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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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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秋史 文字般若 展

-        도병훈선생의 소개글을 보완하는 영상물과 글(도록에서 옮김)













“반야” 란 범어(梵語)로 prajna 라고 하며, 지혜(智慧)를 뜻한다. 이는 초월적 지혜, 즉 인간 생명의 근원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예지(叡智)이므로 이기적인 분별심을 초월한 예지, 혹은 근원적인 예지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이를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실상반야는 진리 이치 그 자체(理經)를 말하고, 관조반야는 사물을 텅 비어 있는 모습으로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즉 근원자리를 사무쳐 뀌뚫어 보는 지혜를 말 한다. 문자반야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 . 율(律) .논(論) 전부를 가리킨다. 이는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를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김정희가 지향했던 학문과 예술도 결국 모든 사물의 도리를 분명히 뀌뚫어 보는 깊은 지혜, 즉 문자반야의 경지였을 것이다.”

1.        <道德神僊>






  “끝에 적힌 관자를 통하여 침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 판서에 오르자 이를 축하하는 뜻으로 써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김정희가 30년 동안 고심한 뒤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그의 호를 써준 글씨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윤정현의 자는 계우, 호는 침계, 이조판서를 지낸 行恁의 아들이다.
늦게 출사하였으나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가문의 배경으로 인하여 급속히 승진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고, 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비문에 능하였다.
김정희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 함경도감사가 되어 김정희를 돌보아 주었다.”


2.        <賜書樓>




        “임금에게 서적을 하사받아 보관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현판으로 보인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와 비슷한 구도이다. ‘사(賜)’ 자는 좌측의 ‘貝’ 를 위로 올려 쓰고 오른편 ‘易’ 의 빠짐을 길게 하여 다른 글자와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서(書)’ 자에 원래 없는 삐침 획을 더한 것과 루 의 모양도 거의 비슷하다.”

3.        <완당제山谷神品첩>
        







    “김정희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이며 화가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 쓴 서첩의 위쪽 여백에 [신곡이 글씨 쓰는 것을 논함(神谷作字)]이라는 그의 글을 인용하고, 그 아래 자신의 견해를 적은 작품이다. 뒤에는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대하여 논한 글이 실려 있는데, [왕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에 수록되어 있다.”

4.        朴齊家(1750-1805), <高士讀書圖>






“고목 아래 적막한 산정에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이 원형의 창을 통하여 보인다. 좌측 아래는 조선 박제가라 적고 朱文方印 1顆를 찍었는데, 印文은 ‘제가(齊家)이다.
박제가의 자는 차수, 재선, 수기, 호는 초정 . 정유. 위향도인이다.
소년시절부터 시 . 서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을 미롯한 이덕무 . 유득공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등과 함께 <건연집)이라는 사가집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1778년에는 사은사 채재공을 따라 아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하여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하였는데,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저서로는 <北學議> . <貞蕤集>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정희 이전에도 박제가와 같이 시서화에 뛰어난 인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사들과 교류하며 文才를 떨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丁若鏞(1762-1836), <四言古詩>






    “다산이 사언체 고시를 초서로 쓴 6곡 병풍이다. 종이에 비하여 작은 붓, 혹은 붓끝을 이용하여 활달하게 썼다. 여백 속에서 세세한 운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다산은 초사보다 24세 위이다. 그는 외국으로 사신을 가지 않았지만 강진에 유배되어 18년동안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김정희가 다산에게 답한 서찰이 [왕당전집] 4권에 실려 있다.”

    8. <歲寒圖跋文>






6.        <實事求是箴>






“근대의 추사연구자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는 앞부분을 김정희가 옹방강이 두 번째로 보낸 편지를 읽고 지은 찬사라고 하였다. 차례를 바꾸어 쓰기도 한다. 후반부를 더하고 箴이라는 말을 붙였다.
    이보다 앞서 김정희는 [實事求是說]을 지었다. 여기에는 학문의 방법 뿐
    아니라 학문의 지향점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김정희는 [실사구시설] 첫머리에서 “구체적인 일로써 실질 되게 하고
    옳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이다. 만약 구체적인 일로
    써 실질되게 하지 않고 다만 공허한 학술을 방편으로 삼으며, 옳음을
    추구하지 않고 다만 선입견을 위주로 삼으면 성현의 도에 역행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당집] 제1권에 실려 있다. 여기에서 ‘
    실사는 한학의 훈고학적 실증주의를, 구시는 송학 즉 주자학의 의리적
    도덕주의를 지칭한다. 김정희는 바로 그의 학문의 지향점인 ‘실사구시’를
    통하여, 한학과 송학 즉 훈고학과 의리학의 절충 혹은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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