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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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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과 망양정을 다녀와서


1.
풍경은 단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아니다. 저마다 관념의 창틀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과 ‘산수(山水)’의 차이처럼.......이런 차원에서 예술의 관건은 관념의 창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나에게 동해 바닷가란 한동안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란 후렴구가 있는 ‘고래사냥’이란 노래와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의 <관동별곡>, 그리고 고교 수학여행 때 가 본 낙산사와 그 부근의 눈부시게 흰 모래와 솔숲으로 기억된 곳이었다.
그런데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대구 인근의 하양 현감으로 5년(1721년~26년), 포항 근처의 청하현감으로 2년간(1733~35년) 재임하는 동안 영남의 주요 명승지는 물론 ‘관동팔경’을 오르내리며 그림을 그렸음을 알게 되었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2.
지난 8월 17일, 나는 가족과 함께 경상북도 울진에 자리 잡은 관동팔경 제1경인 <월송정>을 향해 출발했다. 경북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여름 산맥을 배경으로 해서 수목의 짙푸름이 뚝뚝 떨어지는 길을 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해안 경치를 보기 위해 일부러 더 좁은 해안도로를 천천히 가기도 했다. 굽이굽이 해안 길 오른 편은 일망무제의 동해 바다가 펼쳐졌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마치 백마들이 하얀 갈기를 세우고 푸른 초원을 달려오는 듯했다.
해안을 따라 2시간 남짓 달렸을까, 너른 들과 장송림(長松林)이 보이고, 월송정을 가리키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거기서 오른 편으로 꺾어진 길로 접어들어 평해 황씨 시조 제단원 옆으로 난 솔숲 길을 얼마간 들어가자,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 솔숲 사이로 2층 정자건물이 보였다.  

작은 언덕 계단 위에 있는 월송정에 오르기 전 안내 게시판을 읽어보니 여러 차례 월송정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현재의 건물은 지은 지 불과 2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월송정의 현판을 보니 ‘월송정’의 월은 달 월(月)자가 아니라, 월나라 월(越)자(넘을 ‘월’자이기도 함)였다. (겸재 정선이 그린 <월송정도(越松亭圖>를 오래 전부터 봤으면서도 그림 제목은 예사로 본 셈이다. 그래서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미 조선 시대부터 월송정의 유래에 대한 여러 설이 있었다. 즉 월(越)나라에서 가져온 소나무에서 유래했다는 설, “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라는 설,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이는 성음(聲音)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는 설” 등이었다.)

월송정 2층 누각으로 올라가니 이 장소와 깊은 사연이 있는 인물들의 글들이 여러 개의 편액으로 걸려 있었다. 먼저 고려시대 경기체가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안축(謹齋 安軸, 1287~1348)의 시가 눈에 띄었으며, 옆에 한글 번역까지 있었다.(맨 첫구절의 事去人非水自東, 千年遺踵在亭松은 ‘일은 지나가고 사람도 옛사람이 아니나 물은 동쪽에 그대로 인데 / 천년의 자취 정자와 소나무일 뿐’으로 해석했으면 좋았을 듯하다.)  
그 다음은 여말 선초 때의 사람인 기우자 이행(騎牛子 李行, 1352~1432)과 김종서(金宗瑞)의 글을 볼 수 있었다. 이 중 이행은 이곳 월송정에서 소를 타고 다니며 노닌 것으로 유명해서 훨씬 후대의 인물인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까지 그의 행적을 소재로 <기우선인도(騎牛仙人圖)>를 남겼을 정도다. 이행의 <월송정>이란 한시를 해석해보니 대략 다음과 같았다.

넓은 바다 위로 밝은 달은 솔숲에 걸려 있는데
소뿔을 끌어당기며(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시를 읊다가 취하여 정자 가운데에 누웠더니
단구(丹丘 ; 신선들이 산다는 가상적인 곳)의 신선들을 꿈속에서 만나네  

滄溟白月半浮松
叩角歸來興轉濃
吟罷亭中仍醉倒
丹丘仙侶夢相逢  

이러한 시를 보면 아득한 옛날의 신화나 전설 같지만, 이 땅에서는 불과 백 년 전 만 하더라도 여건만 된다면 동경한 삶이었다. 어느 시대든 누군가 다만 한 때 이 세상(자연) 속에서 살다 가는 것이고 보면 이 몽상적인 시도 그 배면엔 실존의 엄연함을 숨길 수 없다.  


3.
바다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솔숲 사이로 보이는 모래 언덕과 푸른 바다 위로 뜨거운 여름햇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 더없이 낯선 광경이었다.
정자에서 내려와 근처 여기저기를 가보았다. 월송정에는 이른바 ‘문화유산답사’라는 유행에 편승한 시각으로는 특별히 볼만한 대상이 없다. 사구(砂丘)위에 솔숲만 있을 뿐. 물론 옛 월송정 솔숲은 오늘 현재와는 다름을 조선 선조 때 명 문장가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鵝溪 李山海,1538~1609)가 한 때 이곳 근처 마을에 유배되었을 때 쓴 <월송정기>를 보면 알 수 있다.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솔이 우뚝우뚝 높이 치솟아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몇 만 그루나 되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이 참빗과 같고 그 곧기가 먹줄과 같아, 고개를 젖히면 하늘에 해가 보이지 않고 다만 보이느니 나무 아래 곱게 깔려 있는 은 부스러기 옥가루와 같은 모래뿐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지만 위의 기록만큼 많지는 않으며, 또 아주 곧게 자란 나무도 아니고 수령도 대개 백년 미만이다. 그렇지만 이곳 솔숲이 여전하다 해도 ‘관동 팔경’중 제1경으로 꼽혔음을 선뜻 이해할 현대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옛날 이곳에는 ‘월송정 십경(平沙落雁, 龍岩日出, 豬場漁歌, 竹峰夜雨, 賢山春雪, 修眞晩種, 龜浦遠帆, 鶴山濃霧, 南擅暮煙, 前浦農謠)’까지 있었다. 이를 통해 옛 사람이 왜 이곳을 좋아한 지는 어느 정도 짐작되지만 십경 중에서 지금은 사라진 장면이 많다.
그렇다면 이 곳이 매력적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곳이 예로부터 이를테면 신라시대 네 화랑(永郞, 述郞, 南郞, 安郞) 이 머물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유서 깊은 사연이 많아서 그럴까? 다시 이산해(이름이 산과 바다이다)의 <월송정기>를 보자.  

이 정자에는, 매양 해풍이 불어오면 송뢰(松籟 ; 솔바람)가 파도소리와 뒤섞여 마치 균천(鈞天; 하늘을 아홉 방향으로 나눈 구천의 하나로서 중앙의 하늘을 말함)의 광악(廣樂)을 반공에서 번갈아 연주하는 듯,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쭈뼛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한다.    
내가 일찍이 화오촌(花塢村)에 우거하면서 기이한 경관을 실컷 차지하였다. 따스한 봄날 새들이 다투어 지저귈 때면 두건을 젖혀 쓴 채 지팡이를 끌면서 붉은 꽃(해당화를 말함) 푸른 솔 사이로 배회하였고, 태양이 불덩이 같은 여름날 땀이 비 오듯 흐를 때면 솔에 기대어 한가로이 졸면서 울릉도 저편으로 정신이 노닐곤 하였다.
그리고 서리가 차갑게 내려 솔방울이 어지러이 떨어지면 성긴 솔가지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희미한 솔바람의 운율을 들을 수 있었으며, 대지가 온통 눈으로 덮여 솔숲이 만 마리 은 빛 용으로 변하면 구불텅 얽힌 줄기 사이로 구슬 가지 옥빛이 은은히 어리었다. 게다가 솔 비늘이 아침 비에 함초롬히 젖고 안개와 이내가 달밤에 가로 둘러 있는 경치로 말하자면, 비록 용면 거사를 시켜 그리게 하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 방불할 수 있으리오.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가 그  얼마였으랴. 그 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먹을 놀려 경물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을 몰랐던 이들도 있을 것이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에 자적(自適)했던 이들도 있고, 강호(江湖)의 근심에 애태웠던 이들도 있을 것이니, 즐거워한 이도 한둘이 아니요 근심한 이도 한둘이 아니다.…(중략)…천지간에 만물은 크든 작든 저마다 분수가 있어 생겼다 사라지고 찼다가 기우니, 이는 일월과 귀신도 면할 수가 없는 법인 데, 하물며 산천이며, 하물며 식물이며,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이 정자가 서 있는 곳이 당초에는 못이었는지 골짜기였는지 바다였는지 뭍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종내에는 또 어떠한 곳이 될까. 또한 솔을 심은 이는 누구며 솔은 기른 이는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 아니면 솔이 도끼를 맞기 전에 이 일대의 모래 언덕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인가. …(중략)…내 작디작은 일신(一身)은 흡사 천지 사이의 하루살이요, 창해에 떠 있는 좁쌀 한 톨 격이니…(하략)…

이러한 자연 체험은 이산해 만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며 선조 중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체험기나 한시를 남겼다. 이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은 인간세와 자연의 교감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일시적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을 주는 어떤 대상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대자연의 통시적 ․ 공시적 변화 속에서 그 변화의 한 부분이기도 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선조들은 이러한 자연의 변화와 숨결을 온전히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정자라든가 누각을 특히 좋아했다.  

예로부터 한자 문명권에는 인간세와 자연이 교감하는 곳으로는 ‘누(樓)’와 ‘대(臺)’, 그리고 ‘정(亭)’이 있었다. 이 중에서 ‘누’는 밀양의 영남루, 진주 촉석루, 삼척의 죽서루, 평양의 부벽루처럼 규모도 크고 한 고을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대’ 역시 강릉의 경포대, 평양의 을밀대처럼 한 지방을 대표하는 명승지다.
이에 비해 정(자)은 산림 속이라든가 연못가라든가 큰 건물들이 자리한 정원 한 켠에  아담하게 위치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겸재의 <월송정도>를 보면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성루를 겸한 큰 정자임을 알 수 있다.          

‘누’든 ‘정’이든 ‘대’든 그것은 자연과 함께하는 장소다. 이처럼 특정한 장소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전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누정 문화’는 오늘날의 관광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그 차원이 다르다.      
물론 현대인들이 옛날 우리 선조들처럼 자연을 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렇지만 누정에서의 선조들의 자연체험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정자와 누각은 자연을 거의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인간이 서로 깊은 관계를 맺게 하는 장소다. 이러한 곳에서 자연을 온 몸으로 느낀 자는 건물을 짓더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전통 건물의 특성이 그 실체보다 공간(틈)에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구잡이식 도로 개설이나 난개발의 표상인 건물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중시한 전통이 망각된 현상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일이 오히려 원래의 문화재를 훼손하는 작태가 다반사임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어떤 문화재 전문가는 우리시대에는 무조건 과거의 유적을 복원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하겠는가?)
이곳 월송정에서도 자연과 건물의 관계에 대한 몰지각으로 인한 볼썽사나운 현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월송정 앞바다에 설치된 철조망이라든가 월송정 바로 앞의 군부대 건물로 짐작되는 붉은 벽돌 건물은 아직도 분단된 나라여서 그렇다 해도, 월송정 입구 근처 왼쪽에 새로 지은 노인회관 건물과, 화장실 건물을 솔숲이 무성한 바닷가에 2층 누각으로 난데없이 크게 지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외벽에다 매우 큰 글씨로 화장실이라 써 놓은 것은 어이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기실 이는 겸재의 <월송정도> 한번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4.
겸재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을 역임한 후 서울로 돌아와 63세 때 그린 그림으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중 <월송정도>는 월송정이 있는 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조감한 그림이다. 그런데 월송정 주위에는 <월송정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산이 없다. 겸재는 <금강전도>를 그릴 때처럼 이곳도 시점을 상상해서 조감하듯 <월송정도>를 그렸던 것이다. 물론 <월송정도>의 주된 특색은 이러한 시점의 자유로운 변환보다 이곳의 풍광을 함축적으로 그리면서도 여실히 드러낸 그 필치의 독특함에 있다.  
사실 《관동명승첩》의 <월송정도>는 멀리 하늘과 잇닿은 곳까지 크게 파도가 출렁이는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솔숲을 가운데 길게 배치하고 나머지 부분은 간결하면서도 농담이 풍부한 그림이다. 즉 가운데 솔숲이 이 그림의 주된 소재다. 그런데 확연히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밝은 동해의 햇살(光)과 솔숲 사이로 부는 솔솔 부는 바람(風)과 이다. 즉 겸재는 이곳의 바람과 빛(風光)을 그린 것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은 겸재의 그림에 대해, ‘겸재의 산수는 농도의 차이로 인해 바람이 솔솔 지나가는 듯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이 특히 《관동명승첩》의 <월송정도>에 더없이 부합됨을 이곳에서 실감 했다.  

겸재는 한 소재를 각기 다른 시점과 다른 표현 방식으로도 많이 그렸다. 이는 <월송정도>도 마찬가지다. 사실 겸재의 그림은 전기와 후기가 많이 다른 데, 겸재 특유의 유니크한 필력은 50대 후반과 60 대 초반 이후의 그림부터 두드러진다. 이는 이 무렵이 겸재의 화력에서 각별한 시기임을 방증 한다. 바로 이 시기(청하현감시절)와 이 보다 앞선 시기에(하양현감 시절) 겸재는 서울과 금강산 일대에 국한된 소재에서 벗어나 좀 더 폭 넓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동해 지역은 금강산을 포함, 경승지가 많고, 특히 끝없이 너른 푸른 바다와 흰 모래, 이 곳 특유의 곧게 자란 무수한 소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로 부는 바다 바람 속에서  한층 시원하면서도 거침없는 필력이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감동이란 풍경과 그림 사이에 있다.      


5.
다음 날 오전, 망양정으로 가기 위해 동해안 해변을 달렸다. 가는 길목에 있는  월송정을 다시 가보았다. 이는 겸재가 <월송정도>를 그린 장소를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정자에 있는 편액 글씨 중 일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월송정은 어제보다 더 한적했고, 어제 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장소라 할지라도 시시각각 다른 경험을 하게 됨을 깨달았다.

월송정에서 나와 다시 동해안을 따라 대략 30분 쯤 달리자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바닷가에 이르렀다. 망양정이 자리 잡은 산 밑 회집 옆 주차장에 도착한 것이다. 망양정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은 몇 년 전에 가본 금강산 구룡폭포로 가는 길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올해 새로 지은 망양정은 품격 있는 전통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신발을 벗고 망양정 마루 위로 올라서는 순간, 일망무제의 망망대해인 동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계자(鷄子: 닭다리 모양) 난간에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동안, 이곳에 오기 전 잠시 펼쳐 보았던 정철의 <관동별곡>의 구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늘 끝(天根)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 인고,
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 지고,
은산을 꺾어내어 천지사방(六合)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하략)…

불과 수 십 년전 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았다던 동해의 고래는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는 정말 실감났다.
그러나 망양정에서 내려와 앞에 있는 안내 글을 읽어보았더니, 이 망양정이 본래의 자리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그러나 안내 글의 내용은 망양정의 역사적 유래와 망양정을 거쳐 간 주요 관련 인물들을 간명하면서도 적절하게 잘 써 놓은 편이었다.)  
원래의 망양정은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그냥 스쳐 지나가버린 현 망양 휴게소 자리였다.)에 있었는데 조선 철종 때 이건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망양정 자리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겸재 정선의 《관동명승첩》에 나오는 <망양정도>는 원래의 망양정 자리가 아니다.(조선 숙종이 관동팔경 중 망양정 경치가 최고라 하여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란 현판을 하사한 것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망양정의 절경을 읊은 유명한 시와 글들도 대다수는 지금의 망양정과는 무관하다.)
망양정을 새로 복원할 때 이러한 역사성을 고려하여 원래 자리에 지었더라면 송강이나 겸재의 자취를 더 의미 있게 느낄 수 있을 것이 아닌가?(*그러나 김훈이 쓴 글을 통해 옛 망양정 자리는 무분별한 도로공사로 단애의 허리가 잘려나가 바닷물은 단애 끝으로부터 멀찌감치 쫓겨났고 그 사이는 시멘트 칠갑이 되어 있으며, 정자터도 사방이 깎여져 나가 원형대로의 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있음을 알았다.)              


6.
겸재의 관동팔경 그림 중 특히《관동명승첩》의 그림들이 좋은데 물론 제각기 그 풍치가 다르다. <총석정도>과 <죽서루도>는 깎아지른 절벽의 견고함을, <삼일포도>는 가운데가 텅빈 주음법(主陰法)으로 호수의 아늑함을, <청간정도>는 넘실대는 동해바다를, <망양정도>는 일렁이는 동해바다와 험절(險絶)한 수직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정자의 오롯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겸재의 그림은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산천의 특징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이는 유례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미 당대부터 이러한 독자성을 인정받았음을 겸재 바로 옆 짚에 살았던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의 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영석은 겸재가 만년에 그린 화첩에 부치는 발문에서 겸재의 화력과 화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선의 이 그림들은 먹을 씀에 먹이 번지는 흔적이 없고 선염에도 법도를 갖추고 있어 깊은 맛이 나고 깊고 깊어 빽빽하고 울창하며 윤택하고 무르익어 빼어나 …(중략)… 조선 300년(*당시 시점임)을 돌아보아도 아직 이와 같은 화가를 볼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나라 산수화가들 가운데 ‘윤곽, 위치 및 (중국 화본에 나오는) 16가지의 준법의 만 가지 흐름이 굽이치거나 한 가닥 실처럼 어지럽지 않다’는 이론과 방법을 제대로 터득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비록 중첩된 산봉우리라 하더라도 오직 수묵으로 한결같이 마구 칠하여 앞과 뒤와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과 얕고 깊음, 그리고 평평한 흙과 돌의 기세를 제대로 변별하지 않았으며, 물을  그림에도 잔잔함과 급함을 구별하지 않고 두 붓을 새끼 꼬듯이 꼬고 아울러 잡고 그렸으니 어찌 산수(화)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이와 같이 말했더니 겸재 또한 그렇다고 했다.
겸재는 일찍이 북악산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있으면 앞산을 마주하고 그 산의 주름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보며 먹을 씀에 저절로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의 명승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 유람하고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중략)… 그가 사용한 붓을 묻으면 거의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화가들이 상투적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떨쳐버리니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정선으로부터 새로이 열렸다.
                                    
위의 글은 겸재가 그림을 하도 많이 그려 ‘그가 사용한 붓을 묻으면 거의 무덤을 이룰 정도’라는 사실은 물론 겸재의 화풍의 독자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실 겸재의 화풍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것이며, 이는 결국 겸재가 우리의 산천을 폭넓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이후 외세에 의한 단절의 역사를 겪으면서 현재 우리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 대개 이 사실을 모르는 실정이다. 이러니 일반인들의 전통회화에 대한 소양과 나아가 전통문화에 대한 무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월송정이 지금은  TV 사극 드라마 촬영장만큼도 별 볼 것 없는 관광코스에 지나지 않음은 바로 이런 까닭도 있다.    


7.  
역사는 결코 단일한 선형의 시공간에서 형성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번 월송정과 망양정에서의 여정을 통해 왜 겸재의 그림이 투명한 햇살아래 바람이 솔솔 흐르는 듯한 지 알 수 있었다. 겸재의 화폭 속 세상은 그 힘찬 ‘선묘’만큼이나 기운이 넘치면서도 또한 여백으로 확산되는 ‘옅음’의 다양한 변주만큼이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그만큼 겸재의 그림은 생성과 소멸을 아우르는 세상의 실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월송정과 망양정을 떠올리면 역사와 삶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대에 따라 정자는 폐정되었다 다시 세워지곤 한 것이다. 이처럼 단절과 계승의 반복됨이 역사이지만 현시대의 전통 문화와의 단절은 그 전과 양상이 사뭇 다르다. 누정문화를 형성한 특유의 장소성은 망각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주소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바로미터다.
                                        
                                 2005년 8월 19일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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