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5086
2007.06.05 (17: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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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비평의 참된 가치



1.
일전에 수행평가로 학생들에게 몇 권의 현대미술 관련 책을 정해주고 일종의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책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재구성하여 쓴 것이 아니라 글의 상당 부분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문장을 그대로 베껴 놓고서는 자기 글인 양 제출하였다. 명백한 ‘도용’이요 ‘저작권 침해’였던 것이다.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는 세칭 비평준화 지역 명문교로서 학생들 거의 대다수가 중학교 때 전교 1% 안에 드는 학생들이었으며, 고교를 졸업할 때는 이른바 일류대라는 S대, Y대, K 대는 물론 요즘 학생들이 선호하는 의․약대 등에 거의 대다수가 거뜬히 합격하는 학생들이다.  
사실 이들은 입시위주의 교육만 아니라면 훨씬 더 잠재적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잘못된 교육 현실 때문에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교육현장에서   예사롭게 관행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나라의 교육적 현실에서는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니 대학에서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남의 글을 적당히 그럴듯하게 ‘짜깁기’ 한 리포트를 제출하여 학점을 받고, 이 연장선에서 또한 실용적인 취업준비 공부나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실상은 우리 교육이 얼마나 왜 무엇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알게 하며,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 바로 ‘지적 정직성’의 결여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없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현행 교육의 근본적 문제는 ‘지적 정직성’에 대한 불감증은 물론 정형화된 상투적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노예적 능력만을 길러 오로지 시험을 잘 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 잘하는 모범학생일수록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힘)’이 부족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문제 있는 인간들을 길러내는 잘못된 관행이 지난 수십 년간 교육 현장의 실상이다. 예컨대 배운 사람일수록 한 술 더 뜨는 윤리적 파탄 현상이나 여전히 인문학계를 지배하는 ‘학문의 식민성’도 이런 시각으로 보면 능히 수긍이 가는 일이 아닌가?


2.
이번에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에서 메타 비평의 대상으로 도마에 오른 장본인들도 무엇보다 ‘지적 정직성’은 물론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결여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는 그간 우리의 비평 글들이 쟁점 부재의, 즉 비평 본연의 본래성에서 너무도 벗어나 있고, 현대미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논리적 정합성 차원에서 한심한 수준임을 통해서도 능히 알 수 있다.

‘지적 정직성’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결여는 비단 비평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필자는 대학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막연하고도 낭만적인 생각에 스스로 도취되어 자기성찰은 결여된 채 ‘헛짓’을 반복하는 인간들을 미술계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자들일수록 예술이 무슨 천재적 영감의 소산인 줄 아는 한심한 인간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우리 미술인 중에는 폐가를 빌린 농가에서 극빈의  생활을 영위하며 작업하든 별장처럼 호사스런 공간에서 작업하든 이런 미망에 사로잡힌 자폐적 집착 환자들이 너무도 많다.    
또한 우리 미술계에는 언제나 더듬이만 발달한 곤충처럼 발 빠르게 해외의 동향만을 예의 주시하여 ‘유행하는 방식’을 그럴 듯하게 감각적으로 선점 차용하거나 모방하고서는 자신의 작업인양 가공하는 기회주의자들도 적지 않다. 사실 지난 90년대 이후 이른바 잘 나가는 듯이 행세하는 자들은 대개 여기에 속하는 부류들이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스스로 생각하는 힘으로부터 가능한 현대미술에서의 비평적 담론의 가치, 현대미술의 가치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성립하는지와 무관함은 공히 마찬가지다.

3.
지금의 미대 재학생들의 경우도 이런 양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가 출간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었음에도 미대 재학생들이 가타부타 미미한 반응조차 없는 것은 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이는 미대생들이 문제의식은커녕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즉 의식수준을 방증 한다. 첨예한 문제의식으로 또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어느 시기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도전적이어야 할 미대생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한들, 부질없는 ‘헛짓’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이처럼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 그들 앞에는 암울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실상은 미술대학이 심각한 교육적 위기 상황을 넘어 썩어도 너무 썩어 있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한다.    

지난 수십 년 간 이러한 양상이 현대 국내 유수의 미술대학 뿐 만 아니라 거의 모든 미술대학의 엄연한 실상임에도 당사자들만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곧 화단 선배가 되는 현실 속에 주눅 든 채, 맹목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미대 교수들이 대개 정상적으로 교수가 된 자들이 아니니 당연히 실력이 없고, 그러니 오직 교수라는 권력과 권위로 자신의 스타일만 제자들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조교와 시간강사 노릇하다가 연줄과 돈으로 ‘교수’직에 채용되었음에도 공공연히 대형미술학원과 기묘한(?)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된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도대체 무얼 배울 수 있다는 말인가?

  
4.
물론 예술이 언어적 인식 너머, 혹은 언어 이전의 영역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은 부단하고도 치열한 성찰, 이를테면 언어적 인식과 어떠한 기존의 가치도 ‘무화’시키는 근원적인 자유의 세계로 진입하지 않는 한 영영 자각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무엇보다 예술이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로부터 ‘참됨’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말이 전도된 비평계의 행태는 ‘나’를 반성케 하는 ‘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번 오상길 선생의 메타비평은 혹자들이 그릇된 편견으로 오해하듯 비평계의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의 차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바로 ‘나’자신의 문제이며 미술 그 자체의 문제다. 현대예술과 현대의 비평이 주는 가치 있는 자각은 결국 부단하고 치열한 자기반성의 과정 없이 무엇을 성취하려는 것 자체가 넌 센스라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론이 시사하듯 나의 삶은 언제나 전체 속의 삶이다. 그러므로 더불어 검증하고 공유하는 담론으로부터 미술의 가치는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반성과 대화를 통한 ‘차이’ 있는 담론이 풍성할수록 미술의 가치는 심화되고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뜻있는 이들이 기꺼이 담론에 참여하고 소신껏 자기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5년 12월  15일
                                          광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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