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현
조회 수 : 1717
2016.08.23 (11: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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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13

   ()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독자들에게

 

      문명은 다채로운 인간생활의 색상과 품성, 수준과 농도로 형성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곳을 막론하고 문명은 부서지기 쉽고 모자라는 면이 있으며 쉽게 몰락하고 파괴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명에 대한 가장 죄악의 하나는 쿠웨이트에 있는 수백 개의 유전에 불을 지르는 따위의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어느 각도에서 보든 죄악일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라도 한국민만큼은 이런 야만적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기독교를 가장 신봉하는 민족은 한국인이라는 말을 극동에서 일한 선교사 친구들에게 들어 알고 있기 대문이다. 나는 김산 자신에게 많은 사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대의 씨족 . 종족적 보복 윤리 극복하고 초연히 일어선 인물임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인생에서 오직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것에서 패배했다. 나는 자신에게만 승리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려는 것은 복수 살인같은 원시적 인간본능을 딛고 일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뜻이다.

 

       김산은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였다. 자신이 그렇다. 나는 평생을 참된 사실과 진실 그리고 진실하고 고귀한 원리의 추구에 바쳐왔다. 소녀시절에 나는 버니언(John Bunyan, 1265-1321)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다. 훗날 내가 성장하여 영국에 갔을 나는 버니언이 감옥에 갇혀 세계적 고전이 우화집을 저술한 장소인 베드퍼드셔(Bedfordshire) 가보지 않고서는 견딜 없었다. 그러나 단테의 [신곡] 가톨릭 서사시이고 혁신의 이라고 불렸던 버니언의 글보다 시대적으로 휠씬 앞선 것이었다. 감산은 단테적 심리를 졸업하고 톨스토이즘과 아나키즘으로 나아갔고 사회주의의 현대철학인 마르크시즘에 이르게 된다.

 

      마르크시즘은 엄격한 정통파에서 약간이라도 빗나간 사람들을 통틀어 칭하는 토로츠키즘이라는 장식적 형용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쩌동 사상과 같은 많은 화신(구체화) 배출한 사상이다.

 

      김산은 일본경찰의 기록에서 보이는 혼합된 마르크시즘(Mixed Marxism)’ 혹은 1920-30년대의 동양이 겪은 상황 아래서 시대가 낳은 순교자였다. 1980년대에 그의 완전무결함이 명백히 증명되었고 스파이 혹은 토로츠키이주의자 따위의 누명을 말끔히 벗게 되었다. 혹자의 주장대로 그가 캉성에 의해 비밀처형을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일이야말로 끔찍한 잔악행위요 용서받을 없는 죄악이다. 이러한 행위를 나는 반문명 행위라고 못박고 싶다.

 

      33세의 김산은 일본의 억압 아래 있던 동시대 조선인들에게는 영명한 지도자요 사상가였으며, 뜨거운 영혼과 가슴을 소유한 순수한 인도주의자요 더없이 고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저서 [아리랑] 1941년에 처음 출판되고 책을 내놓은 출판사가 손해를 이래 오랜 세월이 침묵 속에서 다시 소생하는 것은 마치 유성들의 연결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랑] 다행이도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최근 년간 [아리랑] 관련하여 맺으온 모든 한국인 친구들에게 따뜻한 우정과 감사를 보낸다. 특히 [아리랑] 김산의 생애에 관련된 역사적 조명과 보충을 해주신 조지 토튼(George Totten) 교수와 개정판이 나오기까지 모든 수고와 협력을 아끼지 않은 화영 여사(워신톤, 북미주한국인권연합)가, ‘Gratitude for Song of Arirang and Continuous Friendship in Enlightening The Spirit of Korea. Friends of Korea, 1990’ 이라고 새긴 아름다운 감사패를 가지고 나를 방문해준 롱아일랜드대학교 지창보 교수의 친절과 호의에 감사하는 바이다.

 

      또한 자리를 빌어 [아리랑] 애독하고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독자들과 많은 애로와 난관을 무릅쓰고 책을 번역 출판해준 도서출판 동녘에도 깊은 감사를 보낸다.

 

                                    매디슨, 코네티컷

                                        1991 10 26

                                          해렌 포스트 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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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 no image 도병훈 [보내고 받아 들이다] 전
1624 2016-10-08
도병훈 [보내고 받아들이다] 展 EXPERIMENTAL S P A C E UZ 2016.10.1 – 10.23 프로로그 [크다고 할 까, 아니 어느 구석진 곳에라도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고, 작다고 할까, 아니 어느 큰 것이라도 감당하지 못함이 없다. 있다 할까, 아니 그 한결 같은 모습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물이 다 이리로부터 나오네, 무어라 이름 붙일수 없어 감히 이를 大乘이라고 한 것이다.] -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에서) 現代思想은 理性信仰의 부정으로부터 탄생해 나왔다. 觀念의 世界를 相對化하고, 그 밖으로, 感覺의 세계를 향해 飛翔해 가려는 듯 하다. 이 특징은 현대사상의 선구자 니-체(1844-1900)같으면 “善惡의 彼岸”이라고 말하고, 그 후계자 바타유(1897-1962)는 [知]에서 [非.知]로 나아 간다 할것이다. –사카이 다케시 [회화와 현대사상] 엄밀히 말하면 작품마다 조금씩 감상 방식이 다르나, 크게 보면 이번 나의 전시는 우리 근현대의 100여 년간에 걸친 ‘문화적 후위 현상’ 및 ‘문화적 혼성화’ 에 대한 나름의 대응 방식으로써, 겸재와 세잔이 각각 자신이 중심이 되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당대의 리얼리티를 찾았듯, 이 시대 나(우리)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라는 오랜 탐색과 실천의 연장선에 있으며, 원효의 ‘湛然’에 담긴 무애(無碍: 걸림 없는 자유) 정신과도 그 맥이 닿는다. –도병훈 작가의 自畵論. 작품의 조형적 됨됨 작가 도병훈의 조형언어의 본질은, [보내고 받아들이다]란 키-워드에 함축되어 있다. 이는 大乘 불교의 핵심을 나타내는 반야경의 [色卽是空]의 “即”이 接續辭의 기능을 함으로, [색]과 [공]의 중간에서 이들을 교차 융합시켜 주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따 온 화두(keyword)로 본다. 색이 世間界에 속한다면, 공은 法界를 나타내고 있는데, 卽은 이 중간에서 “밖에서 들어 오는 有를 뒤로 넘겨 주면서 無化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불교권에서는 이를 [相卽] 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상즉’은 서양의 변증법에서 사용하고 있는 ‘止揚’이라 하는 상대성적 변용의 논리 개념과는 달리, 불교권에서는 두뇌의 인식차원을 넘어 인간의 마음이 감수하는 차원에 이르게 하며, 이를 ‘아뢰야식’의 지각계라 본다. 인간이 지각하는 가장 순도 높은 지각態인 아뢰야식계에서는, 지각과 감각, 지성과 감성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음으로, 사물간의 구획을 짖는 마디에 구애 받지 않고 超時空性的(Non-Standard) 차원의 세계가 펄쳐지며 이를 볼 수 있게 한다. 반야에서 화엄으로 이르는 대승불교의 정수의 경지인 [法界]라 부르는 경지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眞如라고도 부르며, ‘萬有는 그 眞如에 있어서 서로 합쳐저 있다’ 라고 하는 대목도 나온다. 우리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디지털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Matrix적 網狀이 펄쳐저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파묵이나 발묵법등의 응용, 도형의 원심적인 유동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기법등 도병훈 작가가 추구하는 이미지의 ‘리얼티Reality’를 감각적으로 불려 내는 조형언어의 특징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작가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조형의 미학논리가 그렇거니와, 이는 깊고 투명한 원초성을 쉽게 환기 시켜주는 靑色의 단색조가 일률적으로 쓰여저 있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쳐, 파묵이나 발묵법등의 응용, 도형의 원심적인 유동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기법으로 인해 작품 전체가 환상적이며 원초적인 정서를 유발하는 힘이 생기고, 도상의 不定形적 프랙탈하며 카오스적 틀(pattern) 이 허용 되게 된다. 청색은 또한 감각적으로 “사물의 가장 근원적인 실체에 와 닿는 힘”이 있고, 깊고 맑아서 인간의 마음의 心潤 속에 잠재해 있는 “그리움”을 유발한다. 이는 색채론에서도 현대 회화에서 청은 ‘사물이 아닌 공기나 빛을 느끼게하는 기능이 있다’ 라고 하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도병훈 작품의 청색조의 소위는, 대상이 어떻게 보이는가, 라기 보담 대상이 어떻게 있는가 에 역점을 두고 있음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전통수묵화의 껌정색이 주는 모-든 색채를 수렴하고, 금기와 구속적 질서를 선양했던 유교적 정신에 부합했던 무거운 [無]를 지양한 소위다. 작품의 감상 이러한 몇가지 핵심적인 조형의 특징들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살펴 보자. [나동강과 만대루] 입구에서 오른쪽 벽 첫쩨번으로 걸려 있는 작품. 병산 서원의 만대루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통수묵화의 농담처리 방식과 현대회화의 드로잉이 융합되어 多視点을 요구하는 多面으로 이루어저 있다. 작품의 됨됨에서, 물성적 층위를 감각적으로 흝으 보게 하는 과정을 나타 냈다. [숨결] – 전시 벽면 세번쩨 작품. 천대신 종이를 씀. 이 작품은 관조의 삼메경에 놓여 있는 작가의 정일한 마음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작가의 말을 빌리면, “ [나와 물성 사이 공간 – 숨결 16922(종이 작품)]은, 다른 대작을 그리면서 함께 별도의 방에 펼쳐 놓고 가쁜하게 그린 그림으로 청색과 종이의 접촉, 손길, 붓질, 호흡 등을 떠올리며 자유롭게 추상적 이미지의 선적 농담으로 생명감과 공간감을 표현했다”. 전시장 현장에서 직접 작품 앞에 서게 되면 작가의 이 말이 실감으로 와 닿는다. [나선형 소쇄원 이야기] –다섯번쩨 그림. 이 작품은 호남의 대표적 원림(정원)인 담양 소쇄원 일대의 탑사에서 작가가 느낀 나선형 체험을 바탕으로 소용돌이 느낌을 그대로 나타냈다. 필자도 직접 이 원림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도병훈 작가가 언급하고 있는 “작은 공간을 무한공간으로 만드는 선조들의 공간관” 이란 원림 정상에 놓여 있는 누각에서 보면 주변의 경관들이 수직으로 높이 나 있는 얕으막한 계곡을 원심점을 주축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선형Spiral은 일종의 소용돌이로 식물이나 생물의 모양이 이러한 무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의 生動狀을 그려 내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대지 미술가,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이 유타주 솔트레이크 강변에 크다란 [나선형 둑]을 조성해 놓은 작품이 유명한데, 이 작품이 바로 거대한 나선형으로 이루어저 있다. 나선형은 생물의 성장을 증거하는 것으로 생명의 순환성을 상징하는 무늬이기도 하다. 고흐의 말년의 작품, [星月夜]가 별들이 “나선형으로 소용돌이 치고” 모든 것이 구심적인 운동을 나타내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고흐 가 그린 몇 안되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련의 나선형 미학소들은 모두가 우주의 살아 있는 야생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으로 이를 화면상에 바로 반영해 놓은 도병훈 작가의 서정적인 필법이 모더니즘적이라고 불려도 어긋남이 없으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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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 2016-09-19
Selected no image [아리랑] 13
1717 2016-08-23
[아리랑] - 13 (속)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독자들에게” 문명은 다채로운 인간생활의 색상과 품성, 수준과 농도로 형성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곳을 막론하고 문명은 부서지기 쉽고 모자라는 면이 있으며 쉽게 몰락하고 파괴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명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쿠웨이트에 있는 수백 개의 유전에 불을 지르는 따위의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어느 각도에서 보든 죄악일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라도 한국민만큼은 이런 야만적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기독교를 가장 잘 신봉하는 민족은 한국인이라는 말을 극동에서 일한 선교사 친구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기 대문이다. 나는 김산 자신에게 수 많은 사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대의 씨족 . 종족적 ‘보복 윤리’를 극복하고 초연히 일어선 인물임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오직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것에서 패배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만 승리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려는 것은 ‘복수’나 ‘살인’ 같은 원시적 인간본능을 딛고 일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뜻이다. 김산은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였다. 나 자신이 그렇다. 나는 평생을 참된 사실과 진실 그리고 진실하고 고귀한 원리의 추구에 바쳐왔다. 소녀시절에 나는 존 버니언(John Bunyan, 1265-1321)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다. 훗날 내가 성장하여 영국에 갔을 때 나는 버니언이 감옥에 갇혀 세계적 고전이 된 이 우화집을 저술한 장소인 베드퍼드셔(Bedfordshire)에 가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단테의 [신곡]은 가톨릭 ‘서사시’이고 ‘혁신의 혼’이라고 불렸던 버니언의 글보다 시대적으로 휠씬 앞선 것이었다. 감산은 단테적 심리를 졸업하고 톨스토이즘과 아나키즘으로 나아갔고 곧 사회주의의 현대철학인 마르크시즘에 이르게 된다. 마르크시즘은 엄격한 정통파에서 약간이라도 빗나간 사람들을 통틀어 칭하는 토로츠키즘이라는 장식적 형용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쩌동 사상과 같은 많은 화신(구체화)을 배출한 사상이다. 김산은 일본경찰의 기록에서 보이는 ‘혼합된 마르크시즘(Mixed Marxism)’ 혹은 1920-30년대의 동양이 겪은 상황 아래서 시대가 낳은 순교자였다. 1980년대에 그의 완전무결함이 명백히 증명되었고 스파이 혹은 토로츠키이주의자 따위의 누명을 말끔히 벗게 되었다. 혹자의 주장대로 그가 캉성에 의해 비밀처형을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일이야말로 끔찍한 잔악행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이러한 행위를 나는 반문명 행위라고 못박고 싶다. 33세의 김산은 일본의 억압 아래 있던 동시대 조선인들에게는 영명한 지도자요 사상가였으며, 뜨거운 영혼과 가슴을 소유한 순수한 인도주의자요 더없이 고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저서 [아리랑]이 1941년에 처음 출판되고 책을 내놓은 출판사가 큰 손해를 본 이래 오랜 세월이 침묵 속에서 다시 소생하는 것은 마치 유성들의 연결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랑]은 다행이도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아리랑]과 관련하여 맺으온 모든 한국인 친구들에게 따뜻한 우정과 감사를 보낸다. 특히 [아리랑]과 김산의 생애에 관련된 역사적 조명과 보충을 해주신 조지 토튼(George Totten) 교수와 개정판이 나오기까지 모든 수고와 협력을 아끼지 않은 김화영 여사(워신톤, 북미주한국인권연합)가, ‘Gratitude for Song of Arirang and Continuous Friendship in Enlightening The Spirit of Korea. Friends of Korea, 1990’ 이라고 새긴 아름다운 감사패를 가지고 나를 방문해준 롱아일랜드대학교 지창보 교수의 친절과 호의에 감사하는 바이다. 또한 이 자리를 빌어 [아리랑]을 애독하고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독자들과 많은 애로와 난관을 무릅쓰고 이 책을 번역 출판해준 도서출판 동녘에도 깊은 감사를 보낸다. 매디슨, 코네티컷 주 1991년 10월 26일 해렌 포스트 스노
1359 no image [아리랑] - 12
1652 2016-08-22
[아리랑] – 12 -님 웨일즈의 [한국어판 서문] – 동녘출판사 간행(1984년-2016)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독자들에게” 올해 84세를 맞는 나는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37년, 그 당시 32세밖에 되지 않은 한 인물, 장래가 촉망되는 보기 드문 한 조선의 혁명가의 생애를 기록했던 연안 시절로 되돌아간다. 1937년 9월 엔안을 떠난 후로 우리 사이의 연락이 끊겼지만, 풍문에 의하면 그는 나와 만난 그 이듬해가 아니면 그 후에 죽었다고 한다. 1980년대였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소식이 들려왔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스파이들이 스탈린에 의해 모조리 처형되던 시절, 유럽이 혼란과 위험과 공포 속에 몸부림치던 시대에 김산이 소련에서 들어온 캉성(당시의 중국공산당 첩보기관장)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구구한 구설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이 이야기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님을 나에게 누누이 강조했을 뿐 아니라 그는 ‘스파이’와는 거리가 먼 사랑이었다. 마오쩌둥과 조선 사이의 협력관계를 만들기 위한 순수하고 소박한 목적으로 엔안 여행을 했다고 그는 말했다. 엔안 공산당은 조선인들이 독자적 조직을 갖는 데 동의하지 않았고, 중국에 체류하는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합류하기를 주장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엔안에 체류하고 있을 당시 일본은 1937년 7월 7일경 베이징을 점령하고, 상하이 같은 외국인 거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급속히 침식해가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을 패망시킨후 미국은 일본을 지배하에 두면서 일본 내에 차츰 진보적 변화를 이끌어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 위치에 속하는 나라로 만든 것이다. 1941년 일본에서 [아리랑]이 번역 출판되었고, 아직도 도쿄의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계속 발행하고 있다. 나는 김산이 중국과 중국인들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의심스렵다. 1927년에서 1968년 죽기 전까지 중국을 떠나지 않았던 레위 엘리(Rewi Alley)는 언제나 “중국에서는 만사를 예측하고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천안문 사건이나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중국에서 일어날 때마다 매우 놀랍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엘리의 말을 되풀이 한다. 나는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난관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들의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지지한다. 김산은 자주 중국인들이 자기와 매우 다르다는 점에 놀라곤 했다. 1930년대에 그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나오자 베이징 공산당이 그를 축출해버렸다. 이때 그는 그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런 일을 각오했어야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공산당원이면 무조건 사형감이었으므로 공산당원들로서는 출옥한 인물이 누구고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일단 믿을 수 없었고 당연히 경계했다. 김산은 또한 한 조선인이 자신에 관한 거짓말과 험담을 하고 다니는 것에 분개하여 그를 죽일 생각까지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은 적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거짓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산에 대해 설명할 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현대인’의 정신과 ‘현대인’의 심리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그의 영어 구사력은 아주 보잘것없었다. 그는 시제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와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대는 아무런 지장이나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독해에는 능통했으며 회합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대개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광둥, 1927, 패망, 조선인 300명 죽다. 물속의 소금.” 이런 식의 대화 후에는 으레 여기에 관련된 상세한 일들과 이 단어들이 말하려는 핵심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하루나 이틀을 여러 가지 질문으로 보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최선의 협력을 아끼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김산을 ‘참된 도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는 거짓과 허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거짓말 같은 것은 아애 해 본 적이 없었다. 제3세계는 ‘미래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3-4세기 동안 서양이 주도해온 문명과 문화에 만족하며 살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리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1938년에 나와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아주 훌륭한 ‘다리’를 궁리해 냈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경제나 사회제도와도 공존할 수 있고 사기업체나 국가와 개인의 공동소유 기업체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이른바 ‘공업합작운동’이라는 것인데, 이 운동이 중국에서 시작된 후 인도를 비롯하여 다른 나라에 확산, 보급되었다. 이 운동의 본 의미는 ‘함께 일하다’ 혹은 ‘팀워크’를 뜻한다. 1939년, 필리핀 바기오 컨트리 클럽(Baguio Country in Philippines) 에서 [아리랑]을 집필할 당시 세계는 혼돈과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939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일본은 그들이 부르짖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구조에 중국 외에도 극동의 여러 나라들을 추가하고 있었다. 해야할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만사 제쳐놓고 [아리랑] 집필에 전념했다. 당시와 같은 급박한 역사적 시기에 조선에 관한 책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양 공산주의자의 사고와 정신과 심리를 꿔뚫어 보게 하는 종류의 책으로서 [아리랑]은 유일한 지위를 차지했다. 특히 김산은 추종자가 아니라 천부적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로서 유망하고 훌륭한 모범적 인물이었다. 그 예로 펄 벅(Pearl S. Buck) 여사와 그녀의 남편 리처드 월슈(Richard Walsh)를 들 수 있다. 그들은 1941년에 [아리랑]을 출간했다. 당시 조선에 관한 최신 서적으로서 [아리랑]이 유행했고, 나의 태평양 관련 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자문인사들이 나와 접촉하였고, 나의 글을 올렸다는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후에 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서한에서 그는 나의 글을 통해 조선에 관해 알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시간을 내서 나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그는 에드가 스노에게 이미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1358 no image [아리랑] - 11
1686 2016-08-20
[아리랑] - 11 일본에서는 1953년에 安藤次郞역이 朝日書房에서 나온 것이 최초이며, 65년 이후 미스즈서방刊의 동씨의 개역이 78년까지 14판이 나왔었는데, 모두 초판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사사로운 일이지만, 내가 아직 지금과 같이 왕성하지 않했던 조선근대사의 공부를 새롭게 뜻을 세운 뒤, 처음 맞았던 책이 역시 안등차랑역 조일서방판본이었다. 한국에서는 1984년에 동녘사에서 [아리랑]이라 제한 책이 간행된 것이 초역인데, [이것을 읽고 그기에 등장한 사람들의 살아 가는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안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어 [아리랑 2 ]가 간행되었던 것은 전술한바와 같다. 이에 앞서, 홍콩의 南奧出版社에서 1977년 중국어판이 간행되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 본서나 그 주인공 김산의 이야기가 활자화 되어 나왔던 것은 비교적 근년에 이른다. 1986년 요연민족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조선어문의 [조선족혁명열사전] 제2집에는 김산에 관해서 40페이지에 걸처 상세한 기술이 있고,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87년2월에는 같은 출판사에서 연변역사연구소역으로 본서 그 자체의 조선어역판이 간행되었는데, 전술한바와 같이 웨일즈로부터 고광영앞으로 보낸 편지가 귀중한 사료로 역제되어 있다. 이 역본은 표제는 [백의동포의 모습]이라 되 있고, 이는 말할 필요 없이 김산 자신이 쓰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추측되는 것이다. [격동의 30년대]도 이제는 실감적으로 멀어저 가고 있지만, 우리들은 지금부터라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 가며 필사적으로 살아 남으려고 노력했던 지금은 사라저 간 사람들의 진실한 모습을 되돌아 봐야 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고, 참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사람들의 모습은, 잊으버리기 쉬운 일이지만, 이 책이 가까스로 이를 우리들의 시야속으로 재생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잔혹성을 체현했던 김산의 생과 죽음이다. 본서의 이곳 저곳에 적고 있는 바 항상 자신의 판단에 충실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그의 [자유주의]가, 공식주의적 사상점검의 그물의 눈에 걸리기 쉬운 것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예상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 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울림이 결코 어둡고 칙칙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밑바닥없는 밝고 긍정적인 것이란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책속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며, 만주에서 항일 빨찌산사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면서 41년1월에 기진 맥진 끝에 투강한 이후, 대일협력의 역할을 강요 받음으로써, 아직도 그 이전의 공적을 평가 받지 못하고 있는 吳成崙과 같은 사례도 있다. 그러한 삶까지도 함께 아울려, 인간의 강함과 약함을 삼킨 30년대의 역사는 보다 더 깊이 파 헤쳐 가야 할 것이며, 무엇보담, 일본은 그기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에, 이 책의 테-마가 테-마인 만큼 타의 사료를 참고하면서 그 사실적인 점과 고유명사의 비정등에는 많은 노력이 가해 젔음을 알린다. 松平이오子씨의 숙달된 역문도 더하여, 岩波書店 편집부의 平田賢一씨의 지속적인 열의와 보주를 담당한 水野直樹씨의 정성어린 문현 고증이 이 판본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고 있음을 해설자로서는 월권이지만 특별히 말 해두고 싶다. 모두가 이 책에 매료 당했던 사람이 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비정되지 못한 고유명사등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없다. 내외 넓은 조언을 희망하는 바다. (1987년7월- 尾村秀樹)
1357 no image [아리랑] 10
1969 2016-08-20
[아리랑] – 10 그 이후, 1949년 헤렌과 에드가-는 離婚하고, 얼마 있지 않아, 에드가-는 맛카시즘에 쫓겨 스위스로 옮겨, 닉슨방중, 미중국교재개란 극적인 진행을 바라 보면서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서의 제2판의 서문이 쓰였던 시기도 이 즈음이 였으며, 그기에는 그 이후의 역사의 변천을 목격하면서 얻언 감회를 깊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말부터 73년에 걸처 헤렌은 간신히 중국을 다시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엇는데, 문화대혁명의 여운이 사라지고 있을 무릎이었다. 헤렌은 한때 12.9여자학생동지였던 李慜과 재회하고 매일밤 마다 호텔로 와 달라고 말했지만 [당시의 지식인의 엄했던 상황아래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라고, 뒤에 가서 이민은 술회하고 있다. 중국에서 김산의 명예가 회복되고 유족과 헤렌과의 문통이 가능해 진 것은 1980년대에 들어 가서이다. 역사를 반추하면서 홀로 만년을 보내고 있는 헤렌.포스트.스노부인 에게 어찌 깊은 감회가 없었던 것일까. 더욱이 그녀는 1961년에 님 웨일즈란 필명으로 Notes on Korean and the Life of Kim San이라 제한 私家版 타이프로 엮은 소책자를 엮고 있었는데, 연안체재당시의 노-트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본서의 내용을 보정하고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귀중한 사료이다. 일역은 없으나, 한국 서울의 학민사가 1986년에 [아리랑 2]라고 제하여 번역을 했다. 또 Helen Foster Snow, My China Years([나의 중국시대]), William Morrow and Company Inc., New York, 1984년 역시 본서의 일반적 배경의 의미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이 한권의 책이 초판발행이래 구미와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 내용에서 당연한 귀결일것이다. 朝鮮史固有의 문맥으로써의 역사이해의 울다리를 넘어 [혁명의 현장에서 혁명의 당사자가 혁명을 토로한] 박진감 넘치는 보편적의미는 특별히 해설을 부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아닐것이다. 미국에서는 1941년에 죠.데이사로부터 초판이 나오고, 72년에는 저자자신이 개정을 가한 재판이(본서의 底本) 람.밧쯔.프레스에서 나왔는데, 재판에 주를 가하고 있는 G.O.돗덴교수도 이 책의 매력에 이끌렸던 한 사람으로, 44년 초 처음으로 본서와 만나고 제2차대전중 동남아시아의 전선에 종군했을 때, 이 책을 들고 다녔을 정도이다.
1356 no image [아리랑] - 9
1701 2016-08-19
[아리랑] – 9 다음으로 이 책의 성립에 있어 記述者였던 님 웨일즈의 존재도 매우 중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원래 김산과의 인터뷰는, 웨일즈가 연안에 들어 갔던 당초의 예정에는 들어 있지 안 했던 일이었다. 자신을 그토록 명확하게 표현해 내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극한상황속에서 인간의 강인함과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지성을 바탕으로 이해되었던 사실로 그의 이야기에 이끌려 들어가 짧은 채제 기간중 20회 가까운 인터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면을 액면 그대로 아무런 편견도 가지지 않고 솔직하게 받아 드릴 수 있었던 그녀의 감수성이, 이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결정한 바탕이 되었었다. 님 웨일즈는 [웨일즈인의 피를 가젔다]는 그녀의 펜 네임로, 본명은 [헤렌 포스트 스노부인(1907 - )으로, 현재 미국 코넷티컷주 매디슨의 저댁에서 청춘의 추억을 되돌아 보며 혼자 만년을 보내고 있다. 유타주의 법율가의 딸로 아무런 부자유 스러움 없이 자란 건강한 미국 처녀였다. 처음에는 대문학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으나, 격동의 30년대의 현실은, 문학이상의 문학적이었다. 중국에서 인간적인 어떤 문제들이 일어 나고 있다는 육감으로, 이를 지켜 봐야 한다는 결의를 하게 되고 행동으로 옮긴 미국의 저널리스트는, 그녀 외도 몇 명 있었으나, 이 중국혁명과 인간의 문제와의 대면에서는, 전반적으로 어떤 역사적 필연성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1931년 8월, 단신 태평양을 건너 상해에 도착했던 헤렌은 [리빙스톤박사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말하자면 선배격인 에드가. 스노를 찾아 왔었다. 둘은 중국혁명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일에 협력하기 시작하였고 얼마 가지 안해서 32년말 두사람은 결혼한다. 33년 부처는 북경으로 옮겨 연경대학에서 에드가-는 신문학을 강의하고, 헤랜은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를 청강하였다. 35년 스노-부처는 이 두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내전정지. 일치항일]의 12.9 학생운동의 현장을 만나게 되어 스스로 이를 성실하게 협력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투쟁에서 쌓아 올린 신뢰관계가 부처로 하여금 엄혹한 혁명속으로 보다 깊이 들어 가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학생운동을 지탕하는 북방국의 지하조직의 소개로 36년에 에드가 협감연邊區로 들어 가고, 모택동등과 만나서 이후 얼마되지 않아서 유명한 [중국의 붉은 별]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또 37년에는 헤렌이 연안에 들어 갔던 것이다. 부처가 긴밀히 협력하면서도, 취재활동은 항상 단독으로 행해 젔다는 사실도 흥미 깊은 일이다. 물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단순한 남편의 종속이 아닌 독립된 인격을 실현하려고 했던 헤랜의 의지가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 본다. 귀중한 노-트를 뻬았기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 세우면서, 무사히 백색구의 북경으로 돌아 온 헤렌은 얼마 가지 않아 에드가와 더불어 일본군 점령하의 상해로 옮겨 그기서 38년에, 부처와 레우이.아레와 더불어 3인은, 戰禍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민중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공업합작사 운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일미간의 긴장이 깊으 저 감으로써 인본군점령하에서의 활동의 제약을 점점 크게 느껴, 39년, 부처는 지친 몸도 돌볼 겸 필립핀의 보양지 바기오에서 지난다. [아리랑의 노래]의 원고는 여기서 완성시켜 41년에 간행되었다. 일단 상해에 돌아 온 부처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40년말(헤랜), 41년초(에드가)에 각각 미국으로 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두사람의 만남의 ‘역사적 必然성’ 혹은 ‘歷史的 의미를 언급하고 있는 필자 오무라 슈-끼는, 여기서, 두 사람의 행각에서, ‘거대한 국제적인 사건의 현장에서 개를 초월한(자신의 안위를 되돌아 보지 않고)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투신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되는 대목이다. 이는 님 웨일즈의 개인적인 스토리이면서 동시에 중국혁명의 이면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 한 그녀가 증언하고 있는 글에서도 이를 인정하게 되는 진리이다. 김산 역시 자신을 가르켜, “나는 모든 일에 실패하였고, 오-직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만 이겼다” 라는 독백을 하고 있는 대목 역시 암시적이면서 아주 크게 울려 오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행동가는 그리 흔치 않다. 역사적 필연성에는 현실적인 성공이나 영광은 오히려 그 행동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점이 가려저 있다. 행동의 모-든 거취는 오-직 그 과정속에서 만이 당사자의 진정한 동기와 정신이 살아 숨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이야 말로 우리가 [아리랑]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 제 1 조이다. – [아리랑]을 소개하고 있는 필자 조규현의 변.
1355 no image [아리랑] - 8
1667 2016-08-19
[아리랑] – 8 -장지락의 죽음이 던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 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과제이다 1935년에는 당의 노선이 크게 바뀌 갔던 해였다. 大長征途上의 道義會議에서 모택동은 주도권의 확립(1월), 코민테른 7회대회(7-8월), 중공중앙의 8.1 항일구국선언등이 그 계기이다. 중공중앙북방국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노선이 확립된 것은 36년3월의 일이 었다고 한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여, 조선민족해방의 과제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과제를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대해서, 조선인혁명가 사이에서도 빈번히 연락을 취하게 된 것은 35년후반의 일이었다. 중국의 혁명전선은 이곳 저곳 분산되어 있었던 조선일혁명가들이 상해에 집결하여 혐의하고,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자나 민족주의자의 일부도 결집하여 조서민족해방동맹을 발족시킨다. 이 지음 (35년후반이나 36년초) 장지락도 활동의 장을 상해로 옮겨 이 흐름에 따라 동맹의 중앙위원이 되고, 36년7월에는 정돈이 되었었고, 더욱이 폭넓은 통일전선의 형성을 겨냥하는 행동강령의 작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다 했다. 그리고 36년8월, 장지락은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인공산주의자에 의한 협감연 소비에트지구 주재 조선혁명자대표에 선출되어 중공국방국 소개로 연안으로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37년에 들어서면서 백색구에 남아 있던 처 조하평으로부터 아기가(고영광) 태어 났다는 소식이 전해젔다. 웨일즈와 만났던 시기의 장지락은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 수학. 일본어. 조선어등의 과목을 맡고 있었으며, 도선관에서 가장 많은 영어원서들을 빌리는 독서가이기도 했으나, 오랫동안의 무리한 생활로 인해 무거운 페결핵에 걸려 있었다. 장지락의 죽음이 결헥때문이었는지 만주에서 전사 했었는지 추측되기도 한다.(웨일즈 자신도 최근까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던 바와는 다른 비참한 죽음이었다). 최근의 중국의 문현에 의하면, 웨일즈가 연안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던 1938년의 일로, 狹甘연變區保安處는, 장지락을 [도롯끼 분자] . [일본간첩]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사형에 처해 버렸다고 되 있다. 심사과정에서는 결론을 내리는데 충분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보안처의 책임자였던 康生이 비밀리에 처단을 지시했다고 되 있다. 이를 알게된 웨일즈는 유자 고영광(현재국가경제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함) 앞으로 1981년9월14일부 편지(후게 [백의동포의 그늘]에 게재)속에서 강생이 36-7년의 쏘련에서의 [도록키파] 숙정에 언급하면서 37년에 귀국한 자 라는점을 강조하면서, 장지락을 희생한 연안에서의 숙청도, 쏘련에서의 [도롯키파] 숙청과 관련지어 봐야 되지 않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1941년의 [아리랑의 노래]의 원서가처음으로 공간되었을 때 실은 장지락은 이미 이 세상을 하직한지 오래되었던 것이다. 1983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중앙조직부는 [김산에 대한 사형은, 특정적인 역사적 조건하에서 발생한 잘못되어 발생한 안건]이며, 그에게 씨웠던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하여, 당적을 회복시킴]이라고 공포하였다고 함.
1354 no image [아리랑] - 7
1432 2016-08-18
[아리랑] – 7 1924년 이후 제1차 국공합작하에 중국국민혁명이 개시되고, 많은 혁명적인 조선청년들이 여기에 참가하게 되는데, 장지락도 1925년 초겨울에 그 근거지였던 광주에 도착하여, 황포군관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중산대학에서 경제학, 사회발전사등을 연구하였다. 중국측 문현에 의하면, 장지락은 이 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단히 빠른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북벌전쟁에는 종군하지 않고 광주의 근거지에 머물려 있었는데, 27년 북벌도상의 상해에서 장개석이 일으킨 반공 구테타에 반대한 광주봉기(광주 코뮨-), 해륙풍 쏘비에트에의 철수와 그 붕괴후의 백색 태로하의 탈출 모습은 본문에서도 생생하다. 1928년 9월, 홍콩을 거처 상해에 가까스로 생환한 장지락은 얼마 있지 않아 당의 지시에 의해 중국공산당북경시위원회조직부장의 의무에 맡겨지며, 29년 봄 북경에 도착한다. 바야흐르 코민테른6회대회에서 [일국일당원칙]이 확인되었으며, 현재국민당가입방침이 강하게 실시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장지락은 북경도착후 얼마되지 않는 29년8월에 동북의 길림성에서 열렸던 회의에 참가하였던 바 이 역시 朝鮮共産黨滿洲省委의 解消, 중국당에의 가입방침에 관한 회의로써, 그는 여기서 중국당의 입장을 대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고 봐 진다. 반동의 본거지인 북경영사관에 인도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공산주의자임을 끝까지 부인하여, 31년4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 동년6월에 북경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당은 오히려 생각보담 빨리 돌아 온 것을 의문시하여 당적회복조치를 취하지 안했다. 이러한 경과와 겹치는 [한]과의 확집에 관해서 본문의 기술은 읽는 이로하여금 강한 인상을 남긴다. [韓]이란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ML파 중심의 조선공산당 제3차집행부가 깊이 간여하였다는 사실로 안광천이나 韓偉健임을 추측되었으나 그 후의 경력등을 조회하여 한위건이 아니였나 사료된다. 여하간 李立三派라는 렛델을 받는 등 불우의 장지락은 32년초 친구의 배려에 의해 화북성 保定의 제2 사범학교 교원으로서 취임하였는데, 관현에 쫓겨 고양의 초등학교로 옮겼다. 가는 곳 마다 학생이나 청년을 조직하는 대중활동에 성과를 냈지만 고양에 있을 때 당시의 왕명지도부의 무장봉기지시에 반대하여, 북경시당에 통일전선론적 관점에 입각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시기에는 전반적으로 탄압하에 조직의 지도계통이 혼란을 기하고, 상세한 점은 알 수 없으나, 1933년4얼 북경에서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 장지락은 다시 중국경찰에 체포되 전향을 거부하였음으로 일본영사관에 인도 되 버린다. 이때도 조선에 송환되었으나 이내 석방되 34년 1월에는 북경으로 돌아 왔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때 함께 체포된 젊은 중국인 여성동지 趙何平과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어 북경 서직문 부근에 집을 빌려 짧은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하게 된다. 지인의 연고로 34년 겨울(중국측의 문현 [조선족혁명열사전] 제3집, 1페이지에 의하면 35년 9월로 되 있으며 이하 36년경 까지 년대가 모두 본문과 어긋나 있는데) 처와 함께 석가장으로 옮겨 철도노동자등을 통해 이 지역의 당조직의 재건에 성공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35년5월에 당화북위원회와 직결시켰다고 되 있는데, 우의 [조선족혁명열사전]에는 36년1월 중국공산당 석가장 공작위원회 성립, 얼마 있다가, 중공석가장시위로 됬다고 적혀 있다. 여하간 조직은 공인되었으나 여기에 진력한 장지락 자신의 당적은 여전히 애매하였다고. [만주]를 확보한 일본군은 화북으로 침략의 손길을 뻐쳐 [익동자치위원회]라고 하는 괴뢰정권을 발족시키는(1935년11월) 등, 특히 북경주변의 상황은 긴박해 있을 때였으며, 12.9학생운동도 이것에 저항하는 의미를 띠우고 있었다
1353 no image [아리랑] - 6
1622 2016-08-18
[아리랑] – 6 *앞선 글에서 ‘[아리랑]의 일본판 [아리랑의 노래] 암파문고의 님.웨일즈가 쓴 [서문]을 전역 게재했었는데, 그 때 이 책의 “해설”의 글을 쓴 알본인, 尾村秀樹의 해설 일부를 인용한 바, 아래는 그것의 전문을 번역하여 게재한다. 解說 *한구절 앞서 인용분 생략 김산의 길지 않는 생애(1903-38)와 조.일.중 삼국에 걸친 그의 足跡은, 조선의 항일민족해방투쟁(1910-45)이 불가피하게 입지 않으면 안되었던 국제적인 넓힘을, 어느 의미에서 전형적으로 체현하고 있으며, 결코 특수한 례외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신민지 통치는, 조선 안에서는 [독립] [민족해방]을 분명히 내 세웠던 활동에는 존립의 여지를 주지 안 했다. 그것이 조선민족해방투쟁을 불가피하게 국제성을 띠게 해준 첫째 원인이다. 실제로, 日露戰爭. 日本의 侵略 한 가운데서 생을 부여 받은 조선인 김산은 3.1 운동으로 눈을 뜨게 되고, 동세대의 많은 청년들과 같은 사상적 軌跡을 밟으며, 勤學과 鬪爭의 場을 중국에서 구하고, 머지 않아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해 갔었다. 그럼으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이념 아래, 코민테른 6회대회(1928년)에서 확인한 바 [일국일당의 원칙] 그리고 [現住國 黨 加入]의 방침에 따라 중국혁명에 깊이 몸을 던지게 되어, 얼마 가지 않아서, 동 7회대회(1935년)의 반팟쇼인민전선방침에로의 전환에 따라 중국의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 속으로 몸을 던지면서도 조선민족해방의 전선의 구축에도 진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그래서 반 파시즘 진영에 선 진실로 민주주의적으로 살아 가려고 했던 진보적인 미국인과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1925-28)이 존재하지 못하게 된 이후, 在中.在日을 불문하고 많은 조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로 몸을 던지는 일이야 말로 자민족의 해방의 첩경임을 지각하고, 실제로 현재국당에 가입하여 그 나라의 혁명을 위해 투쟁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김산의 투쟁장소가 되었던 중국의 혁명운동사의 측면에서도 아주 귀중한 증언인 동시에 조선민족해방투쟁의 精神史적 軌跡의 둘도 없는 증언이 되며 더욱이 누구나가 모두 쉽게 느끼게 되듯이 [혁명의 현장에서 혁명의 당사자가 고백한 매우 귀중한 혁명의 기록]으로써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安藤次郞씨에 의한 일본에서의 初譯부터 이 책에 매료되어 조선인의 이미지에 대해서 눈에서 인이 떨어저 나가는 느낌을 경험한 우리들은 역사가로써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를 이것 저것 추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산이 본명이 아니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정도 내용이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인물이 흔치 안는 것을 전제로, 뒤에 가서 연안에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저명한 인물, 최창익이나 김두봉의 이름이 오르 내리기도 한다. 그 활동경력이 너무나도 화려함으로 복수의 인물의 합성설도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 추측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여태 어떤 상세한 통사서술에도 소개되지 못한 장지락이란 인물이 실재하였던 것이 浮上해 나온다. 김산이 장지락임이 확정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님.웨일즈 자신의 보조적 증언과 사진제공, 그리고 遺子 고영광씨를 위시하여 근친자의 증언들을 포함한 중국문헌의 출현이었다. 사실관계 역시 줄거리는 대부분 정확하고, 님.웨일즈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장지락이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충실히 기록한 것으로 문헌사료와의 대비에 의해서도 기본적으로 확인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가명을 쓴 사람들의 이름.지명등이 있고,傳文과 실체험의 혼동이나 년대의 오기가 얼마간 있어나 이것들을 수정한다면, 이 책은 그대로 한 사람의 혁명가의 생활과 투쟁의 진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타의 제 문헌을 종합하여 여기서는 확실히 모르는 부분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장지락의 약력을 찾아 가 본다. 張志樂은 본문에 보여주웠던 바와 같이, 1905년3월10일, 조선서북부의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연안시대에는 張明이라 불렸던 바와 같이 이 이외도 장재천, 손명구, 한산, 영광등의 별명. 필명등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산]은 탄압을 고려하여 본서를 위해 만든 변명으로, 웨일즈가 지언 준 것으로, 장지락 본인도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의 출생지는 본문에 의하면 평양부근이라고 하며, 그 기술에 따르면, 補注에 지적한 바 되로 순천군자산리 혹은 평원군장산리에 비정할 수 있어나, 관현측에 특정되지 않도록 지명을 일부러 흐렸다고 본다. 일노 전란의 피난중에 태어 났다고 하는 것, 러씨아군. 일본군 쌍방에 관한 기술이 생생한 것을 보면, 중국측 문현이 적고 있는 바와 같이, 평안북도용천군北中而下長洞이 바른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日露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龍巖浦에서 15k정도의 바다 가까운 농촌이다. 3.1.운동시에는 본문에 의하면 장지락은 평양의 기독교계중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그 종식후 얼마되지 않아 1919년 여름경에 동경에 유학하여, 20년 초두까지 채재한 후 滿洲로 가서 삼원보를 거처 할빈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20년말 부터 일어 났던 훈춘사건, 간도출병 직전 이땅을 떠나 상해로 옮겨 북경협화의학원의 학생이 되었다(25년까지 재학). 상해에서는 안창호, 이동휘등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변에 있었던 많은 청년들과 같이 실력항쟁지향의 [과격파]에 마음을 두게 된다. 본문(365페이지)에 의하면, 1919년부터 20년에 걸처서는 애매한 아나키즘지지자, 21년부터 23년에 걸처서는 아나키스트였다고 하는데, 얼마가지 않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어가는 경과에 관해서는, 김충창(김성숙)의 영향이 킀다고 사료된다.
1352 no image [아리랑] - 5
1634 2016-08-18
[아리랑] – 5 *앞선 글에서 ‘[아리랑]의 일본판 [아리랑의 노래] 암파문고의 님.웨일즈가 쓴 [서문]을 전역 게재했었는데, 그 때 이 책의 “해설”의 글을 쓴 알본인, 尾村秀樹의 해설 일부를 인용한 바, 아래는 그것의 전문을 번역하여 게재한다. 解說 김산의 길지 않는 생애(1903-38)와 조.일.중 삼국에 걸친 그의 足跡은, 조선의 항일민족해방투쟁(1910-45)이 불가피하게 입지 않으면 안되었던 국제적인 넓힘을, 어느 의미에서 전형적으로 체현하고 있으며, 결코 특수한 례외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신민지 통치는, 조선 안에서는 [독립] [민족해방]을 분명히 내 세웠던 활동에는 존립의 여지를 주지 안 했다. 그것이 조선민족해방투쟁을 불가피하게 국제성을 띠게 해준 첫째 원인이다. 실제로, 日露戰爭. 日本의 侵略 한 가운데서 생을 부여 받은 조선인 김산은 3.1 운동으로 눈을 뜨게 되고, 동세대의 많은 청년들과 같은 사상적 軌跡을 밟으며, 勤學과 鬪爭의 場을 중국에서 구하고, 머지 않아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해 갔었다. 그럼으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이념 아래, 코민테른 6회대회(1928년)에서 확인한 바 [일국일당의 원칙] 그리고 [現住國 黨 加入]의 방침에 따라 중국혁명에 깊이 몸을 던지게 되어, 얼마 가지 않아서, 동 7회대회(1935년)의 반팟쇼인민전선방침에로의 전환에 따라 중국의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 속으로 몸을 던지면서도 조선민족해방의 전선의 구축에도 진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그래서 반 파시즘 진영에 선 진실로 민주주의적으로 살아 가려고 했던 진보적인 미국인과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1925-28)이 존재하지 못하게 된 이후, 在中.在日을 불문하고 많은 조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로 몸을 던지는 일이야 말로 자민족의 해방의 첩경임을 지각하고, 실제로 현재국당에 가입하여 그 나라의 혁명을 위해 투쟁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김산의 투쟁장소가 되었던 중국의 혁명운동사의 측면에서도 아주 귀중한 증언인 동시에 조선민족해방투쟁의 精神史적 軌跡의 둘도 없는 증언이 되며 더욱이 누구나가 모두 쉽게 느끼게 되듯이 [혁명의 현장에서 혁명의 당사자가 고백한 매우 귀중한 혁명의 기록]으로써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安藤次郞씨에 의한 일본에서의 初譯부터 이 책에 매료되어 조선인의 이미지에 대해서 눈에서 인이 떨어저 나가는 느낌을 경험한 우리들은 역사가로써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를 이것 저것 추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산이 본명이 아니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정도 내용이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인물이 그리 많치 안타는 것을 전제로, 뒤에 가서 연안에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저명한 인물, 최창익이나 김두봉의 이름이 오르 내리기도 한다. 그 활동경력이 너무나도 화려함으로 복수의 인물의 합성설도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 추측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여태 어떤 상세한 통사서술에도 소개되지 못한 장지락이란 인물이 실재하였던 것이 浮上해 나온다. 김산이 장지락임이 확정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님.웨일즈 자신의 보조적 증언과 사진제공, 그리고 遺子 고영광씨를 위시하여 근친자의 증언들을 포함한 중국문헌의 출현이었다. 사실관계 역시 줄거리는 대부분 정확하고, 님.웨일즈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장지락이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충실히 기록한 것으로 문헌사료와의 대비에 의해서도 기본적으로 확인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가명을 쓴 사람들의 이름.지명등이 있고,傳文과 실체험의 혼동이나 년대의 오기가 얼마간 있어나 이것들을 수정한다면, 이 책은 그대로 한 사람의 혁명가의 생활과 투쟁의 진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351 no image [아리랑] - 4
1813 2016-08-17
나는 모택동에게 아주 긴 설문리스트를 제출하였고 그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답해 주었다. 자주 대담을 하였고, 중국혁명의 본질과 역사에 관해서 작은 책을 쓸 정도를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 책을 위한 첫쩨번 인터뷰가 7월7일 잡혀 있었는데, 아깝게도 이날, 대일전의 戰端이 되었던 蘆構橋사건이 일어나, 그는 담화를 계속해서 할 수 없게 되어 나를 洛甫와 吳亨平에게 맡겨버렸다. 나는 [미국인 통신원의 처]로써 동료로써 맞아 드려 주었다. 그 중에서도 朱德將軍과 그의 부인 강극청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 주려고 했던지, [당신은 용기가 있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연안에서는 그런 칭찬말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내가 왜 그토록 환영받고 많은 전기를 쓸 수 있었는가, 모택동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는 에드가.스노에게, 9년간의 정보의 벽을 넘언 것을 친찬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서로 허물없이 지났었다. 모가 앞서 전기를 만들었었다. 그가 먼저 에드가.스노에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를 따랐던것이다. 그가 이야기를 풀어 가지 않했다면, 다른 이들도 그 자전을 풀어 내지는 안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은 에티겟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택동이 에드가.스노에 호의적이였기 때문에, 나도 이내 받아 드려젔던 것이다. 9월에 에드가.스노와 짐.파드라가 나를 찾아 서안에 왔다 - 연안에서 귀도에 있었던 내가 연안을 떠난, 4시간후의 일이었다. 7월7일에 일본의 공격이 시작했고,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불길한 느낌의 군사거점 동관에서, 현병들이 설명도 없이 나를 열차에서 끌어 내렸다.(아주 무서운 순간이었다. 정보를 제공하라고 공갈을 치던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까, 걱정으로). 서안에 전화를 넣어 스노.바트람의 수색단이 와 있음을 알고, 나는 되돌아 갔다. 내가 특별뻐스편으로 타고 왔던 열차는 폭격을 당하여, 기관차와 객차 몇량이 파괴되었다. 짐은 그의 저작[정복되지 않는 사람들]Unconquered(New York: The John Day Company,1939)의 재료를 뫃으기 위해 공산당구로 향했다. 에드는 나와 청도로 가서 해변에서 이삼일 지난후, 에드는 상해쪽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떠났고, 나는 북경에 집을 정리하기 위해 갔다. 6개월동안 가 있었기 때문에, 북경에 돌아 왔을때는 이내 적리(이질병)의 특별처지를 받기 위해 독일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 나는, 아메바적리(이질)등 다석가지 의 균을 지니고 있었으며 체중은 20폰드 이상 줄어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샘킨 가나리아같이 웃는 - 1936년에 서북의 여행에서 돌아 왔을 때, 에드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안의 4개월간 나는 현재 재간되고 있는 세가지 책의 재료를 뫃았다 – [붉은 중국의 내부] Inside Red China(NewYork: Doubleday.Doran, 1939) ([젹색지나의 내막] 흥아원정무부역, 1941년. [인민중국의 여명]잔야웅삼역, 신흥출판사, 1965년, 1971년 . [중국혁명의 내부-속.서행만지] 고전유랑역, 31서방, 1976년.) [아리랑의 노래] Song of Ariran(New York: The Johm Day Company,1941) [(아리랑의 노래) 안등차랑역, 조일신문, 1953년 [아리랑의 노래] 안등차랑역,미스미즈서방,1965년. [붉은 진 – Red Dust(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1952)[붉은 먼지 – 신중국의 혁명가들] 상(하=미간)육전삼랑역, 신평론사, 193년.] 마지막것의 증보판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 Chinese Communists: Sketches and Autobiographies of the Old Guard(Westport,Conn:Greenwood Press)라 제하여 1972년에 간행되었다. 그 이외 등사판인쇠로 한 저작 [나의 연안 노-트] My Yenan Notebooks 및 [중국의 노동운동]TheChinese Labor Movement와 [근대중국의 여인들]Woman in Modern China의 일부가 되는 자료도 뫃았다. (나의 연안에서의 체험이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에 관해서는 아직 미공간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 ) 박물관에 들어갈 정도로 장수할것으로는 생각하지 않했지만, 1958년부터 60년에 걸처 스탠포드대학의 후-버연구소를 위해 님.웨일즈=코렉선을 정리하게 되었다. 더욱이 1972년에는 뉴-욕의 메토리포리턴미술관의 의복연구소에 나의 [연안산달] 와 북경에서 제단한 서안에서 입었던 광목면의 학생식 장삼이 전시되고, 복사본을 위해 견본으로 연구보존되기도 했다. 끈으로 짠 산달은 협서성 북부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연안에 있었던 때 토지의 홍군병이 나에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장삼의 상착 아래 입고 [공기조절]을 해 주는 대나무로 만든 노동자용 페스트도 2착,메토리포리턴에 기증했다. 대장정때, 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 되지 안 했지만, 중요한 보물중 두개 –독일제 납작한 검은 거울과 남쪽에서 국민당의 최고무관과 더불어 포홱했던 短劍을 나는 가지고 있다. 단검은 코민테른파견고문의 독일인 이덕(옷도 브라운)으로부터 영예의 표시로 주워젔던 것으로, 헤여지는 기념으로 그가 거울과 함께 나에게 주었었다 –여름 동안 그렇게 호의적이 안았던 것의 메쿰으로 – (1960년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그는 동독일로부터 모택동을 공격하고 있다). 또한 흰선이 한줄기 들어 있는 라마교의 주옥으로 만들어진 指輪(손가락지)을 갖고 있다. 연안에서 알게 된 라병휘(루오삔호애)장군이 그의 보물중에서, 부적이야, 몸에 지니고 있으면 말에서 떨어지지 않해요, 하면서 주었던 것으로, 그는 그것을 장정 도중 라마승으로부터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모에게 하였을 때 그는 웃으면서 “받았다면 좋치만…” 라고 말하면서, ‘빼앗은 것인지도 모르지’…라는 뜻이었다. 또 하나 연안의 추억물로써는, 외국인을 위해 맞춘것으로는 최초의 것으로, 진짜백이 [모제즈봉]이 있다. 내가 연안에 있었던 5월에 모택동이 새로운 제복을 만들게 하였음으로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청회색의 옷감으로 한벌 만들어 받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나염의 낡은 [공합] 노동자의 상의도 가지고 있다.(모두 손으로 지언 것으로, 니는 이를 비치 코-트로 몇 년동안 입고 다녔다. 1972년2월15일 – 에드가-.스노가 스위스의 에쟌의 자댁에서 죽은 날 – 메토로 포리탄미술관에서는 1870년부터 오늘날까지 중국사진전이 개최되고, 300매나 되는 나의 연안기념사진중에서 몇장인가 가 전시되고 있었다.(전람회는 성황리에 6개월 이상 이어젔다) 이들 사진이나, [나의 연안 노-트]는,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 나의 문제는 귀도에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몰수 되지 않토록 하는 것이었다. 연안에 있을 동안 나는 남자의 하의를 입고 구명복과 같이 만들어 필름이나 노-트를 숨기는 장소를 만들어, 엿차하면 언제든지 허리둘례에 감고, 위로부터 코-트를 시웠다. 서안에 들어가 서안에서 나올 때나 청도를 출입할 때, 일본점령하에 놓여 있는 천진과 북경에서는 두번이나 출입할 때 나는 이를 감추었다. 기어코 나는 연안항로기선으로 상해를 갔고, 부두에서 에드가.스노와 J.B.바우엘의 연접을 받았다. 시가지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고, 전승의 행진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페스트가 연안의 풍토병이라는 사실은 맞는 말이었다. 방에는 쥐와 벼룩이 창궐하고 있었다. 발진 지프스는 적었지만 장지프스는 흔했었다. 나의 호위병은 여름동안 개방성 페결핵을 앓고 있었다(나는 이때는 모르고 있었지만). 나의 연안노트의 일행 일행은 나의 생명의 피로 쓰여젔으며, 네가 필름에는 땀과 눈물이 베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역사와 함께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었으며 – 곡물을 곁겨를 벳겨 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1972년2월15일의 에드가.스노-의 죽음은 중국에서 미국의 경험의 한시기를 획하는 것이다. 중국공산주의자에 대한 , 그와 합중국민중과의 사이를 이어주는 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다 했었다. 생애를 통해 그는 태평양세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무엇을 두드라도 미국인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었다. 우리들의 [공합]적 결혼은 1932년부터 49년까지 이어젔다(이혼했을 때는 하나의 변화의 시기였다). 우리들이 협동하면서 이루어젔던 크다란 사건은, 12월9일의 학생운동에 불을 짔었던 일이며 레이.아레이와 더불어 공합(중국공업합작사)을 일으켰던 일이다(후자는 그 후 중국전토로 퍼져갔으며 1958년에는 인민공사에 흡수되었다). 1936년에서 37년에 걸처, 우리들은 별도로 중국의 쏘비엣공화국과 중국공산주의자들을 조사하였는데, 이는 공동계획으로써, 어느것도 한사람이 했던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없었다. 나에게는 모택동과 연안은 지금은 그리운 추억 꺼리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깨닭지 않으면 도저히 그러한 위험한 여로를 감행할 생각은 나지 안 했을 것이다. 뒤돌아 보면, 그때 느꼈던 것 보담 휠씬 중대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는 중국의 바레.호-쥬*이며 나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 현장에서 혁명의 기수들로부터 그 입으로 혁명을 증언해 받았던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의 경험중에서도 1937년의 어느 비가 계속 내리는 나날들 연안에서 김산과 대담했을 때 만컴 많은 지식과 이해를 얻을수 있었던 일은 타에 없었다. 이와 같은 고난을 경험하고 더욱 [백색테러]를 살아 남은 인물은, 1937년에는 대부분 살아 남아 있지 안 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이다. 헤렌.호스타-.스노 코넷티컷 마디슨 1972년2월 *바레.호-쥬: 미국 펜실버니아주 동남부의 마을. 미국독립전쟁중 1777년 겨울, 와신톤과 그의 군대가 집결하여 영국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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