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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17: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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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블랙커피’와 예술가의 삶

 

 

1.

사람들은 어떤 대상이든 어릴 때부터 언어를 통해 이해하고 익히므로 그렇게 인식한 대상을‘실재(reality)’라 생각한다. ‘하늘’이란 개념도 하나의 약속된 기호일 뿐 하늘 그 자체(reality)는 아니다. ‘돌’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돌은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과 달리 만질 수 있는 대상이지만 생각 속의 돌은 언어, 즉 관념이다.

우리인간은 언어로 소통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언어가 동어반복의 시스템 및 권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기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신념으로 변하는 시대를 산다. 그래서 변치 않은 신념으로 변하는 현실을 재단하며, 그만큼 언어적 틀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서 벗어난 현대예술가들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으로 마르셀 뒤샹을 꼽을 수 있다.

 

2.

마르셀 뒤샹은 죽기 2년 전인 1966년, 당시 젊은 비평가였던 카반느와 대담을 한다. 이 대담에서 뒤샹은 모든 사회적 제도와 체제로부터 자유롭고자 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평생 발표한 작품(뒤샹은 자신의 작품을 무조작이라는 의미에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에 대해 말했다. 대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카반느가 빈의 논리학에 관해 묻자 뒤샹이 답변한 부분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빈의 논리학자들은 어떤 체계를 엮어낸 것인데,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모두 토털로지 tautology, 말하자면 전제의 반복(동어반복)입니다. 수학에서는 매우 단순한 정리定理에서 복잡한 정리에로 나아가는데 모든 것은 최초의 정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형이상학도 토털로지, 종교도 토털로지 모든 것이 토털로지입니다. 이 블랙커피만 제외하고. 이것에는 감각의 작용이 있으니까. 눈이 블랙커피를 보고 있다는 것은 감각기관이 작동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진실입니다. 다른 나머지는 언제나 토털로지 입니다.”

 

지난 90년대 초반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말은 그 어떤 작품이나 비평적 이론보다 뜻 깊은 메시지였다. 현대예술과 예술가의 길을 자각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위 말의 핵심은 블랙커피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다. 즉 학문이나 제도적 현실은 관념적인 언어의 영역이며, 따라서 그 세계는 실재 세계(reality)가 아닌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진 동어반복적 세계이지만 몸으로 지각하는 감각적인 세계는 ‘진실((reality)’이라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 이래 서구를 지배해왔던 주된 인식론을 뿌리 채 부정한 말이며, 무엇보다 현대예술의 주된 특성을 암시하는 말이다.(플라톤은 참 실재는 감각을 통해 알 수 없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감각적인 현상을 넘어선 관념, 즉 이데아만을 참 실재로 여겼다.)

흥미롭게도 위의 대화를 연상케 하는 일화가 한자 문화권인 동양에서도 있었다. 중국 당나라의 한 젊은 승려가 출가하여 오랫동안 수도하다가 더 이상 진전이 없어 당시 최고의 선사로 알려진 조주스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부처(바로 아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조주의 답변은 “끽다거(喫茶去)” 즉, “차나 한 잔 마시게.”였다. 즉, 온갖 경전에 나오는 언어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차를 마시며 그 향을 맡고 미각으로 느끼듯, 살아가는 동안 온 몸으충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아는 자’의 삶이라는 뜻으로, 뒤샹이 말한 바와 다르지 않다. 이처럼 선불교에서의 깨달음은 개념적 앎의 차원이 아님을 수많은 화두를 통해 입증한다.

이러한 화두의 한 예로 ‘병 속의 새’가 있다. 어떤 젊은 승려가 출가하여 아무리 공부해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역시 당대에 유명한 대선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 선사가 말한 화두와 일화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입구가 좁은 커다란 항아리가 하나 있다. 그 항아리 속에다 갓 부화한 거위 새끼를 한 마리를 넣어 놓고 모이를 주어 커다란 거위로 길렀어. 그런데 항아리를 깨지 말고 거위도 죽이지 말고 ‘거위’ 즉 새를 그 병에서 나오게 하라는 거지. 어떻게 하면 그 새가 나올 수 있을까? 그 새를 산 채로 병 속에서 나오게 하는 법을 안다면 너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그 날 이후 젊은 승려는 어떻게 하면 병 속의 새를 나오게 할 수 있을까?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3일이 지나고 3개월이 지나고 마침내 3년이 지났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대선사를 찾아가, “제가 3년이나 생각했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새를 나오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대선사는 “내일 다시 이 자리에 오면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젊은 승려가 막 돌아서서 몇 발자국을 걸어 나가는 순간, 대선사는 젊은 승려를 다시 불렀다. 그가 무심코 돌아보는 순간, 대선사는 “나왔다.”라고 말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뜻밖의 사태에 젊은 승려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곧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깨우침을 얻는다.

 

새는 어떻게 병 속에서 나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스승이 말한 병과 새는 개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스승이 그런 얘기를 하는 순간부터, 그 젊은 승려는 ‘병과 새’를 실제로 존재하는 ‘병과 새’로 생각해버렸다.

애초부터 새는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병 속의 새’만 불쌍하게도(?) 3년간 병 속에 아니 젊은 승려의 머리 속에 갇혀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얘기를 듣고 책을 읽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은 실재 대상을 전제로 한 개념적 인식이다. 우리의 생각은 약속된 기호체계를 빌린 개념일 뿐 실재 세계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가 이제 알을 깨치고 나오는 새처럼 부화할 시간이 되었음을 안 스승의 절묘한 퍼포먼스 덕분에 그 제자는 언어와 실재 세계의 차이를 확연히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뒤샹의 말이나 선사들의 가르침은 언어 이전의 세계의 실재나 실존적 삶의 실상을 말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블랙커피나 차 한 잔의 화두에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 인식론적 개념과 실재 세계의 차이를 알게 하는 촌철살인의 뜻이 담겨 있다. 언어의 역사, 그 중에서도 문자를 발명하면서 지식을 축적해 온 것이 곧 문명의 역사이지만 이러한 언어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특정시대의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냄새 맡고 촉각으로 느끼는 감각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와 같을 정도로 장구한 시간 속에 형성되고 진화했다. 내 몸의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이 세상을 진정으로 만나는 가장 본질적인 느낌이자 실존을 자각하는 알파인 것이다. 현대 예술이 어떠한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에서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한 이면에는 이러한 자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술의 가치는 감각을 통해 삶의 자유을 확장하고 그만큼 풍요로운 삶을 사는 데 있다는 것이다.

 

2006년 11월 27일,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오는 날에

도 병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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