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현
조회 수 : 1645
2016.08.18 (1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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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 6

 

   *앞선 글에서 [아리랑]의 일본판 [아리랑의 노래] 암파문고의 님.웨일즈가 쓴 [서문]을 전역 게재했었는데, 그 때 이 책의 해설의 글을 쓴 알본인, 尾村秀樹의 해설 일부를 인용한 바, 아래는 그것의 전문을 번역하여 게재한다.

 

      解說

 

    *한구절 앞서 인용분 생략

 

    김산의 길지 않는 생애(1903-38)와 조..중 삼국에 걸친 그의 足跡은, 조선의 항일민족해방투쟁(1910-45)이 불가피하게 입지 않으면 안되었던 국제적인 넓힘을, 어느 의미에서 전형적으로 체현하고 있으며, 결코 특수한 례외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신민지 통치는, 조선 안에서는 [독립] [민족해방]을 분명히 내 세웠던 활동에는 존립의 여지를 주지 안 했다. 그것이 조선민족해방투쟁을 불가피하게 국제성을 띠게 해준 첫째 원인이다.

 

      실제로, 日露戰爭. 日本의 侵略 한 가운데서 생을 부여 받은 조선인 김산은 3.1 운동으로 눈을 뜨게 되고, 동세대의 많은 청년들과 같은 사상적 軌跡을 밟으며, 勤學과 鬪爭의 場을 중국에서 구하고, 머지 않아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해 갔었다. 그럼으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이념 아래, 코민테른 6회대회(1928)에서 확인한 바 [일국일당의 원칙] 그리고 [現住國 黨 加入]의 방침에 따라 중국혁명에 깊이 몸을 던지게 되어, 얼마 가지 않아서, 7회대회(1935)의 반팟쇼인민전선방침에로의 전환에 따라 중국의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 속으로 몸을 던지면서도 조선민족해방의 전선의 구축에도 진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그래서 반 파시즘 진영에 선 진실로 민주주의적으로 살아 가려고 했던 진보적인 미국인과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1925-28)이 존재하지 못하게 된 이후, 在中.在日을 불문하고 많은 조선인 마르크스.-닌주의자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로 몸을 던지는 일이야 말로 자민족의 해방의 첩경임을 지각하고, 실제로 현재국당에 가입하여 그 나라의 혁명을 위해 투쟁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김산의 투쟁장소가 되었던 중국의 혁명운동사의 측면에서도 아주 귀중한 증언인 동시에 조선민족해방투쟁의 精神史적 軌跡의 둘도 없는 증언이 되며 더욱이 누구나가 모두 쉽게 느끼게 되듯이 [혁명의 현장에서 혁명의 당사자가 고백한 매우 귀중한 혁명의 기록]으로써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安藤次郞씨에 의한 일본에서의 初譯부터 이 책에 매료되어 조선인의 이미지에 대해서 눈에서 인이 떨어저 나가는 느낌을 경험한 우리들은 역사가로써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를 이것 저것 추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산이 본명이 아니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정도 내용이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인물이 흔치 안는 것을 전제로, 뒤에 가서 연안에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저명한 인물, 최창익이나 김두봉의 이름이 오르 내리기도 한다. 그 활동경력이 너무나도 화려함으로 복수의 인물의 합성설도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들 추측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여태 어떤 상세한 통사서술에도 소개되지 못한 장지락이란 인물이 실재하였던 것이 浮上해 나온다. 김산이 장지락임이 확정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웨일즈 자신의 보조적 증언과 사진제공, 그리고 遺子 고영광씨를 위시하여 근친자의 증언들을 포함한 중국문헌의 출현이었다. 사실관계 역시 줄거리는 대부분 정확하고, .웨일즈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장지락이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충실히 기록한 것으로 문헌사료와의 대비에 의해서도 기본적으로 확인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가명을 쓴 사람들의 이름.지명등이 있고,傳文과 실체험의 혼동이나 년대의 오기가 얼마간 있어나 이것들을 수정한다면, 이 책은 그대로 한 사람의 혁명가의 생활과 투쟁의 진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타의 제 문헌을 종합하여 여기서는 확실히 모르는 부분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장지락의 약력을 찾아 가 본다.

 

     張志樂은 본문에 보여주웠던 바와 같이, 1905년3월10, 조선서북부의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연안시대에는 張明이라 불렸던 바와 같이 이 이외도 장재천, 손명구, 한산, 영광등의 별명. 필명등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산]은 탄압을 고려하여 본서를 위해 만든 변명으로, 웨일즈가 지언 준 것으로, 장지락 본인도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의 출생지는 본문에 의하면 평양부근이라고 하며, 그 기술에 따르면, 補注에 지적한 바 되로 순천군자산리 혹은 평원군장산리에 비정할 수 있어나, 관현측에 특정되지 않도록 지명을 일부러 흐렸다고 본다. 일노 전란의 피난중에 태어 났다고 하는 것, 러씨아군. 일본군 쌍방에 관한 기술이 생생한 것을 보면, 중국측 문현이 적고 있는 바와 같이, 평안북도용천군北中而下長洞이 바른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日露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龍巖浦에서 15k정도의 바다 가까운 농촌이다.

 

      3.1.운동시에는 본문에 의하면 장지락은 평양의 기독교계중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그 종식후 얼마되지 않아 1919년 여름경에 동경에 유학하여, 20년 초두까지 채재한 후 滿洲로 가서 삼원보를 거처 할빈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20년말 부터 일어 났던 훈춘사건, 간도출병 직전 이땅을 떠나 상해로 옮겨 북경협화의학원의 학생이 되었다(25년까지 재학). 상해에서는 안창호, 이동휘등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변에 있었던 많은 청년들과 같이 실력항쟁지향의 [과격파]에 마음을 두게 된다. 본문(365페이지)에 의하면, 1919년부터 20년에 걸처서는 애매한 아나키즘지지자, 21년부터 23년에 걸처서는 아나키스트였다고 하는데, 얼마가지 않아 마르크스.-닌주의자가 되어가는 경과에 관해서는, 김충창(김성숙)의 영향이 킀다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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