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현
조회 수 : 1899
2016.08.17 (1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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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스트: [아리랑의 노래] 일본 이와나미(岩波) 문고판 ( 443-1)

 

   2판 서문(저자의 한 사람인 님 웨일즈가 쓴 책 서문. 님웨일즈가 쓴 이 서문은, 김산의 일대기로 남겨 놓은 [아리랑]의 일본판 서문으로, 김산이 활동했던 시기의 중국공산당 투쟁사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요약해 놓은 부분이다.) ([아리랑]의 본문은 영문으로 먼저 출판되었지만, 그 내용은 영..한구판 공히 같은것이다).

 

 

序文                                        

 

1934, 남편 에드가 스노(Edgar Snow)와 나는 북경에서 5말일 정도 떨어진 海(하이라이엔)이란 마을의, 미국기금에 의해 세워진 燕京大學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우리들은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 였고 이곳은 淸朝의 官話가 아직 통용되고 있던 지역이라 안성 맞춤의 이상적인 곳이 였다. (내가 왜 官話를 배우려고 했었는지는 알숭달숭 하지만). 중국어와 중국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에드는 작품집 [살아 있는 중국(Living China)-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1936]에 실얼 요령으로 중국의 단편소설을 번역, 편집하고 있었고, 나도 여기에 게재할 [현대중국의 문학운동]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에드는 新聞學科로부터 강의 의뢰를 받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영어로 하는 강좌이면 무엇이던지 출강하고 있었다. 중국어로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지금도 북경정부에 재직하고 있는 그 유명한 張東孫과 더불어, -(나는 물론 영문 택스트를 사용하지만)을 청강하고 있었다. 불교. 도교. 유교에 관해서라면 중국에서는 단연 일류의 학자이던 許地山의 지도를 받았었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청화대학에서 馬友蘭의 중국철학사강의도 듣곤 했다. 중국미술의 특강을 받고, 중국경제사, 서양철학사도 배웠다. 당시 연경대학에서는 서양인 여덟명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 다-.폿드도 미국의 중요한 중국학자로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펜실바니아대학에서 가르켰다.

 

     해정(하이라이엔)에 있었던 때, .버크(Perl S. Buck- [The Good Earth(大地)의 저자]와 리처드.윌슨이 와서 우리들과 함께 지냈으며, 우리들은 서로 찬구가 되었다. .버크는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와 옆으로 일자로 쪼개진듯한 입술을 한 표정이 풍부한 얼굴로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였었다.

    

      그 이후 나는 윌슨이 편집하고 있었던 잡지 [아세아 Asia]에 정기적으로 글을 실기도 하였다. 내가 쓰고 있었던, .웨일즈라고 하는 필명은 에드가 만들어 준 것으로, 은 희랍어로 [이름]이란 뜻이고, 웨일즈는 나의 혈통에서 얼마간의 웨일즈계통이 있었기 때문 따온 것이었다. 이 필명은 나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필요했던 가명이었다. 연경대학 학생들은 처음에는 내가 저자인줄을 모르고 나의 시 [오래된 북경]을 게시판에 부쳐 놓기도 했다. 그 글은, 우리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것 죽음과 같은 나날, 질식상태, 기적의 12 9일의 질풍속에서 만들어 진 죽음과 같은 고요한 분위기와 꼭 맞아 떨어 젔었다.

 

     북경으로 돌아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구에 치아 챤 13변지의 귀신이 나올법한 집을 반 쪽을 빌려 그 문쪽의 옆방에서 에드가.스노와 같이 1936년부터 37년에 걸쳐 [중국의 붉은 별] Red Star Over China을 쓰고 있었다.

 

      학생들은 쫓겨 다녔으며, 믿을 곳을 잃어 버리고 절망적이 되어 아연하였다. 13변지의 이 집은 129일의 학생운동의 온상이 되었고 이어 백색 태로가 일어 나기 시작했다.

 

      1935년의 말, 중국은 파시즘의 절정기에 놓였었다. 白區 안의 공산당관계기관은 모두 괴멸되고, 북경에 살고 있었던 자들은 투옥되던가 처형되었으며 아니면 보신을 위해 파시스트측에 붙어야 했었다. 데모는 비합법화되고 학생들은 본보기의 처형만 기다리고 있었다. 북경을 포함한 화북의 일본 점령이 확실시 되면서 항일운동은 비합법화 되었다. 그러나 연경대학은 선교사의 관리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만은 학생들은 얼마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29일의 학생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중국의 지식인은 대량으로 좌익에 기울어 젔고 파시트들 까지도 좌로 기울어 지고 있었다. 들불과 같이 그 勢는 중국전토로 퍼저 갔으며, 內戰停止와 항일통일전선을 요구하였고, 일본에 대해 처음으로 저항을 표명하였다. 이야말로 중국현대사상의 대사건이었다.

 

    12 9일의 운동은 연경대학의 3학년이 불을 댕겼다. 張조린-학생회의 위원장, 장화-경제학전공으로 1936년에는 에드가.스노의 통역으로써 서북에 동행하였다(1972,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국련대사가 되어 있었다). 진한백-신문학과의 학생, 후에 상무인서관의 편집자로써 중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1938년 이래 1970년 죽을 때 까지 周恩來의 비서를 했던 단팽(中國國聯首席代表 치안당호아의 부인) 12 9일의 히로인 였고, YWCA의 학생부주임간사로 지금은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는 여동생의 균뷰션은 129일의 여성3 -다의 한 사람, 남은 두사람은 리민(지금은 북경에 있다고 황화가 알여 주었다)과 중국에 다년간 YWCA의 노공부 주임간사를 역임한 후 뉴-요크에서 Y.Y.스웨이와 결혼한 장슈위(張淑義)이다.

 

    이와 같이, 1930년대 우리들의 친구였던 연경, 청화의 학생들은, 오늘날 주은래의 영향하의 일파에 가담하여 米中間의 화해를 기약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1935년에 생명이 위태로웠던 학생들이 백색테로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서 외국의 비호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적적으로 에드가. 스노가 닉슨대통령의 방중에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냈던 것이 같은 129일의 일이다.

 

    이 일들은 金山을 떠 올리게 한다. 당시 나는 몰랐지만 마침 그때 그는 북경 및 그 인근뿐만 아니라 다름 아닌 여기 해정에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백색 테로]가 최악상태였던 기간중 그는 중국의 시민권을 얻어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의 서기를 하고 있었으며, 그는 살아 남았으나 당조직은 완전히 화해되었다. 1935년의 봄까지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옥외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북경에는 당과 조직과 연락이 닿아 있는 공산주의자는 이미 없었다고 본다. 우리들과 낮을 익힌 좌익예술가들은 지하에 숨던가 구라파쪽으로 도망가는 길 밖에 없었다.

 

    암울한 시대였다. 힛트라와 뭇소리니가 대두하고, 장개석의 반공전선에는 나-찌의 군사고문이 있었다. 일본은 화북을 완전히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인간의 고귀함과 저열함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던 시대였다.

 

    이때 인간성의 최고의 승리를 보여주었던 인물의 한명이, 공산당원의 黃敬(호앙찐)이었다. 본명은 兪개위(유이쮸웨이), 129일의 데모가 있었던 직후 黃華(호왕호와)가 집에 데리고 왔었다. 그때부터 불과 23세의 몸으로 그는 학생들의 마음이 되고 두뇌가 되었다. 산동에서 잡혀 사형이 될 장합에, 장개석과 친하고 장군의 고관이 었던 伯父 兪大維(유이다이웨이)의 힘으로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그가 역사사에 보여주었던 역할은, 젊은 여우 江靑(치앙첸)을 이끌어 주며 山東에서 공산당활동에 참가 시킨 점이다. 더욱이 1938, 황경은 그녀를 연안에 동행하여, 얼마후 그녀는 모택동과 결혼하게 된다. 1966, 강청은 현대중국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한편 황경은 젊은 시절의 지하활동의 무리가 원인으로 1950년대 죽을 때 까지 북경의 제일기계공업부의 부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것은 1937년 초의 일이였다. 우리들이 데이빗라 부르던 친, 황경이 정보를 주었었다. 5 1일에 군부와 정치방면의 사람들을 뫃아서 연안에서 공산당대회가 개최되는, 이런 회합은 처음 있는 일이, 라고.

 

   그때 우리들의 문필생활은 최고조로, 손을 놓을 틈이 없었다. 그 해 초기에, 선교사의 J. S. 켄너드씨의 방문을 받았다. 씨는 [그리스드교 윤리를 적용한 정기간행물]을 위해 일천 달라의 용의가 있다, 학생들을 움직이는 잡지를 발행한다면, 라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 일을 맡았고, 에드는 매호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하고, 사진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장동손등 연경대학의 교원을 주체로 하여 편집부를 조직하였다. 그 위에, 대리인의 헨리엣드.헬쯔(우리들의 실제상의 공동경영자)로 부터도 나의 시집을 출판하고 싶다고 말해 왔고 [네이션] The Nation으로부터 중국통신원도 같이 의뢰 받았었다. 중국의 학생운동사와 근대예술문학사 등등의 자료를 뫃으고 있었고, 인생은 나에게 매우 귀중한 것으로, 조금이라도 생명이나 건강의 위험을 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데이빗의 정보는 중대했다. 이제 두번다시 이런 기회는 없을 것이다. 1936년에 서북에 있었던 에드로부터 자기에게 오라는 연락이 왔을 때, 나도 모안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전선을 뚫고 갈 수가 없어 서안에서 뒤걸음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당대회의 소식을 접하고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에드가 1936년 서북에서 돌아 왔을 때는, 두 방면군과 그 정치국이 아직 長征을 종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 주덕, 가룡, 수극, 서향전등이 이끌고 있던 제2. 4방면군 이었다. 나의 연안행은 남편이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부터 사료가 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남편은 모택동을 위시하여 6인의 전기를 쓰고 있었는데, 그가 보안에 갔을 때는 아직 모가 이끄는 제1방면군이 장정의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을 뿐 타의 군대의 長征완료는 일년 늦게 서북에서의 합류는 193611월의 일로써, 에드가 홍구를 뒤를 한 직후였다. 연안점거가 12월이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연안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고 생갹했다 그래서 그러한 때 그러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특종의 34인 열전을 물건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드래도 위험한 延安행을 왜 지상명령으로 생각했었는지, 설명할 도리가 없다. 말하자면 역사적 필연의 감이 없지 않다. 같은 어찌할 수 없음은, 이미 1935년 12월9 학생운동때와, 뒤에 가서 1938년의 [공합] 즉 중국공업합작사가 탄생했을 때도 느꼈던 일이다. 그래도 괸찮다고 나는 깨닭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 넘어 보신의 감각을 거슬려 일어 나는 이들의 예감에는 그 자체의 생명이 있다. 마치 진공상태속으로 힘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사실을 구하고, 진실, 역사적진실을 구하는 순례자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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