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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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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과 겸재 정선의 그림


1.
지난 9월 24일 천 원짜리 지폐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진 도산서원을 다녀왔다. 경북 포항에서 도산서원을 찾아가는 길은 꽤 먼 길이었다. 가는 동안 내내 짙푸른 하늘 아래 산길로 이어진 국도는 한적했다. 다만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만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도산서원은 진입로를 잘 닦아 놓은 지금도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워낙 깊숙한 오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적 무의식적 윤리의식의 기저를 형성케 한 장본인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선생이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오랫동안 ‘주리론(主理論)’적인 퇴계 이황의 학문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주기론(主氣論)’적 사상에 더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계 선생이 살던 시대상황과 선생의 지극한 매화 사랑, 기생인 두향과의 애틋한 사연을 알게 되면서 수년 전부터는 선생의 학문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번에 도산서원에도 처음 가게 된 것이다.
이번 답사의 또 하나의 까닭은 겸재가 이 곳을 그려서다. 겸재는 하양현감과 청하현감 재임 시절 이곳 도산서원을 수차례 답사했으며, <도산서원도>와 <계상정거(溪上靜居)도>를 남겼다.


2.
서원 입구로 들어서자 오른 편에 도산서당이 있었다. 서원은 퇴계 사후에 지었지만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 생존시에 지은 건물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기둥에 붙어있는 ‘도산서당’이라는 송판에 새겨진 소박한 글씨였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안내원은 퇴계가 쓴 글씨라고 했지만 퇴계의 글씨체와는 달라 보였다.) 서당과 잘 어울리는 소박한 글씨체였다. 특히 뫼 산(山)자는 산의 형상을 닮아 어린아이가 천진하게 그린 산 같았다.  
도산서당은 세 칸 밖에 안 되는 지극히 작은 건물이었다. 이처럼 작고 소박한 집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로서 나중에 영남학파를 형성하게 되는 제자들을 길러낸 것이다.
선생이 학문을 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서쪽 단칸방은 ‘완락재玩樂齋’로서  ‘완상하여 즐기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다.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기대서라도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는 겸손의 뜻이 담겨있다.
이 마루에서 바라 본 마당의 동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2m 남짓으로 보이는 작은 사각형의 정우당(淨友塘)이란 연못과 유정문(幽貞門 : 유정은 그윽하고 바르다는 뜻임) 몽천(夢泉 : 어린 제자를 바르게 가르치다는 뜻이 담겨있음), 그리고 이 문을 통해서 작은 개울을 건너면 닿는 절우사(節友社)가 있었다. 절우사는 도산 서당 동쪽에 있는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퇴계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난초, 연꽃을 심어 이들 다섯 친구와 함께 한 곳이다.  

도산서당 바로 옆은 문하생들이 머무는 농운정사(隴雲精舍)로, 공부하는 곳은 시습재(時習齋) 잠자는 곳은 지숙요(止宿寮), 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다. 장서각을 지나 동재 서재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서면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현판글씨가 있는 건물에 이른다.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 방이 한존재(閑存齋)다. 이는 『주역』의 閑邪存其誠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말 그대로 삿댄 것을 막고 성실함을 보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3.
서원은 명현의 제사와 지방 대학교로서 고등교육을 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 곳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원은 교육의 장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다만 제사 지내는 곳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도산서원만 하더라도 퇴계가 살아 있을 때는 도산서당과 바로 옆의 농운정사 밖에 없었다.  


4.
현 도산서원은 지난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중수하면서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박 대통령이 무인은 이순신을, 학자는 이황을,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아야 한다면서, 특히 이 세 분과 연관된 현충사, 도산서원, 오죽헌을 성역화하거나 대대적으로 중수하게 하는데, 이 때문에 세 곳이 과도하게 치장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도산 서원의 경우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담장을 함으로써 소박한 서원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답답하고 막힌 부조화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5.
퇴계 이황의 학문세계의 특성은 무엇일까? 퇴계는 평생 성리학을 깊이 공부했다. 성리학은 중국 남송의 정호程顥와 주희朱熹에 의해 성립된 ‘신유학’이다. 주희는 자연의 생성과 변화를 ‘이理’와 ‘기氣’라는 원리이자 현상인 두 계기의 만남으로 규정했다. 자연의 무기물적 변화이자 생명의 탄생까지의 모든 현상이 ‘기(氣)’의 변화라면, 그 변화에 어떤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이 ‘이(理)’다.
그래서 주희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보편적 본질이 ‘리’(性卽理)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를 설정하였다. 즉 ‘성性’이란 인간의 마음에 감정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로서 하늘과 인간의 본성이다. 주자는 정호의 학설을 이어받아 인간의 본성은 기질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다. 맹자의 성선설로 대표되는 원시 유가 사상과는 사뭇 다른 학설을 제창한 것이다. 이처럼 성리학은 성에 대해 감정이 일어난 뒤의 상태인 정情과 함께, 즉 성정을 ‘이’와 ‘기’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인성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특히 인성의 본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사림士林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논쟁이다.1) 이는 크게 퇴계 이황과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설로 대별된다. 그 발단은 이황과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 간의 논쟁에서 비롯된다.
이황은 “사단은 리(理)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氣의 발현(四端理之發 七情己之發 ; 理氣互發說)”으로 보았다. 항상 선한 ‘사단’과, 바깥 사물의 영향을 받아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칠정’은 근본부터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인간 감정을 그 연원에 따라 ‘이’에서 온 것과 ‘기’에서 온 것으로 분리했다. 이는 주희와도 다른 관점으로 사물의 원리인 ‘이’가 움직여 선한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퇴계의 학설에 대해 기대승이 의문을 제기한다.2) 기대승은 맹자의 사단은 모두 인․의․예․지의 실마리端이므로3) 사단과 칠정은 다같이 인간의 감정 현상이며, 그러므로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이황에게 질의한다. 이후 수년간 두 사람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은 논의를 펼친다.
나중에 퇴계는 ‘리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理發氣隨之’고 하여 사단을 도심道心에, 칠정 즉 ‘기가 발하면 리가 탄다氣發理乘之’를 인심人心에 귀속시키는 학설로 수정하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기대승은 이황의 학설을 수긍한다. 요즘 보면 억지 같은 주장을 퇴계가 한 것은 당위적 윤리를 강조해야 하는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기대승의 초기학설을 이어받아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의 발로 생각했다.(氣發理乘說) 따라서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4) 퇴계의 사상이 ‘리’의 발현에 중점을 두었다면, 율곡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을 동일시한 ‘기’의 느낌感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이의 학설은 율곡학파에 의해 계승이 되며, 그 대표적인 이가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물론 이들은 양난 이후 조선사회의 기강을 세운다는 일념에서 ‘예,’ 즉 형식적 윤리 규범을 중시한다. 그렇지만 같은 율곡학파 중 김창협金昌協, (1651~1708)김창흡金昌翕,1653~1722 등은 기감에 의한 정감을 중시하는 학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의 기풍을 추구한다.5)
바로 이들에 의해 기감, 즉 실제 체험을 중시하는 진경문화시대가 열리며, 그 정점에 겸재 정선이 있다. 겸재 정선은 사대부 화가로서 율곡의 학맥을 계승한 사람인 것이다.

6.
퇴계 이황은 이성적 학문 세계와 달리 특히 매화를 좋아한 감성적 인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읊조린 매화음(梅花吟)이 100수가 넘을 정도로 매화를 지극히 사랑(퇴계의 말을 빌리자면 혹애)했다. 그 시들은 하나 같인 선생의 감성어린 인품을 보여준다.
이 매화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인간 퇴계를 다시 보게 하는 일화는 무엇보다 단양군수 시절에 만난 관기 두향과의 사연이다. 퇴계를 사모한 두향은 가까이 모시길 자청했다. 퇴계는 쉽사리 곁을 주지 않았다. 마침내 선생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은 두향이 조선 천지를 뒤져 찾은 기품 넘치는 매화 한 그루 때문이었다. 그 후 선생은 단양에서는 물론 도산에서도 이 매화를 애완했다. 퇴계의 마지막 유언은 “저 매화에 물어 주어라”였다. 단양에 홀로 남았던 두향은 수 년 뒤 선생의 부음을 듣고 자진했다. 두향의 묘는 지금 단양의 구담봉 맞은 편 산자락에 있다.  .
또 하나, 퇴계 이황의 감성과 인품을 엿보게 하는 일화가 있다. 둘 째 아들의 이른 죽음으로 둘 째 며느리가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자 퇴계는 몰래 그 며느리를 불러 재가하게 한다. 불경이부의 윤리의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요즘 상식으로도 파격적인 배려를 퇴계는 한 것이다. 퇴계가 죽었을 때 그 며느리는 상여가 떠나가는 광경을 멀리서 눈물 흘리며 지켜보았다고 한다. 새 삶을 살게 한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인간 퇴계의 참 모습은 그의 학문과 삶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이다.


7.
겸재는 어느 정도 퇴계의 학문과 삶을 알고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학문적 계통이 다른 퇴계 선생이 머문 이곳 도산 서원까지 찾아와서 <도산서원도>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사실 겸재는 외가 쪽으로 퇴계의 혈통을 이은(겸재의 모친이 퇴계 이황의 외손자의 외손녀임) 사람이다. 겸재가 율곡학파임에도 도산서원을 찾은 것은 이러한 혈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계상정거도>는 특별한 사연인 있다. 이를테면  퇴계 이황의 친필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와 우암 송시열의 발문을 합쳐 겸재의 외조부가 만든『퇴우이선생(退尤二先生 眞蹟)』을 겸재가 소장하게 되면서 이 진적이 만들어지게 된 사연과 상황을 겸재가 진경회화로 그린『퇴우이선생진적첩』6)에 들어있는 그림이 <계상정거도>다.
그러나 겸재가 퇴계의 혈통을 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도산서원을 그렸을 리는 없다. 퇴계는 학풍과 학파를 초월해서 존숭될만한 인품을 지녔던 학자였던 것이다.      

겸재가 얼마나 많이 도산서원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겸재가 한 소재를 흔히 다수 제작한 것으로 보아 도산서원도 많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알려진 도산서원 관련 그림으로는 <도산 서원도>와 <계상정거도>가 있다. 이 그림들은 도산서원과 그 주변 풍광을 그린 그림으로 <도산서원도>는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그 주변 풍광과 함께 그렸고, <계상정거도>는 도산서당과 주변 풍광을 그린 그림이다. 즉 <계상정거도>는 서원이 생겨나기 전의 도산서당만을 그린 것이다. 다시 말해 <계상정거도>는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학문하는 광경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같은 장소임에도 그림의 구도와 표현방식도 확연히 다르다. 이는 같은 곳을 그리더라도 시점을 자유자재로 변환시켰던 겸재 특유의 화풍에 기인한다.  
<도산서원도>는 부채에 그렸지만 겸재가 살았던 시기의 도산 서원의 분위기를 십분 실감할 수 있는 그림으로 겸재 화풍의 유니크 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계상정거도>는 겸재가 71세 때의 그림으로 그 거침없는 필법으로 인해 맑고도 풍부한 먹색이 두드러지며 그만큼 겸재의 그림 중에서도 매우 빼어난 수작이다.7)


8.
도산서원, 그 중에서도 도산서당은 조선 유학의 메카로서 소박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그의 감성과 인품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유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이곳도 현대인들이 한 짓은 조상의 인품과 문화적 격을 손상시킨 일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하루빨리 원래의 건물과 부합되는 소박한 담장으로 복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도산 서원은 조선 전통 유학을 회복하는 장소로서의 차원 넘어 특성화된 지방 대학 교육과 문화의 본거지가 되었으면 한다.
겸재 정선의 <도산서원도>와 <계상정거도>에서 느낄 수 있는 학문과 예술은 얽히고설킨 조선시대의 학맥과 인맥과 삶의 실상을 알게 한다. 이 그림들은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곡진한 사연이 담겨 있는 그림인 것이다. 게다가 이 그림들은 겸재의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겸재 만년의 수작이다. 특히 겸재의 <계상정거도>는 조선 중기 이래 학문과 예술의 역사가 압축된 그림이다. 즉 조선 왕조를 지배한 학문의 두 계보를 초극한 그림이다.
또한 겸재의 <도산서원도>와 <계상정거도>는 겸재의 그림의 독자성이 그의 폭넓은 체험에서 나왔음을 입증한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삶과 함께 학문과 예술이 있음을.

                            2005년  10월  24일    


1) 사단은 맹자가 말한 惻隱, 羞惡, 辭讓, 是非지심을 말하며, 칠정은 『禮記』에 나오는 喜怒哀懼愛惡欲으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총체를 말한다.
2) 처음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인 58세의 대학자였으나 기대승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32살의 청년이었다. 이 사칠 논쟁에 대해 쉽게 풀어 쓴 내용을 보려면 최근 김영두가 옮긴『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2003), 351-486쪽 참조.    
3) 이 마음(心)을 欲의 주체로서의 포괄적 개념으로 보고 성을 순수도덕적 규범의 근거로서의 본성으로 보는 것이 정주학, 즉 ‘신유학’의 특징이다. 김용옥,『절차탁마대기만성』, 통나무,1987, 72쪽 참조.  
4) 이황과 이이의 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이황/윤사순 역, 이이 유정동 역,『한국의 유학사상』(삼성출판사, 1989)와 김형효의 『원효에서 다산까지』(청계, 2000) 225-515쪽 참조.  
5) 사단 칠정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한 책으로 한형조가 지은『주희에서 정약용으로』(세계사, 1996)란 책을 꼽을 수 있다.  
6) 보물 제585호임.
7)겸재 정선 뿐 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1713~91)이 그린 <도산서원도>도 있다. 이 그림은 강세황의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1751년 작)으로 보물 제522호이다.(종이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26.8㎝, 가로 138.5㎝.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도산서원도〉는 명종 때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여 남인계열의 학맥을 통해 전승되었으며, 이 그림도 기존의 원본을 방작(倣作)한 것이다. 화면 중앙으로 서원과 주산인 도산을 배치하고 주변의 명승들이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다. 부감법의 효과로 형성된 분지 같은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퇴계(退溪)가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흐른다. 가로로 긴 화면에 펼쳐진 경물들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모이듯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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