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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no image 슈룹 백두대간-히말 프로젝트
2547 2007-06-05
슈룹 백두대간-히말 프로젝트 경기문화재단 2004년 문화예술 진흥사업에 선정되다 경기문화재단이 지원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문화예술 활동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 문화예술 진흥 사업”의 지원프로젝트에 슈뤂의 히말 프르젝트가 選定 되었음을 축하한다. 본인도 본 프로젝트의 기획자인 김성배씨의 지향하는 바 새로운 예술정신에 공감하여 배당된 “문명론”을 일년여 동안 동칼럼에 올리고 있다. 문명론과 예술이란 서로 거리가 먼 화두인 것 같이 보이지만 21세기에 접어든 현 지구권 인간문명의 향방이 통합과 해체의 양극적 역동성을 보이고 순수성과 힘, 분리와 강조의 혼미속에서 예술은 철학을 필요로 하고 철학과 종교는 예술의 정신에 의해 갱생할수 있는 상관 관계에 놓여 있게 된다. 역사가 직선적으로 발전해 온다는 논거가 무너진지는 오래다. 예술은 문화의 한 갈레로 이어저 왔고 문화는 그 특성상 역사에 편입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현존의 세계는 약자의 지역문화나 역사가 강자의 세계문화나 문명에 흡수 통합되어 가는 과정에서 조화가 이루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불려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힘을 가진 선도문명도 그 본질적인 맹점을 노정한다. 문명적 관점과 그 현실을 눈여겨 봐야 하는 이유는 예술이야 말로 인간의 문제에 있어 가장 진실에 까가운 ‘영감’을 불려 일으켜 주는 쟝르이기 때문이다. 문명적 관점에서 본 예술이란 예술이 보편으로 나아가는 파할 수 없는 하나의 대목이며 퍼즐과 같고 예술이 현실을 영영 떠나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지랫대이기도 하다. Art is not Art. 란 경구에는 동전의 한 면, 즉 예술인이 던지는 발신자로서의 진실이 담겨 있지만, 우리들은 동전의 다른 한면, 수신자로서의 해석을 제대로 함으로써 비로써 그 창조적 의미가 발현된다는 것을 잊으서는 안된다. 나는 이 경구를 제대로 이해 하려면 동서양의 미술사를 통달할 뿐만 아니라 문명사까지도 아울려 봐야 그 옳바른 풀이가 가능할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시작이 그 종국에 와서 다시 시작으로 환원되면서 소멸해 버리는 야누스적인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를 품고 있는 “不毛의 眞理”일수 있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가꾸워서 걷우는 일이 남아 있을것이다. 그것이 불모를 면하는 길이다. 백두-히말프르젝트가 지역문화 발전에 큰 헥을 끄으 갈수 있는 시동이 걸리는 소리이다.
53 no image 토인비와의 대담(2)
2381 2007-06-05
토인비와의 대담(2) 이께다: 말씀하신 점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 전적인 ‘신기성’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요. “우주를 유무라고 하는 두나의 개념의 잣대로만 잡으려고 한다면 그기에서의 생명의 발생은 무에서 유가 생겼다고 밖에 말 할 수 없습니다. 佛法에서는 생명은 유무의 개념을 넘어 말하자면 有에의 가능성을 내포한 無의 상태- 이걸 ‘空’이라고 합니다- 그걸 우주에 내포되어 있는 실재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공’이란 것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논할 성질이 아니고 박사님께서 말씀하신데로 하나의 神秘이기도 합니다. 이 ‘空’이란 개념을 이해했을 때 생명이란 실재의 성질을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되지 않갰나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구를 포함한 우주 그 자체가 본래 생명적존재이며 ‘공’의 상태에 있는 생명을 포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로 顯在化하는 조건이 갖추워젔을 때 우주의 어디서던지 생명체로서 탄생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현대과학에서도 지구이외도 생물이 존재하는 天體가 다수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그 실증적인 단서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드래도 나는 우주자체가 생명을 탄생시킬수 있는 힘을 내포하고 있는 “생명의 바다”라고 봅니다. 물질의 유기적구조는 본래 ‘공’인 생명이 ‘유’로 현재화하여 생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기초조건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그래서 이 생명체가 의식활동을 하기위해서 더욱 복잡하고 정교한 물질구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토인비: 우리들이 논하고 있는 이 화제는 대단히 흥미깊은 그리고 중요한 화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금후에도 다시 언급해 가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단지 나 자신으로서는 생명이나 ‘實在그自體’도 역시 하나의 신비이며 ‘發顯’이란 관점에서는 설명을 다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 생명의 영원성 이께다: 생명은 사후에도 존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세에 한한 것인가 만일 존속한다고 하면 그건 영원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혹은 어떤 상태로 존속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생명에 관해서 논할때는 피해 갈 수 없는 최대의 테마입니다. 토인비: 생명이 영원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분명 중대한 문제입니다. 동시에 이것에는 實證불가능한 점이 몇가지 나오기도 합니다. 이께다: 그 점이 古來로 여러 哲人 聖人들이 고민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생명이 영속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생각하는데 중요한 열쇄가 되는 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나는 사후의 생명에 관해서는 대별하여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죽음에 의해 육체가 무기물로 환원할 때 생명 그것도 동시에 소멸한다는 유물론적인 관점이고, 또 다른 것은 유심적인 생명의 ‘불멸’설 입니다. 토인비: 인간의 신체는 사후무기물로 환원됩니다만 이런 육체적 죽음을 가지고 생명의 끝이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는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타교, 그기에 3개의 유대계 종교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또한 사후 다시 생명이 나타 날 때 다시 한번 육체의 모양새를 갖춘다는 점도 일치합니다. 이 여러 종교는 사후에 댜시 나타나는 인간의 형태는 죽기 이전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心身統一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께다: 박사께서 인용한 ‘고등종교’는 모두 생명이 사후에도 존속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 내용에 관해서는 서로가 각기 대단히 다릅니다. 토인비: 맞습니다. 예로 기독교신앙에 의하면 – 이건 바울의 사도서간중에도, 복음서중에도 복음서간중의 예수부활의 현현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설해지고 있는 것입니만 -, 사자의 부활한 육체나 ‘최후의 심판’의 순간에 이따금 살아 있는 인간의 變溶인 육체 는 우리들이 보통 육안으로 숙달된 인간의 육체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육체는 바울에 의하면 ‘영적육체’이며 예수가 부활후 재림했던 때의 육체가 여기에 헤당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돌연히 모습을 들어내고 돌연히 사라진다 그는 닫혀진 자물통으로 잠긴 문을 거처 지나간다 그래서 지상에서 구름 건너편으로 승천하여 보이지 않게 된다 – 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이건 나와 동년배의 카도릭 신자들의 이야기입니다만 최근 성모마리아의 ‘被昇天’설이 교리화되어 이에 의하면 마리아의 육체는 승천한것으로 여겨진 예수의 육체와 같이 영적육체이며 우리들 인간의 경험에 비추이는 현상으로써의 육체와는 다른 것으로 간주 하고 있습니다. 이께다: 기독교가 사자의 부활한 육체를 영적육체라고 말하고 현실의 인간적 육체와 구별한 것은 육체를 더렵혀진 것으로 간주하는 사상에서 온 교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르침은 타의 종교에서도 자주 보여 집니다. 남방불교, 소승불교에서는 인간의 욕망의 은신처라고 볼 수 있는 육체를 멸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하고 있지요. 토인비: 불교도나 힌두교도는 인간은 몇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이는 통상적인 것으로 봅니다만 그기에 더 나아가서 이런 재생의 회수는 무한이며 여태도 마찬가지로 무한히 轉生해 왔다고 믿습니다. 이 신앙에는 우주를 영원한 것으로 보는 신앙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4개의 서양의 종교에서는 다 모두 우주에는 – 적으도 현재형의 우주에는 – 처음이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끝이 올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단 이 여러종교들에서는 이 한번만의 재생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께다: 말하자면 제종교의 사후의 생명관을 대별한다면 불교 힌두교등에서 설하는 ‘열반’설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종교에서 설하는 ‘영혼불멸’설 두나가 됩니다. 토인비: 네, 헌데 이 두개의 관점도 생명의 불멸설에 관해서는 어떤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짧은 일생을 보내는데 그 시간차원에서의 인간의 일생을 시간적으로 연장한 것을 가지고 ‘불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 또는 그리스종교의 몇 개파에서는 –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영혼은 육체에 머물며 이 세상의 삶을 향유하기 이전부터 장구한 시간속에서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죽음뒤에도 무한히 존속해 간다-라고. 남방불교도 이 힌두교적 견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만 輪廻轉生은 현세에서의 인생의 정신적노력에 의해서 멈출수 있다는 점에서만 서로 다릅니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영혼은 모친의 태내에서 육체가 머무는 순간에 신에 의해서 창조된다 그러나 한번 창조된후에는 사후에도 무한히 존속해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의 ‘불멸’의 개념은 힌두교적 개념보다 합리성이 缺해 있어 보입니다. 라고 해도 인간의 생활의 장이기도 한 이 세계의 시간차원에 있어 인간은 태어나기전부터 이미 존재해 왔다던가 사후에도 존재해 간다던가 라고 하는 것은 나로서는 믿을 수 가 없습니다. 인간생활이 영워되는 것은 틀림없이 시간차원에서이고 또한 인간의 가루마(宿業)가 생기는 것도 시간차원에서의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는 “窮極의 정신적實在”가 존재하는 것은 시간차원에서가 아니고 또 인간의 가루마가 이 “궁극의 실재”에 영향을 입히는 것은 시간차원에서가 아니다 라고 나는 想定하고 있습니다. 단 이점에 와서는 나 자신 인간으로서의 이해력의 한계에 와 있다고 느끼긴 합니다. 이께다: 생명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도 그리고 육체가 붕괴한 후 그 생명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도 확실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박사께서 말씀하신 “우주의 배후에 있는 궁극의 정신적실재”에 합일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합일하는가 혹은 살아 있을 동안의 행동의 선악에 의해 합일하던가 하지 않던가 하는 문제가 일어 납니다. 토인비: 나 개인의 입장을 말씀드린다면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나속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선과 악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럼으로 나의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고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억제하려고 자신에게 명하는 것입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은 틀림없이 나의 인간으로서의 본성에서 울어 나온 것으로 압니다. 그건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일생의 영위는 반드시 윤리적인 결과를 동반한다. 더욱이 그 결과는 중요한 것이며 자기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전 인류 전 우주에게도 함께 중요한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일생은 좋던 나쁜것이던 우주 그 자체에 어떤 모양으로도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영향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인생의 正反 어느쪽인가의 가치를 갖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서 인생에 의의가 생긴다고 믿습니다. 이런것에서부터 나는 “궁극의 정신적실재”가 모든 인간의 가루마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라고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께다: 방금 박사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서 내게 강한 흥미를 불려 일어키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갖는 業(가루마)이 “궁극의 정신적실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여태까지의 종교가 이런 궁극적실재는 절대적인 것이고 외부에 영향을 입혀가는 것이다라고 가르키고 있는 점과 크게 뒤바뀌는 것이다라고 해석해도 좋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박사님의 생각은 매우 인간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종교관이며 그건 불법의 그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한편 모든 인간의 숙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게 되면 그 자체 “궁극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될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궁극의 실재”란 존재는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박사께서는 생각하시는지요. 토인비: “영혼불멸”설에도 “재생”설에도 사람을 설덕시킬만한 근거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 믿고 있는 “궁극의 정신적실재”의 존재에 대해서도 설덕력있는 증거는 찾아 낼 수 없습니다. 생각컨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의 본질이란 걸 이해하려면 우리들 인간의 智力은 너무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증명가능한 지식으로 부터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신이나 지침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몇가지의 의문은 손안에 있는 정보를 아무리 잘 합리적으로 활용하드래도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불가피하게 검증될 수 없는 가설에 입각하여 행동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지식이 불충분하드래도 正誤의 판단의 의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도 우리들은 행동을 해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설을 최초부터 믿고 달겨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께다: 물론 분명히 인간의 지적능력에는 한계가 있어며 그 범위를 넘어선 우주의 궁극에 있는 것이나 인간의 생명의 본질에 관한 정의는 모두가 가설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 가설에 관해서 과학상의 그것과 종교상의 그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과학상의 “가설”은 이론적.실험적으로 그 진위가 확인되는 것이고 확인되지 않으면 안되지만 이에 비해서 종교상의 가설은 인생의 납덕되지 않는 현상을 그것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이에 입각한 판단이나 행동이 어떠한 유효성을 갖게 되는가 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과학상의 “가설”에 관해서 던저지는 물음에는 眞僞임에 대해서 종교상의 “가설”에서 다루게 되는 물음은 인간적자질의 향상을 위해서 갖게 되는 가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교가 주장하는 윤회하면서 생명이 영속해간다라는 “가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여러가지 가루마(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유효성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즉 만일 과거에도 그 사람의 독자의 삶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숙업(가루마)이라고 하는 것은 신과 같은 절대자의 의지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하던가 혹은 전적인 우연성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불법의 설명은 인간이 자신이 인간이외의 절대자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것에 대해서 자기자신이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자각케 하고 본원적인 주체성이 여기서 정립될 수 있도록 가능케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군요. 토인비: “불멸”설이나 “재생”설도 가설입니다만 만일 그것들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는 불가피한 의문이면서 손에 쥐고 있는 불충분한 밑천에서부터 증명가능한 지식을 찾아내더래도 해답을 얻지 못하는 의문의 몇가지에 해답을 해줄 수도 있겠군요. 가설로서의 “재생”설은 인간이 일생동안 가루마를 경험한다는 증명가능한 사실과 맺어저 있어 분명하게도 인간의 운명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의 하나를 설명해주는 것이 됩니다. 이 “재생”의 가설을 인정한다 하드래도 그렇다고 해서 “불멸”의 가설도 동시에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남방불교에서는 아라한의 정신수행의 목적은 자신의 재생에 관한 한 생사의 윤회를 끊는데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라한은 나자신의 불멸성을 믿고 그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런 숙명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께다: 남방불교에서는 윤회그자체를 인간의 苦의 원인으로 보고 그걸 끊어 버리는 것을 이상으로 간주 합니다. 윤회전생이란 것은 번뇌의 업에 묶여 생사 와 생사와 고의 세계를 유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라한은 이 윤회를 끊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토인비: 힌두교나 기독교에서 설하는 “불멸”의 개념은 서로 닮았다는 잘못된 인식이 있어 이것이 이 개념을 헤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간차원이라고 하면 그건 인간이 육체를 소유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차원입니다. 헌데 이 두 종교가 영혼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육체에 머물지 않을때도 여전히 시간차원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나 인간의 생명이 비록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 가는 일회의 – 혹은 일련의- 삶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해도 육체에서 떨어저 나간 상태의 생명이 시간차원에 멀물려 있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이 경험 할 수 있는 인간생명의 상태란 오직 한가지 심신통일체로서 뿐입니다. 지성에 의해서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고 경험에서 얻는 旣知事項은 아닙니다. 육체를 떠난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험에서 얻은 확증이란 것은 없습니다. 시체(죽엄)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보고 경함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시체란 이미 단순한 물질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고 그기에는 이미 한때 유기체를 형성하고 생기를 나타내 주던 생명활동은 볼수 없습니다. 의식이 있어 인간이 된 것이 였는데 아니 인간의 의식이란 것은 그 사람의 일생과 같은 기간지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의식은 생후 서서히 눈뜨기 시작하는 것이고 죽음이 까가이 오면 때로는 살아저 버리기도 합니다.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의식상실상태에 빠질수도 있습니다. 시체가 어떻게 되는가 에 대해서는 누구던지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것은 급속히 무기물에로 분해해 갑니다. 비록 이 물질의 집합을 인위적으로 유지하려고 해도 생명이 다한 동시에 이미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립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육체를 떠난 영혼의 존재란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경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차원에서의 존재에 관한 한 영혼은 죽음과 함께 존재를 잃어 버리는 것 이라고 추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결론을 해 보면 시간차원에서는 영혼의 불멸이라던가 재생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인간은 한번 죽으면 그 시간차원에서의 심신통일체로서의 생명도 끝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과 함께 영혼이 시간차원의 밖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가능성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서의 심신통일체로서의 생활기간중에 인간의 행위가 엮어낸 가루마가 “궁극의 실재”에 선악어느쪽에던 영향을 줄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이 “궁극의 실재”가 시간차원상에 존재한다고 상상해야 할 이유는 우리들에게는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경험상 시간차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잇는 유일한 의식있는 생명적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심신통일체적 생명뿐입니다.
52 no image 토인비와의 대담
2470 2007-06-05
토인비와의 대담 아래글은 ‘Choose Life – A Dialogue – Arnold J. Toynbee and Daisaku Ikeda’의 일어판을 택스트로 하여 지난 세기 최대의 문명비평가의 한사람과 일본의 종교가와의 대화중 제3부로 철학과 종교 부분만 초역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글은 또한 ‘백두-히말 프로젝트’의 ‘문명론’ 씨리즈물의 일환으로 번역하여 올리고 있다. 제1장 事象과 本質 1 생명의 기원 이께다: 생명이 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출현하였는가 하는 事案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지지받고 있는 설은 자연발생설로 압니다. 그런 생명의 기원에 관한 현대과학의 관점은 쏘련의 오-바린이나 영국의 바날의 설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구의 진화에서 자연히 생명이 발생하였다고 보고 이를 단계적으로 잡아서 최초의 무기물에서 유기화합물이 생성하고 다음 담백질이 형성되였으며 나아가서 물질대사의 발현에 의해 생명체가 발생했다고 하는 점에서 대충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학설은 원초단계의 생물의 화석의 발견에 의해서 또는 간단한 유기물이 인공적으로 합성되는 것에서 뒷받힘 되고 있습니다. 토인비: 그들 과학자들은 생명을 물질적현상으로서 포착하고 그 입장에서 생명 발현의 계기가 어디 있었는가를 탐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께다: 맞습니다. 이들 과학자들의 사고란 생명발생의 물질적측면에서 본다면 아마 옳바른 해명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부에 이르면 금후의 연구에 의해서 정정되지 않으면 안될 문제도 일어 나겠지만. 기본적인 관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문제삼으려는 것은 “어떻게”가 아니고 “왜” 무생의 물질의 세계에 생명이 탄생할 수 있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물질현상의 측면에서가 아니고 더 깊은 생명의 본질에 까지 파헤쳐저야 할 테마일것입니다. 토인비: 말하자면 변화의 성질일반에 관한 문제입니까. 과거에는 보기에 무생이 었던 우주가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무생이면서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진 생물이 존재하는 현재의 우주에로 변화해 온 그 변화의 성질에 관한 문제이군요. 이께다: 네, 나의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면, 탄생했던 당초에는 무생이 었던 지구에 생물이 발생했다는 것은 무생의 지구 자체속에 이미 생명에의 방향성이 배태되고 있었다 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은가………. 생명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분명하게도 능동적인 존재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능동성 다시 말한다면 發動性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 까요. 나는 무생속에 생이 내포되고 그 생이 자기를 顯現해 간 과정이야 말로 바로 생명의 기원이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토인비: 혹은 그럴런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의 단계에서는 우리들은 그걸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개념을 지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고 이로 인해 생명의 기원을 아는데 한발 더 까가이 다가 갈 수는 있을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기원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중대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변화” 내지 “新奇性”이 발생하는 데 대해서는 다음 두가지 설명중 하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창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했던 사물이 존재되어 지며 혹은 존재하도록 되는 것 – 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대신하는 두번쩨의 설명은 “신기성”이 만들어지는 것은 “발현”(evolution)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보류션은 문자 그대로 원래 속에 내재해 있던 어떤 것이 풀려 나온다는 의미에서의 “전개”, 즉 “발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발현”이라는 설명에 의하면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모두 실제로는 착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왜냐 하면 현재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제부터 존재하려고 하는 것도 모두 처음부터 존재해 있었다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事象은 원래가 잠복해 있던 실재적 요소가 서서히 현재화되어 왔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께다: 지금 박사께서 말씀하신 “창조”나 “발현”이란 분류에 따르면 내가 보건데 생명에 관해서는 “발현”이란 관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그 자체가 作者이면서 作品이다 라고 표현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이 지구상에서 탄생하여 현재에 이르기 까지 자기를 현현하여 개별화되는 방향으로 줄곧 지속해 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개별화된 생명에 능동성을 갖게 하는 생명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힘은 이미 無生의 지구 그 자체속에 내재해 있언 것이라고 봅니다. 토인비: 하면 생명은 창조에 의한 것이라기 보담 발현에 의한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나는 창조에 의한 거이다라고 보는 것이 옳바르다고 새각합니다. 이께다: 그럴까요. 그 창조란 관점에 관련하여 말씀드리는데, 최근, 과학의 분야에서 성공을 걷우고 있는 생명의 인공합성에 관해서 말 한다면 나는 이 생명의 합성은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아리나 생명을 발현시키기 위한 인공적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한다면 여기서 말할수 있는 것은 생명의 창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물질의 내부속에 이미 존재해 있는 생명에너지를 축출해 내는 정도이지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물리적 의미의 그것은 아닙니다. 토인비: 나는 과학자들이 무기물에서 유기체에의 물질적조성변화를 추구하여 더욱 인위적인 고찰에 의해서 그 조성변화를 반복시키는 데 까지 이르렸다고 하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하게도 유기체는 인간생명을 형성하고 있는 의식과 의지를 가진 불가분의 心身相關的統一體의 한 측면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인 組成上의 진전을 추구하고 반복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생물과 생물과의 상이를 설명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의식을 갖지 않는 생물과 의식이 있는 생물과의 상이도 설명하는 것이 못됩니다. 물질이 유기적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은 생명을 가능케하는 불가분의 조건일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그것이 곧바로 생명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물질은 의식을 존재케하는 불가결의 조건일런지는 모르나 그것이 의식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생명과 의식도 함께 전적으로 “신기성” novelty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전적으로 신기함이란 것은 논리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건 원초에서부터 잠재해 있던 어떤 것이 발현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는가 하면 그건 인간의 사고가 공간이나 시간을 기준으로 삼는 사고의 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공간이나 시간은 어디까지나 現像상의 것에 지나지 않으며 “實在그自體”의 不可知性에 비교한다면 本質的인 것이 아니지요. A.J. Toynbee 1889년 런던에서 태어남. 옥스포드대학 졸업. 고대사 전공. 런던대학교수.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연구부장등을 역임. 주저로 [역사의 연구](전 12권). 1975년 몰. Ikeda Daisaju(池田大作) 1928년생 동경도출생. 후지단기대학경제학과졸업. 1960년 창간학회제3대회장취임. 주저 [인간혁명](전 10권)
51 no image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3089 2007-06-05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조정래씨 소설 ‘아리랑’ 프랑스서 희곡으로 출간 소설가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원작으로 한 프랑스어 희곡 ‘분노의 나날’(아르마탕 출판사)이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희곡 출간에 맞취 파리를 방문한 조정래씨는 19일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를 압축해서 잘 보여준다”면서 “한국 민족이 일본에 얼마나 핍박받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어 희곡 ‘분노의 나날’은 프랑스의 전직 공무원 출신인 극작가 피에를 앙드레 테르지앙씨가 ‘아리랑’을 각색해 써 냈다. 윤이상의 음악, 아응로의 작품 등 평소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테르지앙씨는 소설 ‘아리랑’의 불어판 교열을 맡았던 인연으로 ‘아리랑’을 알게 됐고, 6개월에 걸쳐 불어판 ‘아리랑’ 12권을 읽은 후 이를 177쪽의 희곡에 녹여냈다. 불어판 ‘분노의 나날’은 거꾸로 한국어로 다시 번역돼 곧 한국에서도 출판된다. 또 영어.독일어.스페인어.러시아어 등으로도 번역될 예정이다. 조정래씨는 “말로들 세계화, 세계화하는데 내 작품이 프랑스어 희곡집으로 번역되는 걸 보면서 문화의 세계화라는 것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18일 오후 주불 한국문화원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가졌으며, 19일에는 프랑스 연극배우 8명이 희곡 ‘분노의 나날’ 일부를 낭송한 행사에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조씨는 “문학은 곧 모국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리라면서 “20년 세월 동안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32권을 쓰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 100년을 담았다고”고 말했다. 또 “세계 열강들이 각축한 한반도의 문제는, 결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라면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리=강경희특파원 조선일보 6월21일 A24 란에서 옮김. <옮긴이의 변> 위의 기사는 평소 조정래씨의 장편 소설들을 애독하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한 눈에 번적 띄는 대단히 호뭇한 소식으로 들려온다.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활약했던 한국인들이 이따금 우리들을 웃줄하게 해주는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바로 막딱트린 이야기들이다. 21세기는 경제 못지 않게 문화가치가 지구 문명권의 판도를 좌우할 징조가 확연하다. 오랜 문화유산을 물려받고 그 위에 20세기 현대사의 한 가운데서 수난을 겪었던 우리민족의 살길이 문화창달에 있음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라고 하지만 이 개와 보편이 교차하는 변증법속에는 한 작가의 민족사에 대한 진하디 진한 통찰이 갈려 있다. 조규현.
50 no image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2444 2007-06-05
49 no image 문명의 공존
2695 2007-06-05
문명의 공존 -안티테제로서의 글쓰기- 이문열 ‘신들베를 고쳐매며’에서 패러디를 우호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 중에 하나는 그것이 원칙의 주제와 구성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명제적(反命題的) 글쓰기도 이런 점에서는 패라디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제안하기보다는 반대하기가 쉽고 창조하기보다는 비판하기가 쉽다. 하지만 패러디의 장점도 분명히 있다. 특히 일방적 수용에 길들여져 있는 현대의 독자에게 창조되어야 할 강점은 원작에 대한 쌍방적교류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휩쓸린 현대인은 그 수용에 급급해 차분히 분석하고 비판할 겨를이 없다. 해럴트 밀러의 <분명의 공존>은 그와 같은 글쓰기의 명암을 두루 갖춘 책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사고는 새뮤얼 헌팅턴의 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가 내놓은 ‘공존’이라는 대안은 헌팅턴이 제시한 ‘충돌’의 반명제이다. 그는 현팅턴이 단언한 ‘이슬람의 피 묻은 경계선’이나 ‘유교동맹의 잔혹한 시나리오’의 허구성을 적절하고 구체적인 예로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유의 형태는 창조적이기보다는 다분히 패러디적이다. 방법에 있어서도 그는 단순화된 거대 이론의 위험성 내지 기만성을 비판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도 곳곳에서 자신이 ‘오컴의 면도날’로 비아냥거린 단순화의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도달하는 결론은 거대 이론의 외형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문명의 공존>을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준 일방적 충격을 쌍방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끌어내린 점이다. 심오한 문명사적 이의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충돌의 개념이 실은 낡은 냉전 논리의 변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한 것은 헌팅턴의 구상에 대한 쌍방적 사고의 출발이 된다. 거기다가 명쾌하여 시원스럽기까지 했던 진술 방식도 세상의 수요에 편승한 기만적인 혹은 위험한 단순화였다는 지적은 헌팅턴에 대한 적극적인 분석과 비판의 의욕까지 자극한다. 물론 밀러가 제출한 ‘공존’이라는 반명제에 대한 의문도 없지는 않다. 어쩌면 그것은 동구의 몰락 이후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구화(地球化) 현상을 너무 민감하게 그리고 낙관적으로 해석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단순화를 남용하여 문명 간의 관계를 편면적인 관찰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도 있다. 그중에서도 반명제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은 이 책 뒤에 붙은 서면 대담에서 김경동 교수가 적절히 문의한 방향 제시의 기능이다. ‘문명의 조화’라든가 ‘문명의 변증법적 종합’ 같은 적극적인 제시가 아니라 ‘공존’이란 현실 분석적 개념에 멈취 버린 것은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그 물음에 대해 밀러는 한마디로 ‘문명의 조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문명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다양성 가운데의 통일성이란 말로 자신의 기대를 축소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충돌’의 반명제로 출발한 그의 사유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알게 모르게 우리가 젖어 온 미세주의(微細主義), 사소주의(些小主義)의 답론 분위기에서 거대 이론은 낯설고 왼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 되었다. <문명의 공존>은 분류하면 어김없이 거대 이론에 들게 되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지금쯤은 우리의 눈길을 그리로 한번 돌려 볼 만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그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으로 사고하면서 읽어 간다면 요즘에는 드물게 신선한 독서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펴온이의 변: 위의 글은 요즘 한창 신문의 상업광고에 선전되고 있는 이문열의 [신들메를 고쳐 매며]에서 인용한 글이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text로 하여 본 칼럼에 연재하고 있는 “문명론”을 비판적으로 거론하여 <문명의 공존>이란 책을 낸 프랑크푸르트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인 하랄트 밀러(Harald Miller)의 근저 <문명의 공존>에 대한 이문열의 논평이다. 본인은 헌팅턴의 문명론을 마감한 뒤에 밀러의 이 책도 요약을 해 볼 생각을 하고 있다. 이는 이전에 도병훈씨의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도 잠간 언급한바가 있다. 조규현.>
48 no image 바다와 조개
2580 2007-06-05
바다와 조개 랄프 왈도 에머슨 아름다운 조개는 바닷가에 있고, 파도의 거품이 조개 속 진주를 반짝이게 했다. 나는 그 바다의 보물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것은 초라하고 보기 싫은 하찮은 물건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태양과 모래와 파도소리와 함께 바닷가에 그것의 아름다움을 두고 왔기에. <펴온이의 해설> 위의 시는 류시화가 엮은 시뫃음인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에서 빌려 온 것이다. 당산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집사람이 ‘조선일보’만 남겨 놓게 ‘동아일보’를 끊는 바람에 반칠환시인의 구수한 시를 못만나고 있다. 무슨 수를 쓸 길은 있어 보이지만 그동안 의 공백을 메꾸워 보려고 소장하고 있는 류시화의 시뫃음집을 이용하기로 했다. 류시화는 소개말에서, ‘자루 속에서 꺼내는, 잘 익은 고구마 같은 시’라고 토를 달면서, 인생에 대한 무명씨들의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이어 새롭게 엮은 이 시집은 새와 나무, 대지와 꽃, 벌레와 바람에 바쳐진 자연에 대한 잠언 시집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진실했던 때를 기억하게 하는 감동적인 시편들! 여기 이 시집에는 아프리카 사막의 부시맨, 인디언 기도문, 풀쇄기를 노래하는 어느 수도원장, 행복한 바보가 되라고 권하는 방랑 시인과 생을 마감하는 자연주의자 부부의 시가 있다. 그리고 산 입구 팻말에 적힌 깨닮음의 시! ‘밭에는 흙을 / 손에는 연장을 / 눈에는 꽃을 / 귀에는 새소리를 / 코에는 풀냄새 를/ 입에는 미소를 / 가슴에는 노래를 / 피부에는 땀을 / 마음에는 바람을……………’ 앞으로는 좋은 시선집들을 찾아서 시를 읽는 사람이 함께 되어 가도록 하겠다. 조규현
47 no image [종교의 운석학]에의 도전
2430 2007-06-05
[종교의 운석학]에의 도전 렌탈의 사상은 심화한다(7) 일본 월간 중앙공론 2001.9월호 게재분 대담자: 우애시마 게이지( ) 진행자: 마쯔이 다가후미( ) 성지는 어쩐일인지 어디서나 돌산으로 되 있다. 돌에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가 운석의 낙하와 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는지 모른다 우에시마 게이지씨 1947년 동경도 태생. 72년동경대학문학부불어과졸업. 76년부터 3년간, 시카고대학대학원에 유학. 80년 동경대학대학원인문과학연구과종교학전공박사과수료. 사진 경마 해설에서도 활약. 주저에는 [분열병자의 댄스파티] [성지의 상상력]등. 상상력의 한계까지 마쯔이: 현대는 [인간권이 빅뱅을 일어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간권도 하나의 씨스템입니다. 그 씨스템이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구축요소인 중간의 공동체가 여러게 탄생했다. 그런데 현제 일컬어지고있는 개인을 주체로 하는 사회란 것은 중간의 공동체를 없에려고 한다. 인간권이란 씨스템을 궁국의 구성요소, 말하자면 개개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분해하여 여기에서 성립하는 地球씨스템을 생각하자는것이다. 이건 우주에서 말한다면 빅뱅과 같은 상태이다. 빅뱅이란 혼돈과 무질서입니다. 어떤의미에서 본다면 인간권이 붕괴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인간권이 그런 상황으로 나아가려는 가운데 새로운 중간공동체를 만드는 공동환상에 상당하는 구심력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볼 때, 한번은 종교란 걸 가지고 탐색해보려고 한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기본적인데서 ,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정의를 가르쳐주시지요. 우애시마: 여려가지 의 정의나 보는 각도가 있겠습니다만, 나의 경우, 물질적인영익을 넘은 것, 말하자면, 자기자신의 의지로 무언가 될것이다라고 하는 영익을 초월한 것에의 관심, 그것이 종교이며 종교학이란 그걸 배우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폭넓게 잡아서 시작하지 않으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나가버리니까요. 마쯔이: 나는 과학자란 점도 있겠습니다만, 생각하는 틀을 시공스케일로 특정하여 생각합니다. 보통사람이 자신의 존재같은 것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려면,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자신의 인생정도의 타임스케일이 아니면 판단할수 없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생보다 훨신 긴 시간스케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경험상이란, 부모가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 가 있어 왔다란 것. 그런 연명히 이어저있는 안에 자신이 있다. 즉 인생이란 시간스케일, 혹은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란 시공영익과는 별도로, 더 긴 시간, 더 큰 공간스케일에서 자신이 존재하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입니다. 그런 시공스케일로,[우리들이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물얼 때, 과학이 없었던 시대에는, 그것이 종교가 아니였겠나 합니다. 지금은 소위 자연과학이란 방법론의 틀안에서, 우리들의 존재란 것을, 빅뱅이후의 우주의 역사, 지구의 역사, 생물의 역사, 인류의 역사 등과 관계지우면서 말할수 있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나는 자연이란, 빅뱅이후의 우주의 역사를 쓴 “고문서” 임으로, 자연과학이란 그 고문서를 해독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으로…………. 여하턴, 현대의 사람들은, 그러한 새로운 좌표축을 도입하여 그 좌표축 안에서 우리들의 존재의 자리메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과학이 탄생하기전에는, 종교가 그러한 좌표축을 제공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것이 나의 종교란 무엇인가 에 대한 관점입니다. 우애시마: 말씀 하신데로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자연과학과 종교는 공존.병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상상력의한계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종교란 것은 그런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상상력이란 엉뚱한데 까지 가는것이어서, 그런 상상력의 한계를 따라가보려는 것이 내가 종교학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나는 원래는 불문학이였습니다만 도중 종교학으로 옮긴 것은 문학보다 훨신 스케일이 큰 세계에서 사물을 보고싶다, 인간의영익에서 사물을 생각하고 싶지않다 란 생각이 있었지요. 이 지구는 인간이 오기전에도 있었고, 인간이 사라진후에도 있을것이다 라고. 마쯔이씨의 말과 같은것이라고 여깁니다만 인간의영익을 넘어선 것을 좌표축으로 설정하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쯔이: 나의 경우는 여러가지 분석을 하면서 최근에 와서 도달한 해답이였지 처음부터 그런 것을 생각하여 자연과학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만. 그렇지만 자연과학이란 분야가 존재하고 지금은 150억년전의 우주가 실제 보이는 시대입니다. 상상하지 않아도 보이는 세계가 있을 때 상상하는 행위가 어떤점에서 여러가지 접점에서 나오지 않겠나 하는 느낌은 들지요. 성지의 암석학 우애시마: 접점이라면, 마쯔이씨는 [중앙공론]의 연제대담(단행본[21세기의화조풍월] 로서 간행)안에서 650만년전에 공용을 멸종시켰다고 하는 유가단반도의 운석의 낙하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지요. 조사.연구의 과정을 거친후, “우리들이 정말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되였는가를 알수 있는 것은 결국은 전부 돌을 거처서일것이다” 라고 말씀했지요. 그때까지의 본인의 생각해왔던것과 일치함으로 본인의 [성지의 상상력]이라고 하는 책에서도 마쯔이씨의 발언을 소개했을 정도입니다. 그 대담기사와의 만남은 극적이였습니다. 노-들담.드.씨온이란 예르살렘의 수도원에 체제중, 그곳의 담화실에 어쩌다 한권있었던 일본잡지가 바로 그 [중아공론]으로 그야말로 우연이였습니다. 마쯔이: 나도 우애시마씨의 책을 읽고 [성지란 전부가 채석장이다]라고 한 대목을 읽었지요. 우애시마: 네, 돌을 끊으낸 부분, 혹은 특수하게 생긴 돌의 맞춤이 였지요. 마쯔이: 나는 지금 중남미의 채석장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6500만녀전, 공용을 위시한 생물의 일대전멸이 있었습니다. 그건 거대운석이 충돌하여 지구씨스템이 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되여 있습니다. 그때 어떤 극적변화가 일어났는가 를 상세히 조사해보려면 그 당시의 기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는것입니다. 이 경우는 “지층”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지표에 노출한 6500만년전의 지층을 찾아보면 대개가 체석장 같은 곳으로 되 있습니다. 자연이 우주의역사를 기록한 “고문서”라면, 이 경우 채석장이 자연의 고문서와 같은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나는 채석장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보통사람에게도 채석장이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우애시마: 예르사렘의 상징인 황금의 돔은 [바위의 돔]라고도 불립니다만 내부에는 거대한 통바위가 놓여있을뿐입니다. 바위주변만 둘러봐도 잘 모르겠지만 바위밑에 빠저나가는 곳이 있어 자세히 보면 돌을 깍아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성분모교회가 있는 골고-다의 언덕도 당시에는 거대한 돌을 깍아낸 곳이 였고, 내가 이 수년간 찾아다닌 40여개소 이상의 성지에는 예외없이 돌을 깍아낸 장소이거나 돌을 짝지어놓았던곳이 였습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은 아닐것이다 라고. 마쯔이:나는 에집트의 피라밑을 몇번이나 보아왔습니다만 그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핑크스쪽에서 보면 피라미드의 뒤쪽은 돌을 깍아낸 듯이 보이는 흔적이 아주 많습니다. 피라미드는 원래가 석회석의 산이였던 것을 무너터린후 평탄하게 하여 다시 돌을 짝지어 맞추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추론입니다. 요시무라선생에게 물어보았는데 [아마 그럴것이다]라고 대답하던군요. 그런 점등을 봐서 돌 깍아낸 장소나 돌맞추어 올린곳이 고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납덕이 갑니다. 우애시마: 그래서 성지의 조건으로 어떤 수목이 있다던가 동굴이 있다던가 가 아니고 왜 돌이여야 하는가, 돌에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었던가 이것이야말로 현제의 나의 흥미의 중심입니다. 마쯔이: 그것을 과학적으로 조사를 하려면 세계속에 있는 성지의 돌을 물질과학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성지의 암석학] 같은 학문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자연과 우리들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이 특별한 것이 성지가 된다는 것은 있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긴 시공스케일에서 봐서 우리들의 존재에 까지 관계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도. 우애시마: 고문서로써 돌을 읽을 때,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돌의 성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돌이 놓여진 문화적환경을 읽는다. 예를 든다면, 아데네의 팔데농. 그렇게 거대한 돌의 덩어리가 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란 것은 모두들 고대에서부터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연이 아닌 것 같으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것인지 여기서 나는 막혀버립니다. 그기에 돌이 있기 때문에 성지다라고 말해버리면 괜찮을 것 같지만 이런 저런 설명을 하다 보면 서툴게도 우주인의 비래까지 가게 되 버리니까. 돌에 관해서 운석과의 관계도 중요하지요. 운석과 우리들의 문화. 문명과의 관계는 원래 매우 밀접한 것이 였나요. 마쯔이: 마야의 유적도 바로 운석구멍의 주변을 따라서 놓여 있어니까요. 그런 곳에서 문명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지란 말을 사용한다면 유가탄반도는 문명의 성지입니다. 운석의 충돌로 공용이 멸하고 포유동물의 시대가 시작 하여, 우리들이 출현했다. 이것이 1 천만년 늦었다면 우리들은 아직 지구상에 있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유가탄은 인류탄생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우애시마: 그곳에서 문명이 꽃을 피운 것은 우연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돌의 존재를 생각했을 때, 종교의 성지가 운석의 낙하와 어떤성질의 관계가 있다고 해도 전연 부자연한 것이 아닙니다. 마쯔이: 실은, 1980년이전에는 그런 인식은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은 지질학에서는 거대운석의충돌과 지구사.생명사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은 인위적인 생각이고 과학적이 아니라고 제쳐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돌이 있어 그것이 인간의 존재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인식은 혹시 모르거니와 자연과학이 등장하기 훨신 이전부터 있어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저, 혹은 종교인류학적의미에서 그런 천변지이적인 현상이 오래전부터 혹종의 중요한 이벤트로써 인식해 왔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였을까 궁금하군요. 우애시마: 일본에서도 아끼시로에 있는 대구모대사(큰 절 이름) 의 분사에는 운석이 파뭍여 있었다던가 흥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마쯔이: 우애시마씨의 책에서 내가 놀랜 것은 운석이 성지의 모-든 곳에 관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일입니다. 우애시마: 그건 말 하자면 가설입니다. 문제제기로써 아에 단순화 해 버린 것입니다. 마쯔이: 지금이야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끊임없이 운석이 낙하해 목격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인간이 휘소 하였을 때는 아주 드문현상으로서 이따금 하늘에서 대음향과 함게 불덩어리가 떨어저 온다는 것은 강열한 인펙트였을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적인것과 맺어진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갑니다. 우애시마: 기억에 남아서 아주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 젔을것입니다. 마쯔이: 또 철운석같은 것이 떨어진다면 그때까지 보지도 못한 물질이 나타난 것이니까. 만일 그런 기록이 남아있다면 정말 흥미있는 것이 되겠군요. 일만년 만의 위기 우애시마: 나는 종교에서 재미 있다고 여긴 것이 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세계를 두루 조사하고 있으면, 교조라고 하는 사람이나 샤만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이따금 트란스상태에 들어 가지요. 무엇을 하는것인지 무얼 말 하는것인지 알수 없게 되지요. 그 알수 없다는 점이 실언 종교에서는 중요한 점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의 임의성이라 할까, 임의적인 사고라고 할까, 원래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란 것은 반드시 인간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은 아니였다. 갑자기 인간을 일격에 죽여버린다든지 한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가 종교에 있어 가장 최초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을 지켜주는 응호해주는 것으로써의 종교란 것은 이외로 뒤에 나온 생각이고, 원래는 부가항력적인 힘에 대해서 어떻게 대치할것인가 였지요. 최초의 상상력의 이야기와도 이어지는 것입니다만, 무엇을 할것인가를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이쪽에서 논리적인 사고법을 가지고 부딛쳐 봐도 잘되지 않는다. 요는 임의로(렌담적) 쳐들어 오는 것 같은 자연의 위협이나 천지지변에 대해서 위기를 막기위해 어떻게 하면 될것인가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절대로 잘되지 않는다. 이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작에서 페를 돌리는 씩으로, 인간의 사고회로를 일단 리 셑(reset)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그것이 이유를 알수 없는 트란스 상태가 되는 것이고, 기우제 같은것도 이런 맥락으로 봐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쯔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재미있다고 여긴 것은 ,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도, 본질적으로는 그런 것이고, 말 하자면, 인류에 대한 위기관리와 같은 문제이지요. 인생보다 짧은 스팬으로 일어나고 있는 위기에 대해서는, 인생을 살아가면, 경험상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노우하우는 축적되 있다. 100년 혹은 수백년이라도 좋은데 이런 정도의 타임 스팬의 것이면, 역사를 세세히 조사를 하면 그 위기가 어떤것인가, 역사의 축적에서 어느정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1000년 만에 한번 이라던가 아주 드물게 밖에 일어나지 않는 위기에 대해서는 아마 대응할수 없을겁니다. 그래서 인간권은 일만년에 한번 경험하게 되는 종류의 위기를 맞이 하고 있다. 그 위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 할것인가, 우리들이 지구 씨스템위에 인간권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을때와 똑 같은 수준의 선택에 당면하고 있다. 지금 말씀하신데로 [리 셑]하여, 다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에 와 있지 않나 하고 느낍니다. 우애시마씨의 종교의 원점분석으로 본다면 바야흐로 새로운 종교가 등장할는지 모른다. 옛날의 종교가 언제쯤에 나타났는가, 그때의 상황은 어땟나 하는 문제와도 이어지는 것이 되겠습니다만. 우애시마: 하지만, 시대인식차이란 문제가 하나 있어, 지금이 어떤시대인가 하면, 마쯔이씨가 말씀하신 경계의 시대인가 어떤가는, 나로선는 잘 알수가 없습니다. 마쯔이: 인간의 사회만 보고 있으면, 아마 그것이 일만년만의 위기인가 어떤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우주에서 지구, 인간의존재를 생각하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줄곧 끝없이 확대해 온 것이 그 이상 확대할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권을 만들기 시작했을때와 마찬가지여서 확대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선택이 없으면, 인간권을 만들어 살아간다는 삶의 방식자체가 파탄합니다. 어떤 수를 쓰지 않으면 안되고, 21세기는 여태까지의 연장선상에 미래가 있다는 발상은 할수 없다. 우애시마: 하지만 이 100년간에는 세계대전을 두번 겪었고 20세기는 처음부터 위기의식의 시대로서 출발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21세기에 들어서서 새삼스럽게 위기다 라고 할수 없을 것 같은데요. 마쯔이: 나는 20세기 전반이란 것은 지구란 별 위에서 우리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인식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전쟁이 비참했다 라고 하지만 실제로 어느정도의 사람이 죽었는가 하면 오히려 역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래서 전쟁으로 비참했는지 어떤지. 우애시마: 아니, 역사적인 증언을 보드래도 이전부터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에코로지의 문제도 그런데 1950년경에는 의론이 들끓었었다. 근대화나 고도자본주의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역시 최초의 발아 단계에서 그기에 대해서 이의를 내새운다든지 발언한 사람들이 많았지요. 마쯔이: 맑크스 역시 그런 인식이 였지요. 우애시마: 마쯔이씨의 렌탈의사상에서는 욕망이라든가 소유.비소유의 문제가 큰 포인트가 되는군요. 마쯔이: 그것이 제일의 포인트입니다. 인간권을 만들어 살아간다는 삶의 방식은 인간이 욕망을 해방시켜도 살아갈수 있다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여, 그 안티테-제로서의 사상이니까요. 우애시마: 그것조차도 샬.후리에가 선구자로서 구체적인 문제 제기를 했었지요. 마르크스나 앵겔스와는 달리 후리에는 미래사회의 규범을 욕망에 두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비소유란 생각의 헥심은 17세기,18세기, 공상적과학주의라고 욕들을 얻어 먹었는데 후리에, 샹.시몬과 같은 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마쯔이: 그건 있을지도 모르지요. 우애시마:그렇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항상 있어왔습니다.이걸 고려하면 위기의시대가 21세기인지 어떤지 약간의 의문이 있겠지요. 나는 그 시기는 지금부터 100년전에서 금후의 100년-200년의 스팬 같으면 그렇게 말 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쯔이: 그건 조금 다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예를 들면, 도시에서 여러가지 비참한 상황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그렇치만 그건 또 다른 도시로 옮겨버리면 해결이 되는 종류의 문제입니다. 인간권을 만들어 살아간다는 방식 혹은 지구규모라고 하는 문제의식은 없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순환적시간과 직선적시간 우애시마: 아니 저는 마쯔이씨의 문제제기에 그 자체는 매우 공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지구란 대지와의 관련은 인간에게는 대단히 헥심을 이루는 것이고, 대지와의 연결을 배반하면 인간에게 매우 큰 비극이 초래되고 우리들의 운명도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니까요. 마쯔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농경목축을 시작으로 지구씨스템의 물질이나 에네르기에 직접적으로 간여하는 삶을 시작 함으로서 모든 것이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말 지구규모로 그런 삶의 방식이 가능한가 라고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것입니다. 우애시마:종교의 기본적인 생각은 겅험적으로 인간이 매우 얺잔은 나쁜일을 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의 대처법이란 모양새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쯔이씨의 문제제기 와도 관게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쯔이: 그 대처법이란 것이 만일 있으면 금후의 힌트가 될는지 모르겠네요. 우애시마: 기독교의 전매특허도 위기의식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의 시간을 생각할때는 이미 “종말론적인 시간”에 와 있는것입니다. 마쯔이: 이스람교는? 우애시마: 이스람교, 유대교도 역시 그렇습니다만, 세계의 유명하다는 종교는 대부분 친척간이라 위기의식을 중심으로 한 사고법입니다. 그렇치만 그 외의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시간은 순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쯔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심을 얻지 못한다. 자신이 끝나버린다 면 하는것이지요. 우애시마: 우주론에서도 순환적인 시간이란 생각이 있지 않았습니까. 마쯔이: [정상우주론]이지요. 우주에는 처음이고 끝이고 없다는.그렇치만 실제로는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그래서 팽창하고 있는 그 틈세에서 끊임없이 물질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 정상우주론입니다. 우애시마: 절충을 해 놓치 않으면 안되다 이것이지요. 미쯔이: 그렇습니다. 그렇치만, 그것이 그렇치 않다는 것이 여러가지로 알게됨으로 결국은 우주는 팽창해 가는 것이다, 시작은 있었다 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애시마: 종교의 영익에서는 순환적시간이란 생각이 쉽게 공존해 있습니다만, 역시 그것이 없으면 불교의 피안같은 것도 없게 되니까. 마쯔이: 그래도 자연이란 “고문서”에 기록되여 있는 것은 순환이 아니고 모두가 직선적입니다. 이것을 가장 단적으로 알수 있는 것은 우주의 원소조성인데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구만 봐도 생명에 있어서도, 탄소,질소,산소보다 무거운 원소가 존재하지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빅뱅에서 약 100억년 지나서 이런 무거운 원소가 2% 정도 쌓이면 우주에는 지구나 생명이 태어난다. 그렇치만, 언젠가는 수소,헤리움이 없어지고 철만 남는다. 그렇게 되면 별도 빛 나지 않고 생명도 없어진다 는 것이지요. 우애시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드래도, 지구가 한바퀴 돌면 또 달이 나타난다라는 단순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마쯔이: 한 인간이 평생동안 경험하는 현상으로 본다면 분명히 순환하고 있지요. 일년은 반드시 돌아 오기 때문에. 우애시마: 우리들은 양쪽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마쯔이: 아니, 일반대중수준에서는 그런 인식은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계념으로서, 직선적이란 전혀 실감이 없고 역시 순환적이란 감각이 강하다. 우애시마: 그렇다면 동감입니다. 순환적인 시간계념은 위기의식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고 강하게 우리들의 체내에 잠복해 있습니다. 마쯔이: 순환이라고 할 때, 시간의 순환과 물질의 순환이 있습니다. 인류가 생물권안에서 종의 하나로 살고 있을때는, 물질은 지구씨스템안에서 크게 정체하지 않고 순환하고 있었다. 그래서 500만년 까가이 위기가 오지 않했다. 시간계념도 순환적이 였다. 그런데, 농경목축을 시작하여 생물권에서 뛰어나와서 인간권이란 특수한 구성요소를 지구씨스템안에서 만들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순환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인간권이 확대해간다는 것은 어떤의미에서는 이 구성요소에 물질이 집중하여 순환하고 있지 않는것이니까, 순환이란 뜻에서는 불교는 아마 인간권을 말 할수 없는 것이 아닐까. 불교는 인류가 생물권의 하나로 살아 갈때의 단계의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까. 위기의식과 신흥종교 우애시마: 이대로 가면 인간권이 파탄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라고 말 씀하는 군요. 마쯔이: 분명합니다. 우리들은 지구에서 재료를 빌려서 쓰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몸의 삼분의 이가 물이라고 하면 이대로 인간권이 확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구의 물을 전부 점유한다는 것이 되는데 그런 일이 있을수 없는 것 안닌가요. 우애시마: 저가 걱정하느것이 하나 있는데, 새로운 종교가 [이데로 간다면 인류는 멸망한다] 하면서 사람을 끌어 간다. 위기의식을 전면에 내 세운 프로파간다이지요. 그것과 마쯔이씨가 말씀하신 위기감이 어딘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마쯔이: 그런 싱흥종교는 어느 시대에도 있는 것 아닙니까. 우애시마: 네. 종교는 오래전부터 그런 역사입니다. 그래서 꺼구로 말 하면 인류가 멸한다는 위기감은 어느시대도 있었다고 말 하고 싶습니다. 마쯔이: 앞에서 언급한 것을 되푸리하는 것 같습니다만, 100년에 한번 있는 위기, 몇십년만의 한번의 위기 그리고 일만년에 한번 일어나는 위기 등 여러가지 위기 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다가 맞아 떨어저서 일어 난다고 어떤 의미가 있다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구별을 해서 쓰고 있습니다만 요는 인간권이란 계념과 인류는 틀립니다. 내가 문제시 하고 있는 것은 인간권을 만들어서 살아간다는 방식이 가능한가 아닌가 이지 인류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삶의 방식이 가능한가 하는 의미에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것이 [렌탈의사상]인것입니다. 렌탈이 리사이클이나 순환과 틀리는 것은 총량규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점. 더 이상 인간권을 확대할수 없다, 라는 것. 우애시마: 인간권안에서 위기를 넘어설수 있는 것을 구할수 있을까요. 마쯔이: 소유에 대한 계념이라든가 우리들이 그야말로 인간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계념이라던가 공동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나하나 음미해가지 않으면 안되지 않는가. 우애시마: 그점이 어쩐지 추상적이 됩니다만. 마쯔이: 추상적이 되지 않을수 없다. 나 자신도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제안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니. 그리고 그렇게 간단하게 해답이 나오는것도 아닐 것 같고. 우애시마: 그런데 지구는 수명이 있지요. 마쯔이: 지금이 바로 반환점입니다. 앞으로 50억년 이 지나면 존재하지 않게된다. 그 이전에 생명이 없어지는 것은 앞으로 5억년정도 입니다. 왜냐하면 태양이 밝아집니다. 지구는 태양이 그 명운을 잡히고 있습니다. 우애시마: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든 멸할 운명에 있다고. 마쯔이: 그점이 어려운 데목인데 태양이 벍아지는데 대해서 우리들이 아무일도 하지 못하면 지구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고 인간권을 계속해서 존속시키려면 지구에 우산을 씨운다던지 하는 선택은 있습니다. 우애시마: 태양코-드이군요. 마쯔이: 그렇지만, 그건 선택의문제이고 우리가 자연을 콘트롤하고 지구에 손을 쓴다는 선택을 하는것이니까………….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혹성으로서의 지구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앞으로 5 억년입니다. 우애시마: 사물을 긴 스팬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종교학과 혹성물리학은 그 대표 같은 것이 군요. (웃음) 나는 기본적으로는 [어떤것도 되어지는 것과 같이 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아무리 세간에 경종을 울리봣자 별 의미가 없다라고 여기고 맙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지만. 성지 하나를 두고 봐도, 대략 일만년까가운 역사가 있다고 보는데 그 내력을 상세히 추적할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서 오히려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마쯔이씨로부터 크다란 힌트를 얻었다고 여깁니다만 혹시 우리의 종교나 문화가 운석이나 크레트와 밀접히 맺어진다고 하면 그것을 읽고 풀려는 프로세스속에서 야말로 [렌탈의사상]의 헥심부분이 크로즈엎해 오지 않을까요. 언젠가 꼭 공동작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대담을 끝내고 인간권의 내부구조 혹은 내부씨스템을 생각할 때, 종교는 피해 지나갈수 없다. 대단히 중요한 테-마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떤 접점에서 끊어 나가느냐 하면 지구학이라고 하드래도 단칼에 끊으내는 시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상호 관심사로써 의 키워드적으로 겹치는 “돌 깍아 낸 장” 라고 하는 장의 문제에서부터 의론을 시작했다. 돌 깍아 낸 장이란 지하의 지층을 인공적으로 노출시킨 장소이다. 따러서 그 흔적은 지층이란 지구의 역사가 기록된 고문서를 해독하는데 적당하다. 성지에는 그런 돌깍아낸 장이 많다. 라고 지적하는 우애시마씨의 지적은 나에게는 신선했다. 그것이 왜 성지가 되는가는 아직 불명확한 것 같지만 종교탄생의 배경에 현세의 살아가는 방식에의 위기대책으로서 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선택되었는가 하는 것을 탐색하는것도 지구학에 있어 매우 흥미있는 테-마이다. [마쯔이]
46 no image “이미지物로서의 회화”展 감상기 (2)
2506 2007-06-05
“이미지物로서의 회화”展 감상기 (2) 전원길의 9번째 개인전 소나무S 갤러리. 2004년 5월 22일- 2004년 6월 30일 프로로그 흘려간 미래를 보다 전원길의 평면 캔버스화는 ‘大地’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의 짧지 않는 화가 수업과 외연적인 모든 실험성 강한 예술 활동의 중간지점에 도달한 키 워드(key-word)이다. 자연과 작가의 만남에서 그는 자연의 그 한량없는 깊이에 침잔하고 수도승 같은 수행을 통해서 자연의 本質이 그 나타냄의 表象에 들어 있으며 색채란 빛의 언어를 통해서 이를 인간과 자연과의 통로로 삼는 그의 독창적인 어법을 찾아 냈다. 그가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임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였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는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예술적으로 풀이해 낸 한 사람의 使徒의 찬송이며 懺悔錄이라고도 볼수 있다. 평면 캔버스화는 4각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2차원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도토리즘(동어반복)의 관성을 보여주고 보는 사람에게는 그 갇혀 있는 듯 하는 프레임은 예술은 항상 새로워야 한다는 선입견과 모순 되는 듯하다. 자연 속에는 이러한 직선이 교직하여 만들어 내는 사각형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더욱 불만스럽다. 그러나 어찌 자연의 실체가 곧 바로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그의 캔버스는 실험실의 배양기 역할을 맡고 색채란 媒質을 가지고 자연의 생성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포착해 낸 조형의 장이다. 캔버스의 합목적성은 여기서 비롯한다. 전원길의 캔버스화의 프레임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예술성으로 평가 해 볼 때 자연과 예술의 중간자의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나는 평면이 ‘이제 새로운 개념을 담아 낼 수 없다는 고갈된 세계’가 아니며, 시대정신에 반응하는 우리의 의식이 유영하기 위한 장으로서 그 무한한 가치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한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관념이나 개념을 위해서 자연의 諸相을 메타포나 아레고리로 쓰지 않는다. 대상과 동화하면서 내재적이며 필연적인 대상의 메커니즘을 따라 가면서 읽어내고 화폭에 옮길 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不定形이나 複雜系가 지배하고 있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정을 헤아릴 수 있다. 이는 그가 오브제의 幻影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媒質이 갖고 있는 탈 이데오로기적인 중간자로서 色彩에 착안하여 이를 가지고 사물의 내재적 실상을 밝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미지物로서의 회화’란 제목을 부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미리 설정된 미학이론에 의해서 라기 보담 자연에 대한 믿음으로서 일관되게 일꾸워낸 작가의 宗敎的이며 창조적 수행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인 態와의 만남의 장을 설정한 것이다. 단순한 복제물로서 나타나는 우리들의 시지각을 각란하는 이미지물은 아니다. 작가의 이미지와 이미지物은 자연이 숨겨 놓고 있는 순환하는 모습을 색채를 가지고 ‘읽어 내는 묘’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을 말씀의 경전으로 간주하면 어떤 한 곳에 멈추지 못한다. 그것은 생성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시각 문화의 상호 단절 멈춤의 연속에서 살아가지만 자연 속에는 단절과 멈춤이 없다. 작가 자신이 자연이란 오브제와 동거하면서 마치 땅위에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며 곡식을 길러내는 농부와 같이 화면이란 대지위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고 말 한 것은 쟁기가 흙을 일구어 내는 모습을 연상 시킨다. 그의 예술노동은 2차원의 평면 속에 3차원의 오브제를 끌어 드리고 이를 ‘색채’로 겹칠을 한다. 평면화가 갖기 쉬운 평면성을 지우기 위해서이다. 노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믿음은 서 있지만 수확은 땅의 법칙에 의존하며 기다리며 관찰하며 이를 추적할 뿐이다. 그의 접근방식은 농경민족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일하며 그 오묘한 섭리에서 지혜를 배우고 공생의 덕목을 익히며서 삶을 영위 해 가는 모습과 같다. 이러한 방식은 현대 서구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해 왔던 [종합적 큐비즘]이 오브제를 화면상에 도입했던 경우를 떠 올리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恣意的槪念性’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서 사물을 대상화 하지 않는 점에서 차이를 두고 있다. 그의 사고의 틀속에 동양사상적 사유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평면화에 도입한 모티브에는 재독 한국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윤이상의 음악의 구성과 비슷하다. 윤이상은 서구음악의 방법론을 구사하면서 동양적인 모티브(壯子철학등)를 도입하여 서구인들의 귀를 새로 뚫어줌으로서 세계적인 작곡가 대열에 올랐었다. 조형양식의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이 시대를 몸소 부딪치며 살아가는 작가의 시대정신과 맞물려 있다. 올 바른 시대정신은 그 시대가 존재해 가는 방식속의 부조리함 모순성을 꿰뚫어 보고 새로운 vision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萬物化作, 茗區有狀, 盛衰之殺, 變化之流也 (만물이 변용하고 성장함에 있어서 그 모든 싹과 생김새는 각기 본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안에서 각기 성숙과 쇠잔이 있고, 변화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변화와 변용의 부단한 흐름이 있는 것이다. -<장자>편에서.)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 복음 1;7- 이번 전시회에서 보게되는 전원길의 양식의 변모상은 빛으로 비롯되는 색채의 환상(fantasy)을 불려 일으키면서 자연의 실체와 말씀의 실체를 함께 읽어내게 한다. 이 다중적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의 색채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 이미지속에 두 가지 시각의 정신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축에는 시간을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다른 하나의 공간적 축에는 순환의 실상이 서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현란하면서 질서가 있고 형태가 색채를 통해서 만이 발현되는 무대는 우리들의 망막을 잡는 힘이 있으며 그 내면에는 바다와 같은 이 시대의 삶의 향방을 자연 속에 수렴해 낸 작가정신과 신앙적 믿음의 묵직한 존재감이 깔려 있다. Pumkin in the sky-1은 이번 전시 작품중에서 가장 정제된 완성도가 두드려진 작품으로 보인다. 작가가 본의 아니게 들어내 보여주는 ‘미감’을 동반하고 있지만 이는 의도된 것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의 諸相이 원천적으로 품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연유한다. 바탕화면의 색은 하늘 색을 옮겨 놓은 것이지만 여기에 작가는 가는 흰 선으로 ‘금’이 간 것 같은 생명선을 깔아 놓고 있다. 호박이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게 한 시각에서 잡아낸 무대배경에서도 그 繼起的 흔적을 옮겨 놓은 것이다. 마치 旱魃로 인해 땅이 금이 간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자세히 보면 ‘금 cracks’ 이 아니고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작가는 이것을 ‘금’으로 보지 않고 ‘꽃들’이 서로 겹쳐저 있는 모양이라고 설명해 준다. 필자로서는 여하간 이 공간에 떠 있는 호박이 가지고 온 생명 줄이라고 우긴다. 이 금과 같은 가는 선들은 화면의 바탕에 깔려 있음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지각 심리에 동조하는 힘이 있다. 혜성의 꼬리 같이 길게 꼬리를 물고 서로 다른 다섯가지 색갈로 호박과 접속되어 있는 것은 처음에는 호박의 생성과 쇠잔의 서로 다른 시차에서 잡은 것으로 보았는데, 작가는 동시에 불려 내어진 색채임을 설명해 주었다. 호박이 모든 색깔을 혼합함으로써 검은 덩어리로 보이고 그 꼬리들은 아주 명료한 단색으로 시선을 강하게 끗고 있다. 이 작품은 탄탄한 자연의 내적 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우리의 현대적인 미감을 환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움을 품어 내고 있다. 영어의 금을 의미하는 cracks는 ……..금이 가게 하다란 뜻도 있지만 또 다양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사전에는 ‘채찍 따위를 철석 때리다’ ‘호두 따위를 우두득 까다’ ‘깡통 따위를 열다’ ‘부수다, 깨뜨리다’ ‘암호를 해독하다’ ‘비밀을 밝혀내다’등의 동사와 명사로 쓰이고 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전혀 서로 다른 의미는 그 앞뒤의 문맥에 의해서 비로소 한정되며 발현된다. 회화 공간상에서도 말과 문맥사이의 이러한 의미의 한정이 작용한다. 나는 첫 인상의 ‘금’에서부터 ‘생명줄’로 발전해 갔고 작가의 ‘꽃’설에 까지다가 오면서 무언가 하나의 코드(code)를 풀어 낸 기쁨을 얻었다. 필자의 해독이 비록 잘 못된 것일지라도 작가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Pumpkin in the sky-2 에는 이런 선은 사라지고 물체가 아주 어두운 색조 속에 서로 단절되어 있다. 이 화면은 작가가 햋빛을 등에 지고 역광으로 말라가는 호박들을 잡아낸 이미지다. 서로가 줄기의 목숨 줄에 의해서 이어져 왔던 생명감은 사라지고 꺼져 가는 殘光만이 일부 남아 있다. 마치 호박의 만가(requiem)를 듣는 듯 衰殘의 모습을 하고 있다. 天上으로 향하는 갸날픈 아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을 듣는 것과 같다. 그것은 슲음이 아니라 한 물체의 해체과정이며 해체의 진실이며 그 진실 됨을 관조하는 데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이다. 관객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작가가 의도하는 주관을 섞지 않고 냉정하게 사물을 보게 하는 진실된 의도를 깨친다. 이 순수하게 다가오는 미적覺省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잠자고 있던 미감의 부싯돌이 부시를 만나는 순간이다. 각성은 우리 영혼을 그 근원에서 부싯돌의 섬광과 같이 우리의 일상의 관성을 벗겨 내고 참 실상의 vision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림과 관객이 만나는 이 놀라운 공간은 빛이 그늘의 소멸을 좌우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사라저간 형태들을 색채에 의해 조율된 sequence(연달아 일어남) 를 따라 가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호박의 모습을 복원해 줄 때 우리들은 또 다른 환상적인 무대를 떠 올리게 된다. 이 화면은 망막적 즐거움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지적 상상력에 의해 일깨워 질 수 있는 현재 과거 미래를 보게 하는 vision의 역할도 해 낸다. 작가의 시각에 잡힌 사물의 이러한 존재방식은 시간의 벽속에 갇혀 있는 듯 하지만 보는 관객들의 상상 속에서는 그 벽이 사라진다. 순환하는 자연 상은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자칫 허망해 보이지만 그러한 생각은 우리의 굴절된 형이상학적 시간관념에서 오는 것이고 생성과 소멸의 형상 넘어 시공이 합일되는 숭고함을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작가 자신이 자연을 닮아 가기를 바라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그는 그 침잔속에서 자기 자신도 관조하며 각성하고 있는 것이다. 돌들의 소리: 설치물 이번 전시회 도록에 흑백사진으로 모습을 들어 낸 작가의 모습을 보면 어떤 짐작이 간다. 이 사진속의 작가의 모습에는 오랜 고투 끝에 작품들을 생산해 낸 후의 부드러운 정일감이 맴돌고 있다. 그는 그의 분신과 같은 돌들 앞에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또 다른 이미지를 노동하려고 하고 있다. 돌들을 둥근 모양으로 배열해 놓고 태양을 끌어드리고 그 순환의 지표들을 자신의 색채의 족적들로 찍어 놓고 오행사상을 연출해 보인다. 이 돌들은 인근에서 찾아 낸 마사토가 땅속에서 굳어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가 완성해 놓은 돌의 설치물은 인류가 처음으로 자연과 만나면서 신앙과 생활도구로 요긴하기 쓰던 시대를 떠 올리게 한다. 수 만년 이전부터 인류는 이 견고한 돌에서 영원성이란 도덕을 보았었다. 우주의 섭리를 헤아려 보면 그것은 삶의 구조를 하고 있다. 먼지와 같은 아원자가 빅뱅을 일으켜 우주 속을 유영하다 별을 만들었고 망막한 우주의 한 점으로 태양계의 한 혹성으로 탄생한 지구에서 생성의 굴레를 순환해 헤 가고 있는 파편들이다. 이 조금만한 돌들의 고향은 지구 속 깊이 내장된 용암이며 동시에 수백억광년 멀리 떨어져 있는 120억년의 수명을 헤아리는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이루고 있는 몇 만도의 열기를 품고 있는 별들이다. 그것들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상생과 상극을 동시에 품고 찰나이면서 영원한 생명과 도덕적 구조의 흔적을 속에 품고 있다. 그 시원의 구조속에서 원초의 종교가 탄생했다. 작가는 여기에 암호와 같은 영매의 지표를 붙이고 그것을 예술이라 한다. 원시인들은 이를 돌멘이라 했고…….현대의 사이버문명이 우주의 미아로 해매고 있음으로 던지고 있는 영원회귀적 경고의 멧세지이리라. 작가는 돌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 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것도 줄 수 없는 커다란 평화와 위안의 선율이 흘려 가고 있을 것이다. 문명이 안겨 주는 무한 자기 증식의 모든 병폐들을 씻어 내는 가장 확실한 치유의 길을 보여 준다. 그것은 신앙의 모태이고 예술이 아직 종교와 분리되기 이전의 ‘오브제’이다. 안토니 가우디가 그의 조형양식을 그의 고향인 카다루니아의 몬세라도의 밋밋한 바위산에서 자연의 諸相을 읽어내고 고행승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조형양식을 발견해 냈듯이 나는 예술가들의 이 엄혹하면서 황홀하고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면서 그 마지막 새로운 발견과 表像으로 보상 받는 과정을 상상하면서 전원길의 예술인으로서의 정직함을 확인 한다. 예술은 그 근원에 있어 작가에게 엄청난 宿業을 안겨주는 고행이다. 작가는 자기 자신에 가한 이 엄청난 업의 반동을 스프링보드로 삼고 자신에게 정직하게 되고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술을 시대정신의 한 지표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이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라고 줄곧 던지고 있던 나의 물음에 대한 해답의 단초를 열어 주고 있다. -색채 몽타쥬의 해부 그의 색채미학원리는 영화의 몽타쥬효과와 비슷하다. 영화의 몽타쥬는 정지된 한 콤마의 영상으로 압축해 놓음으로서 앞뒤 이야기의 시켄스의 의미를 더 강하게 와 닫게 하는 트릭에서 창조되어 나왔다. 이 몽타쥬이론을 정립한 ‘30년대의 소련의 영화감독 세루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자신이 새로 정립한 몽타쥬이론을 도입하여 세계영화사에서 초기영화의 단순한 방식에서 벗어나게 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천재였었다. 그의 몽타쥬 이론에는 소리 감각 지적요소들이 망라되 있는데 이 몽타쥬 이론의 대표적인 작품이 그 유명한 ‘전함 포춈킨’이다. 당시의 기층계급이었던 노동자 농민 병사 일반 소시민들의 시지각에 맞추어 어려운 혁명이념을 쉽게 풀어 낸 영화예술의 금자탑이다. 전원길의 색채미학원리에도 이와 유사한 지각 메카니즘을 읽을 수 있다. 영화 몽타쥬 요소는 동영상을 구성하는 필름의 한 콤마이다. 전원길의 작품에는 이를 그가 발견해 낸 ‘색채와 형상의 대칭성’과 ‘색채의 계기성繼起性 이미지物’이 화폭을 구성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우리의 의식이 그의 화면에서 通時空間속에서 유영할 수 있게 구성하는 것이다. 색채는 만물에 혼재해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다시 분리 해 낼 수 있고 이것이 화면위에서는 다시 살아저 간 사물의 형상들을 복원해 내는 힘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복원해 나오는 형상들은 감추워진 또 다른 색채를 표출 해 주고 시차상의 변용을 관찰해낸 역순으로 소급하면서 그의 화면은 완성점에 도달한다. 그의 색채미학원리의 유효성은 관객이 그의 이미지물들이 미리 깔아 놓은 통시공의 시켄스의 코드(code)를 읽어 내면서 상상을 통한 해독(de-coding)으로 인도하는 힘을 발휘하는데 있다. 관객은 완성된 화면에서 그의 색채미학의 분신들이 이미지물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몽타쥬에 시지각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간 그의 통로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연출해 낸 열러 있는 fantasy의 세계로 인도 할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자연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19세기 말경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자장 현상(電磁場 現像)의 이론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통시성(通時性)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상대성 이론으로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曲律)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관측치에 차가 생긴다고 보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 관측치의 문제를 해소하고 모든 관측에 통용될 수 있는 공변식(共變式)을 마련했으며, 또한 고전 물리학에서 독립된 두 법칙이었던 ‘질량 불변의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하나의 등식으로 묶었고, 이 등식이 그 후 원자력 발전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순수 객관주의의 물리학에 처음으로 관찰자의 입장, 즉 주관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은 더 깊고 더 넓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 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素粒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 만화하는 에너지(氣)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場)의 변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찰자의 설문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주고, 어떠한 대답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은 그 관찰자의 대상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그 ‘존재’의 기술(記述)로써 양자 물리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관찰의 경험을 정리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그 설문의 방식을 통하여 관찰 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되므로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현대물리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옴에 따라 본질적으로 주관주의인 동양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등 양자 물리학의 거장들이 그 탐구의 과정에서 종래의 물리학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인과율을 본의 아니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됨에 따라 그들은 허탈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며, 심각한 사상적 고민 속에서 그들은 일찍부터 동양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특히 직관적이며 주관주의적인 동양 사상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나 사변적(思辯的)이며 객관주의적인 서양 과학 문명 속에 살고 있고 그 양자의 사상적 괴리(乖離)와 상충을 체험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두개의 사상 경향이 새로운 정신적 용광로에서 융합되고 체계화되는 것이 절실히 요망된다. <프리초프 카르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번역한 이성범.김용정의 역자 서문에서 인용> 필자가 위의 현대물리학의 동향에 대해서 해설한 글을 이 장에 옮겨 놓은 의도를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작가와 만남의 궤적 필자가 전원길화백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 것은 2001년 7월 한전프라자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 [GROWING PAINTING]에서 였다. ‘생명을 숙성 시키는 대지로서의 회화’란 좀 생소하게 들리는 이 전시회에서 당시 성곡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인 이원일의 소개해설을 읽고 ‘고구마’ ‘손끝에 핀 꽃’ ‘껌’ 단색의 6개의 화면들을 옆으로 이어 붙이고 같은 색조로 칠해진 나무토막과 그위에 올려놓은 실재 프라스틱 컵으로 이루워진 ‘컵의 위치’ 개나리와 진달래’ ‘참외,오이, 토마토’ ‘바비 인형’ ‘겨울 잎새들’ 을 관람했었다. 이 신선하면서도 알숭 달숭한 그림들은 그 記意와 記表들을 함께 읽어 내기에는 그림 전시회와는 담을 쌓고 있었던 나에게는 역부족의 대상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시각에 잡혔던 이미지는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지만 유목민적인 사고로 일관해 오던 나의 삶에서 멀어져 갔다. 이후 수원미술전시관 그리고 근래의 소나무 갤러리에서 만난 그의 작품들에게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을 해야겠다는 욕심이 일어났었고 4년째 만나는 이번 ‘이미지물로서의 회화’전에 와서야 비로소 2년 여 동안의 미술 감상 학습의 내공 덕택으로 작품과 제대로 대좌 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자기류적인 해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시각예술 감상을 자신의 감상기를 쓰면서’ 접근해 온 방식에 따라 이번 전시회의 관전기를 하나의 試論으로 쓰 보고 있다. 작가는 2003년에 기술한 작가노트 중에서 ’………하지만 나는 평면이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개념을 담아 낼 수 없는 고갈된 세계가 아니며, 시대정신에 반응하는 우리의 의식이 유영하기 위한 장으로서 그 무한한 가치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적고 있는데, 그는 이번 ‘이미지物로서의 회화전’에서 이 약속을 제대로 지켜 냈고 우리들은 그의 ‘遊泳의 장’을 공유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평면 회화상의 색채몽타쥬는 비사실적이지만 한 정지된 공간 속에 대상의 변성해간 형태가 남겨준 繼起的 흔적을 색채가 가지고 있는 통시성을 이용하여 대상의 형상을 복원해 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합성’이란 몽타쥬원리가 동원된다고 본다. 전원길의 색채미학에서는 한 컷의 記意가 숨어 있는 몽타쥬영상이 아니라 기의가 부재하는 記表性으로 출발한다. 굳이 비유컨데 이는 ‘색채몽타쥬요소’ 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그가 의도하는 시간성을 수렴해야 하는 캔버스화에서는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다. 그의 미학은 전래의 ‘추상화’와는 그 궤를 달리하는 새로운 표상양식이다. 그의 색채는 기의가 없는 媒體要素로 보아야 하며 사전에 만들어진 씨나리오에 의해서 조율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전화백의 작품에서는 자연이 그 오묘한 씨나리오를 쥐고 있으며 작가는 이를 색채의 요술지팡이로 읽어낼 뿐이다. 이러한 작업은 켄버스상에 대상을 본 작가의 이미지를 재현해 내는 오브제와 이미지간의 분리로서는 성립되지 않는 접근방법이다. 그래서 작가는 화면상에 이미지와 이미지물(오브제)을 동거시킨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syntax를 수반하는 ‘그린다’라는 작업과 판이 함으로 작가는 이를 마치 농부가 땅을 밟고 밭을 가는 노동과 같이 ‘일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모든 syntax를 버리면서 자신을 비운 무심한 상태에서 자연 속으로 침잔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노동(field work)에 해당한다. 그의 그림은 사물의 생명력이 발흥하며 우주와 그 기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投射하고 있는 영상의 한 콤마(comma)이다. 마치 경전에서 말씀을 읽고 베겨내는 고행승과 같은 작업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할 수 있는 일은 그 진의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인간이 자연물을 가공하여 만들어 낸 모든 파생적 가상실재의 과잉에 의해 굴절된 시각이 여기서 일소된다. 전원길은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비로서 자연과의 진정한 대화의 통로를 찾아냈다. 그것은 대단히 좁은 조형의 문을 통과한 수행의 한 결과물이다. Cracks란 말에는 ‘암호를 해독하다’란 뜻이 있듯이 그는 자신을 벗겨냄으로서 하나의 code의 베일을 벗겨 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일련의 작품들을 나는 그가 1983년 야투의 자연미술연구회참가활동을 시발점으로 20여년을 걸쳐 자신의 실존의식과 고투하면서 다시 새롭게 자연을 발견하고 그 어법의 탐색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고 1999년 런던 인스티튜 첼시 미술 대학원 修業을 통하여 몸소 체험한 서구미술의 조류와 방식을 체득하였고 이후 일관되게 사물과 자연을 모티브로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해 온 오랜 내공의 결과로 보고져 한다. 음악도 소리란 매체를 통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감성을 자극하고 이미지를 불려내 주지만, 회화는 먼저 이미지가 있고 보는 사람에게 그 숨어 있는 뮤즈(Muse)를 불려 일으켜 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만일 이 환상적인 색채의 향연(혹은 이야기)이 불려 일으켜주는 뮤즈신의 연탄에 귀를 기울일 수 만 있다면 작가의 예술 혼과 만나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의와 기표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존재하는 방식과 같이 자연의 생태와 일치하고 있는 그가 자연과 만나서 일구어낸 길고 긴 이야기의 한 章을 읽어 내는 것이 될 것이다. 관객은 이번 전시회가 바로 우리들 가까이에서 호흡을 같이 하는 한 작가가 우리가 잃어 버리고 있던 자연과의 대화와의 통로를 그의 새로운 색채어법을 통해서 열어 주었으며 이를 듣게 하는 데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에피로그 a) 전원길과의 만남은 narrative 한 년대기적 측면에서 그의 인간됨과 작품의 변모상을 볼수 있겠지만 그가 도록에서 […….자연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고 풍부하게 보는 이의 눈과 머리 그리고 마음속에서 감흥을 주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 라고 말 하고 있듯이 나는 오늘날의 우리의 황량한 문화풍토에서 그가 펄쳐내고 있는 회화적 연극을 제대로 감상하며 감동을 받고 싶은 관객으로서 남고 싶다. 그의 이번 전시회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 이정표는 나에게 한전프라자의 전시작품들을 제대로 되새길 수 있는 보너스를 안겨 준다. b) 몇일전(6월11일) 나는 위의 글을 마무리 하기 위해 다시 안성 소나무 갤러리를 찾았다. 그런데 전시관 안 벽면에 걸려 있는 두 작품 사이로 어린이들이 여러가지 식물의 잎새와 줄기모양으로 그려서 오려 붙인 코라쥬 벽화가 펄처져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휠씬 자유스럽고 순수하고 분방한 조형능력이 있음을 발견했지만 오히려 필자는 이 첨가작품들로 인해 작가의 그림의 틀이 주고 있는 딱딱함이 없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 놀라운 해프닝의 체험은 감상자는 역시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서 좋은 작품들을 보려 다녀야 한다는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전원길 [2004/6/15 (7:19)] 장문의 감상기를 올려주신 조규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순수한 일반 관객으로서 무명의 작가의 작품에 진정어린 관심으로 작업의 면면을 살펴주신 점은 우리 미술계의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45 no image 렌탈 사상은 심화한다(제 2 편)
2442 2007-06-05
렌탈 사상은 심화한다(제 2 편) 미국의 기술신앙에 속지마라 대담* 사가기바라 에이스케 진행* 마쯔이 다가후미 사가기바라 에이스케씨 약력 게이오의숙대학교수. 1941년동경태생. 동경대학경제학부졸업후 대장성입성. 미시간대학경제학박사호취득.하-바드대학객원교수등을 거처 대장성이재국총무과장 국제금융국차장 동국장 재무관을역임. 근간으로 [일본과 세계가 떨었던 날] [진보에서 공생으로]등. 마쯔이 다가후미씨 약력 동경대학대학원이학계연구과교수(지구혹성물리학). 1946년시즈오까현생.동경대학이학부졸업. 동대학원수료. 본지(중앙공론)97년10월호에 [렌탈의 사상]을 발표. [세계가 붕괴한다]. 아시아통화위기때 “사마-즈”는 이런 메모를 돌린다. 그것은 IT 가 지탕하고있는 세계경제의 불안을 나타내고 있었다. 사마-즈의 메모 마쯔이: 사가기바라선생과는 3년전,신문지상(1997년7월14일~17일부 [요미우리]석간)에서 [왕복서간]을 함게 발표해 주셨지요.그때부터 물질적인 뒷받힘이 되여있는 [리얼.월드]에 대해서 화페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급융과 같은 실체가 없는[사이바. 월드] 가 너무비대하고있는 이상현상에 대해서 위기감을 공유하였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아시아의 통화위기가 일어 났지요. 나는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지구전체의 씨스템에서 보는 [인간권]이란 것의 안전성이란 어떤것인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권]이란 것의 불안전함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농경목축을 개시하여, [소유]란 것을 중시하기 시작하고 부터는 인간권은 언제나 무한상승 발전이란 환상에 의하여 지탱되오지않했나 생각됩니다. 그 환상의 헥심은 화폐라고 생각되는데, 이런것을 도입함으로써 어떤종류의 구심력을 만들어 내어 인간권의 내부씨스템을 [안전]화 시킨다는, 대단히 불안전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분야별 전문가들의 지혜를 빌려보자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인터네트라고 하는 실체가 없는 사이바.월드를 만듦으로서 리얼.월드의 유한성같은 것을 극복해보려고하는 방향으로 인간권이 급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느껴집니다. 그 주변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이번 대담에서 의론해봤으면 합니다. 사가기 바라: 지금도 기억하고있습니다만, 97년9월14~15일 어느 회의석상에서,전 미국재무장관인 라-리.사마-즈가 나에게 메모를 돌려왔습니다. “World is falling apart”(세계가 붕괴한다)라고 적혀있는. 그 뒤에 사마-즈와, 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즈란 열차안에서 둘이서 두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의 미국의 위기감이란 대단했습니다. 이젠 이대로 가면 세계공황이라고.미국의 헷지본드나 투자은행이 이상해진것입니다.미국의 금융기관이 줄줄이 적자행진을 하기시작하고 이데로 가면 이상해지지않을까 하고 불안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97년에서 98년에 걸친 세계적신용질서붕괴는 아슬아슬한 선까지 와 있었던것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그때까지는 어느종류의 권력메까니즘로 신용질서를 지탕하고 있던 국가가 그로발 내지 버추얼(global and virtual)의 세계속에서 기능할수 없게 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우리들 국제금융의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대책을 강구해봤지요. 국제통화기금(IMF)을 세계의 중앙은행과 같은 기관으로 하고 이 곳을 혹종의 신용질서의 중심으로 한다는 것도 고려해봤지요. 그러나 결국, 그런것은 부가능했고 국제금융개혁도 후지부지되 버렸지요. 98년의 위기를 어떻던 넘긴후에 99년에서 2000년에 걸처 그런 의론이 있었습니다만 결론은 나오지 않했습니다.신용질서 같은 것을 오늘과 같은 그로발 내지 버추얼의 세계에서 유지할것인가에 대해서 아직 해결책이 없는것입니다.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한번더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큽니다. 세계의 중앙은행 필요성 마쯔이:그 위기가 그렇게 까지 심각해젔던 원인은 알고있습니까. 사가기바라: 그건 알고 있습니다. 현제 일국가내에서의 신용질서를 유지하는 중헥에 있는 것은 중앙은행입니다. 허나 또한편에서는, 그로발화한 화폐에 신뢰를 부여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세계의 중앙은행이 원래 필요한것입니다.그러나 실제는 일국가에는 중앙은행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마쯔이: 그렇치만 그때까지는 각나라마다 중앙은행이 그들의 화폐의 가치를 보증하고있었지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나요. 사가기바라: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그것이 통용이 안되기 시작한거지요. 태국에서 태국의 화폐에대한 공격이 있으면, 태국의 중앙은행이 손을 들어 버립니다. 그때 태국의 중앙은행을 미국이나 일본이 개입하여 도울수가 없었다. 이것이 점점 파급해가서 결국 자본주의의 총본산인 미국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해도 세계적인 통화에 대한 신뢰를 보증하는 메까니즘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것입니다. 그기에 모-든 거래가 리얼타임 와 버추얼로 이루워지니까 이에 대응한다는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요. 마쯔이: 그걸 해결하기위한 대책이 지금도 묘색되고 있습니까. 사가기바라: 묘색은 하고있습니다만 여전히 일국의 정치적 한계가 있습니다. 즉 미국의 정치란 것이 있어 그건 미국의 국익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셈이지요.그래서 이도네시아를 도운다든가 브라질을 도우는 것은 싫다 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쯔이:그래서 미국의 국익과도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군사적인 문제에서도 미국은 자기의 나라 국익에 관계된다고 생각하면 세계경찰적인 행동으로 나서지요.아직 그런 선까지 정말로 영향이 일어난다고 보지 않고 있다는것입니까. 사가기바라:그렇습니다. 98년의 9월,10월에는 적으도 전문가들사이에는 대단한 위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계 전반에 알려지지 않했지요. 크린톤은 그 시기에 대장대신회합에 나와서 이건 대단한 위기다라고 말은 하였습니다만 미국의회전체는 어땟느냐하면 그것을 몰랐다고 할수있지요. 바야흐로 문제는 그로발화 버추얼화되가고있는데 국가의 틀은 옛날 그대로 남아있어 그걸 넘어서지 못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씨스템의 신용질서가 붕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외로 큽니다. 아마 다음에 만일 일어난다면 미국경제의 붕괴입니다. 미국경제는 지금 하강국면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크게 한번 요동을 치면 세계의 신용질서가 위태로워진다. 그런 일이 이 수년내에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21세기초두의 최대문제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보주의]를 연명케한 IT혁명 마쯔이:무한 발전이란 환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가기바라: 그건 어떤종류의 진보주의사관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함니다.그리고 이 것은 근대에 와서 더욱 가속화된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지구씨스템이란 크다란 틀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안에서 인간은 끝없이 진보해간다는 역사관을 말한것입니다. 20세기에서는 그 진보주의사관의 하나의 궁국목표로서 사회주의이라 든가 공상주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한편에는, 지금 미국이 구가하고있는 시장주의,혹은, 자본주의적인 자유, 민주주의, 그런것이 매우 순화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나, 제법 데모그라틱한 시장중심의 씨스템이 만들어 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두개의 흐름이 서로 확집했던 것이 20세기의 정치경제씨스템이라고 보는것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또한 소위 일컬어지는 미국씩 민주주의나 시장주의에 대해서도 한계가 있다 라고 느끼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진보주의사관에 대한 안티테-제가 나오게 되고 앞서 이야기한 [진보-무한발전]이란것을 보편적인 하나의 원리로서 받아드리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론이 나타났다.[성장의한계]라고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입니다만, 이때는, 환경이란 것을 제약요인으로 보고 성장에 한계가있다고 한것입니다. 그런데 싸이버.월더의 탄생으로 그 한계가 없어지고 [다시 한번 고도성장이 가능하다]라고 하는 매우 낙관적인 의론이 요 4-5년사이에 미국경제계를 중심으로 나왔습니다.IT혁명으로 버추얼세계를 만들머로서 그 진보주의사관을 다시 한번 일보전진시키자라고 하는 경향이 보입니다.요는 20세기형의 진보는 끝났지만 또다른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짐으로서 인간의 진보는 영원히 지속한다는 것입니다.특히 요 5년동안 미국은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여태 기것해서 생산성의 상승율이 1.5%전후였던것이 3% 혹은 4%로 뛰고 이것이 IT중심으로 전개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이 제법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반년인가 일년사이에 IT버불의 붕괴가 일어난것입니다. 주가가 껑충껑충 뛰고 성장율이 오르지만 정말로 IT 란것이 인간사회의 무한발전의 환상을 다시 한번 구할수 있는 역할을 할수있을까 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이 생긴것입니다.그래서 IT관련주가 갑지기 굴려떨어지면 도데체 어떻게 될것인가………….. 마쯔이:현실로 지금 떨어지기 시작했지요. 사가기바라: 네. 그래서 요 1년 정도 가 워험합니다.셰계경제며 일본경제가 모두. 마쯔이:미국은 그걸 인식하고 있는겁니까. 사가기바라: 적어도 IT버불이 께질것이다 정도로는 인식하고 있는사람이 많습니다 마쯔이:그것에 대해서 무슨 대책이라도 강구하고 있는겁니까. 사가기바라: 이건 조금 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그럴경우에는 다른방법으로 활성화한다는 생각입니다.감세를 한다든가 금리를 내린다든가. 1998년의 세계공황을 넘으설수있었던 것의 하나로서 중앙은행이 매월 급리를 내렸기때문입니다. 다음번에 다시 하강국면에 설때는 다시 급리를 내린다던가 감세를 한다든다 해서 경제를 활성화한다. 이건 본질적인 해결은 될수없지만 당면한 해결책으로서, 말하자면 경제정책의범위안에서, 그렇게 하자고 생각하는것입니다. 마쯔이: 그건 마치 “파탄”이 올 때 그 “파탄”이 더 무섭게 되도록, 물리학에서 말하는 상변화에 수반하는 열, 잠재적인 열같은 것을 자꾸만 높여가는 것과 비슷한것이군요. 사가기바라: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의미에서는 요 5~6년간이 미국의성공이란, 말씁한데로 카다스트로피(재난)로 가는 잠재열량을 더 높여가는 것이군요. 마쯔이: 이건 좀 믿을수 없는 이야기같습니다만…………… 믿을수 없다고 하드래도 역시 그런 인식은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사가기바라: 나나 마쯔이선생과 같은 인식을, 미국사람들이 갖고있느냐 아니냐 는 모르곘습니다. 그들은 역시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 기술혁신이 경제를 크게 만들어 간다고, 혁명은 이제 시작했다고, 그리고 혁명의 초기라고. 미국사람이란 그럴 때는 잘 믿는 편입니다. 이런 인식은 아마 7~8활은 되지 않을까.이건 일종의 기술신앙임니다. 요전에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의장인 그린스반의 연설을 읽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균형이 잡힌 사람임니다만 연설속에 역시 [기술에의하여 경제파탄은 피할수있다]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석유가격이 오른 것은 지금의 IT 버불이 께지는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만, 인공위성등을 이용하는 석유탐사기술도 대단히 향상되였고 체굴자체의 기술도 높아젔습니다. 따라서 석유공급이 늘어날것이니 이 문제는 해결된다고. 단기적으로 보면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일은 있을수없는것입니다. 석유란것은 유한한 자원이지 않습니까. 그는 기술이 높아젔기 때문에 오히려 코스트가 내려간다고 말하고있습니다.이걸 읽었을 때 역시 그린스반 이라할지라도 혹종의 기술신앙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마쯔이: 지금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 있군요. 사이버.월더의 한계를 역시 석유라고하는 리얼.월더가 결정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사가기바라:석유가격의 상승이란 리얼월더에의한 사이버,월더에 대한 반격입니다. 바야흐로 사이바.월더가 모든면에서 잘나가리라고 생각했는데 리얼.월더에서부터 불이의 일격을 당했다. 유한한 자원입니다 라고 “한방 먹인 꼴이”이 되였지요. 이런 물리적인 한계를 생각지 않고 여태까지는 모두들 앞만 보고 낙천적으로만 생각해왔지요. 역시 리얼.월더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석유가격이 상승경향을 나타낸것입니다. 십몇달라 였던 것이 30달라까지 올라버렸지요. 리얼과 버추얼의 관계 사가기바라:그로발화 와 버추얼화 사이에서 국가의 기본 틀은 어절수없이 어느정도 붕괴하지않을수 없다. 동시에 분권화가 진행된다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안전적인 씨스템을 만들어 갈것인가 의 문제를, 가령, 마쯔이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마쯔이:그건 인간권의 구성요소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인터넷트 같은 도구를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란 구조가 태어 날것인가. 그때 반드시 살고있는 장소의 풍토 같은 리얼한 조건에 규정되여 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종래의 물의세계에서 규정되고있는 의미의 공동체와 버추얼한 것이 잘 맞아떨어저서, 그것이 유닛트가 되여 새로운 인간권의 내부씨스템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사가기바라선생의 이야기와 나의 문제의식이 서로 겹처저있어, 나는 국가론까지 포함한 인간관의 내부구조를 논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사가기바라:지금 세계적인 비정부조직(NGO)같은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분명하게도 지금의 IT기술이 전개함으로서 이런 일이 가능해 젔습니다. 그렇다면NGO같은 것을 어떻게 자리 매김해야 하는가 같은. 마ㅡ이:그런 이야기 가 됩니다. 우리들은 안개를 먹고 살수는 없어니까 살고 있는 장소 와 IT기술이 어떻게 접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해지는데 이것이 서로 떨어저나간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사이버”입니다. 그렇게 되면 실체적인 리얼.월더로서는 아무런 휘드백이 되는것이 없습니다. 사가기바라:그렇습니다. 그럼으로 구체적인 물리적인 공동체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가는가,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마쯔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태까지의 씨스템은 인터네트란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정보의 흐름에서도 그 스피-드가 지극히 제한된 상황안에서 이루어젔습니다.그건 그것대로 20세기까지의 인간권으로써 안전되여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지구씨스템에 있어서의 인간권의 경계조건이 확 바뀟다. 그안에서 어떤 유니트아래서 인간권을 만들어 가느냐 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가기바라: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계열]이란 씨스템이 있는데 이건 IT 기술이 전개되기전의 어떤 종류의 씨스템입니다. 그건 정보나 기술을 이전하는 씨스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제효율을 높인다. 그러나 여태 존속해온 이 [계열]이란 것은 정보를 매우 폐쇠적으로 보유하는 것이 전제가 되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정보화 의 세계안서는 그대로 유지할수 없게 됩니다. 마쯔이: 그래도 정보가 닫쳐있기 때문에 대단한 구심력이 있었지요. 그래서 매우 견고한 구조를 유지할수있었지요. 새 상사의 가능성 사가기바라: 맞습니다. 그렇치만 그 계열의 구조자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물리적 콘닥터(conduct:행위.지휘)라는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계열과 같은 것이 도데체 새로운 사회에 어떻게 변신해가는가. 전면적으로 그 자체를 무너터리지 않고 어떻게 바꾸어 가는가. 말하자면 상사란 것은 어떤의미에서는 정보의 인트미디티어리(중개인)이 였었습니다. 바로 이걸 가지고 장사를 해왔다. 마쯔이:상사란 것은 관계성을 만들머로서 성립해온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물과 소비자를 이어준다고 하는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21세기의 인간권에서 본다면 본질적인 기업형태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종류의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변질해간다면 매우 새롭겠지만 지금은 그 역인셈입니다. 사가기발:그래서 상사들이 지금 시름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인터넷트기술을 도입하여 어떻게하면 새로운 상사상을 만드는가 하는것입니다.인터넷트는 어디까지나 도구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관계성을 강화하는데 사용하면 되니끼.혹은 지금까지의 관계성을 어느정도 오-픈(open)하는데 사용할수 있을겁니다. 그런 여러가지 시도가 있습니다. 마쯔이:혹은 앞서 말한데로 신용이란 문제를 잘 활용한다든가. 요는 그걸 보증하는 것이 없어면 신용도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데 간여함으로써 오히려 상사란 것의 존재의의가 사실은 더 클수있는 가능성이 있을겁니다. 사가기바라:네. 그리고 상사란 어자피 금융업계에 참여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써 지금까지의 구조가 새로운 기술전개를 통하여 어떻게 바뀌가는가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올 오아 낫씽(all or nothing)으로 되있습니다. 마쯔이:그렇습니다. 리얼 과 사이버가 서로 끊켜있습니다. 사가기바라:올드.에코노미(old economy)는 전부 나쁘고 지급부터는 사이버다, 전부 인터넷트숏핑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젔습니다. 마쯔이:그래도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신용”않입니까.전자화폐라도 그걸 누가 보증하느냐 가 문제이지요. 따라서 그것이 없어면 결국 모든 것이 “공동환상”에 지나지 않는것입니다. 사가기바라:맞습니다. 그 상관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쯔이:지금까지는 우리들은 리얼한세계만이 인간권의 구조를 규정하는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권의 경계조건이 벌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갔다. 정보혁명을 경험하여 정보란 것이 무엇인가 를 알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이 우리들의 행동을 규정하기 시작한것마는 알고 있다. 그럴때 인간권의 내부구조를 규정하는 관계성안에서 리얼.월더가 어떻게 새로히 자리매김해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관계성의 부분이 인간권의 내부구조론으로써는 아직 전혀 인식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의론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파악을 해 보면, 대단한 본질적인 문제로 이 상황을 타게 하려면 자칫 “베이콘” “데칼트”이후의 요소환원주의적인, 혹은 이원론적인 방법론대신 어떤 새로운 것이 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이건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은 이직까지도 “베이콘” “데칼트”이래의 입장에 서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부정해버리면,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게 될수 있습니다. 사가기바라:그러나, 미국이란 사회는 이런 상대성,관계성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마쯔이: 이런 인식이 지금부터 계속 지배해가겠습니까. 사가기바라:아닙니다. 그것은 어데서 무너지리라고 봅니다. 그건 어떤의미에서 본다면 불가피하는것일 겁니다. 중,장기적으로 본다면. 아마 미국이란 나라는, 근대의 또께비입니다만, 또 다른 하나의 또께비였던 사회주의를 뒤따라 미국도 붕괴해가는 프로세스안에서 근대가 붕괴해간다는 일이 아마 일어 나리라고 생각합니다. <펴온이의 위글에 대한 소개> 위의 글은 일본의 석학들이 펄친 ‘세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써 ‘렌탈사상’이란 화두로 장장 1년에 걸쳐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월간지 ‘중앙공론’에 게제한 글을 나누워서 번역을 하여 나의 칼럼에 소개한 글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마쯔이교수는 이 씨리즈를 통하여 독자적인 세계문명의 향방을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내가 지금도 ‘문명론’이란 제목으로 칼럼에 올리고 있는 글의 전편에 헤당한다. 총 12회에 걸친 대담기사중 한편을 옮겨 본다. 독자들에게 이 대담기사가 세계의 문제를 여러가지 관점에서 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조규현
44 no image “남원 판소리 대학” 을 읽고
2757 2007-06-05
“남원 판소리 대학” 을 읽고 -조선일보 李圭泰코너(6338)에서 펴오다- [풍토학에서 푸른 산에 싸여 살아온 청산형(靑山形) 인간과 사막에 싸여 살아온 비청산형(非靑山形) 인간을 구분하고, 다시 청산형 인간을 지질이 노쇠하여 바위가 들쑥날쑥 드러난 골산형(骨山形) 인간과 가름진 흙으로 뒤덮인 육산형(肉山形) 인간으로 갈라본다. 곧 비청산형이나 골산형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종적(縱的)으로 성장시키는 권력지향을 하는 성향이 있는데, 청산형, 육산형 인간은 인생을 횡적(橫的)으로 풍요하고 살찌게 하려는 예능지향을 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육산이 지리산임은 알려져 있으며 그 청산의 기를 아끼기라도 하듯 감싸 지리산 남쪽으로 펼쳐진 땅이 남원평야이다. 조선조의 문현들에 팔도에서 단위면적당 소출이 가장 많은 옥답이 바로 이 지리산 자락이며 그 자락 복판을 기름지게 굽이쳐 흘려내린 것이 섬진강이다. 남원은 청산문화를 꽃피운 예향의 수읍으로 유독 이곳에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민중의 종합 예술 판소리가 기생하여 명맥을 유지한 풍토학적 자의가 알 만해진다. 이미 200여년 전 장안에 우춘대(禹春大)라는 소리꾼이 있어 한 곡조에 1000단의 비단이 쌓일 만큼 명성을 얻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판소리의 고향도 남원이요, 성장한 곳도 남원이다. 판소리가 소재인 춘향가 흥부가 변강쇠가의 배경이 이 남원 청산문화권에 있고 판소리 사설들이 이 남원 사투리이며 남원 사투리 아니고는 제 맛이 나지않는 이유가 이에 있다. 남원골을 꼭두로 섬진강 오른쪽을 따라 흐른 노래의 맥이 서편제요 왼편으로 흐른 맥이 동편제며, 판소리 중흥의 중시조 송흘록이 이 청산문화권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판소리 인구의 80%가 전라도 곧 남원문화권과 어떤 형태로든지 연관을 짓고 있다고 들었다.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각광받게 된 데는 그 문화적 가치 말고 인생을 풍요하게 살고 싶은 존재가치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흐름에 호응, 판소리의 지정학적 발생지이기도 한 남원에 판소리 대학을 세우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한다. 남원이 연고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판소리의 세계 중심이라는 원대한 조감도의 일환으로 추진해 나갔으면 한다. kyoutaelee@chosun.com <위의 기사에는 여러가지 함축이 베여있는 타상지석이 될 가락이 베여 있어 옮겨 보기로 한다. 한 지역문화의 발원과 색갈을 풍토학적 차원에서 풀이하고 있고 당연히 판소리는 토착적이며 인습적인 얼개와 양식의 틀을 갖임으로서 오히려 세계로 향한 보편화의 길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과 문화와의 관계란것도 이렇게 아주 긴 호흡으로 교직되어 발효순화되어 오면서 하나의 완결된 독특한 문화예술양식으로 발전해 온다고 보면 서구의 고전음악의 대부분이 특정지역의 민요나 민중의 피와 땀이 베여있는 가락에서 유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 올리게 한다. “백두-히말프로젝트” 도 따지고 보면,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특성과 문화 역사 그리고 히말라야산맥의 줄기에서 자생적으로 영위되고 있는 인간의 삶의 여러가지 모습과 둘려싸고 있는 자연적 환경과의 관계를 삺여 보아야 함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술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해 간다는 말을 한 안토니 가우디나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남국적인 열정과 지중해적인 빛과 아름다움 이슬람문화의 여향을 받은 스페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역사나 종교가 문화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사실과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다. 어떠한 거대담론일찌라도 그 품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속에서, 그를 둘려싸고 있는 자연을 보고 또한 자연속에서 인간의 삶의 문화적 뿌리를 재발견해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일께워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백두-히말을 있는 지정학적 지질학적 풍수지질학적 맥의 철학적 예술적 정립도 그 지역에 기생하고 있는 인간의 역사와 토착문화의 실증적 내지 체험적 발견을 전제하고서야 성립이 될 일로 보인다. 남원 판소리대학 이란 글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이다. 조규현.> 소나무 [2004/6/9 (23:27)]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면 당연히 그 토양과 사람이 연관 있을꺼란 생각을 합니다, 보면 지역 따라 상황 따라 풀 나는 종류나 자라는 행태도 각각 틀리거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43 no image 자연체험터 운영하는 교육실천가 조영순씨
2570 2007-06-05
자연체험터 운영하는 교육실천가 조영순씨 나길회 기자 소개글 소나무 갤러리의 게시판에 옮겨 실언 위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초여름의 싱거러운 초록색과 뜨거운 햋빛 아래 부는 바람과 같이 아주 시원한 소식입니다. 조영순씨는 나보다 나이가 서너살 위의 할아버지인데 그 귀중한 포도밭을 갈아 버리고 그곳에 아이들의 자연체험터를 만들고 독서와 자연체엄을 통해서 손자와 같은 이웃 아이들을 두루 돌봐 주시고 있어니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야 하겠습니다. 나도 늦으막하게 네살백이 손자를 보고 주말이면 아들 며누리와 함께 우리집으로 놀려 오는데 나는 이 손자와 함께 PC를 통해 재미 있는 노래도 듣고 함께 배우며 만화도 보지만 주로 밖앗에 나가서 놀이터에서 놀게 하던가 동내의 책방 동물가게 한강 고수부지 등을 방문하여 가능하면 자연을 체험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지나면서 오히려 내가 얻는 것이 많음을 알게되고 새로히 발견하게 되는 동심 세계의 분방함을 관찰하게 됩니다. 조영순선생은 아에 이웃아이들을 통체로 끌어 드려 이들을 자연속에서 뛰어 놀게 하고 그 위에다 독서의 귀중함까지 일께워 주고 있으니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기회가 다으면 한번 방문하고 싶습니다. 내가 도와 드릴수 있는 일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러한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아동을 위한 교육 활동이 지역사회의 호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는 현대도시생활이나 소비문화에 굴절되기 쉬운 아이들을 건전하게 만들 수 있는 저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소나무 갤러리의 계시미당을 통해서 이 인사의 글이 조할아버지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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