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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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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선생과 오상길 선생의 작가대담을 읽고



1.
어제 교보문고에 들렸다가 우연히 오상길 선생이 엮은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Ⅳ(VOL.3)』, (ICAS 2004)를 보게 되었다.
사실 오 선생은 지난 2000년 초부터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현대이란 무엇인가’라는 차원에서 현대 미술 다시 읽기 자료집을 후배들과 함께 편찬, 발간해왔으며, 그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청음사, 2000),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Ⅰ,Ⅱ(VOL.1,2)』,(ICAS, 2001),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Ⅲ(VOL.1,2)』,(ICAS, 2003)를 엮어내었다. 그래서 이 책들 중 어떤 책은 출간 기념회에서 사기도 하고, 또 몇 권은 그저 얻기도 했으나, 이번『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Ⅳ권』은 작년에 출간된 책이라 늘 봐야지 하는 가운데 어느 덧 1년이 훌쩍 지나버려 처음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보 문고 미술 분야 코너에 마침 이 책이 꽂혀 있기에 펼쳐 보다가 김병기 선생과의 대담에 눈길이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 읽고 말기엔 자료적인 가치는 물론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내용들이 그 대담 속에 있었다.  
책을 사서 집에 와서 다시 찬찬히 읽었다. 장장 7시간에 걸친 대담 내용을 자잘한 글씨로 대하면서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2.
나는 지난 2004년 가을에 있었던 이승택 선생 개인전 오픈 날에 김병기 선생을 뵌 적이 있다. 김 병기 선생은 1916년 생으로 소 그림을 유명한 이중섭과 평양 보통학교 동급생인 사람으로, 동경에서도 유영국, 김환기, 이중섭 등과 같이 공부한 분이다.
그날 김병기 선생이 89세의 고령임에도 마치 50대 후반처럼 정정한 모습에 매우 놀랐고, 1930년대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에 얽힌 비화와 해박한 지식, 그리고 현대미술에 대한 통찰에도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김병기 선생의 말 중 기억에 남은 것은, 우리는 한 세기동안 마르셀 뒤샹에서 요셉 보이스에 이르기까지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 다 배웠다는 것과, 흔히 우리나라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교량적 위치 즉 ‘복도’로 보는데, 그럼에도 한국만이 간직하고 있는 에센셜(essential)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양은 만리장성 남쪽의 동양과 만리장성 북쪽의 동양이 있는데 만리장성 남쪽의 은은한 전통은 우리의 사랑방에서 이어져 왔고 만리장성 북쪽의 전통은 안방에서 이어져 왔는데, 이 북쪽의 전통은 색동저고리에서 볼 수 있듯 매우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로 대변되며, 이는 역동적인 농악을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인물 중에 이영희 선생이 있다. 이영희 선생은 바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8억 인구와의 대화>,<베트남 전쟁>등의 저자로서 그의 모든 책과 글을 관류하는 공통의 특성은 동시대인의 통념을 뒤엎는 진실의 힘에 있다. 중국의 루쉰처럼 비타협적인 진실주의자인 그는 ‘오탁악세’의 우리 근 현대사에서 자신의 삶의 행보를 스스로 결정한 보기 드문 ‘자유인’인 것이다.
이 때문에 명예와 지위와 부를 누리는 사람보다 나는 이러한 분이 우리 근현대사의 실질적인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김병기 선생과의 대담을 보면서 미술계에도 이 이영희 선생 같은 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참된 예술의 세계는 추상같은 진실의 세계와 많이 유사하면서도 이조차 넘어서는 영역이며, 이런 의미에서 김병기 선생의 삶에서는 더욱 풍부한 정신적 함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현대 미술 다시 읽기 Ⅳ』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 사실은 먼저 그간 일부 평론가들에 기술된 비평적 ․ 미술사적 진술이 얼마나 단선적이고 편협한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김병기 선생과의 대담에서는 역시 한 개인의 의식과 삶은 당대 현실과 분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을 겪고, 그리고 동족상잔인 한국 전쟁 이후의 온갖 험난한 시대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역경어린 삶은 그 자체로서 감동이었으며, 그만큼 역사적 시점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실상과 그 연장선에서 오늘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 대담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나이 차이란 아무런 장벽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 했다. 무엇보다 그간 오 선생이 줄곧 한국 현대 미술에 대한 문제 제기―‘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간과한 채 특정인의 주도에 의한 집단 운동 중심으로 정설인양 서술되는 한국현대미술사에 대한 비판―가 옳았음을 원로 미술가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선생은 대담자로서 사전에 우리 현대 미술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적절히 질의하여 세대를 넘어 선 밀도 있는 대담을 함으로써 그 질을 높였다.
그렇지만 아래 글들은 이번 대담 중 미술사에 관련된 구체적 사실에 대한 언급보다 작가로서 삶과 예술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관련된 주요 대목중 주로 김병기 선생 말을 중심으로 일부 발췌한 것이다.


3.
오상길 :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고려대학 소장품들 중 문인화 전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겸재의 <인왕산도> 앞에서 30분 동안 굳어 붙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열등감을 느꼈었어요. 제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의식은 역사에 대한 문제, 예컨대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역사적으로 리얼리티를 어떻게 소화해가야 하느냐 하는 곳에 있는데, 정작 어려서부터 공부해온 것은 서구미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체계였고, 그것에 깊이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제 딴에는 매우 치열한 삶을 살았고 그런 조형의식을 추구했다고 생각했는데, 겸재의 그림을 보면서 그 세계가 저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겁니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예술이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따뜻하고 빛나는 리얼리티, 순수한 예술이 가지고 있는 리얼리티를 본 겁니다.
                                                              
김병기 : 내가 충분히 파악했는지 몰라도 좌절과 고민과.... 이런 것이 참 귀중한 겁니다. 일전에 성곡미술관 전람회 때 박서보가 아! 이거구나! 알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서보 보다 선배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자기가 알겠고 그렇게 했을 때는 남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모르겠다고 하는 거 있잖아요? 좌절과 고민,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이거다! 하고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좋은 거예요. 뎃상을 하다가 이거 아니다 할 때, 그게 좋은 것입니다. 그 정신의 상태가 물질과 결부되면 그것은 작품이에요.…(후략)  
                                                                
김병기 : 천재 이야기가 나와서 가끔 하는 얘기가 있는데, 자코메티하고 브라크가 피카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자코메티는 연령이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피카소가 대선배지요. 그런데 자코메티가 하는 얘기가 ‘피카소가 예술가인줄 알았더니 그냥 천재에 불과해’하는 말이 있어요. 전기에 나와요. 참 가슴이 섬뜩한 얘기예요. 천재라 하면 최상의 존재인 줄 알았는데, 천재 위에 예술가가 있는 겁니다...(중략).. 천재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기술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인데, 기술이라는 것은 좀 하면 다 돼요. 재주는 다 있는 겁니다. 재주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합니까? 간단히 말하면 천재 아닌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하느냐 말입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이 힘든 거예요. 정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병기 : 나는 오상길씨가 얘기하는 의문에 공감합니다. 그렇다, 아니다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의문에 100% 동감한다는 것입니다. 의문은 끝까지 추궁하세요. 나는 세잔부터 출발한 20세기의 온 과정을 정신적으로 다 겪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개인이 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한다고 동요되지 않아요. 단지 좀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본질적인 인 입장에서 나를 형성한 전통으로서의 한국, 동양,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서양에서 오히려 동양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동양에서는 서양을 생각했어요.(후략)    
                                                        
오상길 : 저는 비록 한 시대의 예술가이지만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저와 함께 살고 있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단면을 제가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은 제 이전에 제 나이 때 활동하셨던 선생님 같은 분들이나 조상들의 연장선상에 있고, 또 후손들이 미래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 있고, 그것이 요구되는 방향이 있는데, 그 중간 중간에 역사적인 방향과 관계없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가치들이 전도되고, 물론 그것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제가 역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 역사를 다 살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살고 있는 현실에 충실해야할 이유가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병기 : 나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볼 때 한 작품을 가지고 그 작가의 보지 않습니다. 이 작품과 그 다음의 작품으로 전개되는 그 공간을 봅니다. 거기서 한 작가를 봅니다.…(중략)…30년 동안 같은 것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후략)
                                                        
김병기 : 서툰 선전가들이 자꾸 자기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누군들 자기선전 안하는 사람이 있나? 다 하고 있다고. 안 하는 척하고 다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모르겠어” 그것도 하나의 선전이에요.    
                                                    


남의 학교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박서보가 가르칠 때 형상성이 나오면 “집어치워” 그랬다는 겁니다. 왜 집어치우라는 거죠?
내가 존경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교수는 있어요. 귀스타브 모로 인데, 모로의 교실에서 마티스도 나오고 루오도 나왔어요. 불란서 에꼴 데 보자르에 모로 교실이 있고, 가령 부글로 교실 같은 것이 있었거든요? 아카데미샨이지. 부글로는 다 나를 따르라 하는 식의 아카데믹한 교육의 대가였는데, 막상 거기서는 시원한 작가가 안나왔어요. 그런데 어째서 모로 교실에서 마티스도 나오고 루오도 나왔는가 했더니, 어떤 학생 캔버스 앞에 가서는 ‘넌 왜 캔버스만 보느냐, 대상은 보지 않고, 문제는 대상인데.’ 또 어떤 학생 앞에 가서는 ‘너는 왜 대상만 보고 그리지? 문제는 캔버스인데.’ 이런 정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학생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 상황을 지적한 것입니다....(후략)  
                                                    
김병기 : 잠깐 또 하나. 아주 쉬운 말로 하면, 우리가 외국 것을 받아들여 옮길 때 그 씨앗을 토양에 심어야지, 그 꽃을 꺾어다가 심어본들 꽃이 성장하느냐는 겁니다. 그 씨앗이라는 것은 그 땅의 근본 자세, 기본정신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서양에서 배울 점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한 기본자세를 가져와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김병기 : …(전략)새로운 시간과 부딪혀서 어떤 물질이 결부되는 정신상태, 이것이 작품일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좀 비워 놓을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 강하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잘못 현실을 파악할 수도 있고...(중략)...작품이 방정식처럼 풀어내는 계산식은 아니에요. 1 더하기 1인 2가 아니라 3이고 9고 0이 되는 이상한 상태의 결론이 예술이에요. 그러나 코가 찡해지는 것이 있잖아요? 뭔지 설명은 안되지만. 베르그송인가 누가 얘기 했듯이 감동은 코끝에서 오는 거예요. 뭔지는 몰라도 짜릿한 감동을 줍니다. 만인이 나쁘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짜릿한 게 있잖아요? 만인이 좋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또 안 그런 게 있어요. 그럼 어떤 게 좋은 고 하니 본인이 짜릿해지는 게 좋은 거예요. 나는 모든 얘기에 공감하면서 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김병기 : 내가 가끔 하는 얘기가 있는데, 고려시대 청자는 그 오리진이 중국 송입니다. 송나라에서 온, 그 method는 중국인데 고려 사람들은 그 흉내를 낸 거예요. 그런데 고려청자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상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흙에 홈을 파고 그 홈에 검은 흙과 흰 흙을 집어넣은, 그래서 검은 나무도 그리고, 흰 학도 그리고, 상감이라는 방법을 고려 사람이 발견한 거예요. 중국은 양각, 음각이 있어서 울룩불룩한 것을 좋아하지요. 한국사람은 매끈한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중국 청자는 새파랗지만, 고려의 청자는 새파란 게 아니고 회색 기운이 돌아요. 어떤 것이 더 깊이 있는 청자색인고 하니 고려의 색인 것입니다. 고려의 하늘처럼 아득히 깊이 가서 회색으로 변해요. 그런 은은한 게 있습니다. 송자는 컴퍼스를 대고 그은 것처럼 정확한 기하학적인 원이지만, 고려 사람들이 그린 원은 약간 찌그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기하학적 컴퍼스 원은 요만하데, 고려 사람이나 조선 사람이 만든 원은 크게 둥근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백자인들 중국에 없겠어요? 모든 오리진은 중국에 있지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이것을 이런 풍토에서 우리 구미에 맞추어서 만들었던 겁니다. 특히 도자기에 그게 많이 나와요. 그것이 한국 사람이 이어가야 하는 전통인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해 나가는, 그런 것의 정체는 자연입니다. 중국은 인공적이에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좀더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의 묘미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 또 일본사람들이라서, 임진왜란 때 한국 도공들을 끌고 가서는 한국의 자연미를 내기 위해서 일부러 비꼬기도 하고, 손자국도 넣기도 하고, 찌글하게도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너무 지나쳤어요. 그게 스시에 나오는 그릇입니다. 일본사람들의 치명적인 결점은 자연미를 자연 그 자체로 내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내는 거예요. 여기에 확실히 한국의 위치가 있는 거예요. 그런 체질을 현대미술에 살리면 되는 거예요. 특히 남북이 갈라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참 괴로워요. 평양사람인 나는 고향도 없어요. 이런 특수한 극한 상황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에요. 독일도 다 해결되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정신이 나올 수 있는 귀한 환경적인 조건이에요. 우리가 뭔가 된다고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오랜 괴로운 분단의 시기가 앞으로의  장래를 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어요. 나는 모든 걸 낙관합니다.  
                                                
김병기 : 백남준이 다다거든요? 다다는 부정을 하는 거예요. 부정을 한 번 더 부정하면 긍정이 됩니다. 나는 그 긍정의 세계를 모르고 살아왔어요. 부정에 부정을 연속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긍정의 세계의 아름다움, 그 황홀함, 그걸 생각합니다.  
                                                                            
김병기 : 그런데 백남준은 부정하는 스타일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어요. 그 놈은 나쁜 놈이야.(웃음)‘세상은 지루 합니다.’ 그걸 누가 몰라? ‘동서는 하나입니다.’ 우리도 다 아는 거예요. 그걸 한 번 더 넘어야지요. 그 넘은 것을 우리는 요구하는데,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다 아는 얘기예요.

오상길 : …(전략) 제 눈앞에는 뿌연 커튼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렴풋이는 보이는 것 같은 데, 현재로서는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마구 달리고 있고, 이것저것 파헤치면서 뒤적거리고 쌓아 모으기도 하고, 흩어버렸다가 다시 정리해보기도 하고…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많이 부족해서 뭔가 뚜렷이 보고 싶은 욕망이 강한 것 같아요. 답답하기도 하고…        
                                                        
김병기 :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아직 오십도 안됐어요. 굉장한 시간이 있어요. 60이 되면 다 늙은 것 같지요? 아주 좋은 시간이 오고, 70에 더 좋고 그렇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늙었다고 생각할 때 늙는 거예요.
                                                
                                                        
4.
마르셀 뒤샹과 카반느의 대담이 그러하듯, 작가와의 실제 대화 내용은 당사자의 직접적 언급이라는 측면에서 그 어떤 비평적 논의보다 자료적 가치는 물론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위 두 분의 대화 속에는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과, 사려 깊은 지혜와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인간의 감성적 풍모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이러한 어록은 몇 백 권의 책으로도 전할 수 없는 내용을 단 한마디 말로 전하기도 한다.
위 대담을 통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시대의 병폐로 무엇보다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꼽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마음과 뜻이 통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간관계는 없는 것이다.
현실적인 처세에만 능한, 즉 교활하게 사는 사람들은 얄팍한 처세술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그러한 처세술의 차원에서 참된 만남이 가능할 리가 없다.
어쩌면 예술가들이기에 가능한, 세대를 넘어 선 두 작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 예술의 참 가치와 예술가의 길은 당대의 명예와 지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야말로 ‘코끝을 찡하게 하는’ 매력과 감동에 있다. 바로 이것이 부정을 넘어선 ‘긍정의 아름다움, 그 황홀함’이 아니겠는가?        

                                                     2005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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