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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4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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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예술의 현대적 가치에 대한 소고

                    
        
                                                                  

1.
올 가을과 초겨울에 걸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의 글씨와 그림 등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지난 10월말에는 용산에 새로 완공한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개인 소장품이라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은 <불이선란不二禪蘭>과 <세한도>가 개관 기념전에 출품되어 보게 되었고, 11월 초에는 과천에서 <붓 천 자루와 벼루 열 개를 모두 닳아 없애고 - 추사의 작은 글씨전>을, 그리고 11월 말경에는 경북 안강에 위치한 옥산서원玉山書院 주1)에서 추사가 쓴 현판(편액) 글씨를 보았다. 주2) 이 중에서 <세한도>는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본 적이 있지만 대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주3)  

옥산서원의 마당에 들어서자 맑고도 넉넉한 흰 바탕에 검은 색의 현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길이 약 200cm 폭 약 70cm 송판에다 돋을새김 한 대형 글자를 보는 순간 ‘역시 추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옥산玉山’ 두 글자는 기필起筆에서 송필送筆 수필收筆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서篆書처럼 쓴 해서楷書체여서 부드러운 먹색임에도 엄정하면서도 강경强勁했다. 이어 ‘서원書院’ 두 글자는 힘이 있으면서도 한결 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과연 추사의 장년기를 대표하는 글씨답게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주4)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처럼 한껏 개성 있는 필치를 드러낸 것도, 봉은사의 ‘판전板殿’이나 은해사의 ‘불광佛光’처럼 졸박한 강건미를 풍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추사의 몸의 기운이 한 획 한 획마다 집약되어 있어 천근의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마치 유배 이후 역경을 거치며 더욱 심화되는 훗날의 추사 예술을 예고하는 듯했다.
  명말청초의 화가이자 화론가인 석도石濤,1642~1707는 “한 획이 만물을 포함 한다”주5)고 했지만 추사의 글씨 한 획 한 획이야말로 석도의 이 말을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겨울의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 옥산서원의 건물은 더욱 퇴락한 듯 보였고 공간적 구성도 병산서원이나 도동서원에 비해 협소했지만 추사 글씨의 힘이 서원의 전체 공간을 빛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옥산서원에서의 답사를 통해 추사의 대형 글씨는 실물을 직접 보아야 함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무엇보다 추사의 현판 글씨를 보며 그간의 추사에 예술세계에 대한 여러 해석이나 통념과 달리 이 땅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풍류風流’와 같은, 결코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우리 민족 특유의 은근하면서도 여유 있는 기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주6)
그간의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한 논의는 실제 체험보다 전통적 담론의 틀 속에서만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추사의 예술 세계를 좀더 근원적인, 즉 예술 본연의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 동양의 예술론 및 서예론에 입각한 학술적 분석을 넘어서 예술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모색하는 철학적 시각에서 추사의 예술이 담론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땅에서는 미술문화의 퇴행적 황폐화로 인하여 현대미술은 물론 전통미술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현대미술을 하는 이들은 전통 미술을 알지 못하고 전통예술에 관심을 지닌 이들은 현대를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추사의 예술 세계도 다만 몇몇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나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심 대상일 뿐 일반 사람들로부터는 소외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체에 대한 논의도 점획點劃과 결구結構와 장법章法, 혹은 곡직曲直 ․ 장단長短 ․ 태세太細 ․ 골육骨肉 ․ 종횡縱橫 등 전통적 서예의 담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한글이 상용화된 현실 속에서, 근대예술에 대해 본질적으로 회의함으로써 현대예술이 성립한 지 이미 오래인 시점에서 여전히 전통적 담론의 틀 속에서만 서예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추사에 대한 일반적 통념은 추사가 이른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라는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한데서 근거한다. 그래서 추사하면 대개 ‘문자향 서권기’라는 관념적 예술정신을 연상하며, 이 때문에 흔히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해 ‘학예일치’의 경지라 하지만, 이 전통 담론은 학문과 예술의 본질적 ‘차이’ 때문에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명제이다.
추사 예술의 본질적 특성은 취미로 ‘서예’를 하는, 이를테면 ‘정서 함양’이나 ‘문화생활’의 차원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다. 대중들이 갖고 있는 예술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이를테면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라든가, ‘개별자를 절대화한 천재적인 표현’ 인 것은 단지 통념일 뿐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 감상을 수동적인 행위로 생각한다. 그래서 감상활동을 그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관람객으로 찾아가서 익숙한 미적 가치를 관조적으로 향유하는 취미활동의 한 방식인 줄 안다. 추사가 그토록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원동력은 무엇이며, 나아가서 예술 본연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2.
현대의 해석학에 의하면, 사과 하나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그 인식주체가 지니고 있는 언어적, 개념적, 문화적, 이론적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주7) 이처럼 인식주체의 해석학적 기반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예술은 담론화 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만, 또한 끝내 ‘해석을 거부’ 주8)하는 특성이 있다.

미술사학자인 이동주李東洲는「완당바람」이란 글에서 추사의 예술세계에 대해 하나는 서書와 화畵를 구분하지 않는 태도이며, 또 하나는 법을 찾지 않는 태도로 본다. 전자는 ‘본시 완당은 글씨와 그림을 구별하지 않는다. 멀리 당나라의 왕유와 같이 또 송나라 소동파의 전통을 따른 문인화의 정신을 따라 글씨의 정신과 그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주9) 는 말에서, 후자는 “난초 그리는 법은 또한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기미가 있은 연후에 얻게 되느니라. 또 난초 그리는 법은 가장 화법이라는 것을 꺼리느니 만일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可)하다”는 추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추사 예술의 이념을 설명한다.
  이어 이러한 길이 없는, 즉 ‘무혜경無蹊逕의 경지’, 또는 문자향과 서권기의 미묘한 심의心意는 당대의 예원을 완전히 지배하여, 한국의 정서에서 커 나오려한 두 가지 조류, ‘진경산수’와 ‘속화’를 완전히 압도해버렸다는 것이 이동주의 추사관이다. 주10) 요컨대 추사가 예술의 이념형을 시대에 역행하는 청의 문인화에서 찾았기 때문에 한국예술은 그 정당한 발전을 저해 당했다는 시각이다.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유홍준은 김정희의 삶과 학문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다룬『완당평전』1, 2, 3<자료․해제편>을 지난 2002년에 출간하였다.『완당평전』은 추사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수합하여 총체적인 시각에서 추사의 삶과 학문과 예술을 탐색한 책이다. 특히 제주 유배 이후 이른바 ‘강상 시절’ 부분과 『완당평전』 3권인<자료해제편>은 이 책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평전답지 않게 몇 가지 명백한 오류가 보인다. 주11) 무엇보다 추사의 그림에 대한 서술 부분은 예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예컨대 추사의 산수화를 평하면서 ‘손으로 그리지 않고 머리로 그리려니 그림다운 그림이 될 수 없었다’주12)  사실 ‘그림으로 말한다면 우봉은 완당 일파 중 최고의 화가이며 산수와 매화는 완당 보다 훨씬 잘 그렸다’주13)는 구절, 추사의 <향조암란香祖庵蘭도>에 대해 ‘참으로 현대화가가 그린 작품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이 나타났다고 할 만하다’주14)는 구절들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그림다운 그림’, ‘최고의 화가’, ‘현대화가가 그린 작품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과 같은 말은 추사가 지향한 예술 세계 주15) 는 물론 현대예술관에 비추어보아도 회화의 본질을 너무도 모르는 주관적 해석의 용어이다. 요컨대 그림의 세계란 근본적으로 잘 그렸다, 못 그렸다는 평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특히 ‘현대화가가 그린 작품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이 나타났다고 할 만하다’는 앞 뒤 문맥으로 보아 유홍준은 추사가 <향조암란도>에서 여백 공간에 난 한 줄기만 대담하게 화면 가운데를 가로 지르게 그렸으므로 ‘현대’ 적인 회화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현대예술의 ‘현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현대’라는 말이 아니다. 즉 근대적 미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모험적 미술이 ‘현대’미술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미술은 특정한 양식을 지닐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유홍준 뿐 만 아니라 현대의 디자이너들이 흔히 세련된 의미로 쓰는 ‘현대적인 감각’ 이란 말은 사이비 미술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유홍준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에 대한 추사의 가혹한 비판에 대해 ‘당연히 역사적 비평으로 임해야 할 것을 완당은 동시대적 비평을 가하고 있다’고 보면서, ‘완당이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주16) 했다고 말하는 데, 이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관점이다. 모든 역사가 과거에 대한 현재의 인식과 해석이듯 모든 비평은 결국 동시대적 비평이기 때문이다.
즉 비평이란 어떤 대상을 모티브로 하던 현재의 비평 당사가가 쟁점을 설정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치열한 대안적 의식이다. 이광사에 대한 추사의 비평이 정당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이전의 예술에 대한 가혹한 비판적 도전이 없다면 어떻게 전대의 서체를 넘어선 ‘추사체’가 출현할 수 있었으며, 역사를 쉽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철저하게 고증학적 바탕을 둔 글을 쓸 수 있으며 주17), ‘진흥 이비고’주18) 같은 치밀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한 책을 쓸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이동주는 추사의 예술 세계에 대해 그 변모 과정과 그 독자성, 특히 만년, 특히 1852년부터 4년간의 과천 시대의 글씨와 그림들이 성취한 독자성을 간과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생성되는 예술 본연의 가치보다 추사 예술 세계를 당대의 시대적 조류라는 현상 속에 함몰시켜 버렸다면, 유홍준의 경우는 예술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틀’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동주와 유홍준은 공히 추사의 예술 세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추사의 서간과 그림 및 글씨들이 그 방계공간을 이루고 있는 중국의 서간이나 글씨들과 어떤 위상학적 공간을 형성하는지, 혹은 다른 인식론적 층위에서 말한다면 동양미술사에 등장한 미학적 담론들이 형성하는 위상학적 공간과 추사의 예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그 ‘진정성’을 드러내지 못했음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가령 추사의 난 그림은 송대의 정사초所南 鄭思肖,1241~1318이래 청대의 정섭板橋 鄭燮, 1693~1765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받았다.주19) 예컨대 추사의 <적설만산도積雪滿山圖>주20)는 정섭의 <묵란도墨蘭圖>에서 유래하지만 추사의 그림이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친다. 이처럼 그 상관관계와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주21)        

사실 추사는 25세 때 자제군관으로 청나라 연경에 겨우 몇 달을 머물렀다. 물론 이 연경에서 추사는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남으로써 서예에 대한 종합적 시각을 갖게 된다. 이들을 통해 남북을 아우르는 글씨에 대한 안목을 자각한 것이다. 주22) 알다시피 이후 추사는 남파의 조종격인 왕희지의 법첩을 모본으로 삼던 종래의 글씨를 배격하고 종요鍾繇․ 삭정索靖 ․구양순歐陽詢 등의 북파를 지지하여 이러한 전통을 잇게 된다.  
이후 70평생 동안 ‘마천십연 독진천호磨穿十硏 禿盡千毫’,주23) 즉 붓 천자루와 벼루 열 개를 모두 닳아 없앤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추사의 예술 세계는 단번에 쌓아올린 예술세계가 아니다. 주24)  


3.
  추사는 ‘서화일체론’에 입각하여 글씨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 추상성을 그림에서도 구현했다. 그래서 구체적 형사形似를 배제하고 대상의 본질만을 명료하게 추출하여 회화미를 재구성’주25) 하였다. 따라서 추사의 글씨와 그림은 그 어떤 이념적․양식적 틀조차 무색할 정도로 먹의 질료적 특성과 붓질의 기세가 두드러진다. 특히 추사 만년의 그림과 글씨들은 현대드로잉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수묵의 농담을 생생하게(거칠게) 표출한다.
이것은 먼저 붓보다 먹의 질료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른바 농담활삽農談滑澀; 짙고 옅음과 매끄럽고 꺼칠함 이 바로 이 먹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추사의 <묵법변墨法辨>주26)이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추사는 ‘먹 쓰는 법’과 ‘붓 쓰는 법’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이런 논지에서 추사는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이 먹 쓰는 법을 모르고 붓 쓰는 법에만 신경을 쓴다고 비판한다. 추사 앞 시기에 유행한 동국진체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대한 비판의 핵심도 같은 문제였다.
추사의 서예 및 그림의 세계는 먹→종이→붓으로 요약될 수 있다.주27) 이 때문에 추사의 글씨와 그림은 남다른 점이 있다. 가령 무조건 먹을 진하게 갈아서 그것도 틀에 박힌 글씨체로 요즘의 화선지처럼 흡수성이 강한 종이에다 쓰면 똑 같은 톤이기 때문에 답답하거나 무미건조한 글씨가 될 수밖에 없다. 추사 글씨는 아무리 먹을 진하게 갈아서 강밀하게 썼어도 농담의 변화가 있다. 그 이유는 주로 ‘표면이 매끈한 종이’주28) 로 인한 반발력 때문이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는 먹빛이 매우 맑으면서도 농담의 변화가 풍부하며, 글씨의 가장자리도 면도날로 도려낸 듯 예리하다. 그만큼 리드미컬하게 쓴 붓 자국이 선명하고 생생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화접藻華艓>같은 글씨는 오른 쪽의 ‘조’자는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연하며, 이에 비해 가운데의 ‘화접’은 진하지만,  제작 경위를 쓴 왼편의 글씨는 연하게 써서 절묘한 변화와 균형과 표현의 두께를 보여주고 있다.<도판> 이외에도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 같은 글씨나, <난원혜묘蘭畹蕙畝>나,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二好色三飮酒>같은 글씨를 보면 한 획 한 획이 리드미컬한 강약에 따라 농담이 달라 그림 같은 인상을 준다.
추사는 먹을 팥죽처럼 되게 갈아 마치 좁쌀이 도돌도돌할 정도의 초묵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종이나 먹의 특성상 농담활삽의 이치는 원용된다.주29) 바로 이러한 선을 위주로 한 변화는 추사의 예술 세계의 가장 독특한 개성이다.  수묵의 번짐, 이른바 발묵의 선염 효과는 중국에 있어서도 고온다습한 남방의 풍토에서 나오며, 일본의 기후도 다습하기 때문에 이처럼 번짐의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특성이 있다.  
반면에 이 땅의 풍토적 특성은 ‘화강암 암산과 같이 강경한 골기와 푸른 하늘과 같이 삽상한 기운과 사계의 변화’ 가 뚜렷해서 우리의 전통예술, 그 중에서도 서화는 ‘강경명정剛硬明正한 다변성’주30)이 두드러진다.
    

4.
추사예술 세계의 진면목은 역시 유․불儒彿을 아우르는 굉박심연宏博深淵한 학문과  ‘첩帖’과 ‘비碑’의 융합을 통한 ‘자기화’다. 즉 전서 ․ 예서 ․ 해서 ․ 행서 ․ 초서 등의 서체를 한 데 섞어 마침내 독특한 예술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추사 예술의 융섭성과 종합성은 이 땅에서 성취된 주요 학문과 예술의 두드러진 특성이기도 하다. ‘반야’와 ‘유식’ 사상을 융합한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이 그러하고 유․불․선이 통합된 ‘풍류도’와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 그러하다. 이는 고려청자나 조선 백자도 마찬가지이며, 남종화의 부드럽게 스미는 임리淋漓함과 북방의 강골强骨 기를 동시에 구현한 겸재 정선의 회화도 그러하다. 요컨대 추사는 중국에서 생겨난 모든 서체를 종합했지만 또한 전형화된 글씨를 거부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전통에 빗대어 자기세계를 구현할 뿐이다.  

  사실 이 땅의 유구한 문화예술이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문화 예술을 능가하는 경우도 많은 것은 이처럼 문명을 종합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역량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추사의 글씨가 중국이나 일본의 서도(書道)와 다른 것도 같은 맥락이며, 나아가서 한국의 사상이나 문화적 특성이 다른 것도 한반도의 특유의 역사성과 유전적 기질의 융합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추사가 아무리 부인해도 평생 몸담고 숨쉬고 살았던 곳은 이 땅이었다. 추사는 비록 당시 청의 학문과 예술을 적극 수용했어도 바로 이 땅의 풍토적 특질과 자신의 체험을 자기화한 것이다. 이는 왕희지 이래 주로 중국인들에 의해 구축되고 전유되어 온 ‘서(예)법’은 한 중 일을 통틀어 추사에 와서 대단원을 이루고 또한 극복되었음을 통해서도 능히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질 들뢰즈 주31) 의 시각으로 보면 법이 없음을 법으로 삼는, 즉 ‘무법의 법’을 추구한 추사의 서예는 탈주의 선, 즉 ‘클리나멘’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추사의 글씨에서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힘에의 의지와 태도를 본다. 내가 추사 예술 세계를 보고 감동하는 것은 이 때문이며 이는 예술 본연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5.
마르셀 뒤샹 이래 현대예술가들은 근대 이후 통념화된 미적 규범과 우상적 가치들을 원천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예술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후 새로운 관객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이 현대예술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 작품의 가치는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낸 그 가치를 파악하려는 관객과 만남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추사의 예술 세계도 예외일 수 없다. 추사의 예술세계도 궁극적으로는 추사의 예술의 ‘현재화’와 ‘자기화’ 속에 그 가치가 드러난다. 예술의 가치는 창작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가치를 알아주는, 즉 공유하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특성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보여 준 아도르노도 작품은 해석을 통한 이해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고 말했듯, 이런 문맥에서도 예술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며 느낌의 세계이다. 요컨대 예술은 크게 보면 창작, 즉 표현활동과 이에서 촉발된 담론이라는 두 축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6.
나는 추사 선생 친필은 단간영묵斷簡零墨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한 때는 추사 선생의 탁본 한 점이라도 꼭 갖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도처에 산재한 추사의 진적이나 그 흔적을 볼 수 있고, 예술의 가치란 그것을 알아볼 수 있고 감응할 수 있는데 있기 때문이다.
추사가 남긴 적지 않은 ‘간찰簡札’들에 잘 드러나듯, 추사 역시 한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간이다. 즉 삶이 있고 예술이 있다. 그러므로 추사의 학문적 세계와 ‘서예’라는 전통적 예술 장르를 통해서만 추사의 예술을 논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배제하는 원인이 된다. 추사가 남긴 글들은 추사의 예술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텍스트임에 분명하지만 추사가 남긴 예술세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세계와 예술 세계의 영역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예술의 관점에서도 추사 예술의 독자적 가치는 그가 남긴 글씨와 그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를 인식하는 순간에 생성되는 것이다. 즉 추사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의 용묵법과 필묵법에 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에서 촉발되는 느낌과 생각 속에 존재한다.
결국 예술의 가치는 만남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그림을 보는 방법을 배우고 안다는 것은 어떤 규칙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규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 한다”주32)고 한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술세계란 우리 삶을 깊고 풍요롭게 해 주는 느낌과 자각, 그 정신적 가치로서 비로소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사를 그저 우리나라가 낳은 불세출의 서성書聖으로 우러러 보거나 혹은 시대착오적 문인화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추사가 성취한 예술 세계를 통해 삶과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2005년  12월 1일


주1)옥산서원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년)에 지어졌으며 1574년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서원 주위에는 자옥산, 도덕산, 화개산, 무학산이 둘러싸고 증심대, 관어대, 세심대 등 아름다운 자연을 끼고 있다.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수도修道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는데, 특히 계곡을 볼 수 있는 ‘살창’과 ‘계정’이 유명하다.
주2)구인당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의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쓴 것이다.
주3)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봉은사에 있는 판전 현판 글씨를 비롯하여 간송미술관, 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동산방 화랑에서의 전시회, 추사 글씨 탁본전, 영천 은해사 현판 글씨 등 추사 관련 진적을 보러 숱하게 보러 다녔지만 이번에 아직도 보지 않은 진적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추사 예술세계의 폭을 느낄 수 있었다.
주4)물론 추사의 현판 글씨로는 추사가 세상을 뜨기 3일전에 썼다는 현판인 ‘판전’이나 은해사 불광각에 걸려있던 현판 글씨인 불광이 최고라고 본다. 그러나 판전의 경우 글씨에 새로 금칠을 해 놇았기 때문에 실물을 보면 그 느낌이 판전을 탁본한 글씨를 보는 것만 못하다.
주5)夫一畫, 含萬物於中  『苦瓜和尙畵語錄』(石濤畵論),「尊受章 第四」
주6)추사가 쓴 옥산 서원의 진면목을 더욱 실감한 것은 강당 안 쪽에 붙어 있는 이산해가 쓴 현판을 보고 나서였다. 이산해의 현판 글씨도 매우 개성 있는 글씨였으나 글씨에 비해 여백이 협소한 느낌이었다.
주7)이정우, 담론의 공간, 민음사, 1994, 227-228쪽 참조
주8)수전 손택(Susan Sontag),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19-35쪽 참조
주9)이동주, 『우리나라의 옛 그림』,「완당바람」, 학고재, 1995, 332쪽
주10)유홍준 , 앞의 책, 325쪽
주11)이동주, 앞의 책, 333-334쪽
주12)초판 『완당평전』에서 볼 수 있는 잘못된 기술은 다음과 같다.  먼저 완당평전 1권 224쪽의 도판 사진으로 실린 죽향의 <난초>는 난초가 아니라 ‘나리’다.  333쪽의 <모질도(耄耋圖;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으로 70세노인 ‘모耄’자와 고양이 ‘묘猫’자가 중국발음으로 같기 때문에 고양이를 그리는 것임)>를 성난 다람쥐로 기술한 부분을 꼽을 수 있다.(이 부분은 개정판에서 교정됨) 그 다음으로는『완당평전』제2권 544쪽에서 영천 은해사 말사의 현판인 ‘십홀방장十笏方丈’이 김정희의 글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김정희의 글씨가 아니라 만파석란萬波錫蘭 스님이 쓴 것이다.(『추사글씨 탁본전』도록,과천시․한국미술연구소, 2004, 68쪽 참조) 그리고 추사 글 중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의 협서 부분은 청대의 화가인 장경(張庚,1685~1760)의『포산논화浦山論畵』중에 나오는 내용을 글자만 몇 글자 바꾸어 거의 그대로 쓴 것이다.(葛路저, 강관식역, 『중국회화 이론사』, 미진사, 1990, 324쪽 참조) 또한 <불이선란도>에 대한 논의 중 오른쪽 두 번째 발문인 ‘초서와 예서의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구경이 또 제하다’라는 구절도 그 출처는 동기창의 『화지畵旨』이지만 밝히지 않아 추사의 글인 양 오해하게 써 놓았다.              
주13)유홍준, 앞의 책, 315쪽.        
주14)유홍준, 앞의 책, 298-299쪽
주15)유홍준, 앞의 책,594쪽                                                            
주16)추사는 이렇게 말한다. ‘품격의 높고 낮음은 그 솜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에 있는 것’이니... (阮堂先生全集 卷六)
주17)추사는 ‘침계’란 글을 쓰려고 했지만 옛 한나라 비(碑)에 ‘침’자가 없어서 30년이나 금석문을 연구하여 쓴 사람이다.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면 이런 일화가 있을까?    
주18)김정희 저, 최완수 역, 『추사집』, 1976, 188-219쪽  
주19)『난맹첩』21~22폭, 최완수, 『秋史精華』, (지식산업사, 1983), 243-244쪽 참조.
주20)난맹첩』, 제3폭, 지본수목, 22.9×27cm, 간송미술관 소장.
주21)백인산,「추사화파와 사군자」,『추사와 그의 시대』,(돌베개, 2002), 293-295쪽 참조.
주22)추사는 연경에 다녀 온 뒤 글씨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라진다. 이는 제주 유배시절 제자인 박혜백에게 글씨를 배운 내력을 밝힌 다음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지만 스물네 살에 연경에 들어가서 여러 큰 선비들을 뵙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 발등법(撥鐙法)이 입문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가락 쓰는 법, 붓 쓰는 법, 먹 쓰는 법으로부터 줄을 나누고(分行), 자리를 잡고(布白), 과(戈)나 파(波)와 점과 획 치는 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는 법과 크게 달랐다. 그리고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 금석문자가 수 천종이 되니 종요나 삭정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봐야 한다고들 말했다. 그래서 비로소 그 처음부터 (글씨가) 변천되어 내려 온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완당선생전집(권8)』,「雜識」(2005년 과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완당전집(三)』에는 591쪽에 전문이 실려 있음)  
주23)추사가 만년에 쓴 <與權彛齊 敦仁>에 나오며, 금년 가을에 과천에서 있었던 추사의 작은 글씨전에 전시되었다.
주24)이동국은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크게 4시기로 나눈다. 즉 35세 무렵 이전의 첩주(帖主) 시기〔1기〕, 35세에서 45세 무렵까지의 첩주비종(帖主碑從) 시기〔2기〕, 45세에서 63세까지 비주첩종〔碑主帖從〕시기〔3기〕그리고 63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71세 작고 때까지의 비첩혼융(碑帖混融)〔4기〕시기다.  
주25)최완수, 앞의 책, 114쪽
주26)김정희, 최완수 역, 앞의 책, 73-76쪽 참조
주27)‘서가에서는 먹을 첫째로 삼는다. 대체로 글을 쓰는데 붓을 쓴다는 것은 곧 붓으로 먹을 칠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종이와 벼루는 모두 먹을 도와서 서로 발현시키는데 쓰이게 되는 것이다.(書家墨爲第一。凡書之使毫、卽不過使毫行墨而已。)’, 김정희 앞의 책 73-74쪽.
주28)<세한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주29)‘강경명정’은 최완수가 한 말임.
주30)그 중에서도 ‘냉금지’는 더욱 매끈하다.
주31)20세기 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질 들뢰즈는 사유의 주요한 세 양식들, 예술, 과학, 그리고 철학을 삶을 변형시키는 역능들로 간주했으며, 철학은 새로운 개념들을, 예술을 통해서는 새로운 지각들과 감응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주32)리오넬로 벤투리, 정진국 옮김, 『회화의 이해』, 눈빛 2002,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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