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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과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전을 보고


1.
지난 10월 22일 하루 동안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2006년 10월 21-29일)’을 간송미술관에서 본 후, 이어서 국립중앙박물관 기획 특별전인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전(2006년 10월 3일-11월 19일)’을 보았다.
올해 추사(秋史 金正喜, 1786<정조10년>~1756<철종7년>) 서거 150주기를 맞아 지난 9월에 과천에서 개최된 후지츠카 유물의 기증을 기념한 ‘추사 글씨 귀향전’에 이어, 이번에는 추사 관련 귀한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으로 유명한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큰 규모의 기획전을 연 것이다.
간송미술관에서는 늘 그러하듯 자체 소장품만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중앙박물관의 특별전은 특별기획전의 취지를 살려 개인소장품이라 자주 보기 어려운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추사의 편액 글씨 중 추사체의 진수를 보여주는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비바람에 깎인 볼품없이 깨진 빗돌에 남아있는 몇 개의 글자가 있는 집’을 뜻하는 당호임)>를 포함 지금까지 미공개된 추사 관련 유물까지 포함된 대대적인 전시회였다.
사실 추사 관련 전시회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한꺼번에 개최된 것은 지난 수십 년간 달리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는 앞으로도 수십 년간 이 정도의 대대적인 전시를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2.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에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명품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추사의 만년 작으로 추사체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팽두부(大烹豆腐)>주 1)와 <만수기화>주2)를 다시 보게 되어 좋았다면 국립 중앙박물관에서는 많은 예산을 들인 전시답게 전시 규모 및 여건과 전시 디스플레이, 그리고 관람객들을 위한 서비스 등에서 모처럼 특별전다운 좋은 전시회였다. 예를 들어 <세한도>의 경우 두루마리 전체(발문까지 포함하면 약 13m 길이임)를 다 펼쳐 놓았으면서도 발문을 일일이 다 번역해놓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세한도>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조희룡(趙熙龍, 1789~1866), 전기(田琦, 1825~1854) 허유(許維, 1909~1892)과 같은 추사 후학들의 예술세계도 함께 조명함으로써 일세를 풍미한 추사의 예술세계를 실감하게 하였다.    
또한  추사 백오십주기 기념전에서는 150주기답게 도록이기도 한 『간송문화(澗松文華, 제71호)』에서 최완수 연구실장이 그간 자신이 해온 추사 관련 선행 연구를 종합하여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까지 총체적으로 기술한 「추사 김정희」란 논문을 실어 놓았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 경지전’에서도 세 가지 논고를 실어 그간의 추사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면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박철상이란 고문헌 연구가가 그간 밝혀지지 않았던 『완당소독』에 대한 자세한 해독을 통해 장황사 주3) 유명훈(劉明勳)과 그와 관련된 『난맹첩』에 대해 소상히 밝혀내어 더욱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그간 이 『난맹첩』에 대해 위작설도 있었고 심지어 기생에게 준 것이라는 설도 있었음) 또한 추사 관련 방대한 자료를 해석한 도록을 발간하였다.

3.    
그동안 나는 추사의  예술세계 관련 글을 수차례 써왔지만 전시장에서 글씨와 그림을 보거나 추사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접할 때마다 그간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나 그림은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인다. 추사와 평생 금란지교(金蘭之交) 주4)의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간 삶을 살았던  권돈인(彛齋 權敦仁,1783~1859)이 이한철(李漢喆,1808~ ?)이 그린 추사의 초상 위에 쓴 찬문에서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山海崇深)’고 찬사를 쓴 것이 그저 과장된 수사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과 예술가의 삶을 이해하는 만큼 예술에 대해 더 깊게 알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이번 두 전시회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추사의 예술세계가 성립하게 된 과정이 이전의 선행 연구보다 좀 더 소상하게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회 전에도 추사의 가계와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 자세히 밝혀진 건 사실이지만, 최완수는 이번에 게재한 장문의 논문을 통해 그동안 석연치 않았던 추사의 행적, 그 중에서도 유배 경위를 당시의 정치적 배경의 진술을 통해 더욱 소상히 밝혀놓았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인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는 당쟁의 말폐가 극심하여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는, 참으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중상모략과 권력다툼이 점철된 시기였다. 주5) 즉 안동김씨의 행패가 극에 이른 시기에 오직 불세출의 예술로 버티고 살아남은 추사의 예술세계를 잘 드러낸 것이다.
특히 평생 추사의 삶을 고난에 시달리게 한 안동김씨 일문이면서도 추사와는 남다른 교분을 유지한 김유근(金逌根, 1785~1840) 주6)과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행적과 당시 세도 가문의 관계가 추사의 삶에 미친 영향 등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 이상으로 그 부침의 내력이 복잡했다. 이를 통해 추사가 겪은 만난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만큼 추사 만년 예술의 진면목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추사 자신은 당대를 대표하는 명문가의 자제로 평생 강직한 삶을 살았으나 거의 생트집에 가까운 모함으로 치욕적인 고문(제주도 유배를 가면서 권돈인에게 편지에서 “행동에서 선인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었고 그 다음은 나무에 꿰어 회초리를 맞는 욕을 당하는 고통인데 두 가지를 다 당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을 당하고 이어 약 10년 동안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해야 하는 역경을 겪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고난 속에 추사의 예술세계는 더욱 높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만큼 그의 예술세계는 진흙 속의 연꽃처럼 고고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추사가 옛 그림 장르 중에서 왜 그토록 선비의 맑은 인품을 상징하는 사란(寫蘭: 난초를 쓴다는 뜻임, ‘畵蘭’ 즉 옛 선비들이 ‘난초를 그린다’ 하지 않고 ‘난초를 쓴다’고 한 것은 형태보다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임)에 비중을 두었는지도 바로 추사가 살던 당시의 오탁악세(五濁惡世: 불교용어로 오탁은 겁탁, 견탁, 번뇌탁, 중생탁, 명탁을 말하며 오탁악세는 악한 일이 많이 야기되는 세상을 뜻함)를 이해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전시회 모두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간송미술관의 경우 역시 과거 여러 번 있었던 추사 관련 전시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전시의 타이틀을 ‘학예일치의 경지’로 한 것이 그러하다.
사실 ‘학문’과 ‘예술’은 결코 일치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이다. 물론 추사는 일세의 통유(通儒)로서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답게 자신의 예술관을 이른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 독서를 통해 온축된 향기)’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학예일치’를 지향한 것은 사실이고, 그만큼 상식적 통념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추사의 예술세계와 그의 학문 세계가 서로 일치한다는 관점에서 이를 전시 주제로 삼은 것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이며, 나아가 이는 예술의 본연의 가치에 대한 본질적 성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주7)
그것은 무엇보다 학문과 예술의 영역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논증적 진리나 가치론적 탐색에 진면목이 있는 학문과 달리 예술은 선천적 기질과 후천적 체험, 그리고 물성적 측면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세계이다. 추사가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학문을 성취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쳐도 추사 예술세계의 본질은 다른 차원이다. 예컨대 추사가 서거하기 몇 개월 전에 쓴 <대팽두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 깐깐하고도 굳센 힘과, <세한도>의 까칠한 먹자국과 군더더기 없는 붓질, 그리고 추사의 마지막 글씨인 봉은사의 <판전(板殿)> 같은 글씨에서 드러나는 비할 데 없는 강건함과 진솔함은 ‘학예일치’란 개념적 틀로는 도저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추사의 교유 관계만 보더라도 그 범위가 매우 넓어서 단지 학문적 차원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볼 수 없음을 알게 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서화가들은 물론 청나라 학자 및 서화가, 불교계, 중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층적이고 폭넓은 교유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결국 추사의 예술세계는 실로 복잡한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 그리고 다양한 인적 관계, 학문적, 문화적, 예술적 배경이 총체적으로 종합된 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추사의 예술세계를 ‘학예일치’로 보는 것은 추사 예술의 진면목을 일면적 틀로 한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나는 가치 있는 예술이 타고난 천품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천재적 재능의 소산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예술의 뿌리를 학문으로 보는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그저 학자들이 규정한 미술사적 관점에서 작품을 보는 것도 당연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가능한 한 관념적 이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작품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할 때 그것을 만들어낸 이의 진면목이 드러남을 무수하게 체험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추사의 글씨나 그림도 다르지 않다.
나는 추사관련 전시회라든가 그와 관련된 글을 읽을 때마다 추사의 예술가적 면모는 ‘학예일치’라든가 ‘서예’ 또는 ‘문인화’란 장르로 한정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추사라는 인물이 워낙 복잡다단하면서도 온갖 풍상을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우리 전통예술계의 맥락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최후의 거대한 산마루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추사에 대해 그저 학문적 경지를 드러내기 위해 예술 활동을 한 사람으로 보거나, ‘추사체’와 ‘문인화’를 잘한 예술인으로만 이해해서는 그의 삶과 예술세계는 물론 우리의 전통 예술의 주요 단면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는 추사라는 인물을 통해 역사와 전통 예술의 관계는 물론 예술의 본질적 특성과 가치에 대해 깊고 넓게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6년 10월 24일
                                        도 병 훈(작가)


주1) 예서 대련으로 전문은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이며,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뜻임.
주2) 행서 대련으로 전문은 万樹琪花千圃葯 一莊修竹半牀書(만수기화천포작 일장수죽반상서)이며, ‘만 그루 기이한 꽃 천이랑 작약 밭 한 둘레 시누대 반 쌓인 상(책상) 위 책’이라는 뜻임.
주3) 장황사는 ‘표구’를 하는 사람의 전통적 명칭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종이를 표현수단으로 썼기 때문에 이러한 ‘장황’의 기능과 역할은 매우 중요시되었으며, 이는 단지 장식적 꾸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사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구 방법은 대개 일본식 표구다. 예컨대 족자 옆에 비단으로 된 화려한 장식 문양이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표구 방식이다.
주4) 『周易』 계사(繫辭) 상(上)의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에서 유래한 말임.  
주5) 이 시기 정조는 49세에 순조는 42세, 그의 아들로서 대리청정을 한 왕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증됨)는 22세. 그 다음 헌종은 23세로 요절하는 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독살된 것이 분명한 정조는 물론 이후의 왕이나 왕세자도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음모에 의한 독살로 추정되는데 이 시대가 그만큼 음험한 정치적 모략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는 헌종 다음의 철종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자무식의 왕가 지손이 보위에 오른 왕인데서 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주6)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아들이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오라버니다. 추사와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교분을 유지하면서 그림과 글씨까지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한 때 정략적 차원에서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을 고금도로 유배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주7) 나는 지난 2004년 ‘세한도 다시 보기’란 졸고에서 이러한 논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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