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 5676
2007.06.05 (17:53:32)
extra_vars1:  ||||||||||||||||||||| 
extra_vars2:  ||||||||||||||||||||||||||||||||||||||||||||||||||||||||||||||||||||||||||||||||| 
추사(秋史)의 전<자화상>을 본 소감



1.
작년 가을에 추사 김정희 서거 150주기 기념전들이 간송미술관과‘국박(국립중앙박물관)’등 여러 곳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추사 관련 전시회가 장소만 달리하여 거의 동시에 개최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각 전시장에서는 각각 다른 추사의 예술작품, 또는 그의 학술서적, 그리고 유품들이 전시되었다. 선조들 중 이 정도로 방대한 예술 문화적 유산을 남긴 이는 추사가 유일무이한 존재다.(*수 백 점의 그림을 남긴 겸재 정선이나,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를 제외하면 실제로 전통 예인 대다수는 작은 방 한 칸 채울 정도의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지금도 예술의 전당(서예관)에서는‘추사 문자반야(文字般若)전(기간 : 2006. 12. 28-2007. 2.25)’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추사 서거 150년을 기리는 다양한 전시와 학술연구를 마감하는 최종 행사인 셈이다. 주1)

그러나 내가 이번에 이 전시를 보러간 주된 목적은 추사가 직접 그렸다는 <자화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자화상>은 그간 선문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이번 전람회를 통해 처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다. 주2)
추사의 초상화는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추사 김공상(秋史 金公像)>과 제자인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이 그린 <완당선생 초상>과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등 여러 점이 남아 있으며, 이들 초상화의 눈매라든가 굳게 다문 입술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이번에 출품된 <자화상>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한철과 허련이 그린 초상화들은 조선시대 특유의 도식화, 양식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평범해 보이며, 그래서 그들이 그린 추사 모습도 그저 온화하고 원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추사의 <자화상>은 조금도 꾸밈이 없는 극히 진솔한 모습이었다.    


2.
추사의 <자화상>은 세로 가로 32.0×23.5cm 크기의 한지에 상반신을 포함해서 약간 측면의 얼굴을 조그맣게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자화상>은 조선 시대의 다른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 채 검은 옷깃의 무명저고리와 탕건만 쓴 모습이어서 귀 뒤로 어지럽게 엉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구레나룻이 인상적이었다. 주3)
그러나 눈매는 가느다랗게 긴 그러면서도 끝이 약간 올라간 이른바‘봉눈’이어서 볼수록 범상치 않았다. 특히 형형하고도 예리한 눈빛은 예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유감없이 느끼게 하였다. 비록 작은 그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추사라는 인물의 실존적 리얼리티를 십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추사는 상단 오른쪽에 다른 종이를 오려붙인‘자찬(果老自題)’에서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 해도 나이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천궁(天宮: 하늘 궁전)의 여의주가 주렁주렁한 데 누가 큰 여의주 앞에서 모습에 집착하는가. 하하. -과천 노인이 스스로 제하다-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呵    果老自題

추사는 이 자찬을 통해 자기가 그린 얼굴 모습에 담긴 내면의 실상을 봐야지, 겉모습이 자신과 닮았느냐, 아니냐는 시시비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禪)적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과로(果老)’이라는 자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만년을 보냈던 과천 시절 즉 60대 중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무렵의 추사의 모습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의 「추사방견기(秋史訪見記)」가 그것으로 그가 13세 어린 소년 시절에 봉은사에서 보았던 광경을 약 60년 후 노년에 기록한 것이다. 그가 보았던 추사는 1856년, 즉 추사가 죽기 6개월 전의 모습이었다. 수 십 년 전에 본 기억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방안구석에 놓여 있는 물품들의 품목이나 작은 붓 큰 붓의 개수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그 중 추사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가운데 앉아계신 한 노인은 몸집이 자그마하고 수염은 눈 같이 희며 숱은 많지도 성글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옷 칠한 것처럼 빛났고, 머리는 벗겨져 머리칼이 없었다. 승관(僧冠)처럼 대쪽으로 짠 둥근 모자를 썼으며, 소매가 넓은 옥색 모시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얼굴은 젊은이처럼 혈색이 불그레했지만 팔이 약하고 손가락이 가늘어 마치 아녀자 같았으며, 손에 염주하나를 굴리고 계셨다. 여러 어른이 절하며 예를 갖추자, 몸을 구부려 답하고 맞으시니, 이 분이 바로 추사 어른인 줄 알게 되었다.…(후략)      

<자화상>에 묘사된 얼굴의 특징적인 부분과 위 기록은 대략 일치한다.
그럼에도 그림 윗부분의 자찬인‘과로자제(果老自題)’는 왜 다른 종이에 쓴 것을 오려 붙였을까하는 의문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추사가 그렸다는 사실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그림 그 자체로서는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이럴 경우 전통회화를 미술사가들은 <전(傳) 추사 자화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수 일간에 걸쳐 확대된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다시 보았다. 진품이 아니라면 제자가 그렸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보다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그림에서 여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추사의 <자화상>은 마치 렘브란트가 만년에 그린 자화상처럼 실존적 리얼리티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세한도>나 여타 <난> 그림들에서 느낄 수 있는 추사 특유의 졸박(拙撲)하면서도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필력과도 상통하는 깔깔한 성정의 필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진품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진작여부는 향후 실증적 연구를 통해 확연히 밝혀질 때까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야할 것 같다.    
사실 추사의 진적이나 그림으로 알려진 것 중 다른 사람의 것이나 위작(僞作)으로 보이는 것들이 상당수 있으며, 전시회를 할 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이번 추사의 <자화상>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과연 추사가 그린 것일까 미심쩍기도 했던 것이다. 주4)    

3.
반 고흐의 <해바라기>나 <아를의 침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예술가들이 표현한 모든 작품들은 그 자체로서 화가의 정신적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추사의 그림, 예컨대 <세한도>의 소나무나 집 모습에서도 추사의 정신적 단면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술가의 자화상은 대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 있으며, 그만큼 예인의 삶을 알 수 있는 결정적 텍스트다. 무엇보다 자화상은 그리는 사람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나는 자화상 혹은 자소상에 대해 더욱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
사실 이번 전시회를 보기 전까지 과연 추사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렸을까, 또한 정말 추사가 그린 진품일까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자화상>은 공제 윤두서(恭齋 尹斗緖, 1688-1715),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계보를 잇는 자화상으로 명확히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추사의 예술세계를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자화상이 그간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확증할 증거가 없는 데다, 그의 글씨가 워낙 많고 또 <세한도>,<불이선란도>, <고사소요도> 같은 다른 그림에 가려 상대적으로 간과한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추사가 그렸다는 <자화상>을 보며, 추사의 예술과 삶에 대해 좀 더 그 면면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세상과 삶을 꿰뚫어보는 듯한 추사의 눈빛에서 그의 올곧은 삶과 파란만장했던 삶을 실감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예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생각하게 되었다.        

                                2007년 새해 원단에
                                                도 병 훈  



주1)이번 전시회에서는 ‘추사학예의 화두’라 할 수 있는 ‘문자반야(文字般若)’ 묵서도 처음 공개됐다. 전형적인 해서로 썼으며, 추사는 이 문구를 가장 아낀 제자인 소치 허련에게 주었다. ‘문자반야’는 부처가 말한 경(經), 율(律), 논(論) 전부를 가리킨다. 이외에도 ‘道德神僊(도덕신선)’ ‘賜書樓(사서루)’ 등과 ‘완당제산곡신품첩(阮堂題山谷神品帖)’ 등 분야별 대표작 100여점이 출품되었다. 그리고 박제가(朴齊家)의 ‘한거독서(閑居讀書)’, 정약용(丁若鏞)의 초서병풍, ‘사언고시(四言古詩)’ 등 사우·문인관계 작품 50여점, ‘세한도발문(歲寒圖跋文)’ 등 한중교유관련 문서 50여점, 추사가의 한글편지 등 가계작품 50여점 등 총 250여점을 볼 수 있다. 이동국 예술의 전당 학예사는 “지금까지는 추사의 글씨에만 포커스가 맞춰진 것은 사실”이라면서 “이번 전시는 시서화(詩書畵), 유불선(儒佛仙), 문사철(文史哲)을 관통하는 전인적인 인물로서의 추사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주2)‘예술의 전당 추사 김정희’를 검색하면 인터넷상이나마 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주3)우리의 전통 초상화를 연구해온 성균관대 조선미 교수는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소략한 옷 처리와는 달리 봉황 눈과 얼굴, 봉발에 가까운 털이나 수염 묘사는 리얼리티의 극치를 이룬다.”
주4) 이동국 학예연구사는 전문가들로부터 “추사 스스로 거울 앞에 앉아 곰살 맞게 그리지 않으면 절대 그릴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했다.
Tag List
 

17598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이박골길 75-33 | Tel. 031-673-0904 | Fax. 03030-673-0905 | Email: sonahmoo@hanmail.net

Copyright ⓒ 2002- Alternative Art Space Sonahmoo all right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