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5499
2007.06.05 (17:4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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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가, ‘매미’의 세계에 사는 ‘대붕’


1.

북쪽 깊고 어두운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 천 리 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은 너무나 커서 등짝을 가로 질러 몇 천 리나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솟아올라 날아갈 때는 그 날개가 하늘을 덮는 구름과 같다.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우화로서 일상적 세계의 관념의 틀과 이를 넘어선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의도이다.
어둠 속에 있는 물고기 ‘곤’은 미망에 갇힌 상태를 나타낸다. 이 곤에게는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으며, 그 능력이 실현된 것이 대자유의 새인 ‘붕’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자의 사유는 변신의 사유이다. 즉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일정한 동일성을 지닌 존재들의 세계가 아니라 범주의 벽을 허물고 다른 존재로 화하려는 사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붕이 날아간 하늘은 소유유의 경지를 나타낸 말로 그 절대 자유의 경지가 대붕이 날아간 하늘이다.  
‘소요유’란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이다. ‘유(遊)’란 자기가 꿈꾸는 곳이면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 갈 수 있는 마음의 큰 자유를 가리킨다. ‘소요’는 ‘보행’과 달리 목적지가 없다. 소요 그자체가 목적이다. 춤처럼 동작 그자체가 목적이지만 춤과 다른 점은 소요하는 동안 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자들, 다시 말해 수동적인 삶을 사는 인간들은 이러한 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변신을 꿈꾸고 실천하는 인간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이「소요유」에서도 매미와 메까치가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기껏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위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고, 그나마 못 올라 다시 땅에 떨어지는데 도대체 어째서 9만 리나 날아올라 남녘으로 가겠는가? 메미와 메까치의 생각은 다름아닌 보통사람들의 생각인 셈이다.    


2.
우리 미술계에도 매미와 메까치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틀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인간들이다. 사물들을 가르는 기호와 인식의 틀, 제도와 권력이 부여하는 자리들, 이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매미와 메까치들이다. 즉 제도와 권력의 중심에서 살면서 매미나 메까치의 세계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며, 이는 상당히 알려진 학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님을 느낄 때가 많다.      

얼마 전 한국의 원로 미술사학자로 꼽히며 오랫동안 서울대에서 재직해 온 O 교수(*하바드 대학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원로 미술사학자로서 지금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모 대학의 석좌교수이다) 가 석남 이경성 미수 기념 논총집에서 발표한 ‘어떤 현대미술이 한국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을까’란 논문에서 “어찌하여 서구미술의 아류는 넘치는데 현대판 한국적 풍속화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가. 작가들이 시대성을 너무 경시하기 때문 아닐까”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O 교수는 한국미술사에 남을 현대작가를 창의성, 한국성, 대표성, 시대성, 기타 사항 등 다섯 가지 기준과 원칙을 들고 그 잣대에 들어맞는 작가로 유화 부문은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유영국을, 수묵산수화에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채색 인물화에 김은호, 박생광을 꼽았다고 한다.  
이른바 역사적 맥락과 관점을 강조한 잣대와 기준으로 이렇게 선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O 교수의 언급 중 서구 미술의 아류가 넘친다는 관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미술사에 남을 현대작가를 선정하는 ‘기준’과 ‘원칙’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당연히 작가 선정도 잘못되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O 교수의 기준과 원칙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현대예술의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장르 틀로 이들 작가들을 평가하는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틀로 규정하는 것 때문에도 위의 작가들을 현대 미술 작가로 꼽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대미술은 ‘현대성’에 대한 화두를 전제로 한다. 즉 현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상과 특성으로 현대미술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O 교수가 언급한 위의 작가 중 어느 누구도 ‘현대성’이란 터널을 통과한 작가는 없으며, 그러므로 이들은 다만 전통과 현대 사이에  살았던 과도기적 작가일 뿐이다.      
현대 이전의 미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 회의를 통해 그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 현대미술임에도,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가 아직도 이처럼 구태의연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로 이러한 논의 수준이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 미술의 수준과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물론 그간 척박한 한국전통미술사 분야에서 남긴 O 교수의 선구적 업적을 과소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인품도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다)    


3.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참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현대 미술가들은 바로 대붕의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비록 협소하지만 창공은 무한하며, 그래서 커다란 대붕들이 날 수 있다. 다만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오르는 것이 고작인 매미들에게는 대붕의 존재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대붕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인간세의 통념적 틀을 넘어선 인간을 뜻한다. 대붕도 엄연히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대붕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줄 모르는 자만이 대붕들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한평생을 살아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위에 오르는 매미나 메까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6년   2월 20일   오후 8시 43분에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3 no image ‘보이는 것과 실재의 사이’, 김도희의 제1회 개인전을 보고
소나무
4969 2007-06-05
‘보이는 것과 실재의 사이’, 김도희의 제1회 개인전을 보고 1. 소설로 읽는 철학책인 '소피의 세계'에서 저자는 편지의 형식을 빌어 "슬픈 사실은 우리가 자라면서 중력의 법칙에만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 자체에 길들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처럼 당대를 지배하는 주류적 통념과 함께 사람들은 누구나 주관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경험과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한 개의 사과도 과거의 기억과 함께 본다. 20세기에 들어 서양에서는 '참실재'와 '언어'는 서로 별개의 세계이며 언어의 두가지 요소로서 '기표'와 '기의'를 나누게 된다. 또 이 기표와 기의가 서로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펼쳐지며,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된다고 말했다. 사실 현대의 예술가들이야말로 진작부터 약속된 기호체계 속에서 형성되는 익숙한 세상을 더없이 낯설게 보는 이들이었다. 나는 김도희도 그러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2.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제목이 인 석 장의 사진이 붙어 있다. 종이 표면에 한글 숫자가 적혀 있는 종이로 머리 부위를 감은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은 작가가 대학원 재학 시절에 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일정한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행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지의 표명이다. 즉 숫자는 특별한 의미와 효과를 뜻하기 보다는 작가가 처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도 담당 교수가 이런 동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왜 작품을 안 하느냐고 해서 사진으로 촬영, 인화한 결과물(?)을 제시하자 그때서야‘작품’으로 인정하더라는 것이다. 그 담당교수는‘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한‘그럴듯한 이미지’만을 본 것이다. 이처럼 이 사진들은 대학 현장에서 과연 어떠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작품으로, 역설적으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전시장의 중간쯤에는 노란 테잎으로 칭칭 감아놓은 캔버스canvas가 벽에 걸리지도 않고, 벽에 비스듬히 놓여있다. 바로 이란 작품으로 이 작업은 노란 박스포장용 테이프가 뒤집어 진 상태로 감겨있었고, 표면에는 기다란 머리카락들과 먼지, 곤충 등이 엉겨 붙어있었다. 이 작업을 하게 된 계기도 작가는‘캔버스 회화’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없이 상투적으로 행해지는 교육 현장의 병폐를 목격하면서, 그러한 현실을 통렬하고도 적나라하게 조소한 작업인 셈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작업이 원작이 아니라고 했다. 원래 다른 원작이 있었는데 청소하는 사람이 쓰레기인줄 알고 버리는 바람에 없어져서 새로 재현했다고 한다. 전시장 가운데는 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장지 한 장이 구겨진 채 벽에 붙어 있는 작품이다. 제명의 ‘신치로이드’란 작가가 갑상선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10살 때부터 하루 두 알씩 복용해온 약으로, 작가는 이 작업을 하기 위해 한 달간 이 약의 복용을 중지한 채 이 장지를 깔거나 덮고 잤다고 한다.(*‘신치로이드 60’이란 제목은 바로 한 달간 투약을 중단한 것을 뜻함.) 나는 작가에게 그 당시의 신체적 증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작가는 “몸은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지는데 심리적으로는 더 예민해지더라구요.”라고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수사(修辭)’로 이 흔적에 대해 서술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 한 장의 장지에 흔적으로 남겼지만, 관객은 다만 그 흔적으로 그러한 경험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흔적은 그야말로 어떤 흔적일 뿐 작가 자신의 당시의 고통과 심리적 상태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관객의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가령 우울증이란 질병도 ‘세르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의 부족이 유발하는 무서운 질병인데, 그 양의 부족하고 많음이란 현미경으로나 확인할 수 있는 미세한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는 실로 미묘하고도 섬세한 유전적 기제를 갖고 있는 신체를 지닌 존재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이러한 미세한 물질의 차이로 마침내 생과 사가 엇갈리는 존재이다. 물론 이런 식의 작업은 아름다운 볼거리를 기대하고 온 관객에게는 당연히‘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바로 이 ‘거부감’을 잠시 접고 자신이 대면한 ‘타인’의 삶의 흔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어느 순간 이 작업의 진정성을 실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새삼 내가 어떠한 미세한 물질의 흐름으로 지속되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시각에서도 이란 작품은 개인의 문제, 혹 개인의 사적인 차원을 떠나서 그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는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를 사포 위에 작가의 손톱으로 다시 그린 것이다. 즉 손톱산수는 현대의 준법(皴法)이다. 겸재의 준법은 단순히 실재하는 것을 모사하기 위한 양식적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겸재의 ‘정신성’과 우리의 산천이 만나 성립한 것이다. 그러므로 겸재의 준법을 현재에 와서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김도희의 는 겸재의 ‘준법’을 따라하거나 접근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즉, 작가 스스로 몸의 일부를 활용하여 표현한 것이 ‘준법’일 뿐이다. 즉 작가는 비록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 손톱을 갈아 금강산을 그렸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신체 일부를 마멸하는 행위의 흔적으로 하나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겸재는 붓이라는 도구를 썼지만 나는 그의 붓질을 통해 겸재의 숨결과 호흡을 느낀다. 물론 김도희의 도 이러한 그 방식만 다를 뿐 생생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이러한 점이 전통과 ‘현대미술’이 만나는 하나의 진정한 접점일 수 있다고 보며, 또 다른 하나의 관점이자 대안을 제시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의 어법들은 원점에서 출발하는 바로 투명함과 명쾌함으로 작업의 이면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며, 그 이면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지점과 마주 대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처음에는 그 마주침이 낯설지만 우리는 바로 그 마주침의 순간 늘 대하는 상투적인 것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두개의 비디오 작업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라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실제로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찍은 것이 아니라 나무가 흔들리는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 즉 는 ‘착시’현상을 이용한 작업으로 우리의 지각을 유발시키는 영상작업이다. 그러므로 이는 시각적 이미지의 네러티브narrative가 아니다. 또한 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동영상’이미지, 즉 기계적 메커니즘에 의한 정교한 색점도 아니다. 다만 김도희의 는 보는 것과 그 실상이 다를 수 있는 착시 현상을 통해 바람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흔히 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과연 나무는 바람에 의해 떨림을 당한 것인가. 아니면 나무는 바람 속에서 주체적으로 떤 것인가? 거대한 대지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가 불어오는 바람에 큰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그것은 고대인들에게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었다. 사실 고대인에게 바람은 신의 소리이자 숨결이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다. 단군신화에 나오는‘풍백(風伯)’은 곧 ‘바람신’을 의미한다.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우리 신라인의 고유한 신앙체계로서 바람의 흐름, 즉 ‘풍류(風流)’을 말하고 있다. 신라의 금관은 자작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거기에 달려 있는 얇은 금판은 자작나무의 잎을 형상화한 것이다. 언젠가 박물관 관람객의 발자국에도 떨리는 금관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나는 우리 고대인들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고대인에게 바람은 ‘신끼’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인에게 나무의 떨림은 바람이 불어와서 수동적으로 흔들리는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고대인의 바람에 대한 느낌이 오늘날 우리가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바람, 즉 기압과 기압의 차이에 의한 공기의 흐름보다 우리 몸이 지각하는 바람의 실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왔는데, 예기치 않게도 김도희의 를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바람이 분다고 느끼는 우리의 지각은 바람이 타자의 몸을 빌어 ‘실체’를 가지게 됨을 안다. 동시에 나무는 보이지 않은 바람의 공성(空性)을 입증한다. 이로써‘색(色)’의 세계와‘공(空)’의 세계는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타자의 몸을 빌리지 않은 실체를 과연 무엇으로 지각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우리의 지각에 대해 한 차원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다. 의 오른편에는 또 다른 작업인 이 있다. 이 ‘달’을 이미지로 해서 작업한 것은 와는 다른 방식으로, 혹은 전혀 예기치 못한 감수성을 유발하게 하고 있다. 가 다른 각도에서 이루어진 이미지를 프레임의 시간단위 위에 반복적으로 배치시킴으로서 일상적 시각의 혼란을 유도하고 있다면, 은 얼핏 보면 달을 촬영한 사진을 실시간으로 프로젝터로 비춰서 보여주고 있다. 즉 은 실제 달의 이미지만을 빌어 그 움직임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하여 움직이게 하는, 프레임 상에 놓여있는 가상의 ‘달’이다. 작가는 “지구에서도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달의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지구와 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았다”고 작업 계기를 밝혔다. 그리고 또한 “언젠가 전기 불빛을 보면서 달빛으로 착각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나는 그의 달을 보면서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그러나 우리 몸은 알고 있을 ‘달의 원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동양의 고대인들에게 달빛은 음의 기운의 상징이었다. 도가에서도 달은 ‘어떤 음적(feminine) 상징태의 총화’였다. 나는 이러한 측면에서 김도희의 에서 페미니즘적 요소 이전의 원초적 ‘여성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이번 전시회 작품 중 이러한 여성적 요소가 더 강렬한 작업은 이란 영상 작업이다.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변기 속에 노란 색의 이물질이 물과 함께 변기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보였다 하는 장면의 반복인데, 이 노란 색의 물질인 달걀 노른자는 사람으로 치면 ‘난자’이다. 난자는 한 달에 한 번 배란되지만 수정되지 않으면 자신의 피와 함께 배설되어 버린다. 생명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물질이 수정되지 않음으로 몸에서 떨어져 나가버리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실 이란 작품은 여성들에게 더욱 공감이 될 수 있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김도희의 작업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사적인 체험에서 출발했지만, 각각의 작업들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그저 하나의 동기임을 확인하는 것일 뿐 더 이상 사적인 일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와 의 경우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이자 세계관으로 말한다면 ‘바람과 달의 길’, 즉 ‘風月道’이다. 나는 그의 를 보며 신끼 어린 여인이 산발하고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김도희의 이번 감수성 예민한 일부 작업들-사실은 현실 비판적인 동기가 강한 작업들임에도- 이 마치 무당의 신끼처럼 우리의 원형 무의식이 저절로 표출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러한 감수성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으며, 이 땅에서 수 천 년 이어 온 조선 여인의 어떤 내재적 힘까지 느낄 수 있었다. 3. 김도희의 이번 개인전 출품작들은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미술에 대한 통념으로 보면 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도희의 작업은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 너머 삶의 진정성을 향하고 있다. 나는 김도희 작업의 이러한 측면이 예술가로서 그의 ‘실천’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인들의 가치체계는 물론 자신의 통념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한 태도이다. '현대미술’이 다른 여타의 소비성이 강한 시각문화와 구분되는 중요한 점 중 하나는 바로 관객과 작가의 정신이 만나는 접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김도희의 작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미술’이 시각적인 매체를 이용한 것이 주된 사실이더라도 미술작업은 관객의 상투적 관념 등의 통념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동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념에 비추어 생경하게 보일 수 있으며, 충돌할 수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미술은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영역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교육을 받거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인식체계와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옳다고 배우고 인식해 온 세계 속의 통념과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의 실체를 접했을 때 그것이 처음에는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보고 즐기려 하는 한 결코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것은 좋았던 기억만도 아니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그 이전의 ‘나’를 자각하는 순간, 동시에 정작 무엇이 나를 세계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도희의 이번 개인전 작품들은 통념으로서의 미술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는 까닭과, 그로부터 우리의 진정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2006년 8월 13일, 광명에서 도 병 훈(작가)
42 no image <열녀서씨 포죽도>와 화산관 이명기의 그림 세계
소나무
8816 2007-06-05
<열녀서씨 포죽도>와 화산관 이명기의 그림 세계 도 병 훈(작가) 내 고향 마을 어귀에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유서 깊은 ‘백죽각(白竹閣)’이 있다. 백죽각은 이름이 뜻하듯 ‘흰 대나무’에 얽힌 사연을 담고 있다. 대나무는 옛날부터 소나무와 함께 동북아 문화권에서 그 기품 있는 자태로서 한 겨울 눈서리에도 한 결 같이 푸름을 지키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나의 선조 중에도 이 대나무를 뒤뜰에 심어놓고 늘 즐겼던 사람이 있었으나, 20대 초반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그의 젊은 부인이 대숲에서 오랫동안 슬피 울었으며, 수 십 년 후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흰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한다. 고향 문중에는 이러한 사연을 담은 그림이 전한다. 지난 1996년 추석 무렵에 이 그림을 보았는데,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 1756~1802년 이후)가 그린 <열녀서씨 포죽도烈女徐氏 抱竹圖>였다. 옛 족자를 펼치는 순간, 쪽으로 물들인 청색의 조선식 족자를 배경으로 드러난 그림은 매우 생생했다. 200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는 대작인데다 보존상태가 좋았다. 특히 일반적인 전통 한지와는 다른, 표면이 매끈매끈한 종이여서 그림의 필치가 더욱 투명하고 섬세하게 살아있었다. 그동안 공부해온 서구 회화와는 확연히 다른 예술세계를 처음으로 직접 만져보며 대면한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는 이명기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부친이 소장 중인 필사본으로 된 옛 전적에 그가 그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초상화를 잘 그렸던 화가로만 알고 있던 이명기의 작품세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들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직접 보기도 하고, 동시대 화가들의 그림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이명기의 회화세계를 다룬 선행 연구 논문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 2004년 2월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전>을 보러 갔다가 도록을 통해 이명기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강세황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계추기사癸秋記事」1)를 통해 이명기의 태어난 해가 밝혀졌으며, 또한 이명기가 약관 20대부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다는 것이다. <열녀서씨 포죽도>의 내력 <열녀서씨 포죽도>는 성주도씨 청송당 공파(靑松堂公派) 군위 성동 문중에 전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입향조 도운봉(都雲峯)의 부인인 열녀 서씨2)의 행적을 담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열녀 서씨는 조선 초기의 열녀였다.『세종실록』에 의하면 열녀 서씨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감사가 말하기를, 군위 사람인 도운봉이 후원에 대나무를 심어놓고 이를 완상하며 즐기다가 죽었습니다. 그 때 서씨의 나이는 28세였는데, 아침저녁마다 대나무를 끌어안고 애모하기를 처음 죽었을 때와 같이 17년간이나 계속하던 중 하루는 흰 대나무가 그 후원에 돋아났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 고대 순임금의 두 비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상수(湘水) 물가에서 슬피 울어서 반죽(班竹)이 난 바 있고, 송나라 앙흔이 부모 곁에서 여막을 짓고 효성을 다하여 역시 백죽이 난 상서가 있어서, 군수 양반(楊蟠)이 그 마을을 표창하여 ‘효렴방’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서씨 집에 대가 난 것도 한 상질의 변이(變異)이오니, 그의 높은 정절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함으로써 후세의 사람들을 권장하게 하옵소서.3) 백호(白虎)와 흰 사슴(白鹿)을 영물로 여긴데서 알 수 있듯, 옛 선조들은 흰색을 특별히 상서롭게 여겼으며, ‘흰 대나무의 이적’은 중국의 고사와도 비견되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장계를 올린 당일에 정려와 복호를 명하고, ‘흰 대나무’를 그린 <백죽도>를 본 후 어제시(御製詩) 2 수를 하사한다. 이러한 사실이 나중에『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4),『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5),『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6) 등에 실리며, 문중 및 부친이 소장하고 있는 가첩(家牒)과 문적(文蹟), 그리고 비문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정려각과 <백죽도>가 불타버려, 영조 7년(1726년)에 다시 그려 보관하던 중 그림이 낡아 정조 때에 마침 지금의 경상도 영천 신령면에 위치한 장수도 찰방(長水道 察訪)7)으로 와 있던 이명기에게 부탁하여 중모(重摹)한 그림이 바로 <열녀서씨 포죽도>다.8) 이명기는 이 그림을 그린 후 「포죽도 중모기」와 「포죽도 을묘 중모시 운」이란 칠언율시를 썼다. <포죽도 중모기抱竹圖 重摹記> 영남은 본래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으로 9) 일컬어져 예로부터 정승 판서 등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와 도학, 충의, 절효(節孝)의 선비가 전후로 계속 배출하여 빛나는 전적典籍과 현자賢者가 많은 최고의 고장이 되었다.10) 나는 지난 계축년 여름에 역참을 관리할 것을 명받았지만 역의 공무가 쌓이어 단 한걸음도 문밖에 나가서 아름다운 명승지를 구경할 겨를이 없었으나, 때때로 시골 선비들에게 새로운 것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감동할 때가 많았다. 이번에 석사 도필구가 두루마리 한 폭을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다시 모사하는 일을 부탁하므로 삼가 받들어 펼쳐보았더니, 곧 그의 선조비先祖妣 정부인 달성 서씨의 <포죽도>였다. 장헌(세종)대왕의 시도 여기에 게재되어 있어 두 손으로 받들어 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리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라에서 절의를 장려하고 교훈과 가르침을 붙들어 심어 백세에 없어지지 않는 덕을 드리운 것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도씨 한 집안 만의 영광이겠는가? 아마도 세상의 도리를 위해 다행한 일이니 아 훌륭하여라! 그 흰 대와 눈 속의 붕어가 정성스런 효도의 감동으로 인한 것이니, 이 사실이 모두 『삼강행실도』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 감히 글을 덧붙일 수 없도다. 훌륭하도다. 도씨의 집안에는 어쩌면 그렇게 절의가 많았던가? 이 일에 나도 참여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니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즉시 일어나서 손을 씻고 삼가 모사하여 돌려주며 드디어 이를 위해 중모기를 쓴다. 통훈대부 행 장수도 찰방 이명기 삼가 씀.11) <포죽도 을묘 중묘시 운(抱竹圖 乙卯 中摹詩 韻> 위나라 무공은 원래 군자의 덕이 있어, 기원의 푸른 대가 아름답게 우거졌고 주나라 목왕은 잠깐 선가와 인연 맺어, 황죽시 3장을 지어 세상을 울렸도다. 아황과 여영의 대는 피같이 붉어, 천 년 세월 창오의 땅은 상수 원수를 대하고 맹종의 대(죽순)는 눈 속을 뚫은 기운으로, 특별히 하늘 맨 끝에서 뿌리가 돋아났네. 서씨의 곧은 절개는 사덕을 고루 겸해, 대나무 이적으로 오산에 새로운 정려문 세웠으니 잎은 서릿발 같고 줄기는 옥 같아 마디마디 깨끗하여 아무런 흠 없도다. 남편 죽음 슬퍼하자 하늘이 흰 대 나게 하고, 효도는 능히 하늘에서 붕어 떨어지게 하니 마음 속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구나. 구중궁궐까지 이적 알려져 그림 그리게 되니, 찬란한 임금 은혜 크고도 크도다. 우주의 텅 빔에서 밝은 빛 생겨나 비추니, 언제나 사람이 지켜갈 도리는 어둠에 기대지 않으리.12) 1950년에 부친이 대구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한 『정부인 달성서씨 사적』에 위의 내용이 실려 있다. 「포죽도 중모기」를 통해 이명기가 조선 정조 때의 계축년인 1793년 여름에 장수도 찰방으로 부임했음을 알 수 있다.13) 이명기가 찰방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나14) 어디서 찰방을 지냈는지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 없다. 따라서 이 사적은 그가 장수에서 찰방으로 재임했음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15) <열녀서씨 포죽도>는 1795년(정조 19년) 그의 나이 40세 때에 그린 것임을 그림 좌변에 적혀 있는 ‘숭정후 3을묘(崇禎後 三乙卯)’16)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명기의 「포죽도 을묘 중모시운」은 그가 중국의 역사를 깊게 알고 있음은 물론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나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시에서 영향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를 통해 조선시대 화원들이 그저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가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인문학적 교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기록에서 역시 조선시대는 충효와 정절이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의 근간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선초부터 무엇보다 충효와 정절을 기리는 정책을 폈고, 그래서 서씨와 관련한 이적을 열녀의 표상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제작은 물론 숭현 사상(崇賢思想)의 표본으로 공신들의 초상들도 그려졌고, 이를 진전(眞殿)이나 사당 및 영당에 모시고 향사(享祀) 첨배(瞻拜)하면서 가문의 정서를 공유하는 삶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열녀서씨 포죽도>처럼 조선시대에 관이 아닌 민간에서 여성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이를 족자로 꾸며 자손 대대로 기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거의 유일한 예다. <열녀서씨 포죽도>의 내력과 예술세계 앞의 이명기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듯 <열녀서씨 포죽도>는 누구의 그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숭정후 병오 중춘(崇禎後 丙午仲春)에 그린 원본 그림이 낡아 이명기가 다시 그린 것이다. 19) 화면 최상단에는 『속삼강행실도』에 나오는 서씨 이야기와 세종대왕 어제시를 붉은 세필의 선으로 윤곽선을 그어 행초서로 쓰여 있는데, 이명기가 직접 쓴 것인지는 향후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20) <열녀서씨 포죽도>의 계보는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 그림의 공통점은 한 결 같이 도식적인 3단 구성법을 구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상단은 세종의 명에 의해 그려진 포죽도 족자 그림을 펼치고 있는 장면, 중단은 열녀서씨가 대나무를 움켜 안고 통곡하는 장면, 하단은 집안에서 열녀서씨가 곡을 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열녀서씨 포죽도>는 열녀서씨의 행적에 관한 장면만 집약적으로 묘사한데다 모필화이기 때문에 인물산수화의 특색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명기는 그가 주력한 초상화 외에 10여점의 인물산수화를 남겼다. 그리고 그의 산수인물화 중 연대와 그린 시기가 명확한 기년작은 <열녀서씨 포죽도>가 유일하다. <열녀서씨 포죽도>는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 화풍인 남화적 요소, 즉 우리 역사상 가장 문예가 발달했던 시기인 조선 후기 진경시대의 화풍이 두드러지면서도 조선 중기의 그림을 임모한 그림이어서 정교한 사실성이 두드러지는 북화적 요소도 보인다. 예컨대 전경의 집을 그린 도식적 기법이 그러하다. 흰 대나무를 기록에 남아 있는 대로 8포기로, 또한 저장(苴丈), 즉 상중(喪中)에 짚었던 대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다는 일화를 근거로 저장을 집 거실 안에 그려놓고 있는 것도 사실성에 충실한 북화적 요소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들은 남화적 기법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원경의 산을 ‘미점준(米點皴)’21)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남화풍으로 조선 후기 겸재 정선 이후의 그림에서 흔히 구사되는 기법이다. 얼핏 보면 이 그림은 하나의 단일한 시점에서 그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그림은 크게 세 경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림의 하단인 근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의 시점에서 세부를 들여다보게 하고, 중경과 원경은 공간의 높이와 넓이를 표현하고 있다. 단일한 관점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다시점(多視點), 즉 복합시각을 구현한 그림인 것이다. 우리의 옛 글씨나 그림의 바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즘 흔히 쓰는 화선지와는 확연히 다른 종이다. 특히 <열녀서씨 포죽도>는 잘 다진 장지에다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일점 일 획에도 먹과 채색의 농담이 화가의 감성과 붓질에 따라 그대로 섬세하게 드러나, 이러한 점이 화면을 다채롭고도 미묘하게 한다. 예컨대 이 그림에서는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목의 나뭇잎과 양쪽 길 가의 대 숲이나 언덕 위 대 숲에서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근경 중경의 나뭇가지와 잎의 묘사 방식을 보면 당시에 활동했던 선배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산수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2) 그렇지만 능숙한 필치로 준법을 구사하여 화면을 다질적인 공간으로 보이게 한다. 조선 후기의 그림들은 조선 전기의 관념적 산수와 달리 진경적 사실성이 두드러지는데, 이 그림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다양한 준법으로 그린 수목의 표현이 그 단적인 예다. 그래서 수목 사이 바탕에 옅은 바림(채색)이 가해지는 것도 이 시대 회화의 특성으로, 이 그림도 바림으로 인해 담백하면서도 유현한 기품이 느껴진다.23) 무엇보다 이 그림은 대숲이나 울창한 나무와 대조적으로 그림 중 상단 가운데의 넓은 들판을 텅 빈 바림으로 처리함으로써 투명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한다.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그 끝에 흰 대나무가 있고 그 너머 텅 비고도 꽉 찬 아득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 공간은 이승의 대숲과 멀리 보이는 무덤(저승)사이에 있다. 이 여백은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이다. 이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깊은 감응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열녀서씨 포죽도>는 조선시대 후기 그림으로는 색채를 풍부하게 구사한 그림이지만 수묵화의 기본 특색인 짙음과 옅음, 즉 농담(濃淡)의 변주로 그린 그림이다. 결국 <열녀서씨 포죽도>는 시대와 역사를 충실히 반영한 전통회화로서, 또한 그 기의를 넘어선 다른 감응의 지평을 포함하고 있다. <열녀서씨 포죽도>는 예술세계가 그러하듯, 당대의 의식(記意) 너머 존재하는 무한한 기표(記標)의 세계이다. “전신傳神”을 구현한 이명기의 초상화 이명기의 아버지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종수(李宗秀)이며, 그의 장인인 복헌 김응환(復軒 金應煥, 1742-1789)도 당시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래서 이명기는 어릴 때부터 그림 수업이 가능했고 체화했던 것이다. 이명기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것도 이러한 집안 배경에서 가능했으며 20대 후반에 국내 제일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친다. 이는 이명기가 약관 28세 일 때에 정조가 강세황의 71세 초상화를 그리게 할 때 “왜 이명기에게 그리도록 하지 않는가?”라고 하거나, “이명기는 당대에 독보일세(獨步一世)로서 문무 고관들이 모두 그에게 초상화를 맡겼다”24)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명기는 두 차례나 정조(正祖)의 어진을 그리며,25) 또한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와 함께 사도세자를 위한 용주사(龍珠寺) 대웅보전의 불화를 그렸다고 한다.26) 이명기는 1791년(정조 15년)에 이어 1796년에 두 번째로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리고17), 또한 이 해 여름에 김홍도와 함께 <서직수徐直修(1735~?)상>18)을 그렸다. 장수도 찰방이 되어 지방으로 내려와 있던 1794년에도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초상을 이명기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도 27) 그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중국이나 일본과 어떻게 다른가? 중국의 초상화는 과다한 장식적 배경까지 함께 그리거나 남녀 군상 및 조상들을 함께 그리는 것이 주된 특성이라면, 일본의 초상화는 인물의 표정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28) 이에 비해 조선의 초상화는 극사실적 묘사력29)을 보여 준다.30) 이러한 사실적 묘사력은 당대로선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초상화들이 대상의 외형만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고개지 이래 동양 전통화론의 본질이 된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상의 외형 뿐 만 아니라 대상의 내재적인 본질까지 표현하려 한 전통화론의 주된 화두이다. 그러므로 초상의 잘됨과 못됨의 기준은 ‘전신’에 있었다. 중국에서 전신사조론이 출현했지만 중국에서는 후대에 이를수록 전신이 지닌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버리며, 전신사조의 진면목은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더 실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전통미술사에서 특별한 지위를 점유하며, 그 정심(精審)한 기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가가 이명기다. 그의 나이 37세 때인 1792년(정조16년)에 그린 <번암 채제공의 73세 초상>31)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인 곰보 자국은 물론 사팔뜨기의 눈까지 그대로 그릴 정도로 사실적이다. 뿐 만 아니라 속옷 색까지 얼비치는 의습의 묘사도 절묘하여 그가 남기 초상화 중에서도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유언호 상>, 그리고 1796년에 그린 <서직수 상>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32) 이명기의 초상화는 한 결 같이 담담하고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의연한 성정을 드러내고 있어 초상을 보면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그림을 보면 절로 선조들의 올곧은 삶을 생각하게 된다. 맺음말 이명기는 극진한 필력으로 묘출한 그의 초상화는 올곧은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기질과 내면적 성정, 품격을 여실히 보여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가이다. 이명기는 다수의 인물산수화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이명기의 유일한 기년작 산수인물화인<열녀서씨 포죽도>는 당대의 사회적 이념이 반영된 그림이다. 대나무를 사랑했던 선조의 이른 죽음과 그로 인한 한 여인의 애틋한 정한으로 인해 어느 날 홀연히 하얀 대나무가 솟아나는 사건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당대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 반영이다. 그렇지만 실록에도 기록된 ‘백죽’에 얽힌 사연은 그 족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시지각적 기호와 도상을 통해 면면히 후손들에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열녀 서씨 포죽도>는 우리 전통회화의 주요 특질인 옅음(淡)과 짙음(濃), 즉 허/실(비움과 채움)의 미묘한 변주를 보여준다. 허/실은 바로 우리 삶의 온갖 사연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공간이다. 또한 이명기의 <열녀서씨 포죽도>는 격식과 의례를 중시한 초상화와 달리 무한감과 다질적인 준법으로 시지각적, 또는 물성적 특성상 이념을 넘어선 무한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열녀서씨 포죽도>의 진가는 감성적 기표에 있다. 우리는 ‘기의’로 헤아릴 수 없는 역사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2012년 10월 5일) 각주) 1) 강세황(1713~1791)의 아들인 강관(1743~1824)이 <강세황 71세상>(보물590-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그리게 된 내력과 제작 일정을 자세히 기록한 글이다. 2) 열녀 서씨에 대한 옛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20년 7월 기해조)』,『속삼강행실도』,『신증 동국여지승람』,『정부인 달성써시 사적』,『청송당 도선생 실기,1890』,『영남읍지(1832년)』,『경상북도 읍지(1895년)』, 『조선환여승람』등이다. 3) 『세종실록 20년 7월 기해조(17일)』 慶尙道監司曰, 軍威人 都雲奉, 植竹後園, 每日玩賞, 雲奉死。其妻徐氏, 年二十八, 朝夕就園抱竹, 哀慕常如始, 死者十七年, 一日白竹生於後園。昔皇英泣湘班竹生, 宋仰忻, 盡孝廬墓, 亦有白竹之瑞, 郡守楊蟠表其里, 爲孝廉坊。今徐氏堂後生竹, 亦變常質, 以表素節旌門復戶, 以勸後來。 4) 성종 13년(1382년)에 편찬된 조선전기의 종합인문지리지임. 5) 중종 9년(1514년)에 편찬됨. 6) 광해군 6년(1614년)부터 7년 사이에 편찬됨. 7) 장수(도)는 지금의 경북 영천 신령면에 있었던 역이다. 찰방은 오늘날의 역장 및 우편국장 격으로 대개 30리 거리마다 설치된 지역의 역을 관장하며 당시의 교통수단인 역마의 관리 및 국가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했다. 8) 임진왜란 때 불탄 백죽각은 18세기에 다시 중수하고 새로 비를 세우는데, 이때 중수 비문을 쓴 이가 당시 선산 부사로 와 있던 이채(李采,1745~1820)였다. 이채는 김창협의 문인으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암 이재(陶菴 李縡, 1680~1708)의 손자다. 이런 사실로도 조선시대는 열녀의 정절을 매우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채를 그린 작자미상의 초상화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초상화로 꼽힌다. 9) 원문의 ‘추로지방’은 추(鄒)나라는 맹자의 출생지이고 노(魯)나라는 공자의 출생지이니, 이 사자성어는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이란 뜻임. 10) 한자 원문의 文獻之最라는 말의 ‘문헌’은 여기서는 옛날의 문물과 제도의 연구 자료가 되는 책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적과 현자’를 의미함. 11)「抱竹圖重摹記」嶺南素稱鄒魯之邦, 自古名公巨卿道學忠義節孝之士, 後先相繼蔚然爲我東文獻之最矣。余於癸丑夏膺, 命攻駒於是郵公務氄集 不暇出門外一步地以, 攬作勝之奇時從鄕士大夫益聞其興感者多矣。今星州都碩士必九甫, 持一幅來視 要余以重摹之 役奉以展之卽其先祖妣貞夫人達城徐氏抱竹圖也。莊憲大王宸章奉揭焉 雙擎莊讀欽頌感祝盖見, 祖宗朝崇獎節義扶植風聲垂百世不沫之盛德此豈, 特爲都氏一門之榮抑, 亦爲世道之幸, 嗚呼! 盛我其白竹雪鯉誠孝所感之由具載於三綱圖, 今不敢贅筆而異矣。休哉, 都氏之門何其節義之多也. 斯役也余與有榮矣豈敢辭焉. 卽起盥手敬摹以歸之, 遂敢爲之記. 通訓大夫 行 長水道 察訪 李命基 謹書. 『貞夫人達城徐氏 事蹟』(都永桓 소장), 27-29쪽. 이 글은 그가 쓴 <포죽도 을묘 중모시운>과 함께 이명기가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 보인다. 12) 衛武老有君子德 猗猗綠竹生淇園 周穆暫結仙家緣 黃竹歌聲動地喧 皇英之竹色如血 千載蒼梧對湘沅 孟宗之竹氣凌雪 特地挺出根天根 徐氏貞節兼四德 竹亦梧山別立門 葉如雪刃竿如玉 節節皎然無玷痕 化石崩城白受來 孝能隕魚膓我猿 九重名徹繪後素 燠爛宸章大裁言 照耀宇宙虛生白 萬古綱常顂不昏, 도영환 소장, 같은 책, 29-30쪽 13)『承政院日記』,「乾隆五十六年辛亥 十月 初七日戊申晴.....未時」.....“上.....別下傳敎 主管畵師 司果李命基 同參畵師 氷庫別儉金弘道 相當職除授 주상께서 전교를 내리시되 主管畵師 司果 이명기와 同參畵師 氷庫別檢 김홍도에게 상당하는 직책을 제수하라.” 오주석, 「화선 김홍도, 그 인간과 예술」,『단원 김홍도』(삼성문화재단, 1995) 84쪽에서 재인용. 이 기록은 1791년에 이명기는 주관화사로 어진을 그렸기(御眞圖寫) 때문에 정조가 전교를 내린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명기는 이때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93년 장수 찰방을 제수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논문을 쓸 때만 하더라도 이명기에 대한 선행연구가 없어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후 2007년에 장인석의 명지대 석사학위 논문에서 선행연구논문인 나의 논문을 근거로 『일성록』과 『장수역지』「선생안」을 찾아 그의 재임 기간을 밝혀 내었는데, 그의 논문에 의하면 이명기는 1973년 5월(음)~1975년 8월(음)까지 2년 4개월간 장수도 찰방으로 재임했다. 장인석, 『화산관 이명기의 회화에 대한 연구』,2007, 10-11쪽 참조 14) 오세창이 편저한 『국역근역서화징』(시공사, 819-820쪽)에 보면, 이명기가 찰방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그의 호인 화산관도 장수도 찰방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장수도 찰방이 있는 영천의 주산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머문 인각사가 있는 절로도 유명한 화산(華山)이 있다. 그의 나이로 보아 이 무렵에 아호를 정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16) ‘숭정후 3을묘’는 명 숭정제(1610~1644)사후 3번째 을묘년이란 뜻이며, 이 해는 서기로 1795년(정조19년)이다. 17)이명기는 36세 때인 1791년에 10년 이상 선배이자 스승격인 김홍도와 신한평을 제치고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일을 총괄하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첫 번째 어진을 그렸으며, 그의 나이 41세 때인 1796년에도 정조의 어진을 그린다. 18)얼굴은 이명기가 그렸으며 의습은 김홍도가 그린 전신상이다. 이 그림은 인물의 기질까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인 뛰어난 얼굴 묘사와 부드럽고 섬세한 옷 처리가 조화된 합작 초상화로서 조선시대 인물화중 걸작의 하나다. 19) 서기로는 1726년(영조 2년)이며,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원본은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구도의 「포죽도 후서」에 따르면, 이 해에 새로 그렸다는 기록이 없고, 전해오는 그림이란 뜻의 ‘유도遺圖’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726년 이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20)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徐氏豊基人, 郎將思達之女, 嫁同郡都雲峯, 纔數歲夫死, 哀毁過禮, 常日就堂後竹林, 抱竹號泣, 忽一日生白竹三叢, 三年至七八叢。正統戊午, 莊憲大王名圖, 白竹以進, 復戶旅閭, 御製詩, 號天抱竹涕汍瀾 一夜新篁白數竿 高節凜然驚世俗 九重描上畵圖看 千古瀟湘怨不窮 年年竹上見斑紅 須知素節無今昔 白笋新生一兩叢 右見三綱行實 21) 송대의 화가 미불(米芾)이 창안한 화법으로 먼 산의 숲을 점에 가까운 선으로 그린다 해서 ‘미점준’이라 함. 22) 특히 이명기의 <미불배석도(米芾拜石圖>나 <관폭도>를 보면 김홍도의 <채약우록지도(採藥友鹿芝圖)>와 그 필법이 유사하며, 그림 상단에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는 글이 쓰여 있다. 23) 이 시대의 화가인 강희언(澹拙 姜熙彦)이나 이인문(李寅文, 1745~1821)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이러한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24) 命基以善寫眞 獨步一世 文武卿相悉求於此人. 「癸秋記事」,『표암 강세황 도록』, 20쪽 25) 두 번째인 1796년에 어진을 그릴 때의 정황이『근역서화징』에 실린 「금릉집」편에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조 병진년(1976년)에 왕이 집복헌에 거동하여 화공 이명기에게 어진을 그릴 것을 명하고 규장각 학사인 서용보, 이만수, 이시원, 남공철에게 날마다 돌아가며 대궐에 들어와서, 어진 그리는 일을 감독하게 하여 그림이 완성되자 이에 네 신하에게 각각 모사본 한 벌씩을 내려주셨다. 그 때 원자(세손)와 함게 보시고 그 얼굴과 수염이 꼭 같게 되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 때마다 돌아서서 웃으시곤 했고, 그 족자를 대궐 안에 보관하게 하셨다. 경신년(정조 24년, 1800년)에 상감이 승하하시자 그 뒤에 어진을 네 신하 집에 돌려주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의 일이다. 26) 1790년은 그의 나이 35세 때이며, 이 불화를 그릴 때 김홍도 이명기도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불화는 최초로 서양화 기법인 음영법이 구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그림은 종교화라는 점, 또한 그 기법적 특성으로 보아 김홍도 이명기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무엇보다 20세기에 와서 덧칠을 했기 때문데 김홍도나 이명기의 화법적 특성을 발견할 수 없다. 27) 원본을 이모함. 28) 중국과 일본의 초상화에 대해서는 아주문물학회에서 간행한 『위대한 얼굴전 도록』(2003) 참조. 29) 그래서 피부과 의사인 이성락 박사가 우리 초상화를 보고 피부병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를 통해서는 이러한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하며, 이를 통해서도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그려졌는지 알 수 있다. 30) 조선시대의 초상화에 간략하게 일별할 수 있는 논문은 이태호의 「초상화」,『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학고재, 1999) 288-321쪽과, 조선미의 「한국 초상화의 사적 개관」,『위대한 얼굴전 도록』(앞의 책) 162-177쪽 참조. 31) 오주석은 그의 논문에서 임금의 초상을 그린 해인 1791년에 그린 것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1791년 가을에 어진이 그려졌고, 초상화에 체제공의 73세상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채제공이 1720년생이므로 1792년(초)에 그린 것이다. 32) 서직수 상을 그린 1796년 이후 이명기의 행적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며, 화원들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던 자비령 대령 화원에도 1800년 이후에는 이명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성록』에 1802년 8월 선원전을 수리하여 양지당 및 규장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숙종, 영조, 정조 등 선대의 초상화를 이전 봉안할 때, 이 작업과정에 이명기가 참여하지 않자 순조는 이전까지 어진제작 등의 공로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영원히 사과벼슬에 봉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장인석, 같은 책, 14-15쪽 참조 * 이 논문은 2004년에 쓴 「화산관 이명기의 <달성서씨 포죽도>와 “전신”에 대한 소고」,(『성주도씨 대종친회 회지』제19호, 2004)와, 「<열녀서씨 포죽도>」와 이명기의 그림세계, (『나와 너의 세계 美術』, 글을 읽다, 2007)를 2012년 10월 7일에 수정 보완한 것임.
41 no image 해월 최시형 선생과 검등골
소나무
8441 2007-06-05
해월 최시형 선생과 검등골 1. 지난 7월 8일 나는 가족과 함께 포항시 신광면에 위치한 신광온천에 갔다. 이 온천은 유원지에 있는 큰 규모의 온천이 아니라 동네 목욕탕 같은 곳으로 주변은 논밭뿐인 한적한 시골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도 천연 온천수이고, 갈 때마다 사람도 많지 않아 금년 들어 서너 번 이 곳에 가게 되었다. 온천에서 나와 집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온천 주차장을 벗어나 국도로 진입할 무렵, 오른쪽 도로변에 커다랗게 네모진 화강암 빗돌이 눈에 띄었다. 무심코 그 빗돌 맨 위 상단부분의 글을 보았더니 제2세 동학(천도교) 교조인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선생의 말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가까이가서 보니 그 빗돌에는“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하라.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 데 들어가리라.”로 시작되는 장문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뒷면을 보았더니 이 빗돌은 지난 1998년에 세웠으며 글씨는 당시 이 지역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여학생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빗돌을 보면서, 오래 전부터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최시형이 공부하고 수행한 장소인 ‘검등골’을 떠올렸다. 검등골이 이 지역 어디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갑자기 검등골을 찾고 싶었다. 온천 옆으로 나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검등골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드라이브 하는 셈치고 그 길로 가보자고 집사람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길로 조금 들어가니 조그만 마을과 솔밭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자 두갈래 길이 나타났는데 이정표에는 각각 기일리(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최시형의 고향이었다) 와 마북리로 적혀 있었다. 먼저 기일리 쪽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한참동안 그 길 쪽으로 가도 검등골이란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 차를 돌려 나오는데, 마침 할머니 한 분이 걸어오시기에 검등골이 어딘지 아시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다시 차를 돌려서 두 갈래 길에서 마북리 쪽 저수지 옆으로 난 길로 가면 검등골이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알려준 길을 따라 깊은 산속으로 한 십 여분 달렸을까, 눈앞에 작은 산골 마을이 보였고 그 중 한 집에서 할아버지 한 분과 할머니 한 분이 웬 낯선 차가 이곳까지 왔을까하는 표정으로 우리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혼자 차에서 내려 할아버지께 검등골까지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천도교 신자냐고 물었다. 내가 천도교 신자는 아니며, 검등골은 최시형 선생이 머물며 수행한 곳이어서 오게 되었다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여기서 차로는 더 갈 수 없고 걸어서 한 십리 쯤 산 속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길 주변의 풀도 베고 해서 갈 수 있었는데 나이 들어 힘도 들고 해서 풀을 베지 않아 지금은 풀이 우거져 찾아가기가 어렵고, 상수원 댐도 있다고 했다. 이어 그곳에 가면 집터만 남아 있으며 그 자리에 천도교를 상징하는 깃발만 꽂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서 검등골이 있는 괘령산 자락을 바라보았다. 낙동정맥의 한 줄기답게 그리 높지는 않아도 산세는 단순하면서도 장엄했고, 여름 산 특유의 무성한 숲에 둘러 싸여 그 신비감이 더 했다. 아직도 인적이 드문 벽촌, 이 깊은 산속에서 해월 선생은 우리의 근대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깨침을 얻은 것이다. 계속 산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가슴이 저며 왔다. 2.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27년, 외가 마을인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지금의 포항시 신광면 기일리(터일마음)이다. 그는 5살 때 어머니를,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천애의 고아가 되어, 멸시와 천대 속에 머슴살이를 했다. 17살 때 종이 만드는 공장의 직공이 되었다. 19살 때 흥해 매곡에 사는 손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어 이곳에 살다가 그의 나이 28세 때인 1854년에 신광면 마북동으로 이사하였고, 다시 33세 되던 해인 1859년 봄에 검등골에 가서 화전민으로 살게 된다. 1861년, 그는 이 검등골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의 득도 소문을 들게 된다. 그는 수운 선생이 있는 경주 용담골을 찾아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해월 최시형(1875년 개명하기 전까지는 이름이 崔慶翔이었음)은 수운 선생을 만나러 갔는데 한 방에 있는 사람들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물어보니 ‘모두가 하늘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수심정기(修心正氣)하고 수행하면 하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수운 선생의 말을 듣고, 용담에서 검등골까지 수 십리 길을 한 달에 몇 차례씩 내왕을 했다. 해월도 하늘님 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 무렵 수운 선생이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은적암’이란 곳으로 피신하게 된다. 해월은 검등골에 와서 문을 걸어 잠그고 가마니로 문을 가리어 방을 어둡게 한 후 꿇어 앉아 묵상을 하며 그해 겨울 내내 도를 닦았다. 그럼에도 하늘님 소리는 도무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 나와 계곡에 있는 소(沼)의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따뜻한 몸으로 찬물에 들어앉으면 몸에 해로우니라.”였다. 그 후 해월은 수행을 계속했으며, 약 7개월을 그렇게 지내는 동안 수운 선생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경주에 있는 어느 동학 신자의 집으로 갔는데 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는 수운 선생을 만났다. 우연이었지만 해월에게는 기적적이고 눈물겨운 상봉이었다. 이윽고 수운 선생은 해월을 보고 “하늘님 소리 듣는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해월은 지난 겨울 어느 날, 하도 답답해서 찬물에 들어갔는데, 하늘에서 “따뜻한 몸으로 찬 물에 들어가면 몸에 해로우니라.”라는 말만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수운 선생이 그게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해월이 동지 달 언제였다고 말하자, 수운 선생이 말하길, “맞구나. 내가 그 날 그 시간에 글을 쓰다가 네가 한 말까지 쓰고 밖에 나가서 마당에서 그 말을 읊조렸는데 네가 들었구나!” 그 말을 들은 해월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님의 소리를 저 하늘로부터 들을 줄 알았는데, 사람의 소리가 바로 하늘님의 소리였군요.”라고 말한다. 이 큰 깨달음이 훗날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사상의 핵심이 된다. 이는 수심 정기하면 시공을 초월해서 마음이 통한다는 나아가 천지가 한 생명이라는 사상이다. 1863년 추석날 새벽, 해월은 마침내 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았다. 수운 선생은 최시형에게 ‘해월’이라는 도호와 함께 시 한수를 내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용담의 물이 흘러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리(龍潭水流四海源) 검등골에 한 사람이 있어 오직 한 마음이로다(劍岳人在一片心) 이 일이 있고 난 다음 해 수운 선생은 체포되어 대구에서 참형을 당한다. 이 때부터 동학의 포교는 해월의 몫이 된 것이다. 이후 30년간 해월은 지명 수배범처럼 ‘최보따리’로 관군에게 쫓기며 숨어 지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동학을 포교하게 된다. 즉 구한 말 외세의 침략 속에서 민족의 자존이 풍전등화일 때, 최시형은 한 사람 한사람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가르침을 평생 숨어 다니며 펼쳤고, 그래서 동학의 교세는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나중에 전봉준이 주도한 갑오민주항쟁으로 이어지고(그러나 해월은 이 동학혁명 자체를 반대했다), 나아가 20세기 초 ‘삼일 운동’에 이르기 까지 근현대사의 굵직한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 해월의 삶 그 자체는 소박하기 그지없었으며,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신념의 실천의 연속이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그는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라면서 어린이를 존경하게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도교 제3대 교조인 손병희에게 계승되고, 이어 손병희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 날을 제정하게 된다. 흔히 미국의 영향으로 어린이 날이 제정한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은 데, 어린이날은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어 그는 아녀자도 하늘님이라는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가르침을 펼친다. 이를 잘 알게 하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청주의 집 앞을 지나는데 베틀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 집 주인에게 최시형이 물었다. 누가 베를 짜느냐? 그 주인이 말했다. “제 메눌아기가 짜고 있습니다.” 최시형이 다시 물었다. “누가 짜나?” “제 메눌아기가 짜고 있습니다.” 최시형이 다시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같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한참 길을 가다가 제자에게 최시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하늘님이 짜고 있는 것이지.” 며느리가 곧 하늘님이라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물레를 돌리듯 해월의 평생 습관은 새끼를 꼬는 일이었다. 그래서 멍석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꼴 새끼가 없으면 다시 풀었다. 그래서 제자가 물었다. “왜 그렇게 다시 풉니까?” 해월은 말했다. “하늘님은 쉬는 법이 없다.(至誠無息)” 그럼에도 무엇보다 해월의 인품을 여실히 알게 하는 일화는 제자가 감옥에 가면 자신은 엄동설한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는 사실이다. 해월의 마지막 설법은 음죽군 앵산동(현 경기도 이천군 설정면)에서 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이다. 그 때까지 제사는 벽을 향하여 밥을 놓고 지내는 것이었다. 즉 ‘향벽설위’이다. 그런데 해월은 “나(자기)를 향해서 제사상을 차려라, ‘내(자기)’가 곧 귀신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제자가 물었다. “귀신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러자 해월은“네가 밥을 먹고 싶다는 것, 그것이 바로 귀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고 말한다. 이어 “상기(喪期)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심상으로 백년해라(마음으로 잊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또한 “상은 어떻게 차립니까?”고 묻자, “상은 맑은 물(淸水) 한 그릇으로 족하다.”고 했다. 이 마지막 설법이후 결국 최시형은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종로5가 단성사 근처에 있었던 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1898년의 일이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비참하고 초췌하기 그지없는 최시형의 모습은 바로 이 형장에서 죽기 며칠 전 온갖 고문을 당하던 시기에 찍은 것이다. 나는 최시형의 이 최후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실존적 인격’을 떠올리며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함께 나의 실존적 삶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3. 최시형의 깨달음과 실천은 알량한 지식이나 인식의 틀로서는 결코 가능한 차원이 아니다. 검등골에서 최시형이 겪은 체험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절로 웃음이 나오는 순박한 일화이다.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에 환청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심할 수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최시형의 그 순박하고 순정한 마음이다. 그는 바로 그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체험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고, 평생 그 깨달음을 실천함으로써 한 시대의 지평을 열었다. 나는 검등골에서의 해월의 삶을 떠올리며 현재 우리의 실존과 역사성, 그리고 나의 진정한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가슴으로 반추하게 된다. 해월은 지금 특정 종교를 가진 신자들에게는 교조로 숭앙되는 대상이고, 반면에 일반인들은 해월이 과연 누구인지, 검등골이 어디인지 관심조차 없다. 살았어도 죽어서도 해월 최시형의 삶의 진정성은 여전히 이 땅에서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아니 느끼고 보면 우리의 산천 곳곳마다 선조들의 치열했던 실존의 흔적과 역사의 숨결이 배여 있다. 검등골은 인간 최시형의 ‘실존적 인격’을 갖추게 한 뜻 깊은 장소인 곳이다. 2006년 7월 13일, 광명에서 도 병 훈(작가) PS: '검등골’을 ‘성지’화 한다는 명분으로 자동차 길이 생겨나고, 또 해월이 살았던 건물을 복원한답시고 결과적으로 원형을 훼손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40 no image 한국미술 100년전(2부)의 오류에 대한 단상
소나무
4835 2007-06-05
한국미술 100년전(2부)의 오류에 대한 단상 1. 나는 지난 6월 18일(일),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부)전을 보러 갔다. 이번 전시회는 20세기 전반기를 대상으로 한 1부 전시회에 이어 1950년대 중 후반기 이후 현재까지 미술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이다. 나는 전시장에서 본 리플렛과 팜플렛, 그리고 전시장 입구 벽에 쓰여 진 글을 통해 이번 전시를 포괄하는 주제가 ‘정체성(Identity)’이며, 이를 토대로 미술적 ․사회적 사건을 구분 점으로 삼아 연대별(Ⅰ. 1957~1966. Ⅱ.1967~1979. Ⅲ. 1980~1987. Ⅳ. 1988~ 현재)마다 다시 전통(tradition), 인간(hunman), 예술(art), 현실(reality)이란 네 개의 하부 개념(?)이란 틀로 작품들을 분류하여 배열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인식의 틀 속에 강제로(?) 배열된 작품들을 장시간 동안 보는 것은 매우 착잡하고도 씁쓸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정체성’이란 포괄적 대주제는 물론 4개의 하부 개념으로 설정한 주제와 내가 개별 작품을 통해 느끼는 감응이 실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에 출품된 것이라고 하기엔 함량미달의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 은 그 타이틀의 무게로 보아 통사적 안목(historical perspective)을 포함한 ‘가치론’적 성찰이 전제되어야 할 전시회이다. 권력의 주체들이 갖고 있는 담론이 한 시대의 지배적 가치가 되고 또한 역사의 진실을 왜곡(歪曲)할 수 있음을 밝힌 이는 미셸 푸코이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정부 산하 기관에서 주도하는 제도적 전시회는 이미 도그마적 ‘권력’의 성격을 갖고 있다. 2. 칸트는 일생에 걸쳐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라는 질문을 자신의 학문적 바탕으로 삼았다. 이는 인식작용의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며, 결국 “인식이 대상들의 기준 아래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이 인식에 준해야 한다.”는 ‘주관적 관념론’으로 귀결된다. 즉 칸트의 주관주의란 이 우주는 나의 인식주관이 능동적으로 ‘구성’한 결과물로서의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칸트 철학은 회의론적 ‘불가지론’에 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대상(사건)에 대한 여하한 인식도 나의 인식주관이 구성한다는 데 그 혁명성(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다. 칸트에 의한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이후 ‘지식(episteme)’이란 주위 사물에 대한 정보의 체계가 아니라 ‘나’라는 인식 주체가 주위의 사물을 어떻게 느끼고 인지하느냐하는 인식의 체계가 된다. 칸트는 어떠한 대상도 인식주체의 감성과 지적 맨탈리티의 해석과 재구성에 의해 그 가치가 부여됨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구성설’은 근대 이성을 출발점으로 한 인식론적 탐구의 문제였지만, 단지 인식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은 서구의 근현대 예술사에서는 ‘대상’에 대한 주관적 표현(재구성)으로 그 특성이 드러나며, 그만큼 자발적인 표현의 특질로 나타난다. 그래서 결국 현대에 이르러 현대 이전의 미적 규범(criteria)이나 가치체계(cultural grammer)는 전면적 검증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현대의 미적(예술적) 가치란 담론을 통해서만이 그 정당한 존재가치를 입증할 수 있게 된다. 전시회를 보고나서 새삼스럽게 칸트의 인식론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서술하는 것은 이번 전시회에서 ‘정체성’이란 대주제하에 하부 개념인 전통 ․ 인간 ․ 예술 ․ 현실이란 개념부터가 검증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먼저 ‘정체성’ (혹은 동일성) 문제는 원래 형이상학적 난제로 변화 속에서도 남아 지속되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것들의 동일성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로 대별된다. 유명한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잘 알게 하는 예다. 즉 백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테세우스의 배가 있는데 그런데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 다른 조각으로 대체하게 되었고, 결국 백 조각 모두를 다른 조각으로 대체했다. 이 경우 새로 보수된 배는 원래의 배와 동일한가?의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또 다른 경우는 테세우스의 배를 한 조각씩 옮겨서 원래의 배와 동일하게 재조립했다면 이 배는 원래의 배가 지녔던 정체성을 유지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서구화 산업화의 급격한 변혁 속에 야기된 정체성의 위기’도 바로 이런 '동일성' 의미가 전제된 것이다. 즉'정체성'이 화두가 되는 것은 과거에 실체적으로 '존재'했던 어떤 존재가 어떤 시공간적 변화에 상관없이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했는데 단절되었버렸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현대의 자연관적 측면에서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즉 '정체성'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시대착오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유동적인 역사, 더구나 현대의 복잡다단한 예술을 감당하기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이나 '인간', '예술' ,'사회'등을 정체성의 하부개념으로 삼아 우리의 근 현대 미술을 규정하는 연역적 용어로 설정되는 것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우선 전통과 인간이 양립적인 개념일 수 있는가 하는 반문으로도 알 수 있다. 전통적 소재나 문양을 다루면 전통적 작가이고, 인간을 그리면 ‘인간’적 예술이고,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를 직접적으로 그리거나 표현하면 ‘현실’이고, 조형적 실험성이 두드러지면 ‘예술’이란 식의 범주가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인간’과 ‘예술’은 왜 분리되며, 또한 ‘현실’과 별개로 유리된 ‘전통’, 즉 현재성이 상실된 전통이 도대체 무슨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 정체성이란 대주제 하에서 ‘현실’과 분리된 ‘예술’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현실’이란 주제 하에 선택된 작품들은 과연 어떤 ‘현실’이며, 말 그대로 ‘현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한국 미술 100년 전’에 전시되었는지도 의문이다. (이러한 나의 의문은 아르놀트 하우저의 “예술적 창조에의 주관적 충동, 표현의지 및 표현능력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이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주관적 충동의 근원을 유도해낼 수도 없는 것이다.”라는 말과도 연관이 있다) 이러한 근본적 문제점과 함께 이번 전시회는 정작 쟁점이 되어야 할 핵심 문제는 간과해버린 전시회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특정 시대의 작품들이 당대의 시대와 어떤 상관관계 속에 형성되었는지, 혹은 개인 혹은 어떤 집단들이 어떠한 행위 언표적 공간 속에서 그들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나아가서 그들은 이러한 언표 행위적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의 등의 문제다. 그 단적인 예로, 50년대 후반의 이른바 ‘앵포르멜 미술’의 경우 서구 미술사의 미학적 담론들이 형성하는 공간 속에서의 앵포르멜 미술들과 어떤 위상학적 특성을 형성하는지, 만약 우리의 앵포르멜 미술이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면, 왜 하필 ‘앵포르멜 미술’인지(*이미 오상길 선생은『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란 책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럼에도 왜 ‘정체성’이란 화두를 전제로 한 전람회에 이런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공간은 물론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의 맥을 이어온, 그래서 살아있는 근현대미술사라해도 과언이 아닌 김병기 선생은 대담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Ⅳ(VOL.3)』, (ICAS 2004) 참조)) “만인이 나쁘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좋을 수 있고, 만인이 좋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또 안 그런 것이 있다.”고. 이는 예술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미묘한 것이고 또한 규정하기 어려운 문제인가를 잘 알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예술은 그 의식과 양식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추구해온 의식의 확장과 심화, 즉 정신성의 ‘증표’로서 그 존재가치를 드러낸다. 이런 차원에서 개인전이든 집단전이든, 혹은 기획전이든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를 입증하고 드러내기 위해 전시회가 열린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말인가? 3. 복잡한 사회적, 역사적 좌표 안에서 부단히 형성되고 변환되는 것이 실제 예술의 세계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술 영역을 보는 어떠한 절대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오히려 예술은 철저하고도 메타적인 성찰이 더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해석이다. 과거의 모든 사건이 역사가 될 수는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지나간 역사에 대한 사실 판단은 곧 가치판단이다. 특히 예술의 역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거시적 안목으로 보면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갖는 작품들은 당대의 평가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란 끊임없이 후대의 해석과 평가에 의해 다시 쓰여 지면서 새롭게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전시회는 역설적으로 우리 현대미술의 실상에 대해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전시회가 아닐 수 없다. . 2006년 6월 27일 도 병 훈(작가)
39 no image 김병기 선생 도미 송별연 소감
소나무
5733 2007-06-05
김병기 선생 도미 송별연 소감 1.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통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오리지날리티(originality)’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이 앞마당입니다. 유럽과 미국은 뒷마당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의 주인입니다.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한 시대의 정신성을 증명하는 것은 예술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미술계는 커머셜리즘만 판칠 뿐 정신을 리드하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신을 리드해주시기 바랍니다. 푸른 지중해가 보이는 알제리아의 해안, 로마의 유적이 폐허로 많이 남아 있는 곳에서 태어난 알베르 카뮈는 말했습니다. ‘예술은 폐허 위에 맺힌 이슬’이라고...... 예술은 오늘의 이슬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아방가르드가 되어야 합니다. 아방가르드에 연령은 없습니다. 예술은 ‘포에지(Poesie)’가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통하면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있는 겁니다....... 지난 2006년 5월 31일, 혜화동의 만리성에서 있었던 ‘김병기 선생 도미 송별연’ 자리에서 김병기 선생은 힘 있고 울리는 음성으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91세란 연세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정정하신 모습으로. 6월 5일 LA로 떠나시기 직전에 우리의 정신을 이어온 분을, 그것도 건강하신 모습을 가까이서 뵙고 그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그만큼 그날 송별연은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으며, 90대부터 20대까지 나이를 떠나 예술을 귀하게 생각하는 예술관을 공유한 선후배들이 함께한 더없이 아름다운 자리였다. 지난 5월 12일에 있었던 예술과 시민사회 발족식 날에도 김병기 선생은 고문으로 참석하여 도도히 흐르는 장강처럼 역사의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축사 주1)를 해주셨지만, 이 날도 김병기 선생은 후배들에게 여러 좋은 말씀으로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날 김병기 선생이 과거 역사 속의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오늘을 숨쉬며 살아 있는 예술가임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김병기 선생은 내년에 꼭 작품을 들고 다시한국에 오시겠다고,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셨고, 전시회도 같이 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다) 내가 김병기 선생을 직접 뵙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지난 2004년 가을 이승택 선생 개인전, 주2) 두 번째는 지난 5월 12일 예술과 시민사회 발족식이었고, 그리고 이번 송별연이다. 그 날 김병기 선생은 까마득한 후배들과 함께 한 자리를 너무도 귀한 자리라고 하시며, 손자뻘인 30대 후배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으며, 후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셨다. 게다가 필자를 포함하여 후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그것도 한자로 무슨 글자인지까지 자상하게 물어보셨다. 이처럼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던 그날 송별연에는 황용엽, 조용익, 김구림, 조규현, 오상길, 김미경, 도병훈, 박상준, 최선, 권이중, 최두수, 사혜정, 주연수, 전상민, 정승채, 김도희, 육순호가 참석했다.(존칭생략) 2. 김병기 선생은 유럽에서 다다가 태동된 해인 1916년, 평양에서 근대 서양화 도입기의 선구자적인 화가인 김찬영(1893-1960)주3)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광복-한국 전쟁- 50년대- 60년대로 이어지는 근현대를 화가로, 교육자로, 또 비평가로 활동하신 분이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근현대 미술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당신의 이력은 일제강점기 동경 유학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그 약력을 정리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김병기 선생은 1933년에 도쿄로 유학하여 아방가르드 미술 연구소 주4)의 회원으로 가입하고 그곳에서 에콜드 파리의 한 멤버이자 피카소의 친구로서 20년 만에 유럽에서 돌아온 후지타 스쿠지와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등으로부터 유럽의 현대미술 중 입체파, 구성주의, 그리고 이탈리아의 미래파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여기서 김병기 선생은 수화 김환기를 만나 같이 공부하게 된다. 이 무렵, 김병기 선생은 역시 아방가르드 연구소의 스승이었던 아리시마 이쿠마(有島生馬)의 소개로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에 있으면서 동시에 1935년 문화학원 미술부에 입학했다. 주5) 그러나 이 때 김병기 선생은 몸이 쇠약해져 겨울을 고향에서 보내고 다시 입학, 한 학년 아래 문학수와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김병기 선생과 소학교 동창인 이중섭(1916~1956)이 주6) 이 학교에 입학하여 이들 세 사람은 아주 가까이 지냈다. 김병기 선생이 재학할 때만 해도 이 학교는 전통적인 인상주의 화풍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김병기 선생은 학교에 별로 가지 않고 주로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에서 현대미술의 정보를 습득한다. 1939년 귀국한 후 김병기 선생은 결혼하였으며, 고향 평양의 문학예술총동맹에서 활동하면서 문예동인지『단층 斷層』의 표지도 그리고 삽화도 게재한다. 단층파의 동인은 김이석(1914~64), 구연묵, 김화청, 김조규(1914~90), 유항림 등이었다. 이어 평양에서 이중섭, 윤중식(1913~), 문학수, 황염수(1917~), 이호련 등과 함께 6인전을 열기도 했다. 김병기 선생은 평양에서 광복을 맞이했으며,‘해방 공간을 평양과 서울, 남과 북, 좌와 우 양쪽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그래서 한 때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서기장을 맡고, 잠시 해주에 머물다 1947년 월남했다. 이후 선생은 1948년에 이쾌대 등이 주도한 미술문화협회전, 한국미협전 등에 출품했다. 이어 한국전쟁 때는 종군화가단에서 부단장으로 활약했고 포화가 가시기도 전인 1951년에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56년에는 서울예고 미술과장으로 미술과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시기를 전후하여 김병기 선생은 의미 있는 비평 활동을 펼치는데, 한 예로 1952년 6월 『사상계』에 ‘현대미술의 형성과 동향’을 기고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김병기 선생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을 기하학적 추상과 야수주의로 양분하여 각 사조의 다양성 속에 나타난 조형과 미학을 고찰했다. 이어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현대의 개념은 역사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미술이 문학의 지배에서 벗어나 미술의 자율적 조건인 ‘조형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글에서 김병기 선생은 현대미술이 세잔으로부터 출발한다면서, 세잔이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표현의 세계로 회화를 전환시켰으며, 나아가 자연의 합리주의적인 면만을 강조하기보다는 민감성과 이성, 색채와 형체라는 상반된 세계의 완전한 조화를 추구한 작가라는 주장을 폈다. 이런 맥락에서 감성적 색채와 선에 대한 세잔의 또 다른 관심이 야수주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분석적·합리적 흐름 내에서도 기계문명에 대한 저항과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피카소와 동갑내기 레제를 대비시켰으며,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관의 차이를 강조했다. 이후 김병기 선생은 조선일보사가 1958년에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출품했으며, 1964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커미셔너 활동을 계기로 미국에 정착했다. 그 후 1986년 서울의 가나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계기로 귀국했다. 3. 오래전 『한국현대미술』이란 책을 통해 김병기 선생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김병기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자세히 알게 된 계기는 『현대미술 다시 읽기Ⅳ,Vol.3』에 실려 있는 오상길 선생과의 대담을 읽고나서였다. 주7) 김병기 선생은 이 대담을 통해 한국의 현대미술이 어떻게 시작되고 변천되었는지를 시대와 역사,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로 진솔하고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특히 대담 내용 중 미술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지는 정신성'임을 밝히는 구절과, 이어 ‘예술가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란 통찰력을 보면서 한 후배 예술인으로서 큰 용기와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그만큼 몇몇 비평가들이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듯 지극히 근시안적으로 역사와 문화, 미술사를 재단해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오류인 지를 명백히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미술계가 어른으로 모실 존경할만한 분이 없는 양, 자폐적으로 살면서도 유아 독존인양 사는 이들이 대다수인 삭막한 미술계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대선배님이 건강하게 살아 계시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를 나는 이번에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날 환송식 자리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이 땅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성을 느꼈다. 화단의 원로이신 조용익 선생, 이승택 선생, 김구림 선생, 그리고 조규현 선생 등도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조규현 선생은 특유의 날카로운 어법으로 공부의 과정이 인식의 부단한 해체과정이라는 것과, 실존주의의 오랜 천착을 통해서 자각하셨다는 실존적 인격, 그리고 이승택 선생이 최선에게 큰절했던 사건에 대해 카라마조프 형제에 나오는 장면에 비유하여 말씀해 주셨으며, 그날 송별연 비용도 감당하셨다. 특히 이승택 선생은 조선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더욱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리고 후배의 대표로 최선과 김도희가 까마득한 선배와 함께 한 소감을 말했으며, 이처럼 선후배가 함께하는 더없이 아름다운 환송식 자리를 만든 오상길 선생은 우리 역사를 크게 보는 시야로 김병기 선생에 대해, “저는 김병기 선생 뒤로 겸재 정선이 보입니다. 그 산봉우리 뒤로 또 하나의 산봉우리.......이렇게 역사는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김병기 선생에 대한 후배로서의 역사적 평가였지만, 또한 동시에 나에게도 삶의 역사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2006년 6월 2일 도 병 훈(작가) 각주 주1) 김병기 선생의 축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우리는 역사의 한 장을 열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난했던 그러나 눈이 부실만큼 비약적인 변화를 거듭해 온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해 여기에 서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과 감성의 기저입니다. 모든 예술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을 반영하며, 시민사회는 그 성취에의 공감과 반영으로 문화를 공유합니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은 질곡과 갈등 그리고 혼돈을 투영하고 있더라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때, 나라를 잃어 식민의 아픔을 겪었고 전란의 비극마저 겪었지만, 세월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의 상처를 씻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깊고 아픈 상처였지만, 역사는 그것이 우리의 표피를 잠시 스친 작은 흠집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지혜로운 선조들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삶으로부터 인류의 그것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역사에는 질곡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일찍이 토인비가 말했던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떠 올리며, 우리가 겪어온 현실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 우리가 고난의 시기를 지나쳐 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의 극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지금이 바로 일그러진 근대화, 허겁지겁 갖추어 온 현대화의 난맥상을 하나하나 재정비해 가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으로 를 만들었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문화예술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산적한 난제들을 지혜롭게 풀며 미래로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21세기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 새로운 역사의 주체가 될 것임을 믿고, 또 그렇게 되어 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에 앞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선조들 앞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후예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주2) 필자는 이승택 선생의 개인전에 대해 쓴 글에서 후기로 ‘김병기 선생과의 만남’이란 글을 썼다. 주3)유학 제1세대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고희동, 김관호 다음으로 1917년 동경미술학교서양화과를 나왔다. 주4)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 교사들 중에는 야마모토 란손山本蘭村(1909~77)도 있었다. 아리시마 이쿠마의 조카이기도 한 란손은 조르주 루오의 그림에 감화되어 상지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문화학원 미술부에 입학했다. 그는 초기에 추상작품에 전념했고 흑색전, 이과전 등에 출품했으며 후지타 츠구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후기 작품은 구상적 표현으로 달라졌다. 주5)문화학원 교사는 이시이 학데이(石井柏亭), 아리시마 이쿠마, 야마시다 신타로山下新太郞(1881~1966), 마사무네 도쿠사부로正宗得三郞(1883~1962) 네 사람이며 모두 이과회(二科會)회원이었다. 신타로는 1901년 후지시마 다케지로부터 수학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선과에 진학했다. 그는 졸업 후 1905년 에꼴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으며 스페인 여행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영향을, 파리에서 체류할 때 주로 르누아르의 영향을 받았다. 1910년 귀국하여 이시이 학데이 등과 함께 일본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이과회’를 창립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마사무네 도쿠사부로는 1902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했고, 졸업 후 각종 전람회에 출품하다가 1914년 프랑스에 가서 모네, 르누아르, 반 고흐, 마티스 등의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주6)김병기 선생은 이중섭 화백과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고 일본에서도 같은 미술학교를 다닌 절친한 친구 사이다. (*일부 백과사전에‘1916년 4월 10일’로 돼 있는 이중섭 생일은 김 선생이 태어난 날인데, 인터뷰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잘못 기재된 것이다. 이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다) 지금은 특정화랑의 농간에 의해 이중섭과 그의 예술세계가 신화화 되었지만, 김병기 선생은 어느 대담에서 이중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같이 다녔어. 이중섭은 커서도 꼭 인력거꾼이 입고 다니는 것 같은 반코트 차림이었는데 주머니에 골동상에서 주워 모은 목각, 도자기 파편이 가득했지.” “이중섭이 왜 좋은 고 하니… 극한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그림 하는 태도를 이중섭이 보여 줬어. 아내와 애들 있는 일본에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고. 형제가 싸우는데 어디 피란 가 있느냐 이거야. 거기에 이중섭의 드라마가 있는 거야. 이중섭의 포인트는‘반 커머셜리즘’이야. 누구한테 보이려고 하는 생각도 없이 그냥 그렸다고.” “이중섭 주검을 발견한 게 나야. 적십자 병원에 만나러 가니까 없어. 시체실에 있어. 친구들한테 알렸어. 20명이 모여 홍제동서 화장했지. 내가 그때 잡지에 글을 썼어. “큰 브러시로 좋은 캔버스에 그리지 않았다고 이중섭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은박지 골필화, 데생으로 6·25 동란이라는 리얼리티를 누구보다 더 생생하게 대변했다” 주7) 이에 대해 필자가 쓴 글이 「김병기 선생과 오상길 선생의 대담을 읽고」이다.
38 no image ‘간송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을 다녀와서
소나무
4613 2007-06-05
‘간송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을 다녀와서 1 1. 5월 21일부터 간송미술관에서 ‘간송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이 열리고 있다.(전시기간은 6월 4일까지임) 간송 미술관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1906-62)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10만석의 사재를 털어 세운 사설 미술관이다.(처음 명칭은 ‘보화각’임) 간송미술관에서의 전시회는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하는 것이 특색이다. 그만큼 간송미술관은 우리 전통 문화유산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컬렉션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달리 유례가 없다. 간송미술관이 이러한 문화유산들을 소장하기까지는 우리 문화에 대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간송 선생의 안목 때문에 가능했으며, 한 사람의 힘으로 지금은 간송미술관이 우리 문화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 90년 초만 하더라도 간송미술관에 가면 관람객들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이번 전시회 개관 첫날, 전시를 보기 위해 줄 서서 한참동안 기다려야 했다. 이제 간송미술관도 꽤나 세간에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간송미술관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며, 심지어 미대에 다니는 대학생들 중에도 그런 학생들이 대다수다. 수많은 미대생들이 대학 실기실에서 헛짓’하면서 젊음을 허비하고 있는 것도 제대로 된 출발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고유한 문화의 가치는 자신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며, 간송미술관에서 자신의 진정한 출발점을 모색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지난 1990년 봄부터 금년 봄까지 한 차례를 빼놓고 빠짐없이 일년에 봄가을 두 차례 열리는 전시회를 늘 보아왔지만, 금년은 특별히 의미를 갖는 전시회다. 이번 특별대전에 나온 작품들은 간송 탄신 100돌에 맞추어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대표하는 100점이 출품되었으며, 국보가 12점, 보물이 10점이다. 그림, 도자기, 글씨, 전적, 불상 등 각 부문별 대표성을 갖는 작품이 출품된 것이다. 지난 35년 동안 개인, 유파, 시대, 국적별로 꾸린 예순 아홉 번 전시회를 거치며 그 중에서도 선별해서 뽑았으니 한국 고미술의 정수가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다. 이 중에서도 그 상징성에서나 후대에 미친 영향력 면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문화유산은 단연 국보 70호인 ‘훈민정음(초간본)’을 꼽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문화의 고유성과 우수성을 드러내는 예술작품으로는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와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가을 금강산을 한데 합쳐 살펴보다)과《해악전신첩》, 추사 김정희의 대작 글씨인 명선(茗禪: 차 마시며 선정에 들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신윤복의 <미인도>와 《혜원전신첩 * 단오날 여인들의 풍속을 그린 <단오풍정>은 이 혜원전신첩 중의 한 그림임》그리고 국보 68호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도 간송미술관 소장품 중 간판급 작품이다. 나는 대학에서 서양화(지금은 회화과로 명칭이 변경됨)를 전공했으며 당연히 재학 중에는 주로 유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90년대 초반 간송미술관에서 겸재 정선의 그림과 추사의 글씨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이 후 나는 미술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즉, 그 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겸재와 추사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깐깐하면서도 당당하고, 대범한 여유가 있으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우수성에 눈 뜰 수 있었다. 특히 도자기와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그러했으며, 겸재 그림의 경우, 겸재가 직접 그린 곳들을 답사하며 진경산수화의 특성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민족주의적 틀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 식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근대 이성으로부터 출발하는 현대 사상과 마르셀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에 대해서도 다시 공부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오히려 우리 고유성의 독자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나는 20세기 우리 근현대미술사가 거시적 맥락에서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는 역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3. 지난 2004년 봄에 간송미술관에서 <대겸재전>이 열렸을 때도 나는 이에 대한 글을 써서 미술판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다. 그때 그 글을 쓴 주된 까닭도 미대생들이 읽어보고 꼭 가보라는 뜻에서였다. 현재 한국의 대다수 미술대학에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으며. 더 큰 문제는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대다수가 이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쓴 주된 이유도 이 글을 읽은 미대생들이 꼭 간송미술관에 가 보았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살아갈수록 절감하는 것은 ‘나’란 개체의 유한성과 이와 대비되는 ‘역사’의 장구함이다.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하는 참된 가치의 진정성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비로소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자연체험과 문화체험, 즉 세상과 사물, 인간과 사회 ․ 문화에 대한 맑은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이런 차원에서 미대생 뿐 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번 ‘간송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을 통해 과연 예술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지 눈뜨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06년 5월 22일 도 병 훈(작가)
37 no image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NGO 발족을 앞두고
소나무
4843 2007-06-05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NGO 발족을 앞두고 1. 우리의 현대사를 여전히 진보와 보수, 혹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의 역사로 보는 이들이 있다. 이야말로 역사를 도식적인 관념의 틀로 보았던 헤겔식의 변증법 논리이며, 이는 역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예술계의 쟁점이 된, 지금도 암묵적으로는 양상을 달리하여 지속되는 이른바 ‘참여’와 ‘순수’의 해묵은 논쟁도 결국 특정한 이념으로 재단하는 흑백 논리인 셈이다. 오히려 이념 과잉인 자들과 이념이 부재한(무지한) 사람들의 대립과 갈등의 연속, 그로 인한 혼돈과 혼란이 인간의 역사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급속한 경제적 성장이라는 유례없는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내면적으로는 ‘반목과 불신의 장’이 되어 버렸으며, 우리 문화예술계도 반목과 불신, 그리고 대립의 역사로 점철되어왔다. 현 정부 들어서도 이른바 주로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 혹은 이념적 표현의 수단으로 예술을 도구화해온 몇 몇 사람들이 정치권의 비호 아래 문화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예술위원회, 그리고 지자체 등을 장악하여 과거 자신들이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던 세력들보다 더한 배타적 독선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군부독재시절 민주화 투쟁하듯 여전히 오로지 자신들만이 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오만과 편견으로 미술계의 다양한 실상을 태연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몇몇 인사들이 자신들만의 이념적 기준과 잣대로, 또한 은폐된 의사결정구조를 통해 대다수 문화예술인들이 납득할 수 없는 불합리한 결정을 하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공공재원을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단체들에만 극히 편향적으로 집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문화예술계는 여전히 학연과 지연, 그리고 이념적 지향성을 근거로 정치적 권력화를 기도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무기력하면서도 냉소적인 방관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 결과 우리 문화예술계는 저급한 상업주의 문화의 만연, 예술정책의 혼선을 초래하는 등 극심한 병폐를 드러내고 있다. 결국 문화예술계를 피폐화시키는 주요 원인은 내부에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기현상은 비평가들이나 큐레이터, 미술행정가, 미학자나 미술사학자 등 많은 사이비 전문가 집단이 미술계 현안들을 아랑곳 않은 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비윤리적 작태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2. 이에 지난 수 십 년간 척박한 현실을 감내하면서도 한결같이 소신을 견지해온 일군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우리 문화예술계의 산적한 난제들을 해결하는 단체 모임을 결성하고자 한다. 현 상황에 대해 ‘우환의식’을 갖고 하나의 새로운 기구를 발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는 갈수록 더 혼탁해지는 우리 문화예술계의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이 시대의 문화지식인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책무의식이다. 이제 우리는 이 좁은 땅 안에서도 서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 서로 헐뜯는 구태와 악습에서 벗어나, 문화와 예술이 지닌 진정한 힘과 가치를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노력을 제고시킬 제도와 정책을 먼저 합리적으로 재정비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즉 어디까지나 투명하고도 공정한 합리적 절차에 따라 비판적으로 견제함으로써 예술본연의 순정한 가치회복은 물론 문화예술계도 생산성을 지닌 영역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임은 ‘자기비판과 내부 견제기능’을 갖춘 건강한 조직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에 새로 출범하게 될 시민 단체는 화단의 최고 원로로서 살아있는 근현대미술사나 다름없는 김병기 선생부터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신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계 인사들과 예술을 애호하는 각계각층의 전문인들을 총망라하는 비정치적, 비영리적 모임이다. 즉 학연 지연 등을 근거로 해서 계파를 형성하는 구태를 벗고 진정한 비판정신과 전문성으로 현실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먼저 기폭점이 되는 셈이지만, 뜻을 같이 하는 문화예술인들은 다함께 우리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이데올로기화된 예술개념의 경직되고 완강한 틀에서 벗어나 예술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심도 있게 접근하는 담론 생산의 장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겸재 정선의 ‘클리나멘’하면서도 ‘강경명정’한 붓질처럼, 해학적이고도 해맑은 여유와 기품이 넘치는 김홍도의 그림처럼, 추사 김정희의 도도하고도 청고한 글씨처럼, 마르셀 뒤샹이 기성제품인 <샘>과 복제된 모나리자를 통해 제시한 ‘파천황’의 예술처럼 우리시대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예술언어와 문법을 생성하고자 하며, 이로써 삶의 지평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예술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건강한 노력으로 얻어지는 컨센서스와 성과들은 뜻을 함께 하는 모든 문화예술인들과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로 구축되어 갈 것이다. 3. 어떻게 살든 자신의 그릇만큼 채우고 비우는 것이 삶이지만, 무엇보다 그저 시니컬한 조소나 하면서 방관하는 니힐리즘만큼 나쁜 것은 없다. 다수의 방관과 체념이 소수의 오만을 만들고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한시대의 지표를 흐리게 하고, 결국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황량한 벌판에서 역사와 생生을 배반하는지도 모른 채 더러 무리지어 짖어대는 개들이 있다 해도, 동일화의 강제로 인해 순응의 윤리와 무기력함이 내재화되어 피폐화한 한국미술계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제 뜻있는 자는 모두 다함께 나서야 할 때다. 지금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있지 않은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저 아름다운 5월의 나무들처럼. 깊은 땅 속 어둠에 갇힌 별 빛을 캐는 대지의 점성술사 광부처럼. 2006년 5월 11일 도 병 훈(작가)
36 no image 예술위원회에 대한 민원과 관련, 일부 지각없는 이들의 작태에 대해
소나무
4318 2007-06-05
예술위원회에 대한 민원과 관련, 일부 지각없는 이들의 작태에 대해 최근 문화예술 위원회 기금 및 예산집행과 관련해서 제기된 민원들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특정인 패밀리’의 불순한 음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 양 매도하고 비아냥거림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제기된 민원들은 문광부 산하기관인 문화예술 위원회에서 미술계 전체의 실상을 외면한 채 편중되고 또 불투명하게 일을 집행하는 데 대한 물음이자 문제 제기이다. 민주 사회에서는 어떤 사안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민원을 제기할 수 있으며, 이는 정당한 권리이다. 이번 민원은 수천억의 막대한 문화예산을 편중되지 않게 좀 더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책정, 집행하자는 ‘공론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들은 공론화를 통해서만이 바르게 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 미술계는 이러한 공론화 기능이 미약해서 권력지향적인 몇몇 사람들만이 미술계를 좌지우지해왔다. 다시 말해 미술계의 잘못된 관행은 몇몇 소수자들의 전횡에 대해 나머지 미술인들이 수수방관했기 때문에 자초한 일이다. 요컨대 대다수 미술인들의 무기력함이 오늘날 미술계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번 '문진기금'과 관련한 민원제기는 미술계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신호탄이었으며, 이번 민원 제기도 지난 문진기금 때처럼 불의와 잘못된 관행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차원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러한 진정성을 볼 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잘못된 선입견으로 특정인을 매도하고, 또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무슨 불순한 집단처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간다.”는 간단한 말도 ‘나’라는 주체에 관점을 두는 사고자도 있고 ‘간다’는 행위, 또는 과정에 비중을 두는 사고자도 있다. ‘나’란 주체가 있어 간다고 생각하는 자가 전자라면 ‘가는’ 행위 속에 ‘나’가 한시적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관점이 후자의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특정인’을 겨냥하여 ‘비난’하는 것과 특정인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비판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더 투명하고 공정한, 나아가서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행위의 진정성 여부를 분별할 수 있는 지각도 근거도 없이 ‘특정인’을 마구 비난하는 것은 감정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존재’에 대해 자신의 관점이 전제된 선입견으로는 역동적인 행위(과정) 속에서 존재성이 한시적으로 지속되는 삶을 직시할 수 없다. ‘과정’이나 ‘행위’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편견으로 규정하는 대적적 사고는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세계의 특성상 실상을 왜곡하게 되고 나아가 갈등과 분쟁만 조장한다는 것이다. ‘존재’를 넘어선 ‘생성’적 관점에서 개인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개체적 존재’를 넘어선 그물 (網)같은 존재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회가 나를, 내가 사회를 형성한다. 따라서 내가 곧 사회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 곪아 있는 환부가 있다면 도려내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환부로 인해 사회 전체가 병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질병의 원인이 몇 몇 특정인의 불합리한 판단과 선택이라면 이러한 특정인은 당연히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특정인’이란 존재가 무슨 악의 실체 여서가 아니라 그 특정인의 불합리한 판단과 선택이 야기할 수 있는 병폐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민원들이 제기한 문제의 실상은 머지않은 시점에 그 전말이 소상히 밝혀지겠지만, 혹자들이 오해하듯 단지 특정인을 매도하기 위해, 또 ‘파이’를 골고루 분배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은 지 그른지의 진정성은 그것이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 행위인가에 따라 확보될 뿐이다. 즉 대의명분은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자 하는 지향성의 여부에 달려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비판의 참된 기능은 무엇보다 특정인 중심으로 어떤 사안들이 편향적으로 결정되는 것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데 있다. 이글은 결코 몇몇 특정인을 옹호하거나, 또는 비난하고자 쓴 것이 아니다. 미리 편을 갈라놓고 이번 민원을 사시로 보고 헐뜯는 것은 쟁점만을 희석시킬 뿐이다. 물론 문제된 사안의 ‘진정성’에 대해 논리적 근거를 갖고 논증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의 초점은 생산적인 미술판을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번 민원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단정적으로 섣불리 비난을 하는 자들과 소모적인 논쟁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미술계의 물을 흐리는 몇몇 미꾸라지들의 작태를 우려할 뿐이다. 2006년 5월 2일 도 병 훈 (작가)
Selected no image 현대미술가, '매미'의 세계에 사는 '대붕'
소나무
5499 2007-06-05
현대미술가, ‘매미’의 세계에 사는 ‘대붕’ 1. 북쪽 깊고 어두운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 천 리 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은 너무나 커서 등짝을 가로 질러 몇 천 리나 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솟아올라 날아갈 때는 그 날개가 하늘을 덮는 구름과 같다.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우화로서 일상적 세계의 관념의 틀과 이를 넘어선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의도이다. 어둠 속에 있는 물고기 ‘곤’은 미망에 갇힌 상태를 나타낸다. 이 곤에게는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으며, 그 능력이 실현된 것이 대자유의 새인 ‘붕’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자의 사유는 변신의 사유이다. 즉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사유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일정한 동일성을 지닌 존재들의 세계가 아니라 범주의 벽을 허물고 다른 존재로 화하려는 사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붕이 날아간 하늘은 소유유의 경지를 나타낸 말로 그 절대 자유의 경지가 대붕이 날아간 하늘이다. ‘소요유’란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이다. ‘유(遊)’란 자기가 꿈꾸는 곳이면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 갈 수 있는 마음의 큰 자유를 가리킨다. ‘소요’는 ‘보행’과 달리 목적지가 없다. 소요 그자체가 목적이다. 춤처럼 동작 그자체가 목적이지만 춤과 다른 점은 소요하는 동안 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자들, 다시 말해 수동적인 삶을 사는 인간들은 이러한 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변신을 꿈꾸고 실천하는 인간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이「소요유」에서도 매미와 메까치가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야 기껏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위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고, 그나마 못 올라 다시 땅에 떨어지는데 도대체 어째서 9만 리나 날아올라 남녘으로 가겠는가? 메미와 메까치의 생각은 다름아닌 보통사람들의 생각인 셈이다. 2. 우리 미술계에도 매미와 메까치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틀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인간들이다. 사물들을 가르는 기호와 인식의 틀, 제도와 권력이 부여하는 자리들, 이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매미와 메까치들이다. 즉 제도와 권력의 중심에서 살면서 매미나 메까치의 세계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며, 이는 상당히 알려진 학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님을 느낄 때가 많다. 얼마 전 한국의 원로 미술사학자로 꼽히며 오랫동안 서울대에서 재직해 온 O 교수(*하바드 대학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원로 미술사학자로서 지금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모 대학의 석좌교수이다) 가 석남 이경성 미수 기념 논총집에서 발표한 ‘어떤 현대미술이 한국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을까’란 논문에서 “어찌하여 서구미술의 아류는 넘치는데 현대판 한국적 풍속화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가. 작가들이 시대성을 너무 경시하기 때문 아닐까”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O 교수는 한국미술사에 남을 현대작가를 창의성, 한국성, 대표성, 시대성, 기타 사항 등 다섯 가지 기준과 원칙을 들고 그 잣대에 들어맞는 작가로 유화 부문은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유영국을, 수묵산수화에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채색 인물화에 김은호, 박생광을 꼽았다고 한다. 이른바 역사적 맥락과 관점을 강조한 잣대와 기준으로 이렇게 선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O 교수의 언급 중 서구 미술의 아류가 넘친다는 관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미술사에 남을 현대작가를 선정하는 ‘기준’과 ‘원칙’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당연히 작가 선정도 잘못되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O 교수의 기준과 원칙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현대예술의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장르 틀로 이들 작가들을 평가하는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틀로 규정하는 것 때문에도 위의 작가들을 현대 미술 작가로 꼽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대미술은 ‘현대성’에 대한 화두를 전제로 한다. 즉 현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상과 특성으로 현대미술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O 교수가 언급한 위의 작가 중 어느 누구도 ‘현대성’이란 터널을 통과한 작가는 없으며, 그러므로 이들은 다만 전통과 현대 사이에 살았던 과도기적 작가일 뿐이다. 현대 이전의 미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 회의를 통해 그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 현대미술임에도,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가 아직도 이처럼 구태의연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로 이러한 논의 수준이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 미술의 수준과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물론 그간 척박한 한국전통미술사 분야에서 남긴 O 교수의 선구적 업적을 과소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인품도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다) 3.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참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현대 미술가들은 바로 대붕의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비록 협소하지만 창공은 무한하며, 그래서 커다란 대붕들이 날 수 있다. 다만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오르는 것이 고작인 매미들에게는 대붕의 존재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대붕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인간세의 통념적 틀을 넘어선 인간을 뜻한다. 대붕도 엄연히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대붕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줄 모르는 자만이 대붕들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한평생을 살아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위에 오르는 매미나 메까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6년 2월 20일 오후 8시 43분에
34 no image 나의 드로잉 <산은 산, 물은 물>에 대해
소나무
5677 2007-06-05
나의 드로잉 에 대해 1. 이번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 전에 출품한 은 나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초미니(?) 드로잉이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兮 水是水兮)’이란 말은 지난 1980년대 초, 수행시절 8년 동안 한번도 드러눕지 않고 잠도 앉은 채로 잤다는, 즉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한 성철 스님이 종정 추대식에서 한 법문의 한 구절로, 나는 당시 이 말에서 성철스님의 엄청난 카리스마와 당당한 기백을 느꼈다. 당시 해발 850m에 자리 잡은 가야산 백련암에 머물며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면서 자신을 만나려면 삼천 배를 하고 와야 한다는 조건(*사실은 자신을 찾아오지 말고 부처를 찾으라는 뜻이었음)을 달아 속인들은 물론 승려들조차 친견이 거의 불가능한 존재였던 성철 스님이 말한 원문은 이렇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것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후에 어느 인터뷰에서 성철 스님은 이 뒷 구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해와 달과 별이 일시에 암흑이구나. 만약 이 가운데 깊은 뜻을 알고자 한다면 불 속의 나무 말(木馬)이 걸음걸음 가는 도다.) 2.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말은 원래 중국의 청원(靑原)선사가 한 말이다. 선가(禪家)에 전해오는 ‘산은 산, 물은 물’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山不是山 水不是水)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山是水 水是山)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위의 구절에 대해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어느 선객의 이 네 구절은 삶이 결국 어린애다(childishness)에서 어린애답다(childlikeness)로, 상식에서 상식으로, 순박에서 순박으로, 철학에서 예술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전달해준다. 기나긴 구운몽도 현실로 되돌아왔으며, 백 척이나 휘엉청 거리는 긴 대나무 끝에 달랑달랑 매달렸던 선객은 한 발자국을 더 짚고(本來地, 本來面目)땅으로 떨어졌다.(百尺竿頭 須進一步) 인간이 의식을 가졌을 때 그 의식은 자기의 자발성에 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습과 타성의 틀에 의하여 틀지어진 것이었으며, 그 때 보인 산과 물은 소박한 모습 그대로의 산과 물이었다.(소박실재론naive realism의 단계) 그러나 인간은 문제 상황 속에서 자발적 의식을 갖게 되고 그러한 의식 속에서 어떤 아포리아(aporia: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용어로 길이 없다는 뜻)에 봉착했을 때 이미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여기서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고 인간의 탐구는 시작된다. 이러한 탐구는 계속 인간에게 문제 상황을 안겨주고 인간은 곤혹을 해소시켜 줄 하나님이 안 계셨기에 산과 물 그 자체로 해결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그는 산이 물이 되어버리고 물이 산이 되어버리는 무차별의 공상(空相)으로 해탈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그 웅혼한 무차별의 경지에서 또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현실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여기에 동양적 인간 비극의 또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동양인에 있어서는 하늘나라(Kingdom of God)는 산이요 물이다. 산과 물, 그것이이야마로 알파요 오메가이며 거기에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는 없다. 이 세계의 저주에서 이 세계의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From the contempt upon this world to the appreciation of this world)대자대비의 현실긍정이야말로 동양의 지고한 예술경계다.((김용옥, 「“동양적”이란 의미」,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 통나무, )325-326 쪽에서 인용)) 위의 구절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구절은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차원이다. 즉 왜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가?라는 것이다. 이는 연기의 ‘덧없음’을 보면서도 그러한 덧없음을 세상의 ‘언어’로는 다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네 번째 차원은 무상성, 즉 ‘유동성’이 전제된 말이며, 첫 번째 차원, 즉 소박실재론과는 다른 차원의 ‘산은 산, 물은 물’이다. 결국 이 네번째의 '산은 산 물은 물'은 우리 일상의 언어(기호)로 표현된 산과 물이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기호를 넘어선 산과 물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을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의 망, 즉 관계된 전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절은 관점에 따라서 허무적 세계관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만 불교 사상을 이해할 경우 자칫 치열한 실존적 현실인식이 결여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산은 산 물은 물'은 인도 불교의 본래적 측면보다 중국화된(한자는 인도의 고유언어와 그 언어적 바탕이 다르므로)화두이다. 풍토적 지역적 특성에 따라 언어적 특성이 다르며, 언어적 특성에 따라 '인식의 틀'이 다른 것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서양에 풍경화가 있고 동양에 산수화가 있는 것은 그 세계관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3. 내가 이번에 출품한 은 그 어떤 말로도 규정할 수 없는 세계를 '산과 물'로 규정한 관념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산과 물의 이미지를 나의 기운과 농담적 물성으로 표현한 드로잉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체험했던 산의 이미지와 유장한 강의 흐름을 생동하는 기운의 선과 짙고 옅은 변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절벽 위 노송의 한 가지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길게 이어지는 능선처럼 나에게 있어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상은 언제나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진 우리 산천 특유의 선적 리듬이다. 이는 가녀리고 애상적인 선이 아닌 우리의 역사를 이어 온 꼿꼿한 정신성의 표상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감성이 이 땅 특유의 문화적 전통으로 이어져 온 맑으면서도 당당한 기백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2006년 2월 10일
33 no image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전 소감
소나무
4825 2007-06-05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전 소감 1. 지난 1월 25일부터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전이 인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본 전시회는 기획자가 기획의 변에서 밝히고 있듯,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전람회와 달리 ‘단지 작품을 늘어놓고 보여주는 행사가 아니다.’ 따라서 전람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관람자들에게도 그저 ‘구경거리’가 아니다. 이번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 전은 필자를 포함한 다소 오래된(?) 작가들과 갓 대학을 졸업한 작가들까지 세대를 초월하여 함께 한 전람회다. 이는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란 현대예술의 본원적인 문제에 대해 ‘삶과 예술’을 매개로 하여 서로 깊이 대화를 나누고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란 전시 주제는 근본적으로 ‘리얼리티’의 문제를 제기한다. 리얼리티는 과학과 철학과 예술 등 인간의 삶을 변형시키는 세 가지 주요 역능의 차원에서 각기 그 영역적 특성은 다르지만 삶의 본원적인 화두이다. 이 세 가지 영역 중에서 사유의 정향들(orientations)이나 방향을 생산하는 역능은 물론 철학의 몫이었다. 먼저 표면은 ‘나타난 것(appearance)’, 즉 현상(phenomena)을 말한다. 현상의 현(現)은 나타난 모습, 즉 드러난 모습이다. 그리고 ‘리얼리티(reality)’, 즉 ‘실제로 있는 것’은 ‘실재(實在)’ 혹은 ‘본체(noumena)’ 혹은 ‘실체(substance)’다. ‘진리(Truth)’란 이 현상과 실체 사이의 합치 관계, 즉 상응 관계를 뜻한다.(Truth is conformation of Appearance to Reality) 그래서 유사 이래 특히 근대 이후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 진리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밝혀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성으로 파악하는 진리, 즉 실체적 진리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한다. 엄밀히 말해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True)"의 리(理 ; 이성 혹은 이기 이(일)원론 할 때의 ‘리’로서 원래 불교의 인식론에 입각한 한문 번역 용어인데 일본에서 영어의 truth, 즉 true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을 번역하면서 ‘진’과 함께 ‘진리’로 번역함)를 부정한다. 사실 ‘진(짜)’도 ‘가(짜)’, 즉 “false”의 상대어로서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적 실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인 세계의 실상으로 인해 유동적이고 ‘생성’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 즉 리얼리티 역시 언어적 기호 체계로는 결코 규정할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현대예술(미술)은 ‘리얼리티’란 철학적인 개념 망을 넘어선 리얼리티(진실)를 추구한다. 참된 예술은 언어적 기호를 넘어선 메타적 표현으로 지각적 감응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도 그 전모는 알 수 없는 어떠한 세계다. 시각이든 촉각이든 우리의 감각 기관은 ‘진’에 대해 지각적으로만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근본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욕망의 ‘변이’, 즉 진화의 결과이다. 가장 정교한 감각기관인 눈도 마찬가지다. ((이는 사진기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가령 디지털 카메라는 ‘화소’를 통해서 실물대상을 영상으로 나타나게(옮길 寫, 비출 寫)한다. 따라서 화소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도 인간의 눈이 진화해온 과정을 기계적인 진화로 닮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어떤 대상을 선명하게 본다고, 가령 시력이 2.0이라고 해서 어떤 대상의 리얼리티, 즉 ‘참’을 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그것은 나의 몸의 감각기관 중 안구 속에 내장된 레티나(망막)의 시신경 세포에 나타나는 “사건의 과정(process of events)”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건이 기만적(deceptive)일 수 있음은 평소에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예컨대 우리 눈에는 멀리 있는 대상이 흐릿하고 작게 보이지만 ‘실재(?)’는 그렇지 않지 않는가?) 많은 근현대의 철학자들이 미학, 즉 아름다움에 대한 학문적 탐색의 글을 남겼던 것은 ‘아름다움’이 진리보다 더 본원적이면서도 더 넓은 영역과 관계있는 어떤 감응의 체계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학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칸트에 이르러 아름다움에 대한 객관주의가 깨어지면서 아름다움’도 인식자의 주체적 심미적 ‘판단’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면서부터 이다. 현대미술과 이전의 미술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물론 근대 이전의 모든 미술이 이러한 객관주의적 미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 단적인 예로 ‘풍류도’가 깃들어 있는 전통 문인화나 우리의 도자기 등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서양의 고대나 중세의 일부 회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그 시대적 한계로 인해 뒤샹의 ‘소변기’처럼 미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이루는 획기적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리얼리티의 문제와 ‘아름다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표면적 이미지 이외에 아무런 것도 볼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으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짜와 가짜의 결정적 차이는 ‘자신과 세상을 기만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자신이 남을 기만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진짜와 가짜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실로 큰 차이가 있다. 3. 먼저 사혜정의 영상작업은 거울 위에 비친 팔뚝에 칼을 대려는 장면과,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라는 모순 된 명제를 정색을 한 채 진지하게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참과 거짓 문제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번 전시회의 기획자이기도 한 오상길의 영상 작업은 일견 위압적인 표정을 한 이미지로 “앞으로” “뒤로” 라는 군대식 명령어를 반대로 들리게 하고, 또 그 말을 흉내 내어 다시 뒤집는 이중의 교란을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적 감각과 인식체계, 그리고 인간 사회의 제도적 권력, 나아가 우리 삶의 실상을 근원적으로 자각 ․ 성찰하게 한다. 김성배는 직접 히말라야에서 가져온 암모나이트 화석과 흑 거울을 양쪽 벽면에 걸어놓고 바로 그러한 사물들과 그 사이에 지나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관객이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관객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에 출품된 거의 모든 작업이 이러한 측면이 없지 않다) 김효연은 자신의 얼굴을 붉게 변하게 하여 관객들을 바라보는 영상작업과 함께,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세계를 그 창문에다 그림으로써 보이는 것과 표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업을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매달아 놓았다. 김도희는 겸재 정선의 를 고운 사포에다 손톱으로 그린 와, 한그루의 능수 버들나무를 시점을 달리하여 사진으로 찍어 이 사진들을 연결하여 빠르게 재생함으로써 마치 바람 부는 날처럼 연출한 작업을 제시하고 있다.(*김도희는 오픈 날 비닐을 덮어쓴 채 명상하는 자세로 호흡하는 퍼포먼스를 약 1시간 동얀 진행하기도 했다.) 노승복은 안구의 각막과 수정체와의 사이에 있는 원반 모양의 부분인 홍채(虹彩) 부분을 확대한(즉 신체 특정 부위의 극미한 움직임을 포착한)이미지와 소리를 합성, 윤상 및 방사상으로 뻗은 근 섬유와 가운데 검은 동공을 각각 원초적 생명체의 미시적 움직임과 거대한 우주 세계의 블랙홀처럼 보이게 한 영상작업을 보여준다. 김찬동은 사회 정치적 상황을 환기하는 방독면을 쓴 이미지 사이로 화학적 기호와 문학적 서사를 조합한 후 그 앞바닥엔 알약을 흩뿌려 놓은 작업으로 이 시대의 예술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삶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복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난 해 캔버스 벗겨내기 작업으로 개인전을 한 최선의 경우는 표면적으로는 극히 단순한 캔버스 두 개를 걸어 놓았지만 각각 ‘동냥젖’과 ‘폐유’로 70년대의 단색조 회화를 조롱하면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표면적으로는 극히 평범하지만 그 ‘리얼리티’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안원찬은 낡아 가는 판자촌의 문짝들과 창틀 등을 벽면에 가득 펼쳐놓음으로서 삶의 공간과 사물의 시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유지숙은 아침에 일어나자 바로 자고 일어난 맨 얼굴을 10년간 그것도 1초 동안만 찍고 있는 이미지, 즉 10year self-portrait을 빠르게 중첩시키는 영상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이태한은 옵티칼한 속옷을 입은 몸의 이미지와 숲 속 이미지와 소리를 각각 앞뒷면 모니터로 함께 보여줌으로써 역시 ‘리얼리티’에 대한 감각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양혁진은 빵을 ‘벽면 설치’한 작업과 함께 우연적 붓질을 중첩시켜 그 흔적에 따라 새로운 이미지를 표현하는 회화를, 그리고 정승채는 그리는 붓을 혓바닥으로 핥는 영상작업과 황금캔버스 등을 출품하면서 미술과 사회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고자 한다. 육순호는 사건 현장 보존을 위한 ‘테두리 그림’을 차용 표현하여 회화의 재현 문제와 보는 사람의 관념적 ․ 심리적 반응에 주목하는 사진 작업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일견 고지도적 이미지를 빌려 푸른색의 농담과 기운으로 광목천에다 생성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작고(?) 소박한 드로잉 작업을 출품했다. 4. 이번 전람회는 제각기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 리얼리티에 대한 탐색의 과정이 곧 작가의 삶임을 공유하고자 하는 교감의 장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와 ‘과정’ 속에서 예술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하고 삶의 향기를 느낄 뿐, 다른 어떠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작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작품은 어디까지나 삶에 대한 작가들 저마다의 정신적 매개체일 뿐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 작품의 가치가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 실체적 특성에 있다고 고집한다면 평생 헛짓으로 여러 순진한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속이는 자일 뿐 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예술가에 있어 리얼리티의 문제는 상호 소통의 가능성을 부단히 확장하려는 예술적 특성과 가치에 대한 감응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좀 더 치열하면서도 조금 더 깊고 넓게 살고자 하는 삶의 자세로부터 비롯되는 자각의 과정이자 소산이다. 예술을 매개로 하여 인간적 교감을 추구하는 과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세상에 눈 뜨게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과 나의 관계도 그 규정할 수 없는 리얼리티의 특성상 누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해 느끼고 판단하는 일방적 관계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말 “언제까지 팔짱 끼고서 미술품을 감상”(전시 참여 작가인 최선의 말임)’하려는가? 2006년 1월 27일, 광명에서 도 병 훈(작가)
32 no image 삼척의 죽서루와 그 주변을 본 소감
소나무
5230 2007-06-05
삼척의 죽서루와 그 주변을 본 소감 1. 지난 1월 15일, 삼척에 있는 죽서루(竹西樓, 보물 213호)를 보러 갔다. 90년대 후반부터 겸재가 그림을 그린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답사해온 나로서는 2006년 새해를 맞아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그린 곳을 답사하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것은 강원도 고성의 청간정(淸澗亭)을 빼고는 이제 겸재가 그린 실경은 거의 다 직접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금강산 중 내금강(內金剛) 일대를 제외하고는 겸재가 그림을 그린 거의 모든 곳을 답사하며 그의 그림과 실경을 대조해 보게 된 셈이다. 지금까지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그린 곳을 다녀본 결과, 유난히 인상적인 곳은 금강산 외금강(外金剛) 일대와 금강산 해금강(海金剛)의 삼일포, 서울의 인왕산 일대, 경북 평해의 월송정, 경북 영양의 입암, 그리고 겸재의 탐승각자(探勝刻字)가 새겨져 있는 경북 청하의 내연산 계곡이었다. 사실 이러한 곳은 대개 겸재가 유난히 한 소재를 여러 번 그린 곳이기도 하다. 2. 바닷가에 위치한 관동의 다른 누각과 달리 죽서루는 내륙의 강가 절벽 위 바위들 틈에 위치하고 있었다. 죽서루 주변은 역시 조선다운 정취를 풍기는 풍광이었다. 풍화작용으로 그 형상이 다양한 바위들이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누각이 절묘하게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제각기 높낮이가 다른 자연석이 주춧돌을 이루고 있어 죽서루의 기둥 길이는 제각기 달랐다. 또 누각도 월송정이나 망양정처럼 최근에 지은 신축 건물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건물이었다. 조선 후기 기호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이 현종 원년(1660년)에 이곳에 부임해 와 남긴 아래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죽서루 주변을 짐작할 수 있다. 오십천 물이 읍성 서쪽 석벽 아래에 이르러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며 수담(修潭)을 이루어 놓는다. 수담 위는 모두 절벽으로 된 높은 언덕인데 앞으로는 흰 자갈밭을 내려다보고 위는 넓은 평지다. (중략) 그 암벽 위에 누관(樓觀) 셋이 있으니 응벽헌(凝碧軒)이 가장 장려하여 진주관(眞珠觀)의 서헌(西軒)이 된다. 그 남쪽의 죽서루는 높고 시원하며 바람이 많고 또 그 남쪽이 연근당(燕謹堂)인데, 물이 이곳에 이르러 또 꺾이어 동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무성한 숲에 싸인 안개마을이 있고 그 밖은 두타산(頭陀山)인데, 바위 봉우리들이 산기운을 뽐내며 늘어서 있다. 응벽헌 서쪽 모퉁이에는 바위 벼랑을 따라 돌길이 나 있는데, 그 바위틈에는 요차가 많이 나 있고 암벽 사이로는 물새가 몰려들어 우짖으며 아래위로 날아다닌다....(*최완수 저,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86쪽에서 재인용) 3. 현재 남아 있는 겸재의 <죽서루도>는 그가 62세 때 그린 것이다. 겸재가 이곳 죽서루를 찾은 것은 영조 9년(1733년)부터 11년(1735년) 사이 청하현감 재직 시절이다. 이 시기에 겸재는 대표적인 진경시인이자 절친한 친구인 사천 이병연이 삼척 부사로 재임 중이어서 동해의 다른 승경과 마찬가지로 청하에서 가까운 이곳까지 찾아와 그렸다는 것이다. 겸재의 <죽서루도>는 죽서루 주변의 풍광을 강 건너편에서 그린 것으로 그림의 대부분은 절벽과 강물이 점유하며 누각은 상단 가운데에 조그마한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겸재는 이 <죽서루도>에서 죽서루 주위의 풍경을 바닷가에 위치한 관동명승들과 달리 소박한 필치로 그 분위기를 묘출하고 있다. 이를테면 낙산사 주위의 절벽이나 망양정 주변의 절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절벽을 그렸다. 이처럼 겸재는 그림의 소재나 관점에 따라 마치 다른 사람이 그린 것처럼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겸재는 하나의 소재를 그려도 그릴 때마다 시점과 준법을 달리해서 그렸지만, 또한 자연의 특색이 다르면 그 주변의 풍광도 이전의 그림과 다른 방식으로 그렸다. 이는 역시 겸재가 다양한 실경을 그리면서 그러한 ‘차이’에 주목했다는 것을 뜻한다. 4. 겸재의 <죽서루도>를 보면 현재의 모습과 그 주위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우선 죽서루만 건재할 뿐, 죽서루 좌우의 연경당과 응벽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서루 주변은 현대식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심지어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여러 건물들 중 동굴 탐사관은 서울랜드의 유럽의 성을 본뜬 건물들처럼 요란했다. 왜 하필이면 이곳에다 이런 요란한 모양의 건물들을 지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얄팍한 상혼만이 느껴졌다. 그래서 죽서루 주변을 둘러볼수록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죽서루 옆의 다리는 물론 앞의 현대식 건물들은 죽서루 주변의 풍광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리 위치도 절벽과 너무 가깝고 규모도 너무 거대하여 죽서루와 절벽을 왜소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죽서루를 의식한 듯 다리 난간을 죽서루 누각으로 모양과 대나무 형상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더욱 가관(?)이었다. 전통 누각은 건축학적으로 건물 자체만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각이란 그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각 주변의 풍광이 파괴되어 버린다면 누각은 그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바로 이 때문에 죽서루 주변은 가능한 한 인위적인 건축은 자제하되, 한다 해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래 지방자치제가 활성화 되면서 지방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려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이처럼 저열한 안목으로 인해 결국 주변 광경을 다 망쳐놓는 예가 허다하다. 이곳 죽서루 주변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겸재의 <죽서루도>는 역시 우리의 전통누각이 자연의 참모습을 자각하는 장소임을 알게 한다. 즉 ‘인위’와 ‘자연’의 절묘한 관계, 즉 우리 선조들 특유의 조화미를 알게 한다. 결국 죽서루의 참된 가치는 나무 한그루 바윗덩어리에 이르기까지 어디까지나 그 주변 풍광과의 관계에 있다. 사실 죽서루는 삼척을 대표하는 명승지다. 그러나 현대의 죽서루 주변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그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난개발식 현대식 건물이 죽서루의 가치를 형편없이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땅을 사는 현대의 인간들은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망각하여 훼손하는 결과만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겸재 그림은 물론 조선 백자 한 점에도 담겨 있는 그 깊고 깊은 선조들의 미적 가치들은 철저하게 단절되어 버렸음을, 이곳 죽서루에서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6년 1월 17일 새해 원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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