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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482
조규현
조회 수 : 1733
2016.08.19 (09:35:38)
[아리랑] – 8
-장지락의 죽음이 던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 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과제이다
1935년에는 당의 노선이 크게 바뀌 갔던 해였다. 大長征途上의 道義會議에서 모택동은 주도권의 확립(1월), 코민테른 7회대회(7-8월), 중공중앙의 8.1 항일구국선언등이 그 계기이다. 중공중앙북방국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노선이 확립된 것은 36년3월의 일이 었다고 한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여, 조선민족해방의 과제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과제를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대해서, 조선인혁명가 사이에서도 빈번히 연락을 취하게 된 것은 35년후반의 일이었다. 중국의 혁명전선은 이곳 저곳 분산되어 있었던 조선일혁명가들이 상해에 집결하여 혐의하고,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자나 민족주의자의 일부도 결집하여 조서민족해방동맹을 발족시킨다. 이 지음 (35년후반이나 36년초) 장지락도 활동의 장을 상해로 옮겨 이 흐름에 따라 동맹의 중앙위원이 되고, 36년7월에는 정돈이 되었었고, 더욱이 폭넓은 통일전선의 형성을 겨냥하는 행동강령의 작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다 했다. 그리고 36년8월, 장지락은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인공산주의자에 의한 협감연 소비에트지구 주재 조선혁명자대표에 선출되어 중공국방국 소개로 연안으로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37년에 들어서면서 백색구에 남아 있던 처 조하평으로부터 아기가(고영광) 태어 났다는 소식이 전해젔다. 웨일즈와 만났던 시기의 장지락은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 수학. 일본어. 조선어등의 과목을 맡고 있었으며, 도선관에서 가장 많은 영어원서들을 빌리는 독서가이기도 했으나, 오랫동안의 무리한 생활로 인해 무거운 페결핵에 걸려 있었다.
장지락의 죽음이 결헥때문이었는지
만주에서 전사 했었는지 추측되기도 한다.(웨일즈 자신도 최근까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던 바와는 다른 비참한
죽음이었다). 최근의 중국의 문현에 의하면, 웨일즈가 연안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던 1938년의 일로, 狹甘연變區保安處는, 장지락을 [도롯끼 분자] . [일본간첩]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사형에 처해 버렸다고 되 있다. 심사과정에서는 결론을 내리는데 충분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보안처의 책임자였던 康生이 비밀리에 처단을 지시했다고 되 있다. 이를 알게된 웨일즈는 유자 고영광(현재국가경제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함)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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