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4720
2007.06.05 (17: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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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운불우(密雲不雨)’의 한 해를 보내며


1.
세상은 혼돈에 빠져있다. 신의 있는 거래는 줄어들고, 좋은 친구는 거의 없으며, 진실은 불명예 속에 빠져 있다. 선의의 행동은 보답 받지 못하고, 형편없는 봉사가 터무니없는 보상을 받는다. 모든 나라가 검은 거래에 몸담고 있다. 어떤 나라는 안전을 위협하고 다른 어떤 나라는 태도가 항상 변화해서 두려움을 갖게 만들고 또 다른 나라는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다른 이들에 대한 불신을 가지라고 이런 예를 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위험은 자기 자신의 완전함을 잃는 것이다.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보다 적게 수용하고 다른 이의 어리석음에 지나치게 관대하며 무능함을 용서하고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과 교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원칙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됨됨이를 명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위 글은 17세기 에스파냐(스페인)의 신부인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에서 옮긴 것이다. 벨라스케스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다가 1658년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 제수이트(가톨릭의 한 종파임) 신부는 죽기 얼마 전 당시의 부패와 빈곤, 위선의 시대 속에서 사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평생을 회고하며 거위 털 깃펜으로 양피지에다 이러한 글들을 남겼다.

2.
며칠 전 올해의 ‘영향력 있는 미술인’을 꼽은 기사를 본적이 있다. 한국의 첫 번째로 꼽히는 재벌가의 부인이, 그다음은 모 화랑의 주인이, 그 다음은 물론 익히 아는 노(老) 비평가와 몇몇 지명도가(?) 높은 작가들 순이었다. 이 같은 결과에 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는 왜곡되고 일그러진 한국미술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다. 다시 말해 재벌가의 부인이라든가, 불우한 화가들을 신화화해서 이윤을 추구한 장본인이, 아니면 세력화로 출세한 장본인들의 ‘영향력’이라면 ‘미술’ 그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한 일이 아닌가? ‘미술’ 그 자체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사람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올해의 미술인들이라니 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역설적인 방증인가?  
물론 자본주의의 위력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치의 혼란에 빠진 이들은 ‘영향력 있는 미술인’과 ‘미술’의 가치가 구분됨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긴 많은 미술인들조차 예컨대 피카소나 백남준, 그리고 앤디워홀 같은 이들이 천재 예술가인 줄 알고 있는 실정이니 더 무엇을 말할까.
작금 우리의 미술계는 우상을 조작하는 자들과 그 우상을 무슨 굉장한 미적 가치인양 포장하는 이들과의 야합에 의해 형성된 거품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형국이다. 즉 우리 미술계는 속이는 자와 속는 자,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이 대세를 이루며, 더 가관인 것은 속이는 자들이 버젓이 미술계의 주인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서 과연 무엇이 가치 있는가?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현대미술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3.
올 한해를 마감하면서 일부 교수들이 2006년을 규정하는 사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 구름은 가득 끼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뜻임)’를 꼽았다고 한다. 즉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로 인한 사회적 갈등, 치솟는 부동산 가격, 정치, 둥북아 문제 등으로 사회 각층의 불만이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한 올해의 실상을 집약한 말인 셈이다.
아무튼 이러한 현실이라 해서 미대에서 공부하는 작가 지망생들이나 젊은 작가들이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았으면 한다. 위의 그라시안의 말에서도 실감할 수 있듯, 어느 지역 어느 시대든 이 세상은 예술가들이나 지각 있는 사람들이 평온하게 살 수 있었던 시기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일수록 만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라고 해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좌시한다면 더욱 암담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지속하는 한 그루 소나무처럼 역경 속에 참 가치는 더욱 드러나는 법이다. 우리가 해마다 설렘과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해 새 날을 맞는 것은 좀 더 풍요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올 한 해도 저의 졸고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새해에는 ‘길상여의(吉祥如意 : 뜻과 같이 복 받으시라는 의미임)’하시길 기원합니다.
                          2005년 12월   28일  
                                      도 병 훈(작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55 no image 오규원 시인의 죽음에 삼가 조의를 표하며
소나무
5647 2007-06-05
오규원 시인의 죽음에 삼가 조의를 표하며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속에서 자본다. 이 시는 지난 2월 2일 세상을 떠난 오규원(1941~2007)시인이 1월 21일 세브란스 병실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 간병 중이던 제자 시인 이원 씨의 손바닥에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손톱으로 쓴 시라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 4연은 한참 있다가 쓴 것이며, 그래서 미완성 시의 2연의 첫 구절인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이 시를 4행으로 된 시인의 유작으로 발표하였다. 오규원 시인은 지난 5일 화장되어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나무 밑에 영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전부터 시인 중의 시인으로 생각했던 분의 마치 사후의 일을 내다 본 듯한 마지막 시와 그 다운 수목장을 알게 되면서 그가 남긴 싯 구절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그래서 얼마 전에 산 시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는 그의 최근 시집을 꺼내보았더니 벌써 1999년에 출간한 책이었다. ‘한 잎의 여자’로 잘 알려진 오규원 시인은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재 활동하는 수많은 개성적인 문인들을 길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1991년부터 희귀병인 만성폐쇄성 폐질환으로 보통 인간이 누리는 산소의 20%만으로 호흡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삶에 대해 잔가지를 쳐버렸고, 좋은 것을 향유하려는 욕망까지도 쳐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시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시에게 구원이나 해탈을 요구하지 않았다. 진리나 사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시에게 요구한 것은 인간이 만든 그와 같은 모든 관념의 허구에서 벗어난 세계였다. 궁극적으로 한없이 투명할 수밖에 없을 그 세계는, 물론, 언어예술에서는 시의 언어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가능성의 우주이다. 이토록 평생 도저한 시정신으로 추구했던 오규원의 시 세계는 가열스럽고 가파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얼핏 보면 매우 건조해 보인다. 그 중 그의 ‘오후와 아이들’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파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열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두 눈을 번쩍 뜨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몸속에서 우뚝 멈추어 서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문득 돌아서고 있다 이처럼 오규원의 시 시계는 관념이 지배하는 현실(오규원의 표현에 의하면 등기된 현실), 즉 관리되고 규격화된 사회를 파괴하려는 의지로 일관되어 있으며, 그러한 의지로 본 자신의 세계를 그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라 했다. 서정 과잉의 상투적인 언어로 동어반복을 하는 이들이 지배적인 한국의 시단에서 오규원은 생전에 좋아했던 세잔의 그림처럼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7년 2월 8일 도 병 훈
54 no image 추사(秋史)의 전<자화상>을 본 소감
소나무
5527 2007-06-05
추사(秋史)의 전을 본 소감 1. 작년 가을에 추사 김정희 서거 150주기 기념전들이 간송미술관과‘국박(국립중앙박물관)’등 여러 곳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추사 관련 전시회가 장소만 달리하여 거의 동시에 개최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각 전시장에서는 각각 다른 추사의 예술작품, 또는 그의 학술서적, 그리고 유품들이 전시되었다. 선조들 중 이 정도로 방대한 예술 문화적 유산을 남긴 이는 추사가 유일무이한 존재다.(*수 백 점의 그림을 남긴 겸재 정선이나,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를 제외하면 실제로 전통 예인 대다수는 작은 방 한 칸 채울 정도의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지금도 예술의 전당(서예관)에서는‘추사 문자반야(文字般若)전(기간 : 2006. 12. 28-2007. 2.25)’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추사 서거 150년을 기리는 다양한 전시와 학술연구를 마감하는 최종 행사인 셈이다. 주1) 그러나 내가 이번에 이 전시를 보러간 주된 목적은 추사가 직접 그렸다는 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은 그간 선문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이번 전람회를 통해 처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다. 주2) 추사의 초상화는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과 제자인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이 그린 과 등 여러 점이 남아 있으며, 이들 초상화의 눈매라든가 굳게 다문 입술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이번에 출품된 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한철과 허련이 그린 초상화들은 조선시대 특유의 도식화, 양식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평범해 보이며, 그래서 그들이 그린 추사 모습도 그저 온화하고 원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추사의 은 조금도 꾸밈이 없는 극히 진솔한 모습이었다. 2. 추사의 은 세로 가로 32.0×23.5cm 크기의 한지에 상반신을 포함해서 약간 측면의 얼굴을 조그맣게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은 조선 시대의 다른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 채 검은 옷깃의 무명저고리와 탕건만 쓴 모습이어서 귀 뒤로 어지럽게 엉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구레나룻이 인상적이었다. 주3) 그러나 눈매는 가느다랗게 긴 그러면서도 끝이 약간 올라간 이른바‘봉눈’이어서 볼수록 범상치 않았다. 특히 형형하고도 예리한 눈빛은 예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유감없이 느끼게 하였다. 비록 작은 그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추사라는 인물의 실존적 리얼리티를 십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추사는 상단 오른쪽에 다른 종이를 오려붙인‘자찬(果老自題)’에서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 해도 나이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천궁(天宮: 하늘 궁전)의 여의주가 주렁주렁한 데 누가 큰 여의주 앞에서 모습에 집착하는가. 하하. -과천 노인이 스스로 제하다-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呵 果老自題 추사는 이 자찬을 통해 자기가 그린 얼굴 모습에 담긴 내면의 실상을 봐야지, 겉모습이 자신과 닮았느냐, 아니냐는 시시비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禪)적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과로(果老)’이라는 자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만년을 보냈던 과천 시절 즉 60대 중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무렵의 추사의 모습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의 「추사방견기(秋史訪見記)」가 그것으로 그가 13세 어린 소년 시절에 봉은사에서 보았던 광경을 약 60년 후 노년에 기록한 것이다. 그가 보았던 추사는 1856년, 즉 추사가 죽기 6개월 전의 모습이었다. 수 십 년 전에 본 기억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방안구석에 놓여 있는 물품들의 품목이나 작은 붓 큰 붓의 개수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그 중 추사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가운데 앉아계신 한 노인은 몸집이 자그마하고 수염은 눈 같이 희며 숱은 많지도 성글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옷 칠한 것처럼 빛났고, 머리는 벗겨져 머리칼이 없었다. 승관(僧冠)처럼 대쪽으로 짠 둥근 모자를 썼으며, 소매가 넓은 옥색 모시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얼굴은 젊은이처럼 혈색이 불그레했지만 팔이 약하고 손가락이 가늘어 마치 아녀자 같았으며, 손에 염주하나를 굴리고 계셨다. 여러 어른이 절하며 예를 갖추자, 몸을 구부려 답하고 맞으시니, 이 분이 바로 추사 어른인 줄 알게 되었다.…(후략) 에 묘사된 얼굴의 특징적인 부분과 위 기록은 대략 일치한다. 그럼에도 그림 윗부분의 자찬인‘과로자제(果老自題)’는 왜 다른 종이에 쓴 것을 오려 붙였을까하는 의문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추사가 그렸다는 사실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그림 그 자체로서는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이럴 경우 전통회화를 미술사가들은 이라고 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수 일간에 걸쳐 확대된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다시 보았다. 진품이 아니라면 제자가 그렸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보다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그림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추사의 은 마치 렘브란트가 만년에 그린 자화상처럼 실존적 리얼리티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나 여타 그림들에서 느낄 수 있는 추사 특유의 졸박(拙撲)하면서도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필력과도 상통하는 깔깔한 성정의 필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진품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진작여부는 향후 실증적 연구를 통해 확연히 밝혀질 때까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야할 것 같다. 사실 추사의 진적이나 그림으로 알려진 것 중 다른 사람의 것이나 위작(僞作)으로 보이는 것들이 상당수 있으며, 전시회를 할 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이번 추사의 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과연 추사가 그린 것일까 미심쩍기도 했던 것이다. 주4) 3. 반 고흐의 나 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예술가들이 표현한 모든 작품들은 그 자체로서 화가의 정신적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추사의 그림, 예컨대 의 소나무나 집 모습에서도 추사의 정신적 단면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술가의 자화상은 대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 있으며, 그만큼 예인의 삶을 알 수 있는 결정적 텍스트다. 무엇보다 자화상은 그리는 사람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나는 자화상 혹은 자소상에 대해 더욱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 사실 이번 전시회를 보기 전까지 과연 추사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렸을까, 또한 정말 추사가 그린 진품일까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은 공제 윤두서(恭齋 尹斗緖, 1688-1715),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계보를 잇는 자화상으로 명확히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추사의 예술세계를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자화상이 그간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확증할 증거가 없는 데다, 그의 글씨가 워낙 많고 또 ,, 같은 다른 그림에 가려 상대적으로 간과한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추사가 그렸다는 을 보며, 추사의 예술과 삶에 대해 좀 더 그 면면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세상과 삶을 꿰뚫어보는 듯한 추사의 눈빛에서 그의 올곧은 삶과 파란만장했던 삶을 실감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예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생각하게 되었다. 2007년 새해 원단에 도 병 훈 주1)이번 전시회에서는 ‘추사학예의 화두’라 할 수 있는 ‘문자반야(文字般若)’ 묵서도 처음 공개됐다. 전형적인 해서로 썼으며, 추사는 이 문구를 가장 아낀 제자인 소치 허련에게 주었다. ‘문자반야’는 부처가 말한 경(經), 율(律), 논(論) 전부를 가리킨다. 이외에도 ‘道德神僊(도덕신선)’ ‘賜書樓(사서루)’ 등과 ‘완당제산곡신품첩(阮堂題山谷神品帖)’ 등 분야별 대표작 100여점이 출품되었다. 그리고 박제가(朴齊家)의 ‘한거독서(閑居讀書)’, 정약용(丁若鏞)의 초서병풍, ‘사언고시(四言古詩)’ 등 사우·문인관계 작품 50여점, ‘세한도발문(歲寒圖跋文)’ 등 한중교유관련 문서 50여점, 추사가의 한글편지 등 가계작품 50여점 등 총 250여점을 볼 수 있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학예사는 “지금까지는 추사의 글씨에만 포커스가 맞춰진 것은 사실”이라면서 “이번 전시는 시서화(詩書畵), 유불선(儒佛仙), 문사철(文史哲)을 관통하는 전인적인 인물로서의 추사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주2)‘예술의 전당 추사 김정희’를 검색하면 인터넷상이나마 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주3)우리의 전통 초상화를 연구해온 성균관대 조선미 교수는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소략한 옷 처리와는 달리 봉황 눈과 얼굴, 봉발에 가까운 털이나 수염 묘사는 리얼리티의 극치를 이룬다.” 주4) 이동국 학예연구사는 전문가들로부터 “추사 스스로 거울 앞에 앉아 곰살 맞게 그리지 않으면 절대 그릴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했다.
53 no image Re:추사(秋史)의 <자화상>을 본 소감
소나무
4899 2007-06-05
Re. 秋史 文字般若 展 - 도병훈선생의 소개글을 보완하는 영상물과 글(도록에서 옮김) “반야” 란 범어(梵語)로 prajna 라고 하며, 지혜(智慧)를 뜻한다. 이는 초월적 지혜, 즉 인간 생명의 근원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예지(叡智)이므로 이기적인 분별심을 초월한 예지, 혹은 근원적인 예지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이를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실상반야는 진리 이치 그 자체(理經)를 말하고, 관조반야는 사물을 텅 비어 있는 모습으로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즉 근원자리를 사무쳐 뀌뚫어 보는 지혜를 말 한다. 문자반야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 . 율(律) .논(論) 전부를 가리킨다. 이는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를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김정희가 지향했던 학문과 예술도 결국 모든 사물의 도리를 분명히 뀌뚫어 보는 깊은 지혜, 즉 문자반야의 경지였을 것이다.” 1. “끝에 적힌 관자를 통하여 침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 판서에 오르자 이를 축하하는 뜻으로 써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김정희가 30년 동안 고심한 뒤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그의 호를 써준 글씨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윤정현의 자는 계우, 호는 침계, 이조판서를 지낸 行恁의 아들이다. 늦게 출사하였으나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가문의 배경으로 인하여 급속히 승진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고, 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비문에 능하였다. 김정희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 함경도감사가 되어 김정희를 돌보아 주었다.” 2. “임금에게 서적을 하사받아 보관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현판으로 보인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와 비슷한 구도이다. ‘사(賜)’ 자는 좌측의 ‘貝’ 를 위로 올려 쓰고 오른편 ‘易’ 의 빠짐을 길게 하여 다른 글자와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서(書)’ 자에 원래 없는 삐침 획을 더한 것과 루 의 모양도 거의 비슷하다.” 3. “김정희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이며 화가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 쓴 서첩의 위쪽 여백에 [신곡이 글씨 쓰는 것을 논함(神谷作字)]이라는 그의 글을 인용하고, 그 아래 자신의 견해를 적은 작품이다. 뒤에는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대하여 논한 글이 실려 있는데, [왕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에 수록되어 있다.” 4. 朴齊家(1750-1805), “고목 아래 적막한 산정에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이 원형의 창을 통하여 보인다. 좌측 아래는 조선 박제가라 적고 朱文方印 1顆를 찍었는데, 印文은 ‘제가(齊家)이다. 박제가의 자는 차수, 재선, 수기, 호는 초정 . 정유. 위향도인이다. 소년시절부터 시 . 서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을 미롯한 이덕무 . 유득공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등과 함께 내.외편을 저술하였는데,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저서로는 .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정희 이전에도 박제가와 같이 시서화에 뛰어난 인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사들과 교류하며 文才를 떨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丁若鏞(1762-1836), “다산이 사언체 고시를 초서로 쓴 6곡 병풍이다. 종이에 비하여 작은 붓, 혹은 붓끝을 이용하여 활달하게 썼다. 여백 속에서 세세한 운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다산은 초사보다 24세 위이다. 그는 외국으로 사신을 가지 않았지만 강진에 유배되어 18년동안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김정희가 다산에게 답한 서찰이 [왕당전집] 4권에 실려 있다.” 8. 6. “근대의 추사연구자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는 앞부분을 김정희가 옹방강이 두 번째로 보낸 편지를 읽고 지은 찬사라고 하였다. 차례를 바꾸어 쓰기도 한다. 후반부를 더하고 箴이라는 말을 붙였다. 이보다 앞서 김정희는 [實事求是說]을 지었다. 여기에는 학문의 방법 뿐 아니라 학문의 지향점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김정희는 [실사구시설] 첫머리에서 “구체적인 일로써 실질 되게 하고 옳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이다. 만약 구체적인 일로 써 실질되게 하지 않고 다만 공허한 학술을 방편으로 삼으며, 옳음을 추구하지 않고 다만 선입견을 위주로 삼으면 성현의 도에 역행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당집] 제1권에 실려 있다. 여기에서 ‘ 실사는 한학의 훈고학적 실증주의를, 구시는 송학 즉 주자학의 의리적 도덕주의를 지칭한다. 김정희는 바로 그의 학문의 지향점인 ‘실사구시’를 통하여, 한학과 송학 즉 훈고학과 의리학의 절충 혹은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Selected no image ‘밀운불우(密雲不雨)’의 한 해를 보내며
소나무
4720 2007-06-05
‘밀운불우(密雲不雨)’의 한 해를 보내며 1. 세상은 혼돈에 빠져있다. 신의 있는 거래는 줄어들고, 좋은 친구는 거의 없으며, 진실은 불명예 속에 빠져 있다. 선의의 행동은 보답 받지 못하고, 형편없는 봉사가 터무니없는 보상을 받는다. 모든 나라가 검은 거래에 몸담고 있다. 어떤 나라는 안전을 위협하고 다른 어떤 나라는 태도가 항상 변화해서 두려움을 갖게 만들고 또 다른 나라는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다른 이들에 대한 불신을 가지라고 이런 예를 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위험은 자기 자신의 완전함을 잃는 것이다.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보다 적게 수용하고 다른 이의 어리석음에 지나치게 관대하며 무능함을 용서하고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과 교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원칙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됨됨이를 명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위 글은 17세기 에스파냐(스페인)의 신부인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에서 옮긴 것이다. 벨라스케스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다가 1658년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 제수이트(가톨릭의 한 종파임) 신부는 죽기 얼마 전 당시의 부패와 빈곤, 위선의 시대 속에서 사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평생을 회고하며 거위 털 깃펜으로 양피지에다 이러한 글들을 남겼다. 2. 며칠 전 올해의 ‘영향력 있는 미술인’을 꼽은 기사를 본적이 있다. 한국의 첫 번째로 꼽히는 재벌가의 부인이, 그다음은 모 화랑의 주인이, 그 다음은 물론 익히 아는 노(老) 비평가와 몇몇 지명도가(?) 높은 작가들 순이었다. 이 같은 결과에 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는 왜곡되고 일그러진 한국미술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다. 다시 말해 재벌가의 부인이라든가, 불우한 화가들을 신화화해서 이윤을 추구한 장본인이, 아니면 세력화로 출세한 장본인들의 ‘영향력’이라면 ‘미술’ 그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한 일이 아닌가? ‘미술’ 그 자체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사람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올해의 미술인들이라니 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역설적인 방증인가? 물론 자본주의의 위력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치의 혼란에 빠진 이들은 ‘영향력 있는 미술인’과 ‘미술’의 가치가 구분됨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긴 많은 미술인들조차 예컨대 피카소나 백남준, 그리고 앤디워홀 같은 이들이 천재 예술가인 줄 알고 있는 실정이니 더 무엇을 말할까. 작금 우리의 미술계는 우상을 조작하는 자들과 그 우상을 무슨 굉장한 미적 가치인양 포장하는 이들과의 야합에 의해 형성된 거품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형국이다. 즉 우리 미술계는 속이는 자와 속는 자,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이 대세를 이루며, 더 가관인 것은 속이는 자들이 버젓이 미술계의 주인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서 과연 무엇이 가치 있는가?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현대미술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3. 올 한해를 마감하면서 일부 교수들이 2006년을 규정하는 사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 구름은 가득 끼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뜻임)’를 꼽았다고 한다. 즉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로 인한 사회적 갈등, 치솟는 부동산 가격, 정치, 둥북아 문제 등으로 사회 각층의 불만이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한 올해의 실상을 집약한 말인 셈이다. 아무튼 이러한 현실이라 해서 미대에서 공부하는 작가 지망생들이나 젊은 작가들이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았으면 한다. 위의 그라시안의 말에서도 실감할 수 있듯, 어느 지역 어느 시대든 이 세상은 예술가들이나 지각 있는 사람들이 평온하게 살 수 있었던 시기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일수록 만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라고 해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좌시한다면 더욱 암담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지속하는 한 그루 소나무처럼 역경 속에 참 가치는 더욱 드러나는 법이다. 우리가 해마다 설렘과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해 새 날을 맞는 것은 좀 더 풍요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올 한 해도 저의 졸고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새해에는 ‘길상여의(吉祥如意 : 뜻과 같이 복 받으시라는 의미임)’하시길 기원합니다. 2005년 12월 28일 도 병 훈(작가)
51 no image 김성배의 흑백논리전에 대한 소고
소나무
5010 2007-06-05
김성배의 흑백논리전에 대한 소고 1. 얼마 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 무렵, 거대한 구름이 세상을 덮고 있는 장엄한 광경을 보았다. 무한한 하늘 아래 대지는 수평으로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집들과 아파트들이 작은 점처럼 보였다. 저 흩어지고 모이는 거대한 구름아래 인간사 온갖 추악한 욕망이 들끓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 속 한살이(生)가 한없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부동산 광풍이 수도권 지역을 휩쓸고 있다. 작금의 부동산 투기 열풍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저마다 전전긍긍하며 재빨리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광경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거품현상은 우리의 야만적 현실을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말이후 서구열강들에 의한 제국주의적 침탈은 전통적 자연관의 단절과 더불어 파리나 뉴욕의 거리들과 상점까지 기억하게 하면서 바로 이웃나라들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만들었으며, 산업화이후 점점 획일화․ 유사화되어버리는 공간들은 자본과 상품논리만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함을 방증한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김성배는 지난 90년대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줄곧 현실적 삶은 도무지 안중에도 없는 듯 히말라야와 이 땅을 오가며 살았다. 그래서 그는 초연한(?) 삶을 살고 작업도 이러한 연장선에 하는 듯이 보인다. 과연 그럴까? 2. 지난 11월 10일부터 19일까지 수원 대안공간 눈에서 있었던 김성배의 개인전 설치작업은 해발 6714m인 카일라스(현지 말로는 구루란 뜻의 캉 림포체임)산을 전시장에 축소한 듯 보여준다. 그러나 막상 전시장에 가 보면 미술에 대해 일반적인 통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할(?) 정도의 광경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김성배는 왜 카일라스산을 형상화했을까? 전시장에 들어서면 온통 사방으로 흰 캔버스 천을 펼친 가운데 검은 먹물을 쏟아부은 큰 호박돌 하나가 놓여 있다. 사방의 천들은 그 돌이 짓누르는 무게로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검은 돌은 그저 자그마한 돌이 아니라 주위를 에워 싼 설산 가운데 우뚝 솟은 성스러운 검은 산으로 변모한다. 즉 이 산은 사방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연봉 한 가운데 우뚝 솟은 형상이다.(작가는 우연히 전시장 마당에서 선택한 돌인데 실재 카일라스 산의 형상과 많이 닮았다고 했다.) 사실 이 산은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뵌교 주1)의 성지로 꼽히며, 산스크리트어로는 신의 천당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시바신의 안식처로, 그들의 사원에 있는 링감 주2)의 근원이며, 티벳불교에서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수미산이 이 산을 뜻한다고 본다. 높이는 히말라야의 8000m급 연봉들에 비하면 조금 낮지만 세계의 지붕으로 꼽히는 히말라야 연봉들 중에서 성산 중에 성산으로 꼽히는 산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일라스 산은 지구상에서 ‘중심축’으로서의 상징성을 갖는 장소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성에서 더 한걸음 더 나아가 김성배는 문명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근원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집약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카일라스에 한정되지 않으며, 사실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이에 대해 조규현 선생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는 히말라야 안에서 삶을 영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히말라야는 우리 심상의 숭고하고 영원한 지표는 될지언정 우리가 히말라야의 穴居人이 될 수 없다. 문명은 발전하는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그 물리적인 페이스는 역사성을 띠고 있음으로 비재귀적이다. 자연은 그 아무리 아름답고 숭고하고 스스로 자명한 존재일지라도 이를 인식하는 존재는 인간이다. 김성배의 히말라야 미학은 사이비(似而非)가 판을 치는 우리의 미술풍토에서 그나마 몇 안 되는 정직한 오리지널티를 갖고 있는 예술가임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해 준다.주3) 김성배는 언제나 매우 스케일이 큰 작업을 한다. 이는 실내에 꽉 차는 설치 작업을 해서가 아니며 그 정신의 스케일이 크다는 것이다. 때로는 드넓은 전시장에 머리카락 하나로, 때로는 한쪽 발을 하늘을 향해 쳐들고 있는 무애(無碍)의 행위로 표출되는 그의 작업과 행위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차원을 보여준다. 사실 김성배는 오래 전부터 세련되고 쌈빡한 조형 따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으며, 항상 문명적 차원에서 예술을 생각하고 문명의 통합과 융합을 꿈꿔왔다. 이번 개인전에서 김성배는 전시장 안에 바깥의 광경을 담는 불가능한 시도를 그 실내 안에도 안과 밖이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즉 그는 관람자가 전시장에 들어가도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방법론적 코드를 삼았다. 그래서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객은‘안과 밖’의 세계를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이는 그의 방법론이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간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흑백논리’란 전시 타이틀은 말 그대로 단순한 양극적 사고를 전제로 한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셈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흑백의 시각적 선명함은 오히려 안 밖의 동시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역설적 어법인 셈이다. 3. 김성배의 작업과 행위는 오늘 우리의 황폐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김성배는 산이 거기에 있기에 산에 간다는, 즉 등산이나 트레킹을 목적으로 히말라야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 문명의 새로운 축을 생각하고, 예술을 넘어선 예술을 꿈꾼다. 그에게 전통적 의미의 미술은 더 이상 어떠한 가치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히말라야든 백두대간이든 김성배가 걷고 머무는 자연은 결코 현실도피의 장소도 아니며, 구도자가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영감의 대상도 아니다. 즉 그는 히말라야에서 정신적 영적 해방을 꿈꾸거나 석가처럼 해탈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에게 히말라야의 특정한 장소가 예술적 행위를 표현하는 구심점이 된다는 것은 단지 문명과 대비되는 소재가 아니라 문명을 반추하는 장소성을 띤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하는 중심축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히말라야는 ‘우주와 통하는 배꼽’인 것이다. 2006년 11월 28일 도 병 훈(작가) 주1) 우리나라의 단군신앙같은 티벳의 토착종교임. 주2)남성의 성기를 말하는 것으로 쉬바신의 상징임. 주2)조규현,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전 감상기(1)중에서 인용.
50 no image 뒤샹의 블랙커피와 예술가의 삶
소나무
5606 2007-06-05
마르셀 뒤샹의 ‘블랙커피’와 예술가의 삶 1. 사람들은 어떤 대상이든 어릴 때부터 언어를 통해 이해하고 익히므로 그렇게 인식한 대상을‘실재(reality)’라 생각한다. ‘하늘’이란 개념도 하나의 약속된 기호일 뿐 하늘 그 자체(reality)는 아니다. ‘돌’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돌은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과 달리 만질 수 있는 대상이지만 생각 속의 돌은 언어, 즉 관념이다. 우리인간은 언어로 소통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언어가 동어반복의 시스템 및 권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기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신념으로 변하는 시대를 산다. 그래서 변치 않은 신념으로 변하는 현실을 재단하며, 그만큼 언어적 틀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서 벗어난 현대예술가들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으로 마르셀 뒤샹을 꼽을 수 있다. 2. 마르셀 뒤샹은 죽기 2년 전인 1966년, 당시 젊은 비평가였던 카반느와 대담을 한다. 이 대담에서 뒤샹은 모든 사회적 제도와 체제로부터 자유롭고자 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평생 발표한 작품(뒤샹은 자신의 작품을 무조작이라는 의미에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에 대해 말했다. 대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카반느가 빈의 논리학에 관해 묻자 뒤샹이 답변한 부분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빈의 논리학자들은 어떤 체계를 엮어낸 것인데,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모두 토털로지 tautology, 말하자면 전제의 반복(동어반복)입니다. 수학에서는 매우 단순한 정리定理에서 복잡한 정리에로 나아가는데 모든 것은 최초의 정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형이상학도 토털로지, 종교도 토털로지 모든 것이 토털로지입니다. 이 블랙커피만 제외하고. 이것에는 감각의 작용이 있으니까. 눈이 블랙커피를 보고 있다는 것은 감각기관이 작동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진실입니다. 다른 나머지는 언제나 토털로지 입니다.” 지난 90년대 초반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말은 그 어떤 작품이나 비평적 이론보다 뜻 깊은 메시지였다. 현대예술과 예술가의 길을 자각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위 말의 핵심은 블랙커피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다. 즉 학문이나 제도적 현실은 관념적인 언어의 영역이며, 따라서 그 세계는 실재 세계(reality)가 아닌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진 동어반복적 세계이지만 몸으로 지각하는 감각적인 세계는 ‘진실((reality)’이라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 이래 서구를 지배해왔던 주된 인식론을 뿌리 채 부정한 말이며, 무엇보다 현대예술의 주된 특성을 암시하는 말이다.(플라톤은 참 실재는 감각을 통해 알 수 없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감각적인 현상을 넘어선 관념, 즉 이데아만을 참 실재로 여겼다.) 흥미롭게도 위의 대화를 연상케 하는 일화가 한자 문화권인 동양에서도 있었다. 중국 당나라의 한 젊은 승려가 출가하여 오랫동안 수도하다가 더 이상 진전이 없어 당시 최고의 선사로 알려진 조주스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부처(바로 아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조주의 답변은 “끽다거(喫茶去)” 즉, “차나 한 잔 마시게.”였다. 즉, 온갖 경전에 나오는 언어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차를 마시며 그 향을 맡고 미각으로 느끼듯, 살아가는 동안 온 몸으충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아는 자’의 삶이라는 뜻으로, 뒤샹이 말한 바와 다르지 않다. 이처럼 선불교에서의 깨달음은 개념적 앎의 차원이 아님을 수많은 화두를 통해 입증한다. 이러한 화두의 한 예로 ‘병 속의 새’가 있다. 어떤 젊은 승려가 출가하여 아무리 공부해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역시 당대에 유명한 대선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 선사가 말한 화두와 일화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입구가 좁은 커다란 항아리가 하나 있다. 그 항아리 속에다 갓 부화한 거위 새끼를 한 마리를 넣어 놓고 모이를 주어 커다란 거위로 길렀어. 그런데 항아리를 깨지 말고 거위도 죽이지 말고 ‘거위’ 즉 새를 그 병에서 나오게 하라는 거지. 어떻게 하면 그 새가 나올 수 있을까? 그 새를 산 채로 병 속에서 나오게 하는 법을 안다면 너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그 날 이후 젊은 승려는 어떻게 하면 병 속의 새를 나오게 할 수 있을까?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3일이 지나고 3개월이 지나고 마침내 3년이 지났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대선사를 찾아가, “제가 3년이나 생각했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새를 나오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대선사는 “내일 다시 이 자리에 오면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젊은 승려가 막 돌아서서 몇 발자국을 걸어 나가는 순간, 대선사는 젊은 승려를 다시 불렀다. 그가 무심코 돌아보는 순간, 대선사는 “나왔다.”라고 말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뜻밖의 사태에 젊은 승려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곧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깨우침을 얻는다. 새는 어떻게 병 속에서 나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스승이 말한 병과 새는 개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스승이 그런 얘기를 하는 순간부터, 그 젊은 승려는 ‘병과 새’를 실제로 존재하는 ‘병과 새’로 생각해버렸다. 애초부터 새는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병 속의 새’만 불쌍하게도(?) 3년간 병 속에 아니 젊은 승려의 머리 속에 갇혀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얘기를 듣고 책을 읽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은 실재 대상을 전제로 한 개념적 인식이다. 우리의 생각은 약속된 기호체계를 빌린 개념일 뿐 실재 세계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가 이제 알을 깨치고 나오는 새처럼 부화할 시간이 되었음을 안 스승의 절묘한 퍼포먼스 덕분에 그 제자는 언어와 실재 세계의 차이를 확연히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뒤샹의 말이나 선사들의 가르침은 언어 이전의 세계의 실재나 실존적 삶의 실상을 말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블랙커피나 차 한 잔의 화두에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 인식론적 개념과 실재 세계의 차이를 알게 하는 촌철살인의 뜻이 담겨 있다. 언어의 역사, 그 중에서도 문자를 발명하면서 지식을 축적해 온 것이 곧 문명의 역사이지만 이러한 언어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특정시대의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냄새 맡고 촉각으로 느끼는 감각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와 같을 정도로 장구한 시간 속에 형성되고 진화했다. 내 몸의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이 세상을 진정으로 만나는 가장 본질적인 느낌이자 실존을 자각하는 알파인 것이다. 현대 예술이 어떠한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에서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한 이면에는 이러한 자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술의 가치는 감각을 통해 삶의 자유을 확장하고 그만큼 풍요로운 삶을 사는 데 있다는 것이다. 2006년 11월 27일,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오는 날에 도 병 훈
49 no image 비평가들의 무반응과 현대미술의 가치
소나무
5028 2007-06-05
비평가들의 무반응과 현대미술의 가치 1. 한국현대미술 전반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제기한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오상길 저, 2005)가 출간된 지 약 1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논리적으로 맞서 반론을 제기한 이는 없다. (물론 표면적으로 나서지는 않으면서 사적인 자리에서 소인배의 행태를 일삼는 자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야말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미술사가와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써 온 글을 대상으로 반론을 제기했는데, 1년이 다가도록 그 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침묵일색이다. 즉 그간 그들이 구축해온 논리에 대해 근본부터 잘못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아직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또한 실망스럽고 한심한 사실은 미술계 전체 아니 가장 문제의식이 있어야 할 젊은 세대들의 무관심 ․ 무반응이다. 워낙 미술계가 엉망진창이고 미술교육도 엉터리이다 보니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고, 심지어 불과 수십 년전의 일도 자신과 무관한 일인 듯 까마득한 과거로 알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특히 젊은 세대의 비판의식 상실은 심각한 문제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2.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란 책의 핵심적 논지는 일부 미술사가들이나 비평가들이 담합이나 한 듯, 그래서 객관적 사실인양 기술해온 미술사적 기술과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이다. 이른바 앵포르멜 세대로부터 한국현대미술이 시작되어 1970년대 단색조 미술을 모더니즘 미술로 규정하고, 80년대 소그룹 미술운동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미술로, 이후의 미술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규정한 이들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즉 개별 작가들이나 작품을 단위로 한 담론이 아니라 한국현대미술 맥락 전체를 서구미술의 아류이자 종속의 역사로 기술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전쟁과 분단현실, 그리고 군사독재 등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과의 상관관계는 도외시하면서 특정대학 중심의 세력들을 등에 업고 서구의 이념적 논리를 우리의 미술사에 그대로 적용한 논리적 허구성을 통박한 것이다. 그러나『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에서 비판하는 것은 단지 특정 비평가들의 잘못이 아니다. 메타비평은 근본적으로 미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물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서구 현대미술은 결코 근대미술의 연장선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미술은 근대까지 거장들에 의해 서구의 현대미술은 근대까지 거장들에 의해 형성되어왔던 일체의 미적 가치를 의심하고 해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비해 우리의 현대미술은 이러한 서구의 현대미술을 수용해왔지만 단지 종속화된 아류는 아니며 한국적 특수 상황에서 감각적으로 절충되거나 혼성화된 역사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거대담론이 우리 미술을 규정하는 미술용어가 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사건)의 연장에 있으므로 과거를 모른다면 현재에 대해서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미망은 자신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 뿐 아니라 나아가 그 사회를 병들게 하는데 일조한다. 오해와 무지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역경과 만난을 겪는 것이 역사에 획을 긋는 사람들의 공통점인 것도 그 사회가 심히 병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자들은 언제나 권력을 탐하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시대나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있는 자들, 즉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설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차원에서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란 책은 단지 그간 비평가들과 미술사가들이 한국의 근 현대 미술을 어떻게 왜곡해왔는지 논증적으로 분석한 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3. 어떠한 미적 가치도 용인될 수 없는 바로 그 사실이 처절하게 아름다운 현대미술의 특성상 특정 학맥의 기득권 세력인 일부 작가 중심으로 미술사를 재단하고 서구에서 수용한 번역용어에 지나지 않는 거대 담론으로 미술에 대해 기술해 온 이들의 담론은 이미 그 자체로 자기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침묵한다고 해서 특정 학맥과 인물들을 과대 포장한 역사가 그대로 고착화된다고 생각하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오산이다. 이해 당사자들이 모른 체 한다고 해서 역사의 진실이 가려질리 만무하며, 오히려 한국의 현대미술사는 전적으로 다시 쓰여 져야 함을 자인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있겠는가. 2006년 10월 25일 저녁에
48 no image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과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전을 보고
소나무
5725 2007-06-05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과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전을 보고 1. 지난 10월 22일 하루 동안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2006년 10월 21-29일)’을 간송미술관에서 본 후, 이어서 국립중앙박물관 기획 특별전인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전(2006년 10월 3일-11월 19일)’을 보았다. 올해 추사(秋史 金正喜, 1786~1756) 서거 150주기를 맞아 지난 9월에 과천에서 개최된 후지츠카 유물의 기증을 기념한 ‘추사 글씨 귀향전’에 이어, 이번에는 추사 관련 귀한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으로 유명한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큰 규모의 기획전을 연 것이다. 간송미술관에서는 늘 그러하듯 자체 소장품만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중앙박물관의 특별전은 특별기획전의 취지를 살려 개인소장품이라 자주 보기 어려운 와 , 추사의 편액 글씨 중 추사체의 진수를 보여주는 를 포함 지금까지 미공개된 추사 관련 유물까지 포함된 대대적인 전시회였다. 사실 추사 관련 전시회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한꺼번에 개최된 것은 지난 수십 년간 달리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는 앞으로도 수십 년간 이 정도의 대대적인 전시를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2.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에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명품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추사의 만년 작으로 추사체의 진수를 보여주는 주 1)와 주2)를 다시 보게 되어 좋았다면 국립 중앙박물관에서는 많은 예산을 들인 전시답게 전시 규모 및 여건과 전시 디스플레이, 그리고 관람객들을 위한 서비스 등에서 모처럼 특별전다운 좋은 전시회였다. 예를 들어 의 경우 두루마리 전체(발문까지 포함하면 약 13m 길이임)를 다 펼쳐 놓았으면서도 발문을 일일이 다 번역해놓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조희룡(趙熙龍, 1789~1866), 전기(田琦, 1825~1854) 허유(許維, 1909~1892)과 같은 추사 후학들의 예술세계도 함께 조명함으로써 일세를 풍미한 추사의 예술세계를 실감하게 하였다. 또한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에서는 150주기답게 도록이기도 한 『간송문화(澗松文華, 제71호)』에서 최완수 연구실장이 그간 자신이 해온 추사 관련 선행 연구를 종합하여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까지 총체적으로 기술한 「추사 김정희」란 논문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 경지전’에서도 세 가지 논고를 실어 그간의 추사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면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박철상이란 고문헌 연구가가 그간 밝혀지지 않았던 『완당소독』에 대한 자세한 해독을 통해 장황사 주3) 유명훈(劉明勳)과 그와 관련된 『난맹첩』에 대해 소상히 밝혀내어 더욱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그간 이 『난맹첩』에 대해 위작설도 있었고 심지어 기생에게 준 것이라는 설도 있었음) 또한 추사 관련 방대한 자료를 해석한 도록을 발간하였다. 3. 그동안 나는 추사의 예술세계 관련 글을 수차례 써왔지만 전시장에서 글씨와 그림을 보거나 추사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접할 때마다 그간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나 그림은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인다. 추사와 평생 금란지교(金蘭之交) 주4)의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간 삶을 살았던 권돈인(彛齋 權敦仁,1783~1859)이 이한철(李漢喆,1808~ ?)이 그린 추사의 초상 위에 쓴 찬문에서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山海崇深)’고 찬사를 쓴 것이 그저 과장된 수사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과 예술가의 삶을 이해하는 만큼 예술에 대해 더 깊게 알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이번 두 전시회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추사의 예술세계가 성립하게 된 과정이 이전의 선행 연구보다 좀 더 소상하게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회 전에도 추사의 가계와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 자세히 밝혀진 건 사실이지만, 최완수는 이번에 게재한 장문의 논문을 통해 그동안 석연치 않았던 추사의 행적, 그 중에서도 유배 경위를 당시의 정치적 배경의 진술을 통해 더욱 소상히 밝혀놓았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인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는 당쟁의 말폐가 극심하여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는, 참으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중상모략과 권력다툼이 점철된 시기였다. 주5) 즉 안동김씨의 행패가 극에 이른 시기에 오직 불세출의 예술로 버티고 살아남은 추사의 예술세계를 잘 드러낸 것이다. 특히 평생 추사의 삶을 고난에 시달리게 한 안동김씨 일문이면서도 추사와는 남다른 교분을 유지한 김유근(金逌根, 1785~1840) 주6)과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행적과 당시 세도 가문의 관계가 추사의 삶에 미친 영향 등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 이상으로 그 부침의 내력이 복잡했다. 이를 통해 추사가 겪은 만난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만큼 추사 만년 예술의 진면목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추사 자신은 당대를 대표하는 명문가의 자제로 평생 강직한 삶을 살았으나 거의 생트집에 가까운 모함으로 치욕적인 고문(제주도 유배를 가면서 권돈인에게 편지에서 “행동에서 선인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었고 그 다음은 나무에 꿰어 회초리를 맞는 욕을 당하는 고통인데 두 가지를 다 당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을 당하고 이어 약 10년 동안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해야 하는 역경을 겪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고난 속에 추사의 예술세계는 더욱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만큼 그의 예술세계는 진흙 속의 연꽃처럼 고고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추사가 옛 그림 장르 중에서 왜 그토록 선비의 맑은 인품을 상징하는 사란(寫蘭: 난초를 쓴다는 뜻임, ‘畵蘭’ 즉 옛 선비들이 ‘난초를 그린다’ 하지 않고 ‘난초를 쓴다’고 한 것은 형태보다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임)에 비중을 두었는지도 바로 추사가 살던 당시의 오탁악세(五濁惡世: 불교용어로 오탁은 겁탁, 견탁, 번뇌탁, 중생탁, 명탁을 말하며 오탁악세는 악한 일이 많이 야기되는 세상을 뜻함)를 이해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전시회 모두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간송미술관의 경우 역시 과거 여러 번 있었던 추사 관련 전시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전시의 타이틀을 ‘학예일치의 경지’로 한 것이 그러하다. 사실 ‘학문’과 ‘예술’은 결코 일치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이다. 물론 추사는 일세의 통유(通儒)로서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답게 자신의 예술관을 이른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 독서를 통해 온축된 향기)’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학예일치’를 지향한 것은 사실이고, 그만큼 상식적 통념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추사의 예술세계와 그의 학문 세계가 서로 일치한다는 관점에서 이를 전시 주제로 삼은 것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며, 나아가 이는 예술의 본연의 가치에 대한 본질적 성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주7) 그것은 무엇보다 학문과 예술의 영역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논증적 진리나 가치론적 탐색에 진면목이 있는 학문과 달리 예술은 선천적 기질과 후천적 체험, 그리고 물성적 측면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세계이다. 추사가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학문을 성취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쳐도 추사 예술세계의 본질은 다른 차원이다. 예컨대 추사가 서거하기 몇 개월 전에 쓴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 깐깐하고도 굳센 힘과, 의 까칠한 먹자국과 군더더기 없는 붓질, 그리고 추사의 마지막 글씨인 봉은사의 같은 글씨에서 드러나는 비할 데 없는 강건함과 진솔함은 ‘학예일치’란 개념적 틀로는 도저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추사의 교유 관계만 보더라도 그 범위가 매우 넓어서 단지 학문적 차원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볼 수 없음을 알게 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서화가들은 물론 청나라 학자 및 서화가, 불교계, 중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층적이고 폭넓은 교유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결국 추사의 예술세계는 실로 복잡한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 그리고 다양한 인적 관계, 학문적, 문화적, 예술적 배경이 총체적으로 종합된 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추사의 예술세계를 ‘학예일치’로 보는 것은 추사 예술의 진면목을 일면적 틀로 한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나는 가치 있는 예술이 타고난 천품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천재적 재능의 소산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예술의 뿌리를 학문으로 보는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그저 학자들이 규정한 미술사적 관점에서 작품을 보는 것도 당연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가능한 한 관념적 이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작품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할 때 그것을 만들어낸 이의 진면목이 드러남을 무수하게 체험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추사의 글씨나 그림도 다르지 않다. 나는 추사관련 전시회라든가 그와 관련된 글을 읽을 때마다 추사의 예술가적 면모는 ‘학예일치’라든가 ‘서예’ 또는 ‘문인화’란 장르로 한정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추사라는 인물이 워낙 복잡다단하면서도 온갖 풍상을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우리 전통예술계의 맥락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최후의 거대한 산마루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추사에 대해 그저 학문적 경지를 드러내기 위해 예술 활동을 한 사람으로 보거나, ‘추사체’와 ‘문인화’를 잘한 예술인으로만 이해해서는 그의 삶과 예술세계는 물론 우리의 전통 예술의 주요 단면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는 추사라는 인물을 통해 역사와 전통 예술의 관계는 물론 예술의 본질적 특성과 가치에 대해 깊고 넓게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6년 10월 24일 도 병 훈(작가) 주1) 예서 대련으로 전문은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이며,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뜻임. 주2) 행서 대련으로 전문은 万樹琪花千圃葯 一莊修竹半牀書(만수기화천포작 일장수죽반상서)이며, ‘만 그루 기이한 꽃 천이랑 작약 밭 한 둘레 시누대 반 쌓인 상(책상) 위 책’이라는 뜻임. 주3) 장황사는 ‘표구’를 하는 사람의 전통적 명칭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종이를 표현수단으로 썼기 때문에 이러한 ‘장황’의 기능과 역할은 매우 중요시되었으며, 이는 단지 장식적 꾸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사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구 방법은 대개 일본식 표구다. 예컨대 족자 옆에 비단으로 된 화려한 장식 문양이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표구 방식이다. 주4) 『周易』 계사(繫辭) 상(上)의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에서 유래한 말임. 주5) 이 시기 정조는 49세에 순조는 42세, 그의 아들로서 대리청정을 한 왕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증됨)는 22세. 그 다음 헌종은 23세로 요절하는 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독살된 것이 분명한 정조는 물론 이후의 왕이나 왕세자도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음모에 의한 독살로 추정되는데 이 시대가 그만큼 음험한 정치적 모략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는 헌종 다음의 철종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자무식의 왕가 지손이 보위에 오른 왕인데서 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주6)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아들이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오라버니다. 추사와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교분을 유지하면서 그림과 글씨까지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한 때 정략적 차원에서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을 고금도로 유배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주7) 나는 지난 2004년 ‘세한도 다시 보기’란 졸고에서 이러한 논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다.
47 no image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를 출간하며
소나무
4636 2007-06-05
그간 준비해온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두리미디어)'을 출간했습니다.(오래전부터 출간 준비 중인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은 12월에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예정임) 청소년을 위한 책이어서 일견 다른 청소년을 위한 책들과 겉으로 보기에 유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에서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쓴 책입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시고 애쓰신 분들께 이 면을 통해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머리글인 '책을 내면서' 부분을 아래에 옮깁니다. 책을 쓰면서 “도시의 공기를 더럽히는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처럼,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 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라는 말이 있다. 동서양의 예술에 대해 획일적으로 해석하고 길들임을 비판한 것이다. 사실 과거의 예술 그 자체를 완전하게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을 바탕으로 글 쓰는 이들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틀로 쓴 것이다. 이는 미술사도 다르지 않으므로 과거의 어떤 예술 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려 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면을 생각하면서 보아야 한다. 흔히 보는 오류는 ‘위대한 예술이란 타고난 위대한 천재들이 창조한 것이다.’ 라는 식으로 예술가들을 신화화하거나 영웅시하거나 예술작품에 대해 항구 불변의 가치를 지닌 실체인 양 미화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평가되는 가치 있는 미술은 한 시대를 진실하게 살고자 한 예술가들의 정신적 모험의 과정이자 흔적이다. 이 책은 이러한 한 시대의 정신성을 잘 드러내는 서양 미술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서양의 역사는 그리스 문명 이래 그들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삼아 삶과 문화를 잇고 또한 극복하고자 한 과정이다. 이러한 서구의 문명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활자의 발명,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회 정치적인 사건, 산업혁명, 과학의 발전 등으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즉 인간이 삶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표현됨으로써 서양의 고대나 중세와는 질적으로 매우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한다. 이는 정치 경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지만, 무엇보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 영역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들 세 영역은 당시 서양의 의식과 정신세계를 대표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에서 예술 영역은 인간의 의식과 감성이 함께 확장되고 심화되어 온 과정이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들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해주었다. 이러한 작가들의 새 의식은 특히 현대미술의 경우 새로운 시각적․조형적 ‘코드code’와 ‘어법idiom’으로 드러난다. 이 코드와 어법은 약속된 도상(icon)이나 기호로 의사소통을 하는 체계가 아니며 보는 사람의 관점과 미적 감수성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각자의 주관대로 감상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보기에 어떤 작품이 무의미하게 느껴져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주관 중에는 편향적인 기억이나 체험에 의해 옳지 않은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관적 관점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태도와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태도와 자세로부터 우리는 편견과 인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만큼 삶의 폭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이처럼 예술에 대한 다양한 체험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우며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감성적이고 지성적인 체험을 통해 삶과 세계를 자각하는 데 있고, 이를 바탕으로 참된 미술은 예술과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가치임을 알게 한다. 누군가 히말라야 산 속을 다녀와서는 그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예술작품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도 이처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더 열린 마음으로, 더 풍요로운 정신으로 이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청소년들이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른 예술의 가치를 알고 삶과 문화를 깊고 넓게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끝으로 대학의 선후배로 만나 미술을 보는 시각을 일깨워준 오상길 선생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이 책을 쓰도록 인연을 만들어준 류대곤, 김인기 선생님, 필자에게 선뜻 집필을 의뢰해준 최용철 사장님, 두리 미디어 편집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46 no image 글, 그림, 그리움에 대한 단상
소나무
6274 2007-06-05
글, 그림, 그리움에 대한 단상 1. 글이란 말의 어원은 어학자의 연구를 보면 ‘긁다’와 그 뿌리가 같은 말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긁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문인들이 원고를 긁는다고 했다. 그림이란 어원도 긁다와 같은 뜻이다. 글씨를 긁으면 글이, 모양을 긁으면 그림이다. ‘그리움’이나 ‘그리다’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모습을 긁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러므로 그리움이란 말은 종이가 아니라 마음속에 쓴 글이요, 그림인 셈이다. 불교의 경전인『보현십원가』에도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 앞에....’란 아름다운 구절이 나오듯 그리움은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이요, 글이다. 현재에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을 찾는 것이 그리움이다, 즉 사라진 과거나 앞으로 올 미래가 그리움이다.그러므로 언제나 그리운 것과 그리는 것은 눈앞에 부재하는 것이다. 주1) 결국 글은 바로 그 부재의 것을 현존케 하는 힘이다. 글은 긁는 것이며 문자로 쓴 그림이며 과거의 그리움과 미래를 그리는 행위이다. 위의 글은 이어령 선생의 책을 보고 요약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으면서도 정작 그림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 몇 년 전 신영복 선생의 책에서 그림의 어원이 그리움 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고 과연 그럴까 싶었는데, 위의 이어령 선생의 글을 보니 글과 그림, 그리고 그리움의 어원이 ‘긁다’에서 유래한 것이 사실인 듯하다. 아득한 옛날 인류의 조상들이 땅에다 막대기로 무언가 그리기(긁기) 시작했고 그것은 무언가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이거나 그리운(?) 모습이었을 거라는 것은 추측하기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2. 오늘날 글과 그림은 엄연히 다른 방식의 의사소통 방식을 가진 영역이다. 글은 글자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말을 단순한 형상이나 추상적 기호로 말뜻을 표현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즉 글은 기호들을 배합하거나 기호의 배열순서에 따라 글은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이러한 기호체계가 축적되면서 의미망이 형성되었고 마침내 추상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사고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호로서 이러한 사유체계를 구축하게 된 이후 인류는 구체적인 세계를 연역적으로 규정하게 되었고, 그 후 인류는 그러한 사고로 이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반면에 그림의 역사는 언어처럼 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림의 역사는 추상적 사고를 정립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징의 역사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상징이란 문명권 코드마저 부정한 역사이기도 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림과 언어는 오늘날 전혀 다른 차원이 되었다. 즉 그림은 기호 이전의 영역이기도 하고 기호를 넘어선 세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떤 말의 어원은 최초의 동기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와 예술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그림의 경우 긁기에서 단단한 바위에 파는 행위로 확장되거나 나아가 칠하게 되고, 오늘날에는 영상매체까지 나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긁거나 파거나 칠하거나 영상매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기법적 차이’에 지나지 않음도 알 수 있다. 3. 뭔가 막연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어학자의 일설일수도 있겠지만 우리말인 글과 그림의 어원이 같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부재’의 것을 현존케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그림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즉 글이나 글이 지향하고자 하는 ‘그리움’의 표현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정신적 가치의 근원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글과 그림은 엄연히 별개의 영역이다. 따라서 화가의 입장에서 그림의 기원을 생각해보는 것은 그림의 가치를 원점에서 다시 성찰하는 일인 셈이다. 결국 문제는 역시 왜 표현하려는가, 다시 말해서 무엇이 그리운 것인가 다. 그렇다면 참, 즉 진짜(眞)와 가짜(假)를 구별하는 데도 이러한 어원이 참고가 될 것이다. 2006년 10월 18일 도 병 훈(작가) 주)주1)영어의 miss도 ~이 없음을 깨닫다. ~이 없어서 적적(서운, 허전)하게 생각하다, 그리워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45 no image 전통사찰 공간 탐색-봉정사 답사기
소나무
4890 2007-06-05
전통사찰 공간에 대한 탐색 1. 영국에서 기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승객을 태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업혁명을 통해 필요해진 에너지인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기차가 승객을 태우는 수단이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물론 세상을 보고 체험하는 지각방식마저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체험 과정이 생략되어버리고 오직 목적지에 얼마만큼 빨리 도달 하는가 만이 목적이 되었다. 이에 따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은 획일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으로 변모하였으며, 결국 속도가 현대인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땅에서도 급속한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도로망이 전국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교통수단 발달의 결과는 단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하는데 기여했지만 그만큼 우리도 시간이 공간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살게 되었으니 최근에는 초고속 기차인 KTX까지 생활화되었다. 시간을 절약하게 된 대신 그 대가로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는 거리가 먼 공간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근래에 지어진 사찰들이나 중창불사를 한 사찰들도 공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얼핏 보면 옛 전통 방식대로 건물들을 번듯하게 지은 듯 보이지만 우리의 옛 조상들이 지녔던 공간에 대한 깊은 통찰의 지혜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지어 돈을 더 받으려는 건축업자들의 이해타산과 엄청난 규모의 사찰 공간으로 신자수를 늘이려는 속셈만이 보인다. 2. 어쩌면 인간은 언어를 갖게 되면서 참 실재(reaㅣity)의 공간에서 살지 못하게 된지도 모른다. 참 공간이 아닌 언어로 개념화된 세상 속에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게 된 계기는 체험 당시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공간을 통해서다. 이러한 공간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 까닭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왔다. 그 결과 나는 그러한 기억이 단지 머리의 특정 부위에서만 일어난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이 아니라 온 몸, 즉 오감(五感)을 통한 구체적 체험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도보나 마차로 여행하던 시절 인간은 온몸으로 대지를 느끼고 대지와 호흡했다. 사실 인간들은 오랫동안 엄연히 숨쉬고 호흡하는 자연 공간 속에서 살았다. 이런 차원에서 자연체험과 문화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우리의 전통적 사찰 공간이나 옛 정자, 그리고 서원의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한국의 사찰이나 서원, 그리고 정자가 있는 공간들은 그 건물만 따로 떼어서 그 가치를 평가하는 인식의 틀로는 결코 측량할 수 없는 크고 깊은 세계다. 전통적 지리관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건물과 그 주변 공간은 저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만큼 유니크한 세계다. 나는 이러한 공간 중에서도 그 공간에 들어서는 진입공간에 들어설 때 가장 마음이 설레며, 나에게는 자연의 숨결과 인간적 의지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그러한 공간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 공간은 특히 늦가을 무렵이면 폐부를 저미는 것 같은 은은한 강물 같은 고적한 공간이다. 사실 흐느끼는 듯 구성진 아리랑의 곡조를 연상케 하는 그러한 공간은 예전에는 이 땅 어디에서나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서는 그러한 공간은 많지 않다. 그러한 길들은 거의 대부분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한 넓은 직선 길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의 전통적 공간이 나아 있는 곳이 있다. 그 주요 예로는 울진에 있는 천축산 불영사와 가야산 해인사, 그리고 안동에 위치한 천등산 봉정사와 병산서원 가는 길, 영양의 서석지 진입로 등을 꼽을 수 있다. 사찰의 경우 진입공간은 일주문(一柱門)에서 천왕문(天王門)을 지나 해탈문(解脫門) 앞에 이르는 공간을 말한다. 유서 깊은 전통 사찰의 경우 이 진입 공간은 흔히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적송이나 참나무가 우거진 숲길이며, 계곡 옆으로 길이 나 있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가기도 한다. 이 진입공간은 대개 완만하게 경사져 있고, 게다가 구부러진 곡선으로 이루어진 길로서 때때로 돌기둥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 당간 지주(절에 행사가 있을 경우 기를 다는 곳임)나 부도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 공간에서는 대개 사찰의 중심공간에 위치한 대웅전 건물이 아직 보이지 않으나 시간상으로는 짧게는 2-3분에서 길게는 10여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다. 내게는 이 공간이 짧지만 무한히 긴 공간인데 그것은 굽었으되 곧은 공간이며 곧은 공간이되 굽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찰의 경우 얼핏 이 진입 공간은 대웅전 영역의 바깥경계인 해탈문 앞 공간이나 대웅전 앞마당, 대웅전 속 공간에 이르는 첫 단계이지만 나는 한국의 어느 사찰이든 그 진입공간의 자연스러움과 고즈넉한 아름다움으로 그 사찰의 품격을 가늠한다.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de 1907~1986)에 의하면 성과 속은 ‘세계 안에서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찰의 진입공간은 성(聖 the sacred) 과 속(俗 the profane)의 경계이기도 하다. 즉 진입공간은 성소와 속계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3.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에는 봉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작년 어느 청명한 가을날, 나는 봉정사에 갔다. 안동시내를 벗어나 의성김씨 학봉 종택이 있는 곳을 지나 얼마간 가자 봉정사가 있었다. 깊은 산 속에 있는 절은 아니었지만 승용차로도 한참 동안 시골의 국도를 달려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산속 눈부신 햇살아래 봉정사의 일주문은 세월 속에 빛바랜 단청 색깔과 어우러져 더욱 고색창연했다. “천등산 봉정사”라는 현판도 허세가 없는 글씨였다. 그리고 일주문을 지나자 언덕 위 숲 속으로 해탈문을 대신한 누각의 지붕이 보였다. 이처럼 한국의 절들은 산지 지형상 해탈문 대신 누각 형태의 전당이 지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누각 밑을 통과하는 것이 곧 해탈문을 통과하는 것이 된다. 봉정사의 누각 이름은 만세루다. 이윽고 만세루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올라섰다. 조금도 다듬지 않은 돌들을 대충 얼기설기 배치해 놓았다싶을 정도로 소박한 돌계단이었다. 만세루 밑을 지나자 중후한 대웅전이 그 당당하고도 시원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선 여말 또는 선초 건물로서 전형적인 사찰구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목조건물 외부로 툇마루가 있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예였다) 기둥사이가 넓고 5포작(包作: ‘공포栱包’라고도 하며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 맞추어댄 나무쪽임)이라서 포작 사이의 벽이 넓어 보였다. 내외이출목의 공포를 바깥쪽은 소 혓바닥 모양(牛舌形)으로 안쪽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짜놓았다. 가구(架構: 공간을 형성하는 목조건물의 골격구조)는 일고주구량가(高柱는 일반기둥인 평주보다 더 키가 큰 기둥으로 일고주 구량가란 고주 하나를 세워 9개의 량梁 즉, 대들보를 구성하는 방식이다)란 이며, 비교적 깊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대웅전 안에는 어느 절이나 그러하듯 부처가 모셔져 있다.(양산 통도사의 경우 대웅전에는 부처가 없다. 이는 그 뒤쪽에 석가의 진신사리탑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안에는 세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삼세불(과거, 현세, 미래불)이나 삼신불(보신, 법신, 화신불) 혹은 삼계불(동쪽, 중앙, 서쪽불)을 상징한다. 이러한 배열구조는 종파에 따라 다르며 화엄종의 경우 서방정토의 교주인 아미타여래불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로 관세음보살(자비의 문을 담당)과 제세지보살(지혜의 문을 담당)을 거느린다. 아미타여래불은 무량광불(無量光佛) 혹은 무량수불(無量壽佛)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한량없는 빛과 한량없이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구원을 상징한다. 즉 광대무변한 커다란 빛(光明)을 상징한다. 돌이나 금속, 혹은 진흙으로 형상화한 유한한 개체가 무한한 우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법신상주(法身常主)의 사상 때문이다. 법신은『반야바라밀다심경』에 집약되어 있듯, 궁극적으로 공(空)의 세계와 둘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부처를 향하여 복을 빌거나 소원을 성취하려는 것은 불교의 본연과 배치되는 행위이다. 허공을 향해 복을 구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진입 공간은 무한한 빛과 무한한 공간을 향하는 길인 것이다. 대웅전 옆에 위치한 맞배지붕의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 중기인 12세기경에 지어진 건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보다 이 건물의 단아하고도 소박한 자태를 좋아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곳이 놓여 있는 공간을 전제로 그렇게 느낀다. 이러한 중심 공간을 지나면 봉정사에는 또한 영산암이라는 건물이 자리 잡은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흔히 우리의 사찰 건축을 보기 위해서는 특정건물이나 화려한 색상을 주목하지 말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빈 공간을 눈여겨보라고 한다. 나는 바로 영산암이 그러한 공간의 표본으로 본다. 영산암 마당은 높이가 약가 차이가 나는 두 개로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공간을 가르는 지표는 계단과 그 옆 바위 위에 있는 한 그루 소나무다. 이 소나무와 계단은 두 개의 공간을 나누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어주기도 한다. 천 여년 긴 세월 동안 가람을 가꾸어온 옛 선조들의 지혜가 스며있는 전통 사찰 공간에 실감할 수 있듯, 이러한 점은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과 비교하면 그 특성이 너무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한국의 가람 건축은 시대와 신앙적 배경은 물론 지역과 지형에 따라 그리고 그 지방의 건축가인 대목들에 따라 다양한 형식과 차이가 있다. 그 곳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청자색 반투명의 공간이자 미묘한 회색 같은 그윽한 공간이다. 그 곳은 백자의 그릇처럼 고우면서 대범한 선율이 있는 공간이다. 이처럼 유서 깊은 전통사찰 공간은 문명과 인간과 삶의 토대인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알게 한다. 4.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인간의 몸은 진화하며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왔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이 세상은 지난 수백 만 년을 능가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인간의 몸은 여전히 넓은 초원과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워한다. 여전히 나의 몸은 자연의 깊은 품안에서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속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어도 그 효율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현대의 건물들도 전통 사찰처럼 지을 수는 없다. 또한 건물도 무조건 과거의 전통적 가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곳에 따라서는 현대적 공간이 더 어울리고 꼭 필요한 경우도 있다. 또한 건축의 기술적 측면은 현대에 들어 훨씬 발전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은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며, 이는 곧 도구적 편리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그 위치하는 장소와 건물과 건물의 사이 공간을 어떻게 배치를 하는가는 단지 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전통 가람이 있는 사찰 공간은 자연과 문명이 공존하는 지혜가 담겨 있는 공간으로 자연과 문명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알게 하는 공간이며,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이야말로 나의 존재근거로서 삶의 방식을 결정함을 자각하게 한다. 최근 들어 더욱 가속도가 붙은 문명의 흐름은 결코 돌이킬 수도 없으며,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획일화된 지각방식을 강요하는 공간은 동시에 오감을 상실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2006년 10월 12일 도 병 훈(작가)
44 no image 추사 글씨 귀향전을 보고
소나무
5380 2007-06-05
추사 글씨 귀향전을 보고 1. 어제 10월 1일, 과천 시민회관에서 ‘추사 글씨 귀향전’을 보았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글씨 및 자료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가 모은 것으로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가 2006년 초에 추사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인 과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이 유물을 기증하면서 “그동안 자료를 처리하지 못하여 죽지 못했으며, 추사 관련 자료가 지금까지 나를 살게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유물을 기증한 몇 개월 후 유명을 달리했다. 후지츠카 치카시(이하 후지츠카)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 유학 후 경성제국대학에서 청조학을 강의하면서 18-19세기 한 ․ 중 지식인들의 학술 교류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학자다. 그래서 그는 북경의 고미술품 거리 유리창과 서울의 인사동을 중심으로 한 고서점가 및 골동가게에서 중국학자와 조선학자간에 주고받은 많은 서간문, 탁본 책 등을 발굴하고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추사가 당시 국제적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가 쓴 박사 학위 논문도 「이조에 있어서의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문인화를 대표하는 『세한도』를 소장했다가 서예가 손재형의 간곡한 요청에 광복 직전 우리에게 돌려준 사실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기증된 자료는 추사의 친필 26점을 비롯하여, 추사와 청대 학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이상적, 추사의 아우로서 청대 학계와 교류가 깊었던 김명희, 그리고 추사의 스승인 박제가와 유득공 등에게 보낸 청대 학자들의 많은 글과 그림 등 서화류가 70여점에 이르며, 이외에도 관련 자료를 포함하면 모두 1만 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주요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번 기증 유물 중에 추사의 친필은 많지 않았고 추사체의 진수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현판 글씨 같은 대작도 없었다. 물론 이는 광복 직후 미군 폭격에 의해 후지츠카의 연구소가 불타면서 대부분의 추사 관련 자료가 불타 없어진 것도 그 원인이지만 후지츠카 집안이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아 학술적 1차 자료를 주로 수집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총독부 산하에 를 두어 역사를 왜곡한 식민사관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식민사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일본인 중에는 후치츠카 같은 사람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후지츠카도 처음엔 조선을 명(明)이나 청(淸)의 속국쯤으로 생각하고 조선이 중국의 문화를 어떻게 수용했는가에 관심을 갖다가 북학파와 추사를 알고 나서 조선 문명의 독자성에 충격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추사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도 기증 자료를 주는 과정에서 생전에 추사를 19세기 말에 중국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한류 열풍에 비유했다고 한다) 2. 이번 전람회의 출품된 자료 들 중 특히 추사의 중국인 스승인 옹방강(당시 청나라 최고의 학자이자 서예가였음)이 직접 쓴 유일본 책은 앞으로 연구 결과에 따라 조선 후기 북학파나 추사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다. 그럼에도 나의 주된 관심은 역시 추사의 글씨들이었다. 이번에 전시된 추사의 글씨는 거대한 현판 글씨도 대련 글씨도 아닌 서간(편지글)들이었다.(그래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대작은 전시장에서 볼 수 없다) 이 중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인 에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우선은 이상적의 호임) 이상적은 바로 추사의 와 관계있는 인물로서 에 그려진 곧게 자란 짙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는 바로 이상적의 변치 않은 마음을 상징한다. 란 서간은 추사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생애 마지막에 쓴 추사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글이어서 한동안 발길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록에 번역된 내용과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눈으로 뒤덮인 산에 소리쳐 원안(袁安, 『후한서』「원안전」의 주인공)을 물으러 오는 일도 없는데 대안도(戴安道, 진나라 때 왕휘지의 친구)를 찾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뜻밖에 편지를 받으니 옛날 배공(裴公:미상)이 섣달에 받은 그 편지입니다. 초췌하고 적막한 이곳(과천)에서 어찌 놀랄 만큼 기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품격 높은 문장은 대단히 곱씹을 만할뿐더러 차가운 부엌에 온기가 돌게 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지내며 애써 몹쓸 글 짓느라 골몰하지 않으신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저는 추위에 대한 고통이 북청(제주 10년 유배가 끝난 얼마 후 가게 된 추사의 마지막 유배지로서 함경도에 위치함)에 있을 때보다도 더합니다. 밤이면 한호충(寒號蟲: 산박쥐)이 밤새 울어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날아갑니다. 저무는 해에 온갖 감회가 오장을 휘감고 돌아 지낼 수가 없습니다. 보내주신 물품은 모두 잘 받았습니다. 석노시(石砮詩, 이상적이 지은 철언 장편시)는 조화로운 화음이 봄빛처럼 고울 뿐만이 아닙니다. 영재(泠齋, 유득공의 호) 노인도 다시 돌아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서너 번을 되읽으며 남은 해를 그냥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새해를 맞아 만복을 빕니다. 積雪山嘷 旣無問袁 誰爲訪戴 忽枉尺緘 宛是與裵臘下書風味 蕉萃(췌)寂寞之濱 安得不欣然敍暢也 况高詠佳篇 大嚼煖肉 又覺冷廚(주)回暖 藉(자)想動靖隨喜隨安 不作氷柱雪車之惡札也 何等耿誦 賤狀 苦不勝寒 甚於北時 夜則一寒號蟲 朝起始爲得過鳥 逼歲百感 回膓轉輪無以銷受耳 來惠諸品 一以收到 砮詩極好 非徒鯨鏗春麗 泠齋老人 恐復瞠乎後耳 快讀三四 不虛抛此歲殘光矣 餘冀迓禧 不宣 臘 卄七 老阮 위 글 중 특히 실감나고 가슴에 와 닿은 구절은 추위와 밤새우는 산박쥐의 울음소리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묘사한 구절과 “저무는 해에 온갖 감회가 오장을 휘감고 돌아 지낼 수가 없습니다.”란 구절이다. 나는 이러한 구절을 통해 평생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추사의 실제 삶을 엿보게 되며, 나아가 예인(藝人)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동은 추사의 운필과 용묵법을 통해서 더욱 실감할 수 있다. 편지지에다 쓴 작은 글씨임에도 칼끝으로 목판을 예리하게 도려낸 듯 모가 나는 방필(方筆)에다 뼈가 드러나는 골필(骨筆)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묵(먹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바짝 마른 갈필을 많이 구사하고, 또한 태세(太細)나 장단(長短) 기울기 등에서 변화가 무쌍하여 극심한 동세와 대비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당시 추사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글 중간 중간 추사 특유의 수직으로 길게 내리 그은 선들에서 추사의 고고하고도 단호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숨결과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러한 운필과 용묵은 추사의 3, 40대 글씨에서는 볼 수 없으며, 그만큼 추사 말년 글씨의 특징들은 추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함축한다. 3. 나에게 있어 추사의 예술세계는 겸재의 산수화와 더불어 지난 수십 년간 늘 화두였다. 너무도 개성이 다른, 그러나 근본은 결코 다르지 않은 이 두 사람을 통해 나는 조선의 예술과 숨결을 생생하게 느껴왔으며, 그때마다 자랑스러운 조상을 가진 후예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그들의 예술적 성취는 너무도 크고 우뚝하여 당대 동 아시아 어느 누구도 필적할 이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이들의 예술적 성취가 무색할 정도로 급격한 쇠망의 길을 걸었고, 20세기 들어 결국 국권마저 상실해버린다. 이 격변과 혼돈의 와중에 우리의 전통적 정신문화는 실질적으로 단절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해방이후 새로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면서 지난 수십 년간 경제일변도의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이를 토대로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우리는 각 분야에서 우리 조상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자와 단절된 젊은 세대들에게 특히 전통정신이 담겨 있는 고전은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통예술은 다르다. 추사예술, 특히 거대한 현판 글씨의 경우 글씨의 뜻을 몰라도 얼마든지 예술적 흥취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서양의 일부 미술가들이 원시미술에의 동경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듯이 추사는 동양 서예의 기틀을 마련한 왕희지 이전의 서예인‘고비(古碑)’, 즉 원초적인 글씨로 돌아가서 자신의 서체를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난 90년대 이후 세계화(미국화) 바람이 거세지만 이러한 획일화의 바람에 맞설 수 있는 기틀은 역시 ‘고유성’이다. 물론 이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겸재나 추사는 조선의 선비로서 고유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당대로서는 국제적인 보편성을 지닌 예술을 성취했으며,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겸재나 추사로부터 배울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이후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해서도 그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듯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어느 사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동북공정뿐만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전선에 서 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06년 10월 2일 도 병 훈(작가) *올 가을 추사 서거 150주기를 맞아 국립 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에서 전시회가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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