. 반칠환 시인. <펴온이의 감상> 살과 영혼이 원래 한집에 거한데 구지 육을 이렇게 냉정하게 떼어내어 바라보아야 하는 시인의 의도가 수상하다. 자기속의 타자를 의식하는 것은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적인 사고의 몴이라고 하드래도 ‘몸’을 통체로 분리해 내어서 자신의 ‘분신이나’ ‘자기가 담겨저 있는 숙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싵세타령에는 무언가 불온한 의도가 숨어 있어 보인다. 이는 서구 기독교가 발전 시켜온 데칼트식 이원론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자신을 비우라는 참존재로 향하는 화두인가. 시는 어떠한 종교적인 이데오로기를 거부하는 예술이지만 그런 눈치 보지 않으면서도 취할 것을 두로 끌어안는 열려 있는 세계가 아닌가. 나는 이 대목에서 불교의 공사상을 대비시켜 보고저 한다. ‘비움’이란 먼저 비우려는 의지가 비움을 당하는 대상과의 대위법적인 관계상에서 출발한다. 자기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자아가 있다면 이미 비움의 단초는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숙주’인 몸이 겪는 온갖 수난을 통해서 자신이란 혼이 정화되어 가고 비워저 가는 것이다.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 준다.” 란 끝맺음에는 이러한 몸과 자아 사이의 숙명적인 관계망이 암시되고 있다. 조규현
37 no image 이미지物로서의 회화 : 전원길 개인전
2741 2007-06-05
이미지物로서의 회화 : 전원길 개인전 1) 도록을 통해 미리 보다 - 현대예술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인쇄술의 발달이 이정도의 단께까지 왔는가 하고 놀란다. 비록 원화의 질감까지는 재생이 되지 않트래도 나는 도록에 실려 있는 그림들을 통해서 미리 보는 즐거움을 만긱하고 있다. 프로필이 소개되고 있는 칸에 작업중의 전화백의 흑백 사진이 한 컷 실려 있다. 돌들을 앞에 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내가 여태 보지 못 했던 가식 없는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이 표정은 곧바로 그의 곁을 이미 떠나 있는 작품들을 생산해 낸 산모가 아쉬움을 달래며 누리고 있는 내면적인 평화와 정일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평상심이 엿보이는 모습은 그가 자연속에 얼마나 깊이 천착해 들어가 있었는가를 보여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도승의 풍모를 풍기게 된 것이다. 그가 이번 전시회에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은 오브제의 即自的 생태적인 특성을 두루 조명하고 색의 통시성을 이용하여 걸려 내 보이던 이전의 화면의 여백이 단색조로 강하게 깔려 있는 작품들의 분절되고 단촐한 이미지를 벗어나서 한 막의 무대위에 올려 지고 현란한 색체와 물들이 함께 생동과 주락의 우주적 순환을 연출하고 있다. 이미지와 오브제의 통시성을 관리하는 일은 작가의 몫이고 무대위에 등장하는 物들은 스스로 품어내는 아우라(靈氣)와 衰殘의 엄혹함을 안고 눈부시는 아름다움과 종국의 비애를 통시적으로 그 맡은 자리에서 맡은 역들을 해 내고 있다. 난삽한 미학이론을 거치지 않트래도 작가가 [평면화]에 승부를 건 이유를 직감적으로 납덕케하는 대목이다. 나는 미술감상학습에 나선 이후 줄곧 ‘현대미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란 화두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이 물음은 자신의 물음이며 그 물음의 해답을 쉽게 얻으내리라고는 생가치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해 지고 있는 것은 자기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물음에 대단히 강하게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화두는 뒤집어 보면 ‘현대미술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로 귀착될 것이다.물음과 해답사이 아슬 아슬하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이러한 난제는 내가 숙성 시켜 왔던 ‘앎’에 대한 끝임 없는 열정을 자극해 주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문화의 본질을 두루 천착하면서 대단한 지적 저작물들을 쏟아 내고 있는 Colin Wilson(1931- )은 그의 처녀작이며 폭발적인 화제를 불어 일으킨 [OUTSIDER]에서 outsider는 앎에 대한 수순한 열정으로 이 세상을 알려고 하고 insider(범속인)는 세속적인 가치와 자신을 위해서 알려고 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내가 아직 까지도 예술에 대한 앎의 열정을 지적으로 천착하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나의 깊은 내면 세계속에 이런 국외자적 요소가 숨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자신의 열정의 힘을 가지고 난삽한 현대미술과 대좌하고 있기 때문인지. 미국의 유명한 문화저술가인 Tom Wolf는 그의 저서 ‘The Painted Word ‘(한국번역판은 ‘현대미술의 상실’)에서 자신이 ‘Seeing is Believing’이란 관점에서 현대미술을 탐색하다가 대오각성하여 이 시각을 역으로 ‘Believing is Seeing’ (아는 것이 보는 것이다)으로 수정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는 미술이란 세계가 그렇게 호락 호락한 분야가 아닌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일단은 대단히 재미있고 설덕력이 있는 파래다임 쉽트기 아닐수 없다. 내가 보건데 현대미술은 대중영상매체를 통한 시각문화의 철저한 해체와 대중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 예술자체의 과잉 보급에서 빚어지는 문제들을 함께 안고 있지만 여전히 예술과 예술의 진실은 유효하다는 것을 화신한다. 전원길화백의 ‘이미지로서의 회화’전은 일련의 작품군이 Seeing is Believing와 Believing is Seeing 이란 두마리 토끼를 한껴번에 잡아 내고 있으며 ‘회화작품이란 화가의 혼과 보는 사람의 혼과의 사이에 놓여지는 다리’ 리고 한 드라크라의 말을 떠 올리게 해 준다. 작가의 작품들은 말이 없지만 창조자의 혼이 침목의 말로 들려오게 한다. 마치 그는 이 세상의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에서 비롯 되고 형상화되였으며 그 말씀의 경전을 시각으로 풀이 해주는 使徒와 같다. 본 전시회의 참관을 기다리며…이글을 나의 감상기의 프로로그로 삼는다.
36 no image 울 음
2651 2007-06-05
울 음 오명주 긴 낮잠에서 께어나 이 방 저 방 둘려봐도 식구들이 없다 골목을 나가 보아도 큰 길마저 맑게 정지해 있다 가겟집, 재과점, 세탁소, 그 어디에도 사람은 없다 제과점에서 먹고 싶던 빵 하나를 얼른 집었다가 가만히 내려 놓는다 비어 있는 가게마다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어머니는 어딜 가셨나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혼자라는 사실에 내가 내 자신에게 놀라서 거리로 뛰쳐나온다 정지한 리어카 길 가운데 비어 있는 차들 도독고양이 무서운 개조차 보이지 않는다 텅 빈 길 한가운데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린다 투명한 오후 시집 ‘황태’ 중에서 ‘킬킬 고거 깨소금 맛이다. 때쟁이, 청얼쟁이 어지간히 성가시더니 그러게 누가 낮잠 길게 자레? 저 아이 벌건 낮 울음을 언니 오빠가 훔쳐준다면 아주 잠깐 고소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달려와 덥석 안고 눈물 훔쳐 줄 식구들이 정말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새끼 쳐 나간 제비집도 고요하고, 바지랑대 끝엔 그 흔한 잠자리도 한 마리 없다. 나를 제외한 백주 대낮의 음모가 여간 불길하지 않다. 제과점 빵을 도로 놓은 건 잘한 일이지만 온전한 윤리의식의 발현일까? 혼자라는 두려움이 입맛을 앗아간 탓도 있을 터. ‘누가 와주었으면 …….’기척을 살피느라 울음이 가늘고 길어진다. 낮잠 뒤 행한 풍경, 어쩌면 내 유년의 한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까? 사람 사이에 사람이다. 저 아이에게야 곧 엄마 아빠가 돌아오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반칠환 시인 <펴온이의 감상> 조금 비약을 해서 본다면 이 시는 유동적인 현실에서 잠을 껜 아이에게 현실이 다시 백일몽이나 가위누질린 세계로 뒤돌아간 장면을 연상시킨다. 주변에 익숙하던 사람이나 동물들이 자취를 감춘 생활 공간은 불안을 넘어 공포감을 안겨 준다. 마치 탯줄이 끊킨 아이가 모태의 안전함을 상실하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것과 같다. 肉은 그래서 肉과의교감을 원초적인 관계망속에 구속되면서도 안전한 것이다. 이 아이는 거리를 털쳐 나올 정도로 벌써 유아기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시인이 쳐 놓은 육이 없는 공간이란 덫에는 견디지 못한다. 어른인들 그런 경우를 제대로 견디낼까? 따지고 보면 이 시는 어른들을 향한 패래드화한 멧세지이다. 무수한 상실과 단절 배신과 부정이 판 치고 있는 현실이라도 우리가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람을 귀히 여기지 못한다면 그 위에 쌓아 올리는 어떠한 것도 바벨탑을 쌓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이치이다. 그래서 이 아이가 터트리는 ‘울음’은 그 무겁고 투명한 공간을 허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시의 전체적인 톤의 향뱡이 여기에 놓인다. ‘울음’이 그 무서운 공간의 의미있는 여백을 만들어준다고 보는 것이다. 이우환은 그가 그린 그림속에 ‘여백’의 공간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 여백이란 말을 그는 “그저 빈 공간을 여백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언가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건데 큰 북을 치면 주위 공간에 울려 퍼진다. 큰 북을 포함한 이 바이브레이션의 공간을 여백이라고 하고 싶다.” “고도의 테크닉에 의한 부분적인 붓의 터치로 하얀 캔버스의 공간이 바이브레시션을 일으킬 때 사람들은 거기에서 리얼리티가 있는 회화상을 보게 되리라…….” 라고 말 하고 있다. 나는 위의 오명주 시인의 [울음]이 암시하는 것도 이우환의 ‘바이브레이션’과 같이 들린다. 단절과 허망한 공간속의 한 가닥 퍼저 나오는 ‘울음’ 소리야 말로 이 시의 강박적인 긴장감이 제대로 풀리게 하는 대목으로서 이우환의 ‘바이브레이선’이론과 무관치 않는것 같다. 이우환의 ‘바이브레이선’은 인간과 사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물성적인 요소를 작품성립의 요건으로 보는 것이고 오명주 시인의 ‘울음’은 다분히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적인 요소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차이는 있다. 그래도 여전히 ‘울음’이 갖는 물리적인 특성은 유효하다. 조규현
35 no image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2799 2007-06-05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이근배 어느 날 문득 서울 사람들의 저자거리에서 해매고 있는 나를 보았을 때 산이 내 곁에 없는 것을 알았다 낮도깨비같이 덜그럭리며 쓰례기더미를 뒤적이며 사랑 따위를 팔고 있는 동안 산이 떠나버린 것을 몰랐다 내가 술을 마시면 같이 비틀거리고 내가 누우면 따라서 눕던 늘 내가 되어 주던 산을 나는 잃어버렸다 내가 들르는 술집 어디 만나던 여자의 살냄새 어디 두리번거리고 찾아도 산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산이 가버린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시집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중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또 ‘지혜로운 자는 움직이고 어진 자는 고요하며, 지혜로운 자는 즐기고 어진 자는 오래 산다’ 했다. 높고 어려운 경지이긴 하나 산과 물을 좋아하는 것이 현자에 한하겠는가? 이름 없는 범부라도 자기 마음 속 심처에 흰눈을 얹은 영산 하나쯤 가지고 있을 터. 저마다 그 힘으로 사는 게 틀림없다. 그 영산 발꿈치께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하나쯤 없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 영산을 잊고 산다. 자잘한 일상에 묻혀 근시가 되어가다 마침내 저 산을 아주 놓치게 된다면, 두려운 일이다. 그 산과 내가 둘이겠는 가.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 안의 영산을 올라야 할 것이다. 반칠환 시인 <펴온이의 감상: 우리 강토가 산과 강으로 이루워저 있는 것은 아득히 먼 대륙이 안고 있는 끝없는 대평원과 평야를 부려워 하게 했고 우리의 가난과 질곡을 어리석게도 산의 탓으로 돌리던 때가 있었다. 바다에 둘려쌓여 있는 나라의 그 품요로운 물고기의 자원을 옆눈질 하며 사막의 무진장한 석유자원을 신의 은총으로 강건너의 남의 일로 보고 한탄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막상 이 땅과 물의 그 한량없는 은총으로 돌리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서 이땅의 의미를 새로히 색인다. 세계에서 산을 가장 많이 찾는 민족이 우리가 아닌가.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보고 트래킹하는 사람들속에 한국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고 미술을 전공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오브제로 백두와 히말을 화두로 삼고 있다. 이번주의 이 아침에 만나는 시에 게재된 이근배 시인의 ‘내가 산이 되기 위하여’ 와 이를 소개하고 있는 반칠환 시인의 해설은, 산과 일상의 저속한 어지려움을 대치시켜 ‘산’의 숭고함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히말라야를 한번이라도 밟은 사람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다시 듸돌아 가지 못한다’란 말도 있듯이 고산의 세례는 그 만큼 크고 확실하다. 산이 주는 강력한 기억이나 인상은 사실은 그기서 내려와서 우리의 일상속에 함몰하기 시작할 때 그 위력을 발휘해 준다. 마치 神은 인간의 어지렵고 부조리하고 혼돈스려운 세계가 없어면 그 위광을 발휘 할수 없듯이 高山連峰의 강한 세례를 받언 사람은 진흙바닥속에서 헤매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 불현듯이 솟아 오르는 그 강력한 인상을 떠 올리게 되며 영혼의 맑음과 마음의 치유를 받는 것이며 이는 山의 위광이 우리의 존재깊이 침잔해 있는 샘물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산을 떠 올리기 위해서 ‘피리를 불지’ 않는다. 우리속에 침잔해 있는 ‘산’은 그 때를 맞추워 그 스스로가 우리에게 다가 오기 때문이다. 피리를 불어서 자신이 산이 되게 한다는 것은 좀 지나친 비약이다. 기껏해야 산을 불려 낼수 있을까 인위적으로 불려내는 산은 우리의 뇌리속에 산의 이미지를 투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산과의 교감은 아니다. 산과 동화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산이 스스로 다가 올때를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범상속에서 산과 가장 확실하게 만나는 방편이며 순간이다. 詩句의 이러한 대목이 그 설덕력을 주지 못하게 한다. 이 아침에 만나는 시에서 처음으로 나는 시상과 그 해설을 수궁하지 못하고 있다. 문학 예술이 가지는 ‘이미지’란 무기도 때로는 언어의 요설에 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께워 준다. 내가 히말을 소요하면서 만난 동굴속에서 편생을 수행하고 있는 요기를 떠 올려 본다. 그는 산속에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산이 되였다고는 생각치 않은 것 같엤다. 그는 그속에서 수행을 하면서 오히려 우주와 교감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 그날 그날 자신을 철저히 비워가면서 그 우주의 깊이 속으로 침잔해 가는 듯 했다. 그 한량없는 비움의 투쟁속에는 놀라운 품격이 풍겨저 나오고 초절과 해탈의 기운이 느껴젔었다. 이 자리에서는 ‘고독’이란 말의 의미를 내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고독이란 얼마나 사치스려운 말인가. 그는 철저히 비워가면서 무언가를 곽 채우고 있었으며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거동에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이 보이지 안했다. 빛은 한쪽에서만 흘려 나왔다. 위대한 천재적인 예술가들만이 우리에게 보여줄수 있었던 인간과 자연의 합일의 ‘진실’을 느끼게 했다. 히말의 진실이 있다면 바로 이 요기의 존재속에서 보는 숭고함의 진실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야 말로 내가 하나의 지표로 삼게된 가장 확실한 자연과의 ‘존재의 同化’ 를 보여준 행위 예술이며 인간의 내면을 통체로 진한 영감으로 흔들어 줄수 있는 場 으로 받아 들였다. 흰 눈을 안고 있는 히말라야 連峰의 장관은 印度亞大陸의 강과 강을 끼고 영위하고 있는 인간문명의 진흙바탕을 그 뿌리에 두고 있으며 가깝게는 네팔 티베트의 종교문화의 靜態를 안고 있다. 연꽃의 그 청순하고 맑고 아름다움이 진흙바닥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듯이. 그 숫한 종교가 펄쳐보여 주는 경전과 신화들은 역으로 자연의 ‘경전’에서 따 온 것들이다. 자연의 순환을 보고 인간의 윤희사상이 나왔고 자연의 위력과 그 역동적인 현상의 다양함에서 다신교가 탄생했다. 사막지대의 종족들이 차츰 일신교쪽으로 기울려저 간 것은 자연의 풍요로움이 아닌 활량함과 단색조의 煉獄과 같은 消滅의 냉혹함만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사막이 갖는 그 철저한 排他는 그기서 살아가는 인간들로 하여금 또한 철저하게 한곳을 지향하게 만들었어며 오아시스와 같은 달콤한 천국을 꿈꾸게 하였다고 본다. 중국의 현인들은 산과 물을 거론 했지만 사막은 입밖에 내지 않했다. 공자가 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덕목을 거론 했다면 무순 경구를 씃설까 궁금하다. 지질학적으로 본다면 산은 자연의 본질(혹은 궁극적인 실재)에서 표출되어 있는 하나 하나의 가지여며 그 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구내부에 엉겨있는 마구마(용암)가 지구 표면에 분출하여 냉각된 것들이다. 지구 자체도 그 탄생의 시점에서는 한 응축되어 있었던 조금만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빅뱅에서 흩어저 나온 무수한 입자(별)중의 하나이며 그 속에는 케이오스(혼돈)의 역동성을 안고 주워진 일정한 수명을 갖고 있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본다. 천문학자들은 그 수명이 약 40억년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이 지구상에 문명의 힘을 가지고 인간권을 형성해 오든 [인간문명권]이 [지구권]에서 분리해 나오고 독자적인 힘으로 자연과 대치하며 자연을 헤손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많은 철학자나 미학자들이 이 지구문명권이 일뀌내고 있는 기술문화의 위기를 가늠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지구권에서 살아 가는 사람으로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아침에 만나는 시’가 나에게 처음으로 ‘반어적’ 이고 ‘약간은 부정적’인 생각을 불려 일어킴으로서 그 근거를 천착해 보았다. 언어매체로 엮어나가는 시문학이란 그 문맥이 전달하는 내용에서부터 합목적성이나 보편성을 얻지 못하면 시구와 그 연이 안겨주는 서정성이 뛰어 나도 설덕력을 잃는 다라는 소감이다. 이러한 행태도 시와 예술을 학습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고 있음을 의식하고 제법 긴 글을 남긴다. 조규현>
34 no image 걸으면서 담아내는 ‘맨 땅의 예술’
2819 2007-06-05
걸으면서 담아내는 ‘맨 땅의 예술’ 라차드 롱 Richard Long의 자연속의 소요: 국제화랑에서 전시중 공주국제 2003 자연미술전을 통하여 ‘자연미술’의 세례를 처음 받고 이후 미술작가 안원찬의 백두대간 종주와 쿰부히말의 트랙킹 기행문을 거처 김성배의 백두와 히말을 모티브로 하는 여러 활동과 그의 최근작 ‘백두대간을 가다’ 그리고 삽화로서 등장한 도병훈의 산의 맥을 조감수법으로 잡아낸 그림들. 김인자 시인의 글과 포트로 잡아 낸 티베트 히말에 던지고 있는 시선을 인상깊게 색여 두고 있는 나에게 전 세계의 산들을 소요하면서 작품을 제작한다는 리차드 롱의 ‘맨 땅의 예술’ 소식은 ‘백두.히말 프로젝트’의 진행을 관심있게 보고 있는 나로서는 지나칠 수 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사간동 국제화랑을 찾아 리처드 롱의 전시회를 보려 나섰다. 미리 읽어 두었던 조선일보의 장제연기자의 전시회 소개 글은 아래와 같다. <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은 다양하다. 유명작가 리처드 롱씨의 경우는 걷기가 곧 예술이다. 몇주에 걸쳐 수백km씩 걸으면서 흔적을 남긴다. 아르헨티나.미국.프랑스.그리스.탄지니아.일본등 세계 곳곳을 혼자 즐겁게, 때론 고독하게 걸으면서 돌맹이나 나뭇가지를 이리 저리 배치해 보고 꽃을 꺽기도 한다. 순례자들이 성지를 향해 걷듯, 롱씨도 묵묵히 걸으면서 수천년 전 아티스들이 그랬듯이 돌맹이.나무.진흙을 재료로 삼아 예술을 펄친다. 그리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 전시장에 건다. 이번 서울 국제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는 그가 10년전, 한국 소백산맥을 8일간 걸으면서 남긴 흔적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전시장에는 그가 돌.나무.판자.진흙들 자연에서 옮겨온 소재를 자연의 리듬에 따라 원형.사각형.나선형으로 펼쳐놓은 작품이 등장한다. 갤러리 1층 바닥에는 돌이 가득 들어차 있다. 둥글둥글한 하얀 돌은 평화로운 강변을, 비죽비죽 검은 돌은 한국의 바위산, 혹은 밤하늘을 떠올리게 한다. 리처드 롱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혹평부터 ‘살아 있는 대지를 보여준다’ 는 찬사가 엇갈린다. 그러나 퐁피두 센터.테이트 모던. 뉴욕 현재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 되는 가 하면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대형 전시를 갖는 등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작가다. > 전시장에서 공짜로 입수한 국제화랑측이 내 놓은 인쇄물에 그의 프로필과 예술의 본질이 좀 더 상세히 설명되 있다. <리차드 롱은 1945년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 그는 걷기, 즉 도보를 하나의 조각작업으로 간주하고……이는 기존 미술에 대한 뿌리 깊은 개념에 대한 반박이고, 뒤상의 레디 메이드 오브제 개념과는 상반된 의미의 변혁이다. 이는 뒤샹이 오브제의 개념을 다시 세우면서 굳어진 모더니즘 개념과는 달리 조각을 비물질적인 영역으로 포함시키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물질적 구현 자체를 부차적으로 고려하게 된 전혀 다른 혁신의 미술개념이다. 즉, 걷기가 발생하지 않으면 작품도 존재하지 않으나 걷기 자체는 물리적인 영속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도보를 통해 이동하면서, 땅 위에 지표를 세우고, 꽃을 따고, 돌맹이나 나무조각 등을 재배열하는 등의 행위는 시간과 운동, 장소에 관한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된다. 리차드 롱에게는 도보는 문화적인 다양성의 표현이자, 다른 문화들끼리의 연결성을 가지도록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이는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보다 깊은 차원의 이해이며 자신의 고유 위치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 낸다. …… 1968년 뒤셀도르프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나무의 잔가지를 나열시켜 자연과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리차드 롱은 대지에 표신된 자신의 작업 흔적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번 한국 전시에서도 6점의 사진이 199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의 그의 행보의 흔적을 아름다운 시각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는 자연을 묘사하거나 어떤 불필요한 것을 더하지 않으면서 작품의 주제의 방법은 완전한 整列을 통하여 보여준다. 그는 모든 시대와 문화에 걸쳐서 형태를 만드는 인류의 손길에 의해 선호되어 왔던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 즉 직선, 원형,나선형, 지그재그형, 그리고 사가형 들의 변형을 가하고 있다. 이는 보행과 관련한 형태인데, 특정한 장소간의 거리, 방향성, 운동성 등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결합하는 “배열”의 문제를 담고 있는데,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의 표시와 같은 흔적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지는 않지만, 그의 여행의 여정을 기록하는 수단의 하나로 택스트 작업을 하기도 한다. 1977년부터 시작한 이 택스트 작업은 사실적이거나 설명적인 단어들을 덜 사용하면서 보다 작업을 추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택스트 작업의 역할은 개별적 걷기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으로써, 단어나 문장의 형태 – 주로 관찰, 감정, 경험, 장소의 이름, 시간의 측정, 기간, 숫자, 그리고 거리 등의 배열로 그려지곤 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장치이다. 이번 전시에서 리차드 롱은 전시장 벽에 진흙으로 벽화를 그러낸다. 진흙들은 단순히 물로 개어 손으로 그러내고 있으며 그 손 제스처와 물의 움직임의 리듬을 시작적으로 만들어 낸다. 진흙은 변화하는 흙(earth)처럼 물과 돌 사이를 이어주는 자연적인 다리가 된다. 이는 매우 빠르게, 그리고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며 빛이 들어오는 곳에서 보면 이는 빠른 속도로 만들어진 돌 조각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몸동작으로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정렬과 질서라는 것에 기초한다. 자연과 자연 요소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에 관한, 그의 작업의 중심 수단은 이성적이며 경험주의적이다. 현대세계에서, 파괴와 소멸의 가능성이 널리 펼쳐진 가운데,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긴급하고 적절하다. 이런 의미에서 리차드 롱의 예술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신문기사와 국제화랑측의 소개글들 속에는 좀 어색하면서 매우 어색해지고 헛 짚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내용들이 이곳 저곳에서 보였지만 영국의 한 대지미술가의 세계를 짚으보는데 모두가 다 치려야할 통과의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뒤샹이 오브제의 개념을 다시 세우면서 굳어진 모더니즘 개념과는 달리’ 은은하는… 대목은 대단히 거슬리는 대목이다. 전시회를 해설하는 글들이 자칫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고 현학적으로 굴절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뒤샹을 언급한 부분에서도 이점이 확연히 들어나고 있다. 뒤샹은 오브제의 개념을 세운 것이 아니라 파괴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오브제라고 하지 않고 ‘레이드 메이드’라고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브제란 말은 전통미술에서는 그림을 가능케한 일차적인 재현을 위한 ‘대상’이 였지만, 뒤샹은 이를 거부하고 오브제개념 자체를 파괴하고 숨통을 끊어 놓았던 사람이다. 작가의 일련의 작품군은 리차드 롱의 ‘대지예술’도 이러한 의미의 어려움을 ‘도보’란 중간자를 등장시켜 중화하고 있어며 마치 죤 케이지의 퍼포먼스의 맥락을 떠 올리게 하면서도 마치 죤 케이지가 다시 음유시인이나 ‘지붕위의 바요린 켜는 사람’으로 부활 해 온 것과 같은 도토리즘을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돌들을 원형 사각형의 모양으로 배열해 놓은 작품들도 ‘서로 다른 요소들을 결합한다’라는 뜻으로 읽기 보담 돌들의 개별성과 서로 뫃여 있는 내면적인 신택스트(물성적인 호응 내지 상통하는 맥)를 강조하고 배열의 형상이 주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환치 시키지 않는 편이 좀 더 본질에 와 닿는 해석이 되지 않했나 생각한다. 그러나 롱의 사진.설치.택스트.흙 드로잉으로 나타내고 있는 작품군들은 그 나름데로 새로운 모티브를 잡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있다. 그의 원시미술과 상통하는 대상의 기하학적으로 정제된 형태는 세잔이 인상파에서 벗어 나면서 새로운 각도로 자연을 보고 조형상의 애로를 극복해 가면서 보여 주는 시각의 새로운 파래다임과 이어지는 입체파 회화들의 대상의 해체와 재구성등의 흐름을 떠 올리게 한다. 롱도 역시 여전히 자연을 있는 그대로 안으면서도 인간과 자연사이의 통로에다 자신의 새로운 조형상의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를 나름데로의 스타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작가의 자연관이 숨길길 없이 나타난다. 세잔이 자연의 실재를 존재론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서구의 전통적인 ‘재현’이 갖고 있는 디렘마의 한 징표였다고 보며 이때까지 도 자연은 다소곳이 오브제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미술 작품을 통해서 작가들의 ‘자연관’을 엿볼수 있다. 서양과 동양의 회화들이 그 스타일에서 확연히 나누워저 있는 것은 서로가 자연을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가장 이상적인 자연미술이란, 이건 어찌할수 없이, 동양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생각이지만, 자연의 그 한량없는 깊이의 살아 있는 세계로부터 영감을 얻는 일이며 우리인간의 角진 논리로 재현하려는 것 보담 곧 바로 자연의 어법으로 교감케하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나는 ‘95녀도 공주자연미술전에서 독일의 폰 프렌타노가 ‘정보’란 설치작품을 통하여 보여준 작품성을 대지미술의 가장 바람직한 한 典範으로 보았다. 이 작가는 자연과 인간의 가교를 자연을 대상화 하지 않고 오히려 작가가 자연의 연출자로서 그침으로서 자연이 스스로의 모습을 ‘변성’ 해 가게 하고 자연의 어법으로 접속의 코드를 제시하겠금 하였으며 그기에 현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인 ‘정보’란 개념을 대치시킨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성이란 축이 새롭게 융헙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작업이 보여준 퍼포먼스와 기도와 최종적으로 나타난 건조한 진흙 쪼각들이 한데 어울려서 하나의 작품으로서 지목된것이다.이러한 미묘한 차이에서 나는 리차드 롱의 자연관과 브렌타노의 자연관의 대단히 중요한 차이점을 읽으낸다. 자연 미술은 그런 모습으로 21세기 현대 인간문명이 지연을 잃어버리고 우주의 미아로서 부딛치고 있는 종말론적인 위기에 대처 해 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대단히 감동적인 또 하나의 사레로 나는 안도니 가우디의 조형세계를 떠 올린다. 그의 조형세계에서는 자연이 곧 神으로 등장한다. 모든 것이 이미 자연속에 쓰여저 있다 라고 하는 그의 아포리즘에는 자연을 재현하기 위한 오브제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는’ 경전으로 대치시켜 버렸다. 자연법칙이란 그 본질적 영역에서는 고정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정형적으로 변화해가면서 인간의 ‘환원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그는 겸손하게도 예술은 창조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해 간다라는 독백을 되푸리 했던 것이다. 그의 건축물들의 혁신성은 인위적인 환원주의적인 사고를 따르지 않고 그의 조형의 원천을 자연이 갖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인 혼돈과 질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의 신비적인 총체성. 경계가 없는 역동성. 인간문명이 자연과 인간관계를 손상 시키지 않았던 시대의 인간의 자연과의 공생적인 교감과 우주를 통일적으로 간주하는 절대신에 대한 신앙등에서 잡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작품군들을 당대의 파래다임으로 재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살아 있을 동안 복고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한 물간 예술로 치부되었었다. 현대 합리주의자들의 눈으로부터 벗어 나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 대지미술가의 작품세계를 대충 훑어 보고 직관적으로 느껴진 것을 바탕으로 감상기를 씃지만 여전히 그기에는 합목적성을 결하고 객관성을 답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미루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로 하여금 자연미술 혹은 대지미술을 제대로 감상하게 하는 영국의 earth artist 롱의 전시를 소개한 국제화랑의 다소곳이 진솔하고 용기있는 기획을 한 감상자로서 고맙게 생각하면서 위의 기사들을 히말 프로젝트의 칼럼에 올린다. 이번 전시회의 체혐도 앞으로 있을 자연미술전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감상케 하는 밑걸음이 될 것이고 다가올 많은 자연미술전을 예상하면서 하나의 모멘트를 잡아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백두.히말’프로젝트’를 주관하고 있는 김성배의 야심찬 도전을 눈여겨 보고 있는 나로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여전히 미술감상은 감상의 글을 쓰야 그나마 제대로 학습이 된다는 과제를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33 no image 소나무 갤러리 소식6을 접하고
2561 2007-06-05
소나무 갤러리 소식6을 접하고 평소 소나무 갤러리의 운영을 지켜보면서 두분이 어떤 구상을 하시며 이를 가꾸워 가는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 자신이 오히려 소나무갤러리를 두고 이런 저런 꿈을 꾸고 지납니다. 건너편에 앙상하게 놓여 있는 기웃덩하는 나무다리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수는 없을까 외곽에 멋있는 나무 울다리를 아주 자연스렵게 엮어 놓으면 좋겠다던지 만일 장소가 허락한다면 여러 사람이 함께 황토와 나무와 유리로 새로운 안락한 집을 손으로 만들수도 있을거라던지 집 경계선을 따라 개나리를 둘렸으면 멋이 있겠다던지 몇마리의 젓소와 되지를 길룰수는 없을까…………. 그러나 관심있는 사람의 그런 꿈과는 별도로 그곳에 살고 있는 주인들은 갤러리의 운영에서부터 환경을 가꾸어 가는 슬기로움으로 조금도 틈잡을 수 없게 正道로 이를 실천해 가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 말로 내가 기대하고 있는 현실의 소나무갤려리의 나가고 있는 모습이구나…..관객들에게 꿈을 꾸게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변모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두분의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을 보면서 절로 탄성을 지릅니다. 그기에는 공생의 변증법이 싹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받는 자극이야 말로 밖에 선 사람들에게 주는 두분의 아름답고 의미있는 선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자극을 받는 것 이상의 공생의 논리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것은 차원이 다른 가치를 나누는 일입니다. 나는 소나무갤러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랑의 눈길을 받지만 거꾸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시선을 던지게 될 것을 상상합니다. 이러한 장이 조성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뒤 늦게 미술감상을 공부하기 시작한 나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조금만한 꿈을 꾸게 하는 힘은 그 중간에 “예술’이란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술’을 새로운 인식으로 잡고 있는 두분의 논리와 전략 그리고 Vision 그리고 자연을 제대로 보고 사랑하는 만컴 주변 사람들에게 진솔하고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사랑할줄 아는 실천적인 능려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예술과 자연………이 세개의 축은, 우리가 이 격동하는 시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로로 하는 헥심적인 요소이며 원점입니다. 소식6을 통해서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 다짐하며 보내주시는 멧세지는 갤러리의 앞날을 예감케 하며 본인도 기꺼이 여러가지 재미있고 유익한 program에 참가 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당장에 조금만한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idea는 관심있는 분들이 나름데로 묘목과 꽃씨를 보내게 하고 심으서 갤러리가 대모가 되어 가꾸게 한다던지 연못에 자라나 물고기들을 기증케한다던지………지금 회원이 되어 있는 작가나 다른 쟝르에서 활동하는 가까운 작가들을 초청하여 garden party 를 통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소개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게 한다던지…….현대미술하고 놀자의 진척에 따라 십시일반의 부담없는 관심과 지원을 하게 한다던지……….. 이런 생각들은 우리들이 그기서 무엇을 얻을수 있는 가에 대해서 창조적이고 열려있는 마음으로 공동의 ‘장’을 만들어 간다는 인식이 싹트가야만 지속성이 있습니다. 예수가 한 어부에게 한 말이 떠 오릅니다. 내가 너의를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고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소나무 갤러리를 진정 지역사회의 창조적이며 열러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두분의 leadership를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들의 ‘그물(net)’은 꿈이며 ‘물고기’는 예술이며 자연이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은 인간에 대한 열러있는 마음이며 긍정이며 믿음이며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실재에서 나옵니다. 추이 사신: 전원길교수에게 언급했던 “Handmade Hoems” The Natural Way to Build Houses 를 창고에서 찾아 내어 갖고 있습니다. 전시회 open 날에 지참하겠습니다. 이는 대단히 오래된 책이며 그래서 더 무개가 있는 볼꺼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오는 보다 폭 넓은 책은 미국에 있는 아들과 며누리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지난번에 참석해주신 결혼식을 올린 주인공들입니다. 이 차남은 최근에 아주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죠지아대학교에서 테네시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6월에 그쪽으로 이사를 하기 때문에 책구입은 내가 10월경에 테네시를 방문할 기회에 참고가 될만 한 책들을 구해 볼 작정입니다. 귀댁 아들이 새로 옮겼다는 위신콘신은 테네시 윗쪽 미시간 부근에 있습니다. 앞으로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차남을 통해 길잡이를 시킬 수 있을거로 생각합니다.
32 no image 시 &lt;타오르고 싶을 때&gt; 를 읽고
2620 2007-06-05
시 <타오르고 싶을 때> 를 읽고 김인자 선생의 소나무갤러리 게시판에 올리신 글과 ‘시’를 읽고 있습니다. 전시회 가는 길의 칼국수집의 해우까지 일께워주셔서 나의 유목인적인 사고와 라이프 스타일이 갖는 나이도 생각치 않고 ‘치고 빠지고 이네 잊으버리는’ 기질이 잘 들어 났군요. 좋은 시를 남겨 주셔서 감사 합니다. 시어 하나 하나는 곧바로 이미지로 전이 될 수 있고 연혁적인 풀이를 허용 하지만 문맥을 해독하려면 읽는 사람도 철저히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작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이 사실은 귀납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적 視界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으야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시나 그림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음악의 세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한편 시나 그림은 음악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음악 역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주지만 우리 속에 깊이 침잔하여 언어적 사고로도 동화해 가는 것 같습니다. 나의 유목민적인 기질에는 문화 일반의 잡다한 비빔밥씩 지적 호기심이라 할까 ‘앎’에 대한 열정이 기조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타오르고 싶을 때>가 주는 분절된 이미지와 맥락으로 다가 오는 서정성에는 작가의 삶의 치열함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 치열함이 크면 클수록 어떤 용해됨의 열도가 더 해 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벌겉게 달아오른 무쇠난로’ ‘붉디 붉은 가슴을 생의 혓바닥으로 쑥 한번 문지른……’ 이런 시어들은 작가의 영혼의 절규와 共振하고 있으며 시의 전체적인 톤은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자신의 ‘내적 응시’ ‘불안’등을 표현주의적 수법으로 격열하게 그려낸 뭉크(Munch)의 ‘절규’를 연상시킵니다. 나는 음악세계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구스타프.말라의 선율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말라의 교향곡 4번은 내가 한때 심취했던 곡이였었는데 후기낭만파에 속하는 말라의 음악세계는 현대인의 텅빈 상실감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상실감속에는 말라의 삶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잃어버림에 대한 공허와 불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선율과 격정적인 톤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예감한 진혼곡입니다. 작가는 이 시속에서 ‘존재의 답’이란 화두를 후렴으로 …….’알고 싶으 하는 사람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그 답은 가장 확실하게 던지는 물음속에 항상 내재 해 있다라고 풀이 하고 싶습니다. 끝없는 물음은…. 예술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業입니다. 그 업은 비록 작가를 찢으 놓기도 하지만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정직한 ‘답’을 안겨 줍니다. 그리고 그 답은 모든 사람에게도 공유하는 양식으로 숙성됩니다. 위의 글은 내가 아무런 눈치 보지 않고 나오는데로 시불어된 감상문입니다.
31 no image 조규현선생님!
2872 2007-06-05
조규현선생님! 선생님께서 제 글을 읽고 계셨다니 지금 제 앞에 계시지 않아도 왠지 부끄러워집니다. 처음 선생님을 뵐 때로 기억하는데 김성배님과 임성우군이 동행한 자리였는데 남양의 어느 작은 학교의 그림 전시실을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함께 좁은 식당에 앉아 칼국수로 점심을 먹었던 그때 말입니다. 선생님 그 특유의 경상도 억양에 압도 되어 저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는데 그때 느낌은 참 대단한 열정을 가지신 분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후에도 가끔 뵐 기회가 있었지만 처음의 그 느낌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작품에 대한 선생님의 탁월한 애정과 적절한 비평은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세상을 통찰하는 선생님만의 혜안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림뿐 아이라 요즘 소나무에 올려주시는 선생님 나름의 시 읽기에도 저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적해 주신 오자는 곧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뵐 기회가 있으면 그땐 더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늘 건필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시 한 편 놓고 갑니다. 우울하다고 말하면 괜히 헛지랄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긴 있겠지만 아주 가끔 대합실 구석에 벌겋게 달아오른 무쇠난로를 혓바닥으로 쓱 핥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면 가스통을 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들고 싶을 때가 있다면 그건 존재의 답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그렇게 포기했을 때 활활 타오르는 법 인생은 비오는 날 판잣집에서 흘러나오는 젓가락 장단보다 조금 더 슬플 것을 각오해야 한다 돌아보면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하긴 너무 외롭거나 적막하면 울컥 솟는 게 있긴 있었다 어느새 가을이 슬픈 몸뚱이를 지나간 것도 모르고 정전으로 멈췄다 스르르 돌아가는 노래처럼 도는 건 역시 멀미를 피할 수 없는 것인지 끝을 생각했다면 끝을 말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늦은 저녁 비 내리는 도시는 비루먹은 개처럼 젖어있고 나는 골목에 버려진 수취인 없는 우편물처럼 쓸쓸하다 묻는다면 그 무엇 그리워서라고 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이곳이 낯선 어느 간이역이라면 막차가 떠나자 역무원은 창구를 닫고 숙직실로 돌아가고 마지막 장작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무쇠난로 그 붉디붉은 가슴을 생의 혓바닥으로 쓱 한번 문지른 다음 아무 일도 아닌 듯 사그라 드는 그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시.-전문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