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수 163
조회 수 : 5499
2007.06.05 (17:48:36)
현대미술가, ‘매미’의 세계에 사는 ‘대붕’ 1. 북쪽 깊고 어두운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 천 리 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은 너무나 커서 등짝을 가로 질러 몇 천 리나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솟아올라 날아갈 때는 그 날개가 하늘을 덮는 구름과 같다.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우화로서 일상적 세계의 관념의 틀과 이를 넘어선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의도이다. 어둠 속에 있는 물고기 ‘곤’은 미망에 갇힌 상태를 나타낸다. 이 곤에게는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으며, 그 능력이 실현된 것이 대자유의 새인 ‘붕’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자의 사유는 변신의 사유이다. 즉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일정한 동일성을 지닌 존재들의 세계가 아니라 범주의 벽을 허물고 다른 존재로 화하려는 사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붕이 날아간 하늘은 소유유의 경지를 나타낸 말로 그 절대 자유의 경지가 대붕이 날아간 하늘이다. ‘소요유’란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이다. ‘유(遊)’란 자기가 꿈꾸는 곳이면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 갈 수 있는 마음의 큰 자유를 가리킨다. ‘소요’는 ‘보행’과 달리 목적지가 없다. 소요 그자체가 목적이다. 춤처럼 동작 그자체가 목적이지만 춤과 다른 점은 소요하는 동안 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자들, 다시 말해 수동적인 삶을 사는 인간들은 이러한 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변신을 꿈꾸고 실천하는 인간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이「소요유」에서도 매미와 메까치가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기껏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위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고, 그나마 못 올라 다시 땅에 떨어지는데 도대체 어째서 9만 리나 날아올라 남녘으로 가겠는가? 메미와 메까치의 생각은 다름아닌 보통사람들의 생각인 셈이다. 2. 우리 미술계에도 매미와 메까치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틀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인간들이다. 사물들을 가르는 기호와 인식의 틀, 제도와 권력이 부여하는 자리들, 이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매미와 메까치들이다. 즉 제도와 권력의 중심에서 살면서 매미나 메까치의 세계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며, 이는 상당히 알려진 학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님을 느낄 때가 많다. 얼마 전 한국의 원로 미술사학자로 꼽히며 오랫동안 서울대에서 재직해 온 O 교수(*하바드 대학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원로 미술사학자로서 지금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모 대학의 석좌교수이다) 가 석남 이경성 미수 기념 논총집에서 발표한 ‘어떤 현대미술이 한국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을까’란 논문에서 “어찌하여 서구미술의 아류는 넘치는데 현대판 한국적 풍속화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가. 작가들이 시대성을 너무 경시하기 때문 아닐까”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O 교수는 한국미술사에 남을 현대작가를 창의성, 한국성, 대표성, 시대성, 기타 사항 등 다섯 가지 기준과 원칙을 들고 그 잣대에 들어맞는 작가로 유화 부문은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유영국을, 수묵산수화에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채색 인물화에 김은호, 박생광을 꼽았다고 한다. 이른바 역사적 맥락과 관점을 강조한 잣대와 기준으로 이렇게 선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O 교수의 언급 중 서구 미술의 아류가 넘친다는 관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미술사에 남을 현대작가를 선정하는 ‘기준’과 ‘원칙’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당연히 작가 선정도 잘못되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O 교수의 기준과 원칙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현대예술의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장르 틀로 이들 작가들을 평가하는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틀로 규정하는 것 때문에도 위의 작가들을 현대 미술 작가로 꼽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대미술은 ‘현대성’에 대한 화두를 전제로 한다. 즉 현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상과 특성으로 현대미술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O 교수가 언급한 위의 작가 중 어느 누구도 ‘현대성’이란 터널을 통과한 작가는 없으며, 그러므로 이들은 다만 전통과 현대 사이에 살았던 과도기적 작가일 뿐이다. 현대 이전의 미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 회의를 통해 그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 현대미술임에도,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가 아직도 이처럼 구태의연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로 이러한 논의 수준이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 미술의 수준과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물론 그간 척박한 한국전통미술사 분야에서 남긴 O 교수의 선구적 업적을 과소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인품도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다) 3.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참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현대 미술가들은 바로 대붕의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비록 협소하지만 창공은 무한하며, 그래서 커다란 대붕들이 날 수 있다. 다만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오르는 것이 고작인 매미들에게는 대붕의 존재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대붕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인간세의 통념적 틀을 넘어선 인간을 뜻한다. 대붕도 엄연히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대붕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줄 모르는 자만이 대붕들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한평생을 살아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위에 오르는 매미나 메까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6년 2월 20일 오후 8시 43분에
http://www.sonahmoo.com/11964
(*.78.125.226)
|
|||||||||||||||||||||||||||||||||||||||||||||||||||||||||||||||||||||||||||||||||||||||||||||||||||||||||||||||||||||||||||||||||||||||||||||||||||||||||||||||||||||||||||||||||||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