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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no image “나의 도서관”, 백종옥의 개인전을 보고
소나무
4613 2007-06-05
“나의 도서관”, 백종옥의 개인전을 보고 1. 지난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조흥갤러리에서 ‘나의 도서관’이란 주제 하에 백종옥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지난 9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90년대 후반에 독일로 가서 작년에 귀국 첫 개인전을 연 것이다. 필자는 그가 국내에 있을 때 한 때 주로 동양학 방면의 고전들을 섭렵하는 스터디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때 백종옥은 이마 푸른 문학청년 같은 순수함을 가진 지적인 청년이었다. 구질구질한 모습들의 자폐적인 증상이 심한 후배들을 대하다가 그런 그의 모습이 참 반듯해보였다. 그 때 백종옥은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우리 정체성에 대한 탐색과 상징에 대한 공부를 바탕으로 신화적 서사적 상징성이 강한 페인팅을 했다. 그 후 이번에 너무도 달라진(?) 그의 작업들을 보게 되었다. 이번 그의 작업들은 그간 그가 독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하며, 이는 아래 자전적 고백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무렵 갑자기 작업을 한다는 게 어쩐지 천하에 쓸모없는 짓처럼 생각되었고 내 삶과 밀착되지 않은 한낱 뜬구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더구나 내공을 쌓아 보겠다고 건너간 타국 땅에서 마주친 그 끝 모를 막막함은 그 곳에 내가 있어야 할 이유조차도 가물가물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되돌이표처럼 버티고 있는 작업에 대한 근본적인 권태와 회의였다. 그러나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은 ‘작업에 대한 권태와 회의’가 아니라 바로 그 권태와 회의로 인해 ‘나만의 언어’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상황은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한결같이 겪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우선 국내 미술대학의 교육과정이 너무 엉터리여서 대개 현대미술의 ‘현’자도 모른 채 유학을 가는 데다, 서구 유럽예술의 지역적 문화적 배경이 한국의 상황과는 너무도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는 끝내 이러한 회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 쪽으로 봐서는 초등 수준의 어학으로 간신히 학교만 마치고 귀국해 놓고는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다. 물론 적당히 한국적 이미지를 가공하여 서구 쪽에서 보았을 땐 이국적인 작업을 해서 주목 받고(?), 그래서 성공한 듯 가장하여 국내에서 행세하고 기반을 잡는 경우도 있지만, 정작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실패한 유학이기는 마찬가지다. 요컨대 숱하게 많은 인간들이 아까운 외화만 낭비하고, 자신의 삶만 탕진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나는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는 경우를 봤지만 유학이후 참으로 작업이 좋아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오히려 겉멋만 들어서 더 나빠진 경우도, 심지어는 아예 사람이 망가진 경우도 보았다. 2. 이번에 백종옥의 작업을 통해 그간의 유학생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자신이 처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출구를 자기반성을 통한 과거 작업과의 결별로부터 발견했으며, 그러한 모색 끝에 그는 일상적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체험들로부터 자신의 작업의 모티브를 찾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백종옥의 이번 작업은 주로 ‘책’이라는 오브제와 책이 있는 공간에 대한 탐색이다. 물론 그는 책과는 거리가 먼 대다수 미술 하는 사람들과 달리 국내에 있을 때부터 책을 탐독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있음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렇지만 유학을 가서 직면한 그 고독한 환경 속에서 책은 그에게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가진 듯이 보인다. 그래서 책을 모티브로 한 작업을 하게 되었고 이번 개인전을 통해 그 성과물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단지 책에 대한 관념적 탐닉은 아니다. 이는 책을 책이 아닌 ‘오브제’로 다루거나 내면적 심상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삼고 있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백종옥의 이번 작업을 통해, 그가 독일에 있을 때 자주 가던 도서관과 책을 통해 느꼈던 체험을 대할 수 있다. 때로는 그 책들의 단어들이 망망대해에 있는 ‘섬’처럼 느껴지고, 책 들 속의 현란한 언어로부터 벗어나고픈 심정들을 때로는 오브제와 드로잉과 설치작업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텍스트’다. 이런 차원에서 세상을 하나의 도서관처럼 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공간임을 드러낸 백종옥의 작업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이번 개인전 도록에 밝히고 있듯 백종옥의 ‘나의 도서관’에 이르는 길은 대략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책을 읽으면서 또는 책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내가 떠올린 심상들이나 책과 관련된 공간 속에서 경험한 풍경’, 그리고 두 번째는 책을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매개체로, 세 번째는 책을 통한 내면적, ‘영적 성숙’의 관한 이미지다. 3. 이번에 백종옥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업은 드로잉과 사진, 설치 작업이다. 그의 이번 개인전 작업들은 일견 여성적(?)인 작업으로 보일 정도로 어떠한 현란한 어법도 요란한 허세도 없다. 그는 이번 개인전에서 자신의 색깔을 담담하고 정제된 방식으로 표현했으며 그만큼 그의 작업은 정직하게 자신의 심정과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선 그의 작업에는 유학시절의 고독감과 우울감이 작업의 배면에 짙게 깔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점이 자칫 선이 가녀린 ‘서정적 감상성’으로 읽혀질 요소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차원에서 백종옥이 지향하는 소통 방식에 대해서는 향후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도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물론 설치작업이나 오브제 미술을 전시하기에는 전시장의 조건이 열악한 면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약정된 기호체계를 넘어 예술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백종옥의 지향성에 공감하며, 이야말로 한 예술가의 오랜 탐색의 여정이 도달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도록의 표지사진이자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우주수(宇宙樹)’ 자작나무에 대한 관심과 ‘자기화’는 그 단적인 예다. 4.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미술판은 약간 재미있는(?) 발상에다 뭔가 새로운 방법을 쓴 듯하면 마치 첨단을 달리는 현대 작가인양, 일종의 쇼맨십으로 작업을 하고, 또 이런 것이 통용되는 듯한 분위기로 치달았다. 물론 이는 당시 미술을 입지 구축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미술비평가들이 기획자로 나서면서 이런 부류들만 선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도나도 이러한 경향을 추종하게 되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대학생들까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80년대에 많은 미대학생들이 자신의 주제도, 또는 민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민중미술판’에 휩쓸렸듯. 지난 100여년의 서구 현대미술사가 방증 하듯, 미술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와 ‘부정’이라는 ‘통과의례’의 과정이 없는 작가는 그것만으로도 ‘사기꾼’임을 벗어날 길이 없다. 뒤샹 이래 모든 객관적 미학은 부정되었으며, 이후 미술은 원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술이 자신의 체험에서 출발해야 것은 분명하고, 또 거기서 자신만의 색깔을 갖게 되는 것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연 미술 본연의 가치는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 오늘 이 땅의 미술문화의 황폐함과 상관없이 미술이 추구하고 도달해야말 차원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백종옥의 지난 십여 년의 공부(德畜之) 과정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특히 성급하게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려는 조급증에 빠져 있는 젊은 작가들일수록 이러한 긴 호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백종옥의 이번 개인전을 통해 알 수 있듯, 오랫동안 공부해도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예술가로서는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향후 미술가로서 백종옥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미술가라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의 문제이도 하다. 2005년 12월 21일 도 병 훈 (작가) PS: 저의 이 글을 읽고 무조건 예술가는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거나 '유학 무용론'으로 읽으셨다면 아직 제가 글 쓰는 능력이 부족해서 오독하게 한 것입니다.
30 no image 추사예술의 현대적 가치에 대한 소고
소나무
6829 2007-06-05
추사 예술의 현대적 가치에 대한 소고 1. 올 가을과 초겨울에 걸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의 글씨와 그림 등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지난 10월말에는 용산에 새로 완공한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개인 소장품이라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은 과 가 개관 기념전에 출품되어 보게 되었고, 11월 초에는 과천에서 을, 그리고 11월 말경에는 경북 안강에 위치한 옥산서원玉山書院 주1)에서 추사가 쓴 현판(편액) 글씨를 보았다. 주2) 이 중에서 는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본 적이 있지만 대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주3) 옥산서원의 마당에 들어서자 맑고도 넉넉한 흰 바탕에 검은 색의 현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길이 약 200cm 폭 약 70cm 송판에다 돋을새김 한 대형 글자를 보는 순간 ‘역시 추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옥산玉山’ 두 글자는 기필起筆에서 송필送筆 수필收筆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서篆書처럼 쓴 해서楷書체여서 부드러운 먹색임에도 엄정하면서도 강경强勁했다. 이어 ‘서원書院’ 두 글자는 힘이 있으면서도 한결 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과연 추사의 장년기를 대표하는 글씨답게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주4)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처럼 한껏 개성 있는 필치를 드러낸 것도, 봉은사의 ‘판전板殿’이나 은해사의 ‘불광佛光’처럼 졸박한 강건미를 풍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추사의 몸의 기운이 한 획 한 획마다 집약되어 있어 천근의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마치 유배 이후 역경을 거치며 더욱 심화되는 훗날의 추사 예술을 예고하는 듯했다. 명말청초의 화가이자 화론가인 석도石濤,1642~1707는 “한 획이 만물을 포함 한다”주5)고 했지만 추사의 글씨 한 획 한 획이야말로 석도의 이 말을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겨울의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 옥산서원의 건물은 더욱 퇴락한 듯 보였고 공간적 구성도 병산서원이나 도동서원에 비해 협소했지만 추사 글씨의 힘이 서원의 전체 공간을 빛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옥산서원에서의 답사를 통해 추사의 대형 글씨는 실물을 직접 보아야 함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무엇보다 추사의 현판 글씨를 보며 그간의 추사에 예술세계에 대한 여러 해석이나 통념과 달리 이 땅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풍류風流’와 같은, 결코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우리 민족 특유의 은근하면서도 여유 있는 기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주6) 그간의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한 논의는 실제 체험보다 전통적 담론의 틀 속에서만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추사의 예술 세계를 좀더 근원적인, 즉 예술 본연의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 동양의 예술론 및 서예론에 입각한 학술적 분석을 넘어서 예술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모색하는 철학적 시각에서 추사의 예술이 담론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땅에서는 미술문화의 퇴행적 황폐화로 인하여 현대미술은 물론 전통미술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현대미술을 하는 이들은 전통 미술을 알지 못하고 전통예술에 관심을 지닌 이들은 현대를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추사의 예술 세계도 다만 몇몇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나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심 대상일 뿐 일반 사람들로부터는 소외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체에 대한 논의도 점획點劃과 결구結構와 장법章法, 혹은 곡직曲直 ․ 장단長短 ․ 태세太細 ․ 골육骨肉 ․ 종횡縱橫 등 전통적 서예의 담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한글이 상용화된 현실 속에서, 근대예술에 대해 본질적으로 회의함으로써 현대예술이 성립한 지 이미 오래인 시점에서 여전히 전통적 담론의 틀 속에서만 서예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추사에 대한 일반적 통념은 추사가 이른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라는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한데서 근거한다. 그래서 추사하면 대개 ‘문자향 서권기’라는 관념적 예술정신을 연상하며, 이 때문에 흔히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해 ‘학예일치’의 경지라 하지만, 이 전통 담론은 학문과 예술의 본질적 ‘차이’ 때문에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명제이다. 추사 예술의 본질적 특성은 취미로 ‘서예’를 하는, 이를테면 ‘정서 함양’이나 ‘문화생활’의 차원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다. 대중들이 갖고 있는 예술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이를테면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라든가, ‘개별자를 절대화한 천재적인 표현’ 인 것은 단지 통념일 뿐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 감상을 수동적인 행위로 생각한다. 그래서 감상활동을 그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관람객으로 찾아가서 익숙한 미적 가치를 관조적으로 향유하는 취미활동의 한 방식인 줄 안다. 추사가 그토록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원동력은 무엇이며, 나아가서 예술 본연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2. 현대의 해석학에 의하면, 사과 하나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그 인식주체가 지니고 있는 언어적, 개념적, 문화적, 이론적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주7) 이처럼 인식주체의 해석학적 기반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예술은 담론화 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만, 또한 끝내 ‘해석을 거부’ 주8)하는 특성이 있다. 미술사학자인 이동주李東洲는「완당바람」이란 글에서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해 하나는 서書와 화畵를 구분하지 않는 태도이며, 또 하나는 법을 찾지 않는 태도로 본다. 전자는 ‘본시 완당은 글씨와 그림을 구별하지 않는다. 멀리 당나라의 왕유와 같이 또 송나라 소동파의 전통을 따른 문인화의 정신을 따라 글씨의 정신과 그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주9) 는 말에서, 후자는 “난초 그리는 법은 또한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기미가 있은 연후에 얻게 되느니라. 또 난초 그리는 법은 가장 화법이라는 것을 꺼리느니 만일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可)하다”는 추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추사 예술의 이념을 설명한다. 이어 이러한 길이 없는, 즉 ‘무혜경無蹊逕의 경지’, 또는 문자향과 서권기의 미묘한 심의心意는 당대의 예원을 완전히 지배하여, 한국의 정서에서 커 나오려한 두 가지 조류, ‘진경산수’와 ‘속화’를 완전히 압도해버렸다는 것이 이동주의 추사관이다. 주10) 요컨대 추사가 예술의 이념형을 시대에 역행하는 청의 문인화에서 찾았기 때문에 한국예술은 그 정당한 발전을 저해 당했다는 시각이다.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유홍준은 김정희의 삶과 학문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다룬『완당평전』1, 2, 3을 지난 2002년에 출간하였다.『완당평전』은 추사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수합하여 총체적인 시각에서 추사의 삶과 학문과 예술을 탐색한 책이다. 특히 제주 유배 이후 이른바 ‘강상 시절’ 부분과 『완당평전』 3권인은 이 책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평전답지 않게 몇 가지 명백한 오류가 보인다. 주11) 무엇보다 추사의 그림에 대한 서술 부분은 예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예컨대 추사의 산수화를 평하면서 ‘손으로 그리지 않고 머리로 그리려니 그림다운 그림이 될 수 없었다’주12) 사실 ‘그림으로 말한다면 우봉은 완당 일파 중 최고의 화가이며 산수와 매화는 완당 보다 훨씬 잘 그렸다’주13)는 구절, 추사의 에 대해 ‘참으로 현대화가가 그린 작품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이 나타났다고 할 만하다’주14)는 구절들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림다운 그림’, ‘최고의 화가’, ‘현대화가가 그린 작품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과 같은 말은 추사가 지향한 예술 세계 주15) 는 물론 현대예술관에 비추어보아도 회화의 본질을 너무도 모르는 주관적 해석의 용어이다. 요컨대 그림의 세계란 근본적으로 잘 그렸다, 못 그렸다는 평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특히 ‘현대화가가 그린 작품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이 나타났다고 할 만하다’는 앞 뒤 문맥으로 보아 유홍준은 추사가 에서 여백 공간에 난 한 줄기만 대담하게 화면 가운데를 가로 지르게 그렸으므로 ‘현대’ 적인 회화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현대예술의 ‘현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현대’라는 말이 아니다. 즉 근대적 미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모험적 미술이 ‘현대’미술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미술은 특정한 양식을 지닐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유홍준 뿐 만 아니라 현대의 디자이너들이 흔히 세련된 의미로 쓰는 ‘현대적인 감각’ 이란 말은 사이비 미술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유홍준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에 대한 추사의 가혹한 비판에 대해 ‘당연히 역사적 비평으로 임해야 할 것을 완당은 동시대적 비평을 가하고 있다’고 보면서, ‘완당이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주16) 했다고 말하는 데, 이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관점이다. 모든 역사가 과거에 대한 현재의 인식과 해석이듯 모든 비평은 결국 동시대적 비평이기 때문이다. 즉 비평이란 어떤 대상을 모티브로 하던 현재의 비평 당사가가 쟁점을 설정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치열한 대안적 의식이다. 이광사에 대한 추사의 비평이 정당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이전의 예술에 대한 가혹한 비판적 도전이 없다면 어떻게 전대의 서체를 넘어선 ‘추사체’가 출현할 수 있었으며, 역사를 쉽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철저하게 고증학적 바탕을 둔 글을 쓸 수 있으며 주17), ‘진흥 이비고’주18) 같은 치밀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한 책을 쓸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이동주는 추사의 예술 세계에 대해 그 변모 과정과 그 독자성, 특히 만년, 특히 1852년부터 4년간의 과천 시대의 글씨와 그림들이 성취한 독자성을 간과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생성되는 예술 본연의 가치보다 추사 예술 세계를 당대의 시대적 조류라는 현상 속에 함몰시켜 버렸다면, 유홍준의 경우는 예술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틀’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동주와 유홍준은 공히 추사의 예술 세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추사의 서간과 그림 및 글씨들이 그 방계공간을 이루고 있는 중국의 서간이나 글씨들과 어떤 위상학적 공간을 형성하는지, 혹은 다른 인식론적 층위에서 말한다면 동양미술사에 등장한 미학적 담론들이 형성하는 위상학적 공간과 추사의 예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그 ‘진정성’을 드러내지 못했음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가령 추사의 난 그림은 송대의 정사초所南 鄭思肖,1241~1318이래 청대의 정섭板橋 鄭燮, 1693~1765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받았다.주19) 예컨대 추사의 주20)는 정섭의 에서 유래하지만 추사의 그림이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친다. 이처럼 그 상관관계와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주21) 사실 추사는 25세 때 자제군관으로 청나라 연경에 겨우 몇 달을 머물렀다. 물론 이 연경에서 추사는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남으로써 서예에 대한 종합적 시각을 갖게 된다. 이들을 통해 남북을 아우르는 글씨에 대한 안목을 자각한 것이다. 주22) 알다시피 이후 추사는 남파의 조종격인 왕희지의 법첩을 모본으로 삼던 종래의 글씨를 배격하고 종요鍾繇․ 삭정索靖 ․구양순歐陽詢 등의 북파를 지지하여 이러한 전통을 잇게 된다. 이후 70평생 동안 ‘마천십연 독진천호磨穿十硏 禿盡千毫’,주23) 즉 붓 천자루와 벼루 열 개를 모두 닳아 없앤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추사의 예술 세계는 단번에 쌓아올린 예술세계가 아니다. 주24) 3. 추사는 ‘서화일체론’에 입각하여 글씨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 추상성을 그림에서도 구현했다. 그래서 구체적 형사形似를 배제하고 대상의 본질만을 명료하게 추출하여 회화미를 재구성’주25) 하였다. 따라서 추사의 글씨와 그림은 그 어떤 이념적․양식적 틀조차 무색할 정도로 먹의 질료적 특성과 붓질의 기세가 두드러진다. 특히 추사 만년의 그림과 글씨들은 현대드로잉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수묵의 농담을 생생하게(거칠게) 표출한다. 이것은 먼저 붓보다 먹의 질료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른바 농담활삽農談滑澀; 짙고 옅음과 매끄럽고 꺼칠함 이 바로 이 먹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추사의 주26)이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추사는 ‘먹 쓰는 법’과 ‘붓 쓰는 법’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이런 논지에서 추사는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이 먹 쓰는 법을 모르고 붓 쓰는 법에만 신경을 쓴다고 비판한다. 추사 앞 시기에 유행한 동국진체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대한 비판의 핵심도 같은 문제였다. 추사의 서예 및 그림의 세계는 먹→종이→붓으로 요약될 수 있다.주27) 이 때문에 추사의 글씨와 그림은 남다른 점이 있다. 가령 무조건 먹을 진하게 갈아서 그것도 틀에 박힌 글씨체로 요즘의 화선지처럼 흡수성이 강한 종이에다 쓰면 똑 같은 톤이기 때문에 답답하거나 무미건조한 글씨가 될 수밖에 없다. 추사 글씨는 아무리 먹을 진하게 갈아서 강밀하게 썼어도 농담의 변화가 있다. 그 이유는 주로 ‘표면이 매끈한 종이’주28) 로 인한 반발력 때문이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는 먹빛이 매우 맑으면서도 농담의 변화가 풍부하며, 글씨의 가장자리도 면도날로 도려낸 듯 예리하다. 그만큼 리드미컬하게 쓴 붓 자국이 선명하고 생생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글씨는 오른 쪽의 ‘조’자는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연하며, 이에 비해 가운데의 ‘화접’은 진하지만, 제작 경위를 쓴 왼편의 글씨는 연하게 써서 절묘한 변화와 균형과 표현의 두께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같은 글씨나, 나, 같은 글씨를 보면 한 획 한 획이 리드미컬한 강약에 따라 농담이 달라 그림 같은 인상을 준다. 추사는 먹을 팥죽처럼 되게 갈아 마치 좁쌀이 도돌도돌할 정도의 초묵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종이나 먹의 특성상 농담활삽의 이치는 원용된다.주29) 바로 이러한 선을 위주로 한 변화는 추사의 예술 세계의 가장 독특한 개성이다. 수묵의 번짐, 이른바 발묵의 선염 효과는 중국에 있어서도 고온다습한 남방의 풍토에서 나오며, 일본의 기후도 다습하기 때문에 이처럼 번짐의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특성이 있다. 반면에 이 땅의 풍토적 특성은 ‘화강암 암산과 같이 강경한 골기와 푸른 하늘과 같이 삽상한 기운과 사계의 변화’ 가 뚜렷해서 우리의 전통예술, 그 중에서도 서화는 ‘강경명정剛硬明正한 다변성’주30)이 두드러진다. 4. 추사예술 세계의 진면목은 역시 유․불儒彿을 아우르는 굉박심연宏博深淵한 학문과 ‘첩帖’과 ‘비碑’의 융합을 통한 ‘자기화’다. 즉 전서 ․ 예서 ․ 해서 ․ 행서 ․ 초서 등의 서체를 한 데 섞어 마침내 독특한 예술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추사 예술의 융섭성과 종합성은 이 땅에서 성취된 주요 학문과 예술의 두드러진 특성이기도 하다. ‘반야’와 ‘유식’ 사상을 융합한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이 그러하고 유․불․선이 통합된 ‘풍류도’와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 그러하다. 이는 고려청자나 조선 백자도 마찬가지이며, 남종화의 부드럽게 스미는 임리淋漓함과 북방의 강골强骨 기를 동시에 구현한 겸재 정선의 회화도 그러하다. 요컨대 추사는 중국에서 생겨난 모든 서체를 종합했지만 또한 전형화된 글씨를 거부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전통에 빗대어 자기세계를 구현할 뿐이다. 사실 이 땅의 유구한 문화예술이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문화 예술을 능가하는 경우도 많은 것은 이처럼 문명을 종합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역량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추사의 글씨가 중국이나 일본의 서도(書道)와 다른 것도 같은 맥락이며, 나아가서 한국의 사상이나 문화적 특성이 다른 것도 한반도의 특유의 역사성과 유전적 기질의 융합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추사가 아무리 부인해도 평생 몸담고 숨쉬고 살았던 곳은 이 땅이었다. 추사는 비록 당시 청의 학문과 예술을 적극 수용했어도 바로 이 땅의 풍토적 특질과 자신의 체험을 자기화한 것이다. 이는 왕희지 이래 주로 중국인들에 의해 구축되고 전유되어 온 ‘서(예)법’은 한 중 일을 통틀어 추사에 와서 대단원을 이루고 또한 극복되었음을 통해서도 능히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질 들뢰즈 주31) 의 시각으로 보면 법이 없음을 법으로 삼는, 즉 ‘무법의 법’을 추구한 추사의 서예는 탈주의 선, 즉 ‘클리나멘’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추사의 글씨에서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힘에의 의지와 태도를 본다. 내가 추사 예술 세계를 보고 감동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이는 예술 본연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5. 마르셀 뒤샹 이래 현대예술가들은 근대 이후 통념화된 미적 규범과 우상적 가치들을 원천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예술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후 새로운 관객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이 현대예술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 작품의 가치는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낸 그 가치를 파악하려는 관객과 만남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추사의 예술 세계도 예외일 수 없다. 추사의 예술세계도 궁극적으로는 추사의 예술의 ‘현재화’와 ‘자기화’ 속에 그 가치가 드러난다. 예술의 가치는 창작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가치를 알아주는, 즉 공유하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특성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보여 준 아도르노도 작품은 해석을 통한 이해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고 말했듯, 이런 문맥에서도 예술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며 느낌의 세계이다. 요컨대 예술은 크게 보면 창작, 즉 표현활동과 이에서 촉발된 담론이라는 두 축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6. 나는 추사 선생 친필은 단간영묵斷簡零墨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한 때는 추사 선생의 탁본 한 점이라도 꼭 갖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도처에 산재한 추사의 진적이나 그 흔적을 볼 수 있고, 예술의 가치란 그것을 알아볼 수 있고 감응할 수 있는데 있기 때문이다. 추사가 남긴 적지 않은 ‘간찰簡札’들에 잘 드러나듯, 추사 역시 한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간이다. 즉 삶이 있고 예술이 있다. 그러므로 추사의 학문적 세계와 ‘서예’라는 전통적 예술 장르를 통해서만 추사의 예술을 논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배제하는 원인이 된다. 추사가 남긴 글들은 추사의 예술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텍스트임에 분명하지만 추사가 남긴 예술세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세계와 예술 세계의 영역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예술의 관점에서도 추사 예술의 독자적 가치는 그가 남긴 글씨와 그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를 인식하는 순간에 생성되는 것이다. 즉 추사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의 용묵법과 필묵법에 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에서 촉발되는 느낌과 생각 속에 존재한다. 결국 예술의 가치는 만남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그림을 보는 방법을 배우고 안다는 것은 어떤 규칙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규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 한다”주32)고 한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술세계란 우리 삶을 깊고 풍요롭게 해 주는 느낌과 자각, 그 정신적 가치로서 비로소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사를 그저 우리나라가 낳은 불세출의 서성書聖으로 우러러 보거나 혹은 시대착오적 문인화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추사가 성취한 예술 세계를 통해 삶과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2005년 12월 1일 주1)옥산서원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년)에 지어졌으며 1574년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서원 주위에는 자옥산, 도덕산, 화개산, 무학산이 둘러싸고 증심대, 관어대, 세심대 등 아름다운 자연을 끼고 있다.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수도修道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는데, 특히 계곡을 볼 수 있는 ‘살창’과 ‘계정’이 유명하다. 주2)구인당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의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쓴 것이다. 주3)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봉은사에 있는 판전 현판 글씨를 비롯하여 간송미술관, 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동산방 화랑에서의 전시회, 추사 글씨 탁본전, 영천 은해사 현판 글씨 등 추사 관련 진적을 보러 숱하게 보러 다녔지만 이번에 아직도 보지 않은 진적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추사 예술세계의 폭을 느낄 수 있었다. 주4)물론 추사의 현판 글씨로는 추사가 세상을 뜨기 3일전에 썼다는 현판인 ‘판전’이나 은해사 불광각에 걸려있던 현판 글씨인 불광이 최고라고 본다. 그러나 판전의 경우 글씨에 새로 금칠을 해 놇았기 때문에 실물을 보면 그 느낌이 판전을 탁본한 글씨를 보는 것만 못하다. 주5)夫一畫, 含萬物於中 『苦瓜和尙畵語錄』(石濤畵論),「尊受章 第四」 주6)추사가 쓴 옥산 서원의 진면목을 더욱 실감한 것은 강당 안 쪽에 붙어 있는 이산해가 쓴 현판을 보고 나서였다. 이산해의 현판 글씨도 매우 개성 있는 글씨였으나 글씨에 비해 여백이 협소한 느낌이었다. 주7)이정우, 담론의 공간, 민음사, 1994, 227-228쪽 참조 주8)수전 손택(Susan Sontag),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19-35쪽 참조 주9)이동주, 『우리나라의 옛 그림』,「완당바람」, 학고재, 1995, 332쪽 주10)유홍준 , 앞의 책, 325쪽 주11)이동주, 앞의 책, 333-334쪽 주12)초판 『완당평전』에서 볼 수 있는 잘못된 기술은 다음과 같다. 먼저 완당평전 1권 224쪽의 도판 사진으로 실린 죽향의 는 난초가 아니라 ‘나리’다. 333쪽의 를 성난 다람쥐로 기술한 부분을 꼽을 수 있다.(이 부분은 개정판에서 교정됨) 그 다음으로는『완당평전』제2권 544쪽에서 영천 은해사 말사의 현판인 ‘십홀방장十笏方丈’이 김정희의 글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김정희의 글씨가 아니라 만파석란萬波錫蘭 스님이 쓴 것이다.(『추사글씨 탁본전』도록,과천시․한국미술연구소, 2004, 68쪽 참조) 그리고 추사 글 중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의 협서 부분은 청대의 화가인 장경(張庚,1685~1760)의『포산논화浦山論畵』중에 나오는 내용을 글자만 몇 글자 바꾸어 거의 그대로 쓴 것이다.(葛路저, 강관식역, 『중국회화 이론사』, 미진사, 1990, 324쪽 참조) 또한 에 대한 논의 중 오른쪽 두 번째 발문인 ‘초서와 예서의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제하다’라는 구절도 그 출처는 동기창의 『화지畵旨』이지만 밝히지 않아 추사의 글인 양 오해하게 써 놓았다. 주13)유홍준, 앞의 책, 315쪽. 주14)유홍준, 앞의 책, 298-299쪽 주15)유홍준, 앞의 책,594쪽 주16)추사는 이렇게 말한다. ‘품격의 높고 낮음은 그 솜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에 있는 것’이니... (阮堂先生全集 卷六) 주17)추사는 ‘침계’란 글을 쓰려고 했지만 옛 한나라 비(碑)에 ‘침’자가 없어서 30년이나 금석문을 연구하여 쓴 사람이다.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면 이런 일화가 있을까? 주18)김정희 저, 최완수 역, 『추사집』, 1976, 188-219쪽 주19)『난맹첩』21~22폭, 최완수, 『秋史精華』, (지식산업사, 1983), 243-244쪽 참조. 주20)난맹첩』, 제3폭, 지본수목, 22.9×27cm, 간송미술관 소장. 주21)백인산,「추사화파와 사군자」,『추사와 그의 시대』,(돌베개, 2002), 293-295쪽 참조. 주22)추사는 연경에 다녀 온 뒤 글씨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라진다. 이는 제주 유배시절 제자인 박혜백에게 글씨를 배운 내력을 밝힌 다음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지만 스물네 살에 연경에 들어가서 여러 큰 선비들을 뵙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 발등법(撥鐙法)이 입문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가락 쓰는 법, 붓 쓰는 법, 먹 쓰는 법으로부터 줄을 나누고(分行), 자리를 잡고(布白), 과(戈)나 파(波)와 점과 획 치는 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는 법과 크게 달랐다. 그리고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 금석문자가 수 천종이 되니 종요나 삭정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봐야 한다고들 말했다. 그래서 비로소 그 처음부터 (글씨가) 변천되어 내려 온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완당선생전집(권8)』,「雜識」(2005년 과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완당전집(三)』에는 591쪽에 전문이 실려 있음) 주23)추사가 만년에 쓴 에 나오며, 금년 가을에 과천에서 있었던 추사의 작은 글씨전에 전시되었다. 주24)이동국은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크게 4시기로 나눈다. 즉 35세 무렵 이전의 첩주(帖主) 시기〔1기〕, 35세에서 45세 무렵까지의 첩주비종(帖主碑從) 시기〔2기〕, 45세에서 63세까지 비주첩종〔碑主帖從〕시기〔3기〕그리고 63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71세 작고 때까지의 비첩혼융(碑帖混融)〔4기〕시기다. 주25)최완수, 앞의 책, 114쪽 주26)김정희, 최완수 역, 앞의 책, 73-76쪽 참조 주27)‘서가에서는 먹을 첫째로 삼는다. 대체로 글을 쓰는데 붓을 쓴다는 것은 곧 붓으로 먹을 칠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종이와 벼루는 모두 먹을 도와서 서로 발현시키는데 쓰이게 되는 것이다.(書家墨爲第一。凡書之使毫、卽不過使毫行墨而已。)’, 김정희 앞의 책 73-74쪽. 주28)가 그 대표적인 예다. 주29)‘강경명정’은 최완수가 한 말임. 주30)그 중에서도 ‘냉금지’는 더욱 매끈하다. 주31)20세기 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질 들뢰즈는 사유의 주요한 세 양식들, 예술, 과학, 그리고 철학을 삶을 변형시키는 역능들로 간주했으며, 철학은 새로운 개념들을, 예술을 통해서는 새로운 지각들과 감응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주32)리오넬로 벤투리, 정진국 옮김, 『회화의 이해』, 눈빛 2002, 273쪽
29 no image 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비평의 참된 가치
소나무
5837 2007-06-05
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비평의 참된 가치 1. 일전에 수행평가로 학생들에게 몇 권의 현대미술 관련 책을 정해주고 일종의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책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재구성하여 쓴 것이 아니라 글의 상당 부분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문장을 그대로 베껴 놓고서는 자기 글인 양 제출하였다. 명백한 ‘도용’이요 ‘저작권 침해’였던 것이다.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는 세칭 비평준화 지역 명문교로서 학생들 거의 대다수가 중학교 때 전교 1% 안에 드는 학생들이었으며, 고교를 졸업할 때는 이른바 일류대라는 S대, Y대, K 대는 물론 요즘 학생들이 선호하는 의․약대 등에 거의 대다수가 거뜬히 합격하는 학생들이다. 사실 이들은 입시위주의 교육만 아니라면 훨씬 더 잠재적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잘못된 교육 현실 때문에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교육현장에서 예사롭게 관행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나라의 교육적 현실에서는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니 대학에서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남의 글을 적당히 그럴듯하게 ‘짜깁기’ 한 리포트를 제출하여 학점을 받고, 이 연장선에서 또한 실용적인 취업준비 공부나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실상은 우리 교육이 얼마나 왜 무엇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알게 하며,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 바로 ‘지적 정직성’의 결여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없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현행 교육의 근본적 문제는 ‘지적 정직성’에 대한 불감증은 물론 정형화된 상투적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노예적 능력만을 길러 오로지 시험을 잘 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 잘하는 모범학생일수록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힘)’이 부족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문제 있는 인간들을 길러내는 잘못된 관행이 지난 수십 년간 교육 현장의 실상이다. 예컨대 배운 사람일수록 한 술 더 뜨는 윤리적 파탄 현상이나 여전히 인문학계를 지배하는 ‘학문의 식민성’도 이런 시각으로 보면 능히 수긍이 가는 일이 아닌가? 2. 이번에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에서 메타 비평의 대상으로 도마에 오른 장본인들도 무엇보다 ‘지적 정직성’은 물론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결여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는 그간 우리의 비평 글들이 쟁점 부재의, 즉 비평 본연의 본래성에서 너무도 벗어나 있고, 현대미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논리적 정합성 차원에서 한심한 수준임을 통해서도 능히 알 수 있다. ‘지적 정직성’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결여는 비단 비평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필자는 대학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막연하고도 낭만적인 생각에 스스로 도취되어 자기성찰은 결여된 채 ‘헛짓’을 반복하는 인간들을 미술계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자들일수록 예술이 무슨 천재적 영감의 소산인 줄 아는 한심한 인간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우리 미술인 중에는 폐가를 빌린 농가에서 극빈의 생활을 영위하며 작업하든 별장처럼 호사스런 공간에서 작업하든 이런 미망에 사로잡힌 자폐적 집착 환자들이 너무도 많다. 또한 우리 미술계에는 언제나 더듬이만 발달한 곤충처럼 발 빠르게 해외의 동향만을 예의 주시하여 ‘유행하는 방식’을 그럴 듯하게 감각적으로 선점 차용하거나 모방하고서는 자신의 작업인양 가공하는 기회주의자들도 적지 않다. 사실 지난 90년대 이후 이른바 잘 나가는 듯이 행세하는 자들은 대개 여기에 속하는 부류들이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스스로 생각하는 힘으로부터 가능한 현대미술에서의 비평적 담론의 가치, 현대미술의 가치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성립하는지와 무관함은 공히 마찬가지다. 3. 지금의 미대 재학생들의 경우도 이런 양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가 출간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었음에도 미대 재학생들이 가타부타 미미한 반응조차 없는 것은 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이는 미대생들이 문제의식은커녕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즉 의식수준을 방증 한다. 첨예한 문제의식으로 또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어느 시기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도전적이어야 할 미대생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한들, 부질없는 ‘헛짓’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이처럼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 그들 앞에는 암울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실상은 미술대학이 심각한 교육적 위기 상황을 넘어 썩어도 너무 썩어 있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한다. 지난 수십 년 간 이러한 양상이 현대 국내 유수의 미술대학 뿐 만 아니라 거의 모든 미술대학의 엄연한 실상임에도 당사자들만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곧 화단 선배가 되는 현실 속에 주눅 든 채, 맹목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미대 교수들이 대개 정상적으로 교수가 된 자들이 아니니 당연히 실력이 없고, 그러니 오직 교수라는 권력과 권위로 자신의 스타일만 제자들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조교와 시간강사 노릇하다가 연줄과 돈으로 ‘교수’직에 채용되었음에도 공공연히 대형미술학원과 기묘한(?)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된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도대체 무얼 배울 수 있다는 말인가? 4. 물론 예술이 언어적 인식 너머, 혹은 언어 이전의 영역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은 부단하고도 치열한 성찰, 이를테면 언어적 인식과 어떠한 기존의 가치도 ‘무화’시키는 근원적인 자유의 세계로 진입하지 않는 한 영영 자각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무엇보다 예술이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로부터 ‘참됨’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말이 전도된 비평계의 행태는 ‘나’를 반성케 하는 ‘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번 오상길 선생의 메타비평은 혹자들이 그릇된 편견으로 오해하듯 비평계의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의 차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바로 ‘나’자신의 문제이며 미술 그 자체의 문제다. 현대예술과 현대의 비평이 주는 가치 있는 자각은 결국 부단하고 치열한 자기반성의 과정 없이 무엇을 성취하려는 것 자체가 넌 센스라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론이 시사하듯 나의 삶은 언제나 전체 속의 삶이다. 그러므로 더불어 검증하고 공유하는 담론으로부터 미술의 가치는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반성과 대화를 통한 ‘차이’ 있는 담론이 풍성할수록 미술의 가치는 심화되고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뜻있는 이들이 기꺼이 담론에 참여하고 소신껏 자기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5년 12월 15일 광명에서
28 no image 한국 현대미술 메타비평-‘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를 읽고
소나무
30244 2007-06-05
한국 현대미술 메타비평-‘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를 읽고 1. 최근『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란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는 오상길. 그는 지난 수년 간 현대미술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약 1만 2천여 종의 방대한 자료들과 53분의 작가 및 평론가 대담을 수집하고 채록했다. 주1)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 첫 번째 책이 이번에 출간된 ‘비평가여 내 칼을 받아라’란 책 이다. 그 어떤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 온 평소 풍모답게 비평의 오류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의는 단지 특정 세력을 겨냥한 질타의 차원에 있지 않다. 책 서두의 ‘이 책의 겉표지를 열어보게 될 독자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표명하듯, 저자는 “도대체 미술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7쪽)라는 현대미술 본연의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화두를 전제로 현대미술을 “미술을 회의하는 미술”(8쪽)로 정의하면서 논지를 펼친다. 사실 이 책의 주된 비평 대상은 한국 미술계의 메이저리티-대학교수이자 미술평론가이고 미술사가이며 무슨 학회에 소속된 지위로서 기득권을 갖고 대형 전시회를 기획해왔다는 뜻에서-들인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의 글이다. 이를테면 엄연히 다른 영역인 ‘미술’과 ‘미술제도’의 차이 주2) 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인 및 대중들의 순진함과, 혼란스러운 문화적 환경과 틈새를 기회로 삼아 거짓된 진술을 역사의 진실인양 버젓이 기술해 온, 요컨대 ‘전문역량’에 있어서나 ‘윤리의식’에서나 함량미달인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이 그간 어떤 비평적 오류를 저질러 왔는지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비평을 대상으로 다시 비평하는 것이 미술을 잘 모르는 이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이제 미술의 중심은 그 중심이 예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과 비평을 공존시키는 담론의 문화 속에 있고, 예술을 바라보고 공유하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자리를 잡는”(12쪽)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가는 물론 모름지기 모든 글 쓰는 이들은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적 정직성’이 결여된 글은 진정한 가치의 탐색을 교란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친다. 다시 말해 잘못된 비평은 우선 당대의 활동과 작품이 지닌 역사적 사실을 은폐할 뿐 만 아니라 그 진정한 가치를 전도시켜 버리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사이비 비평은 ‘과연 무엇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쟁점, 즉 화두일 수 있는가’라는 담론의 형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저자의 문제 제기에 대해 당사자들이 계속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해도 이들에게 면죄부가 발부될 수는 없다. 현대미술의 본질적 특성상, 또한 향후 바람직한 미술문화의 새 터전을 닦기 위해서도 이 책의 저자가 제기하고 문제는 본인들이 회피한다고 유야무야될 사안이 아니다. 인간 사회는 통념화된 기호들의 체계와 분류의 범주들, 제도가 부여한 자리와 지위(位)로 구성된다. 그래서 이런 틀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비판 정신의 진정한 함의를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진의를 독해할 지적 능력이 결여된 자들의 ‘매도’는 생산적인 논쟁을 외면하는 비열한 침묵보다 더 한심한 소인배들의 못난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2. 제1장은 ‘한국의 현대미술, 무엇이 문제인가?’를 화두로 해서 궁극적으로 한국현대미술의 ‘현대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이 장은 1930년대 이후 “미술사의 기본적인 원칙과 방법을 벗어나, 임의로 조정된 ‘선택’과 ‘집중’의 정치학을 통해 엉터리로 구성”(34쪽)해 온 데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전제로 한국현대미술의 ‘현대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글이다. 제1절에서 저자는 대개의 미술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이 우리 미술 문맥을 서구의 역사 구분 개념 틀인 ‘근대’와 ‘현대’로 설정하여 미술 자체의 쟁점과 이슈 그리고 작품에 관한 문제는 도외시 한 채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을 근거로 그 기점을 논의한 데 대해 의문과 물음을 던진 후, 제2절에서 구체적으로 이러한 물음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많은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이 ‘추상’양식의 출현을 한국미술의 현대성의 기점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는 그 누구도, 어디에서도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서성록과 윤진섭이 1930년대의 미술을 ‘현대의 이전 단계’ 혹은 ‘근대’로 분류하면서, 그 이유를 일본 미술계와의 긴밀한 연관성과 활동의 소극성으로(집단화가 아닌 소수의 개별적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당시의 미술을 선도하는 주류가 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데 대해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이를테면 일본 미술계와 연관되면 ‘근대’이고 서구와 연관되면 ‘현대’라는 식의 논리는 수용의 방식에서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리고 현대의 기점으로 잡은 집단화 운동, 즉 ‘패거리 지음’은 오히려 비윤리적 반문화적 풍조의 뿌리라는 점에서 미술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44-45쪽) 그리고 “미술 자체의 쟁점과 이슈 그리고 작품 단위의 분석이나 연구의 전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한심한 점으로 본다.(45쪽)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그간 대다수의 미술 평론가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국현대미술의 기점을 1956년에 있었던 《4인전》의 반국전 선언과 1957년에 줄지어 창립을 보았던 다섯 미술단체들의 출현, 그리고 비정형 회화의 집단적 운동 등으로부터 기술하여 온 것에 대해 여러 객관적 정황이나 당시에 활동했던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윤진섭이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을 기존의 1957년설에 대응하는 1956년설로 제시한 것에 대해(58쪽) 그 타당성과 신빙성이 없음을 김병기와 이구열, 정점식 등 당대에 활동한 작가들과 비평가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밝히고 있다.(61-64쪽) 그러나 이 장에서 저자는 무엇보다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식 논란으로 핵심적인 쟁점들, 즉 “무엇을 한국미술로서의 ‘현대성’으로 볼 것인가”라는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질문이 제기되지 못했음을 심각한 문제로 본다. 다음으로 “한국의 비정형 회화 미술과 운동에 대한 비평적 오류의 범례”란 글은 특히 오광수를 비롯한 일부평론가들이 한국의 비정형 회화를 ‘뜨거운 추상’으로 60년대 후반의 추상을 ‘차가운 추상’으로 규정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요컨대 이 양자는 같은 작가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전조 현상’, 또는 내적 필연성 없이 변모하기도 해서 미학적 차원에서 대응적 관계가 될 수 없는 터무니없는 논리임을 밝힌다. 즉 단지 양식만 수용되었는데 어떻게 ‘뜨거울’ 수 있고 ‘차가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69쪽) 제3절은 ‘삭제 혹은 배제되어 온 진술들’로, 정규와 김병기의 글을 통해 1950년대 당시의 정황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김병기의 당시 글과 최근 대담을 통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또 알려진 바와는 전혀 다른 1950년대 미술의 실상을 소상히 언급했다. 제4절은 ‘한국 비정형 회화에 관한 의문들’로 저자는 이 부분에서 1950년 후반과 60년데 초반의 비정형 회화에 대해 일곱 항목으로 나누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는 왜 비정형 회화가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대응하는 대안 미학인지, 둘째는 현대미술 자생론에 대해, 셋째는 당시 비정형 회화의 출현이 자생적이었다면 어떻게 네 작가가 동시에 서로 유사한 추상양식을 보이게 되었는지, 넷째 당시 4인 전 작가 중 한 작가인 박서보만이 자생론을 주장하여 나머지 작가들과 배치되는 점과 또한 왜 하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유사한지, 다섯째, 박서보의 주장대로라면 다른 작가들은 박서보를 추종한 것인지, 여섯째, 박서보가 자신의 독자적 양식이 다른 작가들의 집단적 따라하기로 인해 스스로 소멸하게 된 상황에 대해 왜 단 한번도 반박 저항 해명을 하지 않았는지, 일곱째, 비정형 회화 양식이 갑자기 집단적으로 등장하고 집단화에 대한 양식의 정형화에 빠져 포화 상태에 이르러 전조현상이나 포스트 현상이 없이 느닷없이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으로 변모하게 된 이유. 특히 박서보의 경우 왜 수시로 미학적 자기부정을 반복하며 변모하는지 등이다. 제5절은‘ 한국 현대미술관의 전시를 통해서 본 문제들’로 1979년《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미술협회가 공동기획한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과 2000년의《한국현대미술의 시원》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에 맞지 않은 전시를 비판한 글이다. 제6절은 ‘미술사 진술 오류의 범례들’로, 먼저 서울대 교수인 김영나의 『20세기 한국현대미술』의 부실성과 오류를 기술한다. 이 글에서 저자는 김영나의 모더니즘에 대한 피상적 이해, 무책임하고 몰가치 한 논리로 한국의 미술을 서구미술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오류, 미술운동과 미술 그 자체를 동일선상에서 파악하는 오류, 무엇보다 이러한 오류가 묵인되는 비평계의 불감증과 비윤리성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어 저자는 김홍희의 미술사관과 행적에 대해 비판한다. 김홍희는 2003년에 출간한 자신의 『한국화단과 현대미술』에 실린 「한국현대미술의 전환」이란 글에서 20세기 후반의 한국미술을 크게 3차례(1950년대 말의 미술운동을 ‘앵포르멜 운동’이라 하고 1980년대 미술을 ‘민중미술운동’, 1988년 이후의 미술을 포스트 모더니즘미술의 전파와 ‘국제화 운동’이라고 말함)의 운동으로 규정했다. 즉 김홍희는 한국현대미술사를 ‘운동’ 전환점을 축으로 한 변증법적 발전의 역사를 전개하고 있다’는 논지로 기술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선 문화나 예술이 원천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김홍희의 논리적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80년대 미술을 민중미술로 그것도 “한국초유의 자생적 미술”이라고 말하는 이유, 다시 말해서 김홍희가 말하는 자생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어 한국미술의 포스트모더니즘 상황이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상반된 이즘들을 화해로 공존시키는 통합적 국면’을 논거로 삼아 “어떤 맥락에서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 상반된 이즘이라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어 문화의 ‘원전성(originality)’이라는 근원적 물음을 제기하면서 ‘트렌드 스타일’을 유행시킨 장본인의 한사람으로서 ‘국제병 환자’ 같은 그녀의 행보를 비판한다. 제7절은 ‘1970년대 단색조 미술의 비판적 검증’의 장으로 김복영, 이일의 글을 중심으로 다룬다. 먼저 홍익대 교수이자 미술평론가인 김복영이 1985년에 출간한 『한국현대미술연구』에 대한 고찰을 통해, 70년대 단색조 미술의 담론들에 관한 많은 의문 중 왜 ‘평면성’이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갑자기 중요한 이슈로 받아들여졌는지, 과연 회화의 평면성이라는 것이 그림에서 단순히 재현적 이미지를 소거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 방식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한다.(144-145쪽 참조) 또한 이 글에서 저자는 김복영이 이우환의 새로운 미술읽기의 독해에 실패하여 당시의 미술에 적절치 못한 논리를 제공했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어 본격적으로 저자는 김복영이 ‘70년대의 평면은 사물이라는 객체에의 복귀’ 즉 하나의 독자적인 사물‘로의 환원이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이를테면 저자는 ‘평면’과 ‘평면성’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개념임을 인식론적으로 규명한다. 즉 ‘평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물의 편평한 표면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용인할 수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평면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관념이며, 그러므로 평면은 ‘하나의 독자적인 사물’로 환원된다는 김복영의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반면 ‘평면성’은 ‘평면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조건들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평면과 다른 차원의 개념임을 저자는 진술한다. 따라서 평면성이란 어떤 것을 편평하다고 할 것인가의 전제에 따라 다분히 유동적인 상태로 인식될 수 있는 개념으로서 (156-157쪽) 사실 에두아르 마네 이래 서구 미술맥락에서 성립하는 새로운 회화의 현대적인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 주3)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김복영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말하자면 평면을 ‘사물 그 자체’에로의 ‘환원’이라고 규정함은 미니멀리즘 이후의 인식, 즉 캔버스가 오브제가 되어버리는 시점의 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70년대 미술은 더 이상 회화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로의 환원이라는 맥락에서 평면성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어 저자는 “서구미술의 흐름을 신중하게 읽고 해석”(168쪽)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했던 이일에 대해서도 70년대 미술에 관한 한 큰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를테면 “70년대 단색조 미술에 나타나는 일련의 징후들을 ‘현대미술 그 자체와 대결’ 하고 있는 미술”(169쪽) 로 본 것은 “우리자신의 역사적 존재인식을 배제” 한 채, 전통 동양사상인 ‘주객합일’ 사상과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상호주관성 현상학과 혼동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70년대 작가들이나 비평가들이 노 ․ 장의 ‘무위자연’과 부처의 ‘무’를 논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진술과 그들의 작품과 삶의 방식이 전혀 달랐다는 점에서 그 허구성을 통박한다. 제8절은 ‘70년대 미술의 오해들’을 다루고 이다. 여기서 저자는 70년대 미술의 평면성의 논리가“그림으로부터 모든 이미지를 제거-탈이미지화해야 한다거나, 나아가 회화에 있어 물성과 질료적 차원의 문제로 발전한다는 논리”(177쪽)는 그린버그의 ‘재현적 이미지의 제거’에 대한 곡해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우리가 서구 미술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쟁점도 아니고 이슈도 아니며, 방법론도 스타일도, 나아가 문제의식 그자체도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신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서구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의 비판적 시각과 그런 비판적 성찰을 통해 현재를 열어가려는 정직한 인식론적 태도, 그리고 그런 노력을 통해 성취해가는 새로움의 과정”(179쪽)으로 본다. 이어 저자는 “70년대 미술의 대표적 특징인 ‘단색조/모노톤’은 미묘한 흰색을 구사한 소수 작가들의 독특한 감수성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를 일본 미술계의 지한파 인사들의 미적 지향과 공유되어 마침내 집단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본다. 또한 70년대 미술의 ‘모노톤’은 서구미술 문맥에 등장하는 ‘모노크롬’과 완전히 다른 코드임에도 ‘오독’의 결과로 둘 다 그릇되게 이해했음을 비판한다. 나아가 이를 비평가들의 윤리성을 다시 생각하는 문제로 본다. 이를테면 ‘많은 예술가들과 평론가들이 단편적인 정보를 근거로 현대미술을 오독하고 더듬이 감각으로 스타일을 차용하면서 손쉽게 서구미술의 쟁점과 이슈를 공유한 역사’이며 ‘거짓된 진정성’이라는 것이다.(181쪽) 제9절은 ‘백색의 문화정치학’을 다루었다. 저자는 이 글에서 먼저 서구미술 문맥에 대한 오독의 결과 속에서도 몇몇 70년대 작가들이 주목할 만한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낸 점을 주목한다. 다만 이것이 일부평론가들과 작가들에 의해 어설프게 조작된 논리로 왜곡되었음을 밝히고 있다.(182쪽) 이어 ‘백색’ 의 집단화 획일화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70년대 일부 작가들의 증언을 통해 밝히고 있다. 3. 제2장은 ‘한국미술계와 미술운동의 정치학’으로 미술계의 정치적 집단적 권력화와 미술제도의 정치학, 그리고 미술운동으로서의 한국의 현대미술의 양상을 1970년대까지 간략히 다루었으며, 특히 70년대 미술운동의 전근대적이고 정치지향적인 불순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어 ‘미술계의 권력과 미술제도의 정치적 역학’이란 글에서는 미술을 둘러싼 제도와 기관들이 전문성과 윤리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조건들이 오히려 미술계의 불순한 정치성을 정당화시키는 요인이 됨을 지적 한다.(222-223쪽) 4. 제3장에서는 ‘한국 미술비평문화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 다루었다. 제1절에서는 ‘비평문화가 의미하는 것’이란 표제로 현대미술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오늘의 미술이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이자, 미술작품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분석해야 할 것인지의 방법과 원리 자체를 연구하고, 나아가 그런 시스템을 통해 작품 혹은 미술현상이 오늘날의 미술맥락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일”(229쪽)임을 전제로 비평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제2절에서는 한국의 비평가들이 미술평론가와 미술사가들의 “권력에 아부하는 ‘선택’과 ‘집중’이 오히려 진정한 예술적 성취들을 ‘배제’하고 ‘소외’시켜 왔으며, 그에 따라 미술 그 자체의 가치들이 실종되어 버렸다”(243쪽)는 사실을 밝히고, 이러한 기회주의적 비윤리성을 질타하고 있다. 에서 저자는 현대미술이 ‘트렌드 스타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어려움은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가능해 보이는 지점’ 속에 숨어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는 “곧 ‘미술이 아닌 것은 무엇’ 인지를 묻고 있고, 나아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본질적으로 회의하게 함으로써 ‘미술이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극적으로 되돌아보기를 요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한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창의적 독해를 강조하면서 결국 “한국미술의 서구미술과의 발생 및 전개과정의 ‘차이’가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249쪽)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미술을 향하여’란 글에서는 “한국의 현대미술은 한국의 역사와 미술의 문화적 가치를 향해, 현대적이라고 할 만한 정신의 가치를 생산하고 구축하는 일로부터 찾아질 필요가 있다”(255쪽)는 것을 역설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함을 다짐하고 있다. 5. 이 책은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메타 비평적 글이다. 저자의 이번 책은 저간의 미술계의 속내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자못 충격적일 내용들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얼핏 표면적으로는 비평계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자의 이번 책은 사실 난마처럼 얽힌 한국미술계의 제 문제를 풀기 위한 고육지책의 글이다. 물론 이 책은 기존의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진술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의 심각성을 밝히고, 한국미술의 제 문제들 중 상당부분이 그들의 의심스러운 전문성 및 윤리성의 문제들과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252쪽) 그러나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은 함량미달의 비평가들이나 이들의 담론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거론한 논의의 쟁점은 우리 미술계의 역량과 정체성을 뿌리부터 검증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현대미술 본연의 가치를 지향하고자 함에 있다. 즉 이 책의 진면목은 어디까지나 현대미술의 쟁점이 무엇이며, 또 현대미학과 담론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현재를 열어가려는 저자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인식론적 태도, 그리고 그런 노력을 통해 성취해가려는 지향성은 오늘 이 시점에서 한국미술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척도가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이 책의 출간이 우리 미술계가 환골탈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주1)이를 토대로 그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청음사, 2000),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Ⅰ,Ⅱ(VOL.1,2)』,(ICAS, 2001),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Ⅲ(VOL.1,2)』,(ICAS, 2003)『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Ⅳ(VOL.3)』, (ICAS 2004)를 출간했다. 주2)“미술은 오직 미술 그 자체의 가치천착만을 목표로 할 뿐이고, 미술제도는 미술을 광범위하고 확산시키고 문화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11쪽) 주3)나아가 저자는 그린버그가 말한 비평적 논리(모든 예술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권한 영역은 그 매체의 본성과 일치해야 한다는)를 비판한다. 이를테면 예술의 궁극적인 의문(예술작품은 만든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그림이란 무엇인가 등)을 회화의 형식조건의 문제로 단순화해버렸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린버그는 전통회화예술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가치들을 ‘환영’이라는 하나의 틀로 단순화하여, 그것을 무자비하게 소거해버림으로써 ‘매체의 모든 본성과 일치하면서 동시에 예술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권한 영역을 확보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162쪽) 2005년 11월 15일 도 병 훈 (작가)
27 no image 도산서원과 겸재 정선의 그림
소나무
17502 2007-06-05
도산서원과 겸재 정선의 그림 1. 지난 9월 24일 천 원짜리 지폐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진 도산서원을 다녀왔다. 경북 포항에서 도산서원을 찾아가는 길은 꽤 먼 길이었다. 가는 동안 내내 짙푸른 하늘 아래 산길로 이어진 국도는 한적했다. 다만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만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도산서원은 진입로를 잘 닦아 놓은 지금도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워낙 깊숙한 오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적 무의식적 윤리의식의 기저를 형성케 한 장본인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선생이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오랫동안 ‘주리론(主理論)’적인 퇴계 이황의 학문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기론(主氣論)’적 사상에 더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계 선생이 살던 시대상황과 선생의 지극한 매화 사랑, 기생인 두향과의 애틋한 사연을 알게 되면서 수년 전부터는 선생의 학문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번에 도산서원에도 처음 가게 된 것이다. 이번 답사의 또 하나의 까닭은 겸재가 이 곳을 그려서다. 겸재는 하양현감과 청하현감 재임 시절 이곳 도산서원을 수차례 답사했으며, 와 를 남겼다. 2. 서원 입구로 들어서자 오른 편에 도산서당이 있었다. 서원은 퇴계 사후에 지었지만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 생존시에 지은 건물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기둥에 붙어있는 ‘도산서당’이라는 송판에 새겨진 소박한 글씨였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안내원은 퇴계가 쓴 글씨라고 했지만 퇴계의 글씨체와는 달라 보였다.) 서당과 잘 어울리는 소박한 글씨체였다. 특히 뫼 산(山)자는 산의 형상을 닮아 어린아이가 천진하게 그린 산 같았다. 도산서당은 세 칸 밖에 안 되는 지극히 작은 건물이었다. 이처럼 작고 소박한 집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로서 나중에 영남학파를 형성하게 되는 제자들을 길러낸 것이다. 선생이 학문을 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서쪽 단칸방은 ‘완락재玩樂齋’로서 ‘완상하여 즐기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다.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기대서라도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는 겸손의 뜻이 담겨있다. 이 마루에서 바라 본 마당의 동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2m 남짓으로 보이는 작은 사각형의 정우당(淨友塘)이란 연못과 유정문(幽貞門 : 유정은 그윽하고 바르다는 뜻임) 몽천(夢泉 : 어린 제자를 바르게 가르치다는 뜻이 담겨있음), 그리고 이 문을 통해서 작은 개울을 건너면 닿는 절우사(節友社)가 있었다. 절우사는 도산 서당 동쪽에 있는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퇴계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난초, 연꽃을 심어 이들 다섯 친구와 함께 한 곳이다. 도산서당 바로 옆은 문하생들이 머무는 농운정사(隴雲精舍)로, 공부하는 곳은 시습재(時習齋) 잠자는 곳은 지숙요(止宿寮), 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다. 장서각을 지나 동재 서재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서면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현판글씨가 있는 건물에 이른다.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 방이 한존재(閑存齋)다. 이는 『주역』의 閑邪存其誠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말 그대로 삿댄 것을 막고 성실함을 보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3. 서원은 명현의 제사와 지방 대학교로서 고등교육을 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 곳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원은 교육의 장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다만 제사 지내는 곳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도산서원만 하더라도 퇴계가 살아 있을 때는 도산서당과 바로 옆의 농운정사 밖에 없었다. 4. 현 도산서원은 지난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중수하면서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박 대통령이 무인은 이순신을, 학자는 이황을,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아야 한다면서, 특히 이 세 분과 연관된 현충사, 도산서원, 오죽헌을 성역화하거나 대대적으로 중수하게 하는데, 이 때문에 세 곳이 과도하게 치장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도산 서원의 경우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담장을 함으로써 소박한 서원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답답하고 막힌 부조화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5. 퇴계 이황의 학문세계의 특성은 무엇일까? 퇴계는 평생 성리학을 깊이 공부했다. 성리학은 중국 남송의 정호程顥와 주희朱熹에 의해 성립된 ‘신유학’이다. 주희는 자연의 생성과 변화를 ‘이理’와 ‘기氣’라는 원리이자 현상인 두 계기의 만남으로 규정했다. 자연의 무기물적 변화이자 생명의 탄생까지의 모든 현상이 ‘기(氣)’의 변화라면, 그 변화에 어떤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이 ‘이(理)’다. 그래서 주희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보편적 본질이 ‘리’(性卽理)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를 설정하였다. 즉 ‘성性’이란 인간의 마음에 감정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로서 하늘과 인간의 본성이다. 주자는 정호의 학설을 이어받아 인간의 본성은 기질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다. 맹자의 성선설로 대표되는 원시 유가 사상과는 사뭇 다른 학설을 제창한 것이다. 이처럼 성리학은 성에 대해 감정이 일어난 뒤의 상태인 정情과 함께, 즉 성정을 ‘이’와 ‘기’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인성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특히 인성의 본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사림士林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논쟁이다.1) 이는 크게 퇴계 이황과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설로 대별된다. 그 발단은 이황과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 간의 논쟁에서 비롯된다. 이황은 “사단은 리(理)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氣의 발현(四端理之發 七情己之發 ; 理氣互發說)”으로 보았다. 항상 선한 ‘사단’과, 바깥 사물의 영향을 받아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칠정’은 근본부터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인간 감정을 그 연원에 따라 ‘이’에서 온 것과 ‘기’에서 온 것으로 분리했다. 이는 주희와도 다른 관점으로 사물의 원리인 ‘이’가 움직여 선한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퇴계의 학설에 대해 기대승이 의문을 제기한다.2) 기대승은 맹자의 사단은 모두 인․의․예․지의 실마리端이므로3) 사단과 칠정은 다같이 인간의 감정 현상이며, 그러므로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이황에게 질의한다. 이후 수년간 두 사람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은 논의를 펼친다. 나중에 퇴계는 ‘리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理發氣隨之’고 하여 사단을 도심道心에, 칠정 즉 ‘기가 발하면 리가 탄다氣發理乘之’를 인심人心에 귀속시키는 학설로 수정하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기대승은 이황의 학설을 수긍한다. 요즘 보면 억지 같은 주장을 퇴계가 한 것은 당위적 윤리를 강조해야 하는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기대승의 초기학설을 이어받아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의 발로 생각했다.(氣發理乘說) 따라서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4) 퇴계의 사상이 ‘리’의 발현에 중점을 두었다면, 율곡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을 동일시한 ‘기’의 느낌感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이의 학설은 율곡학파에 의해 계승이 되며, 그 대표적인 이가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물론 이들은 양난 이후 조선사회의 기강을 세운다는 일념에서 ‘예,’ 즉 형식적 윤리 규범을 중시한다. 그렇지만 같은 율곡학파 중 김창협金昌協, (1651~1708)김창흡金昌翕,1653~1722 등은 기감에 의한 정감을 중시하는 학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의 기풍을 추구한다.5) 바로 이들에 의해 기감, 즉 실제 체험을 중시하는 진경문화시대가 열리며, 그 정점에 겸재 정선이 있다. 겸재 정선은 사대부 화가로서 율곡의 학맥을 계승한 사람인 것이다. 6. 퇴계 이황은 이성적 학문 세계와 달리 특히 매화를 좋아한 감성적 인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읊조린 매화음(梅花吟)이 100수가 넘을 정도로 매화를 지극히 사랑(퇴계의 말을 빌리자면 혹애)했다. 그 시들은 하나 같인 선생의 감성어린 인품을 보여준다. 이 매화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인간 퇴계를 다시 보게 하는 일화는 무엇보다 단양군수 시절에 만난 관기 두향과의 사연이다. 퇴계를 사모한 두향은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 퇴계는 쉽사리 곁을 주지 않았다. 마침내 선생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은 두향이 조선 천지를 뒤져 찾은 기품 넘치는 매화 한 그루 때문이었다. 그 후 선생은 단양에서는 물론 도산에서도 이 매화를 애완했다. 퇴계의 마지막 유언은 “저 매화에 물어 주어라”였다. 단양에 홀로 남았던 두향은 수 년 뒤 선생의 부음을 듣고 자진했다. 두향의 묘는 지금 단양의 구담봉 맞은 편 산자락에 있다. . 또 하나, 퇴계 이황의 감성과 인품을 엿보게 하는 일화가 있다. 둘 째 아들의 이른 죽음으로 둘 째 며느리가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자 퇴계는 몰래 그 며느리를 불러 재가하게 한다. 불경이부의 윤리의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요즘 상식으로도 파격적인 배려를 퇴계는 한 것이다. 퇴계가 죽었을 때 그 며느리는 상여가 떠나가는 광경을 멀리서 눈물 흘리며 지켜보았다고 한다. 새 삶을 살게 한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인간 퇴계의 참 모습은 그의 학문과 삶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이다. 7. 겸재는 어느 정도 퇴계의 학문과 삶을 알고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학문적 계통이 다른 퇴계 선생이 머문 이곳 도산 서원까지 찾아와서 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사실 겸재는 외가 쪽으로 퇴계의 혈통을 이은(겸재의 모친이 퇴계 이황의 외손자의 외손녀임) 사람이다. 겸재가 율곡학파임에도 도산서원을 찾은 것은 이러한 혈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는 특별한 사연인 있다. 이를테면 퇴계 이황의 친필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와 우암 송시열의 발문을 합쳐 겸재의 외조부가 만든『퇴우이선생(退尤二先生 眞蹟)』을 겸재가 소장하게 되면서 이 진적이 만들어지게 된 사연과 상황을 겸재가 진경회화로 그린『퇴우이선생진적첩』6)에 들어있는 그림이 다. 그러나 겸재가 퇴계의 혈통을 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도산서원을 그렸을 리는 없다. 퇴계는 학풍과 학파를 초월해서 존숭될만한 인품을 지녔던 학자였던 것이다. 겸재가 얼마나 많이 도산서원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겸재가 한 소재를 흔히 다수 제작한 것으로 보아 도산서원도 많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알려진 도산서원 관련 그림으로는 와 가 있다. 이 그림들은 도산서원과 그 주변 풍광을 그린 그림으로 는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그 주변 풍광과 함께 그렸고, 는 도산서당과 주변 풍광을 그린 그림이다. 즉 는 서원이 생겨나기 전의 도산서당만을 그린 것이다. 다시 말해 는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학문하는 광경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같은 장소임에도 그림의 구도와 표현방식도 확연히 다르다. 이는 같은 곳을 그리더라도 시점을 자유자재로 변환시켰던 겸재 특유의 화풍에 기인한다. 는 부채에 그렸지만 겸재가 살았던 시기의 도산 서원의 분위기를 십분 실감할 수 있는 그림으로 겸재 화풍의 유니크 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는 겸재가 71세 때의 그림으로 그 거침없는 필법으로 인해 맑고도 풍부한 먹색이 두드러지며 그만큼 겸재의 그림 중에서도 매우 빼어난 수작이다.7) 8. 도산서원, 그 중에서도 도산서당은 조선 유학의 메카로서 소박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그의 감성과 인품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유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이곳도 현대인들이 한 짓은 조상의 인품과 문화적 격을 손상시킨 일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하루빨리 원래의 건물과 부합되는 소박한 담장으로 복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도산 서원은 조선 전통 유학을 회복하는 장소로서의 차원 넘어 특성화된 지방 대학 교육과 문화의 본거지가 되었으면 한다. 겸재 정선의 와 에서 느낄 수 있는 학문과 예술은 얽히고설킨 조선시대의 학맥과 인맥과 삶의 실상을 알게 한다. 이 그림들은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곡진한 사연이 담겨 있는 그림인 것이다. 게다가 이 그림들은 겸재의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겸재 만년의 수작이다. 특히 겸재의 는 조선 중기 이래 학문과 예술의 역사가 압축된 그림이다. 즉 조선 왕조를 지배한 학문의 두 계보를 초극한 그림이다. 또한 겸재의 와 는 겸재의 그림의 독자성이 그의 폭넓은 체험에서 나왔음을 입증한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삶과 함께 학문과 예술이 있음을. 2005년 10월 24일 1) 사단은 맹자가 말한 惻隱, 羞惡, 辭讓, 是非지심을 말하며, 칠정은 『禮記』에 나오는 喜怒哀懼愛惡欲으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총체를 말한다. 2) 처음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인 58세의 대학자였으나 기대승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32살의 청년이었다. 이 사칠 논쟁에 대해 쉽게 풀어 쓴 내용을 보려면 최근 김영두가 옮긴『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2003), 351-486쪽 참조. 3) 이 마음(心)을 欲의 주체로서의 포괄적 개념으로 보고 성을 순수도덕적 규범의 근거로서의 본성으로 보는 것이 정주학, 즉 ‘신유학’의 특징이다. 김용옥,『절차탁마대기만성』, 통나무,1987, 72쪽 참조. 4) 이황과 이이의 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이황/윤사순 역, 이이 유정동 역,『한국의 유학사상』(삼성출판사, 1989)와 김형효의 『원효에서 다산까지』(청계, 2000) 225-515쪽 참조. 5) 사단 칠정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한 책으로 한형조가 지은『주희에서 정약용으로』(세계사, 1996)란 책을 꼽을 수 있다. 6) 보물 제585호임. 7)겸재 정선 뿐 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1713~91)이 그린 도 있다. 이 그림은 강세황의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1751년 작)으로 보물 제522호이다.(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26.8㎝, 가로 138.5㎝.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도산서원도〉는 명종 때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여 남인계열의 학맥을 통해 전승되었으며, 이 그림도 기존의 원본을 방작(倣作)한 것이다. 화면 중앙으로 서원과 주산인 도산을 배치하고 주변의 명승들이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부감법의 효과로 형성된 분지 같은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퇴계(退溪)가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흐른다. 가로로 긴 화면에 펼쳐진 경물들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모이듯 배치했다.
26 no image 서석지전경1
소나무
37906 2007-06-05
25 no image 서석지 전경
소나무
11549 2007-06-05
24 no image 쌍계 입암과 서석지를 다녀와서
소나무
5682 2007-06-05
쌍계입암과 서석지에 다녀와서 1. 지난 8월말, 경북 영양에 있는 쌍계 입암(雙溪 立岩)과 서석지(瑞石池 ; 상서로운 돌의 연못)에 다녀왔다. 포항에서 동해를 따라 이어진 7번 국도를 달리다가 영덕에서 34번 국도로 들어가서 911번 국도를 따라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인 두들마을과 석보를 지나 31번 국도로 진입하여 입암 2교를 건너면 다시 911번 지방도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다리 건너서 이어지는 길을 조금 가면 쌍계, 즉 일월산 동쪽에서 영양읍의 동쪽을 돌아 남류 해온 대천(大川)과 일월산 서쪽에서 흘러나온 청기천(靑杞川)이 만나는 지점에 자주색 암벽이 석문(石門)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 양 쪽 바위 중 정자가 바라보이는 쪽이 자양산(紫陽山) 자락이고 도로 쪽에 바로 겸재 정선이 그림 에 나오는 입암, 즉 선돌이다. 2. 겸재 정선이 영남의 오지인 쌍계 입암을 다녀간 것은 그가 포항 인근의 청하현감 재임시절인 1733-35년 사이로, 안동 예안(禮安)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오가는 그 길목에 있는 이곳을 다녀와서 는 그 직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는 겸재 그림 중에서도 대담한 구도와 호방장쾌한 골필법(骨筆法)을 유감없이 구사한 걸작이다. 특히 화면 중앙에 힘차게 발기한 남성의 심벌을 연상케 하는 입암의 묘사는 단연 압권이다. 나는 이곳에서 다시 한번 겸재의 필력과 진경산수화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겸재는 다른 자신의 산수화와 마찬가지로 체험적 시각을 종합한 복합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이곳 입암과 좌우 석벽을 너무도 역동적으로 그린 것이다.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그린 곳을 한 곳 한 곳 직접 답사하기 시작한 이후, 현장에 갈 때마다 겸재 화풍의 독자성에 감탄하게 된다. “예술은 보이게 하는 것이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는 클레의 말처럼........ 그러나 겸재가 그림을 그린 현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자행되거나 이미 자행되어버린 자연의 파괴이다. 이곳만 하더라도 입암은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국도의 개설,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들어서서, 입암 주변이 너무 많이 훼손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지방 자치시대 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요컨대 개발하지 않아도 될 부분을 너무 많이 개발하여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단절된 문화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입암에서의 안타까움은 ‘서석지’를 보는 순간 잔잔한 감동으로 바뀌었다. 그곳은 아직 개발이란 명목의 야만적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입암을 지나 나 오리 쯤 들어가면 왼쪽에 전각이 보이고 서석지 입구가 보이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 바로 서석지를 둘러싼 돌담 곁으로 다가갈 수 있다) 3. 담이 엇갈려 있는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면(따로 대문이 없다) 마주보이는 곳이 경정(敬亭)이고, 몸을 90도 우측으로 돌리면 서석지, 즉 연못이 있다. 서석지는 마당이 없다. 사람 걸어 다닐 정도의 폭을 제외하고 모두 연못이다. 연못 안에는 제각각인 모양의 돌들이 놓여져 있었고 연꽃 대궁이 가득했다. 이 서석지 너머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 주일재(主一齋)이다. 이 주일재는 방 두개와 마루가 있다. 주일재 앞에는 ‘사우단’으로 대나무 소나무 매화 국화를 심었다. 축대를 쌓은 돌이나 주춧돌은 주변에 있던 돌들로 조성하였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고 하나하나가 다들 제자리에 적절하게 놓여 있어 선조들의 정성과 세심함을 느낄 수 있다. 경정으로 올라가는 엇비슷이 놓여있는 작은 방형의 납작한 댓돌 하나도 자연석이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보았더니 마루와 방은 매일 사람의 손길이 간 듯 깨끗했다. 4. 예로부터 서석지를 중심으로 이곳을 내원(內苑)과 외원(外苑)으로 구분하며, 내원인 서석지는 정관 ․ 사고 ․ 독서 등 사생활을 위해 인공 공간이라면, 외원은 자양산 자락인 암벽과 입암이 있는 곳, 즉 석문까지다.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 5년(1613년) 석문(石問) 정영방 선생(1577~1650)이 조성한 조선시대 민가 연못의 대표적인 정원 유적으로서, 우리나라 조경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남 완도의『부용원』, 전남 담양에 있는『소쇄원』과 더불어 3대 한국 정원으로 꼽힌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으면서도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 바로 서석지다. 정영방 선생은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의 문하로 퇴계학의 학통을 계승함)의 선생의 제자로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 싸움에 회의를 느끼고 평생을 이곳에 은거하면서 조성한 곳이 서석지다. 가로 13.4m, 세로 11.2m, 깊이 1.7m인 서석지는 물이 들어오는 곳은 읍청거(揖淸渠), 물이 나가는 곳은 토예거(吐穢渠)라 하며, 연꽃과 60여개의 돌이 존재한다. 이 돌들은 기암도 괴석도 아닌 평범한 암반이나 작은 돌이지만 각각 이름이 있어 선유석(仙遊石), 통진교(通眞橋), 희접석(戱蝶石), 어상석(魚狀石), 옥성대(玉成臺), 조천촉(調天燭), 낙성석(落星石) 등의 명칭을 갖고 있다. 정영방은 이 서석지 안에 있는 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돌은 안으로 문기가 있고 밖으로는 희다.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 있으니 정숙하고 개끗한 여인의 정조와 깨끗함으로 자신을 지킴과 같다. 또는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군자와 같고 덕과 의를 쌓으며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아 중심에 존재하여 저절로 귀함과 실속이 있다. 가히 상서롭다 일컫지 않겠는가. 혹 그것이 옥이 아님을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나 이는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나무 열매가 옥이라 한다면 나는 그것을 가히 얻어 모두 가지고 있을 터인즉 그것을 가지고 있음으로 화가 될 것이다. 옥 같은 것은 옥이 아닌 것과 같아 옥의 아름다운 이름만 훔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대로 순수하고 어리석음을 지켜 세상을 속이고 그 이름을 훔친다 하더라도 돌은 세상을 해함이 없다. 못 속에 편안히 둘 수 있으니 상서롭지 않은가 하늘은 흰 옥 달을 만들고 땅은 청동 거울을 바친다. 물이 멈추어 담담하고 사방으로 물결이 없으니 적막한 감을 능히 갖추었구나. 5. 르네상스 정원, 바로크정원, 독일의 풍경식 정원(*독일의 풍경식 정원으로는 무스카우 정원이 유명하다. 이는 조원가 퓌클러(Herman Furst von Pucker-Muskau)가 조성한 것이다. 그는 무스카우의 영주로서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 무스카우를 "고상하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가꾸기 위해" 대대적인 정원 계획을 세우고 조성한다. 그는 40년간 이 정원 조성에 혼신의 노력을 하며 이 때문에 파산하였다. 그가 손대기 이전의 무스카우는 "쓸모없는 침엽수림과 습지와 모래땅"으로 주거 환경으로나 농경 환경으로서 "촌스럽고 척박함"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정원을 조성해 가기 전 몇 해 동안 배수로를 만들어 땅을 건조시키고 흙을 개량하면서 황량한 침엽수림을 제거하고 활엽수림의 기반을 조성한다. 땅을 개량하고 배수를 위한 수로로서 운하와 호수를 만들며 그림 같은 초원과 숲을 일구고 궁과 점경물들을 건설함으로써 오늘날 무스카우는 기존의 자연에서 탈바꿈하여 전원풍의 자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에서 볼 수 있듯, 서구에서는 나무 한 그루조차도 일일이 의도된 곳에 식재되고 모든 녹지 공간이 하나에서 열까지 자연을 통제하고 복속시킨다. 게다가 나무도 이등변 삼각형이나 사각 입방체 모양, 그것도 좌우 대칭으로 정교하게 배치한다. 이를테면 서구에서는 중심 정원이라 할 플레져 가든(pleasure garden)과 그 주변의 조원된 풍경은, 세팅된 바탕에 주요 수목이 식재되고 점경이 구성되어간다. 자연의 ‘결함’을 인공적인 힘으로 바꾸는 자연지배의 논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도 자연미보다 조형미를 우위에 두는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대극적인 서구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연이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 그 자체로 그 아름다움이 논의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인간이 규정하는 기하학적 질서에 어긋나면 그저 자연의 본질적 결함으로 간주되었다.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은 대극적 관계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동양 3국도 엄밀히 말하면 자연을 대하는 시각이 달랐다. 그러나 서구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신화학자로 유명한 조셉 켐벨이 어느 대담에서 일본의 정원에 대해 감탄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가 정원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보면 일본의 정원도 얼마나 작위적이고 인위적인가? 이는 어느 일본인이 창덕궁 후원을 다 돌아보고 나오면서 "어디가 정원입니까?"라고 했다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런 문맥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정원인 ‘료안지의 석정(石庭)’과 영양의 서석지는 몹시 대조적이며, 이는 우리 전통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 특질과도 다르지 않다. (일본의 도자기는 자연스러움조차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예컨대 담양의 소쇄원도 안강 옥산서원 근처의 계정(溪亭)도 모두 자연 풍광을 끌어들여 세상의 어지러움을 잊고자 한 옛 선인들의 멋이 낳은 여유의 산물이다. 즉 주어진 환경 조건에 큰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어두고 적절한 곳에 자리 잡아 정자를 짓고 자그마한 못을 판 것이다. 이를테면 소쇄원, 안압지와 세연지,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宙合樓), 다산초당은 물론 이름 없는 전국의 옛 정자들도 주어진 경관은 그대로 두어두고 플레져 가든만을 최소한의 손질로 다루었다. 이는 사실 너무도 유명한 곳인 석굴암이나 해인사 등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석굴암은 동해까지, 해인사는 가야산 전체의 품속에서 연꽃 속 화심처럼 존재한다) 6. 노마드의 시대임에도 고유한 전통문화 유산이나 지역 특유의 로컬리티에 관심을 갖은 이유는 그것에 대한 해석은 무한한 현재적 지평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별자의 고유성을 교환가치로 말살하는 도시의 일상 속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살고 있는지는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이 동일화의 강제가 지배하는 끔찍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바쁜 만큼 세월은 덧없이 빨리 지나갈 뿐이다. 즉 우리가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그 경험이 바로 우리의 삶의 내용이다. 삶의 질은 경험의 풍요로움에 달려 있다. 살아있음의 경험과 감동은 세상이나 사물과의 내밀한 만남 속에서 형성되므로. 2005년 10월 4일 PS : 지금까지는 어디에 다녀오면 즉시 답사기를 써 왔으나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현장을 다녀온 사진들은 추후에 올리겠습니다.
23 no image 월송정과 망양정을 다녀와서
소나무
5743 2007-06-05
월송정과 망양정을 다녀와서 1. 풍경은 단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아니다. 저마다 관념의 창틀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과 ‘산수(山水)’의 차이처럼.......이런 차원에서 예술의 관건은 관념의 창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나에게 동해 바닷가란 한동안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란 후렴구가 있는 ‘고래사냥’이란 노래와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의 , 그리고 고교 수학여행 때 가 본 낙산사와 그 부근의 눈부시게 흰 모래와 솔숲으로 기억된 곳이었다. 그런데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대구 인근의 하양 현감으로 5년(1721년~26년), 포항 근처의 청하현감으로 2년간(1733~35년) 재임하는 동안 영남의 주요 명승지는 물론 ‘관동팔경’을 오르내리며 그림을 그렸음을 알게 되었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2. 지난 8월 17일, 나는 가족과 함께 경상북도 울진에 자리 잡은 관동팔경 제1경인 을 향해 출발했다. 경북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여름 산맥을 배경으로 해서 수목의 짙푸름이 뚝뚝 떨어지는 길을 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해안 경치를 보기 위해 일부러 더 좁은 해안도로를 천천히 가기도 했다. 굽이굽이 해안 길 오른 편은 일망무제의 동해 바다가 펼쳐졌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마치 백마들이 하얀 갈기를 세우고 푸른 초원을 달려오는 듯했다. 해안을 따라 2시간 남짓 달렸을까, 너른 들과 장송림(長松林)이 보이고, 월송정을 가리키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거기서 오른 편으로 꺾어진 길로 접어들어 평해 황씨 시조 제단원 옆으로 난 솔숲 길을 얼마간 들어가자,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 솔숲 사이로 2층 정자건물이 보였다. 작은 언덕 계단 위에 있는 월송정에 오르기 전 안내 게시판을 읽어보니 여러 차례 월송정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현재의 건물은 지은 지 불과 2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월송정의 현판을 보니 ‘월송정’의 월은 달 월(月)자가 아니라, 월나라 월(越)자(넘을 ‘월’자이기도 함)였다. (겸재 정선이 그린 를 오래 전부터 봤으면서도 그림 제목은 예사로 본 셈이다. 그래서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미 조선 시대부터 월송정의 유래에 대한 여러 설이 있었다. 즉 월(越)나라에서 가져온 소나무에서 유래했다는 설, “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라는 설,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이는 성음(聲音)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는 설” 등이었다.) 월송정 2층 누각으로 올라가니 이 장소와 깊은 사연이 있는 인물들의 글들이 여러 개의 편액으로 걸려 있었다. 먼저 고려시대 경기체가 으로 유명한 안축(謹齋 安軸, 1287~1348)의 시가 눈에 띄었으며, 옆에 한글 번역까지 있었다.(맨 첫구절의 事去人非水自東, 千年遺踵在亭松은 ‘일은 지나가고 사람도 옛사람이 아니나 물은 동쪽에 그대로 인데 / 천년의 자취 정자와 소나무일 뿐’으로 해석했으면 좋았을 듯하다.) 그 다음은 여말 선초 때의 사람인 기우자 이행(騎牛子 李行, 1352~1432)과 김종서(金宗瑞)의 글을 볼 수 있었다. 이 중 이행은 이곳 월송정에서 소를 타고 다니며 노닌 것으로 유명해서 훨씬 후대의 인물인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까지 그의 행적을 소재로 를 남겼을 정도다. 이행의 이란 한시를 해석해보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넓은 바다 위로 밝은 달은 솔숲에 걸려 있는데 소뿔을 끌어당기며(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시를 읊다가 취하여 정자 가운데에 누웠더니 단구(丹丘 ; 신선들이 산다는 가상적인 곳)의 신선들을 꿈속에서 만나네 滄溟白月半浮松 叩角歸來興轉濃 吟罷亭中仍醉倒 丹丘仙侶夢相逢 이러한 시를 보면 아득한 옛날의 신화나 전설 같지만, 이 땅에서는 불과 백 년 전 만 하더라도 여건만 된다면 동경한 삶이었다. 어느 시대든 누군가 다만 한 때 이 세상(자연) 속에서 살다 가는 것이고 보면 이 몽상적인 시도 그 배면엔 실존의 엄연함을 숨길 수 없다. 3. 바다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솔숲 사이로 보이는 모래 언덕과 푸른 바다 위로 뜨거운 여름햇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더없이 낯선 광경이었다. 정자에서 내려와 근처 여기저기를 가보았다. 월송정에는 이른바 ‘문화유산답사’라는 유행에 편승한 시각으로는 특별히 볼만한 대상이 없다. 사구(砂丘)위에 솔숲만 있을 뿐. 물론 옛 월송정 솔숲은 오늘 현재와는 다름을 조선 선조 때 명 문장가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鵝溪 李山海,1538~1609)가 한 때 이곳 근처 마을에 유배되었을 때 쓴 를 보면 알 수 있다.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솔이 우뚝우뚝 높이 치솟아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몇 만 그루나 되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이 참빗과 같고 그 곧기가 먹줄과 같아, 고개를 젖히면 하늘에 해가 보이지 않고 다만 보이느니 나무 아래 곱게 깔려 있는 은 부스러기 옥가루와 같은 모래뿐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지만 위의 기록만큼 많지는 않으며, 또 아주 곧게 자란 나무도 아니고 수령도 대개 백년 미만이다. 그렇지만 이곳 솔숲이 여전하다 해도 ‘관동 팔경’중 제1경으로 꼽혔음을 선뜻 이해할 현대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옛날 이곳에는 ‘월송정 십경(平沙落雁, 龍岩日出, 豬場漁歌, 竹峰夜雨, 賢山春雪, 修眞晩種, 龜浦遠帆, 鶴山濃霧, 南擅暮煙, 前浦農謠)’까지 있었다. 이를 통해 옛 사람이 왜 이곳을 좋아한 지는 어느 정도 짐작되지만 십경 중에서 지금은 사라진 장면이 많다. 그렇다면 이 곳이 매력적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곳이 예로부터 이를테면 신라시대 네 화랑(永郞, 述郞, 南郞, 安郞) 이 머물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유서 깊은 사연이 많아서 그럴까? 다시 이산해(이름이 산과 바다이다)의 를 보자. 이 정자에는, 매양 해풍이 불어오면 송뢰(松籟 ; 솔바람)가 파도소리와 뒤섞여 마치 균천(鈞天; 하늘을 아홉 방향으로 나눈 구천의 하나로서 중앙의 하늘을 말함)의 광악(廣樂)을 반공에서 번갈아 연주하는 듯,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쭈뼛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한다. 내가 일찍이 화오촌(花塢村)에 우거하면서 기이한 경관을 실컷 차지하였다. 따스한 봄날 새들이 다투어 지저귈 때면 두건을 젖혀 쓴 채 지팡이를 끌면서 붉은 꽃(해당화를 말함) 푸른 솔 사이로 배회하였고, 태양이 불덩이 같은 여름날 땀이 비 오듯 흐를 때면 솔에 기대어 한가로이 졸면서 울릉도 저편으로 정신이 노닐곤 하였다. 그리고 서리가 차갑게 내려 솔방울이 어지러이 떨어지면 성긴 솔가지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희미한 솔바람의 운율을 들을 수 있었으며, 대지가 온통 눈으로 덮여 솔숲이 만 마리 은 빛 용으로 변하면 구불텅 얽힌 줄기 사이로 구슬 가지 옥빛이 은은히 어리었다. 게다가 솔 비늘이 아침 비에 함초롬히 젖고 안개와 이내가 달밤에 가로 둘러 있는 경치로 말하자면, 비록 용면 거사를 시켜 그리게 하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 방불할 수 있으리오.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가 그 얼마였으랴. 그 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먹을 놀려 경물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을 몰랐던 이들도 있을 것이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에 자적(自適)했던 이들도 있고, 강호(江湖)의 근심에 애태웠던 이들도 있을 것이니, 즐거워한 이도 한둘이 아니요 근심한 이도 한둘이 아니다.…(중략)…천지간에 만물은 크든 작든 저마다 분수가 있어 생겼다 사라지고 찼다가 기우니, 이는 일월과 귀신도 면할 수가 없는 법인 데, 하물며 산천이며, 하물며 식물이며,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이 정자가 서 있는 곳이 당초에는 못이었는지 골짜기였는지 바다였는지 뭍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종내에는 또 어떠한 곳이 될까. 또한 솔을 심은 이는 누구며 솔은 기른 이는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 아니면 솔이 도끼를 맞기 전에 이 일대의 모래 언덕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인가. …(중략)…내 작디작은 일신(一身)은 흡사 천지 사이의 하루살이요, 창해에 떠 있는 좁쌀 한 톨 격이니…(하략)… 이러한 자연 체험은 이산해 만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며 선조 중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체험기나 한시를 남겼다. 이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은 인간세와 자연의 교감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일시적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을 주는 어떤 대상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대자연의 통시적 ․ 공시적 변화 속에서 그 변화의 한 부분이기도 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선조들은 이러한 자연의 변화와 숨결을 온전히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정자라든가 누각을 특히 좋아했다. 예로부터 한자 문명권에는 인간세와 자연이 교감하는 곳으로는 ‘누(樓)’와 ‘대(臺)’, 그리고 ‘정(亭)’이 있었다. 이 중에서 ‘누’는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 삼척의 죽서루, 평양의 부벽루처럼 규모도 크고 한 고을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대’ 역시 강릉의 경포대, 평양의 을밀대처럼 한 지방을 대표하는 명승지다. 이에 비해 정(자)은 산림 속이라든가 연못가라든가 큰 건물들이 자리한 정원 한 켠에 아담하게 위치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겸재의 를 보면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성루를 겸한 큰 정자임을 알 수 있다. ‘누’든 ‘정’이든 ‘대’든 그것은 자연과 함께하는 장소다. 이처럼 특정한 장소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전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누정 문화’는 오늘날의 관광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그 차원이 다르다. 물론 현대인들이 옛날 우리 선조들처럼 자연을 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렇지만 누정에서의 선조들의 자연체험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정자와 누각은 자연을 거의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인간이 서로 깊은 관계를 맺게 하는 장소다. 이러한 곳에서 자연을 온 몸으로 느낀 자는 건물을 짓더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전통 건물의 특성이 그 실체보다 공간(틈)에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구잡이식 도로 개설이나 난개발의 표상인 건물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중시한 전통이 망각된 현상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일이 오히려 원래의 문화재를 훼손하는 작태가 다반사임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어떤 문화재 전문가는 우리시대에는 무조건 과거의 유적을 복원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하겠는가?) 이곳 월송정에서도 자연과 건물의 관계에 대한 몰지각으로 인한 볼썽사나운 현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월송정 앞바다에 설치된 철조망이라든가 월송정 바로 앞의 군부대 건물로 짐작되는 붉은 벽돌 건물은 아직도 분단된 나라여서 그렇다 해도, 월송정 입구 근처 왼쪽에 새로 지은 노인회관 건물과, 화장실 건물을 솔숲이 무성한 바닷가에 2층 누각으로 난데없이 크게 지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외벽에다 매우 큰 글씨로 화장실이라 써 놓은 것은 어이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기실 이는 겸재의 한번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4. 겸재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을 역임한 후 서울로 돌아와 63세 때 그린 그림으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중 는 월송정이 있는 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조감한 그림이다. 그런데 월송정 주위에는 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산이 없다. 겸재는 를 그릴 때처럼 이곳도 시점을 상상해서 조감하듯 를 그렸던 것이다. 물론 의 주된 특색은 이러한 시점의 자유로운 변환보다 이곳의 풍광을 함축적으로 그리면서도 여실히 드러낸 그 필치의 독특함에 있다. 사실 《관동명승첩》의 는 멀리 하늘과 잇닿은 곳까지 크게 파도가 출렁이는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솔숲을 가운데 길게 배치하고 나머지 부분은 간결하면서도 농담이 풍부한 그림이다. 즉 가운데 솔숲이 이 그림의 주된 소재다. 그런데 확연히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밝은 동해의 햇살(光)과 솔숲 사이로 부는 솔솔 부는 바람(風)과 이다. 즉 겸재는 이곳의 바람과 빛(風光)을 그린 것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은 겸재의 그림에 대해, ‘겸재의 산수는 농도의 차이로 인해 바람이 솔솔 지나가는 듯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이 특히 《관동명승첩》의 에 더없이 부합됨을 이곳에서 실감 했다. 겸재는 한 소재를 각기 다른 시점과 다른 표현 방식으로도 많이 그렸다. 이는 도 마찬가지다. 사실 겸재의 그림은 전기와 후기가 많이 다른 데, 겸재 특유의 유니크한 필력은 50대 후반과 60 대 초반 이후의 그림부터 두드러진다. 이는 이 무렵이 겸재의 화력에서 각별한 시기임을 방증 한다. 바로 이 시기(청하현감시절)와 이 보다 앞선 시기에(하양현감 시절) 겸재는 서울과 금강산 일대에 국한된 소재에서 벗어나 좀 더 폭 넓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동해 지역은 금강산을 포함, 경승지가 많고, 특히 끝없이 너른 푸른 바다와 흰 모래, 이 곳 특유의 곧게 자란 무수한 소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로 부는 바다 바람 속에서 한층 시원하면서도 거침없는 필력이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감동이란 풍경과 그림 사이에 있다. 5. 다음 날 오전, 망양정으로 가기 위해 동해안 해변을 달렸다. 가는 길목에 있는 월송정을 다시 가보았다. 이는 겸재가 를 그린 장소를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정자에 있는 편액 글씨 중 일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월송정은 어제보다 더 한적했고, 어제 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장소라 할지라도 시시각각 다른 경험을 하게 됨을 깨달았다. 월송정에서 나와 다시 동해안을 따라 대략 30분 쯤 달리자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바닷가에 이르렀다. 망양정이 자리 잡은 산 밑 회집 옆 주차장에 도착한 것이다. 망양정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은 몇 년 전에 가본 금강산 구룡폭포로 가는 길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올해 새로 지은 망양정은 품격 있는 전통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신발을 벗고 망양정 마루 위로 올라서는 순간, 일망무제의 망망대해인 동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계자(鷄子: 닭다리 모양) 난간에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동안, 이곳에 오기 전 잠시 펼쳐 보았던 정철의 의 구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늘 끝(天根)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 인고, 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 지고, 은산을 꺾어내어 천지사방(六合)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하략)… 불과 수 십 년전 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았다던 동해의 고래는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는 정말 실감났다. 그러나 망양정에서 내려와 앞에 있는 안내 글을 읽어보았더니, 이 망양정이 본래의 자리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그러나 안내 글의 내용은 망양정의 역사적 유래와 망양정을 거쳐 간 주요 관련 인물들을 간명하면서도 적절하게 잘 써 놓은 편이었다.) 원래의 망양정은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그냥 스쳐 지나가버린 현 망양 휴게소 자리였다.)에 있었는데 조선 철종 때 이건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망양정 자리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겸재 정선의 《관동명승첩》에 나오는 는 원래의 망양정 자리가 아니다.(조선 숙종이 관동팔경 중 망양정 경치가 최고라 하여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란 현판을 하사한 것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망양정의 절경을 읊은 유명한 시와 글들도 대다수는 지금의 망양정과는 무관하다.) 망양정을 새로 복원할 때 이러한 역사성을 고려하여 원래 자리에 지었더라면 송강이나 겸재의 자취를 더 의미 있게 느낄 수 있을 것이 아닌가?(*그러나 김훈이 쓴 글을 통해 옛 망양정 자리는 무분별한 도로공사로 단애의 허리가 잘려나가 바닷물은 단애 끝으로부터 멀찌감치 쫓겨났고 그 사이는 시멘트 칠갑이 되어 있으며, 정자터도 사방이 깎여져 나가 원형대로의 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있음을 알았다.) 6. 겸재의 관동팔경 그림 중 특히《관동명승첩》의 그림들이 좋은데 물론 제각기 그 풍치가 다르다. 과 는 깎아지른 절벽의 견고함을, 는 가운데가 텅빈 주음법(主陰法)으로 호수의 아늑함을, 는 넘실대는 동해바다를, 는 일렁이는 동해바다와 험절(險絶)한 수직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정자의 오롯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겸재의 그림은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산천의 특징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이는 유례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미 당대부터 이러한 독자성을 인정받았음을 겸재 바로 옆 짚에 살았던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의 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영석은 겸재가 만년에 그린 화첩에 부치는 발문에서 겸재의 화력과 화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선의 이 그림들은 먹을 씀에 먹이 번지는 흔적이 없고 선염에도 법도를 갖추고 있어 깊은 맛이 나고 깊고 깊어 빽빽하고 울창하며 윤택하고 무르익어 빼어나 …(중략)… 조선 300년(*당시 시점임)을 돌아보아도 아직 이와 같은 화가를 볼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나라 산수화가들 가운데 ‘윤곽, 위치 및 (중국 화본에 나오는) 16가지의 준법의 만 가지 흐름이 굽이치거나 한 가닥 실처럼 어지럽지 않다’는 이론과 방법을 제대로 터득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비록 중첩된 산봉우리라 하더라도 오직 수묵으로 한결같이 마구 칠하여 앞과 뒤와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과 얕고 깊음, 그리고 평평한 흙과 돌의 기세를 제대로 변별하지 않았으며, 물을 그림에도 잔잔함과 급함을 구별하지 않고 두 붓을 새끼 꼬듯이 꼬고 아울러 잡고 그렸으니 어찌 산수(화)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이와 같이 말했더니 겸재 또한 그렇다고 했다. 겸재는 일찍이 북악산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있으면 앞산을 마주하고 그 산의 주름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보며 먹을 씀에 저절로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의 명승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 유람하고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중략)… 그가 사용한 붓을 묻으면 거의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화가들이 상투적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떨쳐버리니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정선으로부터 새로이 열렸다. 위의 글은 겸재가 그림을 하도 많이 그려 ‘그가 사용한 붓을 묻으면 거의 무덤을 이룰 정도’라는 사실은 물론 겸재의 화풍의 독자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실 겸재의 화풍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것이며, 이는 결국 겸재가 우리의 산천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이후 외세에 의한 단절의 역사를 겪으면서 현재 우리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 대개 이 사실을 모르는 실정이다. 이러니 일반인들의 전통회화에 대한 소양과 나아가 전통문화에 대한 무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월송정이 지금은 TV 사극 드라마 촬영장만큼도 별 볼 것 없는 관광코스에 지나지 않음은 바로 이런 까닭도 있다. 7. 역사는 결코 단일한 선형의 시공간에서 형성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번 월송정과 망양정에서의 여정을 통해 왜 겸재의 그림이 투명한 햇살아래 바람이 솔솔 흐르는 듯한 지 알 수 있었다. 겸재의 화폭 속 세상은 그 힘찬 ‘선묘’만큼이나 기운이 넘치면서도 또한 여백으로 확산되는 ‘옅음’의 다양한 변주만큼이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그만큼 겸재의 그림은 생성과 소멸을 아우르는 세상의 실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월송정과 망양정을 떠올리면 역사와 삶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대에 따라 정자는 폐정되었다 다시 세워지곤 한 것이다. 이처럼 단절과 계승의 반복됨이 역사이지만 현시대의 전통 문화와의 단절은 그 전과 양상이 사뭇 다르다. 누정문화를 형성한 특유의 장소성은 망각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주소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바로미터다. 2005년 8월 19일 도 병 훈
22 no image 친숙함과 낯섦 사이의 변주, 이태한의 개인전을 보고
소나무
4367 2007-06-05
친숙함과 낯섦 사이의 변주, 이태한의 개인전을 보고 1. “사실상 미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1950년대 출간된 이래 현재까지도 미술 감상 입문서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미술사 책인 곰브리치의『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미술가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미술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몇 가지 제안을 하는데, 우선 미술을 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 하지 않은 태도’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미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신비한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곰브리치가 무엇보다 미술 이해의 장애 요인으로 경계한 것은 지적인 ‘허영’이다. 즉 앞서 언급한 편견에서 자신은 벗어나 있는 척하거나 어정쩡한 미술지식을 과시하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그래서 미술 감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참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곰브리치는 말한다. 2. 그저께(6월 29일), 인사동의 관훈 갤러리에서 이태한의 조촐한(?) 개인전 오프닝이 있었다. (요즈음 무슨 특별전이다 비엔날레전이다 해서 각종 미디어의 힘으로 포장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대형전시회가 많다. 전시회의 성공(?) 여부도 미디어를 통한 선전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어를 동원하지 않는다면 ‘조촐한 전시회’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가치와 의미는 ‘관람객 숫자’와는 상관이 없다.) 이번 개인전에서 이태한은 세 점의 작품을 제시했다. 그것은 영상매체를 이용한 , , 그리고 설치 작업인 이다. 먼저, 은 얼핏 프로파간다적 선동성, 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연상케 하지만, 움츠리고 있는 사람 위로 다만 붉은 깃발만이 창공에서 바람에 의해 펄럭일 뿐이다. 사실 전시장 현장에서 체험하는 은 일반적 통념과 거리가 멀며, 통념에서 ‘탈영토화’한 이미지다. (지각 있는 작가라면 그저 일반적 통념에 호소하기 위해 작품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작품을 볼 때 이런 식으로 한 단계 더 깊은 호기심을 갖고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본다면 작품의 묘미를 단번에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지향하는 바는 또 하나의 서사적 의도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친숙한 통념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이미지로 한정짓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붉은 깃발의 이미지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것이며, 바로 친숙함과 낯섦 사이의 끊임없는 떨림 속에 이 작업의 본질적 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작품인 은 인간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모든 생명체는 호흡하는 존재로, 호흡함으로서 살 수 있다. 호흡은 모든 생명체의 알파와 오메가다. 그런데 이미지는 그저 당연한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숨쉬는 인간의 모습만을 미묘(?)한 변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은 앞의 영상매체와 같은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이미지가 아닌 실제로 눈앞에서 움직이고 반응하는 물질이라는 점에서 그 느낌이 다르다. 다시 말해서 벽면 바닥과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용 구두 한 짝과 끈적끈적한 액체 물질(공업용 그리스)의 반복된 접촉은 그것이 단순원리의 기계에 의한 반복적인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통념도 어긋나게 하고자 하는 변주임을 느끼게 한다. 3. 현대미술가들은 ‘패러다임’을 해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알다시피 패러다임이란 사물을 보는 방식, 관점, 인식의 틀, 신념을 말한다.(*A paradigm is the way you see something, your point of view, frame of reference, or belief.) 이런 의미에서 패러다임이란 말은 흔히 우리가 잘못 알고 있듯, 매우 거창한 말(거대담론)이 아니라 사실 지역적, 풍토적, 문명적 배경에 따라 개개인마다 갖고 있는 일종의 편견, 즉 선입견이다. 예컨대 프톨레미(Ptolemy,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수학자) 이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듯,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인류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변천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근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패러다임의 해체가 가속화되는 것도 단지 후기 모던적 징후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의 패러다임의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전환의 계기는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환에 기인한다. 그러나 과학은 이성적(합리적, 계량적) 언어라는 틀 속에서 어떤 가설들을 입증해가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언어적 기호라는 틀로 그 인식의 범위를 제한하는 측면이 있다. 지각과 감수성에 호소하는 예술영역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간결하고도 직관적인 방식으로 교란할 수 있다. 사실 마르셀 뒤샹 이래의 현대의 미술의 주된 특성이란 당대의 패러다임을 시지각적 방식으로 비틀어서 해체한 데 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미술가의 시지각적 감수성과 첨예한 현실인식을 전제로 하며, 이런 의미에서 현대미술은 무엇보다 작가마다의 새로운 의도(기존의 인식의 틀을 해체하려는)와 그로 인한 표현이 그 쟁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틀, 즉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없이 서구의 현대미술이 수용되었다. 현대미술에서의 문제 제기의 방식을 현대미술의 양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국현대 미술의 이 기묘한 현상은 우리 미술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미술계에는 ‘스타일리스트’가 만들어내는 미술만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이는 남대문 시장의 가짜 명품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럴듯한 가짜일수록 다만 진짜처럼 보일 뿐,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사실 가짜 상품은 대개 고객들이 가짜인 줄 알면서도 단지 명품을 살 돈이 없어서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술판은 가짜를 마치 진짜인 양 속인다. 이것이 우리나라 유수의 상업화랑들의 한결같은 작태다. 결국 순진하고 무지한 사람만 속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미술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도, 또한 미술문화의 ‘사이비성’과 ‘저열성’도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자명하다. 4. 이태한의 작업에서도 잘 드러나듯, 현대미술은 ‘탈영토화, 혹은 탈코드화’로서의 이디엄이 문제다. 즉 현대미술이란 당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혹은 지배적인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담론을 가로지르고자 하는 전략적 방법 속에 그 특성이 드러난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에피스테메), 혹은 인식의 틀(패러다임)을 부정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 이로부터 현대미술은 비로소 그 첫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 친숙하고도 낯선 여정의 길로 말이다. 2005년 7월 1일
21 no image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고
소나무
5426 2007-06-05
을 읽고 1. 우리 역사상 최고의 고전은 어떤 책들일까? 나는 삼국시대의 경우, 원효의 와 을, 고려시대는 일연의 를, 조선시대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를 꼽는다. 먼저 원효의 저서는 나중에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통불교적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현실적 실천성이 두드러진 토착화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는 이 땅 우리 민족 서사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물론 조선 시대의 그 수많은 고전들을 제쳐놓고 일종의 기행문이자 여행기인 를 최고의 고전 반열에 올리다니!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전 중에는 지금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일지라도 사실 당시에는 그 시대적 통념(봉상스)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선 가 그 대표적인 고전이다. 는 당대의 이념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 시대의 통념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이른바 ‘문체반정’을 야기 시킨 배후에 이 가 있었다. 조선시대는 세 번의 반정이 있었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18세기 후반인 정조 때 정조가 주도한 문체 반정이다. 이 중 문체 반정은 앞의 정치적 반정과 달리, 말 그대로 당시 유행하던 문체가 불온하다고 해서 그를 바로 잡으려 한 것이다. 이는 경학에 벗어난 글이 윤리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문체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의 형식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정조는 불온한(?) 문체를 단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조선시대의 규범화된 언표체계인 고문(古文)에 근거한다. 고문이란 중국 고대에서 완성된 문장의 전범으로, ‘육경(六經)’의 문장과 사마천과 반고로 대표되는 선진양한(先秦兩漢)의 문장 및 한유와 소식 등 당송 팔대가의 문장을 뜻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러한 틀에서 벗어난 이른바 ‘패관잡기(稗官雜記)’로 지칭된 소품문, 소설, 고증학 등의 이질적인 언표들이 번성하게 된다. 이 중에서 소품문이 가장 성행하는데, 소품문이란 말 그대로 짦은 글이다. ‘촌철살인’이란 말을 연상해보면 짐작이 가듯, 이러한 글은 뛰어난 기지와 창발성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문체다. 그래서 기존의 고문들과 달리 소품문은 어린아이, 여성, 예인(藝人) 등 ‘소수적인’ 존재들에 주목한다. 나아가 ‘지극히 가늘고 작은 것’ 가을 나비가 꽃 꿀을 채집하는 것 등, 사소하고 미세한 것에도 주목한다. 우주의 이치를 논하는 형이상학적 학문에서 벗어나 지극히 섬세한 정감의 떨림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품문이 성행하게 된 배후에 바로 ‘연암’의 ‘연암체’가 있었으며, 이러한 특성이 집약된 책이 바로 이다. 연암은 스스로 과거시험을 거부한 사람이다. 나중에 비록 낮은 벼슬은 하지만 끝내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관료(대부)가 되지 않고서는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않은 시대에 연암은 당대의 통념을 뛰어 넘는 삶을 살았으며 은 그의 이러한 삶이 전제된다. 이란 책은 저자인 고미숙이 연암의 를 , 유동적인 변화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던 들뢰즈/가타리의 저서인 의 시각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를테면, 유목, 유목민(노마드), 리좀, 수목, 표현기계, 배치, 탈영토화, 재영토화 등 같은 용어는 에 나오는 주요 개념들이다. 고미숙은 와 을 접목시킴으로써 새롭고 신선한 사유의 지평을 연다. 따라서 이 책은 연암 박지원과 들뢰즈/가타리와 고미숙의 생각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셈이다. 2. 는 1780년(정조 4년) 연암의 삼종형이 정사(正使)로서 당시 청의 황제였던 건륭제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갈 때 비공식적 수행자로서 동행하게 되면서 쓴 초고를 토대로 한 연행록이다. (총 26권 10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책이다) 즉 압록강에서 연경(빼이징)까지 약 2천 3백여 리, 다시 연경에서 열하까지 700 리, 토탈 육로 3천리를, 고루한 조선 사대부들은 물론, 일자무식인데다 고지식하기로는 ‘환상의 커플’인 하인 ‘장복’과 마두(馬頭) ‘창대’와 함께 강행군한 천신만고의 대장정을 너무도 자세하게 그린 책이 다. 는 압록항 도강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여행 내내 야음을 틈타 혼자서 숙소를 빠져나와 현지 중국인들과 밀회하면서 필담을 나누는 잠행과 모험을 반복한다. 백탑(白塔)이 보이는 요동 벌판에 이르러 드넓은 평원을 보는 순간 연암은 말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고.” 그리고 이어 천지간에 아무 막힘이 없는 사방을 돌아보며 이렇게 외친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하구나! 라고 말한다. 이어 열하일기엔 ‘호곡장론(好哭場論)’이 펼쳐진다. 그런데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열하’에 가게 된 것은 애초에 일정에 없었던 뜻밖의 일이었다. 건륭제가 북경에 있지 않고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열하에 있는 피서 산장에 있으면서 조선 사행단을 급히 불러들이는 돌발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연암은 우여곡절 끝에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 이곳에 갔을 뿐 만 아니라 그곳에서 만수절 행사에 모여든 온갖 이민족들 ― 몽고, 이슬람, 티베트 등 ― 기이한 행렬을 목격하게 된다. 이 때문에 열하일기에서 ‘우발적인 역동성이 가득찬’ 부분(열하에서의 희극적인 ‘대소동’사건)은 바로 이 열하에서의 체험에서 나온다. 고미숙에 의하면 는 타자의 눈을 통해 조선의 문화나 습속을 바라보는 시점 변환, 사이에서 사유하기 등이 열하일기의 주된 서술적 특성이다. 예컨대 자신을 포함한 조선 사람들이 타자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라는 시점에서 쓴다거나 하는 것은 전자의 예이며 ‘열하로 가는 무박나흘의 비몽사몽의 대장정’은 ‘사이에서 사유하기’이다. 아래는 북경 천주당에서 연암이 양화(洋畵)를 본 소감으로서 미술사적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림에는 한 여자가 무릎에 5, 6세 된 어린애를 앉혀두었는데, 어린애가 병든 얼굴로 흘겨서 보니, 그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차마 바로보지 못하는가 하면, 옆에는 시중꾼 5,6명이 병든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참혹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위의 인용 글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에 그려진 천주교(기독교)는 ‘수난과 원한의 종교’다.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서학인 천주교에 비판적인 사람이 많았는데, 바로 천주교의 이러한 측면 때문이다. 연암의 위 글은 동양에 수용된 서양의 종교의 모습이 이방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처럼 는 고미숙의 재해석을 통해 드러나듯 어떤 대상과도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유목적 시각이 담긴 책이다. 특히 고미숙의 해석이 돋보이는 부분은 에 나오는 그 유명한(하룻밤에 아홉 번을 강을 건너는 사실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탈 주체화의 극한’으로 해석하는 대목이다. 이런 의미에서 는 단지 여행기가 아니다.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글쓰기의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유목적 텍스트이자 지도다. 그래서 는 읽으면 읽을수록 당대의 지배적 이념인 성리학의 고루한 편향을 넘어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런 고전이다. 그런데, 연암이 움직일 때마다 ‘웃음의 파장’이 형성될 정도로 일단 연암의 는 매우 재미있다. 글은 저자의 삶의 흔적이다. 연암은 타고난 장난꾸러기로서 매우 재미있게 산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유머 능력은 예컨대 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중국여행 중 상점의 벽 위에 한 편의 기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베끼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상점주인이 이상해서 묻자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외다.” 사실 이러한 유머의 배경에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현실인식이 깔려 있다. 이 때문에 박지원의 ‘유머러스’한 면모 속에서 우리는 그가 살았던 당대의 현실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의 ‘유머러스함’은 비극적 현실에 대해 희극적으로 대응한 역설적 삶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강렬한 흐름만이 범람하는 광야 혹은 평원, 때론 더할 나위 없이 경쾌한가 하면, 때론 장중하고, 때론 한없이 애수에 젖어들게 하는, 마주치는 것마다, 강렬한 악센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공간적 편력, 그것이 열하일기’라 한 고미숙의 해석은 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관점이다. 이란 책책의 미덕으로 또한 책 말미에 있는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의 비교를 간과할 수 없다. 동시대에 살았지만 너무도 대조적인(요컨대 다산이 인간중심주의자로서 ‘존재론’적 주체를 강조한다면 연암은 인성과 물성이 서로 융섭하는 ‘생성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의 사상과 삶을 비교함으로써 흔히 두 사람 모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근대의 맹아를 선취했다는 식으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근거 없는 것인가를 예리한 시각으로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3. 조선시대의 고전은 대개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고전을 현재 시각에서 번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번역을 통해 비로소 고전은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은 언제나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고전인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번역되는 책들은 원전과는 또 다른 가치를 지니며, 사상과 학문의 역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심화된다. 고미숙의 책을 통해 잘 알 수 있듯, 는 여행의 기록이지만 거기에 담긴 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접속의 장이며, 이러한 만남의 접점 속에서 새로운 담론이 펼쳐지는 장이다. 연암 사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러니와 역설, 긴장과 돌출은 ‘유머러스한’ 담론적 전략이다. 즉 는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 곡진함과 노마드적 유연함, 그것이 ‘삶의 질’임을 알게 하는 책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연암은 시점 변환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던 유연한 상상력을 지닌 보기 드문 예인(藝人)이다. 이처럼 다시 읽기를 통해서도 ‘삶과 예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2005년 6월 21일 도 병 훈
20 no image 김병기 선생과 오상길 선생의 작가대담을 읽고
소나무
5653 2007-06-05
김병기 선생과 오상길 선생의 작가대담을 읽고 1. 어제 교보문고에 들렸다가 우연히 오상길 선생이 엮은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Ⅳ(VOL.3)』, (ICAS 2004)를 보게 되었다. 사실 오 선생은 지난 2000년 초부터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이란 무엇인가’라는 차원에서 현대 미술 다시 읽기 자료집을 후배들과 함께 편찬, 발간해왔으며, 그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청음사, 2000),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Ⅰ,Ⅱ(VOL.1,2)』,(ICAS, 2001),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Ⅲ(VOL.1,2)』,(ICAS, 2003)를 엮어내었다. 그래서 이 책들 중 어떤 책은 출간 기념회에서 사기도 하고, 또 몇 권은 그저 얻기도 했으나, 이번『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Ⅳ권』은 작년에 출간된 책이라 늘 봐야지 하는 가운데 어느 덧 1년이 훌쩍 지나버려 처음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보 문고 미술 분야 코너에 마침 이 책이 꽂혀 있기에 펼쳐 보다가 김병기 선생과의 대담에 눈길이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 읽고 말기엔 자료적인 가치는 물론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내용들이 그 대담 속에 있었다. 책을 사서 집에 와서 다시 찬찬히 읽었다. 장장 7시간에 걸친 대담 내용을 자잘한 글씨로 대하면서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2. 나는 지난 2004년 가을에 있었던 이승택 선생 개인전 오픈 날에 김병기 선생을 뵌 적이 있다. 김 병기 선생은 1916년 생으로 소 그림을 유명한 이중섭과 평양 보통학교 동급생인 사람으로, 동경에서도 유영국, 김환기, 이중섭 등과 같이 공부한 분이다. 그날 김병기 선생이 89세의 고령임에도 마치 50대 후반처럼 정정한 모습에 매우 놀랐고, 1930년대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에 얽힌 비화와 해박한 지식, 그리고 현대미술에 대한 통찰에도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김병기 선생의 말 중 기억에 남은 것은, 우리는 한 세기동안 마르셀 뒤샹에서 요셉 보이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 다 배웠다는 것과, 흔히 우리나라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교량적 위치 즉 ‘복도’로 보는데, 그럼에도 한국만이 간직하고 있는 에센셜(essential)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양은 만리장성 남쪽의 동양과 만리장성 북쪽의 동양이 있는데 만리장성 남쪽의 은은한 전통은 우리의 사랑방에서 이어져 왔고 만리장성 북쪽의 전통은 안방에서 이어져 왔는데, 이 북쪽의 전통은 색동저고리에서 볼 수 있듯 매우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로 대변되며, 이는 역동적인 농악을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인물 중에 이영희 선생이 있다. 이영희 선생은 바로 , ,,등의 저자로서 그의 모든 책과 글을 관류하는 공통의 특성은 동시대인의 통념을 뒤엎는 진실의 힘에 있다. 중국의 루쉰처럼 비타협적인 진실주의자인 그는 ‘오탁악세’의 우리 근 현대사에서 자신의 삶의 행보를 스스로 결정한 보기 드문 ‘자유인’인 것이다. 이 때문에 명예와 지위와 부를 누리는 사람보다 나는 이러한 분이 우리 근현대사의 실질적인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김병기 선생과의 대담을 보면서 미술계에도 이 이영희 선생 같은 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참된 예술의 세계는 추상같은 진실의 세계와 많이 유사하면서도 이조차 넘어서는 영역이며, 이런 의미에서 김병기 선생의 삶에서는 더욱 풍부한 정신적 함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현대 미술 다시 읽기 Ⅳ』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 사실은 먼저 그간 일부 평론가들에 기술된 비평적 ․ 미술사적 진술이 얼마나 단선적이고 편협한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김병기 선생과의 대담에서는 역시 한 개인의 의식과 삶은 당대 현실과 분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을 겪고, 그리고 동족상잔인 한국 전쟁 이후의 온갖 험난한 시대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역경어린 삶은 그 자체로서 감동이었으며, 그만큼 역사적 시점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실상과 그 연장선에서 오늘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 대담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나이 차이란 아무런 장벽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 했다. 무엇보다 그간 오 선생이 줄곧 한국 현대 미술에 대한 문제 제기―‘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간과한 채 특정인의 주도에 의한 집단 운동 중심으로 정설인양 서술되는 한국현대미술사에 대한 비판―가 옳았음을 원로 미술가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선생은 대담자로서 사전에 우리 현대 미술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적절히 질의하여 세대를 넘어 선 밀도 있는 대담을 함으로써 그 질을 높였다. 그렇지만 아래 글들은 이번 대담 중 미술사에 관련된 구체적 사실에 대한 언급보다 작가로서 삶과 예술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관련된 주요 대목중 주로 김병기 선생 말을 중심으로 일부 발췌한 것이다. 3. 오상길 :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고려대학 소장품들 중 문인화 전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겸재의 앞에서 30분 동안 굳어 붙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열등감을 느꼈었어요. 제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의식은 역사에 대한 문제, 예컨대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역사적으로 리얼리티를 어떻게 소화해가야 하느냐 하는 곳에 있는데, 정작 어려서부터 공부해온 것은 서구미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체계였고, 그것에 깊이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제 딴에는 매우 치열한 삶을 살았고 그런 조형의식을 추구했다고 생각했는데, 겸재의 그림을 보면서 그 세계가 저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겁니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예술이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따뜻하고 빛나는 리얼리티, 순수한 예술이 가지고 있는 리얼리티를 본 겁니다. 김병기 : 내가 충분히 파악했는지 몰라도 좌절과 고민과.... 이런 것이 참 귀중한 겁니다. 일전에 성곡미술관 전람회 때 박서보가 아! 이거구나! 알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서보 보다 선배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자기가 알겠고 그렇게 했을 때는 남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모르겠다고 하는 거 있잖아요? 좌절과 고민,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이거다! 하고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좋은 거예요. 뎃상을 하다가 이거 아니다 할 때, 그게 좋은 것입니다. 그 정신의 상태가 물질과 결부되면 그것은 작품이에요.…(후략) 김병기 : 천재 이야기가 나와서 가끔 하는 얘기가 있는데, 자코메티하고 브라크가 피카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자코메티는 연령이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피카소가 대선배지요. 그런데 자코메티가 하는 얘기가 ‘피카소가 예술가인줄 알았더니 그냥 천재에 불과해’하는 말이 있어요. 전기에 나와요. 참 가슴이 섬뜩한 얘기예요. 천재라 하면 최상의 존재인 줄 알았는데, 천재 위에 예술가가 있는 겁니다...(중략).. 천재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기술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인데, 기술이라는 것은 좀 하면 다 돼요. 재주는 다 있는 겁니다. 재주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합니까? 간단히 말하면 천재 아닌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하느냐 말입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이 힘든 거예요. 정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병기 : 나는 오상길씨가 얘기하는 의문에 공감합니다. 그렇다, 아니다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의문에 100% 동감한다는 것입니다. 의문은 끝까지 추궁하세요. 나는 세잔부터 출발한 20세기의 온 과정을 정신적으로 다 겪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개인이 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한다고 동요되지 않아요. 단지 좀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본질적인 인 입장에서 나를 형성한 전통으로서의 한국, 동양,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서양에서 오히려 동양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동양에서는 서양을 생각했어요.(후략) 오상길 : 저는 비록 한 시대의 예술가이지만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저와 함께 살고 있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단면을 제가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은 제 이전에 제 나이 때 활동하셨던 선생님 같은 분들이나 조상들의 연장선상에 있고, 또 후손들이 미래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 있고, 그것이 요구되는 방향이 있는데, 그 중간 중간에 역사적인 방향과 관계없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가치들이 전도되고, 물론 그것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제가 역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 역사를 다 살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살고 있는 현실에 충실해야할 이유가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병기 : 나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볼 때 한 작품을 가지고 그 작가의 보지 않습니다. 이 작품과 그 다음의 작품으로 전개되는 그 공간을 봅니다. 거기서 한 작가를 봅니다.…(중략)…30년 동안 같은 것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후략) 김병기 : 서툰 선전가들이 자꾸 자기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누군들 자기선전 안하는 사람이 있나? 다 하고 있다고. 안 하는 척하고 다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모르겠어” 그것도 하나의 선전이에요. 남의 학교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박서보가 가르칠 때 형상성이 나오면 “집어치워” 그랬다는 겁니다. 왜 집어치우라는 거죠? 내가 존경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교수는 있어요. 귀스타브 모로 인데, 모로의 교실에서 마티스도 나오고 루오도 나왔어요. 불란서 에꼴 데 보자르에 모로 교실이 있고, 가령 부글로 교실 같은 것이 있었거든요? 아카데미샨이지. 부글로는 다 나를 따르라 하는 식의 아카데믹한 교육의 대가였는데, 막상 거기서는 시원한 작가가 안나왔어요. 그런데 어째서 모로 교실에서 마티스도 나오고 루오도 나왔는가 했더니, 어떤 학생 캔버스 앞에 가서는 ‘넌 왜 캔버스만 보느냐, 대상은 보지 않고, 문제는 대상인데.’ 또 어떤 학생 앞에 가서는 ‘너는 왜 대상만 보고 그리지? 문제는 캔버스인데.’ 이런 정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학생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 상황을 지적한 것입니다....(후략) 김병기 : 잠깐 또 하나. 아주 쉬운 말로 하면, 우리가 외국 것을 받아들여 옮길 때 그 씨앗을 토양에 심어야지, 그 꽃을 꺾어다가 심어본들 꽃이 성장하느냐는 겁니다. 그 씨앗이라는 것은 그 땅의 근본 자세, 기본정신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서양에서 배울 점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한 기본자세를 가져와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김병기 : …(전략)새로운 시간과 부딪혀서 어떤 물질이 결부되는 정신상태, 이것이 작품일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좀 비워 놓을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 강하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잘못 현실을 파악할 수도 있고...(중략)...작품이 방정식처럼 풀어내는 계산식은 아니에요. 1 더하기 1인 2가 아니라 3이고 9고 0이 되는 이상한 상태의 결론이 예술이에요. 그러나 코가 찡해지는 것이 있잖아요? 뭔지 설명은 안되지만. 베르그송인가 누가 얘기 했듯이 감동은 코끝에서 오는 거예요. 뭔지는 몰라도 짜릿한 감동을 줍니다. 만인이 나쁘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짜릿한 게 있잖아요? 만인이 좋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또 안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어떤 게 좋은 고 하니 본인이 짜릿해지는 게 좋은 거예요. 나는 모든 얘기에 공감하면서 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김병기 : 내가 가끔 하는 얘기가 있는데, 고려시대 청자는 그 오리진이 중국 송입니다. 송나라에서 온, 그 method는 중국인데 고려 사람들은 그 흉내를 낸 거예요. 그런데 고려청자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상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흙에 홈을 파고 그 홈에 검은 흙과 흰 흙을 집어넣은, 그래서 검은 나무도 그리고, 흰 학도 그리고, 상감이라는 방법을 고려 사람이 발견한 거예요. 중국은 양각, 음각이 있어서 울룩불룩한 것을 좋아하지요. 한국사람은 매끈한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중국 청자는 새파랗지만, 고려의 청자는 새파란 게 아니고 회색 기운이 돌아요. 어떤 것이 더 깊이 있는 청자색인고 하니 고려의 색인 것입니다. 고려의 하늘처럼 아득히 깊이 가서 회색으로 변해요. 그런 은은한 게 있습니다. 송자는 컴퍼스를 대고 그은 것처럼 정확한 기하학적인 원이지만, 고려 사람들이 그린 원은 약간 찌그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기하학적 컴퍼스 원은 요만하데, 고려 사람이나 조선 사람이 만든 원은 크게 둥근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백자인들 중국에 없겠어요? 모든 오리진은 중국에 있지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이것을 이런 풍토에서 우리 구미에 맞추어서 만들었던 겁니다. 특히 도자기에 그게 많이 나와요. 그것이 한국 사람이 이어가야 하는 전통인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해 나가는, 그런 것의 정체는 자연입니다. 중국은 인공적이에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좀더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의 묘미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 또 일본사람들이라서, 임진왜란 때 한국 도공들을 끌고 가서는 한국의 자연미를 내기 위해서 일부러 비꼬기도 하고, 손자국도 넣기도 하고, 찌글하게도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너무 지나쳤어요. 그게 스시에 나오는 그릇입니다. 일본사람들의 치명적인 결점은 자연미를 자연 그 자체로 내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내는 거예요. 여기에 확실히 한국의 위치가 있는 거예요. 그런 체질을 현대미술에 살리면 되는 거예요. 특히 남북이 갈라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참 괴로워요. 평양사람인 나는 고향도 없어요. 이런 특수한 극한 상황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에요. 독일도 다 해결되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정신이 나올 수 있는 귀한 환경적인 조건이에요. 우리가 뭔가 된다고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오랜 괴로운 분단의 시기가 앞으로의 장래를 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어요. 나는 모든 걸 낙관합니다. 김병기 : 백남준이 다다거든요? 다다는 부정을 하는 거예요. 부정을 한 번 더 부정하면 긍정이 됩니다. 나는 그 긍정의 세계를 모르고 살아왔어요. 부정에 부정을 연속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긍정의 세계의 아름다움, 그 황홀함, 그걸 생각합니다. 김병기 : 그런데 백남준은 부정하는 스타일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어요. 그 놈은 나쁜 놈이야.(웃음)‘세상은 지루 합니다.’ 그걸 누가 몰라? ‘동서는 하나입니다.’ 우리도 다 아는 거예요. 그걸 한 번 더 넘어야지요. 그 넘은 것을 우리는 요구하는데, ? 다 아는 얘기예요. 오상길 : …(전략) 제 눈앞에는 뿌연 커튼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렴풋이는 보이는 것 같은 데, 현재로서는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마구 달리고 있고, 이것저것 파헤치면서 뒤적거리고 쌓아 모으기도 하고, 흩어버렸다가 다시 정리해보기도 하고…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많이 부족해서 뭔가 뚜렷이 보고 싶은 욕망이 강한 것 같아요. 답답하기도 하고… 김병기 :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아직 오십도 안됐어요. 굉장한 시간이 있어요. 60이 되면 다 늙은 것 같지요? 아주 좋은 시간이 오고, 70에 더 좋고 그렇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늙었다고 생각할 때 늙는 거예요. 4. 마르셀 뒤샹과 카반느의 대담이 그러하듯, 작가와의 실제 대화 내용은 당사자의 직접적 언급이라는 측면에서 그 어떤 비평적 논의보다 자료적 가치는 물론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위 두 분의 대화 속에는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과, 사려 깊은 지혜와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인간의 감성적 풍모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이러한 어록은 몇 백 권의 책으로도 전할 수 없는 내용을 단 한마디 말로 전하기도 한다. 위 대담을 통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시대의 병폐로 무엇보다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꼽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마음과 뜻이 통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간관계는 없는 것이다. 현실적인 처세에만 능한, 즉 교활하게 사는 사람들은 얄팍한 처세술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그러한 처세술의 차원에서 참된 만남이 가능할 리가 없다. 어쩌면 예술가들이기에 가능한, 세대를 넘어 선 두 작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 예술의 참 가치와 예술가의 길은 당대의 명예와 지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야말로 ‘코끝을 찡하게 하는’ 매력과 감동에 있다. 바로 이것이 부정을 넘어선 ‘긍정의 아름다움, 그 황홀함’이 아니겠는가? 2005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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