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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현
조회 수 : 2107
2016.08.22 (10:55:37)
[아리랑] – 12
-님 웨일즈의 [한국어판 서문] – 동녘출판사 간행(1984년-2016)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독자들에게”
올해 84세를 맞는 나는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37년, 그 당시 32세밖에 되지 않은 한 인물, 장래가 촉망되는 보기 드문 한 조선의 혁명가의 생애를 기록했던 연안 시절로 되돌아간다. 1937년 9월 엔안을 떠난 후로 우리 사이의 연락이 끊겼지만, 풍문에 의하면 그는 나와 만난 그 이듬해가 아니면 그 후에 죽었다고 한다.
1980년대였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소식이 들려왔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스파이들이 스탈린에 의해 모조리 처형되던 시절, 유럽이 혼란과 위험과 공포 속에 몸부림치던 시대에 김산이 소련에서 들어온 캉성(당시의 중국공산당 첩보기관장)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구구한 구설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이 이야기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님을 나에게 누누이 강조했을 뿐 아니라 그는 ‘스파이’와는 거리가 먼 사랑이었다. 마오쩌둥과 조선 사이의 협력관계를 만들기 위한 순수하고 소박한 목적으로 엔안 여행을 했다고 그는 말했다. 엔안 공산당은 조선인들이 독자적 조직을 갖는 데 동의하지 않았고, 중국에 체류하는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합류하기를 주장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엔안에 체류하고 있을 당시 일본은
나는 김산이 중국과 중국인들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의심스렵다. 1927년에서 1968년 죽기 전까지 중국을 떠나지 않았던 레위 엘리(Rewi Alley)는 언제나 “중국에서는 만사를 예측하고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천안문 사건이나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중국에서 일어날 때마다 매우 놀랍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엘리의 말을 되풀이 한다. 나는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난관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들의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지지한다.
김산은 자주 중국인들이 자기와 매우 다르다는 점에 놀라곤 했다. 1930년대에 그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나오자 베이징 공산당이 그를 축출해버렸다. 이때 그는 그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런 일을 각오했어야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공산당원이면 무조건 사형감이었으므로 공산당원들로서는 출옥한 인물이 누구고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일단 믿을 수 없었고 당연히 경계했다. 김산은 또한 한 조선인이 자신에 관한 거짓말과 험담을 하고 다니는 것에 분개하여 그를 죽일 생각까지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은 적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거짓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산에 대해 설명할 때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현대인’의 정신과 ‘현대인’의 심리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그의 영어 구사력은 아주 보잘것없었다. 그는 시제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와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대는 아무런 지장이나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독해에는 능통했으며 회합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대개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광둥, 1927, 패망, 조선인 300명 죽다. 물속의 소금.” 이런 식의 대화 후에는 으레 여기에 관련된 상세한 일들과 이 단어들이 말하려는 핵심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하루나 이틀을 여러 가지 질문으로 보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최선의 협력을 아끼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김산을 ‘참된 도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는 거짓과 허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거짓말 같은 것은 아애 해 본 적이 없었다.
제3세계는 ‘미래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3-4세기 동안 서양이 주도해온 문명과 문화에 만족하며 살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리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1938년에 나와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아주 훌륭한 ‘다리’를 궁리해 냈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경제나 사회제도와도 공존할 수 있고 사기업체나 국가와 개인의 공동소유 기업체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이른바 ‘공업합작운동’이라는 것인데, 이 운동이 중국에서 시작된 후 인도를 비롯하여 다른 나라에 확산, 보급되었다. 이 운동의 본 의미는 ‘함께 일하다’ 혹은 ‘팀워크’를 뜻한다.
1939년, 필리핀 바기오 컨트리 클럽(Baguio Country in Philippines) 에서 [아리랑]을 집필할 당시 세계는 혼돈과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939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일본은 그들이 부르짖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구조에 중국 외에도 극동의 여러 나라들을 추가하고 있었다. 해야할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만사 제쳐놓고 [아리랑] 집필에 전념했다. 당시와 같은 급박한 역사적 시기에 조선에 관한 책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양 공산주의자의 사고와 정신과 심리를 꿔뚫어 보게 하는 종류의 책으로서 [아리랑]은 유일한 지위를 차지했다. 특히 김산은 추종자가 아니라 천부적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로서 유망하고 훌륭한 모범적 인물이었다. 그 예로 펄 벅(Pearl S. Buck) 여사와 그녀의 남편 리처드 월슈(Richard Walsh)를 들 수 있다. 그들은 1941년에 [아리랑]을 출간했다. 당시 조선에 관한 최신 서적으로서 [아리랑]이 유행했고, 나의 태평양 관련 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자문인사들이 나와 접촉하였고, 나의 글을 올렸다는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후에 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서한에서 그는 나의 글을 통해 조선에 관해 알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시간을 내서 나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그는 에드가 스노에게 이미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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